설교문 모음/시편 설교 모음

시편 80편 설교 모음

Jessi J 2022. 12. 1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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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갈망하는 회복 /80:1-6, 80:14-19/ 유기성 목사

2016-08-27 16:01:49

 

여러분은 어떤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우리가 받을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친밀히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대통령과 언제나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시장과 언제든지 밥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실세가 아닙니까? 하나님과 이처럼 친밀하다면 아쉬울 것이 무엇이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80편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였을 때, 하나님께 올려드린 눈물의 기도입니다. 그가 얼마나 울었는지 :5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5 주님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눈물을 물리도록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구하는 것은 3, 7, 19절에서 반복하여 드린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3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 달라는 것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친밀하게 교제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가족도 집도 땅도 성도 나라도 다 잃어버리고 나니 정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아진 것입니다. 하나님!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지자를 죽이고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잃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빛난 얼굴을 나타내 달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그 속에 모든 회복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빌 때 반드시 빌어 주어야할 복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모든 복은 한마디로 주님의 얼굴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말씀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징계를 당했을 때, 반드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의 빛난 얼굴을 보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우리가 만약 무엇을 잃었다면 무엇을 회복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고 재정의 회복도 아니고 사업의 회복도 가정의 회복도 아닙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빛난 얼굴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얼굴을 마주하듯이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지금 필요한 부흥도 교인 수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빛난 얼굴을 나타내 달라고 기도하면서 계속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2 우리를 도우러 와 주십시오. :14 만군의 하나님, 우리에게 돌아오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떠난 줄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만 가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고통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마치 하나님이 어디 다른 곳에 계시면서 그들에게 가 봐야 되는지 고민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다른 곳에 계셨다가 우리가 큰 소리로 찬양하거나 오래 기도하면 가끔씩 나타나는 줄로 여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느껴질 때, “하나님이 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늘 함께 하시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인 것뿐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도망가다가 들판에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깨어나 깜짝 놀랐습니다.

 

28:16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이 놀랐던 것은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 놀라왔습니다.

 

여러분이 시장가다가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무엇이 충격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나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만나는 것이라 여겼는데, 시장 보러 가는 길에서 만난 것이 놀랍게 여겨질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있는 한 떨기나무에서 불꽃으로 임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40년 동안 양 떼를 몰고 늘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순간 모세는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태어나서 40년 동안 보고 자란 것은 엄청난 신상과 무덤들이었습니다, 스핑크스, 피라미드들을 보면서 신은 그런 곳에서 만나는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광야에서, 떨기나무를 통하여 임하셨으며 그 땅이 거룩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40년 광야 길에서 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출근하던 지하철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그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말하신다면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시편 80편을 쓴 기자가 그토록 갈망했던 기도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사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음을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주님이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살게 된 것입니다.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1:2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고후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성경이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보다 놀라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놀라운 믿음을 교리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간음과 사기죄로 옥에 갔습니다. 한 목사님이 그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예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나요?”

 

그는 목사님을 주저함 없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적이 없습니다.”상담하던 목사님이 당황했습니다. “그러면 간음과 사기행각은 어쩐 일인가요?"

 

나는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상담하던 목사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리로만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음에 계심을 아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이 아닙니다. 함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산다!’ 이것이 우리의 찬양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신 것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임하셨다." 이 믿음, 이 고백이 진정 찬양할 일입니다.

 

홍정길 목사님께서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안타까워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이고, 그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입니다.

 

목사님은 이 답을 우리가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저를 보면 어려워하는 이도 있고, 친근감을 가지는 이도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저를 즐겁게 하겠습니다.

 

하루는 어린아이가 제게 말했습니다. “머리가 왜 그렇게 늙었어?” “하나님, 저도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부목사님들이 저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제 딸이 저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제 딸은 저를 보기 위하여 화장하지 않습니다. 맨 얼굴로 아무 거리낌 없이 제 앞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만약 제 딸이 저를 만나기 위하여 화장을 한다면 저는 슬플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일기를 써 보자는 것입니다. 영성일기의 초점은 일기가 아닙니다. 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밑바탕이 되는 믿음입니다.

 

주 예수님이 나의 마음에 임하셨으니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보고 그것을 기록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답답한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어디나 계신가요?” 여러분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돌아갈 집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갈 집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밤이 늦고 배고파도 갈 집이 있다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갈 집이 없는 사람은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자동입니다, “, 주여그리고 그는 오늘 자신을 재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돈, , 가족, 재산, 직장 등 의지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갈 집이 없는 심정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 잃고, 아내도 빼앗겼고, 가족들도 잃고, 고향 친척들이 위험해지고, 성전에 숨을 수도 없어 광야 굴속으로 도망갔을 때입니다.

 

동굴에 들어간 다윗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 갑자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갑자기 깨달아졌습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지! 다윗은 위기와 배신, 고통 속에서 한동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없이 누가 나를 도와줄까? 어디가면 안전할까? 그 생각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갈 데 없는 상황에 다다르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 생각이 드니까,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윗은 동굴로 내 몰렸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둘람 동굴에서 다윗 왕국의 기초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한 남자 성도가 아내를 장례 치렀습니다. 거기다 딸까지 심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처지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그 분이 삶의 전부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유학을 마쳤으나 한국에서 목회할 교회가 생기지 않아서 고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평소에 존경하던 목사님께 상담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어느 것도 상관 없으실 것입니다. 오직 목사님 마음에 주님이 오셨음을 믿고 그 주님을 사랑하며 그 분께 순종하는지만 관심이 있으실 것입니다그렇게 기도하자 아무런 문제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여러분 갈 집이 없는 심정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 갈 곳 없어야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심정으로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고 집 사고 땅 사고 인생을 즐기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것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값비싼 대가가 따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 마음에 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절망 중에 있다 하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모든 것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찬송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대림절 /우리를 회복시켜 주소서 /80:14-19/ 김기석목사

2015-07-10 15:23:30

 

[만군의 하나님, 우리에게 돌아오십시오.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이 줄기와 주님께서 몸소 굳세게 키우신 햇가지를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의 포도나무는 불타고 꺾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분노로 그들은 멸망해 갑니다.

 

주님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주님께서 몸소 굳게 잡아 주신 인자 위에,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시오. 만군의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라멕의 노래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참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한 주가 지나갔습니다. 평화롭던 연평도 마을에 떨어진 폭탄은 우리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때같은 우리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착하고 어질던 가장들도 죽었습니다.

 

촛불 하나씩을 밝히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호명합니다.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 김치백 님, 배복철 님. 예기치 않은 시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주님께서 품에 안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중경상을 입은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이 속히 치유되기를 기원합니다. 대대로 생업을 일구어오던 땅이 공포의 땅으로 변해 졸지에 실향민이 되어버린 연평도 주민들에게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자녀들을 군대에 보낸 이 땅의 수많은 부모들에게도 주님의 평강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한 정치적인 분석을 할 능력도 여유도 없습니다. 다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반인륜적인 폭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적대행위라는 사실을 지적할 뿐입니다. 성경은 에덴 이후 인간의 역사가 형제간의 갈등과 반목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다퉜습니다. 요셉과 형제들은 서로 반목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듬살이가 빚어내는 갈등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5대손인 라멕의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4:23-24)

 

이 노래는 지금도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것은 갈등을 폭력으로 푸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등의 상황 속에서도 공존을 모색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셨다고 말합니다. 그분 안에서 새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분단의 땅, 인류의 모순이 집적된 땅 한반도의 운명을 슬퍼하다가 만난 것이 오늘의 시입니다.

 

절망의 나락에서

 

이 시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인과 그가 속한 공동체는 지금 상당히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2절에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시인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는 앗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던 주전 8세기 전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시를 바벨론에 의해 남왕국이 멸망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시기야 어떻든 지금 시인과 그의 동족들이 처한 상황은 절박합니다.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은 무너졌고, 인심도 흉흉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절박함은 이 시에 사용된 동사들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의 능력을 떨쳐주십시오.”

우리를 도우러 와 주십시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에게 돌아오십시오.”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시오.”

 

연평도 주민들의 마음이 이러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 불에 타고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울 엄두는 나질 않고, 앞으로 살아갈 방도는 더욱 막연합니다. 두고 온 집짐승들이 눈에 밟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나야 합니까?

 

형편이 이런 데도 하늘은 여전히 청명하고, 새들도 무심하게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잠시 놀랐던 사람들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재빨리 이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도 그들을 외면하시는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노엽게 여기시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 백성이 눈물의 빵을 먹고 눈물을 물리도록 마시기까지 버려두시고, 이웃의 시빗거리가 되게 하신단 말씀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 깊은 회의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절망을 통하지 않고는 오는 법이 없습니다. 시원한 샘물은 땅을 파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선 순간입니다. 나치가 지배하고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 고아들을 돌봤던 야누스 코르착(Janusz Korczak)은 마침내 아이들을 떠나보낼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하나님을 줄 수 없다. 너희는 영혼의 고요함 속에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인간의 사랑을 줄 수 없다. 용서 없이는 사랑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 진리와 정의의 삶에 대한 갈망이 그것이다. 그것은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너희가 끈질기게 갈망한다면 결국 보게 될 것이다.”

(Jonathan Sacks, [To Heal A Fractured World], p.69)

 

그는 결국 200여 명의 고아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이들은 어쩌면 야누스 코르착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세 얼굴

 

이 시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첫째 얼굴은 목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1)라고 부릅니다. 여전히 앞길은 캄캄하고 희망의 불빛은 가물거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리라는 확신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의식 속에는 출애굽사건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도 잘 알고 있었고, 넘실대는 홍해가 어떻게 갈라져 길을 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도, 반석에서 솟은 물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확신이 있기에 시인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릅니다.

 

이 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두 번째 얼굴은 전사(warrior)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네 번이나 만군의 하나님’(Yahweh Sabaoth 4,7,14,19)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찾아가는 그들의 고달픈 여정에 동행하시면서 그 백성의 편에 서서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지난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잠시 그들을 외면하고 계시지만,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어머니처럼 전사이신 하나님은 결국은 그 백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올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과 싸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싸우라고 하면 사람들은 늘 먼저 바깥의 적부터 살핍니다. 하지만 진짜 전사는 자기 속에 있는 적과 먼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우리들 속에 있는 두려움, 편협함, 증오, 차별의식 등과 먼저 치열하게 싸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 번째 얼굴은 농부이십니다. 시인은 농부이신 하나님이 애굽 땅에 있던 포도나무를 뽑아다가 약속의 땅에 심으셨다고 말합니다. 정성을 다해 심고 가꾸신 덕분에 누가 보아도 멋진 포도원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들이 포도나무 그늘에 덮이고, 울창한 백향목도 포도나무 가지로 덮일 정도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의 전성기였습니다. 국경도 확장되고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누렸습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과 아름다움에 도취되면서 그 포도원은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고 말았던 것입니다. 망자존대妄自尊大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손을 거두자 포도원의 울타리는 무너졌고, 포도나무 가지는 잘려나갔고, 포도원에는 불이 났습니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마다 들어와 열매를 따먹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자기들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는 때입니다. 내 힘으로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파멸의 씨가 파종됩니다.

 

회복의 꿈

 

이런 현실을 목도한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동족을 새로운 공동체로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집단 혹은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입니다. am은 일종의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반 만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 공동체도 어떻게 보면 am이라 할 수 있습니다. 케힐라kehilla는 다양한 집단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집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모인 임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공동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협력합니다. 뜻만 맞으면 아주 신명나게 일을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중이떠중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기다리다 못해 금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이 그 예입니다. 에다edah는 공동의 목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에다라는 말은 증언을 뜻하는 에드ed’에서 유래된 말인 데, 공통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즉 언약백성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란 am 혹은 kehilla에서 edah로 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신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며 사는 새로운 세상의 모델이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자기 이해에 따라 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오늘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은 망자존대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시인의 간절한 소원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죽으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으니 살고 싶다는 바람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집은 살림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 들어가 보면 즉시 그 집안의 살림살이가 규모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집안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식구들이 두루두루 평안하고 표정이 밝으면 그 집 살림이 튼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풍족한 집이긴 한데 뭔가 어수선하고 집에서 이상한 냉기가 흐른다면 그 집 주인의 살림살이는 그다지 맵짜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집을 잘 가꾸고, 주님의 식구들을 돌보고 보살펴야 합니다. 경쟁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모두가 이기적이고 야수적으로 변해갈 때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임을 일깨우는 사람들, 의 희미한 가능성을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 성도들은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교회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건강해질 겁니다.

 

곳곳에서 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한반도에도 긴장의 먹구름이 자욱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목자이신 주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전사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농부이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 가슴에 선의 씨앗을 심어주십니다. 평화의 세계에 한 달음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울면서라도 평화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밝아질 것입니다.

 

어둠이 지극해도 우리는 대림절 초에 촛불을 하나씩 밝히며 우리 가운데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이 희망으로 이 냉랭한 세상에 온기를 가져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재난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 /80:1-19

2011-06-01 16:20:10

 

311일 일본에 일어난 9.0의 대지진으로 세계가 일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규모 방사선 유출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재난이라고 합니다. 이런 재난을 보면서 지구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야 달력에 근거하여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는 20121221일 지구가 종말한다고 주장합니다. 과학자들은 "2013년 가공할 태양 폭발"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피해 복구에도 약 1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활동 극대기는 20135월쯤 정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태양 폭풍이 극도로 강해지면 지구에 엄청난 전자기 펄스가 쏟아져 전력망을 붕괴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2029년에는 '아포피스' 소행성이 지구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만약 직경 300m의 아포피스가 지구와 충돌하면 대재앙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를 어떻게 모면한다 치더라도 언젠가 치료제가 없는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핵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에 착안하여 미국에 종말에서 당신을 지켜줄 럭셔리 지하벙커가 생겼다고 합니다. 지구 종말에 대비한 집이라고 합니다. '테라 비보스 (Terra Vivos)'라는 벙커라고 합니다. 지진 10도 파괴되지 않고 50메가톤급 핵폭탄이 폭발해도 견딜 수 있고 시속 725의 강풍이 불어도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지면 온도가 10일 동안 676로 유지돼도 안전하며 홍수가 일어나도 3주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최대 135명의 사람들이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식량과 의류가 비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태양이 언젠가는 식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도 크고 작은 재난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재난의 유형은 첫째는 자연 재난이 있습니다. 태풍, 호우, 토네이도, 지진, 해일, 설해, 화산 폭발 등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입니다. 그 원인이 자연 법칙에 의해 일어납니다. 중력의 법칙과 공간과 물체의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관한 법칙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 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인위 재난이 있습니다. 문명발달과 공업화에 따른 인공물에 의한 돌발적 사태를 맞는 재난입니다. 핵 방사능 사고, 위험물, 가스폭발 사고, 건물 붕괴, 화재 등과 같은 재난입니다. 이런 재난은 무지나 부주의에 의해 발생할 때가 많습니다.

 

셋째는 사회 재난입니다. 현대 사회 구조 여건 등에 의해 사회 구성원간의 갈등으로 인간의 의도에 의해 일어나는 재난입니다. 미국 LA 폭동, 오클라호마 연방 청사 폭발사건, 일본 동경 사린가스 살포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등입니다.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기인된 재난입니다. 정치, 종교, 국가와 국제적 관계의 갈등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재난입니다.

 

이런 다양한 재난을 만나면 신앙인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시편 80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재난 앞에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 나라가 망하는 재난입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와 BC 722년에 망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죽은 가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 하나 낳아 놓고 전쟁터에 나갔다 죽은 남편을 둔 새댁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갔다 한쪽 팔을 잃은 가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평생동안 살았던 집이 불타버린 집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토를 빼앗기고 전쟁 포로로 잡혀갔을 것입니다. 누이기 겁탈당하고 아내가 겁탈당한 가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어떻게 묘사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의 나날들을 보내었다는 말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었습니다. 앗수르 뿐만 아니라 수리아, 모압, 암몬, 에돔 등이 서로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비웃음을 당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었다고 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불타고 베임당하고 멸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재난으로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 버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리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평화가 살아졌습니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가족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런 재난 앞에 시편 기자는 어떻게 합니까?

 

재난 앞에서 기도합니다. 어떤 기도를 합니까? 3, 7, 19절 후렴구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우리는 재난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주의 능력으로 구원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1-3).

 

우리는 재난을 당할 때 대부분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합니까?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 무엇 때문에, 어디에"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시편기자고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이십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려 구덩이에 들어가는 죽음의 재난을 당했을 때도 구원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이국땅에 노예로 팔려가는 재난을 당했어도 보호해 주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재난을 당했을 때도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국무총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우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빛을 비추어 생명을 살리시고, 어둠을 거두어 내고, 갈 길을 보여주고 따뜻함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나라가 망하는 재난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재난을 당할 때 그 때 이유를 물으며 원망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80: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대표적인 북쪽 이스라엘의 지파들입니다. 지금 전쟁의 패배로 재난을 당한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어 구원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태풍과 쓰나미, 지진과 같은 자연 재난 즉 천재 앞에서, 방사능 사고와 같은 인재 앞에서, 전쟁과 같은 사회재난 앞에서 재난에서 생명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힘으로 말입니까? 주의 능력으로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다시 일으켜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밝은 얼굴 빛을 보면 우리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재난에는 인과응보적인 재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상섭리에 의해 일어나는 재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통상섭리와 비상섭리가 있습니다. 우주의 법칙을 만드시고 운행하게 하는 것을 통상섭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왜 지진이 나는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5대양 6대주가 17개이 움직이는 판 위에 더 있어 이판의 움직임에 따라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 폭발이 일어나며 산과 산맥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지구 체온 유지되고 석유가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때문에 지구 대기운동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판구조운동이 지구의 체온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화산활동이 만든 다량의 이산화탄소. 화산활동은 지구 깊숙이 있던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뿜어 올려 지구의 복사열이 우주로 나가는 것을 막아 지구를 따뜻하게 하는 온실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데워진 바다에서는 기화가 활발히 일어나고 이는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내린다고 합니다. 사람이 신진대사를 통해 36도 안팎의 체온을 유지하듯 판구조운동도 지구의 신진대사를 돕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혈액'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도 판구조운동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다에 살고 있는 플랑크톤과 유기물이 죽어 땅속 깊이 들어가 석유로 숙성된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판구조운동이 인류 문명을 쥐락펴락한다는 것입니다. 태풍 때문에 많은 재난을 당하지만 태풍이 없으면 바닷물이 죽는다고 합니다. 태풍으로 바닷물에 산소가 원활이 공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난이 일어나는 원인을 잘 모르지만 재난 앞에 인간의 연약성을 깨닫고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와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연단으로서의 재난이 다가오면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훈련을 받아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하게 인과 응보적 재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욥은 심각한 재난을 당하였습니다.

 

성경은 욥에 대하여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은 그 엄청난 재난 가운데서도 신앙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정죄하는 친구들의 허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 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내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난이란 용광로를 통과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판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힘은 동물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지진과 같은 자연 재난을 하나님의 경고이자 은혜의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난을 통해 여러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시대적인 경고를 합니다. 재난을 통하여 인간의 연약함과 교만을 깨우쳐 줍니다.

 

C. S 루이스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답니다. "선생님,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고통과 재난이 많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인간에게 고통을 많이 준단 말입니까?" 그러자 루이스 교수는 "형제여, 그러잖아도 교만한 세상과 인간들에게 고통과 재난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재난 속에서 인류에게 보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도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연에 대하여 지배자, 파괴자가 아니라 청지기로 서야 합니다. 사회와 국가의 불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종말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노아 홍수, 소돔성의 재난 등 수많은 재난을 통해 경고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7-10)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는 재난 앞에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며 우리의 눈물을 씻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4-7).

 

비극적 재난을 당하면 신앙인들은 대부분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합니까?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 무엇 때문에, 어디에"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 죄로 인해라는 깨달음이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내 사업이, 내 나라가, 내 교회가 죄로 인해 이런 재앙이 왔다고 깨달음이 올 때가 있습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때로는 재난이 인간의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간의 실수로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제동 활동 양식으로 주어질 경우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해산과 노동의 고통이 인류에게 끼어들어 왔습니다. 다윗은 유부녀와 간음하여 아들을 잃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지진으로 인한 멸망은 범죄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지만 이런 신학적인 죄 말고도 법적인 죄, 사회적인 죄, 심리적인 죄 등 다양한 죄가 재난을 불러 옵니다.

 

성경은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3:12)"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난이 다가올 때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회개하고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고 하나님께 눈물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그 때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세 가지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왕상1325-33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첫째가 두 마리의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그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워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보통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유다에 제사장이 있고 이스라엘에는 없으니까 임의대로 세운 것입니다.

 

셋째는 절기의 날짜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말하면 하나님보다 이익이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보다 편리가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이 우선순위입니다.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전 사고도 설계한 사람이 잘못 설계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이유가 도쿄전력이 손해배상을 염두에 두고 미국의 지원을 거절해서 더 커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쿄전력이 고가의 자산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해수 투입을 늦게 하는 바람에 문제를 더 키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 무엇입니까? 큰 이익보다는 작은 이익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의 늪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부터 19대 왕 호세아 왕까지 210년 동안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혁명을 일으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백성들은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농사를 잘 지으려면 비가 필요한데 바알과 아세라 신이 비를 내려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이 성적 관계를 가지면 살아나 비를 내려준다고 믿어 산당에 미동들을 두고 성적 관계를 유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망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비참함을 토로합니다. 눈물의 양식을 먹고 많은 눈물을 마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고 아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일 것입니다. 이웃들의 다툼 거리가 되고 비방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재난이 다가 오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길이 진정 사는 길인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 눈물을 다 거두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희망이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어느 목사님이 일본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지진이 일어났고 말했다고 여론의 몰매를 맞았습니다. 도쿄도 지사가 "이번 쓰나미를 이용해 탐욕을 한번 씻어낼 필요가 있다. 천벌이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습니다. 이재민을 행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런 재난이 다가 올 때 우리 신앙인들은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더 높은 이자 수익과 환차 수익을 얻기 위대 돌아다니는 탐욕스런 돈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경제쓰나미를 당하고 있습니까? 이제 이데올로기에 의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지금은 경제 패러다임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경제를 기본 골격으로 짜여지고 있습니다.

 

21세기는 극단적 물질주의 시대가 되리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자유로운 무역''무차별적 시장개방' 으로 세계 질서는 경제 논리에 의하여 결정되고 지배되고 있습니다. 무서운 경제 전쟁에서 자본이 결국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백성의 몰락 속에서 하나님은 의인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을미사변이 있을 당시 전국 교회는 채 30여개에 지나지 않았고 교인 수는 1천명 미만이었으나 교회는 민족의 위기 앞에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독립과 민족 정신을 이끌어 갔고 3.1 운동을 통하여 국권 회복에 앞장을 섰습니다. 당시 조선 총독부가 남긴 비밀 문건 속에는 "이 민족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의 교회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기독교는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재난, 쓰나미는 경제적인 것보다도 도덕적인 쓰나미이며 신앙적인 재난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이 재물 우상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교회가 더 이상 재물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슬프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제일 주의의 신앙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구조 조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도의 변혁이 문제가 아닙니다. 의식의 대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최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삶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정신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경제정의가 없는 경제 정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경제력의 집중으로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었고, 실업자는 대량으로 발생하였습니다. 물가는 불안하여 양곡 도매가격이 영국에서는 500%, 프랑스에서는 700%, 스페인에서는 그 이상 상승하였습니다. 식량 폭동이 일어나고 고리대금업자, 상인의 창고와 집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돈만 있으면 선교 및 구제는 물론 지옥에 있는 영혼까지도 천국으로 올릴 수 있다는 배금 사상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교회는 유럽 토지의 1/3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금전놀이, 성직매매, 각종 세금으로 서민을 착취하였고 사제들은 큰 규모의 교회를 맡으려고 이전투구를 하였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을 통하여 시대는 새로워졌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종교 개혁을 통하여 시대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처럼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이 우리의 살길이고, 가정이 살길이고, 교회의 살길이고, 민족이 살길입니다.

 

 

3. 우리는 재난 앞에서 어떤 경우도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소성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8-19).

 

재난은 단순히 잘못 때문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상섭리 가운데 옵니다. 그럴 때 그냥 아무 이유없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 미래의 원인 때문에 오는 재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오는 재난입니다. 이런 재난을 우리는 속량적 재난이라고 말합니다. 죄로 인한 재난도, 섭리에 의한 재난도 아닌 속량적 재난입니다. 재난을 통해 특별한 목적 즉 하나님의 구원사적 은총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재난에 대하여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29:1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국 하나님께서 메시야적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합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그러므로 해서 제사 제도가 무너집니다. 유럽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통해 회당이 생깁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이 높아집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속하시고 진정 하나님의 언약을 이 땅에서 성취하십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이 땅에 모래알처럼 많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노리니 우리를 소성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 의지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재난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사자굴이 있고 풀무불이 다가 온다고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처럼 끝까지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풀무불 앞에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3:17-18)”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4:16)”라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쉽게 죽지 않습니다. 재난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왜 그런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까? 과거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 7족들을 쫓아 내시고 가나안 땅에 심었다는 것입니다. 시작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시작이 가정의 시작이 교회의 시작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앞서 가꾸셨다는 것입니다. 앞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결과 뿌리가 깊이 박혔습니다. 땅에 가득찼습니다. 산에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백향목처럼 자라났습니다. 바다와 강까지 뻗혔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기업이 잘 성장하였습니다. 가정이 행복했습니다. 교회가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니까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어느날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담이 헐렸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죄악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튼튼한 보호의 울타리로 잘 지켜 주었기에 행복하였는데,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행복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죄악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먹구름으로 막고 시들어 죽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나 나라를 막론하고 죄악의 독소가 판치는 그 곳에는 참 성장과 번성이란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기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이제까지 수고한 열매를 다른 사람들이 다 수확을 해 가버렸습니다. 멧돼지들이 상해하고 들짐승들이 따 먹어 버렸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불타고 베임당하고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외면하지 마시고 포도나무를 돌보아 주십시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니 주님을 위하여 힘있게 해다라고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오른 손을 얹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주님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니 소생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 / 80:8-19

2008-06-26 08:49:40

 

아삽이라는 사람은 성전에서 노래하는 제사장으로 선택된 사람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끊임없이 역사하심을 믿고 감사하여 그 감사의 표현을 본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감사의 마음과 노래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저 자신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새삼 다시 깨닫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번기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자칫 감사를 잃어버리기 쉬운 이때에 우리 교우들도 이런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에 오늘 아침에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진리로 가득 차게 하시고 뜨겁게 하시는 성령이 말씀 듣는 북실교회 성도들에게 강하게 역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사랑의 손길로 감싸시고 위로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일까요?

 

1. 지난날에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드립시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을 한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그들에게 역사하신 과거의 하나님의 손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 선택하셨습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가져다가 (80:8)

2) 도와주셨습니다.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80:8)

3) 모든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음으로 (80: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에서 선택해 주시고 가나안에 정착하도록 심어주시고 그리고 그들이 평안하게 살수 있도록 항상 앞장서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지난날에 도와주시고 섭리하신 하나님께 뜨겁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지난날의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셔야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민족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똑같이 역사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

나와 우리 가정의 과거를 돌아보십시다. 우리 교회의 과거를 돌아보십시다. 거기에는 우리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내제되어 있고 오묘한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과거에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깨달으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강서구에 있는 서울의 안디옥 교회가 내려와 교회를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신도시이니까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어서 그곳에 교회를 짓는다고 하니까 주민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교회가 무허가로 짓는 것도 아니고 불법을 행하는 것도 아니지만 주민들이 이유 없이 반대를 하며 아파트에 안디옥교회 건축 결사반대라는 프랭카드까지 걸고 반대를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회건축을 완공하고 입당, 봉헌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한 달쯤 지나자 아직 지역에 교회를 알리지도 못했고 전도도 하지 않았는데 새신자들이 교회에 등록을 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이 새신자들을 면담하면서 어떻게 우리교회를 알고 등록을 했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새신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하기를 아파트에 안디옥교회 건축 결사반대라는 프랭카드를 보고 이곳에 성결교회가 지어지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교우들은 너무도 놀라워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 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알려주셨고 반대하는 프랭카드에 역사하셔서 오히려 전도의 열매를 맺는 놀라운 복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결교단에 총회장으로 섬기는 신화석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저도 결혼하고 나서 시무 전도사로 섬긴적이 있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우신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은 교회의 역사 속에도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때 당사자 스데반이나 교회는 얼마나 어렵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함께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스데반을 처형하고자 벗은 겉옷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스데반이 죽어 가는 모습을 너무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어 가는 스데반의 얼굴이 그렇게 평화스러워 보이고 해같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듣고 나서야 죽어가면서도 평안하고 빛난 스데반의 모습의 원인을 깨닫게 되고 결국 바울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복음사역에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잃어버리자 그 자리에 사울을 바울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와 사랑을 우리는 깨닫고 감사해야하겠습니다.

 

행신동의 안디옥 교회나 사울의 과거에만 섭리하시고 역사하셔서 화를 복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 이 자리의 여러분과 저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시고 축복하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깨닫고 과거에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현재에도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아삽은 본문에서 과거에 역사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어서 지금도 주의 손으로 심으시고 힘있게 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권고하시고 계시다고 감사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 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80:14)

 

그렇습니다!

과거에만 우리에게 화를 복으로 바꾸는 역사를 이루시고 끝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굽어보시고 권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을 권고하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나를 굽어보시고 권고하시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시고 보전케 하셔서 권고하시고 계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요 사랑입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만 계시고 지금은 잠자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며 과학의 시대이니까 잠자코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무한대에 이르고 과학이 발달하여 우주선이 달나라를 가고 밖에서 집안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 전능의 시대에도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굽어보시고 권고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시골의 조그만 교회에 새 전도사님이 담임자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 기적을 첫주 설교로 잡았습니다. 첫 목회지에서 하는 첫 설교이니 얼마나 긴장되고 조심스럽겠습니까? 교인들도 새 전도사님의 첫 설교이니 긴장을 하고 졸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초년병 전도사님이 너무 긴장해서 예수님이 보리떡 오천 개로 다섯명을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제일 앞에 앉았던 남자 권사님이 그만 실망해서 그건 나도 할 수 있겠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교인들이 와 하고 웃고 전도사님의 첫 설교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지난주일에 한 실수가 너무도 부끄럽고 속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대답해서 망신을 준 권사님도 야속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병이어 설교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강단에 올라가서 정확하게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나도 할 수 있겠다 하고 대답해서 망신을 주었던 권사님께 물었습니다. “권사님 지난주에 나도 그런 것은 할 수 있겠다 하셨지요? 이번 주에도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 대답이 걸작입니다.

전도사님! 아 지난주에 먹고 남은 것 있잖아요?” 교인들이 그 대답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웃는 교인들 속에서 전도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하느라고 애만 썼지 예수님은 어느 경우에도 우리들에게 쓰고 남을 정도로 풍족하게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그 전도사님은 잘하는 설교가 아니라 내가 믿는 설교를 하도록 힘쓰는 좋은 목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북실교회 성도 여러분 !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굽어보시고 계십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바라보시고 섭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권고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네 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합력하여 선을 만드시는 전능자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지금도 굽어보시고 권고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언제나 뜨겁게 감사하는 북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 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80:17-18)

 

우편에 있는 자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얹어 그를 힘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소생케 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앞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는 고침을 받으며 문제를 해결 받으며 악한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복을 주시고 믿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합시다.

 

때문에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셨고 손을 얹으시고 병을 고쳐 주셨으며 악한 마귀를 쫓아 주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죽은 관을 손을 얹으셔서 살아나게 하셨고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아이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장님의 눈에 손을 얹으시고 눈을 뜨게 하셨으며 귀신들린 거라사의 광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사탄을 좇아주셨습니다.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사하시므로 광야에서 굶주린 오천명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20여년 전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저는 배가 아파서 몹시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다가 교인에게 자기를 미워한다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아파서 하나님의 영광 가리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 양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고 저 자신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몇 달을 기도하며 지나다가 가끔씩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픈 일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 저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한참 있다가 집사님이 내과 원장님이신 병원에 가서. 위 내시경을 하였는데 마친 후에 의사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전에 위궤양을 심하게 앓으셨군요 그런데 지금은 깨끗하게 완치가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저는 그때에 우리 주님의 놀라운 손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렇게 아프고 괴로운 배 아픔이 위궤양이었는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우리 주님이 손을 얹으시고 고쳐주신 놀라운 축복의 손길을 기억하고 그저 감사 밖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에도 축복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리를 굽어보시고 권고하시는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에게 손을 얹으사 힘있게 하셔서 우리를 축복하신 우리 주님께 진실된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읍니까?

 

프레드릭 레만 목사는 시골의 아주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너무 어렵고 교인들이 없어서 생활비를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계를 위하여 치즈공장의 직공으로 나가서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요원하고 목사이면서 목회보다는 먹고사는 일에 더 힘을 써야하는 그의 처지인지라 언제나 그의 마음은 너무도 답답하고 안타깝고 그러다 보니 거의 낙심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끊임없는 회의가 그의 마음을 엄습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고달픈 오전 일을 마치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열었습니다. 거기에 자기 아내가 작은 쪽지 편지를 넣어 준 것을 발견하고 그 쪽지를 펼쳤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써 있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어요 여보! 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힘내세요!”

 

사모님이 우연히 어느 기관 담밑에서 주은 글을 읽고 감동하여 힘든 남편의 마음을 위로 하고자 도시락에 써 넣은 것이었습니다. 레만 목사는 그 글을 읽으면서 목사인 자신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낙심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시며 사랑해주신 하나님, 나를 예수 믿게 해 주셔서 구원해 주시고 더 놀라웁게도 목사의 사명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니 오늘의 고통과 어려움이 어려움이 아닌 축복으로 피부 깊숙이 닿아 오는 것을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너무도 감사할 것 밖에는 없고 자신이 낙심하고 회의하고 좌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뜨거운 감동을 받고 그 즉시로 아내의 편지의 구절을 인용하여 아름다운 신앙의 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름다운 곡을 붙여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귀한 감사의 찬송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바로 404장 찬송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리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도 넉넉하셨는데 우리는 너무도 감사를 축복을 모르고 넉넉하신 하나님께 인색함으로 답하며 살고 불평하고 불만하고 낙심하고 살았습니다. 언제나 내게 손을 얹어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에 진심으로 감사합시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해 주시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죄 사해 주시고 그 이름으로 믿고 구하면 넘치는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심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승리하는 지혜로운 북실교회 교우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 /80:14-15/ 신현식목사

2021-08-27 05:03:06

 

오늘 본문 말씀은 암울한 분위기로 출발해요. “하나님, 얼마나 오랫동안 백성들이 올리는 기도를 노엽게 여기시렵니까? 주님께서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눈물을 물리도록 마시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이웃에게 시비거리가 되게 하시니, 원수들이 우리를 비웃습니다.”(4,5,6, 새번역) 탄식해요.

 

마치 지금 우리의 상황 같아요. ‘이럴 때 시인이 어떻게 하나?’ 유심히 보는데, 기도하는 시인을 발견해요.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그 기도에 화를 내시듯 답이 없으셨던 하나님이신데... 또 기도해요.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14)

 

여기서 말하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해요(8, 9) 그런데, 그 포도원이 망가지게 되었어요.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 울타리를 부수시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 열매를 따먹게 하십니까?”(12, 새번역) 탄식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 열강들에게 수탈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기도 해서 포도원이 엉망이 되고 황무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화나신 듯 들은 척도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런데도 시인은 또다시 기도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처럼 덩달아 절망하지 않았고, 덩달아 주저앉지 않았어요.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비방하면서 절망을 보태지 않았어요.

 

시인의 또 다시의 기도오직 하나님의 신앙에서 비롯된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 그래도 기도 밖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신앙에서 가능해지는 기도였어요.

 

이 신앙은, 시인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한 것에도 배어 있어요. 포도나무는 모양도 없고 볼품도 없죠. 목재용으로도 관상용으로도 못 써요. 가지도 가늘고 힘이 약해요. 그래서 버팀목을 세워주거나 끈으로 묶어줘야만 해요.

그렇게 해서 맺은 열매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지요. 농부의 세심한 돌봄으로 쓸모없는 나무가 쓸모 있는 나무가 돼요.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다는 거예요. 볼품도 없고 힘도 없는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쓸모 있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자들이 바로 나이고 우리 백성이다.’의 고백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런 신앙고백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는 포도나무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굽어보시지 않으시면 아무 쓸모없는 인생입니다. 제가 사람 노릇 하려면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제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 끈이 되어 주셔야 열매 맺는 삶이 됩니다.” 이 고백이시죠? 그래서 하나님이 외면하셔도 다시 기도하고, 하나님이 화내시는 것 같아도 또 기도해요

 

사사기 통독을 지난주에 끝내셨죠. 20장에서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내전이 있었어요. 연합군이 유리했어요. 베냐민 지파가 몹쓸 짓을 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고, 군사수도 베냐민 지피는 267백 명이었지만, 연합군은 40만 명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연합군은 모든 면에서 유리한 데도, 기도도 했어요.

 

그런데 1차전에서 연합군 군사 22천이 죽고 패해요.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어요. 그러자 연합군은 다시 기도하는데 울면서 더 간절히 기도해요. 그런데 2차전에서, 18천이 죽고 또 패해요.

 

그러자 어떻게 하던가요? 또 기도해요. 더 간절히 기도해요. 울면서 금식기도했어요. 거기에다가 헌신을 결단하는 번제를 드리면서 기도해요. 실패할수록 기도가 더 성숙해지고 더 간절해졌어요.

 

그리고 다시 싸웠는데, 최후 승리를 해요. 제가 감동이 되는 것은 분명히 군사 수가 많은데도 기도했고, 기도해도 실패하지만 그래도 계속 기도했다는 거예요. 이들의 신앙은 군사가 많아도 우리의 힘은 하나님이십니다. 군사가 많아도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패배가 이해되지 않지만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화나신 것 같지만 더 기도합니다.”의 신앙이었어요.

 

저는 본문에서 시인이 다시 하는 기도 모습에도 감명을 받았지만, 기도 내용에서도 큰 감명과 힘을 얻어요. 15절에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기록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울컥해져요.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나무라는 거예요. 여러분, 나무 심어 보셨죠? 밭이나 마당에 나무를 심을 때, 생각 없이 아무 나무나 심지 않아요. 내가 좋아하고 꼭 필요한 나무, 계속 보고 싶은 나무를 심사숙고해서 심어요.

그리고 아무렇게나 두지도 않아요. 물도 주고 받침대도 해 주고 나무 둘레의 잡초도 뽑아 줘요. 때에 맞게 약도 치고, 거름도 주고, 겨울에는 해충구제를 위해서 짚으러 꽁꽁 싸매줘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지 않으시겠어요? 아무 나무를 아무렇게나 심지 않으세요. 당신이 원하시는 나무, 좋아하시는 나무를 심으세요. 심겨진 채로 방치하시지 않으세요.

본문에서 시인은 내가 바로 그 나무입니다.’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요.

 

중국 선교사로 갔다가 국내에 들어와서 시골교회에서 목양하는 친구가 있어요. 농사일을 하는데, 신기하고 재밌대요.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보면 그렇게 흐뭇하대요. 반대로 잘 자라지 못하거나 병이 들면 그렇게 마음이 아프대요. 그래서, 매일 밭에 나간대요. 궁금해서 나가고 걱정돼서 나간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농사지으실 때 더 하시지 않으시겠어요?

살다보면 거센 폭풍도 만나죠. 그래서 가지가 꺾이고 뿌리가 드러나기도 하죠. 그러나 하나님이 손수 심으신 나무인 것을 잊지 맙시다. 쓰러지지 않게 하세요.

가뭄도 오죠. 앙상해지고 말라비틀어지기도 하죠. 그러나 죽지 않게 하실 것을 믿고 힘을 냅시다. 하나님이 손수 심으신 나무니까요!

많은 눈에 덮여 숨 막히기도 하죠. 무게에 짓눌려 가지가 찢겨지기도 하고, 부러져서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겠죠. 하지만 다시 새순이 나고, 남아있는 다른 가지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실 거예요. 하나님이 손수 심으신 나무니까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해요.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61:3, 새번역)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우리를 슬픔 대신에 기쁨으로,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하셔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은 하나님이 손수 심으신 나무다!”로 부르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과거에는 버림받은 자, 천덕꾸러기였는데, 너덜너덜하게 살았는데, 이젠 바꿔 주시겠다는 거예요.

 

시편기자의 기도,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15)에서 한 가지 더 힘이 되는 것이 있어요.

볼품없고 연약한 포도나무 같은 우리가, 주를 위한 나무이고 그래서 힘있게 하실 나무.”라는 거예요.

지금 시편 기자가 처한 현실은 처참했어요.(4, 5) 그런데도,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나무라고 믿으며 기도해요. 나 비록 이렇게 살아도 내가 살아있음은, 아직도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나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아직 살려 두신 것이니, 하나님이 분명 나를 힘 있게 하실 것이라 믿었어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나무에 이상이 있어도 잘라내지 않는 것은, 아직 그 나무가 필요해서에요. 그 나무를 더 살펴서 키우기 위해서예요.

 

살다보면 때때로는 세상에 떠밀려 사는 막연한 인생 같아서, 살아갈 의미가 희미해지질 때도 있어요. 초라해진 내 모습 때문에, 어디에도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 맥없이 살 때도 있어요. 어떨 땐, 사는 재미도 없고, 살아갈 의미도 찾지 못해서 허무해지기도 해요.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셔서 이 세상에 심으셨고, 아직 나를 세상에 두심은, 하나님은 나를 아직 당신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증거예요. 나를 돌보셔서 쓸모 있게 하시겠다는 증거예요. 이 믿음으로, 마음 약하게 잡수지 마세요. 손 놓고 맥없이 살지 마세요.

 

그리고 때론 나를 왜 이런 곳에 두셨을까? 왜 이런 자리에 심으신 것일까?’ 의문스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주님이 심으신 것이라는 믿으면, 다 뜻이 있다는 것도 믿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나무를 심을 때, 아무 곳이나 막 심지 않아요. 나를 위해서 심고 내가 원해서 심는 나무이기에, 적당한 자리, 필요한 자리, 잘 자랄 자리에 심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주를 위해 적당한 자리에 나를 심으셨어요.

 

제가 방위 소집해제를 하고, 휴학하면서 1년 정도 집 없는 홈리스 생활을 했었는데, 반년은 학교 도서관에서, 반년은 기숙사 지하 보일러실에서 박스 깔고 살았었죠. 간혹 서럽기도 했어요. 그때 B형 간염 진단을 받았었는데 하나님, 몸이라도 건강하게 하시던지, 아니면 돈이라도 주시던지했었죠. ‘괜히 신학을 했나? 내가 잘 못 온 걸까? 앞으로 내가 뭘 하겠나?’ 불안도 했어요.

 

당시 제게 위로가 되었던 말씀이 있어요. 잘 아시는 유명한 출 15장 말씀이에요. “주께서 주의 백성을 인도하여 그들을 주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여호와여, 이곳은 주의 처소를 위해 택하신 곳이며 주의 손으로 지으신 성소입니다.”(15:17) 이스라에 백성들이 지금 있는 광야도 주의 처소이고 주의 성소입니다. 앞으로 인도해서 주의 가나안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노래했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 비록 지하 보일러실이어도 여기도 장신대 선지동산이다. 여기도 주의 처소이고 주의 성소다. 여기도 분명 주께서 인도해서 심으신 주의 산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주께서 인도해서 나를 가나안에 심으실 것이다. 힘 있게 하실 거야! 기다리자! 쓸모 있게 하실거야! 열심히 살자!’

 

지금도 이 마음으로 살아요. 이 마음으로 내일을 또 기대하고 살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마찬가지지 않으세요? 주께서 필요해서 거기에 심으신 거예요. 주께서 다 알아서 거기에 심으신 거예요. 그러니 주를 위해 여러분을 힘 있게 하실 거예요. 가나안에 사는 나무가 되게 하실 거예요

 

바울이 감옥 속에서 고백해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11, 12)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이었죠. 우리도 믿읍시다! 그래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감옥들 속에서도, 마침내 승리하는 우리가 되길 축원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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