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누가복음 설교 모음

누가복음 5:1 - 11절 설교 모음

Jessi J 2022. 12. 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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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이 말씀과 부딪힐 때 /5:1-11/ 류영모목사

2019-12-05 10:24:07

 

I. 행복하십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행복이란 열매가 세상 어디엔가 있어서 그걸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활환경이 조금 더 좋아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져 찾아오는 행복은 스쳐가는 일순간에 불 과합니다.

 

예수님께 행복을 달라고 구해보셨습니까? “예수님 제가 행복하기를 원해요. 행복 좀 주세요.” 기도하면 주님의 대답은 언제나 얘야, 내가 행복이야기쁨을 구해도, 은혜를 구해도 주님의 대답은 마찬가지입니다. “얘야, 내가 기쁨이야” “내가 은혜란다

 

얼마 전 UN이 전 세계인의 행복지수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은 OECD 36개국 중 30위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인의 행복평등도는 세 계 156개국 중 96위로 세계에서 행복 불평등지수 최하위나라로 평가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경제수준이 10위 전후쯤 되고 그만하면 잘 먹고 잘살건만 왜 이런 통계가 나올까요? 학자들의 분석인즉 한국인들은 행복을 경제소득 수준에서 찾고 있기 때문 이라는 겁니다. 나의 어제와 비교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 이라는 겁니다.

 

또 다른 통계 하나가 있습니다. 사회갈등지수입니다. 한국은 OECD 36개국 중 사회갈등지수가 32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에서도 가장 극심한 갈등은 정치이념상 보수와 진보의 갈등입니다. 소위 광화문집회 와 서초동집회의 갈등입니다. 무려 87% 국민이 이 갈등에 휩싸여 있습니다. 경제 중상위층과 빈곤층의 갈등이 82%, 근로자와 고용주 간의 갈등 76%로 그 다음을 잇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나는 불행하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싫다는 의식으로 가득차있습니 다. 인생의 수많은 문제, 상처, 실망감, 고통을 정면으로 직면하여 해결하는 능력,

 

내공을 상실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만나기를 거려합니다. 최근 한국인들의 인간관계가 축소지향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기껏 손에 스마트폰 하나 들고 놉니다. 스마트폰이 유일한 친구입니다. 혼잠, 혼밥, 혼술족으로 넘쳐납니다.

 

최근 기독교 안에서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나가기 싫다는 가나안교인이 급증하는 이 유도 이런 사회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나안교인 200만명 중 대부분은 교 회나 기독교에 불만을 가지고 떠난다기보다는 공동체에 구속받기 싫다는 겁니다. 혼 자 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의 집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가나안성도 44%가 다른 사람 들의 간섭,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함께 모이는 게 싫다는 사람들입니다. 혼자 신앙생 활하겠다는 혼신족입니다. 예배도 방송 등 미디어를 통해 혼자 드립니다. 저는 이런 가나안교인들을 안 나가 교인들이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야 할 가나안 땅으 로 돌아와야 할 성도들, 하나님의 품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할 성도들이라고 해석합 니다.

 

그나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일반사람들과 다르게 행복지수는 높습니 다. 그 중에서도 교회봉사팀에 속해 있거나 목장 등 소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 중에서도 그리스 도인들의 행복지수가 타종교인들 보다 많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행여나 여러분들 중에서도 요즘 세태에 물들어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사람 만나 기가 싫다는 분들이 있습니까? 티끌만한 문제에도 푹푹 쓰러지는 신앙허약체질들은 없습니까?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들, 기도의 불이 꺼진 사람들, 은혜의 불, 행 복의 불이 꺼진 사람들은 없습니까?

 

이번에 목회자 컨퍼런스와 우리교회 감사특밤 의 주제를 Re-ignite 다시 타오르라 ! 우리 교인들과 함께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의 불로 갈멜산 제단에 떨어졌던 성령의 불로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첫사랑의 불로 다시 타오르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II. 빈 배에 말씀을 채우시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또 던지며 땀흘려 일했건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빈 그물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말씀과 빈 배는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만선의 배로 바뀌어졌습니 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이런 일이, Re-ignite 다시 타오르는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는 가를 기록합니다.

 

우리 중에도 평생 땀 흘려 부지런히 살아왔는데, 교회를 섬기며 살았는데 빈 그물 들고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공허감, 허탈감, 실망감을 떨 쳐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리고 감사특밤을 통하여 진정한 Re-ignite 새로운 은혜의 경험,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경험들이 있기를 축 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주목해 보면 말씀이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1절 무리가 예수께로 몰려와 말씀을 듣습니다. 3절 밤새 바다에 나가 일하느라 말씀을 듣지 못한 어부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배에 앉아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4절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그 말씀에 눈빛이 달라진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절 베드로는 내 상식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밤새도록 던져본 자리입니다. 경험 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순종합니다. 6절 그 말씀에 순종한즉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절 두 배에 채워도 배가 가라앉을 만큼 엄청난 고기를 잡았다는 얘기입니다. 인생의 해답이 여기 있습니다. 공동체의 대답이 여기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힐 때 변화는 시작되어지는 것이고 내 인생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말씀의 제목이 내 영이 말씀에 부딪힐 때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사건 가운데 베드로와의 만남의 사건을 가 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는 얘기도

 

됩니다.

 

누가복음 5장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첫사랑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 관계 속에 사랑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갈릴리로 가자. 첫사랑 으로 돌아가자. 처음 만난 그 자리로 돌아가자. 갈릴리에서 만나자 주님은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실패의 밤이 예수님의 말씀과 부딪힌 베드로 빈 배는 만선이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어부는 하나님 나라의 어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당대의 의사였습니다. 누가는 의사가 환자 한 사람을 진단하고 처방하고 수술하듯이 베드로가 어떤 상태 에 있었는지,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그 후에 베드로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말씀과 부딪히는 사 건으로 오늘 본문은 펼쳐집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인생의 빈 배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건강의 빈 배를 안고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 시간 주님이 나를 외면하시면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의사도 안된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사업의 빈 배를 안고 주님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들을 접어야 할까요? 아니 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까요 포기해야 할까요? 쩔쩔매며 주님 앞에 기도하는 분들 이 왜 없겠습니까? 사랑의 빈 배를 갖고 찾아와서 외로워요. 힘들어요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요즘따라 갑자기 기도의 불이 꺼졌습니다. 믿음의 회의를 느낍니다. 사 람 만나기가 싫습니다. 빈 배 저어 오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이번 감사특밤이 특별히 불 꺼진 사람, 빈 배로 어려워하는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접촉되어지고 부딪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 살다가 실패가 찾아오면 두 려워하지 마세요. 고난이 와도 무서워하지 마세요. 문제가 찾아와도 두려워하지 마 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문제 때문에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위기는 기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새로워지는 기회, 다시 기도하는 기

 

, 다시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기회, 새 일을 시작하시는 기회, 문 하나가 닫혀지면 언제나 새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길 하나가 닫혀지면 새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어제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역사하시고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베드로의 빈 배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빈 배를 예수님께 내어드렸 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모든 빈 배의 문제는 끝장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빈 배를 찾아오시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그 빈 배를 가득채워 주시길 기대합니다. 베드로도 그 빈 배에 고기 아니면 은금보화를 가 득담아 주시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건강의 빈 배로 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평안하 라. 질병으로부터 자유하라. 주님이 한번만 만져주시면 될텐데 기대를 하곤 합니다. 사업의 빈 배로 울부짖으며 예수님이 오셔서 하루아침에 대박이 터지게 해 주시길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빈 배에 예수님께서 타셨습니다. 기적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내 인 생의 빈 배에 예수님이 탑승하셨다.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 니다. 내 인생에 예수님이 타셨다는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빈 배에 말씀을 채우십니다. 은혜를 채우십니다. 성령을 채우십니다.

 

기적이 있다면 이게 기적이요 은혜가 있다면 이게 은혜입니다. 우리의 눈길이 주님의 눈길과 부딪히면 거기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의 빈 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 영이 말씀과 부딪힐 때 내 삶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III.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합니다.

 

베드로 큰 기대를 가지고 초저녁 바다로 나아갑니다. 그날따라 그물을 던지고 또 던 져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녹초가 되었습니다. 빈 그물 들고 힘없이 돌아왔습니다. 불쾌하고 짜증스런 밤입니다. 빨리 집에 가 쉬 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배를 좀 빌리자 말씀하시더니 그 배에 앉아 말씀을 증거하 십니다. 이 말씀과 베드로가 부딪힐 때에 심장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정신이 번 쩍 듭니다. 눈물샘이 터집니다. 기쁨이 어디에서 용솟음쳤는지 배에서 깊은 생수의 기쁨이 흘러넘칩니다. 통곡이 터져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배드로의 심장을 살펴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 으라”(5:4) 말씀하십니다.

 

사실 깊은 데로 들어가서 고기를 잡아라 이 말씀은 말도 안되는 조언입니다. 고기는 밤에 잡는 것입니다. 그물이 오르내리는게 훤히 보이는데 대낮에 그물을 던지 라하니 간밤에 던져도 안잡혔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또 던지랍니다. 그러나 말씀과 접촉되어질 때에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 용기가 생기고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그물을 던지는 이 베드로의 모습. 이것을 이름하여 Re-ignite 다시 타오르라 !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불가능을 이겨냅니다. 인간의 끝자락 한계에 부딪혔을 때에 하나님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거 기에서 새 역사가 시작되어집니다. 모든 실패를 승리로 뒤집는 역전드라마가 펼쳐지 게 됩니다.

 

내 인생에 아픔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나를 만지면 이 시간에도 치료되어집니다. 그렇게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접촉되 어질 때에 변화되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가 해가 둥실 떠오른 아침,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다는 건 어부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경험에도 맞지 않습 니다. 바다의 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영이 말씀과 부딪히고 나니 불가능이 가능한 일로 바뀌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시간적 불가능입니다. 밤에 던져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는데 해가 둥실 떠오 른 낮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러나 베드로는 말이 안되는데 순종합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경험을 뛰어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시

 

절도 일이 안되었습니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 졌을 때에도 실패했습니다. 늘그막하 게 모든 것이 다 끝난 상태에서 다시 그물을 내리자 말씀하시는데 이상하게 힘이 생 깁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시간의 불가능을 극복하는 말씀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경험상 불가능이 뒤집어 지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던졌습니다. 또 던졌습니다. 그러 나 고기 한 마리 잡히지 않았습니다. 낮에 또 던져 보랍니다. 던져본 자리이지만 작 년에 다시 시작했다가 실패한 일이지만 젊었을 때도 안되는 일이었는데 경험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말씀이 나를 감동시키니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니 다시 그물을 내릴 수 있는 Re-ignite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분위기상 불가능을 뛰어넘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질하고 밤 한숨 자지 못했습니다.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바다로 가 자. 다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을 던졌다가 안 잡히는 날이면 그 절망감은 어떻게 합니 까? 그러나 이 모든 인간의 분위기, 내면의 상태, 주변의 환경, 모든 것에 아랑곳 하 지 아니하고 말씀 하시니 내가 던지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내가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접어 두었던 기도의 제목을 펼치 겠습니다. 의사는 안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져주시면 이 시간에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치유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친구가 와도 안되던 일인데 내 맨손으로 해 보라고 하시니 한번 해 보겠습니다.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입 니다.

 

마지막 명령대상의 불가능입니다. 베드로는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어 부요 베테랑 어부입니다. 그래도 그가 실패했습니다. 지금 그물질에 관하여 조언하는 이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직업이 목수입니다.

 

고기를 잡아본 적이 별로 없습 니다. 그것도 전직 목수에 실업자입니다. 이런 분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순종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말씀과 부딪히니 조금 전에 말씀하시던 그 분이 또 말씀하시니 신뢰가 생긴 겁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들 소풍간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성경에 없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도를 다니다가 얘들아 하루 쉬자. 오늘은 소풍 가 자.” 제자들이 너무 신났습니다. 가자. 어디로 들로 산으로~ 춤을 추고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님 도시락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가자.” 산밑에 도 착하더니 얘들아, 큼직큼직한 돌멩이 하나씩 품에 앉아라.” 다른 제자들 은 큼직큼직한 돌멩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런데 불평꾼 가롯 유다는 소풍 가자고 그래놓고 또 사역 시킨다구~ 콩쪼가리만한 공기돌 두 개를 손에 들고 공기를 하면서 따라 올라갑니다. 투덜투덜~ 언덕 위에 올라가 시더니 나무 그늘 밑에 내려놓아라. 예수님께서 손을 번쩍 드시고 감사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눈을 떠보니 가지고온 돌멩이들이 진귀한 음식으 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고기에 빵에 기가 막힌 음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오늘은 자기가 가지고 온 것 자기가 먹기다. 남의 것 먹으면 그것은 다시 돌로 바뀌어 진다.” 다른 제자들은 얼마나 배가 부르게 먹었는지 가롯 유 다는 카스테라 부스러기 두 개 가지고 점심을 떼울 생각을 하니까 기가 막히거든요. 한 조각 입에 넣었더니 입에서 사르르 녹는데 맛이 기가 막힙 니다. 배를 졸졸 굶고 내려왔지요.

 

1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을 조릅니다. “예수님 소풍갑시다. 예수님 소풍 안갑니까?” 소풍을 갔습니다. “예수님 이번에도 빈손으로 가는 거지요.” “그럼.” 언덕 밑에 내려서더니 이번에는 주먹만한 돌멩이 네 댓개씩 주 머니에 집어넣어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다른 제자들은 주 먹만한 것을 찾아 야단법석입니다.

 

가롯 유다는 작년에 못 먹은 본전 생각 이 나서 이만한 바위를 번쩍 들었습니다. 어깨에 걸머졌는데 얼마나 멀리 가는지 언덕을 넘어 골짜기를 지나서 갑니다. 예수님께서 내려놓아라. 손 을 번쩍 드시고 감사기도를 하는데 가롯 유다가 어느 순간에 음식으로 바뀌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떴다가 감 았다가 하는데 아멘! 하도록 돌은 돌 그대로 바위는 바위 그대로 있는 겁니다. “얘들아 위를 쳐다보아라.” 큰 나무 높은 곳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 달렸는데 기가막힌 것들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가지고온 돌멩이로 따 먹 어라. 자기가 딴 것 자기가 먹기다. 남들 것 먹어봤자 소용없다.” 다른 제 자들은 던졌더니 열매가 와장창 와장창 쏟아집니다. 가롯 유다는 그 큰 바

 

위덩이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땀만 흘리다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도 아니고 있음직한 얘기도 아니지요. 우리에게 하고 싶은 교훈 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가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순종하라. 순종하다가 손해를 봐도 그대로 순종해 봐라. 큰 것 들라하면 큰 것 들고 작은 것 들라하면 작은 것 들고, 서라 하면 서고 가라 그러면 가 봐라. 말씀에 순종하면 말 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거기에서 Re-ignite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 다. 새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알량한 순종이 기적의 문을 막습니다. 믿음 없는 핑계가 하나님의 역사를 막습니 다. 내 영이 오늘도 말씀에 부딪히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내 인생에 빈 배는 은혜의 빈 배는 만선하는 경험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IV. 내 영이 말씀과 부딪히면?

 

베드로의 영이 말씀과 부딪히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67절입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6)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7)

 

첫째 말씀과 부딪히고 순종할 때 준비된 그릇이 넘치고 찢어지고 두 배에 채울만큼 만선의 인생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순종해 보면 한 번도 내가 받지 못한 은혜를 여러분 두 배에 채울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성 경에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내 영이 말씀과 부딪힐 때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오늘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5선생님순종하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은 다음에 고기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았더니 예수님이 보이는 겁니다. 그분이 누군가 보이는 겁니다. 8주여선생님이 변하여 주여가 되는 것입니다.

 

이분이 누군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던졌는데 고기 한 마리 안 잡힌 것도 이상 합니다. 대낮에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만큼 고기가 잡힌게 이상한 것입니 다. 잡힌 것도 기적이지만 안잡힌 것도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이 역사를 행하 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휘익 던지려 그러면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손에 안 보이는 리모컨을 들고 물고기를 쫓으시는 겁니다. 이동 오른 쪽으로 왼쪽으로 뒤로 도망 빈바다에만 보이는 겁니다. 깊은데 그물을 내려 잡으라 그래 놓고는 갈릴리 바 다에 고기를 다 모으는 겁니다. 다 집합. 아래위로 입체로 집합. 동작 그만 차렷! 여기 던지라 거기 던졌더니 왕창 잡혔다는 것입니다.

 

아 분은 바다의 주인이시구나. 물고기를 통솔하시는 분이시구나. 산을 세우기도 하 고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시는 분이시구나. 인간의 생사화복, 나라의 흥망성쇠, 역사 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시는 분이시구나. 이 분은 하나님이시구나. 역사의 주인이시구나.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구나. 이 바다의 주인이시구나. 주여!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내가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사 로잡히면, 내 영이 말씀과 부딪히면, 내 암덩어리가 말씀과 부딪히면 기적은 일어납 니다. 기적의 시대가 지나간 것이 아니고 말씀을 믿는 믿음의 시대가 지나간 것입니다. 기적의 시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깨끗이 순종하는 순종의 시대가 사라졌기 때문에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가운데 비싼 값으로 알려진 황소머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저는 피카소 전시전에서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 그 작품의 재료는 쓰레기장에서 집어온 낡은 자전거라는 겁니다. 피카소는 이 낡은 자전거를 집어 들고 왔습니다. 이 자전거 안장이 소머리가 됩니다. 자전거 핸들이 황소의 머리로 갖다 붙여 놓았습니다. 그게 황소머리입니다. 이 쓰레기 자전거 안에 이미 황소머리 작품이 명작품이 들어 있었다고 피카소는 말합니다.

 

누구의 손에 잡히느냐에 따라서 쓰레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명작품 황소머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에, 우주의 운행자 되신 우리 주님에 게 붙들릴 때에 기적 안 일어나는게 기적 아닙니까? 은혜 못 받는게 기적 아닙니까? 냉냉하게 살아가는게 기적 아닙니까? 불이 붙습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새로워집 니다. 이적과 기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배에 채워도 잠기게 될만큼 은혜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혀 본 경험이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눈물로 기도하다가 신구약 66권 가운데 성경 구절 하나가 하나님의 응 답으로 다가옵니다. 심장에 화살이 꽂히듯이 그 말씀이 와서 박힌답니다. 평생 그 말 씀을 붙들고 살 때에 앞길이 하나님이 동행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분 은 성경에 단어 하나가 지나가는데 그 말씀을 붙들고 평생을 삽니다. 어떤 분은 그 림 하나가 지나간대요. 그 그림이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이래요. 저는 어떤 분이 내 머리를 툭 치고 한 마리 했던 게 평생 하나님의 응답으로 믿고 살아가는 거에요. 어떤 분은 기도하다가 청아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말씀 붙들고 평생을 사는 겁니다. 그게 믿음에 사람들의 응답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응답 받는 것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을 시간은 없고 기도하고 성경을 펼치고 처음 눈에 들어오는 말씀을 그날 자신에게 주는 말씀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어느날 성경을 펼쳤더니 마태복음 27:5 “유다가 ...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이건 아니다 싶어서 다시 펼쳤더니 누가복음 10: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아니 오늘 왜 이래? 다시 펼쳤더니 요한복음 13:27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다시는 점을 치듯 그렇게 미신적으로 말씀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Re-ignite 다시 타오르라 감사특밤 3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틀림없이 내 영이 말씀과 부딪히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찬양을 부르다가 그 찬양의 가사 하나 하나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응 답으로 다가와서 눈물샘이 터지고 통곡이 터지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강사가 들려주는 간증을 듣다가 나도 저런 아픔이 있었는데 나는 절망하고 있는 데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갔는데 나는 상처를 끌어안고 매일같이 고통 가운 데 살아가는데 저 사람은 상처가 사명이 되었네. 저렇게 승리할 수 있는데 나는 왜? 그 간증이 나를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말씀을 듣고 제가 이 자리에서 기도 인도를 하겠지요. 기도하는 시간, 눈 물샘이 터지고 통곡이 터지고 가슴에 상처와 질병 고통들이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 하게 되고 단단히 잠겨 있던 분들이 열리고 내 인생을 꽁꽁 묶고 있던 밧줄이 풀어 지는 자유함을 얻는 새 장에 갇힌 한 마리 새처럼 꼼짝 달싹하지 못하고 퍼덕이고 있던 나를 저 은혜의 창공을 날도록 내게 자유를 주시는 경험을 하는 신비한 경험 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냉냉하게 불 꺼진 심령들, 주여 이번기회에 내가 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넘어져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 주여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모든 것을 꺾고 손을 접 어둔 사람들, 다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말씀에 순종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 이다. 다시 던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Re-ignite 다시 타오르십시다. 다시 시작하십시다. 다시 펼칩시다. 다시 뛰어가 보십 시다. 다시 세상을 변화시키십시다. 주님 다시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전능하신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일어서십시다. Re-ignite 교회여 다시 타오르라!

 

 

 

실패의 밤에 찾아오신 예수님 /5:1-11/ 오주철 목사

2016-04-04 22:55:02

 

수녀님 네 분이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모처럼만의 신선한 공기를 가슴 가득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던 수녀님들. 그런데 갑자기 한 수녀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 저는 걱정이 하나 있어요. 아무래도 지금 말하지 않으면 평생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이건 비밀인데요..."

 

그러면서 수녀님께서는 지금껏 감춰온 비밀을 다른 수녀님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사실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남자는 유부남이거든요. 저 때문에 이혼까지 한다고 그래요."

 

순간, 다른 수녀님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다른 수녀님 한 분이 말했습니다.

 

"사실 나도 비밀이 있어. 나는 도박에 빠져서 지금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 얼마 전에 성도님들의 헌금을 몽땅 날렸지 뭐야."

 

역시 다른 수녀님들도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수녀님 한 분도 말했습니다.

 

"휴우... 지금 모두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비밀을 말하는 것 같군. 좋아! 나도 하나 말해주지. 난 알콜 중독자야. 밤마다 소주 3병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안 와."

 

다른 수녀님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에 바빴습니다. 이제 나머지 수녀님 한 분도 비밀을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녀님은 말하기를 굉장히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수녀들이 위로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비밀은 꼭 지켜 드릴게요. 어차피 전부 놀라운 비밀을 다 말했잖아요."

 

"아니... 그래도... ..."

 

"지금이 기회예요. 답답한 마음을 털어 버리세요. 우린 죽을 때까지 말을 안 하겠어요."

 

그러자 남은 마지막 수녀님은 힘을 얻었는지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듣는 순간 남은 수녀님은 놀라움에 얼굴이 하얗게 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넘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수녀님의 비밀은 이것이었습니다.

 

"실은 나는 백방으로 설치고 돌아다니는 수다쟁이거든. 고칠래야 고칠 수가 없어. 요 입이 방정이지."

 

사랑하는 여러분, 무릇 입을 다스리십시오. 복을 받는 사람은 입의 훈련을 잘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위로부터 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입의 훈련을 잘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입은 복을 부르기도 하고 복을 쫓기도 합니다. 그런데 복을 부르는 입이 되려면 입으로 자꾸 큰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시간마다 때마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영감과 계시가 있다고 할지라도 훈련되지 않은 계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준비가 철저하고 훈련이 충분하면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에서 철저히 훈련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3년간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훈련하고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기적의 시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큰 믿음을 가지려면 큰 믿음을 훈련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고 준비하십시오. 하나님께 붙잡힌 자에게는 충분한 기회가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훈련의 양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준비의 양이 차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준비 기간이나 훈련기간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의 한계성을 넘어가고 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확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공의 기회는 믿음에 의한 확신으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확률적이고 오감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이 아닌 계시적이고 영감적인 지식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도 하나님은 눈으로 바라본 대로 보고한 10명의 정탐꾼보다 위로부터 오는 영감과 계시를 고백한 2명의 정탐꾼을 쓰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고백한 빌립 보다, 보는 순간에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을 고백했던 안드레의 믿음을 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과학과 경험의 지식을 십자가 아래에 다 묻어버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속에 계시적이고 영감적인 믿음이 나타나셔야 합니다. 이 시간에 눈에 보이고, 이해되어지는 현상을 붙잡지 말고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계시와 영감을 붙잡으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위로부터 주시는 놀라운 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 믿음을 붙잡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해되고 판단되어지는 우리의 이성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위로부터 오는 영감과 계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 대하여 기뻐하시지 않고 그 사람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높여 줄 수 있는 믿음만 가졌다고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높이 쓰실 줄 믿습니다.

 

언제나 믿음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기회의 때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사람도 그 사람 속에 믿음만 들어가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삶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캄캄한 지하 감옥 속에 갇혀있는 바울과 실라에게 찬송과 기도를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 동일하게 저와 여러분에게 찬송과 기도와 감사와 평안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결코 시시한 사람들의 비평과 판단을 큰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하고 담대하셔야 합니다. 실수나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실패로 몰고 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불안과 근심인 것입니다.

 

이 불안과 근심을 정복하는 일,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 내 안에 밀려오거나 남아있는 모든 불안과 근심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녹여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내 속에 있는 실패자의 기질을 성령의 능력으로 정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바람이 불어야 연이 뜹니다. 상처 입은 조개만이 아름다운 진주를 만듭니다. 고통을 통하여 인간은 더욱 강해지며 인생을 성숙시키고 인생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성령의 권능을 힘입고 믿음 안에서 고통을 소화하고 이겨냅니다. 이 믿음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불같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이 땅에 증명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된 인생의 가능성을 하나님 안에서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그 속에 안고 있는 현재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환경의 변화를 믿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키는 주체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역사하시고, 절대적으로 상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믿음과의 싸움을 합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사실 오늘날의 모든 삶의 업적은 어제까지의 불가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으십시오.

 

지금도 기적은 끝없이 일어난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기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말씀했고, 나는 믿었으니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기적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작품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열성적이고 근면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중소기업을 세워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 그는 새벽 늦게까지 잠과 씨름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업이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면서 사업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 위기를 이겨내고자 낮에는 바이어들을 만나러 사방으로 쫓아다녀야 했고, 저녁에는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다 떠나간 빈 공장에 돌아와서 새벽까지 일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업은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했던 그는 정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했지만 결국 인생에서 쓰디쓴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의 말씀에서와 같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할만큼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밤새도록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그는 인생에서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아주 처절한 실패자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이 여기에서 끝이 났다면 본문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어느 실패자의 고백, 내지는 넋두리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은 그 중요한 메시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여기 한 배는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의 빈 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빈 배에 찾아오셨고, 오르셨습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는 실패의 깊은 밤에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밤에 예수님을 만났던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기적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신의 배가 넉넉히 채워지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 빈 배라는 말은 베드로의 실패한 장면을 말합니다. 하룻길을 걸어도 험한 계곡과 태산 준령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왜 실패의 순간이 없겠습니까? 낮과 밤, 빛과 그림자가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실패의 순간, 인생의 깊은 밤에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이 함께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실패의 때에라도 주님이 함께 계시면 실패가 변하여 성공이 될 것입니다. 빈 배에라도 주님이 오르시면 만선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낭패와 실망을 당하여 지쳐있는 베드로의 빈 배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빈 배를 주님께 내어놓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창조되는 신비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명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영향력 있는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니까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었습니다. 빈 배가 만선의 배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님, 내 인생의 배에 오르시옵소서. 우리 가정에 오시옵소서.

내 직장과 사업에 오시옵소서. 우리 교회에 오시옵소서.

우리 민족 가운데 오시옵소서.

 

당신이 오시면 내 삶은 최선의 삶으로 변할 줄로 믿습니다.

오셔서, 나를 축복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인생의 빈 배, 영혼의 빈 배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주님 전에 빈 배를 저어 나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실망하지 말고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에서 만난 실패의 밤은 주님이 가까이 찾아오시는 기회입니다. 실패의 깊은 밤을 맞았을지라도 주님이 찾아오셔서 내 인생의 배에 오르시면 그 실패는 성공을 위한 출발점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이 배에 좀 올라가도 좋으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배에 오르십니다.

 

이것은 주도적인 주님의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서 실패를 하고 좌절하고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은 주도적인 사랑으로 나를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셔서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손을 내미시고, 위로해 주시고, 새로운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빈 배에 오르셨습니다. 오르시고서는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있더니 이제는 아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이날 베드로의 사업은 불경기였습니다. 이날 아침 베드로의 기분은 나쁘고 짜증스러웠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저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배에 오르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 헌신하는 것은 내 인생의 실패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기분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하면 안됩니다.

 

나는 실패를 했지만, 나는 지금 기분이 몹시 상하여 있지만, 그래서 짜증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니 그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명령하시니 순종하여 헌신하는 것, 이것이 제자의 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분에 따라서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기분에 따라서 찬양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기분에 따라서 헌신이 달라집니다. 심지어는 기분에 따라서 헌금하는 액수까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 이 땅의 목사님들은 성도들의 기분을 맞추느라고 목회다운 목회를 못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결코 바른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명과 기분을 구분하십시오. 사명과 감정을 구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헛된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자기 감정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그것이 사명을 감당하는 장애물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고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도 나쁘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 당신의 상한 감정에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려 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헛된 감정의 노예가 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삶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선한 일에 대가를 지불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있는 성도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한 집안의 가장이 고기 한 마리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안타까움과 염려와 걱정이 자신의 피곤한 육체보다 더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분명히 기분이 몹시 상해 있습니다.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나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마음은 그냥 여기에 주저앉아서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배를 띄우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베드로의 마음은 여기에 있지만 예수님의 명령은 저기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소명을 위해서 자기의 기분을 버렸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잠재웠습니다. 베드로, 그는 헛된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을 잃어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합니다. 자신의 상한 기분을 내세워서 위에서 부르시는 소명을 그르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자신의 쓴 뿌리 때문에 내게 주신 헌신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놓치는 불쌍한 영혼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 상한 감정과 쓴 뿌리가 소명과 헌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때, 그 자리에는 악한 사단만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아름다운 열매 대신에 가라지만 무성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그물은 헬라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명령의 대상들도 복수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물을 내렸다"고 했을 때에 여기에서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이것도 단수입니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만 정작 그물을 내리고 순종한 사람은 베드로 혼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은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그날 갈릴리 해변에는 많은 배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던 사람은 베드로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 마음과 인생 그물을 던진 자만이 행복의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최선의 삶을 맛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순종 생활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순종하겠습니다. 실패하여 답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겠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순종하는 신앙, 이것이 기적을 불러일으킵니다. 순종하는 신앙, 이것이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게 합니다. 순종하는 신앙, 이것이 빈 배가 만선의 복을 누리게 합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순종이 습관이 되고, 순종이 생활이 되도록 시간마다 때마다 훈련하는 것입니다.

 

실패의 밤에 찾아오신 예수님,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결과가 하나도 없었던 빈 배에 오르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았던 베드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흥분되지 않습니까?

 

거룩한 영적 질투가 일어나지 않으십니까?

그냥 그렇다구요?

아무런 감동도 일어나지 않는다구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간증은 없고, 신앙은 밋밋하게 종교놀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의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베드로의 빈 배에 오르셔서 만선의 복을 주신 예수님은 오늘 내 인생의 빈 배도 만선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저 사람의 간증이 내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받았던 축복을 나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저 사람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최소한 이런 거룩한 영적 질투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단순히 거룩한 영적 질투심을 가지기만 하면 됩니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행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 마음에 거룩한 영적인 질투심을 품었다면 이제는 그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 삶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선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경험과 판단에 맞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기분이 짜증이 나고 상해 있어도 말씀하시니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릴리 해변의 아주 이름 없는 가난한 어부를 부르신 예수님, 못난 어부들이 자신의 인생 중심에 예수님을 모실 때에 저들을 통해 세계 역사를 뒤집어 놓으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중심에 모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중심으로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앞장세우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의 앞길을 개척해 주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이 땅을 뒤집어 놓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배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나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비록 실패와 좌절의 아픔을 안고 몸부림치는 이 순간에도 나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면 나는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이 변하여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변하여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능력이십니다. 말씀도 능력입니다. 순종도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만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순종하므로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고기를 잡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5절에서 "선생이여"하던 그 호칭이 8절에서는 '주여!' 하고 달라집니다. 이것만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본문 11절에서 그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쫓았습니다. 만선을 위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만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만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실패와 좌절 속에 빠져있는 나를 찾아오신 이유, 그것은 나로 하여금 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고, 환경의 복을 주시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으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환경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치관이 그 복만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그 복은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솔직히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어리석은 부자 관원처럼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질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있는 것까지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예수님께서 오르시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하였더니 그날 그는 대박이 터졌습니다. 실패의 밤이 행복의 아침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빈 배가 만선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만선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해야만 했던 그 목적이 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만선의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자신만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함께 했던 동업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전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 혼자만 잘 살고, 잘 믿고, 나 혼자만 예수님을 따르면 안됩니다. 나를 알던 이웃의 아무개도 함께 예수를 믿게 해야 합니다. 옆집의 아무개 엄마도 함께 소명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내 가정에 찾아오셔서 참 평안과 만족을 주시는 이유, 그것은 먼저는 나로 하여금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제자를 삼아서 함께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헛수고의 밤을 지난 후 /5:1-11/ 이동원 목사

2015-05-09 15:41:32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새로운 한해를 다시 맞아들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살아온 한해를 돌아보는 심정이 어떠하신지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우리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금년한해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세월을 보냈는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금년한해 내 인생이 후퇴하거나 내 삶의 터가 망가진 실패감으로 한해를 결산해야 하는 가슴아픈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신 분들, 건강에 실패하신 분들, 혹은 인간 관계에 실패하신 분들, 그 결과로 가정이 망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직장을 잃고 방황의 한해를 보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마포불백이 되신 분들도 계시겠지요--‘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말입니다.)

 

금년 한해 몸부림치고 애쓴 세월이었지만 도무지 내 인생의 강에서 내가 낚아올린 수확이 변변히 없다고 허무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런 심정으로 그 어느날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날 호숫가에서 만난 낯선 나그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

 

지난 날 그는 날마다 그렇게 했듯 최선을 다하여 어부로서 고기를 낚고자 땀을 흘려 일했지만 이상하게 수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집에 돌아올 것을 포기하고 밤을 새며 고기를 낚고자 했지만 헛수고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운데도 베드로처럼 금년 한해 헛수고의 밤을 지난분들이 계시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제자 베드로에게서 그 대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헛수고의 밤을 지난후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제자 베드로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4:21에는 그물을 깁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든지 혹은 그물을 깁는 행위가 어부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물이 씻겨져 있지 않으면 통상적으로 그물에는 바다 잡초식물들이 걸리게 되고 이것들은 그물을 속히 부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그물을 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수선하여 다음의 고기잡이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어제는 헛수고였지만 고기잡이를 아직은 포기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제의 실패 때문에 내일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쓰기 어려워하는 인생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사회가 나를 포기하고, 내 형제들도 나를 포기하고, 내 마누라도 나를 포기했어도(마포불백이 되었어도) 나 스스로 아직 나 자신을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포기는 곧 절망이고 절망은 희망의 유일한 적인 것입니다. 난치의 질병과 싸우시는 분들을 관찰해 보면 한 동안 잘 견디시다가 한 순간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악 조건 속에 잘 견기다가 한 순간 극적으로 호전되고 기적을 체험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포기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한후 영국의 참전이 불가피하게 되면서 전쟁의 공포와 절망이 영국국민들을 붙들기 시작한 19411029일 저 유명한 윈스톤 처칠 수상이 런던시내에서 40여분 떨어진 자기의 모교였던 명문 사립학교 Harrow School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참 세계전세는 영국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내일의 희망을 갖기 어려웠던 청소년들은 거의 공부를 포기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때 이 학교의 학생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처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인상적이고 짤막하면서도 위대한 연설을 남겼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날 그의 연설은 불과 2-3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영어의 유명한 일곱 단어로 시작된 연설이었습니다. “Never-Give-In. Never-Never-Never-Never--\"(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결코-결코-결코.) 그렇습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다. 그러면 새해에 우리는 새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헛수고의 밤을 지난후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예수께서 한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베드로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단초는 예수님이 그의 배에 오르신 후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먼저 그의 배를 사용하기를 요구하셨고 시몬 베드로는 기꺼이 예수님을 그의 배에 초청해 들이신 것입니다. 본래 2절에 보면 두 척의 배가 있었는데 한배는 야고보 요한 형제의 배였고, 또 한척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였을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야고보 요한은 시몬의 동업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날 아침 호숫가에 모인 무리들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래서 시몬의 배를 강단삼아 해변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시몬은 이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배를 내놓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며 발견하는 흥미로운 사건의 하나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때 마치 그것이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종려주일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중에 나귀타고 입성하실 일을 위해 제자들에게 건너편 마을에 가서 나귀새끼를 끌고 오너라고 요구하신 일이 생각나시는지요?

 

만일 그때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마태21:3)고 말씀하십니다.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마을 한 집앞에 있었던 나귀새끼에 대하여 그가 주인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또 한번은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디에서 유월절 식사파티를 할 것인가를 걱정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성내에 들어가면 물동이 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터인데 그를 따라가 그 집주인에게 내가 나의 제자들과 네 다락방을 사용하겠다고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14:12-16)

 

도대체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소유하시는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기도하며 주여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본문 8절에서도 시몬 베드로가 마침내 예수의 무릎앞에 엎드리며 주여라고 고백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예수의 주인되심-곧 주권(Lordship)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의 주인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 그분을 주인으로 초청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 내 배를 쓰십시오.” “내 집을 쓰십시오.” “ 내 돈을 쓰십시오.” “내 재능을 쓰십시오.” “ 내 시간을 쓰십시오.” “ 내 몸, 내 존재를 쓰십시오.” 이것이 기적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를 디디고 일어서는 그리스도인의 비밀인 것입니다.

 

, 그러면 한해동안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내 인생의 영역에 예수를 주인으로 다시 모셔들이시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 예수님이 참으로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초청되신다면 이제 곧 기적은 시작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헛수고의 밤을 지난후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인으로 초청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부터 주인되신 그분의 말에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주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자기가 아직도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도 한동안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된 인생을 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오늘도 그렇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만나기까지 그렇게 산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의 베드로의 실패는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렇게 고백할수 있었습니다. 다시 5절을 읽어보십시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 그가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상식과 이성의 우상을 깨뜨렸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 이 헛수고의 밤을 지난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4절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에 따른다면 해가 뜬 후에는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상식을 깨트리는 명령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바닷가에서 어부로 지금까지 고기잡이의 전문가인 베드로가 이 아마츄어의 말에 순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6절에 보면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가 사용하던 그의 그물이 찢

 

어지던 그 순간 그의 이성과 상식이 찢어지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성이나 상식을 무시하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저는 기독교가 단순히 이성과 상식에 매여있는 종교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상식이 실패한 곳에서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어내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파스칼은 참된 신앙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금년한해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내 인생이 코너에 몰려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이제 내 이성과 상식의 우상을 깨트리시고 당신의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님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아니 새해부터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며 살겠습니다.”. 더 이상 과거처럼 내 잘난 것, 내가 자랑하던 내 판단력, 내 경험에 의지하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 붙들고 순종하며 살겠다고 말입니다. 사실 주인되신 하나님을 떠나 내 판단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바로 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의 주께 대한 순종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왔을 때 그는 본문 8절에서 주인되신 그앞에 엎디어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의 장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저는 적어도 예수의 주권을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결단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본문에 근거하여 두 가지를 약속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축복을 이웃들과 더불어 나누며 사는 인생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 본문에서 찢어지는 그물에 넘쳐나는 고기를 인해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을 불러 나누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축복의 근원된 성도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요! 둘째는, 사람들의 영혼을 낚는 어부의 인생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네게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는 이제 고기 잡고, 고기 팔아, 아파트 평수 넓히고, 좀더 큰차 타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먹고 잘사는 인생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나를 통해 내 이웃들이 구원받고 변화되고 새 인생을 사는 이 재미, 목장교회 목자 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제 인생에서 두 번쯤 목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까 하는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를 돌려세운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세상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이 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있을까?”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보람찬 일은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꼭 목사가 아니더라도 평신도로서도 걸을수 있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을 낚는 인생을 살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시면 됩니다. 인생의 최후의 후회는 목적의 결여나 목적의 저급함을 위해 인생을 낭비한 후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인생이 헛수고의 한밤으로 결론나지 않기 위해 이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결심하고 새해로 가시겠습니까?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2. 2절에 그물을 씻던 베드로의 심정을 나누어 보십시오.

 

3. 베드로가 주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했는가를 정리해 보십시오.

 

4. 순종의 결과를 나누어 보십시오.

 

5. 우리 각자의 한해의 실패와 새해의 순종의 결심을 나누어 보십시오.

 

 

 

신뢰의 도약 /5:1-11/ 김기석목사

2015-07-01 22:58:32

 

우리 삶의 자리로 찾아오시는 주님

 

우리는 가을의 분기점인 秋分을 지나 한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추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라지만 올해는 바로 오늘에 이르러서야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아 진답니다. 이제 내일이면 밤이 조금 길게 되겠지요. 우리는 계절의 경계선을 넘고 있습니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임계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삶에도 임계점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바로 그 때가 그의 삶의 임계점이요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상한 종교 체험을 가리켜서 어떤 이들은 문지방을 넘는 경험이라고 말하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방과 마루가 갈라지듯이, 주님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은 달라지게 됩니다.

 

평화롭지만 쓸쓸한 게네사렛 호숫가, 아침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일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겠기에 그들은 그물을 손질합니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올라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아달라고 하십니다. 시몬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주님의 지시대로 합니다. 예수님은 배를 강대상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John Wesley 목사는 "세계는 나의 교구"(The world is my parish!)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이 전해져야 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가리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의 현장을 찾아오십니다.

 

상인들의 가게에도 오시고, 교사들의 강단에도 오십니다. 직장인들의 사무실에도 오시고, 노동자들의 일터에도 오십니다. 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귀가 어두워서 참 소리를 가려듣지 못할 때가 많을 뿐입니다.

 

말씀에 따라서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고기잡이라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시몬이 전문가입니다. 아침 햇살이 물 속에까지 비쳐들면 물고기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시몬은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과 오랜 경험과 겨루는 일입니다. 그는 그런 갈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주님의 말씀은 때때로 불합리해 보입니다. 터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학이나 과학적 진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앎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합리성을 내포하지만, 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서재에 앉아 연구를 하던 아인슈타인의 펼쳐진 책 위에 풍뎅이 한 마리가 툭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진귀한 손님을 보면서 문득 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도 이런 풍뎅이 한 마리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이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신비입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고 어느 시인은 말합니다만, 이 우주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둠의 부분이 더 많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라는 한 존재 앞에서 계산을 단념합니다. 재보고 달아보는 짓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그물을 내립니다. 그것은 신뢰의 행동이었습니다. 많은 고기떼가 잡혔습니다. 어부인 시몬으로서는 기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물고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합니다. 그는 주님의 위대하심과 권능을 보았습니다. 놀람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그의 눈길은 곧장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그는 나름대로는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자기 삶이 많은 부분에서 비뚤어져 있었음을 자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매혹과 두려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기 존재가 문제임을 자각합니다. 그는 예수를 붙잡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에게서 멀어지고 싶어합니다. 빛 앞에서 자신이 어둠임을 자각한 인간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거룩앞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떨림을 동반한 매혹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매혹은 잡아당기는 힘(引力)이지만, 두려움은 밀어내는 힘(斥力)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베드로의 태도에서 이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말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말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에게 확고히 사로잡히고 싶다는 소망의 역설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서울에서 혼자 자취 생활을 하던 참 외로웠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쌀과 밑반찬을 가지고 아버지가 올라오시면 세상을 얻은 듯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더 큰 아픔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시골로 돌아가시는 날 아침이 되면 가슴 저편에서부터 서러움이 복받쳐올라 저는 침울해지곤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납니다.

 

아버지가 떠나시기로 되어 있던 어느 날 아침 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렸습니다. “빨리 가세요. 갈 테면 빨리 가세요. 다신 오지 마세요.” 그 말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임을 나도 알고 아버지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서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식민지 백성의 울화를 삭이며 숨죽인 채 살아가는 것, 때로는 겁 많은 자의 용기로 기존 체제에 저항해보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가리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이면을 본듯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선언하듯 말씀하십니다.

 

소명받은 자의 새 삶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는 새로운 소명 앞에 섰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절망의 바다에 떠밀리는 사람들을 희망의 포구로 인도하는 일, 자기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 인간성이 황무지처럼 변해버린 삭막한 세상에 사랑의 물을 공급하는 일. 그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초대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툭하면 세상 탓하고, 형편이 좋다고 웃고 형편이 나쁘다고 우는 게 우리들인데, 하나님은 우릴 보고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사람들 사이의 불화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세상에 나가 그 골을 사랑과 신뢰로 메우자고 하십니다. 물론 그 일은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과가 신통치 않다 하여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이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삼태기 하나 정도라도 희망의 흙을 나르겠다는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 정신의 키는 한 뼘쯤 커집니다.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우리는 몽당연필처럼 볼품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몽당연필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성경은 주님의 초대를 받은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아주 단순하지만 힘있게 전해줍니다. 아니, 단순하기에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새 세상을 이루는 일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가능성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 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복음송 중에 <빈손의 기도>가 있습니다. “두 손을 모으기 위하여 가진 것 모두 다 버렸네/세상에 눈 감고 유혹에 귀 막고/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네두 손을 모으기 위해서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꾸만 내려놓아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도, 든든한 배경을 만들려는 욕망도, 허영심도,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도 말입니다. 내려놓으면 자유로워집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고 하지요? 어떤 복을 원하세요?

 

세상이 정해놓은 행복의 조건들을 채워가는 복인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러저러한 일들에 끄달리지 않는 내적인 자유보다 더 큰 복이 있나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일보다 더 귀한 복이 있나요? 저는 우리 교우들이 그런 복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힘겹지만, 위험하지만 상식을 거스르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시몬은 주님의 권능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체험했을 때 시몬은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길 떠날 수 있었습니다. 신뢰의 도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삶에 자기의 삶을 기꺼이 걸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어떤 가치에 삶을 걸고 계십니까? 주님의 일을 위해 내가 포기한 것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 /5:1-11/ 이동원목사

2014-12-04 16:07:20

 

작년 212일 현대 호텔의 아버지라 불리운 케몬스 윌슨(Kemmons Wilson)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것은 세계적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수성가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가 태어난지 9달 되었을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린시절 미국은 경제적 대공황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인생의 기둥이었던 어머니마져 실직하자 친구에게 50불을 빌려 극장안에서 팝콘 장사를 시작합니다.

 

이 팝콘 사업으로 1,700불을 번 그는 자신과 어머니가 살 집 한채를 구입합니다. 그는 또다시 그의 집을 잡고 돈을 빌려 다시 식당내 전자음악 연주박스(Juke Box)사업을 시작합니다.

 

그후 그는 다시 제재소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동업자들에 의해 해고됩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울분에 찬 그가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아내의 권유로 믿음을 갖게되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후 아내 자녀들과 함께 워싱톤을 여행하다가 값싼 비위생적인 호텔에 투숙했다가 값도 저렴하고 깨끗한 호텔의 비전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테네시주 멤피스 교외에 작은 호텔을 짓기 시작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십계명의 순종, 그리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이웃을 대접하는 황금률의 원칙에 따라 호텔을 경영하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계적인 홀리데이인 호텔 체인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는 고난의 시간을 지나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그의 직업의 장을 그의 소명을 실현하는 장이 되게 한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다른 어떤 때보다 경제적으로 위축된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경제 회복의 열망이 아니라, 우리가 왜 사느냐는 이유의 확인 곧 소명의 발견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는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는"(5)낙심의 와중에서 주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교훈에 비추어 오늘의 곤고한 시대를 극복해 가기 위하여 우리가 붙잡아야 할 소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1. 직업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소명이란 쉽게 말하면 부르심입니다. 성경에서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가장 빈번하게 쓰여진 장이 있다면 고린도 전서 7장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독신으로 살것인가 기혼자로 살것인가도 부르심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부르심을 따라 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고전7:20"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일반적인 삶의 정황과 신앙체험의 정황을 다같이 부르심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교회내에선 일반적인 소명과 특별한 소명으로 나누어 가르치게 됩니다. 일반적인 소명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을 영어로 vocation이라고 합니다.

 

본래 이 단어는 라틴어 vocatio에서 나온 말인데 그 단어 자체가 소명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의 재능과 은사에 걸맞는 어떤 직업의 장에서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인 것입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칩니다. 종교개혁의 기여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직업의 소명을 회복하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직업의 성직성을 가르쳤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이 고기잡이하던 직업의 장에서 부르심을 받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너무 빨리 쉽게 피상적으로 읽은 나머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직업의 장에서 떠나야 할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몬 베드로가 그날 따라 이 직업의 장에서 힘겨운 싸움을 싸우면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주께서 그를 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사건을 계기로 그를 더 높은 소명의 자리로 부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주께서 그가 지금까지 섬겨온 직업을 평가절하하시거나 폄하하신 일이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의 전반부에서 주께서는 어부인 베드로의 그날의 좌절을 이해하시고 오히려 그가 어떻게 고기를 더 잘 잡을수 있을가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리고 그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는 성공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그는 고기가 어디에 모여 있는가를 정확하게 아셨고 그곳으로 시몬을 인도해 가신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이 또한 생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좌절에 빠진 그리스도인 직업인들이 주의 도움을 구하며 일어나서 재기에 성공한 간증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의 직업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직업에 장에 어려움이 계시다면 이때야 말로 주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주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모든 직업은 주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지금까지 그가 섬겨온 직업보다 더 높은 소명을 주시고 있음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 우리가 둘째로 붙잡아야 할 가장 고귀한 소명이 있습니다. 전도의 소명입니다.

 

2. 전도는 가장 높은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본문의 정황에 근거하여 전도를 정의한다면 "전도는 주님없이 살고있는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기잡는 일밖에 몰랐던 그에게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서의 표현에 의하면 고기낚는 어부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고기도 귀하지만 사람은 훨씬 더 고귀한 존재가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한 생명의 가치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수 없는 존재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차별화되는 존엄성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실에 기초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바로 인생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이 소중한 인생들을 구원하시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영광을 회복하도록 친히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인생, 이런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 전도라면 전도보다 더 높은 소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주의적 기독교는 이 전도 소명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곧 가장 높은 소명이라고 가르쳐온 것입니다.

 

이 가장 높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 주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의 직업을 떠나 전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도록 초청하십니다. 많은 목회자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 그런 소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소명받은 분들을 우리는 보통 전임사역자(Full-time worker)라고 부릅니다. 본문의 베드로도 그런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 우리는 이런 소명을 특별한 소명이라고 여겨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이 높은 소명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가 그런 예에 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텐트메이커로 천막 깁는 일을 하면서 바울을 도와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의사 누가도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끝까지 그를 의원 누가로 호칭합니다. 아마도 그는 그의 생애가 다하도록 의사로서 의료 기술을 사용하면서 복음전도에 헌신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전도의 장은 직업의 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직장이 복음화되고 직업의 선교의 도구가 될수 있다면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는 훨씬 앞당겨질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주께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직업의 장을 떠나지 않으면서 전도 소명을 수행하기를 기대하시는 이유라고 할수 있습니다.

 

3. 전도 소명은 예수를 좇아감으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제 사람을 취하라"고 소명받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배와 그물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좇아감이 바로 전도 소명 실현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정상적으로 좇아갈수 있었다면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 곧 전도자가 되어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산다고 하면서도 아직 그가 전도해 본 일이 없고 그를 통해 예수 믿게 된 사람의 전도 열매가 없다면 그의 믿음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예수의 제자들이 워낙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전도 안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정상이고 전도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비정상으로 보여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정상이십니까?

 

, 본문과 매우 유사한 정황에서 마태복음 4:19에 보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우리의 책임은 예수를 따르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약속은 우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책임을 다한다면 약속은 실현되지 않겠습니까? 책임이란 말을 영어로는 responsibility라고 합니다.

 

두 개의 단어 responseability가 결합된 말입니다. 우리가 주의 명령에 정상적으로 응답(response)만 한다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는 능력(ability)은 주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주의 명령을 좇아 둘씩둘씩 짝을 지어 나갔을 때 주께서는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전도하도록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좇아내는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순종이 문제인 것입니다. 순종을 결심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좇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께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좇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순종을 결심해 보십시오. 비로소 저와 여러분을 통해 전도 소명이 실현되는 영광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최근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로 읽히고 있는 현대판 사도행전

 

"하늘에 속한 사람"을 읽어 보셨는지요? 이 책은 1958년생 중국 전도자 일명 윈 형제 본명 리우전잉의 믿음행전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1974년 자기 부친의 기적적인 암치유를 계기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 전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는 1984년 그가 중국 삼자교회에 가입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중국정부의 극심한 박해속에 무려 30회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감옥과 토굴 거리에서 지속적인 전도 운동을 벌려 수천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고 후배 전도자들을 양성합니다.

 

그는 위기에 처할때마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로 함께 하십니다. 그는 최고 74일을 금식하면서도 살아 남습니다. 마침내 19979월 그가 중국 전도의 소명을 다했다고 판단하신 하나님은 그를 중국에서 독일로 탈출시키십니다.

 

그러나 막상 서구 자유의 세계로 탈출한 윈 형제는 서구 기독교의 모습에 큰 좌절을 느낍니다. 서구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쳐 은과 금은 소유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지 못하는 성도들, 헌신할줄도 전도할줄도 모르는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최대가 아닌 최소의 것을 드리면서도 회개할줄 모르는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눈에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봉헌시간이면 두툼한 지갑을 열어 가장 적게 내어놓을 것을 찾는 모습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의 눈에 오늘의 한국교회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그는 중국 성도들의 봉헌 모습이 그립다고 말합니다. "내일 주님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성도가 있습니다"고 광고가 있으면 즉시 한사람 빼놓지 않고 주머니를 털던 성도들--

 

그중에는 주머니에 있는 전부가 아니라 종종 자신의 전재산을 드리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서구의 교회들이 다시 부흥을 경험하려면 말씀에 대한 전적 순종과 헌신이 필요하다고 충고합니다.

 

중국에서 윈 형제와 지하교회가 경험했던 기적은 바로 순종의 기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결코 표적과 기사를 따라 다니지 않았다고--다만 순종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기로 했을 때 표적과 기사가 그들을 따라 다녔다고 증언합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각자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고민을 나누어 보십시오.

2.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소 전도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십시오.

3. 오늘의 본문에서 시몬 베드로가 전도자로 부름 받는 과정을 정리해 보십시오.

4. 본문 11절에서 시몬이 전도자가 되기 위해 희생한 것들은 무엇이었으며 그 때의 시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나누어 보십시오.

5. 우리 각자가 작정한 VIP 태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으며 우리 각자가 어떤 작은 희생을 결심하고 있는지를 나누어 보십시오.

 

 

 

이 사람의 회개 /5:1-11/ 곽선희 목사

2014-11-23 06:09:29

 

증참이라고 하는 사람은 공자선생님보다 마흔 여섯 살이나 어려서 나이로 비교한다면 공자선생님의 손자뻘 밖에는 안됩니다. 그는 아주 젊은, 어찌 생각하면 어린, 그런 제자였습니다만은 공자선생님께서는 이 증참을 가르쳐서 늘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증참이라고 하는 제자가 남긴 간단한 상식적인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일삼성(一日三省)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일일삼성이란 말을 들어왔습니다, 어른들로부터. , 그런데 일일삼성 할 때는 하루에 세 번 자기를 반성한다 그렇게 늘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해 보면 그게 아닙니다. 매일같이 세 가지를 반성한다는 겁니다. 그 첫째가 뭐냐하면, 남을 생각하고 행동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린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자기 기분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매일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남을 생각하고 살았는가? 그것에 대해서 진실하고 충성되었는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두 번째는 '친구와의 교제에 있어서 신의를 저버린 일은 없는가?' 신의. 신실한 교제의 기본인 믿음을 저버린 일이 없는가? 또 하나는 '배우지도 않고 자기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 일은 없는가?' 모르면서 아는 척, 그렇게 남을 가르치며 위선적으로 살아간 일은 없는가? 그것을 이 세 가지를 매일같이 반성해서 그와 같이 공자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제자가 되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서양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또 그의 많은 책 중에서 지적합니다. 사람은 두 말을 많이 하고 잘할 줄 알고 그래야 인격이 세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두말. 간단합니다. Thank you! 여러분은 하루에 고맙다는 말을 몇 마디나 하고 삽니까?

 

작은 일에도 큰일에도 중심에서부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감사, Thank you! 라는 말을 항상 잘할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인격자입니다.

 

또 하나는 I'm sorry.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잘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우리는 그 공자의 문화, 유교문화, 이런 걸 좀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못돼먹은 게 많아요. 마치 고맙다고 하면 자기 인격이 내려가는 줄 알아요. 게다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 아주 족보가 망가지는 줄 안 다니까요?

 

그래가지고 죽을 때까지 I'm sorry 한 번도 못해보고 죽는 사람도 있어요. 되게 못됐지요. 참으로 저질 인간입니다. 볼 것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그건 제 잘못입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또 자주 그렇게 마음에서부터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훌륭한 인격자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첫번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내가 잘못했습니다"그러라 그 말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라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회개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도 회개요, 내 인격을 높이 세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회개에 있습니다.

 

1963년이니까 아주 옛날 얘기이구만요. 제가 처음으로 유학을 갔을 때 어리둥절합디다. 참 거 큰 미국에 가서 보는 것 듣는 것이 다 신기하기만 해요. 그런데, 마침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서 많은 연보를 해서 보내시는 분이 저를 만나서 같이 저 뭐 영어도 잘 못하는데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아주 클럽 식당인데 굉장히 화려하고 큰 그런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뭐 그때 사정으로서는 내 일생 처음이죠. 그런데 이 식당이 높은 곳에 휘황 찬란하게 장식해놓은 샹들리에 등은 다 불은 끄고요, 내가 앉은 식탁, 똥그란 식탁 한가운데에 촛불을 하나 켜 놓고 고걸 또 빨간 유리 갓을 또 이렇게 씌어 놨어요. 그리고 그 불이 깜빡깜빡하는데 이렇게 하고 이제 식사를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더라구요.

 

이러다가 손가락을 베일는지도 모르겠어요. , 그런 상황이라서 내가 공부하러 간 터에 무엇을 못 물어보겠습니까? 거기 나이 많은 웨이터가 나와서 봉사할 때에 "웨이터, would you tell me 이거 왜 이렇게 깜깜하게 하고 먹으라는 거요? 아 저거 불 키면 좋을 텐데 이거 어둡게, 왜 이렇게 하고 식사를 하라는 거냐?"하고 물었더니요,

 

그분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진리를 말해주었습니다. "보자하니 뭐 나이 그만큼 들었으니까, 손가락 베지는 않을 것 같다고. 또 한 가지는 이렇게 불그스레한 얼굴 불빛에 비추어 보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미인 아닌 여자가 없고 미남 아닌 남자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 방안에 불 너무 크죠? 밝게 켜지 마세요.

 

불그스레하게 이렇게 해 놔야 주름살도 안보이고 그저 다 예쁘게 보인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어두운데 비추어보면 다 예쁘게 보인다 그말이에요. 여러분, 여자 분들이 화장을 합니다만은 그 화장도 그게 원래 위장술이거든요.

 

그건 어두운데서 통하는 거예요. 대낮 밝은 빛에 햇빛에 비추어 보면 화장한 거 못 봐줍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고로 우리가 이래 혼탁한 세상에 죄악 중에 사니까 내가 깨끗하고 내가 잘났고 뭐 그런 거 같지. 다 그럴 듯 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그 밝은 심판대, 밝은 빛 앞에 비추어보면 그 모든 것이 다 노출이 되요. 모든 것이 다 이렇게 드러나게 되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앙의 사람,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은 죄라고 생각도 안해요. '뭐 그까짓 것'하고 지나가지만 믿는 사람은 안 그래요. 당연히 도와줘야 될 사람을 도와주지 못했고 용서해야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어요.

 

이럴 때에 그는 괴로워서 잠을 못 자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도 민감하게 죄라고 생각하고 안타깝게 뜨겁게 회개하며 사는 바로 그 사람이 인격도 있는 사람이요 신앙도 있는 사람이다, 하는 말입니다. 회개의 깊이와 은혜의 높이는 언제나 이렇게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해야 될 줄 알면서도 회개 안 합니다. 아니, 회개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또는 모든 것을 환경에 돌리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 뭘 잘못된 건 누구 때문이요 누구 때문이요 해버리는. 또 하나는 변명체질에 사는 사람. 무슨 일이든지 간에 잘못되었으면 내가 잘못했습니다.

 

I'm sorry. 딱 끝나고 말아야 되요. 뭐 이런데 고 다음 말이 또 따르죠. 그러나, 너도 그렇고, 그러나 누구도 그렇고, 그러나 환경이 어떻고……. 이 뒷이야기가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과하면서 말많은 사람, 구제 불능입니다. 이유 없어요. 이건 내 잘못이요.

 

이것으로 끝이에요. 그 다음에 주가 달리면 안 되요. 그러나 어떻고, 어떻고……. 왜 이런 쓸데없는 말이 따라가는 겁니까? 내가 잘못했어요. 아주 간단한 말로 끝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변명이 아주 체질이 되었어요. 이거 배냇병신이요. 그저 말이 많아요. 이거는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또 한가지는 운명론자도 회개를 할 줄 몰라요. 모든 것을 팔자 소관으로 돌려요. 팔자가 어떻고 어떻고. 특별히 교만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 회개할 수 있지요 교만한 사람은 회개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회개로 인해서 오는 후속 결과, 그 불이익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 때문에 그는 회개할 수가 없어요. 만사에 원망과 불평으로 사는 사람, 이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그 심령이 그 몸이 계속 썩어가고 있는 거예요. 회개할 때만이 그 영혼이 온전히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회개의 종류가 몇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지적으로, 지적인 회개로서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건 누구에게 말할 것 없어요. 내 잘못이요, 내가 원인이요. 내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는 지적인 회개가 있어야 되고요, 변명 없이.또 하나는 정적인 회개가 있어요.

 

이 회개로 인해서 오는 형벌과 심판과 저주를 미리 생각을 하면서 미리 느끼면서 통분해 하는 것이에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하고 가슴 아파하는 통분함이 있어야 되요.

 

또 하나는 의지적인 회개입니다. 잘못된 줄 알았으면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결단하고 멈추는 거예요. 그것이, 그리고 돌이키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동기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스러워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그 심리학적 이유 때문에 그 가책 때문에 그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회개하는 사람이 있지요.

미국에 심리학자인 마틴 샐리그마 라고 하는 분이 그의 책 가운데서 말합니다.

 

삶을 우울하게 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 첫째가 뭐냐하면 영구성입니다. 변화를 믿지 않아요. 나는 이대로 머물 수밖에 없고, 이대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내 이 잘못, 또 이런 행위는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또 하나는 확산형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다 그 모양이다. 너는 구제 불능하다. 이것도 못했고 앞으로도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스스로 자기를 절망적으로 평가하고.

그 다음에 개인성입니다.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 문제 있다' 하고는 자괴감에 빠져요. 자기 스스로를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로 평가해 버립니다. 거기도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창조적 역사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에요. 때로는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경우도 있지요. 뭐 형벌을 피하려고, 어쨌든 벌을 면하기 위해서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은 율법적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이없게도 보상을 바라고 대가를 요구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상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회개하면 용서받을 것이다. 축복이 올 것'이라고 그런 보상 심리적으로 회개하는 수가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 모든 회개는 그리 아름다운 회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은혜와 은총에 감사하면서 감격한 중에 회개하는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매를 맞으면서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하고, 어머니가 그에게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어 줬을 때, 잘못한 걸 다 알고도 사랑했을 때 그의 가슴에 안기면서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그 회개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은혜 가운데서 회개하는 회개가 진정한 자기 정체의식이요 진정한 회개란 말씀이죠.

 

오늘 본문에 잠깐 나타난 사건이지만은 이 가운데 예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 회개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참 이상하게, 엉뚱하게 나오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분명히 베드로가 물고기 잡았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여기에 물고기 잡아놓고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시간에 그가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습니까? 매를 맞았습니까? 저주를 받았습니까? 병이 걸렸습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 은혜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볼 때 나는 너무 초라하고 너무나 못됐어요. "하나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이제 무슨 일이든지 한번 끝낸 다음에 다시 시작하는 건 거 귀찮은 일이거든요. 밤새껏 물고기를 잡느라고 수고하다가 그물을 씻어서 지금 다 말려서 걸어놓았습니다. 이제 일을 끝낸 거예요. 정돈해 놓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물을 내리라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이 바다에서 한평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물이란 깊은 데서 내릴 수 있는 성격이 못돼요. 그래서 언제나 밤에 어두운 때에 얕은데서 그물을 내리거든요. 그런데 오늘 대낮에 이건 전혀 상식 밖이에요. 특별히 예수님은 목수예요. 베드로는 어부로서 호수에서 한평생을 산 사람이요.

 

목수가 어부에게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 시간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많은 설교를 하신 다음에 감동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라." 베드로의 생각은 확실했습니다.

 

'이건 못 잡는다. 못 잡을 건 뻔하다.' 그래도 오늘 성격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물을 내려 밤새껏 수고하여 잡은 것이 없습니다만은" 거기다 괄호하고 하나 더 넣어야 되요. '이제도 못 잡을 것이 뻔합니다만은'

 

"말씀하시니까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인격과 그 말씀하시는 분의 체면을 보아서 일단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렸는데 물고기를 가득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게 됐다. 이때에 그는 충격을 받습니다. 왜요?

 

내가 분명히 의심하고 했거든요. 순종은 했으나 믿음은 없었어요. "물고기 잡어라" 할 때에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제는 만선이 되었습니다" 그때 감사했어야 되는데 그런 마음 없었어요.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고 다만 "그저 하라 하니 합니다. 안될 줄 알지만 합니다." 억지로, 부득이 순종을 했더랍니다.

 

, 이제 문제예요. 주께서는 그것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너무 중요한 거예요. "이 믿음 없는 사람아" 이렇게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이 믿음 없는 행위에 대하여 주께서는 모두 다 용서하시고 물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주었단 말이에요.

 

물고기 잡았다는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의 불신앙을 용서해 주신 것, 나의 불신앙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용해 주신 것.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덮어주신 거예요.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은총 속에 있는 것이에요. 감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사랑을 느끼며 회개하는 그 회개가 진짜 회개란 말이에요. 구약성경에 보면 욥기 42장에 볼 것 같으면 그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10남매나 되는 자녀를 잃었지요, 재산을 다 잃었지요, 몸의 건강을 잃었지요, 많은 친구를 잃었지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너무 힘들어서 그는 어머니가 나를 왜 세상에 낳아 놓았던가. 낳으셔서 왜 나를 이렇게 젖을 먹였던가?

 

너무 살기가 힘들어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어요. 원망 아닌 원망을 했어요. 그러나 이 모든 어려운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주실 때 배나 주셨어요, 배나. 더 많이 주었어요. 그때 그는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이여 전에는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니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내가 지난날에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이제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나이다. 욥기에 처음 나오는 말이에요. 회개하나이다.

 

그가 징계를 받으며 회개한 게 아니에요. 큰 은혜를 받으면서 너무 감격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간에 믿음이 없었던 거, 원망한 거, 불평한 거, 참 잘못됐습니다" 그때 회개하더란 말입니다. 이 회개가 높은, 하나님의 사람의 회개란 말이에요.

 

리스트에 대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작곡가 리스트가 어느 날 저 독일에 조그마한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마치 아주 피아니스트 하나가 있는데 이 아가씨가 피아노 독주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방에 광고를 써 붙이고 또 소문을 내게 되었습니다.

 

신문에도 내고. "아무개가 피아노 독주회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는 리스트의 제자입니다" 이랬단 말입니다. 그 리스트의 제자라면은 아주 명예가 높아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독주회하기 바로 전날 리스트가 이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 여자는 리스트의 얼굴도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여자가 이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리스트가 여기 왔으니 이제 난 죽었다.' 그래서 숙소에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빌었습니다. "저는 고아출신으로 혼자서 피아노를 배웠고, 이제 독주회를 가지려고 하는 타임에 선생님의 고귀한 이름을 제가 이렇게 도용을 하고 선생님의 제자라고 광고를 했는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많이 회개를 했습니다.

 

리스트가 껄껄 웃으면서 "큰 실수를 했구먼요.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한답니다. 이리 오세요. 피아노에 앉아서 한 곡을 치세요." 그래서 잠깐 피아노를 쳤습니다. 리스트는 말했습니다. "여기 이렇게, 이렇게 조금 달리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리스트가 하는 말이 "분명히 내가 당신을 가르쳤습니다. 그런고로 이제는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떳떳하게 나는 리스트의 제자라고 말할 뿐 아니라 연주회에 내가 참석하겠는데, '마지막 곡은 제 스승 되시는 리스트 선생께서 하시겠습니다' 라고 하세요. 제가 한 곡 쳐드리겠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거기서 눈물을 흘리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회개가 진짜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알고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가 회개할 때에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내 제자가 되라."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베드로는 이에 감격해서 예수를 위해 삽니다. 닭 우는 소리가 날 때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 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닭소리만 나면 엎드려 회개했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내가 회개하기도 전에, 내가 죄를 다 회개하기도 전에 벌써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푸셨어요. '그 은혜에 감격해서 이제 회개합니다. 아니 일생을 회개합니다.' 바로 그 회개 속에 창조가 있고 능력이 있고 위대한 역사가 있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 당연히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도 않고 하지도 못하며 살아가는 미련한 저희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크고 위대한 은혜를 매일매일 새롭게 감격하면서 더 깊이 회개하고 또 다시 회개하면서 더 큰 능력을,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은혜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을 만난 사람 -베드로 /5:1-11/ 옥한흠 목사

2014-11-14 21:02:27

 

오늘 본문 속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나도, 우리도 만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요즘 말로 하면 보통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입니다. 당시는 지방색이 무척 강했던 시대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그는 천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성실한 생활인이었습니다. 그는 30대 중반으로 가정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성격은 다소 충동적이었지만 진리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내면에 무엇인가를 항상 찾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표는 안 냈지만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깊은 허무를 느꼈습니다. '인생은 이것만이 아닌데 ... ' 하는 진리에 대한 마음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는 세례 요한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그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용단을 가지고 갈릴리에서 요단강까지 먼 길을 가서 그의 제자가 도니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또 애국자였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나라에 속국이 되어 있는 조국을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민족의 해방은 메시야가 와야 한다고 믿고 그를 기다리는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이 베드로와 같은 성격이나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떤 극적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늘 그 사건이 여러분에게도 나타나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1.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실패한 날 아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만난 극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의 생활은 대부분 피곤합니다. 낮에는 그물을 손질하거나 잠을 잡니다. 해질 때 장비들을 갖추어 어둠이 깔리는 바다로 나갑니다. 이게 어부 생활입니다. 남이 일할 때는 잠자고, 남이 잠잘 때는 일을 해야 합니다.

 

미국 교포 사회의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갑니다. 이민을 가서 생활이 안정되기까지 5년 내지 10년은 교포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갈릴리 어부들의 생활과 같습니다. 저녁에 일하는 남편은 낮에 자고, 낮에 일하는 아내는 밤에 잡니다. 교대로 잠을 자며 살아가는데 보통 피곤한 삶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삶은 참으로 피곤한 삶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동틀 무렵 맥이 빠진 상태로 돌아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해가 떠올랐습니다. 저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가 떼를 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바닷가로 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시더니

 

"베드로야, 네 배 좀 내가 타자." 부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그때가 초면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다소 안면이 있었는지라 허락해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조금 떨어지게 하시더니 바닷가에 서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실패한 날 아침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수고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와 그물을 기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베드로와 비슷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는 생활을 되풀이 하는데 말 못하는 피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 사람들의 대부분입니다. 누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출세한 사람은 출세한 대로 피곤함이 끝이 없고, 따라 가려고 몸부림쳐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의 인생은 또 얼마나 피곤 한지요. 인생길 지쳐서 살아갈 용기가 없을 때 평생의 모든 꿈은 허물어지고 세상의 친구는 다 떠나갑니다. 이와 같은 깊은 허무를 누구나 한번씩은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얼마나 피곤합니까?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해서 시작한 결혼 생활도 왜 이렇게 힘겨운가? 그렇게 큰 꿈을 가지고 키운 자녀가 나에게 얼마나 큰 부담감을 주는가? 건강, 직장 문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문제로 피곤합니다.

이렇게 피곤하고 빈손 들고 돌아온 그날에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못 잡고 빈 손 들고 돌아온 그 아침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는 것은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사가 잘되고 배부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안 찾아가십니다. 멸시받고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이 지치고 곤고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오늘 밤,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마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우려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피곤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 믿고 얼굴이 환한데 나도 예수나 믿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래서 이 저녁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바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절대 이 순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 계신 주님이 보이지 않게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실패한 날 아침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에게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피곤할 때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모든 대중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의 말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인생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피곤함을 느낀 사람은 드디어 영혼의 귀가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밤 여러분에게 제 이야기가 들리십니까? 예수님은 저같은 사람 하나를 이 시간에 나팔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예수님이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자신을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의 말이 귀에 들어옵니까? 마음에 들어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에게 귀를 기울인 사람입니다. 왜 귀를 기울일까요?

 

세상 만사 모든 소리는 들을 때뿐입니다. 돌아서면 텅텅 비는 것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이제는 뭔가 찾아야 하겠다' 생각이 있어서 귀를 기울입니다. 언제입니까?

 

피곤한 날 아침에 ... 여러분은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뭐니뭐니 해도 잘 들어야 합니다. 소위 그래서 기독교는 듣는 데서 출발하는 종교라고 말을 합니다.

 

불교에 가면 몰라도 하면 됩니다. 계속 절을 하고 탑을 돕니다. 물론 불교에도 법회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들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신이시요 영이시기 때문에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존재라면 믿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것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시고 그래서 들으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성경을 기록해 놓았지만 그때는 기록이 없어 항상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사람들을 앉혀 놓고 한 시간 두 시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잘못 들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합니다. 듣는 사람에게 잡념을 가지게 합니다. 짜증나게 하고 졸립게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졸리면 마귀가 방해하는 것입니다. 눈을 밝히 떠서 귀로 잘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베드로가 귀 담아 듣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실패한 날 아침에 예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저는 어젯밤에 허탕만 쳤습니다." 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는 대화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의 사정을 아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물을 가지고 다시 깊은 데로 가지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십니다.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아무 말 안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한 허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 이 자리에 옷을 잘 입고 점잖게 앉아 있을 때 그것은 저와 여러분 사이이고, 우리 주님은 옷을 보시지 않습니다. 화장한 얼굴을 보시지도 않습니다. 마음의 생각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은 현재의 베드로를 아시듯이 그의 과거를 꿰뚫어 보십니다. 오늘의 실패를 아시듯이 우리의 과거의 실패도 아십니다. 숨은 한숨, 고통, 마음의 진통,을 다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윗이라는 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44:21)"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족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39:2-4)"

 

예수님은 베드로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듯이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이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면 불안하고 부담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아시고 깊은 곳으로 가라. 고기를 잡아 주겠다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은 책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남 모르는 비리를 캐내려는 것도 아닙니다. 약한 부분을 도와주시고 고통을 아시고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의미로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가운데 처음 나와 계시는 분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알고 이해해 줍니까? 마음의 고통은 여러 가지입니다. 안타까운 사정을 이야기할 때 얼마나 잘 들어줍니까? 실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만은 예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들어주십니다.

 

실패한 날 아침에 주님은 당신을 도와주려고 와 계십니다.

 

이것을 알고 들어갑시다. 예수님께서는 도와주시려고 그 말씀을 하셨지만 이것은 순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명령입니다. 때가 낮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입니다. 낮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린다고 고기가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상식적으로 알겠지만 그물 따라, 고기 따라 깊이가 다 다릅니다. 그물 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조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고기 잡는 일이라면 내노라 하는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 말을 여러분이라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마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 변화인 것 같습니다. ', 저분에게는 순종해야 하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 밖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얻은 것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다시 한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자기 주관이나 생각은 송두리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나가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제가 믿기는 이 시간 똑같은 명령을 주님은 여러분에게도 하신다고 봅니다. 아마 들으시는 분마다 의미가 다 다를 것입니다.

 

"교만을 꺾어라!" "믿어라!" "죄를 끊어 버려라!" "남은 여생을 가난하게 지낼지라도 불의한 재물은 쌓지 말아라!" 여러분 귀에 어떤 음성이 들립니까?

베드로와 같이 순종한다면 베드로와 같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믿으라고 하십니까? 순종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바다로 나갑니다. 지난 밤에는 베드로가 선장이었습니다. 지난 밤에는 예수님이 안 계셨습니다. 밤새도록 그 밤에는 노력했지만 손에 들어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모시고 나갑니다.

 

예수님께서 그 배의 선장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모든 삶의 권한을 예수님에게 맡겼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배는 갑니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3040년 예수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 배에는 예수님이 없었고, 그 배의 주인의 여러분이었습니다. 선장이었습니다. 잘된 일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산 인생을 뒤돌아보면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여러분 손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 훨씬 솔직한지 모릅니다.

 

한국의 고위층을 미국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사는 분입니다. "요즘 어떠십니까? 사는 것이 보람있나요?" 물었더니 얼굴이 빨개지며 말이 없었습니다. 그의 경력을 보면 엄청납니다.

그러나 막상 50년 이상을 하나님 없이 살다 보니 빈 그물만 남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하기에 예수님을 믿고 그 신앙을 회복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끔 교회에 가서 뒤에 앉았다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답답하니까 간 것입니다. 지금은 그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바다로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나갑니다. 인생길을 다시 출발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축복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출세 성공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세속적으로 신앙을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돈 가지고 인생을 좌우하고 평가하는 저속한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갈릴리 바다로 나가 보시기 바랍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보라는 말이 납득이 되지 않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수님 모시고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돈으로 살 수 없었던 것, 명예와 권세로도 얻을 수 없던 것, 주님의 축복으로 여러분의 배에 가득가득 담아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잔뜩 잡아가지고 와서는 정말 놀랐습니다. 고기를 풀기 전에 베드로는 너무 쇼크를 받았습니다. 잡은 고기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 분이 누구이기에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가?' 생각하다 자기도 모르게 갑판 위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가 알기는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나이는 몇 살 위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릎꿇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없는 하나님 앞에 가면 인간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누군인지 노출이 되고 맙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아주 잘사는 사람 앞에 가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 보입니다.

 

아무 권세 없는 사람은 지체가 높은 분 앞에 가면 더 초라해집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죄없는 예수님 앞에 누구든지 가서 1:1로 만나면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자기도 모르게 노출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너는 죄인이다"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죄인임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본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예수님을 잘 모른다고 해야 맞습니다.

 

죄없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만큼 이상한 일도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죄 소리만 하면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불신자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죄의 문제를 깨닫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라 말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죄 없는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만이 이 문제가 대부됩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만이 이 문제가 대두됩니다.

 

과거에 잘못되었던 마음, 잘못 살았던 인생이 그대로 예수님 앞에 서면 노출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지적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와 같은 마음이 먼저 생겨 버립니다. 그 마음이 생기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3.죄를 해결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너무 자주 죄에 대하여 말하자 점잖게 생긴 신사 한 분이 찾아와 "목사님, 강단에서 너무 죄! ! 그렇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주 듣기에 거북하고 곤란합니다." 왜 듣기에 거북할까요? 자꾸 질리기 때문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회개하고 그만 두어야 하는데 매번 반복하니까 계속 찔립니다. 계속 찔리니까 목사가 미워집니다. "목사님, 죄라는 말 말고 고상한 말 있지 않습니까? 약점이라든지, 실수라든지 하는 말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난 목사님은 반문을 했습니다. "독약이 든 병이 있습니다. 독약이라는 말은 누구나 듣기 싫지요. 그래서 독약이라는 상표를 떼고 진통제라는 말을 써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듣기 싫어도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성경을 들춰보면 이 문제가 대두됩니다. 지금 베드로는 정상 코스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10년을 믿어도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진지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다시 믿어야 합니다.

 

요즘 교인들은 너무 비상합니다. 목사가 A하면 벌써 B합니다. 너무 비상하니까 목사가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빙 돌려서 받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래서 문제가 생겨지고 교회는 힘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른 코스로 가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을 만나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를 보게 되는데 얼마나 추한 자신인가를 보게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1-32)"

 

예수님께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참 죄인으로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라고 하나님이 진단하셨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의인은 없습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부터가 죄입니다.

 

육체를 입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부터가 죄입니다. 인간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입니다. 범죄 했기 때문에 후손 대대로 죄인으로 탄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씨 중에 전(), ()씨 등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원래 고려 왕씨였는데 고려가 멸망하면서 이씨 조선에서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이름에 갓을 씌우고, 점을 찍었다고 합니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일이지만 이들은 이씨 조선에서는 상놈입니다.

그 집안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이유 없이 상놈입니다. 아무리 총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벼슬을 할 수 없습니다. 타고난 팔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태어난 사람들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일생 동안 손발 꽁꽁 묶여 방안에 갇혀서 나쁜 짓 안하고 살았어도, 사람들에게 칭찬만 받으며 의롭게만 살았어도 하나님 앞에는 죄인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하나님이 왜 야박스럽게 죄인으로 공격하느냐고 하나님을 탓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몰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 인형이 여러분을 탓한다면 그냥 두겠습니까?

 

불 속에 집어넣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인간은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의 운명입니다.

 

하나님을 추방한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방한 것이 죄입니다. 오늘까지 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다면 하나님 없이 산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입니까? 내가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을 굉장히 나쁘게 보십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무시하고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한다면 얼마나 아니꼽겠습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도 가만 두겠습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인데 모든 삶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추방하고 이때까지 내가 하나님으로 행사하며 살았습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인은 죽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가면 죽습니다. 그래서 그 심판을 면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구원시키려고 하는 데 흥 - 하고 안 믿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을 죄라고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나는 죄인 아닙니다" 하고 빠져나갈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밤에 여러분의 삶은 배 위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 말한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건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백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그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3)"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멸망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9:22)"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사함을 얻고 떳떳하게 서기 위해서는 누군가 의로운 피를 흘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 죄인인데 누구에게서 의로운 피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 없는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해 의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죄의 고해 속에서 신음하며 한 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들, 죽음과 파멸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믿어라"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으로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때까지 짓는 죄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죄까지 모두 씻겨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언제나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서게 해주십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앉아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았습니다.

 

오늘날 역사상 베드로 만큼 영예로운 이름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축복을 받기를 예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도 나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구나 여기서 내가 구원받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내가 믿고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을 깨달으시면 주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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