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장 19절 - 27절 설교 모음
분노(憤怒)를 다스리는 능력 /약1:19-21/ 김병삼목사
2018-04-13 07:06:33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분노가 일어날 때
스캇 솔즈의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에 보면 ‘분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분노와 상대방을 향한 비방의 화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말하며 ‘분노 포르노’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 기자 팀 크레이더는 끊임없이 화낼 대상을 찾는 세태를 표현하기 위해 ‘분노 포르노’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편집자에게 날아온 수백 개의 댓글과 편지를 토대로 그는 많은 현대인이 누군가를 가해자로 몰아 자신이 옳다는 느낌을 얻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분노 포르노는 아무런 개인적인 책임 없이 다른 인간을 희생시키며 싸구려 쾌감을 맛본다는 점에서 포르노와 유사하다.”
이런 책임감 없는 분노의 표출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존재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이 질책하셨던 바리새인들도 늘 남을 경멸했던 사람들이었고, ‘죄’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분노를 한 개인에게 덧씌우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노의 현상은 명백히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씌울 때,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죄’의 모습을 보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발산해도 마땅한 쓰레기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분노의 감정은 언제 일어나나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외부 환경에 의해 우리의 의지가 꺾어질 때가 아닐까요? 아니, 우리의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할 때의 좌절감이 분노로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 19절에 ‘더디 하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분노’가 서두름과 관계있다는 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시리즈 말씀을 준비하면서 성도들의 생각하는 죄의 문제도 물어보고, 실제로 분노의 문제를 이기기 위한 성도들의 묵상도 나누고 있습니다.
한 성도는 분노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사춘기 시절을 지나는 아들에 대한 분노가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눈에 게으르고, 거칠고, 존중하지 못하는 마음에 화가 난다고 말이죠. 지금까지 자신이 노력한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생각이 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분노’의 이유를 묵상하는 중에 서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식을 기다려 주지 못하는 조급한 엄마의 마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참아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두렵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는 고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니 본문 19절의 ‘더디 하며’라는 말씀과 20절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는 말씀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참으시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말입니다.
요즘 참 많이 하는 말 가운데 ‘분노조절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이죠. 이렇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왜 이런 분노의 감정이 생기느냐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분노를 “내가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 내 속에서 일어나는 정서적인 반응”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죠.
그럼 이런 정서적인 반응은 언제 일어날까요?
첫째, 불의와 모욕감을 느꼈을 때 분노합니다.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을 때 화를 내고, 자신에 대한 험담이나 부당한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나 무시당할 때 자존감이 위협받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둘째, 우리의 소원이나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분노합니다.
즉 자신에 대하여 실망할 때 화가 난다는 말입니다. 일을 제시간에 끝내지 못할 때, 집회에 참석하러 가는 데 차선이 막혀 있을 때, 물가가 오를 때를 비롯하여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스트레스를 받으므로 생기는 감정입니다.
셋째, 분노는 어느 정도까지 학습된 반응입니다.
그래서 잠언 22:24~25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렵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노는 전염병과 같아서 전염되고, 늘 불평만 하고 짜증이 나 있는 사람 곁에 있으면 또 다른 분노와 적개심을 느끼게 합니다.
분노의 감정과 반응
이러한 분노의 감정에 대하여, 왜 야고보서 기자는 믿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을까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절)
분노에 대하여 성경은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합니다.
화가 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그 화를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가진 성정(性情)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성정은 완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죄에 대한 경향이 있어서 쉽게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할 때, 이제 문제는 분노 자체가 아니라, 이 분노가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이것을 “죄의 소원이 죄악의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7에 보면 가인이 저질렀던 죄의 원인은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분노’와 ‘죄’를 구분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더 나아가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반응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러분은 분노가 일어날 때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첫째, 분노를 의식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입니다.
분노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대응 방식이죠. 이는 잘 수양된 방법으로 의식적 노력이기도 합니다. 잠언 14:29의 말씀에 의하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도 이렇게 권면하죠.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둘째, 파괴적 반응으로 화를 분출시키는 반응입니다.
가장 미숙한 반응으로 화가 날 때, 폭언이나 욕설을 퍼붓든지, 가구를 부수든지, 부인을 구타하든지 하는 것이 열등감에 기인할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노가 생길 때, 파괴적이고 폭발적인 행동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셋째, 분노가 일 때 피동적으로 억압하는 반응입니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보복당할까 두려워서 무의식 속에 분노를 파묻는 반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화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다 보니 생긴 병이기도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오래된 무의식 속에 화를 내서 안 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화를 억누릅니다. 하지만 억누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신체적 질환으로 나타나게 되죠.
제가 의사들에게 잘 듣는 말인데, “마음이 침묵하면 몸이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존 파웰이라는 사람은 “내가 나의 감정을 억누를 때는 나의 위장이 점수를 매긴다”고 하였습니다. 억압된 분노는 위산과다를 촉발해 소화가 안 되게 하거나 위궤양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편두통. 알레르기(두드러기). 근육통. 심장병, 당뇨병. 암 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억압된 분노를 거룩한 인격으로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분노가 일 때 무시하는 반응입니다.
직접 분노를 표현하면 보복 당할 것을 두려워하던 옛날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에게 가졌던 감정과 같은 것입니다. 아주 소극적으로 분노를 표시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시어머니에게 저녁상 차려 드리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는 것으로 반응하거나, 남편에게 화난 아내는 ‘실수’의 이름으로 밥을 태워서 차려 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말로 표현하지 않고 간직한 분노가 원한 감정, 복수심, 즉 한(恨)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저 바레트(Roger Barrett)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원한은 표현되지 않은 분노의 축적이다. 원한은 인간관계와 개인적인 안녕에 있어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다. 일부 우울증 환자들은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수단으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늘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한다. 당신이 나에게 주의와 정성을 기울여 주지 않는다면, 난 더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포자기해 어떤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일종의 심리적 협박이다."
올바르게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21절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기에서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온유함이란 성내지 않는 것이고, 급하지도 않은 것이죠. 온유함을 위해서는 기다리는 시간, 마음을 진정시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온유함’을 ‘humbly’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것입니다.
스캇 솔즈의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주라]에 보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하는데 아주 적절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째, 아무리 과장되고 부당한 공격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따라서 비난이 부분적으로, 심지어 대부분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혹시 정말로 잘못한 점이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
자신도 모르게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나 말을 했을 수 있다. 물론 비판이 부분적으로 옳다 해도 그 의도는 옳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하라. 그래서 겸손해지라. 그렇게 되면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그 비판으로부터 배우고 비판자를 향한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비판(온라인상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은 부당하고 황당할 수 있다. 실제로 내 입장에 대해 비판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나와 상관없는 입장을 비판받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럴 때는 비판자를 비웃기보다. ‘웃기는군.’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마라, 상대방의 비판에 일말의 진실조차 없다 해도 속으로 비웃지 마라.
첫째,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와 어리석은 행동을 다시금 기억하라.
둘째, 비판자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이 부분에서 저는 여러분보다 더 민감할 때가 많죠.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말과 소문이란 정말 ‘피상적’이죠. 또한, 리더에 대한 공격은 책임지지 않는 다수의 사람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말들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겸손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분노’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라면, 감정의 지배를 받을 때 분노한다는 것이죠. 성경은 우리가 본능과 감정에 지배를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오늘 다시 성령 충만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므로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죄 된 본성에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분을 낼 만한 일들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지만, 그분을 이길 힘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R. A. 토레이 신부는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성령 충만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말하면 실언이 되기 쉽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가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저의 결정은 잘못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성령의 기능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즉 성령께서는 우리가 분을 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깨닫게 하시고, 지침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옛날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일이 있습니다.
어느 신학생이 도둑질하다가 걸렸습니다.
경찰이 이 사람을 잡아 조사를 하는 중에 신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왜 신학생이 도둑질하게 되었는가 묻게 되었습니다. 이 신학생은 매우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 신학생은 돈을 보자 다른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돈을 훔쳐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삶의 위기의 순간에 말입니다. 결정적으로 나를 화나게 하는 순간에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순간에 우리가 어떤 것의 지배를 받아야 할까요?
성령세례는 우리의 삶에 한 번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그러므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말씀이 생각날 수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우리 삶을 다스리기 시작한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때때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묵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Time out’을 외치는 것이죠.
목회 상담을 하는 분들이 제안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조절하는 기술로 알려지는 ‘중간 휴식(Time-out)’이 있답니다. 잠시 진정하고 자신의 처신에 대한 결과를 고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분별한 대응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19절은 우리에게 “성내기를 더디 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바로 20절 말씀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면 화가 나는 순간에 잠시 ‘time out’을 외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시편 37편 7~9절 말씀을 보세요.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기다려라
여호와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강남 중앙침례교회의 피영민 목사님이 사용한 예화가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는 어떤 부부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노란 물약이 든 큰 통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만약 화가 치솟거든 이 물약을 세 숟가락씩 꼭 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반드시 1분 동안 머금은 후에 삼켜야 합니다. 그러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부부는 의사 말대로 화가 나면 물약을 마셨습니다. 물약을 먹고 3분이 지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약이 떨어지자 부부가 다시 의사를 찾아가서 약을 더 져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 약은 설탕물입니다. 부부가 싸움을 안 하게 된 것은 그 설탕물을 먹고 3분을 기다리는 동안 분노를 삭였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32절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 말씀과 가장 잘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묵상하기
분노-그것이 의로운 분노이든 불의한 분노이든-는 결코 빨리 행동에 옮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순간에 하나님과 씨름하는 더 큰 영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되새김질하는 더 힘든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적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침묵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싸움과 괴로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놀라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함
나를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참아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삶 속에서 신실하셨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나를 한 번도 실망하게 하시지 않았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대신하여, 나의 신원을 들으신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수없이 많은 시편의 내용이, 때로는 분노 속에서, 때로는 탄원에서, 때로는 처절한 울부짖음 가운데서 고백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가는 와중에, 그리고 대세의 불리함을 보고, 평생을 함께 싸웠던 부하들이 등을 돌리고, 오히려 다윗을 저주하는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있든지, 혹은 누가 자기를 어렵게 하든지, 사울 왕이 자신을 그렇게 죽이려고 했어도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믿고, 그리고 알고 있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 가운데 죄의 소원을 따라, 죄악을 저지를 것인지, 아니면, 분노가 우리의 본성이기는 하지만, 여호와 앞에 잠잠히 묵상하면서 우리의 모든 신원을 들으시고, 한 번도 나를 실망하게 하시지 않았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지, 분노와 찬양이 전혀 다른 반대 의미일지 모르지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노 가운데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라면, 분노 가운데 우리의 삶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보혜사(保惠師) 성령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가기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우리가 분노를 이기게 되는 것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축복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장애물 하나를 지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계획 속으로 이끄신다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참 많이 하는 이야기죠? (한홍 목사의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택하신 다윗을 이 땅 위에 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골리앗’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골리앗 없는 다윗을 우리가 상상하기 힘이 듭니다.
혹시 골프공을 보셨나요?
골프공의 표면에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습니다. 그 굴곡이 몇 개인지 세어본 분이 있으신가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대략 400~500개 정도의 ‘딤플’이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처음 골프공이 만들어졌을 때는 표면이 매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표면이 매끄러운 공보다 굴곡이 있는 공이 쳤을 때 훨씬 더 비거리가 많이 나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표면에 있는 딤플이 공기의 저항을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고난과 역경이라는 딤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신비로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찾아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요?
분노할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는 사람!
분노를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입니다. 묵상이란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손길을 깨닫기 위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잠시 잠재우는 것이 묵상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들리는 분노의 소리가 아니라,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새로운 의미로 쓰이게 되죠.
참 놀라운 일인데, 월남전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 중에 많은 사람이 붙잡혀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포로가 된 상황에 분노하고 분노가 좌절로 바뀌는 순간 참으로 쉽게 수용소에서 죽어 갑니다.
그런데 수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의미 있게 보낸 사람들이 있답니다. 기타를 잘 치는 다른 포로에게 막대기에 줄을 매고 기타 치는 법을 배우고 나와 연주가가 된 사람, 포로로 있는 동안 매일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체력을 유지하다 본국에 돌아와 쉬지 않고 4,500번의 기록을 세운 사람, 공군 대령 조지 홀은 7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 동안 긴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서 골프채라고 생각하고 매일 휘둘렀다고 합니다. 미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뉴올리언스 골프토너먼트에 출전해 우승합니다.
어떤 수용소에서는 다국적 군인들이 함께 있었는데 4~5년을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 의사소통을 위해 말을 배우다, 불어, 한국어, 스페인어, 중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게 된 사람도 있다고 하죠.
누군가에게 분노하고 지루한 시간이 될 수 있는 순간을 창조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랍지 않나요? 화가 나고 분노할 수 있는 시간을 창조의 시간으로 바꾸는 능력.
혹시 여러분은 K-POP 스타에서 우승한 악동 뮤지션을 아시나요?
몽골의 선교사 자녀로 태어난 남매는 돈이 없어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시절, 선교사인 아버지가 사준 기타를 가지고 무료함을 달래며 연주를 배우고 곡을 쓰다가 스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철환 씨가 쓴 [연탄길] 3권에 어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회복지과에 근무하는 영주라는 공무원이 새로운 근무지로 발령을 받고 아침 일찍 출근을 준비합니다. 밤새 내린 눈은 아침이 되도 그칠 줄 몰랐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가야 했는데, 육교 계단이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떤 노인이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하얗게 눈을 맞으며 계단에 붙은 눈을 떼어내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고생이 많으시네요.”
“고생이랄 게 뭐 있나?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잖아요. 빙판 진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날에는 천하 없는 장사도 봉변을 당하지요.”
잠시 대화가 오고가다 할아버지는 한 숨을 내 쉬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은 아들이 이 육교에서 넘어졌거든, 그때 머리를 다쳐서 지금까지 삼 년 째 방안에만 누워 있다오. 아들놈 때문에 이 늙은이 가슴이 새까맣게 타 버렸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내 아들처럼 될까 봐, 눈 오는 날이면 이렇게 나와 눈을 치우는 거지요.”
힘들지 않냐 는 영주 씨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오, 하나도 힘들지 않아. 이것마저 할 수 없다면 아마 더 힘들었을 게요. 나는 삽으로 눈덩이를 떼어 내며 자식에 대한 아픔까지 떼어 내고 있는 거라오. 이 일을 하고 나면 응어리진 마음이 많이 풀려. 이 일을 하는 건 아들놈 빨리 일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종종 커다란 사건을 맞이하는 두 종류의 사람을 봅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분명히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일어난 불행한 일을 가슴에 품고 분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분노를 누구를 상대로 풀어내야 할지 비수를 품고 사는 것이죠.
그런데 누군가를 향해 품었던 그 비수가 어느 순간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많은 피를 흘린 다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로 인해 아파하며, 그 아픔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얼어붙은 눈을 떼어내는 것처럼, 교통사고를 당한 자식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누군가는 같은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사고 현장에서 차량 안내를 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해 죽어가는 자식을 가슴에 품고, 장기를 기증하며 누군가의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은 분노의 문제가 아니라, 그 분노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고, 그 분노 속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자세가 문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야고보서 기자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우리 태도의 문제를 결정합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다스릴 때 우리의 삶이 능력 있게 변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보다 더 능력 있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거울을 보고 난 후 /약1:19-25/ 김기석목사
2015-06-29 09:57:50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칭'이 왠지 죄송스럽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인데 '성도'라니요? 하지만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하거나 영적으로 흠이 없기 때문에 '성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고전1:2)에게 문안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시행하는 자격 시험에 통과해야만 성도가 될 수 있다면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 성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으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되었으니까 맘대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자매들에게 편지합니다."(1:2)
성도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입니다. 믿음직하고 착실하다는 말이지요. 다른 말로는 성의誠意를 간직한 사람, 곧 참되고 정성스러운 뜻을 품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의를 간직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야고보 선생에게 배워보기로 할까요?
듣기는 속히 하라
저는 처음에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됐어요.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은 알겠는데,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궁리를 많이 했어요.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귀를 열어두고 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가십gossip에 민감한 현대인들에게 복음일 거예요. 살을 많이 뺐다고 자랑하는 어떤 연예인이 알고 봤더니 지방 흡입술로 그랬다더라에서 시작해서, '카더라' 통신을 사람들은 많이 즐깁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는 야고보 선생의 말은 그런 가십을 많이 수집하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재빠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참 느린 사람들입니다. 무슨 소리냐고, 나는 집회 때마다 설교를 듣고, 차에서는 기독교 방송만 듣고, 집에 가면 기독교 텔레비전만 본다고 말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느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극을 보면 왕이 자기 방에 앉아 있다가 "게 누구 있느냐?" 그러면 즉각 대전 내관이 들어와서, 왕의 말에 복명하지 않습니까? 만약 왕이 부르는 데 내관이 응답하지 않는다면 당장 불호령이 내릴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데도 못들은 척하며 살아요. 하나님은 때로는 설교를 통해, 때로는 어떤 상황을 통해, 때로는 어떤 사람을 통해, 때로는 우리가 접하고 살아가는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시거든요.
우리는 그런 소리에 민감하지 못해요. 세미한 중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해요. 성도답게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빨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가 항상 부재중이거나, 통화중이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살아야 합니다.
말하기를 더디 하라
다음에는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했는데요. 이것은 성경의 지혜자들은 저마다 가르친 것입니다. 또 우리 삶의 경험도 그 말을 지지합니다. 말을 급하게 해서 덕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0:19)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
지옥도地獄圖를 보면 집게를 가지고 혀를 뽑는 장면이 나옵니다. 말로 짓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어디에서든 마찬가지지만 교회에서는 특히 말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고, 말을 빨리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실없는 사람이 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탈무드에서 가르친 말은 말의 절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말하기 전에 세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문은 "이 말은 꼭 필요한 말인가?"입니다.
둘째 문은 "이 말은 진실한 말인가?"입니다.
셋째 문은 "이 말은 친절한 말인가?"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한 템포씩만 느리게 말하십시오. 누군가에게서 어떤 허물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람들의 귀로 가지고 가지 말고, 기도의 골방으로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상의하십시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성내는 데 더디라
성도들은 성내는 데 더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 잘 내는 사람을 보면 낯선 사람만 보면 앙앙거리고 달려드는 강아지 생각이 납니다. 화 잘 내는 사람을 기특하게 여기셔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화火는 화禍를 부르게 마련입니다. 물론 '거룩한 분노'는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고, 불의가 판을 치는 데도 나 몰라라 하고 팔짱만 끼고 있다면 그는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불의한 세상을 향해 '아니요' 하고 외쳐야 합니다. 세상뿐인가요? 내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도 분노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분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분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는 것이 나의 성격과 나의 편견에서 출발한 것일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화는 불이어서 나도 태우고 상대방도 태워버리고 맙니다.
신실한 성도는 자기 속에 끓어오르는 화조차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그것이 기도이고, 그것이 명상입니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를 향해 분노의 불을 지피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성도답게 되는 길입니다. 습관이 오래 되면 성품이 된답니다. 우리는 모난 사람들이지만,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다보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할 것입니다.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가 말하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면 뭐해요. 그 말씀이 내 속에 뿌리를 내려야지요. 말씀이 뿌리를 내리려면 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온유함을 '겸손함' 혹은 '공손함'으로 옮긴이도 있습니다.
전에는 저도 말을 극단적으로 할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도 '절대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길래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절대로'라는 말은 교만한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에게는 말씀이 들어갈 여백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가 자부하던 것들을 거두어가십니다. 모난 자아를 깨뜨리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게 되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성인이 되어서 믿게 된 이들 중에는 인생살이의 쓴맛을 보고 주님께 나온 분들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확실한 게 하나도 없고,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그는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 귀가 뚫리는 격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온유溫柔를 뜻하는 단어가 '흙humus'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흙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받쳐주고, 나중에는 그들을 품에 안아 자기 속에 동화되게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이를 정죄하는 일에 재빠르지 않습니다.
그는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래 참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느 분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신다면 세상은 혼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미완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닮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도라 부름받았으니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무릎꿇고 공손하게 받들어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난 후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을 가리켜 야고보 선생은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고는 곧 그 모양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꼭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어요.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에 찔림을 받기도 하고,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지만, 교회 문을 나서기만 하면 재빨리 옛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지요. 왜 그렇지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시 멈추어 서서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흉하고 일그러진 자기의 삶을 조금씩 교정해나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Word이 사건event이 되기 위해서는 진지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날마다 달마다 수입과 지출 사항을 점검합니다. 가정주부들도 마찬가지지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고 나면 자기가 틀린 문제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그래야 다음에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영적인 삶을 위해 자기 삶을 돌아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의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듣기는 더디고, 말하기와 성내기에 빠른 우리들, 온유하기보다는 강퍅한 우리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교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는 밑줄을 긋지만, 말씀이 자기 삶에 밑줄을 긋도록 허용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참상을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치유와 변화의 시작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실상을 보고 진정으로 아픔을 느낀다면 지금부터라도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십시오. 우리가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안아 더 높은 세계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복 받은 이입니다. 오늘 이후 우리의 삶이 성도다운 신실함으로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2 /약1:19-27
2015-06-03 11:02:50
◑4. 자신을 대단한 자로 여기면..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갈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무슨 이유이든지, 자기가 교회에서
남들보다 좀 더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찬양의 은사를 받았을 수도 있고, 가르침의 은사를 받았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자기가 여러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스스로 남보다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자기는, 다른 신자들과 달리, 뭔가 특출한 존재로 생각하거나,
주님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를 특별히 더 사랑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스스로 속는 일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또한 단지 그 교회를 수십년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자기가 교회 중직자라는 이유로,
내가 여기 사람들 중에서 최고참이다.. 라는 우월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무슨 이유로든지,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특출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요,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the first가 the last가 되고, the last가 the first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the last가 the first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제가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높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the first가 the last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은, 자기 스스로 ‘나는 특출한 사람/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교만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웃기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남들보다 잘 하는 것이, 하나 쯤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정말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를 뛰어나게 잘 하는 사람, 찬양인도를 탁월하게 잘 하는 사람,
봉사에, 구제에.. 그 은사가 정말 남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뛰어남이,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나는 남달리 뛰어나다’는 자의식/교만이.. 그를 실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스스로 속지 말라’고 우리를 경계합니다.
갈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그 이유는,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종이고,
영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자이며,
내 힘과 능력으로 사역하지 않고, 주님의 힘과 능력을 빌려서 사역합니다.
즉 주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가,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절할 때, 스스로 우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누구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20년 동안 꾸준히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상당한 경지에 올라가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제 모든 사람의 존경과 칭송을 받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올라간 이후에, 과거와 같은 영적인 영향력을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뭔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갈6:3
교만이 넘어짐의 앞잡이가 된 경우입니다.
여러분, 천국에는 ‘고참’이나 ‘선배’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오래 다녔다고 왕고참 행세하는 분이 안 계십니다.
천국은, 오직 주님 한 분만 높이며, 아무도 스스로 높이지 않습니다.
아니, 스스로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는 큰 자입니다.
성도는 ‘현재 천국’을 살고, 누리는 사람입니다.
지금 현재에서도, 남을 섬기고, 자기가 the last라는 생각으로
(내가 이 교회에 처음 온 새신자라서,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심정으로)
자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을 못 받는다 하더라도,
‘the last가 the first다’라는 말씀으로, 천국 생활을 (연습)해야 합니다.
자기가 the first 또는 큰 자가 아니라서 괴롭다,
또는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한탄스럽다는 사람은,
좀 더 복음을 철저히, 자신에게 적용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5. 육체를 심고, 영생을 거두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 gift)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래서 위 말씀대로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6:23절을 쓴 사도바울은,
본문 갈6:8절에서는 ‘영생’에 대해 약간 다른 각도에서 말씀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롬6:23절 한 측면,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영생>만 알고 있는데요,
동시에 갈6:8절 측면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즉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한 ‘영생’을 거둠>입니다.
▶즉 우리는, 자기 육체를 위해서.. 심으면..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밤늦게 까지 TV로 야동을 보거나,
인터넷으로 더러운 오물들을 탐닉하면서..
그러면 ‘썩어진 것을 거둔다’는 갈6:8절은 잊어버리고
그래도 자기가 ‘영생을 거둔다’고 믿고 있습니다.
롬6:23절만 붙들고, ‘나는 믿으니까,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갈6: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심고, 성령을/영생을 거두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뜻이지만,
‘심었는데, 안 거두는 것은 없다’는 뜻도 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어!’ 하면서, 그가 육체적인 것들을 심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아무 열매가 안 맺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심은 대로 반드시 거둡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치 않은 열매들을, 반드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씨앗은 혹시 땅에 뿌리면, 그 중에 싹이 안 트는 씨앗도 있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씨앗’을 심어서.. 영생을 거두지만
‘육체적 씨앗’을 심으면.. 열매가 안 나면 좋으련만..
아무도 보지 않는 한 밤 중에 심었는데도.. ‘썩어진 것’을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그 ‘죄의 대가를 안 치르는 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두 신자가 10년 전에, 비슷한 시점에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서 보니, 그 열매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한 신자는,
안 보이는 곳에서
(사실 우리는 교회에서만 만나잖아요. 평소에 그가 어떻게 사는지는 잘 모릅니다.)
신령한 씨앗들을, 지난 10년간 계속 뿌렸습니다.
이제 그는 영생(천국 같은 삶)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신자는,
안 보이는 곳에서, 즉 그의 가정이나 직장에서, 친구 관계에서
계속 육체적인 씨앗들을 심었습니다.
영생은.. 믿기만 하면 받는 선물로, 롬6:23절만 붙들었습니다.
10년이 지나서.. 그는 육체적인 열매들만 가득 거두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지 않고 거저 넘어가는 법은.. 없습니다.
어떤 농부가, 한 밤 중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자기 밭에 찔레와 가시를 심었습니다.
그가 알곡을 거두었을까요? (아닙니다.)
찔레와 가시가 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자기는, 아무도 모르게,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게 혼자 몰래 심었는데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정확하게, 자기에게 적용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뭔가를 끊임없이 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뭔가를 안 심는 날은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오늘 우리가 심은 것을, 추수하고 거두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사실 오늘의 내 모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지난 10년 동안, 내가 꾸준히 심어온 것들을, 거둔 결정체로서의.. 지금 내 모습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과거 10년 동안, 뭔가 잘못 심었다는 이유입니다.
내가 뿌린 씨앗들이, 당장 내일 싹이 트고, 열매를 맺지는 않지만,
5~10년 지나면,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생명의/영생의/성령의/하나님께 영광 되는 열매를 거두기 위해
오늘 하루하루를 신중하게 ‘씨를 뿌려야’ 합니다.
롬6:23절 한 구절만 붙잡고, ‘편안하게’ 살아가지 마시고,
갈6:8절을 동시에 붙드십시오!
오늘 당신이 무엇을 심는가에 따라서.. 당신의 미래와, 당신의 영생이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육체’를 심고 있으면서
자기는 ‘영생’을 거둘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갈6:7절은 ‘스스로 속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6.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
약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위 본문의 뜻은,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봅니다. 그러면 얼굴에 뭐가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세수를 하고, 얼굴에 묻은 오물이나 때를 닦아내고, 직장에 출근합니다.
거울을 보고서도, 그저 집을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에 비치는 때를 보고서, 세수를 안 하고, 출근하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울’에 비유됩니다.
내 몸에 더러운 곳이 어디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 그걸 고쳐야지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 즉, 고치지 않는 사람은,
그게 습관이 된 사람은.. 스스로 속고 있는 상태입니다.
말씀은.. 그저 듣고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로 하여금, 교훈하고/책망하고/바르게 하고/의로 교육하려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거울과 같고, 엑스레이와 같습니다.
우리 각자의 문제점을 비춰줍니다.
그러면 한 사람은, 집에 가서, 되새기며, 그것을 앞으로 고치려/행하려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들은 것을, 교회당을 떠나면서 다 잊어버립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십시오.
약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그런데 듣기만 하는 자가, 왜 스스로 속는 자가 되는가 하면
듣기만 하면.. 자기가 다 되는 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그렇다고들 하는데요, 자기가 정통 교회에 다니면, 자기가 정통 신자인줄 알고,
자기가 큰 교회에 다니면, 자기가 최고의 크리스천인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훌륭한 설교를 들으면.. 자기가 훌륭한 신자가 된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요,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님/선생님/회장님이 뭔가 말씀/훈시/지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학생/직원이 가만히 듣기만 하고
절대 그 들은 바를 행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안 들었으면.. 책임이 없는데,
윗분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나는 당신을 무시한다’는 뜻이 되지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그가 직원이라면, 그는 절대 승진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설교도 빠지지 않고 듣습니다. 나는 성경도 매일 읽습니다’
그것으로 스스로 속지 마십시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니까요. 반드시 들은 말씀을 행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7. 자기 입술이 더러우면서,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면.. 스스로 속습니다.
약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교회의 리더들 가운데, 큰 일을 감당하면서도
집에서 자기 자녀나 아내에게
급히 분을 내고, 욕설까지 쏟아놓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아무리 큰 사람이고, 사회적 명성이 높더라도,
그의 경건은 제로 라는 것입니다.
혀는.. 우리의 경건의 척도 중 하나입니다.
자기 혀가 제어 안 되면.. 그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함으로써
스스로 경건한 신자라고 여긴다면.. 그는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약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누가 온전한/완전한/성숙한 성도입니까?
위 구절은, 말에 실수가 없으면..이라고 말씀합니다.
혀가, 우리의 경건의 척도라는 뜻이지요.
혀는.. 자기가 신앙으로 컨트롤 해야.. 제어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절대 제어되지 않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많은 실수를 하게 되고, 자기 경건은 제로가 되는 겁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그의 혀를 통해 말로 나옵니다.
그러니 혀는, 자기 마음의 척도도 되는 셈이지요.
그러니 ‘혀가 경건의 척도’라는 말은, 맞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혀와 말은, 컨트롤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은,
옛 자아에 의해서 순간 지배될 때도 있고, 순간적으로 마귀가 틈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여과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혀입니다.
말문을 닫아버리면, 그래도 그게 쏟아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약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8. 자기를 완전한 자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습니다.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언제나 자기를 성숙한 자라고, 완전한 자라고 스스로 여기지 마시고,
스스로를 ‘죄인이다, 나는 잘못이 있다. 나는 부족하다’ ..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는 완전한 성화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최고 경지에 이른 성자도, 그의 삶에, 사소한 허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막 다른 신자/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기는 죄가 없는 사람’처럼, 의기양양 합니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자기가 허물 있는 죄인이라 생각하면,
타인의 허물을 보더라도, 조금 관대하게 됩니다.
회의를 할 때도, 자기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자기 주장/자기 생각에도, 허점과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자는, 예수님밖에 없고,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나도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겸손한 인격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말로써 상처 주면서도
자기는 전혀 그걸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는 늘 옳은 줄로만 생각합니다.
그는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라는 말씀을,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이다/약1:19-25
2001-11-08 08:30:45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일반적으로 얼마나 봉사하느냐, 남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또 우리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봉사하고 좋은 일 하고 사랑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하는 것에 구분 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석가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며 힌두를 믿는 사람은 힌두의 경전을 따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안에서 순종도,봉사도, 사랑도 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참 성도인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본성을 언제 아느냐고 물으면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알 수 있다고들 얘기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야 비로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되고 신앙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 한말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사람 중'헐버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가「대한제국 멸망 사」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 가운데 한국인의 삶의 의식구조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렇게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사회 관습으로는 유교를 따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를 따르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영혼숭배 즉 미신적이 된다"
우리의 관습에는 정말 유교적인 영향이 큽니다. 또한 우리의 깊은 생각 속에는 착한 일을 해야 복받는다는 생각, 선을 쌓자는 것과 윤회설을 어렴풋이 생각합니다. 또 정작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느냐가 바로 내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단군교의 교주였다가 예수를 믿게 된'김해경'씨가 쓴 책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 점쟁이 노릇을 했는데 그 동안 단골손님의 다수가'예수 믿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정말 어려울 때에도 내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섭리하시고 나에게 복 주실 분으로 믿고 행동하는 신앙인들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성경에도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그리고 약 1:5에"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가 이 글을 쓸 때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많은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핍박하고 이방인들의 오해를 샀습니다. 고난을 끊임없이 그들에게 찾아 오는데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할 때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고 쓴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 때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야고보 장로는 고난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시험이고 두 번째는 사탄의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한 방편이요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시험은 잘 참고 견디면, 시련 중에 믿음을 연단시켜 시련 중에 주시는 하나님의 영생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사탄의 유혹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멸망의 구렁텅이입니다. 욕심을 따라 살다가 결국 죄를 짓게 되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열두 제자의 반열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의 욕심이 지나쳐서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고 어리석은 자로 우리에게까지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시험과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인생은 이런 시험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도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성숙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 속에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성도가 병을 앓다가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목사님 저는 이 교회에 3년씩이나 다녔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겨우 두 사람밖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외로웠습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얘기했을 것 같습니까? 둘 중 한가지입니다.
하나는 "목사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 교인이 얼마인데,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위로했는데 정작 두사람 밖에 않오다니요.."하고 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아플 때 두 사람이나 와서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같이 기도해 주었다니 감사합니다. 막상 제가 어려움을 당하고 나니 어려움 당한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겠습니다. 저도 이들처럼 남을 위로하고 도와주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그마한 일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시험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인지 마귀의 유혹인지는 모르지만 그 시험들은 당연히 이겨야 될 것들입니다. 이겨서 성숙한 자가 되고 이겨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심판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왔고 나를 인정했느냐를 가지고 판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찾아갔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희생했으며 봉사하고 말씀위에 섰느냐를 가지고 판단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다면, 주님이 주신 사랑을 알고 감격한다면 마땅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신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사랑하며 높여주면서 사는 참 신앙인이 되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고난 때에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시험에 들지 않고 감격하면서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의 행동이 말하고 그 사람의 행동이 반복되면 그 사람의 습관이 되는 것이고 습관이 반복되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격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 위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믿음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지 말고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반석은 무엇입니까? 반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반대로 모래는 세상의 인기입니다. 인기있는데 있을 짓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히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집이 그렇습니다. 봉사의 집, 충성의 집도 그렇습니다. 말씀 위에 집을 짓지 않으면 오늘과 같이 비가 올 때나 창수가 날 때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고난 때에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히 서는 여러분 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오늘 몇 가지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약 1:19에"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1.듣기는 속히 해야 합니다.
귀를 기울여서 경청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듣는 태도가 좋은 사람이 배우는 것도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잘못된 관심입니다.
어떤 분이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의 설교가 얼마나 국문법 적으로 맞는가를 평가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교회 중직자이신데 국문과 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내가 어떻게 하면 목사님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중에 목사님의 설교를 돕는 일환으로 목사님의 설교가 국문법적으로 잘못된 곳을 다 적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가져다 드렸지만 목사님은 그것을 얼마나 부담을 느끼셨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설교는 주의 종을 통해 들려지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은 나귀의 입을 통해서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너무 틀린 문법을 쓰면 안되겠지만 관심을 그런 곳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은 시간을 재기도 합니다. 무슨 달리기 시합에서 기록을 재듯 말입니다.
미국의'그레이스 커뮤니티교회'에 부임한'존 맥아더'목사님이 첫 설교를 하셨는데 한 시간 반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빙 위원들이 목사님을 모셔놓고"목사님 오늘과 같이 계속 길게 하시렵니까?"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목사님은'아!내가 너무 길게해서 이 교회가 싫어하는구나'라고 생각은 했지만"예!계속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분들은"목사님 계속 그렇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지금도 예배를 두 시간 드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일주일동안 말씀을 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꽤 되시는데 그분이 하루 빠지게 되면 보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시는 분들 한분한분이 귀하시기 때문에 저는 그 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한마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고 여러분들은 그것을 마땅히 기뻐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잘못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둘째, 자기 생각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어느 노처녀가 하나님께 결혼을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하나님 제 배우자는 키도 좀 컸으면 좋겠고 얼굴도 잘 생겼으면 좋겠고 공부도 좀 했으면 좋겠고 성경은 착하고 집안도 부자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 신후 말씀했습니다."이제 기도 다했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게도 꼭 소개시켜 다오"
내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맞추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셋째,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어느 부흥사가 열심히 설교를 했더니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앞에 앉으셔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은혜를 받았나 봅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이 더 감동을 해서 할머니를 찾아 갔습니다."할머니 은혜를 많이 받으셨군요. 왜 그렇게 우셨습니까?"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목사님 설교하시는 모습을 보니 지난달 죽은 염소새끼가 생각이 나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으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계 2: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철저히 들음에서 납니다.그리고 교회는 마땅히 귀가 열려져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는다고 하는 것은 그냥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과 학생들의 시험 중'청음'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어떤 음인지를,'솔'인지'미'인지를, 박자는 어떤 박자이고, 어떤 장조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청음입니다.
보통 사람은 들어도 어떤 소리인지 모르지만 전문가들은 들으면 어떤 소리인지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는 감각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 신령한 계시를 잘 들을 수록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럴수도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2년 10월28일날 예수님의 재림을 얘기했던 이장림씨, 큰 문제를 일으켰던 만민중앙교회 이재록씨도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들어야 하고 주의 종의 설교를 통해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듣는 사람이 바로 살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강철 왕 카네기의 후계자는'쉬이버'라는 사람인데 당시 이 사람이 카네기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졸업 이었고, 그 회사의 청소부가 후계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신념과 신조가 있었습니다.
"나는 보수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와 사장님을 위해 일한다"
오늘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회사와 사장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했을 뿐 아니라 남의 일을 돕는 데에도 성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서까지 되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쉬이버가 카네기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가 늦게까지 일을 했습니다. 아주 늦은 시간이라 모든 직원들이 퇴근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방 문을 열고 나오면서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한 카네기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앞에 쉬이버가 있었던 것입니다. 카네기는 왜 퇴근하지 않았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사장님께서 언제 저를 부르실지 몰라서 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그 결과 그는 엄청난 재산을 관리하는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 하고 그 명령을 기다리는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듣기를 속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2.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해 우리는 혹시 다른 주장을 하진 않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러면 광야 사막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민 14:27-28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 그랬습니까? 우리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겠다고 한 사람을 죽게 하셨고 망할 것이라고 한 사람은 망하게 해 주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핏하면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겠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이셨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어떻게 얘기했습니까?"그 핏 값을 우리에게 돌리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말로 인해 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천년동안이나 나라에서 쫓겨나 방황하고, 히틀러로 인해 그 민족이 600만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비극의 대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말을 하십니까? 우리는 마땅히 그 말씀 앞에 아멘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멘-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이 고백밖에 하나님 앞에 더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기쁨으로 아멘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졌다는 것, 내 인생의 파도속에서 홍해바다를 가르심 같이 하나님께서 열려지게 해 주셔서 평안히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나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고 응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성내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19절에"..성내기를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왜 간음을 했는지에 대해 책망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얘기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선지자여 다른 나라 왕들을 보시오. 그들은 첩들을 수 없이 두고 있는데 나는 이제 한 사람을 두었을 뿐인데 왜 그러시오?"
그러나 다윗은 주의 종의 말씀에 성을 내거나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다윗을 축복하시고 위대한 왕이 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내는 사람이 있습니다.'저 말은 내게 하는 말이구나. 내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그것은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는 시험입니다. 시험 때에 순종할 줄 아는 여러분에게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4.모든 더러운 것과 악을 내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얼마나 더럽고 넘치는 악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버려야 할 것이 꽤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리새인 적인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십일조생활 잘하고, 안식일을 잘 지키고, 남을 돕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이들의 행동과 열심은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내용과 구원의 진리와는 관계 없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 손은 씻었는지, 몇번 씻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빌린 연장을 남을 시켜 돌려줄 정도로 안식일을 지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은 안식일이므로 커피도 마시면 안되고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하고 경건한 신자나 목회자는 가난해야 한다는 등 이러한 생각들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평가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바리새인들에게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행치 아니한다"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에게 드리는 질문은 이러한 것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죄 사함을 받고 의로워 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손을 씻느냐 안 씻느냐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차도 없고 단칸방에 세 들어 살지만 생활비를 받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는 그런 사람만이 훌륭한 성직자라고, 훌륭한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잣대를 가지고 남에게 강요하기 시작하면 그때서부터 문제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인체 하는 것,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즐기면서 신앙생활하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게 버려야 할 것이 있으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만 겸손하게 서는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온유함으로 받아 실천해야 합니다.
즉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울을 들여다 볼 때 어떻게 들여다 보십니까? 자세히 봅니다. 특히 여자분들은 화장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조금만 잘못 그려도 다시 지우고 그립니다. 마찬가지로 거울을 들여다 보듯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틀린 것이 있을까 해서 보고 또 보고 말씀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성실히 지키기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쫓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 못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운명, 팔자를 따지면서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원망, 불평합니다.
두번째는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뜬구름만 잡는 사람입니다.'언젠가는 잘 되겠지..'하면서 구체적인 계획도 노력도 없이 그저 뜬구름만 잡는 삶입니다.
세번째는 부름 받아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내가 지금 여기 있게 된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 앞에 일을 하듯 성실히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앞에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맡겨진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삶이 복된 삶이겠습니까? 마땅히 부름 받아 충성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 사람의 삶은 잘못되어도 누구의 책임입니까? 하나님의 손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저 심고 물주는 일 밖에 한 것이 없고 자라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중국에 첫번째 선교사로 갔던'로버트 모리슨'이 중국으로 가기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가 중국으로 선교를 간다고 하니 어떤 사업가가 말했습니다."당신이 그 거대한 중국을 어떻게 감동시키겠다는 말입니까?"그는 대답했습니다."그것은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대문으로 들어오는 믿음을 막지 마십시오. 그러면 창문으로 미신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을 집에서 내쫓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집에 마귀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히 서가는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위에 집을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봉사의 집, 충성의 집, 감사의 집도 지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들음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잘 들어서 좋은 믿음으로 승리하는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 /약1:19-27
2022-07-16 09:41:46
지난 주 야고보는 우리가 탐심 때문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고보는 우리가 스스로 속지 않도록 두 가지를 조심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는 말을 듣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말을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것과 말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한 진리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19절과 20절을 보십시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는 먼저 우리에게 듣는 것은 속히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듣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아멘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귀가 있지만 잘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말하는 것은 더디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말을 참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억울함을 말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사실 말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말로 우리는 관계를 파괴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또한 야고보는 성내는 것도 더디하라고 합니다. 타락한 죄인들이 가장 흔하고 쉽게 범하는 죄가 화입니다. 화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는 상대에 대한 우리의 불만을 표출하는 도구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화를 냄으로 우리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우리 자신의 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화는 우리의 불만을 표현하는 도구로 우리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자주내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면 할 수록 우리의 화를 더 잘내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화 내기를 더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마음의 긴장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고요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불의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쉽게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화는 전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화를 통해 우리는 죄를 짓게 되고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화는 파괴의 힘이 있기 때문에 화를 통해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의를 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함으로 화를 내는 것을 더디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화를 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 두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이 가득한 마음은 돌과 같이 굳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긴장을 풀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기 위해 우리 속의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오직 말씀만이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더 하나님의 의를 더 잘 이룰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가 들은 말씀을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3절에서 25절을 보십시요.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 씩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보는 이유는 우리 얼굴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 살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얼굴에 얼룩을 발견했는데도 고치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
여기서 거울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읽으면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울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듯이 말씀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우리 내면의 모든 죄를 지적합니다. 이처럼 말씀 앞에서 우리 죄가 들어날 때, 우리는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처럼 거울을 보고 얼굴에 얼룩이 있으면 깨끗이 씻듯이 우리도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죄를 합리화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보니 얼굴에 얼룩이 묻었다고, 거울을 비난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우리 죄를 지적할 때 우리는 솔직하게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말씀을 알고 있으면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설교를 많이 들어도 실제 삶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날 예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 23절을 보십시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신다고 선포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삶의 열매로 그들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을 말씀을 듣기만 했지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24절에서 27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오래 위에 지은 집이나 평소에는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그 차이가 현저히 나타납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씀을 행하고 사나,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 사나 평소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 주님 앞에 설 때 우리가 들었던 말씀들이 우리의 증거가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47절에서 48절을 보십시요.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마지막날 우리가 실천하지 않은 말씀들이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소 실천하고 순종한 말씀이 우리 안에 남아서 우리를 증거할 것입니다. 이처럼 마지막날 우리가 들은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말씀을 실천해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말씀을 듣는 자가 지혜로운 자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지혜로은 자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말씀을 구체적으로 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혀를 재갈 물리라!
26절을 보십시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말씀을 알고 있다고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들은 교만한 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실제로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자기 혀를 재갈 물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비판하면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속이며 위선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에서 35절을 보십시요.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말은 내면의 영이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영을 가지고 겉으로 아무리 선한 말을 해도 악한 것이 나타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알기만 하고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 사람은 속에 악한 것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속에서 악한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급하게 말하지 않도록 우리의 혀를 재갈 물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를 재갈 물리고, 우리는 말씀을 실천함으로 우리의 진정한 경건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경건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따라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경건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여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인 것입니다.
요한 1서 3장 16절에서 18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여기서 요한은 진정한 사랑은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과부와 고아들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경겅은 우리의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구체적으로 돕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경건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우리 혀를 재갈 물립시다. 우리 말로 우리의 경건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들은 말씀을 행함으로 우리의 경건을 나타낼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말씀을 행합시다. 우리 이웃의 필요를 채워줍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법이며 우리의 진정한 경건을 나타내는 방법인 것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혀를 재갈 물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마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말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들은 말씀을 순종함으로 우리 삶과 입으로 경건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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