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장 34절 - 40절 설교 모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4-40/ 주준태 목사
2016-09-29 15:01:16
성경 말씀은 다 짝이 있어서 서로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해석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에 대한 말씀의 짝은 요일 4:11-12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단짝입니다. 하나만 주장하면 온전하지 못합니다. 중세기 교회가 하나님 사랑만 주장하고 인간 사랑을 경시하자 영적 암흑기가 도래했습니다.
반면에 근대에 와서 인간 사랑만 주장하고 하나님 사랑을 도외시하자 인간시장이 되었는가 하면 인간의 동물화현상이 도래했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인본주의, 신본주의가 따로 없습니다. 진짜 신본주의는 인본주의요, 진짜 인본주의가 될려면 신본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통찮은 교회나 가정에 가보세요. 율법이 많습니다. 규칙이 판을 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교회나 가정은 율법사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식구들의 허물을 얼마나 많이 덮어줍니까? 실제로 용서가 한없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가족의 일원 같으면 이 사회, 이 국가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따지고, 허물 캐고, 약점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직 사랑하고 있지 않거나 사랑이 사라졌다는 증거입니다. 돈은 피보다 진하다는 속설까지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 잔뜩 권위를 부리는 사람도 집에 오면 옷을 벗습니다.
가정은 허물을 보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는 쉼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고 죄를 숨기고 살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지만 교회에 오면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합니다. 때로는 형제들에게도 죄를 서로 고합니다.
좋은 교회는 가정과 같습니다. 좋은 가정은 교회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은혜로운 곳이 교회와 가정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곳이 교회요 가정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이 가정에서 새 힘을 얻습니다. 세상에서 긴장과 억압 속에 살던 사람도 교회에 오면 아늑하고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위하고 치유합니다. 새 생명이 새 사랑을 꽃피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의 사랑의 모습에서 참된 사랑의 모습을 찾아봅시다. 엡 5:28에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맨 처음 예수님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은 자기 교회를 사랑하심으로 자기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회 사랑은 자기 사랑의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였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양하십니까?(엡 5:29)
피와 물과 성령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유업을 함께 나누십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간 문제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극치를 우리가 상속하게 됩니다. 무엇이 유감입니까? 조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엡 5:26-27입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주름살들을 말씀의 유약으로 부드럽게 펴십니다. 다름질하여 깔끔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얼마나 친절하고 부지런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엡 5:25). 주님께 주님 자신이 귀합니까? 교회가 귀합니까?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교회, 내 신부, 내 몸이 더 귀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앞에 영광스런 존재입니다. 귀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사 그토록 희생하여 다시 산 우리 자신을 우리가 미워해선 안됩니다. 자신을 상대화시켜 비교해선 안됩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 70억 중에서 1등인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눅 17:2;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메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스스로 평가 절하시키면 주님이 너무나 섭섭해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주님 안에서 귀하게 여기십시오. 믿음 안에서 자신을 존중하십시오. 자신을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귀중히 간수하십시오.
잠잘 때는 잠을 자고 쉴 때는 꼭 쉬십시오. 음식도 제 때 꼭꼭 드십시오. 적당한 운동을 하십시오.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은 우리 몸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신랑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인 우리를 당신의 성찬상에 오늘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을 설명하신 다음 떡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정작 주시기는 떡을 주시지만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기는 바 내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몸을 주는 것입니다. 몸은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제일 귀한 것입니다. 그 몸을 우리가 받을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진실한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름 성찬상에서 몸을 주시면서 사랑의 계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도 몸을 서로 주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몸을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에게 몸을 주어라 그것이 사랑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눅 4:40절에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라고 했는데 주께서 당신의 몸이 채찍에 맞음으로 그들로 나음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이 53:5, 벧전 2:24).
여러분은 여기서 사랑이란 무엇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사랑은 감성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송두리채 다 주는 것입니다. 처자를 위해 자신을 몽땅 다 내어놓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보니까 이 세상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더 행복합니다. 남편보다는 아내가 더 입장이 좋은 것 같습니다.
남자의 일생은 모두 여자를 위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일생이 교회를 위한 것과 똑 같습니다. 무언가 나 자신을 위해 조금 남기면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되 전적으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허비하되 몽땅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계명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위해 이왕 버린 몸 몽땅 버리십시오. 주님이 당신의 몸을 주신 대로 몽땅 사랑을 위해 다 주십시오. 사랑은 줌으로써 끝내야 합니다. 사랑은 또한 완전히 상대방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지 말고 주기만 하십시오. 받으려고 할 때로부터 의심이 생기고 질투가 생기고 앙탈이 생깁니다. 받을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주기만 하십시오. 그런 순수한 사랑, 깨끗한 사랑을 하면 날마다 새로운 사랑의 세계가 열립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남편과 아내가 이 점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할 줄은 모르고 사랑을 요구하기만 합니다.
자기 몸은 줄줄 모르고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랑은 억압이고 긴장이고 다툼밖에 되지 않습니다. 조금 주고 많이 받으려는 욕심이 지배하는 얄팍한 거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탈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안달하고 질투하면 만정이 떨어질 뿐입니다.
사랑은 그저 믿고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절대로 어디 갔다 왔느냐? 고 묻지 마십시오. 돌아온 것 만으로 감사하십시오. 쉬게 하십시오. 사랑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납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늦게 들어오거든 누구를 만났느냐? 고 묻지 마십시오. 무사한 것만으로 감사하십시오. 자유를 주십시오. 사랑은 따지는 것이 아니라 품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개념이 바뀔 때 우리는 새 사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랑의 생명을 호흡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매일매일 신랑과 신부 같아야 합니다. 언제나 그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능력이요 은혜요 복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몸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몸으로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어 주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몸은 언제나 새 몸입니다. 영생하는 몸입니다. 한없이 새롭게 주시는 몸입니다. 날마다 우리를 씻기시는 손길입니다. 우리의 시름을 없애주시는 손길입니다. 우리의 주름을 펴시는 손길입니다.
손뿐입니까? 그 입은 날이면 날마다 인애의 법을 말씀해 주시는 입술입니다. 용서와 궁휼을 말씀해 주는 입술입니다.
그 눈은 눈동자 같이 지켜보시고 감찰하시는 사랑의 눈길입니다. 그 분의 발은 어떻습니까? 늘 찾아오시며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발길입니다.
오늘 성찬상에서 주님은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며, 너희도 서로 몸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몸 버려 사신 나 자신을 귀하게 여깁시다. 그리고 나만큼 내 이웃을 존중합시다. 귀하게 여깁시다. 내 몸이 귀한 것처럼 이웃의 몸을 귀하게 여깁시다.
몸을 주되 한계 없이 줍시다. 끝없이 줍시다. 남김없이 줍시다. 아낌없이 줍시다. 절대로 의심하지 맙시다. 지배하려고 맙시다.
믿어 주고 섬깁시다. 받으려고 하지 말고 주려고만 합시다. 그럴 때 날마다 새로운 사랑의 밀월이 계속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렇게 믿읍시다. 할렐루야!
◀ 하나님처럼 사랑하기 /마22:39/ 옥한흠 목사
2014-11-11 16:16:22
성경을 읽으시는 여러분의 표정이 밝지를 않습니다. 아마 마음에 굉장히 부담스럽게 이 말씀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지 30년 가까이 되는데, 처음에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고 가르칠 때에는 구원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배우기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공식화시켜서 전도하고 또 가르치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성경을 더 깊이 보게 되고, 과거에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도전 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구원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자꾸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단순히 '믿고 천국 간다.'는 공식으로 설명이 다 되지 않는 엄청난 차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좀더 학문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또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서 실현되는 어떤 현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점점 변해가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고 해석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꾸 깨닫자 한편으로는 굉장한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대단하게 보시는구나.' 저를 향해서 자기처럼 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야, 내가 그렇게 대단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보면 그것이 어떤 때는 기쁨도 되고 하나님 앞에 감사도 됩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기대치에는 너무나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꾸 느끼면서 얼마나 그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 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자기처럼 되라고 명료하게 말씀하시는 사례가 성경에 또 있습니까? 이것만큼 명료하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는 본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보면 바로 알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그가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가를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부터 완벽주의를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까?
막연히 악인을 사랑하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악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란의 후세인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악인은 내게 직접 피해를 입힌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악인 중에도 네 원수'라고 합니다. '너를 핍박하는 자'라고 합니다. 내가 직접 피해를 보았습니다. 엄청난 원한이 지금 내 가슴 속에 쌓여 있습니다. 그런 대상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요구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를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처럼 되야 한다. 세상 사람 보기에는 조그마한 집에서 살고 네 이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무명의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너를 엄청나게 생각한다. 너는 내 자녀가 아니냐? 나를 닮아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한다면 너도 사랑해야 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는 누구나 다 부담을 느끼기 마련인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구약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바꿨습니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고, '그렇구나. 그래야지.' 하고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깎아 내려서 가르쳤단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 가르친 내용을 예수님이 오늘 43절에 인용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소리를 너희들이 하고 있지 않느냐?'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보면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말 하나를 빼 버리고 가르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네 몸과 같이'를 빼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네 이웃을 사랑해라.'만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하면 쉽죠? 그리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빼 버리고 대신에 무엇이라고 가르쳤습니까? '네 원수는 미워해도 괜찮다.' 이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말씀을 각색해 놓았습니까?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각색하는 것, 더하고 빼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취지와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받아야 됩니다. 가감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넓고 너무 높고 너무 큽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인과 악인을 구태여 구분하지 않습니다. 선인도 사랑하고 악인도 사랑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참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45절 중간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우리 생각에는 아침에 참 따뜻한 태양이 떠오를 때에 저 이북에 있는 김정일 집은 비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거기도 따뜻하게 햇살이 비쳐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녀의 가정에도 따뜻한 햇살을 비쳐 줍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폭정을 하는 나라에는 아예 몇 년이 가도 비가 안 왔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때가 되면 거기에도 비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들이 사는 한국에도 비를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악인과 선인을 구태여 구분하지를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46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을 받을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내가 낳은 자식, 내 부모, 내 형제는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끼리끼리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악명 높은 세리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도 다 하는 사랑입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우리보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구나 다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를 믿어도 하는 것이고 안 믿어도 하는 것이고, 도둑놈도 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존경 받는 사람도 하는 것이고, 얼굴이 검은 사람도 하는 사랑이고 하얀 사람도 하는 사랑이 아닌가? 그런 사랑이 아니다. 내가 하는 사랑을 너희들이 해라.'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무조건 사랑해주신 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요, 아가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요, 아가페는 자기를 희생하고 행동에 옮기는 사랑이요, 아가페는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는 사랑이요, 아가페는 열번 백번 똑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그 십자가 앞에 나가기만 하면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 말입니다.
원수 까지도 사랑한 사랑 말입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이 흘러내리는 그 사랑을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 앞으로 나가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비는 다 자식이 자기를 닮기를 원합니다. 좋은 점은 배우기를 원합니다. 부모 치고 자식이 자기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지 않고 마음대로 되기를 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부모의 좋은 점을 본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가문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루에 열번 백번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나처럼 해야 된다. 내가 아가페의 사랑을 너희에게 주었다. 너희도 나를 닮으려면 나와 같이 해야 된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성경을 보십시오. 45절입니다. '하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자, 보십시오. 여기서 '아들이 되리니' 하는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되리니' '아버지를 닮는 자가 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처럼 됩니다.
아버지처럼 된다는 이 말을 또 한번 바꾸어서 48절에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합니다. 이 온전하라는 말이 또 따라나옵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 하나님의 아들처럼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온전한 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온전하다는 이 말은 텔레이오스라고 하는 헬라 말인데 이 말의 명사형이 텔로스입니다. 텔로스는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목표, 목적, 끝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텔로스라는 말을 형용사로 바꾸면 목적에 일치하는 것, 목표에 이른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처럼 온전하라고 하신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에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목적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어떤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까?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본래 의도는 자기와 똑같이 닮은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런데 그 몹쓸 마귀가 와서 유혹해 가지고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갖추어 주시려고 하던 형상을 거의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인간의 모습은 마귀의 형상이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교육을 많이 시켜도 하나님의 형상보다 마귀의 형상을 더 닮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부유하고 명예를 누려도 가만히 보면 마귀의 형상들입니다.
거짓말하는 꼴을 보십시오. 마귀의 형상입니다. 하고 다니는 꼴을 보십시오. 자기 밖에 모르는 꼴을 보십시오. 모두가 마귀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정 없이 무너지고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너무 안타까우셔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시면서 '너희들이 나를 믿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거룩한 백성,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온전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이 세상에 살 때부터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원수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도 우리를 핍박하는 자는 없습니다.
저는 신학교 때 약간 잘못 배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것,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그리고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핑계하기 좋지 않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데. 사람은 죄 짓는 것이 전문이고 하나님은 용서해 주는 것이 전문 아닌가?
그러므로 날마다 그저 잘못하면 회개하고 용서 받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태연하게 생각하고 천당 들어갈 꿈만 꾸고 살았단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인줄 알았단 말입니다. 또 그런 식으로 가르쳤단 말입니다. 그랬으니 오늘날 한국 교회의 꼴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닮아가는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놀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했습니까?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가 굶주리는 것을 보면 먹을 것 갖다 줘야 하고 그가 목마른 것을 보면 마실 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원수 갚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동하기를 기다리면 안됩니다. 명령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움직여야 됩니다. 원수를 자연스럽게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그러셨으니 나도 실천해야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하시는 것을 흉내라도 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원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 있다는 것이 너무 분명한대도 참 실제로는 까마득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내일 모레 일본 컨벤션에 참석합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매년 있었던 모임이기 때문에 저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동경 옆에 있는 하꼬네라고 유명한 관광지에 호텔을 잡고 많이 모이면 오백 명 이상, 적게 모이면 삼백 명 정도 모이는 집회인데 초교파 적으로 모이는 집회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랑의교회가 일본 교회 제자훈련을 위해서 십여 년 투자하면서 거둔 하나의 열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집회를 갈 때마다 마음에 느끼는 것은 사랑이 안 간다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 하면 아직도 감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십여 년 동안 이 나라가 일본 식민지로서 착취를 당할 때 얼마나 우리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까?
지금도 그 잔재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정신, 정치, 경제에 미친 영향, 심지어 우리나라 문화에 끼친 영향들을 보면 아직도 그 당시의 그 무서운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의 근성이 아직도 식민지 근성입니다. 자주 독립을 성취한 백성답지 못합니다. 아직도 왜 교통 법규를 어기면서 그것을 잘난 체 합니까? 그것이 식민지 근성입니다. 왜 길을 가면서 침을 함부로 뱉고 담배 꽁초를 함부로 내버리면서도 부끄러운지 모릅니까? 식민지 근성입니다. 벌써 이 나라가 독립한지 일 세대가 지나고 이 세대가 지나가는 마당인데도 아직도 식민지 근성이 이 땅에서 씻겨 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애국 지사를 무섭게 고문하고 죽인 사례가 한두 건입니까? 일본 천황이 신이 아니라고 반대하다가 소리 없이 죽은 성직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고통한 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나라는 학생들에게 자기들의 야만 행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을 6백만이나 가스실에서 죽인 그 마귀와 같은 독일 사람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전 세계 앞에 용서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판국에 일본은 아직도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독종들인지 모릅니다. 적어도 역사는 진실하게 말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대도 그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저 백성들에게 사랑이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컨벤션에 갈 때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왜 사랑하지 못할까?' 이런 말씀을 보면서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아직도 저는 일본말을 절대로 안 배웁니다.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외에는 안 배웁니다. 그것은 예의상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한 십년 정도 배웠으면 꽤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배웁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에 사랑이 안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변재창 선교사님은 일본에서 이십년 가까이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을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때 이런 기도를 했다죠? "하나님, 좋습니다.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꼭 한가지만 들어 주십시오. 어디를 보내도 좋습니다.
단 일본만 제외해 주십시오. 그랬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끌어다가 일본에다 집어 넣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일본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일본을 위해서 저는 날마다 기도합니다. 특별히 일본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잘 알면서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모순된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을 참 신중하게 받아 들이고 순종하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정말 하나님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한 사람을 한 사람만 꼽아 보라고 한다면 저는 두말 하지 않고 우리 나라의 손양원 목사님을 꼽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다 뒤져봐도, 세계 어디를 가도 이처럼 위대하고 감동적인 원수 사랑의 사례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야 말로 한국 교회의 영광이요 자랑이요 면류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입만 가지고 원수 사랑을 아무리 떠들어대도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듣기 전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그 손양원 목사님의 딸인 손동희 권사님이 쓰신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한번 꼭 사서 읽어 보십시오. 이 손동희 권사님은 당시 중학생이었습니다. 중학생 때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그 당시에 그 상황을 정확하게 목격한 사람 치고 생존자는 아마 이 사람 밖에 없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어요.
손양원 목사님은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서른 일곱 살 때에 전라도 여수에 있는 나병 환자들의 교회인 여수 애향원 교회를 담임하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들을 위한 사역입니다. 거기서 한 1년 사역하시는데 일제가 갑자기 신사참배를 강조했습니다. 천황을 신이라고 인정하고 신사 앞에서 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양심상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우상 앞에서 절합니까?
그것을 거부하다가 결국은 끌려 들어가서 해방이 되던 그 해까지 5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리고는 출옥한 다음에 다시 여수 애양원으로 돌아와서 그 나병 환자들을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섬기면서 목회를 했는데 불과 3년이 가기 전에 저 유명한 여수 반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나서 하루 아침에 많은 중학교 고등학교 그 다음에 청년들이 공산당원으로 돌변해 버린 것입니다.
고등학교 학생 하나가 평소에 예수 믿는다고 아니꼽게 생각하던 차제에 손양원 목사님의 큰 아들 동인이와 중학교 다니는 동신이를 여수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끌고 갔습니다. 끌고 가서 구타를 하고 고문을 하고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놓아 주지만 예수 믿겠다고 하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손 목사님 두 아들이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자 끌고 가서 총살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둘이 순교를 했습니다. 천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 마당에서 두 아들의 장례식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때 손양원 목사님이 나와서 저 유명한 열 가지 감사를 이야기했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아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그가 한 열가지 감사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합니다.
두번째로 많은 성도 가운데 이런 귀한 보배 같은 아들들을 나에게 맡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삼남삼녀 중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이 순교를 했으니 감사합니다.
예수 믿다가 병들어 죽는 것도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순교 당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미국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큰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일으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두 아들이 순교함으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겨날 것을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믿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이런 과분한 큰 복을 내려주신 것은 부모님이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알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이렇게 열 가지 감사를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아들을 장례하는 그 시간에 이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을 삼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장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이 손동희라고 하는 자기 딸을 불렀습니다. 불러 앉혀 놓고 목사님은 자기 심정을 이제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리 원수지만 내가 그 원수를 꼭 내 양아들로 삼아야 되겠다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일제 시대 5년간이나 가족을 고생 시켜가면서 감옥 생활을 견딘 것도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제 1,2 계명을 어기지 않으려고 한 일이었는데 이제 원수를 놓고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된다고 딸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희야 제1,2 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 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어느 것은 순종하면서 어느 것은 순종치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 있겠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순종치 않으면 과거 5년 동안 감옥 생활 한 것이 모두 헛수고요, 너희들을 고생 시킨 것도 헛고생시킨 꼴이 되고 만다. 나는 여기에서 넘어질 수가 없어. 두 오빠는 천국 갔으나 그들을 죽인 자는 지옥 갈 것이 분명한데 전도하는 목사로서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다니는 딸이 이해하겠습니까? 아버지 옷을 잡고 반 미친 것처럼 원수는 갚아야 된다고, 왜 아버지는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별난 예수를 믿느냐고 막 통곡하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 딸을 또 달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어. 용서만 가지고는 안돼. 그 학생을 살려 주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내 아들로 삼아야 해. 너 이거 꼭 기억해야 해. 아비의 뜻을 따라주어."
이렇게 눈물로 간절히 딸을 설득하자 나중에는 딸이 그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약속하고는 범인이 지금 처형당할 직전에 놓여 있는 그 순간에 그 형장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딸이 달려가서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간절하게 눈물로 호소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지휘관이 감동을 받아서 그 범인을 형장에서 빼 내 가지고 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손 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 목사님이 집회 다닐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 아들을 잃고 나서 양아들을 삼고 집회를 다니는데 2년이 안 되어서 6.25가 터졌지 않습니까? 6.25가 터져서 공산당이 전라도까지 휩쓸고 내려갔습니다. 손양원 목사가 잡혔습니다.
목사라니까 여지없습니다. 끌어다가 과수원에 가서 총살을 시켰는데 그 전날 밤에 그런 말을 옆에 있는 사람한테 했다고 합니다. 자기 교회 집사도 끌려 왔는데 그 사람은 나중에 살았습니다.
"내가 지난 밤에 보니 내 아들 동인, 동신이가 내 눈에 나타났어. 아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려나 보다."
그러더니 그 다음날 순교를 했습니다. 양아들이 된 그 사람은 나중에 새사람이 되었지만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아파트 수위로 일하다가 결국은 세상을 떠났는데 떠나기 직전에 이 손동희 권사, 손 목사님의 딸을 찾아와 가지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동희야, 나는 곧 하나님 나라로 간다. 내가 죽어서 천당에 가면 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련다." 이 말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위대한 원수 사랑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돼. 나는 하나님처럼 되어야 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이 원수로 사랑하라고 했어' 하는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어 인간의 어떤 감정을 극복하고 이런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마음 속으로 '아니야. 그래도 이상일 뿐이야. 독특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나 같은 사람은 안돼. 내가 낳은 자식도 비위 상하면 일년 삼백육십오일 미워하고 사는 판국인데 원수 사랑이 어디 있냐?' 이렇게 계속 생각하고 그런 음성이 들린다면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사탄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자가 되기를 원하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돼.'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가?' 자꾸 이렇게 말하는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크게 잘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를 닮은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기본적인 작업은 다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자마자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씨, 생명의 씨를 내 안에 심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씨가 지금 우리 안에 자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씨앗은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씨앗이 아닙니다. 생명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자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말씀을 듣는 이 시간도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이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씨앗이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는 누구를 닮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를 닮은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옛사람은 못박게 하시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살고 있다면 하나님 자녀처럼 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이 내 안에 살고 계시기에 나도 예수님처럼 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정과 욕심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자녀요 온전한 자가 되는 거룩한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알아도 그것을 신중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여러분, 이 말씀이 매우 이상적인 말씀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나를 사랑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내 형제라서 사랑한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런 본능적이고 끼리끼리의 사랑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저 그 수준에서만 사랑한다면 한번 물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증거가 어디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까? 세리도 다 하는 사랑, 도둑놈도 다 하는 사랑,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도 다 하는 사랑을 하면서 그 이상 우리가 발전하지 못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무엇으로 증명해야 합니까? 성경 찬송 들고 다니는 것으로 증명합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본능적인 사랑, 끼리끼리의 사랑을 뛰어넘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도대체 예수 안 믿는 사람하고 우리하고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러므로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돼. 나는 예수처럼 예수님처럼 닮아가야 돼.'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날마다 '주여, 도와주세요.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 주세요. 주님이 은혜 주시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여, 두 손 들고 주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오니 나에게 하나님처럼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설혹 원수가 생겨도 그 원수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반드시 도와 주십니다. 손양원 목사님만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우리를 통해서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이 세상, 정말 자기 하나 밖에 모르는 마귀의 화신들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녹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땅을 녹일 수 있습니다. 병든 이 사회를 고칠 수 있습니다. 내 가정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작은 예수들이 살고 있는 가정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으로 양이 차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오늘도 빚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하나님은 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이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부터 이 목적을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빚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꼭 명심하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한시도 잊지 맙시다.
비록 가슴 속에 증오가 일어나고 감정이 복받치는 순간이 있다 할 지라도 '아니야, 아니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이래서는 안돼.' 하고 말하면서 자기를 추스르고 성령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나중에 놀랍게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마음에 원수는 고사하고 가족 식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여전히 마음에 원한을 갖고 있는 그런 나쁜 감정이 가슴에 있다면 성령께서 그 모든 감정을 깨끗이 눈 녹듯이 녹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밖을 보십시오. 날씨가 조금 더워지니까 눈이 다 녹아 내리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시면 내 안에 있는 모든 잘못된 감정들이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는 원수를 보아도 원수처럼 보이지 아니할 만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반드시 주십니다. 그런 은혜를 받고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40
2006-10-11 15:55:51
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셨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 동무와 타냐와의 대화 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육신의 어미는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자식이 아버지가 싫어 손을 놓아버릴지언정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식일지라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더 나아가 에베소서 1:3-5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창세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고,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
을 받을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내 몸” 즉 내 신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나”는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아무리 지체가 세상에서 높아도, 아무리 건강해도 알맹이 없는 가라지처럼 불에 태워 없어질 허무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어도, 배운 것이 일천해도, 세상에서 겨자씨같이 하찮아 보여도,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지극히 존귀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해서, 쥐꼬리만한 권력 나부랭이 하나도 없다면서, 가방 끈이 짧다고 자존심 상하거나 열등감을 가지거나 원망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자들의 부와 지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01:10,11)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전02: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신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존귀한 존재로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사랑을 스바냐 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습3:14-20)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내가 ...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말씀입니까?
스바냐 3장17절 말씀 가운데 “너”라는 단어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동희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동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이동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이동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이동희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썩어질 이 땅의 권세자나 재벌이나 유명 인사가 아닙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He will renew you in his love)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날마다 젊어지고, 날마다 첫사랑처럼 싱싱하고, 날마다 첫 사랑처럼 기쁘고 즐거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그 알량한 돈 몇 푼 때문에, 그 무엇 때문에, 짜증내며 원망 불평하며 기가 죽고 풀이 죽어 지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고 계심을 믿으
시기 바랍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만큼,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만큼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기 존재가치를 상실해 버립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을 때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예수 전도단에서 활동하는 이민섭이란 청년이 예수 믿지 않는 아버지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귀한 존재가 되로록 하기 위해 쓴 곡이 바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복음성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영원한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진정한 VIP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는 자존감과 긍지를 가지시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초막인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면 천국입니다. 몸이 아프시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풍부에도 궁핍에도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삶이 되게 합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옥도 천국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나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맞바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소중한 가치있는 존재이다.”라는 긍지와 자존감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 받은 바 사랑이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기독교인 아닙니다.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어느 목사님 말대로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아니고, 피아노가 집에 있다고 해서 피아니스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집에 바이올린이 있다고 해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든, 바이올린이 있든 있는 그 악기를 가지고 목적한 음악을 소리를 통해 나타낼 수 있어야 피아니스 트, 바이올리니스트 등 음악가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집에 돈을 많이 쌓아놓았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과 믿음으로 베풀고 섬길 때 영원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부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극히 가난한 자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생활을 통해 나타나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하는 생활, 다시 말해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처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3장 16절 이하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6-18)
오늘 본문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는 말씀의 뜻은 둘째도 첫째 계명과 같이 큰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신 것입니다.
유명한 아시시의 성자인 프란시스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겪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 문둥병자를 본순간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한편은 그에게 가서 기도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다른 한편은 문둥병자로부터 병이 전염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두려운 마음이 앞서 문둥병자를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부담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는 마음에 생긴 부담 때문에 그 자리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문둥병자를 그냥 지나쳤는데 그것이 잘못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왜 그를 그냥 지나쳤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그가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그 병이 전염될까봐 그랬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그 더러운 문둥병자보다 나으? 너는 이전에 그 문둥병자보다 더 더렵혀진 죄인이었다. 그런데 난 그런 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단다.” 그 순간 그는 문둥병자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었던 자신에게 주님이 찾아와 사랑으로 받아주셨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문둥병자에게 돌아가 그를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이때부터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알베르나의 산록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끊임없는 사랑의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 “나의 사랑, 나의 전부이신 예수여”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전 인격과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참된 성도의 모습,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거나 미워하는 자는 거짓된 사랑입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와 2시간 이상씩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어느 여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기도하던 중 신유의 은사 등 여러 은사를 받아 병환자를 위해 기도하여 병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모든 문제들을 기도를 통해 해결 받았는데, 유독 한 가지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이 예수를 잘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운전사였는데 믿음이 없었고, 또 자주 도박을 해서 돈을 날리기 일쑤였습니다. 자녀들도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억지로 몇 번 출석 할 정도이고 제멋대로였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는 자주 응답되지만 이상하게 자기 가정문제는 영 풀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중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는데 에베소서 5장 2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 말씀이 가슴에 뜨겁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집사님은 믿음이 워낙 좋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다보니 무조건 ‘믿습니다.’ 하고 몰아붙이는 식이었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을 마치 귀신을 좇아내듯이 몰아붙여 기를 못 펴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일을 ‘믿습니다.’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사님의 이러한 신앙태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금식기도중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은 자신의 믿음과 기도로 제압하려 하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집사님이 방법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무조건 믿음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술 먹고 들어와 소리를 질러도 죽은 듯이 주님을 섬기듯 열심히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는데 남편이 술도 끊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염려했던 자녀들의 진학문제도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집사님에게 사랑이 없는 믿음과 기도보다 사랑으로 섬기는 기도생활을 더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으로 섬겨야 할 우리의 <이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 예수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15:12-1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이웃의 구원을 위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이동희 목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마22:37-40
2006-10-10 14:31:33
지난 주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설교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 없고 많이 배운 것 없고 그다지 지체가 높지 못하고, 약하고 병들어 겨자씨 같이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여전히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 삼으시고 그 이름만 불러도 즐거워하시고 기뻐 노래하신다 했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낳은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지난 주 설교에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객과 고아와 과부”로 불리우는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에게 지대하신 관심과 사랑을 보이시고 우리에게 그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 23장 22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레 23:22)
또 신명기 24장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24:19)
이상 두 군데 말씀을 오늘날 우리 생활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한 달 수입이 100만원이라면, 그래서 십일조 10만원, 감사헌금, 주일헌금 등으로 10만원, 생활비로 60만원, 교육비로 20만원 등이 지출된다면, 그렇게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쓰지 말고 어려운 이웃에게 언제든지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생활비를 줄이든 교육비를 줄이든지 해서 10만원 정도를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이렇게 삶으로 여러분의 하는 범사에 하나님의 주시는 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객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으로 내세우거나 의지할만한 것이 없는, 자기 권리마저 주장할 힘도 없는 약자들을 말합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이유없이 학대당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하여 약자들을 보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베풀 것을 율법을 통해 명령하시는 이유를 신명기 24장 18절에서 분명히 밝히시고 있습니다.
(신24:18)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너희가 애굽에서 압제당하는 생활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
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경제적으로 압제당하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너희도 은혜와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생활로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1917년 레닌이 러시아를 장악한 이후 오늘날까지 약 1세기동안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살륙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집대성한 <공산주의 흑서>라는 책이 있습니다.(프랑스 역사학자 11명이 공동 집필) 이 <흑서>는 레닌 이후 오늘까지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때문에 희생된 사람을 1억명 가량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레닌에서 김정일까지> 이어지고 있는 범죄, 공포, 압제의 기록입니다. 이 책의 제4부 2장 북한편은 53년 이후 북한 땅에서 기근과 병 때문에 숨진 사람을 50만명으로 추산했습니다. 북한편을 집필한 리굴로 국장은 “오늘날 2천3백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북한 땅에서 지난 50년 동안 공산 체제로 인해 희생된 사람(기근으로 인한 아사자 제외)은 대략 3백만명 이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노동당 숙청으로 숨진 사람이 10만,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이 1백 50만, 공산주의자들이 의도하고 조직하고 촉발한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이 1백30만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 “정규적이고 살상적인 군 작전”으로 숨지는 사람을 계속 보태야 한다고 리굴로 국장은 덧붙였습니다. 그는 근년에 빚어진 북한의 식량난에 주목, “양식 부족으로 인해 직,간접으로 희생된 사람은 수십만에 달할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말살되어가고 있음에도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북한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냐?”며 생트집을 잡고, 국보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등으로 이어지는 친북, 반미 세력들은 북한 “사또 비위 맞추려 눈치만 살살 보는 꼬락서니”에 우리나라는 추운 겨울을 맞고 있습니다. 우리네 동족들이 주리를 틀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훤히 알고 있음에도 “인권”의 “인”자만 입 밖에 내면 반민족, 수구 꼴통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거나, 경제, 정치적으로 압제당하는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는 행위에 대해 죄 없다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그냥 지나쳤거든 뒤 쫒아가 사랑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어려운 북한 동포들과 이웃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2. 그러면 어려운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까? 먼저 로마서 12장 15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한 마디로 어려운 이웃들과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40절 이하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요4:40-42)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민족의 정체성을 더럽힌 혼혈족이라며 개처럼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죄악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 집으로 초청하자 기꺼이 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기절초풍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마땅해 하며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 집에서 가셔서 이틀 밤낮을 함께 지내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일로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므로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높은 기질, 아주 고상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특히 타인의 성공을 우리 자신의 것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아가 죽었을 때만 가능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넓은 사랑의 마음으로 채워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미국에 존스 홉킨스 대학이 있습니다. 이 유명한 대학의 한 젊은 교수가 대학생들을 통해서 연구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취약한 뉴욕의 빈민굴에 아주 열악한 환경에 사는 청소년 200명을 조사했습니다. 대부분이 아편을 하고 있었습니다. 폭력배가 난무하는 곳이며 창녀 소굴입니다. 거짓과 아편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 여기서 자라고 있는 200명의 청소년 중 90%이상이 훗날 필시 범죄자가 될 것이고 이중 대다수가 형무소를 제집처럼 드나들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25년이 흐른 후에 대학원생을 보내어 200명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180명을 찾아내어 만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4명만이 감옥에 간 일이 있고 나머지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예상이 너무나 빗나갔습니다. 교수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알아보았더니 저들 모두가 한 여자 전도사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십 년 전에 여전도사님은 스스로 빈민굴에 찾아와서 지금까지 그들과 동거동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저는 아무 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내 아들딸처럼 사랑하며 함께 살아 간 것밖에 없습니다.” 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전형적으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버려졌던 사람들이 이렇게 예상을 깨고 대부분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습니다. 겨자씨 같이 하찮은 존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구원했던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 전서 12장 26절 이하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6-27)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창세기2장 23절 말씀으로 번역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네 이웃의 뼈가 아프면, 네 뼈가 아픈 것처럼 함께 아파하고, 네 이웃의 살이 아프면 네 살이 아픈 것처럼 함께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유도 모른 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에 되어 길바닥에 나앉게 되고 게다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고름을 긁어내는 너무나 처참한 고통과 환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욥의 아내는 욥과 혼인 서약할 때,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젊을 때나 늙을 때나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서약합니까?” “아멘” 해놓고 욥이 그 지경이 되고 나니까 “그래 이 지경이 되어도 교회에 나간다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며 저주를 퍼붓고 가출해버렸습니다. 그래도 욥은 그런 마누라를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그리고 되어지는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께서 새로 주신 아내를 얻게 되고, 모든 일에 갑절로 축복을 받았고, 고통을 함께 하지 아니한 욥의 본처는 그 축복에 함께 하지 못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구명정이나 던져주는 분이 아닙니다. 직접 그 물속에 뛰어들어 목숨 걸고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함께 하고, 기뻐하는 사람으로 더불어 함께 기뻐하시는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모두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으로 한 몸, 한 지체가 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어려운 이웃을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가운데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어려운 이웃이 여러분에게 껄끄럽거나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자기 몸처럼 사랑해만 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 이하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 같은 이웃일지라도 오히려 그를 사랑으로 섬기고 축복하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리챠드 범브란트 목사가 수십 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공산 치하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감옥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던져졌는데, 어두운 감방 속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챘습니다. 그는 바로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기독교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던 공산당 비밀경찰 대위였습니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 궁금해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얼마 전, 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보내라 했습니다. 주눅 들고 수줍어하는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 있었습니다. 소년은 곧 입을 열었습니다. “대위님,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 당신이지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에요. 나는 엄마의 생일 때마다 예쁜 꽃다발을 사서 선물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부모님이 어디론가 체포되어 가셨기 때문에 이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내게 가르쳐 주셨지요. 원수도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말이에요. 내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대신 이 꽃으로 대위님 아기들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가지고 왔어요. 이 꽃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겠어요?” 대위는 말없이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을 끌어안고 눈물로 사과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여 이렇게 끌려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수일지라도 자신의 몸처럼, 자신의 가족처럼 사랑하라는 이유는 바로 그 원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항상 함께 하시어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여러분의 하시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동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