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장 1절 - 13절 설교 모음
차별은 죄가 아닌가? /약2:1-13; 엡4:25/ 조정의목사
2020-09-17 07:48:42
오늘은 지난 6월 29일 정의당이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관점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기 원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가 땅에 세워진 정부의 정책에 일일이 관심을 두고 관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번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어떤 때보다도 기독교 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회 밖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차별을 찬성하고 조장하는 ‘혐오집단’이라는 비방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참된 교회는 오히려 사랑으로 차별을 적극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말도 교회 안팎에서 나온다. 무엇이 정말 옳은 것일까?
먼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23개의 차별금지 사유(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고용 형태, 병력 또는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로 4가지 차별 영역인 고용, 재화&용역, 교육, 행정서비스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이 발생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다.
추가로 23개 차별금지 사유로 육체적 정신적 괴롭힘을 가하거나 4가지 차별 영역에서의 성희롱도 차별에 해당하며, 간접차별이 발생할 때 역시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보호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은 차별에 관하여 뭐라고 말할까?
1. 모든 종류의 차별은 죄다(약 2:1-13)
먼저 성경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죄라고 규정한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ἔχετε, 현재형, 명령형).
야고보는 당시 초대교회가 모였던 회당에서 일어날법한 사례를 들어 묻는다.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는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그게 곧 차별이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냐고 강력하게 꾸짖는다(2-4절). 이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다. 신분이 높으면 귀한 사람, 낮으면 천한 사람이라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여 사람을 차별 대우한 것이다.
그러면 왜 차별이 죄인가? 야고보는 8절에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너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최고의 법을 주셨다(롬 13:9). 자기 몸을 차별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웃을 다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절대로 차별하여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신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어서 9절에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차별의 문제를 더욱 밝혀준다.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12절에 나오는 “자유의 율법”을 의미한다. 자유의 율법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법을 말한다(약 1:25; 롬 8:2).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그 크기가 무엇인지에 따라 우리를 차별하여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롬 3:22).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자 중에는 헬라인, 유대인, 할례파, 무할례파, 야만인, 스구디아인, 종, 자유인의 차별이 없다(골 3:11).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모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갈 3:28).
그런 차별 없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은 자들이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건 죄다. 우리가 차별할 때 그리스도의 법이 “차별 없이 그리스도께 긍휼을 입은 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라”고 정죄한다. 12절 말씀을 보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그러므로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교회는 마땅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한다(1절).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다. 긍휼을 입은 자처럼 긍휼을 베풀라.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선정한 23개의 차별금지 사유를 야고보가 제시한 사례에 넣어보자. 가장 이슈가 되는 성적지향, 성 정체성을 들어 예를 바꿔보자.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가 교회에 왔을 때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한가? 교회 밖으로 내쫓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선정한 4개의 차별 영역을 생각해보자. 당신은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라는 이유로 취직이 안 되고 물건을 구매하거나 팔 수 없으며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행정서비스를 받을 수 없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어떤 이유로든 차별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 교회 방문한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차별금지 사유를 가지고 있든지 그 이유로 차별하여 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도(차별 없이)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처럼(벧후 3:9)
참된 교회는 아무도(차별 없이)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출신 민족, 피부색, 나이, 언어, 용모, 신체 조건, 종교, 사상, 정치적 성향, 심지어 성적 지향과 성적 정체성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처럼 그 은혜를 입은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기 원한다.
2. 진리를 말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다(엡 4:25)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신 명령 중 하나는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이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 곧 진리를 말하는 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행위 중 하나다(거짓 증언하지 말라, 마 19:18).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신적 사랑인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동시에 진리가 충만하셨다(요 1:14).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다(벧전 2:22).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안에서도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고 명령하고(엡 4:15, 우리말성경), 교회 밖에서도 “거짓을 버리고 ‘각자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실을 말하’라고 명령한다(엡 4:25, 우리말성경).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진리를 사랑 가운데 말해야 한다. 이웃 사랑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차별 없는 사랑이 거짓을 눈감아주는 사랑 그냥 덮어주는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예수님.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거짓의 크고 작음, 죄의 크고 작음을 차별하지 않고 용납하는 사랑이지만, 그 거짓과 죄에서 해방해주는 사랑이다. 환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주는 의사는 사랑 많은 의사다. 하지만 병든 것을 고쳐주지 않는 의사가 사랑 있는 의사인가?(마 9:12-13).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으로 용납하셨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8:11). 죄인과 세리를 멀리 두지 않으시고 함께 식사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셨다(눅 19:9-10). 종교지도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말도 섞지 않거나 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기꺼이 대화 나누셨지만, 항상 그들을 진리로 강력하게 꾸짖으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출신 민족, 국가, 종교, 인종, 신분 등에 차별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 모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말했다(골 3:9-11). 차별은 죄라고 지적한 야고보 역시 바로 이어지는 본문에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는다(약 2:14). 무슨 말인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는 은혜와 긍휼을 맛보지만, 그 은혜를 맛본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이 말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다(요일 1:6). 차별은 죄다. 하지만 진리를 말하는 건 차별이 아니다. 진리를 말하는 건 사랑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적용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23가지 차별금지 사유를 가진 이들이 4가지 차별 영역에서 차별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교회에 온다면 우리는 차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감추는 것이 아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해야 한다.
교회에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가 방문한다면 홀대하거나 면전에 대고 곧바로 ‘동성애는 더러운 죄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차별 없이 영접하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강단에서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굽혀서 가르치거나 가르치지 않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거짓을 퍼뜨린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을 책임도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하고 지키게 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사랑이다.
신학교는 이 진리를 바르고 담대하게 가르칠 일꾼을 키우는 곳이다. 만일 그곳에서 진리를 말할 수 없게 된다면, 거짓을 말하는 자를 허용하는 것이 차별 없는 사랑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차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말할 수 없게 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녀가 학교에서 거짓을 배우는 것을 우리는 반대할 수 있다. 누군가를 차별해서가 아니다. 아이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구든지 어떤 배경을 가졌든지 무엇을 믿고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지 차별 대우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베푸신 십자가 사랑의 본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고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요 8:40, 45). 사람들은 예수님이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푸셔서 죽인 게 아니다. 그 사랑 가운데 충만한 진리를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그 또한 우리가 배워야 할 그리스도의 진리의 본이다.
3.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금지하지만 진리를 말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면 포괄적 차별금지법, 우리는 지지하는가? 지지하지 않는가? 지금 발의된 법은 소위 ‘독소조항’이라는 것이 있다. 단지 사람을 차별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만 있는 게 아니라, 진리를 말할 수 없게 막도록 만드는 조항도 있다.
지금의 법이 통과될 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하여 여러 분석이 있지만, 확실한 건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가 분명히 생긴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SNS나 소셜 미디어에 공유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신학교에서 성경의 관점과 다른 성적 지향, 성 정체성을 주장하는 교수 채용이나 학생 치리를 할 수 없게 된다.
외국에서는 빵집에서 동성부부의 결혼식 케이크 제작을 거절했다가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빵을 팔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차별). 동성 부부의 결혼을 지지하고 축복하는 메시지를 거부한 것이다(진리). 학교 교육은 어떤가?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성 정체성으로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고 반대할 경우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면 결국 거짓을 교육받고 진리의 입을 막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사람을 차별하고 특정 범죄를 혐오해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되 진리와 함께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법을 통해 역리를 순리로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소수를 어떤 비방과 조롱을 받더라도 진리와 함께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이 법에 반대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수가 하나님께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하신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부끄럽고 상실한 마음에 내버려 지지 않길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법에 반대한다.
부요한 믿음 /약2:1-9/ 곽선희 목사
2014-11-18 14:10:43
경제문제를 전문으로 연구 하는 학자들의 사이에서는 사업이라는 말과 경영이라는 말의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사업이 든 경영이든 그게 그건가보 다 이렇게 그저 보통으로 그 렇게 이해하고 있지만은 학 자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좀 더 예민하게 개념을 쪼개서 분석해서 이 렇게 설명하고 이해하고 또 비판하게 됩니다. 그런 학 자적 개념에서 보면 사업과 경영은 다릇습니다. 사업이 라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 요, 경영이라는 것은 사람을 버는 것입니다.
사업이라는 것은 돈을 관리하는 것이요, 경영이라는 것은 사람을 관 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업이 잘 됐다 하는 말은 돈 벌었다 하는 말이요, 그 러나 경영이 잘됐다 하는 말 은 결국은 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됐다. 다 같이 행복했다. 그런말이 됩니다.
그러니깐 예를 들어서 구 멍가게 주인은 자기 혼자서 부지런을 떨면 발술이나 먹 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좀 커지면 이제는 경영에 능력 이 있어야 합니다. 경영능 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을 모 아서 적재적소에 세워서 그 들로 하여금 자기능려과 지 식과 경험을 100번, 100% 발휘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창의적으로 일할수 있게 요
새말로 말하면 관리를 잘하 고, 교통정리를 하고, 알선을 하고, 분위기를 만들어 놔야 해요. 이 경영 잘하는 것 그러니까 경영을 잘한다 하 게 되면 일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돼요. 누구도 기 분나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을 10분 발휘하는 열심히 일하는 그런 환경,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경 영에 성공했다 말할 수 있겠 습니다. 그러니까 사업가하 고 경영인은 다릅니다.
참 미안하지만 우리가 지 금 어디서 고민을 하게 되는 냐 하면은 사업들은 했는데 경영은 못했어요. 경영에서 결국은 실수 했다 하는 말입 니다. 이 경제라고 하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를 자본이 있어야 하고, 지 식이 있어야 하고, 기술이 있어야 하고, 뭐 경험이 있 어야 하고.... 뭐 이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뭐 노하우가 어떻고, 또 로얄티가 어떻 고.... 뭐 이런 얘기를 합니다 만은 이거 다 경제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들입니다만은 이보다 더 중요한 최대의 요 소는 인간입니다. 사람입니 다. 사람, 이거 모두다 사람 이 하는 일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문제, 인간성 문 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소프트웨어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간 자 신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얻지 못하면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인간의 능력 그 사람이 가지는 지식 또 창의 력, 기술 이것을 최대한도로 극대화 할 수 있으려면은 먼 저 신뢰성이 있어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 시는대로 누군가가 나를 믿 어준다든가 전적으로 믿어준 다 할 때 나는 용기가 생기 고 삶에 보람도 있고 밤새워 일해도 피곤하지도 않아요.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 하고 싶어요. 요새말로 말 하면 충성을 하고 싶단 말입 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아요. 나도 나 를 못믿어. 일이 이렇게 되 면은 자기가 가진 지식 아무 소용 없습니다. 자기가 가 진 지식, 능력 아무 쓸데없 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고로 이 신뢰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예요.
이게 기본적이 것이요. 그 건 바로 인간의 문제요 인간 존재와 인간의 성품에 관한 문제가 되더란 말입니다. 신뢰성 우리는 지금 이 문제 에 부딪혔습니다. 흔히 말 하기를 이세상을 사는데 필 요한 것이 아이큐다. 지능 지수다 하고 생각합니다.
또 요새와서는 이큐다. 감 성지수가 중요하다. 엠큐다. 이제는 도덕성지수가 문제 다. 도덕성에 문제있다. 씨 큐다. 지도력에 문제있다 했는데 제가 한개 더 만들겠 습니다. 티큐다. 이것은 신 뢰성지수다. 신뢰지수 어디 까지 믿을 수 있느냐?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느냐? 당신 은 어느정도에 믿는 사람이 됐느냐? 믿을 수 있는 사람 이 됐느냐? 그것이 그 사회 를 결정하는 것이요. 가장 무서운 세상이라는 것이 뭡 니까?
못 믿을 세상이죠. 나도 못믿고, 너도 못믿고. 그 의심이 점점 극해지면은 큰일이죠. 흔히 있지 않습 니까? 의부증, 의처증 이건 살인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 사람이 지식이 얼마나 있 든 없든 뭐 잘났든 못났든 아무 소용 없어요. 의처증 환자하고 살면 참 힘들죠. 의부증 환자하고 살면 지옥 이지. 그건 사는게 아니죠. 자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있다는 말씀이 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때 제자들이 예수 님을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예수님의 믿음이 대단해요.
그 신뢰지수, 신앙 지수가 너무 높아요. 풍랑 이 일어날때에도 조용히 주 무세요. 아 깨워서 우리 죽 게 됐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의심하느냐 예 수님은 마음이 평안하세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런가 하면 또 예수님께서 그 장면 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어요. 죽은 나 사로 장례까지 치뤘는데 무 덤을 찾아가서 돌을 옮겨 놓 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소 리지르는데 저는 아무리 생 각해도 그 대목은 참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만일에 안 나오면 어떡하죠. 나사로야 나오라! 고 소리지를때에 안 나오면 그런 국제 망신이 어 디있습니까? 어쩌자고 무덤 앞에 가서 소리를 지르는 겁 니까?
대단한 대단한 깜짝 놀랄만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 믿음에 스승을 앞에 놓고 제자들이 너무 부끄러 워서 예수님께 주여! 우리에 게 믿음을 더하소서. 우리 에게 믿음 좀 주세요. 그런 믿음 좀 가지게 해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리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 다. 오늘 본문에도 보니까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가난한 자 를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했다. 매우 귀한 말씀이올 시다.
요새 세계적으로 문 제가 된 베스트셀러 책이 있 습니다. 프렌시스 후꾸야마 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인데 「트러스트」 라고 하는 책 입니다. 이건 신뢰라고 하 는 말입 니다만은 그 말의 뜻이 개념이 특별하기 때문 에 번역하지 않고 책의 이름 도 그대로 트러스트 하고 뒀 드만. 한번 사업하시는 분 들은 반드시 읽어 보실만 합 니다. 누구도 권하고 싶습 니다. 그런데 모든 문제 이 경제윤리에 문젠데 경제 윤 리에 바탕은 트러스트라는 거예요. 신뢰성 지수에 따 라서 경제가 이루어지는 것 이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공산주 의 사회가 하나같이 좀 경제 적으로 어려워졌죠. 그 이유 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술 이 부족해서, 노력이 부족해 서, 지도력이 부족해서.... 아 니에요. 공산주의가 경제적 으로 어려워진 이유는 간단 해요. 믿지 않기 때문이예 요. 안믿어요. 그래서 비밀 경찰이 있고, 한 사람에게 명령을 하고 그 뒤에 감시자 를 두고 그 뒤에 또 감시자 를 두고 그 뒤에 또 감시자 를 두고... 삐꺽 하거든 죽 여버려라.
이렇게 살아요. 전부 의심해요. 아무도 못 믿어요. 그러는 동안에 인 간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잠 재력 능력, 지혜, 기술 다 소 멸되고 말았어요. 이게 못 살게 된 이유예요. 그걸 알 아야 합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요. 신뢰지수 얼마나 믿느냐?
이게 문제라는 겁 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지 적하는 말 가운데 이런 얘기 가 있습니다. 한국인은 중 국인보다도 더 유교적이다. 중국에서는 충을 강조합니 다. 충성, 나라에 충성하는 충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서 한국은 효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중국사람 보다더 한 국사람이 더 효를 중심한 효 를 최고의 도구로 생각했더 라 그말입니다. 여기서 어 떻게 되느냐 하면은 결국은 철저하게 가족지향적 사회가 되고 맙니다. 그것도 협소 한 의미에서 내가 좀 내새 끼, 내자식, 나밖에는 몰라 요. 철저한 이기적이요. 그 결과로 어떻게 되나 봅시다.
양자를 삼을 때도 중국 사람 이나 일본 사람도 양자를 삼 을때 자식이 없으면 남의 자 식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서 법적으로 완전한 자기 자식 을 만들어서 이렇게 가족을 만들고 기업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절대로 안해요. 양자를 삼을때는 꼭 자기 핏줄기 조카라든가 뭐 하다못해 몇방울이라도 핏줄기가 이어진 것 이렇게 밖에는 못하는 거예요. 왜 요?
못 믿으니까. 이게 바 로 우리의 좁은 마음이요. 그러면 이렇게 가족지향적 사회가 되면은 전부가 불신 이 됩니다. 가족들끼리도 이게 친자식냐, 서자냐, 첫째 냐, 둘째냐, 사위냐, 딸이 냐.... 도대체 이건 끝도 없는 거예요. 무서운 불신이 이 루어 집니다.
그 결과로 이제 보십시다. 우리나라에 큰 기업 이십대 기업을 조사 해 보면은 그 가운데 중역에 31%가 가족입니다. 가족들 끼리 하는 거에요. 다른 사 람 못세워요. 여기에 문제 가 있는 것이에요. 결국은 아무도 못믿어요. 가족 갖 다 놓고도 이것이 몇천이냐 에 따라서 또다시 의심을 하 는 거에요. 이렇게 되니까 비가족들은 소외되는 것입니 다.
가족들끼리 하는일에 다른 사람이 거기에 충성해 줄일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 보면은 얼마하다가는 다 그 경험도 쌓고 기술도 좋은 분들이 다 나와버려요. 그 회사에 더 있질 않습니 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집안 식구들 하는일에 내가 왜 거기서 충성을 하느냐? 언젠가는 쫓겨날텐데 다 나 와버렸어요.
그러니까 ㅏ그 귀한 지식, 노하우가 그냥 빠져나가는데 이 회사가 되 겠어요. 이래서 한국경제가 어려워진 것예요. 불신 때 문에. 자 이제 예를 들어 봅시다. 일본에 김봉학 장 로님이라고 계시는데 잘 아 시는 여러분 존경하시는 어 른인데 그 일본에서 세계적 인 큰 프라스틱 회사를 합니 다. 제가 거기 방문했을때 깜짝 놀랐습니다.
이 회사 가운데 나와 더불어 30년 이 상 여기에 근무한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고 그래요. 자기 비서를 소개하는데 그 비서가 24년 됐데요. 자기 하고 같이 있는지가... 이러 기 때문에 기업이 커지는 거 요. 우리는 아무도 못 믿어 요. 그 소중한 노하우를 다 짤라버려요. 다 내쫓아요. 다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 집안 식구들이 붙들고 있는 데 이 기업이 이 세계 경쟁 에서 어림도 없는 겁니다. 이래서 어려워졌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신용지수입니다. 얼마나 믿느냐? 전적으로 믿어 주어야 또 믿을 수 있 어야 내가 생을 바쳐서 열심 히 일할 수 있겠는데 믿을 수가 없으니까 일할 수도 없 고, 일할 필요도 없어요.
이래서 그 많은 능력들이 다 소장되고 말았다 하는 얘 깁니다. 여러분 경제가 돈 으로 되는게 아니요. 신용 으로 되는 거예요. 경제가 일어서고 못서고는 바로 신 뢰지수에 정비례한다는 겁니 다. 불신은 불행을 초례하 고 불행해 지면 불안해 지고 불안해 지면 창의력이 다 상 실되어 지고 맙니다. 마지 막엔 무능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유명한 달란트 비유를 말 씀합니다. 다섯달란트, 두달 란트, 한달란트씩을 주었다. 가서 장사해가지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에서 칭찬합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했기에 내가 큰 일을 맡기리라. 이렇게 칭찬할걸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구에 게 일을 맡깁니까?
누구에 게 돈과 기술과 건강과 능력 을 누구에게 맡기느냐 착하 고 충성된 자에게 여기 신실 이라는 말이나 충성이라는 말이 원래 피스토스 같은 단 어입니다. 신실이 충성. 그 신뢰지수에 따라서 일을 맡 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 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 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 을때 구원에 이릅니다. 하 나님이 우리를 믿을 수 있을 때 복을 받는 겁니다. 하나 님이 우리를 믿을 수 있는 그 믿음은 우리의 행위, 신 실한 충성된 행위로 증거되 어야 합니다. 결국은 내가 지닌 신뢰지수에 따라서 하 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것 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믿 음의 뿌리는 오늘 본문 2장 1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리스 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 았으니... 거기에 뿌리가 있 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십자 가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 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지혜 와 그 경륜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기본이요. 둘째로는 나 자신을 믿어야 됩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믿는 믿음입니다.
나 자신 에 대한 정체의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 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줍니다. 그런고로 나는 소중합니다. 그 자신의 정 체감 그 믿음이 아주 중요한 것이요.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웃을 믿습니 다. 그것은 이웃을 믿기 보 다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웃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아내를 믿습니 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남편을 믿고, 자식을 믿습니 다. 친구를 믿습니다. 하나 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나를 믿고, 이웃을 믿게 되는 것 입니다. 본문에 더 깊은 뜻 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 시고... 믿음에 부요하게 하 시고... 믿음을 부요하게 만 들어 주신다는 거예요. 가 난한 자를 택하사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 택된자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런데 부요하게 되는것 믿 음이 부요하게 되는 것이 어 디서 이루지느냐? 가난속에 서 이루어 지고 역경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때 그런 아주머니 하나를 만나 보았습니다. 지금은 뭐 그 때만 하더라도 재벌에 가까 울 정도로 돈이 많은 사업을 잘 하는 사람인데 그 부인이 조금 입이 좀 걸어요. 그래 서 욕설을 잘하고 그런 분이 요.
옛날 얘기를 하는데 6.25전쟁때 피난다닐때 너무 나 어려울때 죽 한그릇을 쑤 어 놓고 서로 한숫가락만 더 먹으라고 권했데요. 당신 밖에 나가 일할꺼니까 한숫 가락 더 떠먹고 가라고. 아 니 당신이 아이들과 하루종 일 수고해야 되니까 당신이 한숫가락 더 떠먹으라고. 죽 한그릇을 놓고 서로 더 먹으라고 권하고 할때에 믿 음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행복도 있었데요. 요새 와 서 사업을 한다고 돌아다니 니까
열흘에 한번 코빼기도 볼 수가 없데요. 바쁘시데 나.. 그래가지고 그래 이 아 주머니가 뭐라고까지 하는고 하니 이놈의 사업 다 망해 넘어져라. 그러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사람답게 살아봤 으면 그러더라구요. 왜요? 신뢰가 없어졌어요. 믿음이 없어졌어요. 이젠 행복도 없어요. 여러분 이걸 아셔 야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오히려 신뢰가 있어요. 거 기에 행복도 있어요. 하나 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할때 그들 로 하여금 많은 고통을 당하 게 했어요. 고난중에 하나 님께 대한 믿음, 형제간에 대한 믿음, 이 신뢰지수를 높여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 가게 했어요. 이걸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이것이 근본 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 학시절에 64년인거 같습니 다. 아주 옛날에 돈을 좀 벌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고 학을 하면서 공장에 가서 일 을 했습니다. 여름방학 한 참 더울때 가서 일을 좀 해 봤는데 월리암 스포즈라고 하는 큰 공장에 가서 강철 공장입니다. 쇠를 깎는 강 철을 만드는 거요. 아주 강 하고 굳은 쇠를 만드는 공장 입니다.
아마 가만히 보니 까 쇠덩어리를 불속에다 넣 다가 꺼내가지고 5톤짜리 쇠 덩어리 한발을 내려쳐요. 때려. 자꾸 때리고 또 불속 에 넣다가 또 때리고 또 집 어 넣었다가 또 때리고 그냥 때리는거야. 왜 이렇게 하 느냐구요. 이렇게 때려야 여기 찌꺼기가 다 빠져나가 고 분자와 분자가 강하게 밀 착됩니다. 그래서 강해지는 거래요. 불순물이 다 빠지 고 순수해지고 분자와 분자 의 사이가 가깝게 되어서 강 한 강철이 된다고 하는 거예 요. 저는 그거 하나 배웠습 니다. 여러분 고난속에서 읽어버렸던 진실을 되찾습니 다.
거품같은 것, 위선같은 것, 체면같은 것, 쓸데없는 것 다 벗어버리고 순수한 마 음으로 돌아가서 서로 껴안 고 사랑할때 진실하게 됩니 다. 그 다음에야 정죄도 일 어납니다. 지금같이 거짓 투성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 인격 자체에 서부터 진실을 그리고 믿음 을 회복해야 됩니다.
디모 데후서 3장이나 마태복음 24 장에 보면은 말세에 징조에 대해서 말할때 이 세상 끝에 가면은 재난도 있고, 지진도 있고, 환란도 있고, 전쟁도 있고, 뭐 많은 어려움이 있 겠다고 말씀하실때 사랑이 식어지며 배신하는 일이 있 으리라. 믿음이 없어질 것 이다. 서로서로 잡아주고 서로서로 우매하는 이러한 불신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 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 분 예수님을 보십시다. 그 제자들 아무리 보아도 우리 가 보아도 시원치 않은 제자 들이오.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도망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실때 다 도 망가고 말았지요. 이런 시 원치 않은 참 부끄러운 제자 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아무 말없이 내 양을 먹이라. 내 가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해 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순교하리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증인이 되리라. 십자가로 구속한 그 교회, 그 거룩한 백성을 그 사랑하 는 제자들에게 위탁했어요. 위임했습니다.
믿어 주었습 니다. 완전히 믿어 주었습 니다. 사랑이 뭡니까? 사 랑은 믿는다는 것이예요. 주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믿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믿 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미래와 그 소망에 대해서 믿 었습니다. 오늘은 쓸모없는 자 같으나 장차 훌륭하게 쓰 여질 것이라고 하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미래를 믿었고, 약속을 믿었습니다.
내 증 인이 되리라. 내가 나를 위 하여 순교하리라. 나보다도 더 큰 일을 하리라.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것이 믿음입 니다. 여러분 성도 여러분 다시한번 생각합시다. 우리 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으나 이제 믿음만 회복 할 수 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 고, 나를 믿고, 이웃을 믿 고... 믿어야 하고, 또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은 오늘도 이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우 리에게 믿음을 더하십니다. 믿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믿게 하십니다. 믿음을 순 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신뢰성을 구축하고 거기서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 다.
약2:1-13/ 시23/ 무산자의 복음 / 한경직 목사
2014-08-23 16:37:1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는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는냐』(약 二․五)
여러 해 전에 내가 신의주 제二 교회에서 시무할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어떤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니 이 청년은 가난한 가정에서 생장한 청년으로 불행하게도 제일 어린 동생이 중병에 걸렸으나 돈이 없으므로 약을 쓸 서도 없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할 수도 없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동생을 낫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 있는 손을 펴 사 돈 없는 사람도 죽지 않고 입원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음성을 들려주옵소서』그 후 과연 자기 동생은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청년은 너무도 기뻐서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목자는
여호와시니
가난한 내 동생이
산 것처럼
불쌍한 모든 형제
슬플 것 없도다
그런데 자기 백부의 옆집에 모 부호의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입원도 하고 약도 쓰고 각색 치료를 다 하였으나 약석(藥石)이 무효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후 그 집에서는 죽은 아들의 옷을 불사른다, 경을 읽는다 야단법석이더라고 썼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목자는 여호와시니!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이러한 생각은 가난한 중에서 신앙 생활을 한 자는 누구나 다 체험한 사실입니다.
과연 여호와는 가난한 자의 목자이시니, 옛날 애굽에서 말할 수 없는 학정 밑에 벽돌을 굽고 고역 하던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절히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사 저희를 구원하여 주셨고,
베들레헴 어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목동 다윗을 불러 골리앗을 쳐죽이고 불레셋을 물리치시며 저를 들어 이스라엘의 제왕을 삼아 건국하게 하시고, 농촌에서 자라난 가난한 농민 아모스를 불러 정의의 예언자를 삼아서 당시 부패한 상류 계급, 귀족 사회의 죄악을 통격(痛擊)하셨습니다.
신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주님 예수는 무산자의 대표라는 기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나셨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 한마디가 주님이 얼마나 가난한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고 가난한 과부의 연보를 축복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다가 가난한 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하였으니 세리 마태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 역시 갈릴리의 가난한 무산 대중이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또한 그러하니 초대 교회 신자들은 부요한자들이 아니라 거의 무산 대중이 아니면 노예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만 아니라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덕을 세우며 정신적 지도자가 된 이들은 대개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장막을 지으면서 전도하던 사도 바울, 가산과 전토를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일생을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면서 전도하던 바나바, 성(聖)안토니, 성(聖)베네딕트, 성(聖)프랜시스도 청빈한 생활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가난한 사람으로 시작하고 가난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기를 통하여 헌신과 희생으로 자라왔으며 영광을 주께 돌렸습니다.
기타 성현들도 역시 가난한 자들이었으니 공자(孔子)는 상가지구(喪家之狗)라는 말을 들었고, 헬라의 가장 지혜 있고 의롭고 선하던 소크라테스는 독배(毒杯)를 마시고 임종할 때 사랑하는 제자 크리토에게『크리토여,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 빗진 것이 있으니 갚아주기를 바란다』하고 운명하였으니 얼마나 가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사람이 사는 것이 그 가산이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말씀이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풍성한 축복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풍성하게 하십니다.
본문 五절에 보면『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택(擇)하사 믿음이 풍성하게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오순절 날 성신의 놀라운 역사를 통하여 저들에게 믿음의 풍성함을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폐문불출(廢門不出)의 예루살렘 교회는 전도의 불길이 맹렬히 일어나서 하루에 三천 명씩 회개하는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사랑이 풍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믿음의 풍성한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사랑의 은혜도 풍성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초대 교회가 오순절 날 믿음의 풍성한 은혜를 받았을 때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사랑의 축복이, 서로 아끼고 서로 위로하는 사랑의 축복이, 물건의 있고 없는 것을 서로 통용하는 유무(有無)상통(相通)하는 사랑의 축복이 저들에게 넘쳤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초대 교회에는 핍절(乏絶)한 사람이 없었다고 사도행전 四장 三十四절은 말합니다.
셋째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십니다.
믿음의 풍성한 은혜가 있고, 사랑의 풍성한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기쁨의 은혜를 하나님은 넘치도록 가난한 자에게 주십니다. 사도행전 四장 三十六절로 三十七절에 보면 초대 교회는 가난한 신자들과 떡을 떼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넷째로, 전도에 열심(熱心)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통하여 전도하십니다. 사도행전 五장 四十二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매일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더라』또 바울은 친히 고린도 후서 六장 十절에서 증거하기를『가난한 자와 같으나 여러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하였습니다.
만일 가난한 예수가 없었던들, 만일 가난한 바울이 없었던들, 만일 가난한 베드로가 없었던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소유할 수 있었겠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이 세상에 공자(孔子)나 소크라데스가 없고 도척(盜拓)이나 석숭(石崇)이만 살았던들 이 세상은 어찌 되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가난한 자의 사명입니다.
병자에게 병자로서의 사명이 있는 것같이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사명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들어서 세계를 부요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 가난하여도 그로 말미암아 오는 사명이 있는 것을 자각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서울 거리를 지나노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 약, 사탕, 수건 등을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라고 아우성치는 것을 여러 번 보게 됩니다.
이들이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아우성 처 본 일이 없는 이북 동포들이라 생각할 때 나는 가슴이 바작바작 타올라 저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지나가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울지 말고, 가난한 자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에 부요할 때 영광을 돌리면 그 이상으로 가난할 때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 하는데 대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기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교회는 가난한 교회입니다. 三八 사선을 넘어온 전재민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와 같이 가난한 가운데서도 믿음에 부요 하고 사랑에 부요 한 은혜를 받아 전도에 힘있는 교회가 되어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가난한 자의 목자는 여호와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과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우리가 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야고보서 강해-5/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2:1-13
2022-01-27 10:34:06
야고보서 2장: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
1-13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지 말라].
‘영광의 주’라는 표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2:8에서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증거하였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복음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이런 표현은 야고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교훈하고 있음을 보인다.
야고보는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며 차별하며 편애하면서 영광의 주를 믿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존귀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광의 주님께서 친히 낮고 비천한 인생의 모습을 취하셨는데,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낮고 비천한 자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도 무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4절] [이는] 만일 너희 회당(쉬나고게)[assembly, 예배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아니냐 함이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교훈하는 이유는 당시에 교회 안에 이런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배당에서 교인들은 금반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히 대하지만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판 아래 앉든지 하라고 불친절하게 대했다. 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였다.
교인을 경제적 기준으로 차별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사람이 소유한 돈의 많고 적음이 그의 인격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부자가 아니셨다. 선지자들도 사도들도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사람들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인격적 덕성 즉 그의 경건과 믿음, 그리고 그의 의와 선과 진실의 도덕성을 가지고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보이는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을 무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바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단지 그의 소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무지하고 악한 일이다.
[5-7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5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네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보통,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믿는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
둘째는 부자들이 성도들을 압제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비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보통, 성도들에게 그런 악을 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천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8-11절]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됨이니 이는]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됨이니라].
셋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법(노모스 바실리코스)[왕의 법]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율법들 중 첫째는 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인간 관계의 법들 중 첫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5-39).
이것은 그 외의 모든 법의 요약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우리는 이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며 죄인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다가 어느 것 하나만 범해도 우리는 모두 범한 자가 된다. 모든 율법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의 어느 하나를 범해도 그는 하나님의 법을 범한 죄인으로 정죄되는 것이다.
[12-13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있을 것임이니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넷째는 우리가 자유의 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법’은 복음을 가리킨다(약 1:25).
복음은 우리에게 죄와 지옥 형벌과 율법의 속박과 위협과 공포로부터 건져내어 자유를 주는 새로운 법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에 근거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요 우리가 값없이 받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속의 복음에 근거하여 장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큰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라면, 우리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천대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어떻게 물리치지 않으시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장차 그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면 우리도 남을 긍휼을 여겨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는 지옥 형벌을 모면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가지고 대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기본이다. 그것은 구원 신앙이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우리의 의가 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진심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외적 조건들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사람을 그의 외적 조건들로 판단하여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자들을 배려하고 도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켜야 한다. 인간 관계의 모든 법들은 이 법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이 사랑의 법을 따라 살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할 것이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자유의 법을 믿어 구원받은 자답게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복음은 자유의 법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이다. 우리는 복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