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5편 설교 모음
고난과 시간,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서 /롬8:17-25, 시105:19, 히12:5-11/ 김형익 목사
2021-05-18 09:15:01
우리는 지난 주일, [신앙과 성숙] 시리즈의 결론의 첫번째 말씀으로, <말씀, 기도 그리고 공동체>라는 주제로 말씀을 상고했고, 오늘로써 우리는 [신앙과 성숙] 시리즈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결론으로 전하는 두번째 말씀의 주제는 <고난과 시간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길러 가시는 데에는 5개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다른 요소를 덧붙이거나 어떤 것을 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마르틴 루터는 좋은 신학자가 만들어지는 세 가지 조건을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고난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신학자에게만 해당되는 조건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고난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탁월함이 드러나는 지점은, 그가 여기에 고난이라는 요소를 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루터 자신이 겪은 것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성경에는 고난이 없었던 하나님의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물론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영신학에 매여있는 무지한 자들은 이 고난의 요소를 부인하는 비성경적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르틴 루터의 말에 두 가지 요소를 더했습니다. 시간과 공동체입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 우리는 공동체의 요소를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교회—공동체 없이 성장하는 신앙은 없고,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숙해져 갑니다. 이것은 단지 지역교회에 등록하여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삶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여기에는 부딪힘이나 갈등. 기타 여러 어려움과 장애물들이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은혜를 바라며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삶만이 참된 성숙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의 요소에 더하여 시간과 고난의 요소를 결론적으로 살펴볼텐데, 고난과 시간이라는 두 요소는 신자가 살아가는 두 나라 사이라는 환경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나라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이것은 자연히 긴장을 유발하고 신자의 삶에 지혜를 요구합니다. 성경적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히면, 지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예를 드러내는데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보여주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고난
우리는 먼저 고난이라는 요소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성격이 어떻게 불신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다른가를 먼저 살펴보고, 우리는 고난이 어떻게 신자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성격(히 12:5~11; 요 9:3; 11:4; 욥 42:5~6; 골 1:24; 딤후 3:12; 마 5:11; 벧전 4:12)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한 영역이 존재합니다. 고난이 죄의 결과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신자들에게는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유익을 놓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성격의 고난이라면, 성육신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신자들의 몫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겪는 고난은 죄의 결과나 죄에 대한 형벌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징계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을 징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징계는 형벌이 아닙니다. 죄와 형벌 사이에 인과율이 작동한다면, 잘못과 징계 사이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작동합니다. 제가 잘못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자의 죄가 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의 죄는 불신자의 죄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불신자의 모든 죄는 예외없이 지옥에 가야할 죄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녀들의 잘못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거나 가볍다는 말도 아닙니다. 도리어 신자는 불신자로 있을 때 죄를 인식하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자신의 죄를 깊이 아파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을 뿐 아니라, 이 죄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가 상했으며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잘못을 충분히 깨닫고 고치도록 징계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징계로 고난을 받을 때, 신자들은 이것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반대로 지나치게 낙심하지도 않아야 합니다(히 12:5). 만일 징계가 없다면 자녀가 아니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히 12:6~9). 그러나 징계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한 가지 성격일 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욥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보시고, 그 원인은 누구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요 9:3),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4). 분명히 신자들의 삶에는 이런 차원의 고난이 존재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은 이로 인하여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이전부터 신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이와 같이 적극적인 차원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인과율을 적용하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욥의 경우나 이 맹인 그리고 나사로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나타내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욥이 고난을 통과한 뒤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고난을 통하여 이와 같은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브리서 12:11)”고 말씀합니다.
징계로 주어지는 고난도 동시에 이런 차원의 적극적 의미를 함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과 믿음 때문에 겪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각각 적극적 차원의 고난과 필연적 차원의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차원의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지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사도의 이 고백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적극적 차원의 고난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나 선지자 혹은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특정한 사람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적극적 고난은 모든 신자에게 열려있을 뿐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는 고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와 유사하지만 조금은 구분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신자가 믿음을 따라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딤후 3:12). 그래서 필연적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필연적이라는 말은,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욕과 박해를 받을 것은 이상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라는 겁니다(마 5:11).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일, 신자가 끊임없이 믿음을 타협하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또는 신자가 믿음을 교회 생활에만 국한하여 사용하려고 한다면,
물론 고난을 피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는 자신의 신앙이 참된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을 것이고, 형식적 신앙 또는 위선적 신앙에 머물 위험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도 얼마든지 피해가려고 한다면, 지옥에 가지 않을만큼의 최소한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고난과 불이익과 손해가 싫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수고를 거절한다면, 이 또한 그 신앙의 진수를 맛보는데서 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확신에 이를 수 없게 할 것입니다.
■고난이 신앙을 자라게 하는 방식(엡 1:18~19)
이제 본문이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17절에서 사도는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하늘의 영광스런 기업을 상속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광을 상속받기 위해서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영광의 기업을 받기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영광과 고난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현재의 고난을 신자가 누릴 영원한 영광과 대비시킵니다. 이것이 신자가 고난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관점인데, 이 관점이 근본적으로 고난을 감당할 힘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은 어떻게 현재의 고난이 신앙을 자라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난 중에서 장래의 영광의 크기를 바라봄으로써 우리 믿음은 성장합니다. 믿음은 당장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신자가 누릴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유난히 믿음의 미래적 성격을 보여주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19절에 ‘고대하는’, 21절에 ‘그 바라는’, 23절에 ‘기다리느니라’,
24절에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그리고 ‘바라리요’, 25절에 ‘기다릴지니라’ 와 같은 단어들입니다. 이점에서 장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없는, 결여된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엎드려도, 그가 구하는 것이 현실의 것이 전부라면, 금생에서 얻을 것들만을 구한다면, 그의 신앙은 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번영 신학, 기복 신앙의 위험입니다.
장래의 영광, 장래의 은혜를 내다보는 것은 신자가 어떤 성격의 고난 가운데 있든지 신자로 하여금 그 고난을 능히 감당하게 하는 힘을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여기서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이나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먼저 나오지 않고, 오히려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먼저 나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실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무엇보다 먼저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현재의 고난을 감당하는 성도의 힘은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에서 나온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신자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믿음으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언제나 이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감당할 때, 우리의 믿음은 고난 속에서 자라가고 성숙해집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고난을 피해가고 고난이 주는 괴로움을 경감시키는 데만 우리의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면, 우리 신앙은 결코 자랄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시 105:19)
고난을 감당하게 하는 힘이 장래의 영광을 바라는 것이라는 말은, 자연히 우리를 시간이라는 주제로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한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데 시간이라는 요소를 사용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한 사람의 성도도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그의 신앙은 자라가게 되어 있고 성숙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시간이라는 요소를 거스를 힘이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언제나 시간이라는 요소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은, 고난이 올 때 우리가 “언제까지입니까?” 라고 기도한다는 사실이 잘 보여줍니다. 고난의 시간과 기간은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결정하십니다. 이것을 시편 105:19이 잘 보여줍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기자는 요셉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그 고난이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이 때는 17세부터 30세까지 13년이다라고 정해진 시간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는 말이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인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성취되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난은 시간과 함께 우리의 믿음을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시간이라는 요소를 생각할 때 보통 느긋함 보다는 조급함을 느끼곤 합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낄 때도 적지 않습니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끼는 것은 거의 언제나 우리의 성취를 생각할 때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시간은 좀 다르게 작동합니다.
성취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낭비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요소도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 고난으로 채워지는 시간 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소위 잃어버린 13년이라고 불릴만한 요셉의 시간은 애굽의 총리로 성공하기 위해서 요셉이 의도하고 준비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요셉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도를 갖고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 요셉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에게는 의식적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시간만이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되는 시간 조차도, 하나님께서 빚어 가시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정확히 같은 것을 말씀합니다. 19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때를 가리킵니다. 21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때,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데서 해방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23절은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같은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될 때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성가심을 받지 않게 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고난으로 점철된 시간입니다.
현재의 시간이 고난으로 점철되었기에, 미래의 시간을 기다리는 우리의 갈망과 소망은 더 깊어지고 뜨거워집니다. 본문의 동사들이 그것을 보여주는데, 먼저 19절에서 ‘고대한다’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매우 강렬하게 열망하고 기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23절에 ‘기다질지니라’라는 단어 역시 강렬하게 기다린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고 25절에 ‘기다릴지니라’도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아주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믿음의 미래적 요소, 시간적 요소를 드러내기 위해서 바울 사도는 믿음을 소망이라고 표현합니다. 믿음에서 시간의 요소를 제거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고난의 현재에서 영광의 장래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믿음을 장성하게 빚어가십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신학책을 읽으며 기도에 전념하여 보낸 의식적인 시간들을 통해서만 우리의 신앙이 빚어지고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시간은 모두 소중하지만, 우리 신앙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시간표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 신앙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예기치 못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 시간표에 큰 지장이 생기게 되고,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려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낙심과 절망에 가까운 시간을 보낼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지내면서 조급함이나 조바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보내기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처해 있는 바로 현재의 시간에 그것을 배워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영원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영원의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의 모든 것,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서(빌 3:20; 막 3:35; 벧전 2:11; 롬 8:29)
고난과 시간이라는 요소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환경은 신자가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신자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만(빌 3:20), 다른 한편으로 신자는 이 땅의 한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신자의 영원한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속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의 멤버로서 우리가 가지는 정체성이 세상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정체성 보다 우선임을 가르칩니다.
심지어 혈연으로 묶인 지상에서 가장 끈끈한 가족이라는 정체성 보다도 우선하는 것임을 주님은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막 3:35). 세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제임스 K.A.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새로운 폴리스, 사회 계급과 혈연 귀족이 폐지된 새로운 종교적, 정치적 실체를 이루는 특별한 도성을 만드신다.” 이렇게 교회는 모든 신자에게 있어서 기존의 모든 소속 보다 우월하고 우선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두 나라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자연히 긴장을 유발합니다. 우리가 믿음 때문에 겪는 손해와 불이익이라는 고난은 우리가 두 나라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믿음이 교회라는 울타리에 한정되지 않고 교회와 세상 두 영역 모두에서 일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신자들은 여기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과 세상에서의 신앙 사이의 불균형, 부조화를 빚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가정과 직장과 모든 삶의 영역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세상에서 우리 신앙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표출 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신자는 타락한 세상에서 주인이거나 지배자로 살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존재합니다(벧전 2:11). 그러므로 신자는 물리적 힘이나 영향력 또는 일방적 소통이 아닌, 섬김과 낮아짐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인 자연법의 근거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선한 양심에 우리 믿음을 담아 세상에서 선한 양심의 사람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을 포함하는 이야기입니다. 정치인, 교사, 의사, 율사, 공무원, 자영업자, 피고용인, 그 어떤 자리에서 살아가든지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고 드러내되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살아가면서도, 그들이 빠질 수 있는 극단적 논리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두 나라 사이에 산다는 것은 교회와 세상에 속하여 살아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this age)과 오는 세상(the age to come)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는 세상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이 세상은 끝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또한 이 세상에 살아갑니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두 나라에 끼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본문은 그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바울 사도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왜 사도 만이겠습니까? 신자들 모두가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합니다.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공사 중인 우리는 고통 중에 탄식하며 그 나라를 바라보고 기다립니다. 이것이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언젠가 두 나라 시민이 아니라, 오직 한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삼위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우리가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고난을 받으며 그날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하고 가녀린 믿음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빚어 가시고 우리를 성숙하고 경건한 어른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가는 복된 삶입니다(롬 8:29).
■결론: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닮고 (요일 5:21; 시 115:8; 고후 3:18; 벧후 1:4)
[신앙과 성숙] 시리즈를 맺으면서 저는 요한일서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립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1).”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가지만, 우상을 섬기는 자는 우상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자가 우상처럼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때, 신자는 하나님을 점점 닮아가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로 빚어져 갑니다(고후 3:18; 벧후 1:4). 참된 신앙은 참된 성품을 낳습니다. 참된 신앙은 성숙의 길로 가는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계시든지, 돈, 권력, 명예, 성공,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사랑하게 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비참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생의 삶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함으로써 우상을 내어버리는 이 싸움을 제대로 감당할 때, 여러분은 참되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그런 성품을 열매로 맺어가게 될 것이고, 이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신앙과 성품은 하나임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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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시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시105:16-22/ 김형익 목사
2021-05-17 12:08:13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의 말이라고 합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 15권의 첫 권의 제목으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인간이 한 문명세계를 건설하고 제국을 세우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당신의 전능하심을 시간 속에 제한하시기를 기뻐하셨고, 시간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빚어가시는데,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그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말입니다.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우리는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이라는 소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여기서 중심 개념은 시간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는데 있어서 시간이라는 요소는 얼마나 중요하고 어떻게 중요한가, 하나님은 어떻게 시간을 통해서 일하시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시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박영선 목사님과의 대담을 엮은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신앙에 관하여 많은 것, 특별히 시간의 요소를 생각하게 하는 인상적인 책입니다.
오늘 말씀을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면 여러분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신앙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요소
저는 만 28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후 28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스물 여덟 해는 제 신앙에 무의미한 시간일 수 없습니다. 목사로 안수를 받던 당시에 비하면 지금 저는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폭에서 조금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도 좀 더 성숙해진 듯 합니다. 설교도 변했습니다. 정확한 해석과 많은 정보들을 따발총처럼 제시했던 젊은 날에 비하면 말은 조금 느려졌지만 그때보다는 좀 더 따뜻하고 깊고 풍성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젊은 시절보다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이 좀 더 여유로와졌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숙해진 신앙의 관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급함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변하지 않나?”하는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일하심이 지금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하시겠지” 생각합니다. 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좀 더 닮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시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차이들입니다.
물론 시간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마술적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서 내 안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내가 그것을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식하고 있는가?” 또는 “내 장래에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해 이루어주실 일을 기대하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어떤 대답을 가지는가는 중요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신앙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어떤 차이를 자신 안에서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또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인식을 잘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정직하게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에배당에 나온 날, 처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믿었던 첫 날과 지금을 비교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시간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2. 요셉의 크로노스(Chronos)와 하나님의 카이로스(Kairos)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요셉의 삶에 대한 매우 압축된 설명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의 삶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요셉과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고대 근동에 주신 기근으로 그들이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신 일을 말합니다. 17절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기근을 주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앞서 애굽으로 보내셨는데 그가 요셉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17살에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18절을 보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것도 부족해서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강간미수범으로 몰려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힌 일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요셉은 이 감옥에서 바로 왕의 신하 두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입니다. 이들은 바로에게 범죄한 일로 죄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두 사람은 각각 꿈을 꾸었고, 이 꿈 때문에 근심하던 중,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만에 복권되고, 떡 굽는 관원장은 그날에 사형 집행을 당하게 됩니다. 이 꿈이 이루어질 것을 알았던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설명하고, 복권이 되면 바로에게 말해 자신을 건져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창세기 40:23은 이렇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얄궂은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바로가 꿈을 꾸게 됩니다. 아무도 바로의 꿈을 해석할 자가 없자, 비로소 그 술 맡은 관원장이 옛날 일을 기억하여 바로에게 요셉을 소개합니다. 드디어 요셉은 감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서게 되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향후 7년 동안 큰 풍년이 온 뒤에 7년 기근이 올 것을 말하게 됩니다.요셉의 해몽과 지혜에 감동한 바로는 당장 요셉을 높여 애굽의 전권 총리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본문 20~22절의 내용입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그리고 요절은 19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요셉의 인생에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에 대한 해석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는 말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시간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작정과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에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몇년 몇월 몇일이라고 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계시간으로 측정되지 않는 소위 배꼽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점심을 12시에 먹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점심은 배고플 때 먹을거야” 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는 요셉이 30살이 될 때라고 표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요셉의 신앙과 관련하여 가지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되기를 마쳤을 때, 즉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를 감옥에서 풀어 바로 앞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요셉의 크로노스와는 언제나 맞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되면 자기도 곧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마 한 달 안에 풀려나겠지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크로노스였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나서야 찾아왔습니다. 좀 더 크게 보면, 요셉은 17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와서 30살이 되어서야 노예와 죄수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13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 13년 동안에 요셉에게는 수많은 기대를 품었던 크로노스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총애를 입었을 때, 그런 기대를 품어봄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이젠 됐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해 주시는 시간입니다. 내가 스스로 “나는 이제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때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가 앞서 이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이 모든 일 속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표 속에서 당신의 말씀과 작정을 이루십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도 적용됩니다.
3. 하나님의 카이로스 안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들
하나님의 카이로스와 우리의 크로노스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질문이 야기됩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던지는 진지한 많은 질문들은 때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라는 질문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형들로부터 팔려 애굽에 온 요셉이 수없이 던졌을 질문입니다. 직접적으로 때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질문들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되어야 풀리게 될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요셉의 삶을 보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요셉은 하필이면 아버지 야곱이 사랑했던 부인 라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편애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려가는 일은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왜 요셉은 형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요셉을 처치하려고 모의하던 바로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리게 되었을까?
어떻게 미디안 상인들은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던 것일까? 또 요셉은 애굽의 평범한 가정의 노예로 팔려갈 수도 있었는데, 하필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노예가 된 것일까? 요셉은 왜 일을 그렇게 잘 해서 그 집의 총무가 되기에 이르고, 보디발의 아내가 매력을 느낄만한 존재가 된 것일까? 요셉은 왜 억울하게도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감옥에 가게 된 것일까? 보디발은 왜 요셉을 죽이지 않고 감옥 그것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가둔 것일까?
바로의 두 신하는 왜 그 때 바로에게 범죄하고 감옥에 들어와 요셉을 알게 된 것일까? 그 두 신하는 어쩌다가 같은 밤에 각각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술 맡은 관원장은 왜 요셉을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그것도 2년 동안이나. 그리고 바로는 왜 그 시기에 흉한 꿈을 꾼 것일까? 어떻게 애굽에는 그 꿈을 해석할 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 하필 왜 그 때는 요셉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합당한 나이인 30세가 되었을 때였단 말인가?
이 모든 질문에 그냥 ‘우연’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은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오면 비로소 모두 정확하게 해결됩니다. 이제 거꾸로 추적해서 이 질문들을 생각해 보지요.
하나님은 요셉이 30세에 바로 앞에 서게 하시려고 그리고 그 날에 그가 총리가 되게 하시려고,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2년 동안이나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바로가 아무도 해몽할 수 없는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전에 요셉이 바로의 신하를 만나게 하시려고 미리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으셨습니다. 죄를 저지를 인물이 아닌 요셉을 감옥에 보내시려고, 보디발의 아내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게 하여 감옥에 갈 정황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가게 하시려고, 요셉을 평민이 아닌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총리로 7년 흉년을 해결하게 하시려고 요셉이 형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애굽으로 팔려 가게 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 시간에 미디안 상인들을 그곳에 보내셨습니다. 또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아들로 나게 하셨고 야곱으로 하여금 그를 편애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또 요셉이 어려서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꿈을 형들과 아버지에게 말하게 함으로써 미움을 받게 하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일어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하나 하나 진행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팔려가던 열 일곱 살 때부터 총리가 되는 서른 살까지 하나님은 요셉을 단련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형들에게 꿈을 이야기하던 그 아이를 하나님은 철저하게 단련하셨고 낮추셨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서른 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장치였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을 통해서 아버지 야곱과 형들을 다루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들을 창세기의 마지막 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오기까지는 아무 것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마치 의미없는 시간의 연속이고 낭비처럼 느껴지는 세월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오면, 우리는 그 시간이 헛된 시간이 아니었고 우연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들이 보낸 시간들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서 일해오셨던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처럼 느껴지고, 낭비된 시간 같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은 입체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 모두 안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요셉 한 사람의 이야기 보다 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비록 요셉의 인생에 국한하여 생각하고 있지만 이 큰 그림,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하여 이루어가시는 큰 그림과 목적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 안에서 많은 퍼즐 조각들이 맞추어지는 경험을 하지만,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퍼즐 조각이 되어 더 큰 그림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엄한 서사시에 비유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야를 가질 때, 우리는 자신이 겪는 사건과 상황들을 더 잘 소화하고 견딜 수 있게 됩니다.
4. 사람의 노력과 하나님의 주권
우리는 보통 성도의 인생에서 이루어지는 성화에서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일관된 강조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적 간섭하심이라는 한 차원 높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우리가 본대로 입니다. 요셉의 생애, 특별히 그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뒤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가 총리가 되기 위해서, 또는 그가 꿈을 해몽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를 이끄시고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모든 사건들이 때에 맞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셨고 주도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다만, 요셉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믿음에 걸맞게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이었고 믿음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만큼입니다. 요셉이 어려서부터 꿈을 크게 가졌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물론 요셉의 성실함을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주께 하듯 행동하고 성실하게 행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또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하면서 죄를 거부했듯이 우리도 그런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승진을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위해, 죄와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주도하고 계시고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지, 여러분이 잊혀진 존재가 되든지, 여러분이 망했다고 느낄만큼 심한 실패를 경험하든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각을 놓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수로 인한 자괴감을 겪지 않을 길이 없고,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인생 안에서 이루시는 성화는 신자 개인의 노력이라는 차원보다 한 차원 높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한 연합이라는 구속의 경륜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가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지나치게 자신의 문제, 자신의 노력, 자신의 의지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찬양 시간에 들은 노래 가사가 대강 이러했습니다. “내가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끊을 수 없는 나의 사랑..” 그들은 분명히 ‘아무 것도 끊을 수 없는 나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도저히 따라 부를 수 없는 노래였습니다. 성경이 정말 이렇게 말씀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베드로에게서 들어본 말이 아닙니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있고, 우리의 믿음의 인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고백도 좋고, 결심도 좋지만,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과 그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실 때, 시간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일하신다.
때때로 우리는 실패합니다. 아니, 자주 실패합니다. 그리고 우리 의지, 믿음의 인내가 바닥이 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조금은 가볍게 여기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실수와 실패에 대해서 지나치게 좌절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자리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실패와 그 실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린 것처럼 생각하거나 느끼지는 않아야 합니다.
이 모든 실수와 실패,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우리를 성숙의 자리로 데려가고 계시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도록 우리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무엇을 이루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허락하신 70년 혹은 80년, 90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을 통해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오늘 우리의 부족한 이 모습을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시간을 통해 빚어가시고 온전하게 만들어가시며 거룩함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이 복된 은혜를 달라고 자비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겸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를 물리치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강해-113/ 삶을 덮는 감사 /시105:1-6/ - 추수감사
2020-01-21 03:39:55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간증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105편이 추수감사주일을 위한 본문입니다.
시 105: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평생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증하고 찬양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목사인 저 자신부터 감사와 간증과 찬양보다는 근심과 염려로 우울할 때가 많습니다.
교인들 중에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담임목사에게까지 전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대개 알려옵니다.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목사는 매일, 세상 떠난 교인, 사고당한 교인, 암환자나 큰 병에 든 교인, 사업이 망한 교인, 시험에 불합격한 교인, 실직한 교인, 가출한 가족, 깨어진 가정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교인에 대하여 듣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즐거운 마음으로 밥 한번 먹기 힘들고,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이렇게 자도 되나? 기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 상태를 점검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마음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우울하고 염려 가득하고 두려운 상태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추수감사주일이지만 마음에는 걱정과 염려가 있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간증하라 하였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간증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라 믿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도 못합니다. 기도했는데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 상태를 점검하고 감사하고 간증하고 찬양하는지를 돌아볼 추수감사주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어서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여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2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신 목사님이 계신데, 일제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위로 열 명이 죽고 둘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이 목사님이 태어나자마자 하나님께 바치셨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세살 때, 부모님과 피난 갔다가 공주 근처에서 길을 잃었답니다. 밤은 깊어가고 너무나 두려워 울면서 헤매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창문을 열고 누구니? 하시며 사정을 들으시고는, 자기를 등에 없고 공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아이의 부모를 찾으셨습니다. 자신은 그만 아주머니의 등에서 잠이 들어버렸는데 눈을 떠 보니 부모님이 앞에서 울고 계시더랍니다.
그 후 살면서 항상 그 때 생각이 난답니다. ‘그 때 부모를 잃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모든 것이 감사하더랍니다.
이 목사님만 아니라 우리 모두‘만약 그 때 그 위기에서 건짐 받지 못하였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텐데,’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은혜로 살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실제 우리에겐 감사할 것이 너무 크고 많습니다.
그것을 보는 눈이 뜨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많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을지라도 십자가에서 피흘려주신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가 막힌 어려움을 만나도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100년이면 지나갑니다.
설교 초반부에 하나님의 기적이 지금도 일어나는가 하고 질문하였는데,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하고 예수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고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엄청난 기적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적, 이 은혜는 어떤 어려움이나 슬픔이나 고통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강력하며 뜨겁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 무엇인가?” “예수를 믿어도 별로 복 받은 것은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서 왜 내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시느냐?” 하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영혼이 메마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언가 좋은 것을 주시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지금도 그 은혜가 우리의 삶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기준으로는 삶의 형편이 천차만별이지만 주님의 은혜 안에서는 다 똑같이 말할 수 없는 은혜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삶을 덮는 은혜와 삶을 덮는 감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생각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모범적이고 건강하게 부흥되는 교회로 알려졌던 춘천중앙교회가 2016년 뜻밖의 화재로 예배당이 다 불탔습니다. 그런데 1년 만에 이전보다 더 좋은 예배당으로 복원하였습니다. 그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였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1년 만에 화재로 불탄 예배당을 복원할 수 있었던 열쇠가 그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에도 교인들이 화재가 누구 때문이냐면서 원망하고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담임목사이신 권오서 목사님은 당시 가장 잘한 일로 소방서를 찾아가 감사를 표한 것을 꼽았습니다. 사실 소방서에 서운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좀 더 신속하고 정확히 진화해줬다면 그렇게 참담하게 모두 다 타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원망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생명을 걸고 불을 진화한 분들이기에 떡과 과일을 준비하여 소방서를 찾아가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소방서가 잘했니 못했니 하는 논란이 사라졌습니다. 만약 그 때 감사하지 않았다면 교회가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혼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대형 화재가 발생한 것 같은 인생의 위기를 만난 분이 있습니까?
눈앞의 어려움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며 살려면 시편 기자의 권면대로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요셉은 주인인 보디발과 간수장의 눈에 사랑스러웠습니다. 어려서 포로로 잡혀갔지만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루 세 번 기도하였던 다니엘은 바벨론과 바사와 메대, 세 나라에 걸쳐 총리로 쓰임 받았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와 사랑, 기쁨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가 그치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매일 일기를 쓰며 매 주일을 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번 중동선교사 수련회에 갔다가 유럽에서 사역하시는 여선교사 한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열심히 사역하였는데 아무런 결실도 없어 답답해하는 중, 유방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이렇게 끝나나, 애통하였습니다. 주일예배 중에 몇 안 되는 교인이지만 교인들 앞에서 자신이 너무나 무능하여 선교 사역의 열매가 없는 것과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남은 기회가 얼마 없음에 대한 애통함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늘 뜨뜻미지근했던 교인들이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고 돌아가며 금식기도까지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암으로 투병해야 할 형편이 되었지만 교인들에게서 기도가 일어나면서 교회의 영적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얼마 뒤 수술을 위하여 병원에서 검사를 하였는데 암이 너무나 놀랍게 줄어들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도 깜짝 놀랐습니다. 교인들은 더 놀랐습니다. 자신들의 기도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보려 할 때는 결실이 없더니 너무나 약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상황에서 갑자기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약해진 것도 암에 걸린 것도 다 감사 제목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감사의 증인] 1·2부 황세희 집사, 3·4부 김석환 집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추수감사헌금을 드립니다.
우리의 추수감사헌금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감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힘을 다하여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로 이렇게 감사하게 하시는 것은 어려운 이들에게 은혜가 흘러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경주의 유명한 최부자 집은 400년 동안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입니다.
그 가문에 내려오는 전통 중의 하나는 “사방 100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입니다. 자신들의 부를 복이라고 여기지 않고 사명이라 여긴 것입니다. 우리야말로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은 그저 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그래서 매해 추수감사헌금으로 재난 당한 이들을 구호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올해도 라오스, 인도네시아 재난 현장에 바로 달려가 하나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삶 전체를 덮는 감사를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닫고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그 거룩한 하나님 성에서 찬양할지어다
주 승리 우리에게 주셨도다 모든 원수 물리치셨네 엎드려 절하세
다 주의 크신 이름 높이며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 감사하세
오 주의 신실하신 그 사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예배자로 부름받은 은혜 /시105:1-45/ 유기성목사
2018-04-06 04:17:08
시 105: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생각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7 그가 바로 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8 그는, 맺으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신다. 그가 허락하신 약속이 자손 수천 대에 이루어지도록 기억하신다. 9 그것은 곧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요, 이삭에게 하신 맹세요, 10 야곱에게 세워 주신 율례요, 이스라엘에게 지켜 주실 영원한 언약이다. 11 "내가 이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물려줄 기업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2 그 때에 너희의 수효가 극히 적었고, 그 땅에서 나그네로 있었으며, 13 이 민족에게서 저 민족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 백성에게로, 떠돌아다녔다. 14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도 너희를 억누르지 못하게 하셨고, 너희를 두고 왕들에게 경고하시기를, 15 "내가 기름 부어 세운 사람에게 손을 대지 말며, 나의 예언자들을 해치지 말아라" 하셨다. 16 그 뒤에 주님께서 그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시고, 온갖 먹거리를 끊어 버리셨다. 17 그런데 주님은 그들보다 앞서 한 사람을 보내셨으니, 그는 종으로 팔린 요셉이다.
18 사람들은 그 발에 차꼬를 채우고, 그 목에는 쇠칼을 씌웠다. 19 마침내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은 그의 진실을 증명해 주었다. 20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하였다.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고, 21 그를 세워서 나라의 살림을 보살피는 재상으로 삼아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관하게 하며, 22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게 하며, 원로들에게 지혜를 가르치게 하였다. 23 그 때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내려갔고, 야곱은 함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24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불어나게 하셔서 그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그들의 마음을 변하게 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자기의 종들을 교묘하게 속이게 하셨다.
26 그러므로 그가 종 모세와 택하신 아론을 보내셔서, 27 백성에게 그의 표징을 보이게 하시고 함의 땅에서 기사를 행하게 하셨다. 28 그가 어둠을 보내셔서 캄캄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그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29 그가 물을 모두 피로 변하게 하셔서 물고기를 죽게 하셨으며, 30 땅에는 온통 개구리가 득실거리게 하셔서 왕실 안방까지 우글거리게 하셨다. 31 그가 말씀하시니, 파리 떼와 이가 몰려와서, 그들이 사는 온 땅을 덮쳤다. 32 비를 기다릴 때에 우박을 내리셨고, 그 땅에 화염을 보내셨다. 33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고, 그들이 사는 지경 안의 나무를 꺾으셨다. 34 그가 말씀하시니, 이런 메뚜기 저런 메뚜기 할 것 없이 수없이 몰려와서, 35 온갖 풀을 갉아먹고 땅에서 나는 모든 열매를 먹어 치웠다.
36 그가 또 모든 기력의 시작인 그 땅의 장남을 모두 치셨다. 37 그들로 은과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가운데서 비틀거리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38 이집트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떠날 때 기뻐하였다. 39 그는 구름을 펼치셔서 덮개로 삼으시고, 불로 밤길을 밝혀 주셨다. 40 그들이 먹거리를 찾을 때에, 그가 메추라기를 몰아다 주시며, 하늘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주셨다. 41 반석을 갈라서 물이 흐르게 하셨고, 마른 땅에 강물이 흐르게 하셨다.
42 이것은 그가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거룩하신 말씀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43 그는 그의 백성을 흥겹게 나오게 하시며 그가 뽑으신 백성이 기쁜 노래를 부르며 나오게 하셨다. 44 그들에게 여러 나라의 땅을 주셔서, 여러 민족이 애써서 일군 땅을 물려받게 하셨다.
45 이것은 그들에게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할렐루야.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의 관심은 설교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도 설교가 아니고 오직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기를 축원합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엄청난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를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시 105: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저는 오랫동안 예배가 좋은 줄, 예배가 기쁜 줄 몰랐습니다.
예배가 복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배는 언제나 의무요, 부담이었고 때로는 예배가 싫었습니다.
그것은 그 때까지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다고 믿었지만 제게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이고 너무 먼 당신이고 두려운 분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배가 기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배가 기쁘고 복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예배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라고 말합니다.
: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예배자는 주님을 찾는 자이고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예배가 지겨운 분이 있을 것입니다. 속히 예배의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기쁨의 예배를 드리고 싶다면 이제부터 예배 순서를 따라 예배드리고, 찬양하면 찬양인도자를 보고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듣고 찬양대를 바라보고, 설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식으로 예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 때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 가지고도 예배가 달라집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모든 순간,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간증을 듣고 설교를 듣는 중에 무슨 생각이 떠오를 수 있고, 회개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위로가 느껴질 수도 있고, 깨끗해진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메말라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도 자꾸 싸웁니다. 그것은 형편이 어렵고 살기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동안 세상에서 힘들고 지친 교인들에게 목사로서 무언가, 즐거움과 위로와 격려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설교를 준비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 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배 때 정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 안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롬 8:9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 지금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생각하여라
:6-44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후손에게 기업으로 물려줄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신실하게 지켜주셨고, 극심한 가뭄 중에 요셉을 통하여 애굽으로 피할 길을 여셨고, 애굽 왕 바로로부터 억압을 당하자 모세와 아론을 세워 출애굽하게 하셨고, 광야에서 구름 덮개와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반석을 갈라 물이 나오게 하셨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가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막연한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다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하게 됩니다.
부목사 시절, 구파발에서 압구정동까지 맨발로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온 부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교회가지 못하게 신발을 감추고 대문을 잠궜는데, 담을 넘어 온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예배하려는 열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 토론토 코스타 마지막 날 간증했던 청년, 11살 때,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때 너무 좋았답니다. 무엇이 좋았느냐 하면 ‘나도 의지할 분이 생겼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11살 아이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의지할 분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백성들이 기쁨에 넘쳐 예배하도록 부르셨습니다.
:43 그는 그의 백성을 흥겹게 나오게 하시며 그가 뽑으신 백성이 기쁜 노래를 부르며 나오게 하셨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 영혼이 살아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지만 세상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5 이것은 그들에게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예배한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밉상인 사람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 일은 도외시하고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배만 드리면 다냐?’ 하고 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면 삶이 변화됩니다.
오늘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머리며, 옷이며 얼마나 신경 쓰셨습니까?
예배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외모보다 마음을 단장합니다. 예배드려야 하기에 다툰 사람과 화해합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것이 진정 예배드리는 마음입니다. 예배드려야 하겠기에 분노하는 마음과 염려, 탐심과 거짓, 은밀한 죄 된 마음을 품은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 삶이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들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고 직장에서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운전 습관이 바뀌고 식습관도 바뀝니다.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굳이 말로 전도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가장 큰 변화는 예배였습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구절에서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이 예배할 때, 얼마나 기쁨이 넘쳤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변화는 예배만이 아니었습니다. 삶이 너무나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행 2:44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 결과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가 살다 보면 반드시 지치고 힘들 때가 옵니다. 교회 봉사도 어느 순간 지칠 때가 옵니다. 그래서 참 예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으면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갈 힘과 사명을 감당할 힘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예배가 죽으면 안 됩니다.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면 큰일입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주님의 얼굴을 찾으며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성찬식을 하는데, 성찬식이야말로 예배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성찬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한 몸이 되셨음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하시기전 제자들에게 정말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비록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겠지만 주님은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약속을 더 이상 말로 하지 않으시고 성찬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한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야단치고 달래고 설득해도 학교를 가지 않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한 랍비가 그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랍비는 그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한참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아이를 품에서 물어주었습니다. 그 침묵의 포옹이 그 아이를 변화시켰습니다. 스스로 학교에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말만으로는 충분히 의사전달이 되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없는 행동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인 사이의 입맞춤이 그와 같습니다. 입맞춤을 통하여 경험하는 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성찬은 예수님과의 포옹이며 거룩한 입맞춤입니다. 하나 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토론토 큰빛교회 집회 중 주일 예배를 마치고 임현수 목사님과 함께 서서 교인들과 인사를 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임현수 목사님과 인사하기 위하여 줄을 섰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몰려서 목사님 옆에 서서 인사를 계속 받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 때 임현수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고난이 면류관인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임현수 목사님이 2년 6개월 고난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비밀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북한에서 억류 중일 때, 혼자 130주 주일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무슨 은혜로운 설교나 찬양이 있었겠습니까? 24시간 감시 카메라 앞에서 무슨 예배가 가능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로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도 예배드림으로 영혼이 소생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감사하는 예배 공동체/시105:1-6, 16-22
2006-11-17 15:49:02
오늘은 우리 영주교회의 창립52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1953년 8월2일에 창립되었는데, 올해로 52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동안 한결같이 우리 교회를 지켜오시며, 현재 생존하신 교우들이 많은 것은 우리 교회만의 자랑일 것입니다.
교회 창립을 기념하여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사역에 힘쓴 것은 창립30주년 때부터였습니다. 창립25주년인 1978년에 교회창립3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 조직이 82년에 와서는 거 교회적으로 개편되어 이성룡장로님이 위원장으로, 양해원장로님이 부위원장으로 수고하셨습니다. 이 때에 열심히 헌금하여 대지를 매입하는 것으로 사업을 마무리하였습니다. 30주년기념예배를 10월 첫째 주일에 드렸고, 기념성회도 열었고, 여교우를 위한 신앙강좌, 시화전과 사진전을 가지고 영주인의 잔치를 가졌습니다.
창립40주년에 오면서 기념예배 시간에 림인식목사님을 모시고 설교를 들었으며, 역대 목사님과, 부목사, 여교역자에게 선물을 드리고, 공로표창을 하였습니다. 그 때 공로표창을 받으신 분들은 고 김윤한장로, 고 홍남익장로, 이성용장로, 고 유명록장로, 고 방윤일장로, 김광철목사님, 고 최삼숙권사, 원순기권사, 정경애권사, 최규실권사, 최기순권사, 김형숙 권사, 고 정영옥권사 13분에게 드렸습니다.
40주년을 맞이하면서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고 오권태장로님이 위원장으로 수고를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성전을 건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성전을 "영주교회 창립40주년 기념 성전"으로 이름을 짓고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건축위원장으로 김희순장로님께서 수고하셨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이 성전은 94. 3. 20에 기공예배를 드리고, 95. 11. 12에 새성전에 입당하였고, 98. 9. 27에 45주년에 맞추어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40년주년의 가장 역점사업으로 과테말라에 민병문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우리교회는 성전을 건축하면서 해외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것이나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지원하는 일에는 중단하거나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학교를 위한 예산도 줄이지 않았습니다.
창립45주년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영주교회 45년사를 발간하였습니다. 오권태장로님이 집필하였는데 창립시절부터 98년까지의 45년 간의 발자취를 정리하였습니다. 45주년 기념주일에는 "한마음 찬양"이란 행사를 가졌습니다.
50주년에 들어오면서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방영남장로님이 위원장으로 봉사하셨습니다. 기념예배와 영주인의 한마당 큰잔치를 가졌고, 예배 시간에는 민경배 박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고, 김민식집사를 초청하여 찬양을 들었습니다. 50년의 발자취와 미래를 전망하면서 영상물을 제작하였으며, 사진전과 영주인의 홈커밍데이를 가졌습니다. 50주년을 맞아 교인들에게 새번역 성경을 나누어드린 점은 아주 높이 평가해야할 것입니다.
50주년을 맞이하여 1,700만원의 사랑나눔헌금을 드렸는데, 전액을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역대 담임목사님의 가족을 초청하였으며, 아동산업과 본교회 여전도회에게 감사패를 주었고, 제직근속 25년 이상의 55명에게 기념패를 주었습니다. 교회학교 10년 근속, 찬양대원 10, 20, 25년을 표창하였는데, 25년 이상 봉사한 분들은 김근태, 이진희집사, 유영혜 선생이었습니다. 이 세 분은 55주년에 가면 30년 찬양대원 봉사상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전도회가 창립50주년을 기념하여 교회화보를 제작하였고, 몽골 울란바타르에 알드릭에이징교회를 설립하고 성전을 건축해주었고, 담임교역자로 단바 전도사님을 임명하였습니다. 여전도회에서는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여 힘써 헌금하고 지원하였는데, 최기순 권사님이 건축위원장으로 수고를 하셨습니다.
금년의 52주년에는 특별한 사업은 없고, 기념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지나가려고 합니다. 앞으로 55주년에 맞추어 대대적으로 일꾼을 세우고, 해외에 예배당을 세우고, 교회 성장을 위하여 교육관과 사회봉사관을 건축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내년부터 창립55주년 기념사업으로 역점사업을 선정하고 연차적으로 준비하며 추진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목적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주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신 목적을 따라 구원받은 자녀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을 목표로 양육하며,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교제하며, 지역사회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5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지나온 50년을 회고하고, 다시 맞이하는 50년을 전망하면서 이제부터 새로운 희년을 향하여 도전하고 자라갈 것을 다짐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참된 안식과 쉼이 있는 곳이지만, 한 영혼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주님께 헌신하는 충성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는 여전히 심는 목회, 세상으로 보내는 파송의 목회를 감당해야 합니다. 목회는 파종과 파송의 목회여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육과 지역 사회를 섬기는 목회는 파종의 목회요, 전도와 선교는 파송의 목회입니다. 우리교회는 교회학교 교육과 지역사회 봉사를 통하여 지경을 넓혀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감사하는 예배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어드린 말씀은 시편 150편 중에 가장 많이 기록된 찬양시에 속하고 있습니다. 찬양의 내용을 깊이 연구해보면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떤 큰 일을 하셨는지를 드러내면서 찬양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크게는 찬양시이지만, 시편 중에서 아주 특이하게 역사를 기록하는 3편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는 시는 78, 105, 106편이 있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많은 일들을 소개하면서 독자들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나아와 찬양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열거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들은 이스라엘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며 살게 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종노릇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이란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큰 고난 속에서 민족성을 배양하고 고난 중에 인도하여 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온전히 예배하게 하려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보다 앞서 가시고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로 아무런 감격과 감사한 마음도 없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집안이 의지하던 양식을 끊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에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애굽으로 한 사람을 보내셨으니, 그가 곧 요셉이란 분입니다. 17절에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앞서 보내셨다"는 말씀, "앞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전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전에 앞서 한 사람을 보내시고 있습니다. 형제간에 암투와 시기 질투를 전용하셔서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게 하셨고, 종으로 팔려가게 하십니다. 어린 소년이 한참 꿈 많은 나이에 형들의 사랑과 우애 속에 성장하지 못하고, 미디안의 상인인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서 끌려갈 때에 쇠사슬에 묶여 끌려갑니다. 애굽에 내려가서는 노예가 되어 주인을 위하여 일하다가 가정 총무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으나, 주인 여자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그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들어갈 때에 발에는 차꼬가 채워지고 그의 몸에는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19절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는 말은 요셉의 예언으로 술 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고, 떡 맡은 관원은 죽임을 당한 일이며,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하기 위하여 감옥에서 나갈 때까지 요셉은 연단 받아야 되었습니다. 새번역성경에는 "주님의 말씀은 그의 진실을 증명해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의 꿈을 통하여 그에게 전달되었던 그의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진실하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꿈꾸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애굽의 재상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참으로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가 꿈꾼대로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섭리요 예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연단도 없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지 않습니다. 먼저 애굽으로 보내어 종살이하게 하십니다. 종살이에서 건지시고도 곧 바로 가나안으로 가게 하지 않고 광야에서 다시 40년 간 연단하시고 그 후에야 가나안을 주시는데, 그것도 싸워서 차지하게 하십니다.
20-22절을 보면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그를 그의 집의 주권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흉년에서 건져내시고, 애굽의 곡창지대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1. 예배는 감사의 예배여야 합니다.
1절 말씀에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장막 칠 곳을 준비하시고 있습니다.
2. 예배는 찬양의 예배여야 합니다.
2절 말씀에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우리들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목청을 높여 찬송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의 예배의 시간입니다. "그를 찬양하며"라고 하였는데, 악기의 현을 뜯으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예배 중에 모든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 적막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에 고유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꾀꼬리는 소프라노를, 박새는 알토를 노래하게 하십니다. 솔솔 부는 봄바람은 피아니시모로, 몰아치는 여름 태풍은 포르테로 연주하게 하십니다.
바람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만물에 부딪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물은 실개천을 흐르면서 잔잔한 리듬으로 노래하게 하시고, 때로는 많은 물이 폭포를 이루면서 아주 장엄한 노래를 연주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기이한 일들을 서로 말하면서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우신 일들을 찬양하고 간증해야 합니다.
3.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이 말씀에서 "여호와를 구하라",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새번역에서는 구하라는 말 대신에 '찾아라'고 하십니다.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건강이나, 또 물질을 의지하여 살아가지 아니하고 주의 능력과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과 구별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4. 예배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5-6절입니다.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여기서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원문에는 세 가지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가 행하신 기적을 기억하라, 그의 이적을 기억하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생각과 행동까지도 전용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유익하게 하고 이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동기와 행동까지도 바꾸어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불순종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도록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도록 우리의 죄악을 전용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감사한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의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한 일들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애굽의 바로를 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징계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어떤 글을 읽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그가 신하들을 이끌고 지방에 사냥을 나갔다가 지혜롭고 충성스러워 보이는 목동을 만나서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켰답니다. 왕이 생각하던 대로 그는 그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였고, 마침내 왕의 신임을 받아 왕궁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장이 되었답니다. 이것은 보는 다른 신하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목동 출신에 왕의 신임을 받는 것에 시기와 질투를 내어 그 목동의 허물과 비리를 깨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에 신중하였고, 진실하여 아무 허물과 아무 틈과 허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끔씩 왕궁 꼭대기에 있는 작은 창고에 몰래 들어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오곤 하였고, 그 창고의 열쇠는 자기만 간직하고 다른 사람은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은 그 창고에는 왕의 재물을 빼돌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왕에게 고하여 그 창고를 엄히 조사하라고 참소하였습니다. 왕은 할 수 없어 신하들의 요구대로 집사장의 열쇠를 빼앗아 신하들로 그 창고를 수색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그 창고를 보니 다 낡아빠진 조끼 한 벌과 너덜너덜한 장화 한 켤레가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왕은 그런 사실을 알고 집사장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그 보잘 것 없는 누더기 옷과 다 떨어진 장화를 그토록 보물처럼 감추어두고 있는가?" 그러자 그 신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왕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두 가지 밖에는 없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때로 왕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제 마음대로 살고 교만해질 때마다 저의 부족한 과거를 보고 제 마음을 바로 잡고 임금님의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후에 왕은 집사장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습니다. 신하들은 그를 참소하였지만 그의 정직과 성실과 겸손함으로 할 말을 잊었습니다. 성실은 성실을 부르고 참은 참을 부른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모두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총애를 입을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귀한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해지고 세상 유혹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가난하고 허물 많고 부족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려고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시고, 외면당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사람이란 너나 할 것 없이 섭섭한 마음은 오래 기억하고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더럽고 추한 죄인이었습니다. 지금도 잘 믿는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지난 52년 동안 이 교회를 지켜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감사한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은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넘치고 넘쳐도 언제나 부족하기만 합니다. 우리 교회는 감사와 찬양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