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6:1 - 13절 설교 모음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6:3-10/ 곽선희 목사
2014-11-26 21:03:32
어느 날 낡은 승용차에서 한 신사가 내립니다. 차에서 내리다가 일 달러짜리 동전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이 동전은 줍기 어렵게 차 밑으로 굴러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동전을 줍기 위해 이 신사는 허리를 굽혀 차 밑에 손을 넣어보았지만 손이 닿지 않습니다.
아주 여러 모양으로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호텔직원이 "선생님, 제가 도와드리죠." 그리고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간신히 동전하나를 집어 꺼내가지고 나와서 이 신사에게 드렸습니다.
그는 그때 그 직원에게 답례로 이백 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는 그 직원에게 중요한 한마디 말을 남겼습니다. "내 돈이라면 일 달러를 떨어뜨려서도 안 된다. 내 돈이라면 일 달러라도 반드시 주워야한다. 그러나 내 돈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내 집 앞에 천 달러를 떨어뜨렸다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일 달러 철학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세아의 최고 갑부 홍콩의 창장(長江)그룹의 리자청(李嘉誠) 회장의 말입니다. 리자청 회장은 갑부일 뿐만 아니라 많이 베푸는 자로서 세계를 놀라게 한 사람입니다. 자기 고향 가까이에 산터우(汕頭) 대학을 세워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홍콩대학, 버클리 대학에 여러 모양으로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아서 부자이기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으로 부자입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일 달러를 버리지 않는 그런 인색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는 아주 후하게 아니 미래를 위해서는 거침없이 많은 재산을 내놓는 그런 분으로서 리자청 회장은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2500년 전 아주 옛날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불행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남과 비교하면서 오는 결핍감에서 오는 거라고 말합니다. 결핍한 것이 아니라 결핍하게 느끼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만족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만족하게 느끼는 바고 거기에 만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먹고, 입고, 살고 싶은 그 얼마간의 수준이 있는데, 이 만큼만 있으면 좋겠다하고 바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조금 부족한 그것 가지고 만족해하는 것이 행복이다. 왜일까요? 만족할 마음의 그것을 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으니까 고것 남겨두고 조금 부족한데서부터 만족을 찾아야 틀림없는 만족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외모. 여러분, 너무 그렇게 완벽하길 바라지 마세요. 그랬다가 성형수술 하다가 아주 망가집니다. 그저 고만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조금 부족한 가운데서 만족하는 그런 마음. 왜요?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의 질투를 받지 않거든요.
이게 행복한 것이구요. 또 자신이 자만하고 싶은 것에서부터 절반밖에 알아주지 않는 그 정도의 명예. 남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랍니까? 나의 나됨보다 더 크게 알아주면 곤란합니다. 불안합니다.
나의 나됨보다 한 절반정도 그 정도만 알아주는 그런 명예를 가지고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다. 겨루어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수밖에 없는 정도의 체력. 그 너무 체력이 강해서 열 사람도 때려눕힐 정도가 되면 어쩌면 조폭 될 거예요.
그런고로 그런 체력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또 연설을 한다고 할 때 청중의 절반 정도는 박수를 치고 절반 정도는 박수를 안칠 수 있는 정도. 이런 정도의 인기가지고 사는 게 좋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아우성을 치며 그렇게 박수를 치는 거 그거 위험합니다. 그러면 어쩌면 내가 망가집니다. 그리고 또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한 절반 정도만 박수를 치는 그 정도의 말솜씨와 인기를 가지고 거기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참 옛날 어른이지만 지혜롭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늘 좀 모라란 중에서 그런 수준에서 만족하라는 것이죠. 또 그 만족하는 비결을 터득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거죠. 참으로 놀라운 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여러분, 앞으로 가질 거라는 게 아네요. 현재 모든 것을 가진 자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에요. 그 만족감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만족함이 넘쳐서 베푸는 거예요. 내가 먼저 기뻐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을 또 기쁘게 하고 있어요.
내게 없는 만족을 남에게 베풀 수 없어요. 만족감이 없는 베풂이라고 한다면 그건 대가적인 거예요. 또 다른 원망과 불만으로 끝나는 거예요. 만족하고 넘치는 마음에서 베풀고 내가 기뻐요. 내가 행복함으로 그 행복이 그대로 유출되어서 어느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겁니다. 스스로 만족해야 합니다. 스스로 부요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말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는걸 여러분이 아십니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 잃어버린 것이다." 여러분, 돈이 많으면 뭘 합니까? 병원에 들락날락하면서 더 뭘 벌어서 어쩌자는 겁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건강은 모든 행복의 조건의 하나가 아니고 근본이란 말이죠. 그런데 더구나 정신적 건강 행복감이라고 하는 이런 건강은 아주 중요한 것이죠. 그런고로 목적을 잃었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이요, 진실을 잃어버린 사람은 인격을 잃어버린 것이요, 또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여러분 보시는 대로 "-같으나, -어찌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리한 것 같으나 어떻다. 그래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자요,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복 받은 사람이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고. 보세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고, 없는 자 같으나 가진 자고, 오히려 남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다. '같으나' 라는 게 뭡니까? 사람보기에는 다른 사람보기에는 그렇다는 얘기죠. 가난한 것 같고, 없는 것 같고, 한심한 것 같고, 미련한 것 같고. 그렇죠? 그건 다른 사람 보기에 그래요. 세상의 판단으론 그래요.
그러나 나는 안 그래요. 누가 뭐래도 난 스스로 행복해요. 스스로 만족해요. 천하에 부러움이 없어요.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해야합니다. -같으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판단하지만 아네요.
나는 아니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는 아니요. 그런고로 새로운 가치관이요, 새로운 생의 패러다임을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내적인 충실이요 영적인 존재에 풍요함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그래 오늘 본문의 그 깊은 뜻은 좀 더 모든 것을 깊은데서 보라. 영적인 차원에서 보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보라. 그리고 '내가 부요한가?' 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이 내게 있다는 거예요.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영원한 것을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치를 두고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그건 얘기가 다릅니다. 땅에서 보는 판단과 하늘나라에서 두고 보는 그 판단은 달라요. 또한 현실적으로 이렇게 영원한 약속을 지향하며 사는 오늘의 생활 그 자체 삶의 의미 판단력 전혀 틀립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 고백 하리이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내가 소망교회에서 은퇴할 때 교회에서 10억짜리 사택을 하나 제게 사주었어요. 생전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집을 하나 얻게 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했어요.
여러모로 생각하다가 뭐 그럴 필요 없다. 생전 내가 남의 집에 살았는데 그건 또 가져서 뭐하노? 여러 가지 생각하다가 교회에다가 헌금을 해버렸어요. 그래서 교회이름으로 등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전 집은 없어졌고요 이제 두 사람이 사는 동안만 살게끔 그렇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뭐 내가 살면 내 집이지 하고 살고 있는데 요새 그 집이 올라갔어요. 아이파크가요, 내가 이사 갈 때 20억, 지금 25억까지 됐단 말예요.
그러니까 우리 교인들이 날보고는 "목사님, 아깝습니다. 그거 조금 있다가 할 걸" 그런 얘기합니다마는 그게 아니올시다. 언젠가 집에 들어갔더니 제 아내가 - 제 아내가 웬만해서는 저 칭찬 잘 안하거든요 -
"여보, 여보 당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가 좋아." 그래요. "왜요?" 그러니까, 요새 이 집 우리 이름으로 가지고 있었으면 재산세가요 삼천만원이 되요. 생돈 삼천만원 어디서 만드냐는 겁니다. 집 파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요걸 딱 바쳐버리니까 남들은 세금 때문에 무슨 월급이 다 죽었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래서 당신은 역시 똑똑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렇습니다. 똑똑하게 사세요. 그거 그렇게 뭐 움켜쥐고 있어봐야 그 별거 아니네요. 그저 훨훨 나는 것처럼 그렇게 살수 없겠습니까? 부요함이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성공은 만족함을 말하는 것이고 풍요의식을 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내가 그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가진 건 내 것이 아니고, 먹은 것만 내겁니다. 그 많이 잡수세요. 먹어버렸으니까 틀림없이 그건 내꺼지. 그리고 여러분 또 하나있습니다. 준 것만 내겁니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가 주고 싶어서 속에서부터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어 버린 거 이건 내겁니다.
왜? 하늘나라에 기록됐으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보면, 네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 이건 하늘에 저금해 놓은 거예요. 그러나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이건 땅의 것이에요. 게다가 어찌 어찌한 이유에서 주었다면 그건 빼앗긴 거예요. 결코 준 게 아네요. 그런고로 자유한 가운데서 아무 보상 없이 보상 바라는 마음 없이 순수하게 베풀어보세요. 그것만 내거에요. 준 것만 내거에요.
우리교회의 어떤 집사님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어째 좀 사업이 잘될 때 모 기관에다가 모 대학에다 삼백 억을 기증한 일이 있었죠. 여러분, 아마 신문에서 다 보신 겁니다. 그래 제가 만나서 "아이 그 삼백억 나한테 주지, 왜 거기다 줬나?" 그랬어요. 그래, 그 사유를 설명을 합디다. "아, 그거 참 좋은 일 했구만" 하고 칭찬을 했더니 대답은 간단합니다.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준 것만 내거라고 하지 않습디까? 제 사업 저 믿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또 기울어질 겁니다. 그러나 이제 남은 거는 삼백억 준거 그거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푼 것만 내꺼다. 이게 새로운 가치관이에요.
여러분, 잘 아는 대로 테레사(Mother Teresa) 수녀는 1997년 8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품은 평생토록 입던 단 두벌 옷 그리고 한권의 성경책 그것뿐이에요. 한평생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그는 한평생 베푸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해서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요한 23세 상을 받았고 또 착한 사마리아인 상을 받았고 템플턴상을 받았고 슈바이처 상을 받고 그리고 대영제국의 상을 받았습니다. 좌우간 상은 두루두루 한평생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사람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본인의 마음으로는 다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 부족함도 없습니다. 부요함을, 부요함을 누리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얻기 위해서 주는 마음은 피곤합니다. 받기위해서 베푸는 마음 이것 또한 언젠가 원망으로 끝납니다. 베풀고 잊어버리세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고 알아보지 마세요.
가끔 보면 북한을 위해서 도웁시다. 이런 말을 해보면 "그거 제대로 전달되나요?" "아, 그거 어떻게 되나요?" 그저 베푸는 사람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신의 손에서 떠날 때 끝이에요.
바로 그 마음이 진정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이걸 꼭 잊지 말아야 되요. 받기위해서 주는 일 흔히 우리가 기복사상이라고 합니다마는 아주 피곤합니다. 오직 이미 가졌다는 마음, 스스로 풍요하다는 마음, 가진 마음에서 베풀고 기쁜 마음에서 주고 은혜에서 은혜로 그래서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그 부요하게 하는 풍요를 즐기는 거예요.
여러분, 잘 외우시는 시편 23편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I want Nothing! -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나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풍요함입니다.
넉넉함입니다. 아니 만족함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이미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가진 이 기쁨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인생의 성공이 있습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넉넉하게 받았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분에 넘치도록 가졌습니다마는 가진 것보다 욕심이 더 커서 늘 불만하고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이미 가진 것을 통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저희들입니다.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혔고 또 한없는 그 허영에 휩싸여서 이렇게 많은 세월을 가진 자 되지 못한 것처럼 빼앗긴 자처럼 다 잃어버린 자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제는 세상사람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가졌고 그리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교회 /고후6:3-7:1-/ 김형익 목사
2021-05-04 06:36:31
사람이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할 때는 뭔가 심정을 나누고 싶을 때일 것입니다. 머릿속의 이야기들, 논리의 나열들이야 그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겠지만, 사람이 자기 속 이야기,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열기를 기대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어느 서신서에서보다도 더 많이 틈틈이 자기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자기 삶의 이야기를 나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 사도를 향했던 의문과 적개심의 마음을 풀고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린도교회에는 거짓 교사들(거짓 사도들)에게 이끌려서 바울 사도에게 의문과 적대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그들을 얻고자, 그래서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 화목하게 하고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1. 바울 사도의 자천(6:3~10)
일찌기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에게 다른 사도들처럼(사실, 이들은 거짓 사도들이었습니다) 추천서를 왜 가지고 다니지 않느냐고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 자신이 바로 추천장이며, 그리스도의 추천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 사도는 그답지 않게 자신을 스스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나는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스스로를 추천한다고 말합니다(6:4). 여기서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참 일군이라고 추천하는 근거는 그들 앞에 드러난 그의 삶 자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삶과 유리된, 삶과 분리된 신앙이 아닙니다.
A. 삶과 신앙, 삶과 교리는 같이 갑니다.
언제나 이 진리를 놓친 시대, 놓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삶과 신앙, 삶과 교리는 언제나 같이 갑니다. 제가 왜 삶과 신앙이라고만 하지 않고 삶과 교리라고 언급하는지 아십니까? 신앙과 교리 역시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내용이 깊어져야 하고 분명해져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믿음의 내용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교리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심지어 교리는 기독교의 영혼이라고 까지 표현됩니다. 교리가 없는 기독교는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제가 주일 예배 전 성경공부 시간에 교리 공부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 그러나 이 공부가 그저 공부로 끝난다면 그것은 역시 몸이 없는 영혼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앙과 교리는 언제나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자신의 삶으로 말해주려고 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은 단지 말로만 전달된 것이 아니고 그의 삶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자신이 어떻게 자기가 전한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B.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6:3): 복음 사역자의 태도
바울 사도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에서 말하기를,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자체의 문제보다도 바울 사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받은 직책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직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는 사역이요, 직분이었습니다.
그는 이 직책이 그 무엇으로도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저 자신이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러 차례 이 본문을 읽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저 자신을 보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다짐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 제가 이렇게 복음의 직분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관찰하여 얻게 된 한 가지 사실은 ‘목사가 싫으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지는 않습니다마는, 심히 어렵습니다. 아마 바울 사도도 그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목사도 아닌, 사도 자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 대한 용납이 없이는 고린도교인들이 자기가 전한 복음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목사인 저 자신으로 인하여 복음의 사역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너무나 부족한 것을 알기에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열망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복음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직분이 놀랍게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나로 인하여 가리워지지 않도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일터에서 우리로 인하여 복음이 막히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가진 삶의 자세와 동일해야 할 것입니다.
C. ‘많이 견딤’의 목록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을 자기가 ‘많이 견딘 것’들의 목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견뎌야 했던 삶의 목록들입니다. 복음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이 목록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목록들의 주제는 4절에 소개된 ‘많이 견디는 것’(great endurance)입니다.
i. 많은 어려움들(6:4b~5): 복수(plural).
첫째는 많은 어려움들의 목록입니다. 4절 하반절과 5절에 있는데 모두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환난, 궁핍, 곤란, 매 맞음, 갇힘, 요란한 것, 수고로움, 자지 못함, 그리고 먹지 못함입니다. 1)환난, 궁핍, 곤란은 일반적인 어려움들을 기술하는 것이고, 2)매 맞음과 갇힘 그리고 요란한 것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박해가 그에게 가해진 것들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3)수고로움과 자지 못함 그리고 먹지 못함은 누가 부과한 어려움이라기 보다는 그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자발적 헌신의 증거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들을 견딘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ii. 은혜의 목록들(6:6~7a): 단수(singular)
이어 바울 사도가 나열하는 것은 은혜의 목록으로 6절과 7절 상반절입니다. 이것들은 앞의 단어들이 복수로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모두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 그리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함?동기의 순수함?을 지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행동했으며 오래 참았고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을 견지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자기를 붙들어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변하는 상황들(7b~8a): ‘말미암으며’(with, through)
이제 세번째 목록으로 바울 사도는 변하는 상황들을 열거합니다.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란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 나오는 목록은 모두 헬라어 전치사 ‘dia’로 시작하는 말들인데 ‘말미암으며’(through)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 입니다.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란 말은 의의 병기를 양 손에 잡고서 라는 말인데, 의를 자기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무기로 변화하는 상황에 그는 대처했습니다. 영광과 욕됨은 바울 사도 자신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고린도교회가 취했던 태도를 말합니다. 그는 사역을 통해서 영광과 모욕을 다 고린도교회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란 바울 사도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신에 대한 좋은 소문과 나쁜 소문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많은 변화를 경험하면서 거기에 따라서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의의 병기를 좌우에 가지고 섰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상황이 주변에서 우리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소문들에 따라서 변하기가 쉽습니까? 바울 사도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가 그 앞에 있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과 평가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의 평가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iv. 하나님의 역전시키시는 능력(8b~10): ‘같으나’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가 제시하는 목록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1)‘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2)‘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3)‘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4)‘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5)‘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6)‘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7)‘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 사도는 외면적으로 자기를 판단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자기의 실재를 아시고 자신의 상황을 변화,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의 실재를 보여줍니다. 이것을 복음의 역설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이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아도 사실 그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항상 누리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은 상황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야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경제적 상황에 처하든지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 사도와 같이 대단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경험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D.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놀랍게 나타나는 것은 고난이 없고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역경을 믿음으로 견딜 때이다.
바울 사도가 이 삶의 고백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놀랍게 나타나는 것이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기가 당하고 있는 모든 환난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기적을 간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통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삶은 외면적으로 보기에는 그대로 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고생을 하고 있었고, 일부 고린도교인들에 의해서는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너희들이 보기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은 나의 삶 속에서 놀랍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역경 속에서 믿음으로 견디는데서 가장 놀랍게 나타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 속에서 빛나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여기서 강조한는 것은 ‘많이 견디는 것’(great endurance)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엄청난 기적 같은 일이 있어야 간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견뎌내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간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눔이 우리 안에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구했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 절대로 당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나를 용납하라(6:11~13):
여전히 바울 사도를 용납하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을 얻고자 하는 사도의 마음이 여기에 표현됩니다. 아직도 그들은 바울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 마음에서 너희가 배척을 당하거나 거절을 당한 것이 아니라, 너희의 좁은 마음이 나를 배척하고 거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아비의 심정으로 자식에게 하듯이 내가 마음을 넓혔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혀서 나를 용납하라고 권합니다. 어쩌면 이 편지 고린도후서는 바울 사도가 아직도 사도를 배척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남아있는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권면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잃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거룩한 교회가 되라(6:14~7:1)
그런데 화제가 갑자기 바뀌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 14절에서 입니다. 바울 사도는 갑자기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 단락이 7:1까지 이어지는데,
이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 때문에 성경 학자들은 이 부분이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삽입되었거나, 바울 사도의 편지의 원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추측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야할 충분한 근거 역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연구는(Scott Hafemann)은 이 본문을 문맥에 비추어서 분명하게 해석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A. 구별과 분리(6:14b~16a): 의와 불법 / 빛과 어두움 / 그리스도와 벨리알 /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여기 본문에는 5개의 구별과 분리의 개념이 소개됩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입니다. 이것들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개념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바울 사도가 말하는 여기 ‘믿지 않는 자’(14절)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불신자와의 결혼, 불신자와의 동업을 금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불신자가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결혼이나 동업 문제를 금하는 것이라면 그런 문제가 이 문맥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의미하는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바울 사도 자신을 배척하고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들이 자신을 용납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이미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고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과 멍에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바울 사도가 말하는 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메시지(고후 5:20)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권면(고후 6:2)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결국에는 불신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여기 바울 사도가 소개하는 다섯 가지 대립과 불일치의 개념과 동일한 것입니다. 절대로 양자는 양립할 수 없으며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들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심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의 위임받은 직책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수많은 교회의 가장 큰 위험은 언제나 교회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교회 안으로부터 일어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이었고, 다른 복음의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지 않는 목사, 믿지 않는 장로, 믿지 않는 신학자, 믿지 않는 교인(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이고 분리를 정당화하는 실수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깊고도 신중한 영적 분별력을 요구합니다. 오용을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면서 유념하는 것은 바로 교회의 순결과 거룩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이어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집니다. 이 16절에서 18절에 있는 구약의 인용들은 사실 16절 상반절에서 언급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을 확증해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5개의 대립 개념들의 절정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인 교회는 절대로 우상과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B. 구약 인용
바울 사도는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구절을 한데 섞어서 인용할만큼 능히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16절 하반절에서 18절은 모두 구약의 인용입니다.
i. ‘내가 저희 가운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16절; 레 26:11~12; 겔 37:27).
첫째로 16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 가운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은 레 26:11~12 과 겔 37:27을 합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구약 인용은 출애굽과 관련된 그 직후에 주어진 약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린도교인들은 새언약의 백성이 된 자들이며 참으로 하나님은 저희 안에 계시고 저희 하나님이 되시며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ii.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17~18절; 겔 20:34; 삼하 7:14; 사 43:6)
또 17절과 18절은 겔 20:34와 삼하 7:14 그리고 사 43:6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부는 제사장들에게 해당되는 정결규례와 관련된 말씀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부정한 것과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앞의 인용이 출애굽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 인용은 구약의 또 한 번의 중요한 구원 사건인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관련된 약속이었습니다.
왜 바울 사도가 여기 장황하게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말하고 있는 논지, 즉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실상 이 두 구약 예언의 중심에는 17절의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가 있는 것입니다. 분리와 구별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강조점입니다.
C. 명령과 권면
i. 너희는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6:14a).
그러면 다시 한 번 14절의 명령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명령은 불신자와의 결혼이나 동업을 금하는 명령으로 쓰인 것이 본래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명령으로 볼 수는 있겠으나, 불신자와의 동업 자체를 금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게토를 형성하여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도시를 떠나서 산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멍에를 같이 한다’는 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게 될 수 있는 어떤 연합이나 그룹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판단과 분별력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그룹에 들어간다고 하거나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바울 사도를 대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을 불신자로 규정하면서 그들과 함께 교회, 곧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문제임을 바울 사도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거룩함에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자신을 깨끗케 하자(7:1).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면서 권면을 시작합니다. 바울 서신을 많이 읽어본 분들은 아실텐데,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은 바울 사도가 흔히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에게 이런 표현은 너무나 낯익은 표현이지만, 바울 사도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권면을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 사도는 ‘우리가’라고 하며 ‘깨끗케 하자’고 말합니다. 명령이 아니라 권유입니다.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도 자신이 가지는 연대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고린도 교회의 지체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관심은 고린도 교회가 깨끗한 교회, 순결한 교회,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침과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근거와 동기를 두 가지로 바울 사도는 제시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약속을 가진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약속들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예언된 약속을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답게 그들은 정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에 대한 약속과 그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삶의 순종에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거룩함을 이루어가는데 제시하는 첫번째 동기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다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은 마땅히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야 할 거룩한 감각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감각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가도록 만들어주는 요소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물질 축복, 예수님과 사역의 성공, 예수님과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지 못한 어떤 것을 함께 얻어야 내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기는 한, 예수 믿는 것을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쾌락을 얻는데 초점을 맞추는 세상의 삶의 방식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날 온갖 더러운 우상들로 둘러쌓여있으며, 이미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 우상들이 다양한 모습들로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은 일치될 수 없는데 말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의 핵심입니다. 이것들이 모든 비진리와 관계있는 것들입니다. 교회가 우상으로부터의 자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선교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가장 창조적이고 공동체적인 전략은 바로 교회 자체입니다. 세상에는 가득한 우상으로부터 자유한 교회의 존재야말로 세상을 향한 최고의 복음적 증거가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은 고립을 위한 분리나 순결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선교를 위한, 이 세상을 향한 복음 증거를 위한 분리이며 순결함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세상 속에서 ‘타문화권 선교사’와 같이 여겨야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거룩함을 이루는 길은 우상을 이겨보려는 우리의 의지력을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만족이 되시며,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를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심을 경험하며 그런 고백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고후6:4-10/ 모든 것을 가진 자
2014-09-29 10:36:0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미국의 어느 돈 많은 갑부가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정으로 만족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나에게 입증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돈 일백만 달러를 현찰로 드리겠습니다."
정해진 날짜와 장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는 정말로 만족한 삶을 살고 있고,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이 너무 좋아서 행복하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족들이 너무 잘해주기 때문에 만족한 삶을 누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부자의 돈 일백만불을 받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자가 묻는 단 한 가지 질문에 아무도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정말로 당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을 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 돈 일백만불이 필요합니까?"
여러분, 만족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찰 만(滿)자 입니다. 꽉 찼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예컨대 컵에 물이 꽉 차면 만족입니다. 그러나 물을 조금 마시면 빈 공간이 생기겠지요? 그러면 아니 불(不)자를 써서 불만(不滿)입니다. 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돈 일백만불이 필요하다면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진정으로 만족한 삶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진정으로 만족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의 명언을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에게든지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은 아닙니다. 비록 적게 가졌다 하더라도 가진 것에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어떤 세무서원이 목사님 가정에 방문을 했습니다. 세금을 매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무서원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가정에는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목사님이 선뜻 대답하셨습니다.
"예, 우리는 엄청 부유합니다."
그래서 그는 잔뜩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되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예, 저는 우선 하늘 나라에 영원토록 살아갈 좋은 스카이 맨션 한 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자상한 아내가 있고, 의좋게 살아가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거기다 오늘밤에 아무 걱정 없이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는 장소도 있습니다."
세무세원은 더 안들어도 알겠다는 듯이 목사님의 말씀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엄청난 부자네요. 그러나 세금은 매길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면서 되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가졌는지 적게 가졌는지 거기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비록 내가 적게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참으로 곤고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시련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이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6∼7절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는 큰 감격이 있었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제일 마지막 절에 보면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삶에 대해서 100% 만족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늘 주님이 주시는 행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8∼10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감격이 우리의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많은 시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런저런 많은 시련과 환난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바울이 이런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딤후3:12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를 핍박합니까? 사람의 부패한 심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악하면 다른 사람도 악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잘못되면 다른 사람도 같은 잘못을 범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악은 언제나 선을 질투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 시간에 조금 늦게 나오신 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그 분들의 심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다른 분들은 다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늦게 들어왔습니다. 마음 속에 죄송한 생각이 들것입니다.
"내가 다음부터는 조금 일찍 와야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옆에 자기보다 늦게 오는 사람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반갑고 안심이 됩니다. 그러다가 잘 아는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늦게 들어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죄송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래도 내 지각은 괜찮구나!"라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내가 게으르면 다른 사람도 게으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악하면 다른 사람도 악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적게 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헌금을 적게 내기를 바라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부패한 심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언제나 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질투하고 핍박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핍박을 받는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는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에서의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잠14:4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여러분,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그 외양간이 더럽혀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깨끗합니다. 그러나 소가 있으면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무슨 비난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르게 살려고 하고 열심히 충성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비난도 생기고 또 오해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똑같이 칭찬 받으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일을 하지 말아야지요.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몇 해 전에 작고한 미국의 유명한 흑인 여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세기에 한 사람 날까 말까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안 앤더슨이 처음으로 독창회를 열었을 때입니다. 그의 독창회가 끝났을 때 온갖 신문들이 앞뒤를 다투어서 혹독한 평가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노래이냐? 도대체 소프라노냐? 앨토냐? 베이스냐?"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그 혹독한 평가를 읽고서 통곡했습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두 번 다시 노래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딸을 달래었습니다.
"얘야, 너는 어찌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인정을 받으려고 하느냐? 도대체 너를 나쁘게 평가한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된다고 그러느냐?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면서 너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느냐?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란다!"
마리안 앤더슨은 어머니의 말에 다시금 용기를 얻어서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하다보면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100% 완전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를 모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믿음으로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그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6∼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그는 시련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꿋꿋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변함없이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히11:38에 말씀한 그대로 바울이야말로 세상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핍박과 환난도 바울을 넘어뜨리지 못했으니까요. 우리도 그런 사람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주후 4세기 중엽 안디옥에 크리소스톰이라는 유명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무척이나 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몰려왔습니다.
크리소스톰도 핍박자들의 손에 붙들렸습니다. 그런데 핍박자들은 크리소스톰을 붙들어 놓고 어떻게 처리해야 될 줄을 몰라서 매우 고심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두 번 다시 입을 열어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매우 때려서 내보냅시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매를 맞으면 자기가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 것이라고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 매로 때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깊은 감옥 속에 종신토록 가두어 놓읍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기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생겼다고 오히려 좋아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멀리 유배를 보내어 버리십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고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곳에 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그는 더 좋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따지지 말고 굶겨 죽이든지 불태워 죽이든지 빨리 처단해 버리십시다."
그 의견마저도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예수 때문에 순교했다고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래서 크리소스톰 한 사람을 처리하지 못해 엄청 고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군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입니다. 그 어떠한 핍박과 시련도 하나님의 일군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환난이 있습니까? 시련이 있습니까? 겁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련은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인내하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제시대때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에게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80세가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가족들을 홀로 남겨놓고서 자기 혼자 죽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난의 명상"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 앞에서 주님이 가시 못자욱과 가시관을 보이시면
나는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할까?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주는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주를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주는 유일의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하시면 나는 무엇이라고 답할까?"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 특별히 80세가 넘은 노모님을 주님의 손에 의탁했습니다.
"하나님, 불효한 이 자식은 어머님을 봉양치 못하옵니다.
내 어머님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불효한 자식의 봉양보다 자비하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나을 줄 믿고,
내 어머님을 주님께 부탁하옵고 이 몸은 주님의 자취따라 가겠나이다."
그 뒤 그는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교자의 이 신앙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일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핍박이 있습니다.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맡겨주신 거룩한 사명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큰 감격 속에 살았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그의 마음 속에는 샘솟듯 넘쳐 오르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8∼10절의 말씀입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바울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이렇게 저렇게 많은 수모를 겪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속이는 자 같았습니다. 무명한 자 같았습니다. 죽는 자 같았습니다. 또 근심하는 자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인간적인 평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참된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와 같은 기쁨, 즐거움, 남이 알지 못하는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감격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고 헌신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해방되기 바로 직전의 이야기입니다. 함경북도 청진시 바로 밑에 나남이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 여자 거지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였습니다. 몸도 건강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남루한 옷을 입고서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빌어먹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보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아니, 젊은것이 무엇이 할 일이 없다고 빌어먹고 다니나?"
그래도 그 여자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늘 모든 사람들에게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여자는 실성했어! 미친 여자야!"라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상대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우리 나라가 8ㆍ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소련군이 나남시에 진출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뜻밖에도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던 그 거지여인이 소련군 복장을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중위 계급장을 하고 장교로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실상은 미친 여자가 아니라 소련군 첩자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람들 앞에서 태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소련군 장교로서 내게 귀한 사명이 있다!"
그에게 이와 같은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너희가 아무리 나를 멸시해도 그럴 자격이 없어!"라는 남모르는 즐거움, 기쁨, 사명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를 천시 여기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을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대사들입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군이다!"라는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감격 속에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또 하나는 마음의 눈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육신의 눈은 밝았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환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어두웠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핍박했습니까?
그러다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아주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부터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바울에게 안수 기도를 해주어서 비로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그 시력은 육신의 시력이 아니고 마음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잘 보이고, 또 그가 자랑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분토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마음의 눈으로 현실 저편에 있는 영원의 세계를 밝히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마음의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에게 이와 같은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삭개오는 자기의 재산을 다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베다니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님을 위해 깨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 감격이 우리의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누릴 수 있고, 주님 안에서만이 맛볼 수 있는 놀라운 감격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 충만하게 누려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역설, 인생의 역설 /고후6:8-10/ 인명진목사
2018-03-27 08:29:37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역설의 종교, 역설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인생 역시 역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역설은 인간의 상식과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해될 수 없는 걸림돌입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며, 죽는 것이 곧 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와는 정반대입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 같습니다. 지는데 어찌 이길 수 있습니까? 버리는 데 어찌 얻을 수 있습니까? 한번 죽으면 끝인데 어찌 살 수 있습니까? 보편적인 지식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이 역설에 바탕을 두고 있고, 우리네 인생 역시 역설이 없으면 인생이 해석이 되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혜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입니다. 사람의 지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패배의 상징 십자가가 우리를 죽음과 죄에서 해방시키기는 승리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리얼하게 상상해 보십시오. 참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은 온통 패배 투성이입니다. 예수도 패배자고,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도들도 패배자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승리자라고 믿고 말한다는 게 참 웃기지 않습니까? 마치 이런 것하고 비슷합니다. 날마다 빌어먹는 거지가 자기 아버지는 재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은 자신을 못 박는 유대의 종교 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을 짓밟음으로써가 아니라 십자가의 패배를 통해서였습니다. 원수를 희생제물 삼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힘과 승리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세상에서 약함과 고난을 통해 보여준 최고의 역설입니다.
세상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기막힌 역설이고, 역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순과 역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샅샅이 살펴보십시오. 모순과 역설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생도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자세히 관찰해 보면 역설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여섯 가지 역설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이름이 기름보다 낫고, 재산보다 명예를 지키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 가는 것보다 낫고, 떠들썩한 분위기보다 초상집에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삼으라!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 인생의 참된 의미는 웃음보다는 눈물 속에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려라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유행가를 듣는 것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을 때에 영혼의 기쁨이 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시작이 아무리 좋아도 끝이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고, 분노를 참고 이겨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지혜도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팔복 역시 역설입니다. 부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복 있다. 웃는 사람이 복 있다 말하는 세상에서 애통하는 사람이 복 있다. 약삭빠르고 거머쥐는 사람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이 복 있다. 힘 있는 사람이 정의마저 쥐락펴락 세상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가는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 있다.
술수가 능한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 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연루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복 있다. 어려운 일 겪지 않는 사람을 곱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이 복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을 절대로 복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산다는 것은 복 없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실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복 중에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엄청난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여기에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의 인생 속에서가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삼고 살아가려는 내 인생 한복판에서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모순과 역설에 걸려 넘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가 무능력한 것이라고 넘어졌습니다. 헬라인들은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라고 넘어졌습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인생살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넘어집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그게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고 무능력한 것이니까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당연히 걸려 넘어집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 말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가 지신 십자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내가 져야하는 십자가는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
모순과 역설로 가득한 십자가를 삶으로 살아내는 일을 피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교회도 예수의 십자가는 말하지만 자신이 져야하는 십자가는 말하지 않고 축복만 말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의 지혜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지혜로, 역설의 지혜로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역설을 포기하고 세상 지혜를 따라서 산다면 믿음의 역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지혜를 말하지만 십자가의 역설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보다 더 큰 힘을 휘두르고, 세상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제물이 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은 자기 존재를 과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숨김으로써, 강함으로써가 아니라 약함으로써, 부유함으로써가 아니라 가난함으로써, 이김으로써가 아니라 짐으로써 증거 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짊어져야 할 역설이고 모순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는 힘을 사랑하는 권력 의지가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자아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나의 약함이 곧 주님의 약함이요, 나의 승리가 곧 주님의 승리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야 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너의 약함이 나의 강함을 드러내고, 너의 아픔이 나의 승리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그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신비와 역설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역설의 신비를 아는 사람들이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는 것을 압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는 것을 압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압니다. 이 신비, 이 역설을 알기 때문에 현실의 고난과 가난과 약함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이 걸어갔던 것처럼 역설의 진리를 믿고 역설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이성과 합리적인 법칙으로만 굴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일상은 우리의 논리처럼 척척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논리적인데, 우리네 인생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1+1=2, 2*2=4라는 수학의 공식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딱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10 나누기 3이라는 난제가 등장했습니다. 답이 3하고 0.3333이 계속됩니다. 문제는 풀려지지 않는 0.333어떻게 하겠습니까?
역설이란 이렇게 이성의 논리가 도저히 적용되지 않는 사건을 풀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인생의 역설을 푸는 열쇠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역설은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역설은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통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논리로 풀 수 없는 0.333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만취 음주운전자 모는 차가 길가 식당으로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은 즉사를 했고, 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고를 낸 사람은 자신이 음주운전을 했기 때문에 사고를 냈고, 죽거나 다치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다친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은 왜 다쳐야 합니까?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사람들은 이해되질 않는 일을 당할 때, 이성과 합리의 논리가 작동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재수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당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자꾸만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니 운이나 재수에 맡겨서 잊으려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된다면 종교가 필요 없고 신의 도움 없이 인간들끼리 잘 먹고 잘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은 이성의 논리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질병 때문에 주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은 이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절박하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무슨 뜻인가?
그 결과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더욱 붙잡고 의지하게 되고, 그때 자신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머물러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강하고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찾지 않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개입, 예수님의 역사, 예수님의 은혜를 통한 역설적 경험, 역설적 체험입니다. 이렇게 그가 깨달은 '약한 그때가 곧 강한 때다'라는 역설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 능욕 받는 것, 궁핍, 박해, 곤고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런 때에 자신은 약하고 무능력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드러나고 예수님의 능력은 더욱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은 자신의 역설적 경험들을 서술함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주석학자들은 이 본문 말씀을 감동적인 역설, 아름다운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설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얼핏 보기에는 속이는 사람 같지만, 복음의 진리, 영생의 진리,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참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무명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있습니다. 징계를 받아 고난 속에서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립니다. 근심하며 살 것 같지만,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며 삽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영혼과 삶을 부요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영원한 것,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가난해 보이지만 절대로 가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스워 보이는 사람이지만 결코 우습게봐서는 안 될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그런 사람입니까?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당당하고 멋있는 사람입니다.
역설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는 단지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를 생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역설의 진리이지만, 마침내 새로운 세상, 다가오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갖고 역설의 진리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겉으로의 기준과 평가와 안으로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물질세계의 기준과 평가와 영적인 세계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현세의 기준과 평가와 내세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영원한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냐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설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역설의 신앙으로 성숙해집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 신앙의 선배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세계 교회사와 우리나라 교회사에 기록된 위대한 신앙인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1866년 8월 27일에 대동강 평양의 한 포구에 큰 배 한척이 정박했습니다. 이 배 이름은 제너널 셔먼호입니다. 이 배는 조선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아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배는 9월 2일에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는데, 이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도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재대로 복음 한번 전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내한했던 첫 번째 선교사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병사 박춘권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대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를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한문으로 된 성경을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에게 건넸습니다.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한문 성경 종이를 떼어서 도배를 했습니다. 나중에 최치량이라는 사람에게 이 집을 팔았습니다. 최치량은 이집을 개조하여 여관으로 영업을 했습니다. 이후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첫날밤을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토마스 선교사가 던져준 성경으로 도배한 방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예사 벽지가 아니라 성경이었습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이집을 매입하여 널다리골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이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 유명한 교회입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과 여관집 주인 최치량은 장대현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짜맞춘 드라마라도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이 하나님의 드라마를 우리는 역설의 신앙이요, 역설의 인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고,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역설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눈에 보이는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토록 행복하게 하는 역설의 신앙으로 역설의 인생을 살아가십니다. 그리하여 세상 감당할 수 없는 당당함으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다! /고후6:1-18/ 유기성목사
2021-01-26 02:39:31
중동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한 청년이 선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얼마 전, 한 광고를 보았는데, 악마와 올해를 의인화한 여성이 연인이 되어 아주 오붓하게, 사람 없는 거리들, 식당과 극장가를 다니면서 데이트하는 장면들을 연출하며 마지막에, 2021년은 당신의 해가 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로 마무리하는 영상이었답니다.
아주 익살스럽게 표현했지만 결론은, 2020년은 한마디로 악마의 해였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 선교사는 그 메시지에 동의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올해를 악마의 해, 어두움의 2020년이라고 불러도,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신실하셨고 선하시기 때문에 2020년도 은혜의 해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그 고백이 참 귀하였습니다.
지금 코로나19의 재확산 속도가 무섭습니다. 주일예배도 당회와 구역회도 성탄절예배도 송구영신예배도 비대면 온라인으로 드려야할 사정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로 누구나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고 주 예수님을 영접하면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주님은 그 안에 임하시고 그와 동행하시는 은혜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 5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하고 호소했습니다. 고후 6장에서 다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1)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인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라고 주장하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거짓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바람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려서 엄청난 은혜의 때가 임하였음에도 믿고 누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고난을 겪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1)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유대인만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전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4에서 자신은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끝까지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상관없이 한결같이 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도 바울과 언제나 함께 해주셨습니다. 유명한 간증입니다.
:8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안타깝지만, 복음을 들은 고린도 교인들마저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 ... :13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임하였음을 전하는 자신을 보고 이제는 모든 의심을 버리고 사도 바울을 향하여 마음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가졌던 답답함이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직 예수님만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인 것은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은 아닌 것입니다.
온라인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신 목사님 한 분이 코로나19로 인하여 너무나 목회가 어려워 오셨다고 하면서 “이젠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형편이 어렵다는 의미이지만 또한 그동안 주님만 바라보지 않고 이런 저런 방법을 기웃거리며 목회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어려워짐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운 시기는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여겨졌습니다. 이제 진짜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암몬과 모압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 왕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대하 20:12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는 고백은 여호사밧 왕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제 진정한 답을 발견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여호사밧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대하 20:17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응답을 받은 여호사밧 왕은 다음날 찬양대를 앞세워 전쟁터에 나갔고 하나님께서 친히 모압과 암몬 연합군을 전멸시키셨습니다.
여호사밧 왕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암몬과 모압의 침공이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수도 없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14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나 살라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겠다는 신앙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엄청난 선언을 합니다.
: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는 것을 교리 지식으로만 알고 지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삼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전 된 자로 사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그 은혜를 거두셨습니다. 그렇지만 구약 성경에서 여러 번 하나님께서 이 일을 반드시 다시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6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레 26:12 말씀입니다.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사 52:11 말씀입니다.
:18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삼하 7:14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회복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된 자로 살게 되었다면, 지금이 아무리 어려운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은혜의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염려가 되겠습니까?
코로나19로 말할 수 없이 어렵고 혼란스럽지만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좋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은혜는 어려울 때 드러납니다. 시험이 오고 고난이 닥칠 때, 드러납니다.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쳤기에 쓰인 성경입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이길 힘을 얻었습니까?
요나는 실패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요나서를 통하여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성경의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갈 수 없었기에 쓰인 성경입니다.
로마에 가지 못하여 안타까워했던 사도 바울이 그려집니다. 그 답답하고 힘들었을 그 때가 사실은 은혜의 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손에 로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둘람 기도회는 환우들의 치유를 위한 집회였습니다. 설교자인 김동호 목사님께서 참 귀한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폐암 투병 중인 목사님이기에 더욱 귀한 메시지였습니다.
실제로 암 투병을 하면서 겪으셨던 일, 실제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 좋은 결과만 아니라 안 좋았던 일까지 솔직히 나누면서 깊은 은혜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한 해가 70 평생에 가장 고통스런 해였다고 했습니다. 암 치료만 세 번 해야 했습니다. 폐암 수술, 전립선암 방사선 치료, 갑상선암 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70년 생애 중 가장 기쁘고 감사하고 은혜로운 해였다고 했습니다.
기가 막힌 고백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곧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고 고백하고 감사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그 실체를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 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아무리 어려운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잃어도 보았고 6.25 전쟁도 겪어 보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어려움을 왜 못 이겨내겠습니까? 낙심되고 절망될 때,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며 나와 동행하신다!” 외치고 또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기도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한시간 기도, 성전 기도, 삼겹줄 기도,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개도 기회가 있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도 기회가 있고 선한 일도 기회가 있습니다.
교육관 비품 헌금에도 힘을 다해 봅시다.
은혜 받을 기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한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은혜,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은혜를 소홀히 여기다가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기 바랍니다.
찬송: 은혜로다
영원한 지금 /고후4:16-18, 고후6:1-2/ 이동원목사
2014-12-04 21:58:40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인 스펜서 존슨이 쓴 책 가운데 ‘선물’이란 책의 이야기를 들려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어떤 노인과 소년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노인은 어린 소년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갖도록 돕겠다고 합니다.
소년이 그 선물을 발견하면 평생을 정말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 그 선물이 무엇이지 암시는 주지만 그 선물은 자신이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년은 그 선물을 발견하지 못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소년도 성장해 가면서 그 선물에 대한 관심을 잊어갑니다. 그는 어느 사이 성인이 되어 취직을 하고 직장인이 되어 살면서 어느 날 문득 인생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직장에서 진급도 못하고 스트레스만 쌓여 가는 어느 날 이 청년은 과거 소년 시절 노인이 들려 준 선물 이야기를 생각해 냅니다.
다시 그가 노인을 찾자 대뜸 노인은 아직도 선물을 찾지 못했느냐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힌트를 줄 터이니 선물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노인은 청년에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하게 느낀 인생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라고, 그리고 그런 장면들에서 어떤 공통점이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이 청년이 살아온 인생의 스냅 사진들을 떠 올리다가 갑자기 그는 이 선물의 정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라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행복했던 모든 경우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에 그가 몰입하고 있던 그 순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영어 단어로는 "선물"이란 "present"가 현재를 의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영원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 영원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적 선물이기도 하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 순간 여기서부터 경험될 수 있는 현재적 선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고(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또한 미래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지만(아직 오지 않았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영원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쓴 유명한 책의 제목이 오늘의 저의 설교 제목과 동일한 ‘영원한 지금’(The Eternal Now)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는 어떤 태도로 영원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보낸 그 편지에서 대답을 찾고자 합니다. 그 영원한 지금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지금은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겪어 온 환난을 살 소망까지 끊어진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라고 고백합니다.(고후1:8-9) 그런데 그가 이런 환난의 시간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극복하고 있는지를 본문에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낙심하지 아니하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무엇 때문이었습니까?
4:17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여기 이 구절에서 우리는 대조적인 3개의 단어들을 발견합니다. 잠시와 영원, 환난과 영광, 경한 것과 중한 것입니다.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환난-그것이 아무리 심한 것이었다 해도 그는 환난의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영원한 영광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볼 수 없는 미래에 속한 것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볼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과 동일한 고백을 우리는 롬8:18에서도 발견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다시 말하면 바울은 고난의 현재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만들어 냄을 믿고 버티면서 낙심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의 탄생을 묵상해 보십시오. 제가 만일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여기 계신 자매들의 손에 쥐어 드리면 싫어할 분이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이아몬드는 원소기호로 표기하자면 C-탄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혹시 숯덩이도 원소 기호로 말하면 탄소인 것을 아시는 지요? 제가 만약 숯덩이 하나를 지금 자매들 손에 쥐어 드리면 좋아할까요? 혹시 똑 같은 탄소가 하나는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다이아몬드가 되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만지기도 싫어하는 숯덩이의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숯덩이 탄소가 저 땅속 깊은 곳에서 어마 어마한 지열과 어마 어마한 지압을 통과하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그 탄소가 아무런 고난도 없이 그냥 세월만 보내면 숯덩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12:10에서 자신에게 직면한 약함도 능욕도 궁핍도 박해도 곤고도 오히려 기뻐하겠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지금의 환난이 바울로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사는 다이아몬드 인생을 만들고 있음을 그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숯덩이 인생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이아몬드 인생을 구하시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고난의 지금은 바로 그 영원한 영광의 내일을 바라보고 사셔야 하는 시간입니다.
2.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고난은 고통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바울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아픔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은혜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12장에서 자신의 치유되지 못하고 있었던 육체의 찌르는 가시의 아픔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말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후6:1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어떤 번역은 이 대목을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지 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미 고난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함께 하고 있는데 그 은혜를 유익하게 선용할지언정 무익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Philips역.-not to fail to use the grace of God) 그렇습니다.
고난중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권면의 말씀인 것입니다.
고난의 상황 그 자체는 어쩔수 없더라도 고난에 대한 반응의 선택의 몫은 여전히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응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고난의 시간은 오히려 엄청난 은혜의 유익을 누리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오늘의 설교를 열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펜서 존슨의 ‘선물’이야기를 인용했습니다. 이제는 한국의 크리스챤 베스트셀러 작가인 조신영(경청의 저자)의 최신작 ‘쿠션’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 한 바로는 모든 일을 바로 처리하기보다 바로 바로 모든 일에 잘 화를 내고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바로이었습니다. 조부의 유산을 상속하기 위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조부의 재산보다 더 중요한 유산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극과 반응의 틈새에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는 자극과 반응의 틈새 공간을 인간의 몸이 닿는 모든 부분에 완충물질로 사용하는 쿠션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쿠션, 우리 영혼의 쿠션은 고난중에도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품성, 온유의 품성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유산 상속의 과정에서 풀어 낸 숙제는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반응(Response)능력(Ability)=자유(Liberty)] 반응하는 능력이 인생을 자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바로 기도와 묵상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러면 지금우리가 지나는 시간이 비록 고난의 시간이어도 기도하면서 은혜를 누리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영원에서부터 부어지는 그 은혜를 누리셔야 할 시간입니다. 고난중에도 은혜는 여전히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3.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며 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사실 은혜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매우 광범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고난의 골짜기를 잘 통과할 수 있었음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허무한 인생의 광야에서 이런 보람을 누리며 하나님의 일을 수종들 며 살아가고 있음도 은혜입니다. 깨닫고 보니 그리스도인의 평생은 은혜에 빚진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은혜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 은혜를 나누며 살기로, 그리고 그 은혜를 전하며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이번 여름철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단기 선교와 단기 봉사의 장에서 땀을 흘리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은혜의 고마움을 알고 섬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주위를 감동시킵니다. 그런 곳에 남겨진 섬김의 향기는 오래 오래 거룩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섬김의 사역은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환경을 벗어난 섬김의 광야에서 은혜의 고귀함을 체험한 우리라면 이제 우리가 돌아온 일상의 장, 우리의 가정, 마을 직장에서 다시 그 은혜를 나누고 전하는 삶을 계속하셔야 합니다.
종종 우리 중에는 여름철 봉사같은 장에서 자신을 나타낼 기회가 있으면 최선을 바쳐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다가도 일상의 장에서는 다시 자신을 자폐시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도의 우선순위의 장은 땅끝만이 아닌 여기 예루살렘에서부터 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는 지금 여기서 전도하고 지금 여기서 섬기실 시간입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회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옛날 그리스의 시라큐스의 거리 한 복판에는 괴상하게 생긴 동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동상은 날개를 어깨 뿐 아니라 발에도 달고 있었습니다. 앞머리는 무성한데 뒷 머리는 대머리였습니다. 동상 아래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 있었습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리시퍼스. 그대의 이름은?-기회(시간) 그대는 어째서 날개를 발에도 달고 있는가-빨리 빨리 날아 다니기 위해서. 그대의 앞머리는 왜 그렇게 무성한가?내가 올때 사람들이 쉽게 붙잡기 위해서. 그대의 뒷머리는 왜 그렇게 대머리인가?-
내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기 어렵기 때문에. 기회는 그런 것입니다. 전도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의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의 기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기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노아는 이웃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방주를 만들기 위해 땀을 흘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기꺼이 하루 하루를 바쳐 순종했습니다. 그가 방주를 만든 다음은 방주의 문을 활짝 열고 이웃들이 들어오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노아는 자기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벧후2:5)고 베드로 사도는 증거합니다. 그러나 그 방주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침내 그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 다음 기회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복음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6: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바울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지금이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할 시간이라고, 지금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나라로 초대할 시간이라고. 지금 이 가을이 바로 이웃들의 영혼을 거두어 들일 영원한 지금의 순간이라고. 이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시겠습니까?
다시 이번 여름 선교의 마당에서 땀방울을 흘리시던 동일한 열정으로 이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전도하고 섬겨 주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이 순간의 우리의 행복입니다. 이제 이 가을 다시 성령의 네비게이션을 따라 영원을 준비하는 순종의 걸음을 옮기시겠습니까? 바로 이 영원한 지금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