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25절 - 36절 설교 모음
하나님의 때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요7:25-36/ 유기성목사
2022-09-22 10:33:25
요 7:25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 26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27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31 무리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그들이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도, 이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시겠는가?"
32 무리가 예수를 두고 이런 말로 수군거리는 것을, 바리새파 사람들이 들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다. 3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 34 그러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 35 유대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려고 하기에, 자기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가?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유대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리스 사람들을 가르칠 셈인가? 36 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 한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일에는 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일어나더라도 조급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올 것이라 예상하고 그때 붙잡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다 알 정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 했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25, :30,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30) 말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33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
‘가만 가만, 내가 조금 더 있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갈거니 조금만 기다려’ 그런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반응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왜 아직 때가 아니었겠습니까?
우선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는 일을 마치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성경이 나오고, 사람들이 복음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온 세상에 전해 줄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마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어리둥절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이 유대인인가? 하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대답은 하나님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 했으나, 할 수 없었던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못하도록 지키셨기 때문이라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란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큰 뜻을 품고 오셨다가, 가룟 유다의 배신과 빌라도의 판결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온 인류의 속죄제물이 되려고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이 비밀을 알지 못했을 때,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십자가가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임을 알았고 그때부터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힐 날이 아직 아니라는 것만으로 담대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잡으러 온 성전 경비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3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 :34 그러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지, 어리둥절하였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 안다고 생각하였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요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실 분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되면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고후 12:2-4에 보면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낙원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방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20년 전 타지키스탄 두산베에 있는 교회가 간청하여 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 중에 이슬람 신학생들의 폭탄 테러로 현장에서 9명이 죽고 100여 명이 부상한 끔찍한 일을 겪은 교회였습니다. 비행기로 8시간 반, 또 버스로 12시간 여행 끝에 도착한 교회는 폭탄테러의 참혹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창문은 다 깨어져 나가 비닐로 막아 놓았고, 곳곳이 부서지고 무너져 있었습니다. 두 눈을 실명한 청년, 자녀를 잃었다고 기도해 달라는 노인을 두 분이나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설교는 천국에 대한 설교 뿐이었습니다. 통역을 하던 형제가 울고 교인들이 눈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606장 찬송(“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가 장례예배가 아니라 보통 예배 때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늘 순교 상황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도 예배 때 이 찬송을 부르며 은혜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집회 중에 스데반이라는 이란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러시아말 통역을 또 다시 이란 말 통역으로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말씀의 1/3도 다 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란에서 공산주의자였는데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서 “너는 왜 나를 믿지 않느냐?”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옥한 후, 예수님께서 지시한 곳을 갔는데, 이란 지하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은 종교경찰에 붙들려 가서 목 베임을 당하였고, 이 사람은 타지키스탄으로 도망 왔습니다. 시골에 숨어서 지내다가 혼잣소리로 찬송을 부르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당신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산 건너편에 있더라고 해서, 이 교회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듣고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 순교한 목사님을 대신하여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안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순교자 스데반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 사람은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사셨기에 십자가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휘황찬란한 열두 진주 문이나 황금 길을 보며 위안을 삼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같은 개념으로 쓰고 계십니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엇을 보았을까요? 불타는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도대체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는 잃어버린 자식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에도 죄인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배신할 가룟 유다의 발도 씻겨 주셨고, 입도 맞추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를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도망갈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너희와 나는 한 몸이다’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 뜨거워 불타는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로 살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더라도, 어떤 삶을 살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잃어버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온갖 죄와 염려, 미움, 두려움에서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의 가슴에 주님의 불타는 사랑이 부딪혀지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붙기를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된 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죽고 난 다음 천국 들어가는 것만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달라집니다.
그 마음에도 사랑이 불일 듯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삶은 길어도 100년이고 그나마 3/1이 지났고 반이 지났고 2/3가 지났습니다.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영생을 얻은 우리가 이 남은 시간 무엇을 하며 살면 좋겠습니까?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신자도 사랑할 수 있는 불타는 사랑, 진정한 용서입니다.
이 사랑이 지금 우리나라에, 우리 민족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로 인하여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중심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병든 사람이 가장 병든 사람입니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식으니 마귀가 우리를 마음 놓고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아직도 “안돼요, 못해요” 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이 아니면, 신앙생활이 결코 기쁨이 아닙니다. 능력도 아닙니다.
고역입니다. 멍에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는데도 이 모양으로 사는가? 탄식하지 말기 바랍니다.
진정한 사랑의 역사는 받기만 할 때 경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사랑이 흘러나갈 때 진정 사랑의 역사가 누려지는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가운데 <어거스터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마을에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날 밤 신비한 노인이 아기 어머니의 꿈에 나타나 '아기를 위한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자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해주세요."
어머니의 소원대로 아이는 자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났을 때 이 중년의 남자는 사랑을 받는데도 기쁜 줄 모르고 불행하다 여기며 황폐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노인이 중년 남자의 꿈에 나타나 과거 어머니에게 했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네 소원이 뭐냐?" 그 남자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는 절실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도 사랑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앤드류 머레이 선교사가 “용서받는 기쁨은 죄인의 것이요 이 땅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기쁨은 그리스도 자신의 기쁨이요 하늘의 기쁨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그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빠져서, 세상 이익만 구하며, 아등바등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기도하기 바랍니다. 믿어지는 것도 큰 응답입니다.
또한 “독생자도 십자가에 못 박게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으로 얼어붙은 내 가슴을 쳐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확신만 생기면 우리는 어떤 시련도 고난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만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찬양: '주님의 시간에'
그리스도 판별(2)-성령을 주시는 분 /요7:25-51/ 김형익 목사
2021-05-06 11:00:23
지난 주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마음자세’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면 눈이 열리고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어떻게 판별하는가, 어떤 근거로 예수를 믿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1. 상황: 예루살렘 거주 유대인들의 의혹(25~26)
지난 주의 본문에서 살펴본 것이 주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순례를 왔던 사람들의 견해였다면 오늘 읽은 본문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견해가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의 입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물론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그리스도 판별의 기준입니다.
2. 오해와 논쟁들
먼저 예수가 누구냐는 문제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편견들, 그리고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A. 불신(27, 40~46, 52)
기본적으로 그들이 가진 이런 관심은 대부분이 불신의 전제에서 행해지는 것들입니다. 27절은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말하면서 만일 그리스도(메시아)가 온다면 어디서 오는지 모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안다는 것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인데, 사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밝혀줄 뿐입니다. 이미 헤롯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물어서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시리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미 5:2).
B. 다툼(40~43).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일부 유대인들은 ‘그 선지자’라고 모세가 한 예언을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아니라고 합니다(40~41). 예수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쟁론이 벌어졌습니다(43).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람들의 근거는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한 미가서의 예언을 아는 사람들이니 앞서 말한 성경에 무지한 자들보다는 성경을 더 아는 자들입니다(42). 여기서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사람들과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사람들 그리고 성경을 잘 알아서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올 것을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결국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완전히 거부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만 또 거기에 대해서 열을 낼 수도 있지만, 그분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지 않는다면 그 인정과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C. 적극적인 공격(32,44)
모두가 다 앉아서 예수가 누구인가 판단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이미 작정했고, 그러기 위해서 부하들을 시켜서 예수님을 잡아오게 하였습니다(32).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잡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의 권위에 눌렸기 때문이고, 주님의 때가 아직 아니었기 때문입니다(30).
D. 믿음(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31). 우리가 요한복음 2:23~24에 의하면 이런 믿음은 아직 분명한 믿음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듯 합니다.
3. 그리스도 판별 기준: 성령을 주시는 분(37~39)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주님 자신이 어떻게 당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시는가, 무엇이 합당한 기준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읽은 37~39절에서 목마른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이야기이고, 마시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적 초청은 주님의 사역에 대해서 그리고 믿음의 삶, 성령충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본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판단의 근거는 ‘인간의 목마름을 완전하게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아무도 이렇게 말한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신약의 사도들도 이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진리입니다. 이해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경험하도록 초청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관계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단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있는 죄와 죄의식을 용서하고 고치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 번도 채워져 본 적도 없는 갈망의 채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오늘뿐 아니라 몇 번에 걸쳐서 상고해 볼 계획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간단하게 살펴볼 주제는 주님이 말씀하신 ‘목마름’ 혹은 ‘갈망’이라는 주제입니다.
4. 목마름(갈망)의 정체
지난 주일 목회서신에 desire에 대해서 썼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목마름은 desire라는 개념으로 우리의 신앙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A. 부정적 목마름: 우리는 목이 마르지 않다!
갈망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고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어떻게 느끼시는지가 궁금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어떻게 느낄지 궁금합니다. 그 맛을 보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고 약속하신 대로 그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높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언젠가 경험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약속입니까?
혹시 이 말씀에 대해서 냉소적인 반응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지요? 그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했다면 믿을 것이고, 또 그것을 더욱 바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이 말씀으로 증명하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경험하지 못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만들거나, 나중에 천국가면이라는 조건을 붙여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아니면 우리 신앙에는 깊은 균열이 있는 것이고, 어쩌면 우리는 예수를 안 믿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이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목사는 믿겠습니까? 근원적인 문제, 우리의 불신앙 또는 주님의 이 약속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정치가가 공약을 하듯이 주님께서 공수표를 내신 것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목이 마르지 않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목이 마르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하는 선은 적당히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가면서 그것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절제의 이름으로 심하지만 않으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는 의무방어 정도로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자연히 우리를 율법주의로 데리고 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얼마나 내 desire를 억누르느냐를 나와 다른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믿으면, 그는 ‘욕심만 없으면 신앙 생활을 잘 할텐데..’라고 잘못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B. 긍정적 목마름
이런 심각한 오해에 기인한 신앙에 기초를 하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밀려나게 됩니다. 갈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름을 억누르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목마른 사람’, ‘갈망이 있는 사람’을 주님을 찾으십니다.
아니 그 목마름 때문에 거의 죽겠다고 느낄 만큼, 그 갈망 때문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된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갈망은 신앙이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갈망이 없다면 하나님도, 천국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 갈망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속에 만들어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적절한 대상을 향한 애정, 사랑이 적절한 대상을 향할 때 우리 영혼의 기쁨은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그 적절한 유일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청교도 목사인 헨리 스쿠갈은 “믿음은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영혼의 만족이다”라고 썼습니다. 만일 갈망이 없다면 만족도 없을 것이고, 우리 신앙은 의무 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느냐에 의해서 평가되기 보다는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돈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고 돈에 목말라 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돈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제가 고민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의무적으로 기본의 도리만을 하는 수준으로부터 영적인 갈망이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주님께로 나아가 주님을 마시고 만족을 얻는 수준으로 가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기본의 도리만을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원리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주님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믿음의 싸움은 본질적으로 desire을 둘러싼 싸움입니다. 내 속의 갈망의 방향, 갈망의 대상을 정하는 싸움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잘 하는 것이 영적 싸움의 본질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주님의 일을 문제없이 감당했지만, 그들 안에 있는 desire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버림을 받는지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혼동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의외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여기서 혼동하고 넘어집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여러분 평생에 싸운다고 할 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영역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5. 죄의 실체는 갈망의 대상을 변경하는 것이다. 죄는 갈망을 타락시켰다.
본래 사람이 창조될 때 하나님을 인간 갈망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인간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는 그 갈망의 대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죄의 실체는 갈망의 대상을 변경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갈망 자체를 타락시킨 것입니다.
A. 우상숭배의 정체: 탐욕(약 4:4; 요일 2:15~16)
이 갈망의 문제는 우상숭배와 깊이 관련이 됩니다. 우상숭배의 정체는 바로 갈망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탐욕 자체가 우상숭배라고 말을 했습니다(골 3:5).
우상이 무엇입니까? 지난 주일 목회서신에서 쓴 대로, Tim Keller의 말을 빌리면, “우상은 여러분에게 만족을 약속하는 그 모든 대상들, 가짜 신들입니다. 하나님 보다 여러분에게 더 중요한 모든 것, 하나님 보다 더 여러분의 마음과 상상을 사로잡는 모든 것,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여러분이 매달리는 모든 대상이 우상입니다.
어떤 것이 여러분의 행복, 인생의 의미 그리고 정체성에 하나님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기를 즐겨 하는 대상, 여러분이 꿈꾸기를 좋아하는 대상, 여러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가령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들이 우상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것을 가리켜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약 4:4).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성도들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요일 2:15~16).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바라거나 갈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하와의 범죄는 본질적으로 이 세 가지였습니다. 먹음직도 함은 육신의 정욕이고, 보암직도 함은 안목의 정욕이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생의 자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와의 죄의 본질 역시 갈망의 대상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다 탐욕과 관련된 것임을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바울 사도가 우상숭배를 탐욕이라고 부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B. 십계명의 핵심: 갈망의 문제
가령, 구약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보십시오. 십계명의 제일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집, 남의 아내, 남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계명은 직접적으로 탐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열 계명 중 하나인 것일까요? 아니요. 십계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갈망의 문제, 혹은 탐욕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일계명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갈망의 유일한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대상으로 모시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다른 것, 돈이든지, 성공이든지, 명예든지 혹은 쾌락이든지 그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여러분이 더 목말라 하고 그것을 여러분이 더 갈망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일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즉, 일계명도 근본적으로는 갈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마지막 계명도 그런 것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여덟 계명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두 번째 계명이나 안식일 계명도 다 그 문제입니다. 탐욕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방해합니다. 예전의 미국은 주일에는 보통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이 부추겨지면서 그것이 깨어져버렸습니다.
부모를 공경함도 물질에 대한 사랑과 자기 사랑에 의해서 깨어지게 되고, 살인, 간음, 도둑질, 그리고 거짓말 같은 것들이 행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대한 갈망과 어떤 유익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이 탐욕이고,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하찮은 어떤 존재로 여긴 사람들에게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C. 갈망의 대상이 바뀐 결과의 비참함(창 4:16~24)
갈망의 대상이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어떤 것으로 바뀐 결과가 무엇입니까? 적어도 아담과 하와는 그 결과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들인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렸고, 결국 하나님을 떠난 삶의 비참함은 이 세상의 문명을 만들어가면서 사는 것 외에 없다는 것을 가인의 후예들이 증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 안에서 그들의 소일거리를 찾고, 이 세상 안에서 그들의 갈망의 대상을 찾으려고 분주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 번도 자기들의 갈망이 진정한 의미에서 만족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단지, 여기서 저기로 그들의 갈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변경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6. 회개: 갈망의 대상을 변경하라.
신약 성경이 죄인을 초청하는 말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구원하는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추구하고 갈망하던 그 대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의심해 보아야 마땅합니다. 한 번도 하나님 자신을 여러분이 갈망하고 살아보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아직도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회개는 갈망의 대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방향의 전환, 즉 U-turn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던 갈망이 이제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점검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여러분의 삶을 거룩한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을 의심하셔야만 합니다. 갈망의 대상이 변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것은 거짓입니다.
7. 믿음: 갈망의 유일한 대상인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갈망하라(딤전 6:6).
믿음은 이렇게 회개한 사람이 계속해서 자기의 유일한 갈망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계속 매일 매 순간 갈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더 많은 소유를 가지는 것, 더 부자가 되는 것이 여러분의 갈망의 하나가 된다면 주님은 거기 계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족하는 마음이 없다면 경건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딤전 6:6).
만족이 없다면 경건을 쌓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갈망의 대상이 되실 때에 만이 여러분의 경건은 유익한 것이 됩니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 열심히 기도했어도 우리의 경건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 탐욕에 의해서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지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8. 결론: 그리스도께서 갈망을 채워주신 것을 경험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냉소적이 된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목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갈망의 채움을 받아본 사람,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께로 와서 마시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남을 경험해본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압니다. 그리고 그분을 더욱 갈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만이 그 모든 것들이 주는 기쁨을 정상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금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놓으시고 사람을 거기 두셔서 그 모든 것을 즐거워하고 누리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 물질도, 건강도, 가정의 행복도, 성공도, 성취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누리게 주신 모든 것들입니다. 즐기라고 주신 선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게 된다면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재앙이며 저주거리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여러분의 앞에 두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한 분만을 갈망하십시오. 아니, 먼저 이렇게 구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너무나 이 세상의 것들에 목말라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런 목마름이 없습니다. 제게 목마름을 주십시오. 견딜 수 없을 만큼 주님을 목말라 하게 하여주십시오. 그래서 주님께 뛰쳐나가 마시게 하시고 제 속에서 생수의 강이 한없이 흘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기도가 된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길 외에 주님이 주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앎과 모름 사이 /요7:25-31/ 김기석목사
2015-07-12 18:09:23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리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그들이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도, 이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시겠는가?"]
• '그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춘분이 지난 정원에 제법 볼 것이 많아졌습니다. 상사초는 볼 때마다 애잔한 마음을 자아냅니다. 어쩌다가 잎이 다 스러진 후에야 꽃이 돋아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일까요? 그 엇갈림의 시차가 안쓰럽습니다.
여하튼 봄은 우리 옆구리를 자꾸 찔러 바깥에 나가자고 졸라댑니다. 볼 것이 많아 봄이라지요?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하다지만 그래도 자연 세계는 자기 때를 잘 지키는 것 같습니다. 때를 못 지키는 것은 어쩌면 사람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며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 했던 뱀의 속삭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며 살아갑니다. 지구라는 녹색별은 수없이 많은 생물종의 고향이지만 인간이라는 한 종에 의해 멸절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다움이란 자기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선과 악, 미와 추, 좋음과 싫음, 네 편과 내편을 가르며 살아갑니다. 삶을 그렇게 구획 짓는 빗금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복잡해집니다.
저는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을 그런 빗금이 스러져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두루뭉수리로 살자는 말이 아니라, 품어 안고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도 집착하는 남과 구별되려는 욕망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참 부질없는 열정일 뿐일 겁니다.
사순절기 한 복판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시작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가 등장하자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25) 이 대목에서 제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라는 단어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의 길과 '그들'의 길이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26절은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들'임을 암시합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지도指導'란 '가리키어 이끎' 혹은 '단체 등의 조직, 방침 등을 결정하고 본래의 목적을 향해 성원을 통솔 인도하는 일'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의 목적을 향해'라는 말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그런데 할배들을 이끄는 책임을 맡은 이는 일정을 체크하고 가는 길을 확인하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애교로 보아줄 수 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자리에 선 이들은 정말 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지도자연하면서 사람들을 본래의 목적을 향해 이끌지 않고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눈먼 지도자'라 지칭하셨습니다. 스스로 길을 잃은 목자가 많은 세상입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피터 브루겔(P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은 마태복음 15장 14절에 의지하여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다>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은 거의 그의 유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는 6명의 앞 못 보는 이가 등장합니다. 앞사람과 뒷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지팡이입니다.
고개를 갸우뚱 들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다른 감각을 활용하기 위한 안간힘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좁은 개울과 교회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선 사람은 벌써 뭔가에 걸려 넘어졌고, 뒤이어 다른 이들도 막 넘어지려는 찰라입니다. 브루겔이 그 그림을 그린 때는 1568년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에 시작되었으니까 그로부터 약 50년 후에 나온 그림입니다. 브루겔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종교가 사람들을 본래의 목적을 향해 이끌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풍자하려던 것이 아닐까요? 제게는 맨 앞에서 나동그라진 사람과 가까운 배경으로 등장하는 교회가 겹쳐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예언자적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오늘 지도자라는 이들은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끌고 있는가는 의문입니다.
정치 지도자든, 종교 지도자든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이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려는 일을 제쳐두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아니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요한은 바로 그런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 사람'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이 사람'이라는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낯선 타자입니다. 문제적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선뜻 가까이 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이기에 그들은 '이 사람'이라는 단어를 골랐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용했다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 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일 음모를 꾸미는 것은 분명한데 왠지 쭈뼛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지도자들이 그를 진짜 그리스도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 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절대화될 때 몰상식이 되는 법입니다. 그들의 상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인데, 자기들은 그가 어디 출신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는 게 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앎을 근거로 하여 세상을 판단하기 일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것은 그가 자기의 무지함을 알기(無知의 知) 때문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더 깊은 앎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중심을 향해 그는 늘 학생의 마음으로 다가갔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셨던 것일까요? 어느 날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주님은 사람들이 한 말을 인용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28a)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고, 직업이 목수였고, 제자들과 유랑하며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주님은 그것을 긍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겉모습만 알뿐 그 깊은 속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의 핵심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좀 딱한 생각이 듭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기 초월의 길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주님은 자기에게서 벗어나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선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무기력하게 사는 것은 '자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집착은 우리가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입니다. 뭔가를 붙들고 있는 손으로 다른 것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집착하는 사람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 '보내신 분'
예수님은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무지한 이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명함에 찍어가지고 다니는 직함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없기에 서술어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8b-2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보냄을 받은 분'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은 참 되신 분, 참이신 분, 곧 하나님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시기도 하시지만, 누군가를 불러 사명을 맡기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어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당신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백성들의 삶을 꾸짖기도 하시고, 그들의 죄로 인해 미구에 닥쳐올 재난을 예고하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절망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더듬으면서 나아가듯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에 멀미를 하며 살아갑니다. 권태에 사로잡힌 이도 있고, 공포심에 마비된 채 살아가는 이도 있고,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의 길을 무반성적으로 따라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보냄을 받은 자로 여기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은 ‘보냄을 받았다’는 이 말을 배타적으로 예수님에게만 귀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나의 '있음'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메시지로 가족들 앞에 혹은 동료들 앞에 서 있습니까?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특권으로 받아들일 때 영적 타락이 시작됩니다. 교회의 직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하라고 준 직책을 계급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마땅히 가야 할 곳에 가지 않는 것 또한 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시어 아픔의 자리에 가시려 합니다.
• '때'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 말하자 사람들은 흥분했습니다. 대단히 불경한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수군거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분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꼈던 것일까요? 그런데 요한은 그들이 멈칫했던 까닭을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맙니다.
예수님이 걷는 그 길의 끝에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때가 무르익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유예의 시간인 셈입니다. 그 시간은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한은 "무리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31)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가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러시아의 짜르 암살모의(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처형 직전에 사면을 받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형지에서 신약성경을 읽었고 예수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1854년에 자기에게 성경을 준 어느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실제로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
(If someone proved to me that Christ is outside the truth, and that in reality the truth were outside of Christ, then I should prefer to remain with Christ rather than with the truth.)
선교는 매력의 감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그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이웃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누구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저 또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표징을 행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씀이,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표정과 말씨가 사람들 속에서 선한 것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 순례 여정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알고 모름의 차이 /요7:25-36/ 박형근목사
2023-03-04 14:51:37
스튜어트란 분이 쓴 책에, 유명한 시집을 각기 다른 환경이나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본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숭이는 책을 보자 움켜쥐고 냄새를 맡고, 먹으려하다가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열 살 된 꼬마는, 그 시집을 장난감처럼 갖고 놉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40대 농부는, 시집을 흔들거리는 책상다리 받침으로 씁니다. 그 책의 진가를 아는 이는, 조용히 앉아서 읽는데 책에 정신이 팔려,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마음은 저 세상에 있는 듯 행복에 잠겨 있습니다.
시집을 성경책으로 바꾸어도 같지요. 성경말씀을 펴서 읽으면 읽을수록, 몸은 이 세상에 있어도 마음은 저 세상에 있듯 행복합니다. 계 1:3에‘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읽으며 알면, 무엇을 할 때 말씀 따라 하지요. 주님의 복을 누립니다. 읽지 않으면 그렇게 안 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주일학교 학생들의 성경지식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해서 아동부에 가서 열 살 난 소년에게 물었습니다.‘여리고 성을 부순 사람이 누구인 줄 아니?’
목사님질문에, 소년이 깜짝 놀라며‘몰라요. 저는 부수지 않았어요. 정말 몰라요.’옆에 있던 교사가 거들면서‘이 소년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목사님이 기가 차서, 다른 반에 찾아가 같은 질문을 했지만 한 아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따라다닌 교사가 당황하며‘목사님, 여리고 성을 누가 부수었든,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우리가 힘을 모아 곧 다시 쌓겠습니다.’여리고성을 부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향해 고함칠 때, 하나님이 부수셨지요.
여리고 성을 누가 부쉈는지 몰라도 되지만, 살면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견고한 여리고 성을 부수신 하나님, 저와 함께 하옵소서.’기도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가면, 여리고 성은 우리에게 산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아는 것이요, 읽은 것입니다. 행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세상일도 그렇지요? 차를 몰고 먼 길을 갈 때, 길을 알면 즐거운 드라이브지만, 모르면 초조와 방황이지요.‘내이비의 젊은 여성의 말에 순종해야 형통한다.’하는데, 성경말씀은 네이비 이상입니다.
그런데도 가끔‘네이비 없으면 운전 못해’하는 말은 듣는데‘성경이 없어 생활 못해.’들은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왜 그런가요? 네이비를 따라하면 효과를 보지만, 성경은 읽지 않으니 효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죠. 성경책을 항상 옆에 두고 읽으며, 그 가운데 있는 대로 살면, 삶이 형통하고 주님의 복을 누립니다. 우리는 살면서‘안다, 모른다.’갈래 길에 설 때가 많은데, 성경을 읽으면‘안다’가 늘어나지요. 그런데, 많이 아는 것이 좋긴 하지만, 바로 알아야합니다.
모 대학의 윤리학교수를 하신 분이 계셨는데, 그 아들은 목사이고 온 가족이 직분을 가진 착실한 성도였습니다. 교수님은, 성경을 많이 읽으며,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대해 좋은 글을 여럿 쓰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아는 목사님이 교회에 나오길 권하자‘나는 책을 좀 읽은 이유로 예수를 믿지 못하는 불행을 갖고 있습니다.’세상지식도 많고, 성경도 많이 아는데, 그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내가 잘 아는데 이건 아니야.’한다면, 믿을 수 없지요. 예수님을 알되, 바로 알아야합니다.
어느 날 모차르트가 길을 가다보니‘모차르트 연구회’란 간판이 보여 그리로 들어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모차르트 곡을 들어가며, 열심히 토론합니다. 모차르트가 듣다보니, 내용이 너무 엉터리라서 한 마디 했지요.‘내가 알기로는 그 곡은 모차르트가 시련을 당해서 작곡한 것이 아닙니다.’잘못을 고쳐주자, 지금까지 해설을 맡아하던 사람이‘모차르트를 나만큼 아는 이가 없는데, 당신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면박을 줍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거지요. 모차르트 앞에서 내가 그를 가장 잘 안다 합니다. 모차르트는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을 잘 안다는 해설가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오시면, 제가 전하는 말씀에 뭐라 하실까? 내가 한 말의 뜻을 더 바르게 전하라 하실까요? 여러분의 일상생활에 하는 대화를 들으시면, 예수님은 뭐라 하실까요?
오늘 읽은 말씀에 잘못 알고, 판단하고 주장하는 것이 여럿 나옵니다. 바로 알았으면, 결과가 달랐지요. 알고 모름의 차이는 큽니다.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며‘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예수님사역의 마지막 때입니다. 그때가 가을의 초막절인데, 다음 해 봄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반 년 전이지요.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가르치고 여러 놀라운 이적을 베푸시자, 백성들의 인기가 날로 치솟으니, 종교지도자들이 눈이 뻘개 죽이려 할 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저 사람은 당국자들이 죽이려하는 그가 아니야, 저렇게 성전에서 드러나게 말하는데 어찌 아무 말도 않지? 그냥 두는 걸 보니,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안 것일까? 그들은 진정 궁금했지요. 예수를 믿고 싶은데, 당국자들이 죽이려 해서 주저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라면 믿어야지 하는 겁니다. 바로 알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인 줄 알아서 그냥 둔 게 아니라, 아직 예수님이 죽으실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데, 예수가 갈릴리에서 온 것을 아니까,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어디선지 모르게 갑자기 오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함께 요 7:41,42을 함께 읽습니다.‘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을 읽으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아기예수가 베들레헴에 나셨잖아? 우리도 아는데, 유대인들이 그런 것도 모르나?’당시 유대인들은 몰랐지요. 모르니,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는데, 갈릴리 출신이니까 아니야, 오히려 큰 소릴 칩니다. 1950년대에, 김해 어느 마을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동생이 소포를 보내왔는데, 열어보니 작은 약봉지 같은 것이 가득 들었고, 그 안에 검은 가루가 들었습니다.
봉지에 알지 못하는 글씨가 쓰였으나, 동생의 설명은 없습니다. 집사님은, 동생이 미국사람들이 먹는 보약을 보내주었다 생각하고, 물에 타 한 대접씩 마시며 가족들에게 권했지요. 아이들이 맛이 쓰다고 먹질 않자, 화를 내며‘삼촌이 생각해서 보낸 보약이니, 입엔 써도 몸에 이로워.’억지로 먹였는데, 초등학생인 둘째아들이‘아버지, 먹으니 잠이 안와요.’‘정신이 맑지? 그게 얼마나 좋으나, 계속 먹어.’얼마 후, 동생편지가 왔는데‘그것이 커피며, 설탕을 타서 먹으면 기분이 상쾌합니다.’
큰아들이 편지를 보고 한 마디 하기를‘무식하면 용감한 거야.’50년대는 그럴 만하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우리가 때로 비슷한 일을 합니다. 교회를 몇 년 다니면, 자기 나름의 신앙고집이 있어 그걸 주장합니다. 나쁘다할 것은 없으나, 성경에 어긋나선 안 되지요. 예수님께서 옆에서 웅성대는 걸 들으시고는, 근처에 있던 이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힘차게 외쳐 말씀하시기를‘너희 말하는 대로 내 이름이 예수고 목수의 아들이고, 갈릴리에서 온 것을 안다.
그러나, 내 겉만 안 것이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셔서 왔는데, 나를 보내신 이는 참 되시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나, 나는 하나님을 잘 아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 잘못 아는 이들을, 바로 알게 고치신 거지요.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낫고, 잘못 알아선 안 되고 바로 알아야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에 깊이 담아야 합니다. 따라 합니다.‘예수님은 나의 주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당신이 누구이심을 분명히 알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한 주간 세상에 나가 살 때나, 가정에서‘나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야. 나는 믿고 구원을 받아 저 천국영생을 누릴 거야.’말로 하지 않더라도, 남이 보고 느낄 정도로 사십니까? 예수님께서 죽을 위험도 감수하며 이리 외치신 것은, 우리에게 성도답게 살라는 뜻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으면, 언제나 예수님을 닮는 그리스도인답게 살기에 힘써야지요.
31절에,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을 직접 보거나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은 그리 하는데 아는 자답게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한 그리스도임을 알았으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할 때 막아서야죠. 그러질 못했지요.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지요. 한 곡예사가 폭포 양편에 쇠줄을 걸고, 긴 막대기 하나 들고 폭포를 건넙니다.
보는 이들이 환성을 질렀지요. 곡예사는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다시 폭포를 건너옵니다. 관중들이 박수를 칩니다. 곡예사가‘잘 보셨지요. 제가 한 사람을 업고 폭포를 건널 수 있는데 여러분 믿습니까?’‘예’다들 소리칩니다.‘저와 함께 저 폭포를 건널 분 나오세요.’그러자 조용합니다. 사람을 업고도 능히 건널 거야 했지만, 내가 업힐 마음은 전혀 없었지요. 많은 유대인이, 그리스도가 온다고 하더라도 이 예수보다 더 이적을 베풀 수 없어, 말은 하지만, 예수를 보호하려고 나서진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하신 말씀에‘아하, 그렇구나.’수긍합니다. 위험한 순간에도 큰 소리로 외침에 감동받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과 그 의미를 압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교회에 충성하며 봉사합니다. 그 정도면‘예수는 그리스도야. 나는 늘 그와 함께 할 거야.’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체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머리에 머물기 때문이지요.‘나도 잘 알아.’하면서,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은, 눈앞의 세상유혹이나 염려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32절에, 무리가 수군대는 것이 귀에 거슬리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아랫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잡으러오는 사람들을 보시고 말씀하시지요.‘내가 너희와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아버지께로 돌아가시니, 너희는 나를 찾아도 못 만날 것이고,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한다며, 죽으심과 부활승천을 예고하시지요. 당신이 가실 길을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무슨 말씀인지 몰라서 서로 묻기를‘이 사람이 어디 간단 말이냐?’그들이 기껏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이 위험하니, 저 멀리 헬라인에게 가서 그들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헬라지역에 가더라도 우리가 못가고 못 찾을 곳이 어디 있어? 이해를 못하는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요 14:5,6을 읽습니다.‘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이 말씀의 앞에 예수님께서‘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따라올 수 없다’하시니 제자들이 근심합니다.‘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예수님께서‘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니, 그 길을 너희가 안다’하시자, 제자도마가 묻기를‘어디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찌 압니까?’도마가 물었기에, 우리는 귀한 답을 얻었지요.
요 14:6의 예수님께서‘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예수님은 우리가 갈 영생으로 인도하는 참된 길이고, 그 길로만 하나님아버지께로 갑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말씀을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은 때가 되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셨고, 그대로 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고 하나님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할 길을 여셨지요. 그 은혜로 우리는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남은 일은 알면, 안 자답게 행하는 거지요.
오늘 아는 것, 모르는 것을 살폈는데, 나눈 대로 예수님은 우리가 잘 모르던 것을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그리스도이다. 둘째는, 성도는 천국 간다. 성도들이 이를 몰라서 못한다, 잘못 알았다고 할 수 없지요. 믿음으로, 영생천국을 누림을 확신하고 살면, 삶이 지금보다 많이 달라지고, 주 예수님이 마련하신 복을 누립니다. 알고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고, 알면 아는 대로 행해야 열매를 누립니다. 내게 유익, 이웃에 유익이지요.
예수님께서 마 23:17에‘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두려운 것이, 혹 저나 여러분이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제대로 행치 못해서, 가족과 자녀들의 천국 길을 막아선 안 되지요. 이 한 마디로 말씀을 맺습니다.‘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바로 알고 행하면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요한복음강해 46.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신가? /요7:25-36/ 이종철목사
2022-06-07 04:50:00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인생은 나그네길
최희준 씨의 “하숙생”이라는 노래는 한국 가요의 고전입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간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가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인생은 길 위에 있습니다. 문제는 걸어가고는 있는데 출발지가 어딘지, 목적지가 어딘지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이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철학이요 종교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안다면 인생에는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고통도, 이별과 인생에서 만나는 고난도 어떤 뜻이 있고, 또 잠깐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무리 재산을 쌓고, 명예를 쌓아도 자기가 머물러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라면 오히려 짐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9절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33절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14장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는 길이다’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에 적합합니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있는 것이 길입니다. 길은 과정입니다. 우리 인생을 길에 비유합니다. 문제는 어렴풋하게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출발지와 목적지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이 되셔서 우리에게 정확한 이정표를 제시해주는 분입니다. 어디가 목표이고, 어디가 안전한 길이고, 어떻게 위험한 길을 피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생은 길에 비유됩니다. 인생을 표현할 때 날 생(生)자를 씁니다. 이 한자를 파자해서 풀이하면 이런 설명이 가능합니다. 외나무 다리(一) 위에 소(牛)가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그만큼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길을 가는데 아슬아슬합니다. 지름길이라 생각했는데 위험한 길입니다. 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길이 더 안전하고 빠른 길이었습니다. 안개 속을 헤매며 길을 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다행히 북극성이라는 목표나 기준점이 있으면 우리는 그 길을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시베리아나 사막 같은 곳에서는 실제 나침반이 없으면 제자리만 뱅뱅 도는 일이 벌어집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인생을 순례길에 비유한 탁월한 작품입니다. 크리스찬이라 이름의 사람은 어느날 성경을 읽다가 이 땅이 장차 유황불에 심판당할 멸망의 도시임을 깨닫습니다. 하루종일 “어찌 할고” 탄식만 합니다.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가족들이나 이웃에게 말하지만 비웃기만 합니다. 작중에 성경 속 인물들이 등장하여 멀리 보이는 좁은 문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충동합니다.
그 길이 망하지 않는 영원한 도성으로 향한 길이라고 합니다. 이에 크리스찬은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그 모습입니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그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그는 계속 뛰어가면서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 하고 소리질렀다.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평원 한가운데를 향하여 그냥 달려갔다.”
이 순례길에서 수많은 유혹과 위험을 만나고, 친구와 동행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결국에는 영원한 도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길의 언덕을 힘들게 올라가는데 그 정상에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이곳에 이르자 크리스찬의 등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짐이 벗겨집니다. “크리스찬이 십자가 위로 막 올라가려는 순간 그의 어깨로부터 짐이 풀어져 등에서 벗겨지더니 굴러떨어져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행에서 짐이 없으면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사회 심리학자 에릭슨은 신체와 정신 발달에 따라 인생을 8단계로 구분하였고 그 나이에 따른 해결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노년기에 해결해야 할 과제는 통합성인데 이는 화해입니다. 자기와의 화해이고, 타인과의 화해입니다. 노년기는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이때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정리하고 의미 부여를 하는 나이입니다. 못다 한 숙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합니다.
자기 인생이라는 작품이 잘 되었건 못 되었건 의미 부여를 통해 매듭을 짓는 것이 화해입니다. 시간은 다 되었고 작품은 제출해야 하는데 여전히 공백이 많고 수정하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한 대로 부족한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자기 과거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화해가 곧 짐을 더는 것이고 벗는 것입니다. 그래야 죽을 때 한이 없고 자유롭습니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원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기원에 대한 논란에서 빚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곧 구원자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26절 이하입니다.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그리스도는 신비적 인물이라서 어디서 왔는지 아는 자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임을 알기에 그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메시야는 너무 위대하고 그런 인물은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신비적인 형태로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선생님이나 어떤 위대한 사람은 화장실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매우 신앙적인 것 같은데 실은 반역사적으로 만들어 신앙의 본질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미 요한복음 1장은 이런 신비성을 깨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1:14) 진리가 고고한 것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육신에 있습니다. 여기 육신은 헬라어로 사륵스인데 바울은 이를 세상성, 죄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냥 고깃덩어리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땅에서 사셨던 예수라는 한 인간에게서 로고스를 보았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증언입니다. 추상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요한복음은 마리아의 몸을 통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비범한 인물은 탄생도 신비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런 비범성이 아니라 물질성에서 진리를 봅니다. 그냥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고 그런 출생이었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증언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말씀합니다. 육체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신비를 주장하는 무리들은 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신비를 말함으로써 현재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총 사건에 대해서 외면합니다. 신비를 주장할수록 엘리트요 기득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먼 이상이나 관념으로 만들어 자기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리 사건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때와 땀이 묻은 역사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한 부류는 표적 신앙을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는 표적을 행하는 자로 예수님의 표적이 많다는 것을 근거로 그리스도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31) 이들은 권능에서, 곧 힘에서 메시야를 찾습니다. 물론 메시야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없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란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의 희생을 볼모로 삼습니다. 표적이란 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권력자에 의존하도록 만들기에 믿는 자는 비주체적이 됩니다.
예수님은 권력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는 반권력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패배하는 것이 오히려 영광의 때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 힘을 포기한 자입니다. 힘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높이고 믿는 자를 주체적으로 만드는 분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약함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메시야는 스스로 강한 자가 아니라, 자기는 약해지면서 타인을 강하게 만드는 분입니다. 표적 신앙에 매였기에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은 따랐지만 십자가에서 패배하자 예수를 버렸습니다.
메시야를 권력자로 생각했기에 오늘 말씀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권력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권력자로 오셨다면 그 혁명은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중동 땅의 한 패권자로서 생을 마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힘을 포기하는 그곳에 메시야가 계십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표적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이는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성에 갇힌 우리의 사고를 깨기 위함입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혔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3-34) 육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던 이들은 나를 찾아도 만나지도 오지도 못한다는 말에만 주목하여 예수님이 멀리 헬라인들에게 갈 것인가 하며 의아해 합니다. 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장에서 예수님이 떠나신다 하니까 도마가 걱정에 쌓여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
여전히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아버지 집으로 간다고 말씀하시지만 이들은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물질성에 갇혀 있습니다. 물질성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이제 그곳이 천국임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가야할 곳입니다. 인생은 잠깐의 소풍이고 스쳐가는 여행길이라는 것이 신약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천국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합니다. 유대 백성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감이 없었습니다. 중세 시대는 단테의 『신곡』에서 보듯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영원한 세계가 가장 리얼하게 느껴졌던 시기입니다. 전쟁, 질병과 역병, 빈곤으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짧았기에 죽음 이후의 세계는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성과 과학, 풍요와 안전으로 인해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 사라졌습니다. 신자들도 내세 신앙을 잘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치 중 하나는 바로 이 내세신앙입니다. 내세신앙의 빛에서 이 땅의 욕망과 권력 추구하는 것의 어리석음, 불의를 행한 것에 대한 두려움, 정의와 사랑을 행하는 것의 중요성이 더해집니다.
인간에게는 항상 죽음의 위협이 있고 언제가는 다 죽게 마련입니다.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모든 문제는 사망이라는 한계상황에서 비롯됩니다. 천국 신앙을 갖지 않으면 죽음이 불편합니다. 죽음의 위협으로 두렵습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입니다. 이 은혜로 충만하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