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설교 모음
나를 찾아오신 주님! /출3:1-5/ 崔仁根牧師
2023-07-07 00:15:28
어린 나이에 혼자서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찾아갈 곳도 없고 외롭고 답답할 때, 현재명의 “고향생각”을 노래하며 고국을 그리워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해는 저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사실 외로운 이 미국 땅에 이민 와서 이처럼 처량하게 고향생각하며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부모형제를 사모하며 눈물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모두 다 경험하는 바와 같이 이 미국 땅은 모든 것이 다 좋은데 정든 친구들이 없고 부모형제가 없다는 것이 한없이 우리들을 외롭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들여다보면 우리 하나님은 한없이 다정하고 사랑이 넘쳐서 이렇게 외롭고 힘든 우리들을 친히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찾아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역사로 인생을 복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성으로 교회에만 다니지 말고 이처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온 몸과 영으로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이렇듯 만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실로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지치고 곤한 인생 여정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신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주님을 위해 못 할 것이 없고 세상의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신비로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 속 인물들 중에서도 이렇듯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위대한 인물로 거듭났고 역사에 길이 남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손을 잡고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승리하고 역사에 남는 놀라운 사명을 감당하는 제대로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함께 성경으로 돌아가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인물들을 찾아보고 또한 하나님은 왜 그들을 찾아가셨는지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망자 모세를 찾아가신 하나님-실패자를 찾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드셨습니다
(출3:1-2)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대로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숱한 특혜를 누리며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요게벳이 유모로 들어가서 모세를 키우므로 민족의식과 신앙을 잘 훈련 받았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모세는 왕궁에서 장성한 후에 노예살이를 하며 고통을 당하는 민족을 해방시켜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됩니다.
어느 날 궁에서 나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애굽인 사람이 자신의 민족을 학대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순식간에 그 애굽인을 쳐 죽이고 학대 받는 동족을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다름 날 또 나가보니 이번에는 같은 민족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힘을 합하여도 애굽인을 대항할 수 없거늘 같은 민족끼리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어제는 애굽인을 쳐 죽이더니 오늘은 또 우리를 쳐 죽이려고 하느냐?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반문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으로 모세는 깨달았습니다. 애굽인을 살인한 이 사실이 이미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바로까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어린 때부터 자라났던 보금자리인 바로의 왕궁을 떠나 정처 없이 광야로 나갔습니다. 우선은 몸을 피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찾아가시고 그에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 3장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세가 어떻게 그렇게도 위대한 역사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매우 기초적인 지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살인을 하고 광야에서 피신이나 하고 있던 무명의 모세를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신선한 기회를 주셔서 위대한 히브리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4:13-14)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거절하는 모세에게 화를 내시면서까지 강력하게 지도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들의 연약함을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수행할 수 없노라고 거역할지라도 하나님은 친히 찾아오시고 해야 할 일을 맡기시는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너무나 가난하여 공부해야 할 나이에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남의 구둣방에서 직공생활을 하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년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고 12명의 기도 동지들을 모아 일주일에 하룻밤씩 모여서 특별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비록 많은 공부는 하지 못했으나 노동하며 기도하던 그 소년은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전 세계에서 350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Y.M.C.A.를 창설한 조지 윌리엄입니다. 그러한 그가 고백하였습니다. “배운 것 없고 가난하여 이 세상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지만 권세와 능력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은 나를 조건 없이 찾아와 주시고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찾아오시는 우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의 때를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배신자를 찾아가신 예수님-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역사적인 인물이 되게 하셨습 니다
(요20:19-20)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얼마나 초라하게 예수님을 배신하고 돌아섰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26:55-56)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것도 한 둘이 아니라 모두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도망가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행여 예수님을 잡아간 그 유대인들이 뒤쫓아 올세라 그들은 한적한 집으로 도망가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숨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유익을 좇아 말씀을 뒤로 하고 두려움을 피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하나의 소망이 있는 것은 사랑의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악당들에게 붙잡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미련 없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 가버렸던 제자들이었지만 부활하시자 말자 그들이 숨어 있는 집으로 친히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도 쓸모없는 제자들을 부활하시자 말자 이렇게도 친히 찾아 가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26:40-41)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배신하고 도망 가버린 못난 제자들을 찾아가셨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도망 갈 수밖에 없었던 그 연약함을 예수님은 이해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끝까지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의 이와 같은 모습이 오늘 우리들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이해를 해 주지 못합니다. 결과만 보고 판단하고 돌아서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한 순간에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 동안 지속해 나왔던 사랑을 던져 버리고 돌아서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었다 깨도 찾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이처럼 배신하고 떠나버리고 도망 가버린 그런 친구, 그런 사람을 한 번이라도 따뜻한 가슴으로 찾아가서 용서하고 사랑을 회복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거의가 다 그렇게 못합니다. 자손심이 있고 체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보다 천 배 만 배 더 위대하신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존심도, 체면도 다 내려놓고 친히 그 배신자들을 찾아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예수님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고 또 따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처럼 사랑해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친히 찾아와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복하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 예수님을 전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지속해 나갔고 나중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사랑하는 그 예수님을 위해 몸을 던져 순교하는 거룩한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나 여러 가지의 두려움에 직면하고 또 느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앞날을 모르는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내일이란 없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것은 역시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이 가지는 그 영원한 세계 그 미지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시작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나 아무도 이를 피해간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의 에녹과 엘리야를 빼놓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극한 두려움에서 떨고 있는 연약한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마14:24-27)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캄캄하고 망망한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타고 있던 배가 요동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다급한 나머지 물 위로 걸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험과 두려움에서 순식간에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주님만 찾아오시면 만사형통할 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주님과 함께 소망 속에서 승리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인마 사울을 찾아가신 예수님-살인마를 최고의 사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행9:1-5)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도 바울이 전무후무한 위대한 사도이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자기 의에 빠지고 스스로 잘난 교만에 사로잡혀 예수님 믿는 귀한 사람들을 어마무지하게 잡아 죽이는 살인마였습니다.
(행7:57-58)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 바울이 청년이었을 때 그는 무고한 스데반집사를 돌로 쳐 죽이고 증인들의 두목이 되어 스데반집사의 순교를 당연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위에서 읽어보신 바와 같이 스스로 살기(殺氣)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가 그곳에서도 예수님 믿는 신자들을 잡으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어리석은 사울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거꾸러뜨리시고 인생이 스스로 잘난 것이 아님을 체험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광명하신 예수님을 보자말자 장님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행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권능입니다. 우리들을 보게도 하시고 보지 못하게도 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들의 눈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내 눈이고 늘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그럴 수 있으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에 사울과 같이 눈을 멀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눈을 지으신 이가 하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출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우리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이 놀라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무 자기중심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자기 오만에 빠져 사는 사울에게 나타나셨겠습니까? 인생은 스스로 잘나서 악을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조물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들을 순식간에 항거불능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게 하시고 일거리를 주시고 섬길 좋은 교회를 주셨을 때 아낌없이 충성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내일을 아는 이는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옛날 런던에서 양품점에 몰래 들어가 금품을 빼앗은 후 그 일가를 몰살하고 도망친 남자가 있었습니다. 경찰은 진범이 아닌 자를 체포하여 재판에 넘겨 결국 사형시켰습니다. 진범은 미국으로 도망가 20년간 거기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젠 안심이겠지"하고 그는 신분을 감추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런던의 일류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있을 때, 호각 소리가 나며 동시에 쿵쿵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났습니다. "여보시오, 저 놈은 도적이니까 붙잡으세요." 경찰관의 외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의 전신은 벌벌 떨리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렇듯 한 순간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수하고 말았습니다. 여유롭게 아무 것도 않고 태평하게 보냈던 20년의 생활,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불안에 찬 어쩔 수 없는 생활이었지 진정한 자유로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똑 같은 경우였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찾아가심으로 인해 그는 사도라는 엄청난 사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에 가장 감사하였던 것은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 사도라는 놀라운 직분을 주심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딤전1:12-17)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살인마를 찾아가시고 성자 사도 바울로 만들어 쓰신 하나님의 능력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칼로 사람만 죽이지 않았지 다투고 미워하고 원수 맺으며 살아온 우리들의 지난 삶은 사도 바울과 다를 바 없는 살인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하였느니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친히 찾아오시고 구원하여 천국 백성 삼아주신 것도 감사한데 천사도 흠모할 고귀한 직분을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죽도록 충성하고 직분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admin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광야에서 부르심 /출3:1-5/ 김병삼목사
2023-04-17 11:27:14
오늘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3대 부르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는 이사야 6장에서 거룩하심 가운데 부르심을 받았던 이야기,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만남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선행지식이 있습니다. 모세에 대하여 좀더 이해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출애굽기 1장에서 당시 시대상을 설명하고 본격적으로 2장에서부터 시작됩
니다. 출애굽기 2장 2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당시 애굽에 있던 유대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
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3달 동안이나 갓난아이였던 모세을 숨겨 두었다고 하
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아이를 가지면 배가 불러오고, 무엇보다 애굽 왕의 명령으로 산파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갓난아이를 석 달이나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출 1장 15-16절.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모세를 살려 석 달 동안 숨겨 두었던 단서는 오로지 ‘잘 생겨서’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토브’라는 말이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데 영어의 ‘good’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요즘 사람들의 사고로 ‘잘생겼으니 좋겠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가장 개연성 있는
해석은 이런 것입니다.
“모세가 산파가 계산하고 있었던 기간 보다 석 달 일찍 미숙아로 태어났으나 ‘토브’ 즉 건강
해서 숨겨둘 수 있었다”는 말이죠.
요즘 같은 세상에서야 석 달 먼저 태어나도 살리는 것이 다반사지만, 당시 고대 국가에서 석
달 먼저 태어나 ‘건강했다’는 것은 가히 기적 같은 일입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광야에서 부르심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미숙아로 태어난 자식이 건강한 것을 보고
분명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라 생각해 몰래 숨겨 키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석 달이지나 산파들이 들이닥치면 죽여야 할 터이니, 요게벳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님 손에 아이를 맡기고 나일강 가에서 갈대상자를 만들어 떠내려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손을 떠나 하나님 손에 자식을 전적으로 맡기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미숙아로 태어나 참 서글픈 사연을 지닌 아이로 석 달 만에 나일강에 흘러 보낸 아이
입니다. 이제 어머니가 지켜줄 수 없는 버림받는 아이가 되었으니,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
할 수밖에 없는 아이가 된 것이죠.
이제 출애굽기 2장 5-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yeled)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naar)
로다
성경 원어에 보면 강으로 내려오는 아기 모세를 바로의 딸이 건져내는 장면에서 다른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하는 ‘아기’가 등장합니다.
똑 같은 ‘아기’인데, ‘옐레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기고, ‘나아르’는 십 대 소년부터 청년에
이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왜 이렇게 다른 표현을 쓰고 있을까요?
바로의 딸이 떠 내려오는 갈대 상자를 열어보고 ‘아기’를 발견합니다. ‘울고 있는’ 아기였죠.
그런데 그 아이가 우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면, 갈대상자를 열어보고서야 알게 됩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아이가 벙어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소리를 내지 않고 울고 있었습니다. 단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랍비를 지낸 메어 라우 (Yisrael Meir Lau) 홀로코스트 당시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숨어지내던 때, 낯선 사람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면 그의 어머니는 아
들을 다락에 숨겼고, 그 때마다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았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를 내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경험을 통해 랍비는 모세가 왜 소리내지 않고 눈물만 흘렸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갓난 아이 모세가 울 때면, 엄마 요게벳은 어떻게 해서든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노력했을 것
입니다. 그래서 나일 강에 떠내려가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이 아이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울
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게벳의 노래’라는 찬양처럼, 모세의 어머니는 얼마나 비통한 심정으로 피눈
물을 흐리며 갈대상자를 물에 띄었을까요?
아마도 이 여인의 마지막 기도는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
나일강에서 건짐 받은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됩니다.
궁중에서 왕이 갖추어야 할 리더십을 배우고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분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이 그를 무척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느날 히브리인과 애굽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자기 동족을 도와 살인을 했
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바로의 행동을 보면 모세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출애굽기 2장 15절.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왕국의 권력지형에서 모세는 제거되어야 하는 인물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냥 죽은 듯이 왕궁에서 지내면 편하게 살지 모르지만, 또한 그렇게 살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가 모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같은 그의 성격으로 인해 그는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래 지도를 보세요, 그가 살고 있던 애굽과 미디안이 얼마나 먼 곳인지.
“잊혀진 세월, 잊혀진 사람.”
지금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모세의 형편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말이 없
을 듯합니다.
그가 미디안에서 했던 일은 양을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하찮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배우고 힘써왔던 삶이 모두 부정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태어나면서 강에 버려진 아이였고,
궁중에서도 바로의 딸이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거나, 권력구조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사
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궁중에서 ‘somebody’ 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나는 동안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nobody’되어 버렸
습니다.
아마도 오늘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요?
“나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살 사람이 아닌데~~”라고 말이죠.
그래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더욱 의미가 없고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저는 이런 상황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광야’라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가장 비참함을 드러내는 말씀이 바로 출애굽기 3장 1절의 말씀입니다.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40년이나 미디안에서 양을 치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에게는 ‘자기 양’이아니라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내면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아직도 그 회사에서 그 자리 밖에, 아직도 그 교회에서 부목사로, 아직도 자기 집이 아니고
전세로, 아직도 취직도 못하고 취준생으로, 아직도 자식이 그 모양이야, 아직도 결혼 못하고.
. .”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게 들리는 소리들입니다.
기억할 것도 없고, 누구도 알아 줄 것도 없는 인생, 그래서 투명인간 같은 존재로 ‘잊혀진 광
야’에 있는 인생 말이죠.
그런데 잊혀진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께는 다 계획이 있으셨던 모
양입니다.
이제 우리가 당시 상황을 상상하면서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모세의 심정은 어땠을까
요?
그 부르심에 모세가 감격해서 울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모세의 마음에서 감동보다 원망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아니, 40년을 기다리게 하시다니 이건 좀 너무 하신 것 아닌가요? 출애굽기 3장 10-11절을
보세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 대화를 들어보세요. 모세는 전혀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격하지도 흔쾌히 응하지도 않았습니
다. 40년을 양을 치며 살았으니, 그의 삶의 열정도 다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죠.
하나님께서 40년을 기다리신 이유는 모세의 격한 성질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은 아닐까?
하지만 모세의 성격이 변하기에는 40년의 세월을 가지고도 해결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자기 성질을 못이겨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을 던져서 깨
뜨린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의 성격을 가다듬거나, 그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가 되었다는 단순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 19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모세를 미디안으로 보내셨습니다.
모세의 생명을 노리던 자가 죽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모세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또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신 곳, 그리고 그 장
면을 가만히 드려다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2절.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가 양을 치다 희귀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
오는 불꽃 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떨기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NIV 성경에는 ‘bush’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덤불’쯤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나 시내산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나무’라는 말 보다는 ‘덤불’이라는 말이 훨
씬 더 어울리는 단어라는 것에 금세 동의할 것 같습니다.
지금 모세가 처한 환경이 초라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장면도 그렇게 장엄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상상하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모습은 커다란 노송이 활활 타는 가운데 보여야 제격이
아닐까요? 그 위엄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훨씬 더 멋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미디안광야에 있는 가시덤불은 아무리 커도 1m를 넘지 않는 크기입니다.
모세의 초라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부르심 역시 초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더듬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던 장면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
다.
소위 세계의 3대 회심으로 불리는 사건들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려고 달려가다 길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
을 만났습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은 그저 정원을 거닐다가 ‘성경을 읽어라’라는 음성을 듣고 서재에 들어가 펼
쳐진 성경을 읽다가 말씀 앞에 거꾸러지는 체험을 합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로 기억하는 마르틴 루터도 젊은 수도사시절 비텐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소위 ‘탑 체험’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수도원에 있는 작은 그의 연구실이 있었던
탑에서 일어난 회심의 사건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길을 걷다가 작은 모임에서 들려오는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소리를
듣다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초라한 곳에 초라하게 찾아오신 하나님!
1904년 웨일즈에 있었던 부흥운동은 당시 수개월 만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영적 부흥운동이었습니다. 이 부흥 운동의 주역은 이반 로버츠라는 청년이었
고 어느 수요일 저녁 17명이 모인 작은 수요일 집회에서 설교하다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기도에 헌신하며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잊혀진 광야에서 살고 있는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 전혀 낯
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우리가 낯설게 느끼는 것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가
환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사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이 포기된 곳에서 하나님은 가장 긴밀하게 우리
의 삶을 파고 들어오시는 분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임재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죠.
우리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초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인생은 그의 계획대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대로 되어진 인생입니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양을 치면서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끌어낼 지도자가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
고 있었을까요?
모세는 광야에서 리더로서의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양을치고 있었을 뿐
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광야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세의 리더십은 교실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던 광야에서 배우고 아무도 기억하
지 않는 그를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풀려나갑니다.
광야을 아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앞에 까지 왔지만, 가나안땅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서도 모세가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역부족이었을 것입니
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미 40년 전에 그 땅을 정탐하고 지도를 그렸던 인물입니다. 가나안에 들
어가서는 가나안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여호수아가 가장 적격이 아니었을까요?
모세가 광야에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광야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우리가 인생의 광야을 지나고,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 잊혀진 곳에서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잊혀진 존재로 외롭게 살았던 광야의 시간이 모세에게 상처가 아니라, 쓰임 받는 훈장이 되었
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순간 말입니다.
가나안을 앞에 두고 모세는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전혀 패배로 느껴지거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모세
자신이 왜 거기에서 멈춰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느보산에서의 죽음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이제 가나안은 다른 사람이 사명의 배턴을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시는 소명의 장소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장면은 바로 5절입니다
.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기에서 ‘신’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네 발의 신’이라는 말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신’이라고 해도 될 것을 왜 ‘네 발의 신’이라고 했을까요? 저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주 분
명하고 단호하게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신을 벗어’라고 했다면 일반적 명령으로 들렸을 것 같은데,
‘네 발의 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 명령으로 들리니 말입니다.
잠시만 생각해도 모세에게 ‘신’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내산은 ‘돌산’이니, 신을 신어야 자신을 보해해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하
낮이면 뜨겁게 달궈진 모래에서 보호해주는 신입니다.
또한 모래밭을 걸을 때, 맨발로 다니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발가락 사이로 모레가 스며들어
오면 속도를 낼 수도 없습니다.
신을 벗는 순간 그의 인생의 속도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모세는 그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속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
둥’에 맞추어 가고 서고를 반복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던 최효섭목사님의 책 중에 [시속 3마일의 하나님]이라는 책을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속도는 인간이 광야를 걷는 속도에 하나님이 맞추어 주셨다는 의미
가 되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속도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신을 벗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거룩’이 그의 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내려 놓으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고 걸어왔던 시간과 과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이 아니
었을까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거룩하지 못한 모든 것들은 벗어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힘’ 앞에서 우리 인간들이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이 신을 벗는 일입니다.
다시 조금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세의 모습을 생각헤 보세요. 신명기 3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실 때, 모세의 ‘눈과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
잊혀진 사람 모세의 신을 벗기셨습니다.
고 있습니다.
제 느낌이 그런가요?
왜지 평온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모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해 미련을 가진 듯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고생하며 걸어왔던 발자취와 가나안 땅이 정말 눈에 보
이는 것이 전부 다였을까요?
하나님께서는 40년의 시간을 통해 눈에 보이는 가나안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나안’을 보
도록 훈련시키신 것이 아닐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진정
한 가나안 땅 말입니다.
모세의 평안함은 진정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는 한 위대한 신앙
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참된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시라 /출3:5-6/ Paul Washer
2015-06-19 14:33:42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시는 순간,
모세, 이사야, 또한 스랍 천사는
모두 자기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와, 죄와, 죽게 된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모세는 신을 벗고 얼굴을 가리고, 스랍도 얼굴과 발을 가리고, 이사야는 화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임재를 경험한 분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교회의 현실은, ‘하나님의 임재’를 외치고 있으나,
그들과 같은 통회 자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변질된 ‘임재’보다는, 참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거기에는 고꾸라짐, 통회, 자복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Paul Washer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참된 예배일수록, 하나님의 임재가 잘 드러납니다.
우리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늘 사모합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란 표현을 종종 듣는다.
“오늘 저녁에 주님의 임재the presence of God가 이 자리에 임했습니다!”
“주님의 놀랍고도 강력한 임재가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배시간에 찬양인도자와 설교자들이 종종 이런 표현을 남발한다.
나는 그들에게 엄중하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느끼는 가벼운 ‘하나님의 임재’와,
성경에 나오는 진짜 ‘하나님의 임재’를 한 번 비교해 보시라고!
모세, 스랍천사, 이사야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모세는 광야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신기하게 나무가 불살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에 가까이 나아가서, 타는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뵈었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 신발을 벗고 맨발로 나아갔다. 출3:5
또한 모세는 두려움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출3:6
하나님의 거룩하심=임재는, 그것을 만난 사람들을 먼저 깨어지게 한다.
강력한 회개와 자기부정을 경험케 한다.
성경에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임재 하셨다고 하는데,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사람들은
강력한 불꽃이 아니라, ‘산들바람, 약간 뜨거운 기운’ 등을 두고,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떠들어댄다.
하나님은 약간 뜨거운 공기나 시원한 바람으로 임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임재하실 때 “강력한 불”로 임하신다.
(미국 부흥사 중에 ‘뜨거운 공기’로 임재를 체험했다는 분이 있음)
(註. 그럼 우리가 기도하거나 예배드릴 때,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또는 좌중이 갑자기 숙연해지는 등의 느낌은, 명백히 ‘불이 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가 아닌가?
물론 Paul Washer 목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남발하고 남용하는 분들에 대해 경고하면서,
더 높고 고상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설교문을, 일각에 대한 비판으로 쓰지 말고, 미래를 위한 건설적, 보완적으로 받아야 하겠다.)
그 불은 스스로 타 없어지지 않으며,
그 앞에 모든 unholy한 것들을 다 살라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은 어쩌면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스랍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각기 여섯 날개가 있는데, 둘은 그 얼굴을 가리고, 둘은 그 발을 가리고
날개 둘로 날며 창화하며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였다.
스랍에 대해 우리는 그 존재의 본질을 잘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스랍도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피조물 중에서 가장 능력이 많고, 가장 거룩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스랍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에서 섬기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이 스랍처럼 하나님 가까이 나아갔다가는 당장 멸망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장 거룩한 피조물이라는 스랍들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들은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자기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를 계속 찬양한다.
그렇게 큰 능력을 가진 스랍 천사 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그 영광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발을 가리고 (너무 미천함과 더러움을 가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였다.
하물며 스랍보다 말할 수 없이 추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태도가 어떠한가?
▶어느 날 어떤 교회 집회에 가니까
인도자가 “하나님의 임재가 이 자리에 계십니다!” 하기에
나는 “아니요, 하나님은 이 자리에 안 계십니다”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 이 자리에 계신다면,
여기 청중들 중에 절반 이상은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왔을 때
“화로다, 나여, 이제 죽게 되었도다!” 라고 외쳤다. 사6:5
누구든지 참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오면,
자기가 죽을 죄를 지닌 절망적 상태임을 절감하며
자기의 죄를 처절하게 고백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가벼이 ‘하나님의 임재’를 외치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워십할 때 두 가지 균형을 가져야 한다.
*이사야가 느꼈던 통회하고 자복하는 의식
하나님의 임재 앞에 완전히 고꾸라져서,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통회하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 같은 축제 의식이다.
손을 들고 기쁨의 환성을 지르는 행위이다.
註. 후자(축제)는 잘 하고 있지만, 전자(고꾸라짐)가 매우 약하고 균형을 잃었다는 주장
불붙은 가시떨기 /출3:1-5/ 김기석목사
2015-07-05 18:11:15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 회한의 심연에서
‘물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이집트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유모 역할을 했던 친어머니 요게벳을 통해서 모세의 내면에는 히브리인의 정체성이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었을 겁니다.
사람은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유년을 품고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서 때가 묻기도 하지만 그는 자기 속에 있는 ‘아이’로서의 자신과 화해하면서 성장해갑니다.
유년 시절에 가정에서 누리는 정서적 안정감이 그의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가 히브리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인 것도 그가 히브리인으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격분에 못 이겨 저지른 그 일이 빌미가 되어 그는 광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 머물면서 그는 그곳의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집트 왕자로부터 목동으로의 전락, 회한과 상실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동족인 히브리인들은 여전히 바로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내인 십보라와의 사이에서 ‘게르솜’이라는 아들을 얻었지만, 아내도 아들도 그의 가슴에 박힌 아픔을 씻어내 줄 수 없었습니다.
‘게르솜’은 ‘황무지에 사는 손님’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 속에는 모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양떼를 몰고 물과 풀을 찾아 그 뜨거운 광야를 걸어가면서 이따금씩 눈에 띄는 가시떨기를 보면서 어쩌면 한숨을 내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는 가시떨기, 또 아무 쓸모도 없는 그 나무야말로 모세 자신의 모습인 듯 보였을 것입니다.
장년의 모세, 그는 자기의 무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50대들이 느끼는 상실감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들은 저 나름의 생활에 분주하고, 직장에서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이고,
건강의 이상 징후가 자주 나타나고, 머리카락도 성기어지고, 가만히 돌아보면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남들의 기대에 따라 처신해왔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만 보입니다. 가시 떨기,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광야에 살던 모세의 자화상이요, 이 시대 중년들의 모습입니다.
• 신을 벗는다는 것
어느 날 모세는 불에 타는 듯한 가시떨기를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메마른 광야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뜨거운 사막 바람에 바짝 마른 가시떨기가 자연발화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불붙은 가시떨기가 소멸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모세는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는지 알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여 그 떨기나무에 다가갔습니다. 그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엉겹결에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비상한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야훼 하나님과의 만남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신’을 벗으라고 했을까요? 신은 어쩌면 우리가 구성해온 삶 자체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력서’ 할 때 ‘履’자는 ‘신’ 또는 ‘밟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력서란 내가 지금까지 밟아온 삶의 내력을 기록한 문서라는 뜻이 됩니다. ‘신’은 그러니까 외적으로 드러난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 말입니다.
분석 심리학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나체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요구하신 것은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드러내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아를 내려놓지 않고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회적 신분도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 여기는 희망과 절망, 경험과 지식, 소유조차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 앞에 경배를 하려는데 천사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쳤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데 왜 그러냐고 항의하자 천사는 “네가 왕관을 쓰고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것이냐?” 하고 책망합니다. 우리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신’을 벗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 하나님의 현존 장소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 장소가 가시떨기였다는 사실입니다. 호렙산 주변의 미디안 광야에서 흔히 발견되는 키가 작은 관목류인 이 가시떨기는 참 보잘 것 없는 나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시떨기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이미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스스로 크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아니라 보잘것 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역살이를 하고 있던 히브리인들의 부르짖음과 탄식소리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는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저리게 하는 또 다른 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시떨기 가운데 머무시면서 그 나무를 소멸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나무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나무가 되지 못했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픔 속에 화육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최근에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요한복음> 강의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들어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도올 선생은 기독교인들이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데, 그것은 적절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이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호전적인 하나님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의 존폐를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을 부족적인 신(tribal God)으로 만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다. 목욕물을 버린다고 그 속에 든 아기까지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시면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 불붙은 가시떨기로 살기
그렇다면 가시떨기 속에 임하신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가시떨기 속에 임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우리를 외면하시는 일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신을 벗었던 모세처럼 우리 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조차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의 가시떨기 안에, 나의 상처, 나의 불안, 나의 공허함 가운데 계십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은 우리들 속에 있는 나약함과 비루함까지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으실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 삶은 전혀 다른 빛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모세가 가시떨기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과의 만난 사건을 ‘문지방(門地枋)을 넘은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문지방을 보기 어렵지만, 옛날 초가집이나 한옥에는 문설주 사이의 문 밑에 나무를 가로 놓아 문지방을 삼았습니다.
그것은 안과 밖을 가르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든 밖으로 나가든 문지방이라는 경계를 넘어야 합니다. 종교학에서 문지방을 넘는 체험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철저한 변화를 뜻합니다.
모세는 가시떨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과 만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문지방을 넘어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지내온 좌절과 실의의 시간은 지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희망과 책임의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나는 요즘 박어진이라는 주부의 글을 즐겨 읽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배달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28년 동안이나 일하던 직장을 겉으론 호탕하게, 속으로 부들부들 떨며 직장을 그만둔 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난 1년을 돌아보며 ‘걷자, 웃자, 놀자’의 구호를 꽤나 성실하게 실천했다고 자평했습니다. 그는 퇴직 2년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한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마을의 온갖 허드렛일에 불려 다니던 ‘종대 삼촌’처럼 자기도 마을의 여유분 노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동네에서 잠깐 아기 보기 서비스. 무료 영어회화 강사, 미등록 불법 체류 여성 노동자들의 상담 도우미 훈련 받기. 생각해보면 할 일이 참 많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시지요.
“이제부터 내 쓸모는 내가 결정한다. 숨어 있던 잠재능력을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능할지도 몰라. 반드시 겸손해야 할 만큼 잘나지도 않았으니 이 또한 자유 아닌가?
나는 진화하고 있다. 지난 50년과 전혀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내 야심, 달성 가능할 것 같다.”(한겨레, 2007년 2월 21일자, 박어진의 여성살이 중에서)
멋지지 않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의식하든 안 하든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도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땅에 묻어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봄 바람이 불자 벌써 나무에 움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비록 마른 등걸 같은 우리들이라 해도 하나님의 기운이 임하면 새로운 생명의 꽃을 피워낼 수 있습니다.
연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불붙은 가시떨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멋진 꿈을 품고 사순절 순례의 길을 잘 걸어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호렙산에서 /출3:1-5/ 이동원 목사
2014-11-28 23:55:15
전통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입학 조건은 소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적이나 품행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소명 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명은 소위 성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직업이 사실상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직업을 영어로는 ‘vocation'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vocatio'에서 온 말로 ’부르심‘ 곧 소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소명 없이도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그 직업을 수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즐겁고 보람찬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부르심이 아닌 경제적 동기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명에 따라 직업을 수행하면 잘 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소명의 순간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한 직업으로 처음 부르심을 받는 순간 혹은 하나의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인도되는 순간은 우리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해방의 리더로 소명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는 모세가 40년의 애굽 궁중 생활을 마치고 일단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를 자임하다가 자신의 민족들에게 거절당한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다시 40년간을 양치는 목자로 살던 어느 날 호렙 산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성경 학자들에게 호렙 산은 일반적으로 시내산과 동일한 산으로 간주됩니다. 호렙 산맥중 가장 높은 산의 하나가 시내 산이었거나 아니면 시내 산맥의 하나로 높은 산이 호렙 산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바로 이 호렙 산(현재 명,Jebel Musa/모세의 산, 2,285m,해발 1,530m 지점에 모세의 소명을 기념하는 성 캐터린 수도원이 위치함)에서 모세는 출애굽의 리더로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부르심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때가 찬 주권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명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제기되는 이슈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자 할 때 혹은 하나님의 소명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소명을 분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1. 일상적인 생활에 성실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아주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소명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이 일상생활에 성실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들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 그들은 세속적인 안목으로 보면 별로 성공적인 인생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모두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때로는 성실하게 실패하면서도 말입니다. 베드로의 케이스를 상기해 보십시오. 그는 그날도 밤을 지새우며 성실하게 고기잡이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결과를 내지 못한 허탈감속에서 새벽을 맞고 있었습니다. “내가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나--”라고 그는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도 ‘죽마고우’(?)들과 한가롭게 어울리던 중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실성은 모든 사역의 필수적인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탈란트의 비유에서 돌아온 주인의 칭찬의 공통적인 근거는 바로 ‘착하고 충성됨’이었고 여기서 ‘충성됨’의 의미는 다시 말하면 영어로는 ‘faithfulness' 곧 ’성실함‘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동일했습니다. 소명이 오기 전까지 그는 그에게 맡겨진 그 일에 성실했습니다. 본문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바로의 진노를 피하여 애굽에서 ‘미디안’(요르단 남, 아라비아 북서쪽 홍해 연안)으로 간 후 미디안 제사장에게 고용되어 양떼를 치는 일(2:15-22참조)이 그의 새로운 직업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제사장 이드로(혹은 르우엘-2:18/고대에는 두 이름을 보편적으로 소유/르우엘은 ‘하나님의 벗’, 이드로는 ‘장관’의 의미로 아마 공식적인 이름)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성실하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장인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것이 모세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장인의 집에서 40년을 살며 두 아들을 낳고 기르게 됩니다. 출18:3-4에 의하면 모세가 얻은 두 아들의 이름은 하나는 게르솜(‘나그네’의 의미)이고, 또 하나는 엘리에셀(‘하나님의 도우심’의 의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아들의 이름에서 모세의 미디안 시절 40년 세월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모세는 이 광야에서 나그네 되었으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감사하는 계절의 삶을 살아 온 것입니다.
소명이 올 때 까지 그는 묵묵하게 평범한 생활인으로 가정 인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아직은 소명이 없으시다구요? 모르시겠다구요? 괜찮습니다. 그러면 일단 주께서 인도하신 당신의 미디안에서, 당신의 갈릴리에서 성실하게 날마다를 사십시오. 어제 성실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말입니다.
2. 하나님의 인도에 자신을 개방해야 합니다.
성실함은 모든 인생을 향한 가장 보편적인 요구입니다만 왜 성실한 사람들이 소명에 응답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일까요? 소위 일상성에 빠져버린 나머지 하나님의 손짓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도에 자신을 개방하지 못하고 사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가 와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성실하면서도 우리는 소위 일상성에 빠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다른 말로 ‘깨어 있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마태24:42에 보면 주께서는 그의 다시 오심을 준비할 것을 가르치시며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깨어 있지 못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의 같은 맥락인 마태 24:38-39에서 주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한마디로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일상성에 빠진 사람들의 종말론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여기서 결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이런 일상성에 빠져버린 나머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깨어 있는 영성을 준비하지 못한 삶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삶의 자리에서 깨어 있는 영적 개방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상성에 성실했지만 일상성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서 새 일을 시작하시고자 신호를 보내실 때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깨어 있는 영성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깨어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혹은 일상성 속에서 경이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떨기 나무를 보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본문에 언급된 떨기나무는 일종의 아카시아 과에 속하는 가시나무로 사막의 거주자나 여행자들에게는 매우 일상적인 볼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에 불이 붙고 있었음에도 이 나무가 타지 않고 있음을 주목한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모세에게 이 떨기나무의 존재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으로 비쳤을지 모를 일입니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쳐 온 이스라엘,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아직도 애굽 땅 고센에서 모질게 생존하고 있었던 민족의 모습 말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이 떨기나무에서 모세는 기구한 자신의 자아상을 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태어나자마자 나일 강에 던짐을 받아야 하는 불행한 출생으로 출생과 동시에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그가 갈대 상자의 섭리로 아직도 이 척박한 사막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불타고 있는 광야의 가시나무의 운명을 너무나 닮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라도 다가 올 새로운 운명에 자신의 존재를 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영적 개방성이 마침내 그를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1975년 봄, 저는 첫 미국 유학의 한 단계를 마무리하며 아직도 불투명한 미래, 불확실한 내일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실 기회 앞에 자신을 던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열어두고 있었습니다. 막연히 앞으로 조국에 돌아가 젊은이들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유학하던 신학교 도서실에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숙제를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목회’라는 두 글자가 제 마음속에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즉각적으로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아직 목회는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솔직히 제 안에 떠오른 느낌에 의하면 목사가 된다는 것은 대학 예비고사에 떨어진 사람을 우두머리로 한 이상한 ‘조직’의 간부가 된다는 감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제 눈앞에 등장한 불붙는 떨기나무는 사라지지 않았고 저는 마침내 석 달 후 별로 원하지 않았던 목사 안수를 받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적어도 주님께서 주실 새로운 소명의 기회 앞에 마음을 열고 계십니까? 닫고 계십니까?
3. 하나님의 소명에 진지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손짓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 앞에 처음부터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랬습니다만 저는 교회 역사와 영적 지도자들의 전기를 통해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할 수 만 있으면 피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출 4장을 통해서 보다 상세하게 기술됩니다. 무엇보다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해서 내 백성을 설득하지 못하겠다고 변명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4:11-12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말을 가르치리라” 무슨 말입니까?
내가 너로 필요한 말을 하도록 돕겠다는 것입니다. 또 네 곁에서 너를 대변할 사람을 함께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의 형 아론을 출애굽의 여정에 동반 리더로 동행하게 하시지 않습니까?
사실 40년전의 청년 모세는 자신 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족들에게 보이콧트를 당하고 바로에게 쫓기고 미디안 광야 목자 생활 40년을 하면서 그는 많은 자신감을 상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80년 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진지하게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찍 무디 목사님은 모세의 일생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첫 애굽의 궁중에서의 왕자 모세의 존재를 가르쳐
1)굉장한 존재로 자신을 착각한 시절(He was somebody), 다음 미디안 사막의 목자 모세를 2)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절(He was nobody),
그러나 이제 출애굽의 미숀을 위해 부름받는 지도자 모세를 가르쳐 3)하나님께만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는 시절(He was God's body)로 묘사한바가 있었습니다. 아주 탁월한 설명이지요. 당신과 저의 단계는 어디에 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실 때 중요한 것은 굉장한 응답이 아니라 진지한 응답입니다. 진지한 대화입니다. 무엇보다 도망가지 마십시오. 이제 솔직한 응답을 시작하십시오. 내가 과연 할수 있느냐 못 하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적어도 도망은 안가시겠다고 응답하셔야 합니다. 할수 있다면 순종하시겠다고 응답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책임감이 아닙니까? ‘책임’을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합니다. 'response'(응답)와 ’ability'(능력)가 결합한 말입니다.
진지하고 적절하게 반응하시면 응답에 따른 그 일을 수행할 능력은 주께로부터 온다는 뜻인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소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서 ‘따라 오라’가 명령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책임은 따라가는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그 능력’을 그가 공급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모세의 케이스로 돌아와 보십시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진지하게 중요한 미숀을 위해 부르실 때 그는 한번만 부르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두 번씩 부르십니다.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번의 기회로 이 중요한 응답을 놓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직 우리의 소명의 내용을 다 몰라도 우리 자신의 능력을 신뢰할 수 없어도, 우리의 미래를 전망할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냥 모세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대답하십시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서있는 그 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 시작되는 땅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출애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3:1-3:12/ 곽선희 목사
2014-11-26 11:34:39
성도 여러분, 아주 어렸을 적에 숨바꼭질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숨을 죽이고 몸을 가능한 한 움크리고 술래가 무엇이라고 하든 못 들은첫 하고 가까이 오러라도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나님과의 숨바꼭질은 넌센스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는 소리가 내가 숨었나이다..그러거든요. 숨어있는 사람이 숨었다고 그러면 됩니까..내가 숨었습니다..인류조상 역사의 처음부터 넌센스가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 숨었나이다.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숨었다고 말합니다.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마는 사실은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겁니까? 아니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을 몰라서 묻는 겁니까? 다 아시지마는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어쩌면 어디 지금 계시느냐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어떤 상태냐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소를 묻는게 아니라 그의 상태를 묻고 있지 않았나...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 내가 어떤 형편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 내 지금의 내 처지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평가 하느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코비라는 유명한 교수님께서 16년전에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썼어요.16년 동안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이로 인해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73세입니다.
이제 그의 한 생을 다 정리 하면서 최근에 책을 또 하나 썼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 7번째습관 가지고 조금 아쉬워서..안되겠다..8번째습관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내놓았습니다. 부제 더욱 우리의 마음을 끕니다.
FROM EFFEECTIVENESS TO GREATNESS..왜냐하면 그가 처음 쓴 책 제목이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었습니다. 이제는 EFFEECTIVENESS부터 GREATNESS..로 다시 말하면 성공으로부터 위대함으로..그런 부제를 달아서 8번째 습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대략 줄잡아서 4가지를 말합니다. 먼저는 실체적 지수입니다. PQ...PHYSICAL QUOTIENT입니다. 내 건강이 어느 정도인가..그건 알아야지요. 주책없이 뛰어드는 건 잘못이지요. 내 나이 얼마 인가는 알아야지요. 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인가는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지능 지수 IQ입니다. 또한 감성지수 EQ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꼭 말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 무엇인가 하면 SQ입니다. 영적지수, SPIRITUAL QUOTIENT...이 내면적인 음성을 잘 듣고 이 4가지를 정직하게 바로 평가 합니다. 그것을 근거로 해서 GREATNESS ..위대함의 인프라가 이루어 질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그는 설명을 합니다. 신체에 대해서 당신이 지금 심장 마비에 걸려서 엠뷸런스에 실려 병원에 가고 있다고 하자.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해야 됩니까...이제 남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짦은 시간, 가장 소중한 인생의 결정을 할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그것을 생각해야 겠지요.
또 하나 우리가 직장인으로써 은퇴를 해야 할 시간이 2년밖에 안 남았다 하자 , 그리고 은퇴를 해야 한다, 이 2년을 내가 어떻게 보내야 하나..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 2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아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죠? 감성 지수에 대해서는 특별할 예를 들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모든 사람이 듣는다면 어떨까..듣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말입니다. 요새 와서 뭐 불법 녹음 테잎이 어떻고 합니다마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만 하면 되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미련하고 제일 약해질 때가 언제인지 압니까?
너와 나와만 알자. 절대 비밀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사는 사람은 항상 비겁해 집니다. 초라해 집니다. 그저 백일하에 다 드러내 놓고 마음대로 보고 마음대로 다 들으라 ..여기에 GREATNESS.가 있는 것이예요.
위대함입니다. 비밀이 많은 사람, 얼굴도 달라 지더라구요, 놀랄 것이 없습니다. 녹음 테잎이 몇 상자가 있으면 어떻다는 것입니까? 할말만 했으면 그만이지..
그로인해서 벌벌 떠는 정도라면 당장 그만둬..그런 인간이 무슨 남을 위로 하겠다는 하겠냐고..안 그렇습니까...? 이게, 이게 바로 감성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성, 내 분기 마다 창조주와 1:1로 만나서 심판을 받는 다고 가정해 보자...하나님께서 매 분마다 나를 만나서 나를 심판하고 계시다 .아니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바로 그럴 때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나..무엇이 우선이 되겠습니까?
무엇이 우선이 되야 하겠습니까? 이럴할때에 비로서 바른 GREATNESS.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음성, 조용하게 들려오는 내면적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런 바른 영성의 위대음의 근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규칙을 지켜서 자기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서 바른 생활을 습관화해야 하겠다, 인격화 하고, 일상화 하고, 성품화 할수 있게 그렇게 살아가야 겠다. 또 하나는 비전을 키워가야겠다.
과거에 살지 말고 미래에 살아야 겠다. 미리 가본미래, 미래를 가보며 살아..그렇게 사는 것이 위대함이다..그런고로 우리에게 주어진 양식 안에 소중하게 열정적으로 살아라..이 말은 열심히라는 말도 되지마는 즐기라는 말도 됩니다.
후회없이 다 쏟아 부으면서 순간순간 만족하며 충만한 즐거움으로 살아갈 것이다, 또한 그러면서도 성공보다는 양심, 소득보다도 정직함을 잊지 마라..여러분, 거짓으로 많이 번들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불의하게 산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정해서 출세한들 그거 사람 사는 거 아닙니다.
그거 위대함의 길이 어디있느냐...이렇게 스티븐 코비는 마지막으로 충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만납니다. 그는 80년을 허송한 한 불쌍한 한 노인입니다. 오늘 이 본문 이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80년을 다...그저 보내요.나이 80년이 되서 이제 이대로 끝나는 것 같은 불한 한 노인이 있어요.
애굽에서 40년 본의 아니게 애굽사람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원치 않은 것을 보고 원치 않은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전혀 이질적인 생활 풍속을 억지로 익히면서 그렇게 40년을 살아왔습니다. 원치 않은 40년 그리고 광야로 쫓겨 가서 광야에서 양을 치며 지냅니다. 애굽에서 왕자로 살던 사람이 광야에서 양을 칩니다.
너무 너무 하늘과 땅입니다. 아마 살고 십지 않았을 겁니다. 양을 따라다니면서 삽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참..마치 서사시 같습니다..양을 이렇게 모아놓고 양의 문을 이렇게 만든다. 임시로 만들고, 그 양의 문에 누워있더 만요, 내가 보니까..누어서자 이렇게...양들이 그 배를 넘어 가지 않아요. 양하고 같이 먹고 살아요. 그렇게 산 목자의 생일날 그것도 자기 양도 아니 예요. 처갓집 양이예요. 처가살이 40년 남자로 볼 장 다본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비참합니까? 게다가 또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실패자요 살인자요 무능자요 도망자요 과거에 쫓기고 있는 숨어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80년을 살았어요. 이제는 이대로 세상을 마감할 수 없는 초라한 노인입니다. 대책 없습니다. 꿈도 없습니다.환상도 없습니다. 무엇을 더 기대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모세를 부릅니다. 하나 남은거 있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었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 만한 믿음, 그만한 경건, 그 만한 깨끗함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모세야.. 응답합니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그대로 응답합니다..제가 349장 찬송을 좋아 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참 마음이...차를 운전할 때..이 모습 이대로..찬송을 부르면서 그렇게 운전할 때가 많습니다...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시옵소서...하나님..가끔 그런 기도를 해봅니다.
나에게 더 깨끗해지기를 기대 하지 마세요. 내가 더 의롭게 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이대로 쓰시려면 쓰시고 아니면 그만두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나아질 자신 없습니다..알아서 하세요. 이 모습 이대로. 이것이 제 기도입니다. 제 찬송이요, 제 신앙고백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절대 헌신입니다. 된다, 안 된다 뭐 변명할 것 없어요. 이 모습 이대로..다 아시는 주님이 부르시니까 말이예요.
라이홀드 니버는 인간의 교만을 3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권력적인 교만, 권력이면 다 된다는 오만, 이거는 종이 호랑이 같아요. 또 지적인 오만,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예요. 알긴 멀 안다는 겁니까? 또한 도덕적인 교만, 내가 남보다 선하다고 깨끗하다고 정직하다고 그것 또한 무서운 교만이라는 말이예요. 이것 다 버리고 모세는 대답 합니다. 내가 여기 있어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그속에 다 포함..그저 이대로 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발의 신을 벗어라....원래 노예는 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벗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상징적 의미로 말하면 너는 오늘부터 노예다, 신발 벗어..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노예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고 신을 벗어라..과거로부터 벗어라....내가 애굽으로부터 40년, 광야로부터 40년...80년 의 때 묻은 신발을 벗어 버리라. 이제 그 신발 말고 다시 출발 하라는 얘기예요. 옛날의 살던 생활양식이 아니고 옛날의 살던 생활 철학이 아니고 옛날의 가졌던 성공 실패 다 접어 두고 잃어버리고 신발 벗어..이렇게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경건..경건..이슬람은지금도 하나님 앞에 예배 할때 마다 신발을 벗습니다.
지금도 신발을 벗고 맨발로..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 합니다. 신발을 벗는 의식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게 최우선입니다. 신발을 벗고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니다. 오래전에 권투 선수로 유명했던 모하메드 알리라는 분을 여러분이 알겁니다. 그는 대체로 떠벌이 였습니다. 그러나 쓸만한 말도 했습니다. 참피온이라는 것은 경기장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자신의 내면 깊숙이에 있는 자신의 소망과 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그런 명언을 한 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를 삼으려고 할때..첫째는 과거를 깨끗이 버리라..둘째는 하나님만 의지하라..셋째는 절대 순종하라..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지 백성에게 끌려가서는 안된다.. 여러분,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것이지, 목자가 양을 따라가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아십니다..이것은 명령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3가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첫째는 내가 너와 함께하실 것이다. 네 손과 함께 할 것이다. 네가 하는 모든일에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가나안땅을 네게 줄 것이다.3가지를 약속해주셨습니다. 모세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80세의 노인으로 실패자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지금 모세의 과거는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을 음성을 듣는 사람에게는 잃어버린 과거는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나니까 애굽의 40년 그거 우연한거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인도 하려면 당대 최고의 문명 애굽을 알아야 합니다. 애굽으로부터 인도 하려면 애굽을 알아야 합니다. 40년 동안 애굽의 최고의 문문을 다 익혔습니다.
이 과거가 버려진 것입니까? 그런가 하면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칠 때 그는 하늘을 처다보며 인도하며 양을 인도합니다. 목자의 지도력, 복자의 인내력, 목자의 경건, 40년 동안 양을 치는생활..그 속에서 모세라는 사람이 낮아지고,낮아지고,낮아지고..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지도자로써의 깊은 소양을 가지게 됩니다. 지도자의 기본이 겸손입니다. 잃어버린 과거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은 있어요, 하나님께는 우연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실패는 있지마는 하나님께는 실패란 없습니다. 이제 모세라는 사람은 오늘 하나님을 만남으로 해서 과거가 그렇게 소중하게 되고 내일이 더 영광된 미래로 다가오게 됩니다. 단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대답하십시다..나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분명히 불으시고 나 여기 있습니다...정직하게 분명하게 응답하게 하사 오늘과 내일은 물론 우리가 살아온 얼룩진 과거 까지도 새로운 의미를 갖을 수 있는 새로운 내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네 신을 벗으라 /출3:1-8/ 곽선희 목사
2014-11-25 10:52:07
하이럼 W. 스미스(Hyrum W. Smith)라고 하는 교수님께서 What Matters Most 라고 하는 책을 쓰셨는데 이 책은 한 달이 못되어서 온 세계에 베스트 셀러로 유명해진 그런 책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그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 What Matters Most,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내가 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 그런 지혜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명저입니다. 여기서 네가지를 말해줍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를 분명히 아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The power of knowing who you are.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큰 오류가 있다면 사람마다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다는 것입니다. 모를 뿐만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기 정체를 알게되는 순간에 깜짝 놀랍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거든요.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아무 것도 모릅니다.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이루어 놓은 것처럼 업적이나 실적을, 성과를 말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다 잘못한 것뿐입니다.
이럴 때에 부끄럽기 그지없고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속았다는 것처럼 기막힌 고통은 없습니다. 완전히 잘못살았습니다. 왜요? 내가 나를 너무 몰랐거든요.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고 합니다.
I am somebody, 나는 무엇인가 중요한 사람이다. I am somebody, 이런 생각을 하는 오만함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반대로 I am nobody.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열등의식에 매여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 평생 이것은 연구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내 능력이나 혹은 내게 대한 평판이나 내가 이루어 놓은 그 무엇에 의해서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의 엄청난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 하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두 번째 소중한 것은 Discover what matters most to you,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세상엔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하고싶은 것도 많고 보고싶은 것도 많고 굉장히 넓은 세상에 삽니다만은 중요한 것은 나입니다
.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좀 더 나아가서 내가 가진 것 중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못 가진 것을 가져보려고 해 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누구나 다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뒤에 보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 이스라엘을 건져라"고 했더니 "제가 누구관대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아주 신중한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나는 그것을 통해서 역사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내 손에 있는 것, 지금도 내 손에 있는 것, 그 소중한 것,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발견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것을 알고 있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Doing something about what matters most. 그 소중한 것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행하라. 거기에 집중하라. 거기에 열정을 다 기울이라 그 말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극대화하라 이 말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몸부림치지 말고 이미 아는 것, 그것을 가지고 충실히 자신의 정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 보세요. 소중한 것을 위하여 열중하기 때문에 덜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끊어 버리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것은 잊어버리십시오. 제가 한가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많이 잃어버리고 다닙니다. 하지만 제 생전에 안경을 잃어버리긴 처음입니다.
아 글쎄 미국에서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밤에 배가 고파서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사먹었는데 그리고 운전을 하려고 차를 몰고 나가려고 하니까 안경이 없습니다. '안경이 왜 없지' 한참을 가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돌아가서 보니 그 안경 가져갈 사람도 없어서 제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 쓰레기통에 제가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햄버거를 먹고 같이 버린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즉석에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잊어버려. 아쉬워 할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 버리고 간 애인, 잊어버리십시오. 그것을 무엇을 생각하며 밤에 잠을 못 주무십니까?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 어떤 어머니의 어린아이가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참 괴로웠습니다. 장례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싸서 안고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장례를 못했습니다. 참 답답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잃은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못하면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가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바보 같습니까? 그러므로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덜 소중한 것을 끊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Priority다. 우선 순위가 문제라고 합니다. 어차피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다 먹는 것도 아니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순위로 중요한 것, 무엇부터 하느냐, 그것이 그 운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네 번째는 What matters most-the broader view.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소중한 것을 알고 그것에 집중하고 수고하고 노력하겠지만, 그러나 거기에 풍덩 빠져서는 안됩니다.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외에 바깥 세상이 있습니다.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항상 보고 시야를 넓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에 베스트셀러로 도는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소명을 받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그는 섰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자신의 동족에 대한 불붙는 정열이 있습니다.
저들을 구원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생각합니다. 내가 할 일은 없다고. 저 노예생활을 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내가 오늘 할 일은 없다. 왜? 그는 죄인입니다.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한 도망자올시다.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애굽에 가며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는가? 역부족입니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간절한 소원일 뿐입니다. 또 하나는 그는 처가살이 40년을 했습니다.
요즘에도 처가살이를 하는 사람에게 별로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처갓집 양을 40년 동안 치며 살았습니다. 남자 대 남자로 말하지만 별 볼일 없는 남자입니다. 어쩌다 처갓집 양을 치는 것을 40년하고 나이 80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생각했겠죠. 이렇게 양을 몰고 다니다가 어느 골짜기에서 내 생은 끝날 것이라고. 그 뿐 아니라 40년의 목자 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이제 불편도 없습니다.
원망도 없습니다. 그저 익숙한 일에 끌려서 그렇게 그렇게 이 골짜기 저 들판으로 양을 몰고 다니면서 살다가 그렇게 생을 마치기로 이미 결정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는 것입니다. 엄청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나이 80세. 실패한 사람 좌절한 사람 인생으로서는 끝난 사람을 놓고 하나님께서는 부르십니다. "모세야."
첫번째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 신을 벗는다는 말,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노예는 신발이 없습니다. 노예는 동물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노예에게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발이 없고 둘째는 이부자리가 없습니다. 그저 지푸라기를 놓고 거기서 돼지처럼, 소처럼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발이 없습니다. 이 말은 "너는 노예다. 오늘부터 너는 나의 노예다. 너는 나의 종이다" 그 말입니다. 노예는 소유도 없고 그의 지식이나 판단의 권리도 없습니다. 기뻐하고 슬퍼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노예는 내가 노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노예다, 그랬습니다. '내가 왜 노예인가. 나도 사람인데. 어째서 언제부터 노예였는가. 누구 때문에 내가 노예인가. 누구 때문에 팔려왔느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예가 아닙니다.
그것은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참 노예는 노예생활에 익숙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에게 순종할 뿐입니다. 그것이 노예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노예다. 신발은 벗으라. 동시에 이 신발이란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서 신발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역사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신는 신발을 턱 놓고 있다가 시발을 신으려고 하면 시녀들이 신겨줍니다. 그 신발, 번쩍번쩍하는 것, 그런 신발. 또 재상들은 재상의 신발이 있고 양반은 양반의 신발이 있고 머슴은 머슴의 신발이 있습니다.
신발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신을 벗어라, 네 신분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것을 잊어버려. 앞으로 네가 어떤 사람이 되든 그것도 너와는 상관이 없어. 신발을 벗으라. 신분을 포기하라. 다만 너는 나의 종이다.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신발은 곧 경건을 말합니다. 우리의 풍속은 아닙니다만은 모슬람 사람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슬람 사람들과 사업을 하다가 어디에 있더라도 심지어는 제가 평양에서도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중동에서 오신 모슬람 사람들이 회담을 하는데 12시가 되니까 초조해 하는데 문을 딱 열고 "저기 가서 기도하십시오" 하고 준비해 놓았다고 그런 얘기까지 합디다만은 좌우간 이 분들은 그 시간에 반드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신발을 벗습니다. 맨발로, 그리고 꿇어 엎드립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의 표시입니다. 맨발, 그것은 완전한 헌신과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설교를 할 때가 있는데 다른 교회에 갔을 때 어떤 교회에 가면은 강대상에 올라설 때 저보고 본 교회의 목사님께서 "신발을 벗으세요"라고 하십니다. "왜요?" "벗으라면 벗지." 알았다고 신발을 벗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거 신으세요." 그리고 슬리퍼를 턱 신으라고 합니다. 그거 화장실에 갈 때 신는 것인데 그거 마음에 안들어요. 그런데, 정말 벗으려면 양말까지 벗어야지 그래야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다 상징적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성경에 '네 발의 신을 벗으라' 했다고 해서 구두를 벗고 올라오게 만드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 과거, 네 미래, 네 신분, 네 자존심 다 벗어버리라. 네 발의 신을 벗어라.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판단하고, 무엇이 옳고 제가 뭘...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네 발의 신을 벗어라.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신 방법은 천지개벽이 아닙니다. 큰 기적이 아닙니다. 사실은 조용하게 한 사람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를 통해 역사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르고 있었지만 벌써 80년 전부터 나일강에서 건져서 바로의 궁전에서 40년간 공부하게 하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지도자의 지도력을 훈련시킨 것입니다.
80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르시는 것입니다. 옛날 생활을 잊으라. 하나님만 의지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불신이요 불신은 교만입니다.
교만 때문에 교만하고 교만 때문에 절망합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간은 권력이란 교만에 붙들리어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권력, 가지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허상입니다.
권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닌데 권력을 가지면 된 것처럼, 권력을 가지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두 번째는 지적교만입니다. 무엇을 안다고, 아니 알기만 하면 다 될 것처럼 합니다. 아니올시다. 다 알 수도 없거니와 알아서도 안됩니다.
셋째는 도덕적 교만입니다. 자신은 남보다 의롭다. 남보다 깨끗하다, 남보다 지혜롭다, 남보다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 도덕적 기준에 의해서 많이 고민합니다. 앞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좀 깨끗한 사람, 좀 의로운 사람, 그런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의인, 위인, 성자, 이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세상에는 죄인 밖에 없으니까." 때로 우리는 청와대의 주인은 성자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정치가 중에 성자 없습니다. 애당초 기대하지 마십시오. 역사적으로 없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다 같은 죄인입니다. 다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순종하느냐, 그것이 문제가 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믿는 그 믿음, 그리고 그 순종만이 문제의 열쇠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 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엄청난 의미가 있답니다. 그 순간 모세는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는 어려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많은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잃어버렸던 과거가 이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느 때 군대 나가는 청년 한 사람이 내게 와서 "목사님 저 군대 나갑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도 안하고 놀러다니고 못된 짓을 많이 했거든요.
이제 좀 후회가 됩니다. 군대갔다 와서 잘하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래? 과거를 잃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금 네가 믿음 에 바로 설 수만 있으면 잃어버린 과거는 아주 유익한 것이 된다. 버려진 과거가 아니다. 그것이 오늘과 내일을 사는 지혜가 될 것이다." 그
렇습니다. 여러분 쓰라린 과거가 있습니까? 오늘 주님과 만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크신 경륜과 지혜 속에서 Meaningful,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도자는 그러합니다.
헨리 블랙커비(Henry T. Blackaby)라고 하는 분이 Spiritual Leadership, 영적 지도력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리더쉽이란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정의했습니다.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첫째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남달리 많은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리더쉽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이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탓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못 됩니다. 민족이건 개인이건 누구든 간에 그 책임을 내가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 책임은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만이 지도자가 됩니다. 또한 자기가 선택하는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 그 분을 위해서 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갑니다. 내 의견과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고 따라가는 그런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너무나 두렵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 알고 있다고. 4장에 보면 모세가 "나는 말을 잘 못하는데요" 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뇨?
가라면 가지. 다 알고, 너의 과거도 알고 너의 미래도 알고 너의 현재의 부족함도 다 알고 내가 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을 하십니다.
세 가지 명령입니다. "발의 신을 벗어라. 나를 믿으라. 그리고 가라." 믿고 가라. 명령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첫째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둘째는 너의 지팡이와 함께 하리라. 셋째는 가나안 땅을 반드시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벌써 한 사람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모세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큰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다만 바른 응답을 원하십니다.
신발은 벗고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묻지도 말고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라. 그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가 모르지만 우리를 위한 지도자들을 세워 오늘이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이 민족이 목자를 잃은 양처럼 다시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세와 같은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다 주 앞에 성실하게 믿음으로 순종해서 내가 사는 영역 그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의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비젼과 야망 /출3:1-12
2014-02-20 11:45:57
요즈음처럼 비젼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 시대는 없는 것 같습니다.
비젼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미래에 대한 구상'입니다. 그리고 야망이라는 말은 영어로 'ambition',그 의미는 '원해서는 안되는 일을 바라는 지나친 욕망, 또는 '분에 넘치는 큰 포부'입니다.
비젼과 야망이라는 말의 차이를 사전적인 의미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차이이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비젼과 야망과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 보면서 우리의 비젼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비젼과 야망은 출처를 통해서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비젼은 하나님께로 온 것임에 반하여 '야망'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요엘서 2:28의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말씀이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이루서 집니다.
여기는 젊은이가 보게 되는 '이상'을 모든 영어 성경은 '비젼'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젼은 젊은이들이 자기 스스로 노력과 연구와 간절한 바램을 통해서 갖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할 때 그 비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모세는 왕궁에서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고, 모든 면에서 자신 만만한 젊은 40세에 그 민족을 구원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 사람을 쳐죽이지만 그는 실패하고 도망가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민족을 구하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한 비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야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의 모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늙었습니다. 그의 머리는 백발이 날립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80세의 촌부에 불과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납시다.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바로 손에서 구원해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비젼입니다.
모세는 5번이나 이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비젼을 주셨기에 모세는 결국 그 비젼을 받게 됩니다.
바울의 비젼,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의 비젼도 바울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하나님이 주신 비젼이었기에 바울은 이 비젼을 위해서 환란을 기쁘게 받았고 순교도 마다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젼'은 전혀 내 생각과 상관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고, 바라던 것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나의 비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야망을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인양 선전하고 실현시키려고 갖은 노력과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인간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속지를 않으십니다.
또한 비젼과 야망은 실현 과정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야먕은 내 자신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내가 이루려고 노력을 합니다. 물론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란 책이 서점가를 휩쓸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마치 성공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교과서처럼 되어 버린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 책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성공과 실패 여부는 나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적극적인 사고로 나아가면 성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는 논리가 도리어 모순을 낳게 되는 역작용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거짓말도 하게 됩니다. 눈가림의 속임수도 쓰게 됩니다.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불의한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연약성과 한계성을 간과하기 때문에 실현이 되지 않을 때에는 극심한 좌절감과 절망 속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가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인간의 연약성과 한계 때문에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의 학문과 지식과 권력과 배경과 애국심 등을 볼 때, 자기 민족을 구원할 것 같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광야로 도망을 가서 숨어서 양을 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모세는 광야생활에서 극심한 좌절감으로 생긴 우울증 때문에 상당 시간 고생을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80세의 촌부에게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비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기에 모세의 능력과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 비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꿈의 사람' '비젼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요셉의 비젼은 전혀 자기의 의지와 소원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가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려가서 노예 생활을 하고,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과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 비젼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애굽을 다스리고 당신들이 내 앞에서 절을 하는 비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오, 그 비젼을 이루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창 45:5-6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케하는 말씀입니다.
(창 45:5-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비젼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당신들과 당신의 후손을 이 땅에 두시려고 나를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고 애굽 온땅의 치리자로 삼으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비젼을 어떻게 이루어셨는가를 말합니다.
'당신들의 손을 통해서 애굽으로 팔려가서 노예 생활하고 감옥 생활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애굽의 치리자로 삼으셨다'고 말을 합니다.
비젼의 실현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젼을 받은 사람은 잠잠히 인내하며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그러먄 하나님의 반드시 이루시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비젼과 야망은 결과 즉 열매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야망은 안 이루어 질 수가 있습니다. 이루어져도 그것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 7:22의 주님의 단호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주신 비젼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분은 중간에 포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은 실패하는 법도 없으십니다.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마 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열매로 압니다. 그러므로 무성한 잎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있는가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 insight가 필요합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시간이 가면 반드시 그 본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눌 우리는 연금술사처럼 기발하고 탁월한 아이디어와 테크닉이 비젼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즉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비젼이 내 속에서 싹트게 됩니다. 드러나게 됩니다.
비젼은 프로그램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비젼은 내 경험과 능력과 내 소유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신념하고 다릅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선포하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모든 것, 내 생각, 내 목표, 내 계획, 내 전략, 내 야망, 다 내려놓읍시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비웁시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 속에 오셔서 나를 채우소서.. 성령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간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가 갖고 있는 비젼이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비젼인가를 분별해내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비젼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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