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8:37 - 47절 설교 모음

Jessi J 2023. 9. 5.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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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속한 자 /8:37-47/ 조학환목사

2023-01-01 14:39:41

 

자유란? 내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니다. 죄를 행할 수 있는 자유는 아무에게도 없다. 참 자유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바르게,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선과 의와 진리와 말씀을 향해 가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뿌듯해 하고, 만족해하고 이게 진짜 자유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안에서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마음껏 감사, 영광, 찬양, 말씀, 기도 생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자.

 

오늘도 계속되는 유대인들과의 변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원래 자유인이다. 너희는 죄의 종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혈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영적으로는 마귀의 자손(44)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1.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37,47)

 

하나님께 속한 자가 가장 먼저 보이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다. 오늘 37절 말씀을 보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내 말이 너희에게 있을 곳이 없으므로...’ 도무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 그들속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생각, 오직 자신의 기득권,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 이런 것만이 가득차 있어서 말씀이 심령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것이다.

 

47절 말씀도 보라.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당연히 하나님께 속한자는 말씀을 듣는다. 귀를 기울인다. 경청한다. 사람들간에도 자기 편의 소리를 잘 듣는다. 그러나 서로 경쟁관계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꼬투리를 잡는다. 진실을 말해도 저게 또 무슨 흉계를 꾸미지 하며 곧이 곧대로 듣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가 안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씀을 잘 듣는다. 귀를 기울인다. 곧이 곧대로 듣는다. 그러나 하나님 편이 아닌 사람은 안 듣는다. 도무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비평이나 하고 앉아 있다. 무슨 모순된 점이 없는지 그것만 찾고 있다. 바로 마귀편에 있다는 증거다.

 

잠언서에서 끊임없이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니던가? 들으라. 받으라. 간직하라. 구하라. 찾으라. 목에 매라. 지키라. 잊어버리지 말라. 떠나지 말라. 마음판에 새기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태도를 잊지 말자. 그 말씀을 받아 들이자. 그리고 마음속에 두자. 오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있을 곳이 없어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불행한 일이 없게 하자. 말씀이 항상 있어서 그 말씀 따라 살아가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자.

 

2.아브라함의 행사를 한다(39-41)

 

유대인들 속에 말씀이 없으므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면서 아브라함의 행사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걸 지적하신다. 39절 말씀이다.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너희 아비는 마귀라하니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결정적인 증거를 말씀하신다. 그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진리를 말하는 나를 죽이려 하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 형식주의와 외식주의에 빠져 불법을 행하느냐? 아브라함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느니라.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서까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할 것이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할 것이다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반대로 하면서 무슨 아브라함의 자손이냐는 것이다.

 

안동 있을 때 이 사람들 만나면 무슨 파 몇 대손 어쩌구 저쩌구 따진다. 특히 안동에 사는 안동권씨들 유명하다. 물론 그들 중에는 꽤 훌륭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막상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성씨가 뭐냐, 무슨 파 몇 대손이냐, 어느 성씨는 어떻고 저쩌구 하면서 따지는 사람들이 많다. 참 웃기는 얘기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양반이 따로 있나? 양반 행사를 하면 양반이고, 상놈 행사를 하면 상놈이다.

 

그렇다고 우리 창녕조가가 상놈 집안이라서 이런 얘기하는 건 아니다. 우리도 꽤나 양반에 속한다.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부마 조계룡 할아버지이며. 세종대왕시의 영의정이었던 조민수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조선시대에 문과에 120여명 정도가 급제하였다. 이거 인구비례로 따지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김씨는 약1,000, 이씨는 약700, 박씨는 약400, 최씨와 정씨는 약200만명 정도인데 창녕 조씨의 약30만명이다.

 

어쨌든 요점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행사를 해야 한다. 학생은 학생의 행사를 해야 하고, 군인은 군인의 행사를 해야 한다. 성도는 성도의 행사를 해야 한다. 항존직은 항존직의 행사를 해야 한다. 말만 하나님 믿는다, 교회에 다닌다, 집사다, 권사다. 제직이다. 이건 아무 소용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하자. 그래서 말그대로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아가자.

 

3.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42-46)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이 또 말한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다.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정통 자손이라는 것이다. 첩이나 무슨 불경건한 방법으로 나지 않고 성결한 아브라함의 혙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만약 하나님의 자손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 또한 사랑해야 되지 않겠느냐, 나는 나 혼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라라고 얼마나 말하였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믿지는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겠느냐?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고 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한 자다. 그래서 너희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 하느냐,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를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나도 믿는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거부하니 너희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라 마귀에 속한 자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았다. 왜일까?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따랐던 아브라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진리를 따르기 위한 전제 조건이 뭐냐, 바로 진리를 믿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잘 따라가지 않는다. 마치 성경이 구시대의 유산이라도 되는 양 현대에는 그대로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면서 믿으면 되지 뭘 그렇게 신앙생활을 철두철미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한다. 그것을 구속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건 신앙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자유이고, 성경대로 사는 것은 구속이라고 여긴다면 이건 자유를 모르는 사람이다. 믿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믿음이란 뭔가? 주님을 믿는 것. 십자가의 구속, 부활, 재림, 심판,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됨, 하나님의 창조, 전능, 사랑 뭐 이런 등등을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정하는데 그 말씀은 따르지 않는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고 인정하는데 그걸 따르는 것을 구속으로 여긴다? 그게 가능한가? 그렇다고 인정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한다?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유대인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았다. 믿지 않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누구 말 맞다나 무늬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진짜는 아닌 것이다.

 

오늘 이 세가지를 기억하자.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을 듣는다. 경청한다. 그리고 믿는다. 믿으면 행한다. 그럴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다. 이걸 기억하며 말씀을 경청하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말씀따라 살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자.

 

 

 

아버지가 누구냐 /8:37-47/ 김도완 목사

2022-08-02 14:50:11

 

1. 신분제와 선민의식

 

한국인과 친한 미국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한국인의 라스트네임은 다 김, , 박이라고 농담할 때가 있습니다. 실제 한국인 절반이 김씨, 이씨, 박씨, 최씨이고, 한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김씨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들 가문이 실제로 이렇게 번성했기 때문일까요? 16세기 조선 초만 해도 성씨를 가진 이는 왕족과 양반, 양민 등 10%에 불과했습니다.

 

조선 후기 광해군이 돈을 받고 신분과 벼슬을 파는 공명첩 제도를 실시하면서 노비와 천민 등이 소위 족보세탁을 하면서 90% 이상이 성씨를 가졌습니다. 이 때 더 비싸도 왕족, 귀족의 성씨를 선호했기에 지금처럼 김씨, 이씨, 박씨 등이 급격히 늘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늘날 족보의 90% 이상이 가짜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족보세탁에 혈안이 되었을까요? 신분에 따라 다른 자질과 권리,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어 그들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 대접, 당하는 차별과 멸시가 하늘과 땅차이의 신분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남아있는 인도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나 인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신분에 대한 믿음과 차별이 덜하지 않는 사회가 있다면 바로 1세기 유대사회였습니다.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믿었던 정통 유대인들이 가진 하늘을 찌를듯한 자부심과 반면 율법을 모르는 평민, 혼혈 사마리아인 그리고 타민족에게 가한 멸시와 차별은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면전에 대고 개, 돼지 취급을 하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그들의 이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는 것은 엄청난 반발은 물론이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이 삐뚤어진 선민의식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난민들을 위협하고 몰아내는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이 이데올로기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신 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십니다.

 

2. 누구의 자손이냐

 

요한복음 8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39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조합니다.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이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를 퍼부으십니다. 44절입니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는 짓이 마귀의 짓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8:44)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8: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8:41) 너희는 너희 아비(마귀)가 행한 일들(살인과 거짓)을 하는도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믿고 주장하는 바가 아니라 행위를 근거로 판단하셨습니다. 이는 열매를 보고 나무의 종류를 판단한다는 당신의 말씀대로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포도나무라고 믿고 주장해도 무화과가 맺힌다면 그 나무는 무화과나무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해치려 하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그가 마귀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인용하며 성도들에게 그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라고 권합니다.

 

3. 예수님은 어디에

 

이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독교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배우고 믿고 또 주장하지만 그 믿음이 참된 것인지는 말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사기꾼일수록 더 번지르한 거짓말을 하고 이단, 사이비일수록 더 그럴듯하게 성경을 해석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행함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을 죽이고 속인다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또 죽인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승천한 후 세상에서 당신을 대신하는 존재 두 가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막 9장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9장을 보면 그가 교회를 박해하다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는 교회를 박해했는데 주님은 이를 당신을 박해하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해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하는 두 번째 존재는 바로 연약한 이웃입니다. 2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가르치기를,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 하였습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그 영혼을 죽이려는 것 곧 살인하는 것이며 이는 곧 예수님을 죽이려는 짓입니다. 거짓으로 비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거짓과 미움을 갖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에게 거짓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가 마귀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반면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며 곧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4. 살인의역사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했고 실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당신을 향한 그들의 적개심만을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을 살해한 것 뿐 아니라 이후 교회 역사에도 이와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살인을 저질러온 마귀의 역사가 이어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서구유럽과 아랍세계에 씻을 수 없는 증오와 반목을 심은 11세기 십자군 전쟁은 그 좋은 예입니다. 교황청과 왕들, 도시의 필요가 맞물려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내세운 성지수복이 아닌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 증오만을 남겼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에서 크게 성장한 Campus Crusade for Christ 소위 CCC 대학생선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한 캠퍼스 십자군이란 뜻입니다. 교황조차도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적 과오라며 공개사과한 죄목 중 첫째로 꼽은 것이 바로 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이들이 캠퍼스의 십자군이 되겠다고 하니 과연 아랍인들이 들으면 복음을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1960년 대까지도 공개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쿠 클럭스 클란 즉 KKK단은 개신교 근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흑인과 흑인에 동조하는 이들을 차별과 테러,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흔적을 지금도 개신교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지역과 정치권 곳곳에서 어렵잖게 찾을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귀에 심심찮게 들려오는 아시안증오범죄도 이런 증오와 멸시에 기반한 폭력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의자녀들

 

이런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의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KKK단에 참여한 이들을 흉측한 얼굴과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칼을 들고 다니는 이들이 아닙니다. 복면을 벗은 그들은 존경받는 군인이요, 인상 좋고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요, 같은 백인들에게 모범적인 지역유지요, 주일마다 교회당에 앉아 성실하게 찬송가를 부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 예배당에 앉은 우리 중 누구라도 거짓에 현혹되고 미움에 사로잡히고 광기에 휩쓸리면 흑인들을 목매다는 KKK단이 될 수 있고,

 

아랍인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십자군이 될 수 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유대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살인과 폭력의 역사는 우리 마음 한 켠에서 시작된 작은 미움과 차별과 텃세에서 시작됩니다. 무게감도 없는 눈꽃송이 하나하나가 쌓여서 굵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긴 세월과 만나면 바위를 뚫듯 우리가 의식하지 못 한 채 마음에 쌓아가는 미움, 분노, 무시, 경멸의 파도가 쌓여서 사람의 마음을 찢고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폭력과 살인의 쓰나미가 됩니다.

 

연예인들이 팬들의 악플세례를 견디다 못 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배설물같은 감정을 쏟아놓은 악플러들의 저주가 쌓이고 쌓이면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생명도 앗아가는 무서운 저주가 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에베소서는 이런 폭력과 살인의 쓰나미가 시작되는 곳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형제의 잘못으로 마음에 분노가 생겨도 그것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품지 말라는 것이고, 그 분노를 해가 지도록 품어서 쌓아놓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분노를 쌓아두면 안 됩니까? 첫째는 분노가 쌓아두면 반드시 미움의 독을 뿜어내고 그것은 곧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앞서 설명했듯이 그 쌓인 분노가 모이고 모여 거대한 증오와 폭력의 쓰나미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분노와 미움의 악순환은 반드시 대를 이어 악순환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것도 닮고 믿는 것도 닮고 섬기는 것도 닮습니다. 미워하는 것도 닮고 해치는 것도 닮고 살인하는 것도 닮습니다.

 

분노와 미움은 우리의 마음도, 영혼도, 가정도, 사회도, 자녀들도 모두 해치는 마귀의 살해도구입니다. 그렇다면 분노와 미움을 품고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귀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마귀의 살해도구가 될 수 있습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나 주장이 아니라 이 믿음과 순종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증명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복음강해 53. 당신의 아비는 누구인가? /8:37-47/ 이종철목사

2022-06-07 05:04:55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아브라함의 자손

 

장동건 유오성 주연의 영화 친구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아버지가 힘없고 천한 장의사란 직업을 가졌기에 장동건은 선생님으로부터 뺨을 무수히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힘 있는 사람이었다면 함부로 못했겠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불평등 구조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머리나 성적이나 직업까지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서울 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2, 30대의 현정부를 향한 분노 투표입니다. 이는 단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를 향해서 밀레니얼 푸어(poor)’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21세기에 들어 신자유주의 강화에 따른 경쟁의 치열과 거대 기업으로 구조 개편, 연속된 경제위기(우리는 IMF 사태, 신용위기, 코로나 위기), 컴퓨터와 전자산업, 4차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인력 절감 등으로 좋은 일자리들이 사라지고 일자리 자체가 축소됩니다.

 

이 와중에 직격탄을 맞은 것은 청년 세대입니다. 대학 졸업자는 이전 세대에 비해 매우 높아졌는데 취업의 문은 더 좁아졌습니다. 이웃 아버지는 자기 일자리를 빼앗는 위협세력이고, 자기 아버지는 부유해야 자신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강남권의 투표 성향은 예나 지금이나 주어진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단적 저항의 모습입니다. 현정부는 이 기득권 구조를 강력히 깨뜨리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스탠스를 취하다 참패를 당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뭐 하는지가 여전히 중요한 시대입니다. 이런 불평등 구조가 고착화되는 것을 막고, 세대간 치우친 기회 구조를 공평하게 는 것이 중요한 시대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또한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전개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위대한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 자랑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39),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37) 유대인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위대함과 편협함이 모순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어느 민족마다 자신의 시조를 자랑하지 않는 민족이 없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자신이 트로이의 후예라고 합니다. 그리스는 알렉산더의 후예이고, 몽골은 칭기스칸을 자랑스런 아버지로 두고 있습니다. 북구는 바이킹의 후예거나 오딘 신의 자녀들이라 할 것입니다. 용맹했던, 자랑스러웠던 조상들이나 실제 민족의 건국 시조가 되었던 조상을 언급합니다. 우리나라는 단군의 후예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지금은 거의 잊히다시피 했지만 우리는 한때 단기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올해는 단기로 4,354년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랑하려면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39)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건국시조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땅을 주고, 위대한 민족을 이루고, 다른 민족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일을 행한다면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족 시조 자랑이 땅과 위대한 민족 건설에 그치고 복의 근원의 약속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단군의 자손이라는 건국개념은 괜찮아 보입니다. 민족을 부르신 성서적 개념에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단군은 폭력적이거나 제국주의적 이미지가 아닙니다. 고조선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 두 단어로 압축됩니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인인간의 정신은 생육하고 번성하라”(1:28)는 창세기 말씀의 실천입니다. 세상을 이치로 교화한다는 재세이화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꿈꾼 이스라엘의 계약법 정신과 일치합니다.

 

고조선은 2,333년 건국 후 무려 2천 년 동안 동북아 지역에서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국이 폭력적 지배가 아닌 공존과 상생이었습니다. 천신 신앙을 가진 환웅족이 곰 토템을 가진 맥 족과 혼인 관계로 맺어 단군 중심의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범 토템을 가진 예 족은 제후국 형태로 자치권을 얻었습니다. 이 삼국을 중심으로 읍루족(만주민족), 실위족(몽골민족), 정령족(투르크족), 산융족(훈족), 일본 족 등이 연방체제를 이뤄 고조선 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고조선은 이 평화를 바탕으로 쌀 문화, 청동기 문물, 고인돌 문화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동북아 지역이 평화롭고 이웃 민족이 공존 상생하고 발전을 이루는 하나님의 꿈의 실현입니다. 무려 이 체제가 2천 년 넘게 존속했는데 우리는 너무 그 뿌리를 알지 못하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단군은 무속인들의 전유물이 되거나 신화 정도로 가볍게 취급합니다. 저는 고조선 체제의 이상이 동북아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웃 민족을 위협하는 팽창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자기 민족만 살겠다는 편협한 섬나라 국수주의일 뿐입니다. 이는 평화가 아니라 폭력이고, 이웃 민족을 괴롭게 하는 제국주의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할 때 그 강조점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복의 근원이 되어 세상 모든 민족을 복되게 하려는 뜻이었다면 예수님은 이를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이 싸움은 나중에 바울이 더 치열하게 합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며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협함으로 나갔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이 된 율법과 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를 근거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온 이스라엘을 꿈꾸었던 것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마귀의 자식

 

예수님은 진리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은커녕 아예 마귀의 자녀라고 매우 심하게 말씀합니다. 44절입니다.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그들이 마귀의 자식인 이유는 마귀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일의 특징은 욕심대로 행한다, 살인자다, 거짓을 행한다입니다. 거짓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한 인간으로서 탐욕대로 살아간다,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위협한다,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친다면 그는 마귀의 자식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마귀의 일인데 잘 주목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념의 죄입니다. 이념의 죄는 거짓으로 집단적 사기를 치는 죄입니다. 유대 랍비들이 무슨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그들은 대부분 선량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이라는 이념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괴롭게 합니다. 다른 민족은 배제하고 차별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이 살인입니다. 결국은 예수를 죽이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살인은 민족 이념으로 인한 민족 간 전쟁, 종교 교리로 인한 마녀사냥, 이념으로 인한 전쟁과 숙청 작업에서 저질러졌습니다. 자본주의 이념은 무정함과 인간의 무한 탐욕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를 하면서 별 죄책감이 없지 않습니까? 내 돈으로 내 집 사서 재산을 불리려는데 그게 무슨 죄야? 이것이 더 무섭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위기로 몰리고 살해를 당합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마귀의 자식이 되고 있는지는 한나 아렌트란 유태인 학자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흥미롭게도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아이히만은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친위대 장교로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와 학살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인물입니다. 아이히만은 전쟁 후 아르헨티나에 피신해 있다가 15년 만에 잡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아이히만이 전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자신은 신 앞에서는 유죄일지 모르지만 법 앞에서는 무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네 아이의 사랑스러운 아버지였고, 단지 충실한 국가공무원이었을 뿐이라고 강변했습니다. 그는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며, 유태인들을 좋아했지만 국가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수행했다고 변명했습니다. 잔인하게 살해되느니 당시 안락사라고 일컬어지는 가스실의 죽음이 훨씬 덜 잔인하고 인간적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살아남았던 유태인 중 한 사람이 이런 아이히만을 법정에서 보고는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해서 그랬을 것이라 예상하며 그 사람에게 기절했던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전혀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아이히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저토록 평범한 인간이 그 많은 사람을 가스실로 몰아넣었군요. 나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이 책을 썼던 한나 아렌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의해서 벌어지는 엄청난 죄악을 보며 그들의 잘못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로 하여금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생각하지 않으면 어느새 마귀의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부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어느새 악마의 자녀가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 마귀의 자식입니다. 이 말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놀랐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고 실상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첫 시작부터 인종이나 혈통의 가족이나 민족 개념을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112, 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혈통의 신화를 깨고 있습니다. 인간의 취미와 성향으로 모인 어떤 사교집단이나, 사람의 뜻이 집단적으로 집약된 이념이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가 바로 내 형제요 내 자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8)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 우리는 누구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어떤 말씀이 들립니까? 그것이 우리의 아버지를 결정합니다. 진리 안에서 진리의 소리를 듣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8:37-8:47

2021-11-17 05:44:58

 

얼마전에 한국에서는 안철수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안철수교수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도 지금 안철수바이러스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철수교수가 서울시장후보 여론조사에서 50%이상의 지지율을 얻었고 대통령후보 여론조사에서도 1위를 할 만큼 그 열풍이 대단했습니다.

 

제가 몇년전에 강호동이 진행하는 무릎팍도사에서 안철수교수가 출연을 했을때 시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안철수교수가 마치 신앙심이 아주 깊은 청교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강호동이 혹시 목사님이 아니냐고 농담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종교가 없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최근에 한 말들을 기록한 동영상이나 신문기사를 살펴보았는데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깨닫게 되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라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아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수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불교만이 깨달음을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성경을 읽다보면 깨달음에 관한 성경구절들을 많이 발견할수 있게 됩니다.

 

예를들어 시편 49:20을 보시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즉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8:26에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님도 노아의 홍수때 노아의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다 멸망한 이유를 마태복음 24:39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즉 사람들이 깨닫지 못해서 결국은 멸망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씀을 듣고난후 네가지의 반응을 말씀하셨는데 두가지 대표적인 반응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번째 반응은 마태복음 13: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네번째 반응은 마태복음 13: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즉 말씀을 깨닫는냐 못 깨닫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결과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도대체 무슨 진리를 깨달아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깨달아야할 진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자연속에도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 감추어진 진리를 연구하다보면 과학자가 될수 있겠지요. 사람의 몸과 정신에 감추어진 진리를 연구하다보면 의학자도 될수 있고 심리학자도 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모든 진리를 다 깨달을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진리를 다 깨달을수는 없겠지만 누구나 반드시 깨달아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나의 생명에 관한 진리는 결코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자동차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 여러가지를 배워야합니다. 그런데 면허증을 따기위해서 자동차 공학박사나 자동차 엔지니어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동차운전을 하면서 내 목숨을 지킬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은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들어 엑셀과 브레이크를 구분할줄 알아야하고 기어를 변동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 신호등 즉 빨간불과 파란불 신호등을 구분할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교통법규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즉 목숨과 생명에 관한 것은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다할지라도 반드시 힘써서 깨닫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따라서 안철수교수가 아무리 깨달음을 강조해도 그 깨달음의 내용이 단지 컴퓨터, 회사경영, 사회나 정치에 관한 것이라면 혹시 내가 지금 못 깨달아도 당장에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목숨과 나의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지금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될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죽으면 영원한 멸망을 피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오늘의 설교제목처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심각하게 질문하신 것은 단순히 정치, 경제, 사회, 종교문제를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반드시 깨달아야할 생명에 관한 진리를 그렇게 오랜시간 가르쳤는데도 어찌하여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깨달아야할 진리가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는지 그동안 요한복음설교를 통해서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즉 두 가지 핵심 진리를 깨달아야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두번째는 예수님은 누구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나는 태어날때부터 썩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죄인이며, “예수님은 나를 죄로부터 자유케하시려고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하지만 측량할수 없을 만큼 매우 깊고 심오한 진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단순한 진리를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머리로 이해는 했지만 마음으로는 믿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8:46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직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이나 이천년전이나 유대인들이 참 진리를 깨닫고 믿지 못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그들이 육신의 혈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천국에 자동으로 들어갈수 있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주일 말씀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깨달으면 자유케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었는데 왜 우리에게 자유가 필요하냐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태어난 자손일지라도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처럼 너희도 지금 살고 있느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39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그래서 혈통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혈통과 가문을 의지하는 사람은 참 진리를 깨달을수 있는 눈과 귀가 닫히게 됩니다.

 

오늘날도 나의 출생가문뿐만 아니라 나의 출신학교, 나의 출신지역, 나의 직장경력 같은 것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의 시야가 좁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진실을 잘 귀담아 듣지 않게 됩니다.

 

요한복음 8:37을 보시겠습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유대인들이 혈통에 집착하다보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속 어느 곳에도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결정적인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를 요한복음 8:47을 통해서 확인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하나님께로부터 너희가 태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들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예수님이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육신의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13을 함께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 깨달아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내가 아직 하나님께로부터 내 영혼이 다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내 영혼이 아직 죽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어있는 내 영혼을 어떻게 살릴수 있겠습니까? 아직 깨달아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닫고 믿을수 있겠습니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깨달아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꾸준히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 10:17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멈추면 안됩니다. 저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도록 4가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예배를 통하여, 두번째는 순모임을 통하여, 세번째는 성경공부를 통하여, 네번째는 개인경건시간 즉 큐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4:6을 보시면,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즉 혈통을 자랑했던 유대인과 달리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은혜를 받을수 있습니다.

 

또 잠언 8:17을 보시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때에 깨달음 즉 믿음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초반에 말씀드렸듯이 안철수교수는 사람이 깨닫게 되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비록 성경의 진리가 아닌 이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꿀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우리가 내가 누구인지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바른 진리를 듣고 깨달고 믿는다면 당연히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예수님처럼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저희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날마다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음으로써 깨달음과 믿음의 복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이웃들이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들 역시 깨닫고 믿게되는 복을 나누어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멸망할수 밖에 없는 저희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나의 강팍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서 내가 태어날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예수 그리스께서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으셨음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혹시 나는 혈통을 의지하고 거듭나지 못하여 여전히 어둠속에서 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시간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는 내가 깨닫고 믿은 복음의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나의 가족과 나의 이웃들에게 전하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9) -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 /8:47/ 김형익 목사

2021-05-11 04:57:34

 

우리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라는 주제를 오늘 아홉 번째로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참 신앙의 믿을만한 증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 후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두려워한다는 말이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 매우 긍정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 자체에 대해서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지배적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은 대개 그것이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경외한다는 말을 선호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이 우리에게 종교적 언어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하는 현실에 비추어 도리어 두려워한다는 말을 쓰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경외한다는 것은 어떻게 입증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존 번연의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것에 진지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의 말을 분리시켜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존중하는 분의 말을 존중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을 존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말을 전혀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로써 여러분은 실제로 그를 존중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존중한다는 것은 첫째로 그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다는 말이고, 무슨 말씀인지 깨달았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첫 번째로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한편으로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부정적 접근)를 살펴보고 다음 주일에 주의 깊게 들어서 깨달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이것은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지에 대한 긍정적 접근)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닌 것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라는 질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A.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라는 말은 아닙니다. 대략 지난 3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이나 강의 등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매우 보편적 현상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신학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말입니다. 직통 계시를 암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계시 위에 존재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었고, 신약 시대에는 성령의 영감으로 사도들이 쓴 말씀들이 절대적이었으며, 이 모든 말씀이 성경으로 완성된 후에 교회는 전적으로 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였고, 새로운 선지자나 사도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과 별개의 계시를 받는다고 말하거나 그런 계시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단에 속한다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이단 판별기준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모든 것이 이단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신학적으로는 꽤나 위험한 표현인데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는 것을 다루기 보다,

 

그때 그때마다 떠오르는 어떤 음성을 듣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이나 호기심이나 능력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를 더 잘 보여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과 별개로 듣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B. 설교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설교를 듣는다는 의미로 축소하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설교자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의 예가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님의 산상수훈/산상설교를 들은 후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인 반응입니다. 마태복음 728~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들은 분명히 주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보통 서기관들을 통해서 들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설교를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설교는 형편없고 저 설교는 아주 성경적이고 바른 말씀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목사를 추종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높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소위 목사들이 연예인과 같은 인기인이 되는 경향도 다 그런 데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분별함이 없이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말씀을 듣고 목사를 따르며 교회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함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 때의 일로 가보지요. 에스겔 3330~33절을 봅시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이 말씀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설교를 잘 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그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여겼습니다.

 

선지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노래의 형식으로 전하곤 했는데 사람들은 에스겔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부르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아주 즐겁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들은 설교자의 화술이나 인품 혹은 어떤 요소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C. 하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나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경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대신,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번민이 생기거나 혹은 말씀으로 인해 기쁨이 생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그런 경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곳곳에서 말씀합니다. 가령, 이사야 662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 떤다는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 떠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예를 보지요.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학살한 잔인한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의 분봉왕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빌립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정분을 나누고 결국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엄밀히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20:14,17) 간음이었을 뿐 아니라 헤로디아에게 헤롯은 이복 삼촌이었기에 이 결혼은 근친상간에 해당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왕의 범죄를 책망하였습니다.

 

마가복음 620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세례 요한의 말씀에 대한 헤롯의 반응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았고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 약간의 번민이 아니라 크게 번민했습니다. 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와 같이 크게 번민하는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헤롯은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또 한 사람을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가 파견한 유대 총독 벨릭스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의 고소로 붙잡힌 사도 바울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유대 출신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사도를 불러서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개인 교사로 둔 성경공부였으니까요. 벨릭스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24:25).” 그도 말씀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 절이 보여줍니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24:26).” 그의 숨은 동기, 그의 마음에서 원한 것은 로마 시민인 바울에게서 뇌물이라도 받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은 두 마음 사이에서 방황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번민이나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만이 아니라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쁨의 반응은 다양한 이유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논리 정연함과 지적으로 깨달아지는 원리들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감정적인 사람이 그 말씀이 가지는 감정적이 요소에 의해서도 마음이 움직여지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는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이 들려져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비판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선지자적인 말씀을 들을 때 그렇게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지는 말씀이 아니라, 어떤 다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소 기쁨의 반응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거나 두려워한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 중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네 가지 밭 중에서 돌밭의 경우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3:20~21).” 말씀에 대한 기쁨의 반응이 잠시 있다가 그 사람의 인격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즉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여하한 이유로 끝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며 참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D. 지식을 위한 말씀 듣기가 아니다.

앞에서 지식의 충족이 기쁨을 주는 경우에 대해서 말씀을 했는데, 이 경우를 조금 더 설명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보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식을 더한다는 차원에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쁘고, 혹은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을 듣게 되면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들었을 때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희가 가진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채워질 것이라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도 알려주셨습니다(13:12). 그러자 사람들은 포도주 부대가 포도주로 채워진다고? 좋은 소리네. 그런데 그건 우리도 다 아는 거야. 뭐 좀 새로운 것 없어? 공부도 안 하나보지?”하는 식의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백성들은 이와 유사하게 반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28:9~10).”

 

이런 것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경우들입니다. 사실 이런 일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2. 요하난의 사건이 주는 교훈: 자신을 속이는 태도를 조심하라(42).

주전 586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모든 말씀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고 성전은 완전히 불타고 무너져버렸습니다. 40년의 세월 동안 특별히 마지막 20 여년 동안 예레미야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말씀을 전해야 했고 언제나 그 결과는 살해 위협과 저주와 물리적 박해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전한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가 참 선지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하난의 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편 바벨론은 자신들이 점령한 유다를 다스리기 위해서 유대인 가운데 그다랴라는 인물을 총독으로 세우지만 그는 3개월 만에 유대 왕족 중 하나인 이스마엘과 그 세력에 의해서 암살되고 맙니다. 암살 후 이스마엘은 암몬 땅으로 도망가고 모든 책임은 총독 휘하의 군대 장관이었던 요하난의 손에 떨어지게 됩니다. 비록 요하난과 지도자들은 그다랴 암살에 직접적 책임이 없었지만, 바벨론이 세운 총독을 죽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나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42:2~3).”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숨김 없이 말하갰다고 하자, 그들은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42:5~6).”

 

이 말은 정말 이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너무나 충분한 말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반응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10일이 지나 기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하난과 모든 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말합니다(10~22):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그대로 거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시겠지만 만일 너희 보기에 평안하고 풍부한 나라인 애굽으로 도망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이 너희를 쫓아가 너희는 거기서 죽어 저주와 수치가 될 것이고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선지자는 그들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마음을 속인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42:22). 그러자 이제 그들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 432절을 보십시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들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당초 애굽으로 가기를 원했고 그 마음을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애굽으로 도피하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거나 그렇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42:3).”

 

이제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측근인 바룩의 부추김을 받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꾸며대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들은 남겨진 모든 자들을 이끌고 애굽 땅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던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때 원치 않게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집니다.

 

3.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요하난과 그의 일행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들은 것은 설교자인 예레미야의 말이었고, 그들이 본 것은 바룩이 부추겨서 지어낸 말을 하는 예레미야였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8:47).” 예레미야가 아니라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그것은 , 내가 지금까지는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구나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거기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설교뿐 아니라, 매일 성경을 읽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신다면 여러분은 복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과 같이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119:105)”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증거입니다.

 

잠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16:20).”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얻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와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의 최저선 /8:37-40/ 김형익 목사

2021-05-07 09:30:21

 

1. 모순: 종교적 살인?증오, 종교적인데, 말과 삶이 다르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모순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가장 종교적이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충성이 있으며, 모세의 율법을 가장 정확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보이고 있는 태도는 적의이고 살의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그 모순을 직선적으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그런 직선적인 태도는 이들의 적대감을 부추겼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37절과 40절에서 각각 주님께서는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그들 마음 속에 있는 태도를 지적하셨고, 결국 59절에서는 그들 속에 숨어있던 살의가 행동으로 나오는 것을 읽게 됩니다. 이들은 결국 주님의 지적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모순이 교회 안에서 여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비록 많은 목회자가 피하고 싶어하는 주제일지라도, 이것은 사실이고 성경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2. 우리가 붙들고 있는 신앙의 최저선: ‘아브라함의 자손

주님께서는 이들의 모순이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붙들고 있는 신앙의 최저선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혈통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거의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이며 외적인 조건입니다.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제가 한국 사람인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마치 여러분이 죠이선교교회 교인이라는 것과 혹은 교회의 어떤 직분을 가진 분들이라는 것과 같은 객관적이고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외적 조건에 대해서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의 최저선일 때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이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떤 근거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 앞에 있던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최저선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신앙의 근거로 무엇을 붙들고 계십니까?

 

3.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오는 두 가지 상이한 결과

오늘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회피하지 말고 대면해보십시오. 주님은 그 근거, 신앙의 최저선으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가하는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주님의 앞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거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상이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A. 죄의 종을 자유케 함

그 첫 번째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죄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게 되면 참 주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이 진리는 그들을 자유케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그들을 죄의 모든 속박과 결과들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합니다. 죄의 형벌에서, 죄의 습관과 능력, 그리고 두려움에서 그들을 자유케 합니다. 자아에 묶여서 사는 타락하고 왜곡된 인생의 틀에서 그를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으로 하여금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 하는 한 가지 결과입니다.

 

B.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함

주님의 말씀이 가져오는 두 번째 결과는 앞의 것과는 너무나 상이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보다시피 주님을 대적하게 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30절에서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했던 바로 그 유대인들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많은 말씀과 설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까지는, 그리고 자신이 그 말씀의 표적으로서 피할 수 있는데까지는 좋을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라고 하신 것입니다(37). 문제는 그 말씀이 내게 걸림이 될 때 일어나게 됩니다. 만일 사람이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게 되면 그는 주님의 제자이고 자유케 하는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할 곳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나,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이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상이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무도 중간에 설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시거나 아니면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4.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시금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저는 예수님을 믿었던유대인들에게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믿는다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께서 여러분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또 염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야 합니까? 여기에 그 시금석이 있습니다. 31절과 37절의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가 바로 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에 의해서 여러분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시험해보십시오. 저는 몇 가지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기준들을 제시하겠습니다.

 

A. 점검 질문들

i. 하나님의 말씀인가, 인간의 말인가?

제일 먼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인간의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실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시는가, 목사의 말로 들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조건 목사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 강단에서 한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인간의 말이 교회 강단에서 설교라는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이것은 분별을 요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억지로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를 통해서 전해질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이 설교를 들으실 때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읽으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기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향해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설교를 들으셨습니까? 어떤 태도로 말입니까?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이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말해줄 것입니다.

 

ii.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이 있는가, 없는가?

두번째 점검 질문은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면 그 말씀은 결코 그 사람 안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교양 강좌 정도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매일의 삶 속에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그리고 영적 상태의 시금석입니다.

 

iii. 순종해야 할 영역을 발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세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읽을 때 여러분은 순종해야 할 영역을 발견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새로운 사실을 아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자기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을 언제나 제시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거의 언제나 우리 자신들에게는 순종을 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말씀이 그저 전에는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 정도를 깨닫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자연과학의 지식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많이 경계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준을 착각하는 교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은 치유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서 현실적 평가와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쌓아 올린 사회 혹은 교회에서의 경력에 비례할수록 그것은 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기에 목사일수록 그리고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그렇습니다. 이것을 피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해야 할 영역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길입니다.

 

이 의지의 복종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될수록 그 말씀은 더 이상 그 사람 안에 거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도 소화된 말씀이 없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편에 서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보게 되고 살핀 나머지 순종할 영역을 찾아서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냥 듣고만 계십니까?

 

B. 지침

이렇게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을 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가지 성경이 가르치는 실제적인 지침을 생각해보지요.

 

i.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3:7~8, 15). 강퍅함은 불신이다(3:18~19).

첫째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는 경고를 우리는 성경에서 듣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구약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강퍅함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강퍅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최악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듣지 않는 마음입니다. 뭐라고 말해도 그는 듣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말씀에도 그는 감동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강퍅한 마음을 불신이라고 지적합니다(3:18~19). 이 강퍅함이라는 불신은 그들 자신이 출애굽을 한 1세대들이었고,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들 스스로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하면 그게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말씀이 거할 곳이 그들 안에 없다는 말씀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ii. 믿음으로 들으라(4:2).

두번째 지침은 믿음으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귀있는 자는 들을지니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청각장애인들을 의식하신 말씀이었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그 말씀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그 말씀으로 변화를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영적 귀로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으로 인해서 변화되었고, 은혜를 받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4:2에서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들은 말씀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다 준행하겠다고 대답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던 사람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불신 가운데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믿음으로 듣지 않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듣는 것이 믿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iii. 말씀은 기도로 소화되어야만 한다(딤전 4:5).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권면했습니다(딤전 4:5). 믿음으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도의 마땅한 반응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들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여러분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삶 속에 그 말씀이 기도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그리고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여러분 자신에게 바라고 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제가 전하는 설교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기도로 승화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변하고, 그것을 간절히 구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기도로 소화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깊은 기도 로 소화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그 아름답고 거룩하신 품성들이 흘러나오고 풍겨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향기로 받으시는 순종은 바로 여기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 믿음의 용장들은 다 이 과정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저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너무나 적은 시대에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통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5. 진리는 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한다.

오늘 이 진단의 질문들, 그리고 실제적 지침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유언으로 남기고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진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여러분의 감정과 상관없이, 여러분의 형편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는 나의 상태와 상황과 상관없이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그 진리의 말씀은 때로는 여러분의 상태 여하에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으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이 나를 힘들게 하거나, 내 아픈 곳을 찌르거나, 내게 상처를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도 있고 외면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가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실상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곳이 없구나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시는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동일하게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는 거할 자리를 찾지 못하는 불신자입니까?

 

6. 내가 붙들고 가는 신앙의 최저선은 무엇인가?(7:24~27)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붙들고 계시는 여러분의 신앙의 최저선은 과연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여러분이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여러분이 정말 거듭나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가 확인하는 수단은 무엇입니까? 오래도록 교회를 다녔다는 것입니까? 모태신앙이란 것입니까? 예전에 어떤 특이한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까? 말씀을 제대로 전한다는 죠이선교교회에 다닌다는 것입니까? 구원 초청에 응하여 앞으로 나가서 기도를 받았다는 것입니까? 영접 기도를 분명하게 따라 했다는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거기에는 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붙들어야 하는 한 가지 신앙의 최저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여러분에게 구체적 진단방법과 실제적 지침을 드렸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결코 오늘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살아 생전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때 명확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우리가 그날 반석 위에 집은 지은 사람으로 예외없이 드러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지금까지의 신앙 생활에 한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풍성하신 자비를 따라서 우리에게 복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admin

 

 

 

들을 귀를 주소서 (가정의 달 시리즈 4) /8:42-49/ 이강웅목사

2020-04-08 13:48:57

 

서론: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의견이 분분하였던 기사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건은 결혼식 당일 날 신랑이 신부 몰래 신부의 부모를 초대하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결혼식에 부모가 참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신부가 어릴 적에 아들 딸 차별과 함께 많은 학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로 딸은 아예 부모와 연을 끊고 살았습니다. 여자 측 부모가 없는 양 상견례도 하지 않고 결혼식 날짜를 잡았는데 신랑이 신부 몰래 신부의 부모를 초대하였습니다. 물론 선의로 깜짝 선물로 준비했겠지요.

 

결혼식이 시작되기 직전 신부 대기실에 있던 신부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한 신부는 신랑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내 부모를 부를 수 있느냐, 내가 살아온 세월 속 상처가 얼마나 큰 줄 아느냐, 결혼식부터 이렇게 마음대로 결정하고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과 나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뛰쳐나갔습니다.

 

신랑 부모와 결혼식장에 와준 하객들에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사라진 신부는 집에도 없고 전화번호도 바꾸고 두 주째 잠수 중이라는 것입니다. 신랑 측에서 하객들에게 사과하고 결혼식은 취소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는데, 신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 된다로 부터 시작하여 그래도 식장까지 와준 사람들에게 신부도 함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식을 취소했어야 했다, 친부모인데 참석한 게 뭐가 어때서 결혼식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너무 지나치다, 심지어 저런 여자랑 결혼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댓글까지 있었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져 보려고 이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우리에게 인생과 가정의 여러 면을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가족 안에 있는 상처와 분노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도 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결혼식을 올리기 전 신부가 부모로부터 입은 상처를 치유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아울러 신부의 상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신랑의 배려심과 소통의 부족을 우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행복의 절정에서 순식간에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만큼 우리 인생이 얼마나 예측 불능한 면이 있는지를 또 말해 줍니다.

 

오늘은 5월 가정의 달 맞이하여 전하는 마지막 설교인데 대화와 소통에 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품속에서 자녀가 태어나고,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형제자매, 친지, 친구, 스승 등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갑니다. 이러한 관계 맺음을 가리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의사소통이라고 합니다. 대화는 이런 의사소통에서 필수적 요소입니다.

 

더구나 사회와 교회의 기본 단위가 되는 가정 안에서의 대화는 한 생명이 아름다운 인격을 갖춘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마치 인체의 혈액순환과 같이 가족원들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여야 합니다. 피 순환이 잘 되어야 세포 성장에 필요한 양분이 운반되어 공급되는 것처럼 가족 간의 대화 역시 서로의 성장을 북돋아주는 사랑과 축복의 대화여야 합니다.

 

만약 가족 간의 오고가는 대화가 이런 내용일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늘 그 모양이야! 그 정도 밖에 못하겠어?” “야 임마! 그것도 공부라고 하냐? 그럴 바에는 일찌감치 집어치워!” “어머니, 제발 잔소리 좀 하지 마시고, 방에 가만히 앉아서 주는 밥이나 잡수시고 참견하지 마세요!”

 

이런 파괴적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이며, 몸짓, 태도 등이 어떠하리라는 것 능히 상상이 가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피차 마음의 상처가 깊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오고가는 대화의 질과 양에 따라서 건강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고, 혹은 파괴적인 관계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온 가족이 인내 가운데 끊임없는 사랑과 축복의 대화를 통해서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조심해야 하고, 신경 써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건강한 대화로 일상생활에서 소통해 갈 때 비로소 건강한 가정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건강한 가정은 어지간한 문제를 만나도 금방 깨지거나 쉽게 망가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와도 오히려 마음이 연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대화를 통해서 어려운 상황을 함께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문제 자체가 더 엉키거나 악화되는 것을 막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해 가는 지혜를 배움으로써 가족원 모두가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반면에 가족 사이에 사랑의 대화가 없으면 서로의 마음에 벽이 생기고, 소통이 되지 않아 쉽게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는 부정적 감정을 불러오고, 그래서 부정적이고 병적인 관계로 변질 됩니다. 이런 관계는 슬기롭게 풀 수 있는 것도 그대로 방치하거나 무시합니다.

 

그리고 섭섭해 하고 실망합니다. 실망하니까 원망하고, 원망하니까 핑계하고, 핑계하니까 정죄하고, 정죄하니까 미워하고, 미워하니까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부부들이 소통이 되지 않아 고통스러워합니다. 아예 대화가 단절된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사소한 일로 다툼이 생겼는데 싸움이 커졌습니다. 말싸움에서 이길 수 없는 남편이 그만 입 닥쳐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입 닥치고 잠자리에 들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일어나보니 이미 출근 시간이 지났습니다. 화가 나서 아내에게 왜 깨우지 않았냐고 물으니까 식탁위에 있는 종이쪽지를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여보, 일어날 시간이에요!”

 

연애할 때에는 한 번 전화기를 붙들면 한 시간 두 시간도 통화를 했는데 결혼생활을 하면서 왜 대화가 줄어드는 걸까요? 왜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대화가 어려워지는 걸까요? 성격과 취향과 습관이 달라서 그럴까요? 그런데 그 차이 때문에 서로 끌려서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너무 바빠서 소통할 시간이 부족해서 일까요?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솔직히 피차 마음의 벽이 높이 쌓아져 가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소통이 되지 않아서 관계가 단절되어 가는 가정이 많습니다.

 

1. 불통의 관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안타까운 탄식이 나옵니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께서 하나님 말씀 진리를 전해도 유대인들이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왜 너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이것은 너희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마귀의 자식이므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의 권세 아래 속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의 필요를 채워주며 그 존재를 빛나게 해주고 싶은 열망을 갖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기에 영광스러운 자리에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불순종의 죄를 지어 타락했습니다.

 

죄는 단절시키고 분리시키는 특성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을 통해서 누리던 생명과 축복, 기쁨과 평강, 거룩과 의로움 등등 이 모든 특권과 영광을 빼앗겼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단절은 인간 소외와 방황과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인간 타락의 비참과 저주가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고 오직 마귀의 말을 좇아서 멸망의 길로 갑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2. 소통의 회복

 

이런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처럼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성육신의 신비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죄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죄인의 모양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사귐과 교제가 풍성히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소통, 교제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끝 순서에 축도할 때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고후 13: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이렇게 관계가 회복되고 교제가 잘 이루어지려면 화해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소통이 잘 되려면 먼저 우리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마음이 어두워져 있거나 가로막혀 있거나 눌려있다면 소통이 잘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마음에 상처가 많아서 마음의 틀이 왜곡되고 뒤틀린 경우에는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복음은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성령 치유로 마음의 상처가 고침을 받아 소통이 잘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깊은 교제와 사귐의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대화는 결코 일방적이 아닙니다. 사실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대화를 잘하는 사림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내용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사람이 기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마음으로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정말 기도 잘하는 사람입니다.

 

3. 들을 귀

 

가정사역하시는 도은미 사모의 책에서 우리의 듣는 귀에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1) 뚫린 귀

 

말 그대로 귀가 뚫려 있어 자기의 내면의 소리도 듣고, 타인의 말도 듣는 귀입니다. 말을 구별하여 들을 줄 알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어도 소화해 낼 줄 아는 귀입니다. 저 사람이 자기의 말을 하는지, 아니면 남의 말을 하는지, 구별할 줄 알고, 사실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아는 귀입니다. 또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타인의 내면의 소리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이런 귀를 가진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2) 엷은 귀

 

팔랑귀라고 하는데 남이 하는 말을 분별하여 듣지 못하고, 들은 그대로 믿어 버리는 단순하고 미련한 사람의 귀입니다. 자기 기준이 없고 혼란 가운데 있는 귀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과장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대게 나는 저 사람보다 못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3) 한 쪽 귀

 

한 쪽으로 듣고, 다른 한 쪽으로 흘려버리는 귀입니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들으려고 하는 귀입니다.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자기의 이익과 성공에 필요한 정보에만 귀를 기울이는 귀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권면이나 충고를 잘 듣지 못합니다. 비판이나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귀입니다. 자기에게 치우친 귀입니다. 이익에 치우친 귀입니다. 이런 사람을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4) 막힌 귀

 

막힌 귀는 어떤 일로 충격을 받은 귀입니다. 상처 된 말이나 듣지 말았어야 했던 말을 들음으로 큰 충격을 받아, 그 말이 미처 소화되지 못한 상태로 있는 귀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계속 잘못 알아듣습니다.

 

이것은 마치 소화 되지 않아 배 아픈 상태에서 계속 음식을 섭취하여 문제를 일으키듯이, 한 번 막혀 버린 귀는 그 뒤에 오는 모든 말을 막히게 합니다. 계속적으로 말들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고, 그러다 보니 염증이 생기고, 붓고, 아프고, 고막이 터지는 일까지 생깁니다. 이런 사람을 상처 입은 사람이라고 해요. 상처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아요. 귀가 막혀 있어요.

 

5) 먹은 귀

 

먹은 귀는 자기 내면에서 말하는 자기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입니다. 그리고 고장 난 레코드처럼 어떤 부분을 반복하여 듣는 귀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세상에 다른 사연이 없어요. 그저 자기 사연 외에는 사실도 없고, 정직도 소용이 없어요. 자기 소리는 다 정직하고, 다 사실이며, 다 옳습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이 언제나 진리고, 자기의 말이 유일한 법입니다. 이런 사람을 병들었다고 합니다.

 

6) 닫힌 귀

 

닫힌 귀는 자기 소리도 남의 소리도 못 듣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소리는 듣습니다. 안 들어야 할 소리만을 들어요. 헛소리를 듣고, 괴상한 소리를 듣고, 이상한 소리를 듣습니다. 이런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7) 열린 귀

 

이 귀는 깨우친 귀라 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사람의 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여 듣는 귀입니다. 땅의 소리와 하늘의 말을 구별할 수 있는 귀입니다. 이런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마치 소화가 되지 않아 배가 뒤틀리듯, 귀가 뒤틀려서 무슨 말이든지 꼬아서 들었습니다. “하면 로 듣고 하면 로 듣습니다. 비꼬아서 듣습니다. 비판적으로 듣습니다. 정죄하며 듣습니다. 급기야 예수가 귀신이 들렸다고 악평합니다(48) 그리고 분노하여 죽이려 합니다.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사람의 귀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건강한 대화를 하려면 건강한 귀를 가져야 합니다. 가정이 건강하려면 건강한 귀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물론 뚫린 귀로 대화하며 관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뚫린 귀는 아무리 건강하여도 사람의 소리 밖에 듣지 못하므로 그 마지막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열린 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귀입니다. 신령한 세계가 열리고,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것보다도 신령한 세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막힌 귀. 먹은 귀, 닫힌 귀를 가진 유대인들은 그게 이해되지 않아요. 제자들은 이해하는 데 그들에게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귀가 할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어요. 거듭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신령한 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요.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란 혈육의 부모로부터 한번 태어나서 그대로 사는 자연인을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과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다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 아닙니다.

 

지식이나 재능, 능력이 많을 수 있어요.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영이 죽어 있어서 기능을 발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며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왜냐하면 이런 일들이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고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없기 때문이지요. 들어도 이해할 수 없어요. 영적인 것은 영적인 감각을 통해 느껴져야 하고, 깨달아져야 하는데 영이 죽어 있기에 영적인 세계, 영적 생명, 그리고 영적 사고력에서 닫혀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고도 영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에 오래 다녀도 여전히 하나님 말씀에 닫혀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생활에 익숙하게 보인다는 것이지 내적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세계와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닫혀 있습니다.

 

이런 분은 먼저 성령에 의해 거듭나야 합니다. 신령한 눈과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세계를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이 살아나면 서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신령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의 교통하심과 성도의 사귐과 교제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사람은 자신과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뚫린 귀, 열린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기술을 배우면 말이 통하는 가정생활, 말이 통하는 교회생활, 말이 통하는 사회생활을 할 수 있어요.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은 마치 마비되었던 신경이 살아나고, 피 순환이 잘 되고, 음식 소화순환이 잘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건강하고 생기 발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소중한 선물 중의 하나는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는 마음가짐입니다. 귀를 기울여 준다는 것은 당신의 사랑과 관심을 함께 나타내주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매우 친밀해 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하는 말을 얼마나 잘 들어주시는가를 보여줍니다.

 

(34:15-18)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16:1-2)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 안에서 먼저 서로 잘 들어주는 귀를 가진 가정. 소통과 대화가 잘 되도록 합시다. 내 자신이 뚫린 귀, 열린 귀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가정 안에서 대화를 성공하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성공적인 사회생활, 풍성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열린 길을 통항 구원이 오가고, 사랑이 오가고, 행복이 오가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강해-41/ 뿌리가 다른 믿음 /8:42-51

2020-01-22 01:33:52

 

지난 한 주간 동안 국내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부산외대 사건, 이집트에서 성지순례 테러 사건 등과 같은 아픈 사건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산가족의 상봉과 소치 동계 올림픽은 온 국민에게 기쁨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우리 생활 속에 항상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남은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을 읽다가 감동을 받은 내용이 있습니다. 올해 성균관 대학을 졸업하는 24살의 서주영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12살에 실명을 해서 앞을 전혀 못 보는 1급 장애인입니다. 그 청년이 졸업을 하면서 부모님에게 쓴 편지가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세상은 저를 장애인이라 하지만 당신들은 저를 아들이라 합니다. 남들은 저를 안쓰럽다하지만 당신들은 저를 자랑스럽다합니다. 저는 서주영군이 부모님에게 쓴 감사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 부모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보면서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보아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사건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 가운데 아합이라는 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며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의 늪에 빠지게 했습니다. 아합 왕이 아람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합 왕은 원치 않았지만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권유로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니 전쟁에 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시드기야라는 선지자는 철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아람 군대를 찔러 승리케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가운데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합 왕에게 아람과의 전쟁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영들을 통해 당신을 전쟁터로 나가게 할 것이고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가야의 말을 들은 시드기야 선지자가 내가 거짓 영으로 말을 한다는 말이냐고 화를 내며 미가야의 뺨을 때렸습니다. 아합 왕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전쟁에 반대를 하는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갔다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선지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비입니다. ‘나비대변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입니다. 대변자는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분의 뜻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시드기야와 미가야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한 내용이 정반대의 내용이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 누군가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시드기야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예언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합 왕의 권력에 편승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자기중심의 마음에 치우쳐 예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 양 모양은 갖추고 있지만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언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미가야는 선지자라는 직분에 충실하게 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악한 아합 왕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지자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시드기야와 미가야는 예언의 뿌리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니 예언의 열매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그 열매가 달라집니다.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세상과 관련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단어는 아멘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단어는 아멘입니다. 즉 온전한 믿음은 세상과 자신의 욕망에 뿌리를 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뿌리를 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서 아멘으로 응답하는 믿음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서기 원합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명석한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똑똑하고 명석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편하고 쉬운지를 잘 압니다. 자신의 체면을 살리는 적당한 선에서 헌신을 하면서 생색을 다 낼 수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순간적으로는 지혜롭게 사는 것 같고 편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축복의 길은 막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직하게 섬기며 순종하는 사람들은 지금을 어려울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축복의 길이 넓혀집니다. 하나님을 고린도전서 1장에서 어리석을 사람을 통해 똑똑한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3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 안에 자신의 의와 욕심, 세상의 논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생각을 부정하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의 의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시킵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의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으로 거짓 정보를 말하며 사실을 왜곡시키고 여론을 조성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이 귀신에 들렸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사단에 속한 사람이라고 매도합니다. 자신의 의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 해 인신공격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내지만 그들의 믿음의 뿌리는 자신들의 의와 욕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위선된 모습에서 사단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빠져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4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을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예수님은 그들이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살인을 일삼는 자인데 너희들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의와 욕심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악한 일을 행하는 마귀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뿌리를 잘못 내린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믿음이니 그 믿음의 행동과 결정들이 모두 자신의 욕심을 위한 열매로 맺어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3·1운동은 한 나라의 욕망으로 인해 세계의 평화와 질서가 깨졌을 때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외침이었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나라든 욕망에 사로잡히면 고통과 상처를 낳게 됩니다. 욕심을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 가운데 이러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원숭이들이 다니는 길목의 나뭇가지에 원수이가 좋아하는 열매를 넣은 조롱박을 매달아 놓습니다. 그 조롱박에는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 놓습니다. 원숭이는 조롱박 안에 맛있는 열매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열매를 움켜쥔 원숭이는 조롱박의 구멍이 너무 작아 손을 빼지 못합니다. 사냥꾼들이 몰려오면 자신이 쥐고 있는 열매를 놓고 손을 빼 도망을 가야하지만 원숭이에게는 그런 지각이 없습니다. 결국 원숭이는 한 손을 조롱박에 넣은 채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세상에 뿌리를 둔 욕심은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사용한 가장 오래된 도구입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세상에 뿌리를 두고 사는 사람이 지혜롭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둔 사람의 삶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의 결론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뿌리를 둔 인생은 멸망의 길로 이끄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둔 인생은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순간순간 크고 작은 선택이 세상의 욕망과 사탄의 터 위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선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복된 자리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삶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가정 /20:16,8:44-47/ 이동원 목사

2014-11-28 15:17:58

 

화란 사람으로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출옥하여 전세계적인 영향을 끼친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저서 가운데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화란을 점령하고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을 때 코리의 아버지와 그의 세 딸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따라 집안에 비밀의 방을 만들고 쫓겨다니는 유대인들을 숨겨주는 모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 코리의 세 자매는 독일 게슈타포 비밀 경찰이 들이닥쳐 "유대인들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갖게 됩니다. 병약한 큰 언니 벳시(Betsie)는 모른척하고 대답을 피하겠다는 것이고,

 

위의 언니 출가한 놀리(Nollie)는 정직하게 대답하겠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녀는 자기 집에 숨겨놓고 변장시킨 유대인 하녀 아날리에스를 보고 나치 경찰이 "이 여자는 유대인 아니오?"라고 물음을 받았을 때 "네 그렇습니다. 유대인입니다."고 솔직히 대답합니다.

 

그러나 막내 코리(Corrie, Cornelia)는 숨겨준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결국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도 이웃을 해치지 않고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어떤 말도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코리는 그렇게 믿는대로 시행했고 나중에 그것이 탄로나 체포되어 감옥으로 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 자매의 입장이라면 누구의 입장을 지지하시겠습니까? 벳시는 피하겠다는 것이고, 놀리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은 안하겠다는 것이고, 코리는 정의로운 거짓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벳시의 자리, 혹은 놀리의 자리, 혹은 코리의 자리중 어떤 자리에 서시겠습니까? 벳시가 되시겠습니까? 놀리가 되시겠습니까? 코리가 되시겠습니까?

 

오늘의 본문 출20:16은 아홉번째 계명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건강한 웰빙 가정을 만들기 위한 아홉번째 법칙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삶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마귀의 도구로 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거짓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어디에서 거짓은 시작된 것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요한 8장에서 이런 거짓의 근원을 폭로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거짓의 근원은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8:44에서 예수님은 당시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나 불신앙의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진리가 그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가 거짓의 아버지, 거짓의 원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아버지"에 대하여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발명의 아버지 에디슨, 교향학의 아버지 하이든--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제가 문교부 교과서 편찬위원이면 하나 더 덧붙일 것입니다. 거짓의 아버지--정답은 사탄 마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처음부터,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거짓을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생각나십니까? 인류 역사의 처음 거짓말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처음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2:17)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모습으로 첫 사람을 찾아온 마귀는 어떻게 말합니까?

 

3:4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 사단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둘 다 맞을 수는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는 명백히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아담 이후 인간이 죽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마귀가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그가 처음 사람에게 처음으로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보다 사단의 거짓말을 더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 마귀의 노예가 되어 여전히 거짓을 믿고, 여전히 거짓을 말하는 자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엄중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사단 마귀의 종노릇을, 마귀의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마귀의 종 노릇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거짓을 말하십시오. C.S. 루이스 교수는 고민없이 거짓을 쉽게 말하게 된다는 청년에게 그러면 이후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사단이 그의 등 뒤에서 빙그레 미소짓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충고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려보십시오. 우리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사단 마귀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마귀가 하늘의 보좌를 향하여 이렇게 소리치는 음성을 기억하셔야 합니다."하나님, 들으셨지요. 저들의 거짓말을, 저들은 분명 나를 닮은 나의 종들이요, 나의 자식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아무리 열심히 출석하고 있고 아무리 그럴듯한 신앙고백을 한다 해도 실제적인 삶의 상황에서 특히 우리의 가정 생활에서 아무런 고민 없이 거짓말을 밥먹듯 쉽게 할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과 상관없이 우리의 언어로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 속한 자임을 증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 우리는 거짓을 중단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마귀의 도구로 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2. 하나님을 닮은 자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요한8:45에서 예수께서는 "내가(나는) 진리를 말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 예수의 제자라면 진리를, 진실을 말하고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다시 요한8:47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진리의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저는 종종 한국 교회의 최대의 딜레마는 한국 교회에 너무나 거듭나지 못한 명목상의 교인들이 많다는 것을 지적한바가 있습니다.

 

그 현저한 증거의 하나가 소위 교회 나가는 교인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너무 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저는 코스타 모임에 갔다가 손봉호 박사께서 강연에서 한국 사회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 전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책임인 것을 지적하는 말씀을 아픈 마음으로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범법 정도를 비교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지난 2000년 한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위증으로 기소된 사람이 1,198명인데 같은 기간 일본에서는 불과 5명이었던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240배나 되는 수치로 인구를 감안하면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서 무려 670배나 위증을 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온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것처럼 일본 인구중 기독교인은 1%가 되지 못하는 0,7%임에 반하여 한국 기독교인구는 인구의 약 20%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존재가 한국 사회의 정직에 기여한바가 전혀 없다는 통계적인 실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엡4:22이하에 보면 성경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된 가장 현저한 증거가 거짓을 버리고 참 말을 하는 변화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22절에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24절에서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새 사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닮아 의롭고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의 첫째 변화를 25절에서 제시합니다.

 

, 4:24-25을 읽어 보실까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의 인구 20%을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이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왜 이 사회의 정직도가 이 모양일까요? 그것은 20%라는 통계가 얼마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하신 예수님, 아니 진실이요 진리 그 자체이신 우리 주님을 닮아 가기 시작한다면 우리 사회는 변화를 외치지 않아도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변화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진실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닮은 자로 예수님을 닮은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닮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우리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을,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 할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말입니다.

 

3. 거룩한 영향을 끼치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그것을 다른 말로 거룩한 영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제대로 전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의 언어 생활이 진실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입으로 나오는 말을 믿을수 없는데 우리의 말로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것을 기대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4:6 말씀을 읽어보십시오."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여기서 뱌울사도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언어 생활로 두가지 단어-은혜와 소금을 강조합니다. 적극적으로는 은혜로운 언어 생활, 즉 우리의 이웃을 세우고 사랑하는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소극적으로는 부패하지 않은 언어 생활을 강조합니다.

 

가장 부패한 언어는 거짓된 언어입니다. 우리의 언어에 소금을 쳐야 합니다. 거룩하고 진실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이웃들은 내 입으로 나오는 예수의 복음을 신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 이 9계명의 상황은 좁은 의미에서는 진실한 법정 증언을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의 다른 단어로 사용하는 '증거'도 본래는 법적인 증언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1:8에 서"성령이 임하시면---증인이 되리라"

 

고 하실 때 증인의 의미는 "순교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증인"의 의미가 있습니다. 희랍어로 martus의 복수인 martures가 쓰여집니다. 영어로 순교자를 뜻하는 martyrs가 이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순교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 희생이 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본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당시의 거짓이 만연한 사회에 거룩한 충격을 주었고 거룩한 영향을 끼치게 한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령께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코리 텐 붐의 세 자매의 거짓말에 대한 문제의 제기로 시작했었습니다. 우리는 세 자매중 특히 둘째 였던 놀리(Nollie) 자매의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매는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할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오늘 날 모든 유형의 절대적 윤리가치를 포기한 소위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런 자매의 입장을 매우 융통성이 없는 입장으로 일축하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는 어쩌자고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인으로 변장하고 있던 유대인 여인을 유대인이라고 정직하게 말해서 이 여인이 체포되게 한 것은 차라리 이웃을 함정에 빠지게 한 잔인함이라고 이 자매를 고발하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놀리 자매는 만일 그녀가 정직을 말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을 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대인 하녀가 잡혀간후 어떻게 그리도 어리석게 진실을 말해서 이웃을 곤경에 빠지게 할 수가 있었느냐는 항의에 놀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날리에스에게는 아무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독일로 가도록 놓아두시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내가 순종(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하여)했기 때문에 결코 그녀의 고통을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6일후 어떤 사람을 통해 메시지가 이들 자매의 집에 전달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이었습니다. "어제 밤 암스텔담에 있는 유대인 극장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극장에 독일 게슈타포들에 의해 체포되어 임시 구금되었던 40명의 유대인들이 구출되었습니다.

 

아날리에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코리는 안도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언니 놀리가 바른 판단을 한 것이라고 동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렇다면 저도 저의 언니처럼 저를 도와 주셔서 어느 때라도 어느 상황에서도 할수 있는 한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며 나머지 인생을 살게 해주셔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이런 결심,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말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결단을 주께서 진실로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설교 적용 질문>

 

1. 거짓 증거들에는 어떤 유형들이 있을까요?

 

2. 우리가 거짓을 말하게 되는 원인들을 말해 보십시오.

 

3. 우리가 거짓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4. 진실하게 살기 위한 방안들을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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