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사무엘상 설교 모음

사무엘상 30:1 - 6절 설교 모음

Jessi J 2023. 11. 1.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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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2). 브솔시내의 교훈: 은혜가 다스리는 교회 /삼상30:7-30/ 김형익 목사

2021-05-07 14:10:11

 

블레셋 시글락에서 보낸 14개월의 시간은 하나님의 낯선 은혜가 아니었더면 얼마나 더 지속되었을런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결코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고,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안정된 삶,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이 편안할 수만은 없는 시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이런 시간들이 우리 인생에 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그때 하나님은 낯선 은혜, 은혜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은혜로 자기 자녀를 건져내십니다. 처자들이 다 붙잡혀가고 남은 자리에서 울다 울다 지친 다윗의 백성들, 다윗의 군사들은 다윗에게 그 책임을 돌리면서 돌로 치자는 이야기까지 오갈 정도가 되었다고 성경은 묘사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의 낯선 은혜를 깨닫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 적의감을 드러내고 있는 자들에게 일어나 적들을 추격하여 처자들을 도로 찾자고 격려합니다.

 

이미 아벡의 전투 현장에서 돌아와 지칠대로 지친 군사 600명을 이끌고 다시 다윗은 막연한 광야의 추적을 시작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 중 200명은 브솔 시내에 이르렀을 때, 지쳐서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200명을 남겨두고 400명을 데리고 추격을 계속합니다. 이스라엘 남방 광야의 지리적 상황을 잘 아는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추적이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추적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섭리: 삶 속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은혜

A. 애굽 소년을 만남(11)

그러던 중 광야에서 다윗의 군대는 죽어가게 된 애굽 소년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를 발견하고는 떡과 물, 그리고 많은 소중한 식량을 나누어주어 살렸습니다. 사흘 밤 낮을 그가 먹지 못한 상태였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애굽 소년으로서 아말렉 사람의 종이다가 사흘 전 병이 들어 광야에서 버림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전 행적까지를 밝힙니다. 바로 이 소년이 속해 있던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략하고 처자들을 데리고 간 장본인들이었습니다.

 

막막한 광야에서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들의 종 하나를 병들게 하여 이 광야에서 버림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낯선 은혜만이 아니라, 이렇게 주도면밀하시고 살펴주시는, 삶 속에 스며있는 은혜가 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리는 이 죽어가는 소년에게 선을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게 됩니다.

 

B. 하나도 잃은 것이 없이 다 찾음(19)

결국 이야기는 소년의 도움을 얻어 아말렉을 추격했고, 아무런 방비도 없이 한참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던 아말렉을 쉽게 쳐서 이기고 처자들을 다 찾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 찾았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기적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한 사람도 잃지 않았고 심지어 잃어버린 물질 까지도 다 찾아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윗은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소떼와 양떼 등 수많은 전리품까지 얻었습니다.

 

2. 승리의 찬가(20)

이 승리는 다윗의 군사들의 마음을 다시 180도 바꾸어놓았습니다. 20절에 보면, 이들은 전리품으로 얻은 양떼와 소떼를 몰고 가면서 말합니다.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이런 이야기를 보면 마음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정한 마음으로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백성들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돌로 칠 생각까지 하지만, 다시 승리와 함께 잃은 처자들을 되찾자 그들은 다시 다윗을 칭송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가벼운 행동이요, 언사입니까? 오히려 가만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3. 은혜의 위기

이제 모든 위기가 다 지나간 것일까요? 아니지요, 교회의 삶 속에 다 지나간 위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귀를 하나님께서 불못에 던져 넣기까지는 결코 교회는 영구적인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큰 기쁨으로 노래부르면서 다윗을 칭송하면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 은혜가 다시 깨어질 위기는 브솔 시내에 다다랐을 때 찾아왔습니다. 브솔 시내에서는 어떻게 될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200명의 지친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승리하고 모든 처자들을 찾아오는 동료 병사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그들 앞에 몰고 오는 커다란 양떼와 소떼를 보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잃었던 처자들을 안고 기뻐하고 또 자기들을 대신해서 싸워준 병사들에게 수고했노라고 감사를 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합니다.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병사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이들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았으므로 전리품은 나누지 말고 처자들만 돌려주자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들을 성경은 악한 자와 비류들이라고 말합니다. 불량한 사람들, 불평하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다윗을 돌로 치자고 까지 한 사람들이기에 이런 반응이 우리를 새삼 놀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이 대다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 몇이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만일 영향력을 재보고 싶다면, 이렇게 부정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역행하는 말 몇 마디를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력을 가지는지를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교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아왔습니다. 이들의 말이 왜 이렇게 힘이 있는가 하면 첫째는 이들의 말이 일면 옳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고한 만큼 얻으라는 원리를 그들은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의 원리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경은 매우 예리하고도 단호하게 그런 식의 공평의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지배하는 가치나 원리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시의성이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A. 관점: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22) vs.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23)

여기서 대립되는 두 개의 관점이 있습니다. 이 불평불만을 하는 자들의 관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해서 얻은 이 전리품은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이다라는 관점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때로 이것은 내가 수고해서 얻은 것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좋게 말해서 공평의 원리였고 자신들이 이 전리품을 나누어가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제기가 다윗의 공동체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자 다윗은 그것은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불평하고 이기적 욕심을 드러내는 자들에게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고 다윗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다윗이 탈취한 것이라고 말했던 이들이 이렇게 얼굴 색을 바꾸어가면서 자기 주장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들 몇몇 사람들의 말을 누가 과연 듣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다윗이 주장한 것은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몫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몫이 같으므로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B. 사랑의 대상: (물질) vs. 사람

이런 일들은 종종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문제의 실상을 좀 더 분석하고 깊이있게 본다면 이것이 결국은 돈(물질)이냐 하나님이냐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돈을 사랑할 것이냐, 사람을 사랑할 것이냐 하는 우리의 사랑의 대상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공평의 원리를 주장하면서 불평을 하던 자들의 중심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 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돈, 사람 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은 위험한 죄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더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내 몫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정신은 세상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무관하며, 하나님의 교회의 원리와는 더욱 무관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예리하게 지적하는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12:5)

 

얼마나 합당해보이고 그럴듯한 말입니까? 여기에 누가 논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가룟 유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예리하고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12:6).” 완전히 허를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유다는 돈을 사랑한 사람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문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으로 다시 소개됩니다. 왜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이런 사건들을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경고를 이토록 무섭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도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악한 자와 비류들의 중심에는 하나님보다 돈, 사람보다 돈이라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최첨단의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이 유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성경의 경고를 우리는 두려움으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들의 중심을 보았고 단호하게 원칙을 세워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원칙은 공평의 원리가 아니라 은혜의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도 다스리는 원리는 오직 은혜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찌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24).” 이후 이 원리는 다윗 왕국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이 뿐 아니라, 다윗은 이 전리품을 여러 지역에 있는 유다의 장로들에게까지 보내어 나누게 합니다.

 

4. 교훈

우리는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적용해야 하는 매우 실제적인 원리들이고, 특별히 공동체인 교회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원리들입니다.

 

A. 공평이 아니라 오직 은혜다.

먼저, 교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공평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깍이고 순응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을 가지고 조직을 운영해본 사람이라고 해도 이 원리를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세상의 원리로 운영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독특하고 세상과는 정반대되는 원리로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기서는 공평이 아니라 은혜가 지배합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시사하는 말씀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가 많으니라(19:30)”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군대는 짬밥이 우선이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교회에서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아야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만일 내가 교회에서 적어도 이만한 대우는 받아야 한다고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생각하시게 된다면 그 결과는 여러분의 마음 안에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나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이 교회의 일원이 된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여기신다면, 여러분은 좀체 불평과 원망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혜가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기부금을 내고 들어오는 조직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써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입되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B. 감사치 않는 인색한 마음은 공동체를 깨뜨린다.

두번째 교훈은 바로 이 첫번째 교훈에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감사치 않는 마음,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반드시 인색함으로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인색함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깨뜨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워지는 토대는 오직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C. 관대한 나눔은 공동체를 풍성하게 한다.

반면에, 관대한 나눔은 공동체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관대한 나눔을 자신의 왕국의 원칙으로, 하나의 정책기조로 설정을 한 셈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다윗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이 관대한 나눔이란 것이 단지 그의 통치의 기조일 뿐 아니라 다윗이라는 사람의 삶의 정신이었음을 보실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그는 그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다윗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그것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5.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대상 12)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하나님의 솜씨를 보게 됩니다. 다윗의 군인들은 다 충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충성스럽기도 했지만, 또 어떤 위기의 순간에는 태도가 돌변하기도 하는 인간들이었을 뿐입니다.

 

또 그들 중에는 정말 자기 본색을 숨기며 불평을 하는 악한 비류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피난살이를 하는 다윗의 군대의 실상이었습니다. 역대상 12장은 다윗이 블레셋 시글락에 있을 때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멀리 요단 강 건너에서 온 갓 지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얼굴이 사자와 같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그 용기를 칭찬합니다(대상 12:8). 사울과 같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도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왔습니다. 이들은 다른 자기 지파 사람들 대다수가 사울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파와 지방색, 혈연을 단호하게 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작정한 자들이었습니다(대상 12:29). 또 잇사갈 지파에서도 족장들이 200여명이나 다윗에게 나아왔는데, 이들은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대상 12:32). 그리고 스불론 지파에서 다윗에게 나아온 자들을 성경은 두 마음을 품지 않은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대상 12:33).

 

이들은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보내준 많은 사람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왜 이런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입니까? 수없이 많은 환난 그리고 아픔을 겪는 와중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고 계셨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준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무 일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지금 블레셋 진영에 피신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도대체 시간이 정지해버린 느낌이 드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성경은 이 기간이 14개월이었다고 밝혀줄 뿐 아니라, 이 기간이 결코 헛되게 지나가버린 시간이 아니라, 이런 산전수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군대, 당신의 교회를 만들어가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전율할만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정지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우리 인생의 시간 속에서도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다는 이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교회의 지난 4년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물을 때, 하나님은 오늘 이 본문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같이 부족하고 흠이 많고 시험에 들기도 잘 하고 세상 영광에 취하기도 하며, 원망과 불평을 하는 우리 같은 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당신의 성품으로 만들어가시면서 당신의 교회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6. 때가 차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차서, 다윗이 블레셋의 시글락을 떠날 날이 다가왔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낯선 은혜가 아니었다면 떠날 수 없는 시글락을 떠날 때가 온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교회도, 역사도 다 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가고 있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지금은 시글락에 있을지라도 그리고 상황이 복잡하고 처절하게 꼬여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당신의 때에 우리를 떠나게 하실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보다 더 큰 소망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역시 때가 차매,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시글락에서 다윗의 위기와 그 회복 /삼상30:1-20/ 마이크 비클

2015-06-13 16:19:04

 

블레셋 땅 시글락에 지내던 다윗은, 강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미적거리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그런 와중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보시고, 그 연약한 믿음의 사람을, 구해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시글락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다윗

 

(가드 왕 아기스의 도움으로) 시글락에 피신한 다윗

다윗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 6백 명과 함께 광야에 거하다가

이제 가드 왕 아기스 영역으로 피신합니다. 삼상27:2

사울 왕이 3천명의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자신을 추격하니까

차라리 외국 땅 블레셋의 한 영주에게 피신하는 것이, 더 안전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블레셋의 한 성읍인 가드왕 아기스는

다윗과 6백 명에게 시글락이란 마을을 주어서, 살게 합니다. 삼상27:6

다윗과 그 무리들이, 거기서 14개월 정도 살았을 때였습니다. 27:7

 

앞서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그가 유대 땅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예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삼상22:5

 

선지자 갓은 다윗을 따르던 4백인의 무리 중에 1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갓이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예언한 이유는,

다윗이 스스로 살 길을 찾지 말고 '하나님으로 네 피난처를 삼으라' 는 훈련을 시키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한 때 다윗이 유다로 들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사울의 계속된 추격을 받으면서, 모압 땅으로 갔다가, 다시 블레셋 땅으로 피신한 것입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블레셋 땅 가드로 피신한지 16개월이 되었는데,

바꾸어 말하면, 선지자 갓을 통한 하나님의 명령(유대에 머무르라)

16개월~몇 년 동안, 오래 불순종하며 살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다윗도, 거기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딱히 다른 곳에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있고 싶어서 있기 보다는, 할 수 없어서 지내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신차 내려갔다가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체 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적이 있었습니다. 삼상21:13

 

본문 삼상27장의 가드 왕 아기스는, 성경에 가드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라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그때와는 다른 가드 왕입니다. 삼상27:2

참고로, 가드는 블레셋 5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삼상6:17

 

어려움 1.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시글락에서 지내는 동안.. 겉으로는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거기서 무사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자꾸 가드 왕을 속여야 했습니다.

 

다윗이 아말렉과 전투에 나가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갖고 돌아올 때,

(아말렉은 블레셋 족속이 아님) 그는 그 전리품들이,

자기 동족 유다 족속과의 전투에서 빼앗은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삼상27:8~11

 

그러자 가드 왕은, 다윗이 자기 민족을 배신한 것으로 곧이 듣고,

다윗이 확실히 자기 휘하에 들어온 것으로 믿었습니다. 27:12

 

다윗이 갓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하고, 시글락에 오래 지내는 동안,

사울 왕의 추격은 피했는지 모르나, 자기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둘러대긴 했지만, 그 마음에 안정감을 없었을 것입니다.

 

2. 마음에도 없는 전쟁에 참가하게 되다.

다윗이 (갓의 예언을 무시하고) 시글락에 오래 안주하다가,

점점 더 큰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가드 왕 아기스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출정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이 정말 난처해진 것입니다.

가드 왕 아기스를 도와서 동족과 전쟁을 치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드 왕 아기스 휘하에 있으면서, 그를 배신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울며겨자먹기로, 일단 자기 부대를 거느리고, 아기스를 따라서 출정합니다.

 

(그러니까 비록 이스라엘 땅이 위험하더라도,

다윗은, 갓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에 머물러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천우신조로, 전장에 도착하자, 아기스의 다른 장군들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골리앗을 죽인 적이 있는 다윗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기스는, 다른 장군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다윗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미안하다고 도리어 사과합니다. 삼상29:1~7

그때 다윗은,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정말 난처했을 것입니다.

정말 묘하고 난처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3. 출정했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시글락이 완전히 약탈당했습니다.

남자들이 모두 출정해서 떠났고, 마을에는 부녀자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전쟁터에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데 3일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와서 보니, 자기들의 처자식들이 다 포로/노예로, 아말렉에 붙잡혀 가버렸습니다. 삼상30:1~2

 

이 날은 다윗의 일생에 아마 최악의 날입니다.

그의 도피 생활 10여년에, 최대의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크게 다급하다고 했고(greatly distressed, 이런 표현 다른 데 없음)

다윗과 그 무리들이 울 기력도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막 반란이 일어나려 했던 것입니다. 30:6

자기들이 그동안 그래도 건설해놓았던 부락이, 쑥대밭이 되고, 다 불에 탄 것입니다.

 

다윗이나, 그의 추종자들은,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블레셋 시글락에 머문 것은 잘못되었다고.. 비로소 시인했을 것입니다.

애초에 시글락에 오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유대에 돌아가자니,

자기들을 환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전히 신변에 위협이 있습니다.

 

위기를 당한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30:8

그러면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사면초가와 같이 당면한 문제들을, 다윗은 점점 풀어나가게 되는데요..

 

 

극적 반전, 다윗의 회복과 그 비결

 

누가 그랬던가요? 하나님은 뒤집기의 명수라고!

이 최대 위기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상황을 반전시켜 주십니다.

 

다윗에게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 알고 보니까,

가장 큰 축복의 시기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처신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위기에 몰리면, 당장 시글락을 찾아서 피신합니다.

내 눈에 보기에는, 거기가 안전할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거하는 것입니다.

 

1.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살펴 볼 점은,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시글락이 불타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불타는 순간이, 자신의 구원의 순간임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글락이 불타서 주저앉은 것을 보고서..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새롭게 그의 인생을 세워주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나의 파멸과 멸망의 시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순간이 도리어 구원의 시간이 됩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모든 교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새롭게 출발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직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만,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개인적 친밀한 교제관계를 갖는 사람만

그의 파멸의 시간도, 도리어 새로운 건설의 시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파멸의 시간에, 그냥 파멸당하고 맙니다.)

 

2.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30:6

이게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힘과 용기를 주신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여호와를 힘입고, 다윗처럼, 용기를 얻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기적처럼 용기백배해서 문제를 헤쳐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통사람들은, 위기의 때에 털썩 주저 앉아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란 사실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으로 내면화되지 못하니까,

그런 지식은 한낱 공허한 꽹과리의 울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믿어지지 않는 걸 어떻합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믿음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교회와서 구해야 될 것, 얻어가야 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것을 얻어갈 줄 모르고,

대신에 무슨 세상적 축복을 얻어가겠다는 것은.. 신앙의 ABC를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로 묻는 다윗

지금 기도하는 다윗 옆에는, 마을이 불에 타서 연기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지금 기도하는 다윗 주위에는, 부하들이 손에 돌을 쥐고 왔다갔다 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며 울부짖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기도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위기의 상황을 돌파하는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벌써부터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에, 연마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자기의 비장의 무기(위기상황을 돌파하는 기도)를 꺼내들었습니다.

 

그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응답 받은 대로, 아말렉을 뒤쫓아 가기 시작합니다. 1)

 

다윗은 다윗이고, 나는 나야!, 나는 다윗이 아니잖아!’

많은 성도들이, ‘다윗의 시글락 위기를 기도로 돌파한 사건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니까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다윗과 같은 믿음의 용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내가 비슷한 위기를 닥칠 때,

나는 그 위기를.. 기도로 돌파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좌절하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다윗이 아니라서, 그 위기를 돌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웟처럼) 철저히 헌신 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평소에 철저한 헌신이 되어있는 사람은,

신앙을 타협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다윗의 시글락과 같은 위기를 만날 때에도

다윗처럼 기도로 그것을 돌파하고,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윗이 아니라고/나는 다윗과 다른 사람이라고.. 발뺌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내가 (다윗처럼) 헌신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도 안 짓고, 늘 완벽하게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늘 죄를 짓고, 실수를 합니다.

본문 사건도, 다윗이 연약해서 시글락으로 들어간 것이 애당초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넘어질 때, 벽에 부딪힐 때, 문제에 맞부딪힐 때,

그것을 기도로 돌파할 정도의 영적인 힘은 평소에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때 기도할 힘도 없을 정도로.. 자기 신앙이 평소에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헌신이라는 것은 도덕적 완전주의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물을 수 있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채널은 평소에 열어 놓고 살아야 (친밀히 교제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3.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다윗이 평소에 잘 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늘 회개하는 것입니다. 관련글: 영적 익사상태 빠져나오기

 

다윗은, 자기가 실족해서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삭제delete'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컴퓨터 용어

이것 역시, 오랜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경험(자기만의 노하우)이었습니다.

 

아무리 회개를 해도, 자기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고,

회개를 할 때, 자기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잘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오랜 회개의 경험을 통해서, 점점 더 회개의 방식을

스스로 터득해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명확히 안 나오지만) 다윗은 시글락의 위기를 만났을 때

분명히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은 것이라든지

아말렉을 쫓아가기로 한 것, 그래서 결국 가족을 되찾은 것이라든지 삼상30:8~20

또 앞으로 설명할 사울의 죽음

다 그가 회개한 결과로 주어진 회복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회개의 명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만나도 쉽게 돌파할 수 있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가 출정한 그 전투에서, 사울 왕이 사망합니다. 31:1~3

시글락의 위기가.. 놀랍게도 극적 반전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전혀 자기 힘으로 사울 왕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정말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기 인생의 최대의 걸림돌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4. (제가 이 설교에서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시편18편을 보시면, 그 시작 표제어에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표제어는, 현대에 만들어 붙인 것이 아니라,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저는 이 날이, 바로 삼상31장에서, 사울이 죽임을 당하고,

다윗은 아말렉의 약탈로부터 자기 가족을 다 찾은 (본문의) 그 날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30세 되던 해였습니다.

 

이 모든 극적 반전이, 하루~이틀 사이에 다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그런 위기의 최고조의 시간에,

다윗이 어떤 심경을 갖고 있었는지, 18편이 말해줍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그중에서도 18:19절이 다윗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합니다.

(/설교자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18:19

 

이 날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입니다.

시글락이 불타는 최대 위기에서 건짐을 받은 날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을 받은 이유를, 한 마디로 다윗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이야!’

 

여러분, 이게 참 황당한 말 같지만, 정말 진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로또에 척척 당첨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기적적인 일이 금방금방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들어간 사람은

다윗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이야!’

 

세상에 보험을 들어도, 이런 안전한 보험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보험이라는 것입니다. (돈 낼 필요도 없는 보험입니다.)

 

정말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구원받은 다윗이 하는 말이

무슨 큰 비결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조용히 그 비결을 물어보니

의외로 너무 쉽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

 

여러분,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는 자기 구원이시니, 자기는 누구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27:1~3

 

이게 지식으로는 알겠는데, 자기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이게 피부에 와 닿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교제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정리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안전, 확신, 평안.. 이것이 핵심입니다.

 

세상에서 성공, 출세.. 이런 것으로 기독교를 몰아가는 것은.. 변질입니다.

뿐만 아니라, 혹시 운이 좋아서 성공하고 출세하더라도.. 늘 불안초조 합니다. 그래서 참된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윗은 적어도 광야 13년의 극심한 환란을 거치면서, 하나님과 친밀함을 쌓아가면서,

이런 신앙이 점점 다듬어져 갔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인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관계의 사람이 많이 나오기 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임재 동행

 

1)

다윗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지, 성경에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지, 내면의 음성인지, 꿈의 계시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문제는, 우리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 음성 듣는 방법을 연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어떤 패턴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을 주시는 각자의 방식을 터득해 나가야 합니다.

각자가 다른 방식일 것입니다.

 

 

 

 

브솔 시냇가에서 /삼상30:23-24/ 맥스 루케이도

2015-06-21 17:37:40

 

지치고 피곤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사건을,

다윗의 브솔 시냇가 사건에서 배우게 됩니다...

 

누구나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는 순간이 있다.

얼마 전에 어떤 여성이, 강아지 한 마리를 끌고 산책하는 것을 보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 한 마리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끔찍하게 더운 날이었는데, 강아지는 다리가 굳어버린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 지글거리는 포장도로 옆에 있는 잔디밭으로 훌쩍 뛰어 들어가더니

아예 잔디밭에 자기 배를 깔고 엎드려 버렸다.

 

주인은 줄을 거칠게 당겨 댔다.

얼마나 승강이를 하던지, 마치 무슨 트레일러라도 끄는 것 같았다.

 

더위에 지친 강아지는,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한번 주저앉고 나더니, 일어날 기력도 없었다.

어디 강아지뿐이겠는가? 누구나 땅바닥에 주저앉는 순간이 있다.

 

한 건만 더 처리하고 가게나.” 상사가 지시한다.

하루 더 야근할 거야남편이 통보한다.

심부름 할 게 하나 더 있는데..” 엄마가 시킨다.

한 번만 봐주라.” 친구가 애원한다.

 

딱 한 번인데, 그냥 들어주면 되지, 그까짓 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줄곧 처리하고, 참고, 해치우고, 용서하고, 봐주었던 까닭에

더 이상 한 번만 더가 안 통한다는 게 문제다. 지친 강아지마냥 주저앉고 만 것이다.

 

이웃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하나님이 무얼 원하시든.. 이젠 내가 알 바 아니다.’ 이 정도면 완전히 지친 것이지요?

 

아말렉(마귀)의 공격을 받아서, 지치고 망연자실 할 때가 있다.

강아지가 잔디밭에 주저앉은 것처럼, 다윗의 병사들은 브솔 시냇가에 주저앉아 버렸다.

 

브솔 시내는, 아말렉의 공격을 받아서, 시글락이 불탄 이후에,

아말렉을 추격하던 다윗의 용사들이, 추격에 지쳐서 털썩 주저앉은 곳이다.

그래서 브솔 시내는 지치고 피곤한 사람이 주저앉는 곳으로, 이제 불리는 것이다.

 

이야기는 시글락의 폐허에서 시작된다.

다윗과 6백명의 용사들은, 블레셋 전선에서 돌아오자마자, 말할 수 없이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다.

 

아말렉 침략자들이 시글락 온 마을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마음껏 분탕질을 치고 나서, 아녀자들과 아이들을 다 잡아갔다.

 

다윗의 군사들의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노여움의 대상은, 이제는 적군이 아니라, 다윗이었다.

다윗이 용사들을 전쟁터로 데려가는 바람에, 아내와 자식들이 무방비 상태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섬주섬 돌맹이를 집어 들었다.

 

친구가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목회의 동지들도, 언제나 등을 돌릴 수 있고, 교우들에게서도 외면을 당할 수 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때, 다윗의 전례를 좇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제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습니까?”

그들을 쫓아가라.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저 루케이도는, 과거에,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성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며,

있는 그대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곧 성도라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갔지만, 여전히 지쳐서 주저앉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아말렉 군대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도 모른다.

추격을 해야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감감한 것이다.

 

실제로 군대 중 2백명은, 브솔 시냇가 근처에 이르러, 지쳐서 주저앉고 말았다.

힘이 빠지고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이들은

더 이상은 못 가겠어! 자네들끼리 가게!’ 하면서, 거기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유야 어쨌건, 오늘날에도, 나와 내 주위에

이렇게 털썩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말한다.

더 이상은 못 가겠네! 자네들끼리 가게!’

 

아울러, 브솔 시냇가에 주저앉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내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호되게 나무라야 하는가, 아니면 창피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다윗은 이렇게 했다.

다윗은 지친 병사 2백 명을, 쉬게 했다.

 

그리고 남은 병사 4백 명으로, 다시 추격에 나섰다.

결국 아말렉 사람들이 버리고 간, 애굽인 소년을 살려줌을 통해서,

다윗의 군대는, 아말렉을 추격할 수 있었고, 결국은 잡혀간 가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친 사람들을 안아 주시라.

다윗과 용사들은, 매가 들쥐를 낚아채듯, 삽시간에 적진을 휩쓸었다.

다윗은 희생양에서, 졸지에 영웅이 되었다.

온 백성이, 다윗의 이름을 연호하며, 함성을 질렀다.

정말 재미있는 대목은 지금부터다.

 

현장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체감하기 위해서

내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아래 3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먼저 <구출된 아내>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해보자.

집 안에 있다가 갑자기 납치되어서 광야까지 끌려왔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아이들을 꼭 껴안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멋진 용사들이 들이닥쳤다.

강인한 팔뚝이 나를 잡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낙타 잔등으로 끌어올린다.

특공대를 보내서 구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한편,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남편의 얼굴을 찾는다.

 

여보, 애 아빠! 당신은 어디에 있어요?” 큰 소리로 불러본다.

그러자 특공대 구조대원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바깥 양반은 여기 없어요. 후방에서 쉬고 있어요.”

 

왜요? 거기서 뭘 하는 데요?”

그냥 지치고 피곤해서, 쉬고 있어요!”

 

, 쉬고 있다고요? 자기 처자식이 다 잡혀갔는데.. 쉬고 있다니요!

어디 한 번 집에 돌아가서 두고봅시다. 내 이 양반을 그냥 둘 수는 없지!”

 

다음은 <구조대원>이 되어 보자.

다윗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이제 승리를 거머쥐고 브솔 시냇가로 돌아간다. 마지막 산마루에 올라서니,

저 아래로 뒤에 처졌던 2백 명의 병사들이 한가하게 오가는 게 보인다. “얌체 같은 놈들!”

 

자기는 생사를 걸고 싸우는 동안,

그들은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풀밭에서 잠을 잤을 걸 생각하니,

속에서 울컥 화가 치민다. 다윗의 용사들은 속이 씁쓸하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삼상30:22.

 

구조된 아내들은 화가 잔뜩 났다.

그런데 구조대원들의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하다.

두 부류 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제 남은 제3의 등장인물, 브솔 시냇가에 남겨진 2백 명을 살펴보자.

그들은, 이 설교문의 주인공들이다.

 

자 그렇다면, 쉬고 있던 2백 명의 심정은 어땠을까?

지친 무리들말이다.

곧 살다가 지쳐서 뒤로 쳐져버린, 우리 자신의 모습일수도 있다.

 

이들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다윗이 어떻게 좌중을 진정시키는지 보자.

 

삼상30:23~24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며 물건을 지켰던 자

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것이니라 하고..”

 

어떤 성경은 그냥 소유물 곁에 남아있던 자로 번역하지만

어떤 성경은 소유물 곁에 머물며 물건을 지키던 자로 번역한다. 공동번역, 새번역 KJV.

 

24. For who will hearken unto you in this matter? but as his part is that goeth down to the battle,

so shall his part be that tarrieth by the stuff: they shall part alike. (KJV)

 

다윗이 무엇이라고 표현했는가?

남아서 물건을 지키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2백명 가운데 누구도 남아서 물건을 지키겠다고 요청한 적은 없다.

그냥 쉬고 싶어 했을 뿐이다.

하지만 다윗은 뒤에 처지기로 한 이들이 쉰 게 아니라, 일을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브솔 시냇가에 머물렀던 지친 병사들의 입장을 존중해 준 것이다.

 

다윗은 평생에 걸쳐서 여러 가지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물론 어리석은 잘못도 그만큼 자주 저질렀다.

그러나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 사건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행동으로 꼽을 만하다.

 

언젠가, 누군가는 다윗의 행적을 읽고서 교회 이름을

<브솔 시냇가 교회>라고 지을 것이다.

그게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교회란 본래 지친 병사들이 힘을 회복하는 자리이다.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Leap over a wall이란 책에서,

저자 유진 피터슨은, 항상 편지 끝에다

브솔 시냇가에서라고 써 보내곤 하던 친구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너무 지쳐서 더 이상은 싸울 수가 없다. 너무 부끄러워 감히 불평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전투에 나갔던 이들이, 승리의 대가를 요구하는 걸 말없이 바라본다.

시냇가에는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앉아 있다.

 

지금 당신이 브솔 시냇가에 머물고 있으신가?

그럼 알아 둬야 할 사실이 있다. 쉬는 게 잘못은 아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원형이다.

우리가 피곤해서 싸우지 못할 때, 그분이 대신 싸우신다.

 

다윗은, 즉 예수님은, 싸울 수 있는 4백인만 데리고 가서, 싸워서 승리를 얻으신다.

그러나 지쳐서 쉬는 2백인들을.. 비난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피곤해서 갈 수 없는 곳에 대신 가신다.

우리가 두 손 놓고 앉아 있어도, 화내지 않으신다.

오히려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하고 말씀하신다. 6:31

 

브솔은 안식을 준다. 더불어 브솔 시내는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다윗은 스스로 잘나서 승리를 얻은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사막에서 만난 애굽인이 앞장서 길을 안내해 준 덕분이었다.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삼상30:23

 

그 기적적인 승리는,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다.

승리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처지인데, 어떻게 지쳐서 주저앉은 이들을 비난하겠는가.

 

당신은 피곤하신가?

당신은, 다윗처럼, 피곤한 자들을 쉬게 하시고, 대신 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의지하시라.

 

그리고 내 주위의, 피곤한 이들을 쉬게 하시라.

지친 이들을, 쉬는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시라.

 

누구나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다. 브솔 시냇가의 교훈을 기억해 두면,

그런 상황에 빠졌을 때, 큰 힘이 될 것이다.

 

 

 

 

진정한 용기 /삼상30:1-6/ 홍정길 목사

2014-12-11 13:18:28

 

로마 제국시대에 검투사들을 양성하는 양성소가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검투사들은 열심히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여러 검투사에게 필요한 무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근데 한 검투사가 검을 하나 받았는데 다른 사람의 것에 비해서 너무 작게 보였습니다. 교관에게 말합니다. "내 칼은 너무 짧습니다." 그랬더니 이 교관이 하는 말, "칼을 짧다고 말하지 말고 한 걸음 더 적을 향해서 다가서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검이 너무 짧다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핑계쟁이라 혹이 겁쟁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비록 검을 짧아도 한 걸음 더 가까이 성큼 다가가서 적과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는 유난히 짧아진 우리의 검을 보면서 불평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전보다 얇아진 월급봉투, 또 전보다 얇아진 승진의 기회, 그 뿐 아니라 불투명해 보이는 미래, 거기에다 자신 없는 건강,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짧아진 검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가 한 걸음 더 모든 문제와 상황들을 향해 다가설 수 있는 용기를 선물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이 주시는 귀한 진정한 용기들을 선물 받으셔서 우리들의 모든 불안하고 두려워 하는 그런 마음들이 담대해지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상황들을 향해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설 수 있는 용기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두려워 하고 불안해 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그가 임금이 되기 전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다윗이 자기 부하들과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는 땅으로 그가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블레셋에서는 시글락이라고 하는 땅을 거기 주어서 다윗 일행이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소식을 들어보니 이 블레셋에서 사울을 대항하여 싸우게 되겠다고 하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다윗도 함께 가서 사울을 무찌르는 그 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회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블레셋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은 바로 우리의 장군이었던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 아니냐. 안돼. 저 사람은 안돼.' 이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따돌려 버렸습니다. 요즘말로 말하면 다윗은 왕따가 되었습니다.

 

자기 민족에게도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에게까지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터벅터벅 걸어서 3일 길을 지나서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돌아와 보았더니 거기는 이미 집들이 불타 있었고 자기의 아내들이 전부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거기 더 기가 막힌 것은 자기를 따르던 400여명의 용감한 이 군사들이 돌을 들어서 자기를 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위기에 또 위기입니다.

 

여러분, 이 다윗의 고통을 정리한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상실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보여준 반응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먼저, 그는 울었습니다. 그냥 운 것이 아니라 힘이 없을 때까지 소리 높여서 울었습니다. 그들의 본부인 시글락에 돌아와서 계속해서 부하들과 함께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생명처럼 귀중한 자기의 가족들이 다 잡혀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도 때로는 울 때가 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서 소리 높여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 이 다윗이 지금 울기 시작합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울고 울고 또 울던 이 다윗, 결국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같이 울고 있던 이 부하들이 갑자기 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바로 이 다윗 때문에 그렇다. 저 다윗을 돌을 쳐서 죽이자.' 이런 상황을 그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괴롭다고 답답하다고 계속 울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은 절망의 돌팔매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 우리는 자기 연민으로 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처럼 생각되어서 소리 높여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은 절대로 대책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다윗은 '크게 군급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급했다' 고 하는 말씀은 난감한 상태에서 불안한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꺾쇠가 온몸을 조여드는 그런 상황입니다.

 

점점 자기 몸, 자기 목을 조여들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불안 가운데 고통스러워 하는 것, 그게 바로 군급한 상황입니다. 다윗은 지금 온갖 괴로움과 고통의 꺾쇠에 졸려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까지는 다윗이나 우리나, 다윗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위대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의 6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려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아멘. 바로 이 부분이 다윗이 보여주는 위대한 용기가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죽음을 생각합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사는 아파트, 한 노인이 올라가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너무 절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절망하면 회피하고 죽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다윗의 상황도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힘을 내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가 말하기를 이런 용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려는 용기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지 않습니까?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잡을 수 없는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존재하려고 하는 그런 용기, 그럼에도 살아야겠다고 일어나는 그런 용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는 진정한 용기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런 용기를 가졌는지를 한번 살펴 보십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보았습니다. 여기 '그 하나님' 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단순히 하나님을 지시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 그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소유격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해하던 이 다윗이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자신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던 그는 자기에게 있는 가장 큰 재산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지금까지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에 생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확신하는 그 순간, 우리의 용기는 불쑥 우리의 가슴 속에 차 오르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장로님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의 하나님, 나를 지키시고 나를 도우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 진정한 용기가 충만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형 에서의 미움을 사서 도망가던 야곱은 돌베게 베고 루스들판에 잠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저 멀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이제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그 말씀을 다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바로 너, 야곱의 하나님이기도 하느니라.'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에 이 귀한 야곱의 마음 속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는 돌베게를 취하여 하나님 앞에 귀한 예배를 드리는 제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순간에 우리 삶 속에 진정한 용기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우리를 버려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만 되시면 우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길래 바울이 고백하는 이 위대한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831절과 37절 말씀을 우리 한번 바울처럼 고백을 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여호와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성경의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엘도힘, 엘샤다이, 이런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는데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나올 때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과 약속을 확인하고 싶을 때는 반드시 '나 여호와가' 그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에게도 나타나신 하나님이 '나 여호와가' 약속을 지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낙심한 다윗에게 나타나는 하나님도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 신실한 하나님, 계약을 이행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지금 이 시간에 다가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도망자의 신세이고 아내와 가족들이 다 붙잡혀가고 버린 바 된 처지이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다윗은 왕위에 오를 것입니다. 그것을 믿었습니다. 잃어버린 것, 모두 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약속대로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을 그가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습니까? 저 높이, 아주 까다로운 할아버지처럼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이놈' 하고 야단치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되십니까?

 

어떤 하나님으로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믿는 자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황해도에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돌팔이 의사 때문에 소경이 되었습니다.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눈을 잃은 건 문제가 안되는데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습니다.

 

방 안에 들어와서 자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문간에서 자다가 개가 자기를 감싸주는 가운데 추위를 견디기도 했습니다.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살아서 무엇하나 죽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도 부인이 지나가다가 이 가련한 소녀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했어요. "얘야, 네 부모는 너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너를 버리지 않아. 여기 하나님 말씀이 있는데 너 들어볼래?

 

시편 2710절을 읽어주면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라.?" 이 말씀을 들으니까 소녀의 마음 속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날 그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부모가 나를 버렸습니다. 저를 쓸데없다고 말합니다. 제가 정말 쓸데 없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딸아, 너의 눈은 지금 보이지 않지만 손이 있지 않니? 다리도 있지 않니? 머리도 있지 않니? 내가 너를 절대 버리지 않으마." 이 소녀는 그 말을 듣고 힘을 얻었습니다. 용기를 내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는데 어느날 황해도 이 근방으로 선교사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이 소녀를 붙들고 도시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를 공부를 시켰습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마쳤습니다.

 

그는 최초의 한국 맹인 교수가 되었습니다. 맹인 여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신학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다가 인천 삼일교회 목회를 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양정신 목사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 하나님,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부르시면 그 속에 진정한 용기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한번 같이 불러보십시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을 부르셔서 용기로 충만해지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힘입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힘입었다' 는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옷 안으로 들어가야 되지 않습니까?

 

탱크를 운전하는 탱크병, 아무리 키가 작고 빼빼한 사람이라도 일단 탱크 속으로 들어가서 탱크를 운전하는 그 핸들을 잡는 순간부터 이 사람은 천하무적이 됩니다. 아무도 공격할 수가 없어요.

 

? 탱크 속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우리 삶의 자리를 옮기는 순간, 그 때부터 우리는 위대한 사람이 되며 용감한 사람이 되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의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여, 사도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런 용기 넘치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분명히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여, 주 안에서 나오는 용기라야 진정한 용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기는 용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이기는 용기가 될 것입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405장을 작사한 사람은 존 뉴톤입니다. 이 분이 한번은 사람의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번째는 '요나 같은 사람이 있다.' 그랬습니다.

 

도망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 회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겁쟁이처럼 자꾸 도망가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때로는 술을 마시며 피하고 때로는 사람 만나서 피하면서 회피하기를 잘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랬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달리는 말 위에 말 목을 잡고 달려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 가운데는 허겁지겁 돈에 끌려 다니고 사람에 끌려 다니고 고통에 끌려 다니면서 정신없이 온통 걱정과 괴로움으로 충만해서 끌려가고 있는 종속형 인간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하나님을 믿지만 돈이 끄는 대로 걱정이 우리를 끄는 대로 말 위에 달려서 말 목을 잡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움직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은요. 창조주 의탁형이 있다고 합니다. 주님 안에 들어가서 주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사람, 이 분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용기를 가진 능력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요나처럼 회피하면 우리는 겁쟁이가 될 것입니다. 여러 환경과 고통에 끌려가면서 비명을 지르는 삶도 안타깝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끌려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주 안으로 옮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내 삶의 가치는 달라지고 성격은 달라져서 참으로 용기 있고 힘있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619절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한번 담대하게 읽어보십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아멘. 그렇습니다. 튼튼하고 견고하여 우리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면 튼튼합니다. 견고합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몸만 여기 계시지 마시고 하나님 안으로 여러분의 모든 것들을 옮기셔서 튼튼하고 견고한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으로 얼마 전에 미국 콜로라도 주에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생긴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이 나치와 또 악마주의를 숭배하고 기독교를 배척하는 무시무시한 트렌치코트라고 하는 단원들이 총을 들고 와서 학생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예수를 잘 믿는 캐시 버널이라고 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트렌치코트 단원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총을 들이댔습니다.

 

"너 하나님 믿지?" 이 버널은 조용히 직면했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살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띠면서 "그래. 나는 하나님을 믿어." 그 순간에 이 총은 불을 품었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절대로 그의 용기를 삼킬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절망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질병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든든하고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힘입고 사는 자를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라 그랬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힘없는 기독교인들을 그들이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맹수가 그들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보호받고 있는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두려움도 하나님 안에 있는 자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가 가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삶의 자리를 하나님 안으로 옮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용기가 넘쳐 나서 모든 상황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어 일어나는 용감한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한번 또 따라해 보십시다.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에게 누가 위로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누가 돈을 대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자기를 도우시는 하나님 안에서 힘을 내었습니다. 용기를 얻었더라는 말은 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힘을 내고 스스로 견고케 하고 스스로 일어나는 그런 모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도와 줘서 일어나는 사람은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세상 사람들은요. 돈을 보아야 희망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 준다는 말을 들어야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상황이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 주지도 않고 돈은 없고 모든 상황이 막혀 있어도 진정한 용기는 스스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무엇인가 보아야 합니다. 돈을 보아야 합니다. 도와 줄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고 내 앞길이 칠흙같이 어두울지라도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일어나 전진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바라보고 일어나서 걸어가며 전진하는 용기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을 우리도 한번 해 보십시다. 시편 425절입니다. 이 고백을 우리 마음을 다하여 같이 해 보십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아멘. 이렇게 여러분의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다른 것이 다 물러가고 모든 것이 나에게서 얼굴을 돌릴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라' 여러분 자신에게 이 말씀으로 격려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시간, 모든 것 가운데 선물해 주시길 원하는 용기는 바로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내 모습 그대로, 내 연약함 그대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일어나는 용기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031절에 이 귀한 용기의 모습이 또 나옵니다. 같이 한번 이 말씀을 읽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아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바로 그는 스스로 용기를 가진 자요. 스스로 가질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귀한 힘을 소유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991년 캘리포니아 이스트 베이라고 하는 곳에 산불이 났습니다. 모든 게 다 불탔습니다. 집도 불타구요. 사람도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은 미술가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수억원되는 그 좋은 미술품들이 전부 불탔습니다. 이 미술가들이 땅을 치며 통곡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자기들의 작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헌거라고 하는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일어나더니 한마디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잃어버렸습니다. 불에 다 탔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납시다. 이 불타버린 모든 재료를 한번 모아가지고 멋진 미술품을 한번 만들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우리 전시회를 합시다."

 

그 말을 듣고 이 미술가들이 일어났습니다. 불타버린 모든 종이, 나무들을 다 모아가지고는 그것가지고 특별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전시회를 했는데 1992년에 성황리에 그 전시회가 마쳤습니다. 헌거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위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불꽃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잿더미 속에서 그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누추한 모양을 아름다움으로 만들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을 가지고 희망을 만들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상황들, 고통의 상황이지만은요. 용기 가진 사람은 고통을 기쁨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내 모든 어려움들을 용기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쁨의 제목들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났습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용기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염이 되었습니다. 돌을 들어 치려고 하던 다윗의 400명의 부하들은 다시금 다윗의 용기를 바라보며 용감한 다윗의 군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적진을 향해 돌격을 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더 많은 것들을 도리어 얻어서 그들은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워졌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우리를 조여드는 모든 것 때문에 절망해 하지 마십시오. 다윗처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내면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누추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절망의 상황은 희망으로 우리의 손에 의하여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용기를 얻어 일어나서 전진하는 참으로 용감한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의 패자 부활전 /삼상30:1-6

2006-12-08 14:34:03

 

양인순 목사

 

 

잘못된 성공 기준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리더십의 대가인 죤 맥스웰은 진정한 리더, 성공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성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많이 벌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는 평생동안 4천억 이상을 기부한 갑부였습니다. 그에게 기자가 돈이 얼마나 많으면 만족하겠느냐?’는 질문에 조금만 더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공=돈 이라는 공식은 맞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실패한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남이 가지지 않은 힘이나 권력, 명예를 가지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유나 성취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흔히 3대 부자는 없다고 합니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찰스 맥엘로이는 권력이란 일시적으로 듣는 탁월한 항우울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잘못된 성공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이 뭐라고 말합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3)

오늘 우리 주변에는 세상적으로 성공했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유명하지만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성공의 기준은 결국 자신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여러분의 성공기준이 혹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지는 않는지요?

 

진정한 성공이란?

나의 성공지도라는 책에서 맥스웰은 성공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공이란 인생의 목적을 깨닫는 것이다. 최대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진정한 성공은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을 개발하여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의 대가를 자신을 위해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실패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소중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성공의 축복을 나누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절망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한 사람을 봅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실패한 다윗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조명해 봅니다. 즉 다윗의 패자 부활전 이야기입니다. 실패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했을 때 감추려고 합니다. 때로는 의욕을 잃고 좌절하거나 낙심합니다. 그러나 진짜 실패는 실패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탁월한 패자 부활전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가운데 위기에 직면해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뜻하지 않은 사고나 질병으로, 재물의 손해로, 자녀나 직장이나 사업의 일로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돌발적인 상황으로 실패의 쓴잔을 마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패자 부활전에서 승리하셔서, 진정한 신앙생활의 승리자, 인생의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절망 속에 처해 있는 다윗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distressed)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의 현재 상태를 군급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과 아픔에 사로잡혔다는 의미입니다. 왜 다윗이 이런 어려움에 직면했을까요? 그는 골리앗과 맞서 싸울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싸움에서 승승장구한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 군급했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런 절망적 상황임을 보여줍니다.

지금 다윗은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울왕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오랜 시간 동안 좇기는 신세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 땅에는 숨을 수가 없어서 가족들과 함께 블레셋으로 도망칩니다. 블레셋은 원래 이스라엘의 적입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적지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주변의 적들을 쳐서 아기스 왕의 환심을 삽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자기 조국 이스라엘을 치러 갑니다. 다윗은 함께 가지 않으면 충성심을 의심받을까봐 할 수없이 전쟁에 나갑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상황입니까?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주변 적들을 쳐서 승승장구하던 다윗이 이제는 자기 나라를 치러가는 적국의 장군으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다행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블레셋의 장군들이 다윗의 충성심을 문제삼아 돌려보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는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최악의 상황이 벌여졌습니다.

다윗의 가족과 군사들이 머물던 곳이(시글락) 아말렉의 기습공격을 받아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여인들을 모두 사로잡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잡아갔습니다. 비록 사울에게 좇기는 10년이 넘는 세월이었지만 그에게 가족은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족을 모두 잡아갔습니다. 당시에 전쟁포로로 잡혀가면 여자는 남자들의 노리갯감이 되고 자식들은 노예로 팔려갑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상황이 눈 앞에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돌을 들어 다윗을 치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가장 견디기 힘든 상황에 있는데 목숨처럼 사랑했던 부하들이 돌을 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설상가상(雪上加霜), 업친데 덥친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직면했다면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기 속에서 일어나는 반응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실패의 자리는 새로운 변화의 시작입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것이 그 사람의 인격의 성숙함이요, 신앙의 깊이입니다. 위기에 반응하는 4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첫째로, 일단 일이 벌어지면 도망치는 도망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일단 요나처럼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피하는 사람은 성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는 속죄양형이 있습니다.

그래 다 내 잘못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내가 책임져야지.’ 그래서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다가 우울증에 빠집니다. 이런 분은 참다 참다 안되면 어느날 바람과 같이 사라집니다.

셋째로, 핑계를 대거나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핑계형 혹은 책임전가형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핑계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킵니다. 나는 잘했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우깁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리더가 되기 어렵습니다.

넷째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터트리는 폭발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실패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패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함으로 영영 돌이키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잘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말씀하십니다. 한순간의 감정을 폭발함으로 여러분의 인격이, 신앙이 무너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왜 하나님은 위기 속으로 몰아가시는가?

그러면 그토록 신실했던 다윗이 이런 엄청난 위기에 봉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다윗은 10년이 넘도록 사울왕에게 좇기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이기에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붙잡고 견뎌왔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빨리 들어주시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쉽게 다윗의 손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바로 Final Test(최종시험)를 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다윗에게 중간고사를 치르게 하셨다면 지금 상황은 고난의 완결편, 마지막 시험을 치루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윗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이미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울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자입니다. 이 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룬 다윗에게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가시를 없애 주십니다. 언약을 맺으시고, 왕으로 기름부어 세워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고난과 위기라는 용광로를 통과시킵니다. 정금과 같이 깨끗하게 단련하셔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지도자들은 고난의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인물들은 모두 고난이라는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눈물에 젖은 빵을 먹으면서 시련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미국 워싱턴주 신호범 상원의원의 인간승리

현재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이신 신호범 씨의 강연을 듣고 많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는 파주에서 태어나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외할머니 댁에 데려다 놓고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6살 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무조건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거지가 되어서 구걸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거지생활을 하다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얻어온 밥을 나누어 먹고 추운 겨울에는 서로 껴안고 추위를 견뎠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항상 자기는 얼어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친구는 추위와 배고픔이 싫어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결심했습니다. “너는 갔지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고 살아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겠다.” 거지 생활을 했지만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커서 선생님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그 결심을 이루지 못했지만 미국에 가서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6.25 직후 노량진에서 구걸을 하는데 어느날 한 미군이 그의 팔을 잡아 트럭에 태웠습니다. 그의 배려로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풍요로운 미국 사람들을 보며 상대적으로 가난한 한국 사람들을 생각하니 너무 슬퍼서 하루는 언덕 위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가와 자기를 끌어 안아주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의 양아버지가 되어 주셨고, 19세에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친절하고 따뜻한 양부모님과 살았지만 늘 슬펐습니다. 무엇이 제일 하고 싶냐는 질문에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너무 많아서 학교에 진학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학으로 14개월 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해 대학 진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종차별을 딛고 그들을 위해 봉사할 때가 올것이다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드디어 92년에 백인이 97%인 지역에서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32천가구를 기도하면서 아침마다 찾았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 와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의 정성에 감탄한 백인들이 그를 지지해서 4선의원을 물리치고 하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워싱턴주의 상원의원이며, 상원의 부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거지인 저를 붙잡아 트럭에 태워준 미군의 손은 바로 주님의 손이었습니다. 언덕에 혼자 울고 있을 때 포응해 준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의 가슴이었습니다. 오늘의 나를 이 자리에 이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입니다. 이제 저의 사명은 흩어진 700만명의 한인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고통의 자리는 실패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성공을 향한 발판입니다. 그곳은 바로 새로운 하나님의 손길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넬슨 보스웰은 위대함과 평범함의 차이는 우리가 실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고난을 뚫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우리를 낮추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끌어 내리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정금같은 믿음으로 연단하셔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을 고난의 자리로 몰고가신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실패를 넘어 승리로

다윗은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엄청난 슬픔과 고통 속에서 뒤로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6절에 다윗은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말씀하십니다. 비록 상황적으로는 엄청난 슬픔과 고통의 자리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족을 빼앗기고,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자들이 돌을 들어 치려했지만 다윗은 상황을 보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승리의 자리로 나가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통의 자리,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더 큰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고 계십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 고백한 것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 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홀로 어둠 속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십니다. 성령님을 붙여 주셔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주님을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향하여 팔을 내밀기만 하면 주님은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소리내어 울면 주님은 다가오셔서 사랑의 품에 안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깃에 스치기만해도 낳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가갔던 것처럼 여러분의 손을 내미십시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비법은 바로 주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편 42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믿음의 고백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8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다윗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 자기의 감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도피하거나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비결입니다.

다윗은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뒤로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누구 앞으로요? 하나님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어려울 때 뒤로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세상의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십시오.

예레미아 332-3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어렵고 힘들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여러분이 미쳐 알지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을 보시기 원합니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꿈이 있고 목적이 보이면 힘들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오리무중일 때가 제일 힘듭니다. 문제의 종착점을 보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문제의 해결책을 얻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 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 보세요 마음을 청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 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왜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최후의 수단이 아닙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해야 할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무릎 꿇어 기도함으로 위기를, 실패를 승리로 바꾸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용기를 내어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고 힘있게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새 힘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40:31) 아멘!

하나님이 다윗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을 때 그의 리더십이 회복되었습니다. 돌로 치려던 자들이 기도하고 나자 함께 추격에 나섭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내와 가족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것 하나 없이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다윗과 같이 군급한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실패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원망하거나 불평하며 도망가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포기하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이요 축복의 출발점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사모하십시오. 주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용기있게 일어서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새로운 힘과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4:6)“

 

이 시간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고난을 뚫고 일어서십시오. 하나님이 이 시간 우리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실패와 아픔과 고난을 승리와 치유와 회복의 자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이 여러분 인생을 새롭게 결단하고 출발하는 패자 부활전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실패를 성공으로/삼상30:1-10

2005-12-07 15:47:45

 

 

성경에는 실패한 사람과,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물질, 자녀, 사랑, 사업, 관계). 우리도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성경과 성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오히려 실패했던 사람들이, 주님께 더 사랑 받고, 크게 쓰임 받았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꿈을 잃지 말고 더욱 힘을 길러,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야 한다. 꿈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에드먼드 힐러리'라는 한 영국청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려고 했으나,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에베레스트 산이여, 너는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란다. 나의 힘도 능력도 자란다. 또 내가 구비한 장비도 더 나아진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돌아오겠다. 기다려라. 나는 다시 산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10년 후인 1953529,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재도전하여, 그 산을 최초로 정복했다. 도전정신과 용기만 있다면,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음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보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청년들은 청년 실업 문제에 무기력하고, 장년들은 기본적인 부양책임마저 감당해내기 힘들다고 불안해한다. 경제적인 어려움만 아니라, 영적으로 무력해진 모습들을 보인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상징인 기쁨이 사라졌다. 이제는 찬송할 힘, 기도할 힘도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소망과 대안을 말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절망과 자학, 방향 모르는 공격성이 우리 심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는 진정으로 성령이 바람이, 거세게 불기를 소망한다. 성령의 바람이 한번 불면, 모든 무기력과 좌절, 절망과 부정적인 심령을 전부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다. 좌절감에 빠졌다. 그렇지만 기도하다 성령 충만을 받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었다. 본문의 다윗은 승승장구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도 실패를 경험하고, 그 실패에서 어떻게 회복하는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통해, 왜 실패하고, 어떻게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지 살펴보아,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먼저 실패의 원인을 찾아보자.

 

1. 왜 실패를 하는가?

다윗은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17장에서, 모두가 두려워하던 골리앗을 믿음으로 싸워 이겨, 스타가 탄생되었다.

 

그 후에도 다윗은 계속 승리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도망 다녀야만 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항상 좋은 일만 계속되지 않듯이, 성공만 계속되지 않는다.

성공도 있지만 때로는 실패도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

 

따라서 좋을 때는 좋은 대로 겸손해야 하며, 어려울 때에는 어렵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실패와 성공, 2가지 인생 길을 통해서, 우리를 겸손으로 인도하신다(7:14). 그런데 영적 승리를 계속하던 다윗은, 죽이려는 사울 왕이 두려워 블레셋으로 도망간다.

 

그래서 요즘 식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였는데, 원수 블레셋으로 망명한다(삼상27:1-2).

그 이유는 사울 왕이,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영적 내리막길이다.

블레셋으로 망명했을 때, 아기스 왕은 다윗과 600명의 부하들, 또한 그 식구들을 환영한다.

그리고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고을을 주어, 다윗과 그의 부하들과 가족들이 따로 살게 하였다.

 

시글락에서 다윗은 14개월을 아주 조용하게, 편안하게 보내게 된다(삼상27:7). 그 곳에 머무는 동안 다윗과 그 부하들은, 아말렉을 공격하여 그 성 사람들을 죽이고, 짐승과 물건들을 가져오는데,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유다 족속을 공격한 것처럼 거짓 보고를 한다. 거짓과 위선을 볼 수 있다.

 

블레셋 왕은 다윗이 자기편이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군대를 모으고, 다윗에게 같이 나가서 싸울 것을 요구하자, 다윗은 거절하지 못하고 그 싸움에 동참한다.

하지만 블레셋인들은 다윗을 믿지 않자,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된다(삼상29:3,4, 30:1).

 

3일 만에 돌아와 보니, 그들이 없는 사이에 아말렉이 침공하여 성을 불사르고, 아내와 자녀들을 전부 사로잡아 갔고, 재산도 전부 약탈해 갔다. 600명의 사람들은 잡혀간 자녀들을 위해 울고, 급기야 600명의 용사들은 돌을 들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다윗은 위기를 경험해야 했나?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다윗이 실패한 3가지 이유를 볼 수 있다.

 

(1) 그는 기도하기를 멈추었다.

"다윗"하면 기도의 사람이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매 순간,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하나님께 기도를 멈췄다. 기도의 사람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을 하는데, 하나님께 묻지 않고, 블레셋을 도와 이스라엘과 전쟁하러 갈 때에도, 역시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 온지 14개월이 지났음에도,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없다(삼상27:7).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멈추면 실패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기도가 멈춰 있고, 기도를 쉬고 있다면, 그는 이미 실패하고 있는 중이며, 패배하고 있는 중임을 알아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기도를 멈추었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폭풍 전야일 뿐이다.

우리의 실패의 시작은 기도의 끝이다. 기도를 멈춘 그 시간이 실패의 시작이다.

 

(2) 하나님 대신, 사람을 바라보았기에 두려워하였다(삼상27:1).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골리앗 한 사람으로 인하여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유일하게 골리앗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달려나갔던 사람이 다윗이다.

 

그러나 사무엘상 27장에 등장하는 다윗의 모습은, 정말 우리를 실망시키는 모습이다.

27:1을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지금 다윗은 스스로에게 말을 하는데, 그 내용이 대단히 부정적이고, 신앙적이지 못하다.

그는 절망적인 말을 스스로에게 한다. 믿음에서 떠난 말을 스스로 던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어떤 내용의 말을 던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말보다, 더 무서운 위력을 가진 말은,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열등 의식도, 자포자기도, 자신에게 신앙 없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세상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기에, 최면술을 개발하고 마인드컨트롤, 자기 암시, 적극적 사고와 신념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사물을 봐야만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사울을 바라봤다. 그때 다윗의 눈에 비치는 사울이 얼마나 컸는지, 다윗은 그만 절망한다. 성공하려면 환경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자.

 

(3) 블레셋을 대적하지 않고, 블레셋과 타협함으로 실패한다.

기도를 멈추자, 사람과 환경을 보게 되었고, 그 다음은 세상과의 타협을 상징하는 블레셋과의 타협하였다. 다윗이 블레셋의 시글락에 사는 14개월 동안에는, 아무 문제가 없이 평안했다.

 

이제는 사울에게 쫓기지 않아도 되지만, 그 평화는 거짓평화였다. 타협으로 얻은 잠시 동안의 편안함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거짓 평안에 속아넘어가,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세상과 타협하는 거짓 평화를 버려야 한다.

 

2. 실패의 교훈

그런데 어느 날, 블레셋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함께 나가자고 하였다. 과거에 목숨을 걸고 블레셋과 싸웠던 다윗이다. 골리앗은 바로 블레셋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블레셋과 한편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처음부터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다. 14개월 동안 먹고 지났을 때, 아기스가 다윗에게 부탁하자, 다윗은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윗은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도록 보호하셨다.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다윗과 그 일행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환난을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그들이 시글락에 돌아왔을 때, 성읍은 불타고 있었다. 모든 소유는 빼앗겼고, 아내와 자녀들은 전부가 사로잡혀 갔다.

 

(1) 그는 모든 소유를 잃어버림으로, 자신의 실패를 알게 되었다.

탕자는 자기주머니 속에 돈이 있을 동안, 잘못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였듯이, 다윗도 자기에게 속한 것을 잃어버릴 때까지는, 실패를 감지하지 못했다.

 

우리 인간들은 어리석어서, 어떤 큰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나오미는 모두 다 잃어버린 후,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온다. 잃은 후에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야, 하나님께 항복한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다 허비한 다음, 하나님께 손을 든다.

 

어떤 사람은 건강 잃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에 가서 하나님께 항복한다. 따라서 다 잃어버린 후에 후회하지 말고, 죄를 멀리해야 한다. 해외토픽에, 이런 끔찍한 일이 보도됐다. 15세 소년이 집에서 기르던 애완 동물에 의해, 목이 부러져 죽었다.

 

마른 체격의 소년은, 3미터가 넘는 버마산 비단구렁이와 놀려고, 이층 침대로 올라갔다.

확실히 길들여졌다고 생각한 그 뱀은, 소년의 목을 감아 목을 부러뜨려, 그 목숨을 앗아갔다.

무시무시한 죽음의 사자로 변할 수 있는, 힘센 뱀을 왜 가지고 놉니까? 죄와 타협하지 말라.

 

(2)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전쟁에 나갔던 600명의 용사들은 돌아와서, 울 기력이 없도록 같이 실컷 울고,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에게 있어서 600명의 용사는 누구입니까?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 있다. 다윗은 여기서 사람을 의지하고 신뢰함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철저히 배웠다. 다윗의 아내도 같이 사로잡혀 갔기에

서로 위로해야 할 입장이지만, 그들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다윗은 "군급"해졌다. 깊은 슬픔과 근심에 빠졌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신다.

우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시고, 때로는 배신을 허락하기도 하신다.

 

다윗은 자기에게 다가온 환경과 사건을 통해, 자기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패를 확인해야만 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실패라는 단어는 어디까지나, 부족한 인간에게 어울리는 단어이지,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다윗은 실패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실패할 수 없는 분이다. 그 전쟁에서 사울이 죽는다. 그 전쟁에 다윗이 참여했다면,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원망을 샀을 텐데, 주님께서는 막아 주셨다.

 

3. 다윗은 어떻게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었을까요?

다윗이 자기의 생애에 다가온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승리하였다. 이 영적 원리는, 수 천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1)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말라(6).

어려운 환경을 만날 때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감정적으로 해결하는데 있다. 600명의 용사들이 다윗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였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섭섭하였을까요?

 

감정대로 하면, 칼을 빼어 그 주동자를 죽여야 했다. 그러면 폭동이 일어나 다윗이 먼저 죽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일을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원망과 불평, 또한 책임 전가가 나타난다. 이런 행동은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죄명은 '낙담시키는 자'였다. 그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군이 얼마나 강한지, 왜 방어하기 어려운지 설명했고,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말을 떠벌리고 다녔다. 그는 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군인들은, 이미 모두 무기력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가 남을 낙심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대안 없이 비난만 늘어놓으면, 남을 낙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격려는 약한 자에게 힘을 준다. 감정적으로 말하면, 낙담을 주게 된다. 그러나 주님을 보면, 희망을 준다.

 

(2) 하나님께 기도하라(삼상30:7-8).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살아온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음을 알았기에 다시 기도한다.

그 동안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단순히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과 방법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는 제사장을 부르고, 에봇을 찾았다.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위급한 순간에 하나님께 묻는다.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삼상30:8).

 

아내와 자식들이 잡혀갔는데, 지금 다윗은 하나님께 "쫓아갈까요?"라고 묻고 있다.

쫓아가는 일은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아니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해도, 가고 싶다.

그러나 물었다는 말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윗의 마음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시면, 그것도 순종하겠다는 다윗의 의지이다. 이제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하지 않겠다는 다윗의 마음이다. 그 이전의 다윗은 블레셋으로 망명할 때도, 전쟁에 나갈 때에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너무나 중요한 일을, 주님 되시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는, 다윗의 마음이 그의 기도에 담겨 있다.

 

(3) 최선을 다하라.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응답이 왔다. 8절이다. "쫓아가라 반드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래서 응답을 받은 다윗은,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말렉을 추적했다.

 

기도 응답을 받은 다윗과, 600명의 용사들은, 최선을 다해 달렸다. 최선을 다해 달렸기에, 200명이 뒤쳐졌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이상, 최선을 다하여 달릴 때, 온전한 순종이 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도, 전력질주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산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많다. 그런데 보기에도 울창하고 멋있어 보이는 나무도, 처음에는 초라한 나무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 잘생기고 눈에 띄는 나무는, 산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사람들이 다른 곳에 옮겨 심거나 뽑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혹시 못생긴 나무처럼, 잘생기지 못했다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는지요? 하지만 보잘것없는 나무가 산을 지키듯, 못생긴 나무는 제자리를 지키며, 서서히 자라나 나중에는 대들보나 기둥 같은 역할을 해내게 된다.

 

오늘 당장 좋은 곳에서 쓰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다. 말없이 실력을 키우면서 분비하라. 적당한 시기가 되면, 가장 멋진 모습으로 능력을 발휘하게 될 테니까요? 오늘 내가 쓰임 받지 않고 있다는 말은,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곧 최선을 다해 준비하라는 신호다.

 

결론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어려운 일을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기도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순종하자.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삼상30:1-8

2004-06-01 10:31:38

 

 

경상북도 영덕군 남종면 구계리에 가면 구계교회가 있습니다. 이곳 어촌에서 베드로의 기적이 나타나 화제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어부인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기 위하여 그물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른 아침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몰려온 군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주님은 베드로의 배를 빌려, 배 위에서 육지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다 전하신 후에 주님은 베드로의 배를 타고 깊은 바다에 나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기적이 구계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구계교회에는 김종무 목사님이 시무 하시는데 기적의 주인공은 김 목사님의 신앙 지도를 받고 있는 김호철 집사입니다.

 

김호철 집사는 1998년에 약 2억 원의 빚을 얻어 맏형이신 김상철 집사로부터 영광어장을 매입했는데 2천년 봄부터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 가을까지 선원들 인건비를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

이처럼 어려운 와중에서도 김 집사는 목사님이 자신이 타고 다니는 것보다 작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려 목사님께 베르나 승용차를 사드렸는데 어장 빚, 자기 승용차 구입 빚, 목사님 승용차 구입 빚. 그야말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습니다.

그런 성도를 보는 목사님 마음이 편할리 없어 승용차를 선물 받은 그 날 20001129일 밤 10시부터 사모님은 철야기도가 시작되었고, 다음날 새벽부터 목사님은 손을 들어 김 집사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열흘이 조금 지난 후 1210일 김호철 집사의 아내 황보향 집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사모님 차 값 다 빠졌어요"

12월 달부터 고등어 떼가 몰려오기 시작하여 차 값이 모두 해결 됐다는 것입니다.

고등어로 기도의 맛을 본 김호철 집사 부부와 목사님 내외는 계속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김 집사는 그 달 23일 토요일 저녁에 사택으로 찾아와 목사님의 밀린 생활비와 교회당 수리비용 일체를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김 집사의 말을 듣고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저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성탄절이 지나고 26일 김호철 집사가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 영광어장에 방어 떼를 몰아주시사 한 마리에 십만 원하는 것 300마리만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장으로 나갔는데 정말 베드로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영광어장의 구조는 정치망 어장으로 공설 운동장 만한 그물이 동쪽, 서쪽해서 두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데 두 개의 방 모두에 고기가 가득 들어찼습니다. 다른 어장에는 고기가 없었는데 김 집사 어장에만 고기가 엄청나게 몰려왔습니다. 그 날부터 한 주간 동안 방어만 건져냈고 그 날 하루 건져온 고기값만 일억이라고 했습니다.

20011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가 4000만원이나 되었습니다. 이 같은 기적을 보고 사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교회를 우습게 여기던 불신자들이 교회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으며 지금까지 모든 바닷가의 풍습이 그렇듯이 굿하고 용왕제를 올리던 마을이 변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구계교회는 21년 된 스레트 지붕과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낡고 작은 교회였었는데 한국판 베드로 고기의 기적이 있은 후 구 건물을 헐어내고 새 교회로 건축하였고 마치 배의 선실을 닮은 형태의 인테리어를 해서 베드로의 기적을 실감케 하도록 꾸며 놓았다고 합니다.

 

현재 김 집사 내외는 주일을 철저히 지키며 주일 밤 예배는 물론 삼일 예배 뿐 아니라 매일 밤, 기도의 향연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전도에도 열심이고, 십일조 생활 철저히 하고 교회 일을 보다 더 잘하기 위해 교회 가까이에 집을 새로 지어 이사까지 했다고 합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때로는 성도들에게 닥쳐 온 시련이 실패처럼 여겨지지만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시련을 딛고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본문 성경에는 다윗의 실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패가 아니라 다윗에게 주어진 시련이었습니다.

 

실패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인생은 완전하지 못하고 약점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아는 사람은 또다시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게 됩니다.

정확한 병명을 알아야 올바른 치료를 받아 병을 낫게 하는 것처럼 실패의 원인을 진단하게 되면 성공할 수 있는 길도 찾게 됩니다.

 

1. 부정적인 생각이 실패하게 만듭니다.

삼상27:1을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 사울의 손에 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여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원수의 나라 블레셋으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정적인 말만합니다. 또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다윗도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어요!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을 피하여 망명의 길을 감으로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부정적인 사람인지 긍정적인 사람인지 진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작아 보이고 남이 가지고 있는 커 보입니다. 물이 컵에 반쯤 들어 있으면 부정적인 사람은 "물이 반 밖에 안 남았어!"라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자족하는 마음이나 감사하는 마음이 적습니다.

딤전 6:6 "知足(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지금 현재 비록 가난하게 살지라도 긍정적인 사람은 자족하는 마음을 갖지만 부정적인 사람은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먹구름과 같아서 내 인생을 아주 어둡게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손에 망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실패의 길을 가게 됩니다. 사람은 신념의 존재이기 때문에 생각한 대로 됩니다. 망할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내게 망하는 일이 닥쳐오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실패의 어머니가 됩니다.

 

2. 악인의 자리에 머물러 살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다윗의 부정적인 생각은 마침내 악인의 장막에 들어가 살게 만듭니다. 다윗은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과는 달리 다윗은 복 받지 못하는 악인의 길로 가고 있으며 죄인의 길과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됩니다.

악인과 함께 어울리면 자신도 모르게 악인의 행동을 따라가게 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는 블레셋 왕 아기스 왕에게 망명을 가게 되었는데 블레셋 왕은 다윗을 위하여 시글락이라는 성을 내 주어 살게 하였습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이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가 저들의 재산을 탈취해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움을 사서 다윗이 이스라엘에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 왕의 요구를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가 탈취하는 대신 남쪽에 있는 이방 족속들을 공격하여 탈취물을 취하여 아기스 왕에게 선물을 주면서 이스라엘 진영에서 탈취한 물건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거짓이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물건을 탈취한 지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남김없이 죽여야만 하는 잔인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만일 그 지역 사람들이 살아 남는다면 다윗의 소행이라는 것이 발각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악인의 장막에 함께 거하면서 어떤 죄를 범했습니까? 그는 수시로 아기스 왕 앞에서 거짓말하며 신임을 얻으려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남녀 노소 없이 잔인하게 죽여야 하는 끔직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3.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하고자 할 때 하나님 앞에 물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능해서 실패하는 것도 아니고 재물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것도 아니며, 운이 나빠서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면 무능한 자도 유능하도록 능력 주셔서 성공하게 하시며, 기도하면 없는 것도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니 행운이 따르게 됩니다.

위에서 소개한 구계교회 김호철 집사도 처음에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실패하였습니다. 잘 잡히던 고기도 잡히지 않고 빚만 잔뜩 지게 되었습니다. 기도했더니 정치망 어장에 하나님께서 고기를 몰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기도의 재미를 붙인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요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멈추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신앙 생활의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니 점점 더 무거운 죄만 짓고 급기야는 인생 중에 가장 힘든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기스 왕은 보란듯이 다윗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대단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이스라엘 군대를 쓰러트리고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망명을 받아 준 은혜를 입은 아기스 왕을 배반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성도라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다윗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선에 나타나자 블레셋의 장로들이 결사 반대하였습니다. 만일 다윗을 전쟁에 출전시키면 분명 아기스왕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골리앗을 죽였던 다윗이니 자칫 다윗으로 인하여 블레셋이 크게 패할 수 있기에 다윗의 출전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전쟁에 출전하지 않게 되어 한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며 감당치 못할 때는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다윗이 전쟁터로 나갔다가 시글락으로 돌아오는 기간이 3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살고 있는 시글락에 아말렉 사람들이 몰려와 부녀들을 모두 포로로 붙잡고 재산을 탈취하고 성을 불태웠습니다.

다윗 일행이 돌아왔을 때는 성은 모두 불타 잿더미만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족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 일행들은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통곡을 했습니다. 다윗을 추종했던 600명의 무리들은 다윗 때문에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려 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 더 큰 시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이 몹시 다급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족과 재산을 다 잃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어야 하는 일생일대의 최대 위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일생 최대의 위기를 만나게 되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 6절에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다급하고 힘든 상황에서 용기를 얻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다윗은 제사장을 앞세워 더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가족과 재산을 탈취한 아말렉을 따라가면 잡을 수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쫓아가면 가족과 재산을 모두 찾을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복

 

다윗이 한시가 급하게 적을 추격하는 도중 애굽 청년을 도중에 만났습니다. 그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는데 다윗은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을 극진히 간호해 줌으로 기운을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급히 따라잡으려 해도 적을 놓칠 판인데 언제 병든 병사를 간호해 주며 치료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지체되는 것에 대해서 조급해 하지 않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기운을 차리자 다윗은 그의 신상에 대해서 묻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청년은 알말렉 군대의 용병이었는데 병들자 저들이 버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애굽 청년에게서 아말렉 군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군대의 수가 얼마나 되는 지 어느 쪽을 향해가고 있는지 등등의 적에 대한 정보를 소상히 알게 되어 적을 공격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으며 지금 죄에 대한 형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려움 당한 사람을 긍휼히 여겨서 돕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잘못 산 것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어주십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긍휼을 얻게 됩니다. 다윗이 애굽 청년을 병들어 죽어 가는 가운데서 보살펴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원수 아말렉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고 아말렉이며 용병 애굽 청년을 구출해 줌으로 인하여 적의 형편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말렉 군대는 블레셋과 시글락이 전쟁에 출전하기 위하여 비어 있는 사이 손쉽게 많은 성읍을 점령하고 셀 수 없는 전리품을 거두게 됨으로 승리를 자축하는 잔치를 벌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사이 다윗의 군대는 새벽 여명이 밝아지기 전에 무방비 상태에 있는 아말렉을 처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수천 수만 명의 아말렉 군대가 모두 몰사 당하고 살아 도망간 수는 400명에 불가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의 승리로 가족들과 재산을 모두 되찾았을 뿐 아니라 아말렉이 노략한 수 많은 재물들을 뺏음으로 일시에 큰 거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어느 소년이 있었습니다. 집안이 부유하여 어린 시절을 호강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이 침침해 오기 시작했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의사가 말하기를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대로 두면 앞을 못 보게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그의 성질은 급격히 난폭해졌습니다. 그의 집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기 때문에 방안에는 불상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불상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으며, 그 바람에 불상들은 깨어지고 마침내는 강 아래로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갔고, 커다란 굿판을 벌리기도 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제 어두운 인생이 되고 말았고,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관하여 자살을 하고자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의 권유로 기독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맹인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소경이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에서 희망을 얻게 되었고 앞 못 보는 불구의 몸 때문에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자신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많은 책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어둠에서 빛을 찾았다'라는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일본 '반사원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의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자리를 잡았고, 강의가 시작되면 강의실은 물을 뿌린 듯 조용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선생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실패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멀리하고 기도하지 않았으며 악인들을 가까이하며 죄짓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가 잘 못 산 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가족들과 재산은 아말렉 군대에게 모두 빼앗기고 성난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다윗은 절박한 위기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용기를 얻음으로 또 다시 기회를 얻게되어 화가 복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실패의 자리에 주저앉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종종 실패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실패를 딛고 성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실패도 기회임을 확신하고 살아가자/삼상30:1-20

2004-04-03 00:08:49

 

 

테헤란 왕궁에 가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입구에서부터 아치형 천장과 벽, 그리고 창문에 이르기까지 마치 다이아몬드를 박아 놓은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유리 장식 때문이다.

이 유리 장식은 빛의 밝기와 방향에 따라 각양각색의 빛을 발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미세한 유리 조각들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왕궁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재미있다.

테헤란 왕궁을 지을 당시, 건축가들은 왕궁을 장식할 거울처럼 비치는 반투명 유리를 프랑스에 주문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몇 달 간의 운송 기간을 거쳐 유리가 도착하였는데, 포장을 풀어 보니 유리가 완전히 깨어져 있었다. 이 사실에 공사 관계자들은 당연히 흥분했고, 프랑스 정부에 욕을 퍼부으며 즉각 새로운 제품을 다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

"차라리 이 깨진 유리를 붙인다면 더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주문을 한다 해도 공사 기간이 연장될 것이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작업 인부들은 큰 유리 조각을 일부러 잘게 부수어 벽과 창에 입히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찬탄했다. 그러자 급기야는 아치형 천장까지도 작은 유리 조각으로 장식했던 것이다. 지금도 각 국의 관광객들이 이 왕궁의 장식을 보기 위해 떼지어 몰려와 저마다 찬탄한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깨진 유리를 활용하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갓 입사한 견습공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테헤란 시내에 조그만 양복점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때때로 자투리 천을 엮어 옷이나 이불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 때 만들었던 자투리 천의 옷과 이불이 특별히 더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사업이 안되어 비참한 마음으로 사용했던 자투리천의 기억이 위대한 건축을 하게 하는 기회로 작용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때로 지독히 근시안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떤 목표를 두고 열심을 다했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때 마치 자신의 전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낙심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한 과정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다듬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때로는 그 실패가 있으므로 더욱 커다란 기회와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사실 위대한 사람들은 실패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다. 남들이 보기에 실패자의 그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할 정도의 무너짐 속에서 오히려 그 모든 여건을 기회로 활용한 사람들이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9년 동안 시베리아 유배생활을 한 뒤, "죄와 벌"이라는 명작을 썼다. 단테(1265-1321)는 정적들에 의해 추방된 뒤 방랑하면서 "신곡"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집필했다. 또한 헨델(1685-1759)은 불편한 몸으로 감옥에 갇힌 후 세계인의 영혼을 뒤흔드는 명곡 "메시아"를 작곡했다. 존 번연은 감옥에서 제2의 성서라고도 일컬어지는 "천로역정"을 썼다.

 

이들 모두는 실패에 함몰된 것이 아니라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위대한 발자국을 역사에 남긴 것이다. 그리고 원하기는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실패를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로 서기를 바란다.

 

"실패도 기회임을 확신하고 살아가자"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이 가운데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새롭게 힘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자신과 환경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1. 다윗이 겪는 커다란 실패

 

오늘의 본문에는 다윗이라는 유명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 다윗이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뒤로 가볼 필요가 있다.

 

1) 블레셋 방백들의 불신

 

a. 블레셋 왕을 따라 전잰터로 나가는 다윗

"1 블레셋 사람들은 그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2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b. 블레셋 왕과 방백들의 논쟁

"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4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5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c. 다윗을 돌려보내는 블레셋 왕

"6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나의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7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 8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9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10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로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d. 블레셋 땅으로 돌아가는 다윗

"11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로 더불어 일찌기 아침에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삼상 29)

 

2) 불살라진 시글락

1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로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3) 빼앗긴 처자식과 재물

2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5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4) 돌 들고 치려하는 부하들

 

6상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2. 실패 속에서 보이는 다윗의 태도

 

1) 통곡하는 다윗

 

4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2)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냄

 

 

 

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3) 기도하는 다윗

 

7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 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어느 교회에 TV 드라마를 아주 좋아하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특히 이조실록을 토대로 한 사극 한명회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장사를 하느라고 빼먹고 못 본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딸을 시켜서 대여점에서 한명회 테이프를 몽땅 빌려 오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은 밤새도록 테이프를 보고, 그 다음날 주일이라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자신이 기도 당번인 날이었습니다. 장로님은 평소대로 기도를 한 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다는 것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멘.” 하고 말았습니다.

 

4)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

 

9 이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육백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는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렀으되

10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사백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11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우고

12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낮 사흘, 밤 사흘을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13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뉘게 속하였으며 어디로서냐 가로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14 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멜 남방을 침로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

15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군대에게로 인도하겠느냐 그가 가로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붙이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으로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이 군대에게로 인도하리이다

 

 

내 갈길 바쁜데라고 했으면

 

그는 아말렉 사람도 아님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것.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것.

그 속에서 더 큰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음

 

자기 일에만 급급하면 마음만 좁아짐.

그런다고 해결이 빨리 되는 것도 아니고

 

 

 

3. 실패가 변하여 놀라운 기회로

 

1) 잃은 것을 되찾은 다윗

 

16 그가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하여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17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18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19 그들의 탈취하였던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2) 더 풍성하게 얻은 다윗

 

20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

 

이것을 유용하게 사용하게 됨

 

3) 블레셋 사람들의 불신도 유익

 

블레셋과 같은 편이 되어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못됨

 

결국 미움받은 것조차 하나님이 활용하신 것임.

 

똑바로 하는데 마움 받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회가 있다고 믿으라

제대로 못하면서 미움받는 것은 말고

 

 

결론

 

 

다윗에게 있었던 실패

 

큰 실패인가 작은 실패인가?

 

여러분의 실패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다윗의 실패가 그를 망하게 하였는가

아니면 그에게 기회가 되었는가?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소수

 

다윗에게서 보여지는 기회 잡는 방법은?

 

1) 통곡하는 다윗

 

4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2)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냄

 

 

 

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3) 기도하는 다윗

 

7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 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어느 교회에 TV 드라마를 아주 좋아하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특히 이조실록을 토대로 한 사극 한명회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장사를 하느라고 빼먹고 못 본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딸을 시켜서 대여점에서 한명회 테이프를 몽땅 빌려 오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은 밤새도록 테이프를 보고, 그 다음날 주일이라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자신이 기도 당번인 날이었습니다. 장로님은 평소대로 기도를 한 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다는 것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멘.” 하고 말았습니다.

 

4)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재직할 당시, 월남의 티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와대 뒤뜰에 피어 있는 수많은 목련꽃을 보고 그만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목련나무 묘목을 잘 싸서 티우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월남에 돌아간 티우 태통령이 어찌나 좋은 땅에 나무를 심고 정성껏 가꾸었던지 목련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잎사귀가 무성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1년이 지나도 목련나무에 꽃이 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티우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각하, 저에게 주신 나무가 어찌된 일인지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 편지를 받아본 박 대통령은 서울대 농대 교수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목련은 추운 겨울을 지나야만 꽃이 피는데, 월남은 사시사철 여름이기 때문에 나무는 잘 자라도 꽃이 피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추운 겨울을 지나야만 꽃이 피는 나무도 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고통이 크면 클수록 영광도 큰 것입니다.

 

 

 

 

 

김 씨라는 한 여자는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살았습니다. 식도락가를 자처하는 그는 어디에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고 하면 당장 친구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달려갔기 때문에, 소문난 음식점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한 몸치장도 즐겼습니다. 그래서 값비싼 옷은 다 몸에 걸쳐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난 척 하고 큰소리치며 살던 이 여자에게 하루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뇨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먹다보니 합병증까지 생겼습니다. 한쪽 손을 쓸 수 없고, 한쪽 눈이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최고의 기술과 시설을 자랑하는 병원 성형외과에 가서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후유증으로 시달렸습니다. 담당 의사는 회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습니다. 용모도 준수하고 여유 있게 살던 사람이,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시력도 상실하게 되자 일순간에 낙심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때는 이때다 싶어 교회에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교회에 나갔습니다.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자기가 대단히 잘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잘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병이 생길 줄 모르고 아주 건강한 줄만 알았습니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빠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 몇 달째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예배 시간에 몸이 찌릿찌릿하더니 쇠꼬챙이처럼 뻣뻣하던 손에 신경이 통하면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까 뻣뻣하던 손도 부드럽게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손이 움직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후 안 보이던 눈도 희미하게 보이더니 결국 시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질병과 고난의 위기에서 구원하심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 예배, 새벽기도, 철야기도, 구역예배 등 예배라는 예배는 다 참석했습니다. 또한 선교회 활동을 통해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교회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 여자가 당뇨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손이 마비되지 않았더라면, 시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세상에서 죄를 짓고 교만하게 불순종하는 삶을 살다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질병이라는 연단과 어려움이 닥쳐서 교만함이 바짝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손들고 항복했을 때, 하나님께서 더 좋은 삶으로, 구원받는 삶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크게 사용하여 주셨습니다.

 

 

 

 

확신에 대한 설교를 계속하고 있다.

죄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자

기도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자

사랑이 최고임을 확신하며 살아가자

실패도 기회임을 확신하며 살아가자

 

 

 

 

 

 

삼상30:1-6 여호와를 인하여 힘을 얻고

2002-03-04 19:44:46

 

 

내일은 오늘 준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열려져 있고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동의 하십니까? 우리는 이 한해를 예수님에 대해서는 존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서는 주의 사랑의 가지고 살아 가기로 결단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이 언제 파도가 올지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즉 감추어진 비밀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의 번호를 안다면 두러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풍랑을 인하여 찬송 할 수가 있으며 더 멋진 항해가 될것입니다. 잔잔한 파도 가운데 항해를 할 때는 누가 잘하는지 모르지만 거센 풍랑을 만날 때, 누가 잘 헤쳐나아가는 가에 의하여 평가를 받게 될것입니다. 이 한 해동안 당하게 될 자신의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에 성서 속에 나타난 믿음의 선조들은 어떻케 대처했는가를 살피면서 비밀의 번호를 하나 둘씩 풀어가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는 내용입니다. 삼상 18:29절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다윗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여러분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시같은 이웃이 있다면 어떻케 하시렵니까? 바울은 자신 몸의 가시를 위해서 3번이나 기도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응답은 무엇입니까? "이는 내가 곧 약할 때에 강함이니라, 나를 너무 자고하지 않토록 하나님이 허락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가시 때문에 나의 신앙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히려 그런 가시같은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감사하며 찬송하시길 바랍니다.

 

삼상 27:1 "다윗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서 망하리니 불레셋으로 도망하는 것이 상책이로다"하고, 600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거처를 옮깁니다. 문제는 거처를 옮긴 후 14개월간의 결과가 오늘 바로 이 사건으로 나타 납니다.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앞장 서기를 원했으나 출전하여 아기스 왕에 신하의 불산에 의해서 다시금 돌아오니 아말렛 군인들이 시글락을 불태우고 처자식들을 잡아 갔습니다. 시글락은 아기스왕이 다윗이 거하도록 허락한 곳인데 이렇케 무참히 성이 불타고 말았습니다. 600명의 군사들은 기력을 다하여서 울었고 저들이 다윗을 죽일려고 한 사건입니다. 이에 다윗이 군급하였으나 여호와로 인하여 힘을 얻고 다시금 추격하여 승리하며 돌아오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1. 군급한 상항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비밀의 열쇄 1번입니다. (다윗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여러분은 어떻케 기도하십니까? 상항이 어려울 때나 생명의 귀로에 섰을 때 말입니다. 아마 죽을 힘을 다하여 부르짖을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행하소서. 그리고 영광받으소서"라고 목놓아 부르짖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신뢰했던 일인데 이 순간에 오히려 적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위급했으면 군급했다고 하십니까? 그러나 감사한 일은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을 때에 하나님만이 도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121편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요?

 

아무도 날 도와 줄 사람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14: 제자들이 밤중에 고생하며 갈리리 바다를 항해 합니다. 더 이상 풍랑으로 갈수가 없는 절대 위기 속에서 유령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가까이 오시는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외칩니다. "만일 주님이시면 나를 명하여 바다위로 걷게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리로 오라"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기적을 낳습니다. 결코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란 내가 주어진 사건 속에서의 나의 판단의 결과 즉, 결과에 대한 나의 사고 방식일 뿐입니다. 절대위기 앞에서 물위에 서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비록 바람과 풍랑이 거세었지만, 이 순간에 주님이 자신을 건지셨다는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물위로 걸어 올자를 찾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가진자 만이 행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에미카미카엘씨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려고하면 마귀가 알고서 먼저 찾아와서 우리를 절망과 낙심 가운데 빠뜨려 그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나의 죽음 조차도 이제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관심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성령님이 가라사대 주 안에서 죽은자가 복되다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위기를 푸는 열쇄 2번입니다.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 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묻습니다. 지금 자신의 부인들과 자식들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내 생명과 같이 소중한 부인과 자식들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골리앗 전투에서 디윗은 신앙의 힘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바라보십니까?

 

신앙인의 삶의 궁국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르는 길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당신을 뜻을 따르도록 나의 뜻을 포기하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22: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워 지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하시면 섭섭해 하십니다. 사울은 28:전쟁의 절대 위기 앞에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갑니다. 왕하1: 아하시엘이 다락 난간에 떨어져 병이 낫을 때에 에글론 신인 바알에게 결과를 물으려고 사절단을 보냅니다. 이 때에 엘리야의 외침이 무엇입니가? 이스라엘에는 물을 만한 선지자가 없더냐? 하나님의 손길이 나와 함께 한다는 확신, 믿음의 확신이 있다면 이젠 주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31"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를 함께불러 봅시다.

 

3, 오직 믿음의 사람은 사람을 얻을 때에 군급한 상항을 푸는 비밀의 번호 3이라고 생각 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잃을 때에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상도"라는 소설에 보면 의주 상인 만사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주위에 사람이 모여야 합니다.

 

(1) 아말렉 군인 : 애굽 사람을 노예로 부려먹다가 이제는 병들었으니 더 군인으로써 보조의 사람으로써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병도 치료해야지요. 밥도 먹여 주어야되지요. 지금 전쟁통에 얼마든지 종과 노예들이 있으니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텔레비젼을 보다가 흥미가 없으면 다른 체널로 돌립니다. 이렇케 흥미 위주로 가다보니 모든 삶의 패턴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람을 바꾼다고요. 같이 살던 사람도 바꾸는데 교회 바꾸는 것은 더 이상 묻지 맙시다. 기분 나쁘면 천당에도 안간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오늘의 T.V 문화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는 사고를 차단시키고 비 인격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기계라고 생각합니다.

 

(2) 600명의 군인들을 보십시오. 뭔가 잘될줄로 알고서 따랐는데 막상 위급한 순간 처자식이 포로로 붙잡혀 갈때에 모두 다윗을 죽일려고 하였습니다. 처음 따를 때에는 나의 목숨 전체를 바친다는 충성을 맹세 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에서 약속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배반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에 어긋 날때에 어떻게 대하는 가를 보여 줍니다. 이 곳 사람들이 왜 개(동물)를 그렇게 사랑하겠습니까? 개는 배반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꼭 그런 이유로 이들이 동물을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3) 아말렉 군인을 추격한 군인은 모두 600명입니다. 그러나 부솔 시냇가에 왔을 때에는 200명의 군인들이 너무 지쳐서 같이 건너 갈 수가 없다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400명의 군인들이 추격하여 노획물과 처저식을 다시 찾아 옵니다. 이 때에 노획한 전리품은 자신들만 가지고 남은 군인 200명에게는 오직 처자식만 돌려 주자고 합니다. 왜 이런 마음이 생겼을까요? 아마도 같이 전쟁하려 가지 않았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자신들은 생명을 걸고 시내를 건너 싸웠지만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피곤하다는 이유로 남아있는 저들에게 노획물을 나누어 같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유가 타당합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무엇보다도 욕심이 앞서있습니다. 400명의 군인들의 소리가 아니라, 이들의 소리는 악한자와 비류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남은 군인들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무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우리는 어떤 일들에 앞서서 욕심이 앞서면 오히려 형제를 잃는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은 200명의 군인들이 나의 형님이요 동생이라면 누가 감히 주지 말자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기억헙시다. 형제가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4) 다윗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다윗은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났는데, 병들고 3일간이나 못 먹었으니 얼굴에서부터 그의 표정이 나타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저에게 물과 떡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와 건포도를 주었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모습입니다. 먹게한 후에 그가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얼마든지 먹기 전에 누구인가를 신분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가노라면 어떤 어려움에도 처할 때가 있습니다. 안목사를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8: 모두가 율법에 의해서 돌로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모십시오.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까?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을 던지려고한 자들을 향하여 말씀 하시며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랑이 가정과 교회에, 삶 속에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보장해줍니다. 이 일로 통하여 아말렉 군인들이 어느 곳에 있는가의 소제가 파악이되고 출전하여 승리를 얻게 됩니다.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돌아와서 악한자와 비류들이 이야기를 듣고 따르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이 전쟁이 우리가 잘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마치 우리의 몴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상 17: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 시간에 감사의 예물을 드립니다. 감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한 나의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감사의 헹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줄 믿습니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군급한 상항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하여 힘을 얻고 승리한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삶의 현장 가운데서 나타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 나의 노력으로 아닙니다. 내 공로가 아닙니다. 교만하지 맙시다. 오직 그 은혜만을 나타내며 증거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절대 위기에 사망의 골짜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삼상27:인간의 방법의 상책이 14개월의 과정을 지나면서 하나님이 다시금 그로 하여금 은혜를 베푸시는 사건이며 왕을 세우십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 같이 보이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케 역사하시고 있는가를 보여 주십니다. 이점을 놓쳐서는안됩니다. 나의 절대위기 앞에서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만이 나를 도와 주심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121: 나의 도움이 여호와께서 온다고 확심하며 찬양합니다. 2002년 어떠한 풍랑과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감사하시며 담대히 나가세요. 물위로 오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알고 있습니다. 왜 내가 물 위에 걷고 빠졌는지 말입니다. 그는 남이 볼때는 실패자 같으나 결코 실패자가 아닙니다. 다윗이 절대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인하여 힘을 얻고 승리함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찬양과 감사하는 2002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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