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37 - 42절 설교 모음
믿으라! 그러면 깨달아 알리라/요10:31-42
2004-03-25 13:23:33
가을의 문턱에서 태풍 “매미”가 가져 다 준 피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저와 집사람은 어제 새벽,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김해 시내를 한바퀴 돌아보았습니다. 먼저 내동초등학교 길로 해서, 초방서점을 지나, 김해논리속독학원을 지나 다리를 건너 구시내 중심을 둘러보았습니다.
간판이 떨어지고, 차가 뒤집힌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이 길가에서 열심히 길바닥을 쓸고 있는데, 청소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가만히 보니 무엇인가 찾아 줍고 있는데, 은행을 줍더라구요.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은행 열매들이 많이 떨어졌나 봅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구산동, 삼계동을 지나 보았더니, 그쪽에는 주유소에 세워 놓은 버스 유리창이 거의 다 깨져 있지요, 또 교회 종탑 자체가 무너져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교회도 좀 더 겸손하라고 종탑 십자가가 꾸벅 절하고 있지만, 물질적인 피해는 뒤로하고, 십자가가 무너진다라고 생각할 때에 목사님과 성도들 마음이 얼마나 안쓰럽겠습니까?
아직까지도 정전인 곳도 있고, 곳곳이 난리입니다. 그래도 우리 김해는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 아니라, 피해가 적은 편입니다. 마산 같은 경우에 해일로 빌딩 지하가 바다 물에 잠기어 수많은 사망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족들을 위로하시고, 속히 모든 파괴 된 것들이 복구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러한 난리 속에서도 저와 여러분이 이처럼 건강하게 예배드리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여러분! 물질적인 피해가 있어도 이처럼 멀쩡한 육신 지켜주시고, 정신은 없지만 주님 찾아와 예배드리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환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욥의 신앙을 다 가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엊그제 밤처럼 몹시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는 날밤, 시체실에 3명의 시체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체들 모두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검시관이 물었습니다. "아니 시체들이 왜 웃는 거죠?" "네~ 이 첫 번째 시체는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서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 그리고 이 두 번째 사람도 심장마비인데 자기 자식이 학교에서 전교 1등 했다고 충격 받아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자 검시관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 번째 사람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자 "이 세 번째 사람은 벼락을 맞았습니다."
"벼락을 맞았는데 왜 웃고 있지?" "네~ 사진 찍는 줄 알고 그랬답니다."
ꁾ요한복음 10장은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과 양되는 성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양을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 중에는 예수님의 양이 있고, 그렇지 않은 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태풍에 보니깐 간판들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교회 앞 비젼학원 간판은 하나뿐인데,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강집사님 다미 아구찜 간판은 두개인데, 하나는 멀쩡하고, 다른 하나는 파손은 되었지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철거를 하였습니다만.... 또 초방서점에 가 보니깐, 집사님 빌딩에 세든 그린컴퓨터학원 간판은 모조리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초방서점 간판은 멀쩡합니다.
♣ 여러분! 간판이 떨어지고, 안떨어지고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1) 먼저는 간판의 견고성일 것입니다.
얼마나 강하게 제작하고, 건물에 부착시켰는가? 동일한 바람을 맞게되면, 약한 간판이 먼저 떨어집니다.
2) 두 번째는 바람의 강도입니다.
바람이 약하게 부는 지역의 간판은 약해도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강한 바람이 불면, 아무리 견고한 간판도 쉽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견고한 간판이라도 강한 바람이 불지 않도록 바래야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간판을 견고하게 제작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지만,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 이번 감리교 300만 총력 전도운동에 어떻게 참여 할 것인가를 놓고 기도하면서 우리 교회 “구호”를 정하는데 저 자신 스스로,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정한 구호가 무엇인고 하니
“최선을 다하여 전하고, 결과는 주님께!” 입니다.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그저 최선을 다해 전도만 하자는 겁니다. 전도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300만 총력전도운동 구호로서는 좀 약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느낌이 팍 오는 구호로 바꾸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전도합시다. 하면됩니다. 내가합니다.” 할렐루야!
그렇지요. 하나님이 하실 일과 내가 할일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햇갈리면 신앙생활이 햇갈립니다.
☺☻ 우리 교회가 텃밭을 가꿉니다만, 그 텃밭을 뒤집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이것 제대로 못하면 소출을 얻지 못합니다. 텃밭을 탐내는 할아버지 말씀이 우리 밭가는 것을 보시면서 하는 말씀이 “안 사람이 열심히 해야 혀!!” 말씀인즉, 자주 나와서 잡초를 뽑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잡초를 뽑고, 가꾸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만, 해가 나고, 비를 주는 것, 태풍이 오는 것, 자라고 안 자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실 자는 내 양이지만” 안 주시는 양도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양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직접 듣고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 우리 눈앞에 나타나셔서, 복음을 전한다면 정말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밖에 못살어! 그렇게 밖에 못믿어! 회개하라!”저를 보고 야단치신다 할찌라도, 아마도, 저와 여러분은 눈물 흘리며 “예수님! 아멘. 아멘! 그리 하겠습니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감격스러운 말씀을 들어도 울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냅니다. 돌을 들고 주님을 치려합니다.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들을 귀가 열려 있습니다.
♤ 지난 주간 한 교우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김해에 노란띠를 두르고, 전도하는 84살 나신 할아버지 이야기 입니다.
교우가 운영하는 기업에 이 할아버지가 오셨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대요. “어쩌다 그렇게 되셨습니까?” 아직 확실한 믿음이 생기기 전이라서 이렇게 물었더라고 그러더군요. 그러자 이 할아버지의 숨겨진 간증이 나오더랍니다.
이 할아버지가 성경을 읽다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는 말씀을 읽으면서 고민을 하셨답니다. “아! 나는 주님의 음성을 못듣는데, 아직 나에게 들을 귀가 없단 말인가?” 그래서 들을 귀를 달라고 작정기도를 시작하셨답니다. “들을 귀 달라고!” 퇴근해서 7시쯤 집에 오면, 잠을 먼저 자고, 12시쯤 되어서 기도를 시작하는데 새벽 4시까지 기도 하셨답니다. 설날, 추석 몇일 빼고 거의 1년을 그렇게 기도하셨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포기할까 생각하시다가, 그래도 끝장은 봐야지 하면서 기도한 게 약 490일 쯤 지나니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답니다. 전도 나갔다가 핍박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서러운 마음에 들어 누웠는데, 그때 음성이 들렸다고 그래요.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는 직접 물어보시든지, 아니면 이 간증을 제공한 분을 제가 소개시켜 드릴테니깐, 한 번 물어 보세요. 그 이후로부터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되었고, 지금도 84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방전도를 다니신다는 것입니다. 재미 있는 것은 노방전도시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랍니다.
황당한 것처럼 들리지만, 한번 시도해볼만 하잖아요? 여러분이 다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사모하면, 사모하는 만큼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직접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꾸 사모하면 성경을 통해, 설교를 통해, 환경을 통해, 사건과 사고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판단하는 능력이 분명하게 생길 줄 믿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에게 조용기목사님이 아끼는 제자 목사인 명성훈목사님이 물었답니다. “조목사님! 목사님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음성은 어떤 음성입니까?” 물었답니다. 즉 주님 음성이 테너처럼 경쾌합니까? 바리톤처럼 묵직합니까? 베이스처럼 아주 깔립니까?를 물어 본 것이지요.
그랬더니 조목사님 왈, “아니!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직접 들은 줄 아느냐? 그게 아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내 마음 한 가운데 울려나는 메아리처럼 감동으로 들려주시고, 성경을 통해 그 음성을 들려 주신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미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주일을 맞아 생각 없이 교회 나와 예배를 드린 것 자체가, 아니면, 싫지만 억지로라도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이미 습관을 통해서, 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통해서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것입니다.
ꁾ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분 중에 귀가 없으신 분이 게십니까? 여러분에게 귀가 있다면, 들을 귀가되시기 바랍니다. 들을 귀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막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잘 듣는 것에서부터 믿음은 시작됩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ꁾ 오늘 본문 38절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ꂎ 이 말씀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됨의 존재문제(who),
또 하나님의 아들 되심으로 하신 사역(what)의 문제입니다.
즉,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냐?] 하는 부분과, [예수님이 어떤 일들을 행하셨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원래 믿음의 순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그
다음에 병 고친 사건들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먼저 병고침을 받고서라도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이 그냥 믿어지는 겁니다. 이게 큰 축복입니다.
* 얼마 전에 어떤 교우가 우리 둘째, 믿음이에게 물었답니다. “노는 것이 좋냐? 아빠, 엄마가 좋냐?” 그랬더니 우리 둘째 왈, “아빠, 엄마가 더 좋아요.” 그러자 또 묻더래요. “아빠, 엄마가 좋냐? 예수님이 좋냐?” 그랬더니 우리 둘째, 왈, 뭐라했겠어요? “예수님이 더 좋아요.” 아니 이런 불효막심한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부모보다 구체적으로 보지도 않은 예수님을 더 좋아한다니.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제가 직접 물어 보았잖아요? “엄마, 아빠가 좋냐? 예수님이 좋냐?” 그랬더니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예수님이 더 좋아!”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듣는 목사 아버지는 아들의 고백이 너무 귀한 것 있지요. 오히려 안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 부모보다 예수님을 더 좋아해야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ꂐ 이상하게 예수님이 부모보다 더 좋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그리스도 되심을 믿어지는 신앙이 정말 축복된 신앙입니다.
ꁾ 병고침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그제서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고구마 전도법, 김기동집사님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그 분의 유명한 간증이지요.
어느 주일 아침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예배를 빼먹고 스키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하는 말이
“예수가 밥먹여 주느냐? 나만 믿어, 나만”
결국 뜻하지 않게 엄청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아내와 두 딸이 큰 부상을 당하자, 이런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그래도 제 아내는 열심히 믿지 않았습니까? 저도 어쨌든 한 달에 3번은 교회에 나갔습니다. 솔직히 99%는 안 믿어집니다. 지금 이 시간, 어떤 선택도 저에게는 없으니, 만 분의 일이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저희 가족의 생명만은 좀 살려주세요. 식물인간이라도 좋습니다. 병신이라도 좋습니다. 평생 뒤치닥꺼리 하겠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세요. 그러면 제가 예수님 믿고, 예수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절실한 기도 끝에 응답을 받지요. 한 가족도 죽지 않고 다 살아 난 것입니다.
“예수가 밥 먹어주느냐?”는 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도를 응답 해 주신 주님을 위해 지금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믿어지는 신앙은 확실한 간증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나약한 믿음 같아요. 불확실한 믿음 같아요. 그러나 이 믿음이, 확실한 간증을 가진 체험적인 신앙보다 중요하고, 축복된 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특별한 간증꺼리가 없어도,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간증, 망했다가 다시 성공한 간증, 병들었다가 다시 나은 확실한 간증이 없어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그리스도로 믿어진다면 이 믿음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의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믿어지는 믿음이든, 확실한 체험의 믿음이든, 분명한 믿음을 갖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 문제는 믿음을 간고 나아가다 보면, 반드시 절망의 시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닌가 봐!” 하는 때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시기가 하나님이 우리를 주목하는 시기입니다.
[정말 믿느냐? 안 믿느냐?]를 결정할 때이기도 합니다. 불확실하지만 억지로라도, 우겨서라도 믿음의 길을 계속 가야 할지, 아니면 돌이켜 세상길로 가야할지를 결정하는 시기입니다.
여러분! 이 때 믿음으로 계속 나아가면, 말씀대로 크신 축복을 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추석, 당일치기로 처가댁에 다녀왔습니다. 11일 새벽, 새벽기도회를 끝나고 출발해서, 처가댁에 머물다가, 밤 11시 30분에 김해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남해 고속도로를 타고 잘 오다가, 그만 [지수]애서부터 차가 꽉 막히는 겁니다. 그래서 국도로 가기로 하고 톨게이트에서 요금 징수원에게 물었습니다. “마산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요?” 그랬더니 대답이 “우회전하고, 좌회전하라.”는 겁니다.
좌회전해서 가는데, 3거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앞서 가는 모든 차들이 좌회전하지 않고 우회전하는 겁니다. 분명 앞차들도 마산으로 가는 걸텐데 말입니다. 잠시 갈등 끝에 징수원 말대로 좌회전 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약 30분을 가는데, 이거 아무래도 길을 잘 못 든 것 같습니다. 지방도로인데, 왕복 2차선인 길이, 어느 곳에서는 왕복 1차선입니다. 산 속 길을 가기도 하고, 또 고속도로 밑으로 뚫린 터널을 3번이나 왔다갔다하는 겁니다. 고속도로가 안 보이면, “이것 잘못 들어선 것 아닌가?”하면서 차를 돌릴까 생각도 했습니다만, “징수원이 일부러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하면서 믿음으로 갔습니다. 정말 이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걸어가세. 믿음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한 참을 가는데, 큰 길이 나오고, 다른 차들이 보이는데,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이제 틀려도 같이 틀리는 동지가 생긴 겁니다. 그리고는 함안에 이르러서 아는 길이 나오는 겁니다.
의심은 갔지만, 믿음으로 그냥 끝까지 갔더니 목적지가 나오고, 결국 4시간 만에 집에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도 할 수 있었구요.
여러분! 먼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깨달아 알게 됩니다.
✝ 날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겠습니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으로 함께 합심해서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1예수님을 배척한 유대 종교가와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요10:37-42
2003-01-08 15:57:42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는 동시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임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 시대의 유대 종교가는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대 종교가를 피해 세례를 받으신 요단강 건너 유대 광야에 계실 때, 구원을 사모하고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은 많은 백성들은 주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현재 복음을 대적하는 많은 종교 지도자가 있는 반면, 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오직 말씀(성경)이 필요할 뿐입니다. 성경이 널리 전파된 지금, 하나님은 더 이상 이적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의 이적을 경계하고 말씀을 사모함으로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설교 내용
지난주간까지 계속되는 하계 수양회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시고 수고를 많이 하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 수양회에 약 7천명이 모였습니다. 참으로 적당하게 하나님께서 구름을 가리워서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시고 그렇게 무덥지 않도록 해 주셔서 걱정한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고 큰 어려움 없이 두 번째 수양회를 은혜 가운데 잘 마쳤고 이번에도 새로이 구원받으신 분들이 많으시리라고 믿습니다. 남은 수양회에 하나님이 더욱 역사하시고 새로이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해 주시고 수고를 많이 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요한복음을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학교에서 정한 교과서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하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이 교과서이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많은 말씀을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과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무엇인지 그런 일들을 우리가 계속 배워야 되고 배울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성경은 교리나 이론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말씀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역사 속의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이루어가시고 하나님의 모든 일이 완성되는 날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있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에 우리가 함께 참여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히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임으로 2천 년이란 긴 역사 속에 그 민족이 얼마나 비참한 저주와 형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고 열심히 교회 다니고 종교생활을 하지만 또 성경도 배우지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상숭배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얻을 뿐 아니라 그때부터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의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 됩니다. 성경대로 구원을 받아야 되고 성경대로 살아야만 성경대로 천국에 갑니다. 몸뚱아리는 교회당에 왔다갔다 하는데 마음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고 생활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면 물론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신을 가질 뿐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받은 사람 속에 성령을 주셔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다스려 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역사하셨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믿으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이루신다고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가신 후에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잖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2장 6절에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제 주님이 우리 안에 게시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으로 연합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셨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합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받아 한 몸이 되었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런 말씀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성령으로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고 예수님은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가 합해서 몸이고 우리 개인은 그 몸 안에 붙어있는 각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몸을 주장하시는 분은 머리고 몸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은 머리되신 주님이십니다. 머리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명령하는 것을 몸이 실행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처럼 머리되신 주님의 뜻을 우리가 깨달아 알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행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가운데 주님이 행하시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깨닫게 할 뿐 아니라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을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따라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을 따라서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옛날 이스라엘 땅에 다니시면서 하신 말씀과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 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그대로 계시고 그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 가운데 그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배울 때 그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 옛날 육신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을 다니시던 주님 오늘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행하시고 또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 우리가 그 옛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오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주님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나라로 영접해 주실 주님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과거 주님은 믿고 다시 오실 주님도 믿는데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잖아요 과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믿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나라로 영접하실 주님을 믿는다면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으로 그것이 연결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 지금 성령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 장차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영접해 주실 주님 그 모든 것이 연결이 되어야 됩니다.
이제 읽을 말씀에 요한복음의 긴 내용 속에 마지막 부분인데 9장에서는 예수님이 소경된 자의 눈을 열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 눈을 열어주심으로써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날 때부터 영적 소경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참으로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앞에 계신 메시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주신 선한 목자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이제 선한 목자같이 양떼를 인도하시는 주님 우리를 멸망받을 운명에서 건져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 그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저희는 나를 알며 나를 따르느니라 목자는 양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그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조금 전에 찬양대에서 찬송 불렀잖아요 주님을 따라 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라가는 생활 교회당에 왔다 갔다 하지만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활이 날마다 주님께 배우고 주님을 본받고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과 운명을 함께 하는 그것이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우리가 따라가느냐 주님을 볼 수는 없지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계속 우리에까지 메아리쳐서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먼저 진리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서 입을 통해서 계속 그 다음 사람에게 계속 메아리치는 것처럼 우리에게 전달되고있고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도망하느니라 주님의 음성인지 타인의 음성인지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역사 중에 하나님의 역사도 있고 마귀의 역사도 있다는 것 아시지요? 마귀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과 이간시키고 사람을 미혹시켜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만 마귀가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 속에도 마귀가 끈질기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 제사장 그리고 율법사 바리새인 서기관들 종교가들 속에 무엇이 역사했습니까 마귀가 역사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종교가들한테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그것은 뭐냐 하면 욕한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마귀가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인간이 범죄하자마자 하나님께서 그 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 뱀의 후손이라는 것은 훗날 이스라엘 종교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스라엘 종교가들 속에 역사해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여인의 후손이라는 것은 처녀의 몸에서 나실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한다는 말은 마귀가 종교가들 속에 역사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인 것은 발꿈치를 상한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발꿈치를 가지고 뱀의 머리를 깨버린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놓고 이겼다고 만세를 불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마귀가 인간을 타락시키고 지옥에까지 끌고 가려고 하는 그 마귀의 모든 계획과 죄와 죽음의 권세를 예수님이 십자가의 권세에서 깨뜨려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이 죄의 권세와 마귀의 모든 계획과 죽음의 권세를 다 깨뜨린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뱀의 머리를 깨뜨린 것입니다. 그것이 뱀의 머리를 깨뜨린 것입니다 그 뱀 속에 역사해서 하와를 꾀고 아담을 넘어뜨렸던 마귀는 이스라엘 종교가들 속에 역사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 속에 그 거짓의 아비, 마귀 살인자 처음부터 살인한 자 그 마귀는 가인 속에 역사해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뱀을 통해서 하와를 넘어뜨렸고 아담을 넘어뜨린 마귀는 첫 번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받으신 그 아벨을 가인 속에 역사해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 마귀는 유대 종교가들 속에 역사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마귀는 끈질기게 역사했습니다. 사도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해서 곳곳에 쫓아내버리고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고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지만 그 핍박을 통해서 복음은 더 힘있게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쫓아내니까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쫓아내니까 가는 곳마다 마치 불똥이 튀어서 계속 더 빨리 그 불이 다른 곳으로 번지는 것처럼 그 복음이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에까지 힘있게 전해진 것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역사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더 큽니다. 하나님은 더 큰 역사로 자기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마귀가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면서 끈질기게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대적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 마귀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마귀도 함께 역사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마지막에 마귀를 잡아서 무저갱에 집어넣는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마귀를 대적하든지 아니면 믿는다고 하면서 잘못하면 마귀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배우고 있는 요한복음을 쭉 보면 유대 종교가들은 예수님을 계속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그랬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지 않았으면 예수님은 목숨이 열 개 백 개라도 모자랐을 것입니다. 벌써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실 자리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때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에게 손을 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생을 주신다고 그리고 내 손에서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다고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사람이 되어가지고 자기를 하나님이라 한다고 참람하다고 이 사람은 살려둘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이라고 했고 지존자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하나님이 거룩하게 해서 보낸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그것이 참람하다고 하느냐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나를 믿지 않을 지라도 내가 한 그 일을 보고 나를 믿으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나를 믿으라 내가 행하는 그 일을 너희가 본다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보면 바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마지막 역사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을 믿습니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시고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많은 말씀을 하셨을지라도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가 없다면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인지 아니면 정말 거짓 선지자인지 거짓말쟁이인지 우리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시고 사십일 동안 살아나신 증거를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알지도 못하고 그를 믿지 못했습니다.
물론 유대인 중에도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 중에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리스도가 주가 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가슴을 치면서 그러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그리스도를 죽였으면 우리가 어찌할꼬 그러면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그래서 오순절에 3천 명이 구원을 받고 5천 명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있고 주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마귀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9절에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실 때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해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잡아 끌고 가서 돌로 쳐죽일 때는 저 골짜기로 내려가서 많은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누가 죽인 줄도 모르게.
예수님은 때가 되기 전에는 자신을 죽는 데 넘겨주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잡고자 하는 자를 돌로 치고자 하는 자들을 피해서 벗어나 나가셨습니다.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완전히 앞에 있는 말씀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고 완전히 다른 사건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 자기를 대적하고 돌로 치려는 사람들을 피해서 저 한적한 곳에 갔습니다 요단강 저편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3년 반 전에 예수님이 30세가 되도록 한 가정에서 요셉의 가정을 빌어서 목수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사람은 30세가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성숙한 시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것을 갖추었을 때 30세가 되었을 때 요단강가에 가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세례요한은 예루살렘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입니다 제사장의 아들은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바치면 레위지파는 십일조 중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칩니다 레위지파 중에서 도 아론의 자손이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책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입니다 백성들이 바치는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받아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자기 집과 같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특별한 옷을 입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존귀와 영광을 받으면서 제사장 직분을 행할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거짓된 종교가들 타락된 종교가들을 떠나서 저 요단강가 그 광야 빈 들판에서 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특별히 보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는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오시기 6개월 전에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먼저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모태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요단강가에서 약대털옷 하나 걸치고 가죽 허리띠를 매고 메뚜기를 잡아먹고 의식주를 완전히 자연에 의지해 버렸습니다 그는 거짓된 종교가들의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종교가들의 모든 것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그는 야인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엘리야 같이 빈 들판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역사했고 그는 외쳤습니다. 회개하라고 천국이 가까웠다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에서 요단강 사방에서 나와서 세례요한에게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에게 나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성령이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했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그이가 누구든지 성령이 그 위에 임하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고 알라고 하셨기에 내가 보고 증거하노라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나가야 할 텐데 당신이 내게로 나옵니까 당신이 내게 세례를 받으시다니요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지요 세례라고 하는 것은 죄인이 죄를 향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산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준 세례는 당시 거짓된 유대종교 속에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자기들이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구원의 세례는 아니고, 죄 없는 사람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이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게 되었느냐 예수님은 죄 없이 나셨고 그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분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키는 분이고 완전히 의인입니다. 그러나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대표로 범죄해서 그 죄와 죽음을 이 세상에 가져왔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으로서 의인으로서 온 세상 죄를 걸머지고 죽으심으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치고 온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죄인처럼 된 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 삼았다는 말씀처럼 하나의 죄인처럼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세례를 받은 것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물에 들어가신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장차 부활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지내고 부활하실 것을 요단강에서 미리 보인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의 3가지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10장 이 때는 3년 반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고 이제 그 역사를 마무리지으려고 하는 시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치려고 노골적으로 잡아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죽으실 날이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3년 반동안 예수님이 처음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던 그곳 세례요한이 거짓된 종교가들을 떠나서 외치던 거기에 많은 사람이 세례요한을 따랐던 그곳 예수님도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종교가들을 떠난 광야입니다. 한적한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모여서 세례요한에게 나온 것처럼 그 세례요한은 이제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후에 목잘려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거기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요단강가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단강 건너편 그 광야에 예수님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않았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이적을 보이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보였지만 유대 종교가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는데 이제 요단강 건너편에 유대 광야에 예수님이 가셨을 때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한 것은 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대종교가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완전히 다른 광경이 나타났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 종교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많은 백성들이 그리고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세례요한이 증거한 예수님 그들은 3년 반 동안 지켜봤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는 것을 백성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거짓된 종교에서 벗어나서 정말 광야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소리를 하면서 회개하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 앞에 보냄을 받은 자다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그의 길을 예비하라고 그리고 예수님을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했는데 그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은 사람들이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지켜봤을 것입니다.
지켜 보았더니 과연 그가 증거한 것이 사실이다 참이다 그래서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구원을 사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간절히 진리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세례요한처럼 거짓된 유대 종교가들의 거짓된 것을 보고 염증을 느끼고 떠난 사람들입니다.
유대종교가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아주 중요한 교훈을 가르칩니다.
누가복음 7장 29∼30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백성은 모든 백성을 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숫자를 모든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세리들 죄인들 창기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리라는 말씀대로 그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롭다 했다는 것은 그 말씀이 옳다고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가에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고 세례를 줄 때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나왔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리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더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이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지리라 유대 종교가들에게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지옥 안 갈 줄 아느냐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할 줄 아느냐 못 피한다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택한 백성이라고 자랑하지 말라 그까짓것 돌멩이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자손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서 불에 던질 것이라고 했으니 유대 종교가들이 세례요한을 얼마나 미워했겠어요 그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느니라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고도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보았고 부활하셨다는 그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무덤을 지키다가 예수님 시체가 없어지고 천사들이 나타났다는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군병들에게 돈을 주어가지고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라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들 얼마나 마음이 강퍅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 엄연한 진리를 스스로 대적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게 바로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그것을 누가 하느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종교가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이 백성들 세리들 죄인들은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요한의 증거와 예수님의 말씀은 동일하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죽었지만 그가 한 말씀은 3년 반 후에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요단강 건너편 외로운 곳 쓸쓸한 광야에 가셨을 때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고 예수님과 교제를 했습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 계속 이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대적하는 많은 종교가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종교가들이 있을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 시대도 그렇고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그 일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가짜 기독교 종교가들 그들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귀신을 내쫓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뒤를 따라 갑니다. 그러나 또 한쪽에서는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사람들 그들은 똑같이 종교가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들에게 쫓겨나기도 하고 그러나 바로 영문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밖 골고다 언덕 십자가는 유대 종교가들에게 버림받은 영문 밖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 종교가들에게 버림받은 곳입니다.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그곳으로 가야 됩니다 영문 밖으로 가야 됩니다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가야 됩니다 영문 밖 골고다길 종교가들에게 쫓겨난 자들 핍박받는 자들 종교가들에게 미움받는 곳 외로운 곳 쓸쓸한 곳 그러나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가 이 장면을 자세히 연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의 유대 종교가들 많은 제사장들과 율법사들 거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했습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필경 유대인 왕으로 나신 이가 여기 있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이 같으면 예루살렘 왕궁에 났을 것이라고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잘못 찾아왔습니다 별은 베들레헴으로 우리를 인도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유대 땅 베들레헴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나신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양 잡아서 죽인 곳입니다 베들레헴은 양을 기르는 곳입니다. 그 옛날 다윗이 양을 치던 곳입니다. 그 베들레헴에 가서 구유에 나신 예수님 물론 예수님은 구유에 나셨고 동방박사들이 찾아갔을 때는 구유는 아닐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 베들레헴 땅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누가 예수님께 경배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큰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예수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다른 곳에 계신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예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13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예루살렘 성밖에 골고다 산에 그곳이 영문 밖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한 장소 거기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예루살렘 성밖에 골고다 언덕에 가자 그것이 아닙니다. 종교가들에게 미움받은 자리 쫓겨난 자리 배척당한 자리 그 영문 밖에서 능욕을 지고 고난을 짊어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도시대에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 종교가들은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그들을 핍박하고 대적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8∼10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이것은 바울사도가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그 당시 유대인 회당이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강론하고 권면하되 그중에 어떤 사람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했다 바울을 대적하고 공공연하게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를 대적하는 무리를 떠나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사원이란 곳에서 요즘 독서실 비슷한 곳 같습니다 두 해 동안 에베소에서 많은 사람이 와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적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을 떠나서 따로 모이면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대적하는 것을 피해서 외딴 곳에 따라 말씀을 전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큰 종교단체 안에 외형적으로 엄청나게 큰 교회당 안에 하나님이 역사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엉뚱한 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다시 돌아가서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세례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다 성경에 보면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세례요한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많은 선지자들이 있지만 모태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로 남의 감기 하나도 못 고쳤습니다.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 성령이 충만한데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 너희가 요단강가에 무엇을 보러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는 것이냐 옳다 선지자보다 큰 자니라 세례요한은 모든 선지자보다도 더 큰 자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이스라엘 역사 중에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크다는 말입니까 키가 커서 크다는 말도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모세와 같은 사람들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큰 기적을 행했습니다 엘리야 그는 또 얼마나 큰 능력을 행했습니까 그리고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사람입니다. 엘리사도 죽은 사람을 살리고 엄청난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아무 이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세례요한이 모든 선지자보다 큰 자입니까 선지자의 사명은 이적을 행하는 것이 사명이 아니고 모든 선지자들은 멀리서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 가운데 일으키리라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왕의 세력에서 애굽에서 구원했듯이 이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는 마귀의 권세에서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는 1600년 전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했습니다 혹은 천 년 전에 700년 전에 400년 전에 그리스도를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기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자기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직접 가리키면서 증거했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가장 놀라운 사명입니다.
달이 다른 별들보다 커서 큰 것이 아니라 지구에 가장 가까우니까 크게 보이는 것처럼 세례요한이 특별한 일을 해서 큰 이적을 행해서 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증거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자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이적을 행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도 않고 이적을 행해서도 안됩니다 왜 안되느냐 구약시대 이스라엘에 나타난 이적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많은 이적이 있지요 그것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한 다음에 선지자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하나님을 증거하러 온 사람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러 온 사람이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이적을 행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적으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는 이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이 사람에 대하여 말한 것은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요한복음 5장 39절에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말씀 구약성경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을 대표로 와서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이적으로 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아무 이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이적을 봤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가룟유다는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보았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는 것도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이적을 통해서 믿을 것 같지만 죽었던 사람이 벌떡 살아나는 이적이 나타나도 그것 가지고는 구원 못 받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적에 대한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적이란 문제에 혼란이 일어납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적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적도 있고 마귀가 역사하는 마귀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이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적이 나타나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적이 나타나는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이 시대적으로 나타나는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구분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구분하면 앞으로 이적에 대해서 의문이 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나타난 이적,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많은 이적이 나타났지요 구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14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시니 하나도 없더라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올바로 찾는 지각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시대가 있었는데 창세기 11장 바벨탑을 쌓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타락하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상태에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기억 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하나님을 떠난 때가 그때입니다 그 대신에 우상숭배하는 일들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인간은 영영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담 하와가 죄를 짓고 숲속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인간을 또 한번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던 그곳에서 우상숭배하는 가정에서 한 사람을 불러내셨는데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무조건 불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탑을 쌓던 곳에서 떠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그 자손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민족이 바로 복의 근원이 된다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역사 속에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고 망하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았고 고대 이집트가 망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앗수르가 망했고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았던 바벨론 제국이 망했고 유대인을 전 세계에 흩어버린 로마가 망했습니다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던 나치독일이 망했습니다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면 이스라엘이 그 땅으로 돌아가게 하리라는 약속대로 1948년에 이스라엘은 독립했고 이스라엘이 독립하자마자 전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이 모여오고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없애보려고 다섯 차례나 이스라엘과 큰 전쟁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흩어버린 사람들이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자들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들은 저주받는다고.
지금도 이스라엘을 없애보려고 하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전 세계의 유대인들 다 모여봐야 1500만 명밖에 안 되는데 전 세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미워합니까 그 중에서 지구상에 13억이나 되는 회교도들 모슬렘들은 이스라엘과 철천지 원수지간입니다 금방이라도 없애보려고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지구상에 없어지면 이 성경은 거짓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는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감히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겠지요 마지막에 중동전쟁이 일어날 때 북방 러시아가 이스라엘을 치러 간다고 했는데 이스라엘을 치는 것과 동시에 그 나라는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는다 개인적으로도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한 나라 중에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입니다 이차대전 당시에 유럽 곳곳에 서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때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죽일 때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옛날에 유럽에 특별히 독일에 유대인 과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전부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노벨 상 받은 사람들이 원래는 저쪽에 많았는데 전부 미국으로 갔습니다. 아인쉬타인도 잡아라 하니까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미국은 유태인의 피난처가 되고 낙원이 되었습니다 600만 명밖에 안되는 미국의 유대인들이 정치·경제·문화·매스컴 미국의 온갖 세력을 그들이 거머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할 수밖에. 우리가 이것도 아셔야 됩니다 미국을 만만하게 보면 안됩니다 미국이 금방 망할 것 같지만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미국이 망하려면 300년이 걸려야 망한답니다 미국 가보면 압니다 엄청난 나라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일본이 미국을 건드렸다가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고나서 야마모도 일본대장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잠자는 거인을 깨웠다고 했습니다 `도라도라도라`라는 영화를 보셨어요?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서 옛날에도 봤는데 또 봤습니다. 마지막 잠자는 자이언트를 깨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보호한 덕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인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시고 우리 영혼이 구원받는 복이 이스라엘 땅에서 온 세계에 전해질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특별히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큰 이적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일부러 애굽에 집어넣고 400년 동안 애굽의 종이 되게 하고 애굽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요셉을 보내서 애굽이란 나라를 특별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애굽을 그렇게 크게 만든 분도 하나님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그때 애굽 문명이 최고로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7년간 흉년이 들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내려가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400년이란 긴 역사 속에 애굽사람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느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그들을 건져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통과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이끌어들이고 하나님 말씀이 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했습니다.
신명기 4장 32절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4절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능력을 행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세력에서 끌어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통과하게 하고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 땅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애굽에서 너희 보는 데서 행한 일이라 이것을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고 그리고 많은 이방인들이 우상숭배하는데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은 다 거짓이고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여호와만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려면 이것은 말로 안되잖아요 어떤 신도 행하지 못한 이적을 보여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이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역사를 다 압니다 구약성경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책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낸 것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때 또 한번 전 세계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400년 동안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거기서 끌어내서 가나안 땅으로 끌어들이고 7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고 그 나라를 세우게 한 그 기적보다 훨씬 더 큰 기적이 1900년 동안 흩어졌던 유대인들을 마지막 다 죽어없어진 줄 알았던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다가 그 땅에 들어가서 강대한 아랍을 물리치고 그 땅을 뺏어서 옥토로 만들어서 강대한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잖아요 그것은 훨씬 더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전 세계에 있는 유대인을 이스라엘 땅에 모이게 한 것은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것은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또한번 큰 기적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이방여자 이세벨이란 여자를 데려다가 왕비를 삼았는데 이세벨이 바알 아세라 신이란 우상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그 바알신에게 제사를 했습니다. 성전 안에 있는 제사장을 죽여버리고 성전에 바알신을 떡 하니 갖다놓았습니다 바보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 하나님인지 여호와가 하나님인지 몰랐습니다 바알이 새 하나님인가보다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3년 반 동안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회개를 안 하는 것입니다 못 깨닫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났습니다 아합왕이 엘리야를 만나면 죽여버리려고 찾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알신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하겠다 그러면 바알이 하나님인지 여호와가 하나님인지 한번 시합을 해 보자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850명 몽땅 갈멜산 위에 모아라 물론 백성도 다 모아라 송아지를 잡아서 벌여놓고 기도를 하고 어느 쪽이든지 불이 내려와서 사뤄가는 그쪽이 참 하나님이다 백성들이 옳도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 이 바보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아 아직도 여호와가 하나님인지 바알이 하나님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어찌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느냐 너희가 숫자가 많으니까 먼저 시작해라 그래서 바알과 이세라신 850명이 먼저 송아지를 잡아놓고 기도합니다 바알이여 바알이여 응답하옵소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엘리야가 바알이 낮잠자는가보다 더 크게 하라 변소갔나 나들이 갔나 모르겠다 더 크게 해라 바알이란 신이 있어야 응답을 하지 그만해라 죽을 때까지 해도 없으니까.
엘리야가 장작을 갖다놓고 도랑을 파고 송아지를 잡고 물을 철철 넘치게 부어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여호와께서 하나님인 것과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모든 백성들이 알게 하옵소서 불로 응답하옵소서 하니까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제물을 사뤄서 도랑물까지 다 올라간 것입니다
백성들이 엎드려서 여호와가 과연 하나님이시로다 이 바알 선지자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다 기손시내에 끌고가서 돌로 쳐죽였습니다. 만일 그때 불이 내리지 않았으면 엘리야가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을 하나님께 돌려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기적입니다. 그 많은 이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선지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했습니다. 약속대로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와서 뭐라 했습니까 여보시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표적을 보여주시오
마태복음 12장 38∼40절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뭐 그렇게 표적을 보여달라는데 악하고 음란합니까 이상하지요 이것이 뭔지 아세요아버지하고 실컷 같이 살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아버지가 진짜 제 아버지라면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내가 3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릴 테니까 제 아버지라면 결사적으로 저를 안아서 다치지 않게 해 주셔야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뭐라 하실까 오냐 그러자 하겠어요 이 죽일 놈 뭐야 아버지라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이런 악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 표적을 보여주었어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어야지 또다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요한복음강해-54 /요10:29-42
2011-01-21 15:07:00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거든'
오늘 말씀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에게 주어진 양들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으시거든 믿지 말며, 만일 그 일을 하시거든 주님은 믿지 않아도 좋지만 그 일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곤고한 일을 당했을 때 요한이 처음에 세례를 주었던 그 곳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르셨습니다.
1. 주님의 손에 붙들린 양들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29-30절).
요 10장은 유명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좋으신지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런 목자가 돌보는 양들은 안전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그 양들을 주님의 손에서 뺏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런 주장을 하시는 데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①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 양들을 맡기신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십니다.
양들을 돌보라고 주님께 맡기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리떼나 그 어떤 무서운 세력들이 위해(危害)를 가해도 끄떡없이 막아내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양들을 주님께 맡겨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양들의 안전에 대한 확신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확신'(self-confidence)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에 대한 확신'(God-confidence)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능력으로 양들의 안전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함으로서 보호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양들도 목회자들이 인간적으로 얻은 양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양들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을 돌볼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은 목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양들을 맡겨주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② 선한 목자되신 주님과 양들을 맡겨주신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라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복잡합니다. 흔히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HOMOOUSIA,' 동일본질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성부의 본성과 성자의 본성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이 하나라는 주장이지요. 그러나 이런 난해한 주장들보다 가장 손쉽게 성부 성자의 일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두 분 사이의 관계의 일치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순종의 일치로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사랑의 일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랑의 일치는 순종으로서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하나님 아버지 역시 아들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유대성은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는데 아들 하나님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일치는 완벽한 사랑과 완벽한 순종의 일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순종으로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사람들이 주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하신 말씀 때문이 아니라 하신 일 때문입니다(31-39).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라고 주장하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감히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주장은 신성모독죄가 되기 때문이었지요. 레 24: 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신성모독죄는 투석형(投石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율법입니다.
돌을 들어 치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세 가지 주장으로 맞섰습니다.
① 주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서 선한 일을 많이 했는데 무슨 일로 돌을 들어 치려느냐는 것입니다(32절).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주셨고, 허기진 자들을 먹이셨고, 슬픈 자들을 위로해주셨습니다.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선한 일을 하셨던 것이지요. 선한 일을 했으면 상을 주어야지, 거꾸로 돌을 들어 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셨습니다.
② 주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유대인들은 즉시 대꾸합니다. 33절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했기 때문에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죄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34-35절을 보세요. 유대인들의 반박에 대하여 예수님은 먼저 시 82: 6을 인용하시면서 대응합니다. 시 82: 6 말씀을 다 찾아 읽읍시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예컨대 재판관은 하나님으로부터 판관으로서 부르심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재판관은 하나님을 대신한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지요.
이와 같이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으로부터 특정한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신한 작은 하나님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출 21: 1-6; 출 22: 9, 28 참조). 따라서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렇게 주장할 수 없느냐고 항변을 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자신이 특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성별(聖別)된 분이라고 주장하십니다. 36절 말씀을 보세요.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이나 어떤 장소, 어떤 시간을 보통 것들로부터 따로 떼어놓아 성별시키는 것이지요. 예컨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성별된 사람들입니다(대하 26: 18; 렘 1: 5 참조). 제단은 성별된 장소입니다(레 16: 19). 안식일은 거룩한 날로 성별된 아주 특별한 시간입니다(출 20: 11).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보통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성별되어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거룩해진 분도 아니며 스스로 이 땅에 오신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지신 분이시며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말은 결코 참람하거나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런 주장을 펴신 다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결론이 중요합니다. 37-38절 말씀을 보세요.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말만하시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행하시지 않을 경우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 마디 말보다 소리 없는 하나의 행동이 무섭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다는 주장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룩하고 선한 행위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는 표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현란한 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실천적 모습이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을 보여줍니다.
3.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은혜 받았던 첫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40-42).
예수님의 주장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민하게 그들의 손을 벗어나 피하셨습니다.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상황을 잘 모면하셨던 것이지요. 그런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요단강 건너 쪽 요한이 처음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서 그 곳에 머무르셨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받으셨던 곳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던 곳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 17).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소명의 장소였지요.
예수님은 곤고한 일을 만났을 때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바로 그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사람들과 씨름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먼저 씨름하시려 했던 것이지요. 야곱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났을 때 베델로 되돌아갔던 것과 마찬가지였지요(창 35: 1-5).
그렇습니다.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할 때 처음 은혜 받았던 그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곳에 쉼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재충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
요한복음 강해-29/ 대화가 필요해 /요10:22-42
2018-11-01 14:27:24
kbs 인기 개그 프로 중에 <대화가 필요해> 코너가 있다. 과거 인기 개그프로였는데 요즘 보니 다시 방송되고 있더라...그만큼 재미를 선사했던 프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개그가 웃음을 준 이유는? 대화를 하기는 하는데 엇박자 대화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보면 엇박자 대화가 많다. 그런데 그 엇박자를 보면서 우리는 웃을 수가 없다. 오히려 서글퍼진다. 왜냐? 그 엇박자가 천국을 놓치는 엇박자이기 때문이다.
<본문>
오늘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유대인의 명절 중에 수전절이라고 있었다. 수전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이다.
수전절이란?
기원전 164년 그리이스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황제의 우상숭배 강요정책에 대항하여 유다스 마카비우스 형제들이 주동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20년간의 게릴라 전을 통해 유대왕국의 독립을 다시 찾은 다음 성전을 깨끗이 하고 8일동안 불을 밝혔는데, 이를 기념하는 축제일이 수전절이다.
안티오커스라는 왕은 특히 유대인들을 싫어했다. 증오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안티오커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8만명의 유대인들을 죽이고 노예로 팔았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할례를 행하는 엄마가 발견되면 목에 아이를 매어서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한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줄 뻔히 알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피로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일부러 성전을 모욕한 것이다. 그래서 마카비우스 형제들이 목숨걸고 항전하여 독립을 쟁취하고 성전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 수전절이었던 것이다.
수전절은 성전을 회복한 기념일이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독립기념일과 같은 광복절이었다. 유대인들이 기원 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린 이후 약 450년만에 독립을 하고 성전을 깨끗하게 회복한 날이 수전절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제하에서 36년만에 독립을 하고 얼마나 감격하였나? 그런데 유대인들은 450년만의 독립이었으니 엄청난 감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이 수전절을 성대히 지킨다고 한다.
이 수전절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항의 하였다. “우리를 좀 헷갈리게 하지 말고 분명하게 얘기해주쇼! 당신이 그리스도요 아니요?”(24절의역) 그러자 예수님이 답한다. “내가 이미 다 얘기했는데 너희가 믿지 않는거다!”(25절의역)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고 예수님은 ‘이미 밝힐만큼 밝혔다. 문제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계속해서 대화가 엇박자가 되고 있다.
그리고는 주님이 말씀하신다. (25하-26)“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즉 예수님은 “너희는 내 말도 믿지 않고 있고, 내가하는 행위도 믿지 않고 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셨기에 행하는 일들이다. 너희들이 내 말을 믿지 않고 내 행하는 행동도 믿지 않는 것은 너희는 내 아버지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엇박자 대화가 되는 이유?
1.하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지난 주일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양의 유일한 장점 하나? 자기 목자의 음성은 기차게 알아듣는다고 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비유에 비추어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가 깊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므로 내 양이 아니라”고 말했는가? 아니다. 주님은 정반대로 말씀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이 말은 어려워보인다...그러나 사실 어렵지 않다.
사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듣고 순종하는 것이지....듣고 순종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예) 여러분이 부모를 믿는다....그리고 부모의 말을 순종하고 따른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부모의 말을 순종하고 따르니 (그후에)부모들이 여러분을 자녀로 인정하고 자녀로 대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먼저) 자녀를 자녀로 인정부터 하고...부모가 낳았기 때문에...자녀로 대해주는 것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이것을 자녀의 입장에서 보자....부모가 나를 대해주는 모습을 분석해보니 부모답기에 부모로 인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먼저 부모로 인정부터 하고...부모로 인정하기 때문에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우리는 먼저 육신의 부모를 부모로 믿는다...믿기 때문에 부모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양이 되었기에 양이 목자의 음성은 기차게 알아듣고 순종하듯이...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양이 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먼저이다. 즉 하나님의 선택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이것은 논리적 순서이다. 선택교리를 시간적 순서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다.)
사실 믿어서 양이 되는게 아니다. 양이기에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오직 구원의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베푸는 선물이다. 그것이 사람의 눈으로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택해주신 것을 감사할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사실 엄청난 은혜인 것이다..
(예)어느 목사님 아들이 언젠가 “정말 엄마 아빠가 나를 낳았어요?” 하고 질문하더란다. 그 때 사모님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내가 데려와서 키울 수 있었으면 너같이 못생긴 놈 데려왔겠냐? 잘 생기고 똑똑하고 속 안썩일 놈 골라왔지.”...그 대답을 듣고는 다시는 그 질문을 안하더라고 한다. 즉 자녀로 낳는 것이 먼저이다. 그다음에 속을 썩여가면서도 자녀로 키우는 것이다.
즉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 택한 백성(하나님 자녀...하나님 양)으로 선택부터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하나님은 속을 썩여가면서까지...하나님 백성으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교리를 우습게 보지말라. 내 마음대로 행할 핑계거리로 삼지 말라....하나님 속을 썩일수록 여러분 인생은 피곤하기만 할뿐이다. 하나님 속 썩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순종하며 힘있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2.주님과 유대인의 관심사가 틀리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서 ‘당신이 그리스도냐? 헷갈리게 하지 말고 화끈하게 대답해주쇼?’하고 다그치는 것은 정말 그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그 질문을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유대인들 앞에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이다’라고 명확하게 밝히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언제나 간접화법으로 자신을 밝히셨다.
주님이 왜 간접으로만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밝히셨을까?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애타게 찾는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밝히기 원하는 그리스도와 달랐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은 애타게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렸지만 그들이 기다린 그리스도는 정치적 메시야만 기다렸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들이 기다리고 찾던 그 메시야이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마카비우스 혁명으로 독립을 성취하였지만 독립기간은 100년 정도 밖에 누리지 못했다. 기원전 63년에 다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버렸고 이제 로마식민지로서 세월이 100년 정도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언제 다시금 이 로마의 지긋지긋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최대의 관심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시켜줄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그리스도냐?”고 질문한 것은 “당신의 그 큰 능력으로 로마군을 물리치고 우리를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줄수 있느냐?” 하고 질문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속시원하게 대답해줄수 없었던 것이다....유대인들이 원한 것은 정치적인 해방이었고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것은 영적인 해방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엇박자 대화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가 틀렸기 때문에 엇박자 대화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같은 공간 안에 살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같은 하늘, 같은 산을 바라보며,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언어로 대화하며 살았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세계만 보고 살았다. 하지만 주님은 영적인 세계를 보고 살았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자유만을 목표로 살았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인 자유를 주고싶어 하셨다.
부부가 같은 이불을 덮고 산다고 해서 같은 세계를 산다고 할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같은 이불을 덮어도 사는 세계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관심사가 다르면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년초에 목사님이 어느 가정 심방을 갔다. 그 가정에 “이 가정에 하나님의 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하고 축복기도 하였다...남편은 ‘올해 사업이 잘되겠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반면 아내는 ‘올해 사업이 적당히 안되어서 남편이 술을 덜 먹겠구나’하고 받아들였다. 똑같은 축복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르지 않는가? 이렇게 관심사가 다르면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가?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폴 틸리히라고 하는 분은 ‘궁극적 관심’이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궁극적 관심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정의하였다. 여러분은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현실에 있나? 물질에 있나? 순간적 쾌락에 있나? 인간은 언제나 그 다음을 생각할수 있어야 한다. 봄에는 여름을 생각할수 있어야하고,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할수 있어야하고, 젊어서는 늙었을 때를 생각할수 있어야 한다. 그 다음을 생각하고 좀 더 나아가서 궁극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신앙이다. 그 관심에 이끌려서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우리 몸은 분명히 현재에 살지만 우리의 관심은 저 궁극(영원)에 있어야 한다.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 땅에 살면서 지옥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 차이는 관심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여러분의 관심은 저 천국이 되시길 바랍니다.
3.바른 하나님 경외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엇박자 대화가 계속되면서 예수님이 드디어 놀라운 선언을 하셨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씀은 정말 파격적인 말이다.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까지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았다. ‘여호와’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은 ‘여호와’ 이름이 나오면 목욕하고 나서 새 붓으로 ‘여호와’라고 적었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 전통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난데없이 하나님을 ‘아버지(아바)’라고 불렀다. 그 자체도 파격인데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분노했다....아니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해? 그래서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다.(31절)
그러자 예수님도 물러서지 않고 질문하셨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은 대답했다. ‘당신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신성모독죄를 범했기 때문이오.’(33절)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를 범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반박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율법(구약성경) 시편82편6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를 ‘신’이라고 표현한 경우가 왕왕 있었다. 구약시대 재판관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재판하기 때문에 재판관을 ‘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재판관은 신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출애굽기21장에 히브리인의 노예와 상전에 관한 율법을 설명하면서 종이 해방될 시기에 해방을 원치 않을 경우...... (출21;6)“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여기서 ‘재판장’은 원어로 ‘엘로힘(신)’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구약성경에는 재판관들, 예언자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어떤 직무를 행할 때 ‘신’이란 단어를 쓴 것을 주님은 지적하신 것이다. 즉 과거 모세를 신이라 했고, 재판관들을 신이라 했고,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라고 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보냄 받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신성모독이 될 수 없지 않느냐고 설명하신 것이다.
지금 유대인들은 마카비 시대에 성전을 다시 거룩하게 구별한 수전절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주님이 성전에 왔는데...주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그 성전에서 쫏아내려고 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사실은 하나님께 가장 불경건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자신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불려지고, 자신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불려지기를 바랐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가르치셨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하나님을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또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다.
(요20: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즉 하나님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불려지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즉 신적인 존재로서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즉 우리가 이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는 그런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서로 대화가 통할려면 관심사가 같아야 한다. 관심이 다르면 엇박자 대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예수님은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엇박자 대화만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 지시려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하려고 오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관심이 죄문제가 아니라 육신의 문제였기 때문에 주님을 알아볼수도 없었고 말이 통할수 없었다. 그들에게 관심은 온통 육신이었기 때문에 영혼의 문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눈뜬 소경들이었다.
하나님 경외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성전에서 사람들을 쫓아내기만 하고...‘누가 신성모독하는가? 하고 살피기만 하는 것이 참된 경건인가? 그것은 북한식 경건이다. 북한을 보라....김일성이 신이다. 김일성 사진이 들어있는 돈을 중간에 반으로 접을수 없고 삼등분해서 접어야 하고....신문에 김일성 사진이 있으면 깔고 앉으면 안되고...집에 불이 나도 사람 먼저 안구하고 김일성 사진을 품에 안고 나오면 영웅 취급해주고...그게 북한식 경건이다....그래서 국민들은 굶어가는데 돈 들여서 미사일 개발이나 하고 있다.
참된 경건은?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 이름 부르도록 하고...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영혼 사랑하고 영혼 구하는 것이 참된 경건인 것이다.
왜? 사람은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이 땅만 쳐다보고 사는 삶이 아니라....하늘을 쳐다보고 살아야 한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사람이 신적인 존재인줄 알고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바른 경건인 것이다. 여러분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는 참된 경건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렇게 유대인과 주님의 대화가 엇박자 대화가 되는 이유?
1.하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주님과 유대인의 관심사가 틀리기 때문이다.
3.바른 하나님 경외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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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다 /요10:40-42
2015-04-14 17:18:00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예수님을 신성모독 했다고 돌로 쳐서 죽이려는 유대인. 수많은 기적과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평행선을 그리며 가는 완악한 사람으로 둘러싸여있다.
아무런 결실이 없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은 다른 것 할 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시기로 하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생의 숨을 고르신다. 마음을 추스린다. 영혼을 돌보신다.
예수님은 거기에 가신다. 거기에 머무르셨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예수님은 거기서 다시 시작하신다. 거기는 어디인가?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거기란 어떤 곳인가?
처음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예수님의 공생애(공식적 생애)는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된다. 다시 그 출발선으로 가신 것이다. 세례받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마 3: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무슨 의미인가? “나는 너면 된다. 나는 너로 충분하다. 나는 너로 충만하다”
사역의 이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은 그대로이다. 변함없다. 하나님의 사랑이면 얼마든지 고난의 십자가로 걸어가신다. 잠시 멈춰서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들이키신다. 채우시고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면 되지 않는가? 신자로 믿음으로 살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아주신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이 더 필요한가?
하나님의 사랑만이 나를 새롭게 한다. 그 사랑 안에 거하라. 믿으라. 거기에 머물라.
하나님이 당신 자체를 기뻐하신다. 거기서 다시 시작하라.
예수님이 가신 거기는 어디인가?
2. 지음(知音)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예수님은 나오지도 않는다. 요한이란 이름만 3번 나온다. 요한이 누구인가? 예수님의 지음이다. 지음이 무슨 뜻인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유일하게 알아보았던 사람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같은 데 생수와 같은 사람이었다.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유대인과 다른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 없이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세례요한의 존재이유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머무신 곳은 요한이 세례베풀 던 곳이다. 즉, 요한이 사역하던 곳이다.
왜 여기에 머무르셨는가? 마음 둘 곳 없는 주님. 요한을 생각하신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발대로서의 역할과 들러리의 역할에 충성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에는 참수형으로 마친다.
그러면서도 세례요한은 무슨 말을 하는가?
“주님 저는 주님의 신발 끈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주님은 흥하여야 하고 저는 쇠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 저는 주님이면 됩니다. 주님께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쓰임 받은 것,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에게 생을 전부 송두리째 드린 사람, 세례요한. 주님의 마음을 알고 충성한 사람. 요한은 이미 죽어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죽이겠다고 돌로 치는 유대인들 틈 속에서 그들만 바라봐서 되겠는가? 그들만 생각해서 되겠는가? 세례요한같은 충성된 종이 있는 것을 생각하며 주님을 힘을 내신다. 이런 사람 한 사람이면 족하지 않은가?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이 땅의 무너지고 흐트러진 삶의 기초들
다시 성벽을 세우며 역사의 새 시작을 무릅쓸 느헤미야같은 사람이 어디있는지요?
지금 그 사람이 그립습니다.
주님!
막힘과 탄식이 넘치는 작은 사람들
하늘이 녹은 눈물로 마음을 적시는 예레미야같은 사람이 어디있는지요?
지금 그 사람이 그립습니다.
주님!
고난과 위험에 노출된 한계의 상황들
자리를 훌훌 버리고 목숨을 내어놓은 에스더같은 사람이 어디있는지요?
지금 그 사람이 그립습니다.
주님!
사람의 가뭄에 목마르는 역사들
시간과 공간을 시원하게 하는 다윗같은 사람이 어디있는지요?
지금 그 사람이 그립습니다.
주님!
지금 이 땅에 에녹, 모세, 여호수아, 바울, 디모데같은 사람이 어디있는지요?
지금 그 사람이 그립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에게 송두리째 주님이 목숨을 부으셨다. 나에게 목숨 건 한 분이면 충분히 새롭게 힘을 낼 이유가 되지 않는가? 나도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는 그 사람 아닌가? 예수님이 마음을 둘 사람 아닌가?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라.
3. 복음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요한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내용이 무엇인가?
요 1: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나의 죄를 해결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복음이다. 세례요한은 그저 말씀만 전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일치시켰다. 그 결과, 39절과는 다른 결론을 맺고 있다.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리하여가 무엇인가? 예수가 날 위해 죽는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 복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다.
주님이 왜 이곳에 오셨는가? 복음으로 되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로 산다. 유대인은 당신 예수로는 안된다고 했다. 그곳에서 주님은 빠져나오신다. 그리고 다시 거기로 가신다.
거기가 어디인가? 하나님의 사랑. 한 영혼. 말씀이면 되는 자리로 가신다.
하나님의 사랑이면 된다는 사람. 예수님이면 된다는 사람. 말씀이면 된다는 사람
이것이 믿음이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 사역의 고비에서 가장 중요한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거기로 가신다.
처음으로 다시 가신다. 예수님은 다시 찾으셨던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들이킨다. 한 영혼을 가득 채우신다. 말씀으로 충만해지신다. 거기가 무엇인가?
“난 너면 된다. 너면 충분하다”
이 하나님의 음성이 내 마음에 울려 퍼질 때 우린 세상의 알량한 유혹을 우습게 여길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날 사랑하는데 내가 어찌 곁길로 갈 수 있는가?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요10:40-42
2021-11-15 11:14:27
한장의 사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몇 일전에 세상을 떠난 고 박태준회장입니다. 뉴스에서 그의 살아생전의 인생을 필름으로 요약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경제인이면서 동시에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는 포항제철을 세운 “철의 사나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철의 사나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발간되었습니다.
또 한 분의 사진입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 많으시죠. 바로 이 분은 100여년전에 한국에 최초로 축구를 소개해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운동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이분은 한국에 YMCA를 창립하고, 병원, 고아원, 학교,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신 영국의 선교사 아서 터너(Arthur Turner)입니다. 이분은 조선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죽고나서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한 선교사가 그의 인생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그는 조선과 조선인을 위해 살았다”
이처럼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일을 하고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할지라도 그가 인생을 떠나고 나면 그의 인생은 말 몇마디로 압축되고 계속해서 기억에 남게 됩니다. 방금 예를 들었던 것처럼 박태준하면 “철의 사나이,” 아서 터너하면 “조선인을 사랑한 사람”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중에 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강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시고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신후에 예루살렘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도착하신 곳은 가족들과 친척들이 살고 있는 예수님의 고향이 아니라 예수님이 침례를 받았던 요단강가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침례요한에 대한 기억과 향수가 강하게 남아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대체로 침례를 받는 사람보다는 침례를 주는 사람이 더 높은 사람처럼 보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침례요한보다 더 큰 권위를 갖고 계신 예수님이 그곳에 가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왜 침례요한의 주 활동무대에 가셨는지 참 궁금합니다.
침례요한이 행한 일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때 그의 부친이 천사의 계시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백년전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수많은 제자들도 생겼고, 그는 또 유명한 설교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중적인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었던 헤롯왕에게도 큰 소리를 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왕은 신과 같은 절대권력을 갖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요한은 왕의 도덕적인 죄를 지적하고 책망할만큼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헤롯왕을 책망한 이유는 자기 동생의 부인을 빼앗아서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헤롯의 부인의 간계로 인해서 목이 잘려죽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침례요한의 행적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요한복음에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의 행적이 그렇게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침례요한이 말한 몇마디의 말밖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침례요한이 살아생전에 수많은 일을 하고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인생을 통털어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되는 것만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예를 들었듯이, 박태준하면 철의 사나이, 아서 터너하면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한 사람, 세종대왕하면 한글, 스티브 잡스하면 아이폰이 생각나듯이 침례요한하면 그가 말한 가장 중요한 말 몇마디가 기억에 남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은 두개의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1:29을 읽겠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번째로 남긴 말인 요한복음 1:34을 읽겠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이 두 마디가 침례요한하면 기억나고 생각나는 말이었습니다. 이 두마디를 한마디로 다시 요약하면 예수님은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침례요한이 죽고난 이후에도 가장 크게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게 된 말씀이었습니다.
침례요한은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들처럼 특별한 기적을 행한 일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행했고,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하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 엘리사는 문둥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침례요한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11:11a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비록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들처럼 큰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때까지 존재했던 선지자들중에서 침례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칭찬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침례를 받았던 요단강가에 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곳에 오자 먼저 침례요한이 살아생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0:41을 읽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들은 예수님을 보러왔지만 침례요한이 가리켜 말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즉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최종 반응을 요한복음 10:42을 통해서 확인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거기서 즉 침례요한이 침례를 주던 그 장소에서 침례요한의 말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젊은 나이에 목이 잘려 죽었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볼때에는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때에는 성공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한 사람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짐 엘리엇(Jim Elliot)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영화 “창끝” 즉 “End of the Spear”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국의 선교사로서 에콰도르 원주민을 선교하려다가 순교한 사람입니다. 18살에 크리스챤 대학에 들어가서 선교를 위해서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다녔던 휫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후에 에콰도르의 아우카(Auca)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열심히 익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준비를 끝내고 4명의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짐 엘리엇의 나이는 29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인에 대한 원주민들의 감정이 매우 안좋은 상태이었기 때문에 결국 도착하자마자 원주민들에 의해서 모두 창에 찔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영화에서 그 장면을 보면 엘리엇 선교사가 죽으면서 “나는 너희들의 친구다. 나는 너희들의 신실한 친구다”라고 말하면서 죽어갑니다.
그런데 엘리엇이 죽고난이후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Elisabeth)는 남편이 순교한지 2년이 지난후 그녀 역시 다른 동료 선교사들의 아내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남편이 이루지 못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린 자녀와 함께 아우카 부족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복음의 열매가 맺어져서 그곳 부족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선교사를 죽인 한 청년은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실화를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엘리엇 선교사가 선교하러가기 위해 10년을 준비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언와와 문화를 공부했지만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배운 지식을 하나도 써먹기도 전에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때에는 큰 실패이었으며 엄청난 낭비같이 보였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 기자들이 죽은 엘리엇 선교사의 아내에게 찾아와서 인터뷰를 합니다. “당신의 남편이 인생을 낭비한 것은 아닙니까?” 그러자 부인이 대답하기를 “낭비라니요. 그는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학 재학시절 짐 엘리엇이 남긴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기도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 주시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 주시옵소서. 저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처럼 풍성한 삶을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God, I pray Thee, light these idle sticks of my life and may I burn for Thee. Consume my life, my God, for it is Thine. I seek not a long life, but a full one, like you, LORD Jesus."
바로 이것이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의 기도이었습니다.
또 그의 묵상메모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절대 잃어 버릴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절대 간직할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 not keep to gain what he can not lose.”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잠시 뿐인 목숨을 잃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비록 짐 엘리엇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지만 그를 기억했던 아우카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인생을 실패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인생을 낭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가장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침례요한처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들도 예수님을 생각나게하는 사람이 될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이 가끔 저희집에 전화를 하다가 제가 저의 집 아들인줄로 착각하고 저에게 아빠를 바꿔달라고 합니다. 반대로 아들이 전화를 받으면 저인줄 알고 착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목소리가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딸을 보면 엄마의 모습이 생각나게 되고 아들을 보면 아빠의 모습이 생각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나를 보고 기억할때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려면 내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그리스도인들을 새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새 사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서로 용납하며 서로 용서하며 서로 사랑하며 평안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는 사람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새 사람답게 살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서로 나누고 서로 격려하고 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옛날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저는 저희 모든 성도님들이 죽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도 나의 이름을 남기려고하기 보다는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전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침례요한은 비록 살아있을때 큰 기적을 행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도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들은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때에는 참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사람의 눈으로 볼때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힘쓰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나를 보고 기억할때마다 예수님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