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 - 16절 설교 모음
신앙인의 불신앙 /요11:1-44/ 유기성목사
2022-09-23 12:56:46
신학생 때, 기독교 서점에 갔다가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집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앙인의 불신앙] 그 책을 사왔습니다. 그 설교집이 한동안 서고에 꽂혀 있었습니다. 제목이 주는 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요 11장은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도 꺾지 못할 믿음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 주위 사람들의 믿음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불신만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의 믿음 없음도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믿음은 있어’ 하는 분들,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로와 그 누이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잘 믿었고 예수님께서도 특별히 사랑하셨던 남매였습니다. 그 가정의 기둥인 나사로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머무신 후 베다니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일찍 오셔서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시지 않으셨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은 다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요단강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 하루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했으니, 예수님께 나사로의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떠난 직후, 이미 나사로는 죽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계획을 세우셨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나사로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텐데 그때 제자들이 얼마만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죽음도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믿음을 제자들에게 주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요 11:15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예수님께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믿음 좋던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태도를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마르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21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이 말에 신앙인의 불신앙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23) 말씀하였습니다.
그랬다면 마르다가 “아멘, 주님, 오빠를 살려주세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24)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말은 믿음인데 마음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슬픔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5-26)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27)라고 대답했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큰 어려움이 닥쳐 슬퍼하고 낙심하다가 사람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에 “괜찮아요,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시겠지요, 언젠가는 해결될 때가 올 거예요, 기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태도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고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말은 훌륭한 믿음이지만 이것이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어떤 형편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기뻐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셨을 때, 마르다는 질겁을 하면서,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39) 하면서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마르다는 분명히 마지막 부활과 영생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도 믿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예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불신앙이요 곧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40)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크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41 ...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예수님의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기적 이후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죽은 자도 다시 살 기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경우는 단 세 사람,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다 살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예표였던 것이지, 영생 천국이 있고, 주님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할 터인데,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어떤 일이 닥칠지라도 제자들이 죽음도 꺾지 못하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장인 히 11장 35절에 보면 두 가지 대조적인 믿음의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 11:35에 또 한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영생의 소망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달게 받은 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지만 자기에게 돌 던지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였고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그것이 스데반에게 죽음도 꺾지 못하는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꺾어지지 않는 믿음’이 너무 높은 수준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그런 믿음을 주십니다.
히 12:2에서 분명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셨습니다,
모라비안 공동체를 세운 진젠도르프 백작이 살던 당시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젠도르프 백작은 지금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모라비안 공동체는 세계 선교와 중보기도의 불을 일으키고 유럽과 영국의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죠지 뮬러도, 허드슨 테일러도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정말 믿었고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들을 놀랍게 쓰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큰 문제가 갑자기 생기면 덜컥 겁부터 나지 않습니까?
그 순간 문제가 얼마나 큰가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이 믿음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나사로가 죽은 것이 불쌍해서였겠습니까? 마르다 마리아가 불쌍해서 그러했겠습니까?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려는 순간인데 그것이 왜 슬프셨겠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무엇이며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 믿지 않는 자, 믿지 못하는 자를 만날 때 애통하셨습니다. 반면에 정말 믿는 사람을 보실 때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우리 스스로 크게 하려한다고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고 예수님을 항상 생각하며 살면 믿음이 커집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은 처음부터 믿음의 용사들이 아니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였더니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은혜의 때를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4장에서 마음이 꽉 닫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 5장에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셨고 6장에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을 먹여야 했었고 8장에서 음행하다가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여인을 만났었고 9장에서 나면서 눈먼 자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육신으로 예수님을 만나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만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여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 어떤 근심도 두려움도 이기게 됩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제가 선한목자교회에서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만 바라보았기에 ‘나는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복음을 실제로 체험했습니다.
선한목자교회를 담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백억의 부채 상환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할 때였습니다. ‘교회 건축은 마무리하고 부채는 다 갚을 수 있을까?’ ‘교회가 온전히 예수님의 교회로 세워질까?’ ‘성도들이 온전히 예수님의 사람으로 세워질까?’ 의심하고 염려할 때가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었습니다. 문제만 보았지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증거를 찾지 말고 먼저 믿으라!’ 하셨습니다,
증거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증거를 구하는 저를 책망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주여 저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순간 놀랍게도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제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과 하나 되는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데 그렇게 마음이 간절하고 뜨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말씀을 전하는 제게도 말씀을 듣는 교우들에게도 하늘로부터 놀라운 평안이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놀라운 평안이 하늘로부터 임함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면서 감격해 하다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 꿈을 잊고 싶지 않아서 옆에서 자던 아내에게 설교 내용을 불러주어 메모를 하게 하고 아침에 보니, 찬송가 455장의 내용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받음이라/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그때부터 설교할 때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과 하나 되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병으로 쓰러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도저히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기분이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문제를 보지 않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빠지지 말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하신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지금 처지가 슬픔과 낙심,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야말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죽음도 꺾을 수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이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할 분들은 일어나기 바랍니다.
찬양: 살아계신 주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요11:1-11/ 이일기목사
2021-07-09 06:42:18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 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순신 장군의 어록 중에 있는 글입니다. 그 분은 한 평생 좋은 일이 따르기보단 굳은 일, 불편한 일, 고통스러운 일과 더불어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평보다는 현실의 고통을 수용하면서 자신을 국가를 위하여 아낌없이 던짐으로 인해 역사의 인물로 세움을 받았고 존경받는 인물의 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가끔은 원치 않는 일이지만 세상에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때 그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기적이 꼭 일어나야만 할 우리의 처지이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성도들을 위하여 기적을 베푸시나 때로는 우리의 희망 시간표 보다는 하나님의 예정 시간표로 인해 그 응답이 지연되어질 때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1. 신앙생활 잘하는 가정에도 슬픔은 찾아옵니다.
0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본문을 열어 가는 첫 말씀은 기적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 가정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사람이 중한 병으로 시한부 생명을 만났다 할까요? 01절에서 어떤 병든 자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것을 보아 나사로란 사람보다 그의 중한 질병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의술로는 더 이상의 가능이 없는 한계점을 맞자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신병의 치료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0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런 상황에서 이틀이 지나도록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 연락도 없는 가운데서 나사로는 그만 죽어 장사 지낸바가 되었습니다. 사람 죽는 일이야 세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요, 가정들마다 다 겪는 일이기에 별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꺼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디 자기만 죽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이런 비극을 맞은 당사자가 대단히 젊은 사람이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자였다는 점에서 다소 의문점이 일어납니다.
0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젊은 사람이 꿈도 활짝 피워 보지 못하고 죽는 그 자체가 슬픔이요, 안타까운 일인데 이런 슬픔이 예수님을 잘 믿는 성도의 가정에서 일어난 겁니다. 사람들은 중직자의 가정이나 믿음이 좀 좋은 사람은 흔히들 환난이나 고난, 예기치 않는 재앙, 이해할 수 없는 병마 등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단정을 잘 지우죠.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도 사랑하시는 나사로의 가정에서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라고 하였고(17절) 장례식까지도 이미 치러진 상황인데 예수님께서 그 가정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을 기다리던 그 초조한 나날들과 장사를 지내고 난 뒤의 허탈함과 슬픔이 한 가정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큼 자리 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지만 그 사랑하는 자가 병들어 죽어갈 때에는 정작 모른 채 하고 그냥 넘어갔다고 할까요?
사람을 보내어 빨리 와 달라고 절박한 호소를 하였음에도 주님은 어떻게 해 주시겠다는 답변도 해 주지 않고 날짜만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나사로의 가정의 관계가 어디 보통의 관계입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여러분이 이런 납득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에 부딪쳤다고 합시다.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하겠습니까?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때로는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넋두리의 원망을 할 때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조금만 은혜를 베푸셔도 우리 가정에 이런 비극이 없었을 터인데, 사업도 이렇게 부도가 나지 않았을 터인데 라고 말입니다. 응답이 없어 마음에 깊은 회의와 의심이 일어나던 순간들이야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그러나 좀 더 냉철히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2. 슬픔 속에도 예수님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0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06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이르는 시한부 생명의 소식을 들으시곤 오히려 더 지체를 하고 있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베다니가 아닌 반대 방향 유대로 가자고 하시는데(07) 왜 치유의 기적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침묵을 하시며 외면하십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만일 여러분께서 주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애타게 호소했음에도 응답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늠해 보는 말씀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한 기회로 삼으심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사람을 보내 우리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다 죽어가니 오셔서 꼭 살려 주십시오. 라는 요청에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0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사람이 겪는 질병들은 세상의 이치를 따라 나타나는 자연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질병을 악령이나 귀신들이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는 있는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질병을 자기의 죄와 연관시켜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도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당한 그 죽을병을 놓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사건은 부활의 교훈을 교육하기 위한 도구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늑장을 부리신 겁니다. 만약 나사로가 죽은 바로 다음날 살리셨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짐작이 가십니까? 예수님을 시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가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라고 입방아를 찧었을 것이고 헛소문도 크게 퍼뜨렸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흘 동안은 그 사람의 죽은 영혼이 공중에 떠돌다 혹 천사가 은혜를 베풀면 그 사람의 시신에 돌아온다는 헬라적 사상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만약 일찍 나사로를 살리셨다면 어쩌면 예수님의 권능을 부인하거나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주님은 사망이 완전히 입증되고 시체가 부패되기 시작한 때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리고 세상을 떠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아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질병을 이기거나, 아니면 주님 품안에 평안히 안식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은 자들이 그 믿음을 본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 순교자들의 죽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음을 볼 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영광스러운 길의 시작일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과 역경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다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고난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믿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때로는 죽음을 앞에 두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낙심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결국에는 죽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든지 간에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상관없이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소망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사건을 증명하기 위하여 나사로의 죽음을 예로 사용한 겁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Churchill, Winston) 경이 죽어 런던에 있는 성 바오르 교회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거행할 때 나팔수가 종탑 위에서 나팔을 두 번 불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국장(國葬) 같은 경우에는 군인들이 예포로서 총이나 대포를 쏘기도 하죠. 첫 번째 분 나팔은 취침나팔로서 고이 잠들라는 것이고, 잠시 후에 다시 분 나팔은 기상나팔이었다고 합니다. 일어나라고 부는 것이 기상나팔 아닙니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생명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에 기상나팔을 마지막으로 불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알고 동정하시는 분입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내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주님께서 아신다면 그때는 힘이 되지 않을까요?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 때와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도 주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임에도 그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왜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부활 그 자체는 영광스럽지만 죽음에 직면하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나사로가 죽었음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힘들 때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함께 고통하시며 동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경우에 기적을 베푸실 때 문제가 되는 고통을 제거하시나 때로는 그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절망과 역경의 골짜기를 동행함으로 통과하게도 하십니다.
시 23:0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을 때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셔서 그리고 전 인류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육체가 부활할 뿐더러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며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이 관계는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어떤 처지, 어떤 고난에 빠지더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낙심치 마십시오. 오히려 나의 현실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원하십시오.
렘애 0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기도하되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놓고 침묵하신 주님의 놀라운 계획은 현실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있음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맥클라맨이라는 영국의 설교자는 요한복음 11장을 두고 말하기를, 나사로의 가족들에게 예수님이 더디 가신 것은 사랑의 지연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연하신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에 예수님께서 늦게 가신 것은 그들의 가정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늦게 응답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늦은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때의 응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던 나사로는 살았고, 살아난 나사로를 통해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셨고, 이 놀라운 기적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은 응답의 시기를 인간 편에서 정한 후 그때에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십시오. 응답의 시기는 주님께 맡기고 기다림이 제일 좋은 것이지 내가 당기려고 하면 잘 안 됩니다.
1990년 노벨 평화상 후보까지 올랐던 엘레나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본래 하나님께 헌신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힘써서 일하는 중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각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여, 어째서 내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 하는 원망을 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은 제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기도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러준 넓은 불모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개간해서 농사를 하였고 거기서 수확한 것으로 중국선교사들의 선교비를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하다가 추수하고 탈곡하던 중 탈곡기에 손이 끼어들어가는 바람에 손이 부러져 오른손을 잘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 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고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농사를 멈추고 그 땅에다가 양로원을 짓고 노인들을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확장되어서 세계적인 유명한 양로원이 되고 그는 노인의 어머니라고 하는 높은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결코 여건을 탓하거나 원망치 않고 주여!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강해 (73) - 나사로 사건(1) /요11:1-7/ 김형익 목사
2021-05-08 10:36:31
1. 문맥: 두 차원, 하늘과 땅의 이야기
요한복음을 살펴볼 때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매우 흥미로운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요한복음이 두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하늘의 차원이고 또 하나는 땅의 차원입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 땅과 하늘의 차원은 단지 공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시간적 차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가령, 나사로가 다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뿐 아니라 마지막 날 우리 모든 신자의 부활을 보여주는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 표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행하신 마지막 표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표적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표적을 마지막 표적으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표적은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예수님에 대한 상징인 빛과 생명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이 표적은 표적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하여 이제 드디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이 점에서 나사로 사건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주석을 쓴 레이먼드 브라운(Raymond Brown)은 이 표적을 ‘표적 사역을 종결짓고 영광의 사역을 개시하는 시발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전반부는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12장으로 끝나게 됩니다.
전반부의 마지막 부분이 11~12장입니다. 이 11장과 12장은 이제 후반부에서 다루게 될 본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적절한 연결부의 역할을 합니다. 11~12장은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장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영광과 죽음의 시간으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요한복음에서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는 중심 주제인 영광이라는 주제가 이제 11~12장을 통해서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 요한복음 9장에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실 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그 병의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요 9:3). 그러나 이제 이 나사로 사건에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1:4). 그리고 12장으로 가게 되면 더욱 더 영광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됩니다(12:16,23,28,41).
2. 요한복음에서 영광: 나사로 사건의 의미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의 나사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4절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 곧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자주 발견하게 되는 단어가 되겠지만, 여기서 잠깐 우리는 그 영광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A. 십자가 죽음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란 단어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레이먼드 브라운이 설명했듯이 주님은 이제 11~12장을 통해서 영광과 죽음으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영광과 죽음’입니다. 왜 영광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십자가는 수치요, 형벌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가장 놀랍고 완전하게 드러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만큼 하나님을 계시하는 사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고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부분은 앞으로 좀 더 깊이 다룰 기회가 있습니다.
B. 십자가 죽음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표적: 죽음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구주
그럼 왜 이 나사로 사건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는 사건이라고 주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베푸신 6번의 표적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각각의 표적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나사로 사건에서는 어떻습니까? 주님은 앞장인 10장에서 당신이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그런데 이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일을 어떻게 행하십니까? 11장을 보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인데 이 엄청난 사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 당국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아주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45~53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풍성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시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약속된 풍성한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생명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나사로처럼 죽은지 오랜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이 점에서 나사로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표적 기사이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표적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3. 문제: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가정에 일어난 큰 슬픔
본문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나사로 죽음이라는 큰 슬픔이 어떤 가정에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이 설명하듯이,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집안입니다. 마리아는 2절에 설명하듯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겼던 여인입니다.
사실 이 일은 12장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왜 여기 마리아에 대해서 그렇게 소개하는 것일까요? 아마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던 시기에 이 마리아가 행한 일이 초대 교회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3; 막 14:9). 그래서 이 여인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요한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이 거의 이 마리아를 안다는 전제에서 11:2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형제 마리아가 바로 그 마리아다 하는 것입니다. 형제 나사로가 중병이 들게 되자, 비록 멀리 떨어져 계시기는 하지만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알려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다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압니다. 나사로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유난히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큰 슬픔을 당하게 된 가정은 주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친근히 여기셨던 가정이라는 사실입니다. 2절의 마리아가 주님께 행한 일에 대한 소개가 그렇고, 5절에서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한 것도 그 관계의 친밀함을 잘 보여줍니다. 문제는 바로 이런 가정이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너무나 당혹스럽고 슬픈 일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관계가 없는 가정이 아니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누리던 가정이 말입니다.
4. 예수님의 고의적 지체: 하나님 영광을 위함.
이 본문에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고의적으로 지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정에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데 주님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이틀을 계시던 곳에 더 유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A. 고난의 상황: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는 말이 정확하게 전달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이틀을은 유하신 것은 할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할 일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계산하고 계시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나사로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도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그것을 주님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사로는 죽어야 했습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것은 병고침의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이 마지막 표적을 통해서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생명이시며 부활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서 보신다면 이 이틀이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 이틀이 되었을지 우리는 압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곳은 본문 1절이 설명하듯 베다니입니다.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1~2마일 밖에 안 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인가 하면 베레아 지방의 베다바라로 불리우는 곳으로 추정이 되는데, 요단 건너 처음에 세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이었습니다(요 10:41). 주님께서 왜 이곳으로 가셨는지를 우리는 압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시자, 그 가르침을 신성모독이라고 해서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31).
주님은 이들을 피해 그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베다바라라는 곳에 오신 것입니다. 이 베다바라와 베다니 사이의 거리는 약 25마일 정도 되었습니다. 즉,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을 때가 첫날이라면, 주님은 다음 두 날을 지체하셨고 넷째날에야 아침에 출발하사 저녁 즈음에 도착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사로는 사람이 예수님께 왔던 그 첫날에 죽은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시는 겁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뿐 아니라, 충분한 시간이 흘러 그의 시신에서 냄새가 날 정도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순간을 기다리기 위하여 고의로 이틀이나 지체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정작 이런 순간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게 된다면 우리는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니 제가 하나님을 이렇게 잘 섬기고 이렇게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왔는데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라고 말이 나오는 순간입니다.
B.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지체하신 것이나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 속에서는 마르다나 마리아처럼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아마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튿날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온 사람을 통하여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는 예수님의 전갈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이미 전날에 죽고 말았습니다. 정말 당혹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에 성도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기까지 가만히 놔두셨는가?”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고도 왜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욥이 그것을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욥은 자신의 좌절을 온갖 형태로 표현합니다. 처음에 욥이 한 말들이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 시간이 깊어지자 욥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욥 13:15). 욥이 이렇게까지 자기 고통으로 인하여, 그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힘들어하는 이유, 그가 고통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숨겨진 이유는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고난의 전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욥과는 사실상 상관없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욥의 신앙을 자랑하심으로써 빚어진 고난이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차원의 고난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사건이 바로 그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일은 단순하게 병 고치는 사건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틀을 지체하셔야 했고,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 며칠이 될 때까지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5. 교훈과 적용
나사로의 사건은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지만, 그 일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의 입고 오신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와 함께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 생활에 얻어야 할 교훈들이 있습니다.
A.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다.
나사로의 죽음은 그의 자매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이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당황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믿어도 말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겪고 있는 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실 수 있겠는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본문은 분명하게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차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차원의 고난이라고 할 때 그 고난은 더 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도무지 자기 자신 안에서는 발견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식의 인과율로 해석한다면, 문제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혹은 그 자매들이 뭔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가나 벌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본문을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상고함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사로 사건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표적은 한 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생명을 주실 것을 계시하신 계시 사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당혹스러운 일들이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이들에게 본문은 거듭 힘주어 말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하게 한 말을 보세요.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냥 나사로라 하지 않고 그들은 나사로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임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착각이 아님을 보이시기 위하여 성경 기자는 5절에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최악의 일을 만난다고 해서, 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쁜 일을 만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자리까지 가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그들을 사랑하시더니”라고 말입니다.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때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 도리어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B. 신앙과 체험: 복음의 내용이 삶에서 체험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제자들이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불완전한 믿음을 온전하게 세워주시고자 하심입니다. 베드로도 그렇고 여기 11장에 마르다의 고백도 그렇고 다 좋은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고백을 한다고 할 때 그 고백의 의미와 내용을 다 완전하게 알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고백하는 내용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살도록 허락하신 인생이라는 사건들과 시간을 통해서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그 고백이 진짜 고백이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음을 들으시고
“아, 이것이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은 순간이 깨달은 것이라기 보다, 이제 그 깨달은 것을 가지고 여러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았다, 그 말씀을 듣는다 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며 또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 형제의 무거운 짐을 함께 져주고 내 짐을 형제와 나누어 지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그 복음이 어느 새 내 삶의 깊은 자리에 살아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성화의 그림인 것입니다.
복음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습득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듣고 배우시는 복음의 내용이 여러분의 삶에서 체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힘도 없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그저 머릿속의 신앙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하나도 바꾸지 못하는 복음입니다. 깨달은 복음이 삶 속에서 다시 깨달아지고 경험될 때 우리의 마음은 주께서 주시는 은혜와 확신으로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차원의 성장을 위하여 나사로의 죽음을 허락하셨습니다.
6.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은 신자가 누리는 지상 최고의 선물 (롬 5:5; 8:15)
성도를 가장 비참하게 하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을 때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일 것입니다. 언젠가는 너무나도 친밀하게 나를 압도하시고 나를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셨던 주님께서 지금은 왜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고 침묵하시는가 할 때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때 우리가 기억할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5:5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행하시는 주요한 일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신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은 바로 이 깊은 사랑이 자기에게 부어졌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큰 확신을 누리는 성도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롬 5:2).
그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게 할 줄을 알고(롬 5:3,4) 이 소망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아서 수치를 당하게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주시는 확신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은 신자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누릴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지금은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가 죽고 주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흘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잠시 우리를 환난 속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있는 곳은 전능자의 그늘이요, 선하신 하나님의 품 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 강해 (74) - 나사로 사건(2)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차원 /요11:6-16/ 김형익 목사
2021-05-08 10:39:42
1.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 위에 세워진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일곱번째 표적인 나사로 사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이 병은…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이 사건이 전개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베다니로 출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누셨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다른 부분들과 같이, 동문서답하는 형식의 대화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두려운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기고 만나는 신앙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께서 의도하시고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제대로 깨닫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자기 관점이 변하지 않은 채 주님의 말씀을 곡해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이라는 근본적으로 바른 지식 위에서만 세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 지식은 성경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주님은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7:3).
앞에서도 우리가 살펴본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또한 그것입니다(요 8:32). 성경에서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거의 절대적이며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지만, 그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기에 성경을 아는 지식과 별개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는 심각한 상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는 토대는 오직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오래된 오해와 오류를 깨뜨리고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성경 지식이 하나님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봅니다. 이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오해는 머리만 커진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성경의 지식이 하나님 아는 지식이 되도록 하는 기도의 삶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반드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성경을 공부해야 소용없다가 아니라, 그 말씀이 믿음으로 소화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얼마든지 우리도 넘어질 수 있는 문제들, 특히 주님을 알아가는데 있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룹니다. 우리는 이 나사로 사건의 표적의 핵심으로 접근해 들어가기 위해서 이런 문들을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여 성장하며, 그 지식은 성경을 아는 지식을 요구합니다.
2. 나사로 사건의 본질: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려는 사건
나사로 사건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라고 부연된 것을 4절에서 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그 아들의 영광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영광을 얻으실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한복음에서 ‘때’라는 말과 함께 ‘영광’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내용이 성취되는 구속사 최대 최고의 사건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성취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는다 함은 그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나사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문제는 제자들이 전혀 이런 진리를 배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시는 일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열심과 충성으로 주님을 따른다고 해도 허사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사건이 그런 제자들의 믿음을 위함이라는 말씀으로써 이 사건의 의미를 조금 더 설명하십니다. 15절에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을 통해서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믿음이 주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 믿음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바른 앎, 바른 지식에 근거합니다.
3. 제자들의 착각과 주님의 생각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약 세 가지 정도의 제자들의 오해 및 착각이 표출됩니다. 각각을 살펴보겠습니다.
A. 첫번째 착각: “주님께서 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유대로 가는 모험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먼저 볼 것은 주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을 지체하시는 동안의 일입니다. 나사로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제자들의 염려는 주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나사로가 아프니 그리로 당장 가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돌로 쳐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8; 요 10:39).
아직 그들의 분이 가라앉지도 않았을텐데, 다시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우려가 8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 동안 아무 기척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 한 사람 아프다고 유대로 가시는 모험을 하지는 않으시겠지. 아무리 그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말이야.” 그러나 주님께서 이틀을 지낸 다음 날 아침에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시니까(7)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9~10).”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은 하루를 낮과 밤 각각 열 두 시간씩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아직은 해?이 세상의 빛?가 있는 낮이라는 말씀은 일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주님이 수 차례 말씀하신대로 아버지의 일입니다(요 5:19; 6:38,39).
즉 하실 일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낮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사명이 다하기 전에는 밤이 오지 않습니다. 그 전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잡지 못했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8:20). 그러나 밤이 옵니다. 그 때가 오면 빛이 없으니까 실족하여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 자신이 제자들의 빛이시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되면 제자들도 다 실족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나사로 한 사람을 위해서 내가 유대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기에 내가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설마 나사로 한 사람을 위해서 가시겠는가?” 생각했으나 주님은 “나사로 한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로 답하시는 것입니다. 아직은 주님 외에 아무도 이 나사로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게 될 일의 감추어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한 명이냐, 만 명이냐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이 기준입니다.
B. 두번째 착각: “나사로가 회복 중이니까 유대로 가지 않아도 되겠다(12~13).”
제자들의 두번째 착각은 주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셨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이 말이 죽었다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런 용법이 매우 드물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렇게 이해한 것 자체가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이어서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2).” 주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시니까,
“나사로가 이제 회복되겠구나, 잠자고 나면 일어나겠구나”라고 생각하고(13) 그러면 갈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하는 뉘앙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사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과 자신들의 안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아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신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4). 그런데 문제는 하나는 들었는데 하나는 놓칩니다. 놓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안전의 문제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반응은 전부 안전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 의도를 제대로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과 자기들이 듣고 싶은대로 해석해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딱 맞는 것 하나만 듣고 그 다음 것은 다 흘려보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 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신앙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무지와 오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지고 바로잡아지는 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자들은 착각과 오해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잠들었다(죽었다)”고 하시고는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더 어려운 문제, 또 한 번의 오해로 제자들을 인도합니다.
C. 세번째 착각: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예수님은 무모한 결정을 하셨다(도마, 16).”
나사로가 회복 중이 아니라 죽었다면 더 더욱 위험을 무릅쓰고 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게 제자들의 생각이고 도마를 통해서 드러난 그들의 착각입니다. 도마는 마치 다른 때의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참 무모한 결정을 하셨다”는 판단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리고 우리도 다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다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섣부른 말입니다. 도마의 말의 두번째 의미는 주님께서 비록 무모한 결정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을 충성스럽게 따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 좋은 태도지만, 무지로 그 빛을 다 잃어버린 충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더욱 아무도 주님의 죽음을 돕거나 대신할 수 없습니다.
4. 예수님의 기쁨(15)
이런 오해와 착각 속에서 주님은 또 한 가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이야말로 제자들의 오해와 착각을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15절을 보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나사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자고 하심은 “너희로 믿게 함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나사로 사건의 큰 차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차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시 하위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한다고 표현하신 부분입니다. 지금 주의 사랑하는 자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은 어땠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기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Severe mercy)의 본질은 항상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기초한다.” 잔인한 자비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는 언제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기초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나사로의 죽음까지 아무 일도 안 하시고 고의적으로 지체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들도 이런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때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이 기쁘다고 말씀하는 것도 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마르다나 마리아의 말처럼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차원 곧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당신의 부재하심(absence)으로써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구체적으로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고 하심으로써 이 기쁨이 제자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더하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임을 밝히십니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예수님의 기쁨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곧 아들이 영광을 얻으시는 일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게 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 역시 제자들에게는 아직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5. 제자들의 믿음의 내용을 형성하는 교훈들
주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 라고 하신 이 차원을 생각할 때,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과 우리들의 믿음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십자가를 지시기 전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요 15:12).”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것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 사건이 화근이 되어 관원들에게 잡혀 죽음에 이르게 되시는, 즉 죽음으로써 생명을 주신 그 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지요? 11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굳이 여기 ‘친구’라는 말을 사용하십니까? 제자들은 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주님과 자기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것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비록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지만, 정녕 친구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시는 분은 주님 자신입니다. 아마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두고 두고 이 나사로 사건을 생각나게 했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나사로 사건 뒤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했을 때,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이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려면 배워야 하는 진리였습니다. 주님 자신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일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던 제자들의 마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바른 진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의 의향과 의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여기 제자들의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당시의 제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계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주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최상의 신앙은 도마의 말로 대변되는 수준의 신앙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런 신앙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의 열매는 쓴 뿌리일 뿐입니다.
6. 지식이 없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아는 신앙으로!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지식이 없는 믿음에서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까? 나사로 사건의 핵심으로 가는 길목에서 본문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위에 여러분의 신앙을 쌓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몇 년을 신앙 생활을 해오셨든지 상관없이 여러분은 신앙이,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고 성숙해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말씀을 토대로 몇 가지 권면을 드립니다.
A. 결심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라: “주님이 저희를 위해 기뻐하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먼저 결심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결심, 결단, 헌신 다 좋은 것입니다. 이게 없는게 우리 신앙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도마처럼 하는 결심은 안 됩니다. 그런 결심을 하기 전에 도마가 했어야 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는데도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을 저희를 위해서 기뻐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전에도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신앙은 ‘그냥 무조건 따라가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제대로 따르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직한 질문을 여러분의 신앙 생활 속에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셔야 합니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 주님과 계속해서 평행선을 그리는 제자들의 착각과 오해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주님과 한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고 주님의 의도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 생활이 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입니다. 질문이 없으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헌신하지 말고 결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적 삶에 질문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B.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8~29).
두번째로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까(요 6:28~29), 일하기 전에, 아니 일을 하려고 생각하기 전에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시라는 것입니다(딤후 3:14).
여기서도 자칫 일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을 통해서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일이 전부라고 여기고 일이 그저 일이라고만 여긴다면 그는 하나님을 배울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곳이 가지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자원하는 헌신으로 운영된다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교회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와 위치 증명의 근거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가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자기가 교회에서 하는 일로 증명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충성 봉사의 정신과 함께, 때로는 한가함도 즐길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분을 믿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말씀을 잘 배우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잘 믿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C. 일을 통해서 배우고 믿으라: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의 믿음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마지막 권면은 일을 통해서 배우고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의미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모든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배우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여러분의 믿음을 위함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아니,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이런 일을 인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주님은 아무 개입 없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사람들로 아들을 믿게 하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여러분의 믿음을 흔들고 꺽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우고 견고하게 하는 것임을 아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11:1-40/ 유기성목사
2018-04-10 14:20:08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한 분이 메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부활하셔야 했나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단지 죽으셨다는 것으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죄 없으신 분이셔야 우리를 대신하여 죽는 속죄제물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죽을 때, 자기 죄로 인하여 죽게 되지 남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를 이길 분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미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님은 부활하셔야 했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이심이 증거 된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이 죽으면 끝이라면 희생을 무릅쓰고 심지어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고전 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부활이 없으면 복음은 거짓입니다, 다 믿겠는데 부활만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부활이 거짓이라면 십자가 복음과 기독교는 거짓에 세워진 것입니다,
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부활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인 상태에 있습니다,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러므로 부활절이 너무나 복된 주일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부활주일을 장애인주일과 함께 지킵니다.
이유는 장애인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할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온전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이 구원받았으면 되지 왜 몸도 거룩한 상태로 거듭나기를 바라야 하나요?’ 라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영혼만 구원받고 몸은 타락한 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신을 구분하는 것은 무서운 이단의 사상입니다. 육신의 타락을 합리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몸의 부활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구원받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셨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죄를 향한 경향" 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는 말씀을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도 몸부림을 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몸도 온전히 변화되는 날, 죄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고 거룩한 본성이 회복되는 부활의 날이 오기를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이냐?”는 질문 (고전 15:35)에 사도 바울이 고전 15:42 이하에서 대답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썩지 아니하는’ (:42) 몸이며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43)이며 신령한 몸 (:44)이라 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실 때 그 몸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큰 소망이란 말입니까?
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지난 2월 16일 장애인인 김근표 군이 사고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일부러라도 찾아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가던 학생이었는데, 갑작스런 죽음의 소식에 너무 당황하였고 그 부모와 가족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열일을 제치고 문상을 갔습니다.
가면서 주님의 마음을 구할 때, 근표가 온전한 몸으로 부활하는 소망이 생각났습니다. 저에게도 유족들에게도 깊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주님이 나사로가 묻힌 무덤 앞에서 돌을 치워놓고 ‘나사로야 나오라’ 하셨을 때, 나사로가 시신을 감싸던 베를 동인 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로버트 잉거솔(Robert G. Ingersoll)이란 유명한 무신론자가 강의 중에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의 기울어지는 인기를 회복하려고 계획적으로 꾸민 사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사로는 아파서 죽은 체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장례식을 치르고 예수를 불렀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체하고 있었는데 예수가 와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했습니다.” 잉거솔은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하는 것이 신호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가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기양양하게“여러분 중에 예수가 왜 굳이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했는지 이유를 말해 줄 사람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노인 한 분이 일어나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예, 선생님, 주님께서 ‘나사로야!’ 분명히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베다니의 모든 무덤에 있던 죽은 사람들이 다 살아나왔을 겁니다.” 잉거솔이 그 말에 당황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부활하였을 때, 여전히 병든 상태에서 겨우 숨만 다시 쉰 채 살았겠습니까? 깨끗해진 몸으로 다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온 몸이 부서지고 찢어지고 깨어졌습니다.
부활하셨을 때, 숨만 다시 쉬게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온전한 몸으로 부활하셔서, 제자들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영광입니다.
야이로의 병들어 죽은 딸도,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다 숨만 다시 쉬게 된 것이 아닙니다. 몸이 완전히 치유된 채 살아난 것입니다.
몸의 장애만 가진 사람이 장애인이 아닙니다. 마음의 장애,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 더 심각한 장애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봅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부활의 날, 우리가 온전해지는 날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날이 올 때까지 탄식하며 기다리기만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이미 오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살 때, 우리는 장애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여기서부터 살게 됩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장애인과 장애인을 둔 가족들과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장애가 있고, 늘 육신에 져서 실패했더라도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약할 때 강함되시네”라는 찬양곡을 작곡한 데니스 저니건 (Dennis Jernigan)은 한 때 동성애자였습니다. 5살 때 교회 화장실에서 성인 동성애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충격으로 동성애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사탄은 이렇게 저의 마음으로 들어왔습니다.”
데니스의 음악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고 교회는 열심히 다녔지만“나는 지옥에 가게 될 것이고 사람들이 나를 증오한다.”는 생각으로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한번은 존경받는 기독교 지도자 한 사람에게 자신의 동성애 문제를 고백하였다가, 그 역시 동성애자여서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해 왔고 큰 충격을 받아 자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 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동성애자들과 성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수록 더욱 절망에 빠져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찬양 집회에서 한 가수가 “여기에 마음속에 있는 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을 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로 들렸습니다. 순간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자신을 그런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부활의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마치 죽음에서 부활한 것처럼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놀랍게도 얼마 후 멜린다 라는 사랑스런 여인을 만나 결혼했고 현재 무려 9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사탄이 나에게서 빼앗으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은혜를 담은 찬양 “약할 때 강함 되시네”를 만들었습니다.
데니스는 현재 수많은 동성애자들을 치유와 회복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장애인을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얼마 전 주일 담임목사와의 대화 모임에서 한 젊은 남자 집사님이 어린 아들에게 정신지체 장애가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말씀하면서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아니신가요?” 그 질문에서 그 집사님의 마음이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어 대답 드렸습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 맞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을 다 고치시지 않고, 불치의 병도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경우입니다. 몸이 건강하여 오히려 영혼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병이 있고 장애가 있어 영혼이 복되게 된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날에는 장애인도 다 온전한 몸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대답했습니다. “교인의 가정에 장애인이 있는 경우, 교회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할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가 함께 그 장애인을 담당하라고 허락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애인을 한 가족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공동 책임을 져야합니다. 교회가 장애인 사역이 소홀히 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로마가 그토록 기독교를 핍박하다가 어떻게 기독교 국가가 되었는가에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군인들이 먼저 기독교인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행동대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까요? 로마 정부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려고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기독교인의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그 일을 일선에서 행하던 자들이 군인들입니다.
그들이 기독교인 집에 들어가서 재산을 몰수할 때, 당시 로마의 사회적 문제였던 장애인과 고아들이 기독교인 집에서 보호받고 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두 집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살고 있는 집이면 어디든 돌아보지 않는 장애인이나 고아들이 한명씩은 있음을 보고 군인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이렇게 고아들과 장애인들, 우리들이 다 내어버린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을 왜 우리가 칼을 들고 가서 내쫓고 재산을 빼앗아야 하는가?, 그들은 왜 보상이 없는 일에 충성하고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섬기며 살고 있는가?, 왜 우리는 이 사람들을 핍박해야 하는가? 결국 군인들이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명입니다.
오늘 성찬을 하면서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온전한 몸을 가지게 됨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장애인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분명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소망입니다. 치열한 믿음의 싸움, 육신과의 싸움을 겪고 계실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찬양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기도응답이 더딜 때.. /요11:1-45/ 닥터 브루머
2015-06-24 20:50:36
▲퀴즈
제가 어떤 공주에 대해 말씀드리겠으니,
그 공주 이름이 무엇인지 한 번 맞춰 보시기 바란다.
옛날에 공주 한 명이 살았다. 신데렐라 얘기는 아니다.
그녀는 자기가 공주인줄 몰랐다.
그 공주는 매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자기 나라에 전쟁이 나서 적에게 침공을 당하고, 자기는 포로로 붙잡히고,
자기 가족의 유업은 모두 적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공주는 포로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종전 직후에 공주는 여전히 매우 가난한 상태였다.
공주는 그 후 몇 (십) 년 동안 아주 힘겹게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조금씩 그 공주와 가족들은 부유해져 갔다.
부가 늘어날수록, 공주도 예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 아름다워지고, 가업은 더욱 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자 주변 여러 나라의 왕자들이, 이제 점점 그 공주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공주 역시 왕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그 공주에게 말씀하신다.
“내 공주가 되어서, 나와 함께 가자!”
그런데 주변의 여러 왕자들도 동시에 이야기한다.
그들은 공주에게 안전을 보장하고, 자기를 따르면 존중받을 것을 약속했다.
그 중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왕자의 이름은 ‘맘몬’(物神)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공주에게 계속적으로,
그 맘몬을 따라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생명을 얻는 것 같지만, 결국 잃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면, 자기 생명을 잃는 것 같지만 얻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공주는 자기 과거의 전쟁과 모든 것이 무너진 비참한 상태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불과 얼마 전 과거의 일이었다.
그 공주는 지금 양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이 공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 바로 “코리아”이다.
이 이야기는 성경적이다.
구약에서 ‘나라’를 말할 때, 여성형 대명사 ‘그녀she'를 쓰고 있다. 겔16:46
앞으로 몇 년간 장래에 한국은 어느 쪽 길을 선택해서 갈 것인가?
더욱 예수님께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세상의 왕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갈 것인가?
이 대답은 이제 한국인 각자에게 달려있다.
제가 사는 유럽에서는, 많은 공주들이 맘몬 등 세상의 왕자들을 선택했다...
◑기도 응답이 더딜 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보내는 편지에, 나사로라는 이름 대신에
‘사랑하시는 자’라고 적었다.
나사로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떴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르다가 집을 소유했다. 마르다가 자기 집에 모셨다 눅10:38
예수님은 일찍 아버지를 여윈 나사로에게, ‘형’이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던 것이다.
두 자매는 나사로가 병들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나사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뭔가 하실 줄 확실히 믿었던 것이다.
▲편지에, 치유해주시도록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냥 ‘병들었다’고만 말했다.
왜 고쳐달라고 편지에 쓰지 않았을까?
예수님 사랑을 너무 확신했기 때문에,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만 들어도, 예수님이 뭔가를 즉시 행하실 것을
두 자매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하는 그 편지는,
정말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가득 찬 편지였다.
▲이 편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신가?
-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셨다.
답장도 없으시고, 움직이지도 않으셨고,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아무 설명도 없이 침묵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종종 이런 황당한 경험을 겪을 때가 있다.
주님을 너무나 확신하면서,
기도만 드리면 주님이 즉시 응답해 주실 것 같은 확신이 충만했는데,
정반대로, 주님이 아무 설명 없이, 우리 기도에 침묵하실 때가 꽤 있다.
▲예상보다 더딘 응답
그런데 나사로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두 자매의 참담한 심경...
두 자매는 속으로 상상했을 것이다.
이 편지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 한 나절,
예수님이 그 편지를 받으시고 아마 즉시 출발하실 거야..
그러면 여기까지 오시는데 걸리는 시간 한 나절,
다 합치면 얼마의 시간인데.., 그 때쯤이면 주님이 도착하실 거야!
그래서 계산하며 기다렸으나, 예수님은 예상된 시점에 오지 않으셨다.
나사로의 병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 계산을 새로 해 보았다.
만약 무슨 일 처리를 마치고 오실 경우, 내일 아침까지는 도착하실 거야!
그런데 주님은 그 때도 오시지 않았다.
그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저기서 멀리 오시는 분이 예수님이 아니신가?’ 해서.
(종종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응답은 내 예상시간보다 훨씬 더디다.)
▲실망한 마르다
그렇게 기다리는 와중에 그만 나사로가 죽어버렸다.
두 자매가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을까?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후에) 예수님이 마침내 도착하셨을 때,
두 자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잘 말해준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과 실망이 교차된 말이었다.
오늘날 이집트에서도, 사업상 대화를 나눌 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약 1시간 정도 주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그것이 전통 문화의 예절이다.
사람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자기 본론부터 꺼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무례한 언행이다. 그만큼 마르다가 충격과 실망을 받은 것이다.
마르다는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압니다.” 요11:22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 요11:23
마르다는 그 말씀이 별로 탐탁치 않았는지, 이렇게 이어갔다.
“예,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줄 믿습니다!” 요11:24
‘하지만 지금은 우리 나사로가 죽었고, 주님은 그 때 오시지 않았습니다!’
라는 뜻이 감춰져 있다.
그 때 예수님은 믿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주여 그러합니다. 믿나이다.”
정말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다.
▲실망한 마리아
그런 와중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왔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11:32
언니와 토씨하나 틀림없이 똑같이, 예수님께 원망과 책망이 섞인 말을 쏟아냈다.
왜 두 자매는 동일한 말(21절, 32절)을 똑같이 쏟아냈을까? 사전 공모한 것일까?
(제 생각인데) 나사로가 죽었을 때, 두 자매는 너무 실망해서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말을
서로 수차례 주고받으면서 계속 원망했다. 그래서 그 말이 입에 익숙해져 버렸다.
마리아는 딜레마에 빠졌다.
생전 알지 못하던 낯선 사람도 치료해 주시고, 이방인까지도 고쳐 주셨는데,
‘사랑한다던’ 오라비 나사로는 왜 죽게 내버려 두시는가? 요11:5
◑예수님이 더디게 지체하신 이유 - 그들을 신뢰했기 때문
▲예수님이 우신 이유
예수님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슬픔을 느끼셨다. 요11:33
“그(죽은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그 때 흐느껴 울기 시작하셨다. 요11:35
왜 여기서 예수님이 우셨을까?
(아래에 계속 설명 나옴)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유
주님은, 공생애 3년이 다 되어갈 무렵
이제 곧 체포되시고, 고문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장사되지만
사흘 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차츰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듣고 고개를 끄떡거렸지만, 제대로 실체를 이해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신 줄 믿었다.
메시아로서의 능력과 기적도 여러 차례 직접 목격했다.
그들 생각으로는, 능력의 메시아가 그렇게 잡히고 죽을 것이라곤 상상치 못했다.
이런 시점에, 예수님은 매우 근심하셨다.
제자들이 여전히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려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데,
그들이 십자가 사건 후에 부활을 경험 못 하면, 갈릴리로 뿔뿔이 다 도망칠 터인데,
그러면 성령의 불이 초대교회에 ‘다 함께 모인 자리에’ 임하실 수 없었다.
‘어떻게 제가 이들로 하여금 부활의 능력을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하시며 고민하시던 바로 그 때,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그래서 바로 그 기회를, 부활의 능력을 실제로 보여주는 기회로 삼기로 작정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나사로를 걱정하는 줄 아셨지만,
나흘이나 그 이상 동안 일부러 지체하신 것이다.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물론 그동안 예수님의 마음도 매우 불편하셨을 것이다.
나사로와 두 자매를 평소에 무척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당할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니, 지체하는 동안 예수님도 고생하셨던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고생과 슬픔은,
나사로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신 장면에서 잘 표출되어진다. (우신 이유①)
▲실망하신 예수님
어쩌면 예수님은, 두 자매가 예수님을 여전히 믿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비록 죽었지만 다시 살리시는 능력,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두 자매가 믿어주길 바라셨다.
그래서 앞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 요11:23
그런데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나 다시 살지, 현재 다시 살 것은 믿지 않았다.
마리아도 현재 다시 살 것을 믿지 않았다.
그 증거는, 마리아가 무덤 앞에서 목 놓아 펑펑 울고 있는 것이었다. 요11:33
그것도 늑장부리고 지체하신 예수님께 대한 원망과 아울러...
나사로 가족은 예수님과 정말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가친척보다도 가깝고, 어쩌면 12제자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함을 깨달으셨을 때,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우신 이유②)
▲신뢰하는 자에게... 더디게 응답하신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응답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해도 예수님이 신속히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있다. 응답이 더디고 지체된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러실 수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을 너무 사랑하고 신뢰하셨다.
또한 그들 가족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도 잘 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체하신 것이다.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응답을 더디 해도, 저들이 시험에 들지 않을 줄 아신 것이다.
혹시 여러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심으로,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거나, 응답을 지체하신 적을.. 경험하적이 있는가?
▲우리 기도를 보관하시는 하나님
저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은 그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고 믿는다.
종종 우리는, 자기가 기도하고도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모든 기도를 다 보관하고 계신다. He keeps them all!
시편에, 주님은 우리 눈물을 눈물 병에 담아 보관하신다는 구절이 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56:8
우리가 울면서 쏟아낸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위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천국에 눈물 병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고,
그 창고에 수많은 눈물 병이 있고, 그 병마다 성도들 각자의 이름이 적혀져 있고,
정말 하나님은 우리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서 보관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만큼 우리 눈물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우리 눈물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기도를 다 보관하실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기도를, 주님은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소망을 버리지 마시라!
▲1. 부활의 능력, 부활의 소망을 전하자!
이제 예수님은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신다.
마르다는 벌써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냄새가 난다고 만류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셨느냐?”
그리고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직접 선교사역에 종사하든지, 아니면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든지
선교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부활”을 굳게 믿어야 한다.
선교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 전하는 사역이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죽음을 정복한 복음’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그 모든 권세로 우리를 명하신다. “땅 끝까지 가라!”
단순히 우리가 ‘생명의 메시지, 생명의 말씀’을 가졌다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능력, 부활의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다.
▲2. 소망을 버리지 않는 것
우리 모두에게 마리아와 마르다와 같은 반응을 할 수 있다.
우리 기도가 예상한 시각에 응답되지 않을 때.., 기도를 파묻어버린다. 중단한다.
두 자매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소망과 기대까지 모두 다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큰 돌을 굴려서 막아버리고,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 좋은 어떤 사람도 병들었을 때, 계속 기도하다가 응답 안 되면,
기도를 중단해 버린다. 더 이상 그 문제로 기도하지 않는다.
가족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다가도,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다가도,
사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다가도,
자기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다가도,
몇 번 기도하다가, 응답 안 되면... 기도를 포기해 버린다. 더 이상 기도 안 한다.
미래를 위해서 걱정은 많이 하는데,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진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언에 이렇게 말한다.
소망이 더디 이뤄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병들게) 하나니.. 잠13:12
그래서 오늘날 마음에 병든 크리스천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이 계속 기도하고 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셨다.
죽은 나사로처럼, 여러분의 소망과 기도제목이 무덤에 굳게 갇혀 있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때가 되면, 주님이 정하신 목적을 이루는 계기가 될 때,
그 죽은 기도제목을 반드시 다시 부활시키실 것이다.
그 죽은 여러분의 소망을 반드시 다시 ‘일으켜 걸어 다니게’ 하실 것이다.
①소망은 영혼의 닻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이라고 하셨다. 히6:19
배를 정박시킬 때, 무거운 쇠로 된 닻을 바닥에 가라앉히면, 배가 정지된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리 저리 방황하는 이유는... 닻(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②소망은 우리 믿음의 바탕ground
‘믿음은 바라는 것에 실상’이라고 했다. 히11:1
'바라는 것 hope for' 은 곧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소망하는 것의 실상assurance'이다.
그러므로 소망을 잃어버린다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결과까지 된다.
소망을 되찾아야,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나가는 말
지금 우리가 소망을 잃고, 기도를 포기하고 중단한 분야가 어디인가?
기억하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신뢰하는 사람에게 기도응답을 지체하실 때가 있다.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 기도를 다 기억하시고, 우리 눈물을 그 병에 담으시고,
우리 탄식소리를 다 들으신다.
그러므로 결코 소망을 잃고 방황하지 마시라.
그 절망을 스스로 극복하고, 또한 절망 가운데 사는 세상을 향해
‘부활의 소망’을 갖고 나아가시라!
이 시간, 여러분이 소망을 잃어버린 분야가 어디인지 생각해 보시고,
다시 소망을 회복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린다.
<인터넷 설교 녹취, 07.08. 25. Dr. Bloomer, 열방대학 총장.
[주제별 분류] 기도 http://blog.daum.net/bible3/12646067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때 /요11:1-11/ 이동원목사
2014-11-29 10:40:33
크리스쳔 유머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머리가 비상한 청년이 어느날 기도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성경에서 천년이 하루와 같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지요?"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내가 비슷한 말을 했지,나의 시간 계산법으로 말이야. 그래서?" 청년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에게는 천불도 일불정도 밖에 되지 않으시겠지요?"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그렇다고 할수 있겠느니라, 그래서 네가 원하는것이 무엇이냐?"
청년이"그러면 하나님, 하나님에게는 그 아무것도 아니라 할수 있는 천불만 당장 저에게 주시지요"했더니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겠으니, 하루만 기다리게나-내 시간으로 말이야"-??
우리는 흔히 기도응답에는 영어로 Yes/No/Wait의 세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응답이 Yes로 나오면 우리는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그러나 응답이 No(아니오)이거나 Wait(기다려)의 경우 이 두가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기다려 이 기도제목에 대해 하나님이 No를 하신 것으로 판단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직까지는 응답되지 않았지만 언제인가 응답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단순히 기도응답의 지연이라고 믿고 계속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구하는 바를 거절하신 것처럼 보여져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기도 응답 간증을 듣게 되면 대부분의 기도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즉각적인 응답을 받는 것으로 인상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응답을 받지 못한 나는 기도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기도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적이고 즉각적인 응답의 경험은 오히려 예외일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의 기도는 기도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을 경험하지 못한채로 그리고 아직도 응답의 어떤 징후나 문제 해결의 희망없이 오기 하나로 버티고 있어야 할 때가 훨씬 더 많이 있을수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생애 동안 친근하게 지냈던 나사로 집안의 나사로가 병들어 눕게 되자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SOS를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나사로는 숨을 거두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되어 이런 상황에 던져졌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때 우리가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1.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위 고통이나 불행을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어찌하여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명백하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예외없이 질병과 죽음이 온다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사랑은 나사로나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일방적인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는것이 5절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가페라는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나사로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도 그를 찾아 왔습니다. 주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의 인생의 장에 질병과 죽음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질병과 죽음을 만나거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만은 의심치 마셔야 합니다. 질병이 우리의 건강을 빼앗아 갈수가 있지만, 죽음이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 갈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은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질병의 이유나 죽음의 이유를 때로 납득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를 향한 이런 주님의 사랑만 지속되고 있다면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거나 인내하지 못할 상황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울의 경험이요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받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없는 고난과 직면하여 싸워야 했습니다.
그는 배의 파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아야 했던 생명의 위험, 동족인 유대인들의 참소와 살해 위협, 수차례 감옥에서 겪은 여러 시련--이 모든 고난을 그가 견디고 이긴 비밀은 실로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8:35이하의 고백이 생각나지 않으시는지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이것이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37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의 싸인이 없어도 고통의 현실이 조금도 나아짐이 없어도 이것만은 붙잡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다는 것-이것만 확신하신다면 우리는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어떤 섭리말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통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오리라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4절의 말씀의 선포가 아니었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우리중에 누군가가 아니 나사로는 결국 죽지 않았는가고 물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예, 그는 물론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한 사실 말입니다.
그것은 치유보다 더 좋은 죽음을 이긴 놀라운 승리가 아니었나요? 바로 이렇게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 결론일 필요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그 분은 이 가정의 기도에 대하여 즉각적인 응답을 지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6절에서 나사로의 질병의 소식을 듣고도 그가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며 늑장을 부리시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 응답의 지연에는 더 좋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감취어져 있음을 믿을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사도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기 위하여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로 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응답되지 못한채로 그의 로마행은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는 대신 롬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감사할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갑자기 죄수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측할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고 로마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입성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좋은 섭리의 게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죄수로 압송되었기에 그는 교통비를 절감할수 있었을 것이고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당당한 보호를 받을수 있었고(경비 가드를 동반하고),
VIP죄수로 로마에 입성했기에 그는 로마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섭리인지요!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어도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된 궁극적인 선하신 섭리를 믿을수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물론 나사로의 죽음은 슬픔을 가져 왔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만에 이곳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에 도착하신 예수님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11:33을 보십시오."예수께서 그의(마리아)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사"--35절은 흔히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로 유명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고통은 고통이고 슬픔은 슬픔입니다.
예수께서도 슬퍼하시고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시지만은 않으셨습니다. 우시기만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 즉 부활의 섭리를 아셨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11:41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직 나사로는 무덤에 있었습니다. 아직 사람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를 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감사하실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인간사 최악의 상황이었던 죽음의 장에서 이토록 침착하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실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11:42절에서 우리는 이런 주님의 확신의 마음을 읽어 낼수 있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의 감사의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삶의 장에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오늘의 제자들도 우리의 삶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그리고 우리의 기도응답이 지연되고 있어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그의 사랑,
그리고 그의 신실하심을 믿을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감사의 영성으로만 우리는 이 시대의 고난을 이겨내는 승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나사로의 부활의 기적은 감사가 낳은 기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야말로 이런 감사의 기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근 이런 감사의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한 자매를 보고 놀라움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교회에도 다녀간바 있는 이지선 자매말입니다. 최근 출간된 이지선 자매의 책-"지선아 사랑해"는 공전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일관성있는 한가지 테마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처참한 교통사고로 고운 미모와 희망의 미래를 잃어버린 이 자매의 삶의 주제가 감사라는 것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 자매에게 그 고운 얼굴이 회복되는 치유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매는 "정말 내게 기적이 없었는가?"고 자신에게 반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 책에서 스스로 대답합니다.
"기적처럼 하나님은 제 눈을 지켜 주셨고 캄캄한 절망 가운데 있을때 하나님은 내 얼굴에 새 피부를 덮어 주시기도 했습니다.--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큰 기적은 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조차도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평안함이 늘 있습니다.
소망가운데 감사하는 가운데 임했던 '평안'--몸의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것--전쟁터속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거기서 오는 영혼의 평안함.
예전 얼굴을 다시는 찾을수 없을 것이라는, 여덟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제가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평안 때문이었습니다.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짧고 잘 움직여 지지 않는데 왜 오른손을 더 지켜 주시지 않았냐고 울며 불며 원망하는 게 아니라, 왼손이라도 오른손처럼 심하지 잘 쓸수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손가락을 절단하러 들어가는 그 수술실 앞에서는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술을 마시고 운전해 우리 차를 들이박은 그분께 조금도 미운 마음이나 분노가 생기지 않도록 제 마음을 지켜 주셨습니다.--정말 힘든 가운데도 어제는 숟가락 혼자 잡을수 있어서, 오늘은 또 문고리 잡고 열수 있어서 감사하며 기뻐할수 있는 마음--
그래서 매일 매일이 너무 행복한 마음이 제게 일어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제 힘으로나 제 의지로는 결코 일어날수 없는 일이기에--저는 감히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자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힘겹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기고 나면 주어지는 보물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수 없는, 가질수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저는 이제 알수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사고 나기 전 그 자리로 되돌려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바보 같다고 할지 모르겠지만--제 대답은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입니다.(왜냐하면)지금 제 안에 담겨 있는 고난이 가져다 준 축복의 보물들은 정말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안에 있습니다.--저는 기대합니다. 지금은 상상치도 못할 일들이 앞으로도 펼쳐질 것입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이 모습이 아니고는 그간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는 전할 수 없는 메시지들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아니고는 만날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며, 이런 모습의 저만이 할수 있는 일들을 분명 제게 맡겨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살아 계십니다.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이 감사의 계절, 우리도 지선 자매처럼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고 감사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기적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요한복음강해-55 /요11:1-16
2011-01-21 15:08:32
"영광으로 가는 길"
예수님께서 참으로 사랑하셨던 가족이 있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외로웠던(눅 9: 58) 예수님께서 친 가족처럼 아꼈던 가족들이었지요. 베다니에 살았던 나사로와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자'로 되어 있습니다. 마 26: 6-13에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셨을 때 한 여자가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은 적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이 여인과 정확하게 같은 여인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일이 마리아의 고향인 베다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동일 인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얼마나 주님을 사모했던지 자기의 가장 귀한 소유를 깨뜨려 주님께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주님 역시 마리아를 깊이 사랑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본분 11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다정했으면 이런 표현을 썼겠습니까?
이렇게 나사로를 비롯한 삼남매는 주님과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친 가족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만큼 위중한 병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다급한 자매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라버니의 병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들으신 주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 세 가지가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1. 주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주님께서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이 말씀의 참뜻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항상 예수님의 영광을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결시켜 말씀합니다. 요 7: 39은 주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았으므로 영광의 영이 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 12: 23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영광의 때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입니다.
이와 같이 적어도 요한복음 하나만 놓고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항상 연관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주님이 받으실 최고의 영광이며 영광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중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는 말씀은 두 가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나사로는 이미 치명적인 중병에 걸려 죽을 것을 미리 아신 주님은 이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위기(危機)는 하나의 기회가 되듯이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중대한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둘째로, 나사로가 앓고 있는 베다니로 가시는 것은 십자가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기에, 베다니로 가는 길은 제자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두려움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들은 주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나사로가 앓는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시던 그 곳에서 이틀을 더 계셨다는 것입니다. 끔찍이 사랑하는 친구라면 전갈을 받자마자 신속하게 베다니로 가셨어야 할 터인데 이틀 동안이나 그냥 더 머무르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요 11: 17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당도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 속에 들어간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체하신 이틀을 여기에서 나오는 나흘의 일부로 본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들으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서두르지 않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인상깊게 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뜸을 들이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당장 가서 중병을 고치는 것보다 완전히 세상을 떠난 뒤 무덤 속에 갇힌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때문에 일부러 그러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첫 번째 이적(요 2: 1-11)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누구의 설득이나 상황 변화 때문에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듣고서도 이틀 간을 머무르셨다는 사실은 어떤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주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의미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오늘 우리는 인생의 큰 위기의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병이나 사업의 실패나 갖가지 아픔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위대한 전기(轉機)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주님은 낮에 다녀야지만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듣고서도 이틀 동안 체류하셨던 주님께서 마침내 제자들을 향하여 입을 여셨습니다. 유대 지방으로 다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봉변을 당했던 곳으로 다시 가자니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 위험한 곳에 왜 또 들어가시려 합니까?" 하면서 만류했던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의 응답이 기괴합니다. 9-10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은 낮 시간이 12시간으로 보았습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면 낮이 꼭 절반에 해당하는 12시간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낮에는 12 시간이 있지 않느냐?"는 주님의 질문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로, 낮은 꼭 12 시간이라는 시간의 정량이 주어져 있기에 이 12 시간이 다 끝나기 전에는 낮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루 낮에는 12 시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낮에는 12 시간이 있지만, 이 시간의 정량은 꼭 12시간 밖에 없다는 제한된 시간을 강조하시는 것으로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은 미리 정해져 있는, 제한된 시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늘려보려고 해도 절대로 연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결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시간을 놓쳐버릴 경우에 회복할 수 없는 낭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낮은 12 시간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때 이 세 가지 의미를 다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하루 낮에는 12 시간이 주어져 있지만, 오직 12 시간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2 시간이 충분한 시간이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넉넉한 시간은 아니기에 결코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을 하신 뒤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햇빛이 있으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표면적인 의미와 심층적인 의미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표면적인 의미입니다. 낮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12시간, 다시 해가 져서 다시 뜰 때까지의 12 시간이 밤이라고 한다면 해가 떠 있는 낮에는 햇빛이 환하기 때문에 넘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찾아 올 경우 빛이 없기에 아무데나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밤이 찾아오면 여행은 종식이 됩니다. 낮에 할 일은 낮에 해야지 밤이 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진실로 강조하시고자 했던 것은 이와 같은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심층적인 의미였습니다. 여기서 빛은 주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고 낮은 주님이 활동하실 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세상의 빛이므로 낮은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기간이고 밤은 주님이 없는 세상, 악과 사탄이 지배하는 시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심층적인 의미를 본문의 전후문맥에 비추어 해석할 경우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얼마 전에 주님이 큰 봉변을 당하신 적이 있는 유대 지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위험하다며 만류할 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지금 위험하다고 해서 이 일을 늦추면 어두운 밤이 와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해야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시간이 지나가 버릴 경우 일할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결코 부족한 시간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충분히 귀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주어진 동안에 주님을 위하여 귀한 일을 해야지 낮 시간이 지나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두운 밤이 찾아오기 전에 주님께서 주신 귀한 일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건강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 "내가 왜 좀더 가족들과 함께 더 좋은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까? 내가 왜 좀더 하나님과 이웃과 교회 위해 좋은 일을 하지 못했을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빛이 환하게 비추이는 동안에 귀하고 아름다운 일, 많이 하십시오.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3. 주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는데 가서 깨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본문 11-12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우러 베다니로 가시겠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이 말씀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면 잘 됐습니다. 나사로는 다시 낫게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13절은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했는데 제자들이 오해해서 그가 잠들어 쉰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토를 달아놓았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거의 항상 잠자는 것으로서 묘사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은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마 9: 24)고 말씀하십니다.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절할 때에도 "잤다"고 표현합니다(행 7: 60). 또한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살전 4: 13; 고전 5: 16).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죽은 사람들은 결코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잠시 잠자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깨게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을 보면 마치 잠자듯이 평온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인들은 영면(永眠)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죽음은 잠은 잠이로되 일시적인 잠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잠든 나사로를 깨우기 위하여 베다니로 갑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주님이 나사로가 죽은 현장에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잠자는 이를 깨우듯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서 주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베다니로 가시는 길은 수치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입니다.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어두운 밤길이 아니라 찬란한 햇빛이 비추이는 낮길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닥치는 그 어떠한 환난이나 역경이나 위기도 주님께서 간섭하시면 영광의 길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