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고린도서 설교 모음

고린도전서 16장 설교 모음

Jessi J 2022. 10. 24.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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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고전16:13-24/ 유기성목사

2021-01-26 02:13:40

 

오늘이 고린도전서 마지막 설교입니다. 마지막이 되면 독특한 마지막의 영성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마지막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순간이 오면 무슨 말을 남길 것입니까?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먼저 강한 믿음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13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착한 것이 믿음 좋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착한 것 성실한 것과 믿음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착한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드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삼상 17:33-37을 보면 사울 왕의 군사들도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골리앗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골리앗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또한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벧전 5:7에서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했는데 염려가 주님께 맡겨집니까?

 

지구촌교회를 담임하셨던 이동원 목사님의 미국에 사는 둘째 아들이 지난 금요일 암으로 소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급히 미국으로 가신 이동원 목사님께서 오늘 새벽 보내오신 문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답을 모른 채로 믿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란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아들을 불러 가신 이유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고 영원히 찾지 못할 듯합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지요.”

 

지금 코로나19로 어려운 때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착하기만 해서는 두려움과 염려를 이길 수 없습니다.

착하기만 해서는 은밀한 죄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착하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도 그대로 살 수 없습니다.

착하기만 해서는 영적 미혹이 올 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신앙 가문, 정통 교단, 신앙 연한, 신앙 체험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여리고성의 보화를 숨겨 이스라엘을 큰 위기에 빠뜨렸던 아간은 정통 신앙 가문 유다 지파였습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땅 판돈을 거짓말로 헌금하여 죽어나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하고 용감해야 하고 힘을 내야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4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강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 원수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방의 허물과 약함을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의견을 주장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큰마음을 가진 자여야 합니다.

믿음이 강하면서 사랑이 많은 사람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보낼 당시, 교회 상황은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은 지금 이 말씀이 마음에 더욱 와 닿습니다.

저는 우리가 믿음이 굳건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면 반드시 어려움을 헤쳐나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씀이 이렇게만 끝났다면 뭔가 아쉬웠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이처럼 믿음이 굳건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나가서 말씀을 전하다보면 선한목자교회에는 정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교인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한목자교회 교인들은 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삽니까?’라고 묻지 않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질문에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화된 증인이 너무나 많은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은 편지 마지막에 몇 사람의 증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가야에서 첫 성도가 된 스데바나입니다.

:1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스데바나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요,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입니다.

 

스데바나를 소개하면서 바울이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곧 말씀대로 사는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바나를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기록하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로 사도 바울을 찾아와 방문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처럼 스데바나는 사도 바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가기 전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전도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상심한 마음으로 아가야 지방으로 왔는데, 아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전도해 본 사람은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 때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 더 이상 지혜의 말로 복음을 전하지 말고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와서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부터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느니라선포하였습니다.

 

그랬는데 스데바나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영접한 것만 아니라 삶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도자의 사명을 계속할 힘을 얻은 것입니다.

 

만나기만 하면 속 시원한 사람 있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답답한 사람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언급하였습니다.

:19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모이는 교회가 다 함께, 주님 안에서 진심으로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선교에서 좌절을 경험하였고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서 추방당한 신세였습니다.

같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하여 고린도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됨으로 만났는데 아볼로 부부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역시 교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기 위하여 고린도를 떠나야 했을 때 이들은 같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천막 만드는 일을 해서 바울의 선교비를 계속 대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증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증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문안합니다.

:20 모든 형제자매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이 인사는 눈물과 위로와 사랑의 인사였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로도 가족보다 더 사랑스러웠습니다. 목숨을 건 관계였습니다.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해서는 교인 사이가 고향친구나 학교 동창 군대 동기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사람들 사이는 육신의 가족보다 더 깊은 친밀함이 있습니다. 모든 사랑의 근원은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갑자기 너무나 두려운 말씀을 하였습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인사의 말을 씁니다”(:21) 하고는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22)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심한 말씀을 하시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 두려운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 사랑의 권면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지 순례 때, 갈릴리 호숫가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세 번 사랑을 고백했다는 곳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그 후부터 눈물이 왈칵 쏟아져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 모두 다 목이 메여 찬양을 하지 못하고 울먹였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구나!” 애통함이 큰 은혜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만큼 살지 못하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 이 말씀을 감사함과 사모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명심하고 명심하고 명심할 말씀입니다. 그러면 삽니다. 모든 문제에 답이 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22 ...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언제 주님이 오셔도 기쁨이 되도록 살라는 사랑의 권면인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할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늘 아이들의 대학 입시나 유학, 직장, 결혼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였는데, 어느 날 기도 중에 네 아이가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너무나 무심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바보같이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음을 깨닫고 회개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회학교 유년부 박영균 전도사가 설교 중에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장난치던 유년부 예배 시간이 너무 그립다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 모여 예배하게 될 날을 준비하면서 확실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언제 또 예배를 드리지 못할 상황이 될지 모르니 얼굴을 마주 보며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때 확실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이 말이 너무 생경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영적으로 속히 돌이켜야 할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2017년 성지순례 때 풍랑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성찬식을 했습니다. 심하게 부는 바람으로 파도가 심하여, 배가 크게 기울었습니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짐들이 쏟아져 내리며 다들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찬식을 했습니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어 비틀거리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데, 특별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풍랑이 이는 상황에서 주님과 연합한 자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은 "두려워말고 계속 나아가라" "나만 의지하여라, 나만 기대하여라" 하시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도 은혜가 되었지만 풍랑 속에서 받은 은혜는 더 크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코로나19 확산 중에 그 때 생각이 납니다.

 

어려운 일이 한 둘이 아니지만 오직 주님을 사랑하며 더욱 믿음에 굳게 서서 모든 이들을 사랑만 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평생에 간증의 해가 될 것입니다.

 

찬양: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오늘의 기도

주님, 어서 오소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겠습니다.

제가 직면한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실천하며, 포기하지 않으며, 더 많이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헌신 /고전16:13-18/ 곽창대 목사

2020-05-31 11:04:38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고린도교회는 제법 튼튼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성결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세속에 타협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 근친상간의 죄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를 일으킨 자를 바르게 징계하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거룩성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둘째는 질서가 없고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들 사이에 불화가 깊어졌고, 여러 개의 파당이 생겨서 하나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에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눈물로 쓴 편지였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상에 대하여 거룩한 교회로 바르게 설 것과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모든 일에 사랑으로 협력할 것을 권면합니다(13~14). 바울은 이 두 가지가 고린도교회의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안으로, 교회에 있는 좋은 일꾼들의 지도를 잘 따르라고 이어서 권면합니다(15~18).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장로들과 집사, 교사들과 같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는 핵심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교회를 세운 바울에게 대표단을 파견하여 직접 자문을 구하기로 하고,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를 세웠습니다(17). 이에 세 형제들은 에베소로 건너가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세 형제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교회를 향한 순전한 사랑과 열정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18). 기쁨이 생겼습니다(17). 바울은 세 형제들의 헌신을 통해 변화될 고린도교회의 아름다운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세 형제들을 알아줄 것, 다시 말해서 그들을 인정해주고 존경하고 또 그들에게 감사하고 협력할 것을 권면했습니다(18).

 

건강한 교회는 교회의 일꾼들이 시원시원하게 일하고 모든 교우들이 그 일을 시원시원하게 받아줌으로써 서로를 용납하고 기뻐하고 협력하고 세워주는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의 일꾼들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부족한 부분을 사랑으로 메우고 협력하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의 교우들은 교회 생활이 즐겁습니다. 우리 교회, 좋은 교회라는 긍정적인 인식이 생깁니다. 이런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형제들 중에서 스데바나와 그의 식구들을 고린도교회의 일꾼으로 즐겁게 추천합니다(15~16).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아가야의 첫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가야에 들어가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과 함께 고린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처럼 스데바나 집 식구들은 고린도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스데바나 집 식구들이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것을 고린도교회가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만 아니라 지금도 변함없이 성도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교회 일에 앞장서서 일할 때 모두 기쁘게 복종하고 협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세 형제들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부탁했습니다. 특히 스데바나 집 식구들을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그들의 지도력 아래 서로 사랑으로 협력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할 때 고린도교회가 새롭게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안수집사와 권사를 세우는 목적은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선출된 이들이 교회를 위해 모범적으로 헌신한다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이들의 아름다운 헌신을 본받아 즐겁게 협력할 때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안수집사와 권사는 스데바나처럼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섬기다는 원어로 손님들이 식사를 잘 하도록 시중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전서에서도 안수집사와 권사가 성도들을 잘 섬기기 위해 구비해야 할 여러 덕목들을 분명하게 명시합니다(딤전 3:8~13).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협력하여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장로와 안수집사(권사)의 중요한 덕목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딤전 3:12).

 

그러므로 집사와 권사로 선출된 자들은 헌신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 더욱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온 가족과 함께 성도 섬기기를 작정하고, 집사로 권사로 임직 받을 때까지 소정의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우들은 안수집사와 권사로 선출되신 분들을 진심으로 축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 앞장서서 수고해야 할 자들이므로 이전보다 더 존경하고 항상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전문

오늘 주일오전예배 후에 안수집사와 권사를 선출하는 공동의회를 엽니다. 이에 앞서서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교회 일꾼들의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 일행이 주후 50년경 고린도에 세운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설립될 당시 바울은 고린도에서 적어도 1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고린도교회가 제법 튼튼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고린도교회는 시끄러운 교회, 문제가 많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 과정에는 적지 않은 문제들이 생기지만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고린도교회가 위치하고 있었던 고린도의 환경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세상의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때 교회는 문제에 휩싸이게 됩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고린도는 그 당시 아주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스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요 무역과 상업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타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로 들끓었습니다.

 

점점 고린도는 부와 사치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다양한 전통 종교들과 수많은 이교의 신전들이 공존하는 우상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특히 고린도하면 방탕과 쾌락으로 이름난 도시였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 윤리적으로 자유분방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환경 가운데서 고린도교회는 세속의 거센 도전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성결을 유지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세속에 타협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 근친상간의 죄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를 일으킨 자를 바르게 징계하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거룩성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둘째는 질서가 없는 교회, 하나가 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들 사이에 불화가 깊어갔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진리조차도 일치하지 못했습니다. 파당이 여러 개 생겼고 각자 자기편의 주장과 자랑을 앞세웠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제멋대로 설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이 같은 소식을 들은 바울 사도는 아주 안타까웠습니다. 사도적 복음과 가르침을 왜곡하는 거짓 교사들까지 들어와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에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눈물로 쓴 편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중에서 13-14절이 고린도전서의 요약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두 가지를 권면입니다.

 

1) 13: 세상에 대하여 고린도교회가 거룩한 교회로 바르게 서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의 명령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깨어 있어라!”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라!” 세속의 도전 앞에서 흔들리거나 뒤로 물러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 편에 굳게 서라는 뜻입니다.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주님의 군사가 되어 세상의 불의와 방탕과 거짓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라는 뜻입니다. 종합하면 교회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거룩하게 서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교회의 대사회적 사명을 천명한 것입니다.

 

2) 14: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모든 일에 사랑으로 협력할 것을 권면합니다. 하나 되지 못한 교회에 꼭 필요한 교훈입니다.

 

이 두 가지, “세상에 대하여는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것, 교회 안에서는 사랑으로 협력하는 것이 고린도교회의 당면한 과제였습니다. 이 과제를 이루기 위해 사도는 이어서 실제적인 방안을 제시합니다.

 

거룩한 교회,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라는 중대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가 지금 당장 내디뎌야 할 첫 걸음을 바울은 아주 명쾌하게 제시합니다. 그 첫 걸음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치유와 성숙을 위한 긍정적인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실제적이고 적절한 해결책이었습니다.

 

그것이 15-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너희 교회에 이미 좋은 일꾼들이 있는데 그들의 지도를 잘 따르라는 것입니다. 17-18절을 먼저 보십시다. 고린도교회는 그 당시 이방에 세워진 교회치고는 성도의 수가 꽤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 지도층을 형성한 일꾼들이 제법 있었다고 보입니다.

 

장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집사들과 교사들 그리고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는 핵심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교회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자주 모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견이 쉽게 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파당의 골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의견에는 합의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를 세운 바울 사도에게 대표단을 파견하여 직접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바울에게로 파견할 대표들을 뽑았습니다. 그 대표들이 17절에 기록된 세 형제들입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입니다. 이 형제들은 고린도교회에서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었던 청장년의 일꾼들이었을 것입니다.

 

세 형제가 에베소로 건너가 바울을 만났습니다. 세 형제와 바울은 머리를 맞대고 장시간 고린도교회를 염려하며 대화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대책도 강구했을 것입니다.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몇 날을 같이 지내면서 바울은 이 세 형제들에게서 고린도교회의 밝은 미래를 보았습니다.

 

세 형제들의 교회를 향한 순전한 사랑과 열정을 본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18). 기쁨이 생겼습니다(17). 이 형제들이 고린도교회로 귀환할 때 그들 편에 편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바울은 세 형제들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는 세 형제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강도 높은 신앙의 훈련을 받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바울은 세 형제들을 신뢰하게 되었고 이 형제들의 헌신을 통해 변화될 고린도교회의 아름다운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 세 형제들을 알아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18). “알아주라는 말은 이 형제들이 교회의 문제들을 수습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일할 때 인정해주고 존경하고 감사하고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교회의 일꾼들이 소신껏 일합니다. 그들의 사역을 모든 회중들이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답답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일꾼들이 시원시원하게 일하고 모든 교우들이 그 일을 시원시원하게 받아줌으로써 서로를 용납하고 기뻐하고 협력하고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의 일꾼들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주님 외에는 완벽한 일꾼이 없습니다.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피차 부족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넓은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부족한 부분을 사랑으로 메우고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교회가 우리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의 교우들은 교회 생활이 즐겁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뿌듯한 긍지를 가집니다. 우리 교회, 좋은 교회라는 긍정적인 인식이 생깁니다. 이런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세 형제들 중에서 스데바나 형제를 더 크게 신뢰하면서 그와 그의 식구들을 고린도교회의 일꾼으로 즐겁게 추천하고 있습니다(15-16). 스데바나 형제와 그 식구들의 섬김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과 함께 협력하며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스데바나 집 식구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천거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들이 아가야의 첫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아가야는 고린도와 아테네를 포함하는 그리스 남부 지방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곳에 들어가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스데바나 집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과 함께 고린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때 스데바나 집 식구들의 희생과 수고는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스데바나 집 식구들은 고린도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둘째는 스데바나 집 식구들이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것을 고린도교회가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스데바나 집 사람들을 고린도교회의 일꾼으로 당당히 천거했습니다. “성도 섬기기로 작정했다는 말은 성도 섬기는 일을 우선수위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번역에 따르면 성도 섬기는 일에 열심이었다는 뜻입니다. 스데바나 집 식구들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당시에만 아니라 지금도 변함없이 성도들을 잘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바나가 가족들을 대표하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린도교회의 회복을 바라며 바울에게로 달려 온 것이 그 확실한 증거입니다. 실로 스데바나 집 식구들은 고린도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려고 헌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교회 일에 앞장서서 일할 때 모두 기쁘게 복종하고 협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세 형제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부탁했습니다. 특히 스데바나 집 식구들을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그들의 지도력 아래 서로 사랑으로 협력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할 때 고린도교회가 새롭게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수집사와 권사를 선출합니다. 안수집사와 권사를 세우는 목적은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선출된 이들이 교회를 위해 올바르게 헌신한다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이들의 아름다운 헌신을 본받아 즐겁게 협력할 때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교단 헌법에 명시된 안수집사와 권사의 자격과 직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집사의 자격:

1) 35세 이상 65세 이하의 남자 세례교인으로 무흠하게 5년을 경과한 자

2) 좋은 명성과 진실한 믿음과 지혜와 분별력이 있는 자

3) 행위가 복음적이고 생활에 모범이 되는 자

4) 본 교회에 등록한 후 2년 이상 경과된 자

 

집사의 직무:

당회의 지도 아래 교회의 봉사와 서무, 회계와 구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

 

권사의 자격:

1) 45세 이상 65세 이하의 여자 세례교인으로 무흠하게 5년을 경과한 자

2) 행위가 복음에 적합하고 생활에 모범이 되는 자

3) 좋은 명성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자

4) 본 교회에 등록한 후 2년 이상 경과된 자

 

권사의 직무:

당회의 지도 아래 교인을 심방하되 특히 병자와 궁핍한 자, 환난을 당한 자, 시험 중에 있는 자와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힘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안수집사와 권사는 스데바나처럼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원래 섬기다라는 원어의 뜻은 식탁에서 시중든다는 뜻입니다. 손님들이 식사를 잘 하도록 시중드는 것이 섬긴다는 뜻입니다.

 

안수집사와 권사가 성도들을 잘 섬기기 위해 구비해야 할 덕목들을 디모데전서에서 분명하게 명시합니다.

 

(딤전 3:8-13) [8] 이와 같이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여성 지도자, 권사들도) 이와 같이 (장로와 집사들처럼)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오늘 우리가 살펴본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섬김에 있어서 온 가족이 함께 협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본 대로 스데바나 집 식구들의 헌신을 바울이 크게 칭찬했습니다.

 

안수집사와 권사가 교회를 잘 섬기려면 안수집사와 권사의 가정 전체가 합심하여 교회에 헌신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디모데전서의 말씀에서도 장로와 안수집사(권사)의 중요한 덕목들 가운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는 항목이 들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는 안수집사와 권사의 후보들 가운데 누구를 뽑아야 할지 대충 정하셨겠지만 오늘 들으신 말씀을 따라 다시 한 번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안수집사와 권사로 선출된 자들은 헌신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 더욱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온 가족과 함께 성도 섬기기를 작정하고 집사로 권사로 임직 받을 때까지 소정의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은 안수집사와 권사로 선출되신 분들을 진심으로 축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 앞장서서 수고해야 할 자들이므로 이전보다 더 존경하고 항상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안수집사와 권사의 선출로 인하여 우리교회가 더욱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세 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합시다.

 

1) 안수집사와 권사를 선출하는 공동의회가 은혜롭게 진행되기를 기도합시다.

2) 시험 들거나 신앙의 손해를 입는 분들이 없기를 기도합시다.

3) 모든 교우들에게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공동의회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라 /고전16:13-14,22

2019-09-05 18:35:47

 

할렐루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라."입니다. 고린도전서 1613절 이하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눕니다. 제목을 한 번 따라해 주세요.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라.",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라."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강한 것 같지만 누구나 약한 부분을 갖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핸디캡도 있고, 부끄러운 과거의 실패의 경험도 있고,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는 깊은 상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그러한 나의 약함이 핸디캡이 상처가 과거의 실패가 더 이상 나를 붙잡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한 모습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큰일을 행하고 나서도 말 한 마디에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왕비가 내일 이맘때 즈음 너도 그들처럼 죽겠다고 하는 그 말 한마디에 두려움이 들어와서 마음이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절 빨리 좀 데려가 주시옵소서."

요즘 말로 말하면, "인생 못 살겠습니다. 나 좀 빨리 천국에 데려가 주세요." 이렇게 고백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문제가 다가오고 어떤 어려움이 다가오고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절대로 마음이 무너지면 안 되고, 절대로 약해지면 안 되고,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되고, 절대로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우린 주님 안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자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1. 믿음에 굳게 서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두 번 보냅니다. 첫 번째 편지가 고린도전서이고, 두 번째 편지고 고린도후서입니다. 첫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믿음에 굳게 서라. 믿음에 굳게 서라. 고린도전서 1613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깨어라! 절대로 영적으로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 영적으로 늘 긴장하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위기는 언제 오느냐, 영적으로 잠을 잘 때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 믿을 때 그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예배드리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열심히 섬기고 모든 일에 앞장섰던 그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 그 모습에 그런 열심이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자기도 모릅니다. 어느 날 열심이 사라졌어요. 예배에 대한 간절함도 없고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영적인 잠을 잘 때인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일 날이 되면 아침부터 일어나서 단장을 하고, 오늘 교회 가는 날인데 어떤 옷을 입을까, 이걸 꺼내 입어보고, 꺼내 입어보고 그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부터 주일이 왔어, 내가 그래도 교회 집사인데 안 가면 안 되겠지." 이러고 교회를 나왔다고 하면 그는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는 한 분도 안 계시지만 저쪽 가면 몇 분 있을 거에요 아마.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늘 긴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잠을 잔다는 것은 신앙이 나태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그 나태해짐 속에 악한 원수 마귀가 우리를 덥석 물어가려고 여러 가지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긴장 상태를 잃어버리면 마귀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절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는 구경만 하고 있다가, 영적인 잠이 들 때 와서 덥석 물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체조선수들이 늘 신경 쓰는 것이 몸무게입니다. 1970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718일에 여자 체조 경기상 처음으로 만점 받은 코마네치라고 하는 선수가 있는데요, 이 코마네치 선수가 14살입니다. 루마니아 공산 치하에 있던 그 나라에 14살짜리 이 소녀가 키는 153cm, 몸무게 39kg, 이 어린 소녀가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전까지 누구도 10점 만점에 10점 만점을 맞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 코마네치가 10점 만점 2단 평행봉 그 위를 날아오르면서 10점 만점을 받았고, 무려 그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 3, 은메달 1, 동메달 1개를 얻었어요. 그 기록을 보면 금메달만 올림픽에서 5, 유니버시아드에서 5, 그 외 유럽선수권, 무슨 선수권에서 금메달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늘 몸무게를 신경 쓰느라고, 39kg에서 1kg도 더 늘어나면 안 되니까, 늘 먹는 것을 절제하고 조심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니깐요, 금메달 3개 따고 나서 마음이 느슨해졌어요. 긴장을 풀어버리고 나서 그 다음에 먹고 싶은 것 참았던 것, 막 먹었어요. 그래서 2년 후에 무려 10kg가 더 늘어가지고 평행봉 위에서 하다가 미끌어지고 떨어졌잖아요. 그러나, 그 이후 다시 정신 차리고 노력을 해서 다시 금메달도 따고, 세계적인 또 코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도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잠이 들어서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열심도 없다고 하면 우리는 회개해야 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깨어라, 깨어라, 깨어 일어나라, 더 이상 잠자지 마라." 11시 예배에 혹시 어제 밤잠 못 자고 왔다가 졸린 사람은 번쩍 정신이 들거야 아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42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 어떻게 우리가 깨어 있습니까. 성경은 깨어 있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기도함으로 깨어 있으라, 찬양함으로 깨어 있으라,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찬양과 기도와 감사가 우리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말씀으로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늘 우리는 깨어 있어야 됩니다. 깨어 있어야 되요.

 

운전하는 사람이 졸면 대형사고가 나잖아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블랙 껌이라고 해서 졸음이 올 때 먹는 껌이 있습니다. 그 껌을 먹으면 바짝 정신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운전을 하면서 사고를 안 내기 위해서도 억지로 잠을 깨우는데, 우리가 영적인 사고가 안 나려면 늘 깨어 있어야 되요. 깨어 있어서 강한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잠자지 않습니다. 늘 깨어 있습니다. 영적인 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잠이라는 것은 나태함입니다. 열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졌을 땐 벌써 졸기 시작한 거에요. 예배를 자주 빠지면 이미 잠이 든 상태입니다. 예배를 빠지는 것 뿐 아니라 예배를 빠져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퍼질러 누워있으면 큰 위기에 빠진 상태입니다.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을 이 귀한 시간에 주님 앞에 나와서 이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알고, 여러분 평생 예배드리기를 힘쓰고 믿음의 사람으로 전진 또 전진해 나가서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영적인 잠에 들어서 다시 죄의 노예로 살지 말고, 자유인으로 승리자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빌립보서 4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라. 데살로니가전서 3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15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고,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서 굳건히 서서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하고만 함께 일하시지 절대로 영적인 잠을 자고 게으른 사람하고 일하지 아니하십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여호수아서 1장에 나오는데 19절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큰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믿음의 용사가 된 후에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 됩니다. 둘째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할 것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614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으로 행하라.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바로 사랑실천입니다. 사랑실천. 사랑을 해야 되는 것을 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옆에서 어려움을 당하는데도 나의 일이 아니니깐 관심을 갖지 않고, 그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낙제점인 것입니다. 이웃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위로해주고, 그를 일으켜 줘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유명한 배우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가지고 온 뉴스에 그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울증이 옛날에는 열 명 중에 한 명이었는데, 요즘은 일곱 명 중에 한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깐 일곱 사람 중에 한 명을 우울증 증세가 크고 작든지 간에 있는 것입니다. 우울증을 고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우리 순복음 교회에 와서 주여 삼창하면 됩니다. 할렐루야!

 

그게 우울증이 좀 깊으면 기도원 들어가서 기도굴에서 몇 시간 부르짖으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주변에 이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안돼요. 그러면 이런 잘못된 극단의 선택을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와 절망을 갖다 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실천을 다른 것이 아닙니다. 꼭 내가 가진 물질을 통해서 누구를 섬기라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에 병든 사람, 가정에 문제가 생겨서 깊은 상처 속에 감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찾아가서 같이 울어주고, 같이 기도해주면 그것이 바로 사랑실천의 모습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잖아요. 나누라는 말을 하면 아멘이 없어져요. 갑자기 조용해져요. 여러분, 여러분 다 부자잖아요. 여러분 다 부자이지 않습니까. 부자예요. ? 온 우주 만물을 다 갖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니까. 얼마나 부잣집 자녀로 우리가 태어났습니까?

 

여러분 다 복덩어리가 된 거예요. 큰 부자가 되었으니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이제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절을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이 신앙생활의 뿌리라고 한다면, 소망은 큰 줄기가 되고, 사랑은 열매가 됩니다. 그런데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나무줄기가 높이 뻗었는데 열매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과나무에 사과가 안 열리면 그 사과나무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포도나무에 포도가 안 열리면 그 포도나무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크리스천 나무에 사랑의 열매가 없으면 그것이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까지 내게 누가 무엇을 주는 사랑만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에만 만족했다고 하면 오늘부터는 그 모습을 바꾸어서 남이 나를 알아주던 안 알아주든지 간에 내가 받은 것을 나누고, 또 나누고, 또 나눌 수 있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 섬김, 나눔, 낮아짐 이것이 사랑입니다. 정말 사랑하니깐 또 주고, 또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은 거예요. ? 사랑하니깐.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입니다. 남들은 '저 집 아이가 문제가 많아' 해도 자기의 눈에 보기에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내새끼인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 사랑이예요. 여러분, 이 사랑을 갖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로 불렸던 이 땅에 왔던 한 선교사, 서서평 선교사를 소개합니다. 미국 남장로교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선교사' 7명 중에 한 사람으로 뽑힌 이 서서평 선교사는 독일계의 미국인인데 엘리자베스 쉐핑이라고 하는 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한국식으로 이름을 서서평으로 만들었습니다. 32살의 젊은 나이로 미혼으로 한국에 와서 평생을 섬기다가 그는 주님 앞에 부르심을 받았는데. 사실 저희 때만 해도 선교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조금 우리보다 나은 삶을 사셨는데 이 서서평 선교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와서 오히려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검정 고무신 신고 얼굴 치장한 적도 없고 그냥 남루한 옷을 입고 과부, 고아들 돌봤습니다. 열네 명의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애들을 데려다가 자기 집에 같이 살았고요. 소박맞고 버림받은 여인들 서른여덟 명과 같이 살았어요. 선교후원금이 오면 그들을 돌보느라고 그 헌금을 다 썼고, 그리고 전남 광주에서 그분이 평생 사역을 하시는데 광주 양림촌에 가면 거지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 거지들을 데려다가 다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 갈아 입히고 음식을 차려주고 또 지나가다가 한센병 환자들 보면 사람들 다 침 뱉고 피해가고 돌 던지고 그랬는데 그들을 데려다가 목욕을 다 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히고 음식을 대접해서 보냈던 정말 예수님처럼 살았던 분입니다.

 

서서평 선교사가 1928년 평양에서 열린 한국 간호협회 총회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의 종교에서 구제를 제해버린다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제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제 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치켜들고 목이 터질 만큼 예수를 부르짖고 기독교 신자라 자처한다 할지라도 구제가 없다면 그것은 참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는 쉰네 살의 나이로 천국에 갔는데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재산은 담요 반 장, 동전 일곱 개, 강냉이 가루 두 홉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동료 선교사가 그의 장례식에 왔다가 침대 머리맡에 쓰인 글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진정한 성공은 섬김에 있는 것입니다. 대접받고 박수갈채 받고 높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 낮아지고 더 섬기고 더 겸손할 때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광주시 최초로 시민사회장이 열렸는데요. 그 장례행렬에는 수백 명의 한센병 환자들과 거지들 또 많은 사람들이 울며 그 장례 그 상여를 뒤따라 가면서 "어머니~ 어머니~" 울며 외치면서 그 장례행렬을 따라갔다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하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 양 서거" 그리고 부제를 "재생한 예수" 이 땅에 예수님의 몸을 입고 왔다고까지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칭찬했던 것입니다.

 

한 여인이 이 땅에 와서 저 광주에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교의 삶을 살았지만은 그가 남긴 이 사랑의 흔적은 지금도 기억되고 있고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을 사랑하라

 

이것은 사랑실천의 사람입니다. 이 사랑실천의 삶에 근본정신은 주님을 사랑한데에 있습니다. 오늘 22절은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사랑해야 되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을 고린도교회에 썼냐 하면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받고도 영적으로 교만해서 타락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경고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린도교회에 복을 주셨는지 고린도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충만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침과 각종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서를 보면 그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은혜 충만하고 성령충만하면서 교만해져서 교회 내 분파를 만들었습니다.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파, 바울파, 파를 만들어 가지고 파벌싸움을 했습니다. 자기끼리 맞는 사람들끼리 교회 내 파벌을 만들어가지고 주도권 싸움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웠지만은 결국 자기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따라서 저들이 움직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경고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면 안 된다. 주님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이 교회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이 교회 내에 파벌을 만들고 나누고 다툰다면 그것은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고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잘못된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죄를 짓는지 아십니까?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 타락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그러한 모습은 있으나, 그 속이 썩어져 들어가서 주님 사랑보다 자기 사랑을 더 위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알아주면 봉사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그것은 다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남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섬김의 모습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로 섬기든지, 남녀 선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하던지, 찬양대로 나와서 봉사하던지, 오케스트라로 나와서 봉사하던지, 어디서 무슨 봉사를 하든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감격 속에 주님을 섬기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지, 내가 이렇게 새벽에 나와도 아는 사람 한 사람도 없고 내가 "어휴."이랬다면 받은 은혜가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쁨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감사함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길 때 기쁨과 감사로 섬기면 하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0절은 말씀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러분,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나의 삶의 모습이 주님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 모습이 주님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가정주부는 가정에서 음식을 할 때도 그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직장인이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할 때도 그 모습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 사업을 하면서 그곳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전공 분야를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분들이 그곳에서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모습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므로 주님께 인정받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그러한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 세상처럼 문제투성이로 살면 안 됩니다. 자질구레하게 살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정말 믿는 사람답게 격이 있게 존경받고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 박수갈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신앙 생활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 분야에서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정상에 오르면 세상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 , 저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 저렇게 복을 받은 거야. 저 사람이 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인정해 줄만 해." 여러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시든 간에,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리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최선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비전센터가 어떻게 지어졌습니까? 나가서 폐지 수집을 하던 할머니가 그 없는 돈을 모아서 옥합을 깨드려 주님 앞에 드려서 저 비전센터가 지어졌습니다. 헌금을 많이 한 분이 있지 않습니다. 다들 십시일반 작은 정성이 모여서 저 비전센터가 지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원래 예산도 없었고, 또 이 비전센터를 세울 그 많은 비용이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금액이 단돈 일 원도 빚지지 아니하고 다 채워져서 아름답게 비전센터가 완공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워싱턴 제일 순복음교회를 지을 때도 삼백 명 교인밖에 없었지만, 옥합을 깨뜨렸던 분이 많았습니다. 외교관으로 오신 분이 자기 아들 대학 등록금을 내놨습니다. 미국 대학에 들어가면 육만 불, 칠만 불 하는데, 외교관 월급이 얼마 안 되니까 몇 년 치 모았는데, 그날따라 교회 건축한다니까 내놨어요. 또 어떤 분은 세탁소에서 바느질 하는데 한 달 수입이 천 불입니다. 한 달에 돈 백만 원밖에 못 버는데 이년 치 그 모았던 돈을 다 갖다가 옥합을 깨뜨려 바친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바친 분도 있었고 그렇게 옥합을 깨뜨린 분으로 말미암아 그 교회가 아름답게 지어져서 단 일 불도 빚지지 아니하고 온전하게 교회를 지어 헌당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예수 믿고 주님을 섬기려면 이렇게 멋있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감동시켜드리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문을 활짝 열고 우리에게 복을 쏟아부어 주실 것입니다. ? 그 믿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증명된 그러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생동안 복의 복을 더하시는 복덩어리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 /고전16:13-24/ 김병삼 목사

2016-03-18 14:56:00

 

[고린도전서 1613-24]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아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

존 오트버그의 [선택 훈련]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한번은 캘리포니아 주 남부의 한 교회에 교역자 자리가 나서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런데 그 교회의 교인 중 한 명이 이 일을 놓고 기도하던 중 내가 그 교회에서 사역하게 되겠지만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내게 말했다.

 

당시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그 교인의 남편도 나와 같은 자리에 지원을 했다. 내가 합격되면 남편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남자는 한때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를 하나님이 정해 주신 짝으로 확신했다. 그는 라디오에서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듣다가 그녀가 정말로 천생배필이라면 다른 방송국에서도 그 노래를 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정말로 다른 방송국에서도 그 노래를 틀어 주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그 여자는 지금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내가 원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나는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할 뿐이다. 혹은 결정의 부담감을 벗으려는 것일 뿐.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앞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끝까지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올바른 결정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을 흔드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앞설 때, 나의 소원으로 인해 하나님의 소원을 잃어버리게 될 때가 아닐까요?

 

마지막 사도 바울의 인사에서 여러분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13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이 마지막 말씀을 아프리카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잠시 쉬는 동안 준비했습니다. 한국에서 들리는 소식은 북한이 준전시 상황을 선포하고 전쟁의 위협 가운데 있을 때였죠.

 

인터넷에서 접한 뉴스에는 북한에서 백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군에 지원하고, 한국에서는 전역을 앞둔 병사들이 50명이나 전역을 연기하고, 예비군들이 군복을 챙긴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전격적으로 회담이 성사되고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소식도 한국으로 가기 전 아부다비에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담화를 보게 되었는데, 전시상황에서 취한 젊은이들의 모습에 너무나 자랑스럽다는 회견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어떻게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나 염려하지만, 위기에 처하면 자리를 잡는 대한민국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 같은 것 말입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보면 금방 쓰러지고 말 것 같은데, 그래도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안심이 되고, 그리고 그 핍박의 시간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격려할 말이 있는 것 말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죄악이 깊고 어두워도 깨어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안심이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사도 바울의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마음이 안심되고, 또한 자랑스러움이 있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었던 말은, 그가 계속해서 하던 말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은 계속해서 반복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모든 봉사의 일로 인해 서로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수 있는지를 보았기에 말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너무나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열심을 내면 낼수록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생기고, 사역의 열매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교만이 생기기 때문에,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이 얼마나 독선적이고 위선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교회를 향해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이어서 사도 바울은 스데바나라는 인물에 대하여 말하지요. 15절에서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옵니다. “스데바나는 아가야의 첫 열매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

 

15절 말씀에서 스데바나를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가야는 고린도의 한 지방 이름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첫 열매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할 때, 이 말씀의 배경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아덴에서 설교하지요.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소위 실패를 맛보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아덴에서 세상의 철학으로 변증하며 복음을 전파하다 실패한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의 모습입니다. 고린도전서 23절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그리고 결심합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바로 생각해보세요. 사도 바울이 잘 나갈 때, 명성을 떨치고 기적을 일으킬 때, 믿고 따르고 헌신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있을 때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믿었고, 또 사도 바울을 믿고 그 옆에서 사역을 도왔던 사람이 바로 스데바나입니다.

 

그러니 이 스데바나가 사도 바울에게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런 새로운 결심과 떨림 가운데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찾아와 결심하고 헌신했던 사람이 바로 스데바나였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15절입니다. “스데바나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라고 말입니다. 뭔가 역동성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고린도 교회가 그 어려운 때, 음란과 우상이 난무한 곳에서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면 이런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바나를 이야기하며 사도 바울의 마음에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좀 작정하고 믿고, 누군가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도 좀 작정하고 섬길 수 있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헌신과 섬김이 자신의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헌신이었다는 점입니다.

 

18절에 있는 말씀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 느낌이 확 와 닿지 않습니까?

 

혹시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십니까? 아니면 마음이 시원하십니까?

 

누군가 여러분의 핸드폰에 이름이 찍혀 벨이 울리고 있는데 빨리 받고 싶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소리가 빨리 꺼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저도 사도 바울과 같이 목회를 하는 사람이니까, 이 말이 더욱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제일 답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일을 시켜 놓으면 괜히 시켰다고 후회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징징댑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안 돼요.”

이런 사람하고는 안 돼요.”

게다가 인정해주지 않고, 칭찬해 주지 않고, 격려해 주지 않으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일을 시켜 놓으면 관리하기가 더 힘들고, 삐질까 봐 염려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 말입니다.

 

또한, 답답한 사람 중의 하나는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설교를 하고 공부를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돌봐 주어도 자라지 않고 어린아이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회하면서 많이 돌봤던 성도가 있습니다.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고 목사님이 여기저기 병원도 소개하고 수술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늘 목사님을 만나면 징징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과 또 상담하게 되었는데, 역시 변화된 것이 없이 징징댑니다.

 

목사님도 그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말을 하고 말았답니다.

집사님 염려하지 말고 죽으세요. 제가 장례를 잘 치러드릴게요.”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지만, 그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유기성 목사님의 책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에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유기성 목사님이 독일에 집회를 갔을 때 만난 사람입니다. 태권도를 가르치는 아주 신실한 사람, 그리고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좋아하며 식사 대접을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자"는 말씀을 듣는 순간 결심을 했답니다.

더 이상 나를 주장하지도 말고, 답답하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답답해하지도 말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나는 죽는데 그 사람들이 안 죽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 하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마음에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혼자가 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고모가 있었는데 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시집도 가지 않고 헌신하며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고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를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한 집회에서 갈라디아서 220절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제 크리스천이 된 이 소녀는 잔소리가 심해 관계가 어그러진 고모와 이대로 지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죠.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참 인상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는 본문 20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아마도 모든 목회자의 소원일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잘 지내는 모습 말입니다. 어느 교회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들이 아름답기는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늘 너무 열심이라는 것이죠. 열심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열심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들이 아픔을 경험하죠.

 

초대교회 당시에 거룩한 입맞춤은 애정을 나타내는 인사법이었습니다. 성만찬을 하면 입맞춤을 교환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인사는 얼마든지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가식적일 수 있습니다. ‘거룩한이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거짓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안아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문안할 좋은 동역자가 있었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 안에도 이렇게 서로 문안할 동역자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가식적이지 않은 이런 거룩한 입맞춤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문안할 수 있는 거룩한 공동체에 대한 목자의 마음 말입니다.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8개월이 넘도록 고린도 교회를 공부하며 참 많은 문제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심각한 문제들이 초대교회나 지금의 교회와 같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칭찬하는 말로 편지를 마감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문제와 말썽 많은 사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이유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목회는 문제 있는 사람과 방해하는 사람,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 절대로 못 해요. 신실하게 돕는 믿음의 동역자 때문에 할 수 있죠.”

사실 이 부분에서 말하기가 참 조심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회의 동역자고, 어떤 사람이 목회의 장애가 되는 것일까요?

적어도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사람의 생각과 말에 따르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가 동역자라고 말할 때는 나의 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동일한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을 의미하겠지요.

 

이 부분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회란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사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목회자이기에 더욱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가장 신나는 때는

우리 교회의 누가로 시작하는 자랑이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보세요.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너무너무 자랑스러운 것이죠. ‘스데바나가문은 아가야의 첫 열매였는데, 그들의 신앙이 변치 않았을 뿐 아니라 성도 섬기기를 작정한 사람임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 그리고 아가이고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그런 상상을 합니다. 너무나 많은 문제 가운데 속이 타고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이들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차분해지고, 다시 힘이 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에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사도 바울의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키고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청량제와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제가 말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목회자인 제가 늘 교인들에게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고 말하는데,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라고 가르치는데, 정작 저도 위로를 받을 때 사람을 통해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 동역자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말입니다.

 

언젠가 어떤 원로장로님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고 나서도 참 감사한 것은 만나 교회 장로라는 말이 그렇게 큰 기쁨과 위로가 되고, 담임목사가 김병삼 목사라고 말할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세속적인 문제들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서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또 한사람의 가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사도바울에게 이 부부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지친 몸으로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아굴라입니다.

 

그는 글라우디오 황제 때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를 떠나게 하므로 그곳에 와서 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도착한 곳에서 그들은 사도 바울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막을 짓는 일을 하고 있었죠.

 

아마도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며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던 동역자였던 것이죠. 로마서 16장에는 이 부부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대 찬사가 나오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16:3-4)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이들은 함께 고린도에서 사역을 감당했고, 이제 에베소로 떠날 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사도 바울과 함께 갑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을 돕기 위해서였죠. 어쩌면 사도 바울의 이런 인사가 여러분에게 참 부담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모든 사람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처럼 될 수는 없지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은 사람이 있으므로 인해 사도 바울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그 집에 있는 교회도라는 말인데, 아마도 이 부부의 집에 교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집을 내놓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헌신으로 말미암아 로마와 에베소 고린도의 교회가 세워졌던 것 같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사도이지만, 이들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역할 수 있었을까요?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에 세워진 많은 교회 중에서 성도의 집에서 시작한 교회들이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분당의 만나 교회에서 개척을 시작할 때, 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리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평양 대부흥의 근거지였던 장대현 교회는 성경으로 벽을 도배했던 최치량의 집에서 시작한 교회가 모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성공이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귀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 에클레시아입니다. 아마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서 모였던 성도들의 모임이야말로 진정한 교회의 모체가 아니겠습니까?

 

더욱 아름다운 것은 부부가 함께 헌신하며 사역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이런 가정들을 가슴에 그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 말입니다.

 

가장 큰 축복을 지금 고린도 교회에 그리며 사도 바울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사철의 봄바람 불어있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가정의 소소한 일들을 부부가 함께 고민하며 기도하는 것도 정말 큰 축복입니다. 부부가 함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부부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제가 참 어려운 도전을 여러분에게 하고 싶습니다.

시대를 거스르는 것 같지만 그런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가 꽤 큰 규모이지만, 성도들을 위해 모일 공간이 많이 부족합니다. 이제는 자기 집을 개방하고 사람들을 초청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맞벌이하는 부부들에게, 공부하는 자녀들에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 우리의 가정이 그렇게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참 큰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유학 시절 학생들에게 집을 참 많이 개방했습니다. 그 작은 집에 4~50명씩 초대해 밥을 해주면서 말이죠, 가만히 보면 그것이 저희 가정에 참 큰 축복이었고, 믿음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유학생들이 한번 왔다 가면 메뚜기 떼가 지나간 것처럼 냉장고를 초토화시켰지만 말입니다. 학생으로 공부하던 그 시절 참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가장 귀하게 사용하셨던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때가 있는 듯합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가정이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경고와 권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꼭 하고 싶었던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카터 콜론은 그의 책 [예수만 남겨질 때까지]에서 이런 비유를 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을 피할 수 없다

 

그의 집에 불이 났을 때 유일하게 타지 않은 것은 벽난로와 굴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불에 견딜 수 있도록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재료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그 재료들은 열에 닿을수록 강해지는 것들이었다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경고임과 동시에 권면의 말이었습니다.

 

22절에는 두 가지 경고가 나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그리고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먼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리라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무섭게 들리시나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받은 은혜를 자신들이 잘나서 받은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만연한 문제가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자기 자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주님을 사랑하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므로 행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곧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가 한 일이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 한 일인지, 나를 사랑해서 한 일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 우리가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3)

참 신기하죠?

 

사랑이 없이도 누군가를 위해 몸을 내어 불사르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명예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자기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의 의를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할 수 있는지, 모든 만물의 거짓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22절에서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문안 인사를 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많이 하던 인사말 중의 하나입니다. ‘마라나타라고 하죠.

 

주님께서 어서 오시기를 바란다는 것은, 주님이 오실 때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죠. 주님이 오실 때는 마지막 심판의 때인데, 심판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죠.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을 하기 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리고 우리 주여 오서 오시옵소서

관계가 성립되나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는 일을 한다면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죠.

저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One Thing”

 

뉴욕타임스와 아마존이 선정한 베스트셀러 1위에 선정된 책이 있습니다. [The One Thing]이라는 제목에 이 복잡한 세상에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게리 켈러와 제이 파파산이 공동으로 집필한 이 책에서 성공의 비결을 이야기 하는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사업하며 성공과 실패를 돌아보며 흥미로운 패턴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되었는데, 단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게 되었을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는 것이죠. 탁월성과 성과는 우리의 초점을 얼마나 좁힐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단 말이죠.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읽던 책이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할 일이 많다.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도 참 많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탈진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은데, 단 한 가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경영학의 대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참 멋진 말을 했습니다.

효율이란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고 효과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효율과 효과를 균형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닌가요? 신앙과 삶의 균형, 영적인 삶의 균형, 일과 가정과 교회의 균형.

그런데 우리 삶의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 자체가 허황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우리에게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도록 절대로 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균형이라는 말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을 때가 종종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요한 문장을 하나 가슴에 새겼습니다.

우선순위와 균형은 함께할 수 없다!”

우선순위에 집중하면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균형에서 벗어나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균형을 깨뜨려야만 가장 중요한 일에 우리의 삶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사업의 원리든, 신앙의 원리든, 우리의 삶은 가장 중요한 것을 할 때,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생에 참 중요한 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을 함으로 우리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것을 손에 잡으려면 놓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기준이 조금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의 기준이 생긴다면 말입니다. 조금 더 우리의 삶이 명확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을 뵐 때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다면 아니, 주님이 오시는 그 마지막 때를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 /고전16:13-18/ 곽선희 목사

2014-11-26 17:43:54

 

 

타임지(The Time)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중의 한 사람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lisabeth Kübler-Ross)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분은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죽기 직전의 사람들 무려 600명을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만나서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의 마음상태, 그들의 생각, 그들의 신앙고백을 정리해서 Death and Dying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60년대 초반에 제가 이 책을 읽었습니다. 크게 감동을 받아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결과로 저의 학위논문을 Eschatology - 종말론 논문으로 쓰게 된 것도 이분의 영향이 컸습니다.

 

Death and Dying, 세계를 놀라게 했던 대단히 중요한 책입니다. 그런데 퀴블러 로스박사가 2004년에 눈을 감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책 하나가 또 있습니다. Life Lessons라고 하는 책입니다. 인생수업이라고 번역된 책인데요,

 

이것이 바로 지난 6월 달에 출간되어서 바로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전문가고 죽음심리학에 대한 책을 수없이 많이 썼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하는 인생수업, 인생공부는 무엇일까 생각해볼만 합니다.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많은 책들이 집중적으로 성공을 지향하며 성공을 중심으로 책을 쓰고 있지만 그는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잘못된 거 같다고. 저자가 말하는 인생의 숙제라는 것은 바로 행복입니다.

 

성공과 행복을 절대로 하나로 보지 않습니다. 성공했다고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또 성공하지 못했다고 불행한 사람도 아닙니다. 성공과 행복을 별개로 생각할 수 있는 지혜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바이지만,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 후회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좀 더 베풀걸!' 좀 더 좋은 일하고 좀 주면서 살 걸……,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못준 것을 후회합니다. 베풀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뉘우칩니다.

 

또 하나는 '좀 더 참을걸!' 조금만 더 참았으면 내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는데 참지 못한 그 조급함이 여러 가지의 후회로 우리 가슴에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좀 더 즐길걸!' 순간순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는데 왜 즐기지 못하고 그렇게도 스스로 괴롭히며 살아왔던가! 그렇게 뉘우친다고 합니다.

 

삶의 큰 상실이라고 하는 것은 내면의 생명력이 죽어간다고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내면적 생명력' 그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몇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라. 나는 어디까지나 납니다. 그 누구의 부속물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손해 봐선 안 됩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망가져도 안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할 것입니까? 그래서 온전한 자유 온전한 자유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찾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아직 죽지 않은 인생을 살지 말고 상실과 이별의 수업을 하라. 여러분 중간 중간 우리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게 밤에 자는 겁니다. 여러분, 잘 때 뭐라고 기도합니까? '잠잘 자게 해주시고 그리고 나쁜 꿈꾸지 않게 해주시고 내일도 건강해서 일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주로 기도합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가 아주 간단합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한 기도가 바로 임종기도이면서 동시에 잠자리 기도입니다.

 

여러분, 잠자고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잠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는 연습입니다. 하루하루를 그날로 마감을 해야 합니다. "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자야 됩니다. 이걸 잊지 마셔야 됩니다.

 

여러분, 자동차를 타고 벨트를 매십니까? 벨트를 맬 때 기도하지요. 뭐라고 기도해야겠습니까? "무사히 가게해주세요." 당신 맘대로? 그러지 말고 그때도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꽝하면 바로가게 해주세요." 안 그렇습니까? , 사고란 언제든 있는 거구요 우리는 순간순간 마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경험이 필요해요.

 

저는 가끔 여행을 합니다. 저는 여행을 떠날 때 비행기 오르는 그때부터 깨끗이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전화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화 받지도 않습니다. 나는 가노라.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좀 끊어버리는 거예요.

 

미련을 너무 가지지 마세요. 그럴 거 없습니다. 제 사랑하는 친구 한사람은 핸드폰을 안가지고 다닙니다. 절대 안가지고 다닙니다. 왜요? , 집을 떠났으면 생각도 떠나야지 그 뭘 그렇게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연락받고 연락하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훨훨 떠나는 마음……. 이렇게 상실과 이별을 그리고 마지막을 항상 현실적으로 경험하며 살아야 되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바로 그 마음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슴 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이라고 할 때 이 한 시간 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얼마나 벅찬 일입니까? 안 그래요? 다시 또 못 볼 거예요. 이 시간이 다시 오는 게 아녜요. 그런고로 항상 감동적인 감격적인 격동적인 그런 순간을 살아가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소중히 여기라. 우리가 관계를 복잡하게 하고 있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퀴블로 로스는 말합니다. "용서를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라." 여러분, 누구와 맺힌 것이 있습니까? 용서하세요.

 

어떤 억울한 일이라도 다 용서해버려서 내 영혼을 자유하게 해야 돼요. 누구를 미워해도 안 되고 미움을 받아도 안 됩니다. 원한을 품어도 안 되고 원한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항상 자유한 마음, 용서를 통하여 영혼을 자유하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한상복 선생님의 배려라고 하는 책은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배려가 인생을 바꾼다고 말합니다. 남보다 뛰어나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겁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뛰어나야한다는 것은 경쟁심입니다. 여기에 매여 사는 동안 힘듭니다. 그냥 나는 나대로 사세요. 그것이 바로 사는 길이요 행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요, "저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18)"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원케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한 때 유행했던 말 있죠? "산소 같은 여자" 그거 좋은 말입니다.

 

산소 같은 여자. 얼굴을 봐도 산소 같고 음성을 들어도 산소 같고 만나도 산소 같고 생각만 해도 산소 같아요. 바꿔 말해볼까요? 탄소 같은 여자도 있어요. 보기만 해도 답답해요, 전화 한통만 와도 가슴이 쾅해요. 이런 사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전화가 와도 산소 같은 사람이면 전화를 받으면서 벌써 기분이 좋은데 어떤 사람은 "아무개입니다……", "아이쿠, 또 무슨 소릴 할라나?" 그런 교인이 있어요. 유독이 좌우간 만나면 "나는 어떻게 살죠?" "그래, 밥 먹고 살지 뭘 어떻게 살아?" , 이런 사람 참, 탄소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18)" 어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까? 어떠했기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몇 가지를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15절에 스데바나의 집을 말하고 있는데 온 집이 더불어 다 예수를 믿어요. 온 집으로 더불어 라는 의미가 시원하게 합니다. 제가 옛날에 심방을 많이 해봤습니다마는 온 집으로 더불어, 온 집안이 다 모여서 심방오신 목사님을 영접하면 정말 가슴이 시원해요. 그러나 어떤 집에 가면 10년 동안을 가도 여전히 혼자예요.

 

"그래, 남편이 예수 믿을 때가 가까옵니까?" 그러면 한다는 소리가 "목사님, 그 사람 예수 안 믿어요." 아주 답답합니다. 이렇게 온 집안이 예수를 믿고 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면 시원하고요 그렇지 못해서 집을 나간 자식이 없나, 뭐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집안이 화목치를 못하고 전체 집안이 구원받지 못했을 때 답답한 거예요.

 

또 한 가지는 여기 보니까 " 섬기기로 작정했다(15)" 그랬어요. 그 집안은 주님과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했다는 귀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가정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 집안은 교회 섬기기로 주님을 섬기기로 작정을 했어요.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랬습니다.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우리 온 집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 섬기는 것을 그 가정의 목적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켄사스주 상원의원 프랭크 칼슨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유명한 분이며 저자로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은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하며 많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제가 읽으면서 감동을 주는 몇 마디가 있어요. 하나님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누굴까?

 

첫째, 결함을 메울 줄 아는 사람. 둘째, 이익만을 좇지 않는 사람. 셋째, 정직한 사람. 넷째, 진실한 마음의 사람. 다섯째가 중요합니다.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양심을 가진 사람, 변하지 않는 사람. 그래요, 우리 교역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분도 누구냐 하면 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저 한번 딱 나왔다 하면 몇 십 년을 똑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수십 년을 봐도 들락날락해서 저 사람이 교회에 나올지 안 나올지 염려가 되는 사람이 있어요. 변하지 않는 양심! 아주 중요합니다.

 

결단이 있는 그런 사람이 시원하게 합니다. 마음이 놓입니다. 안심합니다. 그분은 틀림없는 분이다.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더구나 주를 섬기기로 결심했어요. 봉사 받으려는 마음이 아니고 봉사하려는 마음이에요. 봉사하기로 결심한 그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20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기려 하는 사람, 오로지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역자에게도 그렇습니다. 마음을 편안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 섬김 받으려는 사람이에요. 섬김 받으려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준다 안 알아준다 말이 많아요.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다 보니 여러 사람을 괴롭혀요. 그러나 섬기려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아주 중요한 기술적인 얘깁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랬어요.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17)" 왜요? 모든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사랑하되 멀리 있어요. 스데바나는 가까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봉사할 수 있었어요. 이제 말합니다. 부족한 것이라는 게 뭡니까?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는 Blue Ocean Strategy입니다. 남하는 거 따라하지 않아요. 너는 거기서 봉사하고 나는 이걸 하겠다. 네가 그걸 하겠다고 그러면 나는 이걸 하겠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겠다.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전에 우리 교회에 이한빈 장로님이라고 계셨어요. 우리 온 교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던 그런 어른인데요. 그분의 특징이 뭐냐? 늘 교회 나와 앉을 때는 꼭 성가대 앞에 사각지대에 앉아요. 잘 들리지도 않고 목사님이 잘 보이지도 않는 자리, 꼭 거기에 앉아요.

 

그리고 인사하러 나갈 때 보면 부지런히 나가서 또 앞에서 인사를 해요. 내가 언젠가 물어봤어요. "장로님은 왜 언제나 그 자리에 앉습니까?" "그거요? 다른 사람들이 앉기 싫어하는 곳이니까."

 

여러분, 앉는 자리도 봉사예요. 다른 사람 앉기 싫어하는 데를 골라서 빈자리를 골라서 떡 앉으면 되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딱 정해놓고는 누구도 못 앉게 해요. 자기가 먼저 와서 맡아놨다고 떡 핸드백 갖다놓고……. 봉사는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 싫어하는 곳에 내가 앉고 다른 사람 안하는 것을 내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또한 "함께 일을 하고 수고한다(16)"고 했습니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하고 협력하는 사람, 협력하는 이 마음이 시원하게 합니다. 독자적으로 혼자서 하는 교만한 봉사와는 목적이 다른 거란 말입니다.

 

, 이러한 모든 사람은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너희는 이런 사람을 알아주라(18)"고 했습니다. Understanding! 수고하는 사람의 그 수고를 우리가 알아드려야 합니다. 또 하나는 "복종하라(16)"고 합니다.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이런 숨은 봉사자 이런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분들과 함께하면 나도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 전쟁터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많은 사람을 구출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이라고 하는 간호사를 아실 겁니다. 그녀가 영국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상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물질로 남을 도울 수 있다. 물질이 없을 때는 말로도 도울 수 있다. 물질도 말도 없을 때는 눈물로 도울 수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꼭 물질만 생각하는 게 아녜요. 정말 부드러운 말 한마디로, 마음으로, 아니 눈물로, 간절한 기도로 섬길 수 있는 것이에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까?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까?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그런 사람으로 남아야 될 것 아닙니까?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시원하고 나를 만나는 사람이 기쁘고 나와함께 하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그렇게 살고 그렇게 끝을 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그런 아름다운 그런 새로운 덕이 우리 가운데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도 저희를 주의 전으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먼저 우리가 주님을 만나며 우리의 가슴이 시원해질 수 있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우리와 만나는 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살게 해주시옵소서. 듣는 소식이 답답하고 보는 일들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중심에는 자유가 있고 언제나 시원한 생수로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남자답게 강건하라 /고전16:13/ 옥한흠 목사

2014-11-11 15:19:44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가 20개 정도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교회가 있는데,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약점을 가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완벽한 교회나 이상적인 교회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끌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하고, 흠이 있고, 실수를 많이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약한 교회, 결함이 많아 고통을 많이 겪는 교회에 더 마음이 끌리곤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 면에서 탁월했고, 열심과 열정에서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 그 교회를 개척한 사도 바울의 마음에 늘 근심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그들이 가진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권면하면서 교훈한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본문은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찰나입니다. 그런데 이때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를 위해 권면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힘주어 권면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이 말씀에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원문에 보면 "깨어라,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라, 그 다음에 남자다워라, 마지막으로 강하라."4개의 말이 독립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번역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번역은 이 4가지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번역해 놓았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깨어 있으면, 믿음에 굳게 서 있으면 남자답게 강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남자답게 강건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깨어 있으라.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번역을 더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 하나님나라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고통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굉장한 존재로 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일하고, 밤이 되면 자고, 또 다시 아침을 맞이하면 일어나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늙어가고, 죽는 반복된 삶을 살면서 한 생을 보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향해 예배 드리기 원하는 모든 성도들을 특별하게 보십니다. 곧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강한 자로 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 땅에 펼 수 있는 능력자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자답게 강건하길 원하시지, 연약하고 힘이 없어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존재를 원치 않으십니다. 남자다운 강인함, 남자다운 용기, 남자다운 힘을 가진 성도가 되길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남자다운 것입니까? 어떤 것이 강한 것입니까? 고린도전서를 비교해보면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파쟁을 일삼았습니다. 서로 편이 갈려 비판하고, 욕하고, 미워하면서 싸웠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 같은 짓입니다. 영적으로 약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파벌을 지어 상대방을 헐뜯고 싸우는 교회, 전부다 영적으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자, 상대방의 허물과 약함을 덮어줄 수 있는 자, 누구나 각자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고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큰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강한 사람이요, 남자다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적으로 좋지 못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워낙 고린도라는 도시가 성적으로 부패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갑자기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옛날 습관으로 돌아가 성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남자답게 강건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거부할 줄 아는 힘을 가진 사람, 한 번은 죄를 범하더라고 회개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그 죄와 손을 잡지 않는 내면의 거룩한 힘을 가진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고, 회개하고 나서는 또 죄를 짓고, 그래서 울고 또 기도하고, 그래도 다시금 죄를 짓는 것이 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짓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당사자들끼리 의논하고 합의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대도 불구하고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안 믿는 법관 앞에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내 재산이다 네 재산이다 하면서 서로 싸웠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입니까?

 

물론 법에 호소해야 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법정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차라리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욕되게 않도록 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법정에까지 문제를 끌고 가서 기어코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이단이 들어와서 성도들을 부추겼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그것은 바울의 이야기일 뿐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나느냐?"

 

그러자 약한 사람들은 믿음이 흔들리면서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답게 강건하다는 것은 내가 한번 진리라고 믿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것이 진리임을 확인했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약한 부분을 극복하고 우뚝 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믿음이 흔들리는 나약한 자를 원치 않으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내 젊음도 드리겠습니다. 내가 가진 재산도 주님의 것이오니 드립니다. 한번 밖에 없는 내 인생을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신앙생활 하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요즘에는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의 뉘앙스가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남자의 여성화가 너무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남자'는 강함과 용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맞벌이 생활을 하면서 가정의 경제권을 여자들이 일부 주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남성들은 과거의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로써는 세상에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남성 이미지, 즉 강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기를 지탱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마틸자 켄터는 "남성은 지금 혼란에 빠져서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헤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유형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 어떤 유형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남자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국의 경우 80%의 남편들이 아내와 함께 분만실에 들어가 고통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기저귀 광고에 아빠가 어린 애를 안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치약 광고에 아빠가 어린아이의 이를 닦아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분유 광고에 아빠가 어린 아이를 안고 등장합니다. 이처럼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미국에서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증축하려고 교회 설계를 맡겼는데, 나중에 완성된 설계도를 보고 그만 놀랐다고 합니다.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를 갈아 끼우는 받침대를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1월 일본에 갔을 때, 어느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본의 초등학교 남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15% 가까운 남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여자화장실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가정에서 엄마로부터 "애야, 서서 오줌을 누면 사방에 튀니까 앉아서 누어." 하고 교육 받아 와서 이제 앉아서 오줌 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에 와서도 자기도 모르게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남자가 여성화 되어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자' 하면 부드럽고 섬세하고 자상한 이미지가, '여자' 하면 거칠고 강하고 박력 있는 이미지가 머리 속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는 지금과 같은 그런 이미지로 남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강함의 상징으로, 여자는 부드러움의 상징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남자의 강함과 여자의 부드러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부부가 되게 하셨고, 남자의 강인함과 여자의 부드러움이 서로 뜻을 모아 세상을 헤쳐나가는 힘이 분출되도록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명령하십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느 세계에서 남자답게 강건하길 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아주 다른 두 세계가 있는데 우리는 이 두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면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 세계입니다. 하나는 공적인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세계입니다. 하나는 육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입니다.

 

여기에서 외면 세계, 공적인 세계, 영적인 세게는 우리가 쉽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긴 모습이나 학벌, 지위, 환경을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 영적인 세계는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놓쳐 버리기 쉽습니다. 내면의 세계는 어떤 잘못이나 이상이 생겨도 금방 증세가 포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상반된 두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명령하는 세계는 어느 세계입니까? 바로 내면의 세계입니다. 이 내면의 세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혼, 속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평범하게 표현하는 말로 바꾸면 마음입니다.

 

이렇게 내면 세계, 마음, 속 사람, 영혼이 남자답게 강건하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내면세계는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세계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이새의 아들 7명이 서서 사무엘 앞에 선을 보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을 뽑으려고 하는데, 7아들 중 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인지 찾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외모가 아주 매력적이고 건장한 장자를 보자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고 마음이 뺏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 내면세계, 곧 우리의 영혼, 속 사람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 내면의 세계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눕니다. 이 내면의 세계에서 우리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속 사람, 내면 세계는 하나님의 눈이 떠나지 않으시는 거룩한 지성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너의 속 사람이, 내면의 세계가 남자처럼 강건하라." 왜냐하면 나의 진짜 자아는 내면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받쳐 줄 수 있는 받침대는 문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건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잘 짓고 튼튼한 건물은 내부의 보이지 않는 골조가 얼마만큼 튼튼하게 잘 설계되었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면 전찰을 많이 탑니다. 갈 때마다 제일 부러운 것이 이 전철 시스템입니다. 너무나 잘 되어 있어서 굳이 자가용을 끌고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리타 공항에서 내리면 특급 전철로 동경까지 옵니다.

 

그리고 동경에서 컨벤션이 모이는 하꼬네까지 다시 전철을 바꾸어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가면서 주변 경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집은 다 낮습니다. 지진 때문에 집을 높게 짓지 못하게 합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보면 변두리 도시나 마을 같은 곳에 높아야 2, 3층입니다. 그리고 그 집들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진이 나도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8~10층 되는 조그마한 아파트가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지진이 나면 저 아파트 어떻게 하죠? 왜 저렇게 높게 건축했죠?"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런 경우는 특수 공법으로 설계했습니다.

 

지진 강도가 7이어도 집이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내부 구조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런 아파트는 비쌉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의 10, 15층 아파트와 다를 게 없지만 내부 골조가 강하기 때문에 지진 7도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겉으로 멀쩡하게 잘생기고 건강하고 남자다워 보여도 별볼일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자아가, 속 사람이, 영혼이,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강하냐 입니다. 그 사람을 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받침대가 얼마나 강한 지, 지진 7도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한 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현대인을 일컬어서 '쫓겨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경쟁 속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를 두고 정신 없이 쫓기고 밀리면서 삽니다. 그래서 무한경쟁의 전투병으로 최일선에 동원되어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화, 정보화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긋지긋 아픕니다. 국내화도 골치가 아픈데 세계화는 오죽하겠습니까? 책 한두 권 읽고 소화하는 것도 우리의 지성이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은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이 경쟁해야 되고, 같이 달려가야 되고, 같이 뛰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에게는 바쁜 것이 습관이요, 바쁜 것이 모든 삶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는 무서운 스트레스의 희생물이 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받는 이 외부적인 압박을 처리할 내면의 벽이 약해져 어떤 때는 붕괴될 때가 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무력증에 빠집니다.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뭔지 모르게,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떨리고 두렵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갑자기 잠이 달아나 버리고 어떤 생각에 집착하여 불안에 사로잡혀 한밤을 그대로 보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부로부터 무엇인가 무너져 내리는 증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속 사람이 약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내와 자녀들 앞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고 처신하는 남편, 아빠, 그러나 그 내면에는 흔들림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초조함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8장에 가면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여러 번 전투를 해본 아주 노련한 지휘관입니다. 그런데 전투를 앞두고 있는 마당에서 블레셋 군대를 보자마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 마음이 크게 떨렸다고 나옵니다.(삼상28:5) 사울은 외관상 신장이 크고 건장한 사나이입니다. 게다가 왕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두려움 마음을 묶어 둘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수만 명의 군대가 있었지만 떨림으로부터 자기를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았지만 이미 사울을 떠난 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하시지 않자, 그는 너무나 불안하여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약해져 버린 사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전사하고 맙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흔들리면 우리의 전 인격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속 사람이 강건하라고 말씀합니다. 똑같이 전쟁하는 마당이었지만 다윗은 달랐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18:29) 다윗은 사울처럼 그렇게 건장한 사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두려워 하거나 요동하지 않고 적군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는 속 사람이 남자답게 강건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내면 세계는 얼마나 단단하게 무장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얼마만큼 힘을 갖고 있습니까? 어떤 압력을 받아도 붕괴되지 않을 만큼 여러분의 심령은 강하게 무장이 되어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세계를 남자답게 강건하게 하려면 2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에 굳게 서야 됩니다. 여기에서 깨어있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41) 그러므로 깨어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지 않고 졸고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영적으로 흐릿한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합니까? 요즘 좋은 예가 있습니다. 현 정부의 햇볕 정책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21세기에 가장 악한 공산 집단, 어떻게 보면 가장 무서운 독재정권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햇볕 정책 때문에 대부분의 젊은이들의 마음은 무장해제를 당해 버렸습니다. 안보의식이 흐릿해져 핵을 만든다고 해도 웃고만 있습니다.

 

불바다를 만든다고 해도 남의 일 보듯 합니다. 선제공격을 한다고 해도 웃을 뿐입니다. 핵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이면 그것은 정치공세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결해야 되는지, 어디에서 정신을 차려야 되는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문에서 봤겠지만 프랑스 르 몽드(Le Monde)지가 우리를 비꼬고 있습니다. 북핵 때문에 전 세계가 지금 야단법석을 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흔치 않는 태연함이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 같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된 결과를 책임져야 됩니다.

 

영적으로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잠을 자면 마귀의 유혹이 지금 문 밖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이 세대가 지금 얼마나 무서운 상황으로 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눈 앞에 가까이 이르렀는지를 분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내 영혼이 병이 드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내가 죄 속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지금 죄를 짓는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우면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는 자기 머리털이 깎이는 줄도 몰랐던 것처럼 영적 으로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잠들기 쉬운 것을 피하려면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되 기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의 전문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적당히 해선 안되고 잘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입을 열면 정신 없이 쏟아 놓는 유창한 기도를 잘해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도에는 침묵 기도도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도 내 마음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토할 수 있는 기도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과 만나 모든 사정을 고하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기도의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전문가가 되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전문가가 되려면 먼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개인 훈련이나 공동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선수가 경기장에서 자유 하려면 훈련이라는 무서운 규율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은 경기장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훈련을 통해서 기도의 전문가가 되면, 어떤 시험이나 세상의 공격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에 게으르거나 서툴다면 내면의 세계가 약해져 있기 때문에 공격에 쉽게 당황하고 시험에 빠져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루에 기도를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를 정하십시오. 기도의 목표를 가진 사람은 밤 1, 2시까지 눈을 비비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일어나 기도해야 되는데, 어떻게 새벽 2, 3시에 자서 기도시간에 제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목표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은 즐거움까지라도 필요할 때는 양보하고 절제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 속 사람이 깨어 있기 위한 전문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일단 기도 기간을 정했으면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면서 기도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나 혼자 기도가 잘 안되면 공동체 기도에 참여해서 훈련 받으십시오. 새벽기도도 있습니다.

 

심야 기도도 있습니다. 다락방 기도도 있습니다. 중보기도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 기도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기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인터넷을 하면서 시간 보내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과연 몇 분의 일이나 됩니까? 물론 시간의 장단을 가지고 기도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5분도 눈감고 있지 못하는 삶을 가지고 영적으로 대단한 것처럼 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힘을 못 씁니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30분은 기도한다. 아니면 15분은 기도한다. 기도가 잘 안되면 눈감고 앉아 있다가 일어난다."는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훈련 하듯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면, 나중에는 기도의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1~2분 하다가 벌떡 일어난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계속 지적으로도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내면 세계는 약해지고 붕괴하기 쉽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모르면 믿음의 뿌리를 박을 토양마저 없는 셈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식한데 어떻게 그 말씀이 내 길에 등불이요, 내 인생 길에 빛이 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내 믿음이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든든히 뿌리를 박고 서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숙달되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분량으로 따지면 대단한 분량입니다. 더욱이 깨알 같은 글씨에 그림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책을 적당히 읽어 넘길 수 있습니까? 펴기만 하면 금방 내 마음에 감동이 올만한 그런 말씀으로 차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70%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내용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성경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적어도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숙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무장을 하는데 말씀은 검과 같습니다. 손에 칼을 들고 쓸 줄 모르면 그 칼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무장을 하려면 숙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놓고 묵상하며 생활합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시다. 우리의 삶 전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오늘날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살아야 된다. 나에게 일어난 이 조그마한 사건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석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을 가지고 우리가 사고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말씀의 터가 굳어집니다. 그리고 나의 속 사람이 강해집니다.

 

저는 설교가이지만 설교를 하면 할수록 성경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제 자신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해서 이렇게 오래도록 침묵하시는가?' 성경에 보면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즉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너무나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우간다에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했던 폭군 이디아민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정치망명하여 그곳에서 28년 동안 배부르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낚시하고 수영하고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북한에 있는 악한 정권이 지금까지 권세를 유지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왜 악에 대해서 이렇게 오래 침묵하실까요? 저는 그 숙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내 속 사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악을 보면 확신이 서지 않고 두려움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공부해야 되겠다. 하나님께서 악을 어떻게 다루시고, 악에 대해서 어떤 약속을 하고 계시는지 좀더 확인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에 전문가가 되십시오. 기도에 전문가가 되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뿌리가 깊이 박힙니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의 속 사람이 남자처럼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속 사람은 남자처럼 강건합니까? 강건하면 앞으로 더욱 강건하기를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막강한 군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약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을 정복해야 될 하나님의 놀라운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강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남자처럼 강건하라."고 말입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향해 남자처럼 강건하라고 명령하셨사오니 우리 모두 그런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도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는 사람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함으로써 깨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젖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강해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린 강자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병들고 악한 세상을 우리가 능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하고 정복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남자다운 남자 /고전16:13

2008-06-25 08:51:17

 

얼마 전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끌던 유행어가 있습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무명의 이 개그맨은 이 유행어로 일약 인기 개그맨으로 부상했습니다.

 

이 말이 유행한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흔히 하는 말이고 또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는 말인데 왜 이 말이 유행하게 됐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답은 간단해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남성상이 왜곡되고 있고, 이런 시대 흐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남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이 말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사이 과거기준에서 볼 때 남자 같지 않은 남자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한 시대 흐름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여자처럼 작고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남자들이 인기입니다. 소위 꽃미남이라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미용실을 드나들며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하고 피부 관리를 받고 얼굴 성형수술까지 합니다. 게다가 패션에 민감하고 디자인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입니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심슨(Mark Simpson)이라는 사람이 이런 문화적 트렌드를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이라 부른바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과 우리나라 영화배우 이준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여느 남성들은 이런 문화적 트렌드가 마땅치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이 개그맨은 우락부락하게 생겼습니다. 전혀 메트로섹슈얼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래서 기분 나빠서 외칩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

 

다른 하나 우리시대 흐름 가운데 남성이 여성에게 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최근 외무고시 합격자 31명 중 21명이 여자이고, 신규 임용 판사 90명 중 58명이 여성이랍니다. 중앙일보 수습기자 9명을 뽑았는데 그 중에 6명이 여자랍니다. 그야 말로 강력한 여풍(女風)이 불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자 댄 킨들러란 사람이 이런 흐름을 설명해 주는 책을 썼는데, 그 책 제목이 [새로운 여자의 탄생 - 알파걸(α-girl)]입니다. 여기서 알파걸이란 학업·운동·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자보다 뛰어난 엘리트 소녀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알파걸의 등장으로 남자들은 2류인 베타보이(β-boy)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알파걸의 등장에 남성들이 속이 편할 리 없습니다. 더욱이 여성과 경쟁해서 이길 것 같지 않은 남성들은 속이 쓰립니다. 이 개그맨은 이런 베타 보이들의 대표들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 외칩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

 

결국 저는 이 개그맨의 유행어 속에서 남자다운 남자상의 혼란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고정관념처럼 떠받들어오던 남자다운 남자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시대가 변하면서 새로운 남자다운 남자상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남자다운 남자상을 지켜가려는 몸부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남자다운 남자상에 하나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남자다운 남자상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신체적으로 건장해야 합니다. 키도 크고 체격도 당당하고 근육질 몸매에 한 주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정신적으로 강인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뎌야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삶의 태도가 박력이 있어야 합니다. 말없이 행동해야 하며 의리를 지켜야 하고 야성적인 카리스마를 갖춰야 합니다.

 

 

 

 

이런 남자다운 남자상을 한 마디로 사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런 사나이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이런 사나이들이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과거의 남자다운 남자상에 사로잡혀있는 남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기가 죽어가고 있고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정말 이처럼 남자들이 불쌍해 보인 시대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살펴보았습니다. 역시 교회 안에서도 남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교회 사역의 대부분이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여성 목사들이 나타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여성 장로들이 나타나 점차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역시 남성들이 과거와 달리 초라해 보입니다.

 

남성들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남성들이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남성들이 다시 자기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기가 살아나야 합니다. 당당함을 회복해야 하고 활력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남자다운 남자상을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과거의 사나이 상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시대에 걸맞은 남자다운 남자상을 새롭게 정립해 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여기에 남자답게라는 말이 나옵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안드리제스테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남성이라는 뜻의 아네르에서 왔습니다. 그 뜻은 남자임을 과시하라’, ‘남자다움을 보이라입니다.

 

여기서 남자답다는 말은 강건하다는 말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이 강건하다는 말은 한 마디로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답다는 것은 힘을 갖고 그 힘을 나타내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힘이란 완력이나 박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조폭처럼 전신에 용 문신을 하고 어기적거리며 박력을 자랑하며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믿음의 힘을 말합니다. 영적인 Power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답다는 것은 믿음의 힘을 가지고 그 믿음의 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남자다운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영적인 힘을 갖춘 남자

 

역시 남자다운 남자는 힘이 있는 남자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남자들은 이 힘을 갖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대표적으로 남자들은 정력을 키우려고 애써왔습니다. 정력이 좋은 남자가 남자다운 남자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먹으려 애써왔습니다. 유난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력에 좋다는 음식들을 밝혀왔습니다. 비싼 돈을 주고 보신탕, 녹용, 웅담에 갖가지 야생동물들까지 잡아먹습니다. 국내에 동이 났다고 해외까지 나가서 밝히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남자들은 근육의 힘을 키우려고 애써왔습니다. 주먹의 힘이 있는 남자가 남자다운 남자다로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태권도, 유도, 각종 무예를 익히려 해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남자다운 남자의 힘은 영적인 힘입니다. 특히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영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을 갖춘 남자들이 진정한 남자다운 남자인 것입니다.

 

삼상 17장을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골리앗은 키가 작게 잡아도 2미터 70이상입니다.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입니다. 최신예 무기로 완전무장을 했습니다. 정말 힘으로는 상대할 자가 없는 대단한 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직 군대에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가진 무기라고 해야 고작 물맷돌과 나무 지팡이가 전부입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보기 좋게 이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골리앗이 나타나자 이스라엘 병사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거대한 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크니 절대 빗맞을 일은 없겠군."

 

 

 

 

그렇습니다. 다윗은 남들이 가지지 않은 믿음의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힘으로 골리앗을 보니 두렵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남자의 힘은 바로 이 믿음의 힘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남성 여러분! 이 믿음의 힘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남자

 

남자다운 남자는 이 믿음의 힘을 잘 발휘하는 남자입니다. 이 믿음의 힘으로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남자입니다.

 

3:6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었고, 자기도 모자라 아담에게도 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와가 영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느냐 마느냐 이 중대한 문제를 하와가 자기 혼자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자기가 먹은 것처럼 먹으라고 말했고 아담은 그 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저 아담은 하와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와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결정하면 아담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에덴동산 저 아담의 가정에서부터 남성들은 리더십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을 잃어버린 남자, 고개숙인 남자의 원조는 저 에덴동산의 아담이었던 것입니다.

 

 

 

 

공처가로 소문난 왕이 신하들과 모임에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경들 중에 마누라 눈치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당당하게 남자답게 큰 소리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리고 확인 차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경들 중에 마누라 눈치보고 사는 사람들은 저 왼쪽 깃발 아래로 모이고, 당당하게 마누라에게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들은 저 오른쪽 깃발 아래로 모이라

 

신하들 모두가 왼쪽 깃발 아래로 모였는데 한 사람만 오른쪽 깃발 아래로 모였습니다. 왕이 너무도 기쁘고 자랑스러워 물었습니다. “경은 우리의 자랑이요 또 소망이다.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 비결을 말하라!” 이 신하가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왕이여 사실은 오늘 아침이 마누라가 이르기를 당신은 절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는 가지 말라 해서 사람들이 없는 이곳에 서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믿음의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으로 영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셨습니다. 특히 아담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2:17절 말씀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말라 따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는 말씀은 아담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담이 하와의 이름도 지어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아담이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휘둘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침묵했습니다. 하와가 자기에게 선악과를 주어 먹게 했을 때 먹지 않겠다고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침묵하고 따랐습니다.

 

아담에게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들은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사명입니다. 믿음의 힘으로 공동체를 이끌고 가는 사명입니다. 그래서 침묵하면 안됩니다. 말해야 할 때 입을 열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남자다운 남자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자다운 남자는 영적 리더십을 회복한 남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가정을 일터를 교회를 이끌고 갈 수 있는 남자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남성 여러분! 영적 리더십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힘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입을 열고 말해야 할 때 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성 여러분! 남성들이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기다려주고 경청해 주어야 합니다.

 

 

 

 

남을 돌아볼 줄 아는 남자

 

많은 남자들이 가진 힘을 잘못 발휘할 때가 많습니다. 남자답지 못한 비겁한 남자들입니다.

 

우선 남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려고 합니다. 특히 대화를 통제하려고 합니다.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자기 의견에 반대하면 윽박지르고 화를 냅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폭력도 쉽게 행사하려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말보다 주먹을 앞세웁니다. 쉽게 화를 내면서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폭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너무도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감정만이 제일 중요합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 남자다운 남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힘을 올바로 행사합니다. 그 믿음의 힘 때문에 늘 평안합니다. 늘 여유가 있습니다. 잔이 넘쳐서 흐릅니다. 그 여유와 그 넘치는 잠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남들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일본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자가 벌써 40%나 된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까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서구사회에서 앉아서 소변보는 남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양변기 경웁니다만 도대체 남자가 왜 앉아서 소변을 볼까요? 일전에 터브가이로 소문난 탈렌트 최민수씨가 인터뷰하는 도중 자기가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실 서서 소변을 보면 양변기 주변에 일부가 튀어서 묻게 됩니다. 여자 분들이 일을 보려고 할 때 여기저기 튄 것이 남아있어서 불쾌하기가 그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있는 남자가 힘을 약자를 돌아보기 위해 쓸 때 남자다운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배려하고 섬기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남자다운 남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남성의 위기 시대입니다. 기존의 남자다운 남자상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남자상이 세워져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다운 남자다운 남자상에 정립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믿음의 힘으로 영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으로 약자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성 여러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남자답게 사는 법/고전16:13

2005-01-07 16:42:58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서 시간관리 전문가를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큰 박스와 항아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는 박스 안에서 주먹만한 돌을 꺼내, 항아리 속에 하나씩 넣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아리에 돌이 가득 차자, 다시 박스 안에서 조그만 자갈을 한 움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집어넣고, 깊숙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항아리를 흔들었습니다. 주먹만한 돌 사이에 조그만 자갈이 가득 차자, 다시 박스 안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냈습니다.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한 돌과 자갈 사이의 빈틈을 촘촘히 채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물을 한 주전자 꺼내서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정말 노력하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강사는.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이 실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 큰 돌을 먼저 넣지 않으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큰 돌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저희교회에서 남성주일로 지킵니다. 참 남성들은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왜 바쁜데 이렇게 남성 주일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왜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나 사회나 가정이나 남성이 중심에 있어야 힘이 있습니다. 안정됩니다.

그런데 남성들이 자꾸 어깨가 처지고 힘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여성잡지 엘르가 세계여성의 날 앞두고 남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남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성이 위기에 처해있다진단하였습니다. 이것은 남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이고, 인류 전체의 문제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귀걸이를 하고 목걸이를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남성이 없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남성관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일단오해를 풀어 봅시다.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가지고 만들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남성이 우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속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 방법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사도바울은 남성과 여성에 대해 고린도 교회에 많은 이야길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남자 분들이 있습니다. 에헴! 남자가 여자의 머리야!

현실은 어떻습니까? 얻어터지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단어를 잘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아내의 머리입니까? 남편입니다.

남자가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가정에서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남성이 더 높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곳에서는 남편이 머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의 중요성을 이야기도 하지만 가정을 돌봐야 중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남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여자답게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자답게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오늘 남성주일을 맞이하여 남자답게 사는 법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오늘 남성들이 식사를 대접합니다. 아니! 남자가 어떻게 부엌에 들어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계의 최고의 요리사들은 다 남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 달란트를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식사하시면서 남자들의 솜씨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합니까?

1. 하나님에 대해 깨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어땠습니까?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음을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큰 종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전에 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아!”부르실 때 민감하게 일어났습니다. 영적인 긴장감을 갖아야 깨어납니다.

깨어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습니까?

 

2. 내가 깨어나야 합니다.

임동창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피아니스트입니다.

어린시절 불량학생이었습니다. 그는 갈대밭에 갔다가 그만 깜짝 놀라게 됩니다.

엄청난 소리가 들렸는데 자기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피아노를 다 커서 독학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리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냥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이분으로 인해 태평소의 달인 장사익과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자신이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한번 들어 볼까요? 자기 소리를 내는 분들의 모습입니다.

특히 남자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방법으로 살려고만 합니다.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억지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지쳐 쓰러집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깨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3. 사람을 통해 깨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남자들은 잘 웃지 못합니다. 마음은 여립니다. 그러나 웃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배워온 것입니다. 사람들과 나누어보면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남자들은 돈만 벌어오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돈버는 기계는 있지만 남편은 아빠는 남성이 없습니다.

제가 비법을 알려 드리죠? 남자 분들! 아내에게 여자분들 에게 진솔해보세요.

자기 마음을 진솔하게 나누어보세요. 힘이 든다고. 울고 싶다고, 아프다고, 사랑한다고,

여성들이 남성보다 몇 수위에 있습니다. 다 압니다. 그러니 진솔하게 대하세요.

존 템플튼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순수한 관심뿐이란 걸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나에 대해 깨어날 수 있습니다.

 

4.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잠언 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냥 부자가 되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깨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관이 바뀝니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신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구멍가게를 해도 얼마든지 깨어나면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요. 그러다 보면 어떻게 된다고요? 재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얻기 전에 깨어날 수 있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믿음에 굳게 서야합니다.

저는 요사이 굳은 믿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깨어났는데 믿음에 서지 못하는 분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속은 바뀌지 않고 겉만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깨어나면 굳게 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믿음에 굳게 서라고 할까요? 구원을 경험해도 영성에 깨어나도 믿음으로 굳게 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겉만 잠깐 바뀌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거기서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선교사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큰 가마솥 앞에 끌려갔습니다. 아마도 선교사를 삶아서 먹으려는 모양입니다. 그 때 누군가가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반가운 마음에 돌아보니, 그는 추장이었습니다. 놀란 선교사가 어디서 영어를 배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추장은 자기가 하버드 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선교사가 따지듯 물었습니다. 하버드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여전히 사람을 삶아 먹을 수 있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추장이 말합니다. “나도 많이 변했어요. 전에는 사람 고기를 손으로 먹었는데, 지금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서 먹거든요.”

 

하버드에서 받은 문명 교육이, 추장의 껍데기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알맹이는 여전히 전과 같은 것입니다. 공부는 하지만 마음은 안 바뀌었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믿음위에 서지 못했습니다. 머리는 알지만 마음에 감동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조금 어려운 일오면 예수님을 잊으려고 합니다.

 

저희교회는 제자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힘이 듭니다. 학생이나 선생이나 다 힘이 듭니다. 참 안변합니다. 아니오! 잘 변합니다. 그런데 고무줄처럼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제자훈련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웃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나 가만히 있으려고 하니까 나 한번 바꿔봐

특히 우리 남성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위에 굳게 서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자신의 마음을 확정져야 합니다.

시편 57:7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라고 합니다. 마음이 확정된 사람은 노래합니다. 마음이 확정된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흔들리면 다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걱정이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마음을 확정할 수 있기 바랍니다.

소망을 예수님에게 두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도로 마음을 두어야 합니까?

사도행전 20:24에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마음이 확고한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 삶을 삽니까?

마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남자답게 한번 예수 믿으면 목숨 걸고 믿는 것입니다.

예배도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남자는 그래야 합니다. 믿기 어렵지만 믿으면 미치도록 믿어야 합니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좀 벌어보겠다고 머리 쓰지 말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어떻습니까? 세상의 종교에 빠졌다면 편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분명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남자다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되시기 바랍니다. 힘이 들지 않습니까? 그럴수록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화정하고 눈은 하나님께 고정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강건해야 합니다.

강건하여라는 말은 능력이란 뜻의 크라토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능력 있는 모습을 갖추

, 능력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남자답게 능력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어떤 능력을 갖추라는 말입니까?

 

1. 영적 강건이 필요합니다.

이상하게도 여성들이 믿음이 더 좋습니다. 왜 그런지 궁금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여성들을 믿음이 더 좋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간단했습니다. 여성들은 주중에 말씀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합니다. 영적으로 강건해지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강건해지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는 여성이 독차지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훈련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꼭 소그룹에 참여하십시오. 영적인 훈련과 나눔을 가지시고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2. 지적 강건이 필요합니다.

목회를 시작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남자들을 위해 선데이잡지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고요. 사실입니다.

말씀을 이야기하면 좁니다. 그런데 이효리 이야기하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과학시대, 정보시대입니다. 지식 사회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식사회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베이컨이 말한 대로 아는 것이 힘입니다.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은 물과 같다고 합니다. 지식은 자고 나면 발전하고 변합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물 같은 지식을 물갈이해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즉 지식과 신앙이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3. 육체적 강건이 필요합니다.

저희교회 남성 셀은 주일날 2시에 운동을 합니다. 여자분들 은 보내 주셔야 합니다. 육체적인 강건을 위해 함께 운동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의 몸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이 아프면 영혼도 아픕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체를 관리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엄청난 유익이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남성주일이기 때문에 남자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한 주간 묵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지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닭이 알을 품었다가 달이 찼을 때, 알속의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이라 합니다. 그리고 어미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마주 쪼아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을 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병아리가 껍질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팎의 두 존재의 힘이 함께 껍질에 가해질 때, 비로소 병아리는 온전한 생명체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과 절묘한 타이밍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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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수난시대/고전16:13

2001-09-24 08:43:49

 

[서론]

 

그동안 남성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에 의해 강하고 힘있는 사람으로 전통적으로 길들여져 왔다. 어릴 때부터 남자는 넘어져도 울지 말아야 했다. 길을 가다가 넘어져 울면-"사내자식이 울면 바보야! 남자는 울지 않는 거야! !" 그러면 그쳐야 했다.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나도 울지 않으면, 어이구 o o는 장군 감이네!"라고 추켜세웠다. "남자들을 이렇게 키운 것은 여성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수작이다"라고 하였다.(잭 볼스윅) 이렇게 성인이 된 남자는 아내와 자식을 울릴지언정 자신은 울지 않았다.

 

이런 남자가 요즘 울고 있다. 도전이 오면 그것을 극복할 목표로 삼지 않고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난다. 명퇴니, 조퇴니 하는 생존권의 문제에 봉착한 남성이 울고있다. 남성이 흔들리고 있다. 남성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남자가 직장을 잃었다고 자기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집을 나와 노숙을 한다. 노숙자의 98%가 남자다.

 

남자가 여자보다 약해져가고 있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바이러스에 약하여 병에 잘 걸리고 남성이 여성보다 수명도 짧아 일찍 죽는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은 왜 다른가?

 

유전형질이 다르고 생리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란다.

 

남성의 가치와 여성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성=용맹, 강인함, 경쟁심, , 절제, 용기, 지배력, 호전성.

 

여성=양순함, 표현력, 반응력, 끈덕짐, 민감성, 부드러 움.

 

문제: 아버지 없는 사회

 

우리사회는 아버지 없는 사회가 되었다.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너무 지치고 고갈되어 아들에게 필요한 남성 역할의 모델이 되지 못한다. 또한 아들에게 사물의 이치를 가르치거나 아들과 같이 뭔가를 해 보면서 진정한 남성이 되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딸에게도 아버지는 진정한 남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여성은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얻지 못한 것을 결혼하여 남편에게서 얻어보려고 하지만 남편 역시 아버지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했기 때문에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버지 부재로 인한 정신적 공백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자녀가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90%가 알지 못한다고 한다.(Alexander Mistchlich) 아버지는 너무 바빠서 자녀들에게 자기가 하는 일 조차도 자녀들에게 얘기할 새가 없고 알려주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영웅, 전사, 성자, 학자, 과학자, 백마탄 기사 등으로 아는 자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있되 아버지 없이 자란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해결책

 

요즘 남자들이 제 자리를 잃었다. 우선 남성이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가정도 사회도 제 자리를 잡는다. 남성이 제자리를 잡는 데에는 여성의 도움이 필요하다. 남성은 4 가지 요소를 구비해야 한다. 그것은 왕, 전사, 연인, 마술사이다.

 

1.()이 되어야 한다

 

모든 남성안에는 왕의 전형이 있다. 선한 왕은 모든 남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선한 왕은 선한 판단을 내리고 지혜로우며, 결코 자기 중심적이지 않다.

 

1)선한 왕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한다.

 

왕은 자기의 삶 속에서 그 질서를 실천하여 스스로 본을 보이는 방식으로 왕국의 질서를 세운다.

 

2)선한 왕은 풍요와 질서를 가져다준다.

 

왕은 왕국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풍성하게 공급한다. 그래서 식량, 농작물, 상업을 번성하게 한다.

 

3)선한 왕은 그 백성을 보호한다

 

선한 왕은 그 백성을 적으로부터 보호하여 평안하게 살게 한다.

 

4)선한 왕은 충직한 신하에게 포상과 영예를 준다.

 

4)선한 왕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행한다.

 

나라전체를 볼 줄 알며 복잡한 일을 통합 할 줄 안다.

 

그러나 왕이 공격적이면 폭군이 되고 소극적이면 약골이 된다.

 

폭군: 공격적이다

 

폭군은 자기의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동생을 죽인 왕 같은 남자다. 폭군은 무자비하고 비정하게 다른 사람을 악용하고 남용한다.

 

폭군은 승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모조리 깎아 내리고 굴종 시켜야만 속이 시원해 한다. 폭군은 아내와 자녀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한다. 그래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나 폭군은 겉으로는 강하게 보이나 의식의 내면은 아주 약하고 쉽게 두려워하고 무능하기 그지없다.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 겉으로 화를 내지만 내면은 약하여 쉽게 낙담한다. 남성은 선한 왕은 되되 폭군은 되지 말아야 한다.

 

약골:

 

폭군은 순식간에 정반대로 약골이 되기 쉽다.

 

약골은 침착성, 주체성, 안정감이 부족하다.

 

약골은 강한 사람을 위협과 협박으로 장악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피하고, 대신 약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괴롭힌다. 잔인하다. 약골은 자기보다 강한 폭군을 의지한다. 약골은 폭군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의 편에 서서 자신을 맡긴다. 약골은 폭군에게 빌 붙어서 약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일을 대행한다. 그리고 폭군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마지막에는 버림받는다.

 

그리스도인 남성은 선왕이 될지언정 결단코 약골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훈]

 

나는 어떤 왕인가? 폭군인가? 약골인가? 선한 왕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남자는 왕이 되되 폭군도 아니고 약골도 아닌 성군이 되어야 한다.

 

2. 전사(戰士)가 되어야 한다

 

완숙한 전사는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갖는다. 자기가 풀어야할 삶의 과제와 도전들을 해결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전사는 자신의 능력과 상대방의 능력을 냉철히 평가하여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전략을 세운다. 전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장시간의 훈련을 견뎌낸다. 전사는 몸과 마음을 통제하여 결정적인 행동을 과감하게 한다. 전사는 특정인이나 기관에 연연하지 않고 더욱 고귀한 대의에 충성함으로서 자신의 이해를 넘어선 헌신을 통해 그 진가를 발휘한다. 전사는 더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1)가짜전사

 

가짜 전사는 잔인하다. 적극적으로는 가학성의 형태를 취하고, 소극적으로는 피학성의 형태를 취한다.

 

2)가학(加虐)성 전사

 

병든 가학성의 전사가 활동을 하면 큰 피해가 난다. 난폭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부양하고 보호해야할 가족에게도 폭력을 행한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잘못된 남성 상이 있기 때문이다.

 

[] My Lai 학살 사건-월남전 당시, 어린이, 민간인 학살사건. 1차대전: 터키군인의 임산부 학살 사건

 

3)피학성 전사

 

병든 가짜 피학성의 전사는 약하다. 그는 약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자신을 미워하고 멸시한다. 피학성 전사는 자신을 멸시받고 학대받게 내버려두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구한다는 구실로 자신을 학대받게 하기도 한다. 피학적인 사람은 결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학대에 대항하지 않는다. 진짜 전사와 가짜 전사는 종이 한 장차이이다. 진짜 전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선한 일에 헌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남성

 

성군과 참된 전사의 장점을 구비한 남자는 균형있는 남자, 온전한 남자, 매력적인 남자가 된다. 그러나 건전한 균형을 상실하면 병든 왕, 병든 전사가 된다. 성군은 백성을 보호하고 전사는 결정적이고 용기있는 행동을 하여, 깊고 확신에 찬 관계를 맺게 해 준다. 왕과 전사는 공동체에 활력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룬 남자가 온전한 남자이다. 이 남자는 강하나 너무 강하지 않다.

 

기독교적 남성상

 

[HAN 고전 16:13]

 

개혁: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 여러분은 늘 깨어 있으십시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십시오.

 

왕중의 왕

 

왕중의 왕, 완전한 왕은 예수님 이시다. 가장 모범적인 왕은 예수님 이시다. 예수님은 위대한 능력이 있었으나 그 능력을 오로지 사람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셨지만 당시의 악과 부정과 싸우실 때에는 강한 전사 이셨다. 예수님은 완전한 기독교 남성 상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래서 예수님도 피곤해 하셨고, 목말라 하셨고, 배고파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셨고 사랑이 많으셨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우셨고, 나사로의 죽음으로 그 가족들이 울고 있을 때 함께 우셨다. 칠십인 제자들이 전도하고 돌아왔을 때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셨다(10:21) 부활후 제자들에게 기쁨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없으리라."(16:22) 예수님은 불의를 보시고는 분노하셨다. 인간의 잔인함, 외식, 강퍅함에는 화를 내셨다(23:27,33) 그래서 헤롯에게는 '여우'라고 하셨고(13:32), 자칭 선지자를 '노략질하는 이리'(7:15)라고 하셨다.

 

남성의 특성

 

성공 지향적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한다. 일을 하는 중에 부정을 저지르기도 한다. [] 피노키오의 코- 거짓말 할 때마다 코가 늘어났다. 피노키오는 코가 커지자 거짓말이 얼마나 무섭고 나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성-성공하기 위해 피노키오처럼 거짓을 행한다. 요즘은 코가 늘어나지 않는다고 맘놓고 죄 짖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죄로 인해 목이 잘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크리스찬 남자들이 극복해야 할 일이다.

 

[결론] 온전한 남성의 회복

 

우리는 온전한 남성상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이 바로 온전한 남성상의 모범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자! 그래서 깨어 믿음에 굳게선 강하고 힘있는 남자가 되자. 동시에 예수님 같이 다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멋진 남자가 되자. 그리고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를 살맛 나게 하는 온전한 남자가 되자. 이런 남자와 사는 여성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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