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9 - 19절 설교 모음
◀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 /요12:12-19/ 옥한흠 목사
2015-05-11 21:19:07
어느 시대나 새로운 지도자가 등 장하면 사람들은 대단한 기대와 부 푼 꿈을 가지게 됩니다. 요즈음 우 리 나라에도 보면 대통령이 되겠다 고 하는 소위 8룡이니 9룡이니 하는 사람들에게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 지도자 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은 참 반가 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 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야, 저분이 대 통령이 되면 뭔가 우리 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아니할까 ' 하는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기 때문 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역사 가 우리에게 냉혹하게 교훈 하는 것 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기대를 충 족시킬 수 있는 지도자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지 도자에 대한 기대의 역사는 곧 실망 의 역사였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불란서 혁명이 터지고 나서 눈부실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젊은 지도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입니다. 그의 등장을 지켜보며 온 유럽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흥분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26살 먹 은 천재 음악가였던 베토벤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을 무척 존경했습니다.
자기보다 한 살 위였지만 그의 인물됨에 가슴이 벅 차 오르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 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에게 조금 이라도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목도 나 폴레옹의 이름을 따
"보나빠뜨라 교 향곡 "이라고 붙이고는 5년 후에 나 폴레옹에게 증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폴레옹이 마침 내 황제에 즉위했다는 말이 그의 귀 에 들려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 토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 랐습니다. 그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보나빠뜨라 '라는 제목을 써두었던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리며 이렇게 소리질렀다고 합니다.
"그 사람도 속인에 지나지 않았어.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황제가 되다니 정말 실망했어. "
그리고는 그 교향곡 이 름을
"심포니아 에로이카 "로 바꾸고 특별히 제 2악장에는
"장송 행진곡 "
이라는 음울한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는 그로부터 17년 후에 나폴레옹 이 세인트 헤레나에 가서 유배 생활 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 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나폴레옹 에게 바치려고 했던 그 교향곡을 다 시 손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 니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을 다 내다보고 있었어. 제 2 악장을 장송 행진곡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 '
지도자에 실망한 사람이 어디 베 토벤뿐이겠습니까? 세계 역사가 이 를 증명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 보면 세상에 등장했던 왕이나 통치 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이 사람 들에게 안겨 준 것은 결국 실망과 허탈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펴놓고 읽은 말씀 에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 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 릅니다. 하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 예수님 을 가리키면서
"저 분만이 인류가 기다리는 진정한 왕 "이라고 선언하 고 계십니다. 당시의 세계 최대 강 국은 로마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 정부가 파송한 빌라도를 위시 한 지도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빌라도는
"예수 라는 사람이 지금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데 모든 백성들이 그를 향해서 '호산나 이스 라엘의 왕이여 '하고 외치고 있습니 다. "
하는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은 빌라도는 아마도 술 잔을 들고 마시다가 너무 우스워 가 지고 배꼽을 쥐고 웃다가 술잔을 다 쏟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 귀 새끼를 타고 오는 주제에 왕이라 고? '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는 분을 놓고 인 류가 기다리는 왕이요 구원자라고 누가 생각을 하겠어요? 그러나 하나 님은 엄숙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만 이 진정한 왕이요 예수만이 인류의 구원자다. "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입 니다.
나귀를 타신 왕 예수
이미 앞 시간에 우리가 보았습니 다만 예수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 에서 조용하게 하루를 쉬시다가 그 다음날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 살렘으로 입성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구해 오도록 했습니 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에 관한 자 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제자가 나귀를 끌고 오자 제자들은 나귀 새 끼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 님을 올라앉으시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는 길에 화려한 카페트 대신 자기들 의 옷을 펴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 지를 흔들기도 하며
"호산나! 호산 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 여!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무렵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 나라 사방으로 부터, 세계 도처로부터 수많은 사람 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이 어린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오 신다는 말을 듣고 너나 없이 달려나 갔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 나 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그 충격적인 소식이 이미 쫙 퍼져 있던 터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 고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에 호 기심 반, 흥분 반으로 몰려나간 것 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며 외치는 소 리를 듣고는 함께 들떠서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고 소리를 질 렀습니다.
종려나무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 무입니다. 그리고
"호산나 "라고 하 는 말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안겨주실 분, 자기들을 구원해주실 분으로 기 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 대로를 따라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 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지난 3년간을 우리가 돌이켜 보면 예수님은 한번도 자기의 신분을 공 적으로 노출시킨 일이 없습니다. 가 끔 지도자들이
"네가 누구냐? 신분 을 분명히 밝혀라. "며 따지고 들었 을 때도 예수님은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시고 인자라고 하는 약간 모호 한 용어를 쓰시면서 대꾸를 하셨습 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을 보면 무 리들이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바람에 일 부러 피해서 산으로 도망가신 적도 있었습니다. 7장 4절에 보면 자기 형제들이
"아니, 세상에 나타나서 세상에 큰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면 왜 숨어 다니느냐? 스스로 자기 정체를 밝히고 당당하게 맞서지. "
하고 빈정거렸을 때에도 예수님은
"나의 때는 아직도 이르지 아니하였 다. "
하시면서 그들의 말에 동의하 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자들과 오붓하게 한적한 곳에서 만날 때에 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곧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 의 구원자요,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신분을 노출 시키기를 원치 아니하시던 예수 그 리스도께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자기 가 다윗의 자손이요 평화의 왕이라 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를 하신 셈입 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니셔티 브(initiative)를 쥐고 행동하신 것입 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16절에 보니까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 음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은 태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기를 향해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 이스 라엘의 왕이여! "
하고 소리를 지를 때도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막지 않 으셨습니다. 삼사 일 후에는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십자 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로 변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자신 을 공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가자마자 어린아이들까지 합세를 해 서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
하고 외쳐댔습니다. 그것을 보고 흥 분한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곁에 와 가지고 따지고 들었 습니다.
"당신, 저 소리 못 들어요? 입 좀 막도록 해요. 왜 저렇게 소리 를 지르도록 내버려둬요? 입 좀 다 물게 하라고. "
그 때 예수님은 유명 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소리 지르지 아니하면 여 기 있는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 들이요, 메시야요, 인류의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그 를 환호하지 아니하면 돌이라도 소 리를 지르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 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태도를 바 꾸셨을까요? 우리는 성경에 한두 가 지 이유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구 약에 보면 스가랴 라고 하는 선지자 가 있습니다. 그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 가운데 한 구절에서 예수님에 관해 예언한 것이 있습니다. 그 예 언의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5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이 말씀은 헬 라어로 번역된 70인경이라는 구약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우 리가 읽는 스가랴 9장 9절과 비교하 면 조금 표현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 님은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었습니 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었어요. 그는 그 말 씀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이라 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 가랴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언 하신 말씀 가운데 메시야는 나귀 새 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 성하신다는 것을 기록했다면 자기는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 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공포 분위기 입니다.
유대 나라 지도자들은 예수 님을 기회 있으면 잡아서 처치하려 고 지금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이 나귀 새 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순종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도를 바꾸신 데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처형되 기 전에 분명히 밝혀야 될 것이 하 나 있었습니다. 특별히 자기를 죽이 는 유대 나라 지도자들과 유대 나라 백성들에게 죽기 전에 분명히 밝혀 야 될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들이 누구를 죽었느냐 하는 것 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면서 자 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만왕 의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 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 가에 죽일 때 한 가지 사실은 분명 히 알고 죽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 들을 처형하는 것입니다. 의인을 십 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 명히 해두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의 신분을 분명히 노출하셨던 것입 니다.
겸손하신 왕
그러면 우리 예수님은 어떤 왕이 십니까? 그가 세상의 왕과 비교할 때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오늘 이 사실을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한번 찾 아봅시다. 아마 한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어떤 왕입니까? 세상의 지도자 들과 어떤 점에서 다르신 분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겸손하신 왕입 니다. 스가랴의 예언에서 특별히 강 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나귀의 사이즈 에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
나귀의 사이즈에 특별히 관심을 두 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 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 면서 나귀를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대로 가서 어미 나귀 를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새끼 한 마리가 어미를 따라왔습니다. 아마 꽤 큰 새끼였던 것 같습니다.
나귀가 사람을 태우는 짐승인 것 을 감안하면 나귀를 타려면 어미 나 귀를 타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미 나귀를 제쳐놓고 일 부러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래 서 새끼 나귀가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무거웠겠습 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은 나귀 새 끼를 타셨을까요? 하나님이 스가랴 를 통해 자신을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왕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주 님은 그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 새끼를 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할까요? 스가랴는 이렇게 해석합니 다.
"그는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셨다. "
겸손이란 자 신의 높음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 의 처지로 자신이 내려앉아 함께 울 고 함께 웃기를 기뻐하는 마음가짐 이 아닙니까? 이러한 겸손한 마음가 짐에서 사람을 거칠게 대하지도 아 니하고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아니하면서 사람과 가까워지는 온유 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이 이런 왕이십니다. 겸손하시기에 온유하신 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시 지 않았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 고 내게 배우라. "
우리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인 생을 걸어가고 있어요. 이 인생 여 정이라는 게 짧으면서도 참 길지 않 습니까?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얼마 나 멉니까? 멀리서 볼 때는 탄탄대 로 같이 보이지만 가까이 가 볼수록 얼마나 그 길이 험하고 좁습니까?
십대가 인생을 볼 때는 그 인생이라 는 것이 온통 젤리투성이요, 행복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20대 들어가서 보면 인생길이 조금 달라 보이고, 30대, 40대, 50대에 들어가 면 그 인생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우리가 다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모 두는 너나 할 것 없이 수고하고 무 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 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두 가지 짐을 지고 있었어요. 죄와 사망이 주는 영적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가책이 우 리를 짓누릅니다. 죽음의 공포가 우 리를 사시나무 떨듯이 만듭니다. 밤 낮없이 그 고통 속에 우리는 매어서 살았어요. 게다가 우리 모두가 인간 이기 때문에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 의 짐을 다 지고 신음하고 있습니 다.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 님을 믿고 거듭난 다음에는 죄와 사 망이 우리를 짓누르는 짐에서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드디어 사망의 공포가 우리에게서 떠났습니 다. 죄의 가책과 죄의 형벌이 우리 에게서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 리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인생 여정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고 걸어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피곤할 때도 많 습니다. 슬플 때도 많습니다.
상처 입을 때도 많습니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많습니다. 고독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기쁘고 신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 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짓 누르는 수고와 슬픔이 되는 것은 피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 님과 같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겸손하신 왕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내 곁에 있어주셔야만 내가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무거 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다 지쳐 쓰 러질 때 그 짐을 함께 지고 갈 수 있는 겸손한 왕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다가 쓰러지면 조용히 와서 왜 쓰 러졌느냐고 따지기 전에 나의 팔을 붙들고 일으켜 세워 주면서
"내가 있지 않니? 같이 가자. "
하시는 그 런 겸손한 왕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나귀를 타고 내 가까이 다가오시는 겸손하신 왕, 예 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 까? 물론 그분은 지금 굉장한 곳에 계십니다. 승리하신 왕으로서 하나 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 영광이 얼 마나 찬란한지 사도 요한은 그를 보 고는 죽은 자와 같이 혼 줄이 나가 지고 정신을 잃어버리고 땅에 거꾸 러졌다고 했습니다. 그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납니다. 그 머리털은 양털처 럼 흽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 은 큰 우렛소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광 중에 계시는 만유의 통치자로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지금 세상 에서 예수님을 부를 때마다, 예수님 앞에 다가갈 때마다, 예수님에게 마 음을 쏟아 놓을 때마다 우리를 찾아 주시는 예수님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예수님입니까? 나는 철이 나고 나서 40-50년 동안 신앙 생활을 지금까 지 해오면서 내가 부를 때마다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은 그렇게 무시무 시하고 광채가 나서 가까이 갈 수도 없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때 마다 나를 만나주신 분은 나귀 새끼 를 타고 오시는 겸손하신 예수님이 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군마에 올라앉아 홀을 들고 면 류관을 쓰고 많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오는 왕 앞에는 아무도 접근 못합니다. 그러나 나귀 새끼 타고 오시는 왕이시기에 어린애라도 가서 톡톡 두들겨 볼 수 있고 그 옷자락 을 잡아당길 수도 있는 그런 분이십 니다. 얼마나 멋있어요? 예수님이 바로 이런 겸손한 왕이십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찾을 때마다 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겸손 하신 예수님, 온유하신 예수님을 만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 면 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답답하 고, 어떤 때는 살고 싶지 않다는 이 상한 기분에 빠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찾으면
"내가 네 곁에 있지 않니? "
하면서 다가와 주 십니다. 여러분이 만나시는 예수님 도 아마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 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국제 전화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남편을 따라 외로운 외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있는 힘을 다 쏟아서 충성한 귀한 목사님 부인입니다. 그러다가 몸도 다쳐 가 지고 사실 지병을 갖고 있는 사람입 니다. 그런데 그분이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 니 암이래요. 내일 모레 입원을 하 고 수술을 받아야 되나 봐요. 목사 님 기도해 주세요. "
그러는 것입니 다. 그 말을 듣고 제가 무슨 말이 나옵니까? '아, 하나님 왜 이러세요. ' 이런 짜증스러운 생각밖에 안 들었 습니다. 전화를 끊고 저는 교회에서 도 집에 가서도 그 사모님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입원을 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서 그 다음날 국제 전화를 했습 니다. 그랬더니 벌써 병원에 들어가 고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병원을 수 소문해서 전화를 연결했습니다. 그 런데 그날 전화 소리는 너무 명랑하 고 너무 밝은 소리였습니다.
"목사 님, 왜 또 전화하셨어요? 목사님, 지 금 의사 말 들으니까요 뼈 속에 암 세포가 퍼져 있는지 안 퍼져 있는지 검사를 하고 수술을 해야 된데요. 아마 2,3일 후면 수술할 것 같아요. 목사님, 우리 남편이 이런 병에 걸 렸으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하던 사 역을 다 놓아야 되니까 참 안타까울 수밖에 없을 텐데 마침 제가 이런 병에 걸렸으니까 얼마나 다행이에 요. "
이런 말을 하는데 이 사람이 진짜 암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 인지 아니면 소파에 앉아 가지고 기 분 좋게 떠드는 사람인지 제가 그냥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저는 마음 이 무거워 가지고 눈에 눈물도 나려 고 하는데 막상 당자는 생글생글 웃 으면서 기분 좋게 전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전화 통화를 하고 기 도해 주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 니다. 그 사모님은 자기 곁에 계시 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하시고 온유하셔서 가까이 다가 오셔서 왜 그랬느냐고 따지지 아니 하시고 조용히 부드러운 팔로 껴안 아 주시고
"걱정하지마. 내가 네 옆 에 있어. "
하시는 그 예수님의 음성 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서 상 상할 수 있는 그런 우울함이나 두려 움, 공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 니다.
우리 모두 이런 예수님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기쁨으로 찬양>에 보면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예수님이 나를 밀어주시네/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 시네 "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녀도 지치고 곤하여 쓰러질 때 내게 손 내미시는 예수님 을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오늘 이 시간 이 주님 의 손에 붙들리는 시간 될 수 있기 를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답 답하십니까? 지쳐 있습니까? 고독 하십니까? 사람은 내게 아무런 도움 이 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 새끼를 타고 죽음의 현장인 줄 알면 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시면서 가시던 그 주님이 오늘 나를 찾아와
"내가 네 곁에 있지 않니? "
하시는 말씀을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이런 음성을 듣고 살아야지 날마다 허공을 치듯이 신앙 생활하 면 어떻게 합니까? 세상은 너무 험 하고 악합니다. 우리 힘으로 도무지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 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 그분이 내 곁에 계시다는 믿음 때문에, 병 상에 있는 어느 선교사 부인처럼 남 이 우는 자리에서 웃을 수 있고 남 이 불평하는 자리에 감사할 수가 있 는 것입니다.
희생하시는 왕
둘째로, 예수님은 희생하시는 왕 이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에 쓰 는 짐승은 한번도 멍에를 메고 일을 해보지 아니한 것이라야 된다고 했 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려 고 할 때는 이미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 논을 갈고 한 소는 안 되는 것 입니다. 만약 나귀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하면 나귀 역시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제단에 올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한번도 타보지 아니한 어린 새끼를 타고 가 셨을까요? 자기가 제물이 된 것입니 다. 그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에 올려놓기 위해서 지금 예루 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자기를 태우고 가는 짐승 역시 한번도 사람이 타보지 아니한 나귀 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향해서 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습 니다.
요세푸스라고 유대 나라 유명한 사학자의 말을 보면 유월절을 당할 때마다 유대 나라 각지에서 아니면 세계 도처에서 200만이 넘는 군중이 모여 가지고 북새통을 이룬다고 합 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 로 제사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10 명이나 20명 단위로 팀이 되어 가지 고 짐승 하나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 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이 유월절 때 성전 안에서 희생되는 짐 승의 수는 25만 6천 마리에 이른다 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짐승들이 피 를 흘리고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지 는 것입니다.
이 짐승들은 유월절이 있는 그 달 10일에 예루살렘 성전으 로 전부 끌려 들어갑니다. 이 날은 바로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 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바로 그날 입니다. 수많은 양들이 예루살렘 성 전 안으로 끌려 들어가서 따로 설치 된 특별 구역에서 기다리다가 그 달 14일이 되면 한꺼번에 다 죽임을 당 해서 그 제물이 하나님의 제단에 올 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십 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던 바로 그날, 그 모든 양들은 다 죽임 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 양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어린양이 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어린 양들이 죽임을 당할 때 드디어 십자 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마지막 유월절 양이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 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하나님 자 신의 희생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대속의 제물이었습니다.
대속이라는 말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대속 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어떤 사람의 고통을 대신 당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풀어주는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나의 고통과 나의 형 벌, 나의 저주를 대신 받아주시고 나를 거기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대 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아이슈비츠 수용소 하면 소름 끼 치는 이름 아닙니까? 나치 치하에서 얼마나 악명을 떨쳤던 살인의 현장 이었습니까? 거기에 폴란드의 프란 시스 파에 소속된 신부 한사람이 갇 혀 있었습니다. 한번은 유대인들 가 운데 몇 사람을 뽑아 냈습니다. 아 마 그 사람들을 굶겨 죽이기로 작전 을 세웠던가 봅니다.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사람을 차출해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걸려들면 사형으로 가는겁니다. 몇 사람인지 정확하지 는 않지만 간수들이 벌써 몇 사람을 불러내어 그들을 지하 모처에서 굶 겨 죽이려는 잔인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 습니다. 그때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 에 처한 줄 알고 유대인들 중 한 사 람이 이렇게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좀 살려 주시오. 나 에게는 처자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식구가 있습니다. "
그러자 그 간수 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 대 신 죽어줄 사람이 나오면 고려할 수 있다. "
그때 이 말을 들은 막스밀리 안 콜베 라고 하는 신부가 선뜻 나 섰습니다.
"나에게는 딸린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
간수가
"꼭 하고 싶으면 대신 하라고. 저 사람 대신 나를 넣어주시오. "
그래서 콜 베 신부님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그 팀에 끼게 되었고 결국에는 지하 감 옥으로 끌려 들어가서 굶어 죽었습 니다.
콜베 신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 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바로 이런 죽 음을 일컬어서 구속적 죽음, 곧 대 속적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구약 시대의 번제 나 화목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는 피 없이는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제 사를 드릴 때면 언제나 수많은 양과 소가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습 니다.
죽임을 당할 때마다 주인은 와서 그 양이나 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주인의 모든 형벌과 고통과 죄를 다 짊어지 고 대신 죽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죽음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에 못 박힐 때 우리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내 모든 죄를 그 에게 다 짊어지었고 내 모든 고통과 하나님의 저주를 그에게 다 인계했 습니다.
"당신이 짊어지고 죽으시오. 당신이 다 짊어지고 죽고 나는 살아 야 되겠소. "
이래 가지고 예수님이 죽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서 대속의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베 드로전서 2장24절을 보십시오.
"친 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 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 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상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나니. "
바로 이 것이 대속의 죽음입니다. 우리 주님 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바로 이러한 대속의 죽 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죄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 니까? 오늘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신 이 예수님을 만나 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님의 손에 여러분이 죄짐을 벗으시기를 바랍니 다. 아직도 어떤 죄책감 때문에 짓 눌려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를 희생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서 그 분으로 인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함 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주시는 왕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왕이십니다. 나귀 새 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 다. 24절을 잠깐 보십시오.
"내가 진 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 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한 알의 밀이 누 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 니다. 그 많은 열매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구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 나님 없이 영원한 저주를 받고 멸망 으로 치닫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 다. 다시 32절로 넘어가 봅시다.
"내 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 로 이끌겠노라. "
'내 '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땅에서 들 리면 " 하는 말은
"십자가에 높이 달 리면 ", "승천하면 "
하는 의미가 있 습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는 그날에 세계 모든 사람 을, 온 세상을 자기에게로 이끌겠노 라, 구원하겠노라 하는 말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19절로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바리새인들 이 서로 한 말이 있습니다. 온 천하 의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 수님을 보고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
하고 소리를 지르고 흥분 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볼지어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모든 너희들의 계획이 다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
가끔 마귀도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이 영원한 진리가 되어 버렸 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때 문에 온 세상이, 열방이 예수님을 좇는 날이 온 것입니다. 온 열방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 는 날이 온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 합니까?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나 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 가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화해도 없습니다. 민족끼리 이웃끼 리 빈부 사이에 흑백 사이에 유대인 과 헬라인 사이에 갈라진 이 틈을 하나로 메우고, 영원한 나라 영원토 록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구원을 주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왕이나 황제도 이 일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1963년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 했습니다. 왜 암살을 당했습니까? 케네디 대통령은 백인과 흑인 사이 를 좀더 조화시켜 미국을 인종 갈등 이 없는 나라로 만들어 보려고 특별 한 스케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런데 이것을 안 백인 중의 어떤 사 람이 그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임금도, 어떤 유능한 사람도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 줄 사 람은 없습니다. 인류에게 평화와 진 정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 사람 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밖 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구원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만이 이 구원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 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본문이 하나 있습니다. 계시록 21장 3,4절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 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하 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 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 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 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 라. "
누가 이런 영원하고 행복한 지 상의 낙원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겠습 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분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 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바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던 그분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겸손 하신 왕이요, 희생하신 왕이요, 구원 하신 왕이신 예수님이 오늘 이 자리 에 계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고 계십 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가까이 다가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나는 온유하고 겸손 하니 내게 와서 쉬어라. 너 마음이 몹시 무겁지? 피곤하지? 힘들지? 그러나 내 곁에 와 쉬어라. 사랑하 는 자야 나는 너를 위해 죽었노라. 너를 너무 사랑해서 죽었노라. 내 품에서 진정한 평화를 소유해라. 사 랑하는 자여 나는 너를 구원하기를 원하노라. 영생의 나라로 너를 인도 하기를 원하노라. 비록 인생 여정이 힘들고 고달파도 조금만 참아라. 너 무 황홀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기다 리고 있다. 내가 그 나라를 네게 주 노라. "
여러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겸손하신 주님, 희생하신 주님, 구원 의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 /요12:9-19
2023-08-24 10:34:12
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이루어진 행진
이제 드디어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흔히 고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고난주간의 시작은 예수님이 유월절 절기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은 12장에서 마지막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행진하실 때는 이미 전 예루살렘에 예수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과연 예수가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나타날 것인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것도 당당히 나귀를 타고 행진을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공회원들은 당황했습니다. 나사로 사건 때문에 예상 밖의 무리들이 예수를 따르며 환호하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9-11) 이들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예수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자!
여기에 주동자들은 사두개파의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이 예수 제거에 앞장선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의 교리입니다. 그들은 영혼이고 내세고 부활이고 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다시 산 것은 대략 난감한 일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지도권 약화입니다. 바리새파와는 달리 사두개인들은 성전이 삶의 근거지였습니다. 성전을 근거로 지위를 누리고, 성전이 수입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성전 지배권을 빼앗긴다면 큰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말입니다. 이런 위기감에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의 행진은 당당히 진행되었습니다.
군중들의 환영
예수님의 행진에 대해서 군중들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2-15)
나귀 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옷을 벗어 땅에 깔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길에 놓았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 가지를 들고 흔들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드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종려가지는 존경과 기쁨의 상징입니다.(레23:40) 매카비 시대에는 민족의 영웅 시므온을 환영하면서 종려가지를 흔들었습니다.(1Macc.13:51) 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천국에서 주님을 찬미하면서 종려가지를 흔듭니다.(계7:9) 장막절에 유대인들은 종려와 버들가지로 ‘룰라브’라는 단을 만들어 흔들었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 가지를 흔든 것은 존경과 환영의 표시입니다.
군중들이 이렇게 열렬히 예수를 환영하게 된 것은 바로 나사로 사건에 있었습니다. 물론 나사로 사건 이전에도 예수님의 이적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이적들은 나사로 사건 만큼 큰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이적은 대부분 갈릴리에서 행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 거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가까이서 보고 듣게 됨으로써 예루살렘 거민들이 흥분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군중들 중에는 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막연한 소문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사로 사건을 직접 전해 들으면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타향살이를 하면서 누구보다도 민족의 회복을 고대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메시아적인 이적을 들으면서 열렬히 환영한 것은 당연합니다. 셋째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갈릴리에서 올라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이미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많이 보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더하면서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외친 구호는 “호산나!”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 “호산나”란 말은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지금 구원하소서!’ 하는 뜻입니다.(시편118:25)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의 뜻을 단순히 ‘찬양하라’ ‘환영’ ‘만세’ 정도의 찬미어로 보기도 합니다. 군중들은 ‘호산나’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예수님 만세!” “환영 예수님!” 정도로 생각하고 환호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환영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보면 명절 때 모인 군중들의 수가 270만 명이나 되었다고 했는데,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J. Jeremias에 의하면 이 당시 대략 15만 명의 인파가 모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좁은 도시에서 10만 인파가 호산나를 외쳐댔으니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자포자기 했습니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19)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는 온 세상이 따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말은 그대로 하나의 예언이 됐습니다. 예수님 사후에 예수의 소식은 온 세상에 퍼졌고, 모든 족속들이 예수를 구주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나귀 타신 주님이 보여주신 것
예수께서 굳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시내에서 행진하신 것은 勢를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공회원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만인 앞에 보여주며,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행진은 왕으로서의 행진입니다. 군중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 “주”라는 명칭으로 오시는 분! 주님은 천국의 주인이시오, 그 백성들의 주인이십니다. 또한, 주님은 우주의 왕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군중들은 자기들이 외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외친 말은 사실입니다. 예수는 왕이십니다.
외모로 본다면 예수를 왕이라고 주장하기 곤란합니다. 라만차의 괴짜 돈키호테의 차림새는 퍽 우습게 보입니다. 비쩍 마른 몸에, 헛간에서 꺼낸 골동품 갑옷을 입고, 비루먹은 말을 타고 행진을 합니다. 외형상 주님의 차림새는 돈키호테만도 못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왕의 차림새는 아닙니다. 위압감을 주는 큰 말을 타지 않았습니다.
안장도 없는 나귀, 그것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새끼 나귀입니다. 키 큰 사람이 타면 발이 땅에 닿을 정도입니다. 칼이나 창을 들지 않은 비무장의 모습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30년을 지내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정한 거처가 없으셨습니다. 들이나 산에서 노숙도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행진하시는데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쳤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군중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왕이십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왕입니다. 진토로 돌아갈 육체를 구원하고, 지옥에 떨어질 영혼을 구원하는 왕입니다. 총칼로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 아닙니다. 영으로 영혼을 지배하는 영적 세계의 왕입니다. 말 타고 제국을 건설하는 왕이 아닙니다. 마귀를 멸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왕국의 왕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입니다. 나다나엘은 고백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너무나 겸손하시기 때문에 그저 모범적인 시민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배하는 왕이십니다. 사탄을 지배하고, 세상 나라들을 지배하고, 하늘의 해 달 별을 지배하시는 왕이십니다. 주님 명령은 곧 왕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은 제대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둘째로, 평화를 선포하는 행진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행진하셨습니다. 왜 기왕이면 기름지고 힘 있는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타셨을까요? 그것도 아무도 태워 본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요? 나귀의 의미는 두 가집니다. 첫째는 평화의 상징이요, 둘째는 겸손의 상징입니다.(마21:5, 삿10:4,12:14, 삼하19:26)
먼저,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주로 평화적 목적에 사용됩니다. 제사장들을 태우고, 장사꾼들을 태웁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시키고, 죄인과 죄인을 화해시키려고 오셨습니다. 예수가 있는 곳에 화해가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샬롬”의 도성, 즉 평화의 도성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에서 피 흘린 다윗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평화의 사람 솔로몬에게 짓게 하셨습니다. 평화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그 평화의 도성에서 주님은 평화 행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평화는 거꾸로 하면 화평, 즉 화목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 제물 삼아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화목 제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죄인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시는 화목제물이십니다. 예수님은 서로 원수 된 사람들을 화해시키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이 세상은 투쟁의 장소입니다. 경쟁하고, 시기하고, 싸우는 곳입니다. 북한을 보면 모든 것을 “전투”라고 부릅니다. 농사짓는 것도 전투, 공장 돌리는 것도 전투, 정치도 전투, 학문 연구도 전투, 스포츠도 전투, 사랑도 전투, 다 전투입니다. 도대체 그놈의 나라는 모든 것이 싸움뿐이니 틀림없는 마귀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조화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모니를 회복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나귀는 또한 겸손의 상징입니다. 평화는 싸움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겸손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상 임금들은 위세를 과시하려고 좋은 말을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 세상은 과장과 포장의 세상입니다.
모든 것이 과대 포장되어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고, 속에 든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치장이 요란합니다. 겸손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겸손해서 손해 볼 리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겸손해도 다 인정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귀를 타셨다고 해서 신성이 어디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셔도 메시아이십니다. 참 메시야는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이미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슥9:9) 평화는 겸손으로 이루어집니다. 겸손히 행진하시는 주님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승리의 행진입니다. 예수의 행진은 외견상 승리의 행진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어린 나귀를 탄 모습, 옷으로 안장을 대신하고 올라앉은 모습. 결코 강인한 면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지금 환영받고 있지만 한 주일 후면 붙잡혀 죽을 운명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진은 죽으러 가는 행진입니다. 이것을 어찌 승리의 행진이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모든 신학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이 행진을 ‘승리의 행진’(triumphal entry)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 까닭은 십자가의 결과가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진은 십자가로 향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결코 패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표상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죄와 심판을 이기셨습니다. 지옥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인간의 슬픔과 고통과 불행을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로마 제국을 정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승리를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오늘 우리 역시 주님의 십자가로 승리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생명과 구원과 축복의 장소입니다.
예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의 얘기는 4복음서의 25%-40%에 이르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한주간은 구원의 대장정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입니다. 그 정점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 바로 이 행진입니다. 이 행진이 승리의 행진이 되는 이유입니다. 오늘 주님과 함께 승리의 행진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죄악에서 승리하고, 죽음에서 승리하고, 실패와 좌절에서 승리하고, 아픔과 고통과 불행에서 승리하고, 질병에서 승리하고, 사탄 권세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군중들이 보여준 신앙의 허구성
주님에 대한 열렬한 환영을 보면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행진으로부터 닷새 후에 나타난 무서운 반전입니다. 겨우 닷새의 간격 밖에 없었는데, 종려 가지를 흔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고,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은 어디로 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폭도들의 외침만 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래부터 두 종류의 군중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 그래서 먼저 지지자들이 행진했고, 나중에는 반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에 대한 확고부동한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확연히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중들은 한 때는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반대자의 대열에 가담한 배반자들입니다. 그러면 왜 동일한 사람들이 5일 상간으로 열렬한 지지자에서 지독한 반대자가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오해와 무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를 잘못 알았고, 둘째는 예수의 왕국을 잘못 알았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를 잘못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환영했지만 어떤 왕인지 오해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왕의 성격을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4-16)
사람들은 왕이라고 하니까 높은 자리에 앉아서 호령하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군림하는 왕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낮아져서 섬기는 겸손한 왕이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백성에게 명령하고, 세금을 매기고, 병역을 부과하는 왕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희생당하고 대신 속죄하는 왕이셨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의 용사로 알았지만 예수는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왕을 잘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실망하고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왕국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에서 독립시키고, 예루살렘에 민족 국가를 세우는 것을 메시야 왕국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선언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입니다. 영혼을 지배하고, 내세에 완성될 왕국입니다. 이렇게 왕국을 오해한 결과로 군중들은 실망하고 배반했습니다.
예수를 오해하고, 그 나라를 오해한 것은, 그들의 현세 중심 유물론적인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현세와 물질세계뿐이었습니다. 요즘 다수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뇌 세포의 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단정합니다. 우주 만물은 우연적인 생성과 진화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절반만 봅니다. 비록 대기권 밖의 별을 보고, 뇌 세포를 들여다본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영적 무지함은 영적 죄악의 결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했습니다.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사5:13) 영적 세계는 영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철학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지식으로도, 경험으로도, 사색으로도, 심령과학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나서 성령을 받은 자들만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주님이 어떤 왕이셨던가, 주님이 어떤 승리를 하셨던가를 알게 됐습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셔서 영적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만일 오늘 주님이 내 앞에서 나귀 타고 행진을 하신다면 나는 제대로 알아보고 환영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종려 가지 들고 “호산나!” 외치니까 얼떨결에 같이 외치지는 않을까요? 불과 닷새 후에 예수를 욕하고 죽이라고 외치는 반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을까요? 진정 중심에서 주님을 알아보고, 영접하고, 환영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나귀를 타셨든지, 초라하든지, 주님은 왕이십니다. 그 주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그리고 일평생 주님의 왕국에서, 주님의 축복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획 너머에 있는 것 /요12:9-19/ 김도완목사
2023-04-16 08:48:23
1. 사라지지 않는 불안
한국의 종교인 통계를 보면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통계연도가 달라 오차는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목사가 약 14만, 승려가 4만 7천 그리고 신부가 1만6천 명 정도인데 비해 무당과 역술인 소위 무속인은 등록자만 2016년 약 60만 명에 이릅니다. 무속인의 특성상 한국의 대표적인 두 개 무속인단체인 대한경신연합회와 한국역술인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비회원을 더한 추산치는 최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는 2006년에 비해 10년 만에 두 배 넘게 성장한 결과입니다.
21세기는 소위 과학과 진보의 시기가 아니던가요? 종교는 소멸할 것이란 예언이 쏟아지는 이 시기에 무속인이 이렇게 느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아마도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더 느는 사람들의 미래에의 불안, 염려,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건강과 직장, 가정과 자녀의 미래가 궁금하고 어렵게 될까봐 불안합니다. 미국의 경기, 금리동향, 주식동향, 부동산동향도 궁금하고 11월의 중간선거결과도 궁금하고 바이든이 재선할지, 트럼프가 다시 나올지도 궁금하고 한국의 다음 대통령도 궁금하실 겁니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과연 우리 인생과 자녀와 가정과 이 나라와 이 시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불안과 염려는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본문말씀에게 물어봅시다.
2. 순례자들과 대제사장의 계획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던 베다니 식사의 다음 날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기대와 계획을 가진 것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부류는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순례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확신하고 예수님을 앞세워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해방을 되찾으리라고 계획했습니다. 그 확신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길에 있던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고, 적지않은 이들이 직접 베다니로 내려가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나사로는 베다니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지였고 그의 죽음과 되살아남은 나사로 본인 뿐 아니라 장례식장에 모여들었던 베다니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18절을 보면 베다니 주민들과 예수님을 믿은 이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를 전했고 예루살렘에 구름처럼 모여든 순례자들 사이에는 ‘이 분이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해방을 가져다줄 왕이 아니냐’는 기대와 믿음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개선장군을 환영하듯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13절을 보면 호산나 곧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영접하였습니다. 과연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요?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죽여서 혁명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되살아난 이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어나자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대중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뭉쳐 반로마저항세력으로 뭉치기라도 하면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고 자칫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이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듣고 나사로를 보러왔다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자 그들은 나사로마저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큰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몰려든 순례자들의 규모와 지지세를 보고는 그만 기가 질려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시도는 성공했을까요?
3. 제자들의 깨달음
결론은, 순례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계획은 다 실패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로마를 몰아내기는커녕 로마군병들에게 잡혀왔고 실망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로 돌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대제사장과 함께 예수님을 로마군병에 넘겨 죽이는데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던 기득권은 AD 70년 전쟁으로 예루살렘과 함께 잿더미에 묻혔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전하는 제자들로 인해 교회가 온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모두의 계획이 다 실패했다면 도대체 누구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까? 그 답은 바로 제자들의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당시에는 상황이 어디로 흘러갈지 도무지 몰랐던 제자들이 마침내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16절입니다.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요 12:15) 이는 (슥 9:9에)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도, 순례자들이 예수님께 열광한 것도, 순례자들을 열광시킨 나사로를 살리신 일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을 제자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그제서야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일부러 지체하신, 그 이해할 수 없던 주님의 행동의 의미도 깨달았습니다. 11장으로 돌아갑니다.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나사로를 그냥 고치지 않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셔서 제자들과 순례자들이 믿도록 만들게 하시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입성 뿐 아니라 나사로의 살리심, 그 이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부터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에 의해 오래 전부터 준비되었고 준비된 대로 진행되었고 계획대로 이루어졌음이 드러납니다. 이 모든 일을 준비하고 진행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4. 일하시는 하나님
순례자들도, 바리새인들도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다 자기 계획이 있었지만 이 모든 일의 준비도, 진행도, 결말도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되었습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일 뒤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사람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힘모아 죄악을 만드는 인간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 아래 놓여 있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 중이고 그 뜻대로 완성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미얀마에서도, 한국에서도, 여기 미국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모든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돈을 버냐, 못 버냐, 원하는 학교, 직장에 가느냐, 아니냐에 집착하고 거기에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합니다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 판단과 반대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의 성공과 실패가 영원한 성공과 실패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진리를 쉽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숲 안에서는 숲을 못 보고 산 속에서는 산을 못 보듯 삶의 한 가운데서는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나중에야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떠올리고 이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았습니가? 창세기를 보면 요셉도 자신이 형들의 악행으로 노예로 팔린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후에야 떠올리지 않았습니까?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우리도 지금 당장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괴롭고 힘들고 슬프고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에 우리 생각과 기대를 넘어서는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음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5. 신뢰하는 성도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청동)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므로 지금 다 이해하지 못 해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14살도 안 되었을 소녀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10)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은 가르치신 대로 당신도 기도하셨습니다.
(마 26:39) … 기도하여 이르시되 “…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또한 우리는 삶의 의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조금씩이라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말입니다.
(시 119:125)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미래가 불안하고 염려하고 갈피를 잡지 못 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과 담대함을 누립니다. 겸손하고 신중하게 매순간을 감당합니다. 마침내 승리의 길을 갑니다. 여러분은 오늘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보이지 않지만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뜨겁게 찬양하며 소리쳐 외치라” /요12:12-19/ 유기성목사
2022-09-22 10:45:03
요 12:12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14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6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17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십자가 부흥회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날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예수님에 대한 환영 열기로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땅에 펴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어린 아이들은 나뭇가지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며 환호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때 환호성을 지르며 예수님을 맞이했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였을지 궁금합니다.
제자들과 열광적 지지자들 몇 명은 아니었을까요?
아닙니다. :12에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라고 했습니다.
:19에서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의논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종려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게 이런 찬양이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극도로 감정을 절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감정을 누르고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어야 살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점잖다, 모범생이다, 애어른이다 하는 평가를 받았고 솔직히 재미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도 엄숙하고 조용한 예배가 제 성격에는 맞습니다.
저만 아니고 손을 들거나 일어나서 찬양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주일예배 찬양 시간에 손을 들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찬양할 때 느낌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교인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강의 중에 ‘온누리교회에서 주일 예배 때 두 손을 들고 찬양하게 하는 데 7년이 걸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찬양할 때, 손을 들거나 일어나서 찬양하는 것이 어색한 사람들은 꼭 점잖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가 대항 축구 경기를 볼 때나 벚꽃이 만개한 공원에 가서는 어떻습니까?
반가운 사람,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배 때 점잖은 것은 예수님께서 실재로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정말 믿는다면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날, 상황은 살벌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귀신에 들렸다, 하나님을 모독했다 하며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마치고, 예수님만 나타나기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하고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데도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이 들린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만 하지,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고 사람들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메시야가 오셨구나!”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기적에만 반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처럼 열광적으로 환호했던 사람들은 얼마 못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됩니다, 한 주간 안에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에만 반응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열광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기적 때문에 예수님께 열광하는 사람은 고난 앞에서 다 도망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의 환호성이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불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눅 19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할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찬양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책망해야 맞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찬양은 마땅히 드려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적이 일어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감사도 예배도 달라집니다,
제가 신학생 때, 교회사를 공부하는 중, 부흥시대의 역사를 읽어 내려가다가, 부흥이 일어나던 당시 예배 중에 눈물과 감격, 치유, 회심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예배를 드려 보았으면!’ 하는 갈망이 일어났습니다.
보통 목사님의 설교로 유명한 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조용하고 엄숙합니다.
찬송도 거의 찬송가나 성가곡 수준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로 소문난 교회는 예외 없이 찬송이 뜨겁고 열정적입니다,
박수를 치고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는 늘 뜨거운 통성기도입니다.
누구나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을 체험하면 예배와 찬양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으로는 예배의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감격해 하다가, 어느 날은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라 하며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수준을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12:23에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하셨습니다,
이때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인데,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영광을 얻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 앞에서도 변함없이, 아니 더 뜨겁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영광을 보는 눈이 뜨였습니까?
우리는 모두 그 눈이 열리게 될 때가 옵니다. 천국 가는 길에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는 길에서 돈 생각, 사업 성공, 대학 입시, 건강 생각이 나겠습니까?
자신이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그때 어떻게 찬양하시겠습니까? 가만히 조용히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는 사업 실패를 감사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병든 것을 감사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구원받을 계기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천국 가는 길에서는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 위하여 애통하며 눈물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예수님을 더 분명히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이처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암에 걸린 것도 감사한다]라는 책을 쓴 암전문의 이희대 박사는 30년 동안 암환자를 치료했고, 자신도 암 4기 진단을 받았고, 열 번 암이 재발하였습니다.
그가 암을 이기는 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라!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구원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암 4기의 공포를 이기고 생명의 5기를 사는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암 투병 중에 하나님을 예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천국 가는 길에서 부를 찬양이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뜨겁습니다. “내 영이 주를 찬양합니다!”
계 7:9-12에 보면 하늘에서 드려지는 예배 모습이 나옵니다.
계 7:9 ...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11 ...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것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죽고 난 다음이 아니라 지금 천국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천국 가는 길이 생깁니다.
지옥으로 가는 인생이 천국으로 가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가는 길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지난 주간 분주히 살았어도 천국 가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힘든 일이 있었어도, 실패가 있었어도, 죽을병으로 고생했어도 지난 주간 우리는 천국 가는 길을 걸은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 가는 길에 들어선 성도의 특징이 찬양입니다,
그 찬양으로 그 사람이 천국으로 가고 있는지 지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환경, 여건을 초월하여 찬양합니다.
장례식에서도 찬양합니다. 병원에서도 찬양합니다. 감옥에서도 찬양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빌립보 지하 감옥에 던져진 채로, 한밤중에 찬양했습니다.
기적을 볼 때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이런 찬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보았기에 감옥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에 감옥으로 인하여 더 기뻐하였습니다,
천국 가는 길에서 부르는 찬양이 성도들이 세상을 이길 힘입니다,
살아서 천국 가는 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춤을 추며 찬양해 보셨습니까? 통곡하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안 된다, 어색하다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젠 진리에 반응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 손을 들고 찬양하고 일어나서 찬양할 때, 주님이 늘 함께 계심을 믿기로 한 다음부터였습니다.
주님을 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믿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예배를 이전처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손을 들고 찬양하고 일어나 찬양하여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나 당연히 들었습니다. 교인들이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주님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손을 들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예배는 제게 은혜를 누리고 힘을 얻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려 힘쓰면서 언제부터인가 예배드리고 설교할 때마다 제가 울까봐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앞에서 우는 것이 창피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배인도자로서 절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제 속에서 부글거리며 끓는 것이 있습니다.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뛰며 찬양하고 통곡하며 울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마 제가 이렇게 하는 날이 오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일어나 찬양합시다.
특별히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아이를 기르는 부모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구별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송을 구별할 줄 아십니다.
언제나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찬양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만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일상이 예배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찬양: 내 영이 주를 찬양합니다.
종려주일/ 종려나무이신 예수님 /요12:12-15
2021-05-23 14:20:08
❚ 오늘 주일은 교회력상 ‘종려주일’이다.
종려란 棕(종려나무 종) 櫚(종려나무 려) Palm Tree이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우리가 찬송가 교독문 129번(종려주일)을 교독했는데, 세계 교회는 부활주일 전 주일(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종려주일을 지키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고 기도한다.
❚ ‘인생’에 대한 아프리카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폭풍을 앞두고 있거나 폭풍 속에 있거나 이제 막 폭풍 속에서 나왔거나.”
아프리카의 지혜는 폭풍이 없는 인생은 없다고 담담히 전한다.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구주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엄청난 폭풍을 앞두고 이제 그 폭풍이 기다리는 예루살렘 속으로 들어가신다.
<요한복음 12: 12-13>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리로다.”
✚ 여기 본문의 ‘명절에’(the Feast)는 유월절을 가리킨다.
유월절(逾月節, the Passover, πασχα)은 이스라엘의 해방절이다. 과거 이스라엘이 430년간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애급의 압제로부터 대탈출(Exodus)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이 구원의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이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온 애급을 심판하실 때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살 길을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각 가정마다 ‘흠 없는 어린 양’을 한 마리씩 잡아 그 피를 문의 양편에 세운 기둥인 문설주에 바르게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역하고 주의 백성을 핍박하는 애급의 모든 집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장자를 다 쳐서 생명을 거두셨다. 애급의 역사 속에 전대미문의 호곡소리가 흘러 넘쳤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각 집의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의 각 가정은 한 사람도 해를 당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심판의 천사가 문에 양의 피가 발려진 집은 들어가지 않고 넘어가셨기(逾月, Pass Over)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임하신 그 ‘여호와의 밤’에 “애급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출 11: 6)이 덮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여”(출 11: 7) 모두 죽음을 면하고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실로 유월절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 11: 7)는 말씀대로 주님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위대한 영혼의 절기이다. 해서 세계 곳곳에 흩어진 자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것을 그들 평생의 소망으로 여겼다.
✚ 요한복음 12: 12를 자세히 보면,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찬송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입성을 환영한 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려고 이스라엘 전역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에 오른 자들이었다.
“명절에 온 큰 무리”라는 요한복음의 지적은 오늘 우리들에게 깊은 영적인 도전을 준다. 소위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에 젖은(관습화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요한복음의 기록대로 본다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든 그렇지 않던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의 내적 영혼은 주님의 진리를 향한 신앙적 열기가 식어 냉랭한 상태였다. 그저 그동안 해온 전통이 있으니 유월절을 지키기는 지켰으나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피동태가 되어 의식적으로 지키는 척 하기만 했다. 그러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고 해도 흥미도 감흥도 기쁨도 소망도 가지지 않았다.
대신 성경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온 자들이 하나님(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하였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곳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이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불타는 마음이 있었다.
올해도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종려주일을 맞이했다. 과연 우리들은 지금 어떤 마음 어떤 부류로 서 있는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고자 열띤 가슴으로 영혼을 쏟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주의 성도인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아무런 감흥도 없이 무반응, 무관심, 무덤덤함으로 탈색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권세를 주셨으니”(요 1: 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 14).
✚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palm branches)가 들려 있었다.
성경에는 참 많은 식물들이 나온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셋째 날에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를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창 1: 12). 성경에 언급된 그 많은 식물들 가운데서 우리 예수님과 연관된 몇몇 식물들이 두드러진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았다(요 1: 48).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여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 혼인잔치 집의 근심을 해결해 주신 것인데(요 2: 1-11), 생명의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본다(요 15: 1).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 28)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 비유를 통해 우리들의 심령이 ‘길 가’인지, ‘흙이 얕은 돌 밭’인지, ‘가시떨기’인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를 맺는 ‘좋은 땅’인지 채근하신다(마 13: 1-9).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을 소재로 하여 천국의 내밀함을 말씀하신다(마 13: 31-33).
예수님은 ‘가라지’를 소재로 하여 교회를 헤치는 악한 자들에게 경고하신다(마 13: 36-43).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마 21; 18-19).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무화가나무가 예수님께 저주를 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곧(즉시) 마른 것을 보고 놀라는(amazed) 제자들에게 말씀한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요”(마 21: 21).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으라”하셨다(마 21: 2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러야 할 때, 경건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헌신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묘를 주님의 장례를 위해 내어 드렸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왔다(요한복음 19: 39). ‘몰약’은 방부제로 ‘침향’은 방취제로 사용하는 향품이다.
‘리트라’(λιτρα)는 무게의 단위(pound)인데, ‘100리트라’는 100근(약 34kg)으로서 1리트라가 노동자 300일 품삯(요 12: 3)이기에 노동자의 100년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을 주님의 장례를 위해 드렸다. 이 정도의 장례는 다윗의 장례 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한 것으로서(대하 16: 14)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짐작케 한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올라갈 때, 곳곳에서 유월절 순례를 온 사람들이 손에 동려나무 가지를 들고 우리 주님께 호산나 찬송을 하며 주님을 환영하고 영접한다. 왜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을까?
고대부터 종려나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식물이었다.
주전 15세기, 애급의 파라오 ‘투트모트3세’가 가나안 땅 ‘므깃도’를 중심으로 한 반역을 진압하고 그의 카르낙 신전에 이 사건을 벽화로 남겼는데, 가나안 지역을 종려나무로 표시했다.
하나님의 은혜아래 극적으로 출애굽에 성공한 이스라엘 행렬은 마라의 쓴 물 사건을 겪은 후 열두 개의 오아시스와 칠십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엘림’ 오아시스에서 휴식을 취한다(출 15: 27).
그 후,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출애굽 여정 광야 40년 동안 장막을 치고 생활 한 것을 기념하는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s)을 지킨다.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축복아래 번영하고 왕성함을 상징한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시편 92: 12).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아가 7: 7).
이 종려나무의 학명은 ‘Phoenix dactylifera’이다.
불사조를 뜻하는 ’Phoenix'가 붙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종려나무는 다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고 자라나니 가히 불사조(不死鳥)라 불릴 만하다.
종려나무의 생명력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음씨가 아주 고약한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싱싱하거나 건강한 것을 보면 괜히 화를 내고 질투를 했다. 아름다운 식물을 보면 줄기를 끊어버리거나 뿌리 채 뽑아 던져버리는 등 괴팍했다. 그런 그가 힘든 여정 간에 오아시스를 만났다. 그런데 그 심술궂은 상인은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는 종려나무 가지에 얼굴이 찔렸다. 잔뜩 화가 났다. 하지만 종려나무가 워낙 견고하여 뿌리를 뽑을 수 없었다. 허나 여기서 물러날 그가 아니었다.
주변을 살펴 큰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종려나무 줄기 한 가운데 올려놓았다. 심통도 보통 심통이 아니었다.
종려나무는 갑자기 당하는 날벼락에 하루하루 감당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냈지만 큰 바위 무게를 버텨내기 위해 더욱더 땅 속 깊이 죽을힘을 다해 뿌리를 박아 내렸다. 그야말로 종려나무의 ‘(불가항력적인)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이었다. 감사하게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종려나무의 뿌리는 마침내 오아시스의 깊은 수맥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땅속 깊이 뻗어 내린 종려나무의 뿌리는 거대한 산맥처럼 되었다.
종려나무는 십자가처럼 여겨졌던 그 바위덩어리 때문에 거목으로 성장하여 오아시스를 찾는 이들의 기쁨이 되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 18). 이 말씀 그대로이다.
종려나무의 이런 끈질긴 생명력을 소중히 여긴 이스라엘사람들은 종려나무를 압제를 이겨내는 승리와 부활의 상징으로 여겼다. 예수님 당시 로마가 세운 헤롯 가계의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큰 돌에 눌린 종려나무요 불에 탄 종려나무 그루터기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없는 병자를 고치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메시아라고 확신한 이들은 나귀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Hosann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Blessed is the King of Israel / 요 12: 1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로 좌우에 연하여 있는 연도(沿道)에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한 사람들은 시편 118편의 말씀을 압축적으로 인용하며 주님의 구원을 간청한다.
‘호산나’(Hosanna), ‘구하옵나니∙구원 하옵소서’라는 의미이다.
시편 118편의 무명의 시인이 처한 삶의 정황은 애처롭다.
<시편 118: 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시편 118편 시인이 토하는 고통(mechar, 히)은 ‘좁은 곳, 심신의 고통, 괴롬’이란 뜻이다. 시인은 지금 ‘좁은 곳’에 처해있어 심신의 고통(anguish)이 너무나 힘들고 괴롭다.
시편 118편의 시인의 탄식처럼, 우리 인생도 ‘고통 속에 서 있는 존재’이다.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가난, 건강 상실, 늙음, 타인의 비판, 죽음에의 두려움’같은 6대 두려움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데 시편 기자의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편 118: 12>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시편 118: 13>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여기 시편기자는 앵앵거리는 벌(bees)이 에워싸고 있고, 가시덤불의 불(burning thorns)같이 화급하게 에워쌈을 당한 심대한 고통에 격리되고 포위되어 있다. 이리보아도 저리보아도 구원의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그때, 시편 118편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간구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호산나) 이제 구원 하소서(호산나) 여호와여 구하옵나니(호산나) 이제 형통케 하소서”(25)
시편 118편 시인의 간구의 결과, “내가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5)
그렇다. 하나님은 궁극적 대답(The Ultimate Answer)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광활한 곳’(자유, 구원)에 세우신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편이다(7).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롬 8: 31).
하나님의 사랑은 종려나무보다 강하고 끝이 없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죽기까지 복종하시고자”(빌립보서 2: 6-8)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은 <스가랴 9: 9>이 예언한 ‘왕 중 왕’이요 정녕 구원의 종려나무이시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스가랴 9: 9).
큰 군대의 장군이 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함에 비해, 우리 주님은 나귀를 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유력한 사람들은 우리 주님을 도외시한 채 예수님을 죽일 궁리만 하는 것에 비해, 먼 곳에서 온 순례자들만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우리를 구원 하소서”라고 기도드린다.
한 알의 밀알로서 자기를 많은 이들을 위한 십자가 희생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신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종려나무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 25-26).
“주여 그러하외다(Yes, Lord)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 27)라고 고백한 마르다 마리아처럼, 생명의 참 종려나무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승리를 거두고 찬송하며 주님을 따라가도록 더욱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아멘.
요한복음 강해 (79) - 그리스도의 증인 /요12:9-11/ 김형익 목사
2021-05-08 11:02:08
본문은 계속 나사로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이 식사 자리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함께 했습니다.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과 또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몰려들었습니다. 식탁은 시몬의 집 안에 차려졌겠지만, 수많은 인파가 그 문 앞에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1. 불안한 사람들: 대제사장/관원들
본문은 이제 장면을 바꾸어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예루살렘의 당국자들, 지금 예수님과 나사로 사건으로 인하여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대제사장과 관원들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10절은 대제사장들이라고만 언급되었는데, 이렇게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사용되는 것은 공회를 구성하는 대제사장 가문들, 저명한 대제사장의 문중들과 함께 다스리는 대제사장들과 과거의 대제사장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행 4:6).
여기에 성전을 관리하던 책임자들과 경비 대장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들은 대개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나사로 사건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위협은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나사로 사건의 소식을 듣게 되자 결정한 것은 예수를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참을대로 참았고 이대로 두다가는 큰 일이 나겠으니 그를 죽이자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들이 오늘 베다니의 저녁 식사를 보면서 내어놓는 또 하나의 대책은 나사로까지 죽여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의 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두 발로 걸어다니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부활의 증거요, 그를 살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그저 자기들을 불편하게 하는 증거를 찾아서 인멸하는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하는 방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것인지 생각 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방식을 나중에는 그대로 로마가 받아들였고 기독교 생명의 증거를 없애랴고 그 많은 신자들을 잡아 죽였지만, 그 증거는 그렇게 뿌리뽑히지 않았고 계속해서 번져가기만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2. 나사로, 역사상 최초의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증거
나사로는 어떤 면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최초의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등장한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나 정확하게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1).” 그는 그리스도의 탁월한 증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증인이라는 말 보다는 증거라는 말이 그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증인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진술하는 사람이라면, 증거는 말하지 않더라도 증거 자체가 이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거는 그 자체가 설명입니다. 나사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대화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지금 크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잘못된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는 주님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이제는 나사로까지 죽여야만 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적대감이 나사로에게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최초의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삶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A. 나사로의 증인 자격 요건
나사로가 이런 증거와 증인으로서 가지는 자격 요건이 무엇입니까? 그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까? 단순하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i. 죽었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다.
첫째는 그가 죽었다가 나흘만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주재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도 아니고, 절름발이가 일어선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죽은 자가 나흘이 되어 거의 썩어가고 있을 때, 예수님의 말 한 마디로 살아난 것입니다.
ii.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12:2)
둘째는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12장 2절에서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는 지금 주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고 주님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엉뚱하게 인생을 낭비하고 살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주님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했다는 것이 나사로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사입니다. 이로써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아더 핑크가 강조하듯이).
그가 살아난 후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두번째 자격 요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마 28:20).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리스도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입니다.
B. 그리스도인의 증인 자격 요건
나사로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가지는 자격 요건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어떻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격을 가지게 되는지 아십니까? 제자훈련과정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증거로 만드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오하며 본질적인 일이 필요합니다.
i. 증인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과 회심으로 태어난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첫번째 자격 요건은 나사로에게와 마찬가지로 그가 분명한 거듭남, 분명한 회심을 했는가 입니다. 즉, 그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선언합니다(엡 2:1).
모든 그리스도인도 다 죽은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신 사람들입니다(골 2:13; 엡 2:5).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거듭났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은 주님께서 직접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표현입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난다’, 혹은 ‘다시 난다’는 뜻입니다. 다시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설령, 그가 어떤 전도의 내용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증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이 겪고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거듭남, 분명한 회심이라는 사건 자체가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드는 사건이 되는 것이지, 훈련시키고 가르쳐서 증인이 되게 만들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사실상 그 내용이 옳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위증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증인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과 회심이라는 사건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확실히 회심한 사람입니까?
ii.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분명한 증인으로 만든다.
두번째로 무엇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만드는가? 나사로에게와 마찬가지로, 다시 살아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고 알려준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살려주신 다른 두 사람,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젊은 아들의 이후의 이야기를 전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 나사로만 딱 한 부분,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사람은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기 때문에 도저히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살아난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되었기에, 그 표시로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에게만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다시 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이 되는 진리입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성도는 주님을 더 알아가게 되고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증인이 치루는 대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하루 아침에 당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은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많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대제사장들에게는 불편한 수준을 넘어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사로를 죽여야만 되겠다고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은 증인은 대가를 지불한다는 사실입니다.
A. 그리스도인은 (원하든/원치 않든) 세상에 위협적 존재다.
사실 나사로가 위협적 존재가 된 것은 사회적, 종교적 이유가 섞여있는 문제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 사회에서의 독점적인 특권과 신분을 유지하는데 나사로의 존재는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관리하고 독점권을 얻고 있던 성전에서의 수입은 유대 사회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유대 사회는 예수라는 인물과 그가 살린 나사로로 인하여 심하게 흔들리고 있기에 그들은 사회적인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과 대제사장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교리에 있어서도 위협을 느꼈습니다. 나사로가 있는 한, 그들의 가르침이 설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오늘 현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적실성이 있는 교훈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증거/증인은 세상에 위협적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에 위협적 존재가 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위협이 된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존재 때문에 또는 여러분이 가진 신앙 때문에 여러분이 위협이 된 적이 있으십니까? 위협이라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부담스러운 존재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불신자들이 여러분을 진정한 한편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B. 미움과 비난을 받을 준비를 하라(마 5:11~12; 요 15:18~21).
증인은 치룰 대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 하나가 미움과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마태복음 5:11~1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그것은 성도에게는 훈장이요, 복입니다. 요한복음 15장으로 가면 주님은 그것을 장차 증인이 되어야 할 제자들에게 좀 더 설명해주십니다.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요 15:18~21).”
세상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밉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미우면 자식도 밉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 식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했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듯이 증인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기 때문에 미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복음을 말하지 않고 그냥 잠잠하게 살기로 작정하셨다면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분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면 말할수록 사람들은 여러분을 미워하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거듭난 하나님 자녀들이 증인으로서 치룰 대가입니다.
C. 증인은 증거 때문에 죽는다(계 6:9).
그저 증인이 치룰 대가가 미움과 비난 정도라면 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진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증인은 증거 때문에 죽는다 혹은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이후의 삶에 대해서 본문 외에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가 대제사장들의 음모대로 잡혀 죽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증인들의 이야기를 사도행전에서 읽습니다. 먼저 일곱 집사 중 스데반이 증거를 인하여 순교했고(행 7), 제자들 중에는 제일 먼저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순교했습니다(행 12:2). 사실상 모든 주님의 제자들이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계 6:9).” 순교자들이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을 때(행 1:8)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사실상 나를 위한 순교자가 되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증인은 그 가진 증거 때문에 죽습니다. 실제로, 어떤 강도 살인 사건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증거로 인하여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증거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4. “내 증인, 내 순교자가 되리라.”
증인이 되는 것, 아니 그리스도의 증거가 되는 것에 대하여 한 두 가지 정리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A. 말(증언)이나 성숙한 신앙(증인) 이전에 증거(존재)다.
복음 전도 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분들을 봅니다. 또는 아직 제 신앙이 미약해서라고 하는 핑계도 듣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드립니다. 말이나 성숙한 신앙 이전에 중요한 것은 증거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나사로처럼 산 증거입니다. 죽었다가 산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정리된 증언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성숙한 신앙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 말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데 있어서 나사로가 무엇을 했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어있었고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시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소망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산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는 Monergism(하나님의 단독적 역사)이라고 말합니다. 살아난 사람은, 살아난 사건 자체가 곧 증거입니다. 그는 말로써 하기 전에 이미 말하고 있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가 전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필요하면 말도 사용해라.”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게는 증거 자체로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B. 말(증언)과 성숙한 신앙(증인)이 수반된다.
그렇다고 해서 말이나 성숙한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도 필요하고, 성숙한 신앙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건에 부속하는 것이고 따라오는 것들입니다. 증거가 없는 말과 성숙한 신앙의 됨됨이는 거짓일 뿐입니다.
어떻게 말(증언)을 준비할 수 있고 어떻게 성숙한 신앙을 지닌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나사로가 주님과 함께 먹고 교제하듯이,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고서 이 두 가지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점점 더 깊이 깨달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지식이 정확하고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은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깨달아가면서 자기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는 증인의 말을 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어떻게 갖추어집니까?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길 밖에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 가장 탁월한 믿음의 본과 경건의 능력을 갖추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주님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던 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이,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능력있는 증인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의 성숙을 얻어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많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의 이름을 아십니까? 오늘 나사로를 보면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맞닥드려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증인입니까? 여러분은 죽었다가 산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입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증거로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마땅히 치룰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것을 각오하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하셨듯이, 저와 여러분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역사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상급이요, 면류관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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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80) - 나귀를 타신 왕 /요12:12-19/ 김형익 목사
2021-05-08 11:15:25
1. 예수님이 변하셨다!
본문은 주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늘 그랬지만 제자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은 예수님의 태도가 변했다고 느낀 일일 것입니다.
A. 숨으시던 예수님(마 12:19; 16:20; 막 5:43; 9:9; 요 6:15; 7:4,6)
무엇이 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늘 자신의 메시야되심에 대해서 조심해오셨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다투거나 큰 소리로 자신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마 12:19). 또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이 그리스도(메시야)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도록 명령하셨습니다(마 16:20).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고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막 5:43).
변화산에서 주님의 변화된 영광을 목격한 세 제자에게는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막 9:9).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고 표적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그 때 주님은 그들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요 6:15). 이런 주님의 모습이 답답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지 않느냐, 가서 자신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말씀했을 때, 주님은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일축하셨습니다(요 7:4,6). 제자들이나 측근들이 볼 때 이것은 얼마나 답답한 태도였을까요? 그런데 주님이 변하셨습니다.
B.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요 12:7~8, 눅 19:39~40).
마리아가 저녁 식탁에서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부을 때에도 예수님은 마치 당연히 받을 것을 받으시는 것처럼 다 받으셨습니다(요 12:7~8).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호하는 소리를 다 받아들이십니다. 분개한 한 바리새인이 이들의 환호를 멈추게 하라고 하자, 주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눅 19:39~40). 전에 보여주신 주님의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태도가 아닙니까? 주님께서 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인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신 것 뿐 아니라 지금 돌아가고 있는 모든 정황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고 장사를 준비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주님께서 이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백성들이 명백하게 메시야라고 선언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찬송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고 다 받으십니다.
C. 말이 아니라 나귀, 나귀의 어린 새끼
그런데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 예수님께서 말이 아니라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나귀는 미국에서 보는 나귀와 비교할 때 훨씬 작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나귀를 탈 때 자기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 발이 땅에 끌릴 만큼 나귀가 작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 중에도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가르쳐주는 대로 예수님께서 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이미 두 제자를 보내어 준비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마 21:1~3; 막 11:1~6; 눅 19:29~35).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수많은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환영했습니다.
2. 백성들의 환영
이 백성들의 환영은 예수님의 탄생 때를 제외하고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으신 유일한 환영이고 공적인 메시야 선포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기사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A. 종려나무 가지(13)
첫째는 종려나무 가지인데, 백성들이 주님을 환영하면서 손에 들고 흔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쁨의 상징이고 명절 특히 초막절에 그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레 23:40). 그러나 이 종려나무 가지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아주 민족주의적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멸망 당한 후에, 페르시아 그리고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에 의해서 정복을 당한 민족으로 존재해오던 이스라엘이 주전 167년 헬라제국의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성전 모독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전 안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제단에 돼지를 바치는 사건,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소위 마카비 일가의 저항운동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 지도자인 맛다디아스의 아들인 영웅 유다 마카비우스가 주전 164년에는 성전을 시리아인들의 손에서 되찾아 성전 제사를 회복하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을 기념해서 생긴 유대인의 절기가 수전절 즉 하누카입니다. 유다 마카비우스가 죽고 그의 형제인 시몬 마카비우스는 주전 141년에 예루살렘에서 시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이 때 사람들이 이 영웅과 그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퍼레이드를 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는데, 이때로부터 종려나무 가지는 군사적 승리의 상징이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한 민족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것은 바로 그 때의 감격을 회복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기대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몬 마카비우스처럼 로마를 몰아내고 우리를 구원해달라는 기대입니다.
B. 호산나 찬송하리로다(13)
그들의 이런 기대는 말에도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환호했는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말했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찬송은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시편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절기마다 특별히 초막절 매일 아침마다 부르곤 하던 일련의 시편을 할렐(hallel)이라고 합니다. 시편 113~118편이 그것인데, 지금 이들은 시편 118:25~26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에 덧붙여 예수님을 향해서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C. 나사로 사건 증인들의 증거(17)
어떻게 이토록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예수님을 환영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서 예수님을 찬송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주후 64~65년 사이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2백 7십만 명이라는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참조하면 이때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적어도 2백만 명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큰 무리’가 모여 예수님을 맞았다고 기록합니다(12). 주님께서 예루살렘 인근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증거를 했다고 17절은 전합니다. 그 결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은 메시아다’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 터이고 예수님을 환영하였을 것입니다(18). 결국 나사로 사건 역시 예수님의 치밀한 시간(때)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임을 보여줍니다.
3. 눈물 어린 입성(눅 19:41)
겉으로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의 화려한 입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듯이 예수님은 지금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이르기 전에 해마다 수많은 어린 양들이 죽기 위해서 떼를 지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께서 이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수많은 양떼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유월절 어린 양이시기에 이 두 그림이 오버랩되는 것은 매우 회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마리아만이 주님의 메시아 사역을 감지하였고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에게 조차 그 일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결국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에서 우셨다고 전합니다.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1~44).”
제자들에게 이 일은 너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찬양하는 군중들의 외침은 너무나도 무지한,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기를 구하는 외침인 것을 주님은 읽고 계십니다. 마리아를 제외하면 아무도 주님이 하실 일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 예루살렘 입성은 눈물어린 입성인 것입니다.
4. 예언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
다시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모아봅시다. 그분은 어린 나귀를 타고 계십니다. 발이 땅에 끌리지 않기 위해서 발을 살짝 들고 있어야 할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은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오십니까? 성경은 그것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썼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언의 성취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성령을 보내어주신 후에야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사건은 전적으로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군중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사건입니다.
A. 야곱의 예언(창 49:10~11)
본문 15절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말하고 있지만, 그전에 우리가 간단하게라도 살펴야 할 또 다른 구약 예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노년에 자식들 특별히 유다를 향해서 했던 예언입니다.
“(10)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 49:10~11).”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 지파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 보존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다른 모든 지파들이 다 섞여버리고 흩어졌지만, 오늘날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이 유다 지파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그 혈통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실로가 오신다’는 표현은 바로 메시야의 오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백성이 그분께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 분명한 메시아 예언은 실제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성취되기 시작합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아름다운 포도나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요 15:1).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라는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을 암시합니다. 이미 너무나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입술을 통해서 예언하신대로 그 일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십니다.
B. 스가랴의 예언(슥 9:9)
또 하나 오늘 본문이 직접 인용하고 있는 예언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스가랴 선지자는 왕이 어떻게 임하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나귀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 15절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는데, “크게 기뻐할지어다”가 의도적으로 “두려워 말라”로 바뀌어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그 예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스라엘이 왕을 거부하는 동안에는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어서 그들의 죄가 다 벗겨져야만 그들은 비로소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주목할만하게는 “겸손하여서”란 단어도 생략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중심의도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 말은 생략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의 성취를 위함이며,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5. 나귀를 타신 왕과 백마 타고 오실 왕(계 19:11)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율법 조항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신 17: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말을 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말은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도 전쟁과 정복을 상징하는 말을 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 말씀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들은 말을 탔습니다. 그러나 왕의 왕이신 주님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신 것은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었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나귀를 타신 주님은 영광의 왕이셨지만, 이 모습이 부인할 수 없게 보여주는 것은 그 영광의 왕의 은혜로우신 겸손하심입니다. 영광의 왕께서 힘찬 말들이 끄는 황금 병거가 아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 나귀의 장식물은 제자들이 그 위에 깔아준 겉옷이 전부였습니다. 그 나귀는 왕의 소유가 아니라 빌린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놀랄만한 사실은 예루살렘을 지키는 로마의 수비대가 이 광경을 보고 반란이나 소요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성경 학자는 예수님을 환영한 인파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귀를 타신 왕이 당신의 왕국이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듯이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당신 자신을 무력시위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주님이 오실 두번째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그때에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정복자로서 오십니다. 그리고 공의로 심판하고 싸우기 위하여 오십니다. 전에는 비하와 수치를 입고 오셨지만 장차 권능과 위엄의 옷을 입고 오실 것입니다.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셨지만, 장차 영광의 보좌에 앉아 다스리실 것입니다(마 25:31). 악한 죄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장차 절대 주권의 홀을 휘두르실 것입니다. 처음에 나귀를 타고 오셨지만, 나중에는 영광과 영예로 왕관을 쓰고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6.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왕(13,19)
예수님을 환영하는 백성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호했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것을 피하신 것과 달리 여기서 이 모든 찬송을 당연하게 받으십니다. 그들의 왕으로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들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화려한 왕의 입성을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 12:19)!”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어도 백성들이 저렇게 예수님을 좇으니 어떻게 하겠느냐는 자조적 한탄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이 주님을 좇는다고 과장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서 진리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같이 부지 중에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시는 것을 이들이 말한 셈입니다.
7. “우리는 나귀를 타신 왕을 섬긴다!”
슬픈 사실은 이렇게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호했던 바로 그들이 며칠이 지나고 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기대가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의 부추김에 의해서 예수에게 속았다는 환멸을 경험하게 되는 이 군중은 예수님에게서 돌아서게 됩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나귀를 타신 왕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힘찬 말들이 이끄는 황금 병거를 몰고 오는 왕을 원했습니다.
한 순간, 나사로를 살렸다는 그 뉴스를 듣고 흥분해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호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불렀던 그 찬송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던 그 선언을 통하여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분이 누구신지를 증거한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의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그가 누구였는지 몰랐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왕일 뿐 아니라, 만왕의 왕, 온 세상의 구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나귀를 타신 왕입니다. 나귀를 타신 왕은 여러분의 기대에 맞는 분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르고 선언하지만, 여전히 자기의 의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것은 아닙니까? 나귀를 타신 왕은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기대에 맞는 분입니까? 예루살렘의 그 환영하던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을 각오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며칠 후, 그리스도를 떠났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나귀를 타신 왕을 섬기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여러분은 백마를 타고 오시는 왕의 영접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남은 장들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거듭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주제입니다. 이 사실을 배우지 못한 자는 예수님을 환호했던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십자가가 무한 영광임을 배웁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승리를 이루어내셨습니다. 우리의 왕은 나귀를 타신 왕이십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 왕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좇아가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치일 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들을 영접하시려고 주님은 어느날 백마를 타신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이 우리의 소망임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