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13 - 17절 설교 모음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자 /마3:16-4:11/ 이동원목사
2014-12-03 15:36:44
오래간만에 우리 교회 성가대 찬양을 들으니까 참 너무 좋습니다. 지나간 안식년 첫 두 달을 보내고 돌아오면서 잠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제가 보고를 하겠습니다.
제가 한 일은 대체로 세 가지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7월 초에 있었던 유학생들의 축제 수련회인 코스타 모임을 위시해서 시애틀과 뱅쿠버 지역에 오래 전에 약속했던 두 차례의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두 주간 동안 제가 마침 결혼 25주년이 되어서 그 기념으로 알래스카와 캐나다 록키 등지를 여행하면서 모처럼 한 두 주간동안 온전히 휴식의 시간을 가지면서 문자그대로 아내를 기쁘시게 하는 안식년을 가졌습니다.
우리 목사들에게 조크가 하나 있는데, 목사들이 안식년을 갖게 되면 그것은 목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목사 부인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년이라고 부릅니다. 안식놈이 아니라 안식년입니다.
그리고 한 두 주간 동안은 모처럼 저희 집 아이들과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오래간만에 아빠 노릇을 좀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날 때 늘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 이런 말을 자주했는데,
아이들과 좋은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변함 없이 교회를 지키시면서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우리 김형준 목사님과 사역자 여러분, 제직 여러분, 또 교우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지난 두 달 동안 모처럼 이런 일상적 사역의 자리에서 잠시 떠나 있는 그 일탈의 시간을 가지면서 영적인 그리고 다소나마 정서적인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제 개인적인 QT시간이 좀더 활성화되어서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들을 수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 제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은 QT 재료를 두 번 제가 바꾸었어요. 책자를 제가 일상적으로 하던 것이 아닌 다른 외국의 책자들을 가지고 QT를 했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그 짤막한 기간동안 똑같은 본문이 두 번 나오더라구요. 그리고 본문을 통해서 거의 비슷한 메시지를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제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었던 중요한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솔직히 저희 교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막 이제 공사가 신봉리에 진행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주차장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또 아무래도 내년엔 우리가 성전 건축을 본당 Sanctuary에 대한 건축 시작을 해야 될 터인데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뭐 한 순간도 안식년이라고 하지만, 교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들에게서 제가 자유할 수는 없었던 것이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우리 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합니까? 뭐 이런 기도를 제 QT시간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차례에 걸쳐서 오늘 본문을 보여주시면서 저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네 미래의 사역보다도, 교회의 사역보다도 더 커다란 관심은 네가 어떤 내 앞에서 사람이 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교회가 뭐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네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느냐?
목사가 되느냐? 그것이 나의 더 커다란 관심이다' 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음성을 들었어요. '정말 네가 정말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뻐하는 자가 될 수가 있느냐? 그러면 나머지 일은 내가 책임지지 않겠느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예수님의 공적 생애가 시작되면서 그가 요단강에서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침례를 받고 나오시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오시는 바로 그 순간 비둘기가 그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시고 또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나서 그 소리가 말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런 사건입니다.
자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또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이런 놀라운 이 확인과 또 인정의 말씀. 자 이 말씀을 들었으면 이제 당연히 그 다음에 예측될 수 있는 사건은 뭘까요?
이제 그 예수님 앞에 신바람 나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 갈 것을 우리가 예측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 바로 직후에 하늘의 이 음성이 '너는 내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사건 직후에
마태복음 4장 1절에는 좀 이 사건의 전개가 이가 맞지 않는 메시지가 기록되고 있어요. 여러분 4장 1절을 다 같이 한번 읽어보세요.
4장 1절 다같이 시작.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신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이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하겠다.
뭐 이런 것을 예측할 수 있는 당연한 대목에서 갑자기 그 좀 이 파격적인 사건의 맥을 깨는 흐름를 깨는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그분이 광야로 끌려 가셨다. 이렇게 메시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로 이 시점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사 마귀에게 이끌려 거기에서 시험을 받게 하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신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그것이 방금 전에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선포하셨던 그 음성과 이 광야의 시험이 무관하지 않다는 그러한 결론을 우리가 맺을 수수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3장과 4장이 서로 다른 장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3장과 4장을 연결시켜서 묵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QT시간에 이 3장과 4장이 같이 연결되면서 이 말씀은 새로운 빛으로 저 앞에 다가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선포 직후에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끌고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장면, 도대체 어떤 의도가 하나님께 있었을까요?
그것은 분명 이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그가 사랑하는 더 사랑하는 아들로 더 기뻐하는 자로 빚어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우리는 결론적으로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아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번역할 때, 많은 영어 번역에서는 Temptation이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Temptation, 유혹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죠.
그러나 유명한 세계적인 성서학자였던 윌리암 바클레이는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에서 사용되었던 희랍어 단어인 '페이라제인'이라는 이 단어는 그 의미상으로 볼 때,
Temptation이라는 유혹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은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차라리 Test라는 단어가 훨씬 더 그 의미상으로 타당하다고 바클레이는 지적합니다. Test, 이 Test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예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Test를 줄 때, 시험을 내 줄 때 그것은 학생들을 골탕을 먹인다든지 또 학생들을 파괴한다든지, 학생들을 좌절시킬 목적으로 시험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시험은 선생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실력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부족을 보완하고 보충할 때 그들은 더 성숙한 학생으로서 한 단계 Up Grade될 수 있는 삶의 성숙이 가능하게끔 할 수 있게 하게 하기 위해서 Test라는 것은 인생의 과정에서 반드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로 이런 시험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세 차례의 시험이죠. 세 차례의 시험.
세 가지 유형의 시험. 바로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떤 기대를, 그가 더욱 그의 더 사랑하는 자가 되고, 그의 더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기대가 예수님만을 위한 기대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그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갈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면서도 오늘 사랑하는 그의 아들과 딸들을 데리고 광야로 이끌고 가셔서 그 찬 바람 부는, 그 고독한, 그 굶주린 외로움의 광야 속에 저와 여러분을 두시고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의 폭풍우 속에서, 이 시험의 광야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야. 네가 나의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야!'라는 그런 음성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시험,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예요. 이 시험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저는 결론적으로 본질적으로 말하면, 한마디로 그것은 내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지금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이 순간 사탄은 마귀는 그의 결정적인 허점인 그리고 약점이었던 그의 배고픔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을 단순하게 배고픔의 시험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경제력에 대한 시험이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돌을 그가 명령하시기만 하면 돌을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돌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없겠어요.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이 시험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시험이 돈이 없는 사람들만이 받는 물질의 시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돈을 사용하는, 혹은 물질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그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라는 Test예요.
내 욕심을 따라서, 내 뜻을 따라서, 내게 주어진 혹은 내가 원하는 그 물질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내가 이것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그런 선택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이것을 육신의 정욕의 Test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 이하에 보시면 '너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너희가 만약 이 세상을 사랑하며 아버지의 사랑이 너희 속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거기서 첫째로 경계했던 것, 육신의 정욕 바로 그 Test를 예수님이 바로 이 광야에서 받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예요. 그의 제자들인 우리도 오늘 이 세상의 광야에서 동일한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물질을 사용할 때마다, 물질을 요구하고 물질을 원할 때마다, 우리는 이 시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인생의 광야에서 이 물질의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날마다, 아니 오늘도 이 시험 앞에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물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하되, 물질로부터 자유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의 광야를 여러분과 저는 걸어가고 있을까요?
아니, 그러잖아도 어렵고 궁핍한데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하고 사업을 한다면 내 사업 망하고, 나는 패가망신하는 것이 아니냐고 어떤 분은 항의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약속이 뭐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만약 우리가 정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인생과 내 물질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진다.
이게 성경의 약속이 아니예요.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시리라." 믿습니까 여러분?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지배를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의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내 인생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어 내 물질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인생을 구한다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겠다.
이것이 약속이 아닙니까? 내게 물질이 있든지 없든지, 중요한 것은 나는 정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것을 고백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물질의 욕심에서부터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참으로 자유한 인생이 될 때,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너는 정말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야.
우리는 얼마나 이 물질의 정욕에서부터 자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물질이 있든지 없든지,
혹은 내가 인생에서 경제적인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든지,
이 고난의 초점, 이 시험의 촛점이 내가 그것을 얻느냐 못 얻느냐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물질로부터 자유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내 인생의 중요한 초점을 맞추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느냐?
주께서는 오늘 광야에서 이 시험의 숙제를 들고 여러분 앞에, 그리고 저 앞에 다가오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한마디에 나를 향한 그분의 고백을 위해서, 우리가 그 분 앞에 정말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말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어떤 시험입니까? 잘 아시는 대로 그것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본질이 무얼까요? 본질이? 그것은 내가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살아가는 자가 될 것을 기대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박수를 구하고 싶은 끝없는, 끝없는 욕심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왜 나쁘다는 말이예요. 나쁜 것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정당한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정당한 행동을 통해서 그 결과로 받을 수 있는 박수는 그것은 당연한 격려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우리가 인생의 장에서 쇼를 하기 시작할 때, 허영의 쇼를 하기 시작할 때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노출하지 못하고 인생에서 연극과 쇼를 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런 내 마음 속에 있는 숨어 있는 동기를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에서 경고한 이생의 자랑이라고 생각해요. 이생의 자랑의 본질,
헛된 자랑을 위해서 사람 앞에 Show Up하고 드러내고 그래서 좀 인정받고 박수 받는 인생, 아니 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통해서 벌거벗은 자아의 모습을 통해서 내 진실성의 정체를 통해서 그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구하기 보다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마음이 없는 것을 자기의 삶이 없는 것을 거짓 쇼를 통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허영의 쇼 말입니다.
제가 QT를 할 때 하나님은 내 안에 그런 유혹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저에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교회가 커가니까 큰 교회 목사라는 그런 인정 앞에 더 기쁨과 그리고 더 커다란 그런 마음의 위로를 삼았던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그런 허영의 동기를 주께서는 꿰뚫어 보시고 저에게 지적하셨어요.
그래서 나는 때로 네 명예를 꺾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넘어진 광야에서 이제 사람의 인정이나 사람의 박수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고 일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서 저에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번째 시험. 그것은 네가 나한테 절하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의 본질이 뭡니까? 이 본질이 , 저는 결국 이 본질은 네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써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로써 살 것을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뭐예요? 천하만국의 영광을 약속한 것입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그랬어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8절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보여주며,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에서 지적한 “안목의 정욕” 입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을 다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너 한테 주겠다. 이 모든 영광을 너한테 주겠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전제가 있어요. 마귀의 유혹에는 중요한 전제가 숨어있습니다.
9절에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네가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의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그를 숭배하는 자, 그를 경배하는 자, 사탄을 숭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많은 경우, 이 같은 자기의 동기를, 혹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그의 미끼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사탄을 숭배하기를 원하십니까? 마귀를 숭배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요. 심지어는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펄펄 뛰며, “노(No)”라고 부인할 것입니다. 누가 마귀를 숭배하기를 원하겠어요! 그러나 그들에게 돈을 보여주십시오. 그들에게 출세를 보여주십시오.
혹은 그들에게 성공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성공 때문에 혹은 그 출세 때문에, 혹은 돈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그리고 양심을 타협하는 일을 너무나도 쉽게 자행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사탄을, 그리고 마귀를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경고예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시험을 들고 찾아오는 사탄. 천하 만국의 영광이라는
미끼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다가 오고있는 사탄을 향해서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섬기라.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분만을 경배하라 이 말예요. “Worship only The Lord, your God!. ”
오직 너의 주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우리가 네, 저 하나님만을 경배 할께요. 라고 저와 여러분이 결심한다면, 이 결심의 의미가 뭘까요. 그것은 내 인생의 장에서 다시는 우상숭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상숭배가 뭐예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그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안보여요. 그것이 우상이예요.
신약성경에는 구약과 달리 이 우상의 정체를 말할 때, 우상 숭배의 교묘하고 간교한 그 정체를 지적하여 말할 때 가장 커다란 소리로 그리고 가장 크게 강조한 신약 성경이 강조하고 경계하는 우상 숭배는 골로새서에 보면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이니라. 그 탐심이 어떤 종류의 탐심이든지 간에 모든 탐심에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네 여러분, 우상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은 피조물이예요. 우상은 창조주가 아니예요.
우상은 피조물예요. 우상은 만들어진 것이예요. 우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탐하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 그것은 대단해 보이지만, 매혹적이지만, 굉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불과해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마귀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나님의 만드신 피조물의 영광에 우리의 시선을 두도록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천하만국의 영광이, 세상의 영광이, 세속적인 영광이 아무리 매혹적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마귀보다 크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님 홀로 나에게서, 우리에게서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시대에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 깊은 의미의 신앙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손에 대고 읽는 책 가운데 하나가 헨리 나우엔의 책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 책방에도 헨리 나우엔의 여러 책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만,
이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버드와 예일 대학의 교수 였습니다. 그의 Career(경력)의 절정에서 그는 예일과 하버드 대학에 존경받는 교수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마 학문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세계 최고의 존경받는 상아탑의 교수가 된다면, 그것보다 더 커다란 명예는 없겠죠. 음. 어느날 1986년 8월 정확하게 1986년 8월, 그는 느닺없이 갑자기 하버드 대학에 교수직을 사표를 내고 떠나갑니다.
어디로 가냐 하면 캐나다 토론토의 그 교외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인 데잇브레이크 컴뮤니티라는 장애인 몇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자기가 일종의 거기에 Chaplain, 사목 역할을 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떠나갑니다.
미친일이죠. 주변사람들이 볼 때에는 희한한 일입니다. 자기 Career의 절정,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고, 교수직에서 어느 한 날, 그는 미련없이 교수직 사표를 내고 그는 몇 사람의 장애인들을 섬기기 위해서 장애인 공동체 안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이 장애인 공동체에 가서 그가 첫번째로 쓴 책이 “The Return of Prodigal Son” –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입니다. 탕자의 귀환. 거기서 그는 자기가 탕자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부도덕한 생활 속에 빠져 있던 사람, 죄인만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탕자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허영을 찾아서, 욕망을 찾아서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찾아서 저 먼나라로 떠나갔던 자기는 탕자였다.그리고 자기는 외로워다고, 자기는 방황하고 있었다고 자기의 자아는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몇 사람의 장애인 공동체에서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비로서 자기는 집에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고향에 돌아왔다, 자기의 참된 모습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서 그는 또 하나의 책을 써요. “아담” 이라는 책을 씁니다. “아담”.
이 아담은 그 장애인 공동체에 있었던 장애인 소년의 이름이예요. 장애인 한 사람, 환우의 이름이 아담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아담을 섬겨주고, 아담의 발을 씻겨주고, 한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이 아담 안에서 새로운 아담을 발견합니다. 둘째 아담. 그는 이 아담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 순수한 영혼 속에서 사람들은 지체아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병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 순결한 영혼을 섬겨주고, 그의 육체를 메말라 주면서 그를 도와주면서 그는 그 아담 안에 있었던 새로운 아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자기를 도와주는 헨리 나우엔 이 사목이, 이 신부가 너무 고마워서 이 아담이라는 사람이 더듬거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 나….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순간 그는 이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더듬거리는 말속에 고백되는 이 한 장애인의 음성 속에서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을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인류는 끊임없이 인생의 광야에서 이 시험들을 겪어 왔습니다. 육신의 정욕. 그리고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한 시험들을 겪어 왔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그것은 아담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담 때부터. 마귀가 에덴의 동산에 찾아와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여주었을 때, 성경은 기록하기를 먹음직했고, 보아짐 했고, 그리고, 지혜스럽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이고, 보아짐 안목의 정욕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이 착각과 허영,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저도 실패했습니다. 여러분도 실패했습니다.
우리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삶의 진정한 주소를 현 주소를
잊어버리고, 그리고 춥고 외로운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둘째 아담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예요. 그는 광야의 이 시험에서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의 비밀이 뭘까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그 비밀은 딱 하나예요. 예수님이 시험에 직면하면서 두번씩 한결같이 인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탄이 자기를 찾아올 때, 이 세상의 허영을 들고,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영광을 들고, 그를 찾아왔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두가지의 동일한 반복적인 강조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록되었으되” 말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7절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다만 그를 섬길 지어다”
기록되었으되. 그가 이 광야의 시험에서 이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붙잡었던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의 진정한 원리로 나의 삶의 좌우명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가 있다면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정말 살기로 결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사람들의 박수나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내 창조주 하나님 벌거벗은 것 같이 내 영혼의 동기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정만을 구하는 자로 주앞에 설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나를 숭배한다든지 사탄을 숭배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기로 주 앞에 결심할 수 있다면 지금도 여러분과 저는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고, 나의 기뻐하는 자야.
기도하십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헛되고 헛된 것을 찾아 인생의 광야를 헤매고 있었는지 광야는 고독한 것입니다. 광야는 굶주린 것입니다. 광야는 두려운 곳입니다.
광야는 불안한 곳입니다. 광야는 찬바람이 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광야에서 저와 여러분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명예로 , 때로는 권력으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은 오직 한가지의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때로 이 시험에 우리가 넘어지지만, 때로 이 시험에 쓰러지지만, 어느날 주님 보시기에 내가 정말 그 분이 사랑하는 자고 기뻐하는 자로 설 수 있는 자로 주 앞에 서기 위해 하나님이 이 시험을 우리 인생의 광야에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시험에 승리하십니까? 아니면 된지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하고 우리는 돌아다니십니까?내 영혼은 춥고 외로와 방황하는 탕자가 아닌지!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탕자는 내가 아닌지.저 바깥에 있는 예수 모르는 사람들만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알되 아버지의 품보다 세상에 있는 광야의 쾌락을 더 좋아했고,
그 광야의 만족과 광야의 박수 소리를 더 즐기던 내가 탕자가 아니였는지? 마침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흔들어 깨우고 나를 보시고 내가 주앞에 주님 기뻐하는 자로 세워지기 위하여 내게 다가오시는 그 주님!
그리고 채칙 때리시기도 하고, 사랑으로 나를 만져주시는 그 분. 그 분 앞에 주님 그래요. 다른 무엇보다도 제가 구할 것, 제가 바라 볼 것, 사모할 것,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분만을 구하게 하시고, 그분의 인정, 그분의 영광만을 구하게 하시되, 헛되고 헛된 것을 찾아 어리석게 방황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당신만이 내 사랑의 전부가 되십니다. 내 구함의 전부가 되십니다.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저희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 안에 있었던 육신의 정욕, 내 안에 있었던 안목의 정욕, 내 안에 있었던 이생의 자랑,
하나님 그것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고, 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고, 나는 방황하는 자였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인정받는 자로 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수 없도록 우리의 삶. 나란 존재를 하나님 받아 주시고, 만져주시고,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다 일어나셔서 우리 사모합니다. 찬양하십시다.
“사모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뜻과 정성을 다해) 뜻과 정성을 다해 나의 하나님. 사모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나의 하나님. “
우리 아까 불렀던 주를 높일지라 우리 그 찬양 하나 더하시겠습니다. 주를 높일지라.
처음 불렀던 찬양 주를 높일지라.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주를 높일지라(힘차게)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예수님께.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성령님께.
다시 한번 맘을 다해서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허밍하십시다 . 허밍. 음~~~~음
기도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교회 처음 나온 우리 딸을 위해서 우리 조성민 형제, 김민선
자매의 가정에 주신 김소희 세상태어난지 35일 된 아기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소희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오니 한 평생 하나님께
인정받는 딸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그가 걸어가는 인생이 의미있고 ,
아름답고, 또 하나님의 참사랑과 축복안에서 걸어가는 길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 딸을 위해서 기도하는 아빠와 엄마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주님의 사랑,주님의 교훈으로
이 딸을 귀하게 양육하여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하심이주를 경배하고 나아가는 지구촌의 모든 성도들 거칠고 때로는 고독하고 때로는 불안하고 두려운 인생의 광야, 그러나 이 광야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빚어 주님 앞에 사랑스럽고 기뻐할 만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시험의 그 손길. 때로는 그 손길이 아파도, 차가와도, 어려워도 이 채찍 속에 묻어 있은 주의 사랑을 발견하는 주 앞에 주님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결단하고 당신 앞에 삶을 드리며 나아가는 당신의 자녀들 주님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도록 우리모두 축복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세례와 정체성 /마3:13-17, 막10:38/ 김형익 목사
2022-08-10 15:31:09
1. 세례에서 세례로 (막 10:38; 눅 12:50; 요일 5:6)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공생애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가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요구되는 죄와 부정을 씻는 의식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님이 세례를 받으신 일은 기꺼이 죄인과 같이 여김을 받으시는 비하이고 굴욕의 사건입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반응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이고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첫번째 세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두번째 세례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0:38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일찍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주님은 또 하나의 세례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한다는 것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십자가의 죽음을 세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새 언약 아래서 세례는 옛 언약의 표인 할례와 연결됩니다. 할례는 남성 성기의 끝 부분을 잘라내는(cut off) 의식입니다. 할례에서 ‘잘라내는’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생후 8일 만에 행해지는 할례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하나님께 잘려 나가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받을 세례라는 표현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저주와 죄의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잘려 나가는 심판을 받으실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은 주님이 받으신 두번째 세례입니다. 세례는 죄에 대한 심판의 표이고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눅 12:50). 그렇다면 주님의 공생애는 세례로 시작하여 세례로 마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사도 요한은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5:6a).”고 표현하였습니다.
2. 정체성의 싸움 (마 4:3,6; 눅 4:13; 요 10:30; 마 27:40; 고후 13:4; 마 27:46)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지점은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성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난 번, 성부 하나님의 이 정체성 선언 직후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신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마귀의 시험의 핵심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 4:3,6)이란 말에 있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하시자 마자, 마귀는 바로 달려들어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첫번째 세례에서 두번째 세례인 십자가 죽음으로 향하시는 공생애 여정에서 내내 정체성의 싸움을 싸우시게 됩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했던 마귀는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고 기록했습니다 마귀는 계속 예수님의 주변을 돌면서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께 도전했고 시험했습니다.
한 예입니다. 수전절(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동상을 세우고 돼지를 제사지내는 등 성전을 더럽힌 일이 있었는데, 주전 164년 유다 마키비우스가 군대를 일으켜 수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하나님께 봉헌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정말 당신이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대답하시는데(요 10:30),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넘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조롱과 멸시, 거부와 공격을 아셨음에도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셨을 때에도 그 정체성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님을 모욕하며 말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광야에서 얼마 동안 떠난 마귀는 주님 주위를 내내 맴돌면서 사람들을 통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 자신을 증명하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끝내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당신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주님은 공생애의 시간 동안, 당신이 세례를 받으실 때 주셨던 성부 하나님의 정체성 선언을 붙드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눈 앞에 두신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성부의 음성을 붙들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실 때에도(마 27:46)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정체성 선언을 붙드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성부 하나님의 애정에 대한 그분의 예민한 인식과 성부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한 없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존재로서의 인식은 모든 것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였고 십자가까지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어 그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삶을 시작하였고 그 여정을 걸어가는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3. 복음과 정체성 (롬 8:35-39)
복음은 절망하는 죄인에게 들려지는 좋은 소식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주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음은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입니다. 종교는 구원을 받으려면 이런 저런 선을 행하라고 요구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셨다고 말합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례는 “제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는 절망하는 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받는 것 외에 소망이 없습니다. 저는 구주가 필요합니다.”라는 공적 고백에 근거하여 베풀어집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들으셨던 것과 동일한, 하늘의 소리, 성부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며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선언합니다. 종교는 “선하게 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에서의 구원은 마지막에 전체의 삶을 평가받고 결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삶을 지금부터 지켜보고 너를 최종적으로 구원할지를 결정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출발점인 첫 믿음과 세례에서 선언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마르틴 루터가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라고 불렀던 이신칭의의 교리는 처음 믿는 순간 그 믿음의 참됨을 보시고 “죄 없다”고 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에게 주셔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믿는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언약의 객관적 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선언으로 영원한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불안함과 염려가 아닌 사랑과 안정감과 확신 아래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세례 때 주시는 하나님의 정체성 선언은 단순히 “너는 누구다”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의미는 “나는 너를 사랑하며 기뻐하고 네 가장 깊은 갈망을 채우기 위해 헌신할 것이고, 네 창조적 소명을 절정에 이르게 할 것이란다.”라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자의 삶에는 평탄함 만이 있을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험이 닥칠 때 신자는 어떻게 이 고비를 넘어갑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음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신자들은 믿음 때문에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과 같이 종일 죽임을 당하는 상황들을 겪을 수 있습니다(롬 8:35). 하지만 그 모든 것,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롬 8:39)”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의 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삶이 아닙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을 얻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 답게, 그 신분에 걸맞게 사는 것입니다.
4. 시험의 본질—정체성 시험 (마 4:4,7,10; 롬 8:31-34)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신자는 일평생 마귀의 시험의 타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본질은 주님에게 그러했듯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정체성 도전입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에게 이 마음을 줍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는 충분치 않아. 너는 부족한 존재야.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은 너처럼 살지 않아.”라면서, 우리 근원의 수치심을 자극합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광야에서 주님은 시험하는 마귀를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이런 마귀의 시험에 주님께서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마귀를 대적하셨습니다(마 4:4,7,10).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권위로 마귀를 대적하시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마음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고 그 목소리에 주의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선언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은 물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마귀야, 아버지께서 내게 ‘내 기뻐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어. 그러니 너는 헛소리 그만 하고 물러가라.” 이것이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는 주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딸이고 기뻐하는 대상이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선언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했습니다. 모든 시험, 환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우리의 정체성을 흔드는 마귀를 대적할 말을 가르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사실, 이 앞에서 바울 사도는 폭탄 같은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5. 주목하는 삶 (히 12:1-2)
오늘 세례를 받는 소희 자매만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은 늘 마귀의 이런 시험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신자의 정체성 선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선언을 늘 붙잡으십시오. 시험과 환난 속에서 마귀는 여러분의 정체성을 흔들며, 여러분이 얼마나 부족하고 한심한 존재인지를 속삭일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여기서 ‘얽매이기 쉬운 죄’라는 말은 ‘산만해지기 쉬운 죄’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을 끊임 없이 산만해지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목소리, 복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확증된 정체성에 주목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버지의 그 목소리, 그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고, 나의 기쁨이란다.” 산만해지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내내 아버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믿음의 주요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만드실 주 예수님을 주목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도 천성문에 이르러 사랑하는 구주를 뵈옵기까지 아버지의 그 선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새 정체성을 주목하고 붙들고 갑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마3:13-17/ 이은규 목사
2018-03-16 16:49:13
소설가 최인호씨가 자신의 어렸을 적의 고민에 대하여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용모와 관련된 것입니다. 최근 그는 침샘 암이라는 아주 희귀한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지금도 그의 얼굴이 그다지 잘 생긴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더했다는 것이지요. 다른 형제들은 다 얼굴도 잘 생기고 준수한 편이었는데, 유독 자기만 그렇게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어 이아이만 다르게 생겼네...’ 이렇게 말을 하다가 미안한 마음이 들면 ‘외탁을 했나보군요...’ 그렇게 둘러대곤 했다는 것이지요. 그의 외모를 소재로 별명도 참 많았던 모양입니다. 덩치는 작은데 머리만 유독 커서 ‘남북대가리’라고 불렀으며, 눈은 작아서 ‘쨉쨉이’, 턱은 뾰족하고 길어서 ‘말대가리’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자기 자신도 외모가 맘에 들지를 않아서 아예 신경조차 쓰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옷도 닥치는 대로 입었고 머리도 며칠씩 감지도 않았고... 그가 얼마나 지저분하게 하고 다녔던지 그와 같은 클럽 활동을 했던 여고생들이 단체로 ‘제발 잘 씻고 내복도 좀 빨아 입고 다녀라’는 편지까지 보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인상파로 불리웠는데, 유일한 여자 선생님인 영어 선생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인상을 쓰고 다녔더니, 그 선생님이 하루는 ‘제발 인상 좀 쓰지 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덩치는 왜 그리 왜소하던지... 사춘기를 보내면서 좀 크게 보이기 위해서 겨울이면 옷을 예닐곱 벌씩 껴입기도 하고, 봄이면 아령도 하고 역기도 들어보지만 여름이 오면 마른 장작개비같은 자신의 팔뚝을 감출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의 용모는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외모는 못 생겼지만, 말 주변이 좋아서 항상 미팅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고는 했는데, 자기가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는 항상 다른 친구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는 동안에 그가 가진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상당히 심각한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못생긴 외모가 서서히 그럴 듯하게 변하는 인생의 대반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진정 그가 가진 매력을 인정해 주고 알아 주는 한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고 나서부터였더라는 것입니다. 그 여성이 훗날 그의 부인이 되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한 번도 그가 못생겼다든지 이상하게 생겼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가 가진 결정적인 결함들을 매력처럼 말을 해주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못생긴 오리새끼 같은 자기에게 백조처럼 멋있다’고 말해준 최초의 여성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녀의 칭찬이 그에게는 외모로 인해서 생긴 열등감을 극복하는 소중한 힘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르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어느덧 ‘남북대가리, 쨉쨉이, 말대가리, 인상파’로 불렸던 그가 아니라 아주 근사한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바꾸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유전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도중에 자신의 성격대로 자신의 이미지대로 변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 얼굴의 변천사만 뵈도 잘 알 수 있다. 마치 매일 가는 산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면 그 풍경이 바뀌듯 얼굴도 나이에 다라서 그 풍경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역사이며 살아가는 현장이며 그 사람의 풍경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얼굴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잘 살펴보십시오. 백조인가요? 미운오리새끼인가요? 예전에는 젊고 잘나갈 때에는 백조 같았는데 이제는 미운 오리새끼처럼 보이지는 않으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 까닭을 단지 세월로만 돌릴 수가 있을까요? 혹시 예전에는 미운오리새끼 같이 보였는데, 지금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백조처럼... 그렇게 우아하게 달라진 분은 없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계기로 해서 이루어졌습니까?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나타내려 할 때에 어떤 모습으로 시작하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소위 첫인상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처음에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삶의 나머지 부분이 결정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의 선택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고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를 않습니까? 겉으로는 우리와 같은 얼굴과 용모를 하고 있지만, 그 내면은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는 다른...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날 때부터 다르게 세상에 온 존재라면... 사람들은 그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나요? 게다가 마굿간에서 태어났으니...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 장성하여서 나이가 서른이 되셨을 예수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작하는가? 하는 것은 그의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제 약 30년 동안 갈릴리를 주변으로 조용히 지내시던 예수가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시며 사역의 첫 걸음을 시작한 곳은 사람들의 기대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을 하신 후에 찾아 왔던 사탄... 그의 제안이 더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만약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더라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막말로 해서 게임은 끝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당장 예루살렘을 접수하였을 것이고... 그 여파로 이스라엘 전체에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손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요단강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이제 막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낸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뉘우치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요단강으로 찾아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비천하고 어렵게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인 것이지요. 예수가 그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를 구하였습니다. 요한이 그를 알아보고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였지만...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임을 상기시키며 끝내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가 처음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실 때의 모습입니다. 오늘을 가리켜서 주현절(epiphany)이라고 하지요. 예수가 처음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요단강에서 죄인들의 틈에 섞여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자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를 않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는 혹시 예수도 죄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죄인이 아니라면...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세례는 죄인이 새사람 되는 과정이니까요. 예수는 세례를 받으시면서 스스로가 예수도 죄인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십니다. 물론 예수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의 기자가 이것을 우리에게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예수를 가리킴)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이렇듯 죄가 없으신 분이 스스로 세례 받으면서 불필요한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생각해보면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꺼려하지요.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라고 말하지요.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사람보다는 더 높고 우월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혹시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못한 존재는 아닌가? 사람들이 그렇게 의심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안에서는 이것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은 후에 그를 추종하던 많은 제자들은 예수가 자기들의 스승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말하며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 우월한 분이심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라고 이것을 몰랐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예수가 많은 사람들의 기대나 예상과는 다르게... 불필요한 의혹까지 불러일으키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며 자신을 처음 드러내셨다는 것 속에는 오직 예수만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걸어가는 길에 대한 계획과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도를 15절의 말씀 가운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세례 베풀기를 주저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말은 ‘우리’라고 하는 말과 ‘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라는 말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으셨지만, 예수가 삼년 동안의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 물론 가장 중심에는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제자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예수의 곁을 떠날 수 없었었던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골고다의 십자가가지 예수를 따랐던 몇몇 여성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예수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이 사람들을 마치 조폭의 우두머리처럼 그렇게 거느리고 다니면서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소모품처럼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는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세례 요한을 향해서...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모여든... 가진 젓 없고 세상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수많은 죄인들을 향하여 ‘우리’라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가 가진 놀라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요, 같은 길을 걸어가는 협력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타인을 향한 진정한 개방성과 겸손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아무나 만나서 선뜻 ‘우리’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녀가 만나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까지는 적지 않은 탐색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요즈음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라고 하는 말은 아무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는 세례 요한을 향하여 그를 보자마자... ‘우리’라고... 그리고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누군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 따지지도 않고는 ‘우리’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도 ‘우리’라고 부르시면서 선뜻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향하여 ‘우리’라고 부르실 때.. 그 속에는 너는 나의 소중한 친구야... 너는 나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야...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너와 함께 나누고 싶어...‘ 비록 우리들이 예수와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들 이지만... 주님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정말 행복하고 풍성한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는 세상에서 많은 죄와 허물과 삶의 문제와 고통으로 얼룩진 사람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 요단강 까지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하나가 되셨고... 그 증거가 다름 아닌 ’우리‘라고 하는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말 다른 말은 ‘의’리고 하는 말입니다. ‘왜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까? 내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물었을 때 예수가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의라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와 또한 세례 요한이나 주변의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의’라고 할 때에 이것은 참 자주 말하여지는 단어이면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결국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한평생을 살면서 붙잡고 씨름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보기 원하시는 것... 나를 통해서 이루시기 원하는 소원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평생을 고민했던 삶의 주제였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지금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이곳에 세우신 까닭!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십자가는 예수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기꺼이 감당하려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고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말해주는 것처럼 ‘자기의 의’ 다시 말하면 자기가 생각했던 인생의 계획이나 목적을 희생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바로 여기에서 진정한 인생의 기쁨과 참된 삶의 가치와 보람을 발견하였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4:34)라고 예수가 말할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참된 기쁨을 자기 혼자만 배부르게 먹고 잘 사는 것에 찾은 것이 아니라 힘들고 배고프고 어려운 중에서도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곳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얼마나 신바람 나고... 얼마나 살맛나게 하는 일인 것인지...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태6:25) 오로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만을 유일한 관심사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러한 것에 대한 염려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마태6:33)
살아가는 일 때문에 생기는 염려와 집착...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날 때... 이러한 염려들은 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새로운 물음을 묻기 시작할 때...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오늘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소원과 목적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며 고민할 때..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발견하였을 때... 그리고 자기의 것을 희생해 가면서 그러한 것을 향하여 도전할 때... 거기서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누리지 못하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첫 발걸음을 요단강에서 죄인들에 틈에 섞여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하였다는 것...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삶에 대한 예수의 깊은 이해와 의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그리고 그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일이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깊은 뜻임을 잘 알았기에 그는 요단강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있을만한 곳이 아니라며 어리둥절해 하는 세례 요한과 사람들에게 ‘우리’라고 그들을 향해서 손을 내미시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면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길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가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부끄러움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처럼 그를 향해서 마음을 열고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미는 것... 그래서 그 사람과 내가 우리가 되는...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리라.’(마태18:20) 하셨던 주님의 말씀처럼...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나라를 느낄 수 있는...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비록 오늘 내게 주어진 현실이 나 하나 지탱하기에 벅차고 힘이 든다고 하여도 예수님처럼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힘쓰는 것...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서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 그것을 본래적인 삶(authentic life) 또는 영원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선택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세례를 받고 육지로 올라 오셨을 때, 그를 칭찬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신비한 현상들이 나타난 것이지요.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하나님의 보내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살려고 결심할 때... 그리고 선뜻 그것을 향하여 발걸음은 내딛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결코 그를 그냥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성령을 마치 비둘기처럼 보내셔서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 하게 하십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가복음에는 ‘너는’ 이라고 되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가1:11) 마가복음에서는 이 소리가 오로지 예수에게만 들려진 소리임을 암시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너는’이 아니라 ‘이는’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말을 듣는 사람이 단지 예수 자신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들려지는 음성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하나님과 가지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친밀성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도 읽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물론 그 분은 일차적으로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오로지 예수를 향해서만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일까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나사렛 예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를 얼마나 좋아하고 기뻐하는지... 단지 그것만을 밝히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단지 예수 뿐 아니라 그 말씀을 함께 듣는...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들려지는 음성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는’ 또는 ‘이 사람’은 이렇게 말씀하실 때... 거기에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까지도 당연히 포함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이 사람... 그는 누구인가요? 그는 다름 아닌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그의 처음 시작을 요단강에서 하시면서 드러내셨던 그의 삶에 대한 비전과 생각... ‘우리’라는 그리고 ‘의'라고 하는 말속에 담고 있는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비전을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에서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사람‘의 범주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나사렛 예수를 향해서 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 부족과 허물이 많지만... 그래도 마음의 한 구석에서는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욕망과 의욕이 꿈틀거리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마 너는 그것을 모를 거야...’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에게 지금도 이렇게 이야기하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인가요?
여러분들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저 스스로가 미운 오리새끼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저를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는 음성을 듣고서 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것...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소중하게 생각하신 다는 것... 그것이 저를 미운오리새끼로부터 백조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주어진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부름 받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은 왜 침례를 받았나? /마3:13-17
2017-10-16 19:19:44
우리 교회는 침례탕이 없기에, 보통 여름 휴양회 때 침례를 준다. 이번 여름에는 휴양회가 없지만 침례식은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 침례식을 대비해서, 침례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침례가 무엇인지 잘 들고, 침례 받지 않은 분들은, 침례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마28:19-20)에서 명령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제자)은, 침례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교회는, 믿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어야할 책임이 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 침례는 기분에 따라서 미루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고, 예수님보다 요한이, 먼저 침례를 주었다.
그 때 많은 사람이, 요단강에서 침례를 주던 요한에게 나와,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았다. 그들은 회개의 표시로,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다. 요한에게 침례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줄 몰랐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침례를 받지 않고, 회개의 표시였다.
1. 예수님도 침례를 받았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왜 침례를 받았나?
세례라는 말에, 익숙한 분들을 위해, 침례와 세례의 차이를 말씀드리겠다. (1) 형식의 차이를 보자.
① 세례는 머리에 물을 뿌린다. 물 뿌림의 명사는 ‘란티스모스’(‘ραντισμός), 동사는 ‘란티조’(‘ραντίζω)이다(히9:13, 19, 21-22).
② 침례는 몸이 물에, 완전히 잠긴다. 물에 잠김의 명사 밮티스마(βάπτισμα), 동사 밮티조(βαπτίζω)다(마3:11, 13 28:19). 밮티조는 밮토(βάπτω)에서 왔는데, ‘물에 완전히 잠그다, 옷감을 염색하기 위해 잠근다.’는 뜻이다. 한글 성경에 세례로 표기한 것이, 원문에는 ‘란티스모스’가 아니고, ‘밮티스마’다.
따라서 원문을 바르게 번역하면, 세례가 아니라 침례다. 한글 성경에, 세례로 번역한 것은, 먼저 중국 성경에, 세례로 번역했기에, 그대로 따왔기 때문이다. 일본어 성경에는, 헬라어 ‘밮트스마’가 그대로 사용되어 있고, 영어성경도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밮티즘(baptism)이라고 했다.
(2) 예수님은 어떤 형식으로 받았나?(13-14).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니(밥티스나이),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물에서(아포 투 휘다토스) 아포(~에서, out of) ‘올라오다’(아나바이노)는 ‘솟아오르다.’이다. 아나(위로) + 바시스(걸음) = 물에 들어갔기에 물에서 올라오셨다. 한글성경은 세례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밥티조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았다(16).
형식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침례의식을 행한다. 이 의식을 א(미크베, 미크바)라 한다. 미크베는 ה(카바)에서 나왔다. ‘함께 묶다, …의 도움을 기대하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는 말이다. 명사(티크바)가 되면 ‘하나가 됨, 소망’이 된다.
예수님과 함께 묶여, 예수님의 도움 받기를 기대하며, 예수님을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는 말이다. 유대인은 물이 안 닫는 곳이 없도록, 손가락도 다 벌리고, 겨드랑이도 완전히 붙이지 않고, 완전히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도, 완전히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다.
예수님은 침례를 소중히 여기셨다. 마지막 유언인 지상 명령에서도, 침례를 주라고 하셨다. 또한 (행1:21-22) 사도들은 침례를 강조하여, 초대교회에 가룟 유다 대신, 사도를 뽑는 조건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자이어야 했다.
(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하며, 회심한 자에게 침례 받으라고 했다. (행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 세례와 침례는 내용적으로 일치하는가?
아니다. 어떤 부분에는 일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세례의 ‘洗’자는 ‘씻을 세’자다. ‘죄에서 씻어, 정결하게 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물을 뿌린다.
그러나 침례의 의미는, 하나가 되다(연합)는 뜻이다. 2가지 형식과 의미를, 예수님께 대입해보자.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에서 돌아서겠다는 의미로 받는다. 그렇기에 죄인에게 필요한 의식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면, 예수님도 죄가 있단 말인가?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하면, 이단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 받으려 할 때,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침례를 받아야만 했나?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고 요한이 허락하여,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다.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죄를 씻기 위해,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죄로 물든, 우리와 하나 되어, 죄를 짊어지는 사건이, 침례에 나타났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그 이튿날 나오자, 요한은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선포했다.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침례를 통해서만 설명된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했다. 구약은 우리 죄를 짊어진 속죄제물을, 어린양이라고 했다. 어린양’은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제물이다.
죄 지은 사람은, 어린양에게, 자기 죄를 짊어지게 하고, 그 양을 죽였다. 요한은 바로 그 제물이, 예수님이라고 선포했다. 이렇게 속죄제물이 되려고, 예수님은 침례를 받았다. 예수님은 원래 죄가 없지만 침례를 받음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공식적 제물이 되었다.
예수님은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침례를 받았다. 우리가 죄를 용서함을 받음은, 그냥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속죄양 되신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았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속죄제물이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와 연합했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주님과 연합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게 되었다.
(롬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했다. 침례는 예수님과 이제 연합하여, 물속에 들어가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언한다.
물속에서 다시 올라올 때에,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었기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 침례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진술인가? 따라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신앙으로 고백해야 한다. 신앙고백은 2가지다. 입술의 고백과, 행위의 고백이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함으로, 우리 죄를 청산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주님으로 고백하고,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다(행2:38).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다. 이제 내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음을 선포해야 한다. 침례를 통하여,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 값을, 모두 치르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과 마귀에게 선포하라. 침례의식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이며 부활의식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함께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고백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함께 부활했다는 고백이다. 옛 사람은 죽고, 주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살기 바란다.
3. 침례가 왜 세례로 바꿨는가?
성경은 침례를 가르치고, 예수님도 침례를 받았다. 초대교회도 침례만을 베풀었다. 2C에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자,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해,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가 나타났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의 생각은,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막1:4)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다.”고 했다. 또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다.
그래서 침례를 받지 못하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요3:5中)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했는데, 물을 침례로 생각했다. 그릇된 가르침으로, 침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침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이나 병자들에게는, 침례를 베풀기가 곤란했다. 물속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세기에 쓰인 디다케(12 사도들의 교훈서)를 보면, 침례를 실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물을 부으라고 했다.
3세기의 씨프리안은, 죄를 씻는 것은, 물의 양의 문제가 아니니, 세례도 좋다고 하며, 세례를 허용했다. 그러나 8세기까지 교회들은, 주로 침례를 실시했다. 8세기 중반 로마교회 법왕 스데반 3세가 영을 내려, 침례 대신 세례를 줘도 좋다고, 정식으로 공포했다.
1311년 라벤나 회의에서, 로마교회 대표들은 세례만 하고, 침례를 실시하면, 사형하기로 결의하여 많은 성도들을 핍박했다. 그 후 세례만 실시되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16C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이유로, 세례를 버리지 못했다.
칼빈도 성경에는 침례지만, 현실적인 이유, 도와주는 영주들이, 세례를 받았다면서, 세례를 계속 실시했다. 아직도 세례를 실시하는 교회들이 많다. 성경적인 침례에서 벗어나자, 침례교도들은 회개했다는 표시, 예수님과 연합했다는 표시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면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싸웠다. 성경적인 침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졌음을 믿고, 죄를 회개하는 자들은, 신앙을 침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았다(막1:4-5).
따라서 침례는, 전에는 내가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만인에게 공포하는 선언이다. 만일 침례를 받을 때,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이 없었고, 후에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다시 침례 받는 게 좋다. 이를 ‘재 침례’라고 부른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진정한 회개와 믿음 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며, 세례 받았다. 16세기 종교개혁이후에도, 믿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었다. 유아 세례 받은 사람들이, 성인이 된 후에,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침례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유아 세례가 신앙고백도 없이, 그냥 의식에 참여함에, 불과했음을 알았다. 그 중에 다시 침례를 받았다. 그러자 다수의 유아세례 출신들이, 재 침례 받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유아세례가 재 침례 받는 사람들로 인해, 부당하다고 지적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유아세례 받은 사람이, 대세를 이루고, 교권을 갖고 있었기에, 재 침례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기록들을 보면, 너희가 물에 빠지는 게, 그렇게 좋으면, 아예 물속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익사시킨 경우도 있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침례를 받지 못한 분은, 이번에 반드시 침례를 받기 바란다. 이것은 기분에 따라 미루거나, 거부하는 게 아니다. 믿음이 없이, 세례나 침례를 받았다고 판단되는 분도, 재 침례를 받는 게 좋겠다. 정말 주님과 함께 연합된 인생이 되기 원한다면서, 침례를 받자.
침례식은 결혼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요즘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많지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결혼식을 꼭 해야만, 부부는 아니다. 초라하게 해도, 호적에 올라가면, 결혼은 성립된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지 않아서, 결혼사진이 없다면, 의심받을 수 있다. 따라서 진심으로 사랑하면, 결혼으로 자기 사람임을 인정하듯,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죄를 분명히 회개하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없기에, 침례교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아 세례는,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자, 가톨릭교도들과 일부 개신교도들에게, 유아세례를 무시한다고, 무참하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성경에는 유아 세례는 없다. 만일 침례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더욱 침례를 받아야 한다. (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침례 받으실 때 (1) 구속을 위한 길이 열렸기에, 하늘이 열리고 (2)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 (3)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는,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하여 살겠다고, 침례로 신앙고백을 하고 선포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음성이 있다. 예수님을 진정 믿는다면, 사랑은 고백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백이 진실이라면, 반드시 침례로 표현되어야 한다.
침례는 신비롭다. 죽고 사는 경험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병든 자들이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식을 행해도, 감기도 들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을 읽어 보라. 많은 사람이 침례를 통해, 변화되었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분이, 침례를 받고,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지금은 목사가 되었다. 침례는 이처럼 주님과 연합하는 신비다. 요즘 옛날에, 결혼식을 잘 못해서, 결혼도 앙코르 결혼식을 행하는 분이, 얼마나 많은가!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례를 행했거나, 침례를 받았다면, 다시 행해 보라.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헨리 나우웬/김명희 역/IVP /마3:16-17
2015-09-02 18:08:14
*출처
심오한 내용이므로, 정독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Short Summary
이 책은 크게 '사랑받는 자가 되다',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다'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써 내려갔다.
이것은 예수님이 3년간의 이 땅에서의 사역을 하시기 직전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를 모티브로 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도 동일하게 들어야 할 하나님으로부터의 음성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한다.
◑머리말 - 우정이 시작되다
이 책은 오랜 우정의 열매이다.
10여 년 전 예일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뉴욕 타임즈에 들어갈 기사를 쓰기 위해 나를 인터뷰하러
사무실로 찾아왔다.
30분가량 우리 둘 다 별 관심이 없는 질문과 응답이 오가고 인터뷰는 끝났다.
그가 막 노트를 가방에 넣고 의례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때요, 하는 일이 마음에 듭니까?”
놀랍게도 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뇨, 그저 직업이니까요.”
“싫다면 왜 그 일을 하죠?”
“물론 돈 때문이죠.”
문득 나는 그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치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라는 쇠창살 속에 갇혀 있는 죄수 같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예리함, 자신에 대한 솔직함, 사심 없이 나를 믿어 주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보시고
‘사랑으로 가득하셨을(막 10:21)' 때 일어났던 일과 아주 흡사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억눌린 상태에서 풀어 주고,
그가 자신의 가슴속 깊은 욕구를 성취할 방법을 발견하도록
돕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용솟음침을 느꼈다.
몇 달 후 프레드는 나의 권유에 따라 예일 신학교로 왔고,
소설을 쓰기 위해 애쓰면서 일 년을 보냈다.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고,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나는 그 우정의 결과로
이 책을 쓰고 있다.
우정이 시작될 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종교적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드는 나를 가톨릭 사제로 존경했고,
반면 나는 그의 세속적 유대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다 나이가 들고 성공, 경력, 명성, 돈, 시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자,
우리 관계의 중심에는 의미와 목적의 문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차이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유사점은 더 분명해졌다.
우정이 깊어지고 견고해짐에 따라, 영적으로 같은 기반을 갖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뚜렷해졌다.
유태인인 그는, 명백히 기독교적인 용어나 오랜 교회 생활에 근거를 둔 말로는
위로나 도움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프레드의 친구들을 알게 되고 점차 그들의 흥미와 관심에 공감하게 됨에 따라,
나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성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와 그의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수님이 뭔가 하셔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프레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깊은 갈망에 대해,
우리의 수많은 소원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생존 전략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뢰에 대해서,
정서적 욕구를 채우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변화무쌍한 우리의 관점보다 더 큰 비전에 대해,
대중 매체의 소음보다 더 깊이 있는 목소리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들보다 위대한 그 무엇이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우리 시대와 사회의 중요한 모든 문제를 다룰 수는 없지만
생명, 빛, 진리를 깊이 추구해 나가는 길동무로서
내가 알고 사랑하게 된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 추구에 대해 ‘경청하기를’, 또 여기에 동참하기를 소망한다.
◑1. ‘사랑받는 자’가 되다 (타고 나다)
▲모든 인류를 향한 성경의 가장 깊은 진리
자네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한 후로,
나는 자네가 내 편지(이 책)를 다 읽고 났을 때
정말 꼭 기억하길 바라는 한마디(액기스)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 보았네.
지난 한 해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특별한 단어가 서서히 떠올랐지.
바로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였네.
난 그 단어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내게 주어진 단어라고 확신하고 있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나사렛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서
이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수년 동안 이 말씀을 읽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했지만,
이 말씀이 내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뉴욕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였지.
수많은 대화 덕분에 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이 말은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지.
▲인간 존재의 핵심 진리 - ‘나는 사랑 받는 자’
프레드, 나의 유일한 소망은 자네의 존재 구석구석에서
이 말씀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네.
자네에 대한 우정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자네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네.
또 나는 그 사실을 나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을 자네에게 선물로 가르쳐 줄 수 있네.
우정이란 게 무엇인가?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선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받지 못 할때의 부작용
(사랑과)정반대의 목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우리가 가치 없고 사랑스럽지 못하다는 목소리를 믿게 될 때,
성공, 명예, 권력은 쉽게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다가오지.
그러나 진짜 함정은 자기 거부일세. 아마도 자네는 자기 거부보다도
교만이라는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실 교만이란 것도 자기 거부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 아니겠는가?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거부일세.
그것이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거룩한 목소리를 부인하게 하기 때문이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 진리를 표현한 것이네.
▲‘사랑받는 자’임을 발견하라
자네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그 목소리에 아주 세심하게 귀 기울이는 순간마다,
자네는 더 오래 그리고 더 깊게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내면의 욕망을 발견하게 될 걸세.
그것은 사막에서 샘을 발견한 것과도 같지.
일단 물기가 있는 땅을 접하게 되면 더 깊이 파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난 요즘 파고 들어가는 일을 하고 있네.
그리고 이제 막 건조한 사막을 뚫고 솟아나는 작은 물줄기를 발견했네.
나는 계속 파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만 하네.
그 작은 물줄기는 사막 같은 내 삶 안에 깊숙이 숨어 있는
거대한 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지.
우리 삶에는 아주 거대한 모래더미가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그분이,
우리가 그 모래를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걸세.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물을 발견하고자 하고
그 물을 마시고자 하는 강한 열망뿐이네.
◑2.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 (이 진리로 성숙해 가다)
▲하루 종일 이 진리를 묵상하시라
자넨 실용주의적인 기질이 다분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랑받는 자가 된 상태에서(원리, 이론)
온전히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겠지.(실제 적용)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네.
이 질문이 우리를 낭만주의나 이상주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일상생활의 아주 구체적인 부분을 다루게 하니까 말일세.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란, 실제로 매시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상사 속으로 그 계시된 진리를 붙잡는 것이네.
우리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진리가
자리 잡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를 온전히 주장함으로써 큰 즐거움과 평화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사랑하고 놀고 또 일하는 와중에서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나게 되지.
나는, 아래 네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됨을 알게 되었네.
-선택받은(taken),
-축복받은(blessed),
-상처받은(broken),
-나누어주는(given).
내 경험을 통해 볼 때, 위 4가지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어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네.
▲1. 선택받은 자
선택받았다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되는 일의 토대가 된다네.
사랑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붙잡힌 존재가 되었음을 주장해야만 하네.
영적인 삶의 첫 단계는, 나의 전 존재가 이미 붙잡힌바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네.
거절과 거부로 둘러싸여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놓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적 투쟁이기도 한 이 투쟁을 위해 어떤 지침이 있을까?
①첫째, 자네는 자네에 대한 세상의 거짓된 속삭임을 계속해서 밝혀야 하네.
“이 거짓된 느낌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건 진리가 아니야.
나는 날 귀히 여기셔서 영원 전부터 사랑받는 자로 부르시고
그 영원한 품에 안전하게 품고 계신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야.”
②둘째, 자네에 대한 진리를 말해 주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네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는
장소와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네.
또한 삶과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상의 수많은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네.
③셋째, 자네가 선택받은 사실을 계속해서 감사해야 하네.
감사는 자네가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존재라는 의식을 심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네.
사랑이 사랑을 낳듯이, 감사는 감사를 낳지.
내 경우, 이 세 가지 지침은 선택받은 자로 살기 위한 영적 훈련이었네.
마음의 훈련을 계속했을 때, 나는 나의 그늘을 뛰어넘어
진리에서 나오는 빛으로 들어갈 수 있었네.
△전도의 열망
또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은 열망을
곧 발견하게 되었지.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
그건 선택받은 사실이 주는 커다란 기쁨이네.
△상대도 역시 ‘사랑받은 사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귀중함도,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그들의 독특한 자리도
인식할 수 있게 되네.
우정이란 서로가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네.
▲2. 축복받은 자
△서로 축복하라, ‘사랑 받은 자’임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과 비난의 구분을,
선행과 악행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근본적인 선함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가 사랑받는 자 되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네.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축복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가장 심오한 확증이네.
선택받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네. 우리는 또한 계속되는 축복(격려)을 필요로 하네.
우리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 분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삶의 순간마다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듣게 해주는 축복 말일세.
△‘사랑받는 자’로 축복받으신 예수님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나서 축복의 음성을 들으셨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이 바로 축복이지.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찬양과 비난,
사랑과 저주 가운데서 예수님을 지탱시켜 준 것이네.
△보통 자기가 저주받고 있다고 느끼는 기분은
축복받고 있다는 기분보다 더 쉽게 생기는 법이지.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계속 키워 내기에 충분한 논거들도 찾을 수 있네.
우리는 내면에서 자기자신이 악하고, 나쁘고, 썩었고, 가치 없고, 쓸모없다는 소리,
질병과 죽음으로 끝나 버릴 운명에 불과하다고 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네.
그러나 이러한 시끄럽고, 난폭하고, 소란스러운 저주들은 진리가 아니네.
그것들은 거짓말이지. 믿기 쉬운 거짓말, 그러나 분명히 거짓말이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축복을 듣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이 단지 감상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형성하는 진리라면,
우리는 분명하게 이 축복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하네.
이제 자네가 축복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제안을 하겠네.
그것은 ‘기도’ 그리고 ‘함께 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네.
△나에게는 ‘기도’가 축복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점점 더 좋은 방법이 되고 있네.
그것은 고된 훈련이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본 적이 있나?
우리 세계의 소리를 넘어서 침묵 속으로 들어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독을 감싸 안고 침묵과 친구가 되려 한다면
그 축복의 목소리를 알게 될 걸세.
나는 환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귀, 내적인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네.
하루에 30분씩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지속해 나간다면,
서서히 자네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걸세.
△은밀하게 나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에서 발견하시라
그리고 두 번째로 제안하는 것은, ‘함께 거하는 삶’을 계발하라는 것이네.
거리에서 우리를 멈춰 서게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복,
새 생명에 대해 알려주는 신선한 꽃과 나무들의 축복, 음악, 미술, 조각,
건축의 축복 등.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축복도 있네.
바로 감사, 격려, 애정, 사랑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축복이지.
우리는 그 축복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것들은, 은밀하게 숨어 있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기억나게 하지.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에 대해 좋은 것을 말씀해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말일세.
△우리가 축복받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싶은 깊은 욕망으로 이어진다네.
축복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 항상 축복의 말을 한다는 것이네.
자네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에 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하거나, 그들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들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쉬워지는지 알면 놀랄 걸세.
축복받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네.
내면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를 축복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어둠은 더 이상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네.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단어들을 알게 하실 것이고,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축복받은 존재임을 보여 주실 걸세.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소유한다면,
우리는 열린 눈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볼 수 있네.
▲3. 상처받은 자
△상처는 보편적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자네는 고통스러운 이별과 이혼을 겪어야 했고, 나는 오랜 침체의 시기를 겪었네.
자네는 업무 가운데서 많이 낙담했고, 진짜 소명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방황했지.
반면 나는 계속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많은 요구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치고 실망했지.
분명 선택받고 축복받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선지자들도
모두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았네.
△상처받은 사람들은, 치료보다, 더욱 파멸의 길로 내닫는다.
에이즈는 아마 현대인의 상처를 가장 뚜렷하게 말해 주는 것 중에 하나일 걸세.
난폭한 포옹 속에 사랑과 죽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네.
친밀함과 교제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이 그것에 생명을 건 것이지.
우리 사회의 공허하고 커다란 공간 속에서 절규하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네.
계속해서 외로움 가운데 사느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일세.
그래, 에이즈의 위기는 우리 인간의 상처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조망을 요구하고 있네.
①상처와 친해 지시라
우리가 어떻게 이 상처에 반응할 수 있겠는가?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네.
첫째는 상처와 친해지는 것이고,
둘째는 그 상처를 축복 아래로 가져다 놓는 것이지.
상처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그것에 정면으로 부딪혀서 그것과 친숙해지는 것이네.
우리가 거절, 이별, 무시, 학대, 감정적 조작 때문에 생긴
심한 고뇌와 고통을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가기만 한다면,
이것들은 우리를 마비시킬 뿐이지.
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기쁨과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으로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네.
나는 그것이 분명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네.
우리의 진정한 보살핌은,
우리의 상처를 기쁨으로 이끄는 문으로 만들도록 기꺼이 서로를 도와주는 것이네.
②상처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그것을 축복 아래로 갖다 놓는 것이네.
보통 우리가 상처에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을 저주 아래에 놓고 살기 때문이지.
우리의 아픔을 통해 자신을 쓸모없고 가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일세.
그러나 크고 무거운 짐이라도 축복의 빛 아래 거하고 있을 때는
가볍고 쉬운 법일세.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도전이 되고 낙심할 이유가 될 듯한 일이
정화의 근원이 되지.
형벌처럼 보이던 일이 불필요한 부분을 정리하는 일이 되고,
거절 같던 일이 더 깊은 교제에 이르는 길이 되네.
기쁨과 슬픔은 더 이상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로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려는 동일한 소망의 양면이 되는 거지.
③자기 상처를 통해.. 남을 돕는 치유자로 승화되시라
우리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결론짓기 전에,
나는 다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말이 함축하는 바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은 동시에
거의 없다는 사실을 더더욱 잘 알아 가고 있네.
그래, 사실 우리는 나누어주기 위해 선택받았고 축복받았고 상처도 받았네.
내가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에 관한 것이네.(↓)
▲4. 나누어 주는 자
사랑받는 자의 삶의 네 번째 모습은 나누어주는 것이네.
우리 둘 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얻는 기쁨을
경험으로 알고 있네.
자넨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나는 항상 자네가 준 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네.
고도로 발달된 경쟁심과 탐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주는 기쁨을 상실한 모습을 보고 있기란 슬픈 일이네.
종종 우리는 행복이 소유에 달려 있는 것처럼 살고 있네.
그러나 나는 소유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네.
진정한 기쁨, 행복, 내적 평화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생긴다네.
행복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지.
그러나 그 진리는 대개 우리가 상처에 직면할 때 발견하게 되네.
△자기 상처로 깨어진 사람이.. 남을 잘 돕는다.
수년 동안 우리의 우정이 자라난 방식을 좀더 숙고해 보면
우리의 상처와 서로에게 주는 능력 사이에 신비한 연결 고리가 있음을 깨닫는다네.
우리의 상처 때문에 서로의 삶을 나누고 서로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더 깊이 알게 되었지.
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쪼개는 행동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도 그러하네.
△함께 식사하라
상처를 안고 사는 서로에게 나누어주고자 하는 소망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는 때는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하네.
나는 ‘함께 떡을 뗀다’는 표현을 아주 좋아하네.
함께 먹고자 하는 소망은
서로에게 양식이 되고자 하는 더 깊은 욕망까지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사랑받는 자로서 우리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세상의 양식이 되는 것이네.
그것은 서로에게 우리 자신을 주고자 하는 가장 깊은 욕망을
가장 친숙하게 표현한 것이지.
①삶으로 우리를 주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네.
그것은 ‘삶으로 우리를 주는 것’과 ‘죽음으로 우리를 주는 것’이네.
우선 우리의 삶 자체가 나누어 줄 수 있는 훌륭한 선물이라네.
서로에게 우리의 존재를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독특한 재능이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주어야 하는 가장 큰 선물은 내 삶의 기쁨,
나의 내적인 평안, 나의 침묵과 고독, 나의 행복감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네.
우리의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의 은사니까.
우정, 친절, 인내, 기쁨, 평안, 용서, 온유, 사랑, 희망, 신뢰 그리고 그 외
다른 많은 것들. 이것들이 우리가 서로에게 주어야 하는 진정한 은사들이네.
②두 번째로 우리는 <죽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도록 부름 받았네.
우리가 나누어주는 삶을 살기 위해 상처받고 깨어진 존재가 되었다면,
최종적인 상처가 되는 죽음은
우리 자신의 최종적인 선물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에게는,
죽는다는 것이 온전히 사랑받는 자가 되는 길로 가는 문이 된다네.
선택받았고, 축복받았고, 나누어주기 위해 상처받았음을 아는 자들에게
죽음이란 순수한 선물이 되는 길일세.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은,
서로에게 새롭고 더 근본적인 교제, 새로운 친밀감,
새로운 소속감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네.
정말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면
죽음은 사랑의 끈을 강하게 하고 깊게 하는 잠재력이 있을 걸세.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신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네.
그러나 그것은 사랑 안에서 죽는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니겠나?
우리가 죽을 때에만이 우리 영혼이 온전히 그 전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네.
그러나 준비 없이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네.
그래, 훌륭한 죽음이라는 것이 있지.
우리는 자신이 죽는 방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네.
사랑받는 자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삶 가운데서 열매를 맺게 되지.
우리의 짧은 인생이 시간을 초월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하네.
우리는 그렇게 되기로 선택을 해야 하고,
우리를 기억할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화와 생명을 가져다 줄 영혼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해야 하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1226년에 죽었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네.
그의 죽음은 진정한 선물이었지. 그는 죽었지만 결코 죽지 않았네.
그의 생명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열매를 맺어 가고 있고,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수되고 있네.
몇 년 내에 우리 둘은 땅에 묻히거나 화장될 걸세.
이 세상에서 쉽게 망각되어 버릴 우리의 짧은 여행이
모든 시간과 장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삶을 나누어주는 일로 지속될 걸세.
일단 우리의 죽을 육체에서 자유로워진 사랑의 영은,
오고 감을 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조차도 원하는 대로 날아다닐 걸세.
그래서 죽음으로써, 사후에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 듯
성 프란시스나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목사님처럼..
◑3.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다 (‘영생’의 삶으로 살아가시라)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과 연합해야
삶이란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시고
우리가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시지.
우리 내면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네.
▲사랑받은 자는.. ‘연합’을 도모하며 산다.
영적인 삶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파괴와 폭력을 일으키는
수많은 ‘분리 현상’을 거스르는 것이네.
이러한 분리 현상들은 내면적이기도 하고 외면적이기도 하지.
내 속에서 발견되는 기쁨과 슬픔의 분리 현상이나
내 주위의 문화, 종교, 종족들의 분열은
모두 어두움의 악마적인 세력에서 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네.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성령은 통일체를 만들고
연합하게 하시는 영이시네.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분별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연합, 치유, 회복, 화해의 순간들을 알아내는 것이네.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마다, 분열은 사라지고 연합된 모습이 나타난다네.
▲매 순간 사랑하며 영생의 삶을 살며, 영생을 준비하시라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겠나?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위로부터의’ 삶,
다시 말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랑받는 자’로서의 삶이라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독특한 기회가 된다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가?
나는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곳’,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네.
그러기에 우리의 죽음은 그분께 돌아가는 순간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죽음이 충만한 삶을 향한 문이 되기를 기대할 수 있으려면,
우리 ‘생애’의 많은 순간들에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요구해야 하네.
영생이란 우리 존재의 종말에 갑자기 다가오는 어떤 놀라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되는 우리 존재와 삶의 온전한 계시라고 할 수 있네. (매우 신학적인 개념)
▲남은 삶은 ‘사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
비록 나도 이 세상의 많은 두려움과 위협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땅에서의 몇 년(남은 인생?)은
훨씬 거대한 사건(영생?)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네.
그것은 시간 속으로의 사명, 아주 즐겁고 흥분되기까지 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네.
그 사명을 이루도록 나를 보내신 그분은
내가 집으로 돌아와 이 땅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지.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 /마3:16-4:11
2015-08-28 15:47:18
◑안식년 가서 받은 응답
▶저는 지난 두 달 동안 안식년의 시간을 가지면서
영적인 그리고 다소나마 정서적인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제 개인적인 QT시간이 좀더 활성화되어서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들을 수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QT 재료를 두 번 제가 바꾸었어요.
제가 일상적으로 하던 것이 아닌, 다른 외국의 책자를 가지고 QT를 했는데,
이상하게 그 짤막한 기간 동안 똑같은 본문이 두 번 나오더라구요.
그리고 본문을 통해서 거의 똑같은 메시지를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내용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제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었던 중요한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솔직히 우리 교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막 이제 공사가 신봉리에 진행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주차장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또 아무래도 내년엔 우리가 성전 본당 건축을 시작해야 될 터인데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안식년이라고 쉬러 갔지만, 제 머리 속에 교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가득 차서
한 순간도 자유할(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 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합니까?’
이런 기도를 제 QT시간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차례에 걸쳐서 오늘 본문을 보여주시면서
제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나는 네 미래의 사역보다도,
교회의 사역보다도 더 커다란 관심은
네가 내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교회가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네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떤 목사가 되느냐?
그것이 나의 더 커다란 관심이다'
라고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음성을 들었어요.
'네가 정말,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있느냐?
그러면 나머지 일은 내가 책임지지 않겠느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더 사랑스럽고 더 기뻐하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나오시는 그런 장면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시고
또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으면 이제 당연히 그 다음에 예측 되는 사건은 뭘까요?
이제 예수님 앞에는 신바람 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바로 직후에 마태4:1절부터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갑자기 사건의 흐름과 맥을 깨는 파격적인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사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그것이, 방금 전에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는 놀라운 사랑의 음성과
이 광야의 시험이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3장과 4장이 서로 다른 장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3장과 4장을 연결시켜서 묵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 QT시간에 이 3장과 4장이 같이 연결되면서
이 말씀은 새로운 빛으로 제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이 인정(내 사랑하는...)과 시련(마귀에게 이끌리사...)을 동시에 주시는데,
도대체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분명 이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더 사랑하는 아들로
기뻐하는 자지만, 더 기뻐하는 자로 빚어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우리는 결론적으로 전제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번역할 때,
영어 번역에서는 temptation(유혹)이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세계적인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여기서 ‘시험’의 희랍어 '페이라제인'은 그 의미상으로 볼 때,
temptation유혹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차라리 test라는 단어가 훨씬 더 그 의미상으로 적합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만큼 포괄적 의미의 단어입니다. ‘고난’도 됩니다.
유혹, 테스트, 고난.. 셋 다 포괄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test는 파괴적인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test를 줄 때,
그것은 학생들을 골탕을 먹이거나, 좌절시킬 목적으로 시험을 주지 않습니다.
시험test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실력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 부족을 보완하고 보충할 때
한 단계 더 성숙이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에게 바로 이런 시험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세 차례의 시험이죠. 바로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가 더욱 더 사랑하는 자가 되고, 그의 더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인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시면서도
오늘 사랑하는 그의 아들과 딸들을 데리고 광야로 이끌고 가셔서
그 찬바람 부는, 그 고독한, 그 굶주린 외로움의 광야 속에
저와 여러분을 두시고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의 폭풍우 속에서, 이 시험의 광야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야. 네가 나의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야!'
라는 그런 음성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1.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test
▶자, 지금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이 순간 사탄은 마귀는 그의 결정적인 허점인 배고픔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을 단순하게 배고픔의 시험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경제력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그가 명령하시기만 하면
돌을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이 시험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험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 받는 물질의 시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test>입니다.
내 욕심을 따라서, 내 뜻을 따라서,
내게 주어진 혹은 내가 원하는 대로 그 물질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할 것인가?
라는 선택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의 제자들인 우리도 오늘 이 세상의 광야에서 동일한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물질을 사용할 때마다,
물질을 요구하고 물질을 원할 때마다, 우리는 이 시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인생의 광야에서 이 물질의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날마다, 아니 오늘도 이 시험 앞에 직면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물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하되, 물질로부터 자유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생의 광야를 여러분과 저는 걸어가고 있을까요?
아니, 그러잖아도 어렵고 궁핍한데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하고 사업을 한다면
내 사업 망하고, 나는 패가망신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약속이 뭐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만약 우리가 정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인생과 내 물질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면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지신다. - 이게 성경의 약속이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시리라 마6:33
내가 물질의 욕심에서부터 참으로 자유한 인생이 될 때,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너는 정말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야!’
◑2. ‘자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test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본질은
<내가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사람의 인정과 박수를 구하고 싶은 끝없는 욕심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당연한 칭찬과 격려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인생의 장에서 쇼를 하기 시작할 때, 허영의 쇼를 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런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동기를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 진정한 자아, 벌거벗은 자아의 모습을 통해서,
내 진실성의 정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구하기보다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자랑, 부풀리기, 눈가림식의 쇼를 통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허영의 쇼 말입니다.
▶제가 QT를 할 때 하나님은
내 안에 그런 유혹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제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교회가 커가니까 큰 교회 목사라는 그런 인정 앞에
더 기쁨과 더 커다란 그런 마음의 위로를 삼았던 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인기, 명예 시험을 통과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더 사랑하는 자, 더 기뻐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시험을 거절하신 주님은,
사람의 인정이나 사람의 박수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3. ‘우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test
▶세 번째는 네가 나한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의 본질이 뭡니까?
이것의 본질은 네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써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로써 살 것을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뭐예요? 천하만국의 영광을 약속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의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사탄을 숭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많은 경우,
이 같은 자기의 동기를, 혹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그의 미끼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입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사탄을 숭배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노(No)”라고 부인할 것입니다. 누가 마귀를 숭배하기를 원하겠어요!
그러나 그들에게 돈을 보여주십시오. 그들에게 출세를 보여주십시오.
혹은 그들에게 성공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성공 때문에, 혹은 그 출세 때문에, 혹은 돈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그리고 양심을 타협하는 일을 너무나도 쉽게 자행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사탄을, 그리고 마귀를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시험을 들고 찾아오는 사탄,
‘천하만국의 영광’이라는 미끼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는 사탄을 향해서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
▶이것은 내 인생의 장에서 우상숭배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성경이 강조하고 경계하는 우상 숭배는 골로새서에 보면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이니라. 골3:5
그 탐심이 어떤 종류의 탐심이든지 간에
모든 탐심에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습니다.
네 여러분, 우상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은 피조물입니다.
우상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탐하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천하만국의 영광. 그것은 대단해 보이지만, 매혹적이지만, 굉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불과해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마귀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나님의 만드신 피조물의 영광에 우리 시선을 빼앗기도록 유인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1:25
◑헨리 나우웬의 시험에서 승리
▶헨리 나우웬이 하버드 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인 공동체에 가서
그가 첫번째로 쓴 책이 “The Return of Prodigal Son” 「탕자의 귀향」입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가 탕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부도덕한 생활 속에 빠져 있던 사람, 죄인만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우웬은 자기도 탕자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허영을 찾아서, 욕망을 찾아서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찾아서
저 먼 나라로 떠나갔던 자기는 탕자였다고,
그리고 자기는 외로웠다고,
자기는 방황하고 있었다고
자기의 자아는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몇 사람의 장애인 공동체에서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비로소 자기는 집에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고향에 돌아왔다,
자기의 참된 모습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또 하나의 책을 써요. “아담” 이라는 책을 씁니다.
‘아담’은 그 장애인 공동체에 있었던 한 장애인 소년의 이름입니다.
그 아담을 섬겨주고, 아담의 발을 씻겨주고, 한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이 아담 안에서 새로운 아담을 발견합니다.
둘째 아담. 즉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 순수한 영혼 속에서, 사람들은 지체아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병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 순결한 영혼을 섬겨주고, 그를 도와주면서
그는 그 아담 안에 있었던 둘째 아담이신 예수를 새롭게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기를 도와주는 헨리 나우웬이, 이 신부가 너무 고마워서
이 아담이라는 소년이 더듬거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 나….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순간 그는 이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더듬거리는 말속에 고백되는 이 한 장애인의 음성 속에서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을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인류는 끊임없이 인생의 광야에서 이 시험들을 겪어 왔습니다.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아담 때부터 그랬습니다.
마귀가 에덴의 동산에 찾아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여주었을 때,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저도 실패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삶의 진정한 주소를 현 주소를 잃어 버리고,
그리고 춥고 외로운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장애우를 섬기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 둘째 아담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 수세 직후에 이 음성을 처음 들었지만,
3번의 시험을 이기실 때마다 계속적으로 이 음성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더욱 견고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이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음성을 들려달라고, 주님의 인정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도
그 음성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내 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로 잘 인정해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을 함부로 제 마음대로 쓰고,
세상 자랑을 추구하고,
탐욕의 우상을 섬기면서, 두 주인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test에서 승리할 때,
내 주변 사람들을 섬기면서 ‘둘째 아담’을 발견할 때
우리도 헨리 나우웬처럼,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주님은 우리가 성공하고, 출세하고.. 그런 유한하고 현세적인 것에 관심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마3:13-17
2012-01-05 16:09:34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한 일생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늘 체험하며 그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자신이 메시야였음에도 불구하고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이야기입니다.
1. 겸손과 순종의 종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까지 가셨습니다(마 3:13∼15). 이때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신 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침례 받는 것을 말렸습니다. 요한의 침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였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의로운 분이셨기 때문에 회개의 침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백성들과 함께 침례 받으심으로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자신이 회개의 침례를 받아야 할 죄인들의 모습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해 율법의 저주를 홀로 감당하사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음으로 모든 의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사 인간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은 가장 낮아지고, 겸손한 순종의 모습으로 섬김의 삶에 대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유월절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둘렀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 오시더니 묵묵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요 13:14∼15).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다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겸손과 섬김을 행동으로 교육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모두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합니다(벧전 5:5).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우리도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사닥다리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영광, 가장 아름다운 것, 은혜 위에 은혜는 겸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지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무가치합니다. 아무리 많은 봉사를 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도 자기를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상처를 주면 모든 것이 무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걸어가신 길, 그 길은 오직 겸손과 순종의 길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위치에 인간이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국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 Livingstone)은 6년간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채 밀림 속 오지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뉴욕 헤럴드지가 파견한 기자 겸 탐험가인 헨리 스탠리는 특종기사를 쓸 목적으로 리빙스턴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랜 탐험 끝에 스탠리는 현재의 탄자니아 호숫가에서 원주민 사이에 묻혀 있는 리빙스턴 박사를 마침내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리빙스턴에게 특종을 얻기 위해 열 달 동안 그와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스탠리는 생활하는 동안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여기까지 와서 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리빙스턴 선교사님이 그 험한 곳에서 사역하게 된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의 겸손과 온유함, 열정과 성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저는 결국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회심시킨 것은 그의 설교가 아니라, 바로 그의 겸손과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스탠리는 회심 후 자신이 저술한 아프리카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과 선교단체들을 뜨겁게 반응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리빙스턴 한 사람의 순종과 겸손의 삶은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순종과 겸손의 삶을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겸손한 자와 순종하는 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겸손히 낮아짐으로 영혼의 쉼을 얻으시기 바랍니다(마 11:29).
2. 성령의 사람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일생이었습니다(눅 1:35).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침례 받으신 후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습니다(마 3:16).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리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간 금식하셨습니다(마 4:1∼2).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에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눅 4:18).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도 성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요 14:16, 26; 행 1:4∼5).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순절 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권능을 받아 담대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전파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에도 3000명, 5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병을 고치고 귀신이 떠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신이며, 권능의 신이십니다.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 귀신을 쫓아내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능력 있는 주님의 일꾼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갈 5:22∼23).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일생이 성령님과 동행하며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수로 많은 인기를 누렸던 윤복희 권사는 저서 『저예요 주님』에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여의고 눈물 많은 인생길을 걸어 왔습니다. 부모님의 재능을 받아 태어나서 아주 탁월한 가수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그저 세상 인기에 취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윤복희 권사는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빠인 윤항기 목사는 그녀가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구 공연을 위해 가던 중 자동차 사고를 겪게 되었고, 급정거 소리와 함께 자동차가 세 번이나 굴러 반대 차선에 뒤집혀 넘어진 상태였습니다. 그 때 그녀의 인생은 주님을 만남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녀의 귀에 주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라지 마라. 이건 사고가 아니다. 나니 안심해라” 자동차는 완전히 망가졌지만, 이상하게 그 짧은 순간 성령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노래를 불러야 먹고 사는 대중 가수가 성령을 받은 후 30년 동안 유행가를 부르지 않고, 가스펠과 관련된 뮤지컬 무대만 지키며 온 몸으로 주님만을 찬양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만나기 전 무대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마음속 무대의 주인공이 된 후로는 주님이 기뻐해 주시는 공연을 하려고 애씁니다. 단 5분을 출연하는 배역이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흔쾌히 무대에 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고, 성령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죄를 범했을 때 가장 큰 두려움은 성령이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시 51:11). 성령을 떠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영적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고, 박물관처럼 되어 가는 이유는 성령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
성령이 임하시자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께 말씀하셨습니다(마 3:17).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은 시편 2편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시 2:7). 시편 2편은 왕의 노래로 왕자가 왕위에 즉위할 때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은 바로 ‘너는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죄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왕의 왕이심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어 보내신 메시야란 사실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으로, 이사야를 통해 노래한 ‘종의 노래’의 반복입니다(사 42:1).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종, 그것도 고난 받는 종으로서 이방에 공의를 베풀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왕의 노래와 종의 노래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세상의 왕임과 동시에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실 고난 받는 종, 메시야라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으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사 마치 죄 있는 자와 같은 모습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주님을 기뻐하시며 하늘 문을 여사 성령을 보내시고 예수님이야말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기뻐하는 종’이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온 세상에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일생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사람을 기쁘게’라는 기업 이념으로 경영하고 회사가 있는데 바로 ‘마임’입니다. 마임의 홍혜실 대표는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훈을 ‘하나님을 기쁘게, 사람을 기쁘게’로 정하고, 매주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기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사원들은 매월 1일 연수원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예배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이 개인과 기업의 첫 번째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창립 초기 자체 공장조차 없던 회사는 예배와 기도로 준비하며 성장하여 현재 760여 개 지사, 3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기업은 직원들의 사회봉사활동이 내규화되어 있어서 자폐아와 고아들을 돌보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소아 암 어린이들을 위한 보금자리 마련, 입양부모를 위한 자선 행사들을 후원하여 2009년 경영 성과 부분, 기업의 이미지 부분, 국민경제 기여도 부분 등 3개 부분에서 각각 공적을 인정받아 국무총리상도 받았습니다. 홍 대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경은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가장 최우선 순위에 둘 것이며, 또한 복음 전파에 매진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결정하고 판단할 때 사람에게 인정받기보다는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갈 1:10).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 충만하여 늘 기도하며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히 11:6).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삶을 이 시간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이제 이후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불쌍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