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사도행전 설교 모음

사도행전 4:1 - 4 절 설교 모음

Jessi J 2024. 3. 1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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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4:1-22/ 조정의목사

2020-09-17 10:14:46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 적이 있는가? 가장 최근에 예수님을 말하다가 위협이나 경고를 받은 적이 언제인가? 성경은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다(딤후 3:12).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 경건한 행동뿐만 아니라 말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은 박해가 보장된 삶이다.

 

오늘 우리는 초대 교회가 경험한 첫 번째 박해를 살펴볼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40여 년 동안 앉은뱅이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켰고, 그 놀라운 표적을 보고 모여든 수많은 사람에게 표적이 가리키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담대하게 선포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 일로 인해 그들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그들처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기 원한다.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사도의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하기 원한다.

 

1. 구속(1-4)

 

사도들(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의 행각에서(3:11)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말할 때에, 1), 그 가운데 갑자기 들이닥친(이르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다(1).

 

그들은 두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붙들어 체포하기 위해 기습한 것이다(잡으매, 3).

 

불과 몇 주 전에 이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구속하고 심문하고 로마 재판에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한 자들이다. 그걸로 일단락됐다고 생각했을 그들 앞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타나 또 그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치아픈 이름, 예수(11:45-53).

 

특별히 이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싫어했던(짜증나다, 격노하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들은 제사장들로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예식을 집행하는 높은 직책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평민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친다니 참으로 건방진 이들이 아닌가?

 

가르치는 내용도 문제였다.

 

제사장직을 독점했던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외의 성경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혼은 몸과 함께 소멸되기 때문에, 부활도 천사도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니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한단 말인가? 구약 성경에 정통한 바리새인 랍비면 논쟁을 하겠지만, 이들은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들은 성전 맡은 자(단수)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성전 보안 책임자로 제사장 바로 밑의 지위를 가지고 성전의 보물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성전의 경비대장들”, 22:52-54).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체포했고(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다(3). 아마도 안토니아 요새에 가두었을 것인데 유대인 성전 경비와 로마 병력이 함께 지키는 철통같은 감옥이었다(바라바, 강도, 살인). 거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주눅 들고 겁을 먹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감옥에서 제자들은 주님이 체포당하신 밤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15:20). 제자들은 그 말씀 그대로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을 체포하고 강금했던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의 증인들을 똑같이 체포하고 강금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박해를 감수하고 담대하게 선포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생겼다. 그것도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여자 포함 약 만 명)이 구원받는 사람으로 더해졌다(2:47).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약 25,000 ~ 85,000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증인과 제자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셨으니 우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박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비방이나 조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4). 그리스도로 인하여 박해를 많이 받은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했다(8:17). 주께서 지금도 우리의 증언을 통해 믿는 자를 날마다 더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2. 재판(5-12)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5).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국회+대법원) 산헤드린 공회를 열기 위해서다. 공회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했다(6). 최고 우두머리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으로 실세였고, 그 사위인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 그리고 그 가족들 모두는 성전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세력이고, 예수님을 처리한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요한은 베자 사본에 요나단이라고 나오는데 안나스의 아들로 가야바 이후 대제사장이 됐고, 알렉산더는 알 수 없다.

 

그들은 몇 주 전 예수님께 했던 대로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반원 모양으로 둘러쌓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흥미롭게도 이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이다(20:2).

 

몇 주전 예수님께 유죄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던 장소에서 71명의 분노한 고위 관리들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12:11-12). 진실로 성령님은 이 때 베드로에게 할 말을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다(8).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9). 먼저 베드로는 앞에 있는 자들을 존중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을 조정하여 오해를 바로잡았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9). ‘우리는 죄가 없다고 확실히 선언한 것이다. 우리가 행한 일은 착한 일이다. 안식일에 행한 것도 아니고, 율법을 어기면서 한 일도 아니다. 사십여 세나 된 병 나은 사람을 구원한 참으로 선한 일이 맞지 않은가?(22).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물었던 질문에 답을 한다.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으로 이 선한 일을 행했는지 설명한다. 이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 소조), 육체의 질병에서 치유됐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새롭게 된 구원은 바로 다음에 제시한 분의 권세, 그분의 이름으로 된 일이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그들이 그토록 짜증 내고 혐오했던 이름,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름, 나사렛 예수. 하지만 그들이 도무지 믿지 않았던 부활을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이루셨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그분이 참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바로 그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된 것이다. 절대로 거부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증거 1호가 그들 눈앞에 서 있었다.

 

베드로는 이어서 시편 11822절을 인용하여 그들이 절대로 그리스도를 거절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선포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 이 말씀은 불과 몇 주 전 예수님께서 그들과 성전에서 논쟁하실 때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셨던 구절이다(20:17-18).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 비유는 다음과 같다(20:9-18). 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타국에 있으면서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계속 그들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다. 세 번이나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냈다. 그는 존대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악한 농부들은 도리어 독생자를 죽였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듣던 그들에게 물으셨다. 주인이 돌아와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침묵).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그들은 놀랍게도 결코 그리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흠정역).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았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와 같은 심판을 내리지 않겠는가?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뻔뻔하게 주장했다(20:19).

 

그때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이 베드로가 다시 언급한 시편 11822절이다.“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20:17-18).

 

건축자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쉽게 버리는 돌처럼 그들은 예수를 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터와 반석, 기초석이 되게 하셨다. 누구든지 그분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깨어지고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 예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복음의 핵심이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교회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으며 악한 일로 고난을 받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배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만일 선한 일로 천국에 간다면, 각자 자기 신앙의 진실성을 인정받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면, 여러 예식이나 봉사나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면, 종교는 각자 다른 모양이지만 결국 종착점은 같다면,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없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유일한 길이다. 좁고 편협하다고 비난받아도 이 진리는 굽힐 수 없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대로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14:6). 하나님 아버지께는 그분의 영광을 충만하게 보여주실 독생자 예수 외에 다른 자녀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 참 진리, 고귀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

 

3. 판결(13-22)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자들은 당황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그들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13). 유대인으로서 기본 교육(히브리어 읽기, 쓰기, 유대 역사, 경전 암송)을 받았지만 유명한 랍비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니 대학자들 앞에서 주눅 들고 자신감 없이 말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담대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 알아챘지만,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다(14). 거의 만 명이 되는 사람이 이 일을 통해 예수를 믿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 16, 21)이 놀라운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1). 도저히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6). 예수님처럼 몰래 잡아다 죽이지 않는 한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다(21). 그래서 일단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15).

 

16-17절은 그들이 공회에서 의논한 내용이다. 사도들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인데, 아마도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가말리엘을 통해 누가에게 알려진 내용일 것이다. 표적이 분명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데 달리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위협하여 더 이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자고 결의했다(17).

 

흥미롭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들었을 때 똑같은 일을 했다. 부활의 표적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도리어 돈을 주어 거짓을 민간에 퍼지게 했다(28:11-15).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대부분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서 혹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거부하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거부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공회 앞으로 불려왔고, 그들은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 그들은 담대히 대답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 그들은 유대 최고의 법원 앞에서도 담대했다. 그들의 위협과 경고에 겁먹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이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는가? 그들이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 역시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께서 내 증인이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1:8; 28:20).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보고 들은 그 이름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과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핍박과 경고와 위협이 있어도 결코 그럴 수 없다.

 

2020116일 선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작년에 하루 평균 8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매일 26개의 교회가 공격당했다고 한다. 세 시간에 한 명꼴로 순교하고, 한 시간에 한 개 이상의 교회가 공격을 당한 셈이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있고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한다. 하지만 정작 그만큼 편안한 환경에서 우리는 복음을 얼마나 담대히 전하고 있을까? 어쩌면 조금의 불편함이나 거절, 비방이나 조롱이 두렵고 싫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게으름을 버리고, 두려움을 내어쫓고 담대하게 바울처럼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고난의 시작 /4:1-4/ 하용조 목사

2015-05-23 17:57:31

 

영광이 있는 곳에는 고난도 있습니다. 댓가를 치루지 않은 곳에는 영광이란 없습니다. 정상에 선 사람들의 대부분은 피눈물나는 고통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챤에게는 고난이 있으되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지 않으면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어있다면 그 시련은 나를 변화 시킬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고난과 역경,시련과 핍박,순교의 제물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순절은 기적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했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는 축복과 능력이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자가 일어난 사건을 보았습니다. 믿을 수 없었으나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한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한 것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부활한 예수,나는 이일의 증인이다. 예정된 예수,모세가 선지자로 예언한 예수,다윗이 메시야로 예언한 예수,아브라함이 축복의 근원으로 예언한 예수가 이 기적을 주신분이다. 하고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를 모두가 다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1-2‘ -- ’ 처음으로 복음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비판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야 말로 가장 먼저 감사하고 찬양하고 봉사해야할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사장,성전 관원,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가장 주님을위해서 살아야 할 될자들이 가장 큰 복음의 반대세력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보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교회 핍박의 세력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습니다.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세력은 외부에서 오는 핍박과 고난이 아닙니다. 내부의 비판과 분열과 거짓과 위선에 잇습니다. 거룩한 역사의 방해자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라고 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이라고 다 환영하지 않습니다. 비진리를 소유한 자들은 진리를 소유한 자들이 부담스럽습니다. 불의한 자들에게는 정의로운 자들이 두렵습니다. 환영하지 않습니다. 어둠의 사람들은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의와 진리에 도전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뛸때 함께 기뻐해야 될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의 내용이 거슬리고 -예수 부활의 사건이 그들에게는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까요?

 

(1) 예수가 부활했다면,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들이 지금까지 외쳐댔던 신앙이 허구라는 사실이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왜 거부합니까?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가 죽었다고 생각했고,참람한 자로 죽어 마땅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또 예수를 그런 이유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들에게 손해가 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위치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뿐 아니라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 이것은 자기들의 모든 행위가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의 불안과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기재와 정 반대의 일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잘못했을때 - 진실로 잘못을 시인하는 것을 보면 놀라운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잘못했으나 상황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할 수없다. 그래서 변명하고,인정하기 싫어하고,마지막에 그것이 인정되었을 때에는, 내 허물이 아니고 다른이 때문에 그랬다고 할때는 추하고 불쌍합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사람들은 다 압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하나님께 미안해하는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회개는 심판이 아니고 축복입니다. 너가 죄를 책임을 지라는 말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죄는 내가 책임져 주겠다는 말입니다. 이 것이 복음입니다.

 

 

(2) 그들의 안전과 인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메시야요,부활하신 분이요,기적을 베푸신 분이라면 자기의 허구성과 위선이 드러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위선과 허구성이 드러날때 자기의 위치가 흔들립니다. 그러면 생활의 문제가 생깁니다. 생존권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주장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 예수님께 집중이 되어있습니다. 살아 나셨고,기적을 일으켰으니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되면 자기들의 신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버림을 받게 되겠지요.

 

이것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고,기득권을 잃게 되는데 반대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진리를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진리는 힘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있으나 그리스도가 내게 힘이되거나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이해관계와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3) 영적인 이유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죄는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빛을 거부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와 직접 싸울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쫒겨 납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리스도와 대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그 사람속에 사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을 택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전도때 그리스도를 전하면 맹목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예수쟁이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촌스러운 사탄입니다. 아주 지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신학자들 속에 들어있는 사탄은 더 악랄합니다. 성경의 이름으로 성경을 거부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합니다.

 

종교전문가들인 제사장과 성전 맡은자들과 사두개인들이 가장 종교적인 이유로,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메시야를 거부하고,십자가에 못박고,부활했음에도,눈에 보이는데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악령의 세계에서 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사도들을 체포하고 구금하게 됩니다.

 

3‘ -- ’ 사람은 육체는 가두지만 영혼은 가두지 못합니다. 물리적인 힘으로 전도를 못하게 가 둘수는 있으나 사도들의 믿음까지 감옥에 가둘수는 없었습니다.

심문하기 위해서 체포했습니다.

 

4‘ -- ’ 3절에 핍박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 핍박은 왔지만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은 무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안에 있으면 어떤 고난도 축복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으면 핍박 받은때 더 힘이 나고,고난을 겪을때 더 성장하게 됩니다.

 

- 남자가 약 5천명. 여자까지 합하면 얼마나 될까? 만명을 넘을 것입니다. 애들까지라면 만5천명은 넘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환경속에서 만명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성장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넘어섰습니다.

 

승천때 12명의 제자가 지켜보았고 - 다락방에서 120- 성령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베드로가 설교하고 3천명이 세례 받았는데 4장에서 남자만 5천명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많이 제한합니다. - 그때 하셨다면 지금도 그런일이 일어납니다. 개인의 삶속에도 사업에도 일어날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입니다. 죽은자도 살리신 분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위대하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5천명으로 성장하게된 비결은 ?

 

(1) 성령 - 전도를 해서가 아닙니다. 조직도 아닙니다(당회,제직회). 그냥 살아있는 몸이고 성령의 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니 그냥 하나님의 사람이 모여 온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성령의 바랍이 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무한대로 사람을 보낼 수 있고, 무한대로 물질을 보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지어다. 성령의 불이 임할 지어다. 성령의 능력이 임할지어다.

 

(2) 말씀 - 4‘ -- ’ 성령만 체험을 한것이 아니라 말씀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말씀은 씨와 같습니다. ,돌밭,가시덤불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옥토에 뿌려진 씨는 30,60,100배의 결실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구원이 있습니다.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말씀이 내 마음밭에 뿌려지기 시작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개인과 가정에 사업에 교회에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자라고 변해야 재미가 있습니다. 생명은 자라는 것입니다. 어찌 멈출 수 있겠습니까? 변하지 않다면 예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현상유지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복음을 가졌는데 왜 자라지 않습니까? - 사람이 문제입니다.

 

복음을 제한해서,막아버려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으려고 발부둥치기 때문에 교회는 성장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개인은 변화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기 원하면,순종하기 원하면,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됨을 믿습니다. 기적은 여러분의 것이 될 수있습니다. 축복은 여러분의 것이 될 수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신 분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말씀을 받으라,죽음도 실패도 두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5-7‘ -- ’ 예수님 당시 처형에 관계했던 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진리를 학살키위해서 모였습니다. 사도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일을 하나?’ 무슨일이냐 고 묻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 21:23의 예수님께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심기가 불편했던 것입니다. 말은 부인할 수 있으나 능력은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권세 - 땅의 권세 - 물질,학문,정치.........

 

하늘의 권세 - 교회가 받은 권세,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하나님의 시민권의 권세.

 

제사장, 관원들 -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았으나 땅의 권세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땅의 수입, 땅의 인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일을 하나? - 내구역인데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러나 하는 말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 그러나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권세에, 땅 뺏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권세를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비극을 줌이 아닙니다. 축복을 줌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영광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축복이 될 것입니다.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들 / 4:1-4

2008-06-11 11:35:30

 

 

2005년 성탄절, 온 세계 사람들이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기뻐하고 있을 때에 인도네시아에 일어난 큰 지진 해일인 쓰나미를 기억하십니까?

18만 여 명 사망하고, 5만 여 명이 실종된 끔찍한 참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신혼여행 중에 많은 사람이 사망 실종 되었습니다.

 

이 참사의 현장에서 10살 난 영국의 소녀가 관광객 100여 명을 구해냈습니다.

틸리 스미스는 학교에서 해일이 덮치기 전에 바닷물이 먼저 조금 빠져 나가고, 잠시 뒤에 큰물이 밀려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2주 뒤에 소녀는 부모님과 함께 푸켓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쓰나미가 덮치는 날, 그 시간에 스미스는 해변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살이 일어나며,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큰 파도가 일렁이는 것입니다.

스미스 소녀는 이것이 학교에서 배운 큰 해일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호텔 직원에게 이야기 하였고, 직원들은 바다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관광객들을 대피시켰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에 거짓말처럼 큰 해일이 몰려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푸켓의 모든 지역에서 쓰나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가 있던 곳에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그 시간에,

스미스 소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큰 소리로 어머니와 호텔 직원들과,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피해야 합니다.”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설마 하던 사람들, 글쎄 했던 사람들은, 피하라는 강권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를 나와 높은 지역으로 소풍을 가듯이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녀의 말대로 강력한 쓰나미가 몰려 왔습니다. 모든 것을 다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소녀 때문에 큰 재난에서 생명은 구했습니다.

 

기꺼이 피한 사람들이나, 마지못해 피한 사람들이나, 생명을 구한 다음에, 스미스 소녀에게 고마워, 고마워!’ 감사하다는 말을 쉬지 않고 하였을 것입니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크게 사례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소녀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2절에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멸망치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처럼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이 외친 말은 복음입니다. 구원의 소식입니다. 생명의 소식입니다.

쓰나미 소녀의 외침을 통하여 큰 재난 가운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외침을 통해서는 영원한 저주와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외침을 듣고

감사합니다. 저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당신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제가 당신 때문에 영생의 길을 찾았습니다.”

말하며 큰 절을 하고, 크게 사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 성전 경비대원, 사두개인은 천국복음에 귀를 막았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싫어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외침이 지옥에 떨어지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멸망에 이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구원과 생명의 길인데도 싫어하였습니다.

 

무관심하게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을 텐데, 얼마나 싫었던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전파하지 못하고, 천국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사도들을 다 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천국복음,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싫어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들을 싫어하고, 복음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를 싫어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첫째, 자신들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돌아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 모든 유대인들에게 제사장은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존경 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백성들 앞에 나타나면 백성들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백성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 등을 바라보면서 경건한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 하나님의 큰 권능을 입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갈릴리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 나사렛 출신인 예수라는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고, 권세도 없는 시골 청년입니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습니다.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습니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골 청년이 자신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구원

,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기에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으로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불경 죄, 참란한 죄입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예수가 자신들의 경건은 경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외식하는 자, 위선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는 독설도 거침없이 품어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서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부유함을 질시하는 서민들은 통쾌함 마저 느끼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젊은이를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가르침을 받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젊은이에게 몰려가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조롱하는 예수를 그냥 놔 둘 수 없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붙잡아 와, 산헤드린이란 공의회에서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로마의 속국인 자신들에게 사람을 죽일 권세가 없기에, 로마 황제가 임명한 유다의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 사형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이리하여 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 등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눈의 가시 같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평상시 많은 능력을 행하던 예수이기에 혹시라도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있을 때에 십자가 위에서 뛰어 내려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숨이 넘어가고, 그 시신이 무덤에 묻힌 것을 확인한 뒤에야, 모두들 안심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예수의 일로 지난 2-3년 동안 머리가 아팠는데 깔끔하게 정리하였기 때문입니다.

눈의 가시 같은 예수를 완전히 제거하습니다.

자신들의 권세를 도적질한 예수를 없앴습니다.

 

 

그런데 정리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소란스러워진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외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 있을 때에 따르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 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주변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어느 날 몇 명의 측근을 제외하고는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모두 흩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무덤에 묻고,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하였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생명의 주라고 외치며 모인 것입니다.

예전엔 모였다 흩어졌는데,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모이는 인원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행각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를 따라는 무리들입니다.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큰 무리가 된 것입니다.

 

 

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지금까지의 많은 것을 듣고 보아왔다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의 가르침이 진리인지?

예수의 행하는 능력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예수의 말대로 예수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인지?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부활의 주, 생명의 주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진실인지?

 

들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에 대하여 들으려 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고,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더욱 많아져 자신들이 믿는 유대 종교가 위협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은 구원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영생의 길이지만 영원한 것,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치려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잡아들이고, 복음이 더 이상 전파되지 못하도록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의 일입니다.

바울은 두란노라 이름 하는 학교를 빌려서 매일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점쟁이, 박수, 무당까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깨닫고는 점치는 책과 도구들을 다 불살랐는데 그 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지고, 말씀이 흥왕할 때에 큰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허다한 무리들이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 신이여, 아데미 신은 위대하도다.” 외치며 몇 시간 동안이나 시위를 한 것입니다.

에베소의 관리가 나와서 무리를 진정시키지 않았으면 사도 바울이 큰 해를 입을 번하였습니다.

 

이 소요는 아데미 상을 만들어 파는 데메드리오란 사람이 일으킨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은 달 신을 다이아나(Diana)라고 불렀고, 그리이스 사람들은 아데미, 아르테미스(Artemis)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데미는 제우스의 딸이며, 태양신이 아폴론(Apollon)의 쌍둥이 자매로 나옵니다.

낮은 태양신인 아폴론이 다스리고, 밤에는 달신이 아데미가 다스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이스 최고의 도시 아테네에는 태양신 아폴론 신전이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을 아폴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을 달 신인 아데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을 크게 건설하였습니다.

아데미는 18개의 가슴을 가지고 있으며, 생산과 풍요의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데미를 섬기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상을 만들어 파는 데메드리오는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매상이 줄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데미 우상이 예전처럼 많이 팔리지 않고, 재고가 쌓여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건너왔다는 유대인인 바울이라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이며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결코 사람들에게 복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자 집안에 잘 모셔 두었던 아데미 상을 밖으로 던져 버리더니 발로 짓밟는 것입니다.

집에 있는 아데미 상도 버려지는 판인데, 만들어 놓은 것이 팔려 나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월급을 받지 못한 공장의 직원들과 우상을 만들어 파는 다른 동업자들과 함께 에베소의 아데미 신이여, 에베소는 아데미 신전을 지키는 자인데, 우리가 아데미 신을 소홀하게 대하였도다. 위대한 아데미 신이여!” 외치며 에베소 거리를 활보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 공연장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모였는지.”를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가 있나? 심심하던 차에? 왜들 몰려다녀? 어디 한번 가볼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인 것입니다.

 

 

에베소의 소요는 돈벌이가 안 되자는 우상장사가

바울 때문에, 예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교회 때문이라고

바울을 싫어하여, 예수를 싫어하여, 복음과 교회를 싫어하여 일으킨 소요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는 첫째 이유는,

구원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지만 듣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 때문에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교회 때문에 어떠한 손해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구원 받는 일인데

썩어질 세상의 것이 좋아서,

잠시 즐겁게 하는 세상의 재물이 좋아서

잠시 우쭐 할 수 있는 명예가 좋아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거룩한 것과 신령한 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천국 복음을 듣지 않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천국 복음을 싫어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에게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서 먹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예배하며 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처럼 예배를 받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섬김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악한 영, 사단의 거짓된 꼬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처럼 살라고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헬라어는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로 과녁을 빗나가다는 뜻입니다.

과녁의 중앙에 들어가야 하는 화살이 엉뚱한 다른 곳에 꽂인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 설명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죄의 한자어는 그물 망()과 아닐 비()로 되어 있습니다.

악한 영, 사단의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악한 영, 사단의 그물에 걸려, 사단이 시키는 대로 창조주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아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이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 전도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진시황은 불노초를 구하여, 에집트의 파라오는 피라미드를 지으며 그렇게도 들어가기를 원하는 영원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 천국은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 있는 자는 결단코 의의 나라, 생명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셔서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지옥의 길, 멸망의 길이 아니라, 영생의 길,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외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 말씀처럼 듣기 싫어합니다. 복음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교회를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 사단의 그물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 사단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는 것처럼 마음의 밭에 심겨지지 못하게 하고, 싹이 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

- 우리들은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하고 구원 받지 못하게 하고 있는 악한 영, 사단과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 5: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처럼 악한 영, 사단은 믿는 우리도 넘어뜨리려 합니다. 삼키려고 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합니다. 영생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사망의 길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사단은

초대교회 때에 역사하여 사람들로 복음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게 하였고

오늘날 까지 역사하여 왔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역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길은 길이 좁고 험하여 걷기가 힘이 들어 걷는 자들이 적으며,

넓은 길은 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걷는다.

좁은 길은 구원에 이르고, 넓은 길은 사망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2:37 이하에 베드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성령 하나님께 붙잡혀 사는 삶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종이 되어 충성하고, 순종하여,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종으로 사는 삶이라, 자신을 부인하여야 하고, 주님께서 주신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이고, 구원의 길이고,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여, 듣지 않고,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

둘째, 악한 영, 사단에 매여, 죄 아래 사는 삶입니다.

죄에 붙잡혀서 죄가 시키는 죄가 이끄는 대로 삽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 것 같고, 자유롭고, 거침이 없고, 육체의 쾌락이 있지만,

그러나 사망의 길이고, 심판의 길이고,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8:5-6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교우 여러분!

영을 좇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해야’ ‘이 밤을 다시 한 번’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눈 오는 밤1980년대 록과 발라드 가수인 조하문이 부른 노래입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조하문은 잘 나가던 가수였습니다. 발표하는 음반은 연이어 히트를 쳤고, 영화관 사업에도 손을 댔는데 사업이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하고 있을 때에 어느덧 술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오를 곳 없는 내리막길이란 불안감과 정신적 방황이 계속되면서, 음식은 못 먹으면서도 술과 담배로 하루하루를 이어갔습니다.

건강은 악화 되었고 우울증, 불면증, 자살충동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한 집사님이 권해 준 요한복음을 펼쳤는데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14:27의 말씀을 읽게 되었는데, 갑자기 이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으로 출세로, 술과 담배로, 쾌락으로 평안을 찾으려 하였지만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때에, 하나님의 평안은 참 평안이라고 머리를 치는 것입니다.

19979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 충격 같은 전율을 느낀 뒤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나니, 그의 가족은 물론, 주변의 화초까지 새롭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초조해하던 얼굴엔 웃음이 번져갔습니다.

늘 얼굴을 가리던 모자와 선글라스도 벗어 던졌습니다.

평안을 얻고나니 체중도 석 달 새 20kg 가까이 늘었고, 심지어 신발사이즈도 커졌습니다.

그는 1999년 아세아연합신학대 국제대학원에 진학했고, 2003년 캐나다로 이주했고.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일했고, 중증장애인 공동체인 파티시페이션 하우스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조하문은 2002년 목사 안수를 받고 토론토비전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조하문 목사님께서는 변화된 과정을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란 책으로 펴냈습니다.

 

 

악한 영, 사단의 그물 아래서, 세상의 속해 살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습니다. 죄 아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 안에, 은혜 안에 살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신령한 것을 심는 영의 삶,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가득한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많으니 /4:1-4

2012-12-31 13:28:31

 

1969, 헌터 아담스는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자살 미수로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아버지를 잃고 세상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정신병원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눈 앞에서 손가락 네개를 펼쳐보이며 그것이 몇 개냐 묻는다.

사람들은 모두 네 개라고 말하지만 그는 답이 여덟 개라고 말하면서 비웃는다.

사람들은 모두 그 노인이 가리켜 미쳤다 하고, 그 노인은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 말한다.

그가 유명한 사업가 아서 멘델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헌터는 아서를 찾아가게 된다.

 

그날 밤 헌터는 아서에게서 손가락 문제의 진정한 답을 알게 된다.

아서는 헌터의 눈 앞에서 손가락 네 개를 펼쳐보이며,

자신의 손가락이 아닌 문제 너머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라고 했다.

헌터가 시키는 대로 초점을 손가락이 아닌 아서에게 맞추자

손가락은 네 개가 아닌 여덟 개로 보이게 되고, 헌터는 하나의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과 함께 방을 쓰던 루디의 병을 고쳐주게 된다.

루디는 다람쥐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해 다람쥐의 환상을 보면서 툭하면 공포에 질렸다.

헌터는 루디를 미친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루디의 환상 속 다람쥐와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멋진 작전을 통해서 루디를 도와준 헌터는 거기서 삶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해서 헌터는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정신병원에서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패치(PATCH)'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2년 후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한 괴짜 의대생 패치는

3학년이 되어서야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빛나는 아이디어와 장난기로 환자들을 따뜻하게 치유하려고 환자들을 몰래 만난다.

이 사실을 안 학교측이 몇 번의 경고 조치를 내리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산 위의 허름한 집을 개조하여 친구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운다.

 

그후 권의적인 윌컷 학과장은 패치에게 퇴학처분을 내리자, 주립의학협회에 제소한다.

위원회는 학칙을 어겼지만, 그의 열정과 학업 성적을 인정, 마침내, 졸업을 하게 된다.

그 후 12년간 패치는 의료 행위를 계속했고, 15천명의 환자를 무료 치료했다.

패치는 버지니아 서부에 105 평방미터의 땅을 구입, 게준트하이트 병원을 건설했다.

1천여 명에 이르는 의사들이 그와 합류하기 위해 대기했다고 한다.

 

나는 이 대사가 마음에 닫는다.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해결책을 볼 수 없어.”

절대로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나를 봐!” “손가락을 지나서 나를 봐.”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많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문제를 보면 해결책이 없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문제와 어려움, 고난은 늘 존재한다.

그럴 때 문제를 넘어 영광을 바라보고, 축복을 바라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영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고난이 뒤따른다. 댓가를 치루지 않고 오는 축복은 없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 고난은 필수적이다.

일이 순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이고, 어려우면 큰 문제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어찌하든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

 

오늘 말씀을 보자. 제자들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다.

그 광경을 보고 모인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셨다 설교했다.

그때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 사두개인들이 와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하는가?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길에 고난이 더 많다.”

 

사단은 종교지도자들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사단은 종교지도자들을 통해 제자들과 교회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사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도들과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위협하면 걱정에 휩싸여 낙심하고 절망하다 패배자가 되게 만들려는 것이다.

 

못된 악마가 거리에 노점상을 차리고, 이상하게 생긴 물건에 가장 비싼 가격표를 붙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궁금해서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물었다. 악마가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진 것중 가장 강력한 도구지. 바로 낙심이라네.

난 이걸 사용해, 인간들이 마침내 절망에 빠질 때까지 끈기 있게 일한다네.

절망에 한번 빠지면 그걸로 그만이야. 인간들은 내 노예로 전락하고 말거든

마귀가 좋아하는 낙심, 절망에 빠지면 사단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문제와 고난, 핍박, 환난을 바라보지 않고 문제 너머를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단의 도구에 속지 말아야 한다.

내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붙들면 사단은 결국 두 손을 들게 된다.

사단이 두 손을 들때까지 내 인생에 다가오는 어려움 너머의 축복을 바라봐야 한다.

반대로 내가 포기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면 사단은 박수를 치며 계속 힘들게 만든다.

 

무엇보다 사단이 강력하게 역사할 때는 복음이 능력있게 전파될 때이다.

지옥문이 공격당함으로 영적 죄수들이 풀려나고 있을 때 사단은 심하게 대항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예수 죽인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단이 종교지도자들을 동원하여 즉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인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여 위협하기만 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혹시 베드로가 몇 달전에 대제사장의 집에서 잡힌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약간의 위협과 겁만 주어도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들였음에도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엄청난 수가 믿었다.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4:3~4)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을 때 베드로의 설교에 회심한 사람은 3천명이었다.

그런데 앉은뱅이를 고쳐준 후에 베드로의 설교에 회심한 사람은 남자만 5천명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5~10만명 정도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일이다.

 

성경에 남자 5천명에 대한 이야기가 더 나오는데 바로 오병이어 기적이다.

말씀 들으러 따라온 무리들을 그냥 보내면 가다가 쓰러질 것 같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고 하셨다.

제자들이 답답하여 먹을 것을 찾아보니 소년이 가진 빵5개와 두 마리 고기 뿐이었다.

예수님은 그 빵과 물고기를 들어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눠주라 하셨다.

 

남자만 5천명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 광주리를 남겼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남자만 5천명의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주님의 예언이 드디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몇 명의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나 혼자 먹고 살기에 급급한 인생이 아니라 제자들처럼 5천명도 먹이길 축복한다.

 

어제 000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했는데 큰 감동을 받은 것이 있다.

매달 후원하는 아프리카의 어린이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전에 두 명의 어린이를 후원했는데, 지금은 한 명만 후원한다며 안타까워 했다.

우리 교회가 현재 1(일홈존)의 어린이를 후원한다. 내년에는 2명으로 늘리고 싶다.

가능하면 우리 교회 모든 가정이 1명의 어린이를 후원하는 일에 동참하면 좋겠다.

처음부터 수천명을 먹일 수 없다. 한 명부터 내가 살리고 도와줄 수 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12명의 제자를 양육하는 리더가 된다면 수십, 수백명도 먹이게 된다.

 

베드로와 요한은 감옥에 갇혔지만 말씀을 들은 사람중에 남자만 5천명이 회심했다.

사단이 제자들을 핍박하고 위협해도 제자들이 선포하는 말씀의 능력이 더 강력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이기게 하는 힘은 말씀의 능력이다.

4절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았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도 말씀을 들으니 믿음이 생겼다.

말씀을 듣다보면 사람은 달라지게 되어 있다.

 

일반 학문과 기독교 교육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일반 학문은 기초가 중요하다. 기초가 없으면 아무리 공부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반면에 기독교교육은 전혀 몰라도 말씀 한 마디에, 한 순간에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보며 답답하게 생각할 게 없다.

한 순간에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마치 예수믿고 거듭나는 것이 단번이듯이!

때론 답답해도 하나님 말씀을 듣다 보면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있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밥으로 채워야 배부른 밥통이 있듯이 인간의 영혼에는 하나님통이 있다.

 

지난 주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았다.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른다.

G-12의 창시자인 세자르는 십대 때에 마약을 복용하고 세상에서 인생의 해답을 구했다.

1972년 대학교 학생 때, 계속 기독교 신앙을 공격한 철학 교수에 대해 무척 화가 났다.

그 교수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누구든지 자기가 잘못된 것을 입증해 보라고 말했다.

 

비록 그 당시에는 신자가 아니었을지라도 세자르는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무신론적 교수를 사용하셔서 성경을 연구하도록 감동하셨다.

세자르가 창세기를 읽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온 방을 밝은 빛으로 채워 주셨다.

그러자 세자르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시켰다.

그리스도께서 세자르를 변화시켜 그를 마약과 술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성령께서 빈곳을 채워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게 만드셨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열정으로 콜롬비아 거리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자도 변화시키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강력하게 변화시킨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힘써 봐라.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 곁에서 친구처럼 나를 인도해 가신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적어도 1년에 1번씩 성경을 통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에 불과하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은 관계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인 것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자주 질문해 봐야 한다.

 

초대교회의 성장비결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성령이다.

성령의 바람이 불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고 성령에 이끌렸다.

내 신앙이 밋밋하고 미지근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으면 뻑뻑하고 잡음이 나듯이 내 힘으로 살려 하면 그렇다.

계속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한다.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소서.”

성령님. 환영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채워주소서.”

 

우리의 신앙은 늘 2000년전에 세워졌던 최초의 교회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믿는 우리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축복을 봐야한다.

환경을 통해 나를 낙심케 하고, 포기하게 하려는 사단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사단이 나 때문에 박수치며 웃게 만들지 말고 사단을 긴장시키도록 주님을 의지하자.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혔는데도 5천명이 구원받듯이, 말씀의 능력이 승리한다.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승리한다. 말씀을 붙들어야 사단이 벌벌떤다.

말씀을 들으면 어떤 사람도 한 순간에 변화될 수 있다.

말씀을 깨달으려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한다.

나의 삶에, 나의 가정에, 자녀들 위에, 부부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이 넘치도록 하면 변화의 바람은 강력하게 불어올 줄 믿는다.

 

 

 

세상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 /4:1-12/ 오주철 목사

2022-09-11 03:57:08

 

복음은 말 그대로 ‘Good News’, ‘좋은 소식입니다. 창문도 없고 출구도 없고 통풍도 전혀 되지 않는 공간에 갇혀 숨도 거의 쉬지 못하는 상태에 갇혀 있는 인생들에게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죄 가운데 인생의 수렁과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져내어 맑고 시원한 물에 깨끗이 씻겨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즉시로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향해 이런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들은 스스로 알아서 구원의 길을 찾아가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죄의 오염으로 질식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의 길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다가와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은 다른 누구를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인간이면서도 완벽하게 죄가 없는 분이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있습니다. 탕자를 위한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복음, 다시 살아나게 하는 복음, 다시 새로워지게 하는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숨 막힐 듯한 뜨겁고 건조한 열기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던 사람에게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살려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며, 그들이 바라볼 영원한 산 소망을 주는 복음이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이 위대한 복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믿는 순간 그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처럼 위대하고 복된 복음을 거부합니다. 단순히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 앞에 대적하기도 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삶도 무서워하고 죽음도 무서워하고, 죽음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세계도 무서워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복음을 조롱하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앙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부터 인간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거나 그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때가 찼을 때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불신앙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였던 경악할만한 행동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거부와 박해는 예수님에게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예수님께 했던 끔찍한 행동들을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에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행동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했는데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살 수 있는 복된 메시지라는 생각도 사실은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언제나 복음을 미워하며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잘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전쟁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지난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렀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구 곳곳에는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는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으킨 참혹한 전쟁의 실상들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곤경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지도자들이 문명을 끝장내 버릴 수 있는 힘과 권력을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비극의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류의 여러 복잡한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면 나라와 나라들 사이의 전쟁은 그칠 것이며, 모든 분쟁과 미움과 싸움도 사라질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여호와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이 땅에는 전쟁이 없는 완벽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복음 앞에 전투적으로 반발하고 있으며, 이 복음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현대의 특징이라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앙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어느 날 기도하기 위해 성전 미문으로 올라갔다가 태어날 때부터 걷지를 못했던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됩니다. 이 사람은 매일 친구와 친척들에게 업혀 와서 미문 앞 길바닥에 앉아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그는 불쌍한 거지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은 그런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길바닥에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도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두 사람을 본 이 사람은 여느 사람에게 하듯이 구걸을 했는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베드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 사람을 향해 우리를 보라고 하더니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말을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성경은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엄청나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원래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군중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군중들은 평소에 늘 보던 거지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보고, 심히 놀란 표정으로 그 일을 행한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건의 속편을 보게 됩니다. 보십시오. 태어나서 40년 동안 걷지를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어다니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누군가가 가공해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짜 뉴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사건입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의 주인공이 지금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이 사건으로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베드로는 이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방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향해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라고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장과 사두개인들과 성전 맡은 자들은 기적도 보았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가 재판에 회부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들이 두 사도에게 어떤 짓을 했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또 사도들은 어떤 대답을 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이 마치 그 자리에 앉아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직접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편에는 사도들이 있고, 또 한편에는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가 재판에 회부해서 함부로 다루고 있는 관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통해 관원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 일은 왜 일어났습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왜 이렇게 반응했습니까? 왜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복음을 거부할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깊이 집중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첨단 과학기술 문명을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 중에는 기독교가 오늘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앙은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1세기 예루살렘의 사람들도 똑같은 불신앙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말도 믿지 않겠다고 거부했고, 예수님도 믿지 않겠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역사는 복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역사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큰 세력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의 본문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은 당시 유대 최고 법정에 해당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사도들을 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사실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극심하게 분열된 채 서로를 적대시했습니다. 더구나 사두개인과 장로와 서기관들의 반목은 특히 더 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먼저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자기 직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반열로 나뉘어 있었고, 반열 별로 6개월에 한 번씩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일주일 동안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전 맡은 자는 레위 족속 중에서도 특별히 성전 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 역할을 맡은 무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로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사두개인은 일종의 제사장 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는 정치인들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호가 호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책략과 음모에 능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실 정치인들은 시대가 지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종교적인 행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종교에 아무 관심도 없었으며, 본질적으로 냉담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두개인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과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몸의 부활을 거부했으며, 사람이 장차 받을 상급이나 형벌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천사를 비롯해서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유물론자들로서 삶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뿐이라고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두개인들은 본질적으로 세속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들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본문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여기에서 관리들은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6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이 나옵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주도적으로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제사장이라는 것 외에 알려진 정보가 없는 요한과 알렉산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사두개인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바리새인들로서 구전 율법과 조상들의 가르침에 정통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과 천사와 심판과 상급과 형벌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율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에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탄압하는 일에 뜻을 같이 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도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불과 얼마 전에 예수님을 제거하는 일에도 똑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미워하는 사이였지만, 예수님을 제거하는 악한 일에는 즉시 하나가 되어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옛날 그대로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아담 이후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인이나 미개인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불신앙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한 배를 타고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무리들입니다. 공통점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거부하고 사도들과 교회를 박해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불신앙 그 자체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연합시키는 방식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된 21세기의 현대인들이 반대하는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1세기의 사람들이 반대했던 바로 그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복음과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더욱 강하고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들을 향한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말에 담긴 경멸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본문에서 너희가너희와 같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너희와 같은 자들이.” 이 말에 담긴 저들의 빈정거림과 경멸감이 느껴지십니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이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말인가? 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너희의 말을 들으러 왔다는 말인가? 너희가 대체 뭔데?”

 

그들의 말에는 경멸감과 빈정거림과 도발과 조롱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배경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결코 평범하지 않은 놀라운 사건이 그들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평생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여기에 있는 두 사람이 주도한 것이 분명한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오순절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주 놀라운 설교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3천명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들의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에 대해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를 들어보십시오.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산헤드린 공회에 모였던 권력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켜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율법을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이다.”

 

사도들에 대해 갖고 있던 저들의 선입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미천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무식하고 평범하고 하찮은 촌놈이었습니다.

 

물론 3년 동안 나사렛 예수를 따라 다녔으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지도자였던 나사렛 예수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습니까? 그도 또한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가말리엘 수하에서 배웠던 바울처럼 랍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정규적인 랍비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성경은 관원들이 베드로의 설교에서 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일종의 권위를 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는 법입니다. 설교자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 말에 권위가 있음을 알고, 그 말의 사실성과 능력과 힘을 느낍니다.

 

본문에 나오는 관원들도 확실히 그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관원들은 변론 중에 무식하다고 생각했던 베드로가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고, 그 외에도 전혀 막힘이 없이 율법에 대해 박식한 사실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무엇이 배우지 못한 이 무식한 자들로 하여금 이런 설교를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이들은 어디에서 이처럼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까?” 그렇지만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첫 설교에서 3천명이 회심하고 교회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당시는 설교를 한 후에 영접할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라고 초청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저 3천명이 실제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났고, 모두에게 그 일이 알려졌을 뿐입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었고,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으며,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박해가 일어났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기독교 메시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도 3천 명이 회심하고 교회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모였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그런데 회심자들이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심자들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120여 명이었던 성도가 이제 성인 남자들만 5천 명이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당국자들도 도대체 무엇이 배우지 못한 이 무식한 자들로 하여금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말을 할 수 있게 했을까?”라고 한 번쯤은 물어 볼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보였던 반응은 옥에 가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관원들은 자신들이 기적을 목격하고, 예루살렘을 진동시킬 만큼 엄청난 사람들이 교회로 합류하는 현실에 대해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적이 명백한 사실이었던 만큼 자신들도 외면하려고 해야 외면할 수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더구나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실 그들은 꼬투리만 잡을 수 있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장본인이 그들 앞에 꼿꼿이 서 있었습니다. 명백한 증거, 명백한 사실이 그들의 눈앞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감옥에 가둔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을 없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은 사실을 직면하지 않습니다. 불신앙은 오히려 사실을 철저하게 무시해 버립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불쾌하게 여긴 것은 바로 베드로의 설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도 거부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위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참여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성전 맡은 자, 제사장, 장로들은 사회 최상층 지도자들로서 일반 대중들이 늘 올려다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칭 사도라는 두 사람의 존재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선생으로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전반적인 지위와 권위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부활이 없다고 늘 말해 왔는데,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설교를 듣게 되었을 때 사두개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바로 여기에서 격한 감정이 개입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여러분은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심리상태를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불신앙에 항상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불신앙은 아주 옹졸하며 아주 편협합니다. 불신앙은 영광스러운 기적 자체는 보지도 못한 채, 그 지적을 행한 주체의 권위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불신앙은 위대한 사실에는 관심이 없고 자격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놓쳐버립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과학이 우주를 완전하게 설명해 주며, 만물은 과학이 규정한 범위와 한계 안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복음이 침입해서 그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기적과 동정녀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이야기합니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심판과 영원한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조롱과 거부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복음이 자신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느낀 감정이었고, 오늘의 현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멸시하던 복음이 실상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대한 로마제국 안에서 그리스와 그리스 철학에 배척당하고 로마와 유대인들에게도 배척당하던 한줌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한줌의 무리들을 변화시켜 로마제국을 뒤엎고 세계를 살리는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성도들로 인하여 이 땅은 복음의 깃발을 더 높이 휘날릴 것이며, 이 땅을 살리는 주도적인 세력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가 재판에 회부했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과 군중들은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죄도 없으신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고발당할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권력자들과 군중들은 증거를 날조하고 고발거리를 꾸며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마저도 거짓임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해서 갈보리라는 작은 언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방식으로 나무에 달려 극심한 괴로움과 고통 속에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 버렸다면 앉은뱅이는 여전히 미문 옆 길바닥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을 것이고, 베드로도 그런 설교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망의 줄을 끊어버리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없었다면 사도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교회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고,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기적은 일어났고, 사도들은 성령과 능력으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온 인류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복된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복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진홍같이 붉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시키시고,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죄 가운데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때가 되었을 때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증언했던 설교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거부했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대인들도 1세기 당시의 사람들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세상의 비극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로맨스에는 흥미를 느끼고, 소설이나 영화는 쉽게 믿으며, 삶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판타지에는 흥분하면서도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은 거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인 마귀와 죄와 악을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맨 나중 원수인 죽음까지 정복하시고 이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사람들이나 오늘의 사람들은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군중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착한 일 밖에 한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혜택을 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사람들의 고통과 곤란을 덜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과 동정심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목 박히셨습니다. 착한 일이 문제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히고 재판에 회부된 것도 태어날 때부터 걷지를 못했던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 일 때문이었습니다. 착한 일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고 탁한 공기 속에서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신선한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어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용서와 양심의 평화, 마음의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새 생명, 새 능력,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이 주저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앉은뱅이처럼 그렇게 주저앉아서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 앉은뱅이처럼 벌떡 일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똑똑한 체하며 복음과 이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을 외면하면 할수록 세상은 부도덕과 죄악과 부정직함으로 점점 더 치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십시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때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처럼 세상 사람들이 두 손을 들어서 환영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당연히 복음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순교를 당하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저들을 살리고, 이 땅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착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통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위해 이 놀라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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