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장 1절 - 11절 설교 모음
왕이 오셔야 합니다 / 막11:1-10/ 이동원목사
2014-12-02 14:41:22
옛날 독일, 현재 독일은 프러시 아 제국이라고 불리워졌죠? 프러시 아 제국의 프레드릭이라는 대왕이 어느날 시골길을 행차 하셨습니다. 왕의 행차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한 노인이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경 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 이 먼저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고 합 니다. 자기를 몰라보는 이 노인이 궁금해서 노인은 도대체 누구시요? 노인은 도대체 누구시요 하고 질문 을 던졌습니다.
노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왕이요.그런단 말이죠. 나는 왕이요, 그래서 어느 나라 왕이시 요?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기를 나 는 나 자신의 왕국의 왕이요. 나는 나 자신의 왕국의 왕이요.
그때서야 알아차림 대왕이 빙그레 웃으며 다 시 질문하기를 그래 나라살림은 잘 되시는지요? 그래서 노인이 대답하 기를 그것이 문제요. 이때 대왕께서 또 말하기를 노인장이나 나나 꼭 같 은 문제를 가지고 계시는군요.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는 로마 에서부터 임명 받은 팔레스타인의 소위 분봉왕이라고 일컬어지던 헤 롯 대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소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일 때는 헤롯 필립1세가 그 땅 을 통치하고 있었고 또 그 당시 로 마에는 매우 강력하고 현명한 군주 였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강력한 통치자들 의 통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 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민중들은 아 직도 새로운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 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아 는 왕과 같은 자로 오시리라고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 였 습니다. 구약 예레미야 23장5절에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 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 이 되어 잘 들어 보십시오,
그가 왕 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 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 이 렇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그들을 통치하 는 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운 왕, 그들에게 진실로 공평과 정 의를 약속할 수 있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예루살 렘 성에 입성하시던 그날 이른 아침 부터 예루살렘 성에는 커다란 흥분 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 면 이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 때문 이었을 것입니다. 이 기대는 결코 잘 못된 것은 아니 였습니다.
마태 복음 21장4절과 5절에 보시면 똑 같 은 오늘 본문의 기사가 마태복음에 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인 것 을 말하면서 보라 네 왕이 네게 임 한다라고 선포되고 있습니다.
평화 와 그리고 진정한 의를 약속할 수 있는 왕에 대한 기대 이 기대는 바 람직한 기대였고 이것은 오늘 우리 도 그런 기대를 안고 살아야 할 것 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세상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또 우리의 살림살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지도자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 늘 도정을 맡으신 지사님도 여기 앉 아 계시지 만은 이러한 지도자의 존 재는 매우 소중한 것이고 성경은 언 제나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 를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는 한번도 무정부적인 그러한 주의를 지지하거 나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또 다른 왕을 약 속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통치자와 는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들 이 외면적인 살림살이를 다스리는 왕이라면 성경에 약속된 왕은 우리 의 내면까지,
우리의 존재를 다스릴 수 있는 왕, 그것은 일시적인 통치 자가 아니라 영원한 통치자, 부분적 인 통치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운명 을 바꿀 수 있는 통치자로써의 왕, 즉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있 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정말 뒤 바뀌고 그리고 개인의 삶이 정말 하 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되고 또 우리의 역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안목 그리 고 사람들이 예수의 권위 앞에 굴복 하고 그리고 그분을 왕 중의 왕으로 King of Kings,
그리고 내 내면과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왕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때 개인 도 바뀌고 사회도 바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의 삶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나라 로 바뀌고 내 개인의 삶도 그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내게 왕으로 오 시는 그분을 왕으로 영접할 수가 있 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질문의 대답 을 찾기 위해서 이천년 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맞이했으며 또 어떤 태 도로 맞이 했어야 했었는 가를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게 오셔야 할 왕, 이리 민족 가운데 오셔야 할 왕, 그분을 어떻게 영접하고 맞이해 야만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왕의 계획을 신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이신 그 분 의 계획 계획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 게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자, 예수 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우리가 성 경 속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 은 우연한 행진의 한 결과가 아니라 이것은 계획된 하늘의 섭리의 행진 이 였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예 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다라 고 말합니다.
옛날 구약의 유월절에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었던 어린양과 같은 존 재로 그는 세상의 죄를 구속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더라고 약속 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루살렘에 입성 하신 때가 정확하게 유월절을 앞둔 엿새 전에 그 분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다 시 말하면 하나님의 때를 Gods timing, 그 하나님의 타이밍을 그때 를 기다렸다가 정확한 그 때에 예수 께서는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던 것 입니다.
입성하시기 위해서 그는 먼 저 감람산 쪽의 산을 오르십니다. 이 산 마루에는 두개의 마을이 있었 는데 하나는 벳바게, 또 하나는 베 다니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 에 들어서면 감람산의 등선에서 불 과 100m 떨어진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 다.
자, 거기에 오르신 예수님은 이 제 한 마리의 나귀를 찾고 계십니 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희 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 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왜 하필이면 여기서 나귀 새끼가 등장 했을까요?
이것은 구약 예언 즉, 하 나님의 계획의 성취였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520년 전 구 약성경의 스가랴서 9장9절에 보면 예수님의 이 사건이 있기 520년 전 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시 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찌어다. 예 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 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 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 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 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바로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 고 그 분이 타셔야 할 나귀가 정확 하게 어디 있었는지 예수님은 알고 계셨어요.이 간단한 에피소드속에서 그의 범상한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맞 은 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면 아 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 가 있을 것이다.
그분은 이 모든 것 을 계획하셨고 알고 있었습니다. 자, 3절에 보시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그러니까 나귀 끌고 오너라 하나깐,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면 어떻게 해 요? 그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가 쓰시겠다고 하라 바로 그 분 자 신이 나귀의 주인 그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한가롭게 놀고 있었던 나귀한 마리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 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나귀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그는 인 생의 주인,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 과 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인 그리 고 심판의 주인이십니다. 주가 쓰시 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4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 에 매여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 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 느냐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말대 로 하매 뭐라 그랬을까요?
주가 쓰 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이라니 누 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분이 메시아 요 약속된 메시아요 그 주인이 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것은 하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인 것 임을 주목해 보십시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귀 한 마리를 쓰실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이라면 그분이 만물 의 영장인 여러분과 저를 향한 계획 이 없겠어요?
우리의 삶이 하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 지는 보람찬 인생을 살려면 내 인생 속에 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쩌 다가 인생의 길을 가게 된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다니다 가 오늘 이런 인생의 길에서 서있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 은 놀라운 계획을 갖고 오늘 이 땅 에 나를 보내셨고 나는 여기서 살고 있다.
인생의 성패는 단순히 세속적 인 어떤 성공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는 그 정도의 인생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 지고 있었던 계획, 그 계획 속에서 오늘 하루하루의 삶이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 다.
왕 되신 하나님 내 인생에 왕이 라고 선포하신 하나님 그 분의 의도 대로 내 인생이 쓰여지고 그리고 내 삶이 다하는 날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그 중요한 첫번째 Step은 예수를 왕으로 믿으시기 바 랍니다.
그리고 그 왕은 나를 향해 서 Plan을 갖고 계시다! 놀라운 계 획을 갖고 있다! 내가 온 것은 내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 히 얻게 하려함이니라
그 분은 내 삶이 허무와 갈등에 가득찬 고뇌에 찬 인생을 허우적거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왕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바뀌고 새로워지는 첫번째 step인 것입니다.
둘째는 왕의 구원을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왕의 계획을 믿으시고 둘째론 그 왕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구원, 그 구원의 뜻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분별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이 예 루살렘 성을 향해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 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종 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 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놓기 시 작했습니다. 이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이였습니다
. 그를 왕 으로 기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자, 본문의 9절 마가복음 11장 9절을 다 시 다같이 읽겠습니다.
11장 9절 시 작,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 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 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아마 도 이 찬송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들의 입술에서 먼저 순수한 아이들에 입에서 이 찬송이 터졌을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히브리말로는 이것을 호시안나! 호 시안나! 한번 해 보십시다 호시안 나! 원어 그대로 말하면 호시안나! 뜻은 구하옵나니 기도하옵나니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영어로 Safe us now! 바로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 십시요. 이것이 바로 호시안나라는 단어의 뜻이 였습니다.
우리는 이 찬양 속에서 이 말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에 대한 메시아로서의 기대 그 구원에 대한 기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들은 구원을 기대했고 그리고 그 들이 구원을 기대한 것 그것은 당연 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입 니다.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그 들이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구원에는 다소간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 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제공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구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에게 걸었던 메 시아로서의 기대는 영적인 메시아 보다도 다분히 정치적 메시야였습니 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 었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아는 로마 정권을 때려부수고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인 자 유, 이것은 정치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 다.
그것을 기대한 그 자체를 우리 는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걸어야 할 기대는 단순한 정치적인 자유 이상의 것 이 였습니다.
사실 예수가 붙잡히고 체 포되고 십자가로 갔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 로 높이기 시작했을 때 그 당시에 그 땅에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사람 들은 정치적인 갈등을 느끼고 예수 에게서 정치적인 라이벌 의식을 느 끼고 있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저 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우리의 입지 는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분은 체포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왔던 나사렛 예수 그러나 그 예 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런 유명한 말 씀을 남기십니다.
염려마시요. 내 나 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 니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나 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관련 이 없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의 나라는 세속적인 나라 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휠씬 더 중 요한 나라입니다.
휠씬 더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나라입니다. 즉, 살림의 외부, 표면적인 것만을 다스 리는 그 분이 아니라 그 분은 인간 의 존재의 내면을 통치하는 왕입니 다. 왕들의 마음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왕 그래서 그분은 왕 중의 왕 King of kings.
그 분은 어떤 정치 나 경제나 외적인 상황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깊숙한 것 우리의 의 식,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내 좌절과, 내 부조리와, 내 절망을 아시고 내 마음 속 깊은 곳 으로부터 나를 바꾸어 주실수가 있 는 분.
인간의 내면의 깊은 것으로 시작해서 이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 람들의 삶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왕. 그래서 온 세계의 모든 나라들 속에서 높임과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왕. 왕 중의 왕.
내 나라는 이 세상 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 도 예수님의 말의 뜻을 빌라도나 그 당시의 사람들, 민중들이 얼마나 이 해했는지는 질문일 수 밖에 없습니 다.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그 분이 오시면 당장에 로마를 박살 낼 것을 기대했을 것입 니다. 만약 그러한 정치적인 메사야 로 오셨다면 그 분은 탱크와 군마를 거느리고 타고 당당하게 이성에 입 성해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 수님이 입성하시는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종의 코미디예요. 코 미디. 나귀 타고 들어오시는 모습 Ducky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조 차도 그들이 일상생활에 쓰면서도 그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동물 이 나귀였습니다
그것은 나귀 중에 서도 건장한 나귀가 아니라 뭐예요? 나귀 새끼, 새끼 나귀. 이 새끼 한 마리, 나귀 타고 터덜 터덜 들어오 시는 예수상을 한 번 연상해 보십시 오. 그것은 코미디 중에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 주엔 어떤 의미가 있을 까요. 자, 나 귀를 타신 이유를 일찍이 구약의 선 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겸손 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것이다.
그는 겸손한 왕, 그래서 예루살렘 도성에 뛰어 노는 가장 어린아이 까 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무 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권위가 있는 사람도 권세가 없는 사람도 지 식 있는 Intelligentsia도 무식한 사 람도 누구나 쉽게 친근히 다가설 수 있는 겸손한 예수.
나는 마음이 온 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신 예수. 누 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희망을 약속하 는 예수.
그는 단순히 정치적인 압 박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아니 라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 가운데 본질적인 문제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그렇습니다.
그는 정 치적인 압박에서 우리를 자유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보다 더 깊숙한 인 간의 문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 시기로 약속된 구세주 그래서 그 분 이 마리아에게서 잉태 되었을 때 천 사는 그 분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이 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Jesus! 예수와, Jesus! 예수와. 예수란 말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오늘 나를 방황하게 만드 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 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 내 인생 의 방황, 내 인생의 수수께끼 같은 어려움,
갈등 내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삶의 존재의 갈등 그것 은 결국 죄 때문입니다. 이 죄로부 터 나를 해방하시고 나를 용서하시 고 나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는 분. 바로 그분은 예수.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 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그 분만 이 죄로부터 우릴 용서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 님의 자녀되게 하신다.
여러분 성경 이 약속하는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 시길 바랍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감 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왕의 구원 을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 리가 정말 왕 되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뒤바뀌기 위해서는 세번째로 왕의 눈물을 이해할 수가 있으셔야 합니다.
왕의 눈물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자, 오늘 마가복음 11장은 자 호산나 찬송 속에서 예수께서 예 루살렘에 들어오셨다 이런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루살렘 에 들어오기 직전에 한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에피소드가 마가복 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본문 의 사건의 계속되는 진행을 이젠 누 가복음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9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9장입니다.
그 리고 41절입니다. 누가복음 19장41 절. 41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자, 누 가복음 19장41절 직전에는 마가복음 과 동일한 사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이 누가복음 19장 예를 들어38절에 보 시면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 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호산나 찬송 의 내용이 여기에도 설명되어 있습 니다.
그리고 41절에 보시면 그런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사건 직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일어났 던 한 에피소드를 이렇게 기록합니 다.
41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 요.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 며 네 가까이 오시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 아마도 이것은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일 지 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찬송하는데 왕으로서 그 분을 환영하는데 예수 님은 이상하게 우시고 있습니다. 예 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여러분 이해 하십니까?
자, 예루살렘 성에 다가 오시면서 그가 우시는 모습 속에 정 치적 메시야의 기대를 걸고 흥분한 군중들의 환호성 호산나!
호시안나! 호시안나! 찬양하는 찬송소리를 들 으면서 감람나무 이 감람산 입구를 돌아서시면서 예수님은 아마도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계셨 을 것입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도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그 다음절을 보십시요. 42절에보시면, 누가복음 19장42절. 다같이 한 번 읽어요. 가 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 을 알았다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 금 네 눈에는 숨기웠도다.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부수고 그리고 그들을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줄 수 있는 예수상을 예수에게서 기대하고 있었 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폭력 의 힘을 가지고 오신 예수가 아니라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너희 들이 평화의 의미를 알았더면 좋았 을 것을. 그러나 지금 너희들의 눈 에는 내가 숨기워 져있다. 예수를 예수로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민중 들. 그리고 그 분이 정말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참된 평화,
정치 적인 자유이상의 본질적인 자유, 인 간 존재의 자유, 실존의 자유, 나를 참으로 자유케하고 새롭게 할 수 있 는 이런 놀라운 샬롬의 주님, 평강 의 주님,
나가 너희들의 눈에는 내 가 가리워져 있구나. 예수상. 참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하 여 그 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다음절에 보시면 43절에 날이 이를 지라 한 날이 올것이다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부 터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 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 함을 인함이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는 주만들의 다가올 운 명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자, 지금 은 예수를 환영하고 있는 군중들 예 수에게서 지금 이땅에서의 당장의 어떤 이득과 이해관계를 기대하면서 환영하고 있는 그 군중들의 모습속 에서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맞지않는 예수임을 알았을떄 불과 닷새후에 엿새후에 호시안나!
찬양 하던 이 군중들이 예수를 향해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 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이렇게 폭도로 돌변할 군중들의 모습을 예 수님은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리고 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거 절한 이백성들, 그리고 예수를 거절 한 예루살렘 도성은 하나님의 심판 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 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 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A.D 70년 로마의 타이토스 티도 장 군과 황제가 영도하고 있는 로마의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정복했습니 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언한 그대로 예루살렘의 도성을 잔인하게 파괴했 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 이 예언하신 그대로 돌 하나 돌 위 에 남기지 않고 완전히 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에 언은 적중했습니다.
이 다가올 심판 왕 되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구원 을 거절하고 멸망할 도시의 운명. 그리고 이 도시 속의 사람들의 모습 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호시안 나! 이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 님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서 자주 그 분의 눈물을 만나게 됩 니다. 얼마후에 잠시 후에 그는 겟 사마네 동산에 들어가서 내일 아침 이면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바 라보시면서 그 분은 또한번 우십니 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사마네 동산 에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을 그가 심 한 통곡으로 우셨다 이렇게 묘사하 고 있습니다. 심한 통곡, 통곡의 눈 물을 쏟으셨습니다.
다가올 십자가 의 고통이 괴로워서 흘리신 눈물이 아닙니다. 자, 예수 믿지 못하고 예 수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그 운명을 슬퍼하시 며 그는 우십니다.
구원 받아야 할 영혼 예수 앞에 돌아와서 새로운 삶 을 살고 하늘의 평화를 맛보고 그리 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아야 할 그 민중들의 운명을 내다보 시면서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을 향 해서 흘리는 애타는 눈물이셨습니 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 십니까? 그 눈물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두고 흘리셨던 그 눈물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우리를 곤고 히 여기시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 고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을 체험하 기 위해서 우시던 예수님의 눈물
그 눈물 떄문에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분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길 바랍니다. 그의 눈물 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그의 눈 물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입 니다.
그의 눈물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 였습니다.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눈물을 흘릴 차례입 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가 눈 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고통 속에 사는 이 유 아직도 우리가 충분한 눈물을 흘 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을 위해서 충분히 눈물을 흘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의 민중 들의 고통의 행진은 아직도 계속되 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저와 여러분 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얘기 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 한분이 꽤 괞찮은 목사님이 신데 쫒겨나셨어요.
쫒겨난 이유가 뭐냐하면 이 분이 지나치게 설교가 기독교의 초보적인 메시지 예수, 복 음, 십자가 이런 초보적인 메시지만 주일마다 계속한다 아주 피곤하다 듣기싫다.
Sick and tired! 그래서 목사님을 쫒아냈어요. 나도 쫒겨날 지 모르죠. 자, 그런데 얼마후에 새 로운 목사님이 부임해서 오셨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새로오신 목사 님도 전임 목사님과 거의 비슷한 예 수, 십자가, 복음, 똑같은 메시지를 증거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이번에 는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분 은 쫒겨 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상한 사실이였습니다.
옆에서 이 사 실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찾아 와서 그 교회 교인들을 붙들고 이런 질문을 했대요.
난 당신교회 사람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오. 당신들이 옛날 목사님을 사직시킨, 사임시킨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기독교의 초보 예수 복음 십자가 그 메시지를 증거한다고 해서 사임 시켰는데 보 시오.
새로오신 목사님도 똑같은 동 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 까? 그때 그 교회 교인하나가 이러 한 대답을 했대요. 맞습니다. 새로오 신 목사님도 꼭같은 메시지를 전하 고 계시더군요.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가 달라요? 새로 오신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면서 십 자가를 전하면서 우시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눈물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확 인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눈물 속 에서 주님의 사랑을 만나고 있습니 다.
그렇습니다 눈물이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울어야 할 시간입 니다. 아직도 안타까운 민족의 현실 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니 다.
아직도 예수 알지 못하고 방황 하는 이거리 속에 수많은 우리 이웃 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 니다.
우리가 울면 민족이 살 것입 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거 두리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주 변의 안타까운 우리 가족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바라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신 때가 언제 였습니까?
이 시대는 우리의 눈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눈물에 대 한 감격속에서 내 눈에 눈물이 흘려 지는날 우리 민족은 치유될 것입니 다.
새로워 질 것을 믿으시길 바랍 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 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리에서 일 어나서 우리 다함께 통성으로 기도 할 때 내일이면 3.1절입니다. 우리 민족을 향해서 한 번 기도하십시다.
자,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어려운 우리민족, 경제도 회복되고 그러나 더 중요한 우리만족이 하나 님 앞에 돌아오는 영적인 회복이 이 루어지고 그리고 저 북녘 땅의 사람 들도 우리처럼 자유롭게 찬양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그날이 다가오도 록 하나님 구원의 복음이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이땅을 새롭게 하고 이 민족을 새롭 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이 민족 가 운데 주의 부흥을 주시고 우리를 새 롭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십시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막11:1-11
2016-06-15 11:33:49
과학자가 보는 세상의 신비
“우리가 사는 이 놀라운 세계의 새로운 면과 그 속에서 우리가 맡은 놀라운 역할을 여기저기서 언뜻언뜻 발견하는 것은 행복의 위대한 원천들 중 하나다.”
이것이 누가 한 말일까요? 위대한 종교인이나 영성가의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20세기 초 과학혁명을 이끈 칼 포퍼(Karl Popper)가 한 말입니다.
하나만 더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다. 이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지만 우리 능력이 둔해서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밖에는 파악할 수 없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모든 진정한 종교성의 핵심이다. 나는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독실하게 종교적인 사람이다.”
누가 한 말일까요? 이 말도 종교인이 아니라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과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과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위대한 과학자들인데 이들이 이렇게 ‘신비’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고 그걸 깊이 명상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게 놀랍지 않습니까?
종교는 사람의 정신활동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활동입니다. 종교를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민의 아편이라고 믿는다면 크게 잘못 아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보이는 것도 믿지 않으려 하는데 보이지 않는 걸 믿으니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최고의 정신활동인 종교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세상에는 아무리 알려도 해도 알 수 없는 게 있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 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일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신비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세계를 향해서 영혼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 바로 종교이고 믿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람을 보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께서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 날 길가에 모인 군중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찬미 받으소서!”라며 환호한 데서 ‘종려주일’(Palm Sunday)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떠올려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군중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르며 “찬미 받으소서!”라며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왕이라면 기름이 흐르는 백말을 타고 붉은 주단이 깔린 길을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많은 군중의 환호 속에서 보무당당히 행진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왕은 어땠습니까? 붉은 주단이 아니라 제자들이 깔아놓은 겉옷 위를 기름이 흐르는 백말은커녕 초라한 나귀를 타고 남루한 행색의 제자들과 더불어 우스꽝스런 행진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무슨 왕의 행진입니까?
하지만 여기에 깊은 하느님의 섭리와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신비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우리 영혼의 문을 활짝 열게 만드는 하느님의 역사가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신비로운 섭리에 대해서 얘기하려 합니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신은 누구기에 이런 일을 하는 거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엘리야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요한이 하루는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이 사람을 보시오(Ecce Homo)!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요한이 예수님더러 “이 사람을 보시오....”라고 외치는 장면을 말입니다.
그 자리는 겉옷 깔린 길 위를 나귀를 타고 행진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아이들도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가리키는 요한의 손가락과 “이 사람을 보시오.....”라는 그의 말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고 말한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빌라도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끌려갔습니다. 빌라도가 한 몇 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고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관저 밖에 모여 있는 군중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풀어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매질한 후 군중들 앞에 세워놓고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고 외쳤습니다. 요한이 한 말과 똑같은 말이었습니다.
요한과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라고 외친 것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 겹쳐집니다. 세 장면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건데 그저 그럴 거라는 느낌만 있었지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책들을 뒤져봤는데 제가 참고한 어느 책도 셋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생각은 제가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떠오른 영감인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렇다고 믿게 됐습니다.
요한은 자기는 엘리야도 메시아도 아니라고 말한 다음 손가락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그는 어떻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인줄 알았고 무슨 뜻으로 그렇게 불렀을까요? 요한은 하느님이 주신 영감으로 예수님을 알아봤다고 믿습니다. 인간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관상을 잘 봤거나 성경을 많이 알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불현듯 영감을 받아서 한눈에 알아봤던 겁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보시오!” 그는 자기가 ‘조연’(助演)임을 알았습니다. 명품 조연이었지요. 주연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 말입니다.
그는 자기가 달(月)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반면 빌라도는 극 전체의 흐름을 모르고 자기가 주연인 줄 잘못 알고 있는 조연입니다. 그는 자기가 예수님을 살리거나 죽일 권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자기가 진짜 왕인 줄 알았던 겁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똑같이 “이 사람을 보라!”라고 말했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맡은 역할을 완수하고 아름답게 퇴장하는 사람의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중을 두려워한 비겁한 사람이 예수님 죽음의 책임을 군중에게 떠넘기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왕이 아니다!
요한과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을 때 ‘이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보라고 말한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 어떤 상황에 있는 예수님입니까? 저는 그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 행진에는 깊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게 담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과 초대교회도 이 일을 우연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스가랴 9장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봤던 겁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복음서 기자들과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이 예언말씀이 이루어진 걸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광경은 그분이 이룰 하느님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이 가리킨 ‘이 사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었습니다. 빌라도가 가리킨 ‘이 사람’은 정치권력과 군중권력 사이에서 희생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없애고자 능동적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과 제국과 군중이라는 두 가지 권력 사이에서 희생당하는 사람, 저는 이 묘한 역설을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에게서 봤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는 게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맞습니다. 그건 미리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은 계획된 일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환호한 것이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것이나 겉옷을 길에 깔아놓은 것이나 모두 사전에 준비됐던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이뤄졌다는 얘기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서 벌어진 하느님나라 사건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광경은 스가랴 9장 9절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스가랴 9장 10절 말씀에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습니다. 9절에 이미 왕이나 나귀니 하는 말들이 다 나오기 때문이겠지요.
스가랴 예언자는 10절에서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라고 예언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왕은 왕이되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 왕이고 그 왕이 총칼이 아닌 영적인 감화로 다르시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나라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구교회는 오랫동안 총칼의 힘을 빌려서 지배해왔습니다. 십자군전쟁이며 아시아와 남미 선교 역사를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을 든 선교사들이 군함을 타고 군인들 뒤에 들어와서 무력으로 선교하지 않았습니까. 그 총칼이 지금은 돈으로 바뀌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돈으로 선교하고 돈으로 교육하고 돈으로 교회성장을 도모하는 게 오늘 교회가 아닙니까.
종교적 가치는 결코 돈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물질의 힘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사람을 보라!”는 외침을 듣습니다.
과연 우리는 기름 흐르는 백말을 타고 붉은 주단이 깔린 길을 보무당당히 행진하는 예수님을 봅니까, 아니면 초라한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겉옷이 깔린 길을 뒤뚱거리며 행진하는 예수님을 봅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입니까?
나귀 타고 입성하신 왕 /막11:1-10/ - 쓰임받는 삶/ 김필곤 목사
2018-11-03 07:24:27
오늘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모든 것은 시장”이라는 표어입니다.
시장중심의 경영, 시장 중심 정치, 시장 중심 교육, 시장 중심 종교, 등 시장권력이 인간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소비자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어떤 분야든 살아남기 힘든 세상입니다. 시장에 자신을 팔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상품화 시킵니다. 인간의 욕망 속에 새로운 시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 생애를 살 당시의 유대인의 시대 정신은 자주 독립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26년에서 36년까지 총독 자리에 있으면서 최고의 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세제 개혁을 통해 주민의 수와 재산 상태를 조사하여 2년 동안 소출의 1/4을 내게 했답니다.
세금이 수입의 25%입니다. 로마가 유다 지방에 책정한 농지 증세액이 6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낭비를 일삼은 헤롯 1세의 수입은 1,0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한 가족의 하루 생활비이니까 6백만 명의 금액입니다. 헤롯은 더욱 심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과도한 세금 징수는 경제적 절대 빈곤을 초래하였습니다. 극심한 기근에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수치스러운 것은 로마 황제에게 납세하는 것이었습니다. 극도의 반 로마 감정을 일으켰습니다. 세금 징수는 유대의 독립 주권을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혐오감을 극에 달했고 세리들까지 경멸하였습니다.
로마의 앞잡이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에서 39년까지 통치하였는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고 이것을 비난하는 세례 요한을 처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정치적으로 긴장의 연속이었으며 민심은 쉽게 동요되었습니다. 로마의 식민 지배와 유대 사회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으로 인해 이중적인 고통에 신음하고 극도의 빈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에서는 성전세를 거두웠는데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성전에 얼마나 금이 많았는지 함락 이후에 시리아의 모든 지방의 금의 가치는 이전의 절반으로 평가절하 되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지배 계급은 성전에 축적된 부를 독점하고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로마의 식민 통치에 굴복하며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한 것입니다.
이럴 때 당시 사람들의 시대정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같은 왕이 나타나 민족을 구원해 주길 원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한 로마를 무너뜨리고 사악한 헤롯 왕가와 로마의 앞잡이들을 제거하고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이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했습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예레미야서 23장 5절 이하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5-6)”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주며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은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병을 고치시며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민중들은 어쩌면 예수님이 메시야 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청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다를 잠잠하게 했데.” “귀신을 쫓아 냈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였데.” “죽은 자를 살리셨데.” “문둥병 환자를 고쳐 주었데.” “바리새인들을 묵사발 만들었데.” “로마인들인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녀도 그 집회를 해산시키지 못했데.” 등 각종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어쩌면 그분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일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 축제일입니다. 유월절이 바로 우리로 말하면 일제로부터 해방된 8.15처럼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민족을 생각하는 절기이고 해방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절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 인구가 100만 내지 125만이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인구를 적게는 25,000명 정도에서 많게는 100,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되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모이기 때문에 적어도 200,000명 정도의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이번 유월절에는 대단한 사건이 벌어질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좌의정 우의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로마를 물리치고 불의한 정권에 철퇴를 가해 민족을 해방시킬 메시아 일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이제 예수님께서 유월절 맞이하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고 계십니다.
1. 쓰시는 주님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습니다.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벳바게는 예루살렘 남쪽 1.6KM까지 온 것입니다. 감람산은 해발 800M로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이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의 도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슥9:9; 14:4).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슥 14:4)”라고 하였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유대에 계실 때 대체로 예수님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또한 베다니에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었습니다. 이미 기적을 일으킨 곳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불렀습니다. 제자들은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선택받은 설레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개선 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의 압제를 제거하고 왕이 될텐데 선발대로 뽑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정권 인수위가 되며 얼마나 사람들이 진압군으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대통령 독대만 해도 사람들이 “나 대통령 만났다”
우쭐 대지 않습니까?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왕이 될텐데 “내가 측근 중의 측근으로 뽑혔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혁명을 위한 특별한 지침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거 그들은 마카비 혁명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가 할례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긴 어머니는 아기와 함께 처형했습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게 했고 성경책(당시는 모세5경)을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하였습니다. 더욱 그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을 세우게 하고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주전 167년 유다지역의 작은 마을 모디인(Modiin)에서 ‘마타디아’라는 제사장이 이방제사를 거부하고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동하여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마카비혁명’입니다.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결국 3년간의 투쟁 끝에 ‘유다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성전 안의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제거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권력을 물리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기대를 했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다섯 아들과 시작했는데 지금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제자가 있고 따르는 수많은 군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상한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무슨 심부름을 시키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맞은 편 마을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통령 인수 위원으로 활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않은 맞은 편 마을로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발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위해서는 말이 필요합니다. 개선장군이 탈 품위에 맞는 백말이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되었는데 청와대 들어가면서 티코를 타고 가는 격입니다. 격에 맞지 않은 대관식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미래에 되어 질 일을 훤히 알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귀를 보면 풀어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황당한 지시입니다. 예수님이 절도 사주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보신 인격과 다른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지시입니다. 절도죄로 걸리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변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왕이 되면 출세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출세는커녕 감옥에 가야 할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문을 가진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 왜 이리 하느냐? 물어 보며 무엇이라고 말하라고 하십니까?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주께서 쓸 것이며 곧(지체없이) 다시 여기로 돌려보내리라”라고 말해라는 것입니다. 절도 해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허락을 받고 가져 오라는 것입니다.
이 나귀를 쓰시는 분은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은 “주”(쿠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그 무엇이든지 쓰실 수 있는 만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한 국가의 왕도 얼마든지 자신의 마음대로 필요에 따라 사용하였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 쓰신다는데 누가 거절하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이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만 한다면 그 무엇이든 내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쓰임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들도 주님께 쓰임받고 나귀 주인도 나귀도 주님께 쓰임받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쓰시는 지 이해가 되지 않은 수 있습니다. 상식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라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쓰시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물건의 가치는 쓰는 분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똑같은 피아노지만 베토벤이 쓰는 것가 제가 쓰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똑같은 칼이지만 도둑이 쓰냐 의사가 쓰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같은 병이지만 그 속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나귀 새끼가 주님께 쓰임받지 못했다면 성경에 기록되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며 교훈을 주겠습니까?
시골의 초라한 나귀새끼도 왕의 입성을 위해 쓰신 예수님,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를 쓰시길 원하십니다. 살인하고 도망간 모세, 목동으로 가지고 있던 지팡이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우상 숭배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브라함,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살인 방조자 바울,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에 1세기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물맷돌 하나님이 쓰시니까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 불능자 왼손잡이 에훗도 쓰십니다. 당시 물건처럼 취급당하는 드보라도 사용하십니다. 겁쟁이 기드온, 사기꾼 야곱, 배반자 베드로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쓰시겠다고 할 때 주제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어릴 적에는 "열등아"였습니다.
초등학교를 3개월 다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12살 때는 기차간에서 신문팔이도 했습니다. `전쟁와 평화'의 저자인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계속 낙제점수를 받았습니다.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의 계기를 만든 J 와트도 "얼간이"로 낙인 찍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했습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근대 물리학을 개척한 영국의 대과학자 뉴턴도 초등 학교시절에는 "낙제생"이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되어서도 축음기를 만들었습니다. 존 밀턴은 완전히 실명된 상태에서'실낙원'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순종하면 됩니다. 맡기면 됩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2. 쓰임에 순종함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목적, 그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이 전혀 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그동안 수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미래는 자신들의 계획이나 현제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으로 보다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쓰실 때 어떤 결과나 나타나는가를 똑똑히 본 사람들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 종들을 주님이 쓰실 때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인가를 본 사람들입니다. 폭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에 무조건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 보니 예수님의 말씀대도 상황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원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어디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놀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흠이 없고 깨끗한 나귀처럼 예수님이 유월절 제물이 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민19:2; 신21:3). 하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무덤에 장사하게 하신 것처럼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우연이 아니라 구속사의 계획에 따라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을 질서 정연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지하시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제자들은 순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5분 전만 알고 있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신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4절 보십시오. 제자들이 그것을 풀었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이 말합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고 물어 봅니다. 점잖게 말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인격이 있으신 분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인 것 같습니다.
나귀가 많아 한 마리에 큰 비중은 두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주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때 그가 가져가라고 허락을 합니다. 그 나귀 주인도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합니다.
아마 이 나귀의 주인은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아셨을 것입니다. 이웃 동네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문둥병 환자를 고치신 일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름 없는 이 사람은 영광스럽게도 자신의 나귀를 내어 줌으로 주님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 미래의 축복은 순종함으로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진정 행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10:13)" 우리가 약국에 가면 약 처방전을 줍니다.
그 약을 줄 때 왜 처방전을 주겠습니까? 병을 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을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미래를 보장하는 처방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면 그곳이 약속의 땅 축복의 땅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3종류의 가짜교인을 말하였습니다.
(1)말씀을 듣지않는 교인-교회에 와서 설교들 듣기는 듣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교인
(2)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인-말씀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인
(3)말씀을 듣고 인격과 생활이 변하지 않는 교인-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인격의 변화가 없는 교인.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1:28)"
성경은 말씀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우리가 쓰임받는 길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그저 이성과 경험에 맞지 않다하더라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같아내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소유 주님께 내어드리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풍성한 삶이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3. 가치있는 쓰임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 안장이 없으니까 안장 대신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그 위에 걸쳐 두었습니다. 존경과 복종을 다짐하는 표현입니다. 개선 장군이 들어 올 때 경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메시아 왕국 건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그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 그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이라면 적어도 백마는 타야 하는 것입니다. 개선장군으로 입성할 때 얼마나 화려하게 입성합니까? 신분에 맞는 행사를 해야 합니다. 신분에 맞는 차를 타고 갈 때 사람들이 대우를 해 줍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면 메시아로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처럼 속으로 “코미디, 코미디”하고 조소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쓰시는 방법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품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대도 예수님은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까? 말이 없으면 그냥 걸어가도 될 텐데 말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520년 전에 메시아의 오심에 대하여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해 놓았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야만 했는지를 정확하게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메시아로서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화와 순결성을 상징하는 나귀를 통하여 메시아가 어떤 분일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를 죄와 죽음의 문제로부터 구속하시는 메시아로 오신 것입니다. 스가랴서를 통해 예언해 주신 왕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밑의 10을 보십시오. 나귀 타시는 왕이 무엇을 합니까?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전쟁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왔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 21:4-5)”
제자들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강성했던 다윗의 나라를 재건할 정치적 메시아로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하고 모든 불의한 권력을 제거시킬 의로운 왕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서로 자리 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구속하실 공의의 왕,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힘을 남용하는 불의와 왕이 아닙니다. 권세를 가졌지만 그 권세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로 생명을 구원하는 왕이십니다. 능력의 왕이지만 그 능력으로 교만한 것이 아니라 섬김과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나에게 있어서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귀 탄 초라한 왕입니까? 백마 타고 내 필요를 다 채워주는 정치적 왕입니까? 아니면 진정 메시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나귀 타신 예수님은 우리 성도님과 저의 주인이십니다. 메시아 이십니다. 그 분이 어떻게 쓰시든지 만왕의 왕 예수께서 쓰시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쓰임입니다. 구속사를 위해 쓰임받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우리 왕이여 이 곳에 오소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주소서. 주님을 찬양하오니 주님을 경-배하오니. 왕이신 예수여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4. 변질된 것도 쓰시는 주님-주님의 재활용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8절 이하를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카펫으로 깔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나온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와 권력자들의 폭정에서 구해낼 메시아로 생각하고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왕의 행차를 위해서입니다. 밭에 벤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 나무 가지를, 어떤 사람들은 밭에서 베어낸 잎사귀 많이 달리 나무 가지를, 어떤 사람들은 들에 있는 나무 순을 깔았습니다. 왕의 입성을 환영하는 카펫을 깔아 놓은 것입니다. 일부 군중들이 왕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흥분하였습니다. 뒤에서 따르는 자들은 소리지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구하소서”라는 말입니다.
10절 보십시오. “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장차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메시아’를 기다리며 빨리 임하기를 기원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외세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제 2의 다윗 왕으로 환대하고 그 나라가 번영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침으로 그들의 간절성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땅에 다윗 왕국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의 축복이 나타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19장 38절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상 생애에서 마지막 받는 환대입니다. 환호하는 이런 무리를 보고 예수님은 감정이 무척 상승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로마 정권을 물리쳐 버리고 헤롯 왕가를 제거하고 진정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해 보겠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누가 이정도 환호해 주면 얼마나 살맛나게 신나게 일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때 바린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비유가 상한다는 것입니다. 꼴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은 날이 올 것을 보고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을 보며 환호하지만 예수님은 멸망될 세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면 살기 좋은 새로운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앞으로 디도 장군에게 망해 버릴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고 환호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환호하던 입술이 바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막으라” 외쳤습니다(막15:13).
인간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옷을 벗어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며 환호했던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다 배반하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찾아가 용서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합니다.
제자들을 다 모아 놓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이들이 변화되어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쉽게 변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우리를 초청해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449장 1절)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도 예수 나의 힘 되니 겁낼 것 없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449장 2절)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449장 3절)”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무엇일까요?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가정,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직장이 무엇일까요? 모든 부정 부패가 살아지고 힘으로 통치하여 정의와 공정한 분배가 실현되는 나라일까요? 아닙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모시고 죄 용서함받고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일에 쓰시길 원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순종함으로 이루어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