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골로새서 설교 모음

골로새서 1:15 - 23절 설교 모음

Jessi J 2024. 6. 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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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1:15-20/ 조정의목사

2020-09-18 14:27:55

 

오늘 나눌 골로새서 본문은 골로새서 전체 말씀의 핵심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 성경 전체의 가장 뛰어난 설명 중 하나입니다. 또한 가장 교리적으로 풍성하면서도 시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찬송시이기도 합니다. 이 시가 노래하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제는 그리스도의 초월성, 탁월성, 충분성입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노래하신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 분인지 생각할 때, 그 영적 진리에 압도되어 이것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의 입술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충분히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6:5).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는가와 상관없이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실질적인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이 질문은 예수님이 직접 하셨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9:18-20). 이 질문은 또한 영생에 관한 질문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7:3).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오늘 여러분이 대답해야 할, 그리고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질문입니다.

 

1.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15-17)

 

바울의 찬송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5-17절은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만물의 주권자, 통치자이심을 노래합니다. 18-20절은 예수님께서 새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교회의 주권자, 통치자이심을 노래합니다.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절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어떤 이들에게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입니다. BC 4년경,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유명한 랍비로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제자의 배신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랑과 자비의 대명사, 성인, 기독교의 창시자 정도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노래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저와 여러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1:26-27).

 

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십니다. 얼마나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14:9).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사도 요한은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1:3).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나타내는 광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체를 온전히 나타내 보이시는 형상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충만하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품 속에 있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기의 영광과 본체를 만물 가운데 온전히 나타내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습니다(14:6).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사람의 마음에 비추시는데, 그 빛을 예수님의 얼굴에 두셨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후 4:6; 1:9).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이 영광스러운 관계는 예수님과 다른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예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결정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15절 후반을 보시면,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십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이 표현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피조물이라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도 같은 교리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이 뛰어난 피조물이라고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란 표현은 창조된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열의 높음이나 우월성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시편 8927절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리켜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라고 하셨는데, 이새의 막내아들이었던 다윗을 장자, ‘먼저 난 자로 삼겠다는 말은, 그를 가족 안에서 최고 서열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말을 보면 세상 왕들 중 가장 높은 지존자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으뜸, 지존자, 통치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3:35).

 

바울은 예수님이 만물 위에 가지고 계신 주권 혹은 통치권에 관해 세 가지 이유를 노래합니다. 첫째로 모든 만물을 예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 둘째로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모든 만물을 예수님이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누가 창조하셨는가? 왜 창조하셨는가? 누가 붙들고 계시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누가 창조하셨는가? 16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에게서(예수님)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에 무엇이 포함될까요?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모두를 포함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모든 물질세계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 전체를 가리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 , 모든 짐승과 곤충 포함) “땅과 하늘을 만드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 2:4).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물질세계,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모든 영적 세계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하신 이도 예수님이십니다. 16절에 나오는 왕권들, 주권들, 통치자들, 권세들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영적 세계의 피조물들, 곧 천사들입니다(1:21; 벧후 2:10; 1:8).

 

여러분, 해와 달과 별,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식물과 동물들을 보면서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만물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존재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분이 만물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지은 것이 그분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1:3). 그래서 그분은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왜 창조하셨는가? 만물은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1:16). 만물의 존재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시편 19.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19:1). 로마서 1.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습니다(1:20). 모든 만물 즉 앞에서 말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우상처럼 섬기는 그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했습니다(1:20-23).

 

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죄입니까? 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 죄입니까? 만물이 창조된 목적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그 창조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감사하고 영광 돌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입니다(12:13).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누군가 왜 사냐고묻거든, 그냥 웃지 마시고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위하여 여러분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 만물을 붙들고 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가(예수님)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다시 한번 예수님이 만물 중 으뜸이고 최고이심을 강조하면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바울이 아덴에서 우상숭배하던 이들에게 했던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하나님)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move) 존재하느니라”(17:28).

 

만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언가에 의존합니다.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 알맞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고, 필요한 양식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우주로 나가서 생물의 생존 조건을 생각해보면, 지구와 다른 행성의 거리, 궤도 등이 질서 있게 움직여야 생존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가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붙들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십니다(1:3).

 

결론: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만물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만물에 대한 주권, 소유권, 통치권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주권, 소유권, 통치권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로 눈이 가려진 사람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지만 어리석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과 바꾸고, 그 마음의 정욕대로 살아갑니다(1:22-23). 그런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예수님은 교회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18-20)

 

바울의 찬송시는 이제 예수님과 그분이 만드신 새 피조물, 교회를 노래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교회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이 몸인 교회의 머리십니다. 머리가 몸의 기능과 움직임을 통제하듯,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 즉 교회의 통치자가 되십니다(2:19).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노래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교회의 주권자와 통치자이신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교회를 창조하셨나? 바울은 노래합니다. “그가 근본이시요”. 예수님이 교회의 근본이 되십니다. 교회는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근본이신 예수님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계셔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처럼, 교회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은 근본으로서 모든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어떻게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가 되심으로써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첫 열매로 이후 모든 열매가 맺히게 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고후 5:17).

 

둘째로, 예수님이 왜 교회를 창조하셨습니까?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만물의 으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와 땅,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2:6-11).

 

여러분 이것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만물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특히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교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으뜸으로 여기고 순종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그 이름을 높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원래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려지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창조하신 목적은 만물의 으뜸이 되기 위함이며, 만물에게 경배를 받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태어난 피조물 즉 교회로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앞에 무릎 꿇은 삶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고전 10:31),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14:8).

 

하지만 이 가운데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살든지 죽든지 나를 위해서. 이것이 여러분 삶의 모토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이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생각이 드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지막 19-20절 말씀이 이를 명확하게 노래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교회를 창조하셨고, 둘째,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전쟁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악한 세력과의 전쟁입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그리고 그 영의 지배를 받는 불순종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전멸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6:12; 2:2).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넘치셔서 오래 참으시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자기와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사람들, 죄인들과 화평 조약을 맺기 위해 대사를 보내셨습니다.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9절 말씀처럼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근본 본체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님이 직접 화평 조약을 맺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절하면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4:12).

 

예수님은 단지 화평 조약을 소개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직접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평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20절 말씀처럼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죄인이 치러야 할 죄의 대가,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의 죗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로 인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과 화목을 이루시는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자, 그는 이제 하나님의 정벌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창조하신 교회, 예수님을 으뜸으로 높이고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를 과거 이스라엘에 있었던 훌륭한 랍비나 기독교의 창시자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그 발아래 무릎 꿇고 순종하며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가장 유명한 말씀, 요한복음 316절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6-18)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6).

 

그래서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 질문이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원한 관계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심판이냐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오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3. 결론

 

요즘 대한민국이 참 소란스럽습니다. 명절에도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을 듣고, 뉴스나 신문에서도 계속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또 전쟁이 날 수 있을까요? 잘 모르지만, 북한은 계속 미사일을 쏘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는 무시할 수 없는 외교적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꼭 진짜 전쟁이 아니더라도 금융, 무역등에 있어서 우리는 많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나라가 부도나거나 다른 나라에 많은 인력과 자금을 빼앗길 위기는 언제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바짝 들고, 앞날을 염려하고, 뭔가 필요한 대비를 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대한민국의 미래는 우리가 예측하기 어렵지만, 우리 영혼의 미래는 예측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앞날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곧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대적하는 모든 만물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높이지 아니하고 그 발 아래 무릎 꿇지 아니한 모든 사람은 그날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지 않고 계속 퍼붓는 하나님 나라 바깥 어두운 데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고통을 영원히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와 화목을 이루라고 요구하십니다. 다윗이 시편 212절에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맞추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여러분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급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께 피한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머리 되신 예수님을 따라는 몸된 교회라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거하십시오. 만물의 주권자요 통치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소망을 두십시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8:39).

 

 

 

골로새서 강해-3/ 오직 예수! /1:15-23

2020-01-22 09:50:20

 

여러분 모두 오직 예수의 믿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개신교가 국내 종교인구 1위라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2년째입니다. 인구 대비 19.73%로 다른 종교들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는 종교는 기독교뿐이고 경기도와 서울시 경우, 불교보다 2배 이상 많았으며 연령별로 40대 이하로 갈수록 다른 종교보다 많아서, 상대적으로 젊은 종교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기독교인의 수가 적은 때였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러니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지만 기쁘지만은 않은 것은 왜 일까요? 중세 시대 유럽은 모든 사람이 다 기독교인이었지만 암흑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 잘 믿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바로 오직 예수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오직 예수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단들의 미혹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예수님만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 예수만 믿어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영적 지혜도 알아야 하고 할례도 받고, 특정한 음식을 먹지 말고 특별한 날을 거룩하게 지키고, 금욕과 고행을 통하여 영적 수련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여러분 중에도 꼭 예수만 믿어야 하는 거야?”, “다른 종교나 세상 철학에도 좋은 것이 많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한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줄 압니다. 착각입니다.

 

대전에 있는 어느 장로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현직 중학교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면담요청을 했답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인가 고민을 하면서 면담하는데, 전도를 하더랍니다. “, 내가 교회의 장로야.” 그러니까 장로님인 줄 알고 전도합니다.” 그러더랍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기독교 장로라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전도합니다.” 알고 보니 이 학생은 신천지에 빠져있었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좋다, 그러면 네가 왜 신천지를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써 봐라.” 그랬더니 이 아이가 쉬지 않고 쓰더랍니다. 그리고 한 장 더 달라고 하더니 내리 4장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어보니까 신천지 교리에 대해서, 기존 기독교의 문제에 대하여, 신천지가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자기의 비전과 사명을 적었습니다. 그 아이가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고 합니다.

 

너무 충격을 받은 이 장로님은 교회 중등부 교사인데,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 가서 중등부 아이들에게 똑같이 했답니다.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면서, 여기에다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지,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써봐라.” 했더니 한 장 이상을 채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는 한 줄, 두 줄 그리고 더 이상 쓰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몇 장이나 쓸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는 광신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오직이라고 하느냐 가 문제입니다.

오직 남편’, ‘오직 아내라는 말이 너무 심한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니 문제이지 않습니까?

 

우상이나 거짓 신에게 오직이면 비참하게 됩니다. ‘오직, ‘오직성공인 사람은 주위 사람도 다 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오직인 사람은 말할 수 없이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오직 예수의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엄청난 분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6)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7)

 

:18에서는 예수님은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고 부활의 첫 열매요 만물의 으뜸이시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직 예수면 가정이나 직장, 사회 활동을 소홀히 하지는 않겠는가? 걱정합니다. 실제로 자신은 예수 잘 믿는다고 하면서 가정도 직장도 소홀히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기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데 가정이나 직장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11:2에 보면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예수님 안에서 있습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오직 예수의 믿음을 가지면 지혜롭고 총명하며 재능이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반듯해지고 가정도 일터도 잘 가꾸게 됩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하찮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훌륭한 기업을 만듭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나라들에 가보면 대부분, 미신이 강합니다. 미신이란 신에게 재물을 갖다 바치고, 복을 비는 것입니다. 곧 신에게 뇌물을 쓰는 것입니다. 신이 뇌물을 받으니 자기들도 뇌물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 10:17에 보면,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뇌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믿음으로 살아야 죄와 악에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신 분입니다.

 

: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인한 구원은 단순한 속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한 것입니다.

속죄와 화해는 다른 것입니다. 용서는 했지만 화해는 거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을 뿐 아니라 화해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화해자로 사는 것입니다. 평생 싸우던 사람이 싸움을 그치고 하나가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명한 증거가 골로새 교회 교인 자신이었습니다.

 

:21-22에서 이방인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살았던 골로새 교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놀라운 분입니까? 그런데 예수님만 믿어서는 부족하다고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위에 굳게 서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3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에 튼튼히 터를 잡아 굳건히 서 있어야 하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에 미혹되어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문제지만 교회에 남아있는 이들에게도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오직 예수’,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부담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작은 시험에도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결혼하지 않는 청년들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결혼하여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혼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함께 살 때 일어날 어려움조차 기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어제 젊은이교회 한 자매가 미국 교포 청년과 결혼하여 주례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부모를 떠나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미국이 아니라 남편을 따라 선교지로 떠나는 분도 있습니다.

미국이냐 선교지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것이 가장 큰 은혜요 복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요 만물의 으뜸이요 만왕의 왕이요 교회의 머리고 날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구주이십니다.

그래서 다 죄짓고 살아도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 정결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손해 보면서도 정직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용서의 길로 사랑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순교의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3에서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복음의 일꾼은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니까 순교도 복이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오직 예수’,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것이 힘들게 여겨지는 분은 예수님에 대하여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주님, 더 알기 원합니다.”

 

왜 마귀가 예수님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할까요?

예수님이란 말을 못하게 하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마귀는 왜 사람들이 탄식할 때, 욕할 때 JESUS 라고 하게 했을까요?

예수님이 너무나 놀라우신 분이라 눈과 귀를 가려 예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하여는 목사님이 전문이시잖아요? 목사님이 잘 연구하여 전해주세요.”

아닙니다. 남에게 맡길 것이 따로 있지 예수님을 아는 것을 목사에게 맡겨요?

 

영국의 기독교 저술가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평범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활동마저도 전문가들이 독점해가는 경향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찬송하던 것이 그리 옛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사람이 마이크 앞에서 대신 노래를 불러준다. 다른 사람들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른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말이다. 만약 일이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웃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한 사람만이 웃게 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좌절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좌절을 기대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주님을 더 알아가는 놀라운 길이 앞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놀라고 또 놀랄 것입니다.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어느 날 집에 있던 낡은 책을 보다가 가문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통 조상이 아니었고 보통 신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면 가슴이 떨리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1도 없는 사람도 영적으로는 100% 해당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찬송가 96장은 어릴 때 많이 부르던 찬송인데 제목이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가사는 예수님은 우는 자의 위로요, 없는 자의 풍성이시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온 교회의 머리와 만국인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 되고, 우리의 기쁨이 되시고, 우리의 생명과 평화와 영광이 되신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더 알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더 알게 해주소서.”, “‘오직 예수로 살게 해주소서.”

 

찬송: 오직 예수 다른 이름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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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1:15-23

2016-04-22 15:35:40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취임식 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이렇게 성경에 손을 얹는 것을 거부한 대통령이 딱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1853년부터 1857년까지 14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입니다. 피어스는 대통령 취임을 두 달 앞두고 부인과 아들과 함께 뉴햄프셔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탈선하여 둑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피어스 내외는 무사하였으나 그의 11살 된 외아들은 그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부인인 제인 여사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남편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피어스는 그런 불행 속에서 하나님 어찌하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하고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상하여, 결국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피어슨과 비슷한 처지의 한 여인이 나옵니다(7:11-17). 갈릴리 지역의 나인(Nain)이란 마을에 한 미망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세상을 일찍 떠나고, 그녀는 젊어서부터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당시 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힘든 삶을 살면서도 아들에게 기대를 걸고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느덧 그 아들이 장성하여 직업을 얻고 장가도 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듬직한 아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뭇하고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아들의 관이 장지로 향해 갈 때,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슬퍼하며, 이 어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 그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그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사랑의 음성이었고, 위로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가, 죽은 자의 관에 손을 얹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청년이 일어나 앉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살아난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방금 전까지 슬픔의 자리였던 그곳은 기쁨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은 그 어디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생명을 얻고, 슬픔과 애통이 기쁨과 찬양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 기초요, 모든 근본규범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욱 선명하게 아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5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1:15)

 

여기서 형상은 모양, 모습이란 뜻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실상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입니다(4:24).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추론하는 것은 미신이 되고 이단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우상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5)

 

그런데 그 당시 유행했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철학자들은 영은 선한 것이며, 육체와 물질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선재대신 영혼의 선재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몸의 부활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16)

 

바울은 여기서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and for him). 이는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와 관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고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라는 말씀처럼, 세상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했는데, 이 말은 이 세상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오늘날은 갈수록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 바울은 천사숭배 사상에 대해 경고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거합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1:18).

 

그 당시 천사숭배자들은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는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천사를 숭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매우 설득력 있고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천사 숭배를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꾸며낸 겸손이라고 바울은 책망합니다.

 

18-19절에서 바울은 천사 숭배자들을 가리켜 헛된 것을 과장하는 자”,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라고 강조합니다. 즉 천사 숭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천사라고 하는 허망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상 천사는 피조물로써, ‘하나님의 본체’(2:6)이신 그리스도보다 우월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교회의 머리”(18) 이십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에게 있어서 머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머리를 통하여 유기체의 각 부분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유지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말은 몸 된 교회의 지체인 각 성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연합하고 거룩하게 유지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머리라는 말은 대표자요, 본을 보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몸 된 교회의 대표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앞서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창조자이시고 독생자이시면서도,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므로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인하여, 우리들 또한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시고 계십니다. 그로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변화된 인생, 감격적인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몰라서 거부하거나, 알고도 외면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증거하고, 그의 사랑을 온 세상에 증거해야 합니다.

 

어떤 강도가 백주에 체포되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때 어떤 어린 소녀가 그 강도의 손을 잡고, “두려워 마세요. 제가 함께 경찰서까지 같이 갈께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서야 그 강도는 안정을 되찾고, 얼굴이 밝아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구나. 너의 모습이 마치 예수님 같구나.”

 

강도의 마음을 열어준 그 소녀는 훗날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된 캐더린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구세군 빈민선교운동을 하면서, 미혼모시설, 도시빈민을 위한 급식시설, 감옥전도, 여성보호소 등을 운영하며 인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는 이들로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으며,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이 아닌,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강남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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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1:22-24/ 옥한흠목사

2014-11-11 13:10:46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아주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을 판단하는 권위의 표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사람의 판단과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보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가정을 좀 해 봅시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30년 전에 "나는 건강하다" 자부하신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어쩌다 병이 나서 아프면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아무래도 이런 병인 것 같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당시에는 의료기술도 미진했던 때인지라 의사도 대충 환자의 의견에 동조하여 치료를 했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자기 진단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병원에 가면 첨단 의료장비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뇌파 검사, 간염 검사, 내시경 검사, 장검사 등 기계로 정확하게 인간이 병든 부분을 진단합니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도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면 여기저기 고장난 부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를 보면 온전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도 건강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도 과거에는 건강에 대하여 자신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건강에 대하여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어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려져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받고 몇 개월 살다가 죽는 것을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30대 젊은 나이에 얼굴이 노랗게 변하여 간암으로 죽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머리 아프면 두통약 사다먹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안되니까 병원에 갔는데 검사 결과 뇌종양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정상이라고 고집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에 대하여 아무도 자신이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고집하나가 있습니다.

 

자기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꾸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동물화시키는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옷 잘입고 잘먹고 쾌락만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에서도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비문명인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인간에는 영혼이 있고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유한하지만 영혼은 영원합니다. 영혼은 육체처럼 장사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영혼에 대하여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정상이라고 생각하면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단해야 합니다. 영혼의 거울인 성경으로 위를 들여다보고, 뇌파검사를 해보고, X-레이로 투시해 보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영적으로 진단이 되어집니다.

 

성경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현대인이 아닙니다. 3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을 장사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핍박 속에서도 날마다 부활했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라고 했던 소련에서도 성경은 줄기차게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중국의 철권통치 아래에서도 성경은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매년 6억권 이상 판매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 이렇게 많이 팔리겠습니까? 거짓말이라면 벌써 사라졌을 것입니다. 말씀 앞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죄, 죽음, 심판, 피 등입니다. 대부분 원색적인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원색적인 용어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밖에 판단하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불쌍한 자입니다. 원색적인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허무라는 말로, 죄를 약점이라는 말로 사실을 약화시키면 안됩니다. 내 영혼의 병에 대하여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바른 진단이 나올 수 없고 치료되지 않습니다.

 

한국 의사와 미국 의사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 의사는 병을 진단해서 암이라고 판명이 되면 분명하게 암이라고 환자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나 한국 의사들은 환자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암을 수술하고도 조금 안 좋아서 그 부분을 떼어 냈으니까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환자를 거짓말로 위로합니다. 가족들에게만 사실대로 말해 줍니다. 그러면 가족들은 환자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눈물을 닦습니다. 잘못하면 환자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르고 있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죽음에 대하여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사들은 정확하게 말해 줍니다. 바로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소송을 당합니다. 그래서 환자에게 X-레이를 보여주고 자세히 설명을 합니다. "지금 당신의 상태는 이렇습니다. 수술을 해도 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래도 당신이 원하면 수술을 해보겠습니다. 수술을 할까요 말까요?" 물어보고 환자의 요구대로 합니다. 수술도 포기하고 낙심해 있을 때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물어보고 신앙을 권면합니다. 영적으로 준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자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차츰 죽음을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색적으로 알려줄 때 바른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영혼에 대하여 바르게 진단해 줄 때 인간은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어떤 것입니까?

 

 

 

1.당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1:21-22)"

 

인간은 하나님과 겉으로만 원수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원수가 되었습니다. 근본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악한 행실을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는 마음 바닥으로부터 하나님과 원수관계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이의를 말하는 분이 계실 줄 압니다.

 

"나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인정합니다. 신앙생활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왜 하나님과 원수입니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원수 맺은 관계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관계는 하나님과 원수 맺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주관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객관적 관계가 원수 맺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적 입장이라면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입장일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수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된 것에 대한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상태는 하나님과 원수 맺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무관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죄악의 담이 막힌 것입니다. 혈통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절대로 무관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무관심해서도 안되는 관계입니다.

 

때로는 적대관계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권력가와도 원수관계를 맺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그것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2.당신의 세계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

 

불신자들에게는 인생에 중요한 두 가지가 없습니다.

 

1)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고 살 때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안 믿고 사는 사람들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젊었을 때는 성공적인 삶을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것이 모두 신기루인 것을 깨닫고 허망함을 느끼게 됩니다. 젊었을 때 대기업에서 자기를 놓고 서로 스카우트 하려고 흥정할 때는 자만했었습니다. 그러나 40, 50을 거치면서 소망을 잃었습니다. 정말로 인생의 황혼을 향하고 있는 분들,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식 위해 사십니까? 아닙니다. 앞으로는 60-70이 되어서는 혼자 살 것 각오해야 합니다. 자식이 똑똑하면 할수록 불효할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잘나고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그만큼 골치를 썩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었으면 그만큼 떨어지는 허무감도 깊습니다. 돈이 많이 있었으면 그럴수록 더욱 비참합니다. 도저히 희망이 없습니다. 이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기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봉사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아침의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정상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 믿으니까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 자신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에는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투자합니다. 결과는 너무나 비참합니다. 실상은 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중립이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속하든지 마귀 편에 속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예수님을 모르시는 분들, 여러분들이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 말하면 거부반응을 나태내실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든지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배받기를 거절하면 마귀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안 섬기니까 마귀가 대신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점쟁이를 찾아다닙니다. 현대인일수록, 지식인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재벌, 정치인, 국회의원들은 유명한 점쟁이들을 단골로 찾고 있습니다. 인텔리요 엘리트들이 그러합니다.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매여 있으니 자동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하여 지배받고 있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중에 집안에 부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왜 그런 것을 가져다가 벽에 붙이고, 장롱과 베개 속에 넣어 둡니까? 마귀가 지배하니까 두려움으로 그렇습니다. 꼼짝없이 당하는 것입니다. 종노릇합니다. 쇠사슬에 매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부적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종이조각, 그림조각,글씨조각입니다. 온 천지만물을 지으신 분이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믿는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적을 모두 불태워 버립니다.

 

우상숭배자들은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잔치도 못하고, 이사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묘자리도 마음대로 못쓰고 잠자리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면 간단하게 해방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닐 때 인생은 비극적 인생이 됩니다.

 

 

 

3.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원수가 되어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인생은 윤회가 아닙니다. 역사에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종말도 다가옵니다. 그날이 되면 하나님이 모든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그날까지 행악자는 머리에 계속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그는 진노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장수가 불행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에 어느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발가벗고 설 수밖에 없습니다.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받을 때는 계급장을 모두 떼고 장교와 사병이 다같이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든 하나님 앞에는 모두 빈손 들고 서게 됩니다. 그날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 속에서 쌓은 진노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상황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관계를 개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해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는 하나님이 풀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원수된 매듭은 하나님이 푸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원수된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20)"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원수된 관계를 해결하실 분으로 오셨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마귀에게 종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식물인간이 되어 살다가 죽어도 인간은 죄인입니다.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손발을 꽁꽁 묶여 살다가 간대도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원수된 관계입니다. 강도가 자기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대신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를 그대로 받은 곳입니다. 십자가의 자리가 바로 지옥입니다. 그곳에서 지옥의 우리의 고난을 그가 담당하셨습니다.

 

마음 문을 열면 그가 보입니다. 믿으면 그가 보입니다. 지구 수십 억의 인구가 그를 믿고 있습니다. 믿고 확인하고 간증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류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원수된 관계를 해결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누구든지 용서받는다."

 

부자지간에 원수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로 여기지 않았고 아들은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어머니가 그 일로 큰 병을 얻어 죽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각처로 연락하여 아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아들을 오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당신의 아들입니다. 사랑하세요"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향해서는 "아버지를 사랑해야지" 말씀했습니다. 그들을 손을 마주잡게 하셨습니다. 잘못을 서로 고백하고 둘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그런 관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피흘리며 하나님과 나를 손잡게 하셔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를 믿으면 구원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전하는 것, 변화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4.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이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함을 조비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습니다.

 

 

 

5.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얻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

 

믿음은 나를 포기하고 상대방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탈 때 안전을 믿고 맡기기에 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모두 맡기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 인생 모두 맡으세요." 의심없이 예수님에게 모두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랑거리를 들고 나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를 붙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의 모든 것을 그가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근본적으로 신분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의인으로 보십니다. 용서받는 기쁨이 넘칩니다. 근본의 죄와 신분이 해결됩니다.

 

불신자들은 고독하고 고통을 당할 때 술집을 찾고, 친구를 찾고, 담배를 찾습니다.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고 있으나 마음의 번민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께는 다 고백을 합니다.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기도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비서가 좇아가서 깃발을 세웁니다. "지금은 대통령이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하는 표시입니다. 링컨은 시간제한이 없이 기도했습니다. 카펫트에 구멍이 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노예해방보다도 국가가 양분될 위기를 막은 기도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찾은 하나님, 그가 만난 하나님을 여러분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입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인생 가운데 쌓이게 됩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이 시간 영접하시고 새 삶을 얻으시기 바립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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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송영 /1:15-23

2014-03-14 15:32:01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찬송가를 부릅니다. 찬송가도 주제에 따라서 종류가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새찬송가>의 제목 분류에 따르면 15개로 나뉩니다. 예배, 성부, 성자, 성령, 성경, 교회 ... 영창과 기도송으로 이어집니다. 전체 645장 중에서 1-62장까지만 예배 찬송입니다.

 

예배 때 이 찬송가를 부르라는 뜻입니다. 다르게 분류된 찬송가를 부르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예배의 본질에 바로 서려면 예배 찬송을 부르는 게 좋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고 그것을 찬양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찬양을 가리켜서 송가, 또는 송영(doxology)이라고도 합니다.

 

송영은 일종의 기도문, 또는 신앙고백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런 송영이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에도 나오고 편지에도 나옵니다. 예컨대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부른 노래가 그런 것들입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1:49,50) 바울도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읽은 골로새서를 쓰면서 당시 교회가 부르던 송영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송영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1:15) 이런 송영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각적인 차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은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걸 적나라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큰 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병을 낫게 해주시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병이 나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걸 하나님 경험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사업이 망했다가 다시 좋아졌다거나, 말썽 피우는 남편이나 자식들이 변했다거나, 또는 자기의 죄가 용서받은 확신이 들었다는 경험이 그런 것들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태를 가리켜 성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는데 복잡할 게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입니다. 보통 형상이라는 단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 형태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말을 오해하면 하나님도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헬라어 에이콘 투 데우의 번역입니다. 에이콘 개념이 중요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에이콘은 likeness(닮음), image(인상), form(형상), appearance(외관), statue(조각상) 등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그는 ...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그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 하고 생각하겠지요.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믿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못 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으로 여깁니다.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신학적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나가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초기 기독교에 만연했던 가현설입니다.

 

여기에 빠졌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하고 인성은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인간의 모든 모습들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딜레마에 빠진 겁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신이라는 사실과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에서 인간적 한계를 안고 살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은 실제가 아니라 하나의 그림자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도케티즘’, 즉 가현설입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가현설을 이단으로 배격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삶은 가현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이것으로 가현설주의자들의 문제 제기가 완전히 해결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현설적인 신앙에 물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과 같은 초능력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물론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걸 문자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신과 같은 초능력자라고 한다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질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사람들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을 한 순간에 지상 낙원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 교육도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역사적 한계를 가현설주의자들처럼 교묘하게 비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는 기독교의 믿음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이것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라도 골로새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골로새서의 이 내용과 비슷한 것을 말하는 신약성서의 다른 구절을 몇 군데 보겠습니다. 1) 9:28-36절에는 소위 변화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하고 옷에서도 광채가 났고,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제자들이 예수의 영광을 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영광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합니다. 변화산에서의 사건은 예수님에게 신적인 영광이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2) 고후 4:6절은 이렇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얼굴은 단순히 실제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운명 전체를 가리킵니다.

 

3) 2: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라는 단어는 헬라어 모르페의 번역입니다. 모르페는 nature, form이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신약성경 세 대목과 더불어 오늘 본문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일치하시는 분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초기 기도교인들은 예수님께 송영을 바친 겁니다.

 

그 송영의 내용이 오늘 본문 15b절부터 20절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에 의해서만 근거가 주어집니다. 만물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킨 분이십니다. 송영의 내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전달이 되었지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근원이며 미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뚫어본 초기 기독교인들은 만물의 구원을 예수님이 이루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 사실을 송영으로 노래했습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의 지극하고 거룩한 태도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송영이 어떤 분들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며, 어떤 분들에게는 멀리 느껴질 것입니다. 또는 상투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억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삶을 실질적으로 대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본문 20b절에 나오는 화목에 대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를 보십시오. 만물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만물이 하나님과 불화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나 불화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즐겨도 참된 만족이 불가능합니다.

 

돈을 벌어보십시오. 사업에 성공을 거둬보십시오. 고상한 취미생활에 전력해보십시오. 세상을 조금만 깊이 성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삶이 얼마나 지루한지 잘 알 겁니다. 거기에 열광적으로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마치 숙취했다가 빠져나온 사람처럼 더욱더 심각하게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느낄 겁니다.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화해되는 걸 경험한 겁니다.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생명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존경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바쳐져야할 송영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일상의 송영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다 동의하실 겁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믿고 그분을 찬송합니다. 문제는 이런 믿음이 일상에서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16b절을 읽어보십시오.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런 차원으로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왕권과 주권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당시 로마 황제 체제 아래서 일종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관공서 앞에 세워놓은 황제 신상 앞에서 절하지 않으면 공무원이 될 수 없었고, 그곳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가 많은 황제들에 의해서 정치적 희생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어서 카타콤으로 피신해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 송영을 부른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로마 시대와 다르긴 하지만 그리스도 송영을 삶으로 살아내기는 여전히 어려운 시절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이 오늘의 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두려울 겁니다. 어떤 신자들은 옆에서 보기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힘들어 합니다. 삶에 지쳐 있습니다. 실제로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건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송영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부자가 되는 것에만 마음이 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에 대한 두려움과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돈이 운명을 지배하는 이런 세상에서 당신은 그걸 초월하며 사냐, 하고 묻는다면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가난하면 장마철인데도 위험한 배수관 설치 현장에 들어가서 일하다가 죽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와 같은 나라에서는 부과 가난이 세습되는 실정입니다. 갑과 을의 숙명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이런 나라에서 그리스도 송영의 태도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저도 압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겁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믿음은 이미 손 안에 들어온 것을 믿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여전히 황제가, 즉 자본주의가 왕권을 행사합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사실이 아직은 현실로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전혀 다른 현실을 이미 보고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 그것입니다. 위선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송영을 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이 완성될 순간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모여서 그 사실을 찬송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그리스도 송영의 전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1:15-20

2008-01-18 09:49:18

 

 

오늘성경은 바울의 신앙고백과 같은 말씀이면서 우리 모두에게 고백되어져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오늘 성경은 그분은 하나님 되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믿습니까? 15절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 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지요.

 

그 다음에 말씀은 하나님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창조주라고 고백합니다.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절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다 그 안에서 지어져 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쩨 고백은 예수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8절 그는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했습니다. 더욱이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충만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충만으로 가득하기에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시는 고백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충만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가만히 앉아서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신앙고백을 인정 하고 믿습니까? 그러하다면 당신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은 460,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의 크리스천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은 4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고 합니다. 특히 405장은 지금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어 축하 만찬의 자리에서 불렀다고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부시가 젊은 날에는 마약에 빠져 폐인과 같은 인생을 살았는데, 정말 나 같은 죄인 살리신주님의 은혜로 마약을 벗어나게 되고, 텍사스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 찬송은 자기 고백적인 찬송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 찬송을 지은사람이 바로 존 뉴톤인데, 그의 인생 역정 역시 부시와 비슷합니다. 존 뉴톤은 82세가 되어 자기는 두 가지 사실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죄인 된 삶을 잊을 수 없고, 또 하나는 자기 같은 죄인을 구해주신예수님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존 뉴톤은 '과거에 실패한 자'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냥해 미국에 파는 노예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셨고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한 평생 전도자로 살게 하셨고, 이 찬송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고 변화되게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창조자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바울은 앞장서서 예수 믿는자를 심히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게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둘 째 편지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우리 마음에 비치셨다. 우리는 우리마음에 비친 복음의 빛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자들은 모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죄인으로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그의 형상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있지 않고 어둠속에 있는 자들은 모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마귀가 저들을 사로잡고 있기에 그 마음이 혼미해서 예수님을 보고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는 영광의 광채가 비취었습니다. 그럼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닫는 순간부터 환한 빛이 비취어 내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 합니다.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은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머리는 통치자를 말합니다. 통치자는 모든 것을 지배 합니다. 머리는 중요합니다. 머리가 잘 못 지시를 하면 지체들이 괴롭습니다. 지체들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체된 우리들을 사랑하는 주님이 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유익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때로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지시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아파트 단지 내에 13층에서 떨어진 아이가 있었는데 약간의 부상을 입고 살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30m에서 떨어진 압력은 100km로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약간의 부상만 입었으니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조사를 해 보니 13층에서 아이가 떨어지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1차로 나무에 떨어지고, 이어서 잔디밭에 떨어졌기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잔디밭에 떨어졌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더 큰 기적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옥으로 정신 없이 떨어지던 사람입니다. 다 지옥으로 떠러져야 하는데 주님이 십자가 줄로 우리를 붙들어 매어서 천국으로 끌려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지옥에 떨어져 죽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진 내가 기적 속에 사는 것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십자가로 나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23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의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기적을 보리라, 천국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 구원을 받으리라. 할렐루야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사냥을 할 때,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5%정도랍니다. 그러니까 100번 시도해서 겨우 다섯 번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신비한 생존을 위한 조화의 법칙에 찬양을 드렸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무서운 맹수들이 사냥을 할 때 95%가 성공하는 것이라면 약한 짐승들이 살아남겠습니까? 그런데 5%밖에 되지 않아요.

 

얼마나 민첩하고 빠릅니까? 날카로운 발톱이 있습니다. 튼튼한 이빨이 있습니다. 힘이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한 것들에게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지혜와 재주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 날렵하게 하시고 사자는 오래 달리지 못하지만 약한 것들은 오래 달려도 지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사 이기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럼으로 흔들리지 말아야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어도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도 어쩔 도리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실패한 자리에도 오시는 분입니다. 그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검은 대륙에 선교사로 갔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말년에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배시간에 리빙스턴은 수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당시 그의 오른 팔은 사자에게 물려 불구가 되어 있었기에 학생들은 진지하게 리빙스턴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연설을 마치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서더니 그렇게 힘든 아프리카 생활을 잘 이겨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이 대답하기를 특별한 비결은 없습니다. 그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가 나를 끝가지 붙들어 주었을 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답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인생의 답으로 알고 사는 여러분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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