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요한일서 설교 모음

요한일서 4장 설교 모음

Jessi J 2024. 8. 1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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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사랑의 속성 /요일4:7-11/ 곽선희 목사

2014-11-23 07:08:25

 

요사이 유행하는 말 중에 '대책 없는 자'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하고, 도대체 구제할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인가 한번 봅시다.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L.ALos Angeles가 다르다는 사람. 으악새가 새의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 제가 사전 찾아보았더니 으악새라고 되어있지 않고 억새라고 되어 있어요. 으악새는 방언이랍니다. 어쨌든 으악새는 풀 이름이지 새 이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으악새는 새 이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 이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랑받고 살면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 구제불능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뉘우칠 때에는 또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하늘 아래 사랑이 있냐는 것입니다. 사랑을 부정하고 사는 사람,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대책 없습니다.

 

Cast Away 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나갔습니다만은 아주 명화입니다. 그 내용 중에 보면 두 남녀가 열렬히 사랑을 하고 약혼을 하고 결혼날짜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놀랜드' 라는 이 남자가 자기가 나가는 회사의 일로 인해서 그는 잠깐 출장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이 비행기가 추락되면서 그 비행기에 탄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놀랜드' 라는 사람이 남태평양 어느 무인도에 표류됩니다. 거기서 그는 살아남고 감격합니다만은 그러나 전혀 사람이 살지 않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 이 섬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과일을 따먹고 바위틈에 은신하면서 이렇게 버티고 4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이 그로 하여금 이 많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뗏목을 만들어서 그 배를 만들었죠. 이렇게 띄워 가지고 나가다가 지나가는 상선에게 발견되어서 구출이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애인은 다른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어요. 이 나라의 법은 실종되고 1년이 지나면 사망처리를 합니다.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장례식도 치르고 그럽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결혼을 하고 어린 얘들까지 낳았어요.

 

이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지만은 사랑하는 사람, 모처럼 안정을 얻은 그 사람, 그 가정을 파괴할 수가 없어요. 그는 할 수 없이 물러섭니다. 그리고, 넓은 광야를 앞에 놓고 갈 곳을 잃었어요. '앞으로 가야하나? 뒤로 가야하나? 옆으로 가야하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리고 광야를 바라보며 방황하는 그런 장면으로 이 영화는 끝납니다. 여러분, 무인도에서 4년을 고독하게 가난과 고통과 어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었지만은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허탈감, 이제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렇게 딱 한 문장으로 기록된 곳은 성경에 여기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생명이다.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사랑 없이 생명 없습니다. 살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사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사랑의 계시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하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고요.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로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계시합니다.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했다고. 독생자를 주었다고. ? 그 속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가 죄인을 사랑하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희생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증거하고, 이제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믿으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믿으라, 이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행복하라고. 또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받고 이 사랑을 베풀라고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동물적 사랑과 인간적 사랑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동물이라는 것은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동물적 충동, 행복이올시다.

 

탄자니아나 케냐, 이런 데 가서 보면 넓은 벌판에 많은 짐승들이 사는 것을 봅니다. 짚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을 해보면 동물들은 정말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나는 그 들판을 지나가다가 사자들이 모인 곳, 잘 보기 힘든 곳이니까 사자가 한 30마리 있는 그런 자리를 그 소굴에 들어가보면, 전 재미있게 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자가 짐승을 잡아먹고 배가 부른 다음에 말이죠, 나무 밑에서 아주 벌렁 누웠어요. 벌렁 누워가지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낮잠을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옆에는 커다란 수놈, 왕 사자가 떡 버티고 앉아 있고 거기에는 여러 마리의 암놈 사자가 있고 그리고 새끼들이 이렇게, 그 가정을 거느리고 이러고 앉아있는데 꺼벅꺼벅 졸고 앉아있는데,

 

그 숫사자를 자세히 보니까요 얼굴이 만신창이더라구요. 그 가정을 지키느라고 죽을 고생을 한답니다. 그 왕권을 2년밖에는 지키지 못한답니다. 조금만 힘이 약해지면 다른 젊은 숫사자가 와서 점령을 해버린답니다. 그 사자도 편하지 않더라구요.

 

아주 힘든 생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저 '자네들도 별로 행복하지 못하겠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나와 봤습니다. 동물은 이 본능적 욕구를 충족할 때 편안합니다. 인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사랑을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보면은 어떻게든지 사랑을 확인하려고, 스킨쉽을 통해서 가까이 손을 잡고, 비비고, 안기고, 무릎에 앉고 잠깐이라도 이 사랑 옆에서 떠날 때, 무릎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밀치던가 해보세요. ''하고 울고 사흘 후에는 감기 걸립니다.

 

아주 힘듭니다. 순간순간 자신만만하게 '우리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사랑한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때만 행복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이고 원초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지 않고는 못 살고,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삽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확인하고 알고 깨닫고 느끼고 감사하는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설사, 좀 어려운 고난을 치른다 하더라도 사랑만 확실하면 살 수 있습니다.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질병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무너질 때,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지능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urg)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유명한 사랑의 삼각 이론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치 정삼각형처럼 삼각 균형이 잡힌 그 가운데에 참 사랑이 있다' 하는 것이올시다.

 

첫째 요소가 뭐냐하면은 Intimacy, 친밀감이올시다. 사랑은 친밀함을 느껴야 되요. '가까이 있다. 저와 나는 가깝다. 저는 나를 이해한다. 저는 나의 사정을 잘 알아주신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이렇게 친밀감을 느끼는 그런 정서가 이게 사랑입니다. '가까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비록 조금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다. 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친밀감, 그것이 사랑입니다. 두번째는 Passion 이올시다. 이것은 정열입니다. 사랑이 정열로 작용해서 로맨틱하고 어떤 때는 욕망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소유하려고 하고 꼭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사실은 그 뿌리에 사랑이 있어요.

 

번째 요소는 Promise and Responsibility입니다. 이것은 약속과 책임이 있는 거예요. 책임을 지는 거예요. 약속이 확실하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나아가서 책임을 집니다.

 

저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요 저의 실수가 나의 실수입니다. 저는 나와 상관이 없듯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실수를 보더라도 그건 바로 내 책임이예요.

 

자식의 실수를 내 탓이라고 아내의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남편의 잘못도 그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책임을 지는 마음이 그게 사랑이요. 무책임하게 비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은 바로 동체의식이거든요. 일체 의식이요.

 

하나로 생각하게 될 때 책임을 집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 그러면 여기서 이것이 삼각형처럼 꼭 균형을 잡아야 된대요. 왜냐하면 친밀감에 치우치면 감상주의자가 되요. 요새말로 '마마보이' 같은, 이런 것이 된다 이거예요. , 정열에 치우치게 되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약속과 책임, 이 의무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아주 메마르게 됩니다. 냉정하고 메마르고. 요새 말로 정열이 없어요. 그런고로, 이 세 요소가 함께 합쳐서 정삼각형처럼 이 세 변이 같은 길이로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참 사랑이다, 라고 합니다.

 

이제 이 사랑의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순간부터 사랑의 성격을 떠납니다. 사랑은 받아들임에 있는 것이올시다. 받는 존재 의식이요 받는 감격이요 받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5장에 있는 말씀을 전 개인적으로 많이 사랑합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혹이라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의심이 생길 때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믿어집니다.

 

'내가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기 사랑을 확증해 주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셨다'고요. 그 때가 중요합니다.

 

연약할 때, 또 죄인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때 벌써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어요.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해서 사랑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살고, 봉사한다고 이제서야 사랑을 받을 거라고, 보상적으로 사랑을 받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참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잘해서 사랑을 받는 겁니까? 그렇게 똑똑한 척 하고 계산 많이 하는 자녀는 사랑받지 못해요. 오히려 실수도 많고 부족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우리 아버지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그 깨달음과 그 믿음이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예요

 

.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비유를 아시잖아요. 그가 집을 나가 버렸어요. 그리고 허랑 방탕했어요. 왜 안돌아 왔을까?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돈 벌어가지고 가야지, 출세해서 가야지, 내가 이 모양으로 갈 수 없지 않나?

 

체면, 위신, 생각하는 중에 그는 못 돌아왔어요. 바르게 돌아와 보려고 애썼겠지만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서 마지막에 굶어 죽게 되어가지고는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그를 환영하고, '소를 잡아라, 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잔치를, 환영 잔치를 합니다.

 

아들은 너무 부끄러워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에 저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기뻐하고,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이렇게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그때 탕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 걸.' 내가 집을 나갔으니 아버지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고, 내가 아버지를 잊었을 때 아버지도 나를 저주하고 호적에서 지워버리고 잊어버린 줄 알았지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 그 아버지는 사랑했고,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게 아닙니다.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동안 탕자는 너무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올시다.

 

오래 전에 읽은 책 한 권의 이야기를 저는 늘 잊지를 않고 종종 생각합니다. 캐시라고 하는 여성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주 발랄하고 연애를 했는데 연애에서 실패하고 배신당하게 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은 그는 집을 나갑니다.

 

넓은 세상에 가서 마음대로 살아버립니다, 그 젊은 육체를 가지고. 창녀가 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마지막엔 마약 중독자까지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나니까 몸은 시들고 병들고, 이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는 죽을 때가 되었다. 강가에 나가서 투신자살을 하려고 내려다 보는데 강물에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했습니다. '10년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늙었을까? 어떤 모습일까?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 뵙고, 그리고 돌아와서 죽을 것이다. 죽는 일은 바쁘지 않다.' 그래서 낮에 올 수가 없어서 먼 빛으로 보려고 밤에, 캄캄한 밤에 집에 돌아와 봤는데, 집안과 밖에 외등까지 불을 환하게 켜 놓았어요. '오늘 무슨 파티가 있었나? 왜 이렇게 불을 켜 놓았나?' 그런데 조용해요. '이상하다. 파티가 끝났는가?'

 

대문을 잠깐 밀어보았더니 잠그지 않았어요. '대문도 잠그지 않고 주무시누만.' 조금 더 미는데 ''하고 소리가 나자마자 안에서 어머니가 "캐시야" 그냥 맨발로 뛰어 나옵니다. 꼼짝 못하고 붙들렸습니다. "어머니, 어째서 이렇게 불을 많이 켜 놓은 것입니까?" 그때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 한번도 불을 끈 일도 없고, 문을 잠근 일이 없다." 케시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가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계속 나를 사랑하고 있었더라'는 것이에요. 돌아왔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그 아픈 마음으로 그 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이것을 모르고 방황한 것이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고, 그런고로 벌써 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내가 죄인입니까? 더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내가 병들었습니까?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지요. 내가 실패했습니까?

 

남보다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에요. 받고 있는 것이에요.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은 믿음입니다.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한 이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진실한 자세는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 영원한 세계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낙심함이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마땅하다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런고로 내가 남을 사랑하고, 또 나 자신도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엄청난 사랑 안에 있는 나, 사랑받는 나, 그 존재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를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오늘도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방황할 때에도 끝까지 사랑해 주시니 그 사랑, 깊이 깊이 깨닫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 충만함이 있게 하소서. 내가 처한 처지 이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랑의 사람으로 그런 사람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요일4:12-21/ 곽선희 목사

2014-11-20 14:02:19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매일같 이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 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 다. 특별히 이 세상이 향방없이 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은 미래학자의 말 치고 맞아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치 럭비 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 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 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 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 습니다. 어쩌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더 확실하게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 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 노래라고 하는 것, 노래라고 하지 않았죠.

 

소리라고 했죠. 소 리, 가락, 그렇게 했습니다 만은 그 다음에 뭐 자꾸 변하는데 트로트, 재즈, 락앤롤, 비틀즈,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요새 와서 테크노. 아무리 제가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 려고 해도 이게 정말 노래인가,

 

이 발악인가 노래인가 알 수 없어요. 아무리 좋아지려고 해도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저는 제 나이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합니다만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노래, 어느 나라 노래든지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 떠 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 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 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 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되요.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무서운 맹수들도 한번은 사랑해야 생명을 생산합니다. 또 사랑 속에서 생명 이 자랍니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 사랑하는 걸 보면 신기합디다. 그 렇게 사랑해서 생명은 태어나고, 키 워나고, 자라납니다. 그런고로 생명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옛날 책이나, 혹은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는 이것 을 가마에다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옛날 얘기니까 그저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가마꾼이 색시를 태우고 앞에서 가마꾼이 메 고 가고 뒷사람이 또 메고 갑니다. 이런 경우 앞에서 가는 사람은 앞을 내다보며, 앞을 환히 보면서 가마꾼 이 가마를 메고 갑니다 만은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보입 니다.

 

앞에는 가마가 꽉 막았는데 이걸 붙들고 갑니다. 이래서 옛날 어른들은 이걸 이렇게 설명합니다. 앞에 있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 딸려 가는 가마꾼은 믿음이요, 가운 데 있는 색시는 사랑이라고. 그래 서 신랑집에 가면은 이 두 가마꾼은 물러가고 가마는 해체됩니다.

 

그리 고 신부만 신랑 방에 들어갑니다 그 런고로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그렇 게 옛날 어른들은 비유해서 설명했 습니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 해서 살아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때는 심지어는 죽음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참 사랑에 감격 하면 죽는 문제가 하등의 문제가 되 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력 입니다. 월남전 때에 있었던 실화 입니다. 전세가 불리해 가지고 일 선에서 뒤로 물러섰습니다. 후퇴할 때가 이 작전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 후퇴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총에 맞았습니다. 뒤에서 쏘는 총 에 맞아서 지금 비틀거리고 있습니 다. 이렇게 후퇴 먼저 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보니까 저기에 비틀거리고 쓰러져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 은가, 여기서 이 사랑하는 친구 하 나가 그 총알이 비오듯하는 가운데 를 뚫고 들어가서 저걸 구출하겠다 고 하니까 소대장이 말렸습니다.

 

"이미 총을 맞았고 피를 많이 흘렸 고, 저 사람은 살지 못한다. 굳이 네가 거기에 들어갔다가 너까지 죽 을 거 없지 않느냐? 가지 마라"

 

그 랬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거기 서 손을 들며 쓰러져있는 그 친구를 바라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대로 그 총알 속을 뚫고 들어가서 친구를 업고 나옵니다. 업힌 친구 는 귀에다 대고 자기를 업고 가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빙그레 웃으 면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나는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아무 여한이 없다"

그리고 죽 었어요. 죽은 시체를 업고 와서 내 려놓을 때에 소대장이

"거 봐라! 너 그거 죽을 사람, 어차피 죽을 사 람 살리려고 하다가 너까지 죽을 뻔 했다"

그럴 때에 이 친구는 말했습 니다.

"아닙니다. 내 친구는 내 등 에 업혀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참 사랑!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면 뭐 고생이 다, 질병이다, 문제가 되지 않고 죽 음까지도 넉넉하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에요. 결국은 사랑입니다. 이 귀한 사랑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예요.

 

둘째는 사랑이 병들어서 문제예요.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 에요 병들었어요. 또 사랑에 거짓 이 문제입니다. 사랑에 속았어요.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 게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 도 있습니다. 사랑의 무지가 문제 입니다.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사 랑을 모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사랑의 Discommunication입니다.

 

사랑이 통하질 않습니다. 분명히 사랑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의사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 랑이 절단됩니다. 그 문제는 내가 믿질 않기 때문에. 분명히 사랑하 고 있고 사랑 받고 있는데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되고, 사 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사랑을 모르면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의 원초적 속 성을 설명하는 귀중한 말씀이 이어 집니다. 사랑이 중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이 참 사랑의 의미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 이 참 사랑으로 그 의미를 다시 찾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 랑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은 위대한 말씀 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유명한 말입 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여러 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느껴봤습 니까? 우리는 간간이 결정적 시간 을 맞습니다. 어떤 경우에

"맞아,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크게 깨달 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세상 은 달라집니다. 세상 역사가 바뀝 니다. 삼라만상이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완전히 사랑의 세계 를 보게됩니다. 제 개인 얘기를 해 서 미안합니다 만은, 전 어렸을 때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는 한 번도 맞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 버지로부터는 매를 많이 맞았습니 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만은 어떨 때는 왜 이렇게 자꾸만 때리시나 좀 불만도 많았습니다. 저는 날짜도 기억합니다. 열일곱살 되던 때, 그 때 마지막으로 맞았습니다. 그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잘못이 아니었 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슨 반항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설명 도 하면 안됩니다. 무조건 맞았습 니다. 저를 때릴 때에 어머니가 말 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가실 때에 딱 붙들고 한 마 디 하시는 것을 제가 문 안에서 들 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들을 사랑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

오 늘은 분명히 당신이 잘못했는데 왜 다 큰애를 말로 타이르지 않고 때리 냐고, 아버지는 이렇게 조용히 대답 합니다

"자식은 겉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무슨 말을 . 그렇게 하느냐고, 사랑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지. 저 는 문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사랑 하긴 하는가보다. 그때부터 생각을 다시 돌리고 보니까 정말 아버지의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신 거예요. 과거도 미래도, 아버지는 엄청나게 나를 사랑했어요. 사랑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어 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수 용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말씀을 듣습 니다, 사랑의 계시를 봅니다,

 

사랑의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다 하나님의 사 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사랑의 뿌리요, 사랑의 원초적 생명력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 니다. 자 그리고 오늘 성경은 우리 에게 일러줍니다. 그가 먼저 사랑 했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사랑은 다 철 난 다음의 사랑입니 다.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네 살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여러분 젖 먹던 생각이 난다면 그 사람은 다섯 살까지 먹은 사람이요.

 

결국은 가 장 소중한 사랑은 네 살 전에 있는 겁니다. 그 모든 소중한 사랑은 기 억에 없어요. 그런고로 사랑은 깨 달으면서부터 사랑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모르고 있어요, 엄청난 사랑 을 받고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래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사랑이 없으면 세상에 당신이 존재하질 못 해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 나를 사랑하시고, 벌써 오래 전 부터 내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 과 원수 되었을 때, 내가 아무 것도 모를 때 그는 나를 사랑하셨어요. 나는 때때로 내 손을 내밀고

 

"여기 다가 내가 원하는 걸 주세요. 그래 야 사랑이 아닙니까?"라고 고집을 피우지만,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주시지 않는 것이 사랑이죠. 우리 는 자녀들이 뭘 달라고 할 때에 부 득불 가졌던 것도 빼앗을 때가 있어 요.

 

? 빼앗는 게 사랑이니까. 철 난다는 게 뭡니까? 철이 나고 부터는 그게 아니죠. 빼앗는 것도 사랑이고, 때리는 것도 사랑이고, 잔 소리도 사랑이고.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게 철이 난 것 이죠. 이제부터 알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보상으로서의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받은 사랑에 만족할 뿐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타 임즈가, 뉴욕 타임즈가 베스트셀러 로 제1위로 뽑은 책 한 권이 있습니 다. Chicken Soup for the Couples Soul 이라고 하는 그런 책인데요.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 니다. 수잔 앤드슨이라고 하는 아 주머니가 있는데 설흔네살입니다. 직장여성입니다.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서 그는 실명하게 됩니다. 장 님이 됐습니다. 참 마음이 괴로웠 지만은 1년 동안 치료받은 다음에, 그냥 집에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 직장에서 잘 받아주어서 다시 직장 에 나가게 됩니다.

 

버스를 타고 직 장에 나갈 때 남편이 동행해 주었습 니다. 참 공교롭게도 남편의 직장 과 자기 직장은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 남편은 일찍 떠나서 자기를 데려 다주고 그리고 다시 자기는 자기 직 장으로 갑니다. 이렇게 얼마동안을 했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이렇게 말 합니다. 남편은 군인인데요,

 

여보, 내가 늘 이렇게만 할 수가 없구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어 차피 당신은 언젠가라도 혼자 다녀 야 되겠는데 오늘부터는 혼자 직장 에 나가면 어떻겠냐고. 이 아내는 그때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 를 데려다 주는 것이 귀찮은 모양이 지?' 지겨우냐고, 내가 살아 있는 게 이렇게 불편하냐고, 짜증을 냈습니 다. 남편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러면 내가 도와주마 했는데 도 이 아내는 화가 났어요. 아니라 고 나 혼자 간다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직장에 나갔습니다. 하루 나 가고, 이틀 나가고, 보름동안을 나갔 습니다. 어느 날 버스운전사가 이 렇게 말합니다. 운전기사가 말하기 를

 

"아주머니, 참 복이 많으시네요. 부럽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아니 제가 이제 시각장애자인데 뭐가 이 렇게 부럽냐고 그러니까

 

"아닙니다. 아주머니가 여기 버스에서 내려서 저 사무실에 들어갈 때, 그때까지 저 밖에서 잘 생긴 군인 남자가 당 신을 매일같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들어갈 때 손을 흔들 었습니다"

그때에 이 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 남편이 나를 이렇 게 혼자 보내놓고 뒤따라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뿐이지요. 이미 내 주변에는 벌 써 사랑으로 충만한 거지요. 문제 는 깨달음이 없는 거요.

내 마음이 완악해서 내 마음에 사랑의 기본 요 소가 없어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 거죠. 오늘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벌써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이 뭐냐 하면서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 니다.

 

"네가 내게 대하듯 나도 네 게 대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율법이요 사랑이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하든 말든 관계없이 나는 너 를 사랑한다"

독선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 할 것이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참 사랑은 이것들이 아닙니다.

"그리 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여러분 자 녀를 사랑하십니까? 자녀 사랑해서 효도 받고 싶습니까? 자녀 사랑하 면서 실망하십니까? 사랑을 다시 한번 점검하세요, 재진단 해보세요.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을 대 할 때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세요. 그 고달픈 세상 을 살면서 나를 사랑하시던 그 어머 니의 사랑을 똑바로 생각하면 내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여건에서 자식 사랑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을 알고 감격할 때, 이제 누구를 사랑 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성 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마땅한 것 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요, 그건 공로도 아니요, 그건 자랑 거리도 아니요, 보상을 바랄 것 아 무 것도 없어요.

 

당연히 사랑해야 죠. 여기에는 아무 보상적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그랬어요. 사랑의 채널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부모 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하나님도 몰라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 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나 를 알고 이웃을 아는 것이에요. 여 러분 부모의 사랑을 고루고루 받은 사람은 그 성격이 아주 부드럽고 좋 아요. 어렸을 때 사랑을 바로 받지 못한 사람, 이거 삐뚤어져 놓으면 이건 구제불능이에요. 이것처럼 불 쌍한 게 없어요. 사랑이 궁핍해서, 사랑이 모자라서. 이런 심리학적 결론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사람은 절대 로 자살을 하지 않는답니다. 할아 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좀 다르거든 요. 내 자식은 내가 때리는데 손자 는 못 때리거든요. 어느 쪽은 좀 맹목적이기도 해요. 그러나 이 사 랑을 받고 자란 자녀는 절대로 절망 하지 않습니다. 이게 생명의 힘이 요, 현대를 사는 생명력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두 려움이 없다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해도 두려움 이 없고, 이웃을 대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상만사 아무리 바뀌어 도 환경과 아무관계 없습니다. 나 는 사랑에 취해 가지고 살아가고 있 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새 말로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유명한 주석가 벵겔(Bengel)4단 계로 설명을 합니다. 사랑도 두려 움도 없다면 무지함이요, 사랑 없이 두려움만 있다면 율법이요, 사랑도 두려움도 다 있다면 갈등이요, 두려 움이 없는 사랑 그것이 믿음이라고 요. 참 사랑, 그 안에는 평화와 용 기와 창의력이 있는 겁니다. 사랑 은 억지로 갈취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이 벌써 나를 사랑하시고, 십 자가 안에 계시된 그 무궁무진한 사 랑의 진리를 항상 새롭게 깨달아 가 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 리는 나 자신도 사랑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 님은 사랑이라 이것을 간증하며 항 상 자유하게 승리하는 그런 생을 살 아갈 수 있는 것이올시다.

 

 

 

 

사랑의 열매/요일4:7-12/ 이동원목사

2014-11-29 12:30:56

 

홍수가 나면 제일 흔한 것 제일 눈 에 띄는 것 많이 볼수 있는 것이 물 이죠 온 천지가 물입니다. 그러나 그때 가장 귀한 것은 아직도 물입니 다. 마실 물이죠 오늘 우리는 사랑 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TV를 켜도 또 뮤직 앨범을 들어도 또 영화를 가보아도 이 사랑 이라는 주제가 넘쳐흐르고 있는 세 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웃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아직도 사랑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 까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사 랑, 참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약 성경이 쓰 여지던 그 당시에는 소위 희랍문화 권 안에서는 로마그릭 그리스 로마 문화권 안에서 그 사랑을 뜻하는 여 러가지 그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예 를 들어서 에로스라든지 휠리아 스 토르게이런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 의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 경이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에로스 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여지지 않습니다. 휠리아는 좀 나오구요 스 토르게는 가끔 나옵니다.

 

아 참된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싶어하는 그 사랑 그 사랑을 표현하 기 위해서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그 당시에 사장되어 있던 단어 사람들 이 보편적으로 쓰지않던 죽어 있었 던 사어라고 할 수 있었던 단어 하 나를 끄집어 냅니다. 그래서 그 단 어를 재생시켰습니다.

 

그 단어가 바 로 아가페라는 단어 입니다. 아가페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요한 일 서에 보시면 아가페라는 단어가 동 사로 동사형 아가파오라는 단어로 28번 또 명사로 18번이나 등장합니 다.

 

아가페 사랑은 한 마디로 말하 면 주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조건 을 넘어서는 사랑, 타산이 없는 따 지지 않는 사랑,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할 때 상대방 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이것이 아가 페적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예 수 믿고 구원 받았을 때 우리는 모 두 이 사랑을 접한 것 입니다. 처음 으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귀한 그 런 사랑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 것이 죠. 그런데 우리가 경험했던 이 사 랑은 그냥 정지된 사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계 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 리의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 보시면 성령 의 열매는. 하고 제일 먼저 강조 된 것이 뭡니까? 사랑이죠 근데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바로 아가페 입 니다. 아가페 자 우리가 이 가을 우 리가 맺어야할 사랑의 열매에 대해 서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보고 싶습 니다.

 

왜 우리는 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는 열 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장 그러 면 사실 고린도 전서13장 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장이 바로 요한 일서4장 인데 오늘 요한 일서 4장을 통해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싶어요 자 우리는 왜 이 사랑의 열매를 맺 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 첫째 대답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 이시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자 본문의 8절을 같 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8절 읽어요 시작!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 님을 알지 못 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 이심이라 여기 하나님이 뭐라 그랬어요?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 랑이시다 GOD is Love 사랑은 하 나님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의 속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하실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유일한 일 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자 생각을 해 보세요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 하셨습니까? 그가 사랑 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인격적 관계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 만 물을 지으시고 그리고 만물 가운데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창조의 사건이 발생한 것 입 니다. 구원의 사건, 구속의 사건도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의 관계 를 하나님과 온전히 회복할 수 있도 록 구원의 사건을, 십자가의 사건을 주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 입니다.

 

구원 사랑하시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 입니다. 심판도 저는 사랑 때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사랑 하는 세계, 사랑하는 대상 안에서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하 나님은 심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밑바탕에서 도 그분의 사랑의 의지를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천국을 준비하신 하 나님 왜 그럴까요? 사랑하시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성취하지 못 한 꿈, 미완성의 꿈, 혹은 깨어진 꿈, 이런 상처와 갈등을 경험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 상은 너무 불공평 한거야 세상은 정 의가 살아 있지 못하다고 우리가 탓 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 이 세상 뿐 이라면 이런 불평은 이런 원망은 타당한 것 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꿈이 온전 히 이루어질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 의 공의가 완전히 만족될 수 있는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셨습니다.

 

우 리 모두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는 불공평한 세상 그리고 원망스러운 세상이라고 말했던 우리 모두가 천 국에 가서는 모두 이렇게 말하게 될 것 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셔, 하나님은 사랑이셔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신 것 입니다.

 

자 바 로 그 사랑이신 하나님의 우리가 자 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도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합당한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느냐? 첫째 이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 째로 우리가 사랑 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사랑의 계시자이시기 때문에 그렇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사랑 의 계시자,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 신자 이십니다.

 

자 본문의 9절을 같 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9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 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네, 하나님 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그랬어요 나타난 바 되 었으니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의 사건 입니다.

 

거기서 우 리는 참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이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 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해서 외아들 을 내어주신 사랑, 제가 처음 예수 믿고 이십대 초에 교회에 나가기 시 작했을 때 어느 부흥 목사님의 말씀 한 얘기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촉촉한 감동으로 남아 있 어요.

 

어느날 목사님 두 분이 만나 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목사님 한 분은 아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근데 또 한 목사님은 딸 하나 밖에 없어요 그래 서로 자식들 이야기 하 다가 여보,

자네는 말이야 아들 다 섯 씩이나 되니까 나 우리집에 양자 하나 보내지 그러지 뭐 하고 쉽게 대답을 했어요 그 분이 집에 가서 사모님에게 얼마나 야단을 맞았을까 요? 그러나 약속에 철저했던 그 분은 어 자기 의리와 약속을 지키고자 결심 했어요

 

그래 집에 가서 다섯 아들, 누워있는 다섯 아들을 보고 어떤 아 들을 양자로 친구에게 보낼 것인가, 장남, 장남은 안되죠 장남은 상속잔 데 둘째를 얼굴을 내려다 보았습니 다. 둘째, 다섯 아들 중에서 제일 똑 똑하고 제일 IQ가 높은 장래성이 촉망한 이 둘째 아들은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아들 을 봤어요 세번째 아들을 보니까 다 섯 아들 중에서 제일 자기를 닮았어 요 너무 너무 미남이에요 셋째 아들 은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네번째 아들을 봤습니다.

 

네번째 아 들은 다섯 아들 중에서 제일 병약하 고 병치례를 하고 밤낮 별별대고 너 무 너무 불쌍한 이 자식 넷째를 도 저히 줄 수는 없었습니다.

 

남은 다 섯번째 막내 막내 흐(웃음) 막낸데 말야(웃음) 제일 귀여운데 그래서 아들을 하나도 줄 수 없었던 이 분 은 그 날밤 요한 복음 316절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외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기 위 해서 자진해서 스스로 그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그 예 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 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로서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예수 님의 제자들 그 제자들의 특성은 사 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랑의 열 매를 맺어야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랑의 계시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 까?

세 번째로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 어야 할 이유, 세 번째는 우리가 믿고 있는 성령님 그 성령님이 사랑의 중매자가 되시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은 사랑의 촉진자라 그래도 괞찮아요 사랑의 중매자 사랑의 촉진자 성령은 사랑 의 중매자 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를 맺어주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사 랑을 체험케 하신 것이 성령의 역사 입니다. 자 오늘 요한 일서413절 을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 한 일서 413절 다같이 앍겠습니 다.

 

13절 다같이 시작!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 심으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그 분 안에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또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 이렇게 성경 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 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케 하시 고 우리로 하나님 앞에 가게한 사랑 의 중매자였습니다.

여러분! 이 중 매한다는 것이 참 중요하죠 중매 잘 만나서 일생을 행복하게 사는 분도 있고 또 중매 잘 못 만나서 굉장히 이상한 일 어려운 일들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길 들었어요 어떤 형제 한분이 어떤 자매를 너무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서 propose 하 고 또 사랑을 고백하는데 자매 쪽에 서 반응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이분 이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씩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사랑의 고백 편지를 썼어요 그 러자 일주일이면 이 자매는 일곱통 의 편지를 받았답니다.

 

그런데도 반 응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형제는 더 독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하루에 세 번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세 번씩을 loveletter를 쓰는거에요 하루에 세 번씩 편지를 써요 그래 편지를 얼마나 많이 받았겠어요 드 디어 이 자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 어났을까요? 이 자매가 결혼을 했는 데 편지 배달한 우체부하고 결혼 했 답니다. 중간에 전달한 사람하고 어 떻게 된거에요 그 비슷한 체험을 저 도 했습니다마는 제 아내가 심부름 을 좀 다니다가 저를 사랑하게 되었 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말씀드릴 수 가 없습니다.

 

어쨌든 어 참 이 중매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성령님 이 사랑의 중매자 혹은 사랑의 촉진 자가 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 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습 니다. 그 성령님은 지금도 사랑할 수 있는 energy와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디모데 후서 17절 에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 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 다 이렇게 번역되어 있는데 본래는 오직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근신 의 영을 주셨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 세요

그 분은 우리 안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금도 공급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야합니다. 여기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 는 어떻게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요?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저는 사랑의 열매라는 것은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에서 끝나 서는 안되요 그 고백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사랑해요 찬양했습니다. 거 기서 끝나도 안되요 그 사랑은 구체 적인 어떤 이웃을 향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한일서 4장의 결론을 아십니까? 결론은 마지막 21 절 입니다. 한 번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어요 요한일서 421절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421절 다같이 시작!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 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누구룰 사랑할 지니라?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자 어 떤식으로 전개 되었습니까?

 

우선 하 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사랑 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누구를 통 해서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서 어디에서 제일 잘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서 그리고 그 사랑은 누구 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전달 되었습 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사랑을 체험하고 또 그 하나님의 사 랑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이제 그 사랑은 누구에게 나타나야 한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순종 의식이에요 순종 의식, 더 중요한 것은 순종 의식 자 다시 한 번 이21 절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보시면 요 한일서 4장의 마지막 구절 우리가 이 뭐라그랬어요 계명을 주께 받았 나니 사랑하자 이 명령이 계명이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계명이다 이것 은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많은 명령과 교훈 가운 데서 가장 중요한 계명 이 명령을 주께 받았나니 명령은 순종을 요구 합니다. 그것이 명령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내 사랑하는 주님의 명령이라면 나 는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 고 살아야지 이런 순종의 의식이 얼 마나 있느냐 순종의 의식이 내가 정 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자 그 런 결단이 있고 또 그런 의지를 가 지고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 살고 있다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 에 이 명령 앞에 순종해야지 이 순 종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11절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본문 의1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기서 마땅하도다 라는 단어가 매우 강력 하게 강조된 단어입니다.

 

어떤 영 어 번역에 보시면 마땅하도다 이 표 현이 We 우리가 ought, ought love 이것은 must라는 조동사 보다도 더 강력한 뜻이에요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의뭅니다. 사랑은 의무입니다. 그것은 우리에 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자 우리가 순종하는 과정에서 뭐가 필요할까요 수고가 필요해요 사랑은 수고를 요 청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 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속에 있 어요 교회 나가고 예수믿는데 사랑 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런 마음은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왜 사랑의 열매가 맺혀지 지 않을까요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데살 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할 때 그들에 게 사랑의 수고가 있다는 것을 칭찬 했습니다. 사랑의 수고 우리의 사랑 이 열매를 맺을려면 반드시 수고라 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는 열매를 원하지만 수고라는 과정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 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많 습니다. 사랑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 다. 또 사랑을 표현해야 할 여러가 지의 영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 장 중요하게 사랑을 표현 할 수 있 는 방법 저는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복음 전해서 내 주변의 이웃들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 보다 이웃 사랑의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 수고를 좀 하셔야 죠 수고를 해야 열매를 다음 주일부 터 딸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 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감동적 인 한 이야기를 소개 할려고 합니 다.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어떤 분이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근데 제 가 알고 있는 고전하고 조금 달라요 제가 여러해 전에 그 미국에 살 때 그 Sunday School Times라는 주일 학교 교사들을 위한 잡지를 읽은 적 이 있습니다.

 

그때 이 얘기가 실려 있더라구요 Miss Thomson 이라는 여자 교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분은 교회와서도 교사를 했고 중 학교의 여선생님 이었습니다.

 

자기 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의 학생 가운 데서 Teddy Stellad라는 학생이 있 었대요 Teddy Stellad 근데 이 학 생이 여러 주간 동안 무단 결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왔습니다. 전활했지만 집에 연락이 되지 않습니 다.

 

그러나 이 분이 Christian 이었 기 때문에 그냥 제적 할 수가 없어 서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찿아 가 보았습니다. 가 보았더니 짐작 한 것처럼 가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출하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고 아버지의 술을 아들도 마 시고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 했어요 그래서 그 날부터 이 선생님은 학교 가 끝나면 이 학생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꼭 찾아 가는거에요. 내일도 모래도 계속해 서 찿아 갔습니다. 그리고 Teddy에 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Teddy , 선생님에게는 소원이 꼭 하나 있어 선생님이 반에서 학생들의 이 름을 부를 때 소위 roll coll을하고 학생들의 이름을 부 이 가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많은 열매 가운데 내가 사랑하는 한 영혼의 구원의 열매를 바치는 일 그 사랑의 수고는 결코 지나친 수고 일 수는 없습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사랑 안에 염려가 없어요 -1 /요일4:17-18/ 허운석선교사

2015-07-29 21:20:05

 

요한일서 4:17~18절을 교독하시겠습니다.

비로소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염려)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염려)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위 구절에서 두려움, ‘삶의 염려로 바꾸어도 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확신한 성도에게는.. 삶의 염려가 있을 수 없다는 주제의 설교문입니다.

 

 

십자가 센서 Sensor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저의 그 길지 않은 생을

이처럼 인도해 오신 것을 보면 기막히신 것 같아요.

제가 온전히 주님을 얻기 위한.. 그러한 삶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우리 딸이 디즈니랜드에서 제작한 동물의 왕국’ DVD를 아마존에 보내왔어요.

그 동물들이 수 천 Km, 물을 찾아 이동하는 그러한 모습이었어요.

 

제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아니 도대체 무슨 센서(전자 탐지기)가 있어서, 저 동물들은 수 천 킬로나 되는데 물을 찾아갈까?’

 

너무나 신비스럽잖아요. 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끌고 가는 것도 아니에요.

모세가 이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저희들끼리 그냥 그렇게 가는 거잖아요.

 

저는 항상 이렇게 뭘 보거나 그럴 때, 주님과 같이 보기를 바라요.

그 분초 마다 제가 항상 주님께 말을 해요. 보고하고.

내 마음의 상태를 매사에 주님께 올려요. 그것이 아주 철저하게 훈련이 되어있어요.

아마존에 가서 제가 훈련이 되었거든요.

 

벌레들한테 막 뜯기면서 분, 초마다 주님께 고백을 안 하고서는

도저히 살아 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들 말이지요. 정말 그 하나님, 내 뜻대로 살고 싶지 않으면,

내 뜻을 이루기를 원하지 않으시면

, 초마다 나에 대한 상황 보고를 반드시 하셔야 돼요.

 

내가 이렇게 나쁜 생각을 하고 있고, 내가 이렇게 흉측한 생각을 하고 있고

하나님, 제게 지금 이런 마음이 들고.. 그런 것을 주님께 아주 상세히 보고해야 되요.

그러면 내 자아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있겠어요?

 

그리고 내가 하는 생각이, 주님 뜻에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어떻게 알아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생각을 믿습니까? 절대로 믿으시면 안 돼요.

세상에 자기 생각을 믿는 사람처럼 멍청한 사람이 없고, 교만한 사람이 없어요.

 

일단 생각이 내 머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이 생각을 주님은 어떻게 생각 하시느냐고반드시 여쭈어 보아야 해요.

이것이 겸손이요, 죄악을 막는 일입니다.

 

그냥 내 뜻대로 생각하고 내 생각대로 하면,

그것을 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서 판단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으면, 어둠 속을 헤매며 고통당하는 날을 만날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로 내 생각을 믿으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여쭈어 봐야 되요.

 

동물의 왕국을 이렇게 보고 있는데, 제가 주님께 여쭤보는 거예요.

예수님, 저 동물들은 무슨 센서가 있어서 저렇게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센서를 가지고, 주님께로 찾아가서, 생명 되신 주님을 만날까요?’

제가 이렇게 여쭤보았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십자가이러시더라고요.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십자가가, 너희를 내게로, 생명의 근원되고 생수의 근원된 나에게로 인도한다는 거예요.

그 십자가의 센서가, 그게 성도의 영적인 본능이에요.

 

우리는 그렇잖아요.

순간적인 내 판단과 말과 행동이, 내 육적 본성인지, 영적인 본성인지 잘 몰라요.

그러나 늘 십자가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겁니다.

 

우리가 욕하고 싶을 때.. 십자가를 기억하면, 내 속에서 뭐라고 하죠? ‘하지 마

그 십자가가 바로 주님께 나를 데려가는 센서잖아요. 그렇죠.

하여간 놀라워요. 그 십자가의 센서가 나를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다가 보면,

수많은 핍박을 받을지라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치 수 백 킬로를 이동하는 초원의 짐승 떼처럼,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께 찾아가서,

생명수 강가에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멋져요!

 

 

내 자아를 죽이는 수술을 받아야.. 믿음의 계보에 들어갑니다.

 

지금도 제가 언니하고 이야기해요. 옛날 추억이 생각나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때, 수업 후에 따로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종종 했어요.

 

산수, 구구단을 배웠어요. 그런데 선생님 앞에 가면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항상 방과 후에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하는데, 집에 가려면 십 리를 넘게 걷는 거예요.

 

그러면 언니가 항상 마을 어귀에서 저를 기다리는 거예요.

언니가 기다렸다고 하면, 무슨 소문이 나겠어요?

내가 나머지 공부를 하고 왔다는 것을, 온 마을에 방송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동네 입구에서 언니가 보이면,

막 신경질을 내면서 빨리 가라, 누구 망신을 시키려고 그러느냐

그럴 정도로 언니가 나를 핍박을 하던 생각을 하면 참 소름 끼친다고..

그런 추억꺼리들을, 요즘도 만나면 서로 얘길 나누면서 웃는데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는 세상적인 학문이나 지식에 대해서는

완전히 잠궈 놓으셔서, 나는 외우지도 못해요. 남들 공부하는 것 흉내도 못해요.

남들은 외우기도 잘하지만, 나는 외우지도 못하고, 되는 게 없어요. 산수도 못하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저를 조금 열어 놓으셨어요.

그러니까 이쪽을 잠궈 놓으신 것은, 다른 쪽을 열어 놓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들 공부 못한다고 협박 하거나 공갈하거나 핍박하지 마세요.

그것도 다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잠궈 놓으시고 열어 놓으시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예수님 처음 믿고 나니까, 저는 정말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30년 동안.. 이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어요.

 

주님, 저는 거라사 광인과 같은 (미친) 자입니다.

저는 바로 왕보다 더 강퍅한 인간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주 완고한 자요. 고집스러운 자요.

세상에! 성경에 기록된 나쁜 것은, 다 나로 인하여 기록이 되었군요! (그래서 회개합니다)’

 

내가 성경을 보니까, 안 지은 죄가 없어요. 안 행한 죄가 없어요.

여러분, 그것 발견하셨어요? 이것을 발견하셔야 되요.

성경에 악한 죄, 악한 놈이라고 써놓은 것이.. 죄다 제게 적용되더라고요.

 

그래야 (죄의 권능을 깨닫고,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십자가에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보혈에

내 심령을 적시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담은 모든 세상의 죄의 기원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후손인 나한테, 여기 성경에 기록된 죄들이 없을 리가 없죠.

죄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고, 도덕적인 죄를 조금 끊었다고 해서

내가 의로운 것이 아니에요.

 

내 자아의 죄가 무섭습니다.

과거에 농촌에서, 지리산 아래 마을에서, 저희 부부가 6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그 시골에 가 보니까, 의인된 것이 뭐냐 하면..

담배 끊고 술 끊고. 그게 이제 의인 된 증거예요.

과거에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것은 죄도 아니잖아요.

하나님을 대항하여 역사하는 우리 의지 will.

그 의지가, 그 자아 ego, 일반 죄보다 더 무서운 거잖아요.

 

왜냐 하면 죄는 저주를 받지만, 이 자아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려고 하는, 음모와 계책이 있는 것이잖아요.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짓밟고 서는 것이잖아요.

 

이게 자존심이고, 우리가 삐지고, 화내고, 신경질내고,

이게 내가 왕 되는 대우를 못 받아서그것들을 하는 것이잖아요.

 

오늘도 삐지셨습니까? 왕 대접을 못 받으셔서?

그 놈(내 자아)이 융숭한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그 놈이 대접을 받지 못해서, 내 속에서 화를 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도, 사실 그 놈(내 자아, 의지)을 징계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미워서 징계하시는 줄 알고 오해하는데

내 속의 그 놈을 때려 부숴서 작살을 내려고, 하나님이 그러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를 때리는 줄 알고, 날마다 원망하고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놈(내 자아, 내 육신), 박살을 내서, 쪼개서, 내쫓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러한 어려움도 주시고, 낮아짐도 주시는데,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시는데..

 

다만 그런 어려운 환란들은,

내 속의 사단을 난도질하시는 일로 하신 것이잖아요.

이것을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하고 동역을 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절대 동역을 안 하잖아요.

그냥 삐지고 맨날 늙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래서 우리 신세가 말이 아닌 거예요. 성화도 안 되니까, 늘 그 과정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광야 40년을 뺑뺑이 돈 백성들처럼요.

 

우리가 이제 나이가 들면, 존귀가 있어야 되요.

존귀는 무조건 십자가에서 오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을 때,

그 분이 만왕의 왕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조금만 낮아지면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으로 우리를 옷 입혀 주시잖아요.

 

그 암 말기인 사람을 서울에다가 끌어다가, 여기에 세워 놓을게 뭐예요.

배 아파 죽겠다고 해도, 오늘도 배 아파서 간신히. 오는데 죽는 줄 알았어요.

왜 그렇게 했겠어요.

뭔가 저한테 얻어먹을 것이 있다고. 세상에, 조금 낮아지는 것 시늉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 병든 나를 데리고, 멀쩡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잖아요.

 

얼마나 여러분들이 버티고 순종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아픈 사람을 데리고 그랬겠어요. 그렇잖아요.

얼마나 주님이 안타까우시겠어요.

 

진짜 주님이 저한테 너무 고마워요.

머리는 나쁘고 성격은 안 좋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걸으려고 하는 제 마음,

그래도 주님 말씀을 들고 가려고 온 마음을 다 해서 몸짓을 하는 제 마음.

그것을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믿음으로 살아야 되요.

믿음과 우리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이 모든 분들은 우리의 자아 부정의 길에 선조들이에요.

그리고 모든 벌거벗음의 선조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히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생을 벌거벗기셨다는 거예요. 일생 동안!

 

그래서 그리스도로 옷 입어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을, 자기 삶을 통해서, 이 땅에 그림자(예표)로 보여주셨잖아요.

 

그래서 제 소원은, 아마존에서 그랬어요.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계보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여인들이 나오잖아요.

마태복음1장 족보에 네 명이 나와요.

 

그런데 제 마음에 어떻게 하면,

나도 예수님 같은 생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야무진 꿈을 꾸었어요.

 

그래서 항상 그 여인들을 묵상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여인들은 하나님에게 선택 되어서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하시는데 그 몸이 사용 되었을까.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면 오늘 날에도, 나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또한 그 재림을 앞당기는 역사가,

나를 통해서도 나타나실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 믿음의 조상, 족보의 여인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인격 속에 열매로, 그 분이 온전히 드러나셔야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성령의 열매’(5:22)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이게 벌써 예수님의 할머니들이, 예수님을 낳는 믿음의 조상이 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 열매를 맺어야, 생명의 계보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비밀을 여러분들이 묵상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시 무시 하다는 것을,

그 무게를 아셔야 되요.

 

성령의 열매,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

 

이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 위에서 태동되는데

자기 전 소유를 다 주님께 드린 후에 와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령의 열매가 내 인격 속에 이루어지면 누가 오신 거예요.

주님 자신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주님 자신이 와 계시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이 놀라운 것이.

사도들의 모습 속에 계셨던 주님을 우리가 볼 수 있죠. 그 상태까지 간다는 거예요.

 

사도적인 삶. 순교자적인 삶을,

그 사도들이 사셨던 것처럼, 똑같이 나도 이 시대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엄청난 것이잖아요. 믿음의 계보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것은 정말 대단해요. 이것은 진짜 너무나 존귀하고 거룩해서

진짜 우리가 아무나 발설을 해서도 안 될 말씀이에요.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우리 전 생애가 으깨져서 자아가 무너진 후에, 이것이 드러나는 일들이에요.

그 값어치, 그 열매를 가진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겠어요.

 

성령님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주님에게 드리는 그 순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도대체 이 땅에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아주 적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여러분들 어렵다고 생각하세요?

어렵습니까? 여러분들이 조금만 이제 훈련이 되어지면

모욕 받고 낮아짐을 받고 모멸을 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몰라요.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폭포수 같이 흘러 담길 수 있는 게

내가 사람들의 모멸을 받을 때, 낮아짐을 받을 때,

그 때야 말로 그 순간이 오는 거예요.

 

미련한 우리는, 오는지를 모르고.. 그래서 찬스를 놓쳐요.

그 때야 말로 샤론의 꽃, 예수, 그 장미가 내 심령 속에서 활짝 피잖아요.

그러니 그 십자가를 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믿음의 성인들은, 고통이 오면 올수록 더 기뻐했어요.

슬퍼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그것이 없이는 그들은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믿음의 우리 조상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님,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나에게 고통을 주시옵소서.’

 

그 고통 가운데에서 내가 주님을 보기를 원하고

주님과 함께 하심을 내가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대단하잖아요.

 

제가 23살 때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전에 제가 토정비결을 한 번 보고 왔거든요?

그랬더니 내 토정비결에 운수가 허송세월이었어요.

그런데 그 말을 잊어버려지지 않아요.

 

내가 지금 어느 때는 주님의 은총이, 은혜가 안 느껴질 때 두려워하거든요.

너무 떨죠. 사시나무처럼 떨 때가 많아요.

그 때에 가장 잠들기 쉬운 시간이거든요. 영적으로.

 

그래서 제가 그 생각이 난 거예요. 이게 토정비결에 나왔던 허송세월이 아닌가,

물론 토정비결이 맞고, 믿어야 된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냥 허송세월이란 단어가 제 뇌리에 꽂힌 거죠.

 

지금. 너무 두렵고 떨리고.. 그럴 때는 부리나케 일어나서

청소라도 열심히 하고 몸을 막 움직여서라도

내 안일함에서 나를 깨우고자 하는 그러한 모션을, 하나님 앞에서 애쓰고는 해요.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다 귀찮으니까 그냥 편하기만 하면 돼!’

그것은 개구리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쫙 벌린 것. 그 상태인데

뭘 그게 평안함이라나? 가짜 평안이잖아요.

 

그것은 독 먹은 건데, 그게 좋은 줄 알고,

우리는 아무 문제 없어. 자식 문제도 없고, 남편 문제도 없어. 너무 잘 나가.’

그거 너무 무서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이 뒤집혀서, 그 시간이 평안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살잖아요.

너무 좋다고.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물질에 대한 염려를 버립니다.

 

오늘은 제가 사실은 원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본문에서 요한 사도는, 그 복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아주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 하세요.

 

그래서 보면 생명에 대한 말씀, 빛에 대한 말씀, 사랑에 대해서,

원죄에 대해서, 아담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요한1서에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두려움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했어요.

왜 형벌이 따릅니까.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온전히 내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잖아요.

 

왜 주님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십자가의 삶을 안사니까.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고 주님을 밖에다가 내동댕이쳤다는 것이잖아요.

 

내 뜻대로 살겠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왜 없겠어요.

 

저도 항상 있어요. 제게 특별히 걱정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굶어 죽을 걱정, 저는 그게 평생에 항상 따라 다녀요.

 

그게 놀라워요, 나는. 그게 너무 놀라운 거예요.

'어떻게 해서 이럴 수 있을까..'

 

아직 까지도 입에 밥이 안 들어갈까, 하는 마음이 제 속에 있어요.

이것이 아담이 범죄한 결과에요.

 

하나님이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돈이 보장이 되는 것이잖아요.

항상 피해망상적인 그것이 제 뇌리에 입력이 되어서,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오죽 하시겠어요. 이게 무서운 이야기에요.

왜 우리가 그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밥 못 먹을까봐예요.

 

우리에게 제일 무서운 두려움이 뭐냐 하면, 굶어 죽을 두려움이에요.

까짓 거 굶어 죽을 두려움 없으면, 이판사판이에요.

 

남의 잔소리 들으면서 살 필요도 없어요. 돈만 있으면 되잖아요.

돈만 있으면, 사람들은 죽을 때도 편하게 죽어요.

 

그런데 돈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명의 문제에요.

지옥가고 천국 가는 것만 빼 놓고는, 돈이 이 세상의 강력한 힘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택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돈을 나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진짜 온전한 삶이에요.

그래서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님을 체험한 후에 뭐가 달라졌어요?

주머니가 거듭났잖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헌금하라고 하면 막 떨려요.

진짜 이 비참함은 언제 끝날런지 몰라요.

 

그런데 감사해요. 세상에 주제가 이런데.

그러니 내가 성도님들의 마음을 이해하죠.

얼마나 그들이 진짜 힘겨운지.

 

(그러니까 여러분들 이번 집회에, 여러분들이 나쁜 것()을 발견해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는 것. 행복해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입니다. 왜냐하면요,

이것 때문에 내가 겸손해 질 수 있는 것. 그래서 남(죄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웃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만 여러분들이 얻으셔도 큰 수확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돈이 보장이잖아요. 목숨 걸고 돈 움켜쥐어야 해요.

사람을 죽여서라도 그 돈을. 그러니까 무시무시하잖아요.

 

여러분들이 가만히 묵상을 해보시면서, 주님한테 가르쳐달라고 해보세요.

그 돈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런데 여러분들이 시험에 들어, 안 돼. 이러면 안 되요.

그 얼굴을 확실히 보아야 해요. 그 돈의 위력을.

그 두려움을 알고, 결국은 믿음으로, 그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저는 그래요.

지금도 내게 사단이 와서 물질로 시험을 해요.

선교사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런데 때로는 마귀가 나와서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제가 그래요.

'그래 이놈아. 내가 굶어 죽을 것이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두려움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가 마귀에게 놀림을 받나 그랬더니, 두려움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게 두려운 마음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두려운가, 들여다보면

그 마귀가 거기 앉아서, 우리를 이렇게 부지깽이 같은 것으로 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를 가지고 노는 거예요. 돈으로.

 

그럴 때에 그 돈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더러운 짓거리를 확실하게 보아야 해요.

하나님이 나를 굶어 죽이겠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머릿속에 있냐는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아주 낙인이 찍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짜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시면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묵상하시면서

 

하나님, 정말 저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이 돈에 대해서 보게 해주세요.

그리고 주님이 나의 보장이심을 확신케 해 주세요.’

 

그런데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돈이 자기 보장이에요.

그래서 돈 없으면 안 되요. 여기서 영적 간음이 나오고, 죄가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돈이 없으면 걱정 되는 것. 이게 남편되신 하나님을 배신한 영적인 간음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이에요.

내가 죽었으니까 염려를 해요, 안 해요.

 

그러니까 이제 간음하다가 걱정은 되지만

믿음 안에서 고백 하면서 주님, 내가 걱정 한다고 뭐가 되겠어요?’

살려고 하니까 걱정이 생기지, 죽으려고 각오하면 무슨 걱정이 생기겠어요?

 

왜 살려고 해요? 주님이 죽이겠다는데 죽어야지 왜 살려고 덤비느냐는 말이에요.

그러면 죽어버리면 그 때 되겠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까지 보세요. 진짜 하나님은 얼마나 섬세하신지 몰라요.

진짜 네가 이래도 나를 따라오겠냐?’

 

이게 세상은 허상이잖아요. 염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빌어먹게 해주신다.. 그러면 빌어먹으면 되죠.

은혜만 받아도 빌어먹을 수 있어요.

 

옛날에 길거리에 구걸 다니는 사람들 있었잖아요.

특별히 아이들, 길에서 자고. 얼마나 그 부모가 쌓지 않았으면

마귀가 붙어서 길거리에서 떨어진 것을 주워 먹으면서 그렇게 살겠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내 생명을 거두어주지 않으셨으면, 나도 그 꼴이 아니었겠어요?

여러분들 그런 생각 안 해요?

 

나는 예수님 안 믿었으면, 아마 저기 구걸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었을 거예요.

왜냐 하면 나는 그런 팔자인 사람이거든요.

 

주님이 손대지 않으면, 나도 그 허망함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주님으로 체험을 받지 않으면

나도 생명을 살 수 없는, 지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그 내가 엎드려져야 하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물질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셔야 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돈이 내 것이에요, 하나님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걱정하십니까?

지난번에 어느 교회에 갔더니, 거기는 십일조를 없애셨다고 해요.

 

왜냐 하면 우리의 물질은 다 주님 것이니까, only 십일조만 하면 되겠냐는 거예요.

(십일조를 율법적으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자원해서 드리면 좋죠.)

 

그런데 '나는 십일조도 하기 싫더라'는 사람이 있어요.

십일조만 하려면 자기 손이 떨려요. (계속)

 

 

하나님처럼 사랑하라! /요일4:7-16/ 유기성 목사

2016-08-24 11:37:48

 

이스라엘 선교사님 한 분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세 그룹의 기독교인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 아랍인 기독인, 외국인 기독교인이 있는데, 최근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놀랍게 늘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도 많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오실 때가 가까왔다고 흥분하는데, 선교사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 부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고도 여전히 유대인, 아랍인 따지는 것은 그들이 진정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교인 수가 늘었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나야 진정 부흥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사랑으로 소문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진짜 예수 믿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7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권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누구나 이 말씀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약간 주춤하게 됩니다.

 

8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사랑하자는 말과 분명 다른 느낌입니다. 12절 말씀에 이르면 숨이 막힙니다.

 

12...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라고 명령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해야지결심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게 되어야 진짜입니다.

 

이것을 사랑의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없기에 주님이 임하셔서 사랑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사랑의 부흥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두 집 살림을 하던 남편이 회개하고, 본 부인과 화합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이런 일이 이혼이 급증하던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하고 부러워했을 정도였습니다. 참 성실하다고 믿었던 하인들이 숨겨 놓았던 죄를 회개하였고, 그 주인과 가족들은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한 부인은 자신의 음행을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사회하던 선교사가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남편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울면서 그 아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니 그 아내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매정하게 대한 것을 회개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일을 고백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자 교회가 초만원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조롱하러 구경왔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회개하였습니다.

 

1900년대 초 중국과 한국의 선교사로 일했던 요나단 고우포스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진 당시 일화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신유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때,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가 사랑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6...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능력을 받았다고 교만하고 비판하고 욕심을 부리고 분열을 일삼는다면 잘못된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9-10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 그 독생자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한 제물로 삼았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랑이 아닙니다. 불같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음식만 삼켜도 온 몸을 뒤틀면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 사람이 어찌 이기적이고 냉정하고 무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사랑의 불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폭포수같은 사랑이란 표현에 거칠게 거부감을 표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어디에 그런 사랑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자신은하나님의 폭포수같은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다. 정말 그렇다면 말만하지 말고 느끼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지만 은근히 부인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습니다. 얼굴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며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영원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하나님도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공부 잘하고, 착하고 열심히 충성하여 하나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이 종아하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더 좌절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환상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이 저를 영원히 사랑하기로 결단하였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마음이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열등감 때문에 몸부림칠 때, 고ㄹ니도전서 127-29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약한 자, 미련한 자, 멸시받고, 없고, 비천한 자를 택하여 지혜로운 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3일 동안 믿지 못하다가, 이 말씀은 무조건 믿어야 할 복음을 깨닫고 성경책을 끌어 안고제가 믿겠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순간 통곡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믿음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는 십자가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체험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2절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13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며 사는데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 한분이 너무 너무 좋아하는 자매에게 프로포즈를 하였는데, 자매 쪽에서 반응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번씩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사랑의 고백 편지를 썼어요. 그런데도 반응이 없자 형제는 하루에 세 번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세 번씩을 러브레터를 써서 보냈습니다. 드디어 이 자매가 감동을 받고 결혼을 했는데 편지 배달한 사람과 결혼 했답니다. 자꾸 만나다 보니 정이 든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나 교리로 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만나고 교제하고 동행하니 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신 주 예수님을 믿으면 사랑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랑하게 됩니다.

 

요한 사도 자신이 그 증인입니다. 그는 세상 욕망과 거친 성격으로 성격이 불같아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요한 밖에 계셨던 주님이 성령으로 그의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회개할 것이 아니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오랜 여행을 하고 오셨는데 선물이 없다면 딸들이 회개할까요? 선물을 찾을까요? 찾을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내겐 그 사랑이 없지? 왜 사랑을 주시지 않나요?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대답하기가 힘이 드십니까? 그래서 사랑의 불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없어서 회개할 것이 있다면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소중함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돈을 구하고 건강을 구하고. 은사를 구했지 사랑은 구하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모르고, 그런 것들을 자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랑이 없는 가장 큰 이유요 회개할 제목입니다. , 건강, 성공, 은사 보다 사랑이 더 큰 은혜요 축복인 줄 알면 반드시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김흥섭 판사에게 어느 날 젊은 부부가 성격이 맞지 않아 이혼을 신청하러 왔습니다. 이들은 아이 부양 문제와 재산 보상 문제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때 김 판사는 이 아이를 누가 책임질 것이요? 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이에게 '너는 누구하고 살기를 원하느냐?' 물었습니다. 그때 아빠의 손과 엄마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판사는 재판 일정을 한 달 연기하기로 하고 성경 한권을 사주면서, 고린도전서 l3장을 하루에 세 번 이상 한달 동안 1OO번을 읽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집에 돌아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후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욕심을 회개하고서 이혼 소송을 취소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면 주님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사모님이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해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사모님이 돌아 오시자, 다짜고짜 독하게 다구쳤답니다. 가만있는 사모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은 오늘 딸이 소풍가는 날인 줄 아시기나 하셨어요? 새벽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바빠서, 미처 치우지도 못하고 기도회가 있어 갔기로서니 그럴 수가 있어요? 다른 집 남편들은 이럴 땐 치워 주기도 한다던데.”

 

궁지에 몰린 목사님은 온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답니다.“그래도 그렇지. 당신이 뭐 잘했다고 말대꾸야!”

 

그 때 교회 집사님이 찾아와서 몸이 아프니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에 방에 들어와 가슴만 답답하더랍니다.‘이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까? 아내는 무엇이라고 할까?’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나갔더니, 기다리던 집사님이 가버렸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 집사님 집으로 심방을 갔답니다.

 

목사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을 하실 수 없으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한 장교가 배 위에서 항구에 인산인해를 이룬 군인 가족들을 보고 아내를 어떻게 찾나하고 고심했답니다. 아내는 손수건을 흔들기로 약속했는데 모두 다 손수건을 흔들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배 위에서 둘러보니 그 많은 사람 중에 손수건을 흔드는 아내의 모습이 한 눈에 척 들어오더랍니다.

 

오늘 하나님의 눈에는 누가 가장 뜨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자입니다.

 

얼마 전 한 자매를 만났는데나의 가장 기뻐하는 자이다.’하는 주님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도 사랑스러워 하지 않을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그의 마음에 나의 사랑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의 사정에 대하여 들어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너무나 어려운 형편에서 태어나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삶 때문에 그 마음 중심에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고 뜨거웠습니다.정말 하나님께서 약한 자 미련한자 멸시받는 자를 택하여 쓰심을 알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의 부흥을 구합시다! 그리고 순종만 할 뿐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요일4:17-21/ 유기성 목사

2016-08-24 11:42:53

 

대만 제자훈련 세미나에서 만난 중국인 목사님들, 처음 만났는데도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서로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훈련 섬김이로 가셨던 교우들도 대만교회 교인들과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나 흐뭇하였습니다. 사랑은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처음 교회에 오신 새가족이 주일에 교회에 오셨는데, 처음이라 두리번 거리자 안내하시는 교인 한 분이어떻게 오셨어요?”하고 묻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돌더랍니다. 안내하시는 분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참 센스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왔는데 어떻게 오셨냐니요?

 

이처럼 처음에는 서먹하던 교인들 사이가 친해지게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이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17절에서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도 하나님 처럼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누가 가르셨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누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으며, 누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으며, 누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만드실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밥을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안하신 것이 아니라 못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기를 갈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우리가 사랑하도록 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우리가 사랑하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밥먹는 것 보다 더 갈망하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갈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을 때 가서야 깨닫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죽을 때 가서 깨달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생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산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하다고 했습니다.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워서 심판 날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죽고 난 다음 어떤 처지에 빠질지 주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특별한 죄가 나오지 않습니다. 날마다 잔치하고 산 것이 죄입니까? 부자의 죄는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자에게도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까? 그에게도 사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형제는 사랑했지만, 집 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나사로에게는 사랑이 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의 죄였습니다. 여러분,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에는 분명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썼습니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렸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요한 서신에서는 믿음을 사랑으로 바꾸었습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은 거짓말쟁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말만 믿는다고 했지 실제로는 믿지 않는 자입니다.

 

20...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믿음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증거, 곧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기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2절에서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믿음이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믿고 영접하여야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오셔서, 그의 삶을 바꾸셨다는 증거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도 의견 대립이 있을 수 있고 화를 낼 수 있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미움의 영은 사탄입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베드로는 사도 바울로부터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이 일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랑하였습니다.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하나님처럼 사랑하여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18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증거가 있으니 세상에서 좋은 것 다 빼앗기고 바보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 온갖 것을 다 가지고 누려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어떤 교우들은 죽을 때 편안하게 죽고 싶다고 기도부탁을 하시지만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두렵기만 하고 가슴이 뛰어서 견딜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평생 편안하게 잘 살았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옳고 그른 것도 살펴야 하지만 사랑을 놓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단기 선교 여행을 가는 것을 부모가 반대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싸웠습니다.

 

선교회장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상식에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회장과 다투었습니다.

 

세례냐, 침례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다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언제나 사랑이 제일이며, 싸우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권사 취임예배를 하고 곧 장로 취임을 하지만 성도들 중에 봉사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해도 교회 중직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21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2절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하나님처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하지 말씀하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희미할까요? 천국, 지옥, 심판에 대하여 듣기만 했지 자신의 현실 문제라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누구나 사랑만 하게 됩니다. 미워하고 원수맺고 싸우고 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싸이어에서 선교사로 평생을 사역하신 헬렌 로스비어 선교사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출신의 여의사입니다. 그는 선교지에서 일어난 반란 때 반란군에게 겁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곳에 남아서 미워해도 모자랄 그들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희생]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강사가 된 그녀의 얼굴은 보는 이들마다 천사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전히 하나님처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걱정이 왠 말입니까? 오히려 이기적인 여러분을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하실 주 예수님에게 기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해 달라는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면 반드시 주님이 사랑하게 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하시고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말씀하셨습니다.

 

철저히 이기적인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The Passion of Christ] 영상 한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이 영상을 처음 보는 분들은 충격을 받고 회개하며 또 감사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야겠다, 결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번 이 영상을 본 분들은 또 저 영상을 보여주시네.’ 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 흐릿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십자가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도 다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1만 달란트(5-6조원) 탕감받은 자가 어떻게 1백 데나리온(천만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습니까? 탕감받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영상으로 보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바라본다면 어떻겠습니까?

 

17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영상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바라보시는 장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정말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본다면 어찌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은 과거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을 24 시간 바라보는 자는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움과 판단이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저절로 사랑만 하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중에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중에만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천국과 지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살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처럼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사랑하게 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는 너무나 위험한 모험을 이제는 중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축복의 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담대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해 주시는 주 예수님이 왕이심을 고백하며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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