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3장 설교 모음
깊이 있는 사귐 /고후13:13, 요17:21-23, 요13:34-35/ 김형익 목사
2021-05-20 04:45:18
우리는 교회에 대한 주의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교회] 시리즈의 네번째이자 마지막 말씀으로, 오늘은 ‘깊이 있는 사귐’이라는 제목으로 주의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먼저 래리 크랩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영적 공동체가 아닌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극이다. 아니, 그러한 공동체에서 살면서 거기에 만족하고 그곳이 영적 공동체라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심각한 비극이다.”(래리 크랩,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 김명희 옮김, ivp, p.75).
여러분은 래리 크랩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저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사실, 제가 [깊이 있는 교회] 시리즈 설교를 요한계시록 강해 중간에 갑자기 전하게 된 것은, 제 안에 목까지 차오르는 갈망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서 세우신 교회가 고작 이건가?”하는 질문을 더 이상 미루거나 묻어둘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벧샬롬 교우들과 같이 공감하고 싶었고 함께 갈망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이 좀 불편할지라도 교회에 대한 주의 말씀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 가슴 깊은 곳에 새기시고 감동케 하사 이 말씀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 갈망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1. 성령의 코이노니아 (고후 13:13; 요 17:1,5,21-23; 잠 8:30-31)
성경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린도후서 13:13).”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예배 축도에서 우리는 매주일 이 말씀을 듣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고, 삼위 하나님께서 각각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을 베푸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축복하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교회의 소망은 다양하고 유익한 프로그램들에 있지 않고 바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교회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입니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교통하심은 헬라어로 나눔, 교제, 사귐을 의미하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이 편지를 쓰는 바울 사도는 왜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라고 하지 않고 교통하심이라고 썼을까요?
교제, 사귐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임하는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령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영적 친교, 영적 교제와 사귐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영적 친교가 없다면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교회는 그저 육적인 관계 맺음으로 가득한 세상의 단체나 진배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회를 세상의 모든 단체나 조직과 다르게 하는 본질적 차이를 만드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개념은 본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생생한 사귐과 연합 속에서 경험되는 사랑의 관계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입니다. 본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서로를 영화롭게 하며 존재하셨는데(요 17:1,5)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서로를 무한히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거룩하고 영적인 교제를 보여줍니다(잠 8:30-31).
바울 사도는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런 성부와 성자 하나님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교제가 바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던 내용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1–23).”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이 교회 안에서 경험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고 바울 사도가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했을 때,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축복하는 이 내용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놀라워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세상에서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 보다 더 친밀한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육적인 관계만의 하나됨이 아니라, 온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그 사귐의 깊이와 동질의 교제를 누리도록 창조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영원토록 그리고 날마다 기뻐하셨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뻐하셨듯이,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런 관계들로 맺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려졌고, 성령님께서는 오순절에 강림하여 교회에 부어지셨던 것입니다.
2. 구속과 새 계명 (요 13:34-35)
이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깨어져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깨어져 서로를 비난하는 관계가 되었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창세기의 앞부분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깨어진 관계들을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관계로 회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너진 관계도 회복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계명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이제 나의 죽음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세우시겠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이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새로운 공동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새계명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 사이에 높이 세워져 있는 죄의 장벽들을 헐고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성령의 은혜를 주실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신 새계명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몇 점 정도 될까요?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이런 공동체는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죄인의 본성으로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을 쌓아서 그 누구도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죄인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힘으로 세우자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거듭난 성도들에게 주신 새 본성은 형제가 형제를 깊이 사랑하고 깊이 있는 사귐을 나누는 영적 공동체를 깊이 갈망합니다. 이갈망은 모든 거듭난 성도의 심령 안에 심어주신 거룩한 본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저절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연결되고 결속되며 영적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는 성도들 스스로가 성령님을 따라 걸으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인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 친구들과 영적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3. 영적 친구들과 영적 지도자들
영적 우정, 여러분에게는 영적 우정이라고 할만한 관계가 있습니까? 자신의 성문을 열고 들어오도록 초청할 수 있는 영적 친구가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보면서도, 나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나를 용납해주면서 나를 더 깊은 거룩의 자리로 함께 가자고 말해줄 수 있는 친구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책감과 수치심과 실망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깊은 속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나 자신을 판단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이런 속 마음의 아픔과 갈등을 드러낼 때 우리는 더 없이 깊이 결속될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 정직한 대화를 하게 되고, 복음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면서 성숙하고 깊은 영적 우정으로 빚어져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 우정과 육적 우정을 분별하고 계십니까? 교회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관계가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눔으로써 정서적 외로움을 달랠 친구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서로를 더 친밀하게 알아가고 만남으로써 서로를 위해서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기도해주면서 거룩함을 향해 가고자 하는 친구들입니까? 영적 우정의 관계는 반드시 나이가 비슷해야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10살이 어리거나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천로역정을 걸어가는 친구로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목적지를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서로를 깊이 알고, 서로를 향해 아플지라도 깊은 이야기를 사랑으로 말해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영적 친구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와 갈망들을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거룩이라는 방향을 향할 수 있게 해주는 친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그런 영적 친구여야 하고 또 누군가는 우리에게 그런 영적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정말 영적 친구가 있습니까?
또 하나, 우리가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은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여기서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 그것은 반드시 목사나 장로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적 지도자들은 소위 ‘경건한 어른’입니다. 저는 제 책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에서 경건한 어른에 대한 정의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는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입니다.”
이제 한 번 둘러보십시오. 우리 교회에는 여러분의 시각에서 볼 때 경건한 어른이 계십니까? 얼마나 계십니까? 많습니까, 적습니까?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은, 여러분은 경건한 어른입니까, 아니면 경건한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까? 우리가 깊이 있는 신앙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교회 안에 경건한 어른의 존재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영적 친구들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영적 친구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찾아갈 수 있는 경건한 어른이 필요합니다. 그저 자기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을 통해서 나오는 지혜로운 조언을 제시해줄 뿐 아니라,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주고 나와 함께 해줄 수 있는 지도자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스스로 열지 못하는 내 마음의 깊은 방들을 부드럽게 열고 들어와줄 수 있는 경건한 어른들이 필요합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벧샬롬 교회는 이런 경건한 어른들의 존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려분 모두가 현재 경건한 어른으로 혹은 장래의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져가는 그런 은혜를 주께서 우리 교회에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바로 이런 영적 우정의 관계들과 경건한 어른들의 영적 지도를 포함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교훈과 적용 (갈 6:9; 엡 2:19; 5:27)
이런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는 한 순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순수한 노력으로만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몇 가지 적용적 교훈을 가슴에 새기면서 [깊이 있는 교회] 시리즈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첫째로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는 우리 모두에게 인내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수고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신속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수고한 자리에서 쓰디 쓴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일하신 결과를 나타내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선한 일을 그만 두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피를 흘려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인내는 단순히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 인내로써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의 영적 친구로, 누군가의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 가고 계시는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두번째로, 인내하는 동안, 여러분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시간은 사실 기도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인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깊이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우리 자신의 과업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일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인내하는 동안, 깊이 있는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점점 더 깊어져 가게 될 것이고 이것은 참된 공동체, 깊이 있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기도로 이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내가 더 깊은 갈망이 되게 하고 그 갈망이 깊은 기도로 이어지게 하십시오.
세번째로, 위험을 무릅쓰십시오. 계속해서 여러분은 여러분 내면의 성문을 열어 형제들이 여러분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그들을 초청하십시오. 때로는 이것이 여러분 자신에게 상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수 없이 반복하지만, 어떤 반응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시라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종종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가장 깊은 속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안전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혈육의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상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족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족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경험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 상처들을 통해서, 상처들을 치유 받으면서 정말 가정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가 그러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이고 영적 가족입니다(엡 2:19). 교회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동체입니다. “상처 좀 받아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상처는 결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지고 성령 안에서 연결된 관계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위험을 무릅쓰되, 여러분 내면의 성문을 열어 누군가를 초청하는데서 점점 더 나아가십시오. 성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벽 자체를 헐어버리십시오.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래리 크랩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선택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래리 크랩, p.198).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외로운 인생길에 좋은 친구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백성을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엡 5:27). 거룩을 추구하는 것은 목사와 같은 특정인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함을 위해 부름을 받아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만의 거룩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서로 서로를 향하여 책임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의 거룩을 추구하는 일보다 더 여러분의 옆에 있는 형제들을 거룩의 길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나 홀로 간다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내가 거룩함을 추구한다는 생각으로 그 선한 길을 신실하게 믿음으로 걸어가십시오. 그렇게 성령의 교통하심이 충만한 교회가 되도록 교회를 축복하고 또 축복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주님의 교회를 더 진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나 한 사람이 말씀 듣고 은혜 받고 신앙이 성장하면 된다는 생각을 거두어 들이십시오. 우리는 개인주의가 진리로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이 세상의 정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시대 정신의 세례를 받고 교육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우리 기성 세대 보다 더 심각하게 개인주의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그 위에 신앙을 세우려는 헛된 시도를 할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 세대들에게 가르치고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공고한 개인주의의 정신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깊이 있는 공동체를 경험하고 맛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자녀들의 세대에 깊이 있는 교회를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모든 입을 닫게 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 깊이 있는 교회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은 결코 흉내 낼 수도 없고, 발견할 수도 없는 그런 진정한 교회 공동체, 깊이 있는 교회를 여기에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귐, 성령의 교통하심이 충만한 공동체의 은혜를 우리가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목사 한 사람의 갈망으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왜 벧샬롬교회에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간절히 원했지만, 교회의 리더십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좌절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모두 주님이 바라시는 깊이 있는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함께 수고하며 주의 은혜를 구합시다.
언젠가 세상이 볼 수 없는 깊은 회심과 깊은 성화와 깊은 교제가 있는 깊이 있는 교회를 보게 되는 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런 교회에서 행복하게 주님을 섬기게 되는 날을 바라봅시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더 진지하게 여기십시오.
admin
댁쟾쇰줈
하나님 중심적 예배 (12) - 예배는 시작입니다 /고후13:13/ 김형익 목사
2021-05-10 15:50:15
1. 축도는 파송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축복기도, 즉 축도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축도는 왜 예배 중에 행해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예배는 축도로 마치는 것일까요? 축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축도가 끝나기 전에 나가야 빨리 주차장에서 차를 뺄 수 있고, 불편하게 인사를 청하는 사람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축도를 시작하려고 하면 이미 일어서서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축도를 하려고 하면 이제 점심 봉사를 한다든지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하시는 분들의 마음은 이미 사역으로 가게 되고 축도를 시작하자 마자 나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축도를 마치고 나서 피아노 반주가 흘러나오고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예배 장소를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축도가 예배 의식을 마치는 순서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축도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마치는 순서이자, 동시에 삶의 예배 속으로 들어가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축도는 굳이 비교하자면 졸업식이 가지는 의미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졸업이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축도는 졸업 이상입니다. 축도는 의식으로서의 예배와 삶으로의 예배를 절대적으로 연결합니다. 축도는 이제 교회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며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도록 사람들에게 성 삼위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파송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성 삼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이제 세상으로 나가라는 파송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다시 확인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기 백성들을 그냥 내보내지 않으시고 언약적 축복을 약속하심으로써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2. 선교사 파송 예배
선교사 파송 예배에 참석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선교사 자신에게는 매우 비장한 순간이고, 교인들에게는 사랑하는 친구를 온 마음으로 축복하며 선교지로 내보내는 큰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1991년 7월 8일은 아내와 제가 80일이 된 인성이와 함께 인도네시아 주재 선교사로 파송받는 예배가 있었던 날입니다.
참석한 분들은 선교사로 파송받는 저희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었고, 저희는 저희를 보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기를 각오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이런 특별한 예배가 물론 있지만, 우리가 드리는 매 주일의 예배도 사실상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시는 선교사 파송 예배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교사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방 땅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보내시고 우리는 보냄을 받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특정한 사람들, 선교사들만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게 되는 사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심으로써 주님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사실상, 매 주일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 적대적인 세상 속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안녕히 가세요’가 아니라, ‘당신은 지금 선교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부여 받습니다.
오래도록 우리 교회가 새벽기도 장소로 사용했던 락빌에 있는 The First Baptist Church of Rockville 에서 아침에 기도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붙여놓은 팻말을 수년간 아침마다 보았습니다. “You are now entering the mission field.” 또 어떤 미국 교회에서는 목사님께서 예배를 마치고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예배는 마쳤습니다. 이제 섬김이 시작됩니다(The worship has ended, now the service begins).” 축도는 사실상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3. 성 삼위 하나님의 축복이면 충분하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많은 목사님들이 축도를 하실 때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을 사용합니다. 반드시 이 구절을 가지고 축도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구절들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이 구절은 특별히 축도로서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예배는 예배의 대상이신 성 삼위 하나님을 인식함으로써 그리고 그분을 송축함으로써 시작합니다. 그것이 보통 송영입니다. 예배를 마치는 것도 시작과 마찬가지로 성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선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중심적 예배는 성 삼위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성 삼위 하나님으로 마칩니다.
우리 자신의 상황으로 시작해서 우리의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송함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불변하는 언약의 축복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채워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또 두 벌 옷이나 신도 가져갈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주셨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오늘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돈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서 살 수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세상으로 돌려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무엇보다 가장 문제가 많았던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게 쓰는 두 번째 편지를 마치면서 이렇게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축복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보다 더 강력하고 이보다 더 확실한 축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A.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사건을 설명할 때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4,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제거한다면 기독교와 성경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 있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은혜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받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것이 공의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모든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도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하고, 우리의 삶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안에서 거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그 은혜를 인하여 힘을 얻습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부드럽게 만들어줍니까?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로 얼마나 감사하게 합니까? 이 은혜야말로 우리의 강퍅하고 못된 심령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이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B.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두 번째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요 3:16).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모진 고통과 환난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한, 견딜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불신앙적 태도이고 죄성이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바울 사도가 성령의 영감으로 쓸 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이여, 여러분이 정말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지고 우리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회개하게 됩니다. 이 사랑을 알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힘을 얻습니다. 이 사랑을 알 때, 우리는 모든 환경에서 자족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299장의 찬송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어떤 일을 하는지를 너무나 잘 설명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온전한 참 사랑 / 내 맘에 부어주시사 충만케 하소서
내 주님 참 사랑 햇빛과 같으니 / 그 사랑 내게 비추사 뜨겁게 하소서
그 사랑 앞에는 풍파도 그치며 / 어두운 밤도 환하니 그 힘이 크도다
하나님 사랑은 온전한 참 사랑 / 내 맘과 영에 채우사 새 힘을 주소서.
C. 성령 하나님의 교통(교제)
세 번째로 바울 사도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합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교통하심은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성령의 교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교제는 어떤 것입니까? 성령의 교제의 원형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교제입니다.
완전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시고 온전한 기쁨으로 서로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며, 이렇게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 성령의 교제의 원형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제가 하나님의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 있기를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이런 교제가 있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지요. 성령님께서는 그 일을 하십니다.
막막한 때, 마음이 아무 은혜도 느끼지 못하고 사랑도 느끼지 못할 때,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참된 성령의 교제가 하나님의 교회에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의 교제가 있게 되면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뒤에서 사람들이 속삭이고 수군거리는 것은 필시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누군가를 칭찬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랑스럽고 괜찮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가실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낼지라도 그들은 그 아름다운 소망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제 사랑이 아닙니까?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다면, 그 교회 안에서 때때로 벌어지는 갈등과 불화와 반목 가운데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교통하심, 곧 성령의 교제입니다. 이런 교제는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심령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자기 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더 사랑하고 싶게 하고, 형제에게 자기 자신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이것은 얼마나 놀랍게 교회를 세우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교통하심, 이 축복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교회의 소망은, 다양하고 유익한 프로그램들에 있지 않고 바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교회가 되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성 삼위 하나님의 이 축복의 약속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으로 충분합니다.
4. 은혜와 기쁨을 가지고 세상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 축도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이 변함없는 약속을 확인시켜주심을 알고, 예배의 자리를 떠나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일상과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우리는 은혜와 기쁨을 가지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당의 주차장을 떠나실 때, 기도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이런 것을 새로운 또 하나의 의식으로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 주님, 이제 저는 삶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저의 모든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을 제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저는 성 삼위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확인하고 이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제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해주시고, 제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우리가 예배에서 축도 이후에 반주가 나올 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하는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을 떠나면서 우리는 또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직장에서 여러분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사실을 매 순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순간만이 아닙니다. 그 예배를 통해서 삶의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축도의 내용,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5. 예배의 성공은 예배당을 떠나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예배의 성공은 예배 시간에 무엇인가를 깨닫고, 마음이 울컥하고 감동을 받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깨닫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하게 되는데,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하는 결단일수록 힘이 있고 지속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마음이 감동이 되었을 때,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이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은혜를 받은 증거가 아닙니까? 그래서 예배의 성공은 예배당 안에서가 아니라, 예배당을 떠났을 때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시작입니다. 선교사적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힘은 이 예배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삶이 예배에서 나옵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감동을 받고 결단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결단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언약입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축도를 받을 때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매 주일의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찬송과 기도, 헌상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감동을 받는 예배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는 준비될 필요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축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우선 순위는 절대로 양보하지 마십시오. 예배가 여러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게 하십시오.
선교사가 파송 예배에서 선교지에 나가는 자신의 각오를 밝히고 기도를 부탁하듯이, 우리는 매 주일의 예배 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이제 나가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선교적 삶을 살겠노라고 고백하고 성 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시니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선교지인 가정으로, 일터로 파송받아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이런 은혜를 우리가 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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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에게 주시는 세 가지 복 /고후13:11-13/ 류영모 목사
2021-01-20 04:00:52
오래전 아버지 학교에 참석했다가 후배 목사로부터 직접들은 얘기입니다. 토요일 날 부지런히 설교 준비를 하는데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자꾸 방해를 합니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아빠 언제 끝나. 아빠 나랑 언제 놀아 줘. 구상 할 만하면 문을 열고 찾아옵니다. 뚜껑이 열렸습니다.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답니다. 아빠 설교 준비 하는 것 안 보이냐고. 빨리 나가라고. 문을 꽉 닫으면서 아들이 “설교도 되게 못 하면서” 그러더랍니다. 그 주일 설교를 되게 못 했다고 합니다.
목사가 되어서 설교 한다는 게 평생 부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바로 그 한 영역 있다고 한다면 예배입니다. 목사의 설교가 게을러서 내가 부족해서 우리 교인들이 예배하는데에 방해를 받는다면, 예배가 실패한다고 한다면 나는 목회자로서 실패자 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평생 짐스러운 것, 그러면서도 가장 보람되고 가장 행복한 것 또한 설교 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성도들이 마음대로 교회 예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목사의 마음이 아픈 것은 이러다가 우리 성도들 한분 한분 예배가 무너지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기를 원하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 예배자가 너무 소중해서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응답받는 그 응답이 얼마나 엄청난 것들이 많이 있을까요? 수많은 복 가운데 이것만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예배하고 갈 때마다 반드시 이것은 간직하고 가야 된다. 예배하고 한 주간 살아가면서 이 복을 네가 누리면서 살아라는 복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②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③ 성령님의 교통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 「예배자에게 주시는 세 가지 복」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기 전에 담임을 했습니다. 전도사로써 2년동안 교회를 섬겼습니다. 설교하는데 문제가 없어요. 심방하고 기도 인도하지요. 목회 프로그램을 잘 진행 합니다. 한 가지가 안 되는 거예요. 예배하고 돌아가는 성도님들에게 손을 번쩍 들고 축복기도, 강복선언을 해야 되는데 전도사는 그것을 못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그 시간이 되면 빨리 목사 안수를 받아서 손들어서 축도하고 싶은, 강복선언하고 싶은 그 마음에 손이 자꾸 올라가요. (전도사로서 목회 3년쯤하면 손들고 싶어서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나겠다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축도 강복선언이 그렇게 만만하거나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축도 할 때 마침 문장이 조금 다릅니다. “축원하옵나이다”그렇게 되어 있어요. 연합 모임에 가면 통합측 목사님들은 성경대로 축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판을 많이 합니다.
사실 성경 원문에 마침 문장 동사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끝. 마침 문장이 없습니다. 이게 강복선언. 축도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하잖아요.
하나님은 예배하고 돌아가는 자녀들이 너무 예뻐서 세 가지 복을 주시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입니다. 예배하고 나아갈 때 이것만은 가지고 가야 된다. 이것 놓쳐서는 안된다. 이것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거 무너져서는 안 된다. 이것없이 네가 세상에 살 수 없다. 하는 게 바로 세 가지 복입니다. 매주 이 복을 우리가 확인하고 간직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탄절 예배에 아무개 권사님 남편이 교회에 왔습니다. 교인들이 예배하고 돌아가는데 목사님이 배웅을 하다 보니깐 교회 잘 안 나오는 아무개 권사님 남편이 예배에 왔거든요. 너무 반가워서 손을 잡고 “새해에는 좀 규칙적으로 정기적으로 교회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예배에 꼭 규칙적으로 나오십시오.” 그랬더니 이 남편이 “목사님 저는 평생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예배 참석합니다. 평생 성탄절 예배에 제가 참석해 왔습니다.”
식사는 매끼 먹어야 되잖아요. 잠은 매일 자야 되잖아요. 이 세 가지 복은 매주일 예배에서 매주 단위로 확인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안식일을 지키고 예배하고 돌아가는 백성들에게 아론의 축복을 구약 성도들은 받았습니다. 신약교회 성도님들은 예배 드리고 돌아갈 때에 축도로 일컬어지는 사도바울의 축도, 강복선언을 받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구원 받아서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목적은 예배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백성들을 불러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지요. 예배하는 백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모든 지구가 멸망할 때에 노아 방주에 타는 짐승들 정결한 짐승은 암소 7쌍씩 태웁니다. 왜요? 제물로 제사하는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왜 출애굽을 시켰을까요? 애굽에서는 예배하는 백성으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광야로 나아가 예배 배우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예배하는 족속으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양을 몰고 나갑니다. 양식과 입을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광야에서도 양을 잡아 예배하는 이 일은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유가 예배 잘 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업보다 돈 버는 것보다도 밥 먹고 사는 것 보다도 예배가 우선되고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백성이 확실하면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식구들이 바쁜 일이 많아서 예수를 안 믿는 것 같지는 않은데 예배에는 늘 그 집 엄마가 대표로 참석 해서 예배를 드리는 집이 있었습니다. 여보 나 오늘 누구누구 바이어 만나야 돼. 내 기도 제목해서 내 대신 봉헌해. 맏아들은 골프장에 가면서 엄마 내 기도도 해 주세요. 막내도 학원에 달려가면서 엄마 내 기도 부탁해요. 그리고 엄마 혼자 대표로 가정을 대표해서 예배 드리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마 종말이 되었는지 식구들이 나란히 손잡고 천국 문 앞에 섰습니다. 그 문지기가 안에 들어 갔다 오더니 그러더랍니다. 여러분의 집은 대표로 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오랍니다. 그 엄마가 대표로 들어가겠지요.
여러분, 천국에 대신 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 대신 믿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예배하는 것 남편 대신할 수 없어요. 자식 대신할 수 없어요. 어버이 대신할 수 없어요.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겁니다. 내 예배는 내가 드리는 겁니다. 내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겁니다. 각자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배하고 돌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첫 번째 복이 있습니다.
우선되는 복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내가 이 땅에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가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소원이 많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방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겁니다.
은혜란 말이 성경에 많이 수도없이 나오지요. 200번이상 계속해서 은혜의 물결이 신구약에 흘러갑니다. 그 첫 번째 등장하는 게 창세기 6장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구약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죽는 자리에서 살아나는 겁니다. 노아의 가족만 살아 남는 것 이게 은혜입니다.
구약이 다 지나가고 신약이 다 지나가고 신약성경 제일 마지막장 마지막 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계 22:21) 그리고 성경은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종말.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은혜예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예수 믿는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구원 받고 영생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게 신약 성경 마지막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하여 교회 아닌 교회로 전락해 있을 때에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게 개혁교회입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시스템에 “장로교회”라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개혁교회”입니다.
종교개혁 교회 출발이 무엇입니까? Sola Gratia - 오직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이 교회는 서 있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은혜라는 반석 위에 우뚝 서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 어떤 찬송입니까? 물어보면 한결같이 은혜에 관한 찬송이라고 합니다.
♪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 한량없는 은혜
♪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은혜에 관한 찬송을 가장 좋아 한다고 합니다.
가끔 제가 강의하고 질문하라고 그러면 거의 그렇게 얘기해요. 목사님 그 바쁜 일정 속에 건강은 어떻게 지키십니까? 또 어떤 분들은 후배들은 목사님 맨손 맨몸 맨땅에 개척해서 어떻게 건강하게 부흥되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까?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묻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지금도 많이 젊지만 이것저것 할 얘기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나니까 대답은 한 가지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늘 그렇게 대답하길래 그냥 입에 발린 소리하네~ 그랬어요. 제가 나이가 들고 나니깐 남는 게 이것 밖에 없어요. 은혜 밖에 없어요. 이게 진실한 대답이에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의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땅을 밟고 살지요.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이 땅이 전부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복 받았다. 은혜 받았다. 그랬을 때에 돈 버는 것, 잘 먹고 잘 입고 살아가는 것,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이게 내 머릿속에 일시이고 순간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전부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걸 이겨내는게 믿음입니다. 그걸 뛰어넘는게 믿음의 성숙입니다.
어떤 분이 머릿속에 젊은 부인하고 살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래요. 환갑을 지나고 난 다음에 혼자 그렇게 생각했데요. 입을 열면 큰일나지요. 한 스무 살쯤 젊은 부인하고 살아 봤으면 좋겠다. 그 생각이 머릿 속을 지나가더래요.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아 네가 평생 그걸 원하니 내가 응답을 해 주마. 내일 아침되면 너는 스무살 젊은 부인하고 살게 될 것이다” 그러더래요. 눈을 뜨고 보니깐 자기가 환갑을 어저께 지냈는데 80살이 되어 있더랍니다. 그래서 20살 젊은 부인하고 잘 살았대요. 기도 잘 하셔야 됩니다.
예배하고 돌아가는 사람에게 주신 두 번째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젊은 부인하고 사는 게 아니라 그게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도대체 어떤 사랑입니까? 그분은 누구입니까? 우주만물을 만든 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고 역사를 운행하시다가 대한민국이란 땅에 20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를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 주신 분, 하늘과 땅의 왕, 금생과 내생에 왕이 되신 분입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내가 그분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내가 이 땅에 그분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그분하고 교제 할만한 성실함과 거룩함이 내게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유익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마틴루터가 내가 하나님이라면 사람들을 보니 그 악함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하늘에 불 비를 내려서 벼락을 내려 지구를 멸망시켰을 것이다고 이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내가 죽어야 자리에 그 분이 대신 죽어서 나를 구원해 주신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기적 그랬을 때 제일 먼저 지나가는 기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구원 받은 것 기적 아닙니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나라 백성이 되어서 살아간다. 기적이 있다면 이게 기적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게 무엇입니까? 맛있는 식사 한 끼였습니까? 소 한 마리입니까? 집 한채입니까? 세상에 사장 자리입니까?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고 하니 예수님이 죽으셔야 구원받을 만큼 나쁜 놈이에요. 얼마만큼 소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외아들이 죽어서라도 나를 살려야 될 만큼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일까요? 모든 세상의 노래는 사랑이 주제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가 제일 많은 게 있다고 한다면 아마 사랑일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나를 죽여 상대를 살리는게 사랑입니다. 이게 희생입니다.
우리 마누라는 왜 요즘 희생을 안 할까? 그럼 이미 사랑을 모르는 거예요. 상대에게 기대하는 것 말고 요구하는 것 말고 내가 뭘 줄까? 나를 희생하는 것, 피 흘리는 것, 손해 보는 것 이게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 줄 가치가 없는 사람과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게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장에 사랑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희생이 사랑이라 그랬는데, 함께 있어 주는 게 사랑이라 그랬는데, 사랑이 아닐 수 있다.
사랑이 뭘까? 이 사랑은 구원론적인 사랑입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영생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가페를 설명하는 요한1서에는 정의가 간단합니다. 독생자가 이 땅에 와서 나 대신 죽은 게 사랑이다. 그분을 믿고 구원 받고 내가 살아난게 사랑이다. 그래서 살리려 하심이라. 종말론적인 사랑, 구원론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이 사랑이다.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한1서 4:9)
예배하고 돌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나는 독생자를 널 위해서 내어 주었어. 너 대신 죽었어. 그만큼 너는 내게 소중한 존재들이야. 이 세상 살아갈 때 당당히 살아야 된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내가 너와 함께한다. 너를 버리지 않아. 실수하고 넘어져서 내가 용서 할 거야. 다시 일으킬 거야. 세상 끝날까지 너를 사랑하고 지켜낼 거야. 힘내라.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예배하고 돌아가며 이 소리를 듣고 가야 된단 말이에요. 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배자에게 주시는 세 번째 복이 있습니다. 성령의 교통입니다.
요즘 교통이 얼마나 발달된 세상에 살아 가고 있습니까? 교통이 뚝 끊어지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세계 어디든 하루 만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인천공항을 통해 LA 가면 LA 주일예배 드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지구가 한 공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편리한 교통이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식량이 일산으로 파주로 배송이 될 수 없습니다. 연료가 끊어집니다. 아우성이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교통의 발달, 건축문화의 발달, 백신의 발달 이 세 가지 발달로 생긴게 도시문화입니다. 10만 도시가 100만 도시가 되고 1천만 도시 지금 지구촌 곳곳이 도시문화, 아파트 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5천만명 인구 가운데에 60%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도시문화의 발달입니다. 수도권은 2천만명, 5천만 우리민족 가운데 2천만명이 수도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교통의 발달, 백신의 발달, 건축문화의 발달 때문에 일어난 문화입니다.
세상사의 교통은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아요. 코로나19 팬더믹 상황은 세계가 하루권,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지구촌이 팬데믹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동물과 사람이 섞여서 변종바이러스, 신종바이러스가 생기면 만약에 백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할 가능성도 있어요. 이게 교통입니다. 좋은 것만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달해도 아무리 풍성하게 넘쳐나도 탈이 나지 않는 교통이 있습니다.
유익하기만 한 교통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교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과 우리가 교통하고 살아가는 것, 내 기도가 하늘로 연결되어지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예배를 통하여, 찬양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쏟아지는 것, 이 교통. 이 세상 살아가기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성령이 내 안에 계셔서 예수님의 은혜로 이 세상을 함께 당당히 살아가는 것 교통이 있기 때문이지요.
교통이란 것은 동업,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을 하나님과 함께 동업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성령님과 함께 동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착한 일을 하더라도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동업이 교통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교통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 듯 누리던 일상이 너무나 큰 축복이었음을 새삼 깨달아가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이것 만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텐데, 목사가 되어서 내게 맡겨진 양무리 교인들에게 이것 빼앗기게 해서 안될텐데, 너무나 가슴속에 불같이 일어나는 소중한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1)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교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될텐데. 교회론에 관한 많은 논의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교회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지난 시간 “넉넉히 이긴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 구원론만큼은 잃어버리지 말자. 내가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도 내가 받은 구원만큼은 흔들거리지 말자. 지난 주일 말씀이었습니다.
3)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예배에 실패하지 말자.
오늘은 예배학에 관한, 예배의 소중함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항상 예배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말씀, 강복선언은 아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거예요.
그러나 예배가 자유스럽지 않은 오늘 같은 상황 속에서 예배하고 돌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너무너무 소중해서,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어서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을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잃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너의 곁에 항상 있을 거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했어. 너를 사랑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는데 뭘 아끼겠니. 하늘과 너는 연결되어 있단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들에게 전달되어지고 있어. 이 성령의 교통이 세상 끝날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예배하고 돌아갈 때 이것을 꽉 붙들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위기의 순간순간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행상을 해서 등록금을 모아놨는데, 이제 내일이면 서울에 가서 대학 등록을 해야 되는데 도둑님께서 가지고 가셨어요. 베개 속에 그걸 넣어두었는데 기가 막히게 그 돈들은 베개를 가지고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청소년시절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있었는지 그때 그때마다 내 신앙이 방황할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저를 교육할 때 한 가지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주일 날 예배 드리는 일입니다. 읍내에 와서 유학을 하다가 반드시 주일 날은 시골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그게 없으면 어머님한테 혼나고 평생을 그러고 살았어요.
우리 어머님이 믿었던 것 한 가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는 내가 이 자식 곁을 떠날 텐데 이 자식이 혼자 살아 갈 텐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든 일 있어도 아무리 믿음이 흔들거리고 방황해도 주일 날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면 이 자식은 산다. 그걸 믿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목사가 되기로 할 때도 있었지만 목사가 가장 싫을 때도 있었어요. 다른 것 다 해도 목사는 안 된다고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런 위기와 온갖 방황속에서 예수 믿고 지금까지 주일 예배를 지킨 것 같아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군대생활 할 때는 주일을 못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많이 있을 겁니다. 온갖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 북한의 공군장교 이응평이 비행기를 몰고 내려왔어요. 전시상황이었습니다. 군대 전체가 동원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도 주일 예배 드리고 군대 들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배할 수 있게 지켜 주셨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말씀으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어머니 췌장암이 걸리시고 치매가 왔다 갔다 합니다. 의식이 왔다 갔다 합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치매의식이 뚜렸합니다. 그런데 토요일되면 정신이 온전합니다. 전화번호까지 다 기억납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드리시는 거예요. 병원에 계시는데 토요일 날 정신이 반짝 드시는 거예요. 주일 되니깐 예배 가자. 그리고 휠체어 타고 예배 오셨습니다. 이 줄 제일 마지막 자리에 우리 어머님이 앉으셨습니다. 설교를 듣는데 그날따라 편찮으신 분이 꼿꼿하게 앉아 계시더라구요. 연세가 드시니까 눈이 거의 작아졌는데 그날따라 눈이 커지더라구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꼿꼿하게 뜨시고 아들이 설교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쳤습니다. 설교 후에 기도하고 눈을 떠 보니 어머님이 없으세요. 옆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이미 누군가 업고 병원으로 달라간 것입니다. 그 모습이 내 어머니의 마지막이에요. 하루 이틀 의식 없이 계시다가 별세 하셨는데 내 어머니가 내게 가르친 게 입으로만 가르치신게 아니잖아요.
“마지막 나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다른 것 하나도 원하는 것 없다. 하나님 앞에 가서 예배 하다가 죽고 싶다.”
제 소원이 있다고 한다면 마지막 강단 위에서 마지막 설교하고 죽을 수 있다면 내 어머니의 아들로서 살아감에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아요. 그게 목사의 소원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다른 것 다 실패할 수 있지만 이것만큼 실패하지 말자. 그리고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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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목회자의 축복선언 /고후13:11-13/ 권오진목사
2020-10-06 09:47:26
어느 젊은이가 작은 실수를 저질러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실수에 대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 그에게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잘 견디어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작은 실수를 용서해 줄 날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실수를 만회할 때도 오리라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젊은이가 존경하고 믿었던 스승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스승은 마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자신도 무언가 젊은이에게 던져야겠다는 생각에서 옆에 피어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꺾어 그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무수히 쏟아지는 돌멩이에도 잘 견디어낸 그 젊은이는 그 장미꽃 한 송이에 맞자 그대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장미꽃은 거의 충격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미 꽃 한 송이에 쓰러졌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가장 깊은 상처는 사랑했던 사람이 주는 상처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그 어떤 고통보다 심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하면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은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상처는 더 깊고 예리합니다. 우리의 육체도 상처를 받지만, 육체의 상처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영혼의 상처입니다.
육체의 상처는 잠깐 아프다가 금방 잊혀 집니다. 그러나 영혼에 상처를 입으면 오래 오래갑니다. 그것은 흉기나 무기를 통해서 받은 상처나, 주먹을 통해 받은 상처가 아니라 사람의 혀와 입으로 받은 상처이기도 합니다.
구약 외경에 집회서가 있습니다. 지혜의 책입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회초리에 맞아 죽으면 회초리 자국만 남을 뿐이지만, 혀에 맞아 죽으면 뼈가 부러진다. 칼에 맞아 죽은 사람도 가끔 있지만, 혀에 맞아 죽은 사람은 더 많다”고 했습니다.
집회서는 인간사를 되돌아보면 인간이 혀를 통해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처럼 치명타가 없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살이는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상처에 대한 나의 태도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상처에 대한 반응을 세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은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입니다.
누구일까요? <마귀입니다.> 마귀는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헐뜯게 합니다. 욥기에 보면 마귀가 하는 짓이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동방에 의인 욥을 하나님께 시험해 보자고 하고, 아무런 죄도 없는 욥과 그 가정에 큰 상처를 주지 않습니까?
둘째는, 자신이 받은 상처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직장생활을 하던 어떤 남자가 직장에서 상사에게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때려치우세요.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회사생활을 할 것입니까?” 상사로부터 상처 받은 그 남자가 퇴근시간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오면서 기분이 좋을 일이 없습니다. 집에 와 보았는데 집안 청소는 되어 있지 않고 저녁 반찬은 별로 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밥상을 차리는 아내에게 한 소리를 합니다. “당신은 집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한 것이 뭐야! 이것을 사람이 먹으라고 해 놓은 거야!” 이 소리를 들은 아내 역시 남편의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학교에 갔다가 늦게 돌아와 쉬는 아이를 보고 “너 그렇게 공부하지 않아서 어떻게 할래, 그런 식으로 공부하려거든 때려치워라” 상처를 줍니다. 엄마에게 상처를 받은 아이는 상처를 풀 때가 없으니 집에 키우는 개를 보고 발 로 걷어차면서 “아무 때나 오줌을 질질 싸면 어떻게 하냐!” 합니다.
보통 사람이 상처를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받은 상처로, 자신보다 더 힘든 영혼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로 하면 “상처입은 치유자”입니다. 누구일까요?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마구간에 태어나시면서 부터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공생애사역을 하시면서 종교지도자들로 통해서 엄청난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자신이 3년 동안 양육한 제자에 의해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팔렸고, 베드로에 의해서 모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가장 흉악한 죄인이 달리시는 십자가에 달리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결국 성부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하는 처절한 상처를 받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가지고 남들에게 상처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로 인해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았기에 상처받아 힘든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한 마디로 육체적 상처, 정신적인 상처, 영적인 상처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역을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받은 상처를 향기로 전환시켰던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이 쓴 시 가운데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정호승 시인이 풀잎을 관찰하고 꽃잎을 관찰해 보니,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일수록 상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에서 향기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바울도 자신의 받은 상처를 성도들에게 향기로 전환시킨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외에도 일명 <어떤 편지>와 <눈물의 편지>를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게 네 번의 편지를 썼다는 것은 그만큼 그 교회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주후 51년경,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방문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1년 6개월(18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며 영혼구원에 애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척된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애를 쓰고 개척한 교회가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5년 정도 지났을 때 들려오는 소식이 너무나 좋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문제 / 성적인 문제 / 소송문제 /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문제 / 여성교인들이 문제 / 성찬식문제 / 성령에 대한 이해 문제>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하나 정리해 준 말씀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문제가 완전히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 거짓교사들이 들어와서 거짓교리를 퍼뜨렸습니다.
거짓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 바울은 진짜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도라고 하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어야 합니다.
사도는 주님께 직접 부름을 받아야 하고, 사도는 주님과 3년 동안 함께 다녔어야 하고, 사도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께 직접 부름 받지도 않았고, 주님과 3년 동안 함께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 밖에 없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바울은 “진짜 사도가 아니다”라고 하니, 교인들은 순박하게 등을 돌립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바울이 진짜사도가 아니기에 그가 가르친 교리들도 진짜가 아니다” “생 긴것도 못생겼다. 설교도 못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역시 교인들은 거짓교사들의 말을 듣고 바울의 가르침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바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자신의 사도 권과, 그가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변증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러니 고린도후서를 기록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은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해서 전도한 그 교인들이 어느 순간 <당신은 진짜 사도가 아니잖아요! / 당신이 가르쳐주신 내용은 거짓이잖아요!> 하고 있으니 그가 받은 상처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내용을 읽어보면 바울의 심정을 깊이 알게 됩니다. 때론 너무 화가 나서 <내가 가면 그렇게 거짓말 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강력한 말씀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화를 내면서 말씀을 마무리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인들에게 받은 상처를 가지고, 오히려 교인들에게 축복해줌으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자 본문을 보십시오,
11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이 말씀에서 <형제들아>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한 그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형제>라고 표현하면서 교우 간에 애정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다섯 가지 명령법의 동사>를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합니다.
① 기뻐하라 - 지금까지 편지의 내용은 기뻐할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성도가 항상 기뻐하는 것은 온전하신 주님의 뜻이며, 우리가 기뻐할수록 힘이 되기에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② 온전하게 되어라(온전하게 되며) - 그동안 그릇된 행실(시기, 분냄, 파당, 중상, 거만과 무질서, 음란과 방탕 등) 을 바로 잡고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③ 위로를 받으라(위로를 받으며) -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위로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위로를 받으려면 성령님을 받으면 됩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로하고 바른길로 지도하는 것입니다.
④ 마음을 같이하라(마음을 같이하며) -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하셨는데 그 기도를 성취하는 말입니다. 교인들끼리 분쟁하고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⑤ 평안하라(평안할지어다) - 성도가 평안하려고 하면 예수님의 뜻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교인들에게 끝까지 사랑의 권면을 합니다.
바울이 말한 다섯 가지 <기뻐하라 / 온전하게 되어라 / 위로를 받으라 / 마음을 같이하라 / 평안하라.> 는 고린도교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도 <기뻐하고 / 온전하게 되고 / 위로를 받고 / 마음을 같이하고 / 평안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11절 하반절 말씀부터 12절은 문안인사입니다. “....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우리가 집중해서 보셔야 할 말씀은 13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러분 이 말씀은 많이 들어본 말씀이지요?
예배 마지막 순서 중에 <축복기도>가 있는데 목사가 축도를 하면서 사용하는 내용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지금 전 세계 목사들은 대체적으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한 축복기도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바울의 축도는 귀한 내용입니다.
늘 들어왔던 내용이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의 축도를 보면 순서가 약간 이상하지요.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 순서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순으로 말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축도를 보면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 순서로 나옵니다.
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공문서를 보내올 때 그 공문서를 보면서 우리교회에 교편을 잡고 있는 선생님에게 따진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오는 문서에 인사말에 항상 “어머니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오는 것입니다.
항상 <어머니가 앞에 오고, 그 다음에 아버지가 와요> 그래서 왜 <아버지, 어머니>라고 해야 하는데 --- 왜 어머니부터 쓰는가?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학교 측에서는 아이들이 교육을 어머니가 관심 있게 하기에 그렇게 했을 것이고,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 저는 고전적이라서 그런지 그것이 눈에 딱 뛰었었습니다.
바울의 축도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순으로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 순으로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히 <성부, 성자, 성령> 순으로 하는 것이 맞지만,
인간 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축도를 하면서 삼위일체론에 초점을 둔 신학적 진술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신앙체험을 묘사하다 보니 이런 순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부터 언급한 것입니다.
간략하게 축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1) “주 예수의 그리스도의 은혜” - 예수님을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다 같이 내려주시듯,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어져가는 인간들 모두를 버리지 않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폭넓은 사랑을 말합니다.
3) “성령의 교통하심이” - 성령님이 구원의 상태(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를 지속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특이 이 말씀에서는 교통이란 말을 조금 교정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교통은 사전에는 <오고 가는 것/ 주고받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교통은 <코이노니아 즉 “허물없는 교제, 사귐”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가운데 성도가운데 허물없는 교제가 이루어지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4)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린도교회 교인전체와, 오고 오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 하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자, 우리는 이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다. 그래야 오늘 본문이 은혜가 더 됩니다. 지금 바울이 사랑으로 권면하고, 축복기도를 하는 대상은 바울을 사랑하고, 바울을 절대적으로 존경하는 성도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 권을 인정하지 않고, 바울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로 인해서 마음 깊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바울에게 축복기도를 받을 자격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 영혼을 품고, 그들에게 성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축복기도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 전 세계 목사들이 예배시간 시간 마다 성도들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하면서, 바울이 가진 그런 마음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희교회 모든 성도들 중에는 저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성도들은 없지만,
만약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너 진짜 목사냐! 네가 전한 말씀은 거짓말이 아니야! 하면서 -- 모든 에너지를 다해 목회를 했는데 그런 반응이 나온다면> 나는 과연 바울의 심정으로 성도들로 받은 상처를 가슴에 안은 채 화를 내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하는 그들을 향해 진심으로 축복기도해 줄 수 있을까? .... 쉽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바라기는 <부족한 제가 바울의 심정으로 성도를 향해 축복 기도하는 목사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성도>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똑 같이 대하지 마시고, 바울의 마음으로 진심어린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서 성공적인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nson) 이라는 시인의 <짧은 노래>란 시를 한 편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만일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또는 그 번뇌를 식혀 줄 수 있다면,
혹시는 할딱거리는 한 마리 새를 도와서
그 보금자리에 다시 살게 할 수 만 있다면,
나의 삶은 정녕코 헛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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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