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베드로서 설교 모음

베드로전서 2:22 - 25절 설교 모음

Jessi J 2024. 10. 1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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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고난의 의미 /벧전2:18-25/ 곽선희 목사

2014-11-25 05:10:13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저서 "Man for Himself"라고 하는 그 책에서 건강한 성격을 지닌 사람의 특징을 논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성격. 요새 우리는 건강하지 못한 성격, 건강하지 못한 인격으로 인해서 많은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판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성격은 네가지 특성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생산적 성향을 가졌다. 생산적 성향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생산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랑 자체가 남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남을 죽이는 것이 많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로 얼마나 남을 괴롭히는지... 이것은 비생산적입니다.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산적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자의 어려움에 내가 책임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책임을 같이 지면서 특별히 상대방을 높이 존경하는 것입니다. 존경해서 그를 높이고 동시에 결과로 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생산적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생산적 사고입니다. 생각이 생산적입니다. 그래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볼 줄 알고 과거와 현재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볼 줄 압니다. 우리는 과거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아주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바라볼 줄 알고 또 주관적인 생각, 자기 생각에 집착을 하면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객관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사이에. 객관적 시각을 넉넉하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적 사고이고, 또 하나는 생산적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행복 그 자체가 바로 창조력입니다. 요새는 창의력으로 산다는 말을 합니다. 창의력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마음에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이 창의력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생산적 양심, 저는 오늘 여기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양심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양심에 고통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당장 얼굴이 썩습니다. 몸도 비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정말 본의 아니게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양심이 훨훨 나는 것처럼 항상 자유로워야 합니다. 외부의 압력에 대해서 초연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바로 그러한 양심이 바로 생산적 양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The City of God,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저 속에서 이렇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고통은 같은데 전혀 다른 두 가지 사람입니다.

 

그 고통의 결과를 이렇게 맺고 있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빅터 E. 프랭클(Victor E. Frankel) 이라고 하는 분을 많이 알고 계십니다. 그는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다른 사람들도 고난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책을 썼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는 이 책을 특별히 감명 깊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비슷한 북한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한 5개월 동안 고생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제 노동 수용소는 땅에 있는 지옥입니다.

 

'세상에 이런 데도 있구나.' 참 하나님께서 어찌하던 간에 그걸 한 번 나로 하여금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서 그냥 죽었으면 여러분을 못 볼 뻔하였는데... 어쨌든 참 기적 중의 기적으로 제가 살아서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보통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가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으십시오. 고난 속에서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놀라운 축복일 수 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에게는 고난은 축복일 수 있다. 여러분, 두고두고 생각할만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난 당하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떻게 해야 고난을 면할 수 있다. 고난을 피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실존적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말합니다. 오로지 고난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 또 하나는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 그리고 의를 위하여 스스로 선택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 여러분은 어느 쪽 고난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어떤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원칙적으로 기본입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시장에 가보면 어머니들께서 아이들을 집에 둘 수가 없어서 데리고 나왔는데 겨우 걸어 다니는 세,네살 아이들이 어머니를 따라나와서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집에 떨어져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 복잡한 곳에서 고생을 하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치마 끝을 붙들고 그 복잡한 시장을 다니려니까... 가끔 보면 어머니가 또 쥐어박더라구요, 징징거린다고. 그래도 그냥 울면서 어머니를 쫓아다니는 것을 볼 때에 '이것이 믿음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어머니가 쥐어박아도 나를 사랑한다. 절대로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저 어머니가 나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 끝까지 믿고 따라가면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보면서 참으로 훌륭한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여러분, Meaningful, Dispensational 그리고 Scenario의. 반드시 해피엔드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 해피엔드를 믿는 사람은 그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 서부영화를 보십니까? 서부영화를 볼 때에는 마음을 탁 놓고 보십시오. 주연배우는 절대로 안 죽습니다. 안 죽게 되어있습니다. 나쁜 놈만 죽지 좋은 사람은 안 죽습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 해피엔드, 오메가 포인트( point)를 딱 손에 들고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엄청난 아들을 나를 위하여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그래서 죄 사함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은사입니다. 모든 것들이 축복입니다. 철저하게 그렇게 믿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해도." 세상에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아디코스"라는 말은 unjust라는 뜻입니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나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나의 실수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해서 내가 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옆집 사람이 불조심하지 않아서 불이 붙으니까 그 집 붙으면서 우리 집까지 타버렸잖아요.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연루되어서 뜻도 모르는, 아무 이유도 없는, 정말로 맹랑한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요새 더구나 사업하시는 분들은 연쇄부도가 나서 어렵게 되는 분들이 참 많더라구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왜 당하는지, 어째서 당하는지, 결과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당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께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우니라. 아름답다는 말은 헬라원문대로는 카리스, 은혜롭다는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는가?' 보지도 마십시오. '왜 이런 일이 있느냐?' 더 이상 묻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 큰 은혜를 생각하면서 참으십시오. 그리하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또, '죄악이 있어서 고난 당하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인생은 추수입니다. 가만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오늘도 심고 또 한편으로 거둡니다. 어제 심고 오늘 거두고, 오늘 심고 내일 거둡니다.

 

부모가 심고 자식이 거두고 여러분이 심고 자식이 거둡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까? 당신 눈에 피가 날 것입니다. 남을 속이셨습니까? 근사하게 속이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엄청나게 속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내가 말 잘못 한 것, 말로 인한 실수, 부덕한 말, 부덕한 행동, 내가 심고 내가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회개가 있을 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죄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은 가장 저질적인 고난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다른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이제라도 회개의 길을 찾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니까 '의를 위하여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면'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선택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쿼바디스"라고 하는 영화를 대개 다 보셨을 것입니다.

 

쿼바디스의 장면을 자세히 보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맘에 안 들어서, 소위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불을 지릅니다. 다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려고. 아, 불을 지른 다음에 원망이 많으니까 이것을 기독교인에게 씌워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이 항상 불로 심판한다고 하다가 불을 지른다고. 이래서 정말 애매하지 않습니까? 불은 네로 황제가 지르고 죽기는 기독교인이 죽습니다. 수만 명을 잡아다가 원형극장에서 죽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무모한 죽음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있던 베드로가 같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망을 합니다. 로마에서만 빠져나가면 되니까. 로마성 밖으로 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쪽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바로 그 말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를 향해서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로마로 갑니다.

 

가서 그는 십자가에 죽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같은 모양으로 죽겠느냐? 거꾸로 매달아라."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베드로가 순교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 거기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저는 로마에 갈 때마다 그 자리에 한번씩 서봅니다. 여기 서서 주님을 만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베드로의 그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여러분, 피해가다가 잡히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한탄하며, 저주하며, 죽는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선택적입니다. 온전히 선택적입니다.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일부러 당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잘 아는 대로 억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말이 있죠, 악법도 법이라고. 악법에 의해 그는 처형이 되는데, 처형장에 나갈 때에 그의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억울합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선생님이 이렇게 죽으십니까?"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돌아서서 빙그레 웃고 한 말이, 이것이 명답입니다. "이놈들아, 그럼 내가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죄가 없이 죽어야지. 여러분, 어차피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억울하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사실 억울한 고난을 당해야 사람다운 사람이지 죄가 있어서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억울하다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선택적으로 고난의 길을 갑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본을 끼쳐 우리로 하여금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첫째, 죄 없이, 죄 없이 당하였고 둘째, 입에 괘사가 없었습니다. 아무 변명이 없었습니다. 변명이 없어야 됩니다. 한마디 변명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대신 욕하지 않았습니다. 욕을 당하되 대신 욕하지도 않고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짓궂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두 가지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하나, "이놈들 두고보자. 심판 날에 지옥으로 보내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뜻이 망가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고 괘사를 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고 위협하지도 않고 오직 공의로운 하나님께 다 맡기고 즐겁게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입니다.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힘겨워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는 무려 스물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명이 열살 전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 남은 가운데도 하나는 정신박약아입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했습니다. 인생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역경을 뚫고 끊임없이 불후의 명작을 썼습니다. 명곡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마다 그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쓰고 작품마다 마무리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바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하의 곡을 듣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영광이 넘치는 바하를 알지만은 바하가 한평생 이렇게 모진 고생을 했다는 것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모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의미를 압니다. 고난의 결과도 압니다. 고난의 필요도 압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압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은, 높은 곳으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을 어떤 의미로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를 통해서 날마다 새로운 승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람도 아니오 손이 짧음도 아니오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함도 아니라 오직 사랑 가운데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미쳐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고난을 주시고, 은사로 주시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고난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주님을 알게 하시고, 오늘도 새롭게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확인하면서 승리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 /벧전2:21-25/ 권오진 목사

2023-04-11 04:29:04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 미국 유니온 신학교 대학 초청으로 미국에 머물던 본회퍼는 1940년 독일로 돌아와 외국교회와 접촉하면서 반히틀러 운동을 전개하다 1943년 4월 5일 체포됩니다. 그 무렵 본회퍼는 마리아란 여인을 만나 약혼을 하려던 참이었지만 탈출할 기회를 포기합니다.

결국, 히틀러 암살계획과 관련된 서류가 발견되어 독일이 패전하기 불과 한 달 전인 1945년 4월 9일 그는 36세의 나이로 처형당하고, 시신은 소각됩니다.  

 

<사진 1. 본회퍼 목사>

처형되기 하루 전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그날 일을 동료 수감자 중 하나였던 영국군 장교는 이렇게 썼습니다.

“1945년 4월 8일 일요일, 본회퍼 목사는 작은 예배를 인도했으며, 모두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말씀을 전했다. 그는 우리가 갇혀 있는 참 뜻과, 이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생각과 결심을 표현하는 정확한 단어들을 찾아냈다. 그가 마지막 기도를 끝내자마자 문이 열렸고 두 명의 간수가 들어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본회퍼, 이리 나와!’ 그것은 모든 수용자에게 한 가지 의미 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 교수대.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나를 따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내게는 이것이 삶의 시작일 뿐입니다.’.

다음날 그는 플로센부르크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본회퍼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 주일에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한 본문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생애 마지막 설교를 베드로전서 중 오늘 본문으로 하셨고, 본문 말씀처럼 죽음 앞에 두려움 없이 예수님처럼 생을 마감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신앙 때문에 온 세계로 흩어진 성도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쓴 편지입니다.

그 내용 중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말씀을 근거로 세밀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22-25절을 제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22-25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누가 뭐라고 하든 <뚜벅뚜벅 걸어가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목적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살아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 특새를 통해 <십자가 아래로>라는 주제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겠지만,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의 둔한 머리로는 다 알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랍습니다.

 

어떤 분은 십자가를 일컬어 <십자가는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을 냅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보석은 빛을 냅니다. 여러분의 손에 끼고 있는 금반지나 혹은 다이아몬드 반지나 다른 반지라도 보석이라면 빛을 냅니다.

 

저는 반지를 끼지 않습니다.

제가 결혼한 후 처음에는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평상시처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며 마이크를 들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세든 어르신 한 분이 저에게 인사를 하는데 <전도사님! 새벽기도 하는데 반지가 번쩍번쩍 빛납디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르신은 저에게 장가가서 좋다는 의미로 말씀했겠지만, 저는 그 말씀을 들고 그날부터 반지를 빼버렸습니다. 설교하는데 반지가 반짝거려 성도의 시선을 분산시킨다면 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석은 빛을 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을 냅니다.

보석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빛깔을 내듯이, 십자가 역시 보는 면에 따라 각기 다른 은혜가 빛을 냅니다.

 

오늘은 세 가지 각도에서 나는 빛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 편에서 본 십자가

하나님 편에서 십자가를 보면 큰 사랑이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 아담이 타락해서 죄의 종이 되었을 때 그 사랑하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상처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오죽했으면 정오부터 운명하신 오후 3시까지 태양이 빛을 잃어 온 세상이 캄캄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라며 절규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물과 피를 흘리고 운명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의 큰 상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잘못된 일이 생길 때(교통사고, 사망사고, 혹은 갑자기 찾아온 질병),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자는 누구일까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김정순 명예권사님을 하나님 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예배를 드렸고, 돌아가신 화요일 새벽기도회를 참석하셨던 권사님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모두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마 권사님과 가까이 지낸 분일수록 상처가 클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상처를 치유해주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더 넓게 이해하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에 큰 상처가 남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사역 모두가 사랑이었지만,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십자가를 보면, 큰 사랑의 빛을 발합니다.

 

둘째, 예수님 편에서 본 십자가

예수님 편에서 십자가를 보면 죄의 대속이 빛을 발합니다.

오늘 본문 24절 상반절을 다시 보세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24절 상)

 

이 땅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는데(롬 3:10)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만이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찾아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그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셋째, 성도 편에서 본 십자가

성도의 쪽에서 십자가를 보면 삶의 원리가 빛을 발합니다.

잃어야 얻는다는 기독교의 진리가 십자가를 통해 보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 한 알의 밀이 썩어져야 열매를 찾을 수 있는 원리

어렵게 표현하면 - 죽어야 다시 사는 사중구생(死中求生)의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성도 편에서 본 십자가>에 대해서 잘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분의 발자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성도 된 우리에게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자고 초청합니다.

 

21절을 보세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절)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본을 보여주신 이유는? 성도 된 우리도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발자국을 따라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신 줄 아십니까?

18절 시작하는 말씀을 보세요. “사환들아!”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을 믿는 성도 가운데 사회적 신분이 <종>인 사람에게 한 말씀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1세기 말,

로마시의 경우 전체 인구 120만 명 중에 노예가 3분의 1인 40만 명에 이르렀고,

이탈리아 전체는 5~6백만 명의 시민 중, 1~2백만 명이 노예들이었다고 추정합니다,

보통 집안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1~2명 정도였고,

부유한 집안일 경우에는 400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기록에 의하면 어떤 자유인의 집안에는 4,000명이 넘는 노예도 있었고,

황제의 집안에는 대략 2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자유인이 아니었으므로 시민권을 가지지 못했고, 합법적으로 결혼하거나, 합법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주인들이 그들에게 벌을 주는 데 있어 어떤 법적 제한이나 규제도 없었습니다.

노예는 재산으로 취급되었기에, 지금으로 말하면 상표가 붙었고, 신체가 절단되기도 했으며, 거세되거나, 강간을 당하기도 하는 등 육체적이고 성적인 남용에 있어 주인의 의지나 기분에 종속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어려움에서 많은 종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 건강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 잘 살고

에수님을 믿으면 – 성공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 세상에 머리가 되어야 하고 꼬리가 되면 안 되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 세상의 리더야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현대 기독교인에게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달은 성도는 –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점입니다.

예수님처럼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수난을 묵묵히 받아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그 비밀을 알았기에 이 말씀으로 설교하셨고, 하루 뒤 당당하게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까지 그의 신앙의 정신이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잃어야 얻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이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서 죽으셨기에, 우리를 살리셨듯이

우리도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따라서 걸어오라>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벧전2:18-25/ 염두철목사

2023-02-05 01:17:12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인하여 그들의 주인 된 자들에게 고난을 받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열심히 일하였지만 악한 주인들은 성도된 자들을 이유 없이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성경에서는 애매한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화가 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본문 18절을 보면 전혀 뜻밖의 권면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성질이 급한 다혈질의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서에서의 베드로를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교훈입니다.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은 주인 뒤에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윤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 가만히 있으면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우리가 참으며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9-20을 보겠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예수님의 고난이 선을 행하고도 고난을 받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을 보면 그 목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고난 앞에서도 잠잠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모습은 빌라도에게 기이하기만 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5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베드로는 그 모습을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름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자신의 죄 값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받으신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본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22-23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고난을 견디지 못해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맞상대하지 않고 오직 공의로써 심판하시는 자에게 자신을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준 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온유함을 배우고, 자기 부인과 희생과 겸손함을 배우고,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을 배우고 그대로 따라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의 본을 보여주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의 본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는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삶의 모범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모범이 되고, 예수님의 삶의 가치가 우리에게 인생 철학이 되고, 예수님이 살아온 방법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성숙한 성도라면 시련을 당하든지, 시험을 당하든지, 어려움과 역경에 처하든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왜 너는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그 친구의 질문에 “만약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는 신앙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간디 주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디에게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실망스런 모습만 보여주었습니다.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하숙집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간디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하숙집 주인이 간디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셨다면 간디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인도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모택동 역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요, 다른 하나는 서구 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실망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빠져서 중국을 공산화 시켰다고 합니다. 그의 주변에도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가는 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면 자나 깨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송된 어떤 사람이 선교사 활동을 하면서 원주민들에게서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원주민들이 물살이 세고 빠른 시내를 건널 때에 크고 묵직한 돌을 주워서 어깨나 몸에 단단히 묶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시내를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이것이 시내를 건너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무거운 돌을 어깨에 매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시냇물 속으로 걸음을 옮기자 놀랍게도 무거운 돌 때문에 물살에 휩쓸리지 않았고 오히려 시내를 건너는 일이 쉬웠던 것입니다.

무거운 돌이 세찬 물살에서 몸을 지탱시켜 주는 것처럼, 고난과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연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사람들의 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십자가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는 고난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 문제도 없고, 아무 걱정도 없고, 아무 근심도 없는 사람이 행복해 보이고 잘 사는 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들이 더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보다도 부유하게 사는 나라 사람들이 우울증이 더 많고, 자살률이 더 높고, 마약중독이나 각종 범죄에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과 고통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이것이 복이 되고, 승리가 되고, 영광이 되도록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사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우리의 죄 값을 다 청산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불에 태움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렸는데, 그 어린 양은 예수님의 모형이고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과 같이 죽임을 당하여 속죄제물이 되고,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 값을 다 청산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를 탕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과 욕으로 가득한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나를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그리그 캔들러 2세는 젊었을 때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술을 끊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한번은 술에 취해서 자동차를 타고 오던 중 “나는 알콜 중독으로 망해가는구나. 어떻게 하면 술을 끊을 수 있었는가”하고 스스로 절규하고 있는데, 갑자기 “네 자신을 포기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때 그는 깜짝 놀라서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조용히 손을 잡고 “하나님, 이 음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에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알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육체의 욕망을 따르던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과 이기심과 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벌어들인 수입의 4분의 3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더 많은 복을 주어서 그가 하는 코카 콜라사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번창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심과 교만을 포기하고 자아를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능력과 권능을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상을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사,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치유하셨습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고 했습니다.

 

로마법에서는 죄인이 십자가 사형을 받기 전에 반드시 채찍으로 맞게 하였는데, 이 때 사용된 채찍은 끝이 갈라진 단단한 가죽이었고, 그 갈라진 끝에는 납이 달려 있어서 한 번 때릴 때마다 납이 살을 파고 들어가서 당길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채찍으로 39대를 맞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채찍에 맞으심으로 인해 우리의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을 이미 다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 고침을 받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의 치유를 믿는다고 해서 의학이나 의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면 당연이 병원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치유하시기도 하지만 의사의 손길을 빌려서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진 케일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술을 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술은 내가 하지만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사고가 나서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부랴부랴 어머니에게 달려갔지만 손이 떨려서 수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진 케일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수술을 잘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 때서야 손의 떨림이 멈춰서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해도 고치지 못하는 병들이 허다합니다. 살고 죽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부르시면 가야하지만 일단 우리는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플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채찍에 맞음으로 나을 것을 믿습니다’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하셨습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이나 가축을 돌보는 사람이고, 감독자는 다스리는 사람으로, 예수님은 마치 목자와 감독처럼 우리를 잘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유대 지방은 남북으로 중앙에 고원지대가 있고, 고원지대의 서쪽에는 황무지가 있고, 동쪽에는 사해를 향하여 300미터 이상의 낭떠러지기와 바위 절벽이 있습니다. 이렇고 폭이 좁고 울타리도 없는 고원에서 양들은 풀을 뜯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밤이면 들짐승의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또 조금만 길을 잘못 들거나 목자가 돌보지 않으면 양들은 낭떠러지기로 떨어져 죽고 맙니다. 그래서 목자는 항상 양들에게 신경을 쓰고 짐승의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목자가 양들을 돌보아 주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봐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또한 감독자로서 우리가 잘못되지 않도록 충고하고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길 잃은 가엾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주십니다.

이것을 경험한 다윗은 시편 23편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멋대로, 정욕대로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감독자가 되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평탄하고 형통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면 방황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가 방황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방황을 끝내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가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 주시고,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으로 죄에서 구속하셨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를 병에서 치유하시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고난을 이기고, 의를 얻고, 치유를 받고,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라/벧전2:24/양향모목사

2019-09-03 23:36:23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오늘 본문 말씀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평범하게 읽으면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나무”라고 표현한 말은 여러 가지의 의미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를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가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그 사실 외에 강조하고 싶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친히”라는 단어와 “그 몸으로”라는 단어가 특별히 기록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뒤에 나오는 말 즉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특별히 쓴 단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몸을 희생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별일이 아닌 것 같으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인 것 같으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이고 직접 그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친히 몸소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일, 예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몸을 희생하여야만 하셨던 그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그 일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다른 일은 다 몰라도 이 일만큼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일이 무엇이며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시고 죄에 대해선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참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죄의 길 의의 길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확실하게 구별이 되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죄의 길이고 한 길은 의의 길입니다.

한 길은 죄인으로 사는 길이고 한 길은 의인으로 사는 길입니다.

 

이 두 길 중에 어떤 길로 가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이 두길 중에 어떤 길로 행하면서 사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이 두 길이 가는 목적지가 너무나 확실하게 엄청나게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1)죄의 길이 있습니다.

죄의 길은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빼고 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몸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사탄에게서 받은 악한 심성들이 다 죄입니다.

교만하고, 욕심이 많고, 남의 것을 탐내고, 화를 잘 내고, 게으르고, 낭비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고, 큰 소리로 자랑하고, 자신만만하고, 잔인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죄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룰을 정하고 그 룰 안에서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 그 기준이 자기가 세운 기준에 의한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대학만 가면 공부만 잘하면 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만 많이 벌고 출세만 하고 성공만 하면 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도덕적으로 살고 양심적으로 살면 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사업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의의 기준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이 세운 의의 기준은 수시로 바뀝니다.

세월에 따라 바뀌고 가치관에 따라 바뀌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바뀌고 누구편인가에 따라서 바뀝니다.

 

그 훌륭한 이순신 장군도 우리나라 사람이 보면 의인이지만 일본 사람들이 보면 적군이요 원수일 뿐입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면 독재자여 나쁜 사람이지만 이북 사람들이 보면 존경하는 지도자 동지이요 하나님 같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성공한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죄의 길에 서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나는 성공을 하고 출세를 했어 나는 양심적으로 살고 나는 선한 일에 기부도 많이 하고 괜찮게 살았어, 나만큼 바르게 산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도 그런 것만 가지고는 죄인으로 죄인의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주일도 잘 지키고 율법도 잘 지키고 십일조도 꼬박꼬박하고 새벽기도도 잘 나가고 봉사도 헌신도 많이 하고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충성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런 것만 가지고는 역시 죄인의 길을 갈 뿐입니다.

 

이 세상에 부정모혈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의 길에 행하면서 살다가 죄인이 받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2)의의 길이 있습니다.

죄의 길이 사탄을 따르는 길이라면 의의 길은 하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로 와야 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세운 의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기준을 새우고 아무리 똑바로 기 기준대로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의롭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의로 여기시느냐는 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들 우리가 행하여야 할 선한 일들이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기준대로 살면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 계명들을 다 지키고 그 계명에 있는 정신들을 다 이해하고 그 뜻을 따르면 의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쉽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살면 의인이 되는데 그렇게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의 눈에만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면 된다고 하면 한번 쯤 도전을 해 볼만 한 일입니다.

그러나 밤에나 낮에나 집에서나 밖에서나 심지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크게 구별이 되는 두 길이 있는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로 물든 마음을 가지고 죄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의의 길로 가고자 해도 의의 기준도 잘 모르고 의의 기준을 알고 그 길을 가고자 해도 타락한 우리의 심성으로서는 도저히 그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죄의 길로 가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몸소 십자가에 그 몸을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의의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

 

2.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산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산 자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가지고 오셔서 그 몸을 십자가에 대속의 재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1)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는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뜻을 반대로 생각하기 쉬운 조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말은 언뜻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처럼 아주 조금도 죄를 지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죄를 지을 생각이 조금도 없으십니까?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안 아프고 다른 사람이 나를 흉보고 다닌다고 해도 화가 나지 않고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 사람이 있어도 용서가 되십니까?

 

너무 고차원적인 것을 물어봤습니까?

그럼 조금 낮추어서 마음은 그렇다고 해도 행동에 옮기지는 않으시지요?

인간인지라 죄질 생각 죄악 된 생각은 때로는 있어도 실지적으로 나쁜 일은 하지 않으시지요?

사실 우리는 수시로 죄악 된 생각을 하고 때때로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아닙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해도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처럼 무 반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이 전적으로 죄에 반응이 없이 죽은 사람처럼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 이 말을 그렇게 무반응을 하는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은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을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나의 의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은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죄 때문에 몸소 친히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다시 그 죄를 짓는다는 것은 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마저도 쉽게 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죄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죄의 결과나 죄로 인한 책임이나 죄로 인한 형벌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의 습성을 가지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죄의 무서움을 알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어쩔 수 없이 때로는 마음으로 때로는 몸으로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그러나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고 형벌을 받을 일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하여서 지시고 사형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는 이미 함께 사형을 받고 형벌을 받아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형벌과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는 관계가 없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2)우리는 의에 대하여 산 자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들이요 의에 대해서는 산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먼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 성도들이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새롭게 의의 기준을 세워주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말씀대로 선을 행할 때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해 주셨지만 이제는 그 율법을 지킴으로 받게 되는 의가 아닌 새로운 한 의의 기준을 세워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의의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의의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과거처럼 옛날 구약시대처럼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기준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에 의해서는 그 누구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이신칭의“라는 새로운 의의 기준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보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해 주신다고 했는데 사실 이 믿음을 갖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무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입으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만 믿음을 가질 자격이 주어집니다.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님을 받아서 성령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 이 믿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고백하는 것도 그저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이었나를 깨닫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아무나 내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고난을 당하고 가난해졌을 때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사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믿음을 가질 수도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보일 뿐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의의 기준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이렇게 의에 대해서 산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의에 대하여 산 사람이 된 것은 너무나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의에 대해서 살았다는 것은 단순히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1)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갖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옛날의 모습들을 다 벗어 버리고 사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새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3)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노예로서 죄에 얽매여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일부러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이제 죄를 짓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던 사람들이 감옥에 갔다가 와서 새 사람이 되려고 해도 그 버릇을 끊지 못해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은 죄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끊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억지로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4)우리는 확실한 미래와 새로운 목적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의에 대해서 산 사람이란 확실한 미래가 보장이 되어 있다는 것이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매래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목표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목적도 있고 확실한 미래도 가진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5)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죄는 삯입니다. 그 대가라는 것입니다.

죄는 그 삯 즉 그 행함에 의해서 사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의는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은사로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텔레비전에 제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이 나와서 자신의 일을 자랑스럽게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제가 아는 그 때의 그 사람은 목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사람이 뭘 자랑할 것이 있다고 텔레비전에까지 나와서 잘났다고 간증을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가 잘난 사람일까?

단 한 가지 잘난 것은 그에게도 우리가 가진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못나고 못난 짓을 했다고 해도 못난 것은 덮어지고 좋은 것 선한 것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그런 취급을 받습니다.

너희 같은 것들이 뭐가 잘나서 의인이냐 너처럼 지저분하고 못난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나는 만국에 가겠다. 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말을 들을 만합니다.

제 자신을 둘러봐도 참 잘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의로운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고 그 선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그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의로움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있고 그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의에 대해서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의에 대해서 산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로인하여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었고 의에 대해서는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사람답게 새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다시 고난을 생각하십시오 /벧전2:18-25/ 김병삼목사

2018-11-07 03:42:3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에 대하여 우리가 순복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주를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오늘의 주제 역시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당시 노예제도가 보편화되어 있었고, 노예들의 인권이 별로 존재하지 않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대속하심과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신분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나라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연히 세상의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고, 노예의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당연히 권리를 주장하는 주인들도 존재하고 있었겠죠.

그런데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림을 받게 된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18절 말씀.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우리가 믿는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자유’를 얻었습니다. 죄와 세상의 권력에 매여 있지 않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묶어둘 수 없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고난당하는’것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합니다.

어려운 것은 선하고 관용이 있는 주인들에게 만 아니라,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자에게도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본문 19절과 20절을 보세요.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쉬운 고난은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요,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오늘 말씀이 참 흥미롭죠.

고난 받을 만한 이유가 없이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그 고난을 참으면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죄가 있어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래도 고난은 힘겹고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다면 더욱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고난을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즉, 고난은 우리가 잘 하든 잘못 하든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고 있는 그 고난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드느냐가 아닐까요?

시편 118편 5절에 보면 다윗은 고난 중에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 .”

다윗의 응답은 그가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골고다로 이어지는 고통스런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도 반대로 가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당하셔야 했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굳건한 믿음으로 인해 십자가를 지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부활은 바로 그 고통의 결과였고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믿음의 공동체를 향해 권면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가짜 예수는 우리들을 고통에서부터 구원해 주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진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골짜기를 ‘잘 통과하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을 통해 구속을,

절망의 터널을 통과해 소망의 빛을,

십자가의 과정을 통해 부활을 보도록 권면하시는 분이시고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흔히 착각하는 고통의 해결 방법이 무엇인가요?

하나는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을 마비시키는 진통 요법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둘 다 본질적인 치료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죠.

제이슨 미첼은 [쉬운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 우리가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 걸어야할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고통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의외로 부모로부터 받은 고통의 문제를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너무나 가난 했던 어린 시절이 싫어서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쇼핑 중독에 빠진 사람도 봅니다. 당장은 물건을 사며 만족에 취하거나 가난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더 큰 고통으로 찾아옵니다.

 

어릴 적 부모로 받은 학대를 잊고 보상하기 위해 자신의 자녀에게 집착하는 부모들도 봅니다. 그런데 보상심리로 자녀들을 대하는 부모들은 또 다른 모습으로 자녀를 학대하고 있는 것이며, 그 부모로 인해 자녀는 또 다른 상처를 입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실체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고통의 실체를 인정하고 나면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십자가의 흔적, 즉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상처와 고통의 흔적이야 말로 지금 직면한 부활의 명확한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상처를 보여주시던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뒤에 다시 도마에게도 나타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상처를 드러내 보이시므로 자신의 대한 의심을 풀어 주셨습니다.”

 

참 신기하죠?

상처를 드러내 보이시므로 그 동안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없애 주셨다는 것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증거는 바로 ‘상처’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상처가 무서워 그 상처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처를 드러내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는 더 큰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상처가 부끄러움의 흔적이 아니라, 그 상처를 이긴 승리의 흔적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이슨 미첼은 세상이 교회와 크리스천들에 대해 불신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1. 상처 하나 없는 사람들로만 가득해서 상처받은 자들이 설 자리가 없는 교회는 멀게만 느껴진다.

2. 실생활에서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줄 뻔히 아는데 아닌 척 거짓말하는 사람들만 가득한 교회를 믿을 수 없다.

3. 상처 하나 치유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 따위는 필요 없다.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상처하나 없는 깨끗한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고통의 흔적을 씻고 이긴 사람들,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숨기면서 어떻게 고통을 치유하시는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고 고침을 받을 때, 우리가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가며 생명 되시는 주님을 고백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밝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성공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느끼는 대단한 감정보다,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실제로 우리의 고통 가운데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대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는 소망이 생기지 않을까요?

우리의 상처와 피흘림을 고백할 때, 주님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저런, 네 삶에서 피가 흘렀니? 나도 많은 피를 흘렸단다!”

 

고난과 아름다움의 상관관계

조금 더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9-20절 말씀 가운데 저에게 들어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아름다우나’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잠깐 반복하겠습니다. 고난에는 두 가지가 있는 데, 하나는 마땅히 당하는 고난이요, 다른 하나는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똑같은 고난이지만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은 너무 억울해서 견디기가 힘든 고난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참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당하고 참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 아름다우냐면, 이 고난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은혜’와 동일한 말로 해석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 참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참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은혜’가 생각날 때입니다. 은혜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데, 이런 은혜는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당하는 고난 가운데 복음의 핵심을 생각나게 하는데, 빌립보서 1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종종 믿음으로 우리가 받는 ‘구원’만을 은혜로 생각하는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도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은혜든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전주에 함께 묵상한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과 연결시켜 보면 ‘고난’이 ‘아름다운 덕’을 드러나게 한다는 것과도 통하지 않을까요? 이제 9절 말씀이 잘 이해가 될 듯합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때때로 억울한 일들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며 대신 매를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믿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마지막 때에 드러날 것을 믿는 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기이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까지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고난을 바라보는 영적 안목이 있다!’

 

출처: 김남준 목사 설교 중

서양 속담 중에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흘러가는 시냇물의 아름다운 소리는 곳곳에 박혀 물의 흐름을 방해하던 돌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역경과 고난이라는 돌이 없다면 아름다운 감사의 찬양과 기쁨도 없다. 우리는 화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그녀는 어려서 다른 사람의 실수로 맹인이 됐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를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일평생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고 9000편의 찬송시를 남겼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 391장‘오 놀라운 구세주’역시 그녀가 남긴 찬송시다.

 

아무리 큰 절망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는 희망과 감격의 통로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둡고 험한 길이라도 은혜로 점철된 기쁨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안목은 우리들에게 늘 신앙적 질문을 묻게 합니다.

지난 학기 감신 대학원에서 목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목회를 시작하기 전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why’를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은 ‘how’를 아는 것이다.

이유를 알아야 올바른 전략이 나오는데,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전략은 늘 가변적이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목회를 하면서, 잘못된 고집을 부려서 교인들을 힘들게 하고,

교인들이 하는 말들에 흔들리다가 자신이 힘들어 지는 경우는 ‘목회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에도 동일한 일이 아닐까요?

고난의 순간에 왜 고난을 당하는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왜 우리가 이 일을 견뎌야 하는지. . .

 

이를 위하여. . .

오늘 말씀은 아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름다운 이유를 21절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 말씀이 시작하는 ‘이를 위하여’라는 말이죠.

전체를 묵상하며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인데, 그리스도도 우리들처럼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마땅한 고난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그 삶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사 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죄가 있어 마땅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마땅히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6장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며 처음부터 말씀하셨지만, 잘 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보려고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보며 따랐던 사람들에게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지 못할 때,

제자들이 생각하던 복과 예수님이 주시고자 했던 복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나음을 입게 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따라오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서 누군가 따라오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

시편기자는 119편 71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배워가고, 하나님을 따라가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고난’이라는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무엇이 드러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참고 이길 수 있는 분명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가 분명해 지는 순간 ‘어떻게’가 따라 나오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장기려 박사 기념 사업회에서 펴낸 장기려 박사의 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한 사람이고, 한국 전쟁 후에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시작으로 돈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한 사람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사람으로. . .

그런데 그의 전기를 읽다보니 참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왜 그렇게 선한의도로 일을 하는 사람을 어렵게 할까요?

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을 모함할까요?

 

장기려 박사는 일제시대 때 경성의전을 1등으로 졸업하고 평양의 기휼병원으로 갑니다.

그에게 주어진 경성의대 외과교수 자리나, 경성에서 개원할 수 있는 기회를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간 자리였습니다.

그가 어렵게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죠.

의사가 된 ‘이유’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무의촌에 가서 진료하겠다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 생각났기 때문이죠.

 

그는 평양의 기휼 병원에서 외과과장으로 봉직하며 자신의 월급으로 어려운 이들의 수술비를 대 주었습니다.

그에게 감동한 원장은 그에게 원장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그를 모함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오히려 동료의사들이 분개하고, 대신 결백함을 알리겠다고 흥분합니다. 원장으로 있던 그가 외과 과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장 선생님, 왜 이렇게 침묵하십니까?”

이비인후과 과장이 찾아왔다. 그는 단단히 각오하고 날 만나러 온 것이었다.

“뭘 말인가? 난 할 말이 없네.”

“선생님이 허락하시면 제가 앞에서 싸우겠습니다. 선생님을 기휼에서 끌어내려는 무리들을 가만두실 겁니까? 저는 속이 끓어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당장 일을 벌일 기세였다.

“여보게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면 되는 것이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나. 난 아니니 됐고. 그만 진정하고 돌아가게.”

나를 위해, 기를 쓰던 이비인후과 과장을 돌려보내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님, 당신은 저와 같은 처지에 있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참을 그 질문을 붙잡고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어떻게 해. 네게 맡겨진 충성하면 되지 않겠니.’

주님이 들려주시는 세미한 응답이었다. . .

 

[장기려, 그 길을 따라]라는 책을 보면서 제 마음에도 화가 치미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장기려 박사는

그 곳에 복음 병원을 시작했습니다. 의원으로 시작했던 곳이 1961년 입원실이 100개가 넘는 병원으로 규모가 커졌고, 규모를 감당하기에 턱 없이 부족한 간호사들을 충원하기 위해 1969년에는 ‘복음간호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훈은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사명감을 가지고 사물을 대하라,

문제는 과학적으로 해결하라.

 

또한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라는 것이 생소하던 시절 부산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을 처음으로 시작한 분이기도 합니다.

당시 복음병원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병원이 당시 고신대학을 정식 대학으로 인가받기 위해 필요한 신학교로 만들기 위해 고신대학 부속병원으로 이름을 빌려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병원으로 인해 학교가 커가고 병원이 커지자 이권을 노린 정치 목사들에게 병원을 빼앗기게 되죠.

 

그런데 그런 나쁜 사람들에게 맞서서 싸우는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으로 모든 것을 두고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모든 것을 내 주었으나, 승리한 사람으로 그를 기억합니다.

함께 싸워 진흙탕을 뒹굴어 더러워진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우리가 따라가야 할 발걸음이 되어준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는 1988년 제도권에 속한 교회를 떠나갑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종들의 모임’에서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마지막을 살다 1995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산 돌 위에 자기 인생의 집을 지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거룩한 나라의 족속이 되게 하신 자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의 모습니다.

우리는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보게 됩니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난 받으시므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당한 일에 항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순복하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악을 용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악과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먼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병정들에게 잡히실 때, 베드로는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주님은 말고의 귀를 붙여 주시며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장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행동이 악하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예의 입장에서 주인의 부당함과 싸우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싸움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참으시고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싸움하지도 싸움도 못하는 무기력한 크리스천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싸우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죠.

주인에게 대항하는 것보다 순복하기 위해 싸워야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다음에 함께 묵상하게 될 말씀이지만 베드로전서 3장 9절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주 중요한 것인데, 교회는 어떤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아니, 교회가 불이익을 당할 때, 세상과 똑같이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싸우는 단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참 어려운 일이죠. 도리어 ‘복을 빌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순복’이라는 말이 저에게는 비겁한 복종이나 굴종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복음의 능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칼을 들고 로마에 대항하지 않은 것,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정치세력화하지 않은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방법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본을 끼쳐’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나요? 헬라어의 ‘휘포그람모스’라는 말은, 아직 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써 놓고 따라 쓰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으나 마땅히 참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주님의 뒤를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것은 유명한 목회자, 성공한 신앙인의 길이 아닙니다.

요즘 교회가 능력을 상실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본을 받으려는 태도들이 아닐까요?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주님의 길을 그대로 따라간 사람을 믿음의 성공자라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며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가진 사람들을 ‘성공자’라고 부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의 말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본을 받아야 할 그리스도에 대하여 오늘 본문 22-24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신 분인데, 욕을 당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24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앞에 우리가 묵상한 것과 연결시켜 보면 이렇게 되겠죠.

우리가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것이 아니라 선을 생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히 크리스천들이 살아가야 하는 도리입니다. 25절에서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전에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삶이 사실을 방향을 잃은 인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그릇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목자와 감독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이전에는 우리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해보이지만 그 길이 승리의 길임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을 다시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우리 인생에서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고난이 아름다운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사무치게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고난이 우리의 무능력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를 선전하는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늘 역설의 종교였습니다.

십자가가 부활로,

고난이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비움이 성취로,

약함이 강함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요?

 

 

복음의 능력과 축복(4) - 치유됨의 축복 /벧전2:24/ 하용조목사

2015-05-27 10:17:29

 

신약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유에 대한 말씀들이 곳곳에서 많이 기록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서 24절까지 말씀을 읽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 군병들의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채찍은 가죽으로 만든 길이 1m에서 1.5m정도로 그 끝에 쇠붙이가 달려있었습니다. 그 채찍으로 맞으면 사람의 살점이 찢겨져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살점이 터져나갔을 때 우리의 모든 상처는 치유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질고를 담당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장 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메시아가 오셔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가리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질병도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영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살점을 뜯기시고 피를 흘리시며 죽어가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사망이 죽어 있는 모습까지도 보게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뜻하는데, 그 말씀을 큰 소리로 자신의 귀에 들리도록 한 번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는 이야기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각색 질병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성경 전체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에 각종 질병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질병에 너무 눌려 있고 병치료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너무 큰 경제적 부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암이나 식물 인간 상태로 장기간 병원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통 사고 등 각종 재난으로 신체 불구가 된 사람도 허다합니다.

 

자폐증, 정신분열증,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환자 본인도 괴롭지만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고 하며 가족들은 모두 우울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질병들을 친히 감당하신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치유의 기적은 ‘현재 진행형’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병자들을 치유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손수건만으로도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치유의 기적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각종 질병들을 치유하셨는데, 우리는 못하는 것일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셨기에 우리도 지금 당연히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으시고 항상 동일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영원한 능력이십니다.

 

문제는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그 사실을 믿지 못한 제자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보기 전에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도 있었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지만 은 삼십에 팔아버린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만 다섯 명의 제자들은 믿지 못하고 전직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똑같은 구원의 설교를 듣고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러셀은 그 책에서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요소들을 총동원해 많은 논리들을 갖다 붙여 형이상학적으로 말을 하고 있지만, 결론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예수님에 대해 많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 말씀과 똑같은 필체로 쓰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고 교회에도 다녔으며 예수님을 믿었지만, 결국 ‘신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지식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구별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치유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복음의 능력과 복을 받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어떤 형태의 질병에서도 능히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실패도 하고 실직도 하며, 이혼도 하고 질병도 앓으며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적적으로 변화의 삶도 살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알기 쉽도록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부자(父子) 관계 정립

 

첫째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불확실하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온누리교회가 생기기 전에 김기순 박사님이 미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해 KIST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국내 생활 중 간암에 걸렸습니다. 연구 활동도 중단한 채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병상에서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과 친구들이 저를 찾아와 그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대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그의 얼굴은 새까맣고 황달기가 농후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는 원래 불교 신자여서, 저는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저는 전도사였기 때문에 “김 박사님, 저는 전도사인데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김 박사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제가 기도하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이 없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대와 MIT대와 하버드대의 화려한 경력과 박사 학위는 김 박사님을 구원해 주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서울대병원 후문을 나와 성균관대까지 걸으면서 하나님께 김 박사님을 살려달라고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한 달 정도 치료받고 퇴원해 복직했습니다.

 

그 후 그가 교회에 나왔는데, 예수님을 믿어서 온 게 아니라 젊은 전도사가 병실을 찾아와 기도해 줘서 병이 나았다며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서 교회에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온누리교회의 시작입니다. 그 후 그는 신실하게 예수님을 믿었고 KIST에 다니는 동안 정말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1년 뒤에 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역사가 있었고 3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는 나머지를 사는 동안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처럼 무섭게 전도했습니다.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많았더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관계 설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며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시작은 예수님께 향한 믿음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 받는 영적 권리가 주어진 사실을 믿는다면, 여기서 각종 질병을 치유하는 기적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지만 그 죽음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지만 영은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듭나 부활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무거운 죄의 짐은 떠났고 사망의 권세는 사라졌습니다.

 

로마서 5장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했습니다. 사망이 우리의 주인이었고 우리는 사망의 노예였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들이 우리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항상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고 더 이상 죄를 정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원죄와 우리가 지은 죄악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뿌리째 뽑혀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죄악의 결과인 저주, 패배, 절망감, 정신 질환, 육체적 질병, 죽음마저도 사라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살겠다’는 말이 이런 것입니다.

 

치유는 믿음의 문제

 

셋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거절하시지 않고 모두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마다 ‘너의 믿음대로 되리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입으로 고백하고 선포하는 순간에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예수님 뒤로 다가와 겉옷 자락을 잡았습니다. 그 여인의 마음에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이켜 그 여인을 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자, 그 즉시 여인은 혈루증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 여인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다가가 자신의 믿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갔던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혈루증을 낫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의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병을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기대는 믿음과 다른 것입니다.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은 인간적인 욕심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진급하게 해 달라,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기대일까요? 그것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인간적인 욕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대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서 예수님께서 정말 병을 고쳐 주신다고 확증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자식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속으로 뛰어들고 이리저리 넘어지며 고생한다면, 부모는 그 자식의 병 낫기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도와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식을 치유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확증하는 일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항상 ‘네가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또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그 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인이고 수보로니게 족속인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관심이 없다며 자기 자녀들부터 먼저 배불리 먹게 하지, 자기 자녀들이 먹어야 할 떡으로 개(犬, 이방인)에게 주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면서 자신을 개로 비유하며 절대적으로 예수님께 의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시고 그녀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서 모든 것은 항상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병들어 아파하며 형편이 어려운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항상 엉뚱하게도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면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심·공포·마귀를 이기고 믿음으로

 

넷째는 우리가 의심과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 하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듭니다. 우리가 쉽게 믿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믿음에 대해 강조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믿음들이 전면 부인될 수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모두 가짜일 수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면 개인적인 욕심이고 더욱 들어가 보면 인간적인 욕망입니다.

 

생명이 있는 약속의 말씀에 대해 인간적인 지식, 이성, 경험 등으로 동의한 것일 뿐이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믿음이라면 기적은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또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 하면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기적을 만들고 그 기적 앞에서 정적과 같은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주위 환경입니다. 인간은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잡을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무모하게 보일 뿐이고, 그것이 곧 믿음을 갖는 데 장애물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갖지 못하게 결정적인 이유는 마귀의 속임수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거짓 환상을 심어 줍니다. 우리의 죄가 이미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죄가 있다고 거짓으로 속삭입니다.

 

우리의 과거 습관이었는데도 마치 현실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뚫고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제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 생각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역사는 죄를 계속 생각나게 하는 것이지만,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계속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면 계속 성령님을 생각하고 그분과 지속적인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부자(父子) 관계를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저주, 절망, 질병, 슬픔, 고통, 죽음 등이 모두 떠났다고 선언해 보십시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저를 따라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예수님께서 저의 병을 짊어지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써 저의 모든 질병들이 치유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저의 죄가 모두 사라졌음을 믿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해방시켰음을 믿습니다. 질병, 죽음, 마귀의 권세가 이미 모두 떠나간 사실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사건을 통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허락해 주시고 불의 역사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영광과 존귀를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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