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13 - 18 절 설교 모음
그리하여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3-18/ 곽선희 목사
2014-11-24 22:27:10
이번 달 가이드 포스트지에는 특별한 보고서가 실려 있습니다. 현재 터키에 이스탄불이라고 하는 수도가 있고, 그 수도는 본래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이 콘스탄티노플 그 옛 도성 안에 성 소피아 사원이라고 있습니다.
아마 중동지구를 여행했던 분들은 한번씩 다 다녀왔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1700년 된 엄청난 성전입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1700년 전에 어찌 이렇게 큰 성전이 지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세 차례나 지진을 만났습니다마는 이 집은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서 있어서 기독교문화의 그 화려했던 옛날을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거기에 소장되어 있는 비밀한, 아주 소중한 보고서가 있어서 이것을 이번 가이드 포스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제목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라고 하는 문건입니다.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빌라도 총독의 보고서로서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시작이 되고 그 다음 내용은 대체로 성경에 있는 기록과 비슷하게 그 내용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는 '원치 않았지만 폭동이 무서워서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었고 제자들은 용기를 내서 예수 부활했다고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에 아들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각하,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 본디오 빌라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부활절을 당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될 문제는 부활의 역사성입니다. 부활을 철학적으로 추상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문제가 아닙니다. 혹은 도덕적으로 설명할 문제도 아닙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철저한 사건으로부터 기독교는 시작이 됩니다.
이 역사적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 될 것입니다. 사실로 인간의 인간 됨은 바로 그의 생각에 있는 것이올시다. 생명은 바로 생각입니다. 믿음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영생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라. 메멘토 도미니, 주님을 생각하라. 복잡한 일이 많겠습니다마는 이 두 가지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기에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하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은 동물입니다. 알고 사는 것이 인간이요 아는 만큼의 인간은 존재합니다. 믿는 만큼에 우리의 생명의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요. 거기에 영생이 있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예수의 부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부활은 예수의 부활만이 부활이요 그것만이 부활입니다. 말로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비사로도 어떤 논리로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본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실일 뿐이지 우리가 알고 모르고 믿고 안 믿고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사실대로 실재할 뿐입니다. 부활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만이 부활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Immortality, 소위 영혼불멸같이 그런 이론도 아닙니다. 물론 옛 생명의 회생도 아닙니다. 특별히 윤회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며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설명해주는 또 증거해 주는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요 우리에 대한 약속이요 우리의 생명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그 어느 때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구속사적인 사건입니다. 첫 열매가 되십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우주적인 사건이며 구속 사건이며 동시에 부활에 대한, 부활 생명에 대한 증거며 우리에게 향하신 예표요 우리 생명에 향하신 약속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죽음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은 동물성인 죽음이요 하나의 자연현상이올시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은 절대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일 뿐이지 그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요.
오히려 자유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출생의 신비입니다. 성장의 신비입니다. 요새 뭐 DNA니 혹은 유전학이니 유전공학이니 해서 많은 연구를 합니다마는 뭐 그 '유전자를 읽었다. 해득했다' 뭐 이런 얘기들이 신문에 납니다.
굉장한 것처럼. 문자 그대로 해득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의 세계를 요만큼 해득 좀 해놓고 뭘 다 알고 문제의 해결이라도 난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요. 여러분, 여러분 생전에 죽지 않을 약이 나오리라고 착각하진 마세요. 죽어요,
그러니까 그런지 아세요. 그거는 아닙니다. 늙지 않는다고 해서, 안 늙어도 걱정이죠 사실은. 안 죽어도 걱정이죠. 여러분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에요. 그 성장이 신비롭고 유전인자가 신비롭고 죽음이라는 그 자체가 뭐냐? 점점 더 신비로워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과학자들이 더 신앙이 좋아요. 연구해갈수록 점점 더 깊은 세계를 발견해요. 놀라운 것이에요. 더욱 부활이라는 것은 더더욱 신비로운 것입니다. 참 생명이 육체라는 옷을 잠깐 입었다가 그 어느 순간에 벗어버린다고 생각하세요. 이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인간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잔다." 잔다고 세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잔다. 예수님도 멀쩡하게 죽은 사람 지금 죽었다고 모두가 울고 있고 장례식까지 하고 있는데 "잔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관은 휴식이올시다.
'잔다.' 잔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쉰다는 말이에요. 피곤해서 좀 쉬는 겁니다. 우리가 힘써 일하고 밤에 피곤해서 잡니다. 그 잠자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쉬는 것이요. 그리고 잔다는 말은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잠자는 것 가만히 보면 애들 자는 건 예쁩니다. 어른 자는 건 영 아니에요. 게다가 코를 드렁드렁 골다가 숨넘어갈 것같이 꿀꺽거리면은 아이구 이거 참 힘들어요. 그래서 내가 잠드니 말이지 깨서 그거 계속 들으라고 그러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그 안에 있으니까. 죽은 것 같으나 생명이 그 안에 있어요. 그게 자는 것이에요. '잔다'는 말은 '생명이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혹 여러분이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아프고 답답하면 죽었을까? 아이고 얼마나 숨이 답답할까?' 그리 생각하십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죽음은 자는 것과 꼭같습니다. 생명은 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잠들어서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과 꼭같은 현상으로 죽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지옥 갈까 걱정하세요. 그거나 걱정하세요.
또 주님 앞에 가서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까 그런 걱정을 하더라도 죽는 자체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고 숨막힐텐데 그거 어떡하지?' 그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러분 잠들 때 그 걱정했습니까? 잠자는 것은 죽는 연습입니다,
그게. 매일매일 우리는 죽는 연습을 하고 죽었다 살았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잠이라는 것은 현상이야 어떻게 전개되든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 속에 생명 있다' 그 말이요. 또 하나는 잠이라는 말은 잠에서 깰 때가 있다. '깬다' 그 말이요.
지금은 자지만은 깨어날 때가 있어요. 그것을 내다보기 때문에 "잔다" 그랬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죽어서 장례식을 하는 사람을 보고도 "잠들었다." 예수님의 능력이 플러스알파로 역사할 때 그건 깨어나게 되는 거죠.
그 깨어날 아침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잔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평화롭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잔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잠이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잔다. 이게 문제올시다.
그리스도 안에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잔다. 여기에 죽음을 넘어서는 엄청난 신비가 있는 것이올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고 그의 능력 안에 사는 거요. 그리고 자유한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 산다, 그리고 잠들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잔다고 말했습니다.
스텐버그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The Psychology of Love 라고 하는 책에서 사랑의 3요소를 말합니다. 우리가 인격과 인격관계에서 서로 믿고 사랑한다는 게 뭘 의미하느냐? 그것은 바로 Intimacy - 친밀감을 말한다는 것이죠. 가깝게 느낍니다.
상대방의 행복을 증진시키고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찹니다. 지시를 받으려는 마음, 지시하려는 마음으로 꽉 찹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요. 여러분,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그 철없는 어린 아이들, 부모님의 사랑을 가까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잠깐만 떠나도 못삽니다.
그런데 따로 떨어져 노는 것 같이 장난감 가지고 놀고 친구와 같이 노는 것 같아도 지금 부모님이 여기 계시고 부모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고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친밀감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를 떠나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한 그러한 느낌이 실제적으로 육체의 생활 속에도 나타나고 있어요. 이 친밀감, 마치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그러면서 어머니의 눈을 쳐다보고 있는 거와 같이 바로 그러한 관계 친밀함이 있어요.
이것은 두 생명의 연합을 말하는 거죠. 또한 둘째는 정열이올시다. Passion 입니다. 관심이 있고 사랑과 사랑의 대상에 몰두합니다. 그의 사랑을 담뿍 받으면서 아무 구속이 없습니다. 자유하며 행복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Total Commitment 올시다. 전적으로 위탁을 하고 헌신합니다. 독립되게 별도로 걱정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에게 다 맡기었어요. 내 생명을 그에게 다 위탁해 버렸어요. 그리고 그의 뜻을 그대로 나의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자,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고 그리고 죽었어요. 이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자는 사람이다. 잠깐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장차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다. 지금도 영원히. 생명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요 그것은 헌신이요 그것은 행복이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엄청난 자유와 용기입니다. 그것으로 영원한 세계까지 이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활 생명 속에 사는 오늘의 생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더 테레사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선물' 이라는 책에서 한평생 인도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생을 바친 이 수녀 테레사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선교적으로 사는 모습이다. 선교적으로 산다, 선교사적으로 산다. 다시 말하면 사명을 지니고 사는 거예요. 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거요. 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요.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거예요. 증인으로 살고 선교사적으로 사는 것이요. 엄청난 사명을 지니고 삽니다. 두 번째는 명상가로 산다 그랬어요. Meditation,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명상이란 한가지만 생각하는 거요. 거기다가 사랑과 정열을 쏟는 거예요. 그 외에는 전혀 생각지 않는 거예요. 이게 명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쳐다보고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아요. 명상가적으로 사는 것이다.
셋째는 보편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의인이면서도 죄인 속에 삽니다. 선하면서도 악한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마는 죄악 세상에 아무 불평 없이 그대로 흡수되어 살아갑니다.
철저한 보편성, 여기는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부하건 가난하건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철저한 보편성을 지니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순성을 말합니다. Simplicity. 그렇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말합니다. 심령의학에서도 말합니다. 병이 왜 생기느냐고요? 복잡성 때문에 생깁니다. 딱 한가지만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은 엄청난,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생각하고 저 생각하고 생각이 분열 분산되기 시작하면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니 병균을 이기지 못합니다. 단순성, 사랑에 대하여 단순하고 믿음에 대하여 단순하고 생의 목적에 대해서 단순하고 사명감에 대해 철저하게 Simple mind, Simplicity, 집중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생애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독일의 젊은 신학자였던 본 회퍼, 순교자입니다. 그는 기독교 윤리라는 책에서 에케 호모(ECCE Homo)라고 하는 유명한 말의 논문을 씁니다. 에케 호모라는 말은 Behold this man, 이 사람을 보라, 하는 말이요. 예수를 빌라도 앞에선 예수를 지칭한 말입니다.
그런 예수를 이런 각도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우상화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우상화하지 않았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직도 뭘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잘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처럼 깨끗이 지워버리세요
. 자기가 우상화되는 것처럼 맹랑한 게 없어요. 별것도 아닌 것이 대단한 거처럼 착각을 하고 있어요. 잊어버리세요. 예수는 자기를 철저하게 우상화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성공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실적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내가 뭘 했노라. 예수님 병 고치고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랬어요.
그 많은 역사를 하고도 오히려 피했어요. 실적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했다면 뭐 했다는 얘기입니까? 여러분 자기 공적을 성공을 절대로 우상화해서는 안됩니다. 셋째는 죽음을 우상화하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앞에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그늘이 전혀 없이 살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근심이나 공포가 전혀 없이 깨끗하게 정말 영원을 지향하며 가장 임시적인 세상을 아주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 부활사건 역사적인 부활사건이 이 제자들을 통해서 부활 신앙으로 화합니다. 부활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부활 신앙이 되고, 부활 신앙이 될 때 부활 생명이 됩니다. 이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가 이것을 긍정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막을 길이 없다고요. 부활생명은 가장 위대한 능력이요 지혜요 삶의 힘인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의 보장을 받고 그 믿음에 살고 그 사랑으로 살고 그 감격에 살고 그 능력에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가장 중요한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때때로 외면하고 스스로 자기를 우상화하면서 허망한 일에 끌려들며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며 부활 사건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부활 신앙을 새롭게 함으로써 순전하고 단순하고 보편적이고 거룩한 영생으로 이어지는 귀한 생을 오늘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할 그날의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 승리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살전4:13-18/ 죽음이 왜 두려운가?/ 조용기 목사
2014-09-27 12:39:06
사후 세계를 두려워 하는 인간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명확히 언급
예수님 의지하면 두려움 극복하고 천국 소유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좀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할까요?
1. 죽음이 생존의 끝이요 그 이후는 전적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경계선 저편은 전혀 모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이 있고, 살던 세상이 있는데 이것을 다 잃어버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나간다는 것은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잠깐 사는 세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죽음 건너편의 세상은 영원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내과의사 모리스 롤링즈 박사는 죽었다가 살아난 많은 환자들을 병상에서 인터뷰한 것을 모아 「죽음의 문 너머」라는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온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이 임박하여 의식이 흐려져도 방안 전체의 모습이 보이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육체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 순간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고 무언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빛의 천사, 사랑이 넘치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황금 빌딩, 수정같이 맑은 도로,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곳을 방문하고 거룩한 존재 앞에 서는 경험을 한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환자들은 알 수 없는 흑암의 존재들에게 끌려 불구덩이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가 돌아왔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했던 모든 일들과 말들이 천사들과 심판자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같이 한 의사가 수많은 환자가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기이하게 살아난 간증 등을 모아서 만든 책입니다. 이처럼 죽음 이후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다음에 반드시 심판이 있는 것을 의사가 체험한 사실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살 때도 천국과 지옥을 체험할 수 있는데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하여 마음이 한없이 기쁠 때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이 모두다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면 가정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미움, 원한, 분노, 질투, 시기가 꽉 들어차고 고통과 괴로움이 있으면 사는 자체가 지옥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 속에 벌써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천국과 지옥이 없을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산 사람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불로써 소금치듯 하는 지옥으로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99년 복음 선교사이던 D.L 무디에게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그 해 12월 22일 그의 아들은 무디가 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 아들은 급히 아버지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을 본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아들아, 정말 아름답단다. 정말 황홀하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니 나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잠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사는 다급히 응급조치를 했고 응급치료를 받고 난 다음 깨어난 무디는 이 세상 바깥에 갔다왔다며 그 내용을 증거했습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 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애들도 만났다”라고 말하면서 먼저 간 자녀들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무디는 “무엇으로도 나를 더 이상 잡아둘 수 없다. 마차가 방 안에 와 있다”고 말하며 밝은 천국을 향해 평안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죽음 이후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사람은 영생이 있고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는 사람은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천당행이냐, 지옥행이냐’라는 것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2.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이외에는 사후의 세계를 모른다
철학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연 현상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같이 만인이 지켜보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분 이외는 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기록 된 대로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도망친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두다 목숨을 버리고 피를 흘렸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 것도 눈으로 직접 보았고 부활도 직접보았기에 변화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장사지내고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함께 식사도 하고 가르치시고 축복도 하셨으니 안 믿을래야 안 믿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인 것 입니다. 죽는 것을 분명히 눈으로 보았는데 분명히 눈앞에 살아나서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 주시고 손등에 못자국을 보여 주시고 ‘의심 가거든 만져 보라’고 하시니 안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거기에서 “야! 사람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구나. 대표적인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갔다가 살아나는 것을 보니 우리도 예수 안에서 죽었다가 살아나겠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참말이구나. 그러므로 죽음,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두려워할 것이 못되는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을 전혀 개의하지 않게되는 확실한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순교를 당할때 거부하지 않고 피를 흘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는 것이 영광이었습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아무리 죽여봐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고 나는 살아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과 삶에 대한 증거를 가장 정직하게 하신 분입니다. 체험적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이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선생은 “차라리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바라는 바는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간절히 소원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이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없었으므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 왔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 2절로 4절에서 보면 자기가 천국에 올라간 체험이 몸으로 올라갔는지 영혼이 몸에서 빠져 올라갔는지 분별할 수 없을만큼 뚜렷하고 확실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영생은 분별할 수 없이 뚜렷합니다.
인도의 선지자 선다싱이 쓴 책에 보면 자기가 입신해서 하늘에 올라가 보니까 많은 사람이 죽어서 천당에 올라왔는데 자기가 죽어서 올라온 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3차원의 말로써는 4차원의 영광스러운 천국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 그런 곳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 4장 1절로 3절에 천국은 이 땅과 분명히 거리를 둔 곳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보니까 하늘에 열린 문이 있고 올라오라는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천국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고 말하고 요한도 하늘에 열린 문이 있어 하나님이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매 그리로 올라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악이 들어차고 죽음과 멸망이 꽉 들어찬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장막집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힘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못 올라가지만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다음 성령이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은총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목사님 내가 죽을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제일먼저 예수님이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직 우리가 천당에 안 들어 가고 여기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단장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처가 단장되면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데리러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갈까요? 낙원으로 데려간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 당하실 때 좌·우편 강도가 있었는데 그 중 강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2절로 43절에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강도는 세상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의 살아온 생활은 험악한 강도요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만 부르니까 주님께서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당은 예수님의 공로로 가는 것이지 우리 공로로 가는 곳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인 것입니다. 어떠한 죄라도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고 주님의 이름을 진실로 부르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낙원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신앙이 지극히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은 우리가 표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길로이’에서는 해마다 ‘갈릭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로 마늘로 유명한 지방입니다. 그런데 갈릭페스티벌보다 더 유명해진 아기가 생겼습니다. 엄마 로리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는데 어느 해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 중 한 아기는 석 달 반 만에 숨지고 한 아기만 살아서 ‘샤논’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샤논도 건강이 좋지 못해 세 살이 조금 지났을 때 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것도 암 환자의 1퍼센트 밖에 안 걸린다는 생식 세포 암이었습니다. 샤논은 아기였지만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어서 어른도 힘들어 하는 골수 채취 검사나 척추 수술 등을 잘 참아냈습니다.
성격 또한 명랑하고 쾌활하며 긍정적이어서 가족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5살이 되던 해에 샤논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떠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습니다. 가족들은 아기의 침대 주변에 모여서 기도하며 아기가 빛의 터널을 향해 가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다섯 살로 죽음을 앞에 둔 아기가 입을 열었습니다. 큰 소리로 “아, 빛이 너무 눈부셔요. 빛이 너무 눈부셔요 천사들이 저렇게 소리높여 노래를 불러요. 걱정할 것 없어요. 무섭지 않아요”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신문과 방송에 나고 사람 입을 통해서 전달되고 온 동네 일대에 퍼지게 되자 갈릭페스티벌 보다도 더 유명해져서 샤논 페스티벌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이 어린 아기의 천국가는 모습의 이야기가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5살 짜리 아기가 지어서 말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울고불고하지도 않고 갑자기 큰 소리로 “얼마나 빛이 찬란한지요. 빛이 보여요.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요”라고 말한 다음 세상을 떴으니 그 부모들도 위로를 받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얼마나 큰 힘을 얻었겠습니까? 이 어린 아기도 새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의 집은 이스라엘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천당에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로 7절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했습니다. 눈물, 근심, 탄식, 고난이 다 지나가고 기쁨과 소망과 사랑의 원천되시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이어서 5절부터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모든 것을 이길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말하기를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우리들은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이겼습니다.
믿음 이외에는 이길 자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서 이기게 해주심으로 그 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이깁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지옥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이 영광스러운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고 사람의 새로운 조상이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표적으로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다 이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면 천국이 우리 앞에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도 예수요, 둘째도 예수요, 셋째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가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계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돈도 떠나갑니다. 지위도 떠나갑니다. 명예도 떠나갑니다. 아름다운 우리 모습도 다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떠나가지 않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만 붙잡으십시오. 예수님만 의지하십시오. 지상에서 천국까지 우리를 품에 품어 인도하여 주실 분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큰 은총을 받고 약속을 얻었으므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마음에 위로를 받고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천국을 향해 나가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부활의 소망 /살전4:13-18/ 김진흥목사
2022-01-05 06:28:52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1. 어렸을 때 들은 재미난 옛날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웬 옛날얘기냐고요? 다 이유가 있으니 들려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 양반이 왜 저 얘기를 하나 생각하며 들어보십시오. 우리나라 전래동화 중에 ‘햇님 달님 얘기’ 아십니까?
떡 장사였던 엄마는 길에서 만난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면서 떡 다 뺏어먹고 나중에는 자신까지 잡아먹히지요. 애들까지 잡아먹으려고 아이들만 있는 집에 호랑이가 가서 문열어달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엄마 목소리가 아니고 손이 엄마 손이 아니라며 문을 안 열어줬지만 너무 엄마가 보고 싶던 여동생이 그만 문을 열어주니 호랑이가 쫓아옵니다. 황급히 달아난 남매는 뒤뜰에 있는 높은 나무 위로 피합니다.
호랑이가 나무 밑에서 너희들 어떻게 그 나무에 올라갔는지 알려달라고 꼬드깁니다. 오빠는 나무에 참기름을 바르면 잘 올라올 수 있다고 속였는데 자꾸 미끄러지는 호랑이를 보고 여동생이 깔깔 웃으면서 도끼로 나무를 찍으면 그거 밟고 올라오면 되는데 그것도 모른다고 말을 하니 드디어 호랑이가 그렇게 해서 막 잡아먹으려고 올라옵니다. 그때 남매는 하늘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시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주시고 죽게 내버려두시려면 헌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 튼튼한 새 동아줄이 내려옵니다.
남매는 그 줄을 붙잡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보고 있던 호랑이도 남매의 기도를 흉내 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도 아이들을 따라 올라가게 하려면 헌 동아줄을 내려주시고 못 올라가게 하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주세요.’하고 거꾸로 기도했더니 썩은 헌 동아줄이 내려옵니다. 호랑이는 그 줄을 붙잡고 올라가다가 떨어져서 수수깡에 찔려 죽는 바람에 수숫대가 붉게 되었고, 하늘로 올라간 오빠는 해가 되고 동생은 달이 되었는데, 달님이 된 동생이 밤은 무섭다고 해서 결국 오빠가 대신 달님이 되고 여동생이 햇님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힘은 세지만 우매한 호랑이와 유약하지만 지혜로운 아이들이 대비되는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새 동아줄과 썩은 동아줄입니다. 인생은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하죠? 자기는 잘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잡으면 떨어져 수수깡에 찔려죽은 호랑이 신세가 됩니다. 기왕에 얘기 꺼낸 김에 한 가지 얘기를 더 하겠습니다. 남자들의 시집살이라고 하는 군대는 특히 줄을 잘 서야 그 시집살이 수월하게 한다고 합니다. 보안대에 신병이 왔습니다. 보안대는 군대의 권력기관이거든요. 대위가 대령과 맞먹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거기는 거의 다 가까운 친척이 장성, 국회의원, 장관 등 빽이 든든한 사람들만 배정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선임병이 신병에게 묻습니다. ‘야, 너 무슨 빽으로 여기 왔어?’ 그랬더니 신병 대답이 ‘줄을 잘 서서 왔습니다.’ ‘뭐야? 무슨 줄?’ ‘네~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배치 받기 위해 기다리던 중에 바로 제 앞과 뒤에 줄서서 있던 아이들이 둘 다 아버지가 장성이어서 중간에 낀 저도 같이 불러서 둘은 육군본부로 배정 받고 전 보안사병이 됐습니다.’
영상을 한 번 보시지요. 화면에 보이는 저 친구 많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나름대로는 요령을 부려봤는데 결국 망하고 말았네요. 선거철이 돼서 친박이니 진박이니 하며 대통령에게 줄서기를 하는 후보들 많지요. ‘나 대통령 하고 이런 사이야.’ 과시하느라 현수막, 명함에 대통령하고 같이 찍은 사진을 게재하고 있는 사람들 쫙 깔렸습니다. 그거 길어봐야 2년만 지나면 썩은 동아줄 될 줄입니다만 당장은 쓸 만하니 경쟁적으로 친박을 넘어 진박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걸 봅니다. 언제나 이 나라에서 이런 꼴 안 볼 수 있을는지, 내 죽기 전에는 한 번 보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도 줄서기를 잘 하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이 평탄하니 찾는 사람이 많다는 말씀(마7,13-14)입니다. 주님은 비록 좁고 험하더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곳에 줄을 대고 있습니까?
2. 오늘 읽은 살전4,13-18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있을 부활과 휴거에 관한 말씀입니다. 왜 이 말씀을 주셨느냐 하면 13절의 말씀에 나와 있는 것처럼 ‘몰라서 슬픔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죽은 자나 나중에 죽을 자들이나 다 다시 살아날 터인데, 마치 자다가 깨어나는 것처럼 될 것이라고 1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혹 예수님 재림 당시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은 육신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하늘로 들려올라가는 부활을 하게 된다는 것도 15-16절에서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말씀이 17절 끝 부분 말씀인데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하는 것 한 가지는 인생은 결코 죽는 것으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시 살아났지만 언젠가는 다시 또 죽는 그런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요5,28-29에는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하였고요,
계20,11-15에는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하여간 사람은 세상 살다가 죽는데 죽는 것으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 부활, 즉 영원불멸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서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부활은 영원한 새 세상에서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부활은 영원한 새 세상에서 영원불멸의 몸으로 영원토록 사는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몸이 어떤 몸인지에 대하여 고전15,50-54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홀연히 변화되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는 것을 운이 없거나 재수 없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부활절 말씀을 통하여 정말 몰라서는 안 될 한 가지 진리가 더 있습니다. 18절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입니다. 무엇을 위로하란 말입니까?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이 왜 위로가 됩니까? 부활은 새로운 영생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아무에게나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문과 멸망의 문 둘 중에 생명의 문에 줄을 서 있는 사람에게만 위로가 됩니다.
다른 줄에 서 있는 사람은 위로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난 주일에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에 등장했던 도사처럼, 비명을 지르고, 원한에 이를 갈며, 원통하여 통곡할 일입니다. 그런 이들은 부활이 소망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입니다. 태워도 태워도 구더기조차 죽지 않는 천국 쓰레기장 게헨나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확실하게 예수님 편에 줄을 서 있습니까? 할렐루야~
3. 미국 PGA에서 뛰고 있는 최경주 선수는 아주 신실한 감리교인입니다. 한 집회에서 간증하였는데 자기가 골프선수가 된 것은 줄을 잘 섰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역도선수 하고 싶은 사람 나오라고 해서 모두 12명이 나갔는데 6명씩 갈라세워놓더니 최경주가 있는 쪽 학생들에게는 무조건 골프선수가 되라고 하더랍니다. 처음에는 그게 불만이기도 했는데 착한 그가 그저 시키는 대로 가다가 보니까 골프선수가 되었고 믿음 좋은 아내를 만나 기도하며 선수생활을 하였더니 오늘날 같은 유명 골프선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21,10ff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준비하여놓으신 새 세상을 보여줍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지극히 귀한 보석같이 빛이 나고 벽옥과 수정처럼 맑더라고 했습니다. 오염되고 망가졌던 세상 대신 완벽하고 온전하여 거기 사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 놓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새 세상입니다.
사도들의 믿음이 기둥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빛이 항상 둘러 비추어 그늘진 곳이 전혀 없는 곳, 필요악이라는 부작용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법과 질서의 나라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다시 새 세상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속된 것, 가증한 일,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들어와 살 수 없는 사랑과 평화만 가득한 곳입니다.
얼마나 좋은 나라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곳입니까? 얼마나 행복한 세상일까요? 그런데 그 나라는 생명의 부활에 연결된 줄에 서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부활 소망은 금수저입니다. 진짜 확실한 로또번호입니다.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아멘!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아멘!” 노래하십시오.
“강림하시리니…” /살전4:13-18/ 이영길목사
2024-01-18 09:14:40
먼저 스크린을 보시면 대표적인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인 Claude Monet의 ‘Impression Sunrise’라는 작품을 볼수 있습니다. 제가 올 봄 안식월때 프랑스 파리를 다녀 왔는데 박물관에 제일 많이 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보여 드리는 저 그림은 보지 못하고 왔습니다. 다녀 와서 저 그림을 알게 되었고 저 그림은 Marmottan Monet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곳은 제가 가 보지 못했습니다. 저 그림이 어떻게 보면 인상주의 미술의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그림에 대해서 조예가 깊다고 생각하실까봐 먼저 솔직히 고백하면 한 두번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가장 좋아하지 않은 과목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미술이었습니다. 제 기억에는 제가 그린 그림이 초등학교 3학년 땐가 한번 뒤에 붙여지곤 그 후 한번도 선생님께 인정받은 적이 없습니다.
미술 다음으로 제가 별로 반기지 않았던 과목이 역사였습니다. 저는 미술과 역사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데 이번에 파리를 다녀 오면서 미술과 역사에 처음으로 눈이 조금 띄어진 기분입니다. 물론 저희 교회 미술을 전공하신 분들도 꽤 계신데 그 분들 앞에서 눈이 조금 띄어졌다는 표현도 걸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정도로 양해를 구하고 이제는 눈이 조금 뜨였다는 자신감 내지 착각을 안고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파리 방문 마지막 날은 오랑주리 박물관을 다녀 왔는데 거기에는 모네의 연꽃 작품이 전시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네 말고도 인상주의 화가들 중 잘 아시는 분들이 모네 보다 선배인 마네를 비롯 세잔, 르누아르, 그리고 후기 인상파로 고갱과 고흐로 이어집니다. 이들을 인상파라고 불리우게된 계기는 바로 보여 드린 첫번째 그림의 제목에서 나옵니다. ‘Impression, Sunrise.’
처음에 이 인상파들의 전시회를 보고 어느 비평가가 조롱하는 쪼로 ‘인상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지만 차츰 호응을 받게 되었고 후에는 인상파 미술로 인해서 인상주의 문학과 음악이 파생되어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곧 현대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까지 이들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서론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인상주의를 시작한 사람들에 대해서 입니다. 모네의 그림의 제목만을 생각하면 모네가 시작하였다고 생각할수가 있는데 사실은 모네의 선배들이 시작을 하게 됩니다.
1840년도부터 파리에서 가까운 Barbizon이라는 곳에 학교라기 보다는 여관이라고 할까요. 물론 요즘은 학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젊은 화가들이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는 바깥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스튜디오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스튜디오 안에서 역사적인 일과 아니면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인상주의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화가들이 자연 속에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자연의 색채에 매료 되면서 그리다가 보니 사물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친구들은 저녁에 들어와서는 식사와 함께 relax를 하고는 아침이 되면 캔버스를 들고 자연으로 향합니다. 함께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교제하고 배우다 보니 드디어 인상주의 미술의 기초를 닦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뒤를 이어서 마네 모네 세잔느 고갱 고흐등 기라성 같은 인상주의 미술가들이 탄생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Barbizon이라는 여관 내지 학교였습니다.
Barbizon이라는 여관 내지 학교에서 어울리다 보니 이런 위대한 자취를 역사 속에 남기게 되었는데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도 매일은 아니지만 삶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어울려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오늘 대강절 첫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대강절 wreath촛대에 첫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대강절은 주님의 오심을 축하하며 아울러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촛불이 하나씩 켜져 가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커갑니다. 아울러 우리의 기다림이 커가면 커 갈수록 빛은 세상 가운데 더 밝게 비추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대강절을 지키는 진정한 의미일줄 압니다. 올해도 아름다운 빛을 대강절에 발하는 저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3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금 사도바울은 자는 자 곧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곧 오시리라 믿었습니다. 신앙 생활한지 1년 남짓한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당연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고민 거리가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실텐데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자기들도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한쪽으로는 염려도 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곧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죽은 성도들에 대한 질문과 자신들의 죽음 후의 삶에 대해 질문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이 죽은 자들의 미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묵은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줍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주님 안에서 자고 있는 것이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주님과 함께 모든 죽은 성도들을 데리고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곧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알려 주어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과 더불어 사랑하는 성도들이 함께 올 것을 상상하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지 사도바울은 계속 말씀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아 있다고 우리 눈으로 주님을 먼저 보기에 죽은 자들보다 주님을 먼저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 소리로 강림하실텐데 이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 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염려는 접어 두라는 것입니다. 이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먼저 죽은 자들에 대한 염려는 다 놓게 되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두 가지 장면이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먼저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늘로 들려 올라갑니다. 구름 속으로….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다 구름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 이어서 지금 산 사람들이 들려 올려집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님을 구름 속에서 만난다고 생각할수도 있고 구름 위로 빠져 나간 후 주님을 만난다고도 생각할수 있습니다. 생각하기 쉽게, 구름 위로 빠져 나가서 주님을 만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하여튼 먼저 죽은 자들이 들려 올려지고 이어서 산 자들이 들려 올려집니다. 그런데 사실 죽은 자들의 미래에 대해서 깨닫게 된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로부터 이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땅으로 내려 오셔서 자기들을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땅에까지 다시 내려 오시는게 아니고 공중에 임하시고 이어서 죽은 자가 먼저 그리고 산 자들이 뒤따라 하늘로 들려 올려진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교인들은 전율을 느꼈을줄 압니다. 왜 이들은 전율을 느꼈을까요? 물론 주님을 만나는 자체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공중으로 올라가는 자신들의 모습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자기들의 삶은 땅에서 시작해서 땅에서 끝날 것으로 알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자들입니다. 자기들의 삶의 반경은 땅, 땅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발은 항상 땅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날을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도 자기들의 생활 터전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독수리와 같은 새들의 전유물인줄 알았습니다. 이제 새롭게 눈을 뜹니다. 하늘을 날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이것은 그들에게는 대박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를 갖 믿게 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땅은 많은 환난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예수쟁이들을 못 살게 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급히 데살로니가를 떠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환난이 와도 전보다 환난을 대하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환난 중에 주님께서 오시면 어느새 환난을 주는 악한 자들을 땅에 두고 하늘로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통쾌합니다. 그러니 전율을 느낄수 밖에….
처음에 Barbizon School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젊은 화가들이 모여서 기성 화가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갔습니다. 밖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세계 안에 있는 무진장한 예술의 세계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들은 신나서 매일 매일 들로 산으로 나갑니다. 드디어 인상주의 미술을 만들어 갔습니다.
이들은 자연 세계 안에서 곧 땅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굴해 나가면서 놀라운 예술 세계를 펼쳐갈수 있었는데 하물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땅의 삶만 생각하다가 공중으로 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니 데살로니가 교인들까지 가기 전 사도바울의 일행의 모습부터 생각하면 큰 힘이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를 쓸 때 사도바울의 일행은 디모데와 실라를 포함해서 3명이었습니다. 이 세명이 험한 선교여행을 할 때 늘 어떤 상상을 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자기의 일행인 디모데와 실라와 함께 종종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통쾌해 하기도 하고 때로는 깔깔 웃으면서 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세 명의 일행이 전도하다가 로마 군병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공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세 명의 일행은 하늘로 들려 올려 갑니다. 로마 군병의 모습은 점점 작아집니다. 그토록 무서워 보였던 로마 군병은 개미 새끼 보다더 작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상들을 종종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서 때로는 피식 웃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도 하고….
사도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서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로를 받았기에 그 험한 선교를 잘 마칠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는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기독교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환난 가운데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자기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았기 때문에 지금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놀라운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권면으로 Barbizon school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사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늘을 나는 자기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전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바울은 계속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언젠가 땅에 발이 닿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나누면서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아니 함께 이 놀라운 장면을 그려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다시 오시는 장면을 그리는 Barbizon 의 화가들이 되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 경치를 그리는 젊은 화가들이 인상주의 미술로 세계를 위해 공헌했다면, 주님의 다시 오시는 장면을 상상 속에 늘 그리는 자들을 통해서는 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지 않을까요?
이번 대강절 기간 그림에 소질이 있으신 분들은 손수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소질이 없으신 분들은 최소한 상상 속에서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과 더불어 하늘로 올라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다시 오시는 주님에 대한 그림은 많이 보았는데 하늘로 올라가는 성도들을 그린 그림은 잘 접해보지 못하셨을줄 압니다.
저는 최근 북한에서 풀려 나오신 임현수 목사님의 간증 설교를 듣고 하늘로 올라가는 성도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 그 분의 설교 동영상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2년 6개월 동안 구류되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힘이 되는 환상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어느날 꿈을 꾸는데 호랑이 처럼 생긴 괴물이 마구 닥치는대로 먹어 삼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다행이 당신은 거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척 무서웠을줄 압니다. 잠시 후 굴속으로 자신이 빠져 나가는데 마지막에 굴에서 나오면서 큰 손이 자기를 안아 주는데 자신은 금 두꺼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금 두꺼비가 되어 있었겠습니까? 금 두꺼비는 좋은 소식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자신의 젊었을 때 별명이 두꺼비였다고 합니다. 곧 정금 같이 되어서 자신이 빠져 나올 것을 보여주는 환상이었다고 합니다. 이 환상을 의지해서 2년 6개월을 버틴 것입니다. 혼자서 피식 웃으며….
앞으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펼쳐 가실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모두는 금독수리가 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모두 하늘로 날라 올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 독수리가 되어서….
그런데 금에도 종류가 있지요. 모두 정금 독수리가 되길 원하실줄 압니다. 임현수 목사님이 2년 반을 억류될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정금이 되셨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2년반 동안 당한 여러 환난이 도리어 그를 정금 같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만큼 우리는 금 독수리가 되어 갑니다. 정금 독수리가 되어 갑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를 핍박하고 조롱했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날라 올라갈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깔깔 웃으면서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를 묶어 두었던 죽음까지 우리가 조롱하게 될 것입니다. 통쾌한 승리자 곧 금독수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우리가 받은 모든 환난이 우리로 하여금 정금 독수리가 되게 하고 있는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혼자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매주 모이는 소그룹 모임도 금독수리들의 모임입니다. 구역모임도 상록회 모임도 청년들의 모임도, 중고등부, 주일학교 모두 금독수리들의 모임입니다. 찬양대는 독수리 찬양대 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멋지게 날아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곧 오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찬송가의 작가 Fanny Crosby가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의료 사고로 눈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후에 9000개의 찬송을 작사하게 됩니다. 그가 9000갸의 찬송가를 지을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처음 다시 태어난다면 태어나자마자 어떤 기도를 드릴까요? 저는 다시 앞 못 보는 자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갔을 때 처음으로 제 눈으로 보는 분이 주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했기에 그는 놀라운 세계를 체험한 것입니다. 아무나 찬송가를 9000개 작사할수 있을까요? Fanny Crosby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보다 먼저 금독수리가 되어서 주님을 맞이 할 것입니다.
대강절은 함께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림을 그리는 절기입니다. 함께 독수리가 된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절기입니다. 함께 멋진 화가가 되는 절기입니다.
Barbizon의 화가들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듯이 우리도 함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며 서로를 금독수리라고 위로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면…. 기대하십시다. 주님께서도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