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누가복음 설교 모음

누가복음 1장 설교 모음

Jessi J 2022. 11. 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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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강해①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1:1-4

2019-05-09 23:38:51

 

 

1. 목격자

 

우리는 종종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플래카드(placard) 거리 곳곳에서 봅니다.

 

게시한 사람의 가슴 아픈 사연과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이런 플래카드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범인을 없을 , 누가 加害者이고 被害者인지 구분이 , 억울한 누명을 썼을 , 피해자가 도리어 가해자가 되었을 , 아니면 사건 자체가 미궁에 빠져 해결이 , 혹시 사건을 목격자가 있다면 나서서 도와달라는 의미로 사건 현장에 걸어놓습니다.

 

마디로 ‘이 사건의 목격자가 있느냐’, ‘있다면 증인이 되어달라’는 뜻이지요. 이러한 목격자에 대해 우리나라 법은 “범죄 현장에서 물리적 증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경우, 목격자의 증언은 범죄 현장에 대한 이해를 돕고 범인을 잡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격자는 정말 중요합니다. 목격자의 증언 때문에 사건이나, 사람의 인생, 나아가 가정이나, 사회에까지 영향을 끼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세상을 향하여 스스로 目擊者이자 證人으로 나서서 인물과 그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증언하는 사람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바로 ‘누가’입니다.

 

2.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1) 누가가

 

누가는 신약성경의 유일한 異邦人 저자입니다.

 

누가는 수리아 안디옥 사람으로서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로 유학을 가서 거기서 醫術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에 대해 학자들은 ‘뛰어난 문학가’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문학적으로 아주 뛰어나다고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유능한 의사’였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전문적인 의학용어가 50 나오는데요. 멕기라는 사람은 “누가는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기원전 370)보다 많은 의학 용어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바울과 누가가 만난 것은 번째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물론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확실한 것은 누가가 드로아에서부터 바울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16:10~17). 그때부터 누가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로 갔고, 바울이 2년간 옥에 갇혔을 가이사랴로 갔으며(27:1,2), 대부분의 동역자들이 바울 곁을 떠난 후에도 바울 곁을 지켰으며(딤후4:11), 바울이 순교할 때에도 함께 것으로 보입니다(딤후4:11).

 

이런 것들은 누가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 따라서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증인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 그렇기 때문에 그가 증언하는 것이 진실임을 보증해 줍니다.

 

2) 데오빌로에게

 

오늘 본문을 보면 누가는 자신이 우선적으로데오빌로 각하”라는 사람에게 증언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데오빌로는 누구일까요? 데오빌로에 대해서어떤 학자들은특정한 인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유는 바로 그의 이름 때문입니다. 데오빌로는 그리스어로하나님’을 뜻하는 ‘THEOS’, ‘사랑하는’ 또는친구’를 의미하는 ‘PHILOS’ 합성된 단어입니다. 뜻을 풀이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또는하나님의 친구’가 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누가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숨어있는 독자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것이 누가복음이라는 것이죠.  그런가 하면 3절에 나오는각하”라는 존칭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없는 것으로 당시 實存하는 인물로서 그렇게 부를 있는 사람에게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실재 인물에게 편지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어떻게 실재 인물이 아닌 사람에게 그런 존칭을 사용했겠느냐?’ 반문합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데오빌로가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그는 “각하”라고 불릴 만큼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 그는 적어도 총독 이상의 직위를 가진 인물로서, 우선적인 대상은 당시 유대 지방의 총독이었던 ‘벨릭스(23:26; 24:3)’나 ‘베스도(25:1; 26:25), 혹은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의 조카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후에 이름을 고쳐데오빌로’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그런가 하면 당시 “각하”라는 호칭은 주로 “대제사장”에게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자료와 함께, 주후 37년에서 41년까지 대제사장이었던 인물 가운데 기독교인이 사람으로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누가는 바로 사람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번째 주장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데오빌로가 實存 人物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신분이 높았으며,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하여 붓을 것입니다.

 

3)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을

 

그런데 여러분, 누가는 법정에 증인이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힌 증인선서를 하듯 복음서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증언의 일차적인 당사자인 데오빌로에 대한 예를 갖추지도 않습니다. 그는 單刀直入적으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하면서 자신이 증언하려는 내용에 대한 것부터 시작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증언하려는 사실이 너무나 엄청난 일이거나, 데오빌로에게 직접적인 유익이 있거나, 아니면 당시 자신이 밝히려는 인물과 사건에 대해 사실과 다른 왜곡된 주장이나 글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거짓되고 왜곡된 증언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신은 떼고 아주 확실한 것들만 간략하게 말하기 위하여 의례적인 인사치례조차 생략한다는 뜻으로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루어진 사실( 페플레로포레메) 대하여” 라는 표현입니다. “이루어진”이란 말은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플레레스’와 ‘가져오다’의 뜻을 가진 ‘페로’가 결합된 ‘플레로포레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미 ‘성사된 일’, ‘성취된(accomplished)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예정되었던 계획을 따라 성취된 확실한 사건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Merrill C. Tenney). 왜냐하면 단어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성취된(딤후4:5,17), ‘확인된(4:21; 14:15; 6:11; 10:22)’의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부분을 ‘우리들이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들(those things which are most surely believed among u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이루어진”이라는 말은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을 있는 일’ 로도 번역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사실”이라는 단어는 성경원어로 ‘프라그마’하고 하는데요. 뜻은 ‘행해진 , 성취된 것’이라는 뜻과, ‘사건, 소송, 재판’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말은 ‘이미 분명하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법정 증언처럼 자신이 충분하게 증언하겠다’는 의미가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자들이 전하여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사람이 많은지라.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실에 대하여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기록들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을 비롯하여 다른 복음서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 14절에서 자신이 기록하려는 것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육신이 되어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만나고 경험한 그대로를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역시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실대로 전하려 한다는 의미가 2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란 ‘예수와 그가 하신 일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제자들이 믿게 사실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누가가 말하려는 ,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은 예수님과 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것으로 ‘오래 전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획된 일’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은 계획이 하나 하나 성취된 것임’을 밝히려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은 정확하고 분명한 역사적인 근거와 자료, 그리고 증인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는, 믿을만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는 예수님과 그의 생애와 사역이 분명한 事實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죠. 바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증인으로 자가 법정에서 선서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서,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증인 누가.

 

그리고 본문에서 누가가 굳이 밝히지는 않습니다만, 예수님과 그의 생애와 그의 복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파장, 혹은 결과는 말로 없었습니다. 異邦人인 자신이 데오빌로에게 복음서를 기록하여 전하는 것도 그렇고, 평생 의사로 살아갈 자신이 복음의 사람 바울을 만나서 평생 그의 곁을 지킨 것으로 행복해 것도 그렇고, 예수님과 복음으로 인하여 수많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변한 것을 보면 예수 사건의 파급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데오빌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욱 분명하게 알아야 사건이라고 강조하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방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이나 “상한 갈대”와도 같았습니다. 그런 상태의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후로는 사람들이 소망을 얻었고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누가는 힘을 주어 강조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계속 말합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보내는 것이 좋은 알았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그리고 부활 , 모든 일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록은 단편적인 지식이나, 사람의 이야기나, 혹은 소설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누가는 모든 일에 대해서 근원부터 자세하게 살폈습니다. 여기서 “근원부터”라는 말은 ‘위로부터, 처음부터’라는 뜻입니다. 말은 복음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누가가 처음부터 아주 자세하게 살폈다는 뜻을 전하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가 굳이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 때문이었습니다. 데오빌로는 이미 복음을 들었고 배웠습니다. 누가는 그가 배운 것을 확실하게 알도록 만들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무슨 말인가 하면, 복음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것이 되고, 깊고 높은 것이 되며, 풍성한 것이 된다는 의미가 속에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오직 복음만을 전하고, 성도들이 오직 복음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성도의 내면과 겉을 풍성하고 놀랍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3. 예수 사건의 증인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本意 아니게 세상이라고 하는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매의 , 독사의 눈으로 증인대에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묻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사실이냐? 과연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통치자이신가? 정말 인간이 죄인이며 예수님이 아니고는 구원의 길이 없는가? 과연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이 되었고, 인간을 위하여 죽었는가? 그리고 예수는 부활했는가? 예수는 정말 승천했으며, 다시 것인가?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질문에 침묵한다면, 성경의 모든 사실은 거짓이며,

 

여러분 역시 거짓 종교인으로 결판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반드시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답은 조금 달라야 합니다.

 

누가를 보십시오. 예수님,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 그리고 그의 복음! 이것을 알고 경험한 사람은 어떠해야 할지를 누가가 보여주지 않습니까? 오늘의 짧은 본문에서도 느낄 있을 정도로 누가는 강한 열정과 확신에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알면 알수록 그것이 데오빌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유익이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질문은 조금 바꾸어 볼까요? 만약

 

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으며, 그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며, 분명히 죽은 그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수많은 성도들이 침묵합니까? 교회가 진실성과 신뢰를 잃어갑니까? 예수가 사실이 되지 않고 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가짜 믿음이라는 말이죠. 굳이 교회 지도자들과 설교자들이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일을 지키십시오’, ‘전도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처럼 예수님이 사실이고 사건이라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을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에게 예수님은 사실도 사건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거저 이야기입니까? 기록이자 역사일 뿐입니까? 교회의 가르침이고, 인생의 교훈일 뿐입니까? 지금 누가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그는 아마도 참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명백하고 충분한 사실이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여러분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어떤 일은 여러분을 결코 침묵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람의 누가가 되어 세상이라는 법정에 서서, 세상 모든 사람이라는 재판 방청객들에게 예수가 사실이고 사건임을 증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admin

 

 

 

누가복음의 구원 /1:1-4/ 옥한흠 목사

2015-05-11 22:42:54

 

 

▶누가복음의 수신자 ‘데오빌로’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별명일 수도 있고

 

또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 하나님과 친한 자’(데오빌로의 )라는 뜻의

 

불특정인을 가리킬 있습니다.

 

 

데오스+필레오, 필레아는 친구사이의 사랑, ‘친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데오빌로는.. ‘하나님과 친한 사람’의 뜻입니다.

 

 

이렇게 , 데오빌로는,

 

2천년 교회사 속에서 누가복음이 편지형식으로 전해져오고 있는데,

 

결국 수신자인 데오빌로가 우리 각자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누가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 하나님과 친한(데오빌로) 사람이 되는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구원이라는 무엇이냐?

 

그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데오빌로)라고 설명합니다.

 

보통 서두는, 편지 전체의 주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거라고 말할 있습니까?

 

 

 

 

믿음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과 내가 연합하는 것인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연합하게 경우에는

 

무덤에 내려가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부활하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승천하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이야기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없을 만큼

 

절대적으로 친한 관계가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하나님 우편에 있는 것과 같이 되어서

 

하나님과 가장 친한 상태가 되었고,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인데,

 

 

 

 

‘데오빌로’라는 말이, 바로 구원 받은 자의 별명이요,

 

신자의 그런 상태를, 마디로 함축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 단락 삽글)

 

제가 목사가 30 가까이 되는데,

 

처음에 설교하고 가르칠 때에는 ‘구원’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배우기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공식화시켜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성경을 깊이 보게 되고,

 

과거에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도전 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구원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자꾸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공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엄청난 차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있었습니다.

 

 

 

 

그러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4:13,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학문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는 >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 구원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서 실현되는 어떤 현상으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점점 변해가는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고 해석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꾸 깨닫자 한편으로는 굉장한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처럼 대단하게 보시는구나.

 

 

 

 

저를 향해서 자기처럼 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야, (우리) 그렇게 대단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보면 그것이 어떤 때는 기쁨도 되고 하나님 앞에 감사도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기대치에는 너무나 미치지 못하는 우리 각자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꾸 느끼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 단락, 옥목사님 설교에서 펀글

 

 

 

▶그래서 본문 1:4절에 보면,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믿게 하려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얘기에요.

 

‘하나님과 친한 사이가 되는 것’을.. 누가가 확실하게 설명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은 모두가 각각 별명을 말하자면

 

데오빌로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 데오빌로, 이게 바로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이에요.

 

 

 

 

누가복음은,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친해진 자들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데오빌로에게 전달되는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

 

누가복음은 어떤 면에서 특이한 점을 띠게 될까요?

 

 

 

 

▶마태나 마가는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공생애의 일성(一聲)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런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독특한 관점이 있다는 것이에요.

 

이미 천국으로 마음이 들어간 자들입니다.

 

천국으로 마음이 들어간 자들에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이런 말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누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마가가 말하는 천국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는 거예요.

 

 

 

 

마가가 말하는 천국은.. 가까이 천국으로서

 

우리가 우리 마음으로 거기로 들어가야 천국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 내려와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내용이 된다는 얘기에요.

 

 

 

 

다시 말해서, 마가는

 

‘너희 마음을 하늘로 보내라, 천국으로 보내라! 마가의 요청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거꾸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땅에 내려와서 움직이고 계시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제는 하나님 차례가 되었다는 얘기에요.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고,

 

계속 약속되었던 메시아가 옴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사건은, 수천 동안 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완성이고

 

구원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주고,

 

 

 

 

마가복음은 그렇게 이루어진 구원사건이 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되고, 어떻게 응답해야 되느냐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렇게 우리가 복음사건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등지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냈을 ,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상 인간의 삶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시고 이끌어 가시느냐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기록해나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차례가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서 하나님과 친한 , 데오빌로 ‘데오스 필레오’,

 

하나님과 제일 친한 자가 되었어요.

 

 

 

 

하나님이 내게 제일 친한 분이 그런 사람이 되었을 ,

 

사람의 삶을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 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있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연합해서

 

세상을 우리 마음으로 떠나버립니다.

 

 

 

 

그게 십자가에서 죽는 거죠.

 

그럼 ‘기독교는, 불교처럼 탈속세 하는 거냐? .. 라는 오해가 생길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세상의 삶이 무가치한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탄성을 내뱉으시면서 만들어내신 세상의 일입니다.

 

직업이, 가족이 무가치한 아닙니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이지마는

 

우리가 버리고 갔던 이유는

 

하나님이 소중하고, 하나님이 우선적이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면 세상의 모든 디테일한 (세부적인)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나가신다는 얘기에요. 이게 누가복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서, 누가복음에 성령에 대한 강조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여러분, 사도행전도 누가가 거예요.

 

사도행전을 우리가 성령행전이라고까지 말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어떤 분이십니까?

 

땅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헤아려서

 

땅에서 그것을 성취하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특별히 1장부터 성령에 관한 얘기가 쏟아 붓듯이 나옵니다.

 

, 성령께서, 우리 삶에 디테일한 부분을, 세밀하게 인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의 관심이에요.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유대적인 특징이 있어요.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룬 모든 일들은

 

동안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언하셨던 일의 성취에 초점을,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건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된다는 요청에 초점을,

 

 

 

 

누가복음은 그렇게 마음이 올라간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땅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져 나갈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으로 말하듯이, 누가복음도 성령행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단지 누가복음은 ‘성령행전 예수편()’이고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사도편’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모든 대상들을 버리고 떠날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너무 섬세하게

 

모든 것들에 대해 관심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얘기에요.

 

 

 

 

그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땅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

 

누가복음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

 

 

 

 

사회에서 약자로 있던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많이 나타납니다.

 

여인이라든지 어린아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차례가 돼서, 하나님의 활동이 제대로 일어나려면

 

차례가 먼저 제대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차례는 데오빌로가 되는 겁니다. 데오빌로,

 

하나님이 내게 가장 친한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세상에 마음에 친해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차례를 내가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 차례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6:33

 

 

 

 

하나님 차례가 주어질 ,

 

세상은 무가치한 것도, 무의미한 것도, 공허도 아닙니다.

 

 

 

 

전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하시고

 

의미를 깨달으신 성령께서 땅에서 활동해나가십니다.

 

 

 

 

이야기를, 누가는,

 

하나님과 친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낸 모든 세상에 사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 위에 존재하는 데오빌로들에게

 

누가복음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직장, 취직문제, 건강, 자식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로 믿고 여겨서

 

마음을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께 보내버리고 세상에 대해 죽어버렸습니다.

 

그때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계획하시고, 그것들을 수행해나가신다는 이야기에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1:1-4/ 조정의목사

2020-09-24 14:56:53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자들이 전하여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사람이 많은지라

3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보내는 것이 좋은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오늘부터 우리는 누가복음 말씀을 공부하게 됩니다.“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5:39),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7:3).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경 66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고 있는 책은 4복음서들인데, 그중에서도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해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40% 다른 복음서에서 발견할 없는 내용입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행적을 헤드라인 뉴스처럼 빠르고 간결하게 전달했다면, 누가는 그분을 풍부하고 완벽하게 서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야고보서 공부에서 ‘믿는 자의 참된 삶’에 대해서 배웠는데 바로 참된 믿음의 근본이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말씀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음도 유익하니라”고 했던, 삶과 죽음의 이유가 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시편에서 예언하고 있는 , 베드로전서에서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했던 대상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누가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비중을 차지합니다. 책을 공부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역사도 배울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에 대한 말씀을 매주 듣게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박히신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시간들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풍성해지고 그것이 삶에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의 서두 부분입니다. 말씀이 원문에서는 문장입니다. 부분은 모든 신약성경 가운데 헬라어적으로 가장 격조 높은 문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가장 완벽한 구성으로 이뤄진 문장인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영어로 논문을 써서 제출했는데 그때 저의 논문을 보시고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글은 문법에 틀린 것은 없지만 논문 수준의 영어 문법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논문은 학술 자료로 도서관에 보관이 되기 때문에 권위 있고 믿을 있는 책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의 배열, 편집, 심지어 여백까지도 중요합니다. 장을 폈을 때부터 믿을 있는 책이라는 것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서두 부분도 이후의 말씀과는 달리(5절부터는 평범한 헬라어체) 4절까지는 격조 높은 표현으로 쓰였던 것입니다.

 

성경학자 바클레이는 이에 대해 마치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야기를 대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라고 말했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자신의 일기 같은 잡다한 글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고 신중하게 연구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 기록했나요? 물론 원문에는 누가복음이라는 제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누가가 기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을 누가가 썼다는 것은 외부적인 증거와 내부적인 증거를 통해 있습니다.

 

먼저 외부적인 증거로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이라는 제목은 초대시대 교부들이 사용한 제목인데 이들의 증거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벌초하러 전라도에 내려간 적이 있는데 산소 하나는 산속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워 작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야만 그것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제가 믿고 따라갈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증거는 이러한 효과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기록된 얼마 되지 않은 2세기를 살았던 교부, 저스틴이 이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라토리아 정경과 P75 사본 본문 끝부분(175~225) 역사적인 증거로 남아있고, 2세기 교부인 이레네우스가 “바울의 친구 누가가 바울에 의해 설교된 것을 책으로 기록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3세기의 터툴리안 역시 증인입니다. 초기교회의 목사들과 교부들이 복음서를 누가가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저명한 박사들이 아니라 해도 당시에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입니다.

 

내부적인 증거로는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증거들입니다. 이에 대한 힌트는 3절에서 찾을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보내는 것이 좋은 알았노니”(3). 사도행전의 앞부분을 보면, 보면, 1:1-2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1:1-2).

 

누가복음 서두에서는 ‘처음 책을 쓴다’고 말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전에 책에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다는 것을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있는 것은 여러 차례 등장한 ‘우리’라는 표현입니다. 우리에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포함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사역할 , 3 전도여행에서, 사도 바울이 붙잡혔을 계속해서 ‘우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동역했던 사람들은, 마가, 아리스다고, 디모데, 디도, 실라, 아굴라, 브리스길라, 바나바 등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누가와 디도 뿐입니다. 저자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와 디도 중에 많은 시간 사도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 헬라어를 정도 수준으로 있는 사람은 ‘누가’ 뿐입니다.

 

누가는 헬라어를 구사할 있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의 저자들 유일한 이방인입니다. 그가 이방인이었기에 나타난 누가복음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로마 황제나 관료들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마태는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들에 대해 자주 말하는데, 누가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가 이방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용한 명칭들도 최대한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랍비’를 ‘선생’으로 번역하여 사용함). 유대인들은 남자를 높이고 여자를 낮게 여겼습니다. 아침 기도문에 ‘하나님 저를 이방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만들지 않으신 것에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에는 여자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많습니다. 골로새서 4:4에서는 누가를 가리켜 “사랑하는 의사”라고 말합니다.

 

바클레이는 “목사는 사람의 가장 선한 것을 보고, 법관은 사람의 가장 나쁜 점을 보며, 의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말했는데,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하면서 최대한 현실적이고 분석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의학적인 내용들이 나옵니다. 열병에 대해 “중한 것”이라고 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문둥병도 “온몸에 퍼져있는 문둥병”이라고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그는 역사적인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고 복음의 동역자로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칭찬을 받는 자”(고후 8:18)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빌립보에서 동행했었고, 3 전도여행에서 함께 했으며 바울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로마로 후송되어 배가 난파되는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누가는 사도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유일한 동료가 누가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역사학자가 아니었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해주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이 ‘언제’, ‘어디서’ 쓰였는지는 추정하는 내용입니다. 기록 시기는 61-62년으로 추정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사건 기록이 62 경에 있었던 일인데, 이후로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도(바울의 행적, 62 야고보의 순교, 64 로마 황제 네로의 기독교 박해, 70 예루살렘 멸망 ) 누가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가복음은 전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을 보면 에베소 장로를 모아놓고 그들을 다시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후에 쓰여진 서신서를 보면 그들이 다신 만난 것을 있습니다. 이것들을 종합해 누가가 기록한 시기는 이전인 것입니다.

 

시기에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잡혀서 벨리스, 베스도, 아그립바에게 심문을 당합니다. 가이사랴에서 바울과 함께 투옥되었던 바울은 오랜 기간의 심리 과정에 있었고, 함께 있었던 누가가 누가복음을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구에게 것일까요? 3절에서 있듯이, ‘데오빌로 각하’입니다. ‘각하’라는 호칭을 통해 그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로마 정부 관료, 지방 관료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때론 학문적인 책의 서두에 나오는 사람은 책이 나오게 하는데 도움을 후원자일 경우라고 합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누가복음이 나오는데 도움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기록한다고 말합니다(4). 데오빌로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목격자들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 지역에 널리 퍼져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방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기록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1). 구약 성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해 가리키고 있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에 대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로서 어떤 일들을 이루셨는지,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부터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스스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내용도 나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그분이 하나님으로서 베푸시는 인자하심, 이적들, 말씀들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에서는 예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의 결과물들, 성령을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모든 증거를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이르는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영향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 중에 이뤄진 사실”이고 나아가 여러분과 안에 이뤄진 일들입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보내는 것이 좋은 알았노니”(3). 누가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의 직접적인 목격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가복음을 기록할 있었을까요?“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자들이 전하여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사람이 많은지라”(2). 당시에 예수님의 목격자들이 있었고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자라”(벧후 1:16) 증언했고,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고전 15). 이러한 목격자들을 통해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사건 기록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기록할 있었던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아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분이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코고시는 소리를 듣고, 무더운 오후에 그분의 체취를 맡았던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분의 사역이 펼쳐졌던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그분의 변모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겟세마네에서 그분이 고뇌하시는 모습을, 참혹한 매질을 당하시면서 몸을 뒤트시는 모습을,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고 전율했다. 누가는 자료들을 면밀히 조사해서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이 아닌 것들을 가려내고, 누락된 상세한 정보들을 채워 넣고, 오류를 수정하고,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찾아낸 자료들을 모두 모아 조사하고 나서야 비로서 펜을 들었다”.

 

누가는 철저하고 신중하게 조사하여, 목격자의 진술에 따라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의 기록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가 이제부터 내용은 떠도는 소문을 주워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눈으로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누가는 기록을 “차례대로” 보낸다고 말합니다. 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묶었다는 말입니다. 누가가 의도적으로 묶은 것입니다. 1-2장은 유년기, 3-4장은 사역의 준비기간, 4-9장은 갈릴리에서 사역, 9-19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면서 하신 ,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에 대해, 그리고, 19-24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입니다. 누가는 이러한 주제별 구성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건들을 전달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것을 기록했을까요?“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4). 60-61년에는 사도들과 목격자의 시대가 지나고 복음의 2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보다 전해진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이방지역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소아시아 지역 성도들에게 “너희가 보지 못하였다, 지금도 보지 못한다”라고 말햇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씀이 있어 성령께서 그들에게 조명하여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말씀이니라””(벧전 1:23, 25).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었을 하나님을 알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보여주고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오직 전해 들은 정보로만 믿음을 붙든 ,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믿음을 선택할 의심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누가는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해 세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마이클 윌코크는, “누가는 자기 독자들이 복음의 확실성을 이성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알기 원한다. 그래서 복음의 확실성이 그의 존재의 일부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는 그런 지식이 당신의 것이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어떤 신비로운 체험에 의해? 철학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그렇지 않다. 여기 그의 복음서에 나온 예수 이야기의 명확한 사실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당신은 삶의 기본적인 확실함을 알게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는 보다 확실하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삶을 의지하고 있는, 소망과 미래와 생명을 맡기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말씀들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연약한 어린아이의 울음을 우셨던 예수님을 만나게 것입니다.

 

자신의 소명을 알고 계셨던 소년, 어린 나이에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하셨던 모습, 세례 요한과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확증으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는 모습,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돌보시는 인자하신 하나님,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전능의 하나님, 진리를 선포하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로 죄를 이기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입에서 나온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들을 배우게 것입니다. 말씀과 성품과 표적에 놀라고 감사하며 찬송했던 사람들과, 반대로 차갑게 돌아선 사람들의 모습도 보게 것입니다. 기대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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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자세히, 확실하게 알라 /1:1-4/ 김진흥목사

2022-01-08 04:59:31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자들이 전하여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사람이 많은지라 (3)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보내는 것이 좋은 알았노니 (4)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1. 어떤 사람이 잡지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100미터 밖에서 아내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면 아내가 조금 늙은 거고 50미터 밖에서 불렀는데 대답을 못하면 많이 늙은 거다. 10미터 밖에서 불렀는데 대답을 못하면 심각한 상태다. 사람은 자신의 아내가 어느 정도 늙었을까 궁금해져서 방법을 보기로 했습니다.

 

이튿날 부부가 함께 들에서 일을 하다가 100미터쯤에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야~?” 대답이 없었습니다. '~마누라가 늙긴 늙었나 보다ᆢ' 한참 있다가 50미터쯤 거리에서 아내를 다시 불렀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메뉴가 뭐야~?” 역시 대답이 없었습니다. '~ 내마누라가 이렇게 늙었단 말인가?' 이제 일을 마치고 집에 때가 되어 농기구들을 챙기면서 10미터 거리에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야? 그런데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 마누라가 완전히 맛이 갔구나!' 속으로 탄식을 하며 집에 돌아와서 씻고 옷도 갈아입고 거실로 오며 보니 아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뒷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남자가 뒤에서 아내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으며 나직이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야~~~~? 그러자, 아내가 돌아서면서 말하길, “야! 이누므 영감탱이야! 내가 ‘수제비’ 라고 번을 말했냐?

 

말을 듣고도 지금 사람에게, “목사님이 뭐라는데 사람들이 웃고 난리야?”라고 묻는 분이 계시면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손잡고 다니시길 바라고요. 사람이, 뭐라고 묻긴 묻는데 뭐라고 묻는지 모르시겠다면 잡은 놓지 말고 함께 요단강 건널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누가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야! 이노무 인간아! 내가 ‘예수는 주시오, 주는 그리스도시다.’라고 번을 말해야 알아듣겄냐?

 

오늘 우리가 읽은 1,1-4 복음서의 서문입니다. 복음서를 쓰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는 서문에서 자기가 지금 쓰고자 하는 복음서와 유사한 내용으로 책을 분들이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어떤 분인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책을 많이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다시 예수이야기를 것이니 예수를 알되 확실히 알고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강림절 마지막주일에 같은 말을 하고자 합니다. “예수를 자세히, 확실하게 알자.

 

2. 첫째, 예수이야기는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며,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자들이 전하여 그대로”의 내력이고, 자신도 (3)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내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중에 하나가 ‘팩트’입니다. 가짜뉴스가 하도 범람하니까 먼저, ‘그거 팩트냐?’라는 질문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광주 5.18 항쟁이 북한의 뒤에서 조종하였는데 증거가 사진에 찍혔다고 하면서 ‘이 사진의 아무개가 누구다’라며 사실처럼 퍼졌습니다. 사진 속에 나오는 당사자가 직접 사진 인물이 자신이고 자신은 북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고소를 해서 확정판결을 받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게 북에서 대한민국을 멸망시키려고 벌인 짓이라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판결을 내린 법원도 ‘종북좌파’라서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예수이야기의 핵심은 ‘성탄’,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재림심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 믿기 싫은 사람들은 여전히 별별 가짜뉴스들을 수없이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예수는 사생아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하고 결혼을 했다, 죽은 것이 아니고 프랑스로 도망가서 살고 있는데 후손들도 있다, 심지어는 일본에도 예수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난 후손이 살고 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때는 우리나라에만 자신이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70여명이나 된다고 정도로 가짜뉴스가 판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 수태가 되어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성탄절의 핵심이야기입니다. 누가는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굿간에 가서 직접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동방의 박사들이 예사롭지 않은 별의 출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찾아왔고, 궁궐에서 헤롯을 만났으며, 유대 성경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베들레헴에서 마침내 아기 예수를 발견하게 되자 기뻐하고 기뻐하며 준비해 선물을 드렸다는 사실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일로 인하여 헤롯은 베들레헴 인근의 유아들을 살해하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일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 숨긴다고 숨길 일이며 만들어낸다고 만들어낼 있는 일입니까?

 

모든 일이 은밀하게 일어난 일도 아니었습니다. 관심이 있어 사실관계를 확인할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팩트를 확인할 있는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사시면서 대중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셨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숱한 기적의 현장에서 빵을 먹고, 귀신들이 항복하며, 불치병 난치병 환자들이 고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칩니다. 믿겠다는 것이지요. 아니 믿기 싫은 것입니다. 믿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두려워서 믿고, 기뻐서 믿고, 믿어서 믿고, 그러다 어떤 사람은 죽어도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강림절 마지막 주일에 권합니다. 말구유에 누워계신 아기예수님을 보십시오. 이는 믿을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을 죽도록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십시오.

 

 

3. 둘째로 누가는 자신이 전해주는 예수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이글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헌정한다고 하였습니다. 데오빌로는 누군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혹자는 사람은 로마의 관리로서 믿는 사람인데 당시의 형편상 이름을 밝힐 없어 상징적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데오빌로’라는 말뜻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뜻이 구원자라는 뜻이니까요. 데오빌로는 예수님을 믿어 이미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라면 이미 신자인 사람에게 책을 헌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사함을 받으면 신앙생활의 목적을 이룬 것일까요? 그게 끝이라면 굳이 교회에 다닐 이유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데오빌로들이여, 당신들이 자세하게 확실하게 알아야 것들이 있어서 책을 씁니다, 이것이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자세히 알아야 하며 무엇을 확실히 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호칭에 들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 외에 ‘임마누엘’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구원하시는 예수를 알았으면 ‘임마누엘’하시는 예수를 알아야 것입니다. 임마누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입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를 말합니다.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를 믿으십니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것은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예수 없이 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힘든 일도 쉬운 일도 예수 없이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혼자 살지 마시고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고난 중에 있을 ~ 변함없이 사랑을 베푸신 주님 주님이 좋아요 / 외롭거나 병들었을 때나 절망이 닥쳐올 때도 변함없이 위로해 주시는 주님 주님 사랑해요 /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감사가 넘칠 때도 변함없이 영광을 받으실 주님 주님찬양해요 //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주님 / 너무나 큰사랑 감당키 어려워요 / 나는 주님이 좋아요 나는 주님이 좋아요 / 은혜의 강물이 몸에 흘러요’

 

다음, 주님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주’라는 말이 붙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데오빌로들에게 누가는 권합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방에다 고이 모셔놓고 ‘여기 꼼짝 말고 계셔요~ 제가 알아서 테니까 주는 밥이나 잡수시고 가끔씩 좋은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삽니다. 하지만 반대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모든 일을 주님께 고하고 반드시 주님의 결재를 받아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원칙대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 때문에 중동지역 교회 이야기를 들으니까 거기는 금요일이 휴무일이라 예배를 금요일에 드린답니다. 그건 이미 교회라 없습니다. 성경은 노는 날에 예배하라고 하지 않고 주일에 예배하는 거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배는 못나와’ ‘나는 새벽예배에는 못나와’ ‘나는 십일조는 못해’ ‘나는 전도는 죽어도 못해’ ‘나는 교사는 못해’ 이런 원칙을 세워놓고 사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원칙 누가 정한 것입니까? 몸과 영혼의 주인이신 분의 허락을 받으셨습니까? 주님이 그런 허락을 하실 리가 없죠.

 

여러분, 내가 믿는 구원자 예수님은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시기도 하고, 나의 주인이기도 하신 분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진짜로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 말씀대로만 살기로 했네 / 기도하면서 살기로 했네 / 예배하면서 살리라”

 

4. 여러분, 요즘 세상 분위기가 신앙생활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박해시대, 고난시대보다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와 눈높이를 맞추시려고 말구유에까지 낮추어서 오신 성탄의 주님을 자세히, 확실하게 아는 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사로잡은 사실들 /1:1-4

2011-06-02 13:57:53

 

지중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대리석 기둥들이 버티고 있는 멋진 로마식 저택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아도 보통 사람의 집은 아닌 합니다. 집은 로마 귀족 <데오빌로> 집이었습니다. 그의 집에 손님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환담을 나누는데, 뭔가 즐거운 일이 있는지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종이 와서 편지를 내밀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겉봉에 친근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을 존경하는 누가로부터...>. 데오빌로는 글을 확인하자마자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일어섰습니다.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이상 대화를 나눌 수가 없군요. 유감입니다. 내일 다시 주시겠습니까?>

 

손님들을 돌려보낸 데오빌로는 서둘러 서재로 들어가서 편지를 읽습니다. 편지를 읽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단숨에 편지를 읽은 그는 엎드려 기도합니다. <, 주여, 감사합니다. 저로 하여금 놀라운 당신의 이야기를 읽게 하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는 편지를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는 누가에게 답신을 보냅니다. < 다음 이야기를 반드시 기록해서 보내주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은 당시 있었음직한 이야기를 상상해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데오빌로>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데오빌로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 뒤에 <각하>라는 칭호가 나오는데, 각하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마의 지체 높은 관원이나 귀족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떤 내용의 편지를 받았기에 이토록 기뻐하고 감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설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지위를 포기하고, 명예를 내던지고, 생명까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하찮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삶은 중요한 것들에 의해 인도를 받습니다.

 

1936 12 11 라디오를 통해 BBC방송 뉴스를 듣던 영국 국민들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성의 도움이 없이는 국왕으로서의 의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국왕의 지위를 포기하고자 합니다.> 충격적인 선언을 사람은 대영제국의 <에드워드 8>였습니다.

 

그는 심슨 부인이란 미국 여성을 사랑했는데, 여성은 이혼 경력이 있는 평민이어서 왕의 아내가 없었습니다. 영국 의회가 반대하고, 영국 국민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는 결국 여인을 위하여 왕위를 포기했습니다. 그가 왕위를 버린 동생 앨버트가 형을 이어 왕이 되어 <조지 6> 되었는데, 그는 말더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왕위를 수행해 나가는 것을 그린 <킹스스피치>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명작입니다. 에드워드와 심슨 부인 사람은 1937년에 프랑스에서 결혼했고, 35 간을 사랑하며 살다가 1972년에 에드워드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에드워드란 남자를 이끌어 것은 여인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대영제국의 왕관보다 그에게 소중했습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에 의해 이끌림을 받으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에게도 평생에 자국을 남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려서는 소풍 가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소풍 가기 전부터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너무 좋아 빙그레 웃곤 했습니다. 노란 도시락에 담아간 김밥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흥분되던 소풍이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바랜 사진이 남아 일을 기억하게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은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평생 남습니다. 너무 깊은 자국을 남겨서 지울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아버님께는 아마도 6.25 전쟁이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아버님의 생애에 결코 지울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북한에 남겨두고 7남매는 아버님의 영혼에 너무 상처로 남아 세상의 어떤 지우개로도 지울 없습니다. <아버님, 97세까지 살아오시는 동안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여쭌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일을 말씀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 인생에 가장 슬펐던 일은.....>, 혹은 < 인생에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이라고 시작되는 이야기 거리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 인생에 가장 기뻤던 일은...>이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도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일이 우리 평생에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이며, 가장 기쁜 일이며, 가장 잊을 없는 일입니까? 무엇이 우리 생애에 가장 소중한 것입니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 잊을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데오빌로는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마도 그는 <내가 로마 귀족으로 태어난 >이라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내가 군대 장군이 >이라고 대답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그의 인생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데오빌로가 살던 곳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진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다녀온 사람이 데오빌로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남자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 그가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그에 대해 사방으로 다니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얼마나 놀랍게 사람들 틈으로 퍼져 들어가는지 유대 당국이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옥에 가두고 핍박을 해도 막을 없다고 했습니다. 데오빌로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얼마 그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세히 말해 주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예수>인데, 뜻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평소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능력이 있어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그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앞에 와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유인이었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아무 희망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는 로마 제국보다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선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데오빌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유는 자신도 구원을 받아야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양 있는 로마 귀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하고, 앞에서 아부했습니다. 그는 상당한 힘과 재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도 그의 마음을 채울 없었습니다. 부귀영화에 질렸습니다. 검투 경기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로마식 쾌락도 식상했습니다. 그리스 철학과 신비종교에 관심을 가졌으나,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추악함, 가증함, 위선, 죄악에 질려 있었습니다.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예수, 선생님이라면 가능할 같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능력자였으나, 힘을 이용하여 황제가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기가 있었으나 군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세상을 휘어잡을 있었으나, 천국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신비한 능력이라면 로마 제국이라도 얻을 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무력과 폭력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놀랍게도 그는 사랑을 이야기했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인 틀림없었습니다.

 

<그래, 예수라는 분에 대해 알아보자. 분께 인생을 걸어보자. 분을 의지하자....> 그의 마음은 점점 예수께 기울었고, 어느 멀리 떨어진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일이 이제는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인생 안에서 일어난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데오빌로에게 인생 최대의 사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하여 데오빌로에게 보낸 누가는 < 멀리 팔레스틴에서 일어나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필요가 없는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누가의 삶에, 데오빌로의 인생 한복판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도, 데오빌로도 예수님의 이야기에 이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누가 데오빌로에게 <그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이상 <로마 귀족으로 태어난 >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알게 >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 <데오빌로> <데오스> <필레오> 합쳐서 말로서 뜻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마음에 가장 소중한 분으로 모신 이후,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누구도 예수님의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오늘의 데오빌로입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고, 예수님이 우리 생애 목표가 되셨고, 우리 인생의 근거이며, 목적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다가도 예수님의 일이라면 벌떡 일어섭니다. 우리도 <지금은 제가 바쁘니, 나중에 다시 오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위한 일로 달려갑니다. 우리도 <그건 나중에 사고 먼저 선교지를 돕자>라고 말하면서 물질을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이끌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 사건은 평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2천년 팔레스틴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탄생과 , 말씀과 행하신 , 십자가와 부활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보배가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 < 번째로 중요한 >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 가장 충격적이었던 , 가장 진한 자국을 남긴 것들도 가장 소중한 것들도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 우리 삶에 들어오면 자리를 물려주고 번째 자리로 내려앉게 됩니다. 새로 들어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가장 중요한 > 통하여 번째로 중요하고, 소중하고, 가슴아픈 것들이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학생이 있다고 봅시다. 그가 합격 사실을 확인하고 기뻐 뛰며 돌아오는 길에 날치기를 당해 돈을 잃었다고 해서 인생을 포기하겠습니까? 상당한 거금을 잃었다고 해도 그는 얼마든지 이길 있습니다.

 

돈이 비록 귀하지만, 사법시험 합격이란 최고의 선물을 얻었기에 그는 돈을 잃은 아픔을 극복할 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은 그에게 최고로 중요한 사건이 되었고, 돈을 번째 자리로 밀려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법시험에 떨어지고 오는 길에 그랬다면 그는 술이나 먹든지,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에 의해 번째의 것들이 통제되고 다스림을 받는 원리> 아버님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아버님에게 가장 진한 자국은 전쟁의 상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전쟁의 상처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지 않으셨습니다. 꿋꿋하게 살아남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있었을까요? 이유는 아버님께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 가장 소중한 , 아버님 인생에 전쟁보다 진한 자국을 남긴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죽음의 이야기라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생명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비극이라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기쁨입니다.

 

전쟁이 갈라짐이라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됨입니다. 전쟁이 고통이라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싸맴입니다. 전쟁이 < 죽어!>라고 말할 예수님은 부드러우나 강한 음성으로 <내가 너를 살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님 인생에 최고였기에, 가장 소중했기에, 가장 진한 자국을 남겼기에 다음으로 진한 자국을 남긴 전쟁을 극복하고 살아올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이야기가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이야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가장 소중한 이야기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남기는 자국이 어떤 사고, 어떤 실패, 어떤 상실, 어떤 고통이 남기는 자국보다 진한 자국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장 기쁜 이야기가 되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의 고통을 사라지게 만들길 원합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염려, 근심이 사라지는 복을 얻길 원합니다. 이제 울지 마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이 채워지고 극복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최고로 소중한 것이 되어 세상의 어떤 귀한 것들에 유혹 당하지 않길 원합니다. 혹시 우리가 상상한 앞의 이야기에서 데오빌로를 찾아온 사람들이 황제의 초대장을 가져온 것이라면 어떨까요? 황제가 높은 자리를 준다는 명령서를 가져왔다면 어떨까요? 전에 같으면 황송해서 바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황제의 곁에 앉아 음탕한 춤을 즐기고, 잔인한 검투 경기를 보면서, 진한 포도주에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사양할 있습니다. <황제 폐하, 저는 이제 조용하게 살길 원합니다. 호의에 감사 드리면서, 목가적인 삶을 누리도록 허락해 주시길 청합니다.>라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조용히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불타 오르고, 그는 예수님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할 것입니다. 로마 제국을 위한 수고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것입니다. 로마의 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것입니다. 귀족의 팔찌와 반지 대신에 천국의 면류관을 쓰게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깜짝 놀랄 결심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를 나온 의사로서 출세의 유혹을 버리고 목사가 분이 있습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법관의 길을 버리고 선교사가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이끌리는 삶을 사는 분들은 아름답습니다. 토요일 동료 의사들의 술자리를 거절하고 다음 주일 예배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죽어 가는 청년을 살린 믿음의 의사가 부산에 계십니다.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 청년은 다름 아닌 우리 윤성호 집사님, 박정자 집사님의 아들 윤진우 군입니다. 윤진우 군은 토요일 12시부터 주일 새벽까지 수술을 받았고, 생명을 건졌습니다. 모든 의사가 술에 취해 수술이 불가능하던 시간, 예수님께 삶이 이끌리던 의사 선생님에 의해 생명이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직업을 선택하고, 사람을 만나고, 미래를 결정하고, 시간과 돈을 사용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께 이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신앙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어떤 일을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결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도 데오빌로와 누가처럼 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한 분이라면 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세히 알고자 노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 대해 자세히 미루어 살폈습니다.

 

3절을 보세요. <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훑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어 데오빌로도 알게 하려고 편지로 보냈습니다.

 

4절을 보면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했습니다. 이미 데오빌로가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확실하게 알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복음이 확산되는 이야기를 적어 보냈는데, 그게 <사도행전>입니다.

 

<날마다 풍성히, 확실하게 예수님을 알아 가는 >, 일에 우리도 힘쓰길 원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알지만,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이끌리길 원합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히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정확히, 풍성히 체험하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깊이 기도하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데오빌로가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듯이, 우리도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많이 알게 되길 기원합니다.

 

<, 예수님, 저와 저희 가정과, 저희 교회가 예수님 당신께 사로잡혀서, 이끌림 받으면서 살게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풍성히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도 이루어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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