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 설교 모음
천국과 지옥 /눅16:19-31
2012-11-19 12:54:46
어느 교회에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가 하루는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하지요, 천국과 지옥은 실존합니다.”
그러자 그 성도가 하는 말,
“목사님! 그러면 이제부터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만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 맞다 했답니다. 그 후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설교했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설교가 다 중요하지만 그중에 중요한 설교는 구원 설교입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설교는 종말론적인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입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이 지옥과 천국을 알기는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1년에 한두 번은 반드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올해도 천국 지옥에 대한 설교를 몇 번 언급하는 설교를 하긴 했는데 제대로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때마침 이병철 회장이 질문한 24가지 질문 중 오늘은 14번째 질문을 살펴볼 차례인데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것입니다.
14번째 질문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먼저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두번째는 우리의 양심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죽으면 땅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고 반드시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됩니다. 이것을 이병철 회장님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아멘?
천국은 반드시 존재하고 지옥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만약에 천국과 지옥을 부정하거나 어느 한쪽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단입니다.
“천국이 어디 있어! 이 세상이 천국이고 지옥이지 내세가 있긴 뭐가 있냐?” 하면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성경에 분명히 약속되어 있는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에서만 18번씩이나 지옥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지옥이 있다는 말을 하면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아예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강단에서 지옥과 천국에 대한 설교는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우리 예수님의 입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18번이나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핵심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본질과 핵심은 구원에 있고 그 구원의 목적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죽음 후에 두길 중에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천국에 가시는 것을 믿습니까? 또 불신자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지옥 가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우리 주님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세밀하게 성경에 기록하셨을까요?
오늘 주신 본문의 말씀을 설펴보면서 천국과 지옥은 어떤 것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1.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세요.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어느 날 나사로도 죽었고 또 얼마 후 갑자기 부자도 죽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이 세상사람 대부분이 자기가 어느 날 죽을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시간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죽고 자년 재해로 죽고 질병으로 죽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하루에 죽는 사람이 수백 명이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오늘 내가 죽을 것이다” 생각하고 죽은 분은 몇이나 될까요?
아마도 몇 명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날이 언제든지 상관없이 떠날 준비하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난한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하니 제대로 못 먹고 병들었습니다. 헌데 투성입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다 남의 집 대문에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죽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부자도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가 고혈압 뇌출혈로 죽었는지, 심장질환으로 죽었는지, 암으로 죽었는지, 사인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도 죽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몸에 좋다는 보약, 녹용 등 각종 보약을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죽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문제는 죽음 후가 문제입니다.
나사로는 어찌되었나요?
“이에 그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죽었는데 천사들이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했습니다. 둘 다 죽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의 장례의 모습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장례를 치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머잖아 여러분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 70년 안에 다 죽습니다. 아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90편 10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좀 길고 짧을 뿐이지 결국은 다 죽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을 거부할 사람은 없습니다.
요즘은 의료 제도가 잘되어 80세, 90세가 넘은 분들이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것은 떠날 준비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심판은 영벌과 영생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있는지 모르거나 대책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깝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며칠 후에 미국 여행을 간다면 어떻게 하시나요?
여권도 만들고 비자도 내고 가방도 싸고 이것저것 준비하지 않나요?
그런데 머잖아 영원한 여행을 떠나는데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권도 있어야 하고 비자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천국 여권이 있나요? 천국 비자 받으셨나요?
천국 여권과 비자를 내는 것은 교회를 나와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항공권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에 전혀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착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는 예수 안 믿어도 당연히 천국 간다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권과 비자 없이 비행기 타겠다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실제 제가 아는 목사님이 성지 순례를 가려고 공항에 갔습니다. 여행사에서 여권을 꼭 가져 오라해서 서랍에서 여권을 챙겨 갔습니다. 그런데 수속을 밟던 중에 못가게 생겼습니다. 여권을 구여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유호기간이 지난 여권을 갖고 왔으니 결국 그분은 여행을 못 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주님이 가르쳐 준 방법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죄 사함 받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준비됐나요? 예수님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믿습니까?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실패, 재물의 많고 적음이 여러분의 내세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든 가난한자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공부 많이 한 사람이든 학교 문 앞에도 못 가 본 사람이든 천국 가는 데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대비하고 믿음으로 천국행을 준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지옥은 인간이 체험하는 최악의 고통이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방송에서 개그 콘서트 같은 것은 있으나 코메디 극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외국에는 종종 코메디 극장이 있답니다.
유럽의 어느 코메디 극장에 공연 중에 화재가 났습니다. “불이야!” 소리를 지르면 불상사가 벌어질까 염려되어 한 코메디언이 무대로 나와서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극장에서 지금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빨리 질서 있게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자 청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참 잘 웃긴다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자 코메디안이 다시 나와서, “아니 여러분, 정말 이 극장에 불이 났으니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이것은 코메디가 아닙니다.” 하고 심각하게 말을 해도 여전히 웃기는 말로만 듣고 좋아하다가 많은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심각하게 들어야 할 설교가 지옥과 천국에 관한 설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교하면 농담으로 들으려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실존하고 지옥도 실존합니다. 그러기에 이 설교는 농담이 아닙니다.
특별히 지옥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불꽃 가운데서 사정없이 고통 받는 곳입니다. 그곳의 고통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세요.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할까요?
사람이 제일 고통스러운 고통은 화상의 고통이랍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불꽃가운데 그 화상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지옥에선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사람들이 사우나, 찜질방, 불가마 등에서 워낙 뜨거움에 단련이 돼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온도를 한참 높이기 위해서 보수공사를 한다고 합니다. ㅎㅎ
여러분! 찜찔방 불가마는 뜨거워도 견딜 수 있어요. 왜죠? 힘들면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지옥은 못나갑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교도소에 구속 수감만 되어도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감옥에서 나오려고 난리를 칩니다. 그래도 세상 교도소는 형벌 기간만 지나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아무리 나오려 해도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뜨거운 고통이 항상 존재하면서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또 하나 지옥이 힘든 것은 그곳에서는 어떤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기도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리 도와 달라고 해도 안 됩니다. 심지어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찍어 달라는 요청도 거절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는 신자든 불신자든 동일하게 비를 주시고 땅의 열매를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지옥은 아무리 울고불고 해도 응답이 없는 곳입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은 비교의 고통입니다. 그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눈앞에 천국이 밝히 보입니다. 그리고 내가 잘 알던 사람들이 그 천국에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가 천국에서 누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고통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인생은 누굽니까? 너무 자기를 모르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어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세상 것을 천년만년 누릴 수 있는 것인 줄 알고 죽을 힘 다해 붙잡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준비 됐나요?” “준비 됐나요?” 천국 갈 준비 되셨나요?
여러분 주변에는 아직도 모르고 사는 자들이 많지 않나요? 여러분 부모가 예수 믿나요? 여러분 형제가 예수 믿나요? 여러분 자식들 손자들, 다 예수 믿나요?
본문에 지옥 간 부자의 호소를 들어보세요.
나사로를 살려서 내 아버지 집에 보내달랍니다. 27~28절을 보세요.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그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형제 다섯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형제들은 아직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니 나사로를 살려 보내어 이 사실을 전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소원도 거절당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구제 기관이 아닙니다. 복지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영혼구원 기관입니다. 교회는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을 건져내는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지옥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그곳에 가지 못하게 막는 운동이 전도입니다. 믿으면 다행이고 안 믿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시급성과 긴박성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지옥으로 떨어져가는 불신 가족을 하루바삐 건져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언제 세상 떠날지 모르는데 마냥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변에 갑자기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잖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다면 그렇게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돌아가시고 난후 후회하면 뭐합니까? 그러니 기회는 지금이고 오늘입니다.
3. 천국은 오직 복음을 듣고 믿어야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요청합니다. 27절~28절을 보세요.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자 아브라함이 거절합니다. 29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어떻게 하라고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났는데도 사람들은 안 믿습니다. 하물며 거지 나사로가 살아난다고 믿겠습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는 뜻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듣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만이 지옥 갈 사람이 천국갈 수 있게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도 전해야 합니다.
방법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찌하든지 일단 듣게 하고 그 말씀이 들려질 때 믿어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들어야 믿습니다. 스스로 믿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믿지 않는 다섯 형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살리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16절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잊어버리세요.
내가 얼마나 돈이 많은 사람인가 하는 사실을 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성공한 사람인가를 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건강한 사람인가를 잊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준비되어야 합니다.
천국 갈 준비를 하되 나만 아니라 내 주변의 다섯 형제도 준비시켜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절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에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사람의 풍요가 있습니다.
예수로만 살아가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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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비극 /눅16:19-31/ 홍정길 목사
2014-12-11 09:49:09
우리는 이 주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불경에서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세상이 고생스럽다는 것을 아는 것, 고제(苦諦)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고통의 근거가 집착에서 온다는 집제(集諦),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멸제(滅諦), 모든 것을 없앤 다음에 열반에 이른다고 해서 도제(道諦)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 가운데도 가장 큰 고통을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번 8.15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뉘어 살고 이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50년만에 만난 아들보고 기절한 어머니,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왔어요" 큰절을 해도 모르는 아버지, 몇 차례 거듭 봐도 정말 가슴 아픈 일 중에 가슴 아픈 장면들이었습니다. 이 고통이 이 민족에게서 언제나 떠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보면서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짧은 순간 만났다가 헤어지는 고통도 있지만 영원한 만남과 영원한 이별의 인생도 우리 앞에 열려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여기 성경에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앙드레 김의 것과 상대가 안될 정도의 고급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구두쇠가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쯤 되면 팔자 중에도 상팔자고 아마 온 인류가 이런 삶을 한번 살아봤으면 하고 흠모할 만큼 성공한 삶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이 사람이 돈을 모을 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기록도 없고 또 악했다든지, 무자비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대문에는 거지가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동네를 그렇게 말해야 될지 모르겟습니다만은 옛날에는 부자 동네 성북동에서 거지가 굶어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성북동의 높은 대문, 성처럼 높은 담들 밖에서 굶어죽었습니다. 부자들의 무자비함이 있습니다. 거지가 어디에서 사는가? 가난한 사람 동네에 삽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한국의 성북동 부자보다 좀 낫습니다. 자기 대문에서 가난한 사람이 얻어먹는 것을 용인했습니다.
그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헗은 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몸이 약해져서 거지가 되었는지, 가난했기 때문에 병들었는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마 이런 인생은 세계 어디가도 살기 싫은 사람의 대표적인 유형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것 있습니다. 죽음을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셨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시신이 가마니에 싸여져서 어느 골짜기에 버려졌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장사지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그가 죽자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속으로 갔다고 합니다.
부자는 안 죽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을 것입니다. 매일 골프를 치러 나갔는지도 모릅니다. 건강을 위해서 체지방을 어떻게 줄이는가 의사를 동원해서 매일 건강 밸런스를 체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도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이 사람의 장례식은 굉장했습니다. 죽어서도 저렇게 돈을 많이 써야 되는가 할 정도로 성대한 장례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저가 음부에서" 라고 말합니다.
'하데스'라는 말은 '지하,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은 지옥을 두 단어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델라'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유대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불타고 있는 골짜기, 불이 꺼지지 않는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하데스'라는 것은 그리스에서 지하 세계를 하데스라고 그랬는데, 성경은 그것을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개념인데, 그 때 사람들이 죽으면 가는 곳을 '하데스'라고 했기 때문에 성경은 그 의미를 그대로 원용해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통 중에서 눈을 들어 아브라함 품 속에 있는 나사로를 봅니다. 성경 본문은 '아브라함 품속에 아이처럼 누워있는 나사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편안한 자세, 위로가 있고, 깊은 자비가 있고 관심이 있는 아브라함의 품속에 누워있는 나사로의 모습, 그 이상 더 만족스러운 것이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나는 망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주위도 생각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때입니다. 늘 상습적으로 안개가 짙게 끼어있는 장소 앞에 미군들이 서서 stop!이라는 사인을 붙여놨습니다. 사람들이 가지 말라는 그 팻말을 보고도 앞의 차가 쌩쌩 달리니까 뒤따라오던 차들도 따라 갑니다.
그런데 미군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그 손짓에 한 사람이 "말이 안 통하지만 저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저처럼 강청하니까 가지 말자"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보니까 거기서 한 2km 뒤에 큰 교량이 폭파되어서 안개길로 몰고 가던 차 15대가 무참하게 그 밑에 떨어져서 박살이 난 것이었습니다.
지옥의 무서움을 경고하시는 주님입니다.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지독하고 고통스럽길래 그 분이 죽으셔야만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그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도 됩니다. '고문 받고 있는 중에' 같은 단어입니다. 그냥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형벌의 고문을 당하고 있는 고통 중에 그는 아브라함과 그 품속에 있는 나사로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어떤 고통을 받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형벌이 이 지옥에서 계속되는지 모릅니다.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은 설교하면서 "만약 내가 여러분을 단 5초만 지옥을 보여줄 수 있다면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고 외쳐댔습니다.
존 웨슬레도 말하기를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지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개념이 없습니다. 지옥은 무서운 형벌의 장소, 고문의 장소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현재 삶의 결과입니다.
그런가하면 그 지옥 가는 행로에는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연계되어 있습니다. 여기 25절 보니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살았던 삶입니다.
여기 부자가 돈이 많아서 지옥 간 것 아닙니다. 여기 나사로가 가난했고 거지였기 때문에 천국간 것도 아닙니다. 기억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원리는 있습니다. 돈을 갖고 사회적인 신분과 명성이 있고 성공했으면 그 성공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못 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가난할 때 그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던 사람이 돈이 많아지면 하나님과 담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사에 처음 들어가서 신입사원으로 있을 때에는 매일 Q.T하던 사람이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이사가 되니까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런 일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성공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성공이 갖는 함정, 부요가 갖는 함정, 명성이 갖는 함정이 우리 하나님을 못 보게 만든다면 그 성공은 가장 무서운 실패이고,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하면 무서운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실패했기 때문에 고통 중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실패는 성공입니다. 가난이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그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을 수 있다면 가난이 성공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 땅에 우리가 살았던 그 삶의 결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행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말씀 증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는 이미 결판난 인생이지만 우리 집에 있는 내 동생들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시옵소서." "아니라. 나사로 아니라 모세를 다시 보내줘도 저들은 안믿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이 뇌일혈로 쓰러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크게 시멘트 바닥에 부딪쳤는지 뇌진탕이 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시체실에 놔두었습니다.
옛날에는 냉동실이 없는 시체실이었는데 이틀만에 그 분이 깨어났어요. 그래서 그 분은 평생 얼굴 반쪽이 새파란 멍 같은 것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그 남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동네 방네 돌아다니면서 그 예수라는 사람 대단한 사람이라고, 예수가 자기 아내를 살려주었다고 하면서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자기 자녀들이 교회에 안나가면 부지깽이 가지고 두들겨 패면서 깨워서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교회 안갑니다. 나중에 아내가 기도생활하고 즐거워하니까 자기 아내 위해서 좋은 장소에 기도원을 잘 지어줬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안믿습니다.
남서울교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남서울교회 개척한 지 두 달쯤 되던 때입니다. 한 30명 모였을 때입니다. 한 성도의 가정에서 외국에 공부하러 갔던 딸이 심한 우울증을 갖고 와서 며칠 있다가 음독자살을 했습니다.
교인 30명밖에 안 되는데 한 가정이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니까 당시 온 교회 성도의 2/3가 한양대학 병원에 가서 병상을 지켰습니다. 나중에 한양대학병원 부원장이었던 그 아이의 작은 아버지가 형님에게 "형님, 끝났습니다.
산소 호흡기 뗍니다." 말합니다. 산소호흡기를 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님은 양보할 수 없다고, 숨이 넘어가도 오늘 밤만이라도 곁에 있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저희들은 밤이 늦어 나와서 교회로 모두 모였습니다.
안나왔던 성도들에게까지 나오라고 전화해서 모두 밤새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새벽 4시쯤 이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버지는 안 믿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복음제시를 몇 차례 했는데,
"홍목사님, 그 예수 믿는 것, 참 좋은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가면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나도 압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일어나서 교회는 안나오고 운동하시더라구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말해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습니다. 신기한 방법이 예수 믿게 하는 것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은 중요한 결단을 해야됩니다. 슈바이처라는 젊은 철학도가 박사학위 공부하면서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늘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그래서 교수하면서 오르간 연주자로 평생을 살까 하다가 이 성경 구절을 읽고 의과대학 들어갔습니다.
의과대학 마친 다음 그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평생을 흑인들을 살피면서 살았습니다. 이 구절 때문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될 것인가 결정하셔야 됩니다. 지금의 내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내 영원한 삶이 현재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 구원받아서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들은 주변에 영원히 이별할 사람이 없는가를 돌아봐야 됩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남편 전도하지 않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이 날 이 때까지 그 남자 만나서 고생 고생했는데 영원까지 같이 살면 지겨워서 안되겠어요." 이런 분도 있더라구요.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운동화 바꿔 신으러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50년간 다시 만나지 못한 사연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영원히 이별할 사람이 없는가를 살피시면서 하나님께서 은혜주실 때, 하나님께서 아직 결정적인 문을 닫고 있지 않을 그 시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들에게 증거해야 됩니다.
이것이 먼저 믿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자녀들은 없습니까? 배우자는 없습니까? 부모님은 없습니까? 이별의 아픔을 보면서 다시 만날 기회의 빛나는 약속을 붙잡아야겠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아버님 돌아가시니까 딱 가시기로 작정하시더라구요. 마지막 병원에 입원하는 날, 제가 업으니까 "나 제발 편히 보내라. 내가 다 견딜 테니까 병원에 안가고 여기서 있다가 바로 가게 하라."그러나 그 말을 거역하고 모시고 삼성병원에 갔습니다.
임종하시는 순간, 자기 좋아하시던 그 분 만나서 그런지 활짝 웃으시더라구요. 재회의 땅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땅입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고 싶은 분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품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입니다. 영광의 재회가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이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그 영광의 땅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생에게는 이 사이와 저 사이에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구렁 때문에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영원한 이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구원을 감사하시면서 날마다 주께서 주시는 그 구원의 땅을 믿음으로 바라봅시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해서 영원히 이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보이면 복음 전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주께서 사모하는 심령의 그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귀한 은혜가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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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눅16:19-31/ 이동원목사
2014-12-04 13:57:03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비판하는 메뉴 가운데 빠지 지 않는 단골 메뉴가 하나 있습니 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속하는 교인 들의 신앙이 지나치게 기복적이고 둘째는 타계적이다.
기복신앙을 가 지고 있고 타계신앙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축복 -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기복 적이고 둘째로 타계적이다' 이런 비 판이 있습니다.
이 비판은 한 부분 적으로는 타당한 요소가 있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 다. 저는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 이 그 동안에 지나치게 기복적이었 다는 점은 늘 동의를 하지만 과연 한국 교인들이 타계신앙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 부분에 관하여서는 저 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한국교회 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진 이유, 그냥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히려 반대로 타계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세신앙이 없었 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내세가 있다고 참으 로 믿는다면,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뭐 조금 잘 사는 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그렇게 치사하게 매달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내세 신 앙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타계신앙 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내세신앙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취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인 가치관, 또 기독교 문화의 바탕을 가지고 있는 서구 사회의 경우, 특 별히 미국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내 세를 믿느냐? 천당을 믿느냐? 이런 조사를 해 보면 항상 80%가 넘어요. 80%이상의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교회를 나오거나 안 나오거나, 크리 스챤이거나 아니거나 80% 이상의 사 람들이 85%, 어떨때는 90%나 되더라 구요. 나는 내세를 믿는다. 나는 천 당을 믿는다.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하면 최근에 제가 대표로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 임'에서 코리아 갤럽에 의뢰해서 이 조사를 했습니다. 한국인들의 종교 의식 조사를 했습니다. 먼저 기독교 인들에 물어 봤습니다. 어떤 천국을 믿느냐? 영원한 내세의 천국을 믿느 냐?
아니면 그저 이 땅에서 어떤 상 징적인 천국만 믿고 있느냐?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소위 교인이라고 대 답한 사람들 가운데서 내세의 천국 은 안 믿고, 이 땅에서 그냥 하나님 과 함께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천국이지요 라고 대답한 사람이 무 려 41.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 니다. 우리가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물어 봤습니다.
이 조사는 천 명의 기독교인, 천 명의 불신자를 대상으 로 했던 조사였습니다. 비 기독교인 들에게 내세를 믿느냐? 천국을 믿느 냐는 질문을 했더니 믿는다고 대답 한 사람이 33.9%였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 기독교인이 아닌 비 기독교인의 경우에 내세를 불신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66%나 되었습 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은 내세나 천국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는 것 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두 가지 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 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의 가치 체계가 지나치게 물질주의 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먹고사는 것이 중요 하지 내세는 뭐 별로 중요하지 않 다.
여기에서 오늘 내 직장이 중요 하고 내 목구멍이 중요하고, 내 job 이 중요하고, 내 직업이 중요한 것 이지 나는 내세에 관심이 없다.
지 나치게 물질주의적으로 또 자기 중 심으로 이렇게 우리들의 생각과 의 식이 변하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별로 내세에 대한 관심 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누가 우 리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해도 그 분의 영원한 운명이 어떻게 되었 을까? 별 관심이 없어요, 심지어 기 독교인들도 조차도 그렇습니다.
누 가 우리 가족중이나 이웃 사람들 중, 누가 죽었다 그러면 별로 심각 하게 생각하지 않고 냉담하게 생각 하고 혹시 가까운 사람한테 누가죽 었다 그러면 그 분의 죽음이 내 호 주머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거 기에나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유산 에나 관심이 있고, 그 분의 죽음으 로 내가 어떻게 되느냐? 다른 사람 이 죽든 말든 관심이 없다. 이런 냉 혹한 사회의 조류를 대표하는 조크 가 수년 전에 유행했던 말 중에
"내 가 죽으면 국보 손실이고, 당신이 죽으면 환경정리"라는 말이 있죠? 무서운 얘기입니다. 그렇게 물질주 의적으로 가치가 세속화된 그런 현 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이러한 시류에 편승 한 교회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교회의 대부분의 설교도 이 땅에서의 축복, 위로 거기에 다 집 중이 되어있고, 별로 내세에 대한 설교, 천당이나 지옥에 대한 설교를 우리가 들어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 서 교인들 조차도 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갤럽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지난 달에 조사가 끝난 거예요. 아주 최 근의 조사이지요. 이 조사에 의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 면 좋겠느냐?
교인들이 희망하는 설 교의 주제에 대해서 내세에 대한 설 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인들의 퍼센테이지가 1.5% 예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 요. 자, 이따금 가뭄에 콩 나듯 들 어볼 수 있는 내세에 대한 설교는 코미디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 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경각 심을 느껴서 매우 심각하게 어느 날 지옥과 천당에 관한 내세의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앉아서 픽픽 웃고 만 있더래요. 그래서 너무나 좌절이 되어서 자기 친구 배우 코미디언이 있는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순전히 가짜만 말하는데도 어떤 때는 슬픈 얘기를 하면 사람들 이 울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심각 한 소리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웃기 만 하니 어떻게 된거냐고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비판하 는 메뉴 가운데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속하는 교인들의 신앙이 지 나치게 기복적이고 둘째는 타계적이 다.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고 타계신 앙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현실적 인 축복 -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 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기복적이고 둘째로 타계적이다'
이런 비판이 있습니다. 이 비판은 한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요소가 있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아 주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한국 교 회 교인들의 신앙이 그 동안에 지나 치게 기복적이었다는 점은 늘 동의 를 하지만 과연 한국 교인들이 타계 신앙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 부분에 관하여서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 다.
오히려 저는 한국교회 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진 이유, 그냥 이 땅 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매달 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히려 반대로 타계신앙이 없었기 때문이 다. 내세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내세가 있다고 참으로 믿는다면, 영 원한 나라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세 상에서 뭐 조금 잘 사는 것을 위해 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 게 치사하게 매달릴 필요가 있겠습 니까?
이것은 내세 신앙이 없기 때 문에 그래요, 타계신앙이 없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 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내세신앙이 다 른 나라에 비해서 취약하다고 생각 합니다. 기독교적인 가치관, 또 기 독교 문화의 바탕을 가지고 있는 서 구 사회의 경우, 특별히 미국 사람 들의 경우를 보면 내세를 믿느냐?
천당을 믿느냐? 이런 조사를 해 보 면 항상 80%가 넘어요. 80%이상의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교회를 나 오거나 안 나오거나, 크리스챤이거 나 아니거나 80% 이상의 사람들이 85%, 어떨때는 90%나 되더라구요. 나는 내세를 믿는다. 나는 천당을 믿는다.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하면 최근에 제가 대표로 섬기고 있는 '한국 교 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코 리아 갤럽에 의뢰해서 이 조사를 했 습니다. 한국인들의 종교의식 조사 를 했습니다. 먼저 기독교인들에 물 어 봤습니다.
어떤 천국을 믿느냐? 영원한 내세의 천국을 믿느냐? 아니 면 그저 이 땅에서 어떤 상징적인 천국만 믿고 있느냐?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소위 교인이라고 대답한 사 람들 가운데서 내세의 천국은 안 믿 고, 이 땅에서 그냥 하나님과 함께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천국이지 요 라고 대답한 사람이 무려 41.1% 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 리가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물어 봤 습니다. 이 조사는 천 명의 기독교 인, 천 명의 불신자를 대상으로 했 던 조사였습니다. 비 기독교인들에 게 내세를 믿느냐? 천국을 믿느냐는 질문을 했더니 믿는다고 대답한 사 람이 33.9%였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 기독교인이 아닌 비 기 독교인의 경우에 내세를 불신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66%나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 고 있는 한국인들은 내세나 천국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두 가지의 이유 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가치 체계가 지나치게 물질주의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 에서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지 내세 는 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 서 오늘 내 직장이 중요하고 내 목 구멍이 중요하고, 내 job이 중요하 고, 내 직업이 중요한 것이지 나는 내세에 관심이 없다.
지나치게 물질 주의적으로 또 자기 중심으로 이렇 게 우리들의 생각과 의식이 변하면 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별로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누가 우리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해도 그 분의 영원 한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별 관 심이 없어요,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조차도 그렇습니다.
누가 우리 가족 중이나 이웃 사람들 중, 누가 죽었 다 그러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냉담하게 생각하고 혹시 가까 운 사람한테 누가죽었다 그러면 그 분의 죽음이 내 호주머니에 어떤 영 향을 끼치느냐?
거기에나 관심이 있 을 뿐입니다. 유산에나 관심이 있 고, 그 분의 죽음으로 내가 어떻게 되느냐?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관 심이 없다. 이런 냉혹한 사회의 조 류를 대표하는 조크가 수년 전에 유 행했던 말 중에
"내가 죽으면 국보 손실이고, 당신이 죽으면 환경정리"
라는 말이 있죠? 무서운 얘기입니 다. 그렇게 물질주의적으로 가치가 세속화된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 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이러한 시류에 편승한 교회의 무관 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대부분의 설교도 이 땅에서의 축복, 위로 거기에 다 집중이 되어있고, 별로 내세에 대한 설교, 천당이나 지옥에 대한 설교를 우리가 들어 보 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교인들 조차 도 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 었습니다.
갤럽 조사 보고서에서 보 면, 이것이 바로 지난 달에 조사가 끝난 거예요. 아주 최근의 조사이지 요. 이 조사에 의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교인들이 희망하는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 내세에 대한 설교를 해 주었 으면 좋겠다,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인들 의 퍼센테이지가 1.5%예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요. 자, 이따 금 가뭄에 콩 나듯 들어볼 수 있는 내세에 대한 설교는 코미디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경각심을 느껴서 매 우 심각하게 어느 날 지옥과 천당에 관한 내세의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 이 앉아서 픽픽 웃고만 있더래요. 그래서 너무나 좌절이 되어서 자기 친구 배우 코미디언이 있는데 이렇 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순 전히 가짜만 말하는데도 어떤 때는 슬픈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심각한 소리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웃기만 하니 어 떻게 된거냐고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 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 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 하니까 그런거지"이런 대답을 했다 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 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될 성 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 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 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 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 느냐,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 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 음 16장이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 면 소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 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 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 접하리라"
우리가 이 땅에서 만약 지혜롭게 살 수 있다면 어떤 축복이 약속되느 냐? 제가 이말의 뜻을 해석하는 것 이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것은 그냥 지나가겠습니다.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 속에 나타난 이 단어를 보세요.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 이다. 지금 이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 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 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을 보내게 될 장소. 이 세상의 짧은 시간이 끝 났을 때 우리가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그 영원한 상태는 어떤 곳일 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 16 장 19절이하에서 주님은 그 영원한 세계의 커튼을 조금 열고 그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세계 어떤 곳일까요?
첫째로, 그 영원한 세계의 상태 에 관해서 본문은 이런 것을 가르칩 니다.
그곳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즉시 로 가는 곳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소위 죽는 순간, 즉시로 가는 곳. 그것이 영원한 세계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 되는데요. 여기 보시면 '한 부자가 있어 ..'어떤 분들은 이 본문을 가 리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다 이렇 게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비유라 는 얘기 없어요.
어쩌면 이것은 역 사적 사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래서 이런 케이스를 아셨다가 얘기 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다고 저 는 봐요. 왜냐면 20절에 보시면 부 자이름은 안나와 있지만 부자와 함 께 등장하는 주인공인 거지의 경우 에 이름이 나와있죠. 이름이 뭐였습 니까?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 가..'이름까지 명기한 것을 보아서 어쩌면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 적 사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데 22절에 보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 어..'죽었습니다.
보통 죽었다고 말 하면 기독교의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런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 되는 것. 분리되서 어떻게 되는거예 요? 영혼과 육체가 떨어지는 것입니 다. 육체는 흙으로 지음받았기 때문 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어떻 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저 상공을 space를 계속 떠도는 것으로 구천을 우리의 영혼이 떠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 향이 많습니다. 소위 newage culture 뉴에이지 문화가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 이 아닙니다.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즉시로 어딘가로 갑니다. 어디로 가 느냐? 여기 23절에 보시면 부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저가 음부에 서..'음부라는 곳으로 갔다. 이 음 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 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하데스. Hades.하데스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 리고 있는 장소입니다.엄격하게 말 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 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 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곳 이예요. 본질적으로는 같은 곳입니 다.즉각적으로 이 부자는 음부로 갔 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그러 나 이 거지 나사로는 어디로 갔습니 까?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 이렇 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 이 아브라함의 품에 대해서도 전통적으로 성경주석가들은 신학자 들은 이것을 낙원,혹은 천국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낙원과 천국도 본질 적으로 같은 곳이예요.낙원은 아직 기다리고 있는 곳. 그러나 그곳이 영원한 천국으로 흡수가 될것입니 다. 낙원과 천국 본질적으로는 같은 곳이라고 말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를 했느 냐? 마태복음 8장 11절에 보시면 이 런 말씀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로마 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자 기 아들이 병에 걸려서 와서 고쳐달 라고 하는데
"선생님.우리집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여 도 낫겠습니다."예수님에 대한 놀라 운 믿음을 보여준 이 백부장. 비록 로마사람이였지만 이런 신앙을 가지 고 있었던 백부장의 믿음을 주님이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동서남북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리고 야 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어 디에 앉으려니와? 천국에 앉으려니 와..그랬습니다.믿음의 조상 아브라 함이 간 곳. 그곳이 천국이예요.
그 러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함께 간 다..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쓰여졌기 때문에 유 대인의 대표적인 조상. 누구예요? 아브라함인 것처럼 그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갔던 천 국.그 천국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죠. 성경은 결코 소위 중간기의 신 학 인터벌의 신학을 허락하지 않습 니다.
카톨릭의 경우에는 천국과 지 옥의 중간기의 음부, 혹은 림보라는 장소에 가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라고 하는데 성경은 그 사실에 대해 절대적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죽 는 즉시로 간다.음부이던가 천국이 던가 둘중의 하나를 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영원한 세계. 그세계는 어떤 곳이 냐? 그곳은 죽은 다음에 즉시로 가 는 곳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 랍니다.죽은 다음 떠돌다가 한참을 있다가 도착하는 어떤 곳이 아니라 내가 생명이 이땅에서 떠나가는 그 순간 즉시로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두번 째로 의식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는 우리들의 의식이 살아 있는 곳이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 이라고 있죠.
집에 열심히 찾아오 는 사람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 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 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 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 혼도 없어진다라고 가르칩니다. 그 러나 성경은 없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그 사실은 생 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자의 묘사, 죽은 후의 사후의 부 자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 니까? 본문 23절 같이 읽겠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 사로를 보고 자,음부에서 뭐라고 그 랬어요? 고통 중에. 그가 지금 고통 하고 있어요.
의식적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하고 있는 장소, 분명히 여기 의식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24절에 보시면 그가 이 고통의 장소에서, 음부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24절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여러분 무더운 여름철에 목 마름에 시달려 보셨습니까? 목마름 에. 목이 타는 고통, 물방울 하나를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고 고 통하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내세 는 무의식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 은 의식이 살아 있는 생생한 세계라 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악몽에 시달린 기억이 있습 니까? 악몽. 너무너무 괴로워서 소 리치고 싶은 악몽, 우리 마누라가 가끔 이상한 꿈을 잘 꾸고 소리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인생을 그렇 게 살지 말라고. 잘 때는 푹 자라 고, 늘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왜 그 렇게 이상한 꿈을 잘 꾸는 지 몰라 요. 꿈이니까 깨라고. 아, 꿈이냐 고. 일어 나서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습니다. 깨었으니 망정이지 깨이 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 분 깨어나지 않는 악몽 생각해 보세 요.
깨어나지 않는 고통의 악몽, 영 원히, 영원히, 영원히 지속되는 고 통스런 악몽, 깨어날 수 없는 악몽 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이 지옥입니다. 기 억이 살아있는 곳이예요.
반대로 나사로가 갔던 세계를 보십시오. 25절에 아브라함이 가로 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 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 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 서 무엇을 받고? 위로를 받고 반면 에 이 나사로는 위로를 경험하고 있 습니다. 위로를 경험한다는 말이 무 의식이 아니지요. 위로를 경험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 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품이라 는 말을 썼을까? . 마태복음 8장 11 절을 인용했습니다마는 이것을 어떤 성경 사본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 와 이렇게 표현된 것이 아니라, 천 국에서 기대어 누우려니와 그랬어 요.
기대어 누우려니와. 유대나라에 서는 사람들이 참 아픔이 있다가도 마음 속에 어떤 슬픔이 있다가도 그 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위로 가 운데 하나는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 아주 좋은 분,
스승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식탁의 자리에서도 이렇게 기대어 눕는 것이 전혀 실례가 아니 예요. 한국에서 그렇게 누웠다가는 호로자식이라고 부모들에게 야단맞 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유대 문화권 에서는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이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누워서 이렇게 기대요. 그러면 괜찮다, 괜찮다.
최 후의 만찬석상에서도 제자, 요한같 은 제자가 주님에게 이렇게 기대어 누웠어요. 그 어떤 위로를 받는 광 경.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마음에 어떤 아픈 일을 당했을 때 괜찮아, 안아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품에 안아줘요. 천국을 아 브라함의 품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신앙의 스승, 그분의 품에 안긴다.
우리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나 라. 이 말할 수 없는 위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영원한 세계의 특성이 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레오나르 도 다빈치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듯 잘 보낸 일생은 우리에게 편안 한 죽음의 침상을 마련할 수가 있 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폐 기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후의 우리 의식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세는 그 의식 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세번째로 영원한 세계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로 이루어져 있습니 다. 이미 벌써 간간이 언급했습니다 만은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 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 다.
자,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 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 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그리 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 움의 장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 에 막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가도 고 민이 어느정도 지나면 끝나니까 우 리가 생존이 가능하죠. 끝나지 않는 고민. 끝나지 않는 번민. 상상해 보 세요. 이 고통의 장소. 번민의 장 소. 25절에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거니와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 랬어요. 고민을 받느니라. 저는 이 고민이 단순히육체적 고민만이 아니 라고 합니다. 이미 육체적 고민 그 러나 이것은 정신적인 고민. 그리고 영적인 고뇌입니다. 끝없는 정신적 인 고통. 상상해 보세요. 이세상 후 에 사람들은 그냥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고선 마지막 생명을 끊는 사 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예요. 영원한 정신적인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사후의 모습 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부탁을 하나 합니다. 그것이 사후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그래서 28절에 보면 부 탁을 하나 합니다.
음부에 들어간 부 자가 부탁을 하죠. 28절에 보세요. 자, 아브라함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 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 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따라 서 하시기 바랍니다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이 전도 잔치를 배설한 이유중의 하나. 우리 가 주로 적극적인 것.
예수믿으면 평화. 예수믿으면 기쁨. 예수믿으면 구원. 적극적인 주제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은 이것을 역으로 거꾸로 정의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우리는 이미 고통의 부르짖음을 앓고 있습 니다. 어느날 우리는 이 소리를 토 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가끔 어떤 사람 예수 안 믿을 이유를 말 하는데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우리 부모님이 안믿으셨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나혼자 천국가겠느냐고. 차 라리 같이 가겠습니다. 이런 사람들 이 있어요. 아주 휴머니즘의 인간애 를 가진 소리같지만은 지금 이소리 가 무슨 소리냐면 아주 음부에 가있 는 지옥에 가있는 부자가 소리치는 겁니다. 뭐라고 소리칩니까?
내 형 제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는 이 곳에 왔거니와 내 사랑하는 형제들만은,내 사랑하는 부모들만 은, 내 사랑하는 후배들만은, 내 사 랑하는 친구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 게 하소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어 요.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꽃. 영원 한 목마름. 캄캄한 어두움.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통곡소리. 귀신 들로 가득찬 곳. 성경은 이것이 지 옥의 정체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분 이런 질문을 할지 몰라요."아니. 사 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그런 곳으로 보낼 수가 있습니까?"
잘들 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 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 을 위해 예비된 곳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 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 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 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 지막도 가 있는 것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입 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 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 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 다.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 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 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 마자 즉각적 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 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번째는 이것입니다.하나님이 달려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 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 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 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자, 여러분 어디로 가 기를 원하십니까?천국입니까,
지옥 입니까, 둘중에 하나예요. 나사로 는 아마도 이땅에서는 어려운 삶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배불리 하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아먹었다. 얼마나 어려운 삶을 이 땅에서 살았 습니까? 그는 죽었을 때 아마 변변 한 장례식하나 지내지 못했을 것입 니다.
시청이나 구청에서 나와서 그 의 시체를 간단히 씌워갔을 것입니 다. 반대로 부자의 장례식. 아니, 부자의 삶자체가 호화로왔습니다. 그의 장례식도 호사로운 장례식이었 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그 순간. 상황은 역 전됩니다.한사람은 영원한 빛의 나 라에서 또 한사람은 캄캄한 헤어날 수 없는 어둠속으로 떨어집니다. 이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 천국과 지 옥.
당신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영원한 세계. 그곳은 한마디로 더 말하면. 네 번째로 영원한 세계는 어떤 곳이냐?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지옥 에서 천국으로 갈 수가 없구요. 천 국간 사람이 지옥으로 갈 수가 없어 요.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26절 보세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가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가는 것 아니예요. 뭐 그런 것 가르치는 종교가 있습니 다만은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다시는 그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사건이 일 어날 수 없다. 지금 여기가 중요합 니다.이순간이 중요해요. 이순간 어 떤 결단을 하는가? 이순간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그것이 영원한 상태와 영 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 다.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죽는 그 순간은 이미 늦은 거예요. 이미 영원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가던가. 영원한 지 옥으로 가던가. 그순간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줄 아세요? 본문에 보면 사람이 죽는 그 순간 일어나는 다음 사건을 볼 수가 있어요. 22절에 보 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 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 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죽는 순간 누가 임했습니까?
천사들이 와 서 그의 영혼을 오늘 아브라함의 품 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올려갑니다. 천사들은 우리 영혼의 가이드. 이세 상에 살때도 하나님이 그를 보내서 그를 인도하셨다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영혼을 영원한 상태로 옮겨가 주십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할려고 하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오늘이 중요해 요.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내일 결 정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은 우리 의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 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아 있는 질문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할까요?
어떻게해서 사 람이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갔을까요?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이 부자이기 때문에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그렇게들 해석을 많이해요. 그것은 성경에 대한 깊은 오해입니다. 부자 이기 때문에 지옥에 갔고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은 결코 아닙니 다. 가난 그 자체가 미덕은 아니예 요.뭐 게을러서 가난해지는 사람도 있어요.게으름이 미덕일순 없잖아 요.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고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고 가난 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가 있었 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무엇 이 결정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 부자의 일생속에는 회개가 없었습니 다. 죄를 회개함이 없었기 때문입니 다. 30절 읽어보겠습니다.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 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 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 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 면..뭐라고 했습니까? 회개할 것입 니다. 이사람은 지옥에 가서야 뒤늦 게 비로소 회개의 중요성을 깨닫습 니다.
누군가 가서 저사람에게 가서 외 쳐주면, 전해주면 회개할 지도 모릅 니다. 자기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 에 저곳에 가있다. 죄로부터 방향을 전환하고 돌이키는 것.회개없이는, 회개는 방향의 전환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 을 향해서 내 삶을 전환시키는 결단 이 없다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래요. 가만히 가다보면 지옥가는 것 이예요.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젊은 형제하나가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재미있는 전도지 하나 있 는데 보세요"전도지를 하나 가져왔 어요. 전도지의 제목이 뭐냐면
"당 신이 지옥에 가기 위해선 무엇을 해 야 하는가?"물음표예요.그리고 아 무것도 없어요."그래서 뭐 전도지가 이래?"
그랬더니
"목사님. 그 뒤를 보세요"뒤를 넘겨보니까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그게 대답 이예요.가만있으면 간다는 말이예 요. 가만있으면. 가만 있으면 여러 분의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은 지옥 이예요.내가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 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그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회개해야 합 니다. 그리고 회개와 함께 강조되야 될 한가지 사실이 있다면 믿음입니 다. 믿어야합니다. 저는 나사로가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간 것이 아니 라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합 니다.
믿었다는 증거가 뭐냐? 그의 이름이 그것을 증거해줘요. 나사로 의 뜻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다같이 말해보세 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그 가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그의 가난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예요. 그것 은 사실이예요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챤스가 더 적다고 저는 생각합 니다. 그건 사실이예요. 왜냐하면 부유하기 때문에 그는 부를 믿을 가 능성이 있어요. 자기의 재력을 믿고 재산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 을 가능성은 훨씬 더 많아요. 저는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갈 챤스는 확 률은 더 많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그는 주 앞에 달려 와 주를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하 나님.제가 믿을 곳 없어요. 제가 의 지할 곳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 님을 믿어요. 당신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하 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나사로는 그의 인생의 역경과 그의 인생의 불 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그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믿음 이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준 것이예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당연하죠.여러분. 자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부자는 세상에서 당당히 살았겠지만 은 부자의 이름조차 나와있지 않아 요.부자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name card 명함을 가지고 다녔을까 요?
이 세상에 살 때 아무도 나사로 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습 니다.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나사 로..나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가난 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경에도 불구 하고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 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 다.
하나님은 그를 아셨습니다. '영 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 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나중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 보면 성경책에 이런 선언이 나와요.
'누구든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불못에 던지울것이다. 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 하나님은 자 기 자녀들의 이름들을 기록하고 계 십니다. 그 자녀들을 아십니다. 나 사로. 그는 회개하고 예수믿고 하나 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그것이 영 원한 천국의 주인공이 되게 한 것입 니다.당신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기도하십시다.
잠시 조용히 머리숙여 기도하시 면서 묻습니다.
여러분 지금 죽으면 지금 바로 이순간 죽는다면 나는 천 국갈 확신이 있다. 한번 손들어보세 요. 내려보세요. 확신이 없는 분. 내가 지금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확 신이 없다. 그러나 갈 수가 있습니 다.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당 신도.하나님없이 살아왔던 삶. 그 삶 을 회개하고 이제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 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 니다.
목사님.저 오늘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 어요. 하는 분 오른손을 올렸다 내 려보세요.
제가 기도해드릴께요.
교회만 나왔다고 해서 저절로 천 당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회개하 고 정말 그리스도라는 분을 그리스 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손 올리신 분. 그 결심이 진실이라면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으세요. 그리 고 조용히 저를 따라 기도해보세요.
하나님.저를 용서해 주십시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 마음의 문을 엽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 흘리신 피로 저의 죄를 씻어주시옵소서. 부활하 신 예수님. 이제 제 맘에 오시옵소 서.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옵소서. 여러분. 오늘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 하신다면 이 기도는 여러분의 일생 에서 드릴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 도. 가장 중요한 결단.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지금 이순간 이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오시는 순 간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귀에는 아 무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이순간 예 수님이 마음속에 성령으로 찾아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십니다. 오늘은 여 러분의 생애에 최고의 날, 우리의 인생에서 많은 중요한 날이 있지만 이다음에 천국에 도착하면 돌이켜보 면.
오늘 여러분 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초청했습니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날입니 다. 영접하는 자,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 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 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하 니까 그런거지"
이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 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될 성경의 가장 중요 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 느냐,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이 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면 소위 불 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 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런 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 접하리라"
우리가 이 땅에서 만약 지혜롭게 살 수 있다면 어떤 축복이 약속되느 냐? 제가 이말의 뜻을 해석하는 것 이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그냥 지나가겠습니다.그 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속에 나타난 이 단어를 보세요.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 이다. 지금 이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 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 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을 보내게 될 장소. 이 세상의 짧은 시간이 끝 났을 때 우리가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그 영원한 상태는 어떤 곳일 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 16 장 19절이하에서 주님은 그 영원한 세계의 커튼을 조금 열고 그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세계 어떤 곳일까요?
첫째로, 그 영원한 세계의 상태 에 관해서 본문은 이런 것을 가르칩 니다.
그곳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즉시 로 가는 곳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소위 죽는 순간, 즉시로 가는 곳. 그것이 영원한 세계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 되는데요. 여기 보시면 '한 부자가 있어 ..'어떤 분들은 이 본문을 가리 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비유라는 얘기 없어요.
어쩌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케이스를 아셨다가 얘기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다고 저는 봐 요. 왜냐면 20절에 보시면 부자이름 은 안나와 있지만 부자와 함께 등장 하는 주인공인 거지의 경우에 이름 이 나와있죠. 이름이 뭐였습니까?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이름까지 명기한 것을 보아서 어쩌 면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 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데 22절 에 보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죽 었습니다. 보통 죽었다고 말하면 기 독교의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런 것 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
분리되서 어떻게 되는거예요? 영혼 과 육체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육체 는 흙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흙으 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어떻게 될까 요? 어떤 사람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저 상공을 space를 계속 떠 도는 것으로 구천을 우리의 영혼이 떠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 습니다.
소위 newage culture 뉴에 이지 문화가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즉시로 어딘 가로 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여기 23절에 보시면 부자는 어디로 갔습 니까? '
저가 음부에서..'음부라는 곳 으로 갔다. 이 음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라고 불리우는 곳입 니다.
하데스. Hades.하데스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 리고 있는 장소입니다.엄격하게 말 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 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 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본질적으로는
그리고 두번 째로 의식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는 우리들의 의식이 살아 있는 곳이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 이라고 있죠. 집에 열심히 찾아오 는 사람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 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 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 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 혼도 없어진다라고 가르칩니다.
그 러나 성경은 없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그 사실은 생 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자의 묘사, 죽은 후의 사후의 부 자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 니까? 본문 23절 같이 읽겠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 사로를 보고 자,음부에서 뭐라고 그 랬어요? 고통 중에. 그가 지금 고통 하고 있어요. 의식적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하고 있는 장소, 분명히 여기 의식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24절에 보시면 그가 이 고통의 장소에서, 음부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24절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여러분 무더운 여름철에 목 마름에 시달려 보셨습니까?
목마름 에. 목이 타는 고통, 물방울 하나를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고 고 통하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내세 는 무의식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 은 의식이 살아 있는 생생한 세계라 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악몽에 시달린 기억이 있습 니까? 악몽. 너무너무 괴로워서 소 리치고 싶은 악몽, 우리 마누라가 가끔 이상한 꿈을 잘 꾸고 소리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인생을 그렇 게 살지 말라고.
잘 때는 푹 자라 고, 늘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왜 그 렇게 이상한 꿈을 잘 꾸는 지 몰라 요. 꿈이니까 깨라고. 아, 꿈이냐 고. 일어 나서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습니다. 깨었으니 망정이지 깨이 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 분 깨어나지 않는 악몽 생각해 보세 요. 깨어나지 않는 고통의 악몽, 영 원히, 영원히, 영원히 지속되는 고 통스런 악몽, 깨어날 수 없는 악몽 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이 지옥입니다. 기 억이 살아있는 곳이예요.
반대로 나사로가 갔던 세계를 보십시오. 25절에 아브라함이 가로 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 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 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 서 무엇을 받고? 위로를 받고 반면 에 이 나사로는 위로를 경험하고 있 습니다.
위로를 경험한다는 말이 무 의식이 아니지요. 위로를 경험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 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품이라 는 말을 썼을까? . 마태복음 8장 11 절을 인용했습니다마는 이것을 어떤 성경 사본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 와 이렇게 표현된 것이 아니라,
천 국에서 기대어 누우려니와 그랬어 요. 기대어 누우려니와. 유대나라에 서는 사람들이 참 아픔이 있다가도 마음 속에 어떤 슬픔이 있다가도 그 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위로 가 운데 하나는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 아주 좋은 분,
스승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식탁의 자리에서도 이렇게 기대어 눕는 것이 전혀 실례가 아니 예요.
한국에서 그렇게 누웠다가는 호로자식이라고 부모들에게 야단맞 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유대 문화권 에서는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이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누워서 이렇게 기대요. 그러면 괜찮다, 괜찮다. 최 후의 만찬석상에서도 제자, 요한같 은 제자가 주님에게 이렇게 기대어 누웠어요.
그 어떤 위로를 받는 광 경.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마음에 어떤 아픈 일을 당했을 때 괜찮아, 안아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품에 안아줘요. 천국을 아 브라함의 품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신앙의 스승, 그분의 품에 안긴다. 우리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나 라. 이 말할 수 없는 위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영원한 세계의 특성이 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레오나르 도 다빈치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듯 잘 보낸 일생은 우리에게 편안 한 죽음의 침상을 마련할 수가 있 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폐 기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후의 우리 의식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세는 그 의식 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세번째로 영원한 세계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로 이루어져 있습니 다. 이미 벌써 간간이 언급했습니다 만은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 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 다.
자,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 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 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그리 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 움의 장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 에 막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가도 고 민이 어느정도 지나면 끝나니까
우 리가 생존이 가능하죠. 끝나지 않는 고민. 끝나지 않는 번민. 상상해 보 세요. 이 고통의 장소. 번민의 장 소. 25절에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거니와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 랬어요. 고민을 받느니라. 저는 이 고민이 단순히육체적 고민만이 아니 라고 합니다. 이미 육체적 고민 그 러나 이것은 정신적인 고민. 그리고 영적인 고뇌입니다. 끝없는 정신적 인 고통. 상상해 보세요.
이세상 후 에 사람들은 그냥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고선 마지막 생명을 끊는 사 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예요. 영원한 정신적인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사후의 모습 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부탁을 하나 합니다. 그것이 사후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부 탁을 하나 합니다.음부에 들어간 부 자가 부탁을 하죠. 28절에 보세요. 자, 아브라함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 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 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따라 서 하시기 바랍니다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이 전도 잔치를 배설한 이유중의 하나. 우리 가 주로 적극적인 것. 예수믿으면 평화. 예수믿으면 기쁨. 예수믿으면 구원. 적극적인 주제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은 이것을 역으로 거꾸로 정의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우리는 이미 고통의 부르짖음을 앓고 있습 니다. 어느날 우리는 이 소리를 토 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가끔 어떤 사람 예수 안 믿을 이유를 말 하는데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우리 부모님이 안믿으셨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나혼자 천국가겠느냐고. 차 라리 같이 가겠습니다. 이런 사람들 이 있어요. 아주 휴머니즘의 인간애 를 가진 소리같지만은 지금 이소리 가 무슨 소리냐면
아주 음부에 가있 는 지옥에 가있는 부자가 소리치는 겁니다. 뭐라고 소리칩니까? 내 형 제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는 이 곳에 왔거니와 내 사랑하는 형제들만은,내 사랑하는 부모들만 은, 내 사랑하는 후배들만은, 내 사 랑하는 친구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 게 하소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어 요.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꽃. 영원 한 목마름. 캄캄한 어두움.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통곡소리. 귀신 들로 가득찬 곳. 성경은 이것이 지 옥의 정체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분 이런 질문을 할지 몰라요."아니. 사 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그런 곳으로 보낼 수가 있습니까?"
잘들 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 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 을 위해 예비된 곳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 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 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 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 지막도 가 있는 것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입 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 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 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 다.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 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 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 마자 즉각적 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 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번째는 이것입니다.하나님이 달려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 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 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 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자, 여러분 어디로 가 기를 원하십니까?
천국입니까, 지옥 입니까, 둘중에 하나예요. 나사로 는 아마도 이땅에서는 어려운 삶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배불리 하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아먹었다. 얼마나 어려운 삶을 이 땅에서 살았 습니까? 그는 죽었을 때 아마 변변 한 장례식하나 지내지 못했을 것입 니다.
시청이나 구청에서 나와서 그 의 시체를 간단히 씌워갔을 것입니 다. 반대로 부자의 장례식. 아니, 부자의 삶자체가 호화로왔습니다. 그의 장례식도 호사로운 장례식이었 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그 순간. 상황은 역 전됩니다.한사람은 영원한 빛의 나 라에서 또 한사람은 캄캄한 헤어날 수 없는 어둠속으로 떨어집니다. 이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 천국과 지 옥.
당신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영원한 세계. 그곳은 한마디로 더 말하면. 네 번째로 영원한 세계는 어떤 곳이냐?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지옥 에서 천국으로 갈 수가 없구요. 천 국간 사람이 지옥으로 갈 수가 없어 요.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26절 보세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가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가는 것 아니예요. 뭐 그런 것 가르치는 종교가 있습니 다만은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다시는 그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사건이 일 어날 수 없다. 지금 여기가 중요합 니다.이순간이 중요해요. 이순간 어 떤 결단을 하는가? 이순간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그것이 영원한 상태와 영 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 다.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다.
죽는 그 순간은 이미 늦은 거예요. 이미 영원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가던가. 영원한 지 옥으로 가던가. 그순간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줄 아세요? 본문에 보면 사람이 죽는 그 순간 일어나는 다음 사건을 볼 수가 있어요.
22절에 보 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 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 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죽는 순간 누가 임했습니까? 천사들이 와 서 그의 영혼을 오늘 아브라함의 품 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올려갑니다.
천사들은 우리 영혼의 가이드. 이세 상에 살때도 하나님이 그를 보내서 그를 인도하셨다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영혼을 영원한 상태로 옮겨가 주십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할려고 하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오늘이 중요해 요.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내일 결 정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은 우리 의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 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아 있는 질문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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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것을 기억하라 /눅16:19-31/ 곽선희 목사
2014-11-25 04:47:17
금년 93세의 대학자이자 교수인 피터 드러커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경영학과 미래학의 대가입니다. 그의 신간 Next Society라고 하는 책 중에 이런 제목이 나옵니다.
'미리 가 본 미래' 라고 하는 논문의 제목이 나오는데 그 논문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미래를 미리 가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생기겠습니까? 미래는 반드시 현재로 다가옵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미래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현재는 반드시 과거의 뒷전으로 밀려갑니다. 그리고 미지의 불확실한 미래가 현재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운전을 하십니까? 운전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오로지 앞만 보아야 됩니다. 만일 뒤를 돌아본다면 결국은 미래가 망쳐지는 것입니다. 잘했어도 못했어도 지난 일은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께서 밭갈이하는 곳에 나가서 시중을 하고 도와 드렸는데 물론 제가 밭을 갈 만큼 그렇게 힘도 없고 경험도 없었지만 저를 가르치시려는 생각에서 언젠가는 한 번 보습 쟁기를 잡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소 두 마리가 끄는 보습을 손에 잡고 땅에다 대고 '이랴!' 했는데 아시는 대로 소걸음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는 참으로 천천히 걸어가지만 이렇게 보습을 잡고 보니 얼마나 빨리 가던지... 한참 하다가 내가 제대로 했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보습쟁기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 시간 저의 아버지께서 성경을 읽어 주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성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보습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합당치 않다. 여러분, 잘되었든 못되었든 과거는 과거입니다. 거기에 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생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라고 하는 소중한 선물, 소중한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각이 지혜요 생각이 행복이요 때로 생각이 잘못되면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지난 7월 18일날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세계적인 골퍼요 골프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잭 니클라우스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가 골프 레슨에서 말해주는 아주 지혜로운 말이 있습니다. 프로 골퍼와 아마추어 골퍼의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샷을 날릴 때를 보면 일반 골퍼도 아주 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 그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기억력이라는 것입니다. 전문가적인 골퍼는 한 번 골프채를 휘둘러도 잘했다 못했다를 생각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잘했는지를 꼭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문가가 못되는 일반적인 골퍼는 잘못되면 마누라 탓이요 기후가 어떻고 잔디가 어떻고 다 남의 책임으로 돌린다고 합니다. 한가지 더 있다면 재수가 없고, 뭐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골퍼이고 프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프로는 course management가 훌륭하다고 합니다. 내가 나가서 운동하게 될 이 골프장을 미리 답사를 하고 photograph memory, 사진을 찍듯이 골프장을 전부 살펴보고 머리에 환하게 기억을 하고 밤새 그것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 생각을 가지고 다음에 나가서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단히 말하면 프로 골퍼는 생각이 있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멍청하다 그런 말입니다. 생각이 없이 하는 일은 되는 일이 없습니다. 생각, 기억해야 됩니다. 현대인을 가리켜서 쿼터리즘이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쿼터리즘이라는 말은 짧게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책을 볼 때에도 한 페이지를 다 읽지 않습니다. 몇 줄을 보고는 알았다고 넘깁니다. 한 권의 책도 그저 몇 장을 넘기고는 다 안 것처럼 넘겨버리고 맙니다.
연애를 해도 옛날에는 1년 2년 심지어는 10년씩 길게길게 연애를 했지만 요새는 세 번 만나보면 끝난다고 합니다.
속전 속결입니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그리고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아도 한 테마를 설명하는 데에 옛날에는 한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15분, 이 quarter란 말이 1/4을 뜻하는 말입니다. 한 시간이 1/4로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은 quarterism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다 더 멀리 생각하는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큰 결점이올시다. 여러분, 반드시 다가오는 미래, 이 결정적 미래는 반드시 생각을 해야됩니다.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을 생각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생각이란 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후회라고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지나간 다음에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미래는 더더욱 없고 꼭 지나간 다음에야 '그랬으면 좋았을 걸, 그랬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지나간 다음에야 생각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건을 사오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물건 사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하는데 꼭 사 가지고 와서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 바꿔온 후에 또 후회를 합니다.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산 다음에는 생각하지를 말아야지 그것을 가지고 와서 또 무르자 또 바꾸자하면 그것은 사람이 처절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이 뒤에 가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자꾸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을 하는 겁니다.
제가 이 후회라고 하는 말을 생각하면 꼭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고 하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인데 저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했던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고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죽었다가 혼령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혼령이 슬피 울면서 울부짖습니다. 울부짖는 제목이 무엇인가 하면, "Why didn't you tell me?; 왜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다고 왜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제가 알았다면 제가 왜 예수를 팔았겠습니까?" 이렇게 슬피 웁니다. 저주받은 영혼이 울부짖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후회입니다. 지나간 다음에 뉘우쳐도 도리가 없습니다.
후회라는 고통은 인간이 겪는 가장 무거운 구제 받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후회입니다. 또 하나는 현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생각은 현재에 있는 것이고 또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고 기뻐하는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전망입니다. Perspective,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망이올시다. 저희 교회 이름이 소망교회 아닙니까? 중국에 갔을 때에 소망교회라고 말을 했더니 중국사람들이 못 알아들었습니다.
중국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없고 희망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우리가 중국사람한테 배운 것인데 왜 없냐고 그랬더니 학자인 장관, 우리가 부장이라고 하죠, 장관되는 분이 제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전엔 소망이라고 했는데 요새는 희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소망이 좋은 것입니다. 소망은 바라는 바입니다. 바라는 바. 그러나 희망은 내가 생각하는 소원일 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주관적이고 소망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소망교회, 이름 참 잘 지은 것입니다.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에 소망교회라고 짓자고 했더니 마음에 안 드는지 임시로 그렇게 하자고 했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금 25년이 된 것입니다. 좌우간 이름을 얼마나 잘 지었나 보세요. 서울 안에 소망교회가 30개가 넘습니다.
좋으니까 따라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왜요? 소망이거든. 결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망! 소망이라고 하는 생각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향락, 요새 말로 날마다 파티, 댄스파티만 했대요. 날마다 enjoy 했다. 그런데 거지는 여기에 보니까 나사로 라는 거지는 몸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얻어먹는 처지라 부잣집에서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개가 와서 상처를 핥았다. 그 말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을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라"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간단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둘 다 죽었다,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죽고 잘살아봐도 죽고 못살아봐도 죽고 행복하다고 해봐도 임시요 고통 당해봐도 죽으면 그만이니까 임시적인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같이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안 죽으려고 몸부림을 치더만요. 여러분 어떤 때에라도 병에 걸리거나 중요한 병에 걸렸으면요 의사가 좀 힘들어 하거든 '그냥 갑시다' 그러세요. 자꾸 살려달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거 보기 흉하더라구요. 사람 인격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갈 때 가는 것이지 뭘 그렇게 야단스럽습니까? 여러분, 안 죽으려고 노력하지 마시고 잘 죽으려고 하십시오. 또 하나는 안 늙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안 늙어 보려고 요즘에는 화로 앞에 앉아 있기도 하고, 마사지도 하고 수술도 하고 야단을 하는데 안 늙으려 한다고 안 늙습니까?
곱게 늙으세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은 점점 젊어져요." 그래서 "거짓말도 정도 있게 하세요" 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어떻게 젊어집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습니다.
늙을 생각을 하십시오. 단, 좋게 늙으십시오. 발악을 하지 말고 좀 예쁘게 늙으십시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남기려고 합니다. 죽으면서 남기긴 무엇을 남긴다는 말입니까? 기념사업이라나. 어떤 장로님들은 저보고 "목사님께서 40년 목회를 하셔서 기념사업을 해야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립니다. 절대 안합니다. 기념사업은 무슨 기념사업입니까?
다음 일은 다음 사람이 하라고 하십시오. 내가 하던 일을 거기까지 물려갈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기념사업처럼 맹랑한 것이 없습니다. 기념비를 세우지 말아라. 이것은 성경이 주는 교훈입니다.
사울왕이 이것을 세웠다가 망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기억하려합니까? 아니, 지금도 시원찮은 사람이 무슨 다음 세대까지 기억이 되려고 합니까? 그냥 깨끗하게 가십시오. 무엇을 남기십니까?
제가 우리 교회 묘지에 어떤 사람이 "비석 뒤에 이름 좀 쓰면 안될까요?"라고 해서 "왜? 꼭 써야 하겠습니까?" 가만히 있더니 "그만 두죠." 쓰면 무엇을 하고 안 쓰면 무엇을 합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하십시오.
오늘 성경에 예수님 말씀이 '이것을 기억하라' 둘 다 죽었다는 말씀이십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부자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현세에 산 그 생활대로 내세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말합니다. '지옥과 천당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있다 없다 시비에 앞서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는 모순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조리도 많고 모순도 많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없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거기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주제가 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가 평가되느냐는 것입니다. 잘살고 의롭고 깨끗하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선한 일 많이 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기준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자가 어떻게 돈을 벌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부정 축적을 했는지 못할 짓을 했는지 율법을 지켰는지 지키지 아니하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고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야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남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오직 긍휼,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이것은 수직적인 마음이요 위에서 내려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닮은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비유를 아시지요. 여기에 불한당을 만난 사람이 여리고의 길에 누워있었다.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사람이 지나가고. 바빠서 갔겠지만 문제는 제사장, 레위사람 그 사람들이 얼마나 깨끗한지 의로운지를 묻지 않습니다.
단, 긍휼이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윌리엄 바클리(William Barclay)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The mind of Jesus'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죄는 오직 하나! 긍휼뿐이다."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의라는 것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단,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 하나를 묻고 계신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죽어 가는 사람보고 그냥 지나가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살인을 했느냐 간음을 했느냐 묻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부자가 저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때 가서 뉘우쳤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러나 때는 지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긍휼이란 때가 있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베풀어야 할 시간에 베풀지 않으면 베풀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야 할 시간에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불쌍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사할 때에 "안녕하십니까"도 하고 "Good morning" 하기도 하고 그리고 요즘에는 "좋은 아침입니다" 등 좋은 인사가 많지만 수도사들은 그렇게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Memento mori." Memento는 기억하라, 생각하라. Mori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라. 오늘이 네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항상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해준 복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거지 나사로는 복된 사람입니다. 부자는 불행한 사람이더라구요.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앞에 가서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은 위로를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았더라도 하늘나라에 가서 버림을 받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끓어오를 때 이것을 배반하지 마십시오. 배반하고 나면 잠 못 잡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불쌍히 여길 때에 힘에 넘치도록 한 번 긍휼을 베풀어 보십시오. 불쌍히 여겨요. 베풀어주고 나면 여러분의 마음이 밝아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 행복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오직 긍휼만이 영생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요 오늘을 사는 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오늘이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다시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게 하사 긍휼하심을 힘입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불쌍히 여겨야 할 시간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거절하지 않게 하옵소서. 말만 하는 저희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긍휼하심을 실천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한 길을 갈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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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야할 기가막힌 운명 /눅16:19-31/ 옥한흠목사
2014-11-11 13:44:44
(눅 16: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의 설명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사로의 이름이 나와 있으나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자의 이름은 '다이브스'라고 합니다. 본문은 다이브스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그 삶의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뒷골목 빈민굴에 가보면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고 합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나라에도 거지는 존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부자 다이브스는 돈이 많은 사람을 대표하기보다는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게 죄가 아닙니다. 다이브스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을 인하여 더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과거에는 옷으로 나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곧 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조금 있으면 겨울이 다가옵니다. 우리나라 부자들 가운데 한국은 겨울에 추우니까 미국 하와이에 가서 지내고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철새처럼 더위와 추위를 피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안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많이 가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평생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이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소유한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뱀,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이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70 이후에는 너무 그렇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늙어 눈치보며 오래 살면 또 무엇 하겠습니까? 남에게 피해주며 오래 살 필요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므로 성실하게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둘째는 육신적 죽음입니다. 세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죽은 존재는 잊혀진 존재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불신자들은 지옥에 대하여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기 위안을 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입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열 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사실에 주의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옥은 참혹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말도록 이웃과 어린 자녀와 그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옥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지옥은 무서운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불꽃 가운데서 사정없이 고통받는 곳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의 불은 육체가 타는 곳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알지 못하는 불에 타는 곳이라서 그것이 육신이 타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제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셨습니다.
②지옥은 기도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물 한 방울의 자비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불신자에게도 비를 주시고 땅의 열매를 주시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③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람에게 비교의 고통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눈 앞에 밝히 천국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남과 비교할 때 더욱 큰 괴로움입니다.
④지옥은 무섭게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무디라는 미국의 의학자는 어떤 사고를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한 내용을 '죽음 이후'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에서 죽음 이후의 경험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좁고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억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다 알게 되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이 작품 '리챠드 3세'라는 책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달린 수 십, 수 백 개의 혓바닥들이 쉬지않고 지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⑤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자기 운명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사람들, 세상 낙에 빠진 사람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눈이 먼 사람들, 여기 본문 속에 부자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낙에 빠져 있는 사람들아 정신 차려라.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 하십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왜 부모가 자녀 교육을 할 때 때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초리를 예비시켜 놓고 교육합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적당히 넘기실 수 없습니다. 죄를 공의롭게 처리하십니다.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하시는데 그것이 죽음 곧 영원한 죽음,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른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가 지옥에 가면 당할 고통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그가 십자가에서 친히 다 담당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살리신 다음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의 행복과 기쁨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불신자를 부르셨습니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 자식을 바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운명을 예수님께서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가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자격자이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외치십니다. "부자야! 가난한 자야! 왜 계속 그리로만 가는가. 나 예수를 믿으라!" 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 요구를 거절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이 시간에는 내 얼마나 지식이 많은 사람인가 하는 사실을 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돈이 많은 사람인가를 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건강한 사람인가를 잊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 지구상의 13억 인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성경책이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년 6억권 이상이 팔리는 책이 성경입니다.
죽는 것은 어길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 길 중에 한 길은 분명히 가서는 안될 길입니다. 지옥을 피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너무나 쉬운 길을 알면서도 거절하면 되겠습니까?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에 놓인 우리 운명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죽음이 따라올 때 그 때는 기회가 없습니다. 가서는 안될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왜 이웃을 하나님이 내게 보냈을까요? 왜 전화를 하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괴롭히는 것일까요? 가는 길이 너무나 가서는 안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일학교 어린이를 통해서, 이웃을 동원해서, 사건들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강원도에 황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탄공촌이 있는 곳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막바지 인생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택시운전이라고 합니다. 택시 운전 중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한데 직업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숨걸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인생들은 수천 미터 지하에 들어가 40℃가 넘는 곳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그 안에서 먹고 일하면 탄가루가 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폐가 굳어지는데 그 병이 구폐증입니다.
나중에는 폐인으로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게 됩니다. 구폐증은 아무리 현대 의술이 발달했어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막장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기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어느 광부의 아들이 쓴 시(詩)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 하니까 나도 커서 광부가 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광부는 절대로 되지 말라 하신다.
왜 아버지가 한사코 말린 것일까요? 광부의 생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한사코 지옥에 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지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 가지고 오라는 것 아닙니다. 지옥에는 제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잃고도 선택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사람의 풍요가 있습니다. 예수로만 살아가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