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 설교 모음
나는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눅19:1-/ 이동원목사
2014-12-04 11:07:39
제가 20대 초였습니다. 조금씩 철이 들고, 인생이 진지해지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그런 질문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변할 수가 있나? 내가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약점을 발견할 때 마다 이 질문은 늘 절 다시 괴롭힙니다. 나는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연말이 되면 새해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결심을 하죠. 내가 좀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이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해의 한 주간이 흘러가게 되면 마치 이 속담을 입증하듯, 작심삼일이라는 속담을 입증하듯 새해의 결심이 다시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옛날의 내 모습으로 다시 내 삶이 돌아올 때 마다 이 질문은 다시 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가 있나?
나는 정말 변할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무렵 저는 제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서 선교사님을 모시고 성경 공부하는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 모인 20,30명 남짓한 사람들은 성경을 가운데 열고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열띤 토론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성경 말씀이 누가복음 19장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교회 처음 나온 저는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도 예수 믿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던 저에게는 매우 생소했던 이야기.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야기. 삭개오라는 인물이 예수님 만나고 변화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거기 모인 내 또래의 사람들은 삭개오의 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얘기를 하면서 쭉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나도 변했다고. 삭개오처럼 나도 인생이 변화되었다. 그 중에는 제가 잘 아는 저의 친구 두, 세사람도 섞여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들의 얘기가 사실 그대로 정말 저들이 변해버린, 변화의 이야기라면, 나도 변할지 몰라. 어쩌면 나도 변할 수가 있을 거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변화의 희망을 걸었던 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우선 우리는 이 사람의 정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누구였는가? 그리고 둘째로 그를 변화시켰던 기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를 변화시켰던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기회. 그리고 세번째로 그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삭개오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성경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이 먼저 삭개오였다고 말합니다. 삭개오. 삭개오라는 이름이 먼저 알고 보니까 청결하다는 뜻이예요. Clean 청결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날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죄인의 집에 예수가 들어갔다. 청결하다는 이름의 뜻과 달리, 그는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까요.
꼭 제 얘기 같군요. 저도 아주 이름은 괜찮습니다. 제 이름으로 말하면 저희 어머니가 제 아버님이 무여독남 외아들이신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니까
귀한 집 자식이었죠.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막대한 요금을 지불하고 서울 시내에 이름을 제일 잘 짓는 사람 집에 가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제 이름을 지어 가지고 오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시원찮은 행동을 할 때마다, 이놈아 네 이름은 비싼 이름이야.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니? 이동원. 동녘 동자, 으뜸 원자. 동쪽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야. 근데 저는 이름하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대. 우리가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자라나고 있잖아요.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아 주시고, 네게 좋은 이름을 붙여 주시면서, 좋은 인생을 살라고 주신 이름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기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회적 기대를 미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열등감을 저마다 다 갖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금을 거두고 다니는 사람들의 권력은 대단하죠. 장사하시는 분들 세금처리 되거나, 세금 국세청에서 조사 나오시면,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권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 권력은 사람들이 탐하는 것인지요. 권력. 니체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의지가 권력에 대한 의지다. Will to Power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은 정치인들만이 탐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집안에서 고부 싸움이 한창일 때, 거기에도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곳간 열쇠를 쥐는야. 이것도 권력에 대한 싸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권력에 대한 사모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장이니까! 그런데 권력이 이 사람을 행복하게 못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낯선 사람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또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랬습니다. 부자라. 부자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부자. 부자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십니까? 증권투자도 하고, 오르락, 내리락 증권에 얼마나 신경을 쓰십니까?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있다면 만물일 것입니다. 돈 입니다.
어떤 청년들이 모여서 지도자와 대화를 하면서, 서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청, 지도자가 질문을 던지기를 너희들은 인생을 사는데 뭐가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아마 남자들만 모였던 모양이예요.
한 청년이 대답하기를 뭐니 뭐니해도 머니죠. 돈이죠. 옆에 사람한테 물어봐죠. 옆에 사람 , 저는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여자. 저에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과 여자가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대답하기를 그러면 돈, 여자를 가져 가라. 돈도 필요하고 여자도 필요하다면 돈, 여자를 가져가라.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이 사람은 부자였어요. 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돈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어요. 돈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인생의 목적을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죽음 건너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부자를 20분동안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일본에 암 수술을 받으러 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을 떠나 가셨습니다. 한국인의 부자의 대명사. 제가 그분을 만나면 이 질문을 오랫동안 묻고 싶었습니다. 제 가슴에 묻어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회장님 평안하세요? 근데 저는 이분의 뜻밖의 의외의 대답을 오랜 시간이 지나간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할 거예요. 아니 제가 살아 있는 한 잊어버리지 못할 겁니다.
평안이라니,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한국의 제일가는 부자의 대답이었어요. 제가 이 분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어요. 예수님, 하나님, 제가 이분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권력도 부요함도 있었고, 또, 이런 사회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문제를 끌어안고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분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 기회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저 갈리리에서 요단강 저 동편의 데가볼리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변했다고 사람들이 소리치며 그를 따라다니는 저 예수. 예수가 우리 동네에 와서 우리 곁에 지나가신다.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면서,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재산을 탕진했지마는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 병 때문에 인생에 대한 절망 속에 살던 한 여인이 지나가는 나사렛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자기 병이 순식간에 치료되었다고 소문난 치료자 예수, Healer Jesus! 예수가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가신다. 기회였습니다. 기회.
제가 지난 주일 저녁에 유승준을 만났습니다. 유승준. 온누리 교회에 갔다가 유승준이하고 한 15분 같이 차 마시면서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이 좋아요 그러더라구요
. 너 그 마음 변하면 안돼. 인기가 너에게 그런 진정한 삶을 줄 수가 없어. 같이 기도해 줬어요. 돈으로 인기로 살 수가 없었던 인생의 의미,
그런데 그런 인생의 의미에 굶주리고 있었던 삭개오에게 놀라운 기회, 천재일우의 기회. 놓칠 수 없는 기회. 기회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기회는 인생의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그랬습니다. 기회.
누군가가 기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 희랍에,그리스에 시락쿠스라는 거리에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 동상은, 그 동상은 날개가 있는데, 날개가 어깨 죽지에 와서 달린 것이 아니라, 발에 가서 달려있어요.
그리고 앞머리는 아주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고 사람이 머리 벗어지는 것도 여러가지죠. 어떤 사람은 뱅뱅 돌아가면서 머리가 벗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운데만 쏙 빠지시는 분이 있습니다.
속알머리가 없는 분이죠. 어떤 사람은 아무데나 빠집니다. 버르장 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분은 앞에 앞에 머리가 이렇게 많아. 뒤에 머리가 없고, 이 동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Appotunity 기회. 기회. 그대는 왜 날개를 발에 달고 있는가? 더 빨리 빨리, 빨리 날으고 싶어서. 걷고 싶어서. 그대의 앞머리는 왜 이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쉽게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다시는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회는 그런 것입니다. 기회. 놀라운 기회. 예수가 지나가신다. 구원자 예수. 치료자 예수. 그를 만난 사람들마다 이상하게 인생이 바뀌었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가 있다고. 인생의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 놀라운 예수. 예수가 지나가신다. 놀라운 기회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왜 지나가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 얘기를 읽으면 성경의 이야기로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자기 권력과 자기 명예와 자기의 부를 가지고도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고. 그래서 예수를 기다리는 얘기라고.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한참동안 읽다보면 결론이 바뀝니다.
왜냐면요, 삭개오가 이렇게 아마도 이 사람은 키가 작았어요. 키가 작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들끓고 있었고, 그 군중 Crowd 속에서 키 작은 삭개오가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만나야만 했었습니다.
만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것을 구도의 갈증이라고 합니다. 구도의 열망.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만나고자,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리장이 세무서장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만나야 겠다.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반드시 만나야 겠다. 내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죠.
근데 얘기를 읽다보면 성경 이야기는 이렇게 변합니다. 아마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예수님이 내 앞에 지나가봐라, 소리칠거야. 예수님. 그냥 이렇게 부르면 실례일거야. 앞에다 뭐라고 붙여야지. 인류의 위대한 스승 예수여.
그 말은 좀 형식적인가, 나사렛 예수여,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천하게 부르는 용어야. 어떻게 부를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부를까. 아니면 위대한 휴머니티안 예수여. 한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앞에 딱 뽕나무 앞에 오더니, 삭개오가 부르기 전에 삭개오를 올려다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어. 이때 삭개오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저분이 내 이름을 알아. 나를 만나지도 않고 나를 이름을 부르는 저 예수. 예수는 누굴까? 아마 우리 자매님 같으면 어머 하고 놀랐겠죠. 어떻게 알아 저분이 내 이름을. 저는 성경을 읽다가 늘 저를 감동시키는 부분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마리아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자, 욕심 많았던 여자. 그래서 이름도 막 달라 마리아. 막 달라 마리야. 그래도 그 욕심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여자.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주시고, 성녀로 바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모른 체 동산에 묻혀있는 줄 알고, 예수님이 묻히신 동산에 올랐던 이 여인. 새벽이었는데, 동산 관리하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어디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야, 깜짝 놀라 보았어요.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죽은줄 알았던 예수의 음성.. 마리아야, 삭개오야, 나사로야,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예수, 그는 우리를 60억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인류 덩어리로 취급하지않고, 우리 개인개인을 알고 이해하고 찾아오십니다.
나의 좌절을 이해하시고, 나의 고독을 이해하시고, 나의 방황을 이해하시고, 나의 삶의 그런 슬픔을 이해하시고, 내 인생의 벽 같은 인생의 삶의 벽 앞에서 나갈 길이 없는 출구가 없는 벽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내 모습,
내 답답한 내 모습을 아시는 그 예수. 찾아와서 그는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빨리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와.
자, 여기쯤 읽으면 우리가 이 이야기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예요.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아마 이런 생각도 했을지 몰라요.
나도 예수라는 분을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싶어 하시는 것 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분의 미션을 그분의 사명을 설명하는 놀라운 대목마다 이런 말씀이 반복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이 대목마다 인자가 온 것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삭개오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동네까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삭개오를 찾으시던 주님은 오늘 이 밤에 당신을 찾습니다. 여러분을 찾습니다. 친구들에게 초대받아 오셨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초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잃어버려다구요. 그렇습니다.
대답해 보실까요. 여러분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어디입니까? 살다가 살다가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래서 인생은 방황이 아닙니까.
인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60억의 인구 가운데 인류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란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나를 아시는 분. 나를 이름으로 아시고, 나의 좌절과 내 눈물과 내 고독과 내 갈등을 이해하시며 내가 살아온 인생의 History와 나의 Carrier를 아시고 내 모든 삶의 발자취를 기억하시고,
아시는 그분.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 하시는 그 분.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오늘밤 당신 곁에 조용히 그분은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이 기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삭개오 곁에 지나가고 있었어요.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삭개오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었습니다. 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이리 내려 오너라. 삭개오야 이리 내려오라고. 근데 성경에 보시면 삭개오가 어떻게 응답을 했습니까? 6절에 보시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삭개오는 이렇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다시 한번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자, 삭개오는 어떻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예수님도 급하고, 삭개오도 급하십니다.
꼭 한국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다 급한 사람들 아닙니까? 바쁜 사람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의 결단도 그렇게 급하게 하실수록 좋아요. 신앙의 결단도 급할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급한데 신앙만은 자꾸 급하지 않게 미뤄 두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그래서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고,
바로 지금이 구원 받아아 할 시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급할수록 좋아요.
어떤 빵집 운영하는 사람이 하도 가게가 안되니까, 꾀를 짜내서 이렇게 빵집 앞에 광고를 붙여 놓았습니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리겠습니다. IQ 낮은 멍청한 사람이 그 이튿날 와서 저 빵 거저 먹으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빵집 주인이 다시 읽어 보십시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립니다. 아니 어저께도 내일이었습니다만, 우리집 표어는 그 날, 그 날 유효합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다시 우리들에게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바로 지금이 구원 받을 만한 시간이예요.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집에 영접한 거예요.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모셔드리면서,
이미 삭개오라는 사람은 자기 전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자기의 마음속으로, 자기의 영혼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집에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그러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떤 목사님이 교인 한 분이 교회에 나왔다, 안 나왔다. 그러시는 분이 있어요. 신앙이 참 신앙이 없으니까, 가끔 나왔다, 안 나왔다. 그래서 한번은 찾아 갔었요. 전화 걸어도 안되고, 밤에 가면 있겠지, 밤중에 아파트로 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개 목삽니다라고 문을 두드리니까, 목사님 음성을 듣자 마자, 갑자기 조용해 지더래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러니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이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성경구절을 하나 써놓았어요. 요한 계시록 3장 20절. 나중에 목사님 가시고 난 다음에 그 분이 문 열고 보니까 쪽지 하나가 있단 말이죠.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게 뭘까. 성경을 찾아보았어요.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좀 미안했겠죠.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교회에 갔어요
그래도 차마 목사님 뵙기는 어색하고 그래서 목사님 사무실에다 이 교인이 쪽지 하나를 남겨놓고 갔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도 오늘 교회 다녀갑니다. 그 아래에다 창세기 3장 10절 그랬대요. 목사님도 희한하거든요. 교회는 가끔 나오는데 어떻게 창세기 3장 10절을 다 알까. 그래서 뭔가 목사님도 찾아 보았더니,
창세기 3장 10절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문을 두드리시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내 마음속에 찾아오시겠다고,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예수님. 우리 박광현 형제가 Nock. Nock. Nock.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했어요.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겠다.
삭개오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가정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이 집에 오시자 마자,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업 잘한 사업가가 자기 재산의 한 4분의 1 정도를 환원하는 것은 훌륭한 사업가의 윤리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4분의 1 정도가 아니라,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변한 거죠. 이 사람은 굉장히 변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너 재산 절반 나눠.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 뭐 이렇게 소위 도덕적인 설교를 한 것이 아니예요.
너 이제부터 착한 사람 돼야 돼. 이런 말씀하신 것이 아니예요. 이런 도덕적인 윤리를 설교하지 않았는데도, 이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생을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변한 것 아니예요. 무엇이 변화시켰을까요. 무엇이. 도덕이 변화시킨 것 아니예요. 도덕이.
여러분, 기독교는 도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적 종교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기독교가 부도덕한 종교라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도덕이 포함되어 있지만 기독교의 수준은 도덕의 수준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나갈 때, 기독교와 도덕이 비슷한 것으로 알았어요.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것 아니예요.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니예요. 모든 종교마다 선을 가르치는 것 아니예요. 그런데 성경을 공부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 제가 3년 동안 왔다 갔다 했는데, 교회를 그냥. 처음에 나가서 3년 동안은 그냥 왔다 갔다 그랬어요. 그런 어느 날 갈라디아서라는 성경을 공부하다가, 우리 교회 나가는 사람들의 말로 말하면 제가 깨졌습니다. 깨졌어요.
갈라디아서 2장 마지막절에서 우리가 이런 말씀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바울이라는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을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잘 이해가 안가더라구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가능하다면, 예수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잘 이해가 안가시죠. 저도 잘 이해가 안갔으니까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덕이라는 단어하고 성경에서 젤 비슷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율법이라는 말이예요. 율법. 왜냐하면, 율법은 많은 계명으로 이루어 진 것이 율법인데, 결국 율법은 두가지 이거든요.
두가지 예요. 아주 짤막하게 요약하면 두가지예요. 하라, 하지말라. 뭘 하라. 여호와를 공경하라. 하나님만 섬기라. 안식일을 지켜라. 뭐 하라,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하라. 하지말라 두가지. 근데 이 말씀의 뜻이 뭐냐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네 행동이 합격, 의롭다. 합격 받을 수가 있다면 예수는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다.
십자가에 갈 필요도 없었고,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다. 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라는 질문이 제 마음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그 말씀의 뜻을 더 생각하다가, 제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 누구나 도덕을 추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은 아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성경 조금 공부해 보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나는 다 했더라구요.
하지 말라는 것 이미 했어요. 성경에 보면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했다. 미움은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 살인의 시작이래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 음욕은 간음의 동기가 아니라 간음의 시작이래요.
나는 간음한 사람이예요. 나는 살인한 사람이예요. 나는 율법을 지켜야 할 자가 아니라, 이미 율법을 깨트렸어요. 그러니까 죄인이죠. 율법을 깨트렸고,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어요.
나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더라구요. 노력해도 발버둥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사람. 그래서 내 행동으로는 내 최선을 다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될 수가 없는 자,
그러나 이걸 깨닫는 그 순간, 그 순간 저에게 또 하나 깨달아진게 있어요. 맞아 내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도 내가 나를 고칠 수가 없고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거야. 예수는 나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신거야. 그 예수 믿으면 내가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는 거야. 갑자기 십자가의 사건이 제 마음속에서 깨달아 지더라구요. 아~~ 예수님이 그래서 오셨구나. 내가 나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물속에서 나를 스스로 구할 수가 있다면 구원자가 필요가 없어요. 근데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시고, 그는 죄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붉은 피를 철철 떨구시면서 나를 믿기만 하라.
네가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인 것입니다. Good News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자 마자 그래서 삭개오가 이 변화된 모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그 말을 바꾸면 이런 얘깁니다. 오늘 네가 구원을 받았고, 오늘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의 딸이야. 네가 죄 용서받고 하나님이 아들과 딸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수가 있다.
삭개오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삭개오가 한 결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있다면 오늘 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이 자리를 떠나 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조용히 머리 숙여서 기도하는 이 시간에 제가 초청 받으신 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또 교회 그 동안 계속 나왔지마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실 수가 없었던 분들도 포함됩니다.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저도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정말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싶어요. 저도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변화되고 싶어요. 이런 마음이 생기시면 한번 손 올렸다 내려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손 번쩍이요. 네. 네. 네. 괜찮아요. 아주 부끄러운 손 아니거든요. 아주 거룩한 손, 아름다운 손. 결심의 손. 번쩍 다시 한번 올려주세요. 손 번쩍 괜찮아요. 괜찮아요. 번쩍 올리시고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서, 괜찮아요. 우리 많이 일어나, 다 일어나서요. 괜찮아요. 우리 많은 분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결심한 분들은 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자 다 일어나 주시고,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 오늘밤 우리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 잔치를 열었어요. 여러분이 저희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오늘 이 잔치를 열었거든요. 자, 일어서신 분들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먼저. 저를 따라서. 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의 기도와 같다면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아직 결심하지 않은 분도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괜찮아요.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우리 일어나서 저와 같이 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기도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같이 기도하고 싶으신 분 따라서 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다른 우리 성도들도 같이 기도를 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성도님도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 앞에 와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변화되고 싶습니다.
구원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제 마음속에 오시옵소서.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밤 이웃 초청 생명의 잔치 첫날밤, 우리 많은 이웃들이 이렇게 주님앞에 나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기쁘시죠.
이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안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모든 죄가 다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졌다고, 말씀해 주시옵소서. 저들이 이제 용서받은 자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확증시켜 주시옵소서
. 이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마음속에 모든 의심은 다 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주님을 높여 드리며, 주님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저들을 축복합니다. 저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이 사람의 감사 /눅19:1-10/ 곽선희 목사
2014-11-21 07:29:35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백열명으로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다 죽었습니다.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죽고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이만큼 건강을 지킨 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또한 음식으로 말하면 Plymouth 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했지만 낯선 땅에 아무 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으로,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이 음식을 놓고,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가서 지내면 Thanksgiving 이 때쯤 되면은요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더라구요. 그래 나도 나만 그런가 해서 물어봤어요. 미국 학생들한테 "너희들 칠면조 맛있냐?" 그러니까 맛없데요.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 내가 여러 사람한테 물어 봤어요.
"아 거 닭이 맛있지."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 거라 그래요.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눈물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Courage to Be 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 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이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구요? 끝없는 욕심 때문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는 못 살아요. 또 교만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은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을 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가진 독특한 성격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세리장입니다. 로마 사람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를 떠나서 살 수 없구요. 로마를 피해서 살 수가 없어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에 유대나라 역시 로마 권력 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이요.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실세올시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로마를 대표한 총독 이하 군인들은 이 세리장 같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정치도 못합니다.
로마 세력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리장이라는 이 사람은 부자요. 누구든지 어느 군인이든지 마을에 들어서면 세리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있어요. 왜요? 그는 실세요 그는 부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권력자하고 친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세리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권력 있죠. 부귀하죠. 돈 있지요.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구요.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또 그리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만한 고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름의 독특한 의식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현실대로는 안 된다는 거야. 이대로 세상이 오래갈 수는 없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왜요? 그는 소문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태입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어떤 분이면 저렇게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는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삼은 그 사람이 누구냐?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그분이 누구냐고. 그런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도 세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어요. 많은 사람이 옹위해가지고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는 뭐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는 이 은총적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요. 이 한 번 있는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가 기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우러러보시고" 그랬어요. 쳐다보았어요. 오히려 이상하게 됐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게 됐지요. 보셨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ersonally,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거예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이게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에요. 지명하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신거예요. 삭개오를 보신 거예요. 즉 나를 보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주고받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왜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다 아셨어요.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이만하면 알지. 충분히 알았죠. 예수님은 삭게오의 마음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그의 말을 통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깊은 고민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하고 있는 거예요.
또 한가지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기에 긴긴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할 것이라. 세리의 집입니다. 온 유대 사람이 상종하지도 않고 인사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답니다.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렸답니다. 이렇게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은 오늘 밤 너희 집에서 자겠다. 원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가장 큰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물질을 주시는 분입니까? 내게 지식을 주는 분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 의인이 죄인의 집에 오시고 메시아가 죄인의 집에 오심으로써 그의 신분을 바꾸어 놓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요.
이조 시대에 있었던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같이 몰래 도망을 해서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촌부의 집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점잖은 어른들이 몇일 유하시겠다고 해서 그대로 묻지도 않고 정성껏 참 잘 대접을 했더랍니다. 대접을 받고 왕은 상황이 바뀌어서 환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다음에 생각하니 그 촌부가 너무 고마워요. 이 난리를 피하게 해 주었느니 말이요.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아 불러들이고 보니까 아이고, 이서방이라고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체 높은 왕이에요. 그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으니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게. 딱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마." 뭐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 그럴 때 이 천부는 "아니에요.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 되는데 애들과 함께 환갑 잔치를 하게 되는데 환갑잔치에 한 번 저희 집에 와 주시지요." 이제 왕이 거절하게 됐습니까? "그러지." 왕이 천부의 환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요새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요,
얼마나 많은 뇌물이 들어왔는지 그냥그냥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우리 집에 한 번 오신다.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냐?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내 의가 달라지는 것, 사람이 달라지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완전한 의롭다함을 얻는 엄청난 복을 내리십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사람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첫째가 "즐거워했다" 그랬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죠. 감사, 기쁨. 그 기쁨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족한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접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영접하고.
또 하나는 마음이 열렸습니다. 당장 입이 터졌어요. 마음이 열리면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삭게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돕는 분이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내 재산 절반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라고 마음이 열립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Think, Thank 라는 말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 못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에요.
어떤 식물인간 된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십년 동안을 시중을 해도 아무 보답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없어요.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이렇게 말하더만요. 눈을 한 번 뜨고
"여보 고맙소" 딱 한마디만 하는 것을 들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어요. 반응이 없어요. 말이 없어요. 느낌이 없어요. 깨달음이 없어요. 이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지요. 감사하는 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 깨달음 속에 있어요.
인간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삶에 도리를 알면 유교인입니다.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오직 은혜를,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인이요, 신앙인 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특별히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하는 실천상황이 여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 이것이 감사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깊이깊이깊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감격하고 이 감격한 마음을 행동에 옮겨 보세요. 이제부터 새로운 삭개오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것은 죤 뉴우톤(John Newton)이라고 하는 분이 본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극악한 사람이었는데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 감격 감격합니다. 그 감격으로 주를 찬양하며 피곤없이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성공이 뭐겠습니까?
감사하는 것이 성공이요 기뻐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종은 울려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그 마음에 벅찬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바로 그가 행복한 자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넉넉히 감사할 만큼 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었건만 우리는 이루지 못한 것, 못다한 것, 얻지 못한 것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주여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주의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저 삭개오와 같이 즐거워하며 감격하며 주를 영접하며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사람들 되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고 기쁨으로 모든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눅19:1-10/ 옥한흠 목사
2014-11-11 14:31:11
신문을 읽거나 TV의 뉴스 보도를 들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번 이 세상을 확 뒤집어 놓을 수 없을까?'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좀더 신앙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더 선하고, 좀더 정직하고, 좀더 정의로운 사회로 바꿀 수 없을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사모한다면 아마 한두 번씩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됩니까? 얼마나 음란합니까? 얼마나 사치스럽습니까? 얼마나 잔인합니까? 얼마나 포악합니까? 얼마나 불법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이런 현실을 보면 누구든지 '이 세상 좀 바꾸어 놓을 수 없을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과 함께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코드가 무엇인가? 기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교회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오직 교회만이, 복음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저는 한번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한편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요즘 국가적으로 앓는 열병 중 하나로 '사치'를 지적할 만큼 그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20억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소위 백만 장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약 5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재산을 숨겨 놓고 신고하지 않는 사람도 많으므로 그 수치는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한 1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면 1인 당 가족 5명씩 계산해서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약 50만 명을 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이렇게 사치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것도 이 50여만 명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화점의 명품 코너를 안방 드나들 듯이 다니고, 해외 여행을 다녀올 때면 고가의 제품을 맘껏 사가지고 오기 때문에 좋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제하면서 검소하게 사는 사람들,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우롱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50여만 명 되는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이미지를 사치하는 나라로 바꾸어 놓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000만 명 기독교인 중 90%는 제쳐놓고 10%에 해당되는 100만 명만 가지고 이야기해 봅시다.
이들 100만 명이 정말로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다면 얼마든지 우리 사회를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돈 있다고 제 맘대로 쓰는 몇 십만 명의 사람들이 한 나라의 이미지를 사치에 들뜬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제구실을 하는 100만 명만 있다면 충분히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에서 세리장으로 있던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의 낙원'이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도성이자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부촌에서 세리장의 자리에 앉을 정도면 그가 얼마만큼의 재력을 소유한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백안시하는 네 부류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창녀나 이방인, 죄인처럼 취급받던 사람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마다 세무공무원을 파송하여 식민지에 있는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이를 위해 현지인을 고용했는데, 그들로 부과한 세금을 걷도록 할당제 형식으로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러면 이 현지인들은 자기 동족들에게 가서 세금을 거둬 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특별히 열심이 있고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뽑아서 팀장 역할을 하는 세리장으로 세웠습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얼마나 자기 동족에게 미움을 받았을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당시 세금을 산정하는 기준이 있었겠지만, 대부분 세리들이 나름대로 각 가정마다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려면 규정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의로운 자, 순결한 자'라는 뜻입니다. 결국 삭개오는 자기 이름값을 못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안면몰수하고 자기 인격과 가문을 팔아 돈 버는 데만 생명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에게 있어서는 퍽 불행한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그런데 중간에 여리고로 통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미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여리고 도성에 퍼져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TV나 신문 등 정보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기한 것이나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한데 몰려가 구경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동네를 지나간다고 하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을 둘러싸고 같이 걸으면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이라도 귀담아 들으려는 아름답고 멋진 진풍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던 일을 제쳐놓고 달려 나왔습니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유난히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가까이 접근은커녕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체면 불구하고 옆에 있는 뽕나무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린애들이 하듯이 뽕나무에 걸터앉아 예수님이 지나가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하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첫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에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 자기의 어떤 꿈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삭개오처럼 영혼의 갈증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큰 구멍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나은 것이 있을 텐데.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어떤 갈증이 있습니다. 이 갈증을 늘 마음에 담고 있다가 위대한 스승, 예수님이 오신다는 밀을 듣자 한번 만나봐야 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죄책감과 갈증, 허무감이 있습니다. 어쩌면 영적으로 뽕나무에 올라가 앉아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전하기만 하면 예수님을 받아 들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세상의 것으로 만족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다른 대안을 찾아 애쓰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봅니까? 마음에 큰 구멍을 가진 사람으로 봅니까? 그들의 마음 속에 공허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봅니까? 아니면 그들이 살고 있는 큰 집만 눈에 들어옵니까? 아니면 그들이 앉아 있는 지위만 눈에 들어옵니까? 아니면 그들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만 눈에 들어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사람을 바로 보는 눈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보아야 합니다. 집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재산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꾸미고 사는 것들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눈을 가지고 그들의 내면 깊은 곳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 큰 공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이 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삭개오를 모르고 지나가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시고 기억하시지만, 특별히 한 사람을 아시고 기억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그가 삭개오인지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만이 아시는 특별한 역사였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저녁에 너희 집에 들어가 유하여야 하리라." 그 말을 듣고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
리고 예수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마주 앉은 것입니다. 삭개오의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어린 양이 되어 죽으실 속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 앉은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영혼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얼마 후 삭개오가 벌떡 일어나더니 주님 앞에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재산 절반을 정리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말씀이 있지만 자기 재산을 반이나 처분해서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삭개오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분의 맑은 눈동자 앞에서 자신의 추잡한 모습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났는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명령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액수인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를 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 제가 세리로서 토색하여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다면 장부를 확인해서 4배로 갚겠습니다." 이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배상의 액수는 1/5입니다. 토색한 것의 1/5만 더 얹어서 갚으면 됩니다. 그런데 4배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액수의 20배를 갚겠다는 말입니다
. 얼마나 감동을 많이 받았으면 예수님 앞에서 이런 약속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삭개오를 보고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삭개오가 일어나서 자신의 변화 받은 모습을 간증하자 비로소 예수님이 구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될 두 번째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로 만나면 삭개오처럼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변화 받았을 때에 비로소 구원 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죽었습니다. 돈이 우상이었던 삭개오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삭개오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게 변한 삭개오를 보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구원 받았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구나. 너야말로 영생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이 되었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크게 3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돈에서 마음이 떠나 버렸습니다. 삭개오처럼 돈을 밝히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돈이 하나님이 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이름과 가문, 믿음, 동족까지 팔아가면서 돈에 매달렸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돈에서 마음이 떠나버렸습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 마음에서 우상이 없어집니다. 돈이 우상이었던 사람은 돈에서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명예가 우상이었던 사람은 명예에서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정욕이 우상이었던 사람은 정욕에서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과연 우리 자신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보십시오. 변화가 있다면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의 비극은 입으로는 예수를 고백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떠드는데도, 실상 내면은 돈의 노예가 되어 돈에게 끌려 다닌다는 것입니다. 돈이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 이야기만 하면 믿음도, 하나님도 다 소용없고, 돈이 전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안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믿는 사람과 다른 점이 없기 때문에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우상에서 돌아섭니다. 돈이 우상이었던 사람은 돈에서 자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만약 이런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일어나기를 기도하십시오. 아니면 내일이라도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변화를 보십시오. 그는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해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사람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잘 살고, 내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 만나자 가난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신음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이처럼 이웃을 보는 눈이 바뀐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웃을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나누어 쓰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아직도 이웃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습니까? 항상 우리 집, 우리 자식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변화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삭개오에게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토색했다는 것은 해를 끼쳤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과하게 부과해서 착취를 했으니 그것은 나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했으면 당연히 회개하고 보상까지 하겠다고 것이 삭개오의 생각이었습니다.
흔히 "예수 믿고 죄 용서 받고 변화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옛날에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서는 진정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만나면 삭개오처럼 변화할 수 있습니다. 돈에서 마음이 떠날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삭개오처럼 변화만 된다면 이 사회가 안 바뀔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감동을 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삭개오를 만나시듯 우리를 만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와 역사가 일어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될 세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의 속편입니다. 성경에는 삭개오의 속편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떠나셨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예수님 앞에 한 약속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약속을 행동에 옮겼습니다. 재산을 정리해서 반을 나누고는 그 동네의 빈민촌을 찾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기절초풍했을 것입니다. 세리장으로서 악명 높은 그 사람이 갑자기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지금까지 당신들이 그렇게 어렵게 사는 줄 미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나 내 자신이 잘못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받으세요." 하면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사실이 여리고 성을 들썩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장부를 들고는 자기가 토색한 집안에 찾아가 "내가 당신 집에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여 토색했습니다. 약 10만원 정도를 토색한 것 같은데 여기에 4배를 보태서 50만원을 드릴 테니 받으십시오." 하면서 손해액을 배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내 자신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습니까? 이로 인해 여리고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삭개오와 같은 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을 짓밟고 성공하면 그것으로 인생의 소원성취를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면 굉장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구, 저 사람이 저렇게 잘 살고 교만한데, 예수 믿으라는 말로 찔러 봐야 피도 안 날 텐데..."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막상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생각지도 않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전하기만 하면, 우리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그들이 예수 믿고 삭개오처럼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 받은 그들을 통해서 한국 사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붙들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신문지상을 통해서 많이 봅니다. 타임지에 실린 기사 하나를 소개합니다. 아시아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나라로는 다섯 나라를 들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외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한국 성인남녀 2,350만 명 중 약 20%에 해당하는 450~500만 명이 외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서로 모르게 잘못된 관계를 가집니다. 미혼의 젊은이들도 혼전에 벌써 탈선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외도입니다.
서울 고검 검사가 쓴 칼럼에서 이에 대해 탄식한 것을 보았습니다. 최근 명단이 공개된 미성년 성폭행자 대부분이 20대부터 40대까지인데, 그들 중에는 교수, 교사, 의사, 약사, 언론인, 영화감독, 회사원, 외국인 강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가담해 있었습니다. 그런대로 성공했다는 사람들, 잘 산다는 사람들, 자기가 목표한 만큼 재산을 모았다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외도 정도가 아니라 좀더 흥미와 자극을 더하고자 어린 미성년자에까지 접근했다는 점에서 타락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고검 검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 이 나라의 성적 타락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우리 나라처럼 유흥업소가 많은 나라도 없고, 우리 나라처럼 접대여성이 혹사당하는 나라도 없고, 우리 나라처럼 성폭력이 많은 나라도 없다." 아무래도 범죄자들만 다루는 전문직에 있는 사람의 말이므로 더 신빙성이 있을 것입니다.
잘 살면 잘 살수록 이런 일들이 더욱 비일비재합니다. 나중에 성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면 마약에까지 손을 댑니다. 그래서 오늘날 마약 사범이 얼마나 많이 퍼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이런 데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마음에 구멍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벌면 벌수록,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마음에 있는 공허가 더 큰 입을 벌리고 더 좋은 것, 더 쾌감을 주는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그들에게 전도해야 됩니다. 그들도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변화 받은 그들 한 사람을 통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사람이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쓰임을 받으면 이 세상이 바뀝니다. 이 세상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뉴욕에서 전도집회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하는 필립스라는 사장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가 그 전도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37살에 수석 부사장이 되었고, 40세에 CEO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만큼 탁월하고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하며 돈에 대한 애착이 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성공하기 위해서 외길을 달려온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복음을 듣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은 생각, 가치관, 인생관, 물질관, 대인관계 등 삭개오처럼 모든 것이 다 바뀐 것을 말합니다.
그 역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회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 사람 달라졌다. 무언가 달라졌어." 하고 말할 정도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밤 늦게 필립스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친구이자 특별 고문 겸 보좌관이었으며, 잘 나가는 워싱턴의 변호사였고, 유명한 독설가이기도 했던 찰스 콜슨입니다. 당시 워터게이터 사건으로 상당히 어려운 궁지에 빠져있을 때였습니다. 단 둘이서 응접실에 앉자 마자 찰스 콜슨이 필립스에게 이렇게 말을 돌렸습니다.
"필립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전에 비해 완전히 변해 버렸어. 나는 자네에 관해 좀 듣고 싶네. 그 동안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밤 얘기해줄 수 없겠나?" 그 말을 들은 필립스는 그날 밤 하나님께서 전도의 기회를 주신 줄 알고 간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콜슨,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밤낮없이 일해서 성공한 사람이었어.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진 사람이었지.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어. 나는 정말 허전했어. 때로는 한밤 중에 일어나 침실 복도를 거닐거나 몇 시간씩 바깥 어두움을 쏘아보곤 했네. 내 인생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네. 나는 중요한 것이라곤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어.
그러던 어느 날 출장 차 뉴욕을 가게 되었는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전도집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 거기를 가면 무언가 해답을 얻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참석해 보았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나에게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다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어.
그런데 이것이 나에게 결정적으로 문제였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다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그 시간 나는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였어. 그러자 신비한 평화가 내 안에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옛날 같으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삶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네. 이것이 나의 이야기야. 내가 변화 받은 이야기지. 콜슨, 자네도 이 시간 그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네. 나하고 손잡고 기도하세. 예수님이 자네를 만나주실 꺼야." 그리고는 손을 잡고 둘이서 기도했습니다.
콜슨이 그 순간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종의 에너지 같은 것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감정이 솟구치면서 거의 울음을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복받쳐 올랐습니다.
겨우 참고 기도를 끝낸 다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뛰어나가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시동을 걸려고 열쇠를 찾는 동안 눈물이 비오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몰고 집을 빠져나올 동안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어 차를 길 옆에 세우고는 정신 없이 한 시간이 넘도록 혼자서 울었다고 합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흐느꼈을 정도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흐느껴 우는 동안, 마치 해방되고 있다는 놀라운 감정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의 눈물이 온 몸에서 솟아나면서 깨끗이 씻어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주님 앞에 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콜슨은 그날 밤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해 1974년, 그는 워터게이트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고 7개월 동안 복역했습니다. 그런데 출감 후 교도소선교회를 조직해 전 세계 형무소 수감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일평생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도소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재소자들의 인권 문제가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전세계의 교도소에 수감된 많은 죄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망에서 소망을 찾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1,000여 개 넘는 방송망으로 전달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브레이크포인트의 진행자입니다. 또한 기독교의 현대고전으로 평가 받을 만한 우수한 책들을 수십 권이나 썼습니다. 1993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칠 줄 모르고 교도소를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사회의 가장 참혹한 곳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콜슨이 필립스를 찾아왔을 때만해도 이제 그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매장당할 것이고, 다시금 재기하기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초라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스가 콜슨을 전도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를 통해 이 세상이 바뀌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해서 이 세상을 바꾸어야 하고, 그 다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전도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함으로 그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이 온 세상에 파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대안입니다. 이것이 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보고 낙심만 하지 하십시오.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로 되면 세상이 바뀝니다. 우리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은 바뀝니다. 진짜 예수를 만난 변화를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은 바뀝니다. 이런 꿈을 가지고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는 돈에서 자유함을 얻었고, 가난한 이웃에게 마음을 열어 자신의 죄를 회개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변화되자 여리고 성이 감동을 받았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부흥이 있었으리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주여, 오늘도 이 놀라운 역사는 계속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시옵소서. 이 가운데 머리 숙인 주의 자녀들 마음 마음을 주의 영이 터치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입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상 내 가슴 속에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지는 잘 모를 때가 많은데, 그 가슴속에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얼마만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이와 같이 삭개오처럼 변화 받고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바뀔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통해 전도 받는 사람들이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받으면 그들을 통해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치유 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앞두고 우리를 통해 삭개오처럼 변화 받고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내 주시옵소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들을 통해 큰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눅19:1-10/ 변화된 가정 / 한경직 목사
2014-08-27 12:00:42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누가복음 19장 8절 다시 봉독하였습니다.
지난 주간을 가정 주간으로 지켰고 오늘을 흔히 어머니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아침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온전히 변화된 가정 하나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곧 삭개오의 가정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라는 성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은 일찍이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제일 먼저 점령한 성으로써 옛날부터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의 도시’라는 이름이 있고, 또한 그 성에는 아름다운 동산과 장미꽃들이 많기로 유명하며 특별히 발삼(Balsam)이라고 하는 좋은 향품의 유명한 산지로써 소문난 곳입니다. 또 이곳은 동서의 교통의 요충지로써 문화가 집산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삭개오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그때에 그 도시의 모든 세금을 받는 세리장이었으며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일반 사회에서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따라서 그는 사실 고독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간다는 소문을 그가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어떤 분인가 보기 원하였습니다. 이런 이가 왜 예수를 보길 원하였을까? 아마 예수는 당시에 소문난 선지자이니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호기심일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한다는 소문을 혹 들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 된 사람으로 보였지만은 그의 심령 깊은 속에는 의로운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이 숨어 있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그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거리는 사람으로 꽉 메웠고 그의 키는 매우 작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마침 그 옆에 있는 높은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마치 새처럼 나뭇가지에 앉아서 예수님께서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 후 주님의 일행이 지나갔습니다.
천만 뜻밖에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우러러 보셨습니다. 주목하여 보십니다. 주목하여 보실 뿐더러 주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씀은 삭개오뿐 아니고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실로 뜻밖입니다. 삭개오는 기뻐서 나무 위에서 곧 내려와 즐거이 예수를 그의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으로 들어가신다고 수군거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놀라울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후에도 친히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사실은 삭개오가 예수를 찾기 이전에 예수께서 삭개오를 먼저 찾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보기 이전에 예수는 그를 먼저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뜻이 합할 때에 구원의 큰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삭개오와 온 가정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큰 변화를 그 가정에 가져 오게끔 하였습니다.
이 역사적인 일화에 대해서 몇 가지 꼭 배울 진리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로, 삭개오 같은 이도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다는 이 사실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삭개오는 그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지금도 세무서 직원들이 칭찬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혹 있는 듯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라는 직업은 보통 사람으로는 절대로 택하지 아니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대 사람들은 로마제국에 예속된 민족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 정부를 미워하였습니다. 자기 민족에게 돈을 거두어 이런 정부에 바치는 세리들은 매국적으로 생각하던 때입니다. 애국심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적 양심의 마비자로 세리들을 다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고 이 세리들은 흔히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또한 토색을 많이 했습니다. 곧 부당한 이득을 얻었습니다. 요사이 말로 부정부패의 공무원이요, 탐관오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질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가장 천한 계급을 의미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삭개오는 이렇게 돈을 많이 모아 그 당시에는 큰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주택도 아마 고급 주택처럼 매우 호화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이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한 이는 아마 당시 여리고 성 안에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주님 자신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부자들에게는 유혹과 시험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삭개오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넓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가장 깊은 죄악의 구렁텅이까지 그의 구원의 손은 미칩니다. 사회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나 가장 낮은 계급이나,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어디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은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심령의 상황이 현재에 어떠한 자리에 있든지 결코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현재 어떠한 사회적 비난과 오해를 받을지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절망할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깊은 죄악과 시험에 빠졌을지라도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를 찾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를 바라볼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주보십니다. 꼭 영접하십니다. 구원하여 주십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온 가정이 변화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신 후에 그의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을 사배 다 갚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삭개오의 참 회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참 회개란 먼저 자기의 죄를 깨달아야 하고, 다음에는 그 죄를 주님께 고백하여야 하며,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다른 이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그것을 보상하는 데 참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여기에 “사배나 갚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보상할 결심을 했습니다. 사 배나 갚는 것은 구약 율법에서 요구하는 사실 이상입니다. 출애굽기 22장을 읽어 보면 거기에 보상에 대한 모세의 율법이 있습니다. 가령 사람이 남의 소나 양을 도적질해서 잡아먹었거나 팔면 그것은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아주라고 했습니다, 죄 사함 받으려면, 양 하나에는 양 넷으로 갚아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둑질한 것이 살아서 아직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물론하고 그저 갑절을 배상하라. 이렇게 규정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삭개오는 평균으로 다 사 배를 갚아 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죄인은 물론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로 인한 죄를 지었으면 가령 남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면 부당하게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참으로 회개하려면 나의 죄로 인하여 다른 이에게 입힌 손해를 반드시 보상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가능하기만 하면 보상해야 합니다. 혹 불가능한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랜 목회 경험에 있어서 이런 실례를 종종 보았습니다. 자기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자봉침을 오래 쓰다가 회개하고 그 임자에게 도로 돌려주는 청년도 보았습니다. 어떤 식모는 주인 아주머니의 집에 있는 돈을 조금씩 훔쳐 내서 두었다가 그 후에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그 주인 아주머니에게 돌려준 젊은 여자도 있습디다. 미군 군정청에서 일하면서 안 받을 뇌물을 받았다가 회개하고 그 돈을 돌려주려고 하지만, 그 당사자를 찾지 못해서 많은 고민을 하다가 교회에 연보를 하는 청년도 보았습니다. 서양 속담에 ‘돈이 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회개는 돈이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한번은 간증 예배를 봅니다. 여러 교우들이 일어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 받은 것을 간증합니다. 그 예배를 필한 후에 그 목사가 자기 교회에 잘 믿는 어떤 여자 집사를 만나서 으레 그 집사가 간증할 것 같은데 그 저녁에 간증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남은 다 간증하는데 집사님은 오늘 저녁에 간증을 못했습니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 집사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아마 목사님은 모를 겁니다. 오늘 저녁에 처음으로 간증한 여자들 세 분 알지요? 그분들이 오래 전에 내 돈을 잘라먹고 지금까지 안 주는 분들입니다. 나는 그 여자들로 말미암아서 많은 손해를 보고 지금까지 아이들 데리고 남 모르는 생활에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무슨 간증을 할 것입니까?”
은혜 받았으면 재정거래가 분명해야 합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서도 재산을 분명히 해야 군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재정거래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재정거래가 분명해야 합니다. 다른 죄는 다 회개하면서도 아무개는 돈주머니는 아직 회개하지 못했다는 그런 말도 들립니다.
삭개오는 참으로 회개할 뿐더러 그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사회 봉사자가 된 것입니다. 참 회개는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그의 온 가정에 구원이 이른 것입니다. 여기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부인과 그의 자녀들도 다 구원을 얻은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 보면 흔히 이렇게 호주가 먼저 회개하고 온 가정이 같이 구원을 얻습니다. 빌립보의 간수가 먼저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자기가 믿은 후에는 온 가정이 또한 같이 믿으면서 세례를 받고 기뻐하였다는 기록을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찾아봅니다. 또 어떤 때는 가정의 어머니가 먼저 믿고 온 가정이 함께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역시 빌립보에서 살던 두아디라 성에서 자주 장사를 하던 루디아라고 하는 어머니는 먼저 바울의 전도를 받아서 믿고 그 온 집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며 바울과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습니다.
참 신앙은 이렇게 온 가정을 감화시킵니다. 온 가정을 변화케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천국이 그 가정에 임합니다. 집이 크든지 작든지 찬송가의 한 구절과 같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내 주 예수 모시게 되면 그 가정이 곧 하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가정에 이렇게 천국이 임하니 그 가정에 행복과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던 그 가정은 존경과 선망의 가정이 된 것입니다. 전에는 남의 것을 약탈하는 악의 소굴이었더니 이런 가정이 변해서 이제는 모든 가난한 이들과 불우한 동포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봉사하는 큰 자선의 근거지로 변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실 삭개오의 가정은 불멸의 가정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의 여리고를 생각할 때에 오직 삭개오라는 이름을 기억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세리요 탐관오리였으나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를 중심에 영접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이 누구에게나 불멸의 생애의 비결이 아닙니까?
부정과 부패는 먼저 번 대통령 선거 때에도 큰 쟁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의 중대한 문제의 하나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요사이 어떤 신문에 새로 대통령으로 피선된 ‘박 대통령에게 바란다’는 란이 있습디다. 여러분들이 여러 모양으로 여러 말을 하는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골자는 ‘제발 부정부패를 없이 해주시오.’ 그 말인 모양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리 측근이라도 그저 도려내 주시오.’
삭개오와 같은 부정부패 공무원들이 정직하고 깨끗한 공무원이 되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한국의 공무원들 가운데 그동안 삭개오의 죄를 배운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 죄를 배우지 말고 삭개오의 회개를 좀 배워야 하겠습니다. 삭개오처럼 오늘날 우리 한국의 공무원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자기의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봉사하며 토색한 것을 사 배는 그만두고 본전이라고 갚아 주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명랑한 사회로 변할 것입니까?
삭개오와 같이 예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먼저 찾고 계십니다. 이러한 공무원들의 양심을 예수는 기다린 지 오랜 줄 압니다. 이러한 이들의 이성의 문을 두드린 지도 오랜 줄 압니다.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중심으로 영접하고 변화된 공무원들, 변화된 기업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또한 변화된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온 사회와 국가가 변화될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저는 성지를 순례할 때에 여리고에 내려가서 그 도시를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 작은 고을입니다. 그러나 그 거리 한 옆에 ‘삭개오의 뽕나무’라 이름 불리는 큰 나무가 지금도 하나 서 있습니다. 한국 뽕나무와 같지는 않고 얼른 보면 오동나무 혹은 들메나무 비슷하게 보입디다. 사실 삭개오가 전에 올라갔던 나무인지는 모르지만은 상당히 오래된 나무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나무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가? 간단히 말하면 이것입니다. ‘삭개오과 같은 세리요 매국적이요 부패한 사람도 이 나무 위에서 예수를 만나 새 사람이 되었다. 변화된 사람이 된 것이다. 그의 가정이 변화되어 새로운 가정이 되었다. 누구나 예수를 믿고 예수를 영접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새 가정이 될 수 있다고.’ 삭개오의 뽕나무는 지금도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예수는 옛날 여리고 거리만 지나가신 것은 아닙니다. 살아 계신 주님은 오늘날도 서울의 거리를 지나가십니다. 아니 우리 영락의 뜰에도 걸으십니다. 영락의 뜰의 나무 하나하나가 삭개오의 뽕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살아 계신 주님은 이 시간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심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 내 자신이 새로워질 수 있고, 내 가정이 새로워질 수 있고, 내 나라가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집을 나가기 전에 이 뜰을 나가기 전에 주를 꼭 만나시고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조용히 머리 숙였을 때에 스스로 내 자신을 살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중심에 주님을 영접하였나? 내 가정이 과연 주님을 영접하였나? 스스로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제가 기도하기 전에 중심으로 예수를 영접하시기를 원하는 분, 아직까지 교회 나오지만은 사실 중심으로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분들이 이 시간 꼭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제가 기도하기 전에 ‘내가 참으로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 시간 내 온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바칩니다.’ 이렇게 꼭 결심하는 분들 한 번 손들어 보세요. 높이 손들어 보세요. 손 내리세요. 기도하십시다.
자비하신 주님이시여, 주님께서는 세리장이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난과 천대의 대상이었던 삭개오를 불러서 주님의 제자를 삼아 주시고, 그 생활을 새롭게 해 주시고 그 온 가정에 축복하여 주었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저희들이 이 시간 믿는고로, 지금 저희들이 손을 들어서 주님을 영접하는 표시를 하였습니다. 주님이시여, 이 시간 우리 마음에 오시고 우리 온 가정에 오셔서 우리 가정 전체가 주님의 나라가 되고, 우리 가정에 천국이 이 시간 임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영락의 220 구역에 흩어져 있는 4,000여 세대 가정 가정마다 오늘 이 기쁜 어머니의 날,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 자리를 떠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눅19:1-10/ 예수께서 머무르실 때 / 한경직 목사
2014-08-26 13:50:44
먼저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또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하여 주시는 가운데 그동안 약 2개월 반 동안 미주 약 10여 도시를 순회하고, 지난 주간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감사한 것은 가는 곳마다 우리 영락 교우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또 우리 영락의 뜰에서 자라난 믿음의 자녀들이 멀리 외지에 가서 공부도 많이 하고, 또 그곳에서 교회를 충성되게 봉사하는 모습들을 보고 더욱 감격하였습니다.
우리 본 교회에서는 아무 직분도 없던 이가 그곳에 가서 장로가 된 이들도 있고, 집사가 된 이들도 있고,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를 봉사하는 것을 볼 때에 참 얼마나 감격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 곳에서 여러 분들이 본국에 돌아가게 되면 그 누구에게 각각 좀 문안을 해달라고 하는 부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안한 것은 제가 정신이 부족해서 그저 돌아오고 보니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전에 어떤 심부름하는 젊은 사람이 자기 주인의 중요한 부탁을 받고 건넛동네에 가서 그 말씀을 전하려고 심부름을 가는데, 가는 가운데도 꼭 그 말대로 전하려고 아주 애쓰며 생각을 하며 가다가 거의 동네 다가서 큰 돌체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돌체를 건너뛰는 바람에 그만 깜박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제가 여러 곳으로 다니다가 마지막 돌아올 때에 태평양을, 말하자면 건너뛰어 왔으니 뭐 좀 생각나던 것도 거의 다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그저 한 마디로 말하면 미주에 가서 계신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의 친족들, 여러분의 친구들은 다 무사하게 평안히 지내고 또 그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주를 봉사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도 하실 것 없고 다만 여러분께서 계속해서 이들을 위해서 기도로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한 것은 제가 듣는 대로 미국 이민 역사상에 우리 한국 민족처럼 미국에 들어와서 교회를 많이 세우는 민족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미주에 가 있는 우리 민족을 약 40만으로 추산을 하는데, 뭐 확실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듣건대 교회 수가 한 700개에 가깝다 그런 말이 들립니다. 하여간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통해서 그 나라에서 하실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니 자연히 들리는 말도 많았습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어떤 선교사가 미국에 돌아가서 어떤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에는 예수께서 이미 지나 가시고 지금은 예수께서 한국에 머물러 계시더라.” 그런 말을 했답니다. “한국에 머물러 계시더라.” 저는 그 말을 들을 때에 참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예수님께서 여리고 거리를 지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지나가신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삭개오의 집에서는 머무르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집에 머무셨으므로 삭개오는 실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 번 지나가시는 것도 물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머무시는 것은 얼마나 더 귀합니까?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거리, 지나가신 가정, 지나가신 마음이 적지 않은 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예수님께서 머무시는가? 우리 가정에, 우리 마음 속에 머무시는가? 그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또한 그러하리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께서 우리 가정에 또 우리 마음에 머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가정에 머무실 때에 그 가정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삭개오는 당시에 로마 사람을 위한 세리장이요 또 큰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가정에 머물게 되실 때에 그는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불의한 생활을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청산하였습니다. 그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불의로 얻은 재물은 4배나 갚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에는 죄가 그냥 도사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탐심, 교만, 시기, 증오, 거짓, 부정, 음란, 온갖 더러운 것은 주님이 머무실 때에는 사라집니다. 빛이 임할 때에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사방이 밝아집니다.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가정도 밝아지고 깨끗하여집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가정에 주님께서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실 때에는 기쁨이 충만하여집니다.
마음 속에 넘치는 기쁨이 따릅니다. 악인의 마음은, 성경의 말씀과 같이 바다 물결이 바람에 밀려 진흙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불안과 공포, 근심과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도둑놈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달아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마음에 머무실 때에는 참 회개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습니다. 모든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고 기쁨과 화평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체험을 가진 믿는 이들은 항상 우리가 부르는 대로 이런 찬송을 부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천국으로 화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어디나 하늘나라로 화합니다.
예수께서 첫번 이적으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은 상징적인 큰 뜻이 있습니다. 곧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참된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실 때에는 먼저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사도 바울은 늘 외쳤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감옥에서도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사실 지나보니 그리스도를 모신 생활처럼 기쁜 생활이 없고, 그리스도를 모신 생활처럼 행복한 생활이 없습니다. 보람 있는 생활이 또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 마음에 머무실 때에 영적 기갈이 사라집니다.
풍성한 생명수를 늘 마시게 됩니다. 흡족한 생명의 양식을 항상 먹게 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주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또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대로 입니다. 풍성한 생명 양식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계시지 아니하는 심령 속에는 언제나 허무감이 떠나지 아니합니다. 인생은 허무합니다. 또 늘 죄책감이 마음을 괴롭힙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는데, 사죄를 받지 못할 때에는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러한 심령 속에는 언제나 공포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무섭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머무실 때에 이런 것들은 사라집니다. 인생은 허무하지 아니합니다. 허무감 대신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사명감에 불탑니다. 죄에서 해방을 받은 심령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감같이 향상의 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포심 대신에 확신과 승리의 신념으로 나날을 살아갑니다.
시편 23편에 고백한 다윗의 말씀과 같이, 이러한 심령은 언제나 푸른 풀밭에 눕고 잔잔한 물가에서 쉬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방면에 흡족히 이릅니다. 육신적인 방면에도, 사업 방면에도 축복을 또한 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 보면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는 많은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시몬의 장모도 열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중풍병자들도 일어났습니다. 문둥이들도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주님의 이 능력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 하시느니라” 지금도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올 때에 주님의 능력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떤 병은 숨은 죄가 그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병은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병 고침도 받습니다. 또 잠언의 말씀과 같이, 즐거운 마음은 양약 곧 좋은 약이 됩니다. 그러나 근심은 뼈가 마르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는 건강도 있습니다. 건강의 축복도 받습니다.
물질문명이 발전할수록 온갖 신경성 질환 또는 정신병들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고층 건물이 높아질수록 범죄율도 또한 높아진다고 합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생활이 가능하여질수록 먼저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사회라야, 나라라야 명랑하고 살 만한 사회와 국가로 또한 발전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때로는 갈릴리 바다와 같이 풍파가 높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배는 두려울 것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다의 풍파도 잔잔케 하셨습니다. 이 거친 인생의 고해를 지나가는 인간들로서 때때로 풍파를 겪지 않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머무실 때에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 통치하셔서 마지막에는 선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외람된 말이나 제가 나이 점점 많아 갈수록 더욱 깊이 믿어지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여러분, 거기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기억하십니까? 자세히 들으세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 모든 일 가운데에는 환난도 포함되었습니다. 꼭 이대로 됩니다. 또 그렇게 됩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머무실 때에는 우리의 심령에 점점 변화가 옵니다.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됩니다. 깨끗하여집니다. 우리의 인격이 비록 부족하나 점점 자라납니다. 주님의 그 고결한 인격을 향하여 점점 장성합니다.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성품도, 우리의 말도, 우리의 생활 전체가 주님의 모습으로 점점, 비록 더디나 화하여집니다. 죄로 인하여 잃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갑니다.
한마디로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늘 머무실 때에는 우리는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 심령이 천국 곳간에 들어갈 수 있는 알곡으로 점점 변하여집니다. 그리해서 이러한 이들은 세상에서 살기는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을 위해서 일하고 세상을 봉사는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지는 아니합니다. 비록 그 몸은 땅에서 살지만 그의 마음은 하늘에 두고 삽니다. 이 세상을 영원한 고향으로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한 순례자로서 영원한 고향을 바라보며 삽니다. 그의 심령 속에는 영원한 소망의 별이 언제나 빛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에게는 사실 죽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장례식을 거행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예수님께서 장례식했다는 얘기가 어디에 있나요? 없습니다. 죽음을 만나면 생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어린 딸을 일으켰습니다. 생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죽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일으켰습니다. 무덤 속에 나흘 동안이나 있던 나사로를 불러내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주님 안에서는 죽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는 죽음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뿐입니다. 영생은 죽은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그 때부터 영생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의 육신의 죽음이란 잠깐 지나가는 한 단계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가 사는 거리를 지나가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가정에 머무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주님께서 오셔서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음 문을 여세요.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머무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단순히 머리로 믿고 기독교 사상을 가진 생활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머무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저희들이 겸손히 저희들의 마음 문을 열어놓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친히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중심에 계시고, 우리의 사언행(思言行), 생각 말 행동, 삶 전체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한 사람도 한 사람도 문을 닫는 이 없게 해 주시고 성령의 크신 감화 가운데 문을 열고 중심으로 주님을 영접해서 모든 죄는 사라지고 모든 근심과 염려도 사라지고, 오직 기쁨 화평 영생만이 우리의 중심에 충만할 수 있는 이 은총을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고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눅19:1-10/ 회개와 보상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03:34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값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 十九․八-九)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다가 길에서 특별히 두 가지 일 행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먼 소경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간절히 청해서 그 병을 고쳐 눈이 보게 된 일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여리고의 세리 장으로 있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여기 기록한 대로 세리 장이요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세리가 일반 국민에게 천대를 받던 것은 로마인 아래에서 관리가 되어 유대인의 돈을 착취하여 외국 정권에 바치는 까닭에 그 때에 세리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민족적으로 볼 때 반역자로 인정받고 또 종교적으로 볼 때에도 배교자(背敎者)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세리와 죄인이라고 신약에 나타나는데 세리는 거의 창녀와 같은 천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이 사람은 세리 가운데도 세리 장이요 부자라고 하니까, 그런 자리에서 돈을 모은 만큼 그 가운데 불의 한 재물이 많을 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그 때에 여리고 에서 제일 큰 도적놈은 세리(稅吏)장 삭개오 일 것이라고 기록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삭개오라고 했는데 그 뜻은 깨끗하다고 하는 뜻과 새롭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름은 좋습니다.
아마 스탈린도 이름은 요셉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 삭개오가 예수를 꼭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첫째 이유는 호기심이었을 것입니다. 유명한 갈릴리의 선지자가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이 따라간다고 하는 그런 소문을 듣고 그 어떤 사람인가 하고 호기심 가운데 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된 일을 보고 우리가 짐작하여 보건대 그 호기심 이외에 삭개오 자신도 모르는, 말하자면 그 잠재의식 가운데 자기는 그런 천한 직업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자리에 그 사람도 옳고 깨끗한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이 속 깊은 곳에 있었던 같습니다.
양심의 불이 아주 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여간 이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거리에 나와 보니까 두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볼 수 없고 하나는 자기 키가 너무 잘아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서 높은 나무에 올라가 앉으면 그 가운데로 지나가는 예수를 잘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예수 님이 지나갈 길에 먼저 가서 예수님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의 일이란 하루의 생활을 돌아다 볼 때에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삭개오가 그날 아침에 나와서 나무 위에 올라가 앉을 때는 그날 저녁에 자기에게 무슨 변화가 생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 동안에 뜻밖에 그야말로 천만 뜻밖에 자기 일생에 잊을래 야 잊을 수 없는 일생의 혁명적인 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 올라앉아 있는 그에게 예수 님께서는 얼굴을 들어 나무 위의 삭개오를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삭개오야 일어나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저녁 너희 집에 유하겠다."
그 말을 들을 때 삭개오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삭개오는 너무 기뻐서 허둥지둥 내려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갔고 무리들은 수군거리면서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성경이 삭개오의 집에서 된 일을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잘 대접도 하고 여러 가지 말로 삭개오가 죄를 자백한 줄 압니다. 그 모든 한 말을 성경에 단단한 이런 말로 기록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대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것이 삭개오가 그 날 저녁에 한 고백의 결론인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오늘 저녁 이 집에 큰 구원이 이르렀구나 이 사람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기사로 마치었습니다.
여기에 오늘 아침 축복할 말씀은 삭개오의 고백인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討索)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회개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참 회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회개는 물론 제일 먼저 죄를 깨닫는 것이 첫 걸음인 줄 압니다. 그러나 단순히 죄를 깨닫는 것만이 회개는 아닙니다. 몰론 죄를 깨닫는 것도 어려운 일인 줄 압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 허물을 모릅니다.
다윗같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곧은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그런 음란한 죄는 짖고 자기의 충성된 부하 우리아 를 억울하게 그렇게 원수에게 죽게 하고 그리고 그 우리아 의 아내를 취 해다 궁전에 갔다 두로도 얼마 동안 다윗의 양심이 얼마나 둔해졌던지 양심의 괴로움이 없었습니다. 평안히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보내서 비유를 들어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이 부자인데 자기 집에는 소와 양이 많고 그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린 암 양 새끼를 딸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 집에 손님이 왔는데 자기 집에 양과 소는 두어 두고 이 가난한 집의 어린 암 양을 빼앗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때에 다윗이 노하여서 하는 말이 그런 놈이 이 나라에 있다면 곧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나단은 왕이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산상보훈에 말씀하시기를 어찌해서 네 눈의 들보는 보니 못하고 형제의 눈에 티를 뽑으라 하느냐. 먼저 네 눈의 들보를 뽑으라. 그리고 나서 형제의 눈의 티를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려면 우리의 허물을 깨달아야만 됩니다. 무서운 죄를 많이 짓고도 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무심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만으로 완전한 회개는 아닙니다. 깨달으면 후회합니다. 그저 이 다음에는 그런 죄 안 짓겠다고 후회 많이 합니다.
유다가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먹은 다음에 많이 후회하였습니다. 얼마나 후회하였는지 은 삼십 냥 다시 가지고 성전에 가서 돈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안 받으므로 은 삼십 냥을 그 성전 뜰에 내버리고 왔습니다. 얼마나 후회하였습니까. 너무 후회한 끝에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후회만이 회개가 아닙니다. 만일 유가다 그 돈을 내버리고 난 다음 낙심하지 않고 다시 예수님 앞에 돌아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죄 사함을 구하였던들 유다도 죄 사람을 얻었을 것입니다. 후회만 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깨달았을 때 죄에 대해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그 공포심만으로는 회개는 아닙니다.
상고사 가운데 민족들이 유럽을 점령해서 사방으로 흩어질 때 우스트로 고드라고 하는 족속이 이태리 평원을 점령하고 오스트로 왕국을 건설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왕 가운데 데로도링이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삼십여 년 동안 그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또 여러 가지로 보아 좋은 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혈기를 못 이겨서 무죄한 친구 두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보에디오스 또 한 사람은 디메커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비참하게 목 달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 왕 자기가 실수한 것을 알고 항상 후회하였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는 후회했습니다.
어떤 날 저녁에 특별히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는데 그날 저녁 특히 요리 인이 생선으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왕이 생선을 볼 때 생선의 빨간 눈알을 들여다보니 거기에서 자기가 죽인 사람의 눈알이 보였습니다.
생선의 아가리에 날카로운 이빨을 볼 때 마치 자기가 죽인 그 두 사람이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어 나오는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이 데로도링 왕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불편해서 저녁은 먹지 못하겠다고 하고 자기 침상에 돌아가서 누웠습니다. 얼마나 무섭든지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삼일 후에 죽었습니다.
죄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 죄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죄를 단순히 무서워한다고 이것이 참 회개는 아닙니다.
그러면 참 회개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五五장 七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했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죄를 깨달아 알고 후회하고 무서워할뿐더러 죄가 이렇게 무서우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음을 돌이키고 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죄가 무서운 줄을 깨달아서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서 마음을 돌이켜서 주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 어떤 청년이 오는 주일날 공일인데 청량리 요리집에 가서 놀기나 하겠다고 나간다고 합시다. 나가는데 사방에서 종소리가 울립니다. 아 이것 주일날인데 이렇게 다 예수께 나와 예배하라고 종소리가 나는데 내가 이렇게 딴 방향으로 가서 되나 하여 그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그 때에 그 청년 마음이 돌아섰다면 그 청년의 몸까지 돌아설 것입니다. 몸까지 온전히 돌이켜서 자기가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오게 될 때 그것이 온전히 회개입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一八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음만 이렇게 一八0도로 돌아선다고 하면 몸도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회개에는 열매가 있고 이 회개에는 행동 곧 실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토색한 것을 회개하고 자기가 과거에 가난한 사람에게서 불의 하게 재물을 취한 것을 회개한 다음에는 사 배나 갚아 주기로 결심하고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재산을 손해 나게 하였다고 하면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이면 자기가 가능하기만 하면 남의 재산 손해 난 것도 갚아 줄 것입니다.
삭개오와 같이 갚아 주는 것 없이 마음만 돌이켜서 회개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 회개가 아닙니다.
미국의 유명한 무디 목사의 전기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목사가 어떤 곳에 가서 부흥회 할 때 어느 저녁 어떤 청년이 와서 말하기를 자기가 시내 어떤 상점에서 점원으로 있는데 불행히도 한달 전에 돈을 一五00불 훔쳐서 다 쓰고 지금 九五0불밖에 없는데 이번 이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큰 죄를 지었으므로 또 내가 꼭 이 돈을 갚아 주어야 되겠는데 남은 것이 九五0불밖에 없고 채울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남은 것 九五0불은 꼭 쓰지 않고 이것 가지고 장사를 잘해서 一五00불이 된 다음에 꼭 갖다 갚으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무디 선생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하는 말이 내 생각 같아서는 그 도적질한 돈을 가지고 장사한대야 장사가 잘 될 것 같지 않으니 그 남은 것 가지고 가서 갚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 하는 말이 이것 가지고야 어떻게 부끄러워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가서 사정을 다 말하고 갚아 주자는 것입니다. 그 청년을 데리고 가서 그 사정을 다 말하고 나머지 돈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놀라서 눈이 둥글 해 지면서 입을 다물지를 못합니다. 그 주인은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 청년을 그런 청년인 줄 몰랐는데 훔쳤다고 하는 사실에 놀라고, 둘째는 이 청년 회개하고 가져온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면서 이 주인 하는 말이 이 청년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이전보다 이제는 더 신용할 수 있고 또 모든 죄 다 용서하고 이것도 감사히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일생에서도 이런 일을 가지고 와서 의논하고 갚아 준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정신적인 면,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 내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것 있으면 명예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지 갚아 주려고 힘쓰는 면이 없으면 참된 회개는 아닙니다.
여기 삭개오가 절반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도 이유가 있는 줄 압니다.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불쌍해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내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려고 할 것이면 온전히 청산하려고 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가령 十년 전에 어떤 청년이 죄를 지어 남의 재산을 훔쳤는데 그것을 갖다 주려고 해도 어디 있는지 몰라서 갖다 주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삭개오도 아야 절반을 갈라서 갚아 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 보상입니다.
바로 二十년 전인가 봅니다. 신문을 보니까 방탕하게 살던 청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 후에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해서 많은 죄악을 쌓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갚을 수 있을까 해서 특별히 걸인을 구제하는 사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종의 사회적 보상입니다.
사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의 영향 결과는 나만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도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 다 갚을래 야 갚을 길 없습니다.
여러분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책을 읽은 이 있을 줄 압니다. 거기 어떤 귀족 청년이 자기 숙모네 집에 있는 가련한 여자 카츄샤라는 여자를 유인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가련한 여자는 그 귀족 청년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마지막에는 점점 떨어져서 창녀가 되고 나중에는 살인과 강도 혐의로써 어떤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무심하게 재판정에 배심원이 되어서 들어가 보니까 어떤 여자가 재판을 받는데 가만히 보니까 몇 十년 전에 자기가 정조를 유린했던 가츄샤라는 여자입니다. 이 청년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의 일시적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여자의 일생을 그르쳤습니다.
이 청년은 무엇을 해서든지 갚으려고 애써 보고 그 가운데서 좋은 사람 만들어 보려고 애쓰면서 시베리아까지 따라갔었으나 헛되게 돌아옵니다. 그런고로 죄는 무섭습니다.
특별히 청년 시대에 죄를 삼가야 할 것은 청년 시대에 죄는 잘못 지으면 나만 망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일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청년이 그 후에 회개해서 그 영혼의 구원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끼친 죄의 결과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 까지는 갚아 주어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교사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독일의 유명한 선교사, 그는 철학박사, 신학박사, 음악 박사, 의학박사인 그는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 가서 흑인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수술을 해주고 흑인과 같이 살면서 그 일생을 그 부인과 같이 살면서 그 흑인들에게 선교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슈바이처가 독일 안에서 유명한 대학 교수 자리를 다 내놓고 아프리카로 간 동기 가운데 중요한 동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번은 어떤 공원을 지나갈 때에 구기 흑인의 동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흑인의 동상을 볼 때 과거 一00년간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지은 죄악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들 무지하다고 잡아다가 종으로 팔았습니다. 가서는 학대했습니다. 짐승처럼 대우했습니다. 착취해서는 돈 모아다 자기네 나라에서 잘 살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과거 백년 동안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에게 지은 죄를 만분지일이라도 보상해 볼 수 없을까? 그 죄악을 갚기 위해서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이것도 사회적 보상입니다.
참 회개에는 열매가 있고 실행이 따릅니다. 어떤 목사님 이런 말씀했습니다. 어떤 작은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도무지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아침 장로 한 분이 일어나서 하는 말씀이 이번 부흥회에 은혜가 없는 것은 모두 다 제 죄인 줄 압니다.
제가 기 교회 장로라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어떤 직분하고 한 교회 있으면서 담을 막고 서로 외면하고 지냈습니다. 제가 이제 이 죄를 자복 합니다. 하면서 그 사람에게 가서 자기 잘못을 자복하고 화목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그 교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참 회개는 열매가 있습니다.
금년 새해를 당해서 우리가 다 새로운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가정으로나 교회로나 새로운 축복을 받아야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가가 새 축복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러나 그저 새해라고 모든 것이 그저 새로워지는 것 아닙니다. 새해라고 그저 새 복이 임하는 것 아닙니다.
시편 六十六편 十八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리라.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달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누가 마음속에 죄악을 품었는지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사야 五十九장 一-二절에『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저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구원 못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귀가 가리워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민족 사이를 막았습니다. 또 반면에 역대기 하 七장 十四절에『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했습니다. 그 땅을 고칠지라. 내 이름으로 일컬어는 내 백성을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는다고 하는 너희들, 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겠다고 한 말씀은 나라에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요엘 二장 十三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仁愛)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니』했습니다.
우리가 옷을 찢지 말고 참으로 마음을 찢자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서 내리려고 하시던 재앙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개인이나 가정, 교회, 우리 전 민족이 새 해에 축복 받는 길은 오직 하나인데 회개의 좁은 길입니다. 참 회개는 후회만이 아닙니다. 아는 것, 죄를 무서워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의 자리에서 떠나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죄를 보십니다. 거기 죄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래야 줄 수 없습니다.
이 새 해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이 일년 동안을 걸어가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