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2:7 - 11절 설교 모음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 /요일2:7-11/ 조정의목사
2021-09-01 08:51:41
347년경 태어난 4세기 신학자 제롬은 사도 요한의 일화를 들려 준다. 사도 요한이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해져 더 이상 설교할 수 없게 되자, 에베소 교인들 앞에서 한 마디 권면하는 것으로 만 족하게 되었는데, 그는 권면할 때마다 “어린 자녀여, 서로 사랑 하십시오”라고 늘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이 말에 식상한 청중이 견디다 못해 왜 이렇게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냐고 묻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것만 잘 실천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데이비드 잭맨, <요한서신강해: BST>, 11p).
요한은 그만큼 사랑을 강조한 사도이다. 스스로를 “주가 사랑하 는 제자”라 칭했고(요 19:26), 요한일서에만 53번 “사랑”을 말 했다(요한복음 포함 110번, 신약 전체 거의 30%). 그런데 이 “사랑”은 영생과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 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불어 믿음으로 사랑의 사귐을 누리는 것인데(요 1:1-4; 요 17:3),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 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명령에 즐거이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사랑을 표현한다(1:5-2:6).
그러면 사랑의 주와 동행하며,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 사랑하지 않아도 될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성도를 심히 미워하고 성도 간에 갈등의 불이 꺼지지 않고 내 안에 성도를 향한 사랑이 턱없이 부족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빛과 어둠을 나누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 현 주소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리신다. 이 말씀을 통해 형제를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영생을 가진 자에게 얼마나 비정상 인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백하여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돌이키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길 바란다.
1. 이유1: 성도 사랑은 예수님의 명령이다(7-8)
예수 안에 살면서 성도를 미워해도 될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라고 분명히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과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밝히신 뜻을 예수님이 변경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옛 계명 을 통해 분명히 밝히신 뜻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7절)
요한은 먼저 편지의 독자들을 가리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른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친 밀하고 진실한 말로 독자에게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를 위해 꼭 필요한 교훈을 준다.
요한은 자신이 지금 그들에게 쓰는 것이 새 계명이 아니라고 말 한다.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 그들이 들은 말씀이다. 참으로 하 나님은 옛 언약의 백성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때부터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고 명하시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고 돌판에 새겨 말씀하셨다(출 34:28; 신 10:4).
또한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 첫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고(마 22:37), 둘째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이다(마 22:39). 사도 바울도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 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갈 5:14).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한결같으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하기를 기뻐하신다. 그것을 분명하게 명령하셨다. 어쩌면 당신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노력은 하겠지만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고 여긴다. 하지만 계속된 요한의 설명에 주목하라.
요한은 성도 사랑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신 그리고 그들이 말씀 을 통해 들은 옛 계명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8절을 보면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예수님께서 그렇게(“새 계명”)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은 요한을 포함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의 “새 계명”은 내용에 있어선 달라진 게 없다. “서로 사랑 하라.” 하지만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근거와 본과 원동력이 되어 주신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①근거: 예수님 없이 우리는 하나님도 성도도 사랑할 수 없다. 하 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사랑의 사귐을 누리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9). 성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는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벧전 1:2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영혼이 깨끗함을 받아 진리를 순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진실한 성도 사랑을 할 수 없다. 그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사랑의 근거다.
②본: 예수님은 서로 사랑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은 새 계명이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고 말했다(8절).
예수님(“그”)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하나님 사랑의 본, 겸손히 발을 씻기고 우리 죄를 담당하신 형제 사랑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에게 “사랑”이 온전히 나타난 것처럼(참된것 = 입증 된 것, 발견된 것), 그분 안에 사는 우리에게도 참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③원동력: 요한은 8절 마지막에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비춰주시므로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할 수 있다.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 자는 예수님께 서 사랑의 빛의 원동력이 되시기 때문에 그 빛을 성도에게 반사 할 수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으며 또한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처음 이 계명을 주실 때의 의도대로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다”(309페이지).
그러므로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옛 계명에 예수 님으로 인해 새로운 방식으로 순종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몰아내시고 성도 사랑에 순종할 수 있게 하셨고(근거), 성도 사랑의 완벽한 본을 보여주시며(본), 계속해서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빛을 우리 안에서 비추고 계시기 때문이다(원동력). 예수님 의 계명은 분명하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순종에 필 요한 모든 자원이 되신다. 그래서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성도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예외도 될 수 없고 핑계도 댈 수 없다.
2. 이유2: 성도 사랑은 예수 안에 사는 증거다(9-11)
이후 요한은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당신은 영생을 누리면서 성도를 미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생 을 가진 자의 확실한 증거가 성도 사랑이기 때문이다. 중립지대 가 존재하지 않는 빛과 어둠의 비유로 요한이 이를 설명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빛 가운데 있다”고 주장한다(9절).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 즉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영생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다(현재형).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 자에 대해 요한은 “지 금까지(still, “여전히”, “아직도”) 어둠에 있는 자”라고 판단한다. 다시 말해 참빛이신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실상 예수님 밖 곧 어둠에 있는 자라고 정죄한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증오, 폭력, 분노, 비방과 같은 외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한 주석가의 말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 의 부재”로도 나타난다(데이비드 잭맨, BST). 성도에 관한 철저한 무 관심, 공감이나 동정도 없고 사랑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 것 역시 어두움 가운데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사는 자의 증거는 무엇인가? 10절을 보라.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10절)
참빛 곧 예수님 가운데 거하는 자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다 (현재형). 앞에 나온 미움이 그 사람의 특징을 규정하듯, 형제 사 랑도 빛 가운데 거하는 이의 참 특징을 규정한다. 그는 형제자매 를 사랑하는 삶을 산다. 분명히 그것이 삶에서 보인다. 특별히 요 한이 말한 “형제”엔 넓게 원수와 이웃도 포함되나, 좁게는 예수 안에 같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공유한 형제자매를 의미한다.
넓게는 이웃 사랑, 좁게는 성도 사랑이 당신이 예수 안에 산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러면, 내가 지금 성도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외적으로) 주중에 전화를 많이 걸고, 자주 성도를 찾아가 만 나고, 성도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 시간과 물질을 성도를 위해 사용하는 것, (내적으로, 성품적으로) 성도와 관계 속에 미움과 분노, 자랑, 시기 등 죄를 멀리하고 오래 참고 온유하고 이타적으로 성도의 유익을 구하는 것 등이 될 것이다(고전 13장). 하지만 특별히 요한이 주목하는 성도 사랑의 열매는 다음과 같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 곧 빛 가운데 거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 이 없다(10절).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다.
거리낌(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 13번 정도 언급되는데, 누군가 를 “넘어지게 하는 것”(마 13:41; 16:23), “실족하게 하는 일”(마 18:7; 눅 17:1), “거치는 것”(롬 9:33; 11:9), “걸림돌”(갈 5:11; 계 2:14) 등을 말한다. 참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앞이 나 성도 앞에 죄의 덫이나 미끼를 두지 않는다. 죄의 유혹에 스스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 결과 다른 성도가 죄에 넘어질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 요한이 여기서 주목한 성도 사랑은 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앞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 영생 을 가진 자는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 속에 죄를 두는 자, 곧 죄로 자기뿐 아니라 성 도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그 안에 어둠이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 과도 사귐이 없는 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성도 사랑이 예수 님 안에 사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 고 예배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면 서도 성도와의 관계에 많은 걸림돌을 두고 제거하지 않고 아무렇 지 않게 사는지 모른다.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이 별개로 분리 된 것처럼 여기는 성도가 얼마나 많은가? 틀렸다. 그럴 수 없다!
마치 상의는 멋진 양복을 입었는데 하의는 발가벗은 사람처럼 당 신과 하나님의 사귐이 아무리 기품있고 빛나고 아름다워 보여도 성도(가족 포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인이다. 요한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분명히 말했다(요일 4:20). 그만큼 성도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직결 되어 있다. 다음 말씀이 내린 평가를 보라.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11절)
그는 분명 어둠에 있다. 어둠에 속한 자다. 그래서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는 말은 마음이 죄로 완고해졌다는 것이다(요 12:40).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과 성도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참빛 예수님 안에서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도 형제자매 에게 그 빛을 반사하지 못한다면, 분명 중간에 그 빛을 가로막는 어둠 곧 죄가 있다는 말이다.
상류에서 흐르는 물이 막히면 하류 로 흐르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이 형제자 매에게로 흘러가지 않는 사람은 중간에 죄라는 쓰레기가 꽉 틀어 막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죄가 돌처럼 굳어졌다는 말이고,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면 슬프게도 처 음부터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란 게 밝혀진다.
3. 적용
설교 제목이 “예수 안에 살면서 형제를 미워해도 될까?”이다. 원래 제목을 “미워할 수 있을까?”로 지었다가 바꾸었다. 우리는 성도를 미워할 수 있다. 여전히 옛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성도를 미워해도 된다’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형제를 미워하는 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과 함께 사는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이가 사랑하지 않는건 비정상이다. 하나님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는 자는 사랑하는 자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오랜 세월 미워하고 있는 성도가 있지 않은가? 어떤 이유로든 거리를 두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 간에 불협화음을 내며 살고 있지 않은가? 회개하고 돌이켜라. 하나님께 자백하고, 성도에게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예수 안에 사는자 답게 서로 거치는 것을 두지 말고 뜨겁게 사랑하자. 이것만 순종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요한일서 강해 (10) - 사랑이라는 테스트 /요일2:7-11/ 김형익 목사
2021-05-13 08:38:07
1.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요한일서는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주제를 다룹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으니(1:5), 빛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이고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말이지요. 그래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되며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자백함으로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1:5~2:2).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 다음에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2:3~6). 이것이 지난 주일에 살펴본 말씀입니다. 세번째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10절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라고 말씀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참된 그리스도인을 식별하는 테스트로 제시한 사도는 이제 그 계명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다룰 한 가지 중요한 계명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5절에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지니라”고 했는데 여기 ‘산다’는 말의 본뜻은 ‘거한다’, ‘거주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 40번 그리고 요한서신에서 27번 사용되었는데, 사도 요한에게 이 단어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거한다는 것은 영구적으로 깊이 연합된 삶을 의미하는 말이고 6절에서처럼 그가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형제 사랑을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행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2. 옛 계명 = 새 계명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사도가 논지를 전환하거나 주의를 집중시킬 때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이제 계명 중에서도 하나의 계명, 곧 사랑의 계명을 다루려고 하기에 독자들의 주의를 모으는 사랑 어린 부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는 약간 모순적으로 들리는 말을 꺼냅니다.
A. 새 계명인가, 옛 계명인가?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계명이 사랑의 계명을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마는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는 지금 새 계명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옛 계명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새 계명은 무엇이고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사도가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금 이 편지를 읽게 될 독자들이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그들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계명을 말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뿐 아니라 구약은 분명히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통해서 율법이 사랑의 계명 임을 보여줍니다. 두 구절을 각각 보지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주님께서도 이 말씀들을 가지고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39).” 이점에서 보면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옛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B.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
또 사도는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던 바로 그 처음부터 그들이 복음과 함께 들었던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 마지막 밤에 주님에게서 들었던 새 계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이 주님으로부터 이 새 계명을 들은 지도 약 50년이 지났습니다. 이점에서도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옛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사도는 이어서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좀 전에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는, 율법이 말씀하고 있는, 그리고 이들이 처음에 복음을 들을 때부터 들어서 배웠던 옛 계명 임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또한 새 계명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일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주님께서는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물어야 합니다.
C. 왜 새 계명인가?
주님께서 새 계명을 준다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율법의 핵심인 이 계명을 온전히 실현하심으로써 사랑하라는 이 계명의 전혀 새로운 차원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또한 십자가에 당신을 못박는 로마 군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셨고 죄인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보내실 성령님을 통하여 영생을 주심으로써 신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행하고 살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제자들은 주님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9절에서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 안에서도 사랑은 참된 것이 될 것입니다. ‘참되다’는 말은 ‘실재가 되다,’ ‘온전케 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이 세상이 아닌 교회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새’ 계명이라고 말할 때, ‘새로운’을 뜻하는 형용사 ‘카이노스’(kainos)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새로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있던 것이 성질상 혹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되었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되다’는 말씀은, 이제 새 계명이 말씀하는 바, 진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했고 신자들 안에서도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D.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춘다.
사도는 참빛이 벌써 빛을 비추었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참빛이 세상에 왔다고 표현했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어둠이 물러가는 것은 참빛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다 지나갔다거나 언젠가 물러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이 이미 물러가기 시작했고 물러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은 빛 가운데 거하는 신자들 안에서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3. 형제 사랑으로 시험되는 신앙
이제 9~11절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사람의 신앙은 말이 아니라 형제 사랑이라는 테스트를 통해서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A. 형제를 미워함으로써 어둠 가운데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
“나는 빛 가운데 거하여 살고 있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형제를 미워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오해하지 말고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여기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말은 어느 순간, 또는 어느 기간 어떤 형제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씀하는 것은, 형제를 미워하는데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미움이 그가 살아가는 기조이고, 형제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형제를 미워함으로써 자기 말처럼 빛 가운데 있는 자가 아니라 어둠에 있는 자임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11절에서 계속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단지 어둠에 있을 뿐 아니라 어둠에 행하는 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이 사람의 영적 주소가 어둠이라는 말이고, 이 사람의 영적 활동 영역이 어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뿐 아닙니다. 그는 갈 곳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는 삶을 지배하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신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그 인생에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신자는 자기가 가야할 인생의 종착지를 압니다. 신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신자를 지배하는 삶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불신자의 비극은 갈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둠에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어둠에 행하기 때문에 갈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비참한 말이 뒤에 나옵니다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무서운 말입니다. 어둠에 있고 어둠에 행할 뿐 아니라,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불순종은 결정적으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지속적인 불순종과 지속적인 미워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은 시각을 왜곡시키고 눈을 멀게 하여 참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삶 속으로 그를 던져 넣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쓰여지던 1세기 말, 야만인들은 자기들의 적들의 눈알을 뽑아 눈을 멀게 하는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을 가장 치욕스럽게 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서신을 읽던 1세기의 독자들에게 ‘눈을 멀게 한다’는 말은 매우 실제적인 말이었습니다. 어둠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가 사용하는 어둠은 영적 실재입니다. 그리고 눈을 멀게 할 만큼 공격적입니다. 어둠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인생을 점점 더 혼돈과 무질서 속으로 데려갑니다.
어둠의 영역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점점 더 자신의 죄를 발견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어둠에 있고 어둠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일이고 성경은 그것을 경고합니다. 눈이 먼 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어둠 가운데서 형제를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자기 기만입니다.
B.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빛 가운데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
그러나 사도는 반대의 경우를 10절에서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형제 사랑이 그가 어디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도는 한 마디를 더 붙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거리낌’(skandalon, 추문을 의미하는 영어 scandal의 어원)이라는 말은 ‘덫,’ ‘미끼를 달고 있는 막대기’ 혹은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돌부리/원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대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마 18:7; 눅 17:1; 갈 5:11; 마 16:23; 롬 16:17; 고전 1:23).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그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여기서 거리낌(걸려 넘어지게 하는)의 대상이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문맥상, 이 구절에서 거리낌의 대상은 그 사람 자신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형제를 사랑함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요소를 가지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가 넘어지지 않는 것은 빛 가운데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할수록 그는 믿음의 공동체에 더 깊이 결속하게 되고, 이 결속은 점점 더 그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10).”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형제 사랑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때 그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4. 교훈과 적용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적용적으로 생각하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A.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첫째로 본문이 말씀하는 형제 사랑은 단지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말에 있지 않듯이, 느낌에 있지도 않습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드러난다고 앞에서 사도는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계명,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느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행함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계명입니다. 명령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선택 사항이거나 권장 사항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존재 증명입니다. 형제 사랑은 내가 어둠 가운데 있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고 있으며 빛 가운데 행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방식입니다. 형제 사랑은 단지 최소한의 선만 넘기겠다는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의 논지는 거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서로와 세상에게 알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모든 사람이 형제 사랑으로써 교회를 교회로, 신자를 신자로 알아볼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음으로써,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배움으로써, 가만히 앉아서 기도함으로써 세상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아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느낌이 아니고, 내가 내 스타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내어주는 것이고, 내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고, 내가 형제를 섬기기 위해서 손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형제 사랑은 느낌이 아닙니다.
그리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형제 사랑이라는 테스트를 통과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게 형제 사랑이라는 관문을 지나 빛 가운데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손해와 불이익과 불편함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형제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고 계십니까?
B. 미움은 덫이다.
또 하나의 부정적 차원의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움을 사소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는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1~22).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의 뒤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요일 3:15).
이 말씀의 빛에서 볼 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도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11).” 미움은 어둠에 살고 있음을 증명할 뿐 아니라 눈을 멀게 하여 점점 더 우리의 삶을 피폐하고 비참하게 만들어갑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한 말씀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속에 거리낌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넘어지게 만드는 거리낌 때문에 이 사람은 어디서도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즉,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을 넘어지게 하고 여러분의 눈을 점점 멀게 하고 갈 곳을 알지 못하게 하는 덫이고 거리낌입니다.
C. 형제 사랑은 성숙한 신자만의 특징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얻는 교훈은, 형제 사랑은 성숙한 신자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모든 참된 신자의 특징입니다. 그가 영적으로 어리든지 성숙하든지 신자라면, 그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가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신자들의 몫이라는 인상을 받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 사랑은 신앙이 성장하는 어느 단계부터 행하는 덕목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을 듣던 처음 순간부터 우리가 듣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듣고 배우고 순종해야 할 계명으로 가진 것이 형제 사랑이라는 새 계명입니다. 이점에서 저도 여러분에게 옛 계명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참으로 빛 가운데 거한다면, 우리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형제 사랑이라는 이 계명을 온전히 실현하고 성취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게만이 아니라 믿는 우리에게도 참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모든 주의 자녀들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형제 사랑, 자기를 주는 사랑은 결코 가끔 한 번씩 하면 되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빛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양식이고 습관이고 태도이며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안에 거리낌이 없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길은 안전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형제 사랑 안에서 우리 걸음을 안전히 인도하시고 교회를 풍성하게 하시며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을 알게 하시는 복된 은혜를 더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빛 가운데 거하십시오 /요일2:7-17/ 김병삼목사
2018-04-14 04:45:29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새 계명으로 산다는 것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보면 한 가지 맥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비교하는 어법을 사용하는데, 계명과 말씀, 죄와 구원, 어둠과 빛, 사랑과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단어의 사용이 다를 뿐이지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변화’입니다. 옛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죄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가 되고 성화의 삶을 살게 되면 명백하게 형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명하 목사가 쓴 [오늘은 시작하기 좋은 날입니다]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한다.”
하루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서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제자를 천천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제자는 창밖을 내다보고 난 뒤 스승에게 말했다.
“어린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뛰노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제자에게 일렀다.
“이번에는 거울 앞에 서 보거라. 그리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제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스승에게 말했다.
“스승님, 거울 속에는 제 모습만 크게 보입니다.”
그 말을 듣고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거울이나 유리창이나 똑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유리창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볼 수 있고, 거울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모습만 볼 수 있겠느냐? 그것은 거울 뒤에는 은칠이 되어 있기 때문이지. 네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을 덮고 있는 은칠을 벗겨버려야 한다. 네 마음이 깨끗해져야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요한은 계속된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심령에 가려진 은칠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있습니다.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 밖에는 보지 못하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빛 가운데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본문 7~8절이 이러한 맥을 간략하게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여기서 잠깐,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를 살피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5~40절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주 명확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죄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런 맥락에서 보면 7절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지금 요한이 쓰고 있는 것은 이미 들은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을 통해 구약의 제사 ‘화목제물’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율법이 필요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완성을 향해 나가게 됩니다.
구약의 계명은 신명기 6장 4~9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니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제사법이 발전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제사를 통해 표현하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관심을 ‘이웃 사랑’으로 넓히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미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사랑은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체험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7절에 보면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별명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저자 사도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를 가리켜서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열심은 있었지만,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누가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까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위해 순교할 때,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어머니 마리아를 섬기는 일을 수십 년간 지속합니다.
그 시간을 통해 요한이 깨달은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사역하는 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을까요?
참 신기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거는 일보다,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웃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이루는 것은 ‘분부하신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랑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도 요한이 경험하고 깨달은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지난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도 요한의 말년에 몸이 불편하고 병약한 상태에서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들것에 실려 설교했습니다. 그때 그가 습관처럼 했던 말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병약한 말에 사람들이 은혜를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진리이기 때문이고, 빛 가운데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증거였기 때문이죠.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초대교회를 보며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이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며 2장 1절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이런 편지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옛 계명과 새 계명이 ‘사랑하라’는 것에서는 똑같은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지경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과 옛 계명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일에 예배를 드렸다면,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는 증거
우리가 새 계명을 지킨다는 명백한 증거가 드러납니다. 아니 우리가 말로만 계명을 지킨다고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거짓임과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이 빛 가운데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9~11절을 보겠습니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데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죠.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한 사람에게 걸려서 모든 사랑을 잃어버리죠.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지나며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교회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비극적인 교파의 분열이 일어났고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믿음의 방식과 교리적인 문제들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고, 이긴 자가 강단을 차지하고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다음 이긴 자가 강단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갈라진 사람들이 한쪽에서는 찬송을 부르고, 한쪽에서는 기도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예배를 드리며 서로를 미워했습니다. 도저히 서로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성장했지만, 교회 안에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사람을 버렸습니다.’
아주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이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과 ‘거짓’의 증거입니다.
종편에 [호박씨]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한 번은 세시봉으로 알려진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 씨가 나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이 사람들은 어린 시절 함께 교회 성가대를 했던 멤버들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조영남 씨가 방송에서 재미있게 말을 한다는 것이 그만 윤형주 씨에 대한 인신공격이 되었고 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이 하기로 했던 공연도 취소할 상황에 놓이게 되죠.
방송관계자들과 세시봉 멤버들도 긴장하고 있을 때, 조영남 씨가 윤형주 씨에게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너는 교회 장로고 나는 평신도인데 네가 품어야지.’ 그리고는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모인 식사자리에서 윤형주 씨는 ‘함께 기도합시다’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됐다고 말입니다.
세상이 참 힘들어하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요?
교회에서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나오면 이웃 사랑이 안 되는 것이죠. 사도 요한은 이것이 아직 어둠 가운데 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참 힘든 것이 선교사 간의 알력입니다. 목숨을 걸고 선교하는데, 함께하는 선교사님 간의 사랑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틀리면 사랑할 수 없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하용조 목사님의 책 [예수님과의 사귐]에 보면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감옥 안에서 사람들은 딱딱한 빵과 물로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기본적인 조건이 열악하여 사실 예배드릴 환경이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잡혀 온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자신이 먹을 빵의 십 분의 일을 떼어내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렇게 모인 빵조각들은 그날 고문을 당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형제에게 먹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진정 빛 가운데 거하는 형제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렇게 빛 가운데 거하는 형제들의 모습이 적은 것에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빛은 빛으로서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것은 빛입니다.
어둠이 빛에게 말합니다.
“봐! 여기는 캄캄하지?”
그런데 빛이 어둠에게 다가가자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어둠은 빛을 더 어두운 데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빛이 다가가자 어둠은 또 사라지고 맙니다.
헬무트 틸리케의 [현실과 믿음 사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소금과 빛에는 공통적인 중요한 속성이 있다. 쓸모 있게 되려면 둘 다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다른 무언가와 섞여 스스로 희생되어야 한다.
빛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소금은 음식 속에 녹아 없어진다.
소금을 조금만 뿌려도 그 많은 반죽 전체가 변한다. 순전히 양으로 볼 때 세계 인구 전체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다량의 음식물에 넣은 소금 몇 알갱이에 견줄 만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할 수 있다. 너무 소수이며 가정과 일터와 지인들 사이에서 고립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고작 소수의 보잘것없는 남녀들이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맥이 빠지고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분은 “너희는 세상의 거대한 무리이니”라든가 “나의 그리스도인 너희는 일반 대중과 똑같아져 세상 시민이 되어야 하나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대중 속의 한 줌 소금이니”라고 하셨다. 본질상 그것은 소량이다.
소금이 그 책임을 다하려면, 소금 통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소금 통 안에 있는 소금은 안정감을 느낄지 모릅니다. 다른 소금과 함께 있기 때문이죠. 소금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함이라고 자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짠맛을 잃는 것은 음식물에 들어간 소금이 아니라 소금 통에 남아 있는 소금입니다. 왜냐하면, 짠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죠.
바람이 불면 등불이 꺼질 것 같지만, 등불은 다시 살아납니다. 오히려 바람이 불지 않는 곳, 산소가 없는 곳에서 등불은 꺼지고 맙니다. 불이 꺼진 초는 지저분한 촛농과 심지만을 드러냅니다. 불은 타야 빛이 납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물러가고 ‘거리낌’이 없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이런 표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이 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사람들 앞에 거리낌 없이 설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평가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함’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가 서는데 ‘장애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형제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서로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비판하면서 금이 가는 일, 서로를 판단하므로 정죄하는 일, 잘못을 지적하므로 상처를 건드려 날카롭게 하는 일 같은 것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에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고(9~10절),
다른 하나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오는 가장 큰 특권은 17절의 말씀입니다. 세상 것은 모두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남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이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형제를 사랑하려고 해야 빛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해야 어둠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는데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구별하여 아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 거하지 않으면, 어떤 것이 세상적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되시기 때문에 빛 가운데서 어둠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병원에 견학을 갔는데 어떤 꼬마가 자꾸 손을 씻는 간호사를 보면서 물었답니다.
“왜 저렇게 손을 자주 씻나요?”
그러자 선생님이 아주 지혜롭게 대답을 합니다.
“응, 간호사 선생님은 건강을 사랑하고 병균을 미워하기 때문이야!”라고 말이죠.
바로 말씀에 적용할 수 있겠죠.
영적 성화는 형제를 사랑하고 세상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란 물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세상’입니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와 사단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사단이 다스리는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을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 것이란 세상의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면, 사단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한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하라고 권면합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의 눈과 귀가 무엇을 향해 있는지를 분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흔히 ‘학’을 고고한 동물이라고 말을 합니다. 다리 하나를 들고 조용히 서 있는 모습, 그리고 하얀색의 깃털, 우아한 몸짓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학이 조용히 발을 들고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발밑에 있는 개구리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개구리가 지나가면 여지없이 부리로 낚아 채 버립니다.
우리 인생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지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생적으로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어둠에 거하는 자요,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사단이 다스리는 나라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은 죄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일(열매)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보세요.
창세기에 나와 있는 최초 인간의 타락은, 인간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창세기 3장 6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육신의 정욕) 보암직도 하고 (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이생의 자랑) 나무인지라.
이 세 가지는 사탄의 전형적인 무기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빛에서 어둠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미혹했단 사탄의 전략도 이 범주에 속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육신의 욕망이죠.
두 번째로,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의 영광을 주겠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욕심이 아닐까요?
세 번째로,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삶의 자랑거리를 만들라는 욕망이겠죠.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적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취약한 부분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먹는 것, 게으름, 혹은 성욕 등 어디에 약한지를 말입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중에 보석, 옷, 혹은 명예를 탐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또한,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자랑하면서 사는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 12~14절에서 세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여기서 ‘자녀’라 함은 신앙을 막 시작한 초신자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라 함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그리고 ‘청년’이라 함은 하나님께 헌신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초대 교인들에게 세상에 속하지 말고, 어둠에 거하지 말며 세상을 이기라고 권면합니다.
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 받았음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기신자들은 태초부터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청년들은 악한 세력을 말씀으로 이기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가운데 살며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자녀와 아비와 청년들에게 두 번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12절은 과거형으로, 14절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전에 교인들도 그렇게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악과 싸워 이긴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육신의 정욕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담이 유혹에 넘어진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욕망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이 비췰 때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맥스 루케이도의 [하나님의 캐스팅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의 이야기가 나와 있더군요.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나가는 다윗이 하는 말들을 분석해 보니 9:2의 비율로 하나님과 골리앗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6절에서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은 그 이후에 더 이상 골리앗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어떤 실력을 가지고,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그가 들고 있는 칼이나 방패에 대하여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비결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참 많은 골리앗이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이 있고, 죄의 권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힘이 얼마나 센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일들입니다. 이로써 세상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서 눈이 뜨입니다 /요일2:7-17/ 유기성 목사
2016-08-24 10:28:48
한 자매가 신학생과 교제하게 되어, 부모님께 인사시키려고 집에 데려왔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뒤, 어머니는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어볼 것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청년을 서재로 불러 물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딸아이와 살 집은 장만할 수 있겠는가?" 청년이 대답합니다. "열심히 주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겁니다." 아버지가 다시 묻습니다. "결혼하려면 돈이 필요할텐데?" "열심히 사역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겁니다."
아버지는 약간 당황해하며 또 다시 묻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을 낳아 키울 대책은 있나?" 그러자 청년이 확신있게 또 대답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테니까요." 아버지가 어떤 질문이 해도 답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겁니다." 아버지가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여보, 어때요?"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청년 말이야. 문제투성이야. 마땅한 직업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는 것 같아. 한 가지 긍정적인 건 저 친구가 나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아?"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보는 것이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도 차이가 엄청납니다. 보는 눈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지난 임원훈련 때 오신 황병구본부장께서 요즘 청년들이 교제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제를 시작한지 100일 되는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시계상 시간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건의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사귄지 100일냐 200일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처음 손잡은 날이 언제냐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과 손잡았으셨나요? 언제 입마춤을 하셨나요?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과 사귀며 사랑하는 관계가 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없어지고 사람이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9절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
“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산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형제 자매 중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과의 사귐, 주님과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1절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이 가리워 있는 것입니다. 눈이 왜 가리워있습니까? 마귀가 눈을 가리운 것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므로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정신차려야 합니다. 이 말씀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괜히 미워하겠습니까? 미워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 미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그저 미워하는 사람이라고만 하였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미움, 그 자체가 영적인 뿌리가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살 정도로 잘못한 사람도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미움의 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영에 사로잡히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저 사람 내 버려두면 큰 일 날텐데.” 걱정하는 사람은 미움에 사로잡힌 자신이나 걱정해야 합니다. 미워할수록 악은 더 힘을 받습니다. 악한 영의 양식이 미움이기 때문입니다.
임원훈련에 오셨던 조현삼목사님께서 교인들이 싸우기에 왜 싸우냐고 하니“다 잘해 보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싸우지 말고 보통만 합시다. 하고 외쳤답니다.
아직도 미운 마음을 풀리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에게 말씀합니다.
12절 자녀 된 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미운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화 낼만하니 화를 내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셨다면 십자가가 가능했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속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미워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구원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13-14절에서 두 번이나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이라고 말씀하면서 죄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 ...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마귀를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마귀의 종노릇한 데서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서 죄사함을 받음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맺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이루어졌습니다. 죄 뒤에서 우리를 지배하던 마귀가 꺽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지 알아야 합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오신 성령 하나님,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시 37편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1절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하시고는 10절에 가서는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눈 앞에서 다 사라진다는 약속은 믿어지지 않는 약속인데, 이 약속이 목사님께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어느 순간 주변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악인이 눈에 띄지 않는 것입니다. 미운 교인이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 때가 어떤 때일까요? 실제로 교인들이 다 착해져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은혜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미움이나 비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입니다. 큰 일이 벌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이 안보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빨리 십자가 은혜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자세히 살펴도 악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또 하나 깨달아지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5절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해야 되겠다는 끔과 소원을 가진 사람에게는 현실도피적인 생각이 아니냐, 염세주의적 생각이 아니냐, 소극적 세상관이 아니냐 불만스러울 것입니다.
자매에게 “남자는 다 늑대야”, 형제에게 “여자는 다 여우야” 하는 식처럼 들립니다. 이런 자세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결혼하는 신부에게 “이제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안돼”, 신랑에게 “이제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안돼.” 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옳은 말입니까?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탕자에게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노아가 가족들에게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할 때는 어떻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롯이 아내와 딸들에게 “우리가 비록 소돔과 고모라에 살지만 이 땅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하면 안돼.” 할 때는 어떻습니까?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에 참여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결코 세상을 사랑하면 안된다.”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단들이 횡행할 때가 될 때 “아무 집회나 모임이나 가면 안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이해되고 통하고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15절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는가? 세상으로부터 왔는가? 분별해야 합니다.
16절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사라져 버릴 것인가? 영원히 남을 것인가? 분별해야 합니다.
17절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마음에 돌덩어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설교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사랑하는 선교사님의 글 하나를 읽게 되었습니다.
조동욱 선교사님은 인도 실리구리에서 16년간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제 60세도 넘었습니다. 지난 한달간 한국을 다녀 가셨습니다. 그런데 인도로 떠나시기 전날 페이스 북에 글을 하나 올리셨습니다.
장로수련회 중에 이 글을 읽으며 저도 울고 장로님 권사님들도 다 울었습니다.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목은 [내가 인도로 되돌아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였습니다. 제목에서 마음이 쿵 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한 달 동안의 모국 방문을 마치고 인도 선교지로 들어가기 하루 전날 새벽기도 시간, 이젠 인도로 돌아가야지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인도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아찔해진다.
인도의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먼지 쌓인 시골 길을 걷기엔 나의 건강이 너무 약한 듯하다. 에어콘이 고장난 선교 짚차를 타고 산골을 치닫기엔 이제 너무 버거울 것 같다. 무면허 운전사가 몰던 차에 부딪혀 피투성이가 된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 바닥에 내동댕이 쳐 누워있던 그 때, 그날따라 궂은 장마비는 왜 나의 마음을 그토록 서글프게 적시었든지, 생각할수록 인도는 무서워진다. 내가 왜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 가야 하나?
나는 한 때 낯선 인도 땅을 마치 정든 고향 길 걷듯이 아무 두렴없이 다녔다. 그런데 지금 엉뚱한 생각이 내 마음에 자리 잡는다. 그래 인도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엉뚱한 물음들이 쉬지 않고 솟아난다. 네가 반드시 인도로 되돌아 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깊이도 알 수 없는 구렁텅이 같은 힌두교와 씨름하며 숲 속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처럼 앞길을 가로 막는 인도 정부와 힌두교 열심당원들을 헤치고 힘들여 그 땅에 들어 가야 할 이유가 뭐지?
인도 땅을 벗어나는 데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가장 먼저 가족들이 떠오른다. 선교사 가족이라는 명분? 난 이미 그런 명분이나 명성이란 것과 담을 쌓은 지는 오래거든.
인도에 남아 있는 아내? 염려할 것 없어. 전화 한 통이면 언제든지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지. 아이들? 그들은 선교지에서 겪을 것은 모두 다 겪고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지 않냐?
인도에 이미 뿌려 놓은 사역들은 어떡할 것이냐고 ? 걱정할 것 없어. 그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냐? 신학대학을 설립한 것이며 그리고 학장이란 자리? 그건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는 홀가분함이 더 할 걸. 개척해 놓은 교회들은 어떡하냐고? 이미 세워둔 목회자들이 잘 이끌어 나갈거야 .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도 편안해 지는 것 같다. 주님께 기도했다. 아무래도 그 분의 확답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주님, 이제 인도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죠? 주님, 한 마디만 그렇다고 말해 주세요. 내가 인도에 들어 갈 이유가 없다고. 그만하면 잘 했다고 말해 주세요.’
그러나 주님은 엉뚱한 질문을 내게 던져왔다.‘너 정말 인도로 되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정녕 그 땅을 떠나고 싶으냐?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하고 쉽게 떠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좋아, 네가 인도를 떠난다면 나도 인도를 떠나랴?’
나는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계속 속사포 처럼 물으셨다.‘네가 인도를 떠난다하여 나도 인도를 떠날 것 같으냐?’ 순간 아찔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인도를 포기하지 아니하심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인도를 포기한다고?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나는 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하나님,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지 아니 한 인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은 인도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순간 또 다른 강한 성령의 음성 들려 왔다.‘네가 자신감이나 용감함 때문에 인도를 다시 밟아서는 안된다. 네가 인도로 되돌아 갈 단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수많은 인도의 영혼들 때문이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위해서 뿐이다.’
갑자기 내 속 깊이 통곡이 터져 나왔다.‘주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주님, 아무 조건없이 제가 인도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는 땅과 그 땅의 영혼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그 땅을 다시 밟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처음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감격하며 황소같은 목소리로 기도하며 뜨거운 눈물로 교회 마룻바닥을 적시던 그 기도를 다시 올릴 수 있었다.
조동욱선교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분명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도 장로님들도 수련회가 마쳐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인도로 돌아가는 선교사님의 마음같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만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세상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하여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담쌓고 살 곳도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사명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일터사역 컨퍼런스에서 박정관목사, 교인들이 식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흔히 보는데,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그 식당에 오신 것 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용히 대화하고 종업원에게 주변 손님들에게 식당 주인에게 주님께 하듯이 하여야 합니다.
식사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그 뒤에 아무렇지 않게 떠들고 불평하고 행동하는 것은 전도만 가로막게 됩니다. 식당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한 것처럼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처신해야 합니다.
여러분, 미운 사람은 없어졌습니까? 세상이 선교지처럼 보입니까? 그 눈이 뜨이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외에는 미움과 세상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기 힘쓰시기 바랍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예수님 나의 왕이십니다.“ 외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반드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이 뜨일 것입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 눈을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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