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서 1~3장 설교 모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십시오 /스1:1-11, 렘25:11-12/ 김형익 목사
2021-05-18 03:12:17
우리 마음을 흥분되게 하는 이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면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전 538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바사’ 혹은 ‘바사 제국’이라는 말은 역사상 페르시아 제국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는 세계사에서 키루스 2세로 알려진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왕이고 이란 사람들에게는 건국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때가 바로 본문 1절이 말하는 ‘바사 왕 고레스 원년’이고 주전 538년입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왕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1절의 주어는 고레스 왕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어떤 일을 행하십니다.
1. 약속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렘 25:11~12; 29:10~11; 단 9:1~2)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에 예언을 시작했고, 멸망할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유다가 하나님의 성전이 멀쩡히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당연히 유다 백성들뿐 아니라 왕과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불편하게 만들었기에,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전반적인 예언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난 뒤의 일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고, 70년이 지나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5:11~12을 보지요.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렘 25:11–12).”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한 번만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29:10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아주 유명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말씀을 하셨습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것이 1절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말씀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9:1~2을 보겠습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 9:1–2).”
이때는 에스라 1:1과 같은 해입니다. 이때 매우 연로한 노인이었던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말씀을 읽게 되고 포로생활이 70년에 마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떨게 했던 것은 이제 70년이 거의 다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될 수 없고, 지난 세월 죄악에 대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바벨론 유수가 70년이라는 것은, 대개 두 가지 정도의 계산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첫 번째 포로로 잡혀간 때로부터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첫 번째 귀환까지의 기간입니다. 예루살렘이 주전 586년에 멸망하기 전 제일 먼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은 여호야김 왕이 통치하던 주전 60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유대인이 일차로 귀환한 것이 주전 538에서 535년 사이입니다. 이 기간이 70년 정도가 됩니다. 두번째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이 있던 주전 586년부터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이 세워진 주전 516년까지의 70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던 이 일을 이루게 하시려고 일어나십니다. 이것이 1절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라고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 제국과 왕을 움직이시는 주권자 하나님 (사 44:28~45:1; 잠 21:1; 사 40:15~17)
약속을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이제 무엇을 행하십니까? 제일 먼저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1절 하반절에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역사는 우연이 만들어내는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모든 제국과 통치자들을 당신의 뜻을 따라 다루시고 움직이시고 당신의 목적을 향해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바벨론 포로기가 70년이 될 것이라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라는 인물이 역사 속에 등장하기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44:28~45:1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사 44:28~ 45:1).”
이사야 선지자가 고레스 왕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적어도 150년 전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놀라운 예언입니다. 결국 고레스의 등장과 그의 바벨론 정복과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여, 과거 바벨론 제국이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강제로 끌고온 민족들을 본토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신전을 세우게 하는 유화정책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레스 왕이)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른 내용이고, 그 내용이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하나님은 제국과 왕을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잠언 21: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때때로 이런 말씀은, 우리가 어떤 권력자의 밑에서 신음할 때,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또한 역사 속에 흥했다가 쇠한 모든 제국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0:15~17을 보지요.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5–17).”
오늘날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시고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의 주권자인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3. 잔잔한 삶에 파문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약속하신 대로, 역사를 움직이시고,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때로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솔한 말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고레스 왕이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머나먼 곳에 와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이제 너희의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라.” 고레스 왕의 이 칙령이 지난 수십년 동안 바벨론 땅에 와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이것은 1945년 8월 15일 이 한반도에서 35년간 일제 치하에서 살다가 해방의 소식을 들은 우리 민족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주전 586년) 바벨론으로 끌려왔다고 할지라도, 5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주전 605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이미 70여년이 되었으며, 그 다음에(주전 598년) 잡혀온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은 이미 60년을 바벨론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바벨론에 형성된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70년에서 50년을 보낸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들은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텃밭을 만들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손주를 보고 살아왔습니다(렘 29:5~6). 유대인들 중에는 다니엘과 같이 정치적으로 성공을 한 사람들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부를 일군 사업가들처럼 바벨론의 주류 사회에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이제 돌아가서 성전을 다시 세우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이 하나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소식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잔잔한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 성가신, 자기 자신의 인생만 본다면, 없었어도 괜찮았을 왕의 칙령이었을 것입니다.
4. 형편을 따라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3~4)
왕의 칙령이 2~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고레스 왕은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합니다(스 1:3). 그리고 “그 남아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스 1:4).”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유대인이 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에스라의 후반부에서 보듯이, 이때로부터 약 80년이 지나서 학사 에스라가 다시 유대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스 7). 어떤 유대인 사업가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당장 접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연로한 부모님들을 모시고 4개월이나 될 긴 여정에 합류할 수 없었을 가정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집집마다 다양한 사정들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할 것은, 이때 고레스 왕의 칙령이 있었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일을 성취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쉽게 단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1차 예루살렘 귀환자들의 명단에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처럼 칭송되어서도 곤란합니다. 분명히 바벨론을 떠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유대인들도 당연히 합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인물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때가 찼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신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첫번째 귀환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다니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다니엘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은 분명하고, 이와 같이 비슷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레스 왕의 칙령도 모든 유대인은 다 당장 돌아가라는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볼 대목은, ‘그 곳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4절 앞에 ‘남아 있는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이들을 유대인 주변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 곳 사람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왕의 칙령은, 이들은 돌아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위하여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세워질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함께 하지는 못할지라도,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물질로 동참하라는 말이고, 나아가서 세워질 성전에 드릴 예물을 기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기쁘게 예물을 드린다’는 개념은, 소위 낙헌제물(freewill offering)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주는 명령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기로 결정한 유대인들에게 말입니다.
사람들의 형편과 사정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억지로 가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각기 다른 형편과 사정 속에서,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이 믿음을 자신의 자리에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5. 마음을 감동하여 모든 자원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5; 출 12:35~36; 3:21~22; 창 15:13~14)
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이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고레스 왕이 모든 피정복민들을 향하여 유화정책을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마치 논에서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쉬운 일입니다(잠 21:1).
이것 뿐이 아닙니다. 이미 70년 가까이 바벨론 땅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도 하나님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5절을 봅시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스 1:5).”
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감동을 주신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유다와 베냐민의 족장들이 있었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지도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들에게 귀환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개념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5절에서 말하듯이,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에게는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이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지도자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까지도 감동을 받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갈 마음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마음에 감동을 준 사람들은 고레스 왕과 이 지도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평범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시킨 유대인들이 돌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마음도 움직이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몸으로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은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 또는 보물로 귀환하는 형제들의 여정을 축복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6절에서 우리는 ‘그 사면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흥미로운 것을 보게 되는데, 물론 이들은 4절의 고레스 칙령에서 밝힌, ‘그 곳 사람들’일텐데, 6절에서는 약간 다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유대인들의 이웃이었던 이방인들, 바벨론 사람들을 가리키는 뉘앙스를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예루살렘 귀환은 제2의 출애굽으로서, 첫번째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출애굽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출애굽기 12:35~36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5–36).”
정말 희한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임노동으로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것에 대한 보수를 받아 애굽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르실 때,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20~21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출 3:21–22).”
사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이미 4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일도 말씀하셨었습니다. 창세기 15:13~14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임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구하는 것을 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이 의도적으로 단어를 4절에 있는 대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바로 그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실 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까? 있습니다. 고레스 왕은 왕의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하여, 느부갓네살 왕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다 세어서 유다 백성의 지도자인 세스바살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창고지기는 오늘날의 재무관과 같은 장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다시 짓는 것만이 아니라, 성전 예배가 가능하도록 성전 집기들을 그 세월 동안 철저하게 보존되게 하셨다가 이제 이 유다의 귀환자들에게 정확하게 세어서 내어주게 하신 것입니다.
6.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라.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의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십니까? 약속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십니까? 제국과 왕을 움직이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보십니까?
하지만, 이런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평범한 삶에 파문을 몰고 오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어떤 형편, 어떤 사정 가운데 있든지,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믿음, 신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 하나님은 어떤 일을 우리에게만 알아서 하라고 맡기지 않으시고, 필요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시고 그 모든 자원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쓰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여러분은 본문에서 이런 하나님을 보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서 수십년을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어느 날 공포된 고레스 왕의 칙령은 기쁘고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만난 상황은 이것과 동일한 상황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당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현재의 예배당이 예배와 교제 그리고 온 교회의 신앙 교육을 하기에 비좁아진 현실에서 이 모든 일을 제대로 감당하기에는 좀 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제적 필요 앞에서, 예배당 이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공동의회에서 교인투표를 통하여 물었었고, 예배당 이전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이 일은 성가신 일이 아닌가요? 우리는 새로이 이 일을 위해서 헌금을 해야 하고,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일정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 유다 백성과는 그 의미가 다른 상황이지만, 동일한 것은, 우리도 이 일을 믿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일의 주인이고 리더이시며 마침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알아서 감당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정한 감동을 주셨기에, 여러분은 벧샬롬교회의 교인이 되셨고, 오늘 우리는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는 다 다르고, 우리의 어떤 행위로 우리의 믿음과 모든 것이 평가 받지도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기만을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제국과 왕의 마음으로 움직이시는 주권자 하나님, 원하시면 누구의 마음이라도 감동하게 하셔서 그 일에 동참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자원만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헌금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작정하여 드리는 헌금이 되기를 바라고,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복된 여정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 주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admin
에스라서론/스1:1
2001-08-19 23:16:49
에스라서론
스1:1 정회현 목사
역대상하에 뒤이어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나온다. 이들은 포로기 이후의 이야기다. 역대하에서 유대인들의 포로생활이 고레스칙령으로 끝나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역대하 마지막부분과 에스라 첫부분은 비슷하다. 바사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는 이야기로 끝나고 또 시작되었다. 전에 역대상을 강해할 때에 역대상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역사가 재편된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역대하 끝부분과 에스라 첫부분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에스라서 전체가 성전의 재건 및 유대인들의 성결과 관련되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역대서와 에스라서는 같은 저자에 의해 쓰인 것으로 본다. 많은 학자들은 포로이후, 아니 모세이후 최고의 율법사로 불리는 에스라가 이들을 저술한 것으로 본다.
에스라는 과연 모세 이후의 최고의 율법사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다면 에스라는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율법 중심의 삶을 살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 모세 이후 열왕조까지는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중심의 신앙생활이었으나 포로기 이후는 회당중심으로 율법중심의 신앙생활로 변화되었다. 포로기 때에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포로기에는 회당중심으로 생활하였지만 에스라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율번적으로 모든 것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에스라가 율법중심의 랍비의 전통을 수립하였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전통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에스라서는 느헤미야서와 여러모로 닮았다. 에스라서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라면 느헤미야서는 무너진 성곽과 도시를 재건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두 책은 모두 흩어진 신앙생활을 정립하여 포로 이후 참신앙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에스라나 느헤미야의 이야기가 우리의 흩어진 신앙을 바르게 정립하는 면에서 매우 유익한 책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마음이 흩어지고 신앙생활이 느슨해질 때가 있는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가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할 수가 있다. 이 두 책은 성도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졌을 때 어떻게 이런 것들을 끊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에스라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구분된다. 첫부분은 1장부터 6장까지로 1차 포로귀환과 성전건축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두번째부분인 7장부터 10장까지는 2차 포로귀환과 신앙회복을 다루고 있다. 첫부분의 주요 등장인물은 스릅바벨이고 두번째부분은 에스라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후손이고 에스라는 아론의 후손이다. 즉 에스라서는 왕의 일과 제사장의 일을 나누어서 기술한 것이다. 왕의 기능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고 제사장의 기능은 성결케 하는 것이다. 이 두 기능은 죄에 빠진 인간의 영성을 회복하는 데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왕과 제사장의 기능을 예표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과 제사장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 몸을 성전삼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먼저 스룹바벨의 영도하에 4만여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최초로 한 일은 하나님의 단을 쌓아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를 가던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해야 한다. 이방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하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하였듯이(고전6:19-20)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애굽에서 구하여 낸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의식을 소홀히 할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또는 예배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스룹바벨이 인도하는 유대인들은 또한 초막절을 지켰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처음으로 맞은 절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정성을 다해 초막절을 지켰다. 초막절은 추수가 끝나고 옛날 광야생활을 기억하며 초막에서 1주일을 보내는 절기인데 이 때 많은 예물도 하나님께 드린다. 초막생활을 하며 지난날의 고통을 생각하고 지금의 은혜에 감사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치 못하면 받은 은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잊기 쉬운 인간에게 기억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절기를 명한 것이다. 유대인은 이와같이 초막절을 지키면서 지난날 자신들이 나그네 삶을 살았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지난날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이제 새롭게 하나님 중심을 살기로 결심하는 것도 이와같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자세로 살기로 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만큼 지난날의 죄악된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할 준비를 하였다.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곳에 하나님의 전 지대를 놓았다. 예복을 입고 정성스레 다윗의 규례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전 착공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어려서 솔로몬의 성전을 본 기억이 있으므로 감회속에 대성통곡하기도 하였다. 지난 날의 영화가 뇌리 속에 스쳐가면서 70여년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한 것이 기억되어 슬픔과 기쁨이, 고뇌와 감회가 교차했다. 또한 지난날의 성전을 본적이 없는 세대들은 성전을 건축한다는 기쁨과 즐거움에 들떠서 노래하며 외쳤다. 그 때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전을 자기들의 손으로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보람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성전을 짓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마음 속에 무너진 성전의 지대를 놓는 일을 해야 한다. 마음에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을 짓는 일은 바로 나 자신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전의 지대를 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전을 지어갈 때 내 영성은 회복되어간다.
그러나 성전을 지을 때 모든 것이 다 잘돼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방해꾼이 나타나서 방해를 한다. 유대인이 성전을 지으려 하자 인근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이 와서 자기들도 성전을 짓는 일을 돕겠다고 하였다. 사마리라인들은 물론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앗수르 사람과의 혼혈아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이미 다른 종교와 혼합된 상태로 명목상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카돌릭과 같은 상태다. 이런 그들이 와서 같이 성전을 짓자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대인들이 지금 어려운 상황에서 이거 잘되었다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배척하고 어렵더라도 자기들의 힘으로만 성전을 지을 것인가? 오늘날도 이런 유혹을 많이 받는다. 돈많은 사람이 돈을 대주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성전을 짓자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똑같다. 결론부터 말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것이 유대인들의 태도였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당장은 좋을지 모르나 신앙이 변질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되므로 차라리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힘만으로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언지하에 자기들의 호의가 거절되자 사마리아인들은 이제 조직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였다. 호의가 적대감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지역에 살고 있던 바사의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또 바사왕에게 소를 올려 유대인들이 성전을 짓게 되면 반역을 할 것이므로 절대 성전을 짓는 일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미 고레스왕은 죽었고 그 후대의 왕들은 고레스의 칙령을 잘 모르므로 정치적인 이유로만 판단하고 이들의 소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영을 내려서 성전을 건축치 못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호의를 거절한 것이 이처럼 성전 건축을 못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일할 때 방해꾼은 교묘하게 다가온다. 때로는 광명한 천사로 와서 유혹하기도 하고 아니면 때로는 위협이나 협박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7b-8a).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길로 걸어갈 때 이런 고난은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고난이 올수록 하나님께 더욱 매달려야 한다.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방해꾼의 방해를 받고 세월만 보냈다. 벌써 10여년이 흘렀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레스왕을 모르는 왕이 등극하므로 성전건축은 더욱 어렵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을 독려하기 위해서 나타난 선지자가 있으니 학개와 스가랴다. 이들의 예언서는 뒤의 소예언서에 실려 있지만 에스라서에 나타난 이야기만 보더라도 이들이 성전건축을 얼마나 독려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당시의 왕인 다리오에게 글을 올려 고레스왕의 조서를 생각나게 한 것은 성전을 재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대 고레스왕이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케 하였다는 사실은 후대의 왕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선대가 허락한 것을 후대의 왕이 순종치 않는다면 선대를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리오왕은 즉시 국고에서 조사케 하였고 조사해보니 과연 고레스의 칙령이 있어서 다리오왕은 다시 조서를 내려 성전을 건축케 함은 물론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제공케 하였다. 뿐만아니라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하여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집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고 하였다. 이 무시무시한 조서가 내려지자 방해꾼들은 사라졌고, 유대인들은 기가 살아 성전건축을 재개한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은 참으로 묘하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를 받았을 때 오히려 기뻐하였을 것이다. 학개서에 나오듯이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바빠서 성전을 짓는 일을 소홀히 하였고 심지어는 귀찮게 여겼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건축이 중단되었으니 그들이 오히려 속으로 기쁘게 여겼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그냥 두시지 았다. 왜냐하면 성전 건축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광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맞아야 할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로 4년만에 이 성전이 완공되었다. 스룹바벨이 지대를 놓은지 20년이 흐른 것이다. 솔로몬이 7년만에 성전을 완공하였는데 성전재건은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지대를 놓은지 20년만에,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한지 4년만에 완공을 보았으니 감회가 새로왔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 많은 방해 세력과 어려움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섰을 때 얼마나 감회가 큰가? 개척교회의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성전을 지어서 중형교회로 도약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더나아가서 이 땅에서의 괴로움을 다 극복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바로 그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오늘의 고통을 참는 것이다.
이렇게 성전이 준공되자 봉헌식을 가졌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유월절기를 드렸다. 솔로몬 성전에서 마지막 제사를 드린지 정확히 70년만의 일이다. 아니 70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는데 무슨 소린가? 우리는 다니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1차로 바벨론에 끌려간 것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멸되기 20년 전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1차 포로때부터 정확히 70년 후에 1차 귀환이 이루어졌고, 성전이 파멸된 후 정확히 70년 만에 성전이 재건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만큼 오묘하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앞으로 다니엘을 통해 주어진 70이레 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성전건축이 완료된 후 또 60여년이 흘렀다. 7장은 바로 60여년의 공백이 있은 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니까 에스라가 본서를 기록한 것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전을 재건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보고서 정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에스라서는 이렇게 긴 공백기를 두고 두부분으로 나뉜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완공되어 60여년동안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에스라와 같은 율법사가 없었기 때문에 에스라때처럼 모든 것이 율법대로 체계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사사때처럼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대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이때 준비된 인물이 에스라다. 에스라는 모세 이후로 최고의 율법사라 할만큼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에스라 이후의 모든 신앙은 에스라의 영향에 힘입었다. 이런 인물이 지금 바사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때의 왕이 아닥사스다왕이었는데 아닥사스다왕도 고레스왕과같이 조서를 내려 에스라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했다. 우리는 여기서 왜 바사국왕들이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보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바사국은 나름대로의 신을 섬기고 있었으나 오늘날 불교와 마찬가지로 모든 신을 포용하고 있었다. 왕을 신으로 섬기도록 한 것도 아니고 각 민족은 정치적으로는 바사국에 속해있었지만 자기들의 신을 섬기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바사국에 순종만 하면 무슨 신을 섬기든 상관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각 민족이 자기들의 신을 잘 섬기는 것이 바사국이 잘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바사국이 이런 정책을 쓰지 않았다면 유대인이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에스라는 왕의 조서에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갈 사람들을 모집하였고 이때 성인 남자만 1500여명이 귀환하였다. 그는 그 머나먼 길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귀환하였다. 에스라는 출발에 앞서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모든 다른 도움을 거절하였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느헤미야의 귀환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에 따라 성전의식을 정립하러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삶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에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느헤미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의 선민들이 하나님의 선민답게 사는 길을 가르친 것이다. 성전 중심의 예배를 회복하고 율법중심의 삶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때 에스라가 가장 안타깝게 여긴 것은 유대인의 통혼문제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통혼하여 유대인의 혈통이 흐려지고 있었는데 에스라는 이것을 애통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왜 통혼이 나쁜 것인가? 솔로몬에게서 나타났듯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결혼하여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고 또 그것이 문제가 되어 유대인의 순수함이 자꾸 흐려지니까 에스라는 그 근본을 바로잡길 원한 것이다.
이와같이 에스라가 통회하며 기도하자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기억하고 같이 회개하였다. 그야말로 영적 각성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한 사람의 회개가 이만큼 중요하다. 한사람만 바로 서면 나머지는 따라오게 되었다.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율법대로 하겠다고 하였고 에스라는 이방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고 단호히 말했다. 에스라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봐도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라고 의문이 갈 정도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으로는 그것이 그만큼 중요했다. 그들은 나라가 없다. 바사국에서 수많은 민족이 섞여서 산다. 그들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사는 길밖에 없다. 에스라는 그것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의 순수함을 유지하려면 이와같이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타협적이되고 결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유대인들은 결국 살을 찢어내는 고통을 택하였다. 사랑하는 아내를 쫓아냈다.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자도 있었으나 자녀와 생이별 시켰다. 그 길만이 유대인으로서의 전통과 혈통을 세우는 길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후대 사람들도 그 길을 걸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지독스런 유대인이 탄생된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이런 결단이 필요하다. 만약 에스라가 이런 일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유대인을 찾아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서구유럽에서 이런 결단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서구유럽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되 또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올바른 길을 가는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것을 교훈삼아 자를 것은 잘라 예수 안에서 순수함을 유지하길 기원한다.
admin
세상으로 살이 쪄 있는 자는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다 /스3:8-16
2016-06-25 15:44:31
8절-13절: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역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게 하매 이에 예수아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전 공장을 감독하니라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이 성전은 선민이 맨 처음에도 가지고 있었어요. 계시적으로 보면 에덴동산에서도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이요. 그 후에 일정한 곳이 없이 제단성전 생활을 하게 했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가면서부터 초막성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 성전이라는 성전은 하나님의 시은소요, 인간의 수은소입니다. 시은소라 함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곳. 수은소라 함은 선민들이 거기서 은혜를 받는 곳. 그러니까 성전이라 하면 어떤 건물을 자꾸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 이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곳, 그리고 인간이 은혜를 받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 그 말이요. 지금 그런 면으로 말씀을 드린 겁니다.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그 말의 의미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행, 모든 죄, 모든 고통, 모든 심판거리를 성전에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은 또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이라 할 때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 그 말이요.
또 다른 의미로 보면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만나서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교환하는 장소다’ 그렇게 또 보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란 인간은 출생해서부터 타락을 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사망적이요 죄악적이요 심판거리요 영원히 고통거리만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일반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과 바꾸지 않고, 하나님 것을 받지 않고 그냥 이 세상에 살다가 간 자는 필연적으로 죽음 저 편에 가서 고통을 면치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심판의 고통을, 또 지옥의 고통을 면할 길이 없다 그 말입니다. 세상의 성자 중에 손꼽는 공자라도 하나님의 것을 받지 못했으면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심판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고통을 면하게 하려고 성전 또는 회막을 허락한 거라 그 말이요.
인간이 죽음의 선을 넘어가면 무(無)로 돌아가느냐? 없어지느냐 그 말이요. 아니면 목석으로 변하느냐? 아니면 불교의 주장대로 금수로 변하느냐? 아니면 죽어서도 생생하게 그대로 지속을 하느냐 그 말이요. 성경은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갈 곳은 천국이다. 확실히 갈 것이다 그 말이요. 그런데 ‘죽음 저 편에 가서 어떤 행복을 누리느냐’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확정이 되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인간이란 인간은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과 바꿔치기 해야 된다 그 말이요. 쉬운 예를 들면 자기가 미국에 가려면 미국의 것으로 바꿔야 될 거라 그 말이요. 그곳에서 바꾸든지, 이곳에서 바꾸든지 바꿔져야 할 거란 말이요. 말도 바꿔야 하고 돈도 바꿔야 하고, 바꿔야 된다 그 말이요. 바꿔야 살 수 있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성전은 시은소, 또 인간 편에서는 수은소. 이것을 성전이라고 한다 그 말이요. 성전 속에는 시은소 수은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성전 회막 앞에서 양을 인계 받을 때에 안수하고, 그리고 인간이 지은 죄를 양이 짊어지고 죽지요. 넘겨주고 받으면 제사장은 그 양을 잡아서 속죄제물로서 바칩니다. 내 대신 양이 죽더라 그 말이요. 그 다음에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오는 겁니다. 순서가 그렇게 됐어요.
우리가 기본은혜에서 볼 때에 기본은혜 속에는 영감의 감화가 있고, 중생이 되는 겁니다. 죽은 영이 살아난다 그 말이지요.
육신의 생명은 불신자도 있습니다. 미중생자는 육신의 생명은 살아있는데 영이 죽어 있어요. 물론 육신의 생명은 처음에 있었던 거지요. 중생자는 육의 생명과 함께 영의 생명도 가지고 있는데, 성도가 가진 이 영의 생명은 안 죽지요. 불신자는 영의 생명이 없는 겁니다. 불신자가 누구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영의 생명이 없는 자가 불신자다 그 말이지요.
그런고로 기독교인은 영의 생명이 하나 있고 육의 생명이 하나 있습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영의 생명은 없고 육의 생명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인데, 문제는 두 가지 생명을 가진 기독자가 어느 생명 위주로 살았느냐? 영의 생명을 위주로 살았으면 이거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보는 거고, 예수 믿는 기독교인이라도 육의 생명을 위주로 살았다고 그러면 믿음 없이 살았다고 보는 거지요. 신앙으로 살았다고 보지는 않는 거지요. 불신자처럼 살았다고 보는 겁니다.
육의 생명은 죽을 생명인데 이 죽을 생명은 사람이 구태여 죽이지 않더라도, 가만 내버려둬도 죽는다 그 말이요. 그러나 영의 생명은 안 죽습니다. 사람이 육의 생명을 죽이더라도 중생한 영의 생명은 안 죽습니다. 못 죽인다 그 말이요. 이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서 살린 것이라 그 말이요. 진리와 성령이 와서 살렸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의 생명은 안 죽는다 그 말이요. 죽을 생명이 아니다 그 말이요.
그래서 중생된 생명은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이요,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이요, 본질적으로는 진리의 생명이요, 소유적으로는 영에 속하니 영의 생명이요, 본능적으로는 능력적 생명이요, 순서적으로 보면 구생명이 아니고 새생명이라 그렇게 보는 거지요. 인간이 출생할 때는 구생명을 가지고 나온다 그 말이요. 그러나 이제 예수 믿고 중생된 생명은 죽이려야 죽일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육체의 생명은 개체 개별적 생명이라서 각각 따로 따로 죽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질적으로 모두 한 생명이다 그 말이요. 이 중생한 사람의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생명이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죽는다고 그러면 중생된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이 중생된 영의 생명은 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결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면 다 죽는다 그 말이요. 쉽게 말씀을 드린다면 뭣과 같은가 하니 각 집집마다 전기가 있는데 발전소의 발전기가 꺼지면 집집마다 전기는 다 죽는 거와 같다 그 말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죽지를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 죽는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중생된 그 영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는 하나님이 안 죽으니 그 자도 안 죽는다 그 말이요. 육신이 안 죽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중생한 영의 생명은 안 죽는다. 그래서 중생한 영의 생명은 불멸의 생명입니다. 불사생명이요, 안 죽는 생명이라 그 말이요.
우리가 ‘죽는다’ 할 때 ‘어느 생명이 죽고, 어느 생명이 안 죽느냐’ 하는 이것을 잘 깨달아야 되겠어요. 예수 믿는 우리는 중생된 영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은 안 죽습니다. 만일에 예수 믿는 내가 현재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중생된 영이 죽는 게 아니라 이건 곰국(고통, 심판)을 먹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런데 영이 중생을 해서 새생명으로 살아난 것을 중생 즉시에는 자기 자신이 모른다 그 말이요. 어린아이가 자기 생일을 모르듯이. 자기의 생일을 부모가 가르쳐줌으로써 알지 안 가르쳐주면 그 아이가 어른이 돼도 자기 생일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중생이 된 사람이고, 예수님을 보고 ‘주여’ 하는 사람은 중생이 됐다 그렇게 보게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중생을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 부모가 가르쳐주니까 안다 그 말이요. 세례요한이 커서 어머니에게 묻기를 ‘내가 모태에서부터 중생을 했다고 하는 그걸 어찌 압니까?’ 하니까 그 어머니가 ‘내가 너를 배었을 때에 뱃속에 있는 네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를 보고 뛰놀았느니라’ 하고 알려주니까 안다 그 말이요. 뱃속에서 뱃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뛰놀았으니 중생이 됐다 그 말이요. 부모가 그걸 가르쳐 주니 안다 그 말이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으로 된 것은 아니지요. 예수가 잉태된 그 생명은 인간의 어떤 행동으로 된 생명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된 생명이냐? 다만 말씀으로 된 생명이었다 그 말이요.
그런데 ‘네가 잉태한다’고 하는 그 말씀을 마리아가 영접을 했을 때에 그 즉시로 자기에게 잉태된 그것을 마리아 자기가 알았느냐? 몰랐던 거지요. 점점 날이 가고 배가 불러오니 알았다 그 말이요. 그러나 엘리사벳 속에서 6개월째 있는 세례요한은 알았다 그 말이요. 마리아 속에 든 아기를 알았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중생된 자는 안다 그 말이요.
이처럼 자기가 뱃속에서 중생된 사실을 자기가 태어난 후에 부모가 가르쳐 주니 확실히 알았다 그 말이요. 그게 확신이라 그 말이요.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거는 중생을 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직접 생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 영의 생명은 직접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서 올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리아 태중의 그 생명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왔단 말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왔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인간을 통해서 온 생명이 아니라 그 말이요.
우리가 알기로 권OO이라는 그 분은 인간이 인간을 중생시키는 것으로 말을 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단이라 부르게 되는 겁니다. 죽은 영을 사람이 어떻게 살리느냐?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출생이 됐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중생을 해야 천국을 갑니다. 구약시대에 양을 잡아 드리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을 형식계시로써 보여준 겁니다. 양이 인간을 구원을 시키지 못해요. 짐승의 피로써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대형을 하고, 또한 대행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인간에게 입혀주는 것을 형식계시로써 보여준다 그 말이요.
구원을 할 때 첫째는 대형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이지요. 이 대형으로 성도의 죄를 벗기고, 또한 대형을 입히니 성도는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대신 예수님이 죽었다 그 말이요. 그래서 나는 영원히 죽는 형벌은 면했다고 그랬지요?
그리스도의 이 대형으로 나의 죄를 없이 했으니 나는 무죄라 그 말이요. 그러나 이 무죄상태는 말 그대로 무죄인이지 아직 의인은 아닙니다. 대형을 한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대행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의를 입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대행으로 성도에게 당신의 의를 입힌다 그 말이요. 그래서 이제 의인이라 인침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공의 법을 지키심으로 대형을 하실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지성의 법을 지키심으로 대행을 통해 당신이 행한 그 의를 성도에게 입힌다 그 말이요. 그래서 중생한 성도는 의인이라 인처진다 그 말입니다. 주님의 의로서 인처진다 그 말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의의 예복을 입히는 겁니다. 나에게 당신의 의를 입히시려고 주님께서 대행을 하셨다 그 말이요. 나에게 의를 입히시고 의롭다 칭한다 그 말이요. 목욕을 시키고,(무죄상태) 그 후에 새 옷을 입힌다(의를 입힘) 그 말이요.
이처럼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의를 입어야 만이 되는 건데,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 바리새인들의 의는 신조 의가 아닌 인조의 의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 말이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성경구절대로 행했으니 의인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그들이 행한 의는 신조 의가 아닌 인조 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라 그 말이요.
예수님의 의는 본질과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만들어진 하나님의 의를 성도에게 입힌다 그 말이요. 그래서 ‘중생한 성도는 의인이다’ 이렇게 칭함이 된다 그 말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물은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러니까 중생 시에 진리와 생명 성령 이것이 복합적으로 동시에 나에게 들어오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의 용어로 구분을 지어서 논리적으로 말을 하려니까 ‘진리와 생명 성령’ 하면서 분리해서 말을 하게 되고 ‘그 셋 중에 어느 게 먼저냐’ 하고 자꾸 논란을 하게 되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본구원(중생)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구원이라 그럴 때에 이것을 논리적 순서적으로 말을 하면 ‘대형 대행’ 하고 말을 하는 것이고, 이걸 한 마디로 하면 예수님의 구속입니다. 이 구속 속에는 당신의 의행이 들어있지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드린 이 의행을 우리에게 입히는 거지요. 순서적으로 보면 그렇다 그 말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죄인을 살리려면 예수님께서 죄인 대신 형벌을 받고 죽어야 된다 그 말이요. 이래서 나의 죽은 영을 살리고, 아울러 죄를 면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의를 입히니 의인이라 그렇게 인처진다 그 말이요.
이제 영이 중생된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내재하고 계시니 성전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더불어 결합이 되어 있어요. 성경구절은 고전3:16, 롬8:16에 되어 있고, 또 마5:20입니까?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기본구원 속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들어있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성도가 영이 중생이 되었는데 현재적으로 죄를 지을 때는 그 사람에게서 성령이 떠나가느냐?
중생된 영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중생한 영이 하니라 그의 이성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죄를 지어도 나의 중생된 영과 결합되어 내 속에 내주하고 있는 성령님은 떠나가지를 않습니다. 다만 사역적인 성령님은 떠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중생된 영과 결합되어 내 속에 내주하고 있는 그 성령님이 떠나면 중생된 내 영이 도로 죽게요?
내가 빵을 먹고 싶은 것은 나의 중생된 영이 아니고 육(이성 포함)이지요. 육이 그러는 거지요. 또한 중생한 영은 언제나 죄를 반대하지만 육은 죄를 찬성을 할 수가 있어요. 영은 영의 성질 성격상 하나님의 질과 같은 성분이므로 근본적으로 죄를 찬성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영은 양심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 말이요. 그럼에도 그 양심을 밟아놓고 죄를 지을 수가 있는데, 이는 이성과 몸이 짓는 것이지 중생한 영이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내 양심을 누가 짓밟느냐? 진리 따르는 양심을 누가 짓밟느냐? 남이 짓밟는 게 아니고 자기가 짓밟습니다. 이러게 돼놓으면 하나님이 손해가 아니고 자기가 손해가 돼요. 자기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중생한 사람이 자기의 몸이 진리를 따르는 양심의 말을 안 들으면 자기 속에 있는 영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의 이성을 통해 육이 듣고 나의 중생된 영과 함께 움직일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가 돼서 나가는 건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중생된 영이 자기의 양심을 통해서 죄를 짓지 말라고 마음을 두드리는데도 이 이성이 자기의 몸을 붙잡고 죄를 지으면 중생된 영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 말이요. 중생된 영이 강권적으로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마음은 원이로되 육이 약하도다’ 하는 게 있지요?
우리가 본문에 보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전을 짓는데 백성이 말을 안 들으면 성전을 못 짓습니다. 육이 살이 찌면, 돼지로서 비유할 수가 있는데 돼지가 살이 찌면 잔칫상에 올라가지요. 잔치할 때 뭘 잡느냐? 돼지를 잡는단 말이요. 육이 강하면 마음이 살이 찐 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세상적으로 살이 찐 것을 ‘육이 강하다, 육이 살이 쪘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돼지가 잔칫날에 잡히듯이 하나님의 심판 날에 때려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살이 찌니, 육이 강하니 성전을 못 짓게 되지요. 아닥사스다가 성전을 못 짓게 하더라 그 말이요. 이게 이제 외부의 사건 환경입니다. 아닥사스다가 성전을 못 짓게 하는 것은 외부의 사건 환경입니다. 왜냐? 육덩이라는 백성이 성전을 안 지으려고 하니까 그렇다 그 말이요.
성전을 안 지으면 어떻게 되느냐? 마음이 살이 찐단 말이요. 육이 살이 찐다. 세상에 살이 쪄 있다 그 말이요. 성도가 마음에 살이 쪄 있으면 생각과 마음과 소원과 목적이 세상으로 살이 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경우에 자기 속에 성전이 안 지어진다 그 말이요.
자기 속에서 영이 주격이 돼가지고 새사람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이 자기의 배경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 모든 만물이 동원이 되고 호응 협조하면서 성전을 짓게 되는 겁니다.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 대군을 출애굽을 하면서 빈손으로 데리고 나가지요? 남녀 아이들 노인들 여자들 모두를 합치면 약 150만 명 이상은 될 텐데, 그런데 모세는 빈손을 들고 나가지요. 그 배후에 누가 역사하느냐? 하나님께서 역사를 한다 그 말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을 광야에 있어도 못 먹어서 굶어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죄 해결을 못해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벼락을 맞아 죽은 자들은 있지요. 당신의 백성은 하나님이 책임을 진다 그 말이요. 자식이 굶고 있으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부모가 책임을 지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걸하느냐? 이치에 안 맞는다 그 말이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인간 내가 내 자녀를 사랑함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더 잘 아시고 더 사랑하십니다. 나의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이 더 하신다 그 말이요. 그러니 내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는 아버지가 하시는 거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께서 나에 대해 가지신 소원인 ‘네가 사람이 되어라’ 하는 그 면에 신경을 써 나가면 된다 그 말이요.
아이의 젖 걱정은 부모가 하지요? 그러니까 믿는 우리는 새사람이 중복적으로 만들어지는 일에, 주님 닮는 그 일에 신경을 쓰면 되고, 또 딴 사람에게도 그 일에 신경을 쓰자 그 말이요. 그렇게 되면 자기의 천국이 화려해지고, 자기 속에서 천국건설이 잘 되어나가고, 자기의 영적 성전건설이 잘 되어나가고, 더불어서 내 신앙실력이 커진다 그 말이요. 이것이 오늘 본문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기도 올립시다.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신경을 쓰시는 그 일, ‘어떻게 하면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줄까?’ 하는 그 면에 신경을 쓰며 살라고 하신 것인 줄 압니다.
우리가 그 면에 신경을 써서 주님처럼 닮고 싶어서, 깨닫고 싶어서, 지혜자가 되고 싶어서, 도덕성자가 되고 싶어서, 능력성자가 되고 싶어서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려고 하고, 또 ‘나만이 아니고 너도 같이 받아 가지자’ 하는 그 면으로 신경을 쓰다보면 우리가 이방인들이 구하는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이것은 신경을 안 쓰게 되는데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신경을 쓰지 못하니까 이방인들이 구하는 그 면으로 구하는 그런 교인이 될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래서 오늘날 많은 교인들을 보면 ‘무엇을 먹고 마실까 입을까’ 하는 그 면으로 구하고 치닫고 있을 뿐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것은 안 받고,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것을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의 이치에서 어찌하든지 저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이 일에 부지런히 힘쓰고 애쓰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기쁘게 갈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큰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건강한 감성 /스3:8-13/ 김정호 목사
2016-02-26 14:07:19
이스라엘의 교육은 특이합니다. 종교와 교육이 일치된 교육입니다.
그들의 교육은 자기들의 민족종교인 유대교(Judaism) 기반 위에 가정과 학교가 힘을 합하여 자녀교육을 실천합니다. 한마디로 가정과 교회와 학교가 삼위일체로 이루어진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으로 지금 온 세계가 불경기를 맞아 허덕이는 현실에서도 그들은 불경기를 모르고 지냅니다. 모든 나라들의 은행이 흔들리고 국가들이 부채로 시달리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만큼은 은행이 한 곳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국가 부채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더욱이나 그들은 아랍 국가들과의 오랜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 처지입니다. 아랍인들의 테러로 수시로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중에서 번영을 계속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 그들의 탁월한 교육시스템 탓입니다. 그들은 교육의 중심에 “헤브루타 교육”이 있습니다. 헤브루타는 한 마디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질문과 대답이 되고 대화가 깊어집니다. 거기서 더 깊어지면 토론이 되고 더욱 깊어지면 논쟁이 됩니다. 헤브루타가 어떻게 우수한 유대인들을 길러낼까요?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면 오늘은 선생님께 무엇을 배웠니?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유대 어머니들은 다릅니다. “오늘은 선생님께 무엇을 질문하였니?” 하고 묻습니다. 질문 많이 하는 어린이가 똑똑한 어린이입니다.
질문이 많은 곳에 발전이 있습니다. 질문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만들고 토론과 논쟁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상대의 말을 들으며 그에 대해 답할 말과 논리를 치열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견해와 다양한 시각을 지니게 됩니다. 이것이 헤브루타의 힘입니다. 친구와 가족과 성도 간에 대화가 필요합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건강해지고 든든해집니다. 건강한 감성이 조성됩니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은 이성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슬퍼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성을 잘 조절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성의 조절이 어려워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감정의 폭발로 인하여 엄청난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감성의 표현은 좋은 인격과 신앙과 밀접합니다.
오늘 스룹바벨 성전을 짓는 상황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감성을 점검하고 채우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감사하는 감성
본문 11절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노래했다는 것입니다. 찬송과 감사는 쌍둥이이며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심에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한 조건이 인간이나 물질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감사의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 사람은 영원토록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면서도 불평만 하는 사람도 있고 감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못하고 감사만 해도 인격과 신앙과 삶의 변화와 성숙이 됩니다.
좋은 것들이 따라 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인생과 미래와 영원이 달라집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어 집니다. 감사에 대해서 생각하고 알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할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과학자가 사람 키 높이의 선인장에 초음파 진단기를 연결하고 파장의 변화를 측정했습니다. 이 실험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나뉘어 진행됐습니다.
첫째는 한 사람을 선인장 옆에 세워놓고 “이 선인장을 콱 잘라버려.”라고 계속 말하도록 하고 선인장의 변화를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선인장이 갑자기 급격한 파장을 나타내며 몹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둘째 실험은 반대로 선인장에게 “예쁘다.”는 말을 계속 들려주며 변화를 측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한 곡선이 나타나며 선인장이 안정감을 보였습니다. 하다못해 식물도 사람의 언어에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은 동물과 식물과는 달리 저절로 성장하지 않고 칭찬을 들을 때 성장하는 법입니다. 칭찬은 사람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그 능력을 배가시키는 영양제와 같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도 배우자들끼리 칭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한 번 잘못을 지적했다면 두 번 이상 칭찬하고,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은 칭찬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칭찬은 천국의 언어가 되고 그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 될 수 있습니다.
서울의 어떤 병원에서는 아예 하루에 세 번씩 주위 사람들을 칭찬하자는 취지에서 “찬찬찬(贊贊贊)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배우자를 칭찬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부부 사이에 숨겨진 엄청난 칭찬거리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의 외모만 가지고 칭찬한다 해도 눈, 눈썹, 눈동자, 이마, 머리, 머릿결, 헤어스타일, 귀, 귓불, 뺨, 턱, 코, 입술, 윗니, 아랫니, 인중, 살결, 목, 목덜미, 어깨, 팔, 팔꿈치, 손, 손목, 손등, 손바닥, 손금, 손가락, 손톱 등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만 120가지가 넘습니다.
또 사람이 갖는 얼굴 분위기와 표정으로 5만 가지 이상을 칭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얼굴 분위기가 다양한 사람을 가리켜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하고 표정이 변화무쌍한 사람을 가리켜 “오만상을 찌푸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얼굴에 대한 칭찬도 찾아보면 천 가지가 넘고 표정에 대한 칭찬은 5만 가지가 넘는다는 말입니다. 여하튼 배우자의 장점은 찾을수록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죽는 날까지 칭찬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감사하는 감성이 건강한 감성입니다. 이제 불평을 버리고 감사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눈물의 감성
본문 12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70년 전에 파괴를 당했던 성전 터였기 때문에 그곳에 다시 기초가 놓였다는 것은 가히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나서 뜻밖에 대성통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옛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의 기초가 다시 놓인 것을 보면서 그들은 솔로몬 시대의 영화가 죄로 말미암아 붕괴되었음을 새삼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옛 성전과 비교해 지금의 기초는 보잘 것 없이 작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바벨론 땅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들이 연로한 노인들의 감정을 대성통곡으로 폭발케 하였습니다.
불행에 대하여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죽음을 선고 받고 통곡하였고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것을 생각하고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장차 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일본의 여류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는 ‘빙점(氷点)’ 이란 제목의 소설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입니다. 그녀는 일본에서는 드물게 보는 크리스천입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녀가 크리스천이 된 것은 지독한 질병 중에서였습니다. 20대 나이에 결핵과 척추카리에스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게 되면서 성경을 접하고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20대에 한창 나이에 남다른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 된 셈입니다. 미우라 아야꼬가 애송하였다는 신앙 시가 있습니다. 작자 미상의 시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다.>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슬픔은 자기를 정화시켜 주기 때문에 절대 필요한 감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눈물은 불행이 아니라 행복의 전주곡입니다. 우리는 국가와 교회와 이웃의 불행에 대하여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나와 이웃의 죄를 보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주님이 주님의 병에 담으신다고 하였습니다.(시56:8) 눈물이 주님의 병에 차야 응답과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강퍅한 사람들은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아프고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죄와 은혜와 공감하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런 눈물이 너무 메마르고 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를 보고 경건한 어른들이 흘렸던 눈물을 이 시대에 함께 흘리는 눈물의 감성이 있는 건강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기뻐하는 감성
본문 12-13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오늘의 세상은 대성통곡하는 소리와 기쁨의 함성으로 가득합니다. 분간하기가 십지 않습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세상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를 보고 노인들은 대성통곡하고 젊은이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통곡과 웃음의 이유가 있고 다 합당한 것입니다. 누구를 비웃거나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를 손으로 성전을 짓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했고 기뻐하였습니다. 성전을 지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찬양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 장애입니다. 찬양할 때 믿음과 은혜는 더 커지고 충만케 됩니다. 영적 벙어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크게 감사하고 찬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하면 기쁘고, 기뻐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조건이 아니라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때 얼마나 기뻤던지 바지가 흘러내릴 정도로 기뻐 뛰었습니다.
부인 미갈의 멸시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순전하게 기뻐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뻐하며 찬양할 때 영육이 건강하고 마귀가 물러가고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체험케 됩니다. 좀 방정맞게 보이고 체신이 없어 보여도 기뻐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프리카에서 선풍적으로 일하고 있는 라인하르트 본케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교회는 40명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 집회를 하고 싶었습니다.
1만 명 들어가는 경기장을 예약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그 때 그가 소리쳐 말했습니다. “큰 사람은 초라한 발상을 하지 않는다.” 결과는 운동장이 그득 찼습니다. 오히려 넘쳤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 왔습니다. 20년 전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에 100만 명이 회심하리라.” 이 말씀은 20년 후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곳곳을 다니면서 대형 집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곳곳마다 수십만 내지 최대 160만 명이 모여 그의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며 회개하고 주님에게로 돌아오는 역사가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그린밸리에서 집회할 때 대형 텐트를 쳤습니다. 그런데 심한 태풍과 먹구름이 동시에 무섭게 몰려 왔습니다. 대형 텐트를 한꺼번에 날릴 수 있는 무서운 위력을 가진 태풍이었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서 태풍을 꾸짖었습니다.
“네가 만일 이 텐트를 무너뜨리면 나의 하나님께서 이보다 세 배나 큰 텐트를 세우실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태풍과 먹구름은 물러가라!”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몰려오던 구름이 칼로 자르듯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텐트를 가운데 두고 피하였다가 다시 모였다가 사라졌습니다.
미국의 여자 사업가 중에 오스틴이 있습니다. 여자 속옷을 팔아서 백만장자가 된 사람입니다. 미국에는 몸집이 큰 사람이 참 많습니다. 승용차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옷을 스몰, 미디엄, 라지, 엑스라지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사람이 있습니다. 창피하다고 엑스라지는 안 팔리는 것입니다. 제일 큰 옷을 창피하여 달라는 말을 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오스틴은 늘 말했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
오스틴은 가장 큰 팬티나 속옷을 퀸스 사이즈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왕 사이즈라는 것입니다. 여왕은 몸집이 큰 사람으로 연상되게 하였습니다. 몸집이 큰 여자들이 자기들이 여왕 사이즈인 줄 알고 불티나게 사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초라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곁에는 늘 지혜를 제공하는 늙은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왕은 고마운 마음에 물었습니다.
“평생 나를 위하여 일하여 주었는데 떠나게 되니 서운한 데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지.” 그 장수가 말했습니다.
“폐하! 점령하신 나라 가운데 한 나라를 제게 주십시오.” 주변에 있던 대신들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무례한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한 나라를 가져라. 그대는 내가 한 나라라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대에게 나라를 하나 준다. 가져라.”
큰 사람은 초라한 발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작은 성전을 지으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크신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고 높이 찬양하는 건강한 감성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감사와 눈물과 기쁨의 감성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따뜻하고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건강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스7:1-10/ 한 애국자의 결심 / 한경직 목사
2014-08-27 10:19:59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 7장 10절을 다시 봉독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요, 또한 율법에 익숙한 학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요시야 왕 때에 당시에 큰 개혁운동을 일으킨 유명한 대제사장 힐기야의 증손이 됩니다. 여기 에스라 7장에 그의 족보를 아론에게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 역사상 에스라의 위치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중흥의 중심 역할을 한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잡혀가 70년간의 포로생활을 한 후에,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으로 해방을 받아서 약 4만여 명이 주전 536년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지도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성전 짓기를 시작하였지만,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다른 족속들의 방해로 15년간이나 중단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스가랴와 학개의 노력으로 공사는 다시 계속되어 작은 규모이지만 성전짓기를 마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뚜렷한 지도자가 없으므로 성지에 돌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날로 쇠미하여졌고, 특별히 그들을 둘러싼 많은 이교 민족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의 사회적, 종교적 생활은 실로 위기에 직면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당시 파사에 있던 에스라가 동지를 모아서 예루살렘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돌아간 지 약 80년 후였습니다. 에스라의 노력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여호와를 중심한 신앙은 다시 부흥하게 되었고, 사회는 정화되었으며, 사기는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어서 장차 온전한 정치적 독립의 정신적인 기초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중흥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러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러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 오늘 읽은 에스라 7장 10절은 그 비결을 보여줍니다. 그는 파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에 확고한 결심이 있었습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을 때 자세히 들어보세요.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그 결심은 간단히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율법을 연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연구. 둘째는 그 율법을 준행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실행. 셋째는 그 율법을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하였습니다. 교육. 다시 말해서, 에스라는 연구, 실행, 교육이라는 3대 결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이 한 애국자의 결심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각성과 결심을 또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그대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통 제사장이 아니고, 학사 에스라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하나에게 아주 중요한 것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연구 곧 공부함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34장 16절에는,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야 합니다. 신명기 17장 19절에도, “율법책을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니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옆에 두고 항상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편 2절에도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할 때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우리 개인개인의 신앙 생활에 절대로 필요합니다. 왜? 성경은 곧 생명의 양식이 되는 까닭입니다. 영적으로 일용할 양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데 절대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 곧 마귀의 화전을 소멸하는 무기가 되는 까닭입니다. 우리 주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 성경의 말씀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인생행로를 옳게 가는 데 절대로 필요합니다. 시편의 말씀과 같이,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는 까닭입니다.
성경은 거울과 같아서 이 성경 가운데서 내 자신을 바로 보고, 내 허물을 깨닫고, 죄를 알아서 회개하게 하고, 또 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공부하면 우리의 신앙은 자연히 장성합니다.
전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디 엘 무디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처음에 믿음을 더 얻기 위하여 기도만을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 후에 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온다’는 성경의 구절을 읽고 더욱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했더니 믿음은 자연히 장성하게 되었습니다.” 꼭 그렇습니다.
또 교회 역사를 보면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서 모든 위대한 신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오직 당시에 수도사로 있던 마틴 루터가 성경을 연구는 가운데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됨으로 이 종교개혁에 봉화가 일게 된 것입니다. 19세기 이후에 세계선교 운동도, 윌리엄 케리니, 허드슨 테일러니, 리빙스턴 같은 이들이 성경을 읽는 가운데서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새롭게 들음으로써 세계적 복음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면서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난 것도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다. 교회는 하나이다.’라고 하는 이 진리를 새롭게 깨닫는 가운데서 교회 일치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최근 수년 내에 일어난 교회의 사회 참여, 혹은 사회정의 운동도 역시 성경을 공부하는 데서 곧 “공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 데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에스라는 자기 자신이 먼저 성경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마 우리 교우 가정에는 누구나 성경 한두 권은 다 가지고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그 성경을 얼마나 읽습니까? 얼마나 연구합니까? 성경책 위에 먼지는 앉지 않았습니까?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성경책 위에 앉은 먼지를 일시에 털면 아마 해가 안 뵐 거야.”
여러분 가정에는 그런 성경 없습니까?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로 이 성서주일에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애국자 에스라의 첫째 결심을 오늘 아침 우리도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둘째 결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연구할 뿐더러 그대로 준행하기로, 실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식에만 그치면 안 됩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말대로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 ‘글은 글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고’,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을 듣는 것은 좋지만, 속담의 말대로 마이동풍(馬耳東風)이 되서는 안 됩니다. 말 귀에 스쳐가는 동풍처럼 지나만 가면 안 됩니다. 사실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그대로 행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6장 16절에,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1장 8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읽고 그대로 다 행하면, 우리의 길도 평탄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도 산상보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지만 내 말을 듣기는 들어도 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경고를 내렸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행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이대로 행하기를 힘씁니까? 세상의 무엇보다도, 물질보다도, 정욕보다도, 허영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또 둘째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행하기를 힘씁니까? 사랑은 먼저 가정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족을 사랑합니까? 남편 된 여러분들, 아내를 사랑합니까? 아내 된 여러분들, 남편을 사랑합니까? 시어머니 된 여러분들, 며느리를 사랑합니까? 며느리 된 여러분들, 시어머니를 사랑합니까?
사랑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피차에 서로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화해, 화평하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을 굳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단결할 줄 압니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봉사를 힘씁니까?
성경은 성결, 정직, 충성, 근면, 절제, 그리고 온유와 겸손의 생활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이대로 행하기를 힘씁니까? 10계명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열 가지 계명들을 양심적으로 지키기를 매일 힘씁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행하기를 힘씁니까?
바로 며칠 전에 박 대통령께서는 비상사태를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은 한국이 직면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정부와 국민이 이러한 사항에 대응할 만한 생활과 의무를 촉구하기 위함인 줄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태 아래에서 우리의 생활이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대로 행하면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하였습니다. 현 시국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대적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안보 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범사에 근신해야 합니다. 말도 삼가고, 심지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노는 것도, 모든 일에 근신해야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유언비어에 속지 아니해야 하겠고, 모든 생활에 절약과 검소와 절제를 다하여 사치풍조나 퇴폐풍조나 온갖 사회풍조를 해이하게 하는 행동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러한 시국에 있어서 먼저 솔선수범해야 될 줄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솔직하니 가장 쉬운 것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언할 마음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때에 꼭 우리 가정에서 혼식을 실행해야 될 줄 압니다. 잡곡을 꼭 섞어 먹어야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오실 때에 잡곡 꼭 잡숫고 오신 분 몇 분이나 되십니까? 손 한번 들어볼까요? 여러분, 양심적으로 대답해 보세요.
우리 지금 한국의 식량사정이 쌀 때문에 500억이니, 1억 달러가 넘는 외화를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잡곡을 같이 먹는다고 영양이 부족한 건 절대 아닙니다. 또 사실 맛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먹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오히려 혼식이 더 맛있습니다. 이거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닌데, 우선 우리 믿는 이들이 이러한 시국에 있어서 실행해서 온 국민에게 모범이 되어야 됩니다.
또 그리고 둘째는, 특별히 해방 이후에 다방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가정, 사무실 뭐 어디서나 커피 잘 마십니다. 또 홍차 많이 마십니다. 사실 이것은 해방 후에 특별히 우리 한국에 들어온 사치풍조 가운데 사치한 음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옛날 할아버지야 언제 커피 마셨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은 옛날부터 그저 구수한 숭늉을 마시고 살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것 마셔야 되겠으면 국산품 생강차든지 또 우리 좋은 인삼차 있지 않아요? 아무래도 이런 걸로 바꿔야겠습니다. 국산차로 바꿔야 합니다. 사실 커피 때문에 수백만 달러의 외화가 매년 소비되는 것입니다. 이럴 것 무엇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혹 아실 줄 모르시겠지만, 우리 교회 안에서는 이런 커피는 다 전폐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어디에서나 꼭 우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러한 시국일수록 철저한 절제생활이 필요합니다. 어떤 신문사에서 조사해본 결과는 금년 1월부터 9월까지 우리 남한에서 술을 소비한 양이 130만 킬로인데, 그것은 얼마나 많은가 하니, 서울 시민의 1년간 수돗물 사용량과 같다고 합니다. 아, 이만큼 술을 마셨단 말이야. 그런데 그 금액이 얼마인가 하니, 418억 2천만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여러분, 술 뭘 가지고 만드는지 아십니까? 곡식 가지고 만듭니다. 쌀로 만듭니다. 식량이 부족해서 외국에서 들여다 먹으면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신 좀 차려야 할 때입니다.
또 보세요. 금년 1월부터 9개월간에 담배는 얼마나 피웠나? 그 담배 피운 개수는 380억 개비를 피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놈들을 다 이렇게 이어놓으면 그 길이가 얼마나 긴가 하니 서울과 부산간을 2,900번 왕복할 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웁니다. 그 값이 얼마나 소비가 됐는가 하니, 597억이라고 합니다. 담배 심는 밭에 곡식을 심었으면 곡식이 얼마나 생산되었겠거늘 쓸데없는 담배를 심어서 전부 불태워 버리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 좀 깊이 생각할 만한 문제인 줄 생각합니다. 이런 쓸데없는 소비를 그냥 묵인하면서 무슨 생활의 절제를 말합니까? 특별히 이러한 시국에 철저한 금주단연운동이 필요한 줄 생각합니다. 이것은 먼저 정부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줄 압니다.
이조 역사를 읽어 보니 이성계씨가 새로 나라를 건설할 때에 금주령을 반포했습니다. 오늘날 민족중흥을 부르짖으며 새 역사를 창조한다고 하면서 왜 이런 점을 생각지 아니합니까? 그리고 신문에 본즉 이와 같은 시국에서도 무슨 꼬꼬클럽이니 나이트클럽이니 하는 곳에서는 밤새도록 소란을 피운다고 합니다. 이것이 비상사태 아래 용납될 수 있어요?
성경은 근신하고, 깨라고 합니다. 정부로도 근신하고 깨어야 하고, 국민도 근신하고 깨어야 합니다. 나부터 먼저 깨어서 내 책임을 바로하고, 이 나라를 바로 지키고 건설해야 합니다. 자립, 자급, 자위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 국민 하나하나가 근신하고 깨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특히 이런 때에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실행해서 범사에 솔선수범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의 셋째 결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가 성경을 읽고 행할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장 6절 이하에 보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하였습니다.
먼저 이 말씀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학생과 청년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이웃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전 민족에게 성경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각각 재능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술가는 그 예술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음악가는 그 음악을 통해서 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문학가는 문학을 통해서, 문필가는 문필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우리 민족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상담자는 상담을 통해서, 글을 쓰는 사람은 문서를 통해서, 방송하는 사람은 방송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교육적인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지, 우리 믿는 사람의 교육적인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 교회에서도 교회학교, 주간학교, 유치원, 야간 성경학교, 성경통신과, 여자신학교, 영락중학교, 영락상업고등학교 등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은 그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내 민족의 교사가 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은 물론 내가 먼저 실행하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산 편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락교인이 금년에 한 사람씩만 가르친다고 하면, 그만큼 우리 민족 가운데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르치기로 결심하십시다.
이 성서주일에 애국자 에스라의 3대 결심을 우리의 결심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 둘째는 성경대로 살기로 하는 것, 셋째는 성경을 가르치기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우리 하나하나가 성경의 말씀을 연구하며 그대로 준행하여 살며 또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결심을 하고 이 거룩한 자리를 떠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약말씀@ 하나님의 손을 실증하라 /스8:21-23/ 옥한흠목사
2014-11-17 16:44:35
세상에서 흔히 통하는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빈말’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생활에 모순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을 가리켜 ‘빈말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따라다니는 위험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에스라는 유대나라 사람으로 바벨론의 포로였습니다. 그는 인품이 준수하고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앗수르의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한동안 했습니다.
그러나 70년의 포로생활이 끝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에스라는 왕에게 자기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왕은 그의 간청을 들어줬을 뿐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기물들을 다시 그에게 선물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까지는 사막 길을 4개월 동안 가야 하는데 이 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대가 호위를 해주어야 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에스라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왕에게 군대를 요청하면 반드시 줄 것이지만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모르는 왕에게 “하나님은 신 중의 신이요,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호하시고, 위험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자주 이야기했습니다(22절).
그러므로 길에서 만날 적군을 막아 줄 보병과 마병을 달라고 왕에게 고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군대를 얻어서 호위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지만 에스라는 왕에게 자신의 증거가 빈말이 될까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에스라처럼 양자택일을 해야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왕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여행함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광야에서 실증해 주리라고 결정했습니다.
에스라는 드디어 3만여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9일 동안 바벨론 영토를 행한 끝에 국경선인 아하와 강가까지 왔습니다. 이곳에서 3일 동안 야영하면서 광야 길에 들어서기 전에 에스라는 모든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왜 그처럼 강하던 에스라가 갑자기 금식기도를 선포했습니까? 인간에게는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한 결단이라도 기도 없이는 안됩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순결을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불순하고 약한 믿음을 순결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며,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하게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줍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결단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100% 받을 수 있도록 거리끼는 모든 것을 처리해 줍니다.
에스라는 3일 동안 기도함으로 그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죄를 처리한 다음에 황량한 광야에 하나님의 역사가 따라올 것을 믿고 담대하게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놀랍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방왕에게 실증했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에게서 말과 행동이 일치한 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인생 길을 걸어갈 때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