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모음/레위기 설교 모음

레위기 13장 설교 모음

Jessi J 2022. 11. 1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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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적 죄를 지니고서는 거룩을 대면할 수 없다/레13:

2001-11-30 18:08:41

 

레위기 13장은 두 개의 주요한 구분으로 나누인다. 하나는 인간의 피부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요(2-46), 또 하나는 직물에 관계된 진단과 치료법(47-58)이다. 27가지의 피부병과 세 가지 다른 직물에 관한 병이 기술되고 있다(사람의 경우/ 털, 흰점/난육/, 다시 생겼을 때, 불에 데였을 때) 

 

성경에서 말하는 문둥병을 오늘날의 한센 병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그 이유는 직물과 빌딩 등에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둥병에 관한 내용을 종기, 변색, 피부병에 의한 딱지, 벗겨짐, 곰팡이 등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5세기 전에는 문둥병에 의해 고통을 받았다는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기독교 시기 전에는 매우 드물었으며, lepra라는 헬라어 역시 진짜 문둥병을 말하는 elephantiasis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피부병에서 언급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정확치 않지만 건선(2-17), 기계총(황선: 29-37), leucoderma(38-40)을 포함하며, 데임에 의한 조직 손상이나 습진, 포진, 혹은 문둥병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leprosy of joints가 많지만, 이 성경의 내용은 White leprosy(called Lepra Mosaica)는 최근에도 아라비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고 카일 & 델리취의 주석에서는 말한다. 그리고 Trusen의 기술을 인용한다. 

 

“매우 자주 그 병이 일어나기 전 수년 전에 하얗고 노란 점들이 피부에 특히 생식기에 이마에 그리고 얼굴에 그리고 관절에 나타난다. 그것들은 느낌이 없고, 때로 머리카락을 점들과 똑 같은 상태로 만든다. 이 점들은 후에 피부를 파고 들어가서 근육과 뼈에 미친다. 머리는 하얗게 되고 결국 떨어진다. 아교질의 부풀어 오름이 세포 조직에 형성되며 피부는 딱딱해 지고 거칠어지며 솔기가 되어지며 림프액이 그것으로부터 나오며 커다란 딱지가 생긴다. 매우 아프다. 손톱이 부풀어 오르며, 끝부터 감아 올려지며 떨어진다. 코가 막히며 심각한 점액이 흐르고 감각은 무뎌지며 환자는 야위고 약해지며 끊임없는 갈증과 뜨거운 열이 그의 고통을 끝낸다(Krankheiten d. alten Hebr. P. 165) 

 

제사장들이 기간을 두고 판단해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고정된 것인가 혹은 낫고 있는가(정함), 퍼지고 있는가 그리고 전염적인 것인가(부정해 짐)를 판단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제사장들은 피부병 진단의 주요한 기준으로 그 감염이 만성적인 것이거나 한 주 드리고 두 주 이상 되어지는가를 지켜 보아야 했고 피부보다 깊은 것인가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 결과 속살이 나오고, 색이 바뀐 것은 부정한 것이었다. 직물 역시 한 주 이상이어야 하고 깨끗이 씻기지 않아야만 했다. 

특이한 기록은 13의 내용인데 완전히 하얗게 되었을 때는 정하다는 판결을 내리라는 명령이다. 그것은 그 병이 끝나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되었던 것이 비듬이 되어 죽어 나가고 깨끗해 진다. 그러나 기운이 넘치는 살이 있으면 하얗게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부정하다고 정해졌다. 

 

결과: 고통 받는 자는 한 주 동안 분리된 후 좀 더 심각한 것일 때 좀 더 장기적인 분리 필요했다. 그것은 공동체를 영향 주지 않기 위함 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만져 부정케 되는 일이 없도록 함이었다. 그러나 제일의 목적은 부정한 것이 거룩한 것을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종교적 목적이 우선했다는 말이다 

 

감염된 직물을 불사르는 이유 역시 그것을 입음으로 사람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들 자신이 위험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만일 부정한 채로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다른 이들을 위험에 직면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질적으로 죽은 자에 속했다, 그 병이 죽음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몸을 침범하게 하기 때문이며 공동체와 경배의 장소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하다고 정한 사람은 옷을 찢고 텁수룩한 머리와 가려진 얼굴로 슬픔의 예식을 행해야만 했다(45-46). 그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표현이었다(10:26; 21:10). 옷을 찢는 것은 슬픔을 의미했다. 죽음이나 죄 혹은 그 결과에 대한 슬픔이 그것이다. 수염을 가리우는 것은 특히 (겔 24:17, 22) 죽음의 슬픔을 위한 것이었다. 미가서 3:7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대답을 받지 못한 자들의 수치와 관련되어진다. 

 

그는 또한 영문 밖에서 살아야 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들의 집으로부터 떠나 살아야 했다. 그것은 비참한 상황이었다. 고대에서 그것 자체가 재난이었다. 한적한 곳에 사는 것이 아닌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의 분리였다. 

 

그것은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거룩한 장소인 성막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삶을 살아야 했는데 그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막은 거룩한 백성들이 사는 진들로 둘러 쌓여야만 했다. 그는 살아 있는 죽음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박탈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축출과 같다. 하나님 개의치 않는 곳으로의 축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길어질 때, 그것이 이미 옛 것일 때, 지속적인 것일 때에 그러했다 씻음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에 그러하다. 

거룩은 레위기에서 온전함에 의해 상징되어진다. 동물들은 희생되기에 완전해야 했으며, 제사장은 육체적인 흠이 없어야 했고, 혼방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있어 온전함과 신실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행동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이 지속적인 부조화의 상태에서 온전함의 부족을 보였을 때에, 그는 배척되어야만 했다. 일시적인 일탈은 그 경우에 해당치 않는다. 

 

이 법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순결함과 거룩의 중요성에 대한 웅변적인 증언이다. 개인적인 불편함이 나라의 영적인 안녕을 위태롭게 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중심으로부터 배척되어진 부정에 근거하여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사 6:3-5). 

 

일상에서 믿음에 의한 변화가 믿지 않는 이들의 변화 이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일 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경험치 못한 수준의 성결을 요구하고 계심을 배운다. 단지 우리가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에 예수님 안에서의 변화를 그저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배운다. 지속되는 정결치 못함이 결코 거룩을 대면할 수 없음을 드러내시는 이 말씀이 우리로 더욱 거룩한 삶을 사모케 하기를 소원한다. 

 

 

 

문둥병의 진단과 정결의식 /레13:9-17

2017-11-14 18:48:32

 

9 사람에게 문둥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10 제사장은 진찰할찌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난육이 생겼으면 

11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문둥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금고하지는 않을 것이며 

 

12 제사장의 보기에 문둥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까지 퍼졌거든 

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찌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14 아무 때든지 그에게 난육이 발생하면 그는 부정한즉 

15 제사장이 난육을 보고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찌니 그 난육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문둥병이며 

16 그 난육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17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처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찌니 그는 정하니라 

 

 

서론 

 

 

레위기 13~14장에는 문둥병 규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읽기에도 복잡하고, 설교하기도 어려운 본문입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레위기 13~14장에 기록된 내용도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한 말씀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모든 율법의 규례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복음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규례에 나타난 예표와 실체를 찾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문둥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짜라아트’는 오늘날의 한센씨병과는 전혀 다른 병입니다. 한센씨병은 현대 의학으로 치료될 수 있는 질병가운데 하나이지만, ‘짜라아트’는 치료 방법이 없는 특별한 질병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둥병은 인간의 의술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을 가리킵니다. NIV(새국제역)성경을 봐도 ‘Infectious skin disease’(전염성이 있는 피부질환)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대게 ‘Leprosy’(한센씨병)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전염성이 있는 피부질환’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성경의 문둥병은 사람의 피부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의복과 주택에도 발병했습니다. 오늘날 사람의 피부에만 발병하는 한센씨병과는 종류도 다르고, 발병하는 곳도 다르고, 치료방법도 다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에 이를 ‘문둥병’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저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을 보면 문둥병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는데 13장에는 사람의 인체와 의복에 발병된 문둥병 진단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14장에는 회복된 문둥병자의 정결의식과 가옥에 발병된 문둥병의 정결예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3장은 문둥병 진단에 관한 말씀이고, 14장은 정결의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문둥병이 의복이나 가옥에도 발병할 수 있다는 것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도 얼마든지 죄로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레위기를 강해할 때 가옥의 문둥병에 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정결해야 한다는 요지의 설교였습니다. 오늘은 인체에 발병한 문둥병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문둥병은 영적인 부정을 가리키는 ‘죄’를 상징한다. 

 

 

문둥병은 단순한 피부질병을 넘어 영적인 부정과 죄를 상징합니다. 영적인 질병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죄의 상징이라는 것은 세 가지 증거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 보면 문둥병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즉각적인 발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구스 여인과 결혼한 모세의 지도력에 대항하며 비판하다가 문둥병에 걸리게 된 미리암이 그 예입니다. 또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가 거짓과 탐욕으로 나아만 장군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직접 하나님께 분향하려던 남 유다 웃시야 왕도 이마에 즉각적으로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질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문둥병이 단순히 육체적 질병이었다면 의사들이 관리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13~14장의 기록에 따르면 문둥병은 철저히 제사장의 관리 아래 있었습니다. 문둥병을 진단하고 확정해 선포하는 것이 제사장의 사명이었고 병이 나은 이후, 정결의식을 행하는 것도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를 진단하고 깨끗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문둥병은 단순히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영적인 죄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문둥병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습니다. 어떤 약을 써도 문둥병을 깨끗케 할 수 없고, 노력한다고 해서 낫는 병도 아닙니다. 문둥병이 깨끗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영어로 ‘Defilement’(부정)입니다.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정결하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문둥병에는 ‘치료하다’(Cure)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깨끗하게 하다’(Cleanse)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도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네가 깨끗함을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문둥병이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씻어 주실 수 있는 영적인 부정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Ⅱ. 문둥병에 대한 진단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한다. 

 

 

요한복음 16장 7~8절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혜사’는 제삼위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Holy Spirit)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야단을 치거나 혼을 낸다’는 의미보다 ‘마음 깊이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문제는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올 결과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고,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해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주일에도 놀러다니고 교회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롯의 사위처럼 복음을 농담으로 여기며 웃고 떠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가볍게 생각할 주제가 결코 아닙니다. 이 문제가 가벼운 주제였다면 어떤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죄인인데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하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되고 “이대로 죽었다가는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겠구나!”하는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제사장이 문둥병자에게 문둥병이 있다고 진단해 주는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역사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레위기 13장은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제사장이 환자를 문둥병자로 선언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조건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겼을 때, 그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해야 합니다. 13장 3절에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둥병자로 확진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묵하지 않으면 문둥병이 아닙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이 사람 영혼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피상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감옥에 가보면 죄수들이 대부분 자신들이 행한 범죄를 뉘우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뉘우침이요, 후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후회는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역사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가룟 유다도 죄수들처럼 예수님을 은 30개 받고 팔아넘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준 제사장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으나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다시 예수님의 제자도 되지도 못하고, 제사장 편에도 서지 못하는, 오갈 데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속된 말로 왕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그 몸이 갈대밭에 떨어져 창자가 흘러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회는 했으나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피상적인 후회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영혼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회개’(Saving Repentance)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피부에 흰점이 돋고 털이 희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털은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백발은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몸 여기저기 자라는 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얀 색 반점이 생기고 흰 털이 나오는 것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피부의 뿌리까지 부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피부 속까지 썩었기 때문에 건강한 털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한두 가지 자범죄를 떠올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근원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천국에 들어갈 의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자신이 50%, 하나님이 50%를 공헌하면 천국에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극락에 가는 법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론은 이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내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천국 들어가는 데 공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0.0001%도 공헌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문둥병으로 진단하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라 이는 문둥병임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부에 퍼지면 문둥병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죄인들의 지정의(知情意) 전 영역이 모두 부패했음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만 부패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of Man)은 건강한 진리가 나오는 제일 뿌리의 교리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하는 모든 신학은 거짓된 것입니다. 

 

 

넷째, 피부에 난육이 발생하면 문둥병으로 진단하라고 하셨습니다. 14절에 “아무 때든지 그에게 난육이 발생하면 그는 부정한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육’은 ‘생살’(Raw Flesh)이라는 뜻입니다. 환부에 종기가 터지고 안에서 생살이 부풀어나면서 진물이 나는 것을 ‘난육’이라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곪은 상처가 터진 것처럼 사람의 양심에 심한 가책이 와서 상한 심령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왜 인생을 이렇게 살았을까? 내게는 천국에 갈 의가 전혀 없구나!”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처든지 그것이 문둥병으로 진단받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피부보다 우묵해야 하고, 둘째는 흰 털이 나와야 하고, 셋째는 피부에도 온통 다 퍼져야 하고, 넷째는 난육이 발생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조건이 모두 있어야 문둥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가 마음의 뿌리에서부터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참된 회개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냥 교인입니다. 그러나 피상적인 후회 정도의 뉘우침으로는 참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참된 회개를 하시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3장에는 문둥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취해야 할 조치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45~46절에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은 먼저 옷을 찢어야 합니다. 옷을 찢는 것은 “나에게 천국에 들어갈 의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참된 회개는 하나같이 모두 옷을 찢고 기도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풉니다. 묶었던 머리를 푸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머리에 쓰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름에 태양 볕이 내리 쬐이고,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모자와 같은 것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다”(I am under the wrath of God)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윗입술을 가리고 다녀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고 다녀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서 진 밖으로 홀로 나가야 합니다. 홀로 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반드시 혼자 나가야 합니다. 

 

구원은 누가 대신 받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식이 저절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각자가, 일대일로 영문 밖에서 수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 분을 만나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영문밖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난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Ⅲ. 정결의식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를 적용해 주시는 과정’을 설명한다. 

 

 

문둥병에 대한 정결의식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죄인들에게 적용해 주시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의학기술로 고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가 사람의 죄를 근본적으로 용서해 주고 죄인을 의롭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떤 교육, 어떤 선행, 어떤 훈련으로 가능합니까? 어떤 약도 문둥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진단하고 깨끗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과정이 바로 레위기 14장의 정결의식에 그림처럼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정결의식은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다섯 가지 단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단계는 문둥병자가 진 밖에 있기 때문에 제사장이 문둥병자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문둥병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치료해주셨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예수님이 먼저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야 가능해 집니다. 결코 자유의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면 구원받고, 원치 않으면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8년 된 병자 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왜 그에게 다가가셨을까요?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6). 

 

2단계는 제사장이 산새 두 마리를 취하여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고, 다른 한 마리는 날려 보냅니다.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속죄하심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단계는 제사장은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묶어서 붓을 만든 후, 산새의 피를 찍어 문둥병자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피뿌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죄인들의 영혼에 뿌리셔서 죄 사함과 자유를 얻게 하고, 평안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영혼의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합니다. 

 

4단계는 영문 밖에서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이 자기 옷을 빨고 털을 밀고 맑은 물에 몸을 씻은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고, 7일을 거한 후 다시 한 번 옷을 빨고 털을 밀고 물로 씻은 후에 가족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로 격리되어 있다가 드디어 그리운 가족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웠던 가족들을 오래간만에 재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 받은 후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소속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가 됩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형제자매입니다. 

 

5단계는 하나님 앞에서 피와 기름을 일곱 번 뿌리고 기름을 세 곳에 바릅니다.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오른쪽 발가락에 바릅니다.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가 되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화된 삶,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듣고 보고 행하는 모든 것에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죗값을 갚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사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셔서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문둥병의 정결예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림입니다. 

 

 

결론 

 

 

문둥병자에 대한 진단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라는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미 죄인 된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 상태에서 자신이 저주 받은 문둥병자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성령의 역사로 주시는 깨달음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렇게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참된 성도가 된 사람은 놀라운 복을 받은 것입니다. 교인이라고 다 똑같은 교인은 아닙니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상한 심령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 피로 씻음 받고, 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성령 체험입니다. 요즘은 이상한 종교행위를 통해 성령을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방언, 예언, 통변과 같은 은사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런 현상들이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있고, 천주교에도 있고, 힌두교, 크리스챤 사이언스와 같은 단체에서도 나타납니다. 몰몬교 교리에도 “우리는 방언과 통변을 믿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비로운 체험이 진정한 성령 체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체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어, 자신의 전 삶을 예수님께 드려 정결케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성령의 참된 역사를 체험하여 하나님께 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강해-13 /레13:1-, 레14:1-

2011-02-10 17:41:07

 

문둥병에 대한 규례 

 

범위가 길기 때문에 전체적인 개관을 설명을 하고 그리고 그 구분을 따라서 조금더 설명을 하겠다. 그래서 구분을 제일 뒤에다가 돌려놨다. 음식물의 주보를 보자.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한 규례에서는 땅에 있는 먹을 것은 부정하다 그렇게 가르쳤고 출산으로 인한 정결법 규례에서는 생명이 출산이 부정하다 그렇게 말씀했다. 그러나 성소에서 이스라엘 과 함께 하신 여호와께서 그러한 부정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규례를 주시어 그들을 정결케 하셨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부정한데 먹을 것을 주셨고 출산을 통한 모든 것은 부정한데 정결법을 주셔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로 할례 되게 하시고 성소에 출입하도록 하셨다. 

정결케 하는 규례는 하루의 해가 지는 것과 물로 씻는 것과 칠일과 40일이 차는 것과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정결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온전한 정결을 교회에 주심으로 이 생명의 언약 역사를 완성하셨다. 

문둥병 규례에서는 이스라엘 의 몸과 의복과 가옥 등 모든 것에 하나님과 교제를 단절시키는 죽음이 활동하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그런 부정으로부터 이스라엘 을 정결케 하시는 규례를 주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성소에서 봉사케 하신 것이다. 

 

전체적인 흐름이 이런 내용이다. 그러면 13-14장을 대충 설명하면 모든 썩어짐의 징후에 정하고 부정함을 판별하고 정결케 하는 자는 제사장이다. 무슨 징후가 있으면 칠일의 간격을 두고 진찰하고 또 칠일을 두고 진찰하고 만일에 그 징후가 우묵하거나 퍼졌거나 색깔이 짙어 졌으면 문둥병이며 문둥병은 심히 부정하다. 문둥병의 특징은 부정하다 그 말이다. 부정함은 어떤 의미로 부정하냐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의 진으로부터 분리되는 부정이다. 

 

가령 출산한 여인의 부정은 다른 사람을 부정케 하고 하나님의 성소에 나가지 못한다는 의미로 부정이다. 또 음식물의 부정한 것을 먹으면 하루 동안 부정하고 물로 씻으면 깨끗하다. 그런데 여기 문둥병의 부정의 의미는 이스라엘 의 진으로부터 쫓겨나서 진밖에 있어야 된다 그런 의미로 부정하다. 

 

문둥병이 나으면 먼저 정결케 하는 규례를 통하여 진으로 들어오나 칠일 동안 자기 집밖에 있어야 하고 제 팔일에 성소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된다. 정결케 하는 규례의 특징은 산 새 두 마리로 하는 정결법과 물로 씻고 털을 칼로 미는 것이며 제사법의 특징은 속건제의 피와 기름을 정결케 된자의 신체에 바르는 것이다. 

설명에서 네 번째에 더 넣으라. 징후에 한가지를 더 넣어라. 난육이 있으면 난육은 문드러진 살이 속에서 올라온 것이다. 그런 것이 있어도 부정하다. 

 

13장을 읽어보면 전체적으로 이런 이야기다. 자세히 보면 이런 저런 차이가 있지만 대충 읽으면 문둥병은 부정한데 제사장이 진찰하고 그러면 무엇이 문둥병이냐? 피부보다 깊이 들어갔거나 또 그 털이 햐해져버렸거나 또는 상처가 넓어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밑에서 문드러진 살이 올라오고 있거나 그러면 문둥병이다. 문둥병은 부정하니까 진 밖으로 쫓아내고 거기서 부정하다 그래야 된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 오냐? 문둥병이 아니고 이런 저런 피부병은 칠일 기간이 지나면 나으면 정결하다. 칠일을 기다려서 보고 또 만일에 문둥병이 확증되면 진 밖으로 쫓아내는데 하나님이 낫게 하셨으면 정결법을 통해서 돌아와야 되는데 물로 씻고 또 털을 다 밀고 그런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특징은 산 새 두 마리로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는 그런 것 그리고 14장에 제사법을 보면 다른 제사법 보다도 속건제 제사가 강조가 되어 있다. 그런 것들이 특징이다. 

 

일단 이렇게 전체를 보는 습관을 길러야 된다. 그리고 전체를 대충 말할 수 있도록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이제 부분들을 볼수가 있다. 내가 한 번 쯤 읽어오라 그 말은 한 번만 읽어오라 그 말이 아니라 전체를 자기 말로 설명할수 있을정도로 일어오라는 말이다. 읽으라는 말이 숫자가 아니라 알수 있도록 읽으라는 그런 말이다. 

 

성경은 전체로 빠른 속도로 읽고 그 전체를 파악하도록 하고 그리고 그 문맥에서 무엇을 말하고 그 표현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을 따라서 해석을 해야지 그 토대를 벗어 버리면 그 때부터는 다른 데서 끌어온 이야기다. 아무리 신학 이론적으로 맞아도 그 문장이 말하지 않는 것이라서 옳지 않다. 항상 문맥을 봐야 한다. 그래서 설명이 13-14장이 긴데 몇줄로 요약을 했다. 이런 말이 대충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알 것이다 해석도 전체적인 윤곽을 따라서 해석을 하고 그리고 부분들을 구분해서 성경이 기록했으니까 그 구분들을 따라서 특징들을 언급하면 될 것이다. 

 

나은 여부는 칠일의 간격으로 진찰하고 정결케 하는 규례는 물로 씻는 것과 피와 기름을 바르면 정결케 된다. 흐르는 물은 죽음에 접촉해도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그랬다. 음식물은 부정하다 했을 때도 음식물이 방축 물이나 샘물에 떨어지면 부정하지 않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흐르는 물은 죽음에 접촉하여도 부정을 입지 않는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 

 

피는 생명을 말하고 홍색 실과 백향목도 생명이 표상들이다. 백향목 하면 굉장히 크고 좋은 나무다. 그래서 홍색 실과 백향목 하는 것은 생명의 풍성한 활동들 그런것에 관계된 이야기다. 우슬초는 피를 뿌릴 때 이 우슬초에 뭍혀서 뿌리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로 우슬초는 정결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백향목과 우슬초를 연구해 봤자 모른다. 단지 백향목의 큰 것을 대비시킬려고 우슬초를 대비시킨 것뿐이지 백향목을 백향목대로 풍성하고 우슬초는 정결법이지 백향목은 크니까 우슬초는 째째하고 이렇게 하면 안된다. 성경에서 우슬초는 정결케 하는데 쓰인다. 거기다 뭍여서 뿌린다. 담장 위에 있는 우슬초 산 위에 있는 백향목 하는 것 보니까 우슬초는 별볼일 없는 풀인데 어떤 성경 용도는 별볼일 없다는데 강조가 아니라 정결케 할 때는 우슬초에 뭍혀서 뿌린다 

 

. 가령 우리 나라 같으면 보름에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데 피마자대로 한다. 그러면 피마자가 왜 그런지 우리는 모른다. 미신은 어리석은 것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면 그러니까 피마자 연구하지 않아도 되고 그 말이다. 우상은 참 어리석은 것이라 별볼일 없는 것인데 피마자 나무가 무엇이 겂나다요? 탱자 나무를 가지고 다니면 겁날 까 별볼일 없는 것인데 말하자면 우슬초 하면 성경이 그것은 정결케 하는데 묻혀서 뿌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지 우슬초를 연구해서 알 것도 없다 그 말이다. 

 

백향목은 크고 곧은 나무를 이스라엘 의 풍성함 부요함으로 백향목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 용도를 따라서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백향목 보다 더 큰 나무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나무 연구가 아니라 성경이 가나안 땅의 평화에서 산림이 풍성하고 포도와 무화과가 많고 그런 것이다. 그러면 제일 맛있는 것이 포도고 무화과냐 하면 많지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있는 것은 제일 맛있는 줄 알고 그런데 더 맛있는 것이 많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은 최고 좋은 것만 주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언약 적으로 최고 좋은 것을 준 것이지 물건이 제일 좋은가 하고는 다르다. 

 

그 때 아무리 좋은 것 주었어도 아이스크림 못 먹었잖아요? 우리는 백원이면 먹을 수 있는 것을 그러니까 성경은 언약 적인 이야기지 물질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성경이 백향목은 크고 좋은 나무 이스라엘 의 번성함 그러니까 여기서 생명의 표상으로 또 모든 붉은 색은 그렇게 썼다. 그런 이야기지 나무 자체를 연구해서 상수리 나무는 딱 딱한데 백향목은 어쩝니다 연구 해 봤자 모르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을 상수리 나무로 이야기한다. 상수리 나무를 베어도 그루터기는 남고 했을 때 그 나라에 상수리 나무가 많은 모양이지요? 그런 것을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이지 상수리 나무는 단단합니다. 철도 침묵으로 씁니다. 벌레가 먹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은 그러니까 상수리 나무 해 가지고 여러 이야기를 해도 모르는 이야기다. 그렇게 풀지 말고 문맥만 가지고 풀어야 한다. 

 

정결케 하는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서 속건제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것이 강조 된 것은 문둥병으로 인하여 부정케 되어 진밖에 있어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왜 그렇게 해석이 가능하냐면 그러므로 마치 제사장의 위임식의 피와 기름처럼 속건제의 피와 기름을 문둥병으로부터 정결케 된자의 신체 기관에 바른다. 그리고 속죄제와 번제를 잡는 곳에서 속건제를 잡고 그 고기는 제사장에게 돌리는데 지극히 거룩하고 그리고 제사장은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를 드린다. 

 

제일 먼저 드린 것이 속건제로 되어 있다. 다른 데서는 속죄제가 앞설 때가 있고 어느 때는 번제가 앞선다. 출산에 비유에서는 번제를 먼저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속건제를 제일 앞에다 나 뒀다. 그리고 제사장이 위임식에서는 위임제 제사에 피를 바른다. 속죄제나 번제로 바르니까 위임제 제사에 피를 오른 귓부리 엄지 손가락에 바른다. 그런데 문둥병을 정결케 하는 제사에서는 속건제의 피를 가져다 바른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위임식은 성소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즐거이 봉사하는 제사장의 사역이다. 그러니까 화목에 사역 그러니까 화목제 위임식에 피를 그렇게 발랐다. 그는 화목제의 몸으로 나가는 식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 속건제의 피를 그전에 제사장의 위임식에 화목제를 바른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는 속건제가 강조되어 있다. 그 몸을 속건제를 드리는 식으로 드리는 것이다. 속건제는 어디서 잡냐 말하기를 속죄제와 번제를 잡는 곳에서 잡으라 해서 잡는 곳을 같이 언급해서 같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그러면 속죄제와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제사들을 대표하는 대표 법들이다. 그러니까 문둥병 자가 정결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속건제가 강조가 되어 있다. 속건제는 본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갚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으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고 그런 권리 침해에 대해서 드리는 것이 속건제다. 

 

그러니까 이 문둥병자는 문둥병 때문에 하나님의 성소에 나가서 마땅히 봉사해야 할 마땅한 의무 수행을 못한 것이다. 진 밖으로 쫓겨 났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속건제의 예물을 듸록 속건제 예물의 피를 그 전 신체 기관에 발라서 그의 전몸이 그 직무를 감당하는 회복의 의미를 준다. 그래서 그 제물을 제사장이 먹는 것이다. 그렇게 강조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모든 제사를 드린다. 

 

산에서 자기에게 나온 제자와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의의 법을 친히 말씀하시고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의 문둥병 자를 정결케 하기 원해서 오신 분이시다. 그 문맥이 그런다.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이 고쳐 주고 싶으면 고치고 안 고치고 싶으면 안고쳐주고 그런 의미로 원하시면 그런 것 그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씀하신 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문둥병을 정결케 하시기를 원하셔서 오신 분으로 묘사를 해주고 있다. 이방인은 찾아 가시기를 원하셔서오셨고 그것이 마태복음 8장의 흐름이다. 원하여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오는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지시고 깨끗게 하셨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썩어짐을 이긴 생명의 것을 유업으로 받았으며 그 생명을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린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 예수님 죽으셨을 때 물과 피가 나오고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셨다. 요한-서 5장6-12절을 보면 물과 피로 임하셨는데 증거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고 성령은 진리시고 이 셋은 하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그렇게 쭉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도 물을 뿌리고 또 피가 있고 그렇게 정결케 하고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흐르는 물위에서 산 새를 잡고 그것을 우슬초에 뭍여서 뿌리고 한데서 연결이 되어 있다. 여기 보면 이전에는 음식물은 부정하다. 출생은 부정하다. 그랬는데 13장에서는 문둥병이 안드는데가 없다. 그러니까 다 보면 한마디로 썩어짐이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 썩어짐이 발동도 활동이 되면 부정하다. 생명이 하나님과 단절된다. 그 활동력은 죽어야 되고 죽은 뒤로도 또 씻어야 되고 여러 제사법이 있다. 그렇게 해서 진으로 들어오고 하나님의 성소에 나갈 수가 있다. 

 

그러니까 물과 피의 정결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고 그 제물을 통해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이 정결법이 모든 것이 다 부정하고 모든 것에 죽음에 세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정결법을 통해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이 상실되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은혜의 일을 예수 안에서 완성하셨는데 예수는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유월절과 관계가 있고 제사법들과 관계가 있다. 그는 죽으셨을 때 물과 피를 흘렸고 다 이루었다 하고 죽으셨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그렇게 하고 죽고 눅가복음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렇게 죽고 요한복음은 다 이루었다 그렇게 하고 죽으신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물과 피를 흘렸다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그 이야기를 한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요한복음 처음부터 유월절과 관계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무엇을 이룸이겠는가? 그가 이제 생명의 주로서 자기 백성을 새로운 하나님의 교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신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너희들이 뉘 죄든지 용서하면 용서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을 새로운 인류로 짓고 계신다. 그런 문제들이 요한복음 문맥이다. 그러니까 물과 피의 정결법은 어디서 완결되는 것인가? 성령은 진리이신데 물과 피로 임하셨는데 증거하시는 것은 성령이시니라 성령은 진리시니라. 구약 개념에서 물과 피의 완성은 성령이시다. 

 

하늘에 속한 생명 성령이 증거하신데 성령은 진리시다. 그런데 이 성령이 아들 안에 있다. 그러니까 아들이 있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영생이 없다. 그렇게 요한-서에서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교회는 썩어짐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것을 얻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을 기업으로 받았다. 우리의 몸도 먹을 것도 의복도 가옥도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은 한마디로 새로운 세대에 속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옛 질서에 매이지 말라 그 말이다.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레위기13-14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문둥병 자는 성소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남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의 책인데 병든 사람은 교회에 오지 말라는 말이 아니냐? 병든 사람은 교회가 일부러 찾아 가야지! 말하자면 물론 전염병이 들면 본인이 교회에 오지 않겠지요? 다른 사람이 위험하니까 그리고 목사도 심방하고 나서 다른 집에 갈 때 조심하고 가야겠지요? 아 나는 목사니까 전염병 들린 사람집에 들렸다가 나중에 아이 낳은 집에 들렸다가 그래가지고 병을 옮기고 다니면 안된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그전에는 어떻게 해석을 했냐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은 모르지만 어떻든 나쁜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제일 좋은 것 주지 나쁜 것을 줄 이유가 없다고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일 좋다는 것을 건강법으로 안다. 그런데 요새 알지요 고기만 먹었다 하면 몸이 산성화 된다는 것을 그러면 제사장은 제일 먼저 죽어야 되지요? 맨 고기만 먹어야 되거든. 봐라 피는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그런데 사람이 죽을려면 수혈하지요? 그러니까 언약 적인 언어로 읽지 않고 소위 하나님과 관계한 소위 신령한 것을 먹고 마시는 소위 육체의 것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 해석이 안된 것이다. 

 

여기 문둥병도 병원 차리라고 해 났구만 이런 저런 병이 있으면 교회에 안 나온 것이 좋고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를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것이 지금도 통한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 설교하면 전부 감동을 받아 버린다. 레위기 신약에서는 계시록이고 구약에서는 레위기다. 설명했다면 맘대로 해 버릴 수가 있거든.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들의 삶의 질서 그 당시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 

 

구체적인 관계에서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되고 그런 의미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어떻게 이전에 흔적들이 없어지고 하늘에 속한 것으로 완벽하게 회복되었는가를 선언하면 된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너희들이 먹고 마실 때 조심해라 그런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온 땅이 다 부패에 참여했다. 땅에 있는 것은 모두다 부정하다. 생육하고 번성해도 해산하는 고통과 죽음에 따라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가나안 땅의 모든 것 즉 집에서 문둥병이 있다. 그런 것은 부정한 것이다. 부정하기만 하면 진짜 소망이 없는데 그런 부정한 중에 생명의 양식이 있고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면 새롭게 출생되고 칠일과 40일이 지나면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고 그리고 문둥병도 그것이 부정한데 그것을 하나님이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깨끗케 하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봉사할 수가 있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그 몸으로 봉사했던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을 봉사하는 그런 백성으로 살수 있도록 속건제의 피를 그 몸에 바르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들이다. 

죄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친히 생명의 하나님으로 함께 계시고 너희들의 모든 것을 생명의 회복해 주겠다 하는 약속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약속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된 것이다. 

 

바울이 만일에 전도하다가 매 맞고 죽게 되면 나는 죽었도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날마다 죽음이 나타나면 그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는 약한 중에 하나님의 강함을 찬양한다. 그의 몸에는 죽음의 흔적이 없다. 겉 사람이 후패하면 속은 날로 새롭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그는 아무것도 없어도 다 가진 자다. 

 

그는 세상에서 형편없는 욕을 먹어도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진 자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라 그 말이다. 오늘 아침에 했던 설교도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예수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썩어짐이 제거된 것이다. 여전히 먹는 떡 포도주 먹어봤자 뒤로 나오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생명의 관계로 살고 있지 이스라엘 백성처럼 죽음에 질서에 복종하는 선물을 받고 있지를 않다.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은 예수 안에서 쇠하지 않고 썩지 않는 영원한 기업이다. 그것이 우리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 말이다. 그것이 레위기 13-14장에서 문둥병 규례로 이스라엘 의 전 삶을 커버하는 방식으로 그 몸이며 옷이며 집이며 전체를 두고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서 구체적으로 나눠 가면서 설명을 해보면 그 의미들이 잘 드러날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이 틀을 따라서 적어 가면서 조금씩 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여기 보면 이런 것이 있다. 우묵하고 털이 희고 색갈이 짙으면 문둥병이다. 

 

그런데 온 몸이 희여져 버리면 깨끗하다. 조금만 희끗희끗해도 가둬놓고 봐야 되는데 온 몸이 하야지면 깨끗하다. 하얗게 된뒤로도 거기서 난육이 생기면 부정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해가 안된다. 조금만 희끗 희끗해도 수상한데 온 몸이 하얗게 되면 이것은 진짜인데 문둥병으로 진찰을 받았다가도 온 몸이 하얗게 되면 괜찮다. 

 

그렇다가도 속에서 문드러진 살이 올라오면 또 부정하다. 이런 것은 무엇인가?가령 온 몸이 하얗게 되면 그 병이 전 몸에 퍼진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게되면 그 몸에서 활동력은 멈춘다. 묘한 표현법이다. 완전히 하얗게 되었으니까 완전히 문둥병이다고 해야 될것인데 몸에 일부에서 활동하고 있으면 병이 활동하고있는 증거인데 온 몸에 퍼졌으면 그것은 온 몸에 하얗게 되므로 활동이 끝난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난육이 올라오면 부정한 것이다. 왜 다시 죽음이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 집이나 몸 모든 것에서 활동하는 죽음의 세력들 썩게 하는 세력들 그런 문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털이 하해 지면 이스라엘 은 아마 털이 까맣겠지요? 본래 흰 색깔이 있는 털도 있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부정한가 그래서 미장원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말하자면 이스라엘 의 영역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다 

 

. 우리도 털이 하얗게 되면 힘이 점점 빠지구나 낙엽 진다는 말이다. 그런 이야기다. 그런 의미로 속에 죽음이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다가 평소 피부보다 우묵하게 꺼져 있다. 또 그것이 점점 확대되면 분명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부정하다. 그런 이야기들이다. 지금 우리들이 병원에 가는 문둥병하고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번역이 그렇게 된 것이고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세시 병 그런 것하고 직접 관계된 이야기는 아니다. 

 

의학적으로 하자면 오히려 곰팡이류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몰라도 좋다. 이 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도 좋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몸에 죽음이 활동하고 있는가? 옷에도 집에도 썩어짐 그런 것이 있는가?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그래서 치료해서 하나님의 은혜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병들어 있어도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병든 사람이 안되고 죽어도 예수안 에서는 하늘에 속하고 구약 때는 조상의 묘실에 있고 신약 때는 예수와 함께 하늘에 있다.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다. 구약 때는 조상의 묘실 어둔 곳으로 들어가는 그림자가 있다. 신약 때는 그런 것이 없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의 질서에 대한 문제다. 여러분이 죽으면 분명히 묘지에 들어가 썩는다. 성경은 그런 인간론에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지금 신약 교회에 있어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하나님이 너를 이겼도다 죄의 권세가 너를 이겼도다 죽음의 권세가 너를 끝냈도다 이런 이야기는 없다. 

 

그것이 신약 백성이 누리고 있는 삶의 질서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죽은 뒤고 영혼은 천당 가고 육체는 무덤에서 잠잘까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까 이원론이구나 둘이구나. 그것을 연구해 봤자 성경을 가지고는 모른다. 성경은 그런 일에 관심하고 설명하지를 않는다. 

 

한마디로 다윗은 죽었으나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지만 다윗이 말하기를 이렇지 않냐? 다윗과 부활하신 예수를 대비시킨 이야기지 우리 몸이 어떻게 되었냐 거기다가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관계 문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극히 가난한 자가 주님 나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께서 이 보리떡을 주셨나이다. 

 

하고 감사하면 그는 세상에 부요한 자가 하나님을 모르고 소고기 먹는 자하고는 다르게 이는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에게는 한마디로 배고픔이 없다. 신체적으로 배가 안고프다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베고파서 못살겠다 그런 말을 안한다 그 말이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내가 자꾸 부부 예를 드는데 그런 것이다. 살고 있는 것이야 학고방이지 그런데 좋다고 둘이 손잡고 다니거든. 보리밥을 먹으면서도 맛있다고 한다. 식당 가면 그보다 훨씬 맛있는 것이 많이 있는데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맛있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에서 해석을 해야 되지 어떤 존재론적인 그런 것으로 하면 지금 오히려 구약 때 사람들이 더 오래 살았다. 구약 때 아브라함도 백칠십오세나 살았다. 그러면 예수님은 훨씬 빨리 죽었으니까 죄가 많구만. 그런 이야기 해 가지고는 모른 이야기다. 그래가지고 죄가 적었을 때는 오래 살고 죄가 많아서 고재봉이 같은 사람은 오래 살면 안되니까 고기를 많이 주어서 빨리 죽어버리게 하고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사람은 고재봉이를 모르겠구나. 우리 때는 고재봉이가 제일 나쁜 사람이었다. 요새는 누가 제일 나쁜가 꾀가 많은 사람 노태우 맞아 그 사람이 5년 대통령 했기에망정이지 더했다면 큰일나겠구나. 그런 사람이 한 천살쯤 살면 형사에 많이 붙어도 안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성경은 그런 나이를 세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 언약 적인 언어로 읽어 내야 한다. 그래야 지금 여러분이 당장 죽어도 죽는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문둥병 규례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친다. 

 

이제 모든 것을 썩어짐에서 해방되는 약속들을 주고 있다. 어디든지 썩어짐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가 칠일에 간격으로 치료해서 깨끗하게 하시든지 물로 씻어 하시든지 또는 새의 피로 또는 피와 물로 정결케 하시던지 또 나중에 속건제 피를 발라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하시든지 그런 방식을 통해서 성소에서 봉사하게 하신다. 전 몸을 제사장 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속건제의 피를 거기 발라 주고 있다. 이것이 레위기에서 하고 있는 약속인데 이 약속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완성이 되었다. 

우리는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낸다. 우리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받았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러면 왜 면도로 털을 다 밀라고 그럴까요? 그전에는 털도 죄로 해석을 했다. 대충 일회용 면도기로 밀면 털이 듬성듬성 여기저기 있어서 보기 싫어서 안된다. 스포해자기고 털뿌리까지 다 파 버려야 깨끗하지 그래가지고 죄 찾는 방식으로 풀었다. 면도칼을 하나님의 말씀 예리한 검이니까 그래가지고 그런 식으로 풀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공격하면 여러분들 털 없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공격하면 양심이 괴롭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몸안에 죽음이 활동하고 있었다. 흰털이 이었다. 그렇게 했을 때 나타난 모든 것들을 깨끗이 깎아서 없애 버리고 있다. 정결케 해주고 있는 것이다. 죄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상황으로 풀어야 되지 그것을 죄와 관계시킨다 해 가지고 소위 영해 시키면 안된다 그 말이다. 항상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해석을 하고 그 관계에서 예수가 우리의 전 삶의 질서에서 어떻게 했는가로 해석을 해야되지 우리는 예수안에 있는 구원을 개인이 어떻게 도덕적인 것을 회개하냐 전부 개인 구원론으로 해석을 하니까 우리의 전 삶의 질서로 해석을 못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전 삶의 절서를 포괄하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존재론적으로 통치하니까 우리가 거기까지 가서 도덕적으로 살면 거기 까지 깨끗해 진다. 이런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주님은 첫 창조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새 창조의 머리여서 그분안에서 모든 것은 새롭게 지어진 것이지 우리를 도덕적으로 단순히 개선하는 그런 것을 가르치는 종교 훈화집이 아니다. 우리의 몸도 새롭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몸의 정결케 된 것이다. 이제는 전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새로운 몸으로 지어진 것이다. 주님 오시면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죽음이 활동할 때까지라도 오히려 나는 내 약함을 자랑하겠다. 그렇게 바울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실망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미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울이 이제는 때가 가까웠으니 그 시대에 맞추어서 살라는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예를 들었지만 가령 구약 때 같으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것을 도적질하면 그것으로 대게 공격을 한다. 미가서나 아모스서에서 많이 공격을 한다. 너희 부한 자들아 왜 가난한 사람을 그렇게 하냐? 너희가 도적질 한 것이 하나님 앞에 증거가 되리라. 이렇게 한다.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 붙여 가지고 그러면 가난한 사람도 도둑놈 있고 부자도 정직한 사람이 있거든. 그런데 우리한테 직접 적용을 하면 부자들이 기분이 나쁘다. 헌금도 안해버린다. 그러니까 세상을 두고 한다. 보라고 세상이 얼마나 썩었냐고. 노태우 도둑놈 보라고 부자 된 것 보라고 그것을 노동자에게 나눠줬으면 얼마나 되겠냐고 교회 부자를 공격하면 안되지 왜냐하면 5-6공 장로가 있거든 안한다. 

 

도적질하지 말아라 그러면 이제 알아서 들어라 그 말이지 그러니까 불특정 다수한테는 세게 하고 개인을 만나면 다 복을 주어 버리고 말을 못해 버린다. 이런 식으로 하면 여기서 도적질 안한 사람은 아 나는 거기에 안 걸리는 구나. 세상은 썩었구나 이렇게 있는 것이다. 왜 자기는 돈 번 것 중에 세금 잘라 먹는 것 없고 정직하게 벌었거든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설교했던 것처럼 헌금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했다. 좋아. 그러니까 나는 그 본문에 안 걸리겠구나 신약은 그렇게 안한다. 신약은 완성된 빛가운데서 해석을 해야 한다. 

 

완성된 빛은 이제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으로 살라는 그 말이지 아 도덕적으로 정직해서 돈만 정직하게 벌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몸으로서 봉사하고 그랬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많이 구제하고도 그리고 자기는 더 잘먹고 살고 있다. 말하자면 넉넉하니 내가 우리 교회에서 구제 헌금을 제일 많이 했거든.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대리자로 봉사해야 되지 나는 남보다 헌금을 많이 했다 그것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가능해도 컸을 때는 아버지의 대리자로 봉사해야 되지 나는 그래도 동생 보다는 과자를 많이 나누어 줬으니까 되고 이렇게 하면 안되겠지요. 말하자면 동생들이 다 나쁘면 형님이 아버지 대신 뼈빠지게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나는 줄만큼 주었으니까 누가 나를 욕하겠는가 해도 동네 사람이 다 욕해버린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그러니까 구약 때는 도둑질만 안하면 된다. 왜 부자는 복받았으니까 그런데 도둑질해 가지고 부자가 되었거든. 그런데 부요한 자는 분명히 하나님께 복을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복받았다고 폼잡고 있는 것이다. 실은 도둑놈이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공격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때는 그런 삶의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를 따라서 살지 않으면 다 잘못이다 이 말이다. 신약 성경의 증거는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직하게 돈을 벌었다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이 좀 본을 보입시다. 다른 사람은 세금을 도적질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맙시다. 그런 도덕적인 단체로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요새 학생들 공부 참 못하는데 우리 장학금도 주고 공부 잘해서 좀 유명해져 봅시다. 

 

요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면 다 박사 학위를 가지고 간다. 왜냐하면 박사 학위 따 가지고 가면 수상하고도 악수할 수 있거든. 그런데 목사만 되어 가지고 가면 면장하고도 악수를 잘못한다. 그러니까 전도하는데 장애가 많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교회가 세상을 좀 주도해야 되겠다. 주님이 말씀하신 방식하고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마치 예수님 시험받으실 때 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봐라 네가 한 번 해바라 한 것하고 비슷한 이야기다. 마치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생을 추종했던 것하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회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구약에 있는 것을 구약의 틀을 보지 않고 신약으로 막 연결을 하니까 그렇다. 신약은 부활하신 주님과 새로운 관계에서 해석을 해야 되지 구약 도둑질을 우리는 안했으니까 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다 옛 것을 붙들고 있는 나쁜 사람들이다. 그리고 몸으로서 수고가 아니면 구약처럼 그런 방식으로는 의롭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부활의 빛으로 해석을 했을 때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법으로 완전히 해석이 되고 부활의 빛이 아닌 것은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의 진행되는 빛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완전한 지금 새 시대의 빛을 가져올 수가 없다. 새 시대는 완결된 빛이다. 완결된 빛은 예수 안에서만 드디어 해석되고 주어지는 것이다. 성취되어야만 해석되고 주어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드디어 우리에게 주어지고 누려진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라 그 말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꼭 부자 되게 해야만 분란이 없을 까요. 교인 중에 부자 있고 가난한 사람 있으면 화목이 잘 안되니까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일정 기간 불안하지 않을 만큼 좀 부자가 되게 해야 좀 신앙의 자유가 있고 여유가 있지 그 사람이 너무 너무 가난하니까 자꾸 흔들이고 죄 짓는 것이라고 그렇게 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부자들 보고 가난한 사람 구제하지 말라는 그 말이 아니라 그가 부자가 되어야만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접근하지 말라 그 말이다. 

 

마땅히 아내는 남편에게 잘해줘야 되겠지요? 그러나 남편이 너무 너무 가난하니까 마누라가 이 생각 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냐. 그런 해석은 아내를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일꾼과 첩은 설명하는 방식은 되어도 아내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니다. 제가 말하는 강조점을 알겠지요? 

 

구약 교회는 가난하면 운다. 하나님 우리가 왜 외국 땅에 쫓겨나고 가난합니까 해도 지금은 십자가에서 죽어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죽는 것이 신약 시대다 그 말이다. 왜 새로운 관계로 주어졌기 때문에 구약 때는 가나안 땅의 부요함이 복이다. 신약 때는 영광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을 따라는 것이 복이다. 그러니까 그런 일로 넘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다. 가난해서 신앙이 약해지지 않는다 그 말이다. 여러분이 그 점을 잘 알아야 한다. 

 

가난해도 방금처럼 권하면 세상 어떤 부자보다도 힘있게 그리고 넘치게 살아 버린다. 그런데 나도 보니까 너무 가엽거든요. 왜냐하면 형제가 가난하고 아픈데 마음이 안아프요? 그것만 자꾸 염두해 두고 있으면 위로할 방법이 없다. 내가 돈이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이 있어야 위로가 되지... 

 

기도하면 느닷없이 준다고요?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냥 속은 진실 되게 염려한 듯 하는데 위로할 길은 없어져 버리고 내가 믿음으로 형제를 제대로만 보면 나는 아무것도 없이 가서 세상에 어떤 부자보다도 더 부요하게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 아무것도 안주고 무슨 말인가 알겠어요?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의 질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형제를 충분히 동정해야 되지만 참 다운 힘과 연합은 주님과 관계에 있지 내가 무엇을 가져다주면 그것으로 되고 마땅히 형제로서 봉사한 것이지 그 자체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안된다. 그런 점들은 조심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기독교인들이 무슨 일을 하겠다 해 가지고 프로그램을 자꾸 제사힌 일에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그쪽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열심히 반대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을 짜자 말자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하늘에 속한 것이 땅에 속한 것으로 전락이 되어 버린다. 영원한 생명의 관계가 이런 저런 거래 관계로 전락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하는 말이다. 

 

흐르는 물은 깨끗하다. 피를 받으려니까 질그릇 위해서 잡는 것이다. 다른 것 아니고 그리고 산 새에다가 백향목 붉은 실로 묶지요. 우슬초와 함께 그리고 그 산새를 날려보낸다. 그리고 그 피를 정결함을 받을 문둥병자에게 뿌린다. 

 

피는 뿌려지고 날라가고 있다. 그런 것이 다 정결케 된 생명의 자유들 그런 것을 말하고 있다. 머리에가 문둥병이 들었으면 칠일 동안 기다려 볼 것 없다. 즉각 진찰해라. 왜냐하면 머리는 항상 머리거든요. 거기에서 무슨 흔적이 있는 것은 더 뚜렷한 죽음의 활동력이다. 그러니까 더 퍼졌는지 깊어졌는지 볼 것이 없다. 즉각 진찰해라 그런 이야기다. 여러분이 해석할 수 있을 듯 한데 그러면 다음에 조금더 설명하면서 한 장에서 마무리를 짓겠다. 하여튼 14장까지 읽어 오기 바란다. 

 

제가 구분해 준 것은 여러분이 읽기 좋도록 구분해 준 것이고 그 문장 자체를 여러 번 읽는 것이 최상의 해석법이다. 읽으면 여러분이 잘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모르면 넘어가고 그러면 다 안 것이다. 그래도 알 수 있지요? 부분 부분을 몰라도 거기서 말하는 충분한 썩어짐으로부터 자우에 대한 약소들은 알 수가 있지요?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봉사할수 있도록 우리를 정결케 하는 속건제의 피를 알수 있겠지요? 그러면 되는 것이다. 

 

 

 

 

레위기강해-14 /레13:1-

2011-02-10 17:36:01

 

문둥병에 대한 규례 

 

 

 

앞에 있는 문단은 이전 것을 조금더 줄여 놓은 것이다. 음식물과 출산의 규례에서 땅에 있는 생물과 생명의 출산이 부정하다 그렇게 가르치고 문둥병 규례에서는 이스라엘의 몸 옷 집에 죽음의 세력들이 활동하면 그런 것은 부정하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소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그 부패로부터 정결케 하셔서 함께 하시는데 정결케 하는 규례는 해가 지는 것 칠일 사십일 그런 기한이 차는 것 할례 그리고 물과 피의 정결법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림 이런 것이 정결법이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정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온전한 정결을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교회에 주심으로 이 생명의 언약 역사를 완성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하는 그 교회는 이런 음식물에 있어서 정하고 부정한 것이 없고 또 출산에 있어서도 부정한 것이 없고 그리고 몸 옷 집 그런데도 죽음의 세력이 없다.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새겻이 되었기 때문이다. 

 

13장:1-28절까지는 피부 문둥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피부 문둥병도 여러 가지 증상에 따라서 또 넷으로 나누어서 말씀한다. 

 

먼저 피부 문둥병을 보면 피부에 무엇이 돋아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생기거나 색점이 생기거나 그러면 그것이 문둥병과 비슷하다. 그러면 진찰을 해야 되는데 털이 희고 우묵하면 부정한 문둥병이다. 그런데 털이 희고 우묵한 그런 것이 없이 그냥 딱지가 있고 색점이 생겼으면 칠일 동안 가둬둔 후에 진찰을 한다. 

 

그래서 희고 우묵한 문둥병의 증상이 없으면 말하자면 딱지만 생기고 색점만 있고 털이 희다거나 우묵한 증상이 없으면 또 칠일 동안 가둬두고 칠일후에 진찰을 해봐서 그 병색이 엷어 졌으면 그는 정하다. 그러나 그냥 정한 것이 아니라 옷을 빨아야 정하게 된다. 그런데 정하다고 판결을 받은 후에 병이 퍼졌으면 부정하다. 그래서 문둥병으로 판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피부에 발진이 있었을 때에 제사장이 진찰하는 방법이다. 

 

그 다음에 피부에 문둥병 반점이 나타난 경우인데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고 난육이(부풀어 오른 살) 생겼으면 금고할 필요 없이 그는 부정하다. 오래된 문둥병이다. 그냥 무엇이 돋고 색점이 생기면 이것이 문둥병인가 아닌가 검토를 해서 가둬 둘 필요 없이 그냥 문둥병으로 판정할 수 있는 것은 흰 점이 돋고 털이 희고 거기 부풀어 오른 문드러진 살이 있으면 그것은 가둬둘 필요 없이 바로 진찰해야 된다. 왜냐하면 오래된 문둥병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머리부터 발까지 하얗게 되어 버렸으면 이것은 정하다. 왜냐하면 전체가 희어 졌기 때문에 정하다. 그런데 거기 또 부풀어오르는 살이 생겨 버리면 부정하다. 그런데 그 난육이 변해서 희어져 버리면 정하다. 그러니까 전부 희어져 버리면 정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종기 자리에 종기가 나았는데 거기 나타난 문둥병은 종기에 나은 자리에 흰 점이 돋거나 희고 불그러스럼한 색점이 생겼고 우묵하고 털이 희면 문둥병이다. 이렇게 해 놓으니까 알기 어렵다. 성경에는 불그스러한 색점이 생기면 제사장에게 진찰하게 할것이요 제사장에게 데려가면 제사장은 진찰할것이요 거기 우묵하고 털이 희면 문둥병이다. 그러니까 흰점이나 희고 불그스러한 색점이 있어가지고는 이것은 종기 나은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아직 문둥병은 아니고 그 자리가 우묵하게 들어갔거나 흰털이 있으면 문둥병이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흰 점이 돋고 희고 불그스럼한 색점은 있는데 우묵하거나 털이 희거나 그런 증상은 없다. 그러면 칠일동안 금고한 후에 칠일후에 진찰을 하는데 그 색점이 퍼졌으면 문둥병이고 색점이 퍼지지 않고 그래도 있으면 종기 흔적이다. 

 

화상 입은 곳에 또 문둥병이 들 수가 있는데 화상 입은 자리에 불그스름하고 희거나 순전히 흰 색점이 생기면 제사장이 진찰한다. 그런데 그 색점에 털이 희거나 피부보다 우묵하면 문둥병이다. 그러나 희거나 우묵한 흔적이 없으면 칠일 동안 금고한 후에 살펴봐야 하는데 피부에 퍼졌으면 부정하다. 그러나 퍼지지 않고 색이 엷으면 화상이고 그는 정하다. 물론 이런 경우도 씻어야 정결하다. 

 

그 다음에 피부 문둥병이 아니고 머리나 수염에 문둥병이다. 머리나 수염 자리가 피부보다 우묵하고 누렇고 가는 털이 있으면 부정하다. 이것은 옴인데 문둥병이다. 그런데 우묵하지도 않고 거기 검은 털이 없다. 우묵하지는 않는데 아직도 누렇고 가는 털이 있는 식인데 검은 털이 안나 있으면 칠일 동안 가두어 두고 칠일만에 진찰하는데 옴이 퍼지지 않고 누른 털이 없고 그러니까 그대로 있다 그 말이다. 분명히 무슨 이상이 있는데 누루고 가는 털이 있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러면 아픈 자리에 털을 민다. 그리고 칠일동안 가두어 두고 칠일후에 진찰을 하는데 그대로 있고 진행되지 않했으면 깨끗하다. 그러면 옷을 빨아야 깨끗하게 된다. 그런데 후에 보니까 옴이 퍼졌다. 그러면 누른 털이 있는가 또는 피부가 깊은가 그런 것을 찾을 필요 없이 부정하다. 그런데 퍼지지는 않고 검은 털이 났으면 정하다. 나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피부 어루러기인데 피부애 흰 색점이 있고 부유스럼하면 그것은 어루러기요 그것은 문둥병이 아니고 정하다. 

 

그 다음 대머리 문둥병이다. 대머리라고 해서 다 부정한 것은 아닌데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레한 색점이 있어 피부 문둥병과 같은 증상이 있으면 확실한 문둥병이다. 

 

이것은 기다릴 필요 없이 확실한 문둥병인데 머리에 환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부보다 깊던지 누른 털이 났던지 상관이 없이 그런 피부 문둥병 증상 색점이 있고 불그스럼하면 그것은 문둥병이다. 왜냐하면 아픈 자리가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문둥병으로 판정을 받은 사람은 문둥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그렇게 외쳐야 한다. 아랫입술 가리워 봤자 입이 가려지지 않는다. 윗입술을 가려야 입이 가려지겠지요? 그래서 하여튼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것은 큰 슬픔 애통의 표시다. 그리고 그는 부정하니까 부정한 공기라도 접촉 안되도록 그런지 손으로 가리우고 하는 것이다. 기침 나면 손으로 가리우지요? 안 옮겨지게 그래서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그렇게 계속 외쳐야 된다.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지 못하고 부정한즉 진밖에 살아야 하는데 혼자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의복에도 문둥병이 드는데 이제까지는 몸과 관계가 있고 의복에도 문둥병이 드는데 의복에 푸르거나 붉은 점이 생기면 그것은 문둥병 색점이다. 칠일 동안 간직한후에 색점이 퍼졌으면 악성 문둥병이기 때문에 불살라 버러야 한다. 색점이 퍼지지 않았으면 그 색점을 빨아야 하고 칠일동안 간직한 후에 그 빤 색점이 퍼지지 않았어도 불살라라. 피부병은 퍼졌어야 부정한데 옷은 퍼지지 않고 색점이 그대로 있으면 악성 문둥병이다. 빤후에 색점이 엷으면 색점을 찢어 버리고 색점이 여전히 있으면 재발한것이기 때문에 불살라야 된다. 

 

색점이 벗어졌으면 다시 빨아야 정하다. 이것이 문둥병을 판별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정결법은 14장 끝에 가옥에 대한 문둥병이 있는데 그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집에 나타난 문둥병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진찰하는 자는 제사장이다. 가령 여러분이 전쟁할 때 보면 여호수아가 앞서는 전쟁이 있고 비느하스가 앞서는 전쟁이 있다. 우리는 여호수아만 대장이고 비느하스는 대장이 아닌 듯 이해를 하지만 가나안 땅의 전쟁은 전부 여호수아가 대장인데 어느 전쟁은 비느하스가 대장인가? 

 

발람의 유혹을 받은 모압을 칠 때는 비느하스가 대장이다. 여기서도 제사장이 진찰한 것은 제사장이 의사를 겸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과 교제에 있어서 정하고 부정한 것을 판별하기 때문에 제사장이 한 것이다. 이것은 성소에 계신 하나님과 교제에 있어서 부정하고 정함을 판별해야 하기 때문에 제사장이 하는 것이다. 

 

문둥병은 부정하다는 것이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고 부정하다는 말고 문둥병은 같은 말로 사용되고 있다. 부정하기 때문에 진밖에 혼자 살고 슬픈 모양으로 부정하다 부정하다 그렇게 외쳐야 된다. 아무도 그 부정에 옮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문둥병은 부정하냐면 문둥병은 색점이 있고 우묵하고 털이 있고 난육이 있으면 문둥병이다. 

 

색점이 있는데 거기 우묵하고 흰털이 있다. 또는 문드러진 살이 올라온다. 그러면 문둥병이다. 그것은 썩어짐이 활동하고 있는 증거이고 그래서 부정하다. 다 희어지면 썩어짐의 활동은 끝났지요? 그래서 정하다. 그런데 희어졌다 가도 난육이 생기면 또 썩어짐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하다. 그것이 판별하는 방법이다. 

 

칠일 동안 금고한 후에 변화가 없으면 부정하다. 한 것이 근본적인 금고 방법이다. 생명체는 칠일 더 금고한 후에 부정한지 정한지 여부를 판별하고 생명이 없는 것은 칠일동안 금고해 보면 그냥 알수 있다. 왜냐하면 색점은 있는데 문둥병적인 그런 증상은 없다. 우묵하거나 털이 희거나 그런 것이 없다. 거기서 검은 털이 나면 생명이 활동하고 있는 증거다. 그러니까 나은 것이다. 

 

그런데 누른 털이 있으면 저 속에서 무엇이 썩고 있는 증거다. 그래서 부정하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없이 피부병처럼 무엇이 와 있으면 일단 칠일 동안 따로 가두어 두고 칠일만에 제사장이 진찰을 해야 하는데 이상이 없이 그대로 있으면 또 칠일을 금고해야 한다. 칠일후에 보니까 그대로 있으면 이것은 깨끗한 것이다. 

 

그런데 두 번 칠일후에든 한 번 칠일후에는 퍼져버렸으면 그것은 부정하다. 그러면 그대로 있으면 정한가?그런데 옷을 보니까 옷은 무슨 이상이 생기면 따로 칠일동안 두었다가 그 다음 보니까 그대로 있다. 그러면 사람 같으면 또 칠일을 기다려야 하는데 옷은 그냥 부정하다고 판별한다. 악성 문둥병이다. 그러면 왜 옷은 퍼지지 않았는데 부정하고 사람은 안퍼졌는데 그대로 있으면 정하다고 그러는가? 그것은 사람은 생명체고 옷은 생명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분명이 무슨 흔적이 있으니까 죽음의 흔적이 있는데 사람은 생명체거든요?그 생명의 활동력이 썪어짐의 세력을 이기고 있다. 더 이상 퍼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칠일 칠일 칠일은 하나님의 안식의 수고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의 수인데 거기 생명의 활동력이 죽음을 이기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정한 것이다. 

 

그런데 옷은 속에서 생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대로 있으면 이것은 생명이 썪어짐을 이기고 있는 아닌 상황에서 그대로 있으면 이것은 부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활동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래서 이것은 부정하다고 판정을 해야한다. 그런데 단지 머리에 무엇이 생기면 이것은 물어 볼필요도 없이 부정하다. 왜냐하면 문둥병이 머리에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머리를 생명의 중심지로 이해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명이 심장에 있는가 보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머리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머리에 조그마한 이상만 생겨도 이것은 분명히 썩어짐이 활동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에 누런 털이 있던지 피부보다 우묵한지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이 여기서 문둥병을 진찰하는 방법이고 한가지 핵심은 썩어짐이 있는가 하는 이야기다. 썩어짐이 생명을 이기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으면 다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의 거처인 성소에서 살아서는 안되고 진밖에 살아야 되고 죽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된 것처럼 이 사람과 접촉하는 모든 것은 부정하기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미리 미리 외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그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자기 때문에 부정함을 입지 않도록 혼자 살아야 된다. 여러분이 이런 틀을 가지고 본문을 읽어보면 부정하다는 말들이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가를 알 것이다. 한마디로 부정하다 한 것이 문둥병의 특징이다. 

 

만일에 문둥병이 아니면 또 문둥병의 의심한 있어도 빨아 보는 것이다. 물을 깨끗게 하는 것이다. 그런 데도 아무 빤 효과가 없으면 부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문둥병의 의심이 생겼으면 빨면은 정하게 되는 것이다. 문둥병이 아니니까 그냥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흔적만 있어도 일단 물로 씻어야 정하다. 

 

그러니까 문둥병으로 확정이 되면 씻어만 가지고는 안된다. 다른 정결법이 있는데 그냥 문둥병이라는 의심한 생기면 그리고 나중에 문둥병이라는 판별만 안 받으면 빨면 괜찮다. 왜냐하면 물을 깨끗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은 부정을 타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제거하는 생명과 관계된 것으로 성경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정하다. 

 

이것이 문둥병을 진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하여튼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여도 그들 몸에 죽음이 흔적만 나타나도 그것이 확실한 죽음의 세력이면 진밖에 있어야 하고 확실한 죽음의 세력이 아니어도 빨아야 정하지 그렇지 않으면 정한 법이 없고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먹는 땅에 있는 모든 것도 부정하다. 그 중에 일부를 거룩하다 해주셨고 그리고 출생은 부정한데 남자는 할례 하면 깨끗하고 출생한 여자는 40일과 80일이 차면 깨끗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에 예물 드리는 특권을 회복 받는다. 

 

그리고 문둥병에서는 이제 그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심화시켜서 옷이고 몸이고 가나안 땅의 가옥이고 모든 것에 흔적만 있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하고 연합이 안된다. 하나님은 온전한 생명이라.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빨아야 되고 그리나 그 이상에 확실한 죽음에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만 되면 그것은 빤 것 가지고는 안되고 진밖에 나가 있어야 되고 다른 방법을 통해서 들어와야 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전 삶의 영역에 죽음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가르치고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 중에 거하는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을 씻고 또 칠일과 40일의 기한이 차고 또는 하루해가 지고 그리고 산 제물에 피와 기름을 뿌리고 이런 방식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으로 받아들이고 성소로 받아 들여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뿐만 아니라 제사장처럼 그의 전 몸을 피와 기름을 바른 제사장 적인 몸으로 헌신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분으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도 이러니까 이렇게 나가라 그런 말이 아니라 바로 이 은혜의 일을 예수 안에서 완성하셨다. 이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생명의 교제에는 썩어짐의 흔적이라고는 없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휘장밖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는 없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제사장이 있다. 이제 우리가 정하고 부정한 것을 판단한 분은 하나님이 세우신 대 제사장이시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형제로 오셨고 그리고 우리의 대표로 자기 몸을 드리셔서 썩어짐의 권세를 이기셨다. 그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의 상속자로 보좌 우편에 앉으셧다. 그분안에서는 우리의 몸도 죽은자를 살리신 성령이 함께 하신 몸이고 그리고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도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썩어짐이 흔적이 없다.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운데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의 질서다. 

 

몸에 병들면 교회나오지 말아라 그런 말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이 성경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전염병 때문에 또는 독감 때문에 내가 독감에 걸렸으면 형제에게 전염 되겟다 그러면 마스크 쓰고 나오던지 안그러면 쉬든지 하는 것이다. 문둥병 보니까 감기 걸려도 교회 나오지 말라는 말이구나.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감기가 아니라 문둥병 할아버지가 걸렸어도 그는 정하다. 그리스도안에서는 그는 아버지앞에 나오는 특권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지 너는 진밖에 살아라 그런 저주가 없다. 이것은 구원약속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킬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교제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교제에다가 적용을 시키는 것이지 전염병 있는 사람은 교회 나오지 말 것 그런데 적용시키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구원의 언약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 개인들의 삶의 모델들을 말하려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그런데 출산한 여자가 아들 낳으면 40일 딸을 낳으면 80일 그 동안 교회 나오지 말라는 말인가? 우리 나라는 삼칠일이면 됩니까? 아마 이런 것은 서양하고 동양하고 다를 것이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산파 오기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리면 애굽 여자하고는 다르다. 그러니까 아마 지역마다 다를 것이다. 

 

서양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샤워를 하고 그런다던가? 우리 나라는 따뜻한 방에 찜질을 해야지 찬물 손댔다가는 큰일 나 버린다. 그러니까 체질이 달라서 그런지 우리하고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그 지역에서 산혈이 깨끗한가 하는 것이지 성경에 40일이니까 40일 동안에는 절대 문밖에도 나가지 말고 몸 고안을 해야 되겠구나 성경적으로 그것하고는 다르다 그 말이다. 

 

그런데 서양 같으면 아이 낳았을 때 삼일 안에 가야 안 늦게 가는 것이라고 한다. 병원에 있어도 목사가 가야 되는데 삼일 안에 가서 아이 이름도 짓는가 보고 또 세례도 줄수 있는가 보고 축복도 해야 되고 그런데 우리 나라는 그렇게 하면 대단히 실례가 된다. 

 

그러니까 각 나라마다 풍속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성경에서 끌어오면 안된다 그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그 사망의 세력 중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주시는가? 하는 그런 언약 관계를 인치고 있는 것이지 여기서 몇일날 까지 교회 가고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또 일주일만에 교회 나와서 하나님 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도 난처하다. 우리 나라 사람은 몸조리를 좀 오래 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런 것은 각자 분별력을 따라서 조절할 일이다. 건강한 사람은 일찍 나올 수 있고 몸이 나쁜 사람은 몇 달 몸조리 할 수 있다. 그런데 목사 부인은 일주일만에 나오고 장로 부인은 이주일 만에 나오고 신앙이 좋을수록 빨리 나오고 그래가지고 나는 며칠만에 교회 나왔는데 사모님은 두달이 넘도록 교회를 안 나온다고 그게 무슨 믿음이냐고 말이여 믿사오니 하고 나오면 건강해져 버릴것인데 그런 믿사오니는 없다. 

 

그런 것으로 신앙을 척도 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전도사가 이런다고 그러면 안되는데 내가 전도사여 이 사람아 체면이 있지 두 주일 쉬었으면 나가세. 마누라는 자기 체면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럴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덕이 될지 자기들이 조절하면 될 것이다. 

 

구약 때 같으면 40일 지나서 안 나오면 부정한 여자다. 율법을 안 지킨 사람이다. 그 때 나와야 된다. 나는 조금 더 있다가 50일만에 나갈란다 하면 당신은 성경대로 안 살았다고 판결을 받아야 될 것이다. 구약 때는 그런 규례를 따라 움직였고 사람이 그 규례를 시행하는 판단자였다. 

 

그런데 신약 때는 그런 규례 아래 있지를 않는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는지 그 관점에서 자기가 조절을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병들었으면 하나님이 나를 부정하다고 저 진밖에 두셨는가 슬퍼할 필요가 없다. 나는 부정하니까 심방도 오지 마십시오. 하고 슬피 울고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다.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정결하고 땅에 있는 성소에 들어간 정도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의 영광스러운 거처에서 예배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게하셨다. 그것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이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를 살리신 생명의 성령이 우리안에 계신다. 그런 영광의 교제로 계신다. 성령의 교통은 성령이 주신 교제다. 그렇게 계신다. 

 

이제 자세한 것은 몰라도 되고요 여러 번 읽어보면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 문둥병은 부정하구나. 조금만 살에 무엇이 생겨도 이것이 문둥병이 아닌가 진찰을 해봐야 되는구나? 문둥병이 아니어도 씻어야 되는구나? 몸은 완전해야지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장애가 있구나? 왜 하나님은 완전한 생명이시라 거기 죽음의 그림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제사장은 죽은자를 만져서도 안된다. 자기 아버지여도. 죽음과 접촉하면 안된다. 왜 하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런 큰 틀을 가지고 해석을 하면 된다. 작은 것은 그 틀에 맞추어서 읽어 나가면 된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본문을 여러 번 읽어 보면 제가 설명한것보다도 그 사상을 아주 강조를 해준다. 부정하다 하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를 한다. 읽다 보면 부정한 생각이 확실히 들만큼 강조를 해준다. 

 

그런데 그전에는 이렇게 이해를 하지 못하고 대머리 문둥병은 사상 문둥병 그러니 사상이 틀려 버렸으니 행동은 볼 것도 없다. 그러니까 대머리 문둥병은 물어 볼것도 없다. 이상한 사상적인 징조만 있으면 뻔히 알아본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 조금만 수상하면 오래동안 관찰해봐라 함부로 나두었다가는 문둥병이 다 퍼져벼릴수 있거든요? 수상한 자는 의심해라. 이웃집에 온 손님 간첩인가 살펴보자. 그런 식으로 읽었다. 그러니까 완전히 정죄의 법으로 읽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구약은 분명히 썩었다고 정죄해도 그들을 씻어주는 생명의 약속의 법인데 그것을 사람들의 행위의 기준으로 막 읽어 버렸다. 안된다. 

 

그러니까 이제 종아리 문둥병은 무엇이겠는가? 짧은 미니스커드 문둥병이 종아리 문둥병쯤 되겠지. 이런 식으로 읽었다 그 말이다 

 

. 의복 문둥병은 무엇이겠는가? 여기는 썩은 것만 문둥병인데 요새로 하면 모피 옷은 의복 문둥병이겠지? 요새 신문에 보면 짐승 보호 운동 때문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래가지고 몸에다가 수백만원씩 걸치고 다니니까 이것은 의복 문둥병 성경은 썩어야 문둥병인데 우리는 썩지도 않고 미끈 미끈한 모피 옷을 문둥병이라고 그런다. 그렇게 읽어 들어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도덕적인 기준으로 읽어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 수염 문둥병은 교만 문둥병이겠지요? 여자들은 요새 눈썹 문둥병이 꽤 있다. 이제 문신이 지워지지도 안한다. 환처가 엷어지지도 안한다. 그러면 문둥병은 아니어도 일리가 있다. 일리가 있다 분명히 그러니까 그냥 받아 들여 버린다. 아하 그런 구나. 뭐하려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했는고 그런다. 

 

구체적인 몸이 질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유업이 썩어짐의 질서에 있지 않냐? 조금만 썩어진 것도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왜 하나님은 생명이시라. 그러나 썩어짐을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내가 너희를 치료하고 너희로 내 앞에 부르마 내 앞으로 나와라. 제사장처럼 나를 온 몸으로 섬겨라. 그렇게 말하는 언약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읽지 말라 그 말이다. 구체적인 몸의 질서로 이스라엘의 몸 먹을 것 출산 집 전부 그런 것으로 그냥 읽어야지 영해 시키면 안된다. 

 

여러분이 스스로 해석할 수 있도록 많이 읽어야 된다. 목사를 천주교 교황처럼 유일한 해석자로 높이지 말라 그 말이다. 

 

여러분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신약 시대 때는 죽음의 권세가 끝나 버렸다. 우리는 죽으면 영광스런 단 앞에 있는 백성들이다. 구약 언어 표현으로 하면 너는 죽었으니까 너는 진 밖으로 나가라 그런 것이 없다. 너는 죽었으니까 제사장은 만지지 말고 우리는 그런 몸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언약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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