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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스가랴서 설교 모음

스가랴서 설교 (전체) 이동원 목사

by Jessi J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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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서론 /1:1-/ 이동원목사

2014-12-05 16:25:24

 

오늘부터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스가랴서를 함께 같이 공부합니다. 스가랴서,

~스가랴서가 어떤 책일까요? 이 책의 특성부터 우리가 좀 생각을 하겠습니다.우리가 구약성경을 몇 가지로 분류할 때 이 스가랴서는 소위 소선지서 혹은 소 예언서 중의 한 권 이라고 불리워 집니다.

 

소선지서, ~대선지, 소선지, 대예언서 소 예언서, 이사야 예레미야 이런 책들은 소위 대예언서, 대선지서에 속하죠? ~모두 소선지서가 12권이 있습니다. 왜 대선지와 소선지로 구분하는가? ~대선지서는 선지자들이 더 위대한 사람들이고 그리고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려요, 하하~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를 구별하는 중요한 구별 법은 이것입니다.~부피가 작습니다. 하하~ 소선지서는 그 예언의 내용의 부피가 적습니다. 그런데 소선지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를 딱 뒤지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스가랴서는? 아닌게 아니라 그전에 나오는 학개라든지 뭐 스바니아 말라기 이런 것들을 보면은 어때요? 부피가 아주 작죠?

 

그런데 스가랴서는 어떻습니까? 부피가 작지 않다. 소선지서 치고는 굉장히 부피가 두껍다. 우리는 스가랴서의 외견상의 첫번째 특성으로 소선지서 12권 중에 가장 길고, 그리고 또 하나 있어요.

 

길 뿐만 아니라 스가랴서를 읽어보시려고 시도하신 분들은 아마 그런 느낌을 가졌을지 몰라요.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스가랴서를 보았을 때? 읽어봤어야 대답을 하죠? 하하~ 솔직히 태어나서 처음 스가랴서를 공부하시는 분 손 들어보세요, 솔직하게. 스가랴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시는 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녜, 어렵습니다, 어려워요, 아주.

 

그래서 이 스가랴서의 첫번째 특성은 소선지서 12권 중에 가장 길고 난해한 책이다. 가장 길고 난해한 책이다. 이것이 첫번째 특성입니다.

 

두 번째는 이 책은 문체가 아주 다양한 책이다. 문체가 아주 다양합니다. 우리말로 읽어보면 다 뭐 그렇고 그런 기록과 내용처럼 보여지지만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 산문채도 있고 시도 있어요.

 

시도 있고 산문채도 있고, 주로 전반부가 산문스타일로 엣세이 스타일로 기록되어있고 후반부에는 시적인 형식으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환상이 있는가 하면 예언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노래들이 있습니다. 그 문체가 아주 다양해요. 여러가지 스타일의 문체가 이렇게 한꺼번에 등장하는 책이다. 이게 또 하나의 특성 이에요

 

세 번째로 스가랴서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신약 성경에 많이 인용되는 책이다. 신학성경 어디에 많이 인용된 것 같아요 스가랴서 내용이? 복음서에도 좀 나옵니다. 그러나 제일 많이 나오는 부분이 어디냐 하면 계시록입니다.

 

계시록, 아마 계시록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 제일 많이 인용된 것은 에스겔서이고 그 다음이 스가랴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신약성경은 스가랴서를 모두 71번 정도 인용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스가랴서를 인용한 부분이 한71번 정도 되는데 그 중에 계시록에만 28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의 계시록 뭐 이렇게 스가랴서에 대한 별명을 붙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네번째로 이 스가랴서의 또 하나의 특성은 교리적 스케일이 광범한 책이다라는 사실입니다. 교리적 스케일이 광범하다.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 그 분야들을 터치하고 있다. 특별히 세가지 분야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입니다. 기독론이란 것은 예수님에 대한 아~얘기가 많이 나온다. 이 스가랴서에, 예수님의 오심 초림, 또 예수님의 다시 오심, 예수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내용들이 스가랴서에 많이 예언되고 또 증언 되고 있습니다.

 

또 스가랴서가 매우 교회론적이란 것은 성전회복을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약의 공동체는 신약교회의 묘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매우 교회론적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에~ 이 스가랴서는 종말론적인 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시온의 회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온의 회복,

 

그래서 우리는 스가랴서를 크게 한 몇 가지의 특성으로 정리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소선지서 12권 중 가장 길고 난해한 책이다.

두 번째 문체가 다양한 책이다

세 번째로 신약성경에 많이 인용된 책 가운데 하나이다.

네 번째로 교리적 스케일이 광범한 책이다.

 

우리는 그 다음 저자와 기록 연대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누가 썼으며 언제쯤 아~이런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느냐? 저자와 기록연대, 우선 저자는 누구겠어요? 스가랴, 뻔한 거죠. 그런데 어떤 학자는 스가랴가 아닐지 모른다.

 

그걸 연구하는데 평생을 보낸 매우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가랴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문체가 아주 다르다! 후반부는 다른 사람이 썼을지도 모른다!

 

예레미야가 썼을지도 모른다 뭐 이런 아~항상 희안한 발상을 갖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성경 학자들은 대부분 이것이 스가랴가 기록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11,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1절 다같이 시작, “다리오 왕 이 년 팔 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 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 에게 임했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기록을 합니다.

 

, 그러면 스가랴죠. 스가랴 라는 이름이 구약에 그런데 한 사람이 나오지 않아요. 굉장히 많이 나와요 스가랴가 구약성경에 한 30명 나와요.그런데 스가랴는 한 이름입니다. 스가랴의 뜻이, 아주 뜻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하나님이 기억해 주신다, 이 스가랴 란 말의 뜻이에요. 하나님이 기억해주신다.

 

아마 뜻이 좋으니까 굉장히 많은 그런 동명 이인들이 존재 하고 있었습니다. 분당에서 전화번호 찾아보니까 이 동원이 한 20명이 넘어요.역시 내 이름이 좋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은 명자 순자 영자 정자 뭐 이런 이름들 많은 것처럼, 스가랴 라는 이름이 상당히 많아요.

 

그런데 이 스가랴는는 어떤 스가랴 였는가? 이 스가랴는 어떤 스가랴 였을까? 이 저자에 관해서 몇가지 그 정보를 Information을 성경에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의 선지자였다.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였다. 제사장 가문 출신이면서 동시에 선지자였다. 제사장이고 선지자였다. 굉장히 중요한 그런 역할을 했던 사람이죠.

 

우리가 그 11절 조금 아까 읽은 말씀에 보면 다리오 왕 이년 팔 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했다고 그랬어요? 스가랴 인데 스가랴를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잇도의 손자 꼭 일본사람 이름 같은, 잇도 잇도상,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그런데 성경 어떤 부분에 보면 특별히 에스라서 같은데 보면 아~ 잇도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데가 있어요. 잇도의 아들,

 

그런데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자도 아들이라고 그럽니다. 히브리 말로 아들 벤 이란 말은 아들, 자기 친아들뿐만 아니라 손주도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표현의 차이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헤미아서에 보시면 느헤미아 한번 찾아보세요. 느헤미아 12장 한번 찾아보세요 느헤미아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2장 이에요. 1절부터 제가 좀 읽겠습니다. 121절에 보시면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를 쫓아 돌아온, 그 다음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이러하니라.

 

이게 제사장의 명단 이에요. 제사장의 명단, 제사장 가문의 명단을 쭉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 명단을 읽어보면 4절에서 어떤 이름이 등장합니까 4절에? 잇도와 녜, 잇도상이 여기에 등장을 해요, 하하~. 그러니까 제사장 가문이다. 제사장 가문이다. ~ 16절 보시면 느헤미야1216절 이에요.

 

느헤미아 121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 이요그런데 잇도 족속에는 아주 이게 다 제사장 가문이지만 그 중에서도 스가랴가 아주 대표적이다. 그런데 아~ 스가랴가 잇도의 손자라면 그 사이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스가랴의 아버지가 있어야죠.

 

베레갸가? 그런데 그 이름이 빠져 있어요 여기에, 왜 빠져있을까? 성경학자 들은 아버지가 일찍 죽었을 것 이다. 아마도 이런 추정을 합니다. .스가랴의 아버지가 일찍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디디고 일어나서 자기의 소명을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이 스가랴 였을 것 이다.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학개, 스가랴 바로 직전에 나오는 책이 무슨 책입니까?저는 지당한 질문만 해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학개에요. 그런데 학개하고 스가랴는 동시대에 활동했든 선지자 입니다.

 

소위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그러니까 포로 후 포로시대가 지나가고 귀향시대에 돌아오고 나서 활동했든 마지막 선지자들 입니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마지막 활동했든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학개와 스가랴는 거의 같은 때에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학개는 기성세대를 대상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기성세대,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해서 성전 빨리 짓자! 이렇게 외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해서 설교하고 활동했다. 그렇다면 스가랴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면서 누구를 대상으로 해서 활동했을까요? 신세대를 대상으로 해서 아마도 활동했을 것이다,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자신이 아마도 또 젊었을 것입니다.

 

스가랴 23절 한번 보세요. 스가랴 23절 스가랴23, 4절 특별히 읽어보겠습니다 4, 3절부터 읽고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절 다같이 읽어요

 

시작,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여기 4절에 보시면 너는 달려가서 누구에게? 그 소년에게 이르기를 그랬어요.

 

소년에게, 이 소년이란 낱말이 요즘 최근에 번역된 표준 새 번역 성경에 보면 젊은이에게, 그랬습니다. 청년에게 이르기를, 스가랴는 자기 자신이 젊은이 면서 동시에 젊은 세대를 향해서 그 시대 활동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는 젊은 예언자요 젊은 이상주의자 였습니다. 그는 민족을 품고 세계를 가슴에 품고 살았든 사람입니다.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고 산 사람이 였습니다. 물론 스가랴서 전체의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만은 아니에요. 여전히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계라는 창을 내다보고 있었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가랴 마지막 14장에서 한 구절 같이 보겠습니다. 149절입니다. 스가랴149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어요. 스가랴 149절 다같이

 

시작,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하나님이 누구의 왕이라고 그랬어요? 천하의 왕이시며, 그랬습니다.

 

비단 그 분은 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의 통치자 이실뿐 아니라 그는 천하의 왕이 되신다. 그는 이세계 가운데 열방 가운데 멧시아가 왕이 되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민족과 세계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든 그리고 사모했든 성전, 성전이 세워지기를 촉구했고 예언했고, 그리고 세워진 성전을 수호하고 지키다가 성전에서 순교했던 사람입니다.순교자에요

.

우리가 구약에서는 그의 순교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23장 한번 찾아보세요. 마태복음 2335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335, 마태복음 2335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증언 입니다. , 마태복음 2335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사가랴 라고 그랬지만 스가랴나 사가랴나 마찬가지입니다. , 그 아벨의 피에서 부터 시작해서 스가랴 까지 이르는 순교사를 예수님이 증언하면서 마지막 스가랴의 이야기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 이 스가랴 선지가가 예언자가 활동했든 때는 언제 였을까요? , 다시 한번 스가랴 11절로 돌아오시면 스가랴서가 열리면서 이런 말로 시작이 됩니다. 스가랴 11절에 언제라고 그랬어요? 다리오 왕 이년 팔 월에, 이렇게 시작 됩니다.

 

다리오 왕 이년 팔 월에,그러니까 다리오 왕 시대였을 것 이다. 이 선지자가 활동했든 시대가 다리오 1세 였을 것 이다. 다리오 1, 바벨론을 해방시키고 페르시아가 일어나면서 아~ 다리오1세 그러니까 그 연대가 BC주전 521년부터 486년까지 다리오 1세가 활동한 것으로 보통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전 521년부터 486년 사이

.

, 조금 더 우리가 그 역사적 배경을 좀 큰 그림을 가지고 살펴보면. ,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돌아옵니다.포로귀향, 약 주전 5376년경,536년경에요.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에 돌아옵니다.

 

5만명, 42360명이라는 말도 있지만 약 5만 명의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으로 팔레스타인 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 돌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학개와 스가랴가 끼어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런데 돌아오고 나서 그들이 시온의 땅으로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가지고 있었든 꿈은 뭐냐 하면 우리의 시온에 돌아가 거기서 다시 성전을 건설하고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것이 꿈이였어요. 그러나 돌아왔지만 아직까지도 성전은 1516년이 지나지면 지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 그때 주전 520, 그러니까 여기보면 다리오 왕 이년 팔 월에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주전 BC 520년경입니다. 520년경, 그런데 그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하기에 일어나서 예언을 시작하기에 바로 앞서서, 얼마정도 앞서냐 하면 두 달 정도 앞서서 학개 선지자가 먼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두 달 앞서서, 학개 선지자가 활동한 때가 그러니까 활동을 시작한 때가 주전520829, 정확하게 학개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그래서 학개와 스가랴의 내용은 겹치는 부분이 많아요. 또 성전 재건 회복이라는 동일한 주제가 계속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한 두 달 후에 활동을 시작합니다. 스가랴서 선지자가 두 달 후에 활동을 같이 시작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가랴 선지자는 학자들에 의하면 주전 52011월정도 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51812월까지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을 것 이라고 추정됩니다. 2년 동안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2년 동안, 그러나 2년만 활동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학자들은 스가랴 9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은 스가랴 선지자가 노년기에 아~받았든 예언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의 정점은BC 520,519,518, 2년 동안 그는 아주 열렬하게 활동을 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결과로 학개, 스가랴, 이런 선지자의 활동의 결과로 BC 515년경 성전이 봉헌됩니다. 성전이 지어지고 봉헌 됩니다. 그러니까 아마 성전 봉헌되고 나서 좀 있다가 정확하게 모르지만 얼마 있다가, ~ 이 스가랴서가 아마도 기록 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이 대부분,대충 우리가 그 연대 배경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 이제 중요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스가랴서의 주제가 뭐일까요? 제가 이미 예고를 해 드렸어요. 우리가 이 신년 초에 스가랴서를 선택해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저는 그것이 우리시대에 우리가 가진 중요한 관심 하나 하고 일치하기 때문에 저는 특별히 이 스가랴서를 공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주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회복’. , 평소에 제 얘기 잘 듣는 사람들은 대답을 정확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복’.

그런데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결과 회복입니다. 성결과 회복, 스가랴서의 두 가지 중요한 주제 성결과 회복입니다. 성결과 회복, 이 두 가지의 주제는 소위 성결과 회복이라는 주제는 서로 아주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깨끗해져야 성결 해야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셔요 믿습니까? 우리가 성결 해야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우리의 삶의 장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민족이 회복되었다! 그러면 그 결과가 무어냐? 성결하다! 그래서 이 성결과 회복이라는 두개의 주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입니다. 절대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 우리가 잠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성결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스케치 해 보겠습니다. 쭉 한번 훑어보기만 하겠습니다. 스가랴 31절부터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 스가랴 31절부터5절까지 다 함께 합독 하시겠습니다.

 

시작,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렷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겉에 섰더라

 

, 4절에 보시면 더러운 옷을 어떻게 했습니까?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혔더니 그의 모습이 정갈해 졌다. 뭐 이런 내용이 나와요. 9절 보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39절 같이 읽겠습니다. 39절 다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이땅의 죄악을 제하여 버리겠다! 성결의 선언이죠?

 

, 스가랴 131절은 우리가 잘 는 아주 유명한 잘 알려진 그런 말씀중의 하나입니다. 이 구절에 근거해서 찬송가도 작사 되었죠? 131절 다같이 읽습니다.시작,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무슨 찬송가 생각나세요? ‘샘물과 같은 보혈은그만! 더 부르면 실력이 탄로 나니까, 하하~.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터져 나온다. 열린다 또 주제가 역시 성경입니다. 1420절 자, 스가랴 1420절 자,마지막 부분이에요 스가랴142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말 방울에 이르기까지 무어라고 기록될 것이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 성결이라! ,하나님께 성결이라 성결, 다같이 성결! , 성결과 함께 동시에 같이 강조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어라고 했습니까? 회복! 성결과 회복,

 

, 스가랴 8장 전체가 다 회복에 대한 메세지에요. 8장 전체, 물론 사실은 스가랴 전체가 회복의 멧세지 이지만 그 중에서도 8장은 특별히 회복의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 83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83절 다같이 시작,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화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도리라그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말이에요? 회복되리라! 이말 이에요 회복되리라.

 

20절부터 읽어보시면 스가랴 820절부터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 23절 같이 읽어봐요. 823절 마지막 절 다같이 시작, “만군의 여화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회복, 회복이라고 했었죠.

 

, 마지막 14장보겠습니다. 스가랴14, 149절 제가 아까 읽었습니다만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10온 땅이 아라바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러 그 본처에 있으리니다시 한번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된다 이게 뭐에요? 회복, 회복 이에요.

 

,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 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이것이 회복이에요, 회복.

 

, 스가랴서에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뭡니까? 성결과 회복, 회복 될려면 뭐해야 되요? 성결 해야 합니다. 깨끗해 져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해 질 때 그때 비로소 회복이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또 꺼꾸로 얘기 할 수가 있어요.우리가 정말 회복되었다! 그러면 회복된 결과가 뭘까요? 주님 보시기에 깨끗하다 그것이 진정한 회복인줄로 믿습니다.

 

, 간단히 아웃트라인을 개요를 드리겠습니다. 스가랴서 전체의 개요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전체를 머리 속에 집어넣고 공부해야 방황하실 이유가 없어요.첫 시간이 참 중요한 것 입니다.

 

첫 시간에 나오신 분들에게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시간부터 나오시는 분들에게 방황이 있을 것입니다.하하~ 그래도 나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하하~ 그래서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해요

 

스가랴서의 전체의 그림, 우선 서론, 스가랴서의 서론 11절에서 6절까지 이게 서론 이예요. 서론이 딱 지나가면 17절부터 6장 끝까지, 17절부터 6장까지가 뭐냐 하면 8가지 환상,

 

다같이 8가지 환상! 그리고 7장과8장에 보면은 7장과8장에 두 가지 메세지가 나와요. 다같이 두 가지 멧세지! 이 두가지 메세지가 뭐냐 하면 7장에는 금식의 메세지가 나와요 8장에는 회복의 메세지가 나옵니다. 두가지 메세지, 그리고 9장부터 14장까지 마지막 9장부터 14장까지 두 가지 예언이 나와요.

 

다같이 두 가지 예언! 스가랴서는 여러분이 이 세가지만 딱 기억하고 있으면 돼요. 따라서 하시면 서론, 서론 빼놓고 세가지만 기억하시면 돼요. 서론 빼놓고 세가지, 첫째는 뭐냐 하면 따라서 하십시요. 여덟가지 환상!, 두 가지 멧세지!, 두 가지 예언! , 저 쳐다보시고 한번 해 보세요.

 

,서론 빼놓고 스가랴서를 만드는 세가지 중요한 구조적인 틀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만 기억하시면 돼요. 서론 빼놓고 첫째는 뭐에요? 8가지 환상, 그 다음에 두 가지 멧세지, 그 다음에 두 가지 예언, 그러니까 서론만 딱 외어두시면 돼요. 서론은 11절부터 6절까지, 17절부터 6장까지가 뭡니까?

 

8가지환상, 그 다음에 78장이 뭡니까? 두 가지 멧세지 9장부터 14장까지가 뭐에요? 두 가지 예언, , 이세가지만 딱 기억하시면 돼요. 서론 빼놓고 세가지 뭡니까? 8가지 환상, 두 가지 메세지, 두가지 예언, 다 끝났어요.스가랴서는.

 

, 이것이 스가랴서의 구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오늘 서론 부분을 간단히 살펴 봄으로서 스가랴서의 뚜껑만 열어보겠습니다.

 

,11절부터 6절까지 한번 읽겠습니다. 스가랴서 11절부터 6절까지 제가 1절 읽고 여러분들이 2절 읽으시고 6절까지

1: 다리오 왕 이 년 팔 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가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예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 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아멘,

 

11절부터6절까지가 스가랴 전체를 여는 서론입니다 서론, 서론의 내용은 뭐냐 하면 회복의 열쇠, 회복의 열쇠 자, 회복 될려면 회복의 열쇠가 뭘까요? 하나에요.이 열쇠만 있으면 회복되어요. ,회복의 열쇠가 뭘까요? 우리가 그 핵심이 3절에 나와있어요.3, 다시 한번 3절 읽습니다.

 

13절 다시 한번 시작,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한마디로 말하면 뭐 같아요? 내게로 돌아오라 쏘리엔트로. 하하~~ 회개에요.

 

회개 회개. 회복의 열쇠가 뭡니까? 회개. 회복의 열쇠는 언제나 회개입니다.우리가 회복되기를 원하면 회개를 열망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외침 가운데 하나가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돌아 오라

 

이 서론 부분에서 우리가 왜 회개해야 되느냐? 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하느냐? 왜 회개해야 되느냐? 그 이유가 네가지로 기록되었어요. 왜 회개해야 되느냐? 첫째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회복 되기 위해서,

 

,2절에 보면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 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조상들에게, 잘못해 왔든 지금까지의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시다! 그러면서 3절에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돌이키라 돌아오라. 이 회개란 것은 방향 전환이죠? 돌아오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향을 딱 바꾸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저쪽을 쳐다보고 계시면 안되죠? 그런데 너희가 돌이키면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무슨 약속을 했어요?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가고 있었어요.방향을 돌이키면 하나님도 뭐에요? 돌이키겠다.그러면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해요? 만나요. 이게 회개에요. 진정한 회개, 관계의 회복 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돌아오라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저는 우리민족이 금년 한해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왜 회복되어야 하는가 두번째로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역사적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그것이 4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4절 읽습니다.

 

4절 다시 한번 시작,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화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약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화와의 말이니라과거에 그랬다 이말 이에요. 여기 첫번째 부분에 계속 나오는 단어하나가 있어요. 열조라는 말입니다.

 

네번씩 나와요 열조에, 너희 열조가, 그랬죠? 2절에 무리의 열조 에게, 그랬습니다. 열조 에게, 4절에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열조,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조상들을

 

우리가 좋은 전통은 조상에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조상이 잘못한 것 선배들이 잘못한 것 본받으면 안되죠? 윗물은 더러워도 아랫물은 여전히 맑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똑같이 하면 안된다 말이죠 똑같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않기 위해서 역사에서 배워라, 과거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불신앙 했고,그랬든 과거를 똑똑히 들여다보고 본받지 말라 만약 본받으면 똑같은 역사가 반복된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않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세 번째는 우리가 왜 회개해야 되는가? 인생의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인생의 시간이 그렇게 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5절 이에요. 5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5절 다시 한번 시작,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열조와 선지자, 열조는 하나님으로부터 회개를 촉구 받은 조상들, 우리가 4절에서 본대로 악한 길,

 

악한 행실 속에 살든 조상들, 선지자는 그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촉구했든 선지자들,그들이 지금은 다 갔다! 인생의 시간은 많은 것이 아니다.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말씀하실 때 그때 우리가 빨리 응답하고 고치면 절막한 인생길이 보람이고 의미이고 감격이고 아름다움일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간다

 

. 인생의 시간은 매우 짧다.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이 중요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인생은 금새 지나간다.인생의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왜 회개해야 하는가? 회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 때문이다.주의 말씀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6절 읽겠습니다.6절 다시 한번 시작,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 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아침 안 잡숫고 오셨오? 아침 안잡수었으면 점심 먹을 소망을 갖고 다시 한번 힘차게 읽어보세요.

 

다시 한번 시작,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이 말 표현이 좀 복잡해요. 거죠? 복잡해요. 그래서 빨리 새 번역 쓰기는 써야 되겠는데, 지난번에 조사를 해보니까 한국 교인들이 65프로가 다 새 번역 썼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게 다른 교회 안쓰는데 쓰면 이단이라고 이상하다라고 그런, 그런데 사실은 빨리 좀 새 번역 썼어면 좋겠어요. 한국말은 틀림없이 한국말인데 이것이? 뭐 이런 말도 있어요. 돌쳐 이르기를 그렇죠

 

? 여기에 6절에, ?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뭐 이렇게 번역을 했나? 이게 국어사전에도 안나와요. 돌쳐 이르기를 뭐 이 돌쳐가 다른 뜻은 아니고 도리켜 회상하기를 그런 뜻입니다. 돌이켜 회상하기를, 돌이켜 회상하기를, 다시 말하면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가 잘못한 그대로 하나님이 행하실려고 뜻하신 것을 행하셨다

 

그러니까 심은 대로 거두었다.심은 대로 그대로 거두었다.그러니까 미리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 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너 그대로 까불다가는 죽어! 그런데 그대로 되지 아니하였느냐 이말 이에요.그대로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렇게 가면 내 채찍과 내 징계를 피할 수가 없다.

 

그대로 되지 아니하였느냐 이말 이에요 그대로 되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한번 한다고 하면 한다! 내 말은 확실하다! 내 말은 분명하다 내 말은 아주 확실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마지막에 확인시켜 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빨리 정신 차리라는 말 이에요. 네 조상들도 멋대로 하다가 내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종들을 통해서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다가 징계를 받아 포로생활하고 그렇게 고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대로 되지 아니하였더냐?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빨리 회개하라 이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성 때문에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회개의 촉구와 함께 스가랴서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회개하면 볼 수 있는 미래, 혹은 회개하지 않을 때 그들이 살고있는 삶의 모습들을 하나님은 환상으로 펼쳐져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잘 깨닫지 못하면 우리 아이들이 깨닫지 못하면 그림을 그려야 돼요.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환상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몇 가지 환상? 8가지 환상, 이 환상의 정체가 무얼까요?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 우리는 이 구약의 난해한 책 가운데 하나인 스가랴서, 그러나 깊은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과 기대를 담고 성결을 촉구하고 회복을 촉구하고 있는 스가랴서의 말씀을 대하면서 하나님 금년한해 우리가정 우리민족 회복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회복되기 위해서 먼저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회복의 열쇠는 회개입니다. 우리민족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주앞에 깨끗한 민족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깨끗한 가정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깨끗한 교회, 한국교회가 정결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그래서 우리교회 우리민족 우리나라 회복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회복의 한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스가랴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두웠던 때 시온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성전은 세워지지 못하고 백성들은 방황하든 그 시대 그 어둠 속에서 회개를 외치고 회복을 외치든 스가랴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나이 많은 성숙한 지도자 학개와 더불어 그 곁에 나란히 서서 함께 회개의 메시지를 토하던 젊은 예언자 스가랴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하나님 우리 가운데 학개가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스가랴가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성결을 소망하고 회복을 외치며 자신의 삶에서부터 이 말씀을 적용시켜 회복의 꿈을 꾸는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하여 하나님 금년 한해에 우리 가운데 회복의 은혜가 임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민족도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는 놀라운 한해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난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1:7-17/ 이동원목사

2014-12-05 16:32:51

 

우리가 지난시간 스가랴서의 서론을 통해서 스가랴서의 구조를 우리가 함께 같이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스가랴서의 구조이면서 스가랴서의 아웃트라인, 개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네 가지만 기억하시도록 말씀 드렸습니다.

 

서론이 있고 첫째로 서론이 있고 11절부터 6절까지,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무어라고 그랬어요? 몇 가지 환상? 8가지 환상, 17절부터 어디까지? 6장 마지막 절까지, 그 다음은 뭐에요?

 

7장과8장은 두가지 메세지, 그 다음에 9장부터 마지막 장 14장까지는 두가지 예언, 이래서 우리가 스가랴서의 구조, 서론, 8가지 환상, 두가지 메세지, 두가지 예언, 그렇게 기억하기 어려워요?

 

서론하고 그 다음에 8가지 환상 17절부터 6장까지, 그 다음엔 두 가지 메세지 몇장 몇장? 7장과 8, 7장에는 특별히 금식에 대한 메세지가 있고 8장에는 회복의 메세지 입니다. 두가지 메세지,

 

그 다음에 9장부터14장까지는 두가지 예언, 혹은 두가지 신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서론 빼놓고 8가지 환상, 두가지 메세지, 두가지 예언, 이것이 스가랴서 전체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11절부터6절까지의 그 서론적 메세지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이 메세지가 선포된 이후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갸 선지자에게 임하신 후에 다시 약 3달 반 이라는 시간이 지나갑니다.

 

주전 5192, 오늘 7절에는 다리오 왕 이 년 십일 월 이라고 그랬어요.11, 그런데 유대인 칼렌더의 11월은 우리 칼렌더로 약2월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BC 5192월 스가랴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환상의 형태로 임하고 있습니다. 환상의 형태로, 몇 가지 환상이에요? 8가지환상, 8가지 환상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8가지 환상을 우리가 자세히 공부해 보시면 8가지의 그 비젼이 환상이, 혹은 이상이라고 그러는데 환상, 이상, 그런데 '이상' 그러면 자꾸 이상해져요. 그래서 '환상'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환상,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 그 회복에 대한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8가지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이 환상이 8가지 중에서 한가지만 빼놓고 두번째 환상만 빼놓고는 어떤 틀이 있어요 뚜렷한 틀이 있습니다. 환상도 그냥 환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 임하는 메세지의 어떤 특성이 있습니다.

 

세 가지의 두드러진 특성이 있어요. 즉 환상을 기술할 때 '내가 보니' 이렇게 시작이 돼요. 내가보니 내가 보니, 그리고 이제 보여주셔요. 보여주신 것에 관해서 질문을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보여주신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무슨 뜻이죠?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환상을 보여주신 이 천사를 통해서 다시 대답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런 뜻이다! 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이것이 공식 이에요 환상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공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보겠어요. , 8절 무슨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까? 오늘 본문에 8절에도 내가 밤에 보니,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밤에 보니,이렇게 시작하는 거에요.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9절에 보시면 내가 가로되, 뭐라고 질문을 합니까? "내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가 본 환상들, 이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랬더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게 대답 이에요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18절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8, 18절에도 어떻게 시작 됩니까? "내가 눈을 들어 본즉" 이제 보았어요. 19절에도 보시면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무어라고 물어봅니까?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이 뜻이 무엇입니까?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에 "내게 대답하되"라고 대답이 나옵니다.

 

, 세번째는 조금 달라지는데 세번째는 조금 다른 형식이 있지만 그러나 세번째도 그의 유사합니다.

~21절 보시면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2절에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어본즉 내게 대답하되" 약간 다르지만 그의 비슷해요. 그런 형태로 되어있어요. 3장에 나타나는 것이 조금 그런 형식을 뚜렷하게 따르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거의 비슷한 형식이 3장에도 나옵니다.

 

4장 한번 찾아보세요 4, 4절 보겠습니다. 44절 다같이 읽어요, 시작.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그전에 일단 보였어요. 쭉 보여주고 보여준 것에 관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그 뜻이 무엇입니까? 물었어요. 그랬더니 5"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라고 대답이 나왔어요. 그 다음에 대답이 나왔습니다.

 

, 5장 한번 보겠습니다. 5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1절 시작,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이제 보였어요.다시 한번 보였습니다. 보였으니까 그날 무슨 질문을 할까요?

 

? 이것이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을 하는 것이 당연하죠?

,2절 다같이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3"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길게 좀 설명이 나온 후에요?

 

5절 보겠습니다. 5절 다같이 "내게 말하든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6"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서론이 길었지만 그의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 6장 한번 보겠습니다.6, 61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보았습니다. 무언가를 보았어요. ,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이게 형식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 그냥 쭉 보인 것이 아니라 뚜렷한 어떤 틀을 가지고 형식을 가지고 이 환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 환상, 이것을 홍마 탄 사람의 환상 보통 이렇게 부릅니다. 붉은 말을 탄 사람의 환상이다. 이것이 첫번째 환상이에요.

 

자 첫째로 환상을 본 때, 언제 보았습니까? 8절에 보면 18절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셔서 18절에 환상을 언제 보았습니까? 녜 환상은 밤에 보는 거에요 낮에 볼려고 하지 마세요. 낮에 보면 몽유병 환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환상은 밤에 보는 것입니다.

 

, '내가 밤에 보니' 그랬습니다. 물론 저는 문자적으로 아~ 이 스가랴 선지자가 밤중에 이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 합니다.그러나 저는 여기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스가랴 선지자가 살았든 그 시대가 바로 어두운 밤이 였습니다

 

. 하나님은 이 어두운 밤에 이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때가 어두울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상이며 비젼 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자리가 어두울수록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내 인생의 길이 어두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젼입니다. 희망을 걸 필요가 있습니다.

 

저 빅터 프랑클이라는 유명한 의미의 요법 로오델라피를 창안했든 심리학자가 독일 나치의 그 수용소 경험을 통해서 어느날 그가 남겼든 메모지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심리학자니까 그 수용소 안에서 감옥 안에서 동료 유대인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이 고난 속에서 행동하는 모습들을 학자답게 늘 관찰했었습니다.

 

두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이런 메모지의 유명한 글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은 차가운 감옥의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또 한 친구는 감옥 저 건너편 하늘을 바라본다. 이것은 얼마나 현저한 차이인가?

 

꼭 같은 환경 속에 살면서 같은 감옥 안에서, 같은 위기에 직면하고 같은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한 사람의 시선은 차가운 감옥 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또 한 사람은 감옥 저 건너편의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빅터 프랑클 박사는 늘 감옥 안에서도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반드시 감옥 속에서 나간다.

 

그리고 이 고통 속에서도 사람이 희망을 가질 때 얼마나 그 생존이 풍성한 생존일 수 있는 것인가를 내가 지구촌의 모든 사람에게 다니면서 나는 강연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이 도저히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어려운 이 지옥 같은 이 감옥 속에서도 사람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면 희망을 갖기 시작하면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생존이 가능하다.

 

그 광경을 실제로 자기가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는, 강요하고 있는 teaching하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늘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해방과 함께 그 감옥의 생존자가 되었을 때 자기의 꿈을 실현하는 그런 학자로서의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환상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에요. 어두울수록 고통스러울수록 삶이 절망과 시련일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환상이라는 것은 보고싶다! 그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환상은 보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루종일 매우 피곤하게 하루를 살았다 오늘 밤 꿈이라도 멋있게 꾸어보자! 그래서 꾸어져요? 그것이 마음대로 안돼요 이것이 문제에요 마음대로 안돼요. 환상은 하나님 편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환상을 본 사람들, 그들이 환상을 본 그 삶의 정황을 살펴보면 두가지 사실이 현저한 특성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그들이 정말 주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했을 때,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어두운 시대를 이기기 위해서 고통의 삶의 장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환상입니다. 환상을 보아야 돼요. 눈에 실제로 보이는 환상이든 마음으로 보여지는 환상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환상을 본 자는 견딥니다.

 

극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찬란한 승리하는 사람으로 고난 저 건너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환상을 볼 수가 있느냐? 이것이 문제에요. 순종하는 자, 또 하나는 기도 하는 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했을 때 그리고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삶이 조금 잘못 갈 수도 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하지만, 열심히 하지만 내 삶의 방향이 잘못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내 동기가 선하고 내가 정말 주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순종의 발걸음을 옮긴다면 그리고 기도하면서 살고 있다면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방향을 바꾸어 주십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자, 바울이 소아시아쪽으로 전도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어디에서 쓰기를 원했습니까? 마케도니아 유럽 편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말이죠.그런데 다른 방향으로 가요.

 

그렇지만 바울 편에서는 순종하기를 원했어요 정말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주의 뜻대로 살기를 원했고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순종하는 이 자녀 이 종을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밤중에 주께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메시도니야, 마케도니아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상을 보여주시죠?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요!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요! 그래서 발걸음을 옮깁니다.

 

우리가 정말 순종하기를 원하면, 기도하기를 원하면 내 삶의 방향을 고쳐주시고 내가 가야할 곳으로 가게 하시고 그리고 저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그 환상이 보여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환상을 본 자, 밤중에 환상을 본 자, 이런 사람들이 새벽을 맞이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환상을 언제 보았느냐? 언제 보았어요? 밤에 보았어요. 낮에 볼려고 하시는 분이 있어요. 성가대에서 한번 보실려고 그러다가 지금 탁 깨셨습니다.하하~~ 밤중에 환상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이 환상의 궁극적 메세지가 뭐냐? 이 첫번째 환상, 붉은 말을 탄 사람의 환상, 이 환상이 보여 줄려고 하는 궁극적인 메세지, 16절과 17절에 나와있어요. 1617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1617절 시작,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절 까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 두가지 뭡니까 두가지?

 

첫째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건, 내 집이 다시 지어질 것이다. 건축될 것이다 성전의 재건, 이러한 메세지이고 또 뿐만 아니라 성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회복,하나님은 성전만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당시의 꿈, 또 하나님의 일을 대표하는 사건이 였어요. 대표하는 사건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하나님 일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 그 집이 지어진다! 성전재건에 대한 약속이 여기 있었습니다. 이 환상 속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동시에 그 성전을 세우는 그 도성, 예루살렘 도성에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17절에 보시면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주께서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그들의 삶의 장에 언제나 주께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소원할 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에너지, 그리고 자원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중국 내지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많은 고난 속에 선교하면서도 늘 그런 낙관적 삶의 태도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늘 무엇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동역자들에게 이런 말을 늘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공급이 결핍한적은 결코 없다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일에 하나님의 공급이 결핍한 적은 결코 없다네!

 

따라서 하십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공급이 결핍한 일은 결코 없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서 있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시고 나를 책임 져주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그 도성의 회복을 함께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이 환상의 궁극적인 메세지에요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이 환상의 주체 이 환상의 초점이 뭐냐? 이 환상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이 뭐냐? 초점, 혹은 주체, 이 환상의 주체가 있어요. 그것이 바로 8절에 나타난 홍마 탄 사람, 이것이 환상의 주인이십니다.

 

오늘 환상의 주체라고 할 수가 있어요. 환상의 주인, 가장 중요한 사건이 환상에서 뭐 많은 것들이 보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에요. , 8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그랬습니다.

 

뭐 여러가지가 많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만 또 기억하시면 돼요. '홍마 탄 사람' 붉은 말을 탄 사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그런데 이 홍마 탄 사람이 어디에 서 있었습니까?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다 그랬어요. 화석류나무에 서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홍마 탄 사람의 인물의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11절하고 비교해보세요. 11,

 

,11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 하더이다" , 자 홍마 탄 사람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었는데 또

 

11절에 보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그분을 누구라고 그랬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그랬어요. 여호와의 사자, 그래서 신학자들은 바로 이 홍마 탄 사람이 바로 여호와의 사자다, 여호와의 사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그냥 하나님이 부리시는 많은 천사들 중 한 사람이란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영어 성경에도 보면은 이 말을 번역할 때 '' 정관사 더(The)가 붙어있어요

 

. 디 혹은 The angel of the Lord 주님의 그 천사, 주님의 그 천사, 이것은 막연히 많은 천사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어떤 분, 구약성경에 보면 종종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을 천사형,혹은 인생형이라고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해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 가운데 그 인간의 모습으로 하고 나타날 수 있는 분, 이 분은 그의 예외 없이 제 2위 인격이신 성자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바로 이 분을 구약시대에 나타난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 소위 Free incarnate Christe라고 말합니다.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아기의 모습으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지만 구약시대에도 예수님이 나타나는 거에요. 가끔 나타나셨어요.

 

가끔, 어떤 때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고 예수님이? 어떤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 케이스에요. 여화와의 그 천사 그 천사의 모습, 이것은 바로 주님이시다. 홍마 탄 자,

 

, 그런데 다시 8절을 읽어보시면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사람이 홍마를 타고 홍마를 탄 사람, 혹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그리스도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이신데 그분이 어디에 속에 있었다고 그랬어요? 골짜기 속, 골짜기 속 그 다음에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랬습니다.

 

이 화석류나무 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의미를 가지는 톡특한 나무라고 합니다. 이 나무를 히브리 백성들은 하닷사라고 말합니다. 하닷사 하닷사,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지 않습니까? 하닷사,

 

? 에스더. , 맞아요, . 에스더 강의 할 때 제가 분명히 그 얘기를 했습니다. 기억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대여 축복이 있을 지어다 하하~~.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잊어 버림으로서 저는 반복할 수 있는 특권을 갖기 때문입니다. 하닷사, 에스더라는 이름의 뜻이 사실은 하닷사에요. 에스더라는 이름의 뜻이 그것을 히브리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이 하닷사 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바로 뭐에요? 화석류나무 입니다.

 

화석류나무, 이것은 히브리 백성들 사이에 매우 보편적인 이름 이에요. 아주 PopularName 이에요 아주 흔한 이름이에요. 명자 순자 영자처럼 아주 흔한 이름 이에요. , 그래서 아주 흔한 이름 이에요.

 

그런데 이 나무는 화석류나무는 주로 초막을 지을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초막을 지을 때, 그래서 이 나무는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백성의 상징이기도 했어요. 어떤 학자들은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백성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이 화석류나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좋아했든 나무이고 많이 사용했든 나무이고 또 그 백성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 그런데 화석류나무 사이에 그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화석류나무는 지금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디에 있었다고 그랬어요? 8절에 보면 골짜기에 있었다 골짜기 속에 있었다! 골짜기 속에 있는 화석류나무, 이것은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난 속에 있었든 이스라엘백성, 그런데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신 우리 주님, 바로 이것이 환상의 의미에요. ,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포로 된 자리에서 돌아왔습니다.

 

, 돌아왔지만, 꿈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아직도 형편없어요. , 차라리 어떤 사람들은 그 포로생활 할 때가 더 나았다고 그때를 추억했을지도 몰라요. , 당장 와보니까 뭐에요? 다 삶을 살만한 조건이나 환경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어요. 성전도 쓰러지지 않았지, 성벽도 없었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환경이였어요

 

. 그들의 삶은 마치 골짜기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아주 거칠은 삶, 황폐한 삶,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이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주시고자하시는 메세지,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세지는 딱 하나에요. 그대들은 아직도 고난 속에 있다 그러나 고난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일 수 있는 어떤 계획과 플랜이 계시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삶의 장에 고난을 허용하실 것 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이 고난 속에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 삶이 장이 캄캄한 골짜기 여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여도 그 골짜기 속에 임하시고 찾아오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마치 구약성경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포로시대에 살았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들은 그들의 신앙의 정조을 타협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어떻게 되었어요?

 

풀무불 속에 던짐을 받았어요. 풀무불 속에, , 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 불 속에 던지어 지도록 그대로 방관 하셨을까요? 아마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풀무불 속에 던짐을 받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왕이 세 사람을 던져 놓고 보았는데 그 불 속에서 세 사람이 아니라 몇 사람을 보았습니까? 네사람, 이 제4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그것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이 고난 속에 있을 때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그 고난 속에, 그 고난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스폴즌 목사님 위대한 설교가 스폴즌 목사님이 말년에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참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어떤 교우 한 분이 신방을, 목사님을 방문해서 오셔서 "목사님 아프시죠?" 그런데 스폴즌 목사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 아파요 너무 너무 아파요 그러나 이 고통보다 주님은 내게 더 가까이 계셔요 그것이 나의 위로랍니다"

 

그렇지요. 아픈 건 아픈 거에요. 고난이 아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난을 엔죠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픈 건 아픈 거에요. 시련은 시련이에요. 고난은 고난이예요. 그 후에 아무리 빛나는 약속이 약속 되어있어도 아픈 것은 아픈 것이죠. 그러나 성경은 매우 일관성 있게 약속을 주시고 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고난 속에 있을 때 반드시 찾아오신 하나님, 스폴즌 목사님의 고백처럼 고통 보다 더 가까이 계신 주님, 그 주님이 함께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만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이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 아니함은 뭐에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 이로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 이로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 네 번째로 환상의 주인을 보았어요. 환상의 주인, 함께하시는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환상의 조연들이 있습니다 환상의 조연들, 주연은 누구에요? 환상의 주연은? 예수님이에요.

 

그러나 이 환상의 조연들, 이 환상 속에 조연들이 있습니다. 조연들은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이 환상의 전달자 역할도 하고 또 이 환상의 해석자 역할도 하고, 또 환상의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을 우리는 천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예수님에 대해서 여호와의 천사, 그랬지만 이것은 그냥 무수한 천사들 중에 한분 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의미한다고 그랬어요? 예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다.

 

,그것이 구별되는 현장을 우리가 11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11절을 조금 조심하면서 읽어보세요 11절 다같이 시작,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 하더이다." 여기서 11절에 '그들이' 라는 정체가 나옵니다. 그들이, 그들이 누구냐?

 

다시 8절로 돌아가겠습니다. 8절에 보시면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이분이 주인공이에요 주인공, 홍마 탄 사람, 붉은 말을 타고 있는 사람, 그런데 그 뒤로 백그라운드로 그 뒤에 누가 있었습니까?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그랬어요 말이 세 마리가 있었어요. 홍마 자마 백마. 이 자마는 중간에, 홍마는 뭐 붉은 말인데 백마는 하얀 색이고 이 자마는 보통 갈색이라고 많이 생각을 합니다. 갈색, 그러나 정확하게 갈색은 아니에요.

 

이것은 붉은색과 흰색의 중간 색깔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느냐? 신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의견들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대체로 홍마는 아마도 전쟁을 상징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백마는 뭘 상징할까요? 평화겠지요. 아마도 그 중간에 있는 자마는 전쟁과 평화가 썩여있는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닐까?

 

전쟁과 관련하는 천사들, 평화와 관련하는 천사들, 혹은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와 더불어 관련되어서 일하는 어떤 천사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9절에 보시면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 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이겠죠? 그분이 대답하여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들은 누구냐 하면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다. 이게 바로 누구에요?

 

천사들.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있는 일반적인 천사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11절에 보면 '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이게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있는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 그분에게 보고를 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보통 천사가 아니에요 그렇죠? 여기 명확하게 구별이 되죠? 그 많은 복수, plural 복수 천사들하고 그 천사는 구별되는 존재다. 그러니까 그 천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육신 이전에 그리스도 라고 여러분이 보시면 되는 거에요. 그분에게 보고를 했어요 그렇습니다 그들이 바로 조연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 예수님의 심부름을 하면서 환상을 전달하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고 보고하기도 하는 역할을 하고있는 환상의 조연들을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 그 다음에 다섯번째로 이제 우리 환상 속에 있는 열방들을 보겠습니다. 환상 속에 있는 열방들,이 환상에는 열방들이 등장합니다. 환상 속에 있는 많은 열방들 자, 그 열방들의 모습을 11절에서 어떻게 보고 했습니까?

 

11절 다시 한번 읽어요. 시작,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 하더이다" , 열방들의 모습이에요. 온 땅이,이것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다른 많은 땅들의 다른 나라들을 다녀보니까 다 평안하고 정온 하더이다. 이것이 좋은 보고가 아닙니다.

 

이스라엘편의 입장에서 보면은 좋은 보고가 아니에요. 이들은, 이 열방들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지금 이스라엘이 포로 되게 하고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만든 주인공들,그 주변 세력들, 주변 열방들 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평온한 가운데 있다는 거에요. 이건 좋은 보고는 아니에요.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고 아!이게 좋은 보고 구나, 생각 하시면 안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것을 또 우리가 가만히 읽어보시면 스가랴와 동시대의 선지자, 같은 시대의 선지자가 있었다고 그랬지요? 스가랴는 젊었다고 그랬어요 늙었다고 그랬어요?

 

젊은 선지자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스가랴보다 늙은 선지자가 있었다고 그랬었죠? 누구였습니까? 학개. ,학개 찾아보겠습니다. 학개.221, 221, 그렇게 방황할 문제가 아닙니다 한 장만 뒤로 가면 됩니다.

 

하하~~한 페이지만 뒤로 가면 학개 2장입니다. 어디메로 가서 방황하고 계십니까 도대체? 평소 성경실력이 유감없이 폭로되는 처절한 환경이에요 지금의 모습이, 평소에 좀 열심히 보시면 아,뒤에 있구나 이렇게 딱 볼 텐데, 그냥 여기 있나 저기 있나? 학개가 어디 있나? 하하~~

 

, 학개221, 학개221절 다같이 읽어요. 학개 221절 다같이 시작,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 시킬 것이요"

 

22"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이 사건이 열방이 소요하고 열방이 심판을 받아야 이스라엘이 온전한 회복을 성취하게 돼요. 그런데 여기서 보고는 뭐냐 하면 열방이 평안하다는 거에요.고요하고 평안하다는 거에요.

 

,그러나 이 평화는 물론 오래갈 수 있는 평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15절에서 하나님이 드디어 이 보고를,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도대체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죠?

, 12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가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그러면 이 열방들은 그렇게 평안한데 이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그대로 놓아두시겠습니까?

 

성부와 성자의 대화처럼 우리가 보여집니다. , 그리고 나서 15절을 보세요. 대답이 나와요.15, 1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에요. 뭐냐 하면 이 안일한, 평안가운데 있는 이 열국에 인해서 내가 진노한다. 또 조금 있으면 진노할 것이다.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했다. 이것이 무슨 얘기냐 하면, , 이스라엘 백성들, 그 땅을 쳐들어 왔든 세력들, 어떤 세력들입니까? 예를 들어서 바벨로니나,

 

앗시리아, , 이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아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신차리도록 하나님이 쓰신 몽둥이, 막대기, 채찍 역할을 한 것이에요. , 그래서 내 백성을 쳐라! 그래서 내 백성이 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쓰셨어요.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워주는 역할만하면 돼요.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했다는 것이에요?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우리 자식들에게 우리도 노하긴 노하는데 완전히 처절하게 노할 수는 없죠? 어떻게 해요 우리는? 대부분 자식들에게 노할 때 얼마만큼 노합니까? 조금만 노하셔야 돼요. 너무 노하시면 안돼요

.

신학 성경에 우리 자녀교육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그랬습니다. 너무 진짜 노하게 만들면 큰 일이에요. 조금만 노하게, 정신차리도록 만 노하시면 돼요.

 

정신차리도록 만, 그런데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했다, 그들은 힘을 내어 내 백성을 너무나 짓밟았다 이말 이에요. 내 백성을 너무나 짓밟았다. 그래서 내가 그들도 그대로 두지않을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그들을 그대로 두지않고 그들을 심판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이것이 열방의 형편이에요. 환상 속에 나타난 열방의 형편이에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환상 속의 이스라엘, 환상 속의 이스라엘의 백성, , 이 환상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하나님은 그 백성을 지금 어떻게 보시고 있으며 어떻게 하시고자 하십니까?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 주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있습니다

 

.

우선 14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4절 시작,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 이런 형편에 놓여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어떻게 한다? 질투한다. 질투한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애정입니다. 사실 사랑과 질투는 똑 같은 것이죠?

 

,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 아내가 전혀 질투가 없다, 성녀죠? 그런 생각 하십니까? 아니에요 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질투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요. 왜 질투합니까? 대답은 하나에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것 이에요.

 

, 주의 백성들을 깨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방 세력들을 잠시 쓰신 것을 보지만 그들에 의해서 그 백성이 짓밟히고 너무나 고난 속에 있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화가 나신 거에요. 이 질투하시는 하나님, 다시 그 백성을 향해서 다가가시는 하나님, 이방을 다루시고 그 백성을 향한 설계와 그리고 격려를 펼치시는 하나님, 자 이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가 16절부터17, 우리가 처음에 아까 읽었든 이 두절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 미래에 대한 그 약속을 몇 가지로 크게 네가지로 정리해 볼 수가 있어요

.

크게 네 가지로, 첫째로 메시야가 오신다. 메시야가 오신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 즉" 돌아왔은 즉, 앞으로 이루어질 결정적 사실을 말할 때, 때때로 과거처럼 표현하는 그런 문법이 있어요.

 

표현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돌아오신다, 그분이 반드시 다시 온다, 메시야가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에요. ,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약속, 첫번째 약속이에요. 내가 다시 돌아온다. 그뿐만 아니라 메시야가 오실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또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예루살렘에 돌아왔은 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그 집이 건축된다, 그러니까 환상으로 볼 때는 이미 건축되는 것을 보고 있는 거에요 지금, ,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입니다. 이것을 우선 문자적으로는 제2의 성전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전의 회복,

 

그 다음에 세번째 약속이 있어요. 그 뿐만이 아니라 성전이 건축될 뿐 아니라 예루살렘 위에 뭐가 치어진다고 그랬어요?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먹줄을 칠 때는 건축하기 위해서 먼저 일단 줄을 이렇게 쳐주는 것을 말해요.

 

재건의, 성전 재건의 본격적인 준비하는 광경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럼 17절에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학자들은 여기서 우선 예루살렘 지경이 넓혀질 것을 보고있습니다.

 

이 먹줄을 친다는 것도 지경을 넓혀서 예루살렘 성의 확장을 예언한 것이라고 봅니다. 예루살렘 도성의 확장, 도성의 확장,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도성 그 자체에 대한 축복, 축복,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이 올 때 까지 회복은 아직도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17절 다시 한번 읽어요. 다같이 시작,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네 가지 약속입니다.

 

네 가지 약속이 뭡니까? 자 이 환상 속에 있는 이스라엘의 미래, 네가지 약속, 첫째 메시야가 오신다. 두번째 성전이 회복된다. 세번째 예루살렘 도성의 지경이 넓혀진다. 네번째 예루살렘성이 축복을 회복한다. 이 네가지 약속이에요.

 

그런데 이 네가지는 성서학자들은 이 약속을 가리켜서 이중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이중 예약이라고 말해요. 저와 함께 구속사를, 열린 성경학교에서 구속사를 공부하신 분들은 이중 예언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계시죠?

 

이중 예언, 구약성경의 많은 예언은, 물론 이것은 문자적으로 얼마 후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르키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질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까지도 겨냥한 Double fulfill, 이중으로 성취될 예언들을 동시에 한 Telescope, 한 망원경으로 보고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도 뭐냐 하면 주님이 간섭하셔서 얼마 후에 성전 그 자체가 회복되고 제2의 성전이 다시 지어졌어요 실제로.그 성전이 회복되고, 또 예루살렘 도성도 좀더 넓혀졌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성이 축복을 경험했어요. 물론 이것은 잠시 후에 이루어질 역사적 그 사건을 보여주고 있지마는, 더 먼 안목에서는 이것이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이루어질 사실들에 관한 예언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요? 성전이 회복돼요

 

. 지금 이스라엘에 가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성전이 있던 자리에 회교신전, 회교신전이 서 있어요. 벽 밖에 안 남았어요. 서쪽 벽 밖에, 하나 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그 성전이 메시야가 재림하기 전에 다시 성전이 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은 끊임없이 넓혀져 왔어요. 오늘 여러분들이 그 성지 순례를 가보시면 이제 옛날 예루살렘이 있고 Old cityNew city, 자꾸만 넓혀져요

 

. 도시가 넓혀지는 거죠. 예루살렘의 도성이 넓혀졌어요. 이 넓혀져 가는 예루살렘, 이것도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과 기대를 회복하고 축복 속에 들어가는 것, 저는 그날이 반드시 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환상을,

 

, 지금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황폐함 속에 살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직 지어지지 않았어요. 성전도 지어지지 않았어요. 도성은 아직도 비참한 상태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었어요

 

. , 이 환상을 보았을 때 무얼 느꼈을까요? 환상을 보고 또 전달하고 전달된 메시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상을 보았을 때 야!

 

지어질 성전, 그렇다면 우리가 성전을 지어야겠구나! 그리고 이 성전을 그리고 이 도성을 하나님의 축복의 도성, 샬롬의 도성이 될 수가 있도록 일해야 겠구나, 라는 그 용기가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이 환상을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시대에 아직도 IMF의 고난의 시대가 끝나지 않은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환상을 보는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상을 본다.

 

미국에 유명한 흑인 목사님들, 마틴루터 킹 쥬니어, , 미국 같은 민주주의나라에서 아직도 흑인들이 백인들에 의해서 여전히 천대 받고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흑인들은 자포자기 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이 훌륭한 인물이 될 수가 없다, 포기하고 있었든 흑인들에게 그가 와싱톤에서 위대한 설교,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 I have dream, 나는 흑인의 자손들이 백인의 자녀들과 나란히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그들이 함께 공부를 하고 함께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들의 꿈을 키워가고 그들이 그 피부의 색깔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의 고매함에 의해서 판단되는 그날이 올 것을 나는 보고있다 I have dream,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 꿈 때문에 흑인들의 민권이 회복되고 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회복되고 있는 것 이에요. 이 꿈을 갖는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

제가 지난 주일 저녁에 우리교회 제직들과도 그런 꿈을 같이 나누었습니다마는 꿈을 갖는다 우리교회가 꿈을 갖는다 우리 민족이 꿈을 갖는다 저는 우리 민족의 꿈이 겨우 경제 회복이다 이건 너무 천박한 꿈이라고 생각해요 경제회복만 된다.

 

그런데 경제회복만 되면 또 회복된 경제를 가지고 또 태국에 뱀 잡으러 또 돌아다니고 또 매춘업 업소에 드나들고 더 타락하면 더 크다란 심판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민족이 회개하고 영적 부흥을 체험하고 거룩한 민족으로 회복되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IMF를 지나고 났을 때 우리민족이 좀 더 깨끗한 민족이 되는 꿈, 그리고 이제는 제3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폼잡고 이웃들을 무시하는 백성이 아니라 이웃들, 열방들을 겸손히 섬기는 우리민족, 선교한국인 그리고 정말 이웃들을 축복하고 세계를 섬기는 봉사하는 민족이 되는 꿈, 우리가 이런 거룩한 꿈을 꿀 수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민족 가운데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거룩한 환상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제가 처음에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환상은 보여집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그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정말 기도할 때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 가정을 위한 자녀들을 위한, 또 우리민족을 위한 위대한 꿈을, 거룩한 꿈을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그 꿈을 통해서 그 비젼을 통해서 회복의 한해를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자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우리에게 꿈을 주시옵소서 우리가정에 꿈을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에 꿈을 주시고 우리민족에 꿈을 주시고 하나님 환상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그 환상을 보고 살아가는 이 한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21세기의 환상, 깨끗한 민족 거룩한 교회 그리고 하나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주앞에 쓰임을 받고있는, 위대한 교회와 민족의 환상을 꿈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정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작은 사업이지만 그리고 우리의 작은 삶의 터전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서 우리가정 식구들도 쓰임을 받는 거룩한 꿈, 하나님 이 꿈을 꾸게 도와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마음속에 꿈을 주시고 환상을 주셔서 우리가 내일을 향하여 하나님 위대한 내일을 향해서 걸어갈 수 있는 우리 민족이 될 수 있도록 우리교회가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성령님 역사하시고 능력으로 함께하시고 우리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시옵소서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스가랴에게 주셨던 그 비젼 스가랴 시대를 살든, 골짜기의 거칠고 험악한 삶을 살든 그 백성들에게 환상을 주시든 주님 오늘 IMF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는 이 백성들에게도 꿈을 주시옵소서 우리가정에도 꿈을 주시옵소서 가시나무에 찔리며 피 흐르는 고통 속에 시련 속에 살고있는 어떤 성도들의 가정에도 꿈을 주시옵소서 재건의 꿈을 회복의 꿈을 꾸게 하시고 우리가 잠시 시어를 견디고 기도하고 일어 났을 때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아 위대하고 놀랍게 쓰임을 받는 그 꿈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환상으로 오늘의 시어를 이기고 찬양하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의 말씀을 받고 주 앞에 기도로 우리의 삶의 짐을 내려놓고 응답하시는 주님 함께하시는 주님 신뢰하며 다시 삶의 장으로 나아갑니다. 주신 말씀 속에 우리인생의 내일에 대한 소망을 환상을 바라봅니다. 주님 내게 걸어가는 인생의 그 길이 아무리 험악한 골짜기라 해도 주님 함께하시면 우리는 넉넉히 승리하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고난의 시대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들의 사랑이 우리의 이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기를 소원하여 드려지는 이 제물을 축복하시고 우리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켜 주시옵소서 다시 삶의 장으로 나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같은 사랑 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과 평화를 주신 이, 이 날도 우리 발걸음마다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네 뿔과 네 공장의 환상 /1:18-21/ 이동원목사

2014-12-05 16:38:45

 

스가랴서의 구조 네가지 틀,

첫째로 서론 11부터6절까지,

 

두번째가 뭐에요? 8가지 환상, 17절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에요? 6장까지,

그 다음에 스가랴서 세 번째 부분은 뭡니까? 두가지 메세지, 몇 장과 몇 장? 7장과 8, 7장은 금식에 대해서 8장은 회복에 대한 메세지,

 

이 스가랴서의 네번째 부분은 어떤 부분입니까? 두가지 예언 혹은 두가지 신탁 몇 장부터? 9장부터14장까지,

 

8가지 환상 중에서 오늘 두번째 환상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첫번째 환상, 붉은말을 타고있는 사람,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든 분, 누구였습니까 그분이? 예수님, 구약성경에 나타나신 예수그리스도, 삼위 하나님 가운데 두번째 위에 해당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첫번째 환상 속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또 사실들이 뭐냐 하면 이 환상 속에 나타난 열국들의 모습과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열국들과 이스라엘은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매우 중요한 두개의 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우리가 지난시간에 환상 속에 보았든 열국들은 열국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15절에 보면, 115절에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하나님이 열국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1617절에서 이스라엘은 결국 회복된다 그들은 영광을 회복할 것을 하나님이 예언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긴장관계를 대치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열국들, 이 열국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진노하는 모습들은 보여주었지만

 

구체적으로 이 진노가 무엇인지 아직은 나타나 있지않습니다. 이 두번째 환상은 바로 열국에 대한 심판의 사실이 제시됩니다. 그 심판의 이유와 그 심판의 확실성이 이 두번째 환상을 통해서 계시됩니다.

 

그러니까 1장을 좀더 덧붙이는 것 1장에서 열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좀 더 펼쳐보인 보충적 환상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흔히 이 두번째 환상을 가리켜서 네뿔 네 공장의 환상, 네 뿔 네 공장의 환상, 나중에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만 여기서 공장은 뭐 물건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니에요. 아 이것은 공장쟁이 목수쟁이 대장쟁이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네뿔 네 공장의 환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두번째 환상은 네 뿔에 대한 환상 또 네 명의 공장 장인들에 대한 환상으로 이 두번째 환상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 첫번째, 이 두번째 환상 중에서도 첫번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네 뿔에 대한 것을 먼저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네 뿔, 우선 네 뿔의 환상, 18절에 보시면 내가 눈을 들어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자 이 환상에는 일정한 어떤 틀이 있다 형식이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 환상들이 기술된 모습을 살펴보면 한 세가지가 두드러진 특성으로 나타난다고 말씀 드렸죠?

 

첫번째는 뭐라고 그랬어요? 환상을 봐요 일단. 내가보니, 두번째는 묻습니다. 이 환상을 본 스가랴가 묻습니다 이 뜻이 뭡니까 물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떤 대답이 나옵니까? 천사가 대답이 나와요.

 

그것이 일정한 환상의 형식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본즉,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네 뿔을 보았습니다. 네 뿔, 뿔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런데 이 뿔을 달고있는 짐승의 모습은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짐승은 무슨 짐승인지 모르겠어요. 일반적으로 뿔에 대한 환상이 나올 때 뭐 양의 뿔이라든지 짐승의 뿔이라든지 무슨 염소의 뿔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짐승인지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뿔은 세력의 상징입니다. 파워, 세력 어떤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권세나 세력을 상징하는데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향해서 내 구원의 뿔 되시는 하나님 뭐 이런 말이 있어요 시편에 거죠? 못 보았어요? 녜 구원의 뿔 되시는 하나님,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이것을 뿔이라는 단어로 표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한번 찾아보세요 시편75, 시편75편입니다. 시편7545, 시편754절과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편754절과5절 시작,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재미나는 표현이죠? 막 권세 부릴려는 사람보고 이 성경적 표현을 빌리면 뭐에요? 뿔을 들지 말라, 그러니까 남편이 나를 막 짓밟을려고 그러면 뿔을 들지마시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성경적인 표현이에요

 

재미있는 표현이죠? 녜 권세를 행사하지 말라,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뿔을 달고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이죠.어떤 힘을 나타낸다 권세를 나타낸다, 좋은 의미로 쓰여질 수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여질 수도 있어요.

 

하나만 더 살펴보시면 시편에서 시편 9210절 한번 찾아보세요. 시편9210절입니다. 시편9210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편9210절 다같이 시작,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주님이 내게 힘을 돋구어주시고 나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말할 때는 또 이런 표현을 써도 좋겠습니다.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다!

 

막 기운이 뻗칠 때는 여러분이 내 뿔을 주께서 높이셨다! 우리끼리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들 속에 이 뿔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뿔은 머니 힘 능력을 상징하는데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이 환상으로 돌아가서 이 환상 안에서 그러면 네 뿔의 정체가 뭐냐? 이 뿔을 보았는데 네 뿔의 환상을 보았는데 네 뿔의 정체가 뭐냐?

 

, 19절 다시 한번 읽습니다. 19절 다같이 시작,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자 이 네 뿔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질문했어요. 천사의 대답, 무어라고 대답했습니까?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여기서 헤쳤다는 말이 중요한말 이에요.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과 또 거기 수도였든 예루살렘을 헤쳐버린 뿔이다.

 

헤쳤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흩어놓았다는 말입니다. 흩어놓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북방이스라엘도 짓밟고 남방 유다도 짓밟고 또 그 가운데 수도였든 예루살렘도 짓밟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흩어놓은 세력들이다 이말 입니다.

 

이스라엘을 흩어놓았던 세력들, 이 세력들의 역사적 정체가 무엇이냐? 구약의 학자들이 여러가지로 토론을 합니다. 몇 가지 설 이있어요. 몇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당대에 바로 이 환상이 보여지고 지금 스가랴가 살던 그 시대적 역사의 전후를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고 괴롭혔든 적대적 세력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시리아든지 앗시리아 라든지 저 북방이스라엘을 포로로 짓밟고 이끌어간 사람들은 앗시리아죠? 남방을 누가 끌어갔어요 남쪽은? ? 몰라요? 바벨로니아, 유다는 바벨로니아가 끌어 갔습니다. 바벨로니아, 그리고 애굽, 시리아 앗수르 바벨로니아 애굽, 이런 사대 세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합니다. ~ 왜냐하면 뭐 앗시리아나 바벨로니아 의 경우에 실제로 뭐 짓밟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끌어간 것이 사실이지마는 뭐 앗시라아는 약간 괴롭히고 공격했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직은 아니였고 또 애굽의 경우에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두번째는, 두번째 해석은, 뭐냐 하면 가장 많은 해석은 이것을 그 당대의 이스라엘백성의 역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의 과정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짓밟았든 대표적인 세력, 대표적인 네가지 세력을 의미한다. , 이스라엘 백성들을 짓밟았든 대표적인 네가지 세력, 그러면 어떤 세력들이 생각날까요?

 

우선 바벨로니아, 최종적으로 마지막 아~ 유다와 예루살렘을 짓밟았던 바벨로니아 그 다음에 메대파사 메대파사, 그 다음에 그리스 희랍 알렉산더를 내세워서 알렉산더가 여기까지 왔어요 이스라엘까지 왔었어요

 

그리스, 그 다음에는 뭡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누가 짓밟았어요 이스라엘을, 로마, , 그래서 이 네가지로 보는 학자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방인의 때를 대표한다. 이방인의 때,

 

즉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짓밟고 예루살렘을 짓밟아놓은 그 역사적 기간 전체를 대표한다 신약성경에 보면 "이방인의 때"라는 말이 있죠? 혹시 성경 읽다가 그런 단어 보신 일이 있어요? 이방인의 때,

 

이방인의 때,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가 이방인의 때입니다. 이방인의 때, 복음이 이방인 가운데 전파되고 있는 때, 아직도 이스라엘은 짓밟혀있는 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을 잘 얻어먹지 못해서 그렇습니다.하하~~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습니다.하하~~

미안해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제가 반장하라고 그랬더니 요즘 반장한다고 자원을 해놓고 걱정이 태산 같아요. 과거에 반장했던 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 제발 우리 마누라를 좀 도와 주십시요. 어떻게 반장 잘 할 수 있는지, 내가 무슨 얘기하다가 또 이런.

 

주전 605, BC 605년부터 예수님 재림할 때 까지 아마도 이 기간 전체를 대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짓밟은 네가지 대표적인 세력을 의미한다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상당히 있어요. 그래서 바벨로니아 메대파사 그리스 혹은 희랍 로마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칼빈을 위시해서 더 많은 성서 학자들은 이것이 구지 어떤 특정한 세력을 의미 한다고 볼 필요가 없다, 넷이라는 숫자는 지극히 상징적인 숫자다. 넷은 일반적으로 세상을 상징하는 숫자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세상에 사방, 동서남북 할 때도 넷이라는 숫자가 사용되죠?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혹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적대시하는 모든 세력을 단순히 네 뿔로 상징하는 것이다.

 

저는 사실은 이세번째 견해를 저가 동의 합니다. 구지 꼭 역사의 어떤 사건과 성경의 사건을 지나치게 결부 시킬려는 것은 저는 그렇게 건강한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세번째 견해를 더 지지해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 혹은 오늘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있는 모든 세력, 교회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모든 세력들을 대표하는 것이 네 뿔이다 저는 네 뿔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리고 지금도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네 뿔의 정체입니다. 네 뿔의 정체,

 

물론 역사적으로 이것이 바벨론일 수도 있고 앗수르 일수도 있고 그리스일수도 있고 로마일수도 있지만 구지 꼭 그런 나라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리고 교회를 적대시하고 공격하는 일체의 모든 세력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네 뿔이다 라고 보는 것이 저는 합당하다고 생각을 해요.

 

, 네 뿔 그 다음에 또 뭐가 나온다고 그랬어요? 이 두번째 환상 속에는? 네 공장, 혹은 네 장인, 뭐 사돈 장인 그런 장인말고 뭘 만드는, 깨트리는 장인. 20절에 보시면 때에 여호와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우선 네 장인의 네 공장의 환상이 보여요. 네 공장의 환상, 네 명의 공장이 보였다.

 

이 공장이 히브리말로 카라쉼 이라는 단어가 쓰여 지는데 카라쉼, 이것은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장인의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종류가 나누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무를 가지고 쟁이의 일을 하면은 뭐가 될까요?

 

목공이 되는 것이고 목수 목공이 되는 것이고, 이 사람이 돌을 가지고 쟁이 역할을 한다면 뭐가 될까요? 석공 혹은 석수가 되는 것이고 만약 철을 가지고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면 철공이 될 것입니다, 철공.

 

저는 여기서 철공을 의미할 가능성이 제일 많다고 생각해요. 철공을 의미할 가능성, 왜냐하면 물론 이것도 이 뿔이 어떤 재료냐에 따라서 이 뿔을 깨트리기 위해서 나무를 가지고 되느냐 뭐 이렇게 이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아마 철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철과 같은 망치, 철을 녹이고 깨트리고 부수는 이 철공.

 

, 어쨌든 이런 장인 공장 네 사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네 장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혹은 정체라기 보다도 여기에서는 역할에 더 치중하고 있습니다. 역할이 뭐냐? 네 장인의 역할이 뭐냐?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21,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 하러 왔나이까 그들의 역할은 뭐냐 무얼 하는 거냐? 네 장인의 역할은 무엇이냐?

 

, 21절 다시 한번 읽어요. 다같이 시작,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 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인은 뿔들 편이에요 뿔들 편이 아니에요? 뿔들 편이 아니죠? 이 뿔들을 오히려 제압하기 위해서 뿔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뿔들을 제압하기위해서, 여기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있는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또 준비하신 사람들의 상징이 바로 이 네 공장 장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뿔을 항상 든다는 것은 어떤 힘이 솟구친다 승리한다는 것을 말하지만 뿔이 떨어지면 패배하는 거죠. 뿔이 떨어지면, 그런데 그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어떻게 할려고요? 떨어치려 하느니라 이 뿔들을 꺽기 위해서 이 뿔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네 명의 장인을 하나님이 준비 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네 뿔의 세력을 제압하고 괴몰시키기 위해서 준비하신 사람들 혹은 세력들, 그것이 네 장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쓰시는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세력을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신 차릴 수 있도록 이들을, 뭐 바벨로니아나 앗시리아나 이런 것들을 잠시 징계의 몽둥이로 쓰신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징계의 몽둥이로 이들이 쓰임을 받았다는 말이 반드시 좋은 말이 아닙니다.

 

쓰임 받는 것도 두가지 종류가 있어요. 영광스럽게 쓰임을 받는 것이 있고 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식들, 뭐 이렇게 때리고 그럴 때 뭐 좋은 막대기 쓰지 않을거에요 녜? 시시한 막대기 한번 쓰고 내어 버릴 거,

 

내 자식 정신차리게 하기위해서 잠시 막대기를 쓰실 수가 있지만, 어디 좋은 막대기 어디 있나 막 돌아다니면서 좋은 막대기 사가지고 와서 그 막대기를 잘 보관해두고 이것은 내 자식을 때리는 영광스러운 막대기다,

 

그러는 인간이 있어요? 여러분 가운데 없죠? 좋은 일도 아닌데 별로 좋은 일도 아니에요. 좋은 일도 아닌데 좋은 것을 쓸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안 좋은 일에 하나님이 안 좋은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 이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이런 세력들이 였든 것입니다.

 

그래 내 백성들을 좀 정신차리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좀 써야겠다 그러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짓밟게 했지마는, 지난시간에 제가 강조했어요. 이 사람들이 이 바벨로니아 와 앗시리아가 과잉 행동을 했어요.

 

과잉행동을, 그랬죠? 녜 어디에 나옵니까 그 말씀이, 15115절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115절 다같이 시작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 하였음이라"

 

이것이 되게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그렇죠? 녜 여러분이 자식들에게 화를 내실 때 조금만 노하십니까 열화 같이 노하십니까? 뭐 성격에 따라서 케이스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너무 열 내시면 안돼요. 교육상 노하신다면 쬐금만 노하셔야 돼요.

 

조금만 노하셔야지 너무 노하시면 안되죠. 그러니까 내가 내 백성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 되겠다 하나님 되게 재미있으신 하나님이에요 거죠? 녜 아주 조금만 노하셨어요.

 

아유 그래 가지고 내 백성 좀 때려라 그랬더니 이스라엘을 그냥 왕창 짓밟아 놓았어요. 내가 언제 너보고 그렇게 하라 그랬느냐? 너 너 혼좀 나야겠다 말이죠.

 

사실은 앗시리아 바벨로니아를 이뻐서 쓰신 것이 아니에요. 이게 형편없는 백성들이에요. 그래서 한번 쓰시고 버릴 목적으로 약한 백성들을 써신 겁니다 하나님이, 이게 지나치게 했다말이지요.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위기와 어려움에 직면할 때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또 다른 세력을 준비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가지고 쓰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적 세력을 대표하고있는 것이 네 장인의 모습이다. 네 공장의 모습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아~ 바벨로니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짓밟혔지만 나중에 누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얻습니까 또?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녜? 메대파사 때문에, 메대파사 때문에 페르시아에 누가 등장했어요?

 

고레서 녜,싸이러스 고레스 황제가 등장해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고 정치적 사건이지만 이 단순히 역사적 정치적 사건으로 보여지는 이 사건의 역사의 무대 배후에는 누가 이 모든 역사를 지배하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십니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되요. IMF뭐 다 일어나고 그냥 일어나는 것 같지만 뭐 그냥 YS가 잘못해서 일어나고 뭐 재경원이 잘못해서 일어나고 한국은행이 잘못해서 일어나는 것 같지마는 그러나 이 모든 역사의 배후에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리고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지배하시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바벨론을 치시기 위해서 메대파사를 쓰시고 또 메대파사가 잘못했을 때 또 그리스를 쓰시고 또 그리스가 잘못했을 때 또 로마를 쓰시고 역사는 자꾸 순환되어요

.

이것은 특정한 네 공장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세력을 의미한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을 언제나 하나님이 다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거에요.

 

네개의 뿔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은 또 네개의 공장의 환상을 보여주시므로 우리가 위기가 있을 때 마다 우리가 역경이 있을 때 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준비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준비대책 없이 IMF를 이땅에서 허용하신 것이 아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준비가 있어요. 저는 하나님의 경륜이 반드시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함께 같이 공부하시면서 이제 이 두번째 환상이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냐 마지막으로 몇 가지 교훈을 좀 정리해 보고 싶어요.

이 두번째 환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들, 레슨들이 뭐냐? 몇가지 그 레슨을 정리해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믿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결국 누가 대적하시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대적해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세력은 반드시 하나님 자신이 대적하신다. 이것은 변치 아니하는 매우 일관성있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본문의 사건, 이 환상이 보여주고 있었든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은 창세기123절의 예언적 성취라고 믿습니다. 창세기123절의 예언적인 성취였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123, 뭐가 나와요? 창세기 123절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인데요 누구한테 하신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소명하시면서 그때 하나님이 하셨든 약속의 말씀입니다. 2절은 우리가 잘아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123절에 보시면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한마디로 말하면 뭐에요 너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축복한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날 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게 얼마나 굉장한 약속이에요? 얼마나 굉장한 약속, 우리가 얼마나 굉장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를 축복하는 자는 말이야 내가 축복 할 꺼야 너를 저주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저주해, ! 굉장하다 옆에 있는 사람보고 내가 이렇게 굉장해요!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하~~

 

한마디로 내가 뭐길래, 거죠? 내가 뭐길래, 내가 어떤 존재이길래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서 이 약속이 나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이라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를 축복하는 사람은 말이야 내가 축복할꺼야,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내가 저주해, Oh my God ! 내가 얼마나 굉장한 존재이기에, 내가 얼마나 굉장한 존재이길래 하나님이 이런 약속을 하시느냐.

 

이것은 저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향한 약속이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향한 약속이라고 믿어요 공동체를 향한 약속, 우리 개인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 우리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든 세력들을 하나님이 결국은 대적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교훈.

 

두번째로 하나님의 대적은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 하나님의 대적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 앗시리아가 심판 받았어요 안받았어요? 받았습니다. 바벨로니아 심판 받았어요 안받았어요?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을 다루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나한테 좀 나에게 우리에게 잘못한다고 그래서 너무 그렇게 흥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이 다루시니까, 믿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다루시니까.

 

그러니까 신약에서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원수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원수, 웬수를, 웬수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너무 웬수를 공격 할려고 그러지 말라, 보복은 그리스도인의 방법이 아니에요.

 

?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잡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219절에 뭐라고 그랬어요 한번 다 찾아보세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마는 로마서1219절 다 찾아보세요 로마서1219절 다같이, 로마서121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로마서1219절 다같이 시작,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 하심에 맡기라 기록 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느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 하시니라"

 

원수는 누가 갚으세요? 주님이 갚으신다 그러니까 내가 흥분하지 말자, 다같이 내가 흥분하지 말자, 왜요? 주님이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본문의 이 두번째 환상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경우는 하나님의 대적들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믿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대적들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결국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사실 이 당대에 스가랴가 이 환상을 보았든 당대의 사건으로 우리가 렌즈를 좁혀서 생각해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역사적 시점에서 최대의 과제는 뭐냐하면 성전 건축이였어요. 그들은 그 열망을 갖고 돌아왔어요.

 

시온의 땅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성전 건축은 이루어 지지 않고 있었어요. 성전건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그 주변 세력들의 반대 때문이였습니다. 주변 세력들의 반대 때문에,

 

그들을 끌어갔고 그들을 짓밟았던, 끊임없이 그 주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대하고 있던 세력들의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자신의 문제도 있었지마는 그래서 성전건축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또 학개에게 말씀을 주시고 스가랴에게 환상을 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뭐냐하면 반드시 성전건축은 이루어진다. 아무리 반대해도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의 계획이였다면,

 

하나님이 역사했다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그 격려를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어느 시대나 적용 될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대적들의 대적,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어떤 일을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지고야 말 것입니다.

 

세계 복음화! 얼마나 악마들이, 마귀들이, 마귀가 얼마나 세계 복음화를 적대시하고 있어요 그러나 결국 이 지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편만하게 전파되고 야 말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흐르는 강이, 모든세상의 물이 땅을 덮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땅에 편만하게 이루어 지고야 말 것입니다.

 

사탄의 대적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야 맙니다.

~ 하나님에게도 별명이 많은 것처럼 마귀에게도 별명이 많아요. 마귀의 이름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에 그 엄청남, 스케일의 엄청남,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름들이 쓰여집니다.

 

한 두 가지 이름으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영광스러움, 하나님의 사역을 다 설명해 낼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의 역사도 상당히 간교해요 그래서 마귀도 이름이 많아요. 그렇지만 마귀의 많은 이름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두가지 입니다. 사탄, 마귀, 이 두가지 이름이 마귀의 대표적인 이름이지요. 사탄의 뜻이 뭐에요?

 

사탄의 뜻이, 밤낮 설명해도 밤낮 잊어버려요. 사탄의 뜻은 대적이라는 말이에요. 사탄이라는 말이 대적이라는 말이에요. 대적, 사탄, 사탄이 대적이라는 말이에요. 마귀의 뜻이 뭡니까? 마귀라는 말은 참소자라는 말입니다.

 

참소자, 사이를 갈라놓는다라는 뜻입니다. 부부가 갈라지고, 부부와 자식이 갈라지고, 교회 공동체가 갈라지고, 지도자와 백성들이 갈라지고 이런 모든 세력들의 배후에 저는 사탄의 역사가 있다고 믿어요.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을 흔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

그런데 이 사탄이 대적한다 이 대적한다는 것이 직접적인, 사탄의 직접적인 공격이라면 마귀가 참소한다는 말은 이것은 간접적인 공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탄은 어떤 때는 직접적으로 공격을 해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간접적으로 쓱 서로 시기하게 만들고 싸우게 만들고 그렇게 공격을 해요 그렇게 해서 흔들어보기도 하고

,

직접적인 공격이든 간접적으로 공격하든 여러분 사탄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께서 승리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 있으리라! 하나님의 도모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사탄이 일시적으로는 좀 흔들어보고 뭐 이기는 것같이 쾌재의 노래를 부를지 모르지만 마지막 승리자는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 결론부터 말하면 성전건축 되었어요 안되었어요? 됐어요. 그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다시 재건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도 재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재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축복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레슨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회개할 때 마다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라는 교훈이에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회개할 때마다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안 백성이 되죠?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분의 자식이 잘못하면 자식하고 인연을 끊어십니까? 어떻게 하세요 징계하셔요. 징계는 사랑하는 자에게만 징계할 수가 있는거에요. 우리가 징계를 받는 이유는 우리가 주앞에 사랑 받는 자녀인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징계를 경험하는 거에요. 죄는 우리에게 징계를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회복은 뭐하면 회복이오죠? 회계하면 회복이 이루어져요. 회계하면 회복이 이루어져요. 회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됩니다.

 

, 적들이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제압하셨다 문제는 없어졌다. 우리가 문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항상 기뻐하시면 안돼요.

 

우리가 어떤 고통꺼리가 생겼는데 사탄의 직접적인 공격이든 간접적인 공격이든 삶을 살면서 문제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것으로 기뻐하시면 안돼요 이제부터는 뭘 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이제부터 무엇을 하느냐,

 

자 이러한 열방의 세력들을 꺽으신 이유는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성전재건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그 기회를 주신거에요. 문제가 없어졌다는 것만으로 항상 만족하는 소극적인 삶에 안주하지 마세요.

 

내가 문제가 없어졌다 내가 골치 썩이든 문제가 없어졌다는 것으로 기뻐하지 마시고 내가 해야 될 일이 뭐냐? 적들을 제거하고 내 삶에 평화를 주셨는데 해야 될 일이 무엇이냐 이것을 물어보아야 돼요. 해야 될 일이 뭐냐? 그리고 그 기회를 잘 선용해야 되요. 그 기회를 잘 선용해야 돼요.

 

그러나 이런 기회, 이런 하나님의 기회가 우리 삶 속에 오는 것은 진지한 회개가 있어야 되요

.

지금 이 두번째 환상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제부터 적들을 하나님이 다 제압하신다,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두번째 환상 다음에 몇 번째 환상이 있을까요? 세번째 환상이 있어요.

 

잘 아시네요. 그런데 그 세번째 환상이 뭐냐 하면 적들을 제압해 놓으시고 하나님이, 대적들을 없애주시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떻게 회복을 이루시느냐, 이게 세번째 환상의 내용이에요. 세번째 환상의 내용

.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뭘 근거로 시작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지하게 회개할 때 사실은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네가 잘못해서 이러한 적대하는 세력들이 일어났지만 회개하면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는 메세지를 지금 주시고 싶어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 한마디 하고 일어서면 돼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마디 하는 것 쉽지않죠. 그러나 자기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용기 있는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 그러나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그의 삶이 더 시궁창 속으로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미국 텍사스에 주지사 가운데 네프 라는 이름을 가진 주지사가 있었는데 이분이 한번 주립 교도소를 방문 했대요.

 

그래서 쭉 교도소 시설을 돌아보고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시고 나서 여러분 가운데 정말 나하고 얘기하고 싶은, 탄원하고싶은 어떤 분이 있으면 얘기를 하십시요.

 

내가 시간을 내겠습니다. 20명이 나와요 20명이, 20명하고 다 인터뷰를 했어요. 짤막 짤막하게 이 주지사가 인터뷰를 해보았는데 놀라운 사실은 20명 가운데서 19명이 다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거에요. 자기는 잘못하지 않고 억울하게 교도소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중에 꼭 한 사람만이 주지사님 저는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을 뼈저리게 참회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한번 기회를 주시면 사회에 나가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 떳떳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지사가 이 청년에게 감동을 받았어요. 다른 사람은 다 잘못한 것이 없고 억울하게 왔다고 그러는데, 그 한명의 사람에게 사명권을 행사해서 나가게 했습니다.

 

이 사람이 텍사스 주에서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됩니다. 로빈손 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도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쓰신거에요.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이라면 동시에 그것은 회복의 시작이에요.

 

저는 우리민족도 이 시점에서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진지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복의 꿈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회복! 어떤 모습으로 일어날까요? 세번째 환상 속에 나타난 회복의 모습,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주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 저들을 아픈 마음으로 치시고 징계하셨으나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괴롭히든 세력들을 없애주시고 새날을 예비하시든 전능하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져 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우리의 삶의 장 역사의 마당에도 우리가 아직도 고통과 괴로움을 계속하고 있지지만 하나님 우리민족이 회개할 때 새날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정에도 우리민족에게도 새날을 속히 주시옵소서 회개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이 땅에 회개하는 진지한 부흥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회개 없이 하나님 단순히 IMF를 벗어날려는 생각들이 없어지게 하시고 주앞에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뼈저리게 회개하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다시 일어서는 이 민족 우리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고통케 하심이 스가랴 에게 비전을 주셔서 그 어두운 시대를 이기게 하시든 주님 오늘 우리 시대에도 우리도 우리조국의 미래 교회의 미래 우리가정의 미래의 환상을 지금도 보여 주시사 그 미래의 빛나는 환상을 붙들고 오늘도 전진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오늘 주를 경배하고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님의 평안과 능력으로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척량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의 환상 /2:1-27/ 이동원목사

2014-12-05 16:57:26

 

스가랴서 연구 오늘 2장 계속하겠습니다.

 

스가랴서 2장입니다. 우리가 스가랴서 2장의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면 척량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의 환상, 척량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의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스가랴서의 구조 모두 네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첫번째는 서론,

 

두번째는 8가지 환상,

 

세번째는 두가지 멧세지,

 

네번째는 두가지 예언으로 되어있습니다.

 

 

 

8가지 환상 중에 오늘 세번째 환상입니다.

 

기독교를 우리가 계시의 종교라 이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시" 그러면, 우리는 얼른 그 신기한 것, 이상한 것, 저 산에 올라간 사람들만이 받을 수가 있는 것, 또 그런 사람들만이 뜻을 알 수가 있는 것, 우리가 지나치게 이 계시라는 단어에다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라는 낱말에 본래의 뜻은 뚜껑을 연다, 이런 뜻입니다. uncover, 그래서 뚜껑을 연다. 뚜껑을 연다 그래서 이 뚜껑을 여니까 다 보여요. 계시란 것은 감추어져 있던 것이 보여진 것입니다. 이제는 공개된 것입니다. 알려진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아~특별한 종류의 사람들만이 계시를 독점하고있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계시는 계시된 후에 더 이상 그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성령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상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계시는 이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자신의 진리를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그 방법 하나가 바로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대체로 역사 속에 될 일을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환상도 있지만 성경에서 차지하는 대부분의 중요한 환상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신앙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지향하는 것들입니다.

 

오늘 스가랴서에 나타난 8개의 환상, 이것들은 이제 서로 연관된 환상들입니다. 따로 따로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것을 차근 차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역사 가운데 될 일들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환상은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의 특성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어떤 환상을 보여주실 때 갑자기 이렇게 딱 보여주시면 우리가 이해 할 수가 없죠? 차근 차근 보여주십니다. 마치 그분은 친절한 교사처럼 선생님처럼 자상하고 친절한 선생처럼 차근 차근 계단적으로 단계적으로 그 환상을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과거 또 이스라엘의 현제 이스라엘의 미래를 하나님이 어떻게 섭리하실 것인가를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번째 환상은 척량 줄을 잡고있는 사람의 환상입니다.

 

21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21절을 다같이 시작,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그런데 이 측량 줄을, 갑자기 척량 줄을 잡고있는 것이 딱 보이면 저게 뭘까 이렇게 될 수가 있잖아요. 측량 줄이 이미 나왔어요. 물론 우리말 성경은 다른 단어를 써서 번역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1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6, 이 첫번째 환상에서 본 내용 중 하나였는데 11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화와의 말이니라 하셨다하라"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상태에서 돌아왔습니다. 이제 내 집이 건축될 것이다. 성전의 건축을 예언하면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먹줄이,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워지리라. 먹줄이 나왔습니다. 이 먹줄이 바로 다른 말로 말하면 척량 줄 입니다. 이 재는 것, 재는 것, measure, 재는 라인이다. 척량 줄이다. 왜 이 줄을 그었을 까요? 거기다 건설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새로운 건설을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 그러니까 이 척량 줄이 이미 나왔기 때문에 스가랴에게 있어서 이것은 낯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척량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이 뭔가 액션을 시작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첫번째 환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내용들을 이제 공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척량 줄을 잡고있는 사람, 그가 누구냐? 정답부터 말씀 드리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첫번째 환상, 붉은 말을 타고 있었던 사람, 누구라고 그랬어요? 예수님이에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실 때 종종 사람이나 혹은 천사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하나님 가운데서 주로 성자하나님 예수그리스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자신의 모습을 사람으로 계시하거나 천사로 계시할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삼위하나님 가운데 두번째 위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렇게 하십니다. 붉은 말을 탄 사람, 그 골짜기 가운데 서 있었던 그 사람이 이번에는 척량 줄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 오늘 본문의 2절에 보시면 그 척량 줄을 잡고있는 사람을 향해서 이 환상을 보고 있었던 스가랴가 이렇게 묻습니다. "2절에 네가 어디로 가느냐?" 감히 예수님한테 네가 어디로 가느냐? 잘 몰라서 그랬겠죠? 그 분이 누구인지 아직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번역상의 문제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2절 다같이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22절 시작,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내가 예루살렘을 잘 척량하여 길이와 가로와 세로, 장광을 얼마나 될는지 내가 그것을 보고자 함이다! 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 그런데 한마디로 말하면 이제 그가 보게 되는 이 환상, 이 환상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재건과 확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확장된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재건의 플랜, 계획 속에는 물론 성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전도 재건되고 이 성전이 세워질 예루살렘city, 그 성도 다시 재건된다. 재건될 뿐만 아니라 확장된다. 예루살렘의 재건과 확장의 비전이 그 중심 되는 내용이에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번째 환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다가올, 바로 앞에 다가올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예루살렘의 도시의 재건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은 이 환상을 받는 사람들, 또 앞으로 환상의 내용을 읽게 될 후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보다 더 궁극적으로 올 또 환상을 보여주셔요.

 

이렇게 하나님의 예언이 바로 가까이 다가올 사건, 그리고 가까이 다가올 사건을 통해서 더 멀리 있는 미래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방법을 가리켜서 이중 예언이다라는 말씀을 제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으신 분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중 예언, 마치 우리가 망원경으로 보면 가까이 있는 사건이 그 망원경 안에 잡히고 가까이 있는 그림도 보이고 또 멀리 있는 산도 한꺼번에 보이는 것처럼 가까이 올 사건과 멀리 있는 사건을 함께 보여주십니다. 이중 예언이다.

 

그러면 그 멀리 다가올 궁극적인 그 예언을 뭐냐? 그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재건과 확장 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비전입니다. 예루살렘 도시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이 거룩한 도성, the holy city, 이 거룩한 도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스케일, 메시야를 통해서 이땅에 오게 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가, 그 나라의 비전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에서 부터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초림과 그 재림 사이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그 확장의 비전을 궁극적으로 보여주시고자 의도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환상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여기 천사들이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3절에 보시면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분을 맞으며" 그랬습니다. 그분은 예수그리스도이지만 내게 말하든 천사? 즉 스가랴에게 말하고 있었든 천사가 나가니까 또 다른 천사가 왔다, 여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그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 중간 역할을 바로 이 천사들이 동원되어서 하고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은 4절에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 소년을 아마도 이 환상을 보고있는 스가랴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스가랴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이제 환상의 내용이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그 환상을 그 소년에게 전달하기를, 달려가서 전달하라! 그랬어요. 4절에 달려가서 전달하라, 이것은 이 계시사건에 긴박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바야흐로 이루어질 사건이 매우 긴박한 것이다. 다가올 성전의 회복, 예루살렘 도성의 재건, 이것이 얼마나 긴박하게 앞에, 눈앞에 다가와 있는 사건인가를 보여주는 그런 숨가쁜 계시 사건의 긴박성을 여기서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세번째 환상은 그 시연이 세가지 단계로 되어있습니다. 이 환상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것은 세 단계로 되어있습니다. 세가지 스테이지로 되어있습니다.

 

첫번째는 예루살렘 의 확장입니다. 예루살렘의 확장, 그것이 21절부터5절 사이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의 확장의 비전, 그것이 첫번째 단계입니다.

 

, 4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24절 다같이 시작,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 자 예루살렘이 어떻게 된다구요? 사람이 거하리니, 황폐했던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조금 거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아진다.

 

사람도 많아지고 육축도 많아진다. 이것은 그 번영의 모습이죠. 이 도성 이 시티(city), 이 도시가 다시 번영하는 모습을 사람이 많아지고 또 육축이 많아진다 그랬습니다. 사람도 많아지고 육축도 많아진다.

 

그러면 많아지는데,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까 그 다음에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뭐에요?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이 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성벽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 그래서 성벽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예루살렘 도성이 회복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확장될 것이다 그 확장의 비전이에요.

 

그 모든 도시의 역사라는 것이 그 도시가 번영하게 되면 그런 역사를 걷게 되죠? 그 도시의 사람들이 많아져요. 그러면 어떻게요? 도시 바깥으로 나갑니다. 그러면 교회가 또 새로운 한 촌락을 만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도시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서울에 사람이 많으니까 다 어디로 갔어요? 강남으로 갔습니다. 자 강남에 사람들이 많아지고 번영 되니까 어디로 왔습니까? 분당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분당도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어디로 왔습니까? 드디어 수지맞는 수지로 왔습니다. 이게 바로 도시의 역사에요. 자꾸만 많아지는 거에요.

 

예루살렘의 확장과 번영을 예언한 것입니다. 동시에 아~ 그런데 이제 마지막에 그 번영의 상태가 얼마나 그 치열한 번영이냐 하면 마치 성곽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 성곽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을 것이다. 이 말을 딱 하니까 고대인들에게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이 생기느냐 하면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곽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성곽이 없으면 큰일나요. 왜냐하면 이 성곽이 바로 뭐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니 고대 모든 삶을 살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안전의 표상이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벽이 없어지면 큰일 납니다. 옛날에는 그 성이 바로 그들을 지키는 안전의 상징이다. 그 안전의 심볼이라고 우리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곽 없어지면 어떡하나? 성곽 없어진다고 그러니까 성곽 없어지면 어떡하나 질문을 할 사람들을 위해서 그 다음에 메시지가 계속 됩니다.

 

 

 

5, 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 성곽이 없어진다 그렇게 사람이 많아져서 성곽 바깥으로 막 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즉각적인 반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보호할 것인가?

 

, 하나님의 대답은 뭐에요? 하나님의 대답은? 누가 우리를 보호할 것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내가!, 이게 하나님의 대답이에요 내가!

 

그래서 이 5절에서 강조된 단어가 내가 라는 단어입니다. 이 내가 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두번씩 강조되어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한번 나오지만 본래는 두번이에요. 내가 불 성곽이 되어주리라! 또 그 가운데서 내가 영광이 되어주리라! 영어로 I will be, 내가 무엇 무엇이 되어준다, 첫째로 무어라 그랬어요?

 

내가 불 성곽이 되어준다! 두번째로 내가 영광이 되어준다!

 

하나님의 보호를 두가지 표현으로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불 성곽이 되어주리라! 성곽 없으면 어떡해요 하나님? 자 하나님의 대답이 뭐에요? 내가 불 성곽이 되어주리라!

 

자 이게 얼마나 놀라운 약속이에요? 내가 불 성곽이 되어주겠다, 물론 사람들이 견고한 성읍을 쌓는다는 것은 고대생활에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것이 안전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돌과 흙으로 사람들은 견고한 성읍을 짓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사람이, 인간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좋은 돌을 찾고 그리고 진흙을 잘 이겨서 견고한 성읍을 만든다고 해도 그 성읍은 역시 일시적이고 또 부분적인 보호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뭐에요? 내가 뭐가 된다? 불 성곽이 되어주리라! 아멘.

 

내가 불 성곽이 되어주리라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이에요? 불 성곽이 되어주신다고 언약하시는 하나님, 자 불로 된 성곽, 그 안에 살면 얼마나 안전할까요? 불로 된 성곽, 한번 상상해 보세요.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만 상상할 지어다!하하~~, 불로 된 성곽 안에 살아간다, 그 얼마나 희안할까요? 불로 된 성곽 안에 산다.

 

 

 

옛날 그 아람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막 벌벌 떨기 시작한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였든 엘리사의 사환이, 그렇죠? 엘리사의 사환이 막 벌벌 떨어요. 이 적군들이 지금 쳐들어오는데 어떡합니까 선생님, 너는 그렇게 두려우냐? 예 그렇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하죠? 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사환의 눈이 열렸어요. 뭐가 보입니까? 불 병거, 불말, 하나님이 보여주신 불말과 불병거가 주의 백성들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할렐루야!

 

하나님이 그 백성을 지켜주신다 이것처럼 안전한 것이 어디있어요?

 

,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던 하나님, 밤중, 캄캄한 밤이면 그 백성이 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적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야생 동물들이 그들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무엇으로 지켰습니까? 광야를 행진하는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으로? 불 기둥으로, 그 백성들을 지키시던 하나님,

 

자 오늘 본문에서는 그 시대 한시대의 주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성곽 없으면 어떻게 살아요? 주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불 성곽이 되어주리라!

 

그 시대 사람들은 성곽 걱정, 성벽 걱정을 했지만, 요즘은 무얼 걱정합니까? 하나님 돈 없으면 어떻게 살아요? 하하~~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내가 돈이 되어주리라! 할렐루야, 하하~~ 그게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내가 불 성곽이 되어주리라!

 

 

 

미국 사람들이 옛날 신앙이 좋았을 때 초기 청교도신앙, Puritan의 신앙이 있었을 때 그들은 심지어 돈을 만들면서 이 돈에다가 미국 돈 달라에다가 무어라고 써놓았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믿는다. in God we trust.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돈은 쓰지만 우리가 돈을 믿고 살지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의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없어지자 돈을 쓰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돌기 시작했습니다.하하~~

 

우리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도 저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재미나는 얘기가 있는데 그 다윗의 역사 속에서, 다윗이 골리앗 하고 싸울 때 말이지요

 

, 객관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 싸움에 다윗은 승산이 없었습니다. 무장된 거장 골리앗, , 육체적으로도 다윗을 압도했던 그 사람, 또 아주 철저한 잘 만들어진 아주 거대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또 굉장한 무기를 들고 있었단 말이죠.

 

그러나 그 골리앗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 왜 그랬습니까 다윗이? 너는 너 갑옷 믿고 너 무기를 믿고 나에게로 나오지만 소년 다윗은 무어라고 외쳤습니까? 나는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아가노라! 그의 신뢰는 하나님에게 있었어요 할렐루야! 하나님을 믿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러나 이 다윗도 계속 인생을 살다가 어느날 비틀거리기 시작해요. , 그럴 수가 있어요.

 

신앙의 사람도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 사울에게, 사울왕에게 쫓겨서 도망 다니다가 그 다윗 왕의 일생의 에피소드에 보면은 아주 흥미로운 이런 사건 하나가 등장합니다.

 

사무엘상21장 찾아보세요. 사무엘상21장 사무엘상21장입니다. 이 시대적 배경은 사울 왕에게 다윗이 쫓겨서 여기저기 방황할 때의 역사였습니다. 사무엘상 21, 사무엘상218절에 보시면 도망가다가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 집에 왔습니다.

 

, 사무엘상218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사울의 군사가 자기를 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겁이 났어요 갑자기, 그래서 이 집에 혹시 칼이나 병기가 있습니까? 내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9"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바로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던 가지라 여기는 그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 도망가다가 쫓기다가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의 집에 왔는데 그런데 자기를 보호할 무기가 없었단 말이죠 그래서 무기 없습니까. 그러니까 하필 거기 뭐가 있었어요? 골리앗의 칼이 거기에 가 있는 거예요. 희안하게, 이것 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아! 그보다 더 좋은게 없습니다. 내게 주십시요. 자기가 죽였던 골리앗의 무기로 무장을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9, 사무엘상 2110절 다같이 시작,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장을 하고도 골리앗의 칼을 갖고도 다윗이 여전히 뭐에요? 두려워했어요. 두려워한 정도가 아니라 계속 읽어보시면 13절에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다윗이 뭘 어떻게 했습니까?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더라" 당당했던 옛날의 다윗, 골리앗 앞에서 조금도 두렵지 않았던 당당했던 옛날의 다윗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그렇게 겹겹히 무장을 하고도 벌벌 떨면서 미친척을 하면서 자기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모습으로 다윗이 전락해 버립니다.

 

 

 

, 무장한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객관적 삶의 조건을 자기가 갖추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자기 인생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안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인생의 모든 조건을 다 소유하고 있어도, 직장 좋고 돈 있고 건강하고 모든 것 다 소유하고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벌벌 떨면서 땅을 기어 다닐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이상이 없을 때 우리는 이 말씀 앞에 당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당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위대한 약속의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의 불 성곽이 되리라! 얼마나 위대한 약속이에요

 

자 거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내가 너희의 불 성곽이 되리라, 또 하나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영광이 되리라 이 말입니다. 내가 그 영광이 되리라!

 

밖으로는 네 성곽이 되어주겠고 또 안으로는 그 가운데서는 내가 너의 영광이 되어주리라! 보통 약속이 아니에요 내가 바깥으로는 너의 성곽이 되어주어서 너를 지킬 것이고, 안에서는 네 가운데서는 너의 영광이 되어주리라,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은 올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었어요, 구약에는.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후로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영광이 떠난다, 이 갑옷이라는 말, 어디서 들은 것 같잖아요? 이 갑옷? 그런게 있어요 구약에 보시면 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다, 이것이 제일 두려워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또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 성전이 지어지고 다시 봉헌되는 찬란한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면서 에스겔서에 보면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에스겔431절 한번 찾아보세요 에스겔431절입니다. 에스겔431절 말씀입니다. 자 에스겔431절에 보시면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예루살렘성 동쪽 문으로 데리고 가서 보여줍니다. 동쪽문에 도달하니까 어떤 일이 생겼느냐 하면 432,

 

자 에스겔 43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어요. 성전도 무너지고 하나님의 영광도 떠났습니다. 그러나 저 동편에서 뭐에요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다! 이 말입니다.영광이 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영광을 붙들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자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주께서 우리 안에 오실 때 주의 성령이 우리와 더불어 영원히 거하신다, 그리스도인 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특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저는 그 영광이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영광이 가리워질 수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마는 내가 범죄하면 더 이상 그 영광이 내게 역사하지 못하고 마치 그 영광이 없는 것처럼 부재하는 것처럼 그 영광에서 내 눈이 가리워지고 멀어진 채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내 눈을 떠서 아직도 나와 함께하시는 그 영광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지키신다,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내가 너의 불 성곽이 되어주며 내가 너의 영광이 되어주리라!

 

세번째 비젼에 있어서 첫번째 약속은 예루살렘의 환상이 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의 환상, 예루살렘의 재건과 확장의 환상이 였습니다.

 

 

 

두번째는 포로시대의 종말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 환상의 두번째 단계로서 포로시대 종말의 계시입니다. 포로시대가 끝난다 26절부터9절까지,

 

우선6절과 7절은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약속합니다. 포로 되었든 그들이 돌아온다 6,7,

 

자 먼저 6절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을 사방에 뭐같이 흩어지게 한다? 바람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흩어놓으셨어요. 흩어놓았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붙여진 역사적 별명가운데 하나가 디아스 포라이민족, 디아스 포라이민족, 흩어진 백성이다 흩어진 백성이다,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범죄가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했고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흩어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향을 잃어버리고 흩어진 백성이 되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람같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북방 땅에서, 뭐예요? 도망할지니라! 그들이 포로로 잡혀갔던 북방, 뭐 앗시리아나 바벨론, 여기서는 바벨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바벨론에서 도망갈지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왜요? 바벨론에 하나님의 진노가 오고있습니다. 바벨론에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망하라! 도망하여 나오라 이 말입니다. 거기서 도망하여 나오라, 이제는 바벨론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나 그 다음절 8절에서는 그 바벨론의 심판의 와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호될 것을 약속합니다. 주의 백성들을 바벨론의 심판의 와중에서 보호를 언약하시는 하나님, 어떻게 그 보호를 약속하시는가? 8절에 참 아름다운 약속이 있어요.

 

 

 

, 우리 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다, 자 그래서 너희를 끌어낸다, 돌아온다, 포로 된 자리에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그 과정에 있어서 내가 너희를 지켜준다

 

자 만약 너희를 해하는 자가 있다면 뭐를 해하는 것이다? 내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너희를 눈동자같이 지킨다 이 말입니다. 참 얼마나 아름다운 약속인지 몰라요. 내가 너희를 눈동자처럼 지킨다,

 

그 표현이 시편에 많이 나오죠?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소서, 본래 이 표현이 처음 나왔든 곳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32장이 이 표현의 오리지날 이에요 오리지날.

 

, 신명기 3210절입니다. 신명기 3210, 이 눈동자라는 표현의 오리지날, 신명기32장 신명기32장 찾아보세요.신명기3210절 아주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자 신명기32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아멘,

 

녜 얼마나 아름다운 약속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황무지에서 만나주신다 짐승이 부르짖고있는 광야에서 만나주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시고 그리고 어떻게요?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신다, 한번 눈동자 만져보세요.

 

그 얼마나 그 참 약하고 어리고 얼마나 소중한 부분입니까? 이게 어떻게 되면 큰일나죠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거에요.가장 민감하게 반응에서 보호 하도록 되어있는 거에요.우리가 위험을 감지하면 손이 제일 먼저 이쪽으로 가잖아요 녜 눈동자를 보호할려는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신다!

 

그렇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민감한 보호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

 

 

 

자 그러면서 9절에는 바벨론의 패망을 약속합니다. 바벨론의 패망입니다. 9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9절 다같이 시작,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손가락이에요. 하나님 손가락 하나 딱 까딱하니까 그 기세 등등하던 바벨론이 노략거리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손가락 한번 싹~ 들으시면 끝날 줄로 믿습니다 하하~~

 

, 우리를 패망 시키고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세력들이 바벨로니아의 세력들이 그렇게 물러갈 것이다. 한낮 구경거리처럼 전락하고 말 것이다. 대 바벨로니아의 제국도 그렇게 무너집니다. 로마제국도 그렇게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대적하던 일체의 모든 어두움의 세력들은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다 멸망하고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과 저를 지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포로시대의 종말을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이제 메시아시대의 도래를 약속합니다. 메시아시대의 도래의 비전, 그것이 10절부터13절까지, 메시야 시대의 도래,

 

자 이제 예루살렘은 재건되고 확장될 것입니다. 포로시대는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새 시대, 새 시대 메시야의 시대가 찾아올 것입니다. 메시야시대의 도래의 환상, 그것이10절부터 13절까지, 우선 메시야가 오신다! 메시야의 약속, 10절이 바로 메시야의 약속이에요.

 

다같이 읽겠습니다. 10절 다같이 시작,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 말씀을 붙들고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미 그 메시야는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다시 오실 것 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무어라고 했어요? 임하여! 단순히 그냥 하나님이 임하신다 이정도가 아니라 오셔서 어떻게요? 그 가운데 거할 것이다. 중요한 단어에요. "거한다" 내가 임하여 거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의 약속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약속을 찾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임마뉴엘의 하나님 우리는 그 주님을 믿습니다.

 

여기서 거하신다 거한다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샤칸이라는 말입니다 샤칸 샤칸.

 

그런데 장막을, 장막을 가리켜서 미슈칸 이라고 부릅니다 미슈칸.

 

우리가 요한복음 114절에 보시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똑같은 단어에요.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더라, 그렇습니다 그 영광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예수그리스도,육신을 입고오신 바로 그리스도, 메시야의 도래 메시야의 오심이 여기 약속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직도 성전은 지어지지 않고 버림받은 황폐한 도성에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셔서 너희들 가운데 거할 것이다! 메시야는 오실 것입니다. 메시야의 강림,

 

뿐만아니라 11절과12절에는 그와 동시에 이방인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방인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깜짝 놀랬을 거에요 이 약속을 듣고,

 

 

 

11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11절 시작,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화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녜 그날에, 이 위대한 날, 새로운 날, 새로운 날. 새롭게 밝아오는 역사의 날,

 

,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자민족 중심주의의 삶을 살던 대표적인 백성입니다. 자기 백성 밖에는 몰라요.

 

~그래서 유대교는 전도하지 않습니다. 유대교에는 전도가 없습니다 왜 없는 줄 아세요? 유대교는 유대백성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종교다, 전도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도 전도하지 않아요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전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민족 종교이기 때문에 전도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그렇게 읽는 사람들이 있어요.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인데 우리가 왜 읽나?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자 바로 이런 약속을 보세요 그날에, 이것이 구약이잖아요 지금, 신약이 아닙니다 구약인데 그날에, 무어라고 그랬습니까? 많은 나라가,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많은 나라들이 많은 나라들이 열방들이 어디에 속한다? 여호와께 속하고 그들이 뭐에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자 이방인들이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우리도 본래 뭐에요 뭐였습니까? 이방인들이에요. 우리 다 이방인들이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준에서 볼 때 우리는 철저한 이방인들이였어요.

 

우리는 단군자손,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군의 자손들이였어요.

 

어쩌다가 우리가 여호와를 찬양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을까요? 바로 이 약속 때문에, 이 구절의 약속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위대한 약속이에요. 그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뿐만아니라, 나는 뭐에요 너희들 가운데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을 알리라 할렐루야! 이것이 이방인의 시대의 도래를 약속하고 있는 위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선교하는 백성이 될려면 그래서 자민족 중심주의의 사고를 벗어나야 됩니다. 자민족 우월주의를 벗어나야 합니다.내 백성만 생각하는 것, 유대민족의 오해에요. 왜 선교합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 백성만 향한 관심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꼭 같이 일본을 사랑하시고 꼭 같이 파키스탄을 사랑하시고 방글라데시를 사랑하시고 아프리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을 우리의 관심으로 소유할 때 이 민족가운데 복음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처럼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 마지막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역에 하나님의 일 하심에 경외스러움에 대한 선포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우리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여기에서 이 성소에서 일어나심 이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요 하늘의 성소를 말하고 있는 거에요. 하늘의 성소, 다시 말하면 하늘의 성소에서 그분이 일어난다 그분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임하여 그분이 계획하신 놀라운 일을 시작하시기 직전이라는 말이죠 그 광경을 보여줍니다. 성소에서 일어나신다, 그러므로 모든 혈기 있는 자들이여, 이 혈기 있는 자들의 표현이란 것은 연약한 인생들에 대한 표현입니다.연약한 인생들이여 잠잠 하라 이 말 입니다. 잠잠 하라!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다 주께서 역사할 것이다.

 

자 그 당시 포로상태에서 돌아오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성전을 재건할 것인가? 많은 토론을 했어요. 토론을 했지만 아직도 성전은 지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토의만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그 시대 그런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잠잠 하라 잠잠할 지어다.주께서 일어나신다 주께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역사의 시간이 하나님의 액션의 시간이 가까워왔다. 잠잠 하라! 이 잠잠 하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지요?

 

홍해 앞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 모세를 향해서 막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매장할 때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와서 이 바다 앞에서 우리를 매장할려고 하느냐?

 

, 하나님의 메시지가 뭐에요? 너희는 가만히 서서 잠잠 하라 이 말이에요. 너희는 가만히 서서 내가 여호와 되심을 알지어다! 너희는 가만히 서라! 주께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도구에 불과해요.

 

주를 신뢰하는 것, 우리가 일하지도 않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것,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일은 주께서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셨어요? 이 성전을 재건하고 특별히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는 일에 쓰신 중요한 도구가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느헤미야지요, 느헤미야.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는 일에 있어서.

 

, 느헤미야 1장을 읽어보시면 느헤미야가 그 성을 쌓기 위해서 어떤 일을 제일 먼저 시작합니까? 느헤미야1장 전체내용이 바로 뭐에요? 기도에요. 기도, 기도입니다. 그는 기도로 일을 합니다. 많은 말이 하나님의 일을 성취시킬 수가 없어요. 느헤미야는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 황무한 예루살렘성을 내려다보면서 그 이스라엘 민족들의 안타까운 현실과 참상을 가슴에 끌어안고 주앞에 엎드립니다. 금식합니다.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쓰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쓰셔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나는 단지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감사하며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전개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쓰임을 받아요. 말만 무성한 사람들은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들, 조용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경륜과 주권을 신뢰하고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주의 영광을 나타낼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의 영광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성소에서 그분은 일어나십니다.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다음 환상에서 계속됩니다.

 

 

 

기도하십시다.

 

자 오늘 우리가 스가랴서의 세번째 환상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하시고 또 하나님

 

나라가운데 주 영광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시는 그 하나님, 동일하게 오늘의 황무한 역사 속에서 어

 

둠 속에서 우리가 때로는 좌절하고 아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조용히 당신의 계획을 설계 하

 

십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

 

님의 일을 하시고자 그분은 계획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어둠 속에서도 어떤 좌절 속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의 경륜과 그분의 계획을 믿습니다.

 

그 계획을 믿고 기도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들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써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합니다. 우리가정 회복시켜주시고 우리민족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놀라우신 주님 오 하나님 우리가운데 주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시며 주께서 우리의 은혜와 능력이신 것을 신뢰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아파할 때 우리가 좌절하고 무력한 자리에 주저앉았을 때 그때도 잠잠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운데 찾아오시고 또 우리가운데 당신의 영광을 베푸시며 우리를 붙들어 일으켜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우리가 바라봅니다. 성소에서 일어나 이땅에 가련하고 연약한 인생들을 굽어보시며 우리가운데 성령으로 임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주님을 붙들고 일어섭니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일어서 주를 찬양하며 보여주시는 그 미래를 향해서 걷겠습니다. 여호와의 환상과 하나님의 그 말씀을 붙들고 걸어갑니다 주님 이 시간 좌절하고 넘어졌든 자리에서 일어나 주를 붙들고 일어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도 주를 경배하고 다시 흩어져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샬롬 평강으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 /3:1-10/ 이동원목사

2014-12-05 17:02:56

 

오늘 3장에는 네번째 환상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네번째 환상의 내용을 일반적으로 말할 때,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이라 이렇게 말합니다마는 저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이라고 하는 것이라기 보다도 3장의 Title을 이렇게 붙이고 싶어요.

 

이것은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환상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환상이 주인이 궁극적으로 누가 나 물 좀 갖다 주셨으면 좋겠는데, 바뀌니까 물도 없어지고 뭐, 이상해요.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이 환상의 주인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속죄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제사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그 주인공들은 물론 제사장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되는 제사장을 가리켜서 우리가 대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 성경에 보시면 특별히 히브리서,

 

이 히브리서는 구약하고 신약을 접속하고 있는 Link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책이죠. 이 히브리서 414절 말씀에 보시면 이것은 히브리서 414절 한 구절에만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 우리의 큰~ 대제사장. 다시 말하자면 대제사장 앞에다가 수식어가 하나 더 붙어요. 그 수식어가 바로 뭡니까? 큰 대제사장. 영어에 보면 The Great High Priest. 보통 대제사장을 high Priest 인데 그 앞에다가 Great라는 단어가 더 붙습니다.

 

큰 위대하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구약성경의,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 일반적으로 구별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그분을 위대하신 대 제사장 혹은 큰 대제사장이라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그 주인공은 여호수아라는 인물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러 사람이 있어요. 여호수아를 한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제사장 여호수아도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그 여호수아 말고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바벨로니아에서 포로되었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귀환하게 되었을 때,

 

그 스룹바벨이라는 지도자 아래에서 약 5만명에 가까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온의 땅으로 돌아 옵니다. 이 돌아오는 행렬 속에는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가랴가 활동하고 있었던 그 당시, 그 시대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 오늘 31절에 보시면, , 스가랴 3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그랬습니다.

 

여호수아를 가리켜서 대제사장 여호수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시면요,

 

대제사장 여호수아 말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이 한 분이 본문에 그림자처럼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어디 앞에 서 있다고 그랬어요.

 

여호수아의, 여호와의 사자앞에 있다. 사자 앞에 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어느 편에 있을까요? 뒤에 있어요. 뒤에. 그림자처럼 뒤에 있는 바로 그 분. 여호와의 사자. , 이 스가랴서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매우 독특한 한 분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 분이 누굴까요?

 

예수님이예요. 성삼위 하나님 가운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가운데 제 2위에 해당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종종 구약 시대에서 어떤 경우에는 천사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천사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그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사자. The angel , The angel of The Lord. 주님의 독특한 그 천사의 역할을 했던 분.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뒤에 서있는 걸로 되있어요. 그림자처럼 서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분이 바로 누굴까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여호수아는 어떤 의미로 나타났을까요? 제사장인데 제사장의 책임은 물론 백성들의 책임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환상 속에 나타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시대를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을 대표하는 존재가 이 대 제사장 여호수아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 그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그 분의 역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그 걸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여호수아라는 제사장과의 관계에 있어서

 

, 여호와의 사자이신 그 분이 하고 있는 역할,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하고 계시는 역할을 상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되겠어요. 어떤 역할을 하실까?

 

네가지 역할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첫째로는 그리스도의 변호하심. 우리를 위해서 변호하세요. 그것이 1절과 2절이고, 둘째는 우리를 용서하심, 우리 죄를 사하심. 그것이 3절과 4절입니다.

 

셋번째는 5절부터 7절까지 우리를 소명하심. 그리스도의 소명. 그리고 8절부터 10절까지는 우리를 구원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스도의 변호, 그리스도의 용서. 그리스도의 소명. 그리스도의 구원,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오늘 본문에서 다룰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변호입니다. 31절과 2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31절과 2절 다같이 시작.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 이것을 보면 사탄이 또한 출현하는데요, 사탄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대 제사장 여호수아의 우편에 섰다 그랬습니다. 우편에 서 있어야 할 분은 주님이시지만은 마귀가 아마 주님의 자리를 점령하고 자기가 마치 그리스도인 것처럼 과장하면서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존재로 마귀가 사단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단의 역할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것. 그래서 사탄을 대적자, 적대자,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역할을 해요. 대적하면서 참소합니다. 대적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참소예요.

 

마귀의 뜻이 참소라 그랬죠. 참소.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발하고 참소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한다 그것은 그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합니다.

 

우리가 사단이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한다고 말할 때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들어나는 인상적인 광경 하나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무슨 사건이 생각나십니까? . 맞습니다. 여러분이 욥기1장과 2장에 보시면 사단이 하나님의 보좌앞에 와서 욥을 참소하고 있죠. 하나님의 백성인 욥을 참소합니다.

 

아주 제가 의인인 것 같고 열심히 섬기는 것 같지마는 팔자가 좋아서 그래요. 하나님. 저 좋은 팔자 한번 뺏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형편없이 하나님을 욕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던 이 사단의 역할은 지금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발하고 참소하는 그 기능을 계속해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니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단의 참소의 기능은 더 해 질 것입니다. , 우리가 요한 계시록 1210절을 한번 찾아 보세요.

 

요한 계시록 1210절입니다. 요한계시록 1210절입니다. 요한계시록 1210절입니다. 조금 배가 고프지 않으십니까? 그러네요. 가만히 보니까 그래서 이런 소망이 생겼어요. 설교가 전보다 훨씬 더 짧아질 것이다. 식사시간에는 소망 중에서 진행이 될 것이다. 별로 감동이 안되시는 것 같으세요. 그만 두십시오.

 

요한계시록 1210절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 1210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 사단이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있는 당하기 시작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사탄 마귀를 어떤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언제 참소한다고 그랬어요. 밤낮으로 참소한다. 사단이 밤낮으로 참소해요. 우리는 사단의 이 참소의 역할을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 다시 스가랴 3장으로 돌아오시면 31절에는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2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탄을 향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을 오히려 책망하세요. 이 사단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단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낮추고 우리를 실망하게 만들고 좌절시키고,

 

신앙에서 떠나게 하려는 사단의 이 끊임없는 참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주앞에 설수가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과 은혜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역할이예요. 사단이 우리를 참소할 때 사단의 역할이 일종의 검사 역할과 비슷합니다. 요즘 검사님들이 고생 많이 합니다만은 검사가 참소해요. 고발합니다. 일단 고발을하면 그 옆에 또한 누가 있어요.

 

변호사가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변호를 합니다. , 우리를 변호하는 자가 누굴까요? ,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역할이죠. , 이 역할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장면이 아마, 요한일서 21절 모습일거예요. 한번 다 찾아 보세요. 요한 일서 21절입니다. 요한일서 21. 요한일서 21절의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일서 21, 다 같이. 시작.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 우리를 대언해 주시는 분이 있다 그 분이 바로 누구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 여기서 대언자라는 단어를 가장 실감나는 현대적인 표현으로 다시 바꾼다면 뭐라고 바꿀수가 있을까요.

 

변호사가 있으니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는 분이 있으니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그랬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참소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 마귀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참소가 이루어지면 나도 알아요.

 

막 자신을 자학하게 되고 신앙에서 떠나고 싶고, 이것은 마귀의 참소의 결과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의 보좌를 향해서 나올 수가 있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의 변호 때문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변호를 우리가 경험할 때 비로소 우리는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사단이 우리를 대적하지만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를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사망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그 아무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는 줄을 믿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변호예요. 그러면서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32절에 보시면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은 나의 택한 자다. 시온은 나의 택한 자다. 모든 시대를 털어서 통 털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은 자신의 시온처럼 간주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해요. 이는 불에서 꺼낸 뭐라 그랬습니까?. 그슬린 나무. 이게 우리들의 모습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따라서 하십시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이 표현을 아주 즐겨 사용했던 사람이 요한 웨슬리예요.

 

요한 웨슬리 그는 간증할 때마다 "나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다"라는 이런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요한 웨슬리 생애 가운데 그가 어렸을 때 6살 이었을 때 그 교회 목사관 비슷한데서 그가 잠을 자다가 화재가 일어 났습니다.

 

불이 났습니다. 지붕이 화재로 말미암아, 가라앉기 직전에 이웃집에 살던 사람이 뛰어들어 극적으로 어린 요한 웨슬리를 끄집어 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상기하면서 웨슬리는 한 평생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때 정말 죽어어야 한 존재인데 주께서 나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처럼 살리셨고,

 

그리고 때가 찬 시각 마침내 나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하셔서 하나님은 나를 쓰시고 있다. 그랬습니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살려주신 당신의 자녀를 주께서 포기하실수가 있겠습니까?

 

사단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변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 때문에 사단의 정죄와 참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몫의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변호.

 

두번째는 3절과 4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용서하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심에 대한 증언이 기록됩니다.

 

환상으로 나타나있어요. 이것이 3절과 4절이 같이 읽어요. 시작.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 여호수아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어요. 더러운 옷을. , 제사장 여호수아는 누구를 대표한다고 그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해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은 본래, 우리는 본래 무슨 옷을 입고 있던 자에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던 자예요.

 

여호수아가 입고 있었던 더러운 옷. 그것은 바로 여러분과 나의 모습입니다. 더 원색적으로 말할까요. 여러분과 저의 꼬라지 이예요. ,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었어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근데 이 환상이 보여주고 끝났다면 이 더러운 옷을 입고 계속해서 서 있는 여호수아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실망할까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니님께서 그에게 이런 선언을 하십니다. 내 죄는 사하여 졌다. 선언을 하세요. 그리고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힌다. 더러운 옷 대신에 우리에게 무슨 옷이 입혀지십니까? 아름다운 옷이 입혀집니다

 

. 이것이 범죄했던 우리들이 주께서 우리들을 받아 주실 때 예수께서 우리들을 받아 주실 때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의에 옷을 입는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인 것을 보시길 바랍니다.

 

, 이사야 646절에 보시면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의 , 또 인간이 자랑하고 있는 의에 정체를 가리켜서 이사야 64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는 마치 다 더러운 옷과 같으나"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근데 이 더러운 옷이라는 번역은 사실은 아주 얌전한 번역에 속합니다. 본래의 뜻은 더러운 걸레. 더러운 걸레와 같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 본래의 모습

 

.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러분 다 재구 앉아 계시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다 무슨 옷이라고요. 누더기를 입고 있어요. 걸레인 누더기를 입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들의 진상이었어요. 우리들의 진상.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환상으로 계속되었더라면 그것은 비극적인 모습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죄가 사하여 진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과 동시에 그 다음에 아름다운 옷이 입혀진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사실이예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 이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사단의 참소는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예요. 마귀의 참소는 결국은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런 얘기를 들으셨을 거예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예요. 저 유면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생애 가운데 일어났던 일입니다. 1900, 1990,1251년인가?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그 해, 한참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 마틴 루터가 마음속에 어느 날 깊은 고통을 안게 되었습니다. 내가 과연 이런 종교 개혁을 할 자격이 있나, 개혁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그런 아픔과 고통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고민을 하다가 잠들었어요. 마틴 루터가 잠들었어요. 근데 그 꿈 가운데서 마귀가 나타나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쫙 루터가 지금까지 범했던 죄의 목록들을 쭉 쓰는 것예요. 하나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는 그렇게 주 앞에 범죄한 자였습니다. 이 마귀가 보여주는 루터 자신이 보여 주는 루터 자신의 죄상 앞에서 루터는 꿈이지만 고개를 들지 못하고 떨구고 있었습니다

 

.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너는 이 종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귀가 회심의 미소를 흘리던 순간 꿈속이지만 갑자기 루터의 머리 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말씀이 있었어요. 그가 평소에 외워 두었던 말씀이예요. 그가 붙들고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뭐냐하면 요한 일서 17절 말씀이었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너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이 갑자기 생각이 나는 것이예요. 그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사탄을 향해서 마구 소리치는 거예요. , 지적은 맞다. 내가 그런 범죄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믿는 하나님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이 모든 죄에서 나를 속양했느니라. 그리고 옆에 있던 잉크병을 들어서 마귀를 향해서 집어 던졌어요. 잉크병이 벽에 가서 맞으면서 잠을 번쩍 깼습니다. The Waterful clock Castle. 이라는 유명한 성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깨어나 보니까 잉크병 자국이 벽을 꿰 뚫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마음에 큰 자유를 얻었습니다. 주 앞에 도저히 설 수 없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던 우리의 정체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 나올 때, 주님 앞에 나올 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그 모든 죄에서 속양하여, 다시 주앞에 당당히 세워 주시는 은혜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 값을 사하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선포에 바로 그 환상인 것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는 그리스도의 소명입니다. 35절부터 7절까지 그리스도의 소명입니다. 35절부터 7절까지 그리스도의 소명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실제로 주인공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지만 그림자처럼 이 본문에 계속 나타나고 있는 분이 누구예요. 여호와의 사자. 바로 그 분이 누구라 그랬어요. 예수 이십니다. 이제 어떤 역할을 하나 보세요. 우선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그 정한 그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매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그 정한 관을 관,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 출애굽기 28장을 좀 자세히 가서 읽어보시면 그 제사장이 아론 제사장이 취임할 때 반드시 머리에 관을 씁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되었다 이말이예요. 아마도 대제사장 그 당시 여호수아도 이런 말이 이런 생각이 있었을 거예요.

 

내가 정말 백성들을 대신해서 속죄제의 제사를 드릴 제사장의 자격이 있나? 나도 부족하고 더럽혀진 사람인데 저도 목사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저를 지배할 때가 너무나 많아요. 내 부족을 느낄 때마다 내 연약함을 느낄 때마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자격이 있어서 선 것이 아니예요. 은혜로 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신뢰한 것으로 서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주님은 그의 죄가 속양되었다는 선포.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뭘 해주십니까?

 

이제는 관을 씌워 주세요. 정결한 관을 씌워 주십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너는 제사장 자격이 있다. 이말이야 너는. 제사장 자격이 있다. 제사장 역할을 하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이 제사장은 비록 대제사장에만 주어진 Title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이 제사장은 바로 누굽니까? . 제사장이 누구예요

 

. 목사가 제사장이죠. 제사장이 누굽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제사장이예요 이것이 만인 제사장 주의예요. 근데 이게 구약에서부터 벌써 나와요. 신약에만 나온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특수한 제사장이 있었지만 제사장의 속죄의 일은 모든 백성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을 때,

 

그 백성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그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96절을 찾아 보세요 출애굽기 196, 출애굽기 196절입니다. , 다 같이 읽습니다. 출애굽기 196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뭐가 된다 그랬어요? 제사장 나라가 된다. 그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나오고 그리고 이웃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고 말씀했어요. 신약에 오면 이 제사장 특권이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는 다 왕 같은 족속이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제사장이라고 말씀십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 우리가 바로 그 분에게 선택함을 받아

 

그 분앞에 언제든지 나갈 수가 있고, 또 그 분의 말씀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나갈 수가 있는 나를 제사장으로 삼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바로 그 제사장이예요. 그 제사장의 소명을 확인해 주시는 것이예요. 확인해 보시면 본문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다시 스가랴 3장으로 돌아오시면 7절에 중간 부분에 이렇게 말씀했어요.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 신실하게 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쓰실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제사장으로 선택함을 받아서도 계속 범죄하고 주 앞에서 계속 불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쓰실 수 없습니다. 내가 그의 말씀을 지킴에 삶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면, 그 약속이예요.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다.

 

내 집을 다스릴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제사장으로 주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된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은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소명이예요. 우리를 향한 소명. 그의 집에서 섬기고 그의 뜰을 지키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제사장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38절부터 10절까지 .38절부터 10절까지인 그리스도의 구원이 다시 약속됩니다. 8절부터 10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대 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스가랴의 환상 속에서 이 모든 환상의 궁극적인 주인이신 곧 바로 역사 속에 오실 메시아의 모습이 약속됩니다. 여기서 메시아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몇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나요. 3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나시는데 장차 오실 메시아가 3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

우선 8절에 보시면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동료 제사장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그 다음에 나와요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여기에서 우선 메시아의 약속, 첫번째로 메시아를 뭐라 부르냐면 내 종. 나의 종 My Servant. 나의 종이라 그랬어요. 메시아는 나의 종이다.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Mission을 감당하기 위한 나의 종이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메시아의 이미지를 뭐라 불렀습니까? 순이라 그랬습니다. . . 순은 가지란 말이예요. 가지. 가지 순 자. Branch .가지. 순이다 말입니다. . 메시아의 이미지가 가지로 약속된 것은 성경에 자주 나와요.

 

이사야에서도 많이 나오고요. 예레미야에도 등장합니다. 예컨대 예레미야 235절에 한번 찾아보세요. 예레미야 235.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예레미야 235절입니다

 

. 예레미야 235절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235.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이게 메시아의 약속인데 다윗에게서 한 가지가 나온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가지와 같은 새로운 생명의 싹이 나온다. 그는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할 것이고,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다. 누굽니까? 예수님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예요. 그는 나의 종, 그리고 나의 순, 나의 순, , 순의 이미지는 부드럽죠. 새로운 생명의 싹으로 오신 부드러운신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의 또 하나의 이미지. 메시아의 또 하나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다시 스가랴 3장으로 돌아 오셔서 그 다음절에 보시면 9절에 보시면 뭐라 그랬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이번에는 뭐라 그랬어요. . 메시아의 이미지가 이번에는 뭘로 나타납니까?

 

돌로 나타납니다. 순하고 돌은 대조적이죠. 순은 순하고 돌은 돌이고 네, 돌은 견고한 순하기만한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은 견고한 메시아가 되십니다. 이 돌 위에 돌, 보배로운 기초 돌 위에 백성의 공동체가 세워질 것입니다.

 

모퉁이 돌. Corner stone. 신약에 가시면 이 보배로운 돌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위에 하나님의 공동체가 세워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되시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미지는 약속을 이렇게 나타납니다. , 스가랴 310절 다같이 읽습니다.

 

310.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서로 초대하리라 " 어떤 이미지가 느껴요. 여러분.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서로 왔다 갔다하는 모습 어떤 이미지예요.

 

. 기분 나빠요. 기분좋은 이미지예요. 기분 좋죠 평화의 이미지 예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평화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상징할 때 무화과 , 포도나무 아래서 서로가 서로를 초대하며 왔다 갔다 . 하나님의 샬롬! 평안이 이루어진 모습. 메시아가 오실 때 하나님의 종이신 메시아,

 

생명의 가지 순처럼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실 견고한 반석이신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시게 될 때,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참된 평안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주님이 우리의 소망이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

 

 

 

 

 

 

순금등대와 감람나무의 환상 /4:1-14/ 이동원목사

2014-12-05 17:09:40

 

, 오늘 스가랴서 4장 공부가 되겠습니다. 스가랴서 4장을 함께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스가랴 4장의 Title 제목을 붙일 수 있다면, 순금 등대와 두 감람 나무의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순금 등대와 두 감람 나무의 환상.

 

중국 내지 선교의 위대한 개척자인 허드슨 테일러 . 처음에는 China Inland Mission, CIM 이라고 불리워졌읍니다마는 문화 혁명을 겪고 나서 일시 해체되었던 이 단체가 나중에는 OMF라는 단체로 다시 부활했죠. 지금도 아주 의욕적인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는 기구입니다. Overseas Missionary followship, OMF라는 단체로 불리워 지는데 본래 이 단체의 창설자는 허드슨 테일러입니다.

 

유명한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이제 선교를 위해서 도착하는 우리 신참 선교사, 자기 후배들이 도착할 때마다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선교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이런 말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분들은 먼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이란 말은 영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영성. 이것은 세속성과 차별되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세상에서 일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배울 필요가 있어요. 어떤 경우에는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단체나 한 공동체를 경영하고 움직이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배워야할 많은 그 리더쉽의 그 원리와 철학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사역. 하나님의 일에는 세속적인 일의 방법과 분명히 다른 그 무엇이 있어요. 알파가 있습니다. 더하기 알파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가령 교회의 일을 하다 보면 이 세속적인 시각으로 판단할 때 이건 안되는 일이예요.

 

도무지 안돼요. 근데 되거든요. 돼요. 이런 일들을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저는 목회를 하면서 늘 경험하게 됩니다. 분명히 인간의 그 합리적인 이성적 판단, 그리고 상식적 그 계산에 의하면 도무지 안되는 일인데 나중에 보면 되었어요.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일을 감당할 때 되는 일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은 우리가 합리적인 인간의 판단과 이성적인 그 기초로 분석해 보면 이건 분명히 되는 일이예요. 안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다 되는 거예요. 근데 결과적으로 안돼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영성. 어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의 철학. 사역의 태도. 혹은 사역의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요한 주제는 스가랴서 전체의 주제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마는 성전 재건입니다. 성전 재건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우리는 성전재건 하나만 보면 안돼요. 이 성전 재건을 통해서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 지금 우리의 중요한 제일 과제는 성전 재건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지금도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또 보내시는 사역의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옳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그것이 다섯번째 환상입니다. 다섯번째 환상. 순금등대의 환상. 그리고 두 감람나무의 환상입니다. 이 순금 등대는 그 등대만 나오는 것이 아니죠.

 

, 1절과 2, 같이 읽겠습니다. 스가랴 41절과 2절을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먼저 본 것이 뭐냐? 네가 무엇을 보느냐?

 

, 환상을 봤습니다. 다섯번째 환상입니다. 스가랴서에 환상이 몇 개 나와요? 벌써 잊어 잡수셨습니까? , 스가랴서의 구조. 4가지 구조. 처음에 서론, 그 다음에 뭐예요. 8가지 환상. 그 다음엔 2가지 메시지. 그 다음에 2가지 예언. 혹은 2가지 신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8가지 환상중에 5번째 환상입니다.

 

그 환상의 초점은 여기 2절 보니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보니 순금등대가 있습니다. 순금으로 된 등대를 하나 봤어요.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 순금 등대를 내노라와 유사하다 생각하면 됩니다. 내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귀하게 여기는 어쩌면 의미에 있으면 민족적 상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가 있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을 방문하면 국회 앞에 큰 그 이스라엘 국회 앞에 내노라 가운데 큰 이 둥지가 있고 그 다음에 이렇게 여섯가지 가지.. 모두 합해서 7개로 된 어떤 내노라는 8개로 된 것도 있어요. 그러나 이건 금촛대입니다. 금촛대, 순금등대가 있고, 그 꼭대기 위에는 주발 같은 것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좀 보통 내노라와 다른 것 같에요. 위에 주발이 있다고 그랬어요. 이 주발은 아마 기름을 붓는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기름을.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일곱 등잔, 입곱 등잔으로 그 기름이 갑니다. ,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다

 

그랬는데, 좀 복잡한대 그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인지 정확하게 상상하기 좀 어렵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위에 그 주발이 있고, 거기에 기름을 부어 놓으면 일곱개의 파이프, 일곱관이라는 것은 일종의 파이프입니다.

 

파이프 라인을 통해서 일곱 그 촛대에 불이 밝혀 주는 모습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등대는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메시아 되신 그리스도.

이 그리스도와 연결된 그 가지. 일곱개의 가지. 위에 있는 일곱 촛대.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 언약의 백성의 공동체를 상징했습니다만 먼 안목으로 볼 때 이것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계시록 120절을 한번 보세요. 요한 계시록 120., 요한 계시록 120절에 보시면 사도 요한도 환상의 날을 봤어요.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환상. 그 계시들을 펼쳐나가면서 1장에서 보면 그가 환상을 보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뭘 봤느냐? 12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그랬습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언약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가 있고,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교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 가운데도 교회의 역할 뭐겠어요. 왜 이런 등잔, 등대가 등장했을까요.

 

우리 찬송가 가운데에 보면 하나님의 진리 등대 라는 찬송이 있죠. 하나님의 우리가 그 등대가 되어 주의 빛을 비추세.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 길이 빛나니 우리들도 뭐가 되어 등대되어 주의 사랑 비추세. 그 빛을 비추는 등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빛은 누구예요. 진정한 빛은 예수님이 빛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러나 그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그리스도에게 붙어버린 그리스도에게 소속한 우리도 이제 그의 빛을 드러내야 할 책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마치 등대가 있고 등대와 연결된 일곱 촛대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우리들은 이제 그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 먼저 그것을 봤어요.

 

그런데 그것만 본 것이 아니라 3절에 보시면 또 본 것이 있습니다. 순금등대와 함께 뭘 봤습니까? 3절 읽겠습니다. 43절 시작. "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그 옆에 또 두 감람나무가 있었어요. 이 감람나무에서 바로 기름을 짜냅니다.

 

그것을 아마 주발에 부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지속적으로 빛을 발해야 되고, 지속적인 빛을 발할 수 있는 기름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면서, 그 무한한 공급의 원천을 상징하고 있다라고 우리가 말할 수가 있습니다.

 

, 이 초점은 뭐냐? 이것들은 왜 등장했느냐?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공동체가 재건되어 제대로 그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역할을 소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성전, , 성전 건축된다 그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건물만 지어진다.

 

건물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죠.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어떤 사역을 하느냐?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사역의 기초로써의 성전 재건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시급하고도 긴박한 과제였습니다. 어떻게 이 성전 재건이 이루어 질것인가? 그 질문을 바꿔 말하면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들이 성전 재건을 하던 방식에 있어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받들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다. 성령으로 하는 거예요

 

. 하나님의 일은 성령님을 의존하고 하는 일인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것을 보여 줘요. , 이 성전이 어떻게 세워지고 재건 될 것이냐? , 이 부분에서 우리가 잘 아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이게 어디 있었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오늘 이걸 보면서 아, 여기 있었구나. 이렇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보고 또 보니까 여기 있구나, 이상한 연상은 하지 마십시오. , 6절 한번 다 같이 읽어봐요.

 

6절 다같이 시작.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죠. 그게 거기 있었어요. 이 말씀이 바로 여기에 있었어요. 이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무엇으로 나의 신으로 된다. , 아직 성전 재건되지 않았는데, 그 이전에 바로 그들이 포로되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자 마자,

 

성전 재건을 시도 했어요. 왜 안 했겠어요. 피 맺힌 한과도 같은 성전의 재건.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을 예비하며 새 힘을 얻고, 주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리라. 흩어졌던 디아스포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한 처럼 그들의 마음속에 사무친 그들의 염원, 바램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시도했지만, 잘 안되었어요, , 그것이 여러분이 에스라서 특별히 3장과 4장을 읽어보시면, 그 배경이 쭉 나와 있습니다.

 

아마 에스라 3장을 찾아 보세요. 에스라. 3. 우리가 8절부터 보면 그 시작이 되는데 자, 에스라 38,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 온 자들이" 뭐를 시작하고 역사를 시작하고, 일단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방해가 일어납니다.

 

41. 41. 에스라 41절입니다. 같이 읽어요. 41. 시작.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듣고 어떻게 하느냐, 방해를 시작해요.

 

4, 44.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그것을 참소합니다. 그 당시의 전 세계의 패자였던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 왕께 아무래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모반하려는 시도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라는 무모한 고발 참소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이 내려집니까? 421. 에스라 42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에스라 421. 다 같이 읽어요. 시작. "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그래서 실패로 돌아갔어요. 실패로 돌아갑니다.

 

,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성전 재건을 바로 돌아오자 마자 그것이 이루어 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때가 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때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하나는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역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영적 준비가 아직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또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님이 일을 하셨다. 이것을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우쳐 알 수 있도록

 

그리고 너무나 쉽게 그 일을 성취하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가능성이 많습니까? 모든 일이 어떤 일도 너무 쉽게 일이 풀려가면 우리는 어떻게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많습니까? 내가 했다.

 

이거 뭐 별거 아니네! 뭐 해보니까 쉬우네. 내가 했다. 내가 했다. 그러나 안될 것 같아서 막 기도하니까 되요. 그러니까 뭐예요. 그러면 결론이 어떻게 내립니까? 주님이 도우셨다. 저도 우리 분당에서 일루 이사 오고, 뭐 건축하는 과정에 있어서 하루에도 열번씩 나는 생각에 하나님이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드실까?

 

그냥 팍 쏟아 부어주시면 간단한대. 그 필요한 것만 주시고, 또 기도 시키시고 그러면 되고, 되고, 되고, 되고, 안되지는 않아요. 되요.그러나 그냥 되지는 않더라구요. 기도하구나서 꼭 되더라구요. 우리가 결론을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

 

우리가 이것으로 확신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체험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마찬가지예요. 어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 구약 성경에 이런 재미나는 말씀도 있어요. 신명기 8장에 보시면 한번 찾아보세요. 신명기 8. ,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꿈의 가나안,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요.

 

, 가나안 땅. 어떤 땅이에요. 어떻게 약속된 땅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milkhoney가 뚝뚝 떨어지는 땅. 거기서 milkhoney가 막 쏟아져 나오면, , 여기서 그냥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누리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 가보니까 막 milkhoney가 뚝뚝 떨어지는 것만은 아니였습니다.

 

, 8장 신명기 8. 물론 약속은 이렇게 되었어요. 12절에 보시면 11절부터 보겠어요. 신명기 811절부터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일 주의할 것이 뭐예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게 되는 것. 또 하나님을 잊어 버리는 것. 그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주의하라.

 

12"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그 때 위기가 있어요. 모든 것이 잘 되고, 너무 너무 잘 될 때, 어떤 위기가 올까요.

 

그 다음 절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너무 너무 축복이 쏟아져 잘 되면 뭐해요. , 뭐 이거 내가 괜찮구나. 내 지혜대로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하니까 그냥 모든 것이 쫘~~, 풀려 가더라.

 

너무 너무 일이 잘 되더라. 역시 내 지혜는 똑똑해. 역시 나는 Sharp. 역시 나는 굉장한 사람이야.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역시 내 대가리는 단단해. 대단하다.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를 과소, 과대 평가, 과대 평가 할 수가 있습니다.

 

, 여기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신명기 8. 아직도 신명기 8장이예요. 17, 18, 17절 한번 다 같이 읽어요. 17절 시작, "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너무 너무 쉽게 그냥 농사가 잘되고 일이 잘되면 우리가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내 능과 그 다음 뭐예요.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절 계속 읽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ㅇ

 

이루려 하심이니라" 내 능력과 내 손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이렇게 우리가 결론을 내릴까봐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면서 뭐예요. 너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누가 주었느나? 너에게 준 건강. 너의 지혜,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을 잊지 말아라. 이것이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쉽게, 쉽게 인생이 풀려가지 않고,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종종 장애물을 경험해요. 역경을 경험해요. 힘듬을 경험하고 시련을 경험합니다. 그 시련 앞에서 우린 어떻게 합니까? 기도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도와 주셔야 되요. 주님 정말 도와주셔야 돼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 했더니 그 역경이 극복되고, 일이 이루어지더라구요. 그러면 우리가 결론이 뭡니까? 결론이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다. 이것은 나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이는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내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무엇으로 나의 신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장에 이와 같은 환경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챤의 일생. 주의 백성들의 역사는 바로 나의 힘으로 이루어 가는 역사가 아니라, 성령으로 이루어 가는 역사 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성령님의 도우심. 성령님의 함께하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사역 펼쳐져 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요.

 

, 두번째는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다. 첫째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그 일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집니까. 누구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요?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지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다. 은총의 역사다. 47. 다 같이 읽겠습니다. 47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따라서 해보세요.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아주 멋있는 표현이예요. ,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산은 뭘 말하까요. 장애물을 말하는 거죠. 장애물. 지금 성전을 짓어야 할텐데, 그 앞에 너무 너무 장애물이 많은 거예요. 그러나 환상 속에서 이 외침이 들려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여러분, 여러분 앞의 인생의 길에 장애물이 놓일 때 시련이 놓여질 때,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때 우리가 외쳐야 할 말씀 뭘까요? 다 같이,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그러면서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네가 스룹바벨앞에서 이 스룹바벨은 지금 이 성전 재건을 지휘하고 있는 총 지도자죠. 총독입니다. 총독.총독. 2의 성전. 두번째 성전. 첫번째 성전은 무너졌고 자, 흩어져서 포로 생활하다 다시 돌아와서 짓는 이 두번째 성전을 제2의 성전이다. The Second Temple이다.

 

혹은 스룹바벨이 중심되어서 지었기 때문에, 이걸 스룹바벨성전이다.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 그런데 그 산이 스룹바벨 앞에서 뭐가 되리라. 그랬어요. 평지가 되리라. 산은 평지가 되리라. 여러분 오늘 이 귀한 약속하나 받아가지고 나가셔도 수지 맞으신 것입니다. 수지 주민 여러분 수지 맞으셨습니다.

 

,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 앞에서 뭐가 되리라. 평지가 되리라.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 머릿돌. 머릿돌은 언제 합니까? 언제. 두가지 처음에 할 수도 있고, 마지막에 할 수도 있어요. 이건 아마도 마지막에 건축을 다 끝내고 마지막에 놓은 머릿돌이 아닐까? 일이 다 끝났다 말이죠.

 

시작하고 이제 끝난거예요. 끝내면서 뭐해요. 끝내면서 뭐라 외쳤어요.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다시 말하면 뭐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산을 평지같이 만드시며, 마침내 이 모든 역사를 이루신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은총,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얼마나 복된 약속이예요. 아주 놀라운 약속이 여기 있어요.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어떤 장애물이 있었을까? 그 당시 장애물 몇가지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우선 페르시아의 제왕이었던 아닥사스다왕의 반대. 그 당시 전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던 아닥사스다왕이 이 일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거 큰일이죠. 이것이. 제일 큰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닥사스다왕이 허락을 한다고 할지라도 성전을 지을만한 실력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적인 실력이 없었다 능력이 없었다

 

. 실제로 그랬습니다. 별로 능력이 없었어요. 또 세번째로 거기다가 어떤 방해가 있었어요. 주변의 작은 부족 국가들이 반대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거기에 살던 사람들, 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와서 여기다가 자기들의 옛 나라를 다시 재건한다.

 

그들에게는 위협이죠. 그들에게는 손해입니다. 그 싸움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땅에 지금도 팔렌스타인, PLO와 이스라엘의 싸움. 팔렌스타인과의 싸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싸움이예요.

 

후세인이 그렇게 존경받는 이유가 뭐냐하면, 이 팔렌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잘 했기 때문에 그가 죽었던 이 평화를 위해서 노력했던 이 사람에 대한 세계적인 평가가 그 만큼 높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싸움이예요. , 9절 계속 읽겠습니다. 9, 9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 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의 지대를 놓았은 즉, 자 성전을 짓기 위한 또,

 

이 모든 역사를 시작하기 위한 기초를 처음에 놓았을 때, 스룹바벨이 처음에 놓았을 때 그것을 시작만 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손이 그것을 또한 어떻게 하신다. 마치리라. 여러분 하나님은 시작만 하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시작하셨다면 그 하나님은 끝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감동이 안되는 모양이네.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예요. 끝내주시는 하나님. 감상이 다 사라진 것 같애요. , 하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일을 시작만 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완성하신다. 마쳐주신다.

 

우리 신약에도 그 약속이 계속되죠. 빌립보서 16. 우리 안에 착한 일은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노라. 아노라 시작하신분이 마치신다 믿습니까?

 

알파이신 하나님. 오메가인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시작이신 하나님이 완성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분은 반드시 끝내주십니다. 옆에 분 쳐다보시면서 끝내주시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 반드시 완성시켜 주세요. 몇 년 만에 이 일이 이루어 졌냐면 4년 만에 이루어 졌어요. 4년만에 주전 520년 경에 시작이 되어서

 

다시 제차 성전 건축을 위한 역사가 다시 제차 시도가 되어갔고, 516년 만에 끝납니다. 4년 만에 끝냈어요. 그건 그 당시로 봐서는 굉장히 빨리 끝낸 것 입니다. 4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 10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0절 다 같이 시작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작은 일에나 그것은 스룹바벨의 처음에 성전을 짓기 위해서 돌 하나 갖다 놓고 시작할 때, 처음에는 얼마나 그것이 미미해 보여요. 이게 뭐 되겠느냐?

 

여기에서 무슨일이 시작되겠느냐? 얼마나 미미하고 작아보이는 일이예요.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더냐, 그러나 작은 돌하나 놓는 시작. 그 미미한 시작. 그 아무것도 같아 보이지 않은 적은 시작. 겸손한 겸비한 시작. 그 작은 시작, 허나 그 시작을 누가 보고 있었다고요.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일곱 눈. 왜 하나님의 눈을 일곱 눈이라 그랬을까? 하나님의 눈이 정말 일곱개 계시다는 말이 아니고. 일곱은 무슨 숫자예요. 완전함의 숫자. 하나님의 완전하신 눈.

 

그 분의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눈. 하나님의 눈이 자, 스룹바벨이 처음에 돌 하나 딱 놓을 때, 사람들이 다 비웃었을 거예요. 저게 뭐, 아니 심지어는 이를 시작하는 그들조차도 시작하면서도 과연 여기서 뭐가 될까. 시작하면서 뭐가 될까. 학개 23절 한번 보세요. , 스가랴와 학개는 동시대에 함께 일했던 선지자라 그랬죠.

 

학개 23. 학개를 찾는데 왜 이리 시간이 걸릴까. 그 앞에 있는데. 스가랴 바로 앞에. 학개 23. 자 학개 23.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 중에 남아 있느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그들 눈에도 뭐예요.

 

이게. 그들의 모든 시도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였어요. 옛날의 그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을 바라보았던 그들 여기서 무슨 다시 성전이 지어질까? 옛날의 영광을 기억했던 그들의 눈에 지금 그들의 새로운 시도는 보잘 것 없는 미미한 시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시도를 누가 보셨다는 것이 중요해요.

 

하나님이 보셨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다. 그러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것은 미미한 시작이 아니라 위대한 시작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실 뭐, 우리가 이 건물, 이 장소를 우리가 선택할까 말까 이런 생각만 가지고 저도 처음 이 동산에 올랐을 때, 기억이 아주 마음속에 새롭습니다. 처음에 와 보니까

 

여기 뭐 굉장해요. 여기다가 물러가라 뭐 괴상한 거 다 써붙이고, 빨간 줄로 그어놓고 뭐 유리창도 깨지고, , 여기서 뭐가 될까, 너무 너무 을씨년스럽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계속 하나님이 주실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나님이 주신다면 이 동산이 아름답게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동산이 되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와서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세상을 품은 그런 위대한 교회의 환상이 자꾸 머릿 속에 떠오르더라구요. 그리고 하나님은 아직도 일은 끝나지 않았어요. 계속되고 있는 우리들의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 일은 기어이 하나님이

 

시작하셨기에 완성하실 줄을 우리는 믿습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계획속에 시작되었다. 이 확신만 있으면 되요. 기도 가운데 여러분이 아시고 하나님이 이것을 주셨다. 그러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시작 하신이가 마치실 것 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놔두지 않아요. 하나님이 하신 일은 반드시 끝내주세요. 사람의 욕심. 사람의 생각으로 한 일이라면 그것은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동기를 살피는 것이예요. 내 동기. 하나님 내 욕심입니까? 하나님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 질것입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는 늘 중국에서 어려운 선교 사역을 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의 지원이 결코 결핍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의 지원이 결코 결핍할 수가 없다. 그것 믿고 재미나는 것은 허드슨 테일러는요,

 

아무에게도 도와달라고 부탁을 안했어요. 그 다음부터 이 허드슨 테일러를 통해서 독특한 선교 방법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Faith Mission이라고 부룹니다. 믿음의 선교. 이 믿음의 선교란 것이 뭐냐하면, OMF라는 선교회에 소속한 선교사는 지금도 선교할 때 어느 교회에 가서 뭐가 부족하니까 도와달라는 소리를 못하게 되있습니다.

 

OMF 선교사들은. 이게 허드슨 테일러의 전통이예요. 뭐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의 도와주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아신다. 기도만 하는 것이야 이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도 못하도록 되있어요

 

.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는 있지만 자기들의 입으로 뭘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돼있어요. 그렇지만 이 CIM 그리고 OMF의 전통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진행을 해요. 주님이 도와주신다.

 

주님이 도와주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의 지원이 결코 결핍한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 진 다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결론은 뭐 밖에 없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뭐예요. 벌써 잊어버렸네, 하나님의 뭐예요. 은혜, 은혜, 은총. 은총.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은혜의 뜻이 뭐예요. 은혜라는 것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자격이 없어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예요. 이 은혜라는 것이 종종 무슨 단어와의 대칭 개념으로 등장합니까?

 

은혜의 반대 개념.로마서를 연구하면 특별히 몰라요. 로마서 116절 찾아보세요. 로마서 116. 로마서 116. 다 같이 읽겠습니다. 로마서 116. 다 같이 시~~, 로마서 116. 시작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 하느니라"

 

여기서 은혜가 무슨 개념하고 대칭 개념이예요. 행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 말은 뭐예요. 우리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다. 그 말을 오해하지는 마세요. 우리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예요.

 

우리가 최선을 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최선을 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에 된 것은 아니예요. 그것은 누구 때문에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만약 그것이 순전히 우리의 행위로 된다면 하나님이 은혜라는 것이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할 수도 없었던 것.

 

그러나, 주께서 도와주시고 주께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이 끝났을 때, 우리의 간증은 이것입니다. 뭘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저는 크리스챤들이 평생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생, 인생 사는 것의 마지막에 늘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하지만 마지막에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어야 해요, 뭐예요.

 

내가 가만히 살아온 것이 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은혜라. 주님의 은혜. 은혜로 구원 받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예요. 믿습니까 여러분. 어떤 일을 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예요

 

.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은총의 역사다. 이게 47절부터 10절까지. 41절부터 6절까지는 누구의 역사에요. 성령의 역사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역사로 하는 것이다. 7절부터 10절까지 하나님의 일은 은총의 역사다. 은총의 역사다.

 

 

마지막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한 역사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한 역사다. 11절 이하. 14절까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셔요. 하나님이 사람들 통해서. 1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 11절 시작.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 나무는 무슨 뜻이니까하고" , 등대 옆에 있는 두개의 나무. 두 감람나무는 또 무슨 뜻입니까? 한국 교회 역사에는 아주 웃기는 Story가 있습니다.

 

한 때 이제 그 분이 돌아가셨고, 뭐 그 분을 따르던 세력이 다 와해되지마는 자기를 감람나무라고 하신 분이 있었죠. 박태선 장로께서 자기는 감람나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감람나무는 하나가 아니고 반드시 둘이거든요.

 

그러니 하나를 찾아야 되요, 또 하나 감람나무를. 그래서 박태선씨가 한번은 문선명씨를 찾아 갔대요. 당신이 그 나머지 감람나무가 되어달라고 또 문선명씨는 자기 나름대로 자존심, 존심이 있으니까,

 

둘 중의 하나 노릇하기 싫으니까 나는 아니다 그랬대요. 그래서 혼란이 생겼어요. 두개의 감람나무. 감람나무의 정체가 뭐냐. , 우선 이 감람나무의 정체. 두 감람나무. 본문에서 두 감람나무는 뭐냐?

 

이거 성경 모르고 성경을 피상적으로만 읽는 사람들. 나는 항상 늘 희한한 것이 그런 사람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요. 따라가는 사람들이, , 어떻게 따라가는지, 난 참. 여기서 두 감람나무가 뭐냐하면요 우선 역사적으로 그 당시의 두 감람나무는 이 성전을 재건하는데 쓰임을 받게될 두명의 지도자를 말하는 거예요. 한 사람은 누구예요. 스룹바벨이예요.

 

스룹바벨. 정치 지도자. 또 한 사람은 그 정체가 이미 나왔습니다. 지나간 시간 공부한 3장에서 환상의 주인공은 누구였습니까? 대 제사장 여호수아. 제사장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종교 지도자죠.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또 지금 여기 나오는 지도자는 누굽니까?

 

스룹바벨은 무슨 지도자예요? 정치 지도자입니다. 이 사람은 정치 지도자. 이 사람은 이 지역을 관할하는 총독이었습니다. Governer . 총독이었습니다. 총독. 이 두 사람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예요. 두 사람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대 제사장 여호수아와 그 다음에 총독이었던 스룹바벨. 정치지도자와 그 다음 제사장 이 두 사람의 연합된 힘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의해서 쓰임을 받은 것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사람이 또 중요해요.

 

, 그런데 이 두 감람나무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12절에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입니까 금관. 파이프 라인이라,? 파이프 라인을 통해서 공급되어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합니다.

 

이 마지막에 대답이 나옵니다. 14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이들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 , 두 감람나무 가지나

 

, 이 두 감람나무는 다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말이예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 주 앞에,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사람, 두 사람. 이 두 사람이 누구예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먼 안목에서 볼 때는 자, 성경의 모든 예언, 구약의 예언은 이중적 안목을 갖고 있다. 그래서 뭐라그랬어요. 이중 예언. 그래서 성취도 이중 성취다. 이것은 장차 올 광경이예요. 장차 올 이 두명의 지도자는 누구를 말할까?

 

저는 이것이 계시록에도 나와요, 나중에, 두 증인. . 두 증인이 계속 나오는데 이것은 어떤 개인보다도 이것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교회.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낼실 때 어떻게 내 보내셨어요?

 

둘씩, 둘씩. 그래야만 증거가 성립하거든. 법정 증인도 한 사람이 봤다 이거 같고 증거가 성립 안돼요. 몇사람이 봐야 되요? 두 사람. 증인의 숫자예요. 전도하러 나갈 때 두 사람이 이상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변명을 합니다. 나 전도 안 받아서 나 예수 못 믿었어요. 말하면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십니까. 증인이 있느니라.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씩 증인이 있느니라. 이 둘은 증인의 숫자예요. 교회는 바로 증거의 공동체예요. 증인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다 해야 되요.

 

그런데, 자 우리가 쓰임을 받고 그 당시 이 두 사람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고 이 일에 쓰임을 받을 수가 있었던 이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성결된 자로써 성령충만을 받았기 때문에 .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쓰임을 받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하나의 자격이 있습니다. 뭘까요?

 

기름 부음이예요. 기름 부음.기름 부음. 성령의 충만함이예요. 이것은 목사님. 목사가 안수를 받고 나면 뭐라고 부릅니까?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만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사를 선출할 때도 예루살렘에서 일곱 명의 집사의 기원. 그들의 자격. 두 가지 자격이 뭐예요. 하나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성령이 충만한, 성령이 충만한,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게 됩니다.

 

거기서 어려움이 생겨요. 교회서 많은 일들의 어려움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정말 성령 충만,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해요. 기도해야되죠. 저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금관,

 

이 주발과 이 금 촛대를 연결하는 혹은 나무의 상징을 보여주는 파이프 라인이 어쩌면 기도의 상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함이 부어지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기름이 들어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등잔에서. 금 촛대가 빛을 발해요. 환한 빛을 발해요. 따뜻하게 만들고 또 사람들을 치유하고 부드럽게 하고 맛을 내고 이 기름의 모든 역할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사역을 상징하는 모습이 아닐까.. 우리가 정말 성령의 기름을 받고, 성령충만하면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빛이 납니다. 아름다운 빛이 나요.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합니다.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해주는 역할을 해요

 

. 사람들을 부드럽게 합니다. 따뜻하게 하고, 감싸요.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누굴 통해서 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람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 오늘 허드슨 테일러 얘기하다 끝날 것 같은데, 허드슨 테일러가 계속하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어요.

 

자주한 말이 있어요.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이 사람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시느냐,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 그런데 아무나 아니예요. 어떤 사람. 성령충만한 사람. 그래서 우리가 무엇보다 쓰임받기 위해서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요.

 

주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옵소서. 그런데 성령충만 다음에 중요한 것이 있다면 저는 지혜 같애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집사를 뽑을 때 성령충만하고 그 다음에 뭐예요. 지혜. 성령충만해도 이 골이 비어 있으니까 곤란하더라구요. 근데 똑똑한데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그 똑똑함을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서 아주 잘못된 일을 많이해요. 이 두 가지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해요.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그 시대에 두명의 지도자. 이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저는 지금도 이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여러분도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해요.

 

지도자들이 어떻도록 성령충만하도록. 이 지도자들이 성령충만하지 못할 때 한 공동체, 그리고 한 부서를 완전히 잘못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도록. 지혜가 충만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빛이 들어나는 주의 위대한 승리가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귀한 한 주간의 중간을 살면서 우리가 주 앞에 나와 찬양드리고 말씀받고 다시 흩어져 갑니다. 특별히 구정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그러나 민족의 고통이 계속되는 어려운 시기에 가족들이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복음의 아름다움이 나누어짐과 또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되게 하시고, 가족 전도의 기회가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또 어려운 형편 속에서 제사 사이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일들 가운데 고민하고 안타까워하는 그런 식구들도 있는데 지혜를 주셔서 그 상황 속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주신 말씀 은혜를 감사하며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서 사랑의 헌금을 드렸습니다. 쓰여지는 곳에 주의 빛, 주의 영광, 나타나게 도와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평안과 함께하심이 이 날도 주를 예배하고 흩어져 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두루마리와 에바속에 여인의 환상 /5:1-11/ 이동원목사

2014-12-05 17:13:43

 

, 오늘 수요일 우리 계속된 스가랴서 공부, 오늘 스가랴서 연구 오늘은 제5장을 공부할 시간입니다. 스가랴서 제5장이 되겠습니다.

 

스가랴서는 모두 네 개의 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네 가지로 크게 나누어질 수 있다고 서론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서론 11절부터6절까지, 둘째가 17절부터 시작해서 6장까지가 스가랴서의 두 번째 가장 중요한 일종의 어떤 메인바디(Main body),

 

큰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두 번째 부분이 바로 뭡니까? 8가지 환상, 8가지 환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 아~ 7장과8장에 두가지 메세지가 나옵니다. 두 가지 메세지는 무얼까요?

 

7장은 녜? 금식에 대한 메세지, 8장은 회복에 대한 메세지, 그 다음에 9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다시 두 가지 예언 혹은 두 가지 신탁에 대한 말씀으로 이렇게 구성 되어있습니다.

 

서론, 8가지 환상, 두 가지 메세지, 두 가지 예언, 이것이 스가랴서 전체를 만들고 있는 커다란 구조 혹은 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8가지 환상가운데 오늘 5장에는 6번째 환상과 7번째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6번째 환상을 가리켜서 두루마리 환상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두루마리 환상, 7번째 환상을 가리켜서 에바 속의 여인의 환상 이라고 불리 워 집니다.

 

에바 속의 여인의 환상,

 

어떤 학자들은 6번째 환상과 7번째 환상을 한가지 환상으로 이렇게 보는 학자들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비슷한 내용이 아~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은 사실 7번째 환상은 6번째 환상과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6번째 환상에 나타난 계시를 보충하고 또 발전시키는 그런 의도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7번째 환상에서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 지금부터 첫번째부터 5번째 까지 보았던 환상, 이 스가랴서의 주인공인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처음 5가지 환상은 긍정적 환상들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성과 에~ 또 성전을 중심으로 한 회복의 약속, 그리고 그 회복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메세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 처음 5가지 환상들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아있는 세가지 환상,

 

6번째부터 시작해서 6번째 7번째 8번째, 이 세가지 환상은 그 톤이 긍정적이 아닙니다. 그 톤 자체가 매우 부정적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들이, 경고하고 경계하는 내용들이 중요한 내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이 회복되어가고 성전이 세워지고 예루살렘성이 다시 번영이 돌아오는 과정에 있어서도 이 번영을 깰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보면서 그것을 경계하고 또 경고하는 내용이 이 세가지 남아있는 내용의 중심 내용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환상을 사람들에게 펼쳐보이는 하나님의 그 방식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탁월한 교수법을 배울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교사이십니다. 그분은 먼저는 긍정적인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격려하고 축복하고 약속하고, 이것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잘못된 것을 경계하시고 또 바로 잡도록 책망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만약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을 기를 때 하나님에게서 이러한 교육적 방식을 배울 수가 있다면 우리들의 자녀교육이 얼마나 더 효율적일 수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식들에게 야단을 치기에 앞서서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녜?

 

먼저 칭찬도 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축복해 주신다음에 '너는 참 귀한 아들이다 너 하나님이 너무 너무 좋은 장점을 주셨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것들은 좀 이렇게 고쳐보면 어떨까?' 이렇게 우리가 접근한다면 얼마나 더 그 부모의 얘기를 잘 들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처음 시작하자 마자 '너 이래 가지고 어디 대학 가겠니? 말이죠. 부모님 얼굴만 보아도 지긋지긋 해져요, . 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위한 상황이 긍정적 상황이 설정되어있지 않다면 어떤 종류의 가르침도 충고도 효율적일 수가 없습니다.

 

충고와 교정을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 밭을 먼저 만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 밭을 만드는 요소들이 칭찬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 들입니다. 우리 만날 때 마다 늘 먼저 칭찬해주고 서로 격려해주고 축복 해주고, 그 다음에 우리가 서로 잘못된 것들은 서로 교정할 수 있도록 서로 같이 마음을 열고 대화 하는 이런 Communication의 방식,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 이에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 지금까지 5가지 그 환상들 보았든 5가지 환상들, 아마 오늘 처음 와서 이 환상 공부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몰라요. 어쩌다 오늘 오셔 가지고, 하하~ 5가지 환상의 내용들을 공부 못하신 분들은 참 안타깝습니다마는 5가지 내용은 아주 따뜻한 환상들입니다. 아주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의 환상들이 그 중심내용 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이어서 이제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경계와 경고의 메세지가 주어집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주기위한 전달하기 위한 Tool로서, 도구로서 하나님은 지금 남아있는 세 가지의 환상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우선 이 5장에 나타난 첫번째 환상, 51절부터4절까지, 이것을 두루마리의 환상이다 이렇게 불리워 집니다. 제가 한 줄 읽고 다음에 여러분들이 읽으시고 4절까지 먼저 같이 읽겠습니다.

 

 

 

1: "내가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4: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샤르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얘기일까요? 우선 이 환상의 중심은 환상의 주체는 어떤 두루마리 였습니다. 스가랴가 두루마리의 환상을 보았어요. ~ 이 두루마리는 아마도 파피루스라고 불리워지는 형태의 책 이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 고대는 이 책을 만들 때 두 가지 방식이 많이 쓰여졌는데 하나는 대나무 껍질을 벗겨서 종이를 만들어서 그 위에다 숯 같은 것을 글씨를 씁니다. 이것을 코덱스라고 부릅니다. 코덱스, 그러나 또 하나는 소위 양피지, 양 가죽을 가지고 양의 가죽을 깎고 그 위에다가 글씨를 써요. 그리고 나중에 맨 두 끝에 다는 나무를 겁니다. 이것이 그 두루마리를 만드는 것 입니다. 두루마리.

 

아마도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루마리는 후자의 것, 대부분의 구약성경의 메세지는 이와 같은 형태의 두루마리에 글자가 쓰여져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가 보았든 이 두루마리는 아주 굉장히 큰 두루마리였어요. 아주 규모가 크다란 두루마리였습니다.

 

, 여기2절에 보면은 장이 얼마라고 그랬어요? , 장이 이십 규빗이요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광이 십 규빗, ~ 그러니까 장이니까 길이죠 길이? 뭐 세로라고 그래도 상관이 없을텐데, 그러니까 이십 규빗, 그 다음에 넓이는 십 규빗, 일반적으로 한 규빗을 뭐 구약시대 사람들은 정확하게 계산 했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손 끝에서부터 이 팔굼치 까지를 한 규빗으로 보았고 그저 그냥 얼른 생각하면 약 45cm정도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한 규빗 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그것이 이십 규빗이다 그러면 상당히 크죠? , 상당히 큽니다. 10m는 조금 안되겠지요. 그 다음에 그 넓이가 십 규빗, 그러니까 약5m 조금 안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피터로는 30피터에다가 15피터 정도의 것,

 

그러면 상당히 큰 것 입니다. 책으로서는 어마 어마 하게 큰 규모의 책 입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이것이 바로 뭐냐하면 성소 안에 들어가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제사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현관을 통과하는데 그 현관의 사이즈하고 정확하게 일치 합니다. 성소 현관의 사이즈가 바로 30피터 15피터, 그러니까 10m, 5m 정도였어요.

 

그런데 옛날 제사장들은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상징하고 있는 성전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메세지를 주고자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 이 두루마리 책에 쓰여져 있는 내용은 아주 부정적인 것입니다.

 

좋은 내용이 아니죠? 일반적으로 성경말씀 그러면은 그 말씀은 우리를 구원을 얻게 하는 말씀, 생명을 얻게 하는 말씀, 축복의 말씀, 분명히 성경말씀은 그런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또 하나의 기능이 있어요.

 

이 말씀을 거절하고 이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생명의 말씀이 사망의 말씀이 되고 심판의 말씀이 되고 저주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이중성이다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의 이중성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측면 심판의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미 이 말씀대로 약속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게 될 축복에 대한 메세지는 이미 충분히 5가지의 환상들을 통해서 전달했어요.

 

이제는 그러나 이 멧세지를 제대로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와 경고로서 심판의 멧세지를 주고자 하는 의도로 지금 두루마리가 보여진 것이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그런데 두루마리가 가만히 있는 두루마리가 아니라

 

어떻게 한 두루마리에요 2절에 보면? ? 두루마리가 눈에 보였는데, 큰 책이 보였는데 어마어마 하게 큰 책, 그 책이 어떤 책이라고 그랬어요? 막 날아다니고 있어요 막 날아다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딱 보면은 괴물 같아요 이것은 그 말씀의 어떤 활동성? 녜 그 말씀의 어떤 활동성을 상징해 주고있는 표현이 아니냐?

 

마치 우리가 신약성경에 보시면 말씀의 성격을 규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요?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그런 표현을 우리에게 연상 시키는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도 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심판을 얻기도 합니다. 이제 바야흐로 이 말씀이 심판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막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 자 그런데 그것이 그 사이즈가 바로 이 두루마리 책의 사이즈가 성소에 들어가는 입구의 현관의 사이즈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메세지가 있을까? 학자들이 여러 가지 추정을 합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보편적인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하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냐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저도 거기에 동의하고 싶은데요 하나님의 심판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전에 그는 반드시 그 심판을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그의 집이 깨끗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할 근거를 상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그의 집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 가운데 있는 죄악을 지적하시고 그것을 제거하시고 심판 하심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고 계시는 사건이라고 보여집니다. 자 이런 원리는 성경에서 매우 일관성 있게 강조되고 있는 원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컨데 신약에서 베드로 전서, 베드로 전서 417절 한번 찾아 보십시요. 베드로 전서 417절입니다. 한번 다 찾아보시겠습니다.베드로 전서 417절의 말씀입니다. , 찾으신 분은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심판을 하기 전에 여기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이런 단어입니다. 무슨 단어에요? '먼저' , 하나님이 그 심판을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 하신다구요.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하신다. 당신의 뜰에서부터 당신의 집에서부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을 사랑하고 따르고 구원 받고 섬기는 당신의 백성들이 성결하기를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신다는 멧세지 입니다.

 

 

 

, 지금 이 스가랴서 전체가 가장 중심 되는 메세지가 바로 뭡니까 네? 처음부터 참석 하셨던 분들이 대답을 하셔야지, 스가랴서의 두 가지 중요한 메세지, 뭐에요? 회복과 또 하나는 성결, 거룩함 이에요 회복과 성결, 회복이 중요한 메세지에요. 그러나 회복은 무엇을 위한 회복인가? 거룩하기 위한 회복이에요.

 

거룩함에로의 회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그리고 그 회복의 실제적인 과제 가운데 하나는 그 당시에 자, 바벨론의 포로 되었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의 땅 고향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그들이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뭡니까? 성전 회복이에요. 물론 예루살렘 성 전체를 회복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성전을 회복하는 것, 성전 재건이였습니다.

 

, 그들은 성전 재건을 그렇게 열망하고 또 하나님의 그 뜻에 합당한 성읍의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일방적으로 이 귀향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두개의 범죄, 두 가지의 범죄가 있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지적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 3절과4절에 보시면 어떤 죄악이 두 가지 대표적인 죄로 지적이 됩니까? 하나는 도적질, 도적질이 있고 또 하나는 뭐같아요? 대답하는데 실력도 필요없고 시력만 있으면 돼요. 잘 보시면 나와있습니다. 4절에, 도적질과 함께 또 하나는 뭐에요?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맹세하는 것, 쉽게 말하면 거짓된 맹세, 혹은 헛된 맹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도적질과 헛된 맹세, 두 가지 범죄 입니다.

 

 

 

저는 이것이 물론 어느 시대나 있을 수 있는 범죄지만 그 당시 이 말씀이 기록되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든 두 가지의 대표적인 죄악이 아니였는가 생각됩니다. 우선 자, 멀리 갔다가 이제 돌아왔으니까 당장에 그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제일 필요한 당면 과제는 생존이였을 거에요.

 

거기서 잘 생존하고 사는 거에요. 경제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생존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 고향에 온다는 것은 부푼 꿈이 였지만, 이번에 아마 고향에 갔다 오신 분처럼 고향에 간다! 얼마나 마음이 좋아요? 그런데 가서 보면 막상 그게 그거에요. 거죠? 하하그런데 돌아올 때면 힘들기만 하고,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에 대한 꿈, 시온에 대한 꿈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돌아와서 보니까 말이 아니 였어요.

 

예루살렘, 아주 황폐한 도성, 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없어진 황무한 성 이였습니다. 생존 자체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 생존하고 봐야된다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였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땅에서 생존하다가 보니까 자연히 뭐에요? 도적질 같은 것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꼭 한가지 종류의 남의 물건을 진짜 훔치는 그런 도적 질도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런 도적질 뿐만 아니라 뭐 살기위해서 남의 돈을 꾸고 나서 갚지 않는다든지, 뭐 이런 일들, 그것도 하나의 도적질 입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것도 일종의 도적질 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 땅에서 성행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자, 시온의 땅에 돌아오면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부푼 마음속에 기대가 있었고 신앙의 고백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한번 멋지게 여기서 회복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주께 헌신 하겠습니다. 열심히 그들은 주를 향한 충성과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실상은, 지금 성전 지을려면 뭐부터 해야 되요 사실은? ? 아 머니, 머니가 있어야지 뭘 성전을 짓지요? 그런데 이런 일 가운데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헌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이죠.

 

그것은 주를 향한 헛된 맹세에 불과한 당시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도적질이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범했던 그 당시 대표적인 범죄였다면 이 헛된 맹세 거짓된 맹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범죄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 이것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너희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끊어질 수 밖에 없다. 너희들의 가정은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죄가 너희들을 망하게 할 것이다.

 

죄 때문에 바벨로니아에 흩어져서 포로생활을 했든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로운 역사를 새로운 사회를 재건 하기를 원하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품고 있었던 그 죄를 지적하시며 경계하고 계시는 메세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루마리 환상의 정체 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 그 다음에 이제 두 번째 환상은 55절부터11절까지, 소위 에바 속의 여인의 환상입니다. 이것이 5장 속에 나타난 두 번째 환상, 또 환상 전체를 볼 때는 몇 번째 환상이에요? 7번째 환상이 되겠습니다. , 제가 한줄 읽고 다음줄 여러분이 읽으시고 마지막 절 까지 5절부터 시작해서 읽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5: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6: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7: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리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8: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9: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10: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매

 

11절 다같이,

 

11: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아멘.

 

 

 

이것이 에바 속의 여인의 환상, 이것도 물론 심판과 관련된 환상입니다. 에바는 곡식을 담는 혹은 곡식을 측량하고 재는 그릇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커다란, 그 당시에 그 측량기준 가운데서 가장 많은 용량을 담을 수 있었던 일종의 하나의 말과 같은, 되 는 말과 같은 것 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바로 그 에바 가운데 여자가 들어가 앉아 있었다 말이죠. 큰 여자가 들어가 있었다. 에바 가운데 여자가 들어가 앉아 있었습니다.

 

,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그런데 동시에 보면 또 그 여인과 함께 어떤 환상을 보았습니까? .납 한 조각이 뜨는 광경을 동시에 보았어요. 7절에 보시면 에바 가운데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또 둥근 납 한 조각이, 납 한 조각이 쭉 이렇게 뜨는 모습이 보였어요.

 

, 8절에는 우선 설명이 나와있습니다. 도대체 그 여인이 무엇을 상징하느냐? 그가 가로되 이는 무어라고 그랬습니까? 악이라 하고, 그러니까 이 여인은 악을 상징하고 어떤 죄를 상징하는 모습으로서 여인이 등장했다. 왜 하필 여자를 악으로 상징 했느냐? 여성들이 유감을 표명할 줄 모르지만 성경에서 상당히 보편적인 그런 모습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지 못할 때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을 때 그 모습을 가리켜서 영적인 음행의 죄를 범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과 같다 이런 표현들이 많이 등장하죠?

 

이를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넣고 그 다음에 납 조각을 에바의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그러니까 이 납 조각은 일종의 뚜껑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카바, 뚜껑이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것이 아구리를 딱 덮었다. 뚜껑으로 딱 위를 덮어버렸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이 속에 들어가서 에바 속에 들어가서 뭐에요? 꼼짝 못하게 된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어떤 죄의 양이 꽉 차가지고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그 모습 속에 처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태를,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악이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어떤 모습 앞에 처하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이 무슨 죄냐? 어떤 악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냐?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에바, 에바가 등장한 것은 이것이 어떤 그 장사하기 위해서 무엇을 측량하는 하나의 그 그릇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따라서 이것은 상업적인 거래에 있어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성실한 범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서 돈을 꾸어놓고 갚지 않았어요. 돈을 꾸어놓고 갚지 않았어요. 이것도 일종의 도적질 이지요.

 

이미 말한 도적질의 형태와 함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범하고 있었던 죄를 상징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에바를 등장시킨 것 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여인을 등장시킨 것은 이따금씩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우상을 숨길 필요가 있었을 때 또 우상을 운반할 필요가 있었을 때, 우리 뭐 작은 부처 같은 것도 이렇게 어디로 옮겨갈 때는 어디다가 집어넣고서, 박스 같은데 집어넣고서 그 부처상 같은 것을 옮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상가운데는 아주 조그만 우상도 많아요.

 

저는 여러분들이 아~ 이런 날 시간이 계셔서 좀 뜻있게 보낼려면 여는지 안 여는지 모르지만 요즘 그 뭐에요? ? 갑자기 생각이 않나네? , 예술의 전당 안에 그 다윗의 고대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 한번 그런데 가보시면

 

그 당시 가나안 땅에 유행했던 우상 같은 것들도 전시해 놓았어요. 조그만 우상들도 많아요 아주 작은 형태의 우상들, 도장 곽 속에 들어가는 그런 작은 우상들도 전시해 놓았습니다. 좀 비싼 것 같기는 하지만 입장료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성경의 그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들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그런 좋은 전시회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 당시에 종종 이런 에바 박스 안에다가 우상들을 옮기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어떤 우상 숭배의 범죄를 상징 하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경제적인 범죄와 함께 동시에 우상숭배의 범죄, 그런데 그 당시 대표적인 우상은 어떤 우상이였을까? 물론 그것은 어떤 여인의 그 형상으로 상징화 된 실제의 어떤 우상 신을 의미할 가능성도 없지 안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보편적으로 그 당시 생존에 급하다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나 없이 붙들고 있었든 가장 커다란 우상,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때문에 그 땅에 돌아왔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 시온의 땅에 돌아오면서도 생존에 발버둥치다가 보니까 돈에 대한 욕심, 물질에 대한 욕심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하고 있었든 가장 강열한 우상의 신이였다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전 지금도 인간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 우리시대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신약시대에 가면은 우상 가운데서 가장 크게 신약 성서에서 강조하는 우상의 범죄는 어떤 우상일까요?

 

한번 골로새서 3장 찾아 보세요. 골로새서3, 골로새서 3장입니다. 5절에 보시면, 구약시대에는 가시적인 형상으로서 우상에 대한 경계가 제일 많이 나타납니다마는 신약에 오면 이 우상이 제일 많이 강조됩니다. 자 골로새서 35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시작,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래서 가시적인 형태만 우상이 아니라 오늘 우리시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있다면 뭐가 우상이라고 그랬어요? 탐심,

 

그런데 우상의 정의가 뭐에요? 우상이라는 것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잘 안보이게 되는 것,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애 요인이 되는 모든 것, 나로 하여금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게 만드는 그 무엇, 하나님 이상으로 집착하게 하는 그 무엇,

 

일체의 것이 우상일 수가 있습니다. 이 탐심! 탐심! 이것이 가장 강력한 하나의 우상인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 너무 그들이 물질에 집착을 하다가 보니까 서서히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또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서 시온의 땅에 돌아왔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그 마음이 멀어지고 물질에 더 크다란 욕망을 키워가고 있었든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다른 선지자들에서 지적된 범죄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향한 물질적 헌신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책망하고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스가랴 다음에 나오는 책이 무슨 책일까요? 몰라요? 찾아보시면 알지요 스가랴 다음에 뭐가 나와요? 말라기죠 말라기 한번 찾아보세요 말라기 3장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든 시대도 거의 뭐 조금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비슷한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말라기 38절과 9절 한번 읽어보겠어요. , 말라기 38절과 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 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아까 일찍이 여기 도적질의 범죄가 경고 되었습니다만 어쩌면

 

이 도적질의 범죄 속에서 더 스가랴 선지자도 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강조하고 싶었던 도적질은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도적질, 즉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도 지적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 그것을 경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고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만약 그들이 고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 경고 앞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마지막 경고가 나와 있습니다

 

 

 

다시 스가랴 5장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경고가 뭡니까? 9절에 보시면,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달려있는데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재빠른 어떤 동작을 나타내고 있는데 저는 하나님의 천사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심판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천사들의 모습이 아닌가? ,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그 에바를 들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10,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그를 옮겨가고 있는거에요. 에바를 어디론가 옮겨갑니다. 죄악을 상징하는 에바를 옮겨갑니다.

 

11절 마지막 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그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갑니까? 시날 땅으로 옮겨간다. 시날 땅이 어디냐 하면 바벨로니아에요, 바벨로니아.

 

 

 

,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성경 학자들의 해석이 여기서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져요. 하나를 과거적인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있고 또는 미래적인 해석을 하는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적 해석이란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하나님 앞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범죄 했고 우상숭배에 빠졌을 그때 하나님이 그때에도 어디로 데리고 가셨어요? ? 바벨로니아로 데리고 거셨잖아요? 북방 이스라엘은 어디로? 앗수르로, 또 남쪽 유다는 어디로? 바벨로니아의 포로로 잡혀갔던,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켜 주시면서 너희들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현상이 또 한번 일어날수가 있다. 바로 이런 경고다 이렇게 해석 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아~ 이것을 미래적 해석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미래적 해석이란 것은 문자 그대로 이것은 뭐냐하면 이스라엘 땅 안에 있었던 죄가 이제는 하나님의 간섭을 통해서 이스라엘 땅에는 정화되고 정결케 되고,

 

그 죄가 옮겨진다 어디로 옮겨져요? 바벨로니아로 옮겨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신 다음에 이제 하나님은 그 죄악의 현장이 이제 바벨로니아를 중심으로 새롭게 일어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바벨론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동일하신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미래적 해석이라고 말하는데 이 해석을 취하는 학자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 저는 이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들이란 것은 앞으로 다가올 그 사건 뿐만 아니라 멀리 있을 사건 까지 함께 동시에 예언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을 무슨 예언이라고 그래요? 이중 예언,

 

이중 예언. 마치 그 망원경 속에 가까이 어떤 현장이 보이고 또 멀리 있는 사건이 동시에 보이는 것처럼, 가까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의 재건, 또 그 재건에 따른 경고를 담고 있지만 더 멀리는 뭐냐 하면 이것은 이방인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까지도 하나님이 포함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 최후의 마지막 심판의 장소를 계시록에 보면은 뭐라고 묘사 합니까? 바벨론으로 묘사되어 있어요. 큰 바벨론이다 이렇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한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 17, 요한 계시록 17장입니다. 우선 한번 15장 같이 읽어봐요. 요한 계시록1715,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범죄한 이 세상, 이세상의 문화 전체 또 이세상의 제국을 상징하면서 뭐냐하면 많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을 상징하는 큰 바다 위에 여자 하나가 앉아있다 그 여자는 음녀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대상이 될 이 세상에 대한 상징이라는 말이지요. 세상에 대한 상징.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만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 이 죄악 가운데 있는 온 세상이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 이제18장 들어가보세요. 계시록 18장입니다. 요한 계시록1823절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마지막 심판의 선언의 멧세지 입니다.

 

계시록18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것이 되었도다" 3절까지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엿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 마지막 심판의 모습을 큰 바벨론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그들이 범죄 때문에 이 심판을 피할 수가 없는 모습, 또 땅의 상고들도, 이 장사 하는 사람들을 얘기하는 거에요. 장사하는 사람들. ,올바르게 장사하고 또 올바르게 돈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 사치함을 인해서 그 범죄함을 인해서 그리고 그 온갖 우상숭배를 인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마지막 바벨론에 부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의 가까이 있는 심판도 보여주고 또 멀리 있는 심판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환상이 바로 이 에바 속에 들어가 있는 여인의 환상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 그리고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 그러나 이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시면서도 이 축복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관리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사람들은 축복을 원하지만 그래서 이번 구정에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모이는 사람마다 서로를 추복하고 복 많이 받으십시요 라고 인사를 나누었지만 복 받기에 합당한 사람, 즉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우리가 주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느냐?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에요.

 

 

 

저가 늘 강조합니다만 저는 금년 안에 IMF를 벗어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벗어나면 이건 더 크다란 재앙이 될 수가 있어요. 깨끗한 민족이 되어 벗어나야 돼요.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을 제대로 받고 우리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정결케 하고 그리고 벗어날 때 역사를 통한 레슨을 교훈을 제대로 받을 때,

 

그리고 벗어나면 우리 민족은 멋진 민족이 될 거에요. 정말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민족,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선교하고 또 축복 하는 그런 놀라운 민족으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지만 무조건 IMF만 면했으면 좋겠다.

 

조금 괜찮아지니까 또 우리가 사치하고 방탕하고 이런 방식 그대로 나간다면 이것은 결코 우리 민족이 희망적인 징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민족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그러나 깨끗한 민족이 되어 회복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는 회복과 함께 성결을 당부하시는 주님의 메세지를 오늘 이 환상 속에서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십시다.

 

축복을 나누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 앞에 깨끗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께서 지적하시는 잘못, 잘못의 가능성들을 우리가 회개하고 또 포기하고 주앞에 더욱 깨끗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우리 자녀들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우리 가정을 성결하게 하시고 우리 민족을 성결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민족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회복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밝아오는 한해 우리는 이 한해가 우리 민족적으로 우리 가정적으로 우리가 회복 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좋은 명절을 우리가 만날 때 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피차에 서로 축복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존재, 그리고 정녕 축복 가운데 다시 일어서는 재기의 한해, 우리 민족도 일어서고 우리 가정도 회복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그러나 우리가 주앞에 받아야 할 교훈, 주앞에 정직하게 받게 하시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회복이 피상적인 회복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내적인 회복이 동반되는 주앞에 정결한 회복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정 우리민족이 그렇게 회복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당신의 자비하신 손으로 우리가정과 우리민족을 붙드시고 이 한해가 정말 회복을 향해서 걸어가는 성결과 회복의 한해가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아멘.

 

 

 

우리 옆에 있는 분들하고 인사하면서 복된 한해 되십시요. 그리고 거룩 하십시다 이렇게 우리 인사 하십시다. 해보세요 한번, 복된 한해 되십시요. 그리고 거룩 하십시다. 세상 사람들 하고 좀 달라야 할 것 아니에요? 인사가? 똑같은 인사에도 그죠? 그냥 복 많이 받으십시요 만 하지말고, 우리 오늘 스가랴의 이 메세지가 그런 메세지니까 복을 받되, 우리가 거룩한 축복을 누릴 수 있게, 우리 다시 인사 안한 분 옆에 사람 다른 사람 쳐다보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요 그리고 거룩 하십시다. 이렇게 이렇게 인사 하세요.

 

 

 

, 기도 드리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아름다운 민속 명절, 우리 가족들이 함께 앉아 두런 두런 우리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격려와 사랑을 나누는 이 계절, 하나님 우리에게 짤막한 인생이 정말 축복 된 생애가 되기를 우리가 주앞에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자녀들이 이런 축복 된 삶 가운데 거하고 또 축복을 누리기를 하나님은 기대 하십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이기심의 만족만을 위한 그런 축복이 아니라 주앞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 축복을 스스로 누릴 뿐만 아니라 축복을 이웃들과 더불어 나눌 줄 아는 그런 축복을 기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그 축복의 기대에 부흥하는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의 민족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이런 축복을 서로 소원하고 기도하고 나누는 이 계절에 오늘도 주앞에 귀한 예배 드리고 또 우리 이웃들을 위해서 축복의 헌금을 드리고 또 이런 축복의 기도를 가슴에 품고 떠나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이방인의 심판과 구원의 환상 /6:1-15/ 이동원목사

2014-12-05 17:18:56

 

오늘 스가랴 6장 공부할 시간입니다. 스가랴서 오늘 제 6장을 함께 같이 공부하시겠습니다.

 

우리가 스가랴 6장의 제목을 타이틀을 부여할 수가 있다면 이방인의 심판과 구원의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심판과 구원의 환상, 이방인들이 심판 받고 혹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되는 일에 대한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약성경은 어쩌면 유태인들을 위한 책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실제로 저도 어떤 사람들에게 전도하다가 아~ 유대인의 종교를 왜 믿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구약을 겉으로 피상적으로만 읽어본다면 이스라엘의 역사, 또 이스라엘의 명절, 이스라엘의 율법, 이런 것들이 구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한 유대인의 책으로 오해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을 우리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약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방인들에 대한 예언과 그리고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특별히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은 이방인들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을 성경이 기술 할 때에도 대체로 두가지 경향을 띄우게 됩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방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상당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그 이방의 세력들이 하나님을 혹은 백성을 대적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심판 받을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꼭 이방인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묘사된 것이 아니고 긍정적으로 묘사된 부분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할 사람들,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사람들, 또 실제로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쓰임을 받는 백성들, 또 하나님의 구속사의 소중한 도구로 구원을 선포할 세력으로도 이 이방인들이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스가랴 6장에는 이 두가지 사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 이방인의 심판의 측면과 또 이방인들의 구원의 측면 이두가지 측면이 함께 나란히 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스가랴 6장의 첫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1절부터8절까지에는 스가랴서의 8번째 환상이 그려집니다.

 

마지막 환상이죠? 8번째 환상, 바로 8번째 환상 마지막 환상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심판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스가랴 6장의 두번째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는 9절부터15절까지는 소위 여호수아의 대관식의 환상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따로 보면 환상을 9가지 환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이 여호수아의 대관식에 대한 내용은 이것은 8번째 환상을 보충할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별도의 환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성서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어쨌든 여호수아가 취임하는 제사장과 왕으로 취임하는 이 대관식, 바로 이 대관식의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계획을 보게 됩니다. 이방인의 구원, 그것이 9절부터 15절까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첫번째 대목을 함께 같이 좀 살펴 보겠습니다. 1절부터8절까지가 그 첫번째 대목인데 여기에 바로 스가랴서의 일련의 8개의 환상들 가운데서도 마지막 환상, 8번째 환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환상의 내용이 바로 이방인들의 심판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이 환상을 가리켜서 네 병거의 환상, 이렇게 부르죠? 네 병거의 환상,

 

, 우리 시작되는 처음 1절을 다같이 일겠습니다. 61절입니다. 시작,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이렇게 시작됩니다. 병거를 보고 있는 것으로 스가랴 6장이 시작됩니다.

 

사실 네 병거 그리고 또 이 네 병거를 태우고있는 말들, 말들이 그 다음에 이어서 2절 이하에서 묘사되고있는데 홍마 붉은말, 백마 하얀말, 이런 말들이 묘사됩니다. 흑마, 홍마, 백마 이런 말들이 묘사되고 있는데 아 우리가 이런 비슷한 환상을 본 일이 있죠? 몇번째 환상에서 보았습니까? 사실은 첫번째 환상에서 보았습니다.

 

이미 우리가 첫번째 환상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이 첫번째 환상 속에 묘사된 이방인들, 즉 유대를 짓밟은 이방인, 그 당시에 특별히 유대나라를 짓밟은 그 바벨로니아 같은 세력들 혹은 앗시리아의 세력, 이런 세력들에 대해서 굉장히 이 환상을 보고 있었던 스가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음 편치 못하게 만든 한 모습들이 있었어요. 우리 기억을 환기 시키기 위해서 우리 111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11절입니다

 

. 스가랴 111절입니다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 하더이다" 여기서 온 땅이란 것은 이방 세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죠? 이방 세계가 어떻다고 그랬어요? 평안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편에서는 아주 약이 오르는 일이에요.

 

이스라엘을 짓밟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악하고 죄 많은 이방세계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환상을 보는 스가랴는 하나님 앞에 항의하고 싶은 그런 심정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바로 그 평안한 듯 외견상으로 보였던 이방세력에 대한 심판이 바야흐로 오늘 이 마지막 환상 속에서 그 심판이 집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 오늘 이 첫번째 대목 여덟번째 환상은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은 세가지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의 준비, 그리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의 진행,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만족하심, 이런 세가지 단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선 심판이 준비되는 모습입니다.

 

, 네 병거가 등장했어요. 그 병거와 함께 2절 이하에 보시면 말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또 세번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번째 병거는 어룽지고, 이 어룽지고는 얼룩지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그랬습니다. 우선 도대체 아~ 네 병거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 병거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1절에 보시면 그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 그랬습니다. 두 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볼 때

 

그들에게서 기억되는 대표적인 산, 두개의 산 그러면 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거의 의견의 여지가 없이 그들은 두개의 산을 머리속에서 떠 올립니다 하나는 시온산, 하나는 감람산 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보면 시온산이 있고 그리고 또 감람산이 있습니다. 종종 이 시온산과 감람산은 심판의 자리로 묘사됩니다

 

.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저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그 시온산과 감람산 사이에 하나님의 무슨 심판의 본부를 차려놓고 거기서 심판한다고 저는 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증거 중의 하나는 자, 이 산을 묘사할 때 그 산이 1절의 무슨 산이라고

 

그랬어요? 놋산이다 그랬어요 놋산이다. 놋으로 된 산이 실제로 있을까요? 놋으로 만들어진 산이? 그렇지 않죠. 그런데 놋이란 것은 놋, 주석이란 것은 성경에서 보면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그런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아주 견고한 심판, 하나님이 흔들림이 없는 심판을 묘사할 때 이 놋이라는 물체가 나타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놋산이다. 이러한 것은 이제 바야흐로 여기에서 심판을 시작하신다 이런 의미의 선포라고 보면 되겠어요. 자 거기에서 네 병거가 튀어나옵니다. 네병거, 자 이 네 병거가 또 무엇을 의미하느냐?

 

성서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토론들이 진행됩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려고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이 네개의 병거는 스가랴가 이 환상을 보았던 이 시점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로 계속되는 인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소위 이방의 죄 많은 세력들을 심판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쓰신 도구들로서의 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첫번째 병거는 아마도 바벨론 바벨로니아, 두번째 병거는 메데파사, 메대파사. ,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어나는 나라는 어떤 나라지요? 그리스입니다. 희랍, 알렉산더가 대표되는 희랍, 그 다음에 네번째는 로마, , 대 로마제국, 왜 이 네 제국들이 심판의 도구로 상징되느냐 하면 자,

 

바벨로니아는 누구를 멸망시킵니까? 앗시리아를 멸망시켜요. 그런가하면 메데파사는 누구를 멸망시킵니까? 바벨로니아를 멸망시켜요. 바벨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시온의 땅으로 돌아가라! 저 유명한 고레스, 싸에로스의 칙명, 고레스가 바로 이 메데파사를 이끌던 지도자지요? 그래서 메데파사,

 

그런가 하면 메데파사는 또 누구에 의해서 멸망합니까? 그 다음 나타나는 희랍제국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또 희랍은 다시 로마라는 세력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서로 계속해서 물고 물리면서 심판을 받습니다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네개의 일련의 계속되는 제국을 문자 그대로 의미한다라고 보는 성경 학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해서도 꼭 그것이 지정된 제국을 의미한다고 보기보다는 보다 더 포괄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세계 죄 많은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서 쓰시는 일체의 모든 세력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지는 모든 세력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더 보편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꼭 꼭 집어서 이것이 바벨론이다 파사다 희랍이다 로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지는 세력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좀더 넓은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 이 네개의 병거를 말들이 끌고 있지요. 네가지 종류의 말, 네가지 색깔로 구별되는 말들이 이 병거를 끌고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무슨 색깔이에요? 홍마 붉은말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뭐 여기도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이 붉은색이라는 것은 피 혹은 전쟁을 뜻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두번째는 흑마 검은말, 이것은 일반적으로 기근이라든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는 백마 흰말, 이것은 평화적인 정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 제국이 또 다른 제국을 점령할 때 반드시 피가 동반되는 것은 아니에요. 전쟁을 치르지않고도 무혈혁명에 의해서 정복하는 케이스들이 역사 속에는 종종 있어왔습니다. 아마도 그런 케이스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백마가 아니겠느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네번째가 어룽진, 하하~ 어룽진, 이것이 한국말은 한국말일 텐데 어디에서 나온 한국말이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어룽진 말, 얼룩진 말, 그러면서도 아주 건강해 보이는 말, 아마도 이것은 자세히는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주 강력한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떤 강력한 통치에 의해서 한 세력을 제압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인류역사 속에서 죄와 악으로 가득찬 한 문명이나 한 제국이나 한 사회를 심판할 때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전쟁으로 어떤 때는 기근을 통해서 어떤 때는 평화로운 정권교체에 의해서 어떤 때는 강력한 통치에 의해서 하나님은 한 세력을 무너뜨리고 또 다른 세력을 세우시면서

 

역사를 진행시켜가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4절에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준비태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 준비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 준비되었습니다. 그 심판은 곧 진행될 것입니다.

 

, 6절과7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6절과7절 다같이 시작,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고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 바야흐로 심판이 진행되고있는 것인데 일단 우선적으로 그 하나님이 심판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느냐 하면 북쪽으로 남쪽으로, 북편 땅과 남편 땅, 그래서 북쪽은 아마도 이 바벨론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북편 땅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남쪽은 아마도 에집트 애굽에 대한 심판을 보여 주고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역사가 진행되고있는 심장부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북쪽 남쪽 그럴 때는 항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사고를 해야 돼요.

 

옛날에 성경을 어이없이 해석하는 분들이 성경 읽다가 동쪽 그러면 대한민국, 대한민국 만세 이렇게 해석하는 부흥사들이 참 많았어요. ,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성경해석, 저는 언제나 참 감동을 받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해석 앞에 은혜를 받고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더 신기하게 항상 생각을 합니다. , 성경을 정확하게 보아야 돼요. 그 이스라엘이라는 그 지리적 위치에서의 북쪽, , 이 북쪽이면 앗수르나 바벨로니아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 바벨로니아에 대한 심판 그리고 애굽에 대한 심판이 임박하게 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벨로니아는 그렇게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멸망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유를 얻었고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이 역사적 사실을 이제 마무리 짓는 이 광경을 선언하면서 마지막8절에서 그 심판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소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 8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요? 시원해졌다,

 

그래서 하나님이 뭐 심판하는 광경 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면 안 되겠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역사 속에 드디어 하나님이 바라시든 경륜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든 또 다른 세력의 죄와 악이 심판되었다. 그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 하나님의 거룩함이 만족된 선언이라고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주의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죄를 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안타까워 하십니다. 죄와 악이 있는 곳에 주의 마음은 들끓듯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죄가 용서된다든지 죄가 심판될 때 하나님은 어떻게 느끼실까요? 시원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일, 두가지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일, 어떻게 해요? 회개하고 용서 받든가 심판 받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든가, 이두가지를 통해서만 주의 마음은 시원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민족들이 되지 마십시다.

 

오늘 우리의 삶 개인의 삶 속에도 주의 마음을 들끓게 하는 대상이 되지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의 마음에 시원함을 드리는 사람들, 주님의 거룩함 앞에 서서 거룩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시원해 하십니다.

 

옆에 사람 쳐다보고 하나님이 시원해 하실지 답답해 하실지 한번 관상을 보시기 바랍니다.하하~

 

옆에 사람 관상이 시원해 보이십니까 답답해 보이십니까? 하하~

 

 

 

, 이 두번째 대목입니다. 오늘 스가랴 6장의 두번째 대목은 9절부터15절까지 이것은 여호수아의 대관식이라고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방인의 구원 이방인의 구원의 계획이 시작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물론 하나님의 적대 세력으로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더 커다란 구속사의 섭리는 또 이방인 가운데서 전개됩니다. 열방들 가운데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인 것을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제 보게 될 것입니다.

 

, 다시 이 부분을 우리가 세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있는데 처음은 9절부터10절까지는 포로 되었던 자들의 헌신, 이 포로 되었던 자들의 헌신이 이루어지면서 이방인을 위한 구속사의 섭리가 본격화됩니다. 포로 되었던 사람들의 헌신.

 

, 9절과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그랬습니다.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사람들, 포로 되었다가 이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의 이름이 여기 지명됩니다.

 

자 여기 지명되는 사람들의 이름, 헬대, 또 한사람을 도비야, 또 한사람은 여다야, 또 한사람은? , 뭐 집에서 들었다는 것이지 주인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에요. 세사람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조금 나중에 보면 또 한사람이 더 추가가 됩니다. 14절에 보시면 14절에 보면 그 면류관은 헬렘과, 학자들은 이 헬렘과 헬대가 동일인이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동일인인데 때로는 아마 헬대라고 부르고 때로는 헬렘이라고도 아마 불리워졌던 인물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도비야, 여다야,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더 추가가 되죠? 스바냐의 아들 헨, 헨이라는 이 네사람이 등장합니다. 네사람. 그런데 여기 10절에 보시면 그들에게서 무얼 취했다 그랬어요. 10절에 보시면 무얼 취했다, 무얼 취했습니까? 11절에 보시면 알 수가 있죠? 은과 금을 취했다. 그들에게서 은과 금을 취해가지고 면류관을 만들었다. 그래 갖고서 그것을 대 제사장이였던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졌다 그래서 그 면류관을 쓰고 제사장이였던 여호수아가 취임을 합니다. 왕으로서 취임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면서 드디어 왕의 자리에 취임하는 모습이 거기에 보여졌습니다.

 

, 이게 무슨 뜻이냐 우선 여호수아의 대관식은 제가 조금 후에 설명을 해드리기로 하고요 우선 이 네 사람이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 네 사람의 헌신 때문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새로운 섭리가 진행되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신약시대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바로 이 네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바벨로니아에서 돌아온 이 네사람, 아마 지도적인 인물이였을 것입니다. , 성전을 건축되지 못하고있지요 아직도, 그리고 제대로 역할을 못하죠.

 

답답한 가운데 이들이 아마도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도록 물질적 헌신을 했던 사람으로 보여져요. 은이라든지 금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실제로 하나님의 사역이 진행되도록 성전 건축이나 이런 일들을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지목하고 기록한 이 대목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 참 이런 역사의 소중한 의무를 소중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하는 성경기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14절에 보시면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무엇하기 위해서라고 그랬어요? 기념하기 위하여 나중에 여호와의 전안에 두었다. 기념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다.

 

꼭 우리가 이름마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네 사람의 이름은 신앙 고백적 의미를 가진 뜻도 없지않아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헬대 혹은 헬렘, 이 헬렘이라는 말의뜻이 본래 강하다 힘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강한 자, 이것은 단순한 강함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이 사람의 어떤 성격과 캐럭터를 나타내어주는 이름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되고요, 도비야라는 말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이런 뜻입니다

 

. 하나님은 선하시다 God is good, 하나님은 선하시다. 여다야는 하나님은 아신다 God knows,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리고 ''이란 말은 은혜란 뜻이에요 헨, 은혜, 은혜,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에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 이들은 다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붙들림을 받았던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였을 것입니다. 이들의 헌신을 통해서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아마 이런 부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네사람의 인물이 여기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부흥되도록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은 어느시대 에나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중한 이 네사람의 헌신을 주께서는 기억하셨습니다. 성경에 그들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들의 헌신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런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 네사람이 등장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 두번째는 드디어 여호수아가 대관식을 진행합니다. 이것은 물론 상징적인 것이에요. 상징적인 것, , 여호수아는 본래 직업이 뭡니까? 직업이 뭐였어요?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면류관을 씌운다 그들이 바쳤든 네사람이 바쳤던 은이나 금을 가지고 왕의 면류관을 만들어서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제 뭐가 된거예요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왕이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에요 이것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아니고,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이것을 우리가 13절을 보면 더 알 수가 있어요 우리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 이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은 구약에서는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제사장과 왕 사이에 갈등도 있었습니다. 두사람 사이에 라이벌 같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했고 갈등도 없지않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사장과 왕권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제사장이 바로 왕이 되었다 이 둘 사이에 이제는 평화가 성립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 가능했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 사실을 지금 가리킬려고 하는 것이 뭐냐하면 그 당시에 유력한 지도자가 두 사람 있어요.

 

누구였습니까? 여호수아는 제사장이였고 또 한사람 실제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 누구입니까? 스룹바벨, 그가 총독이였어요. 스룹바벨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맞지않으면 힘들어요. 이 성전건축,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성전을 건축하는 역사적 과제는 성립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뜻이 맞았다 이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되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된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왕관을 썼다는 것을 통해서 이제는 제사장과 왕권이 하나가 되었다. 종교적인 지도자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스룹바벨이 하나가 되었고, 드디어 성전 건축 제2의 성전을 건립하는 일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제가 스가랴 강해를 시작한 이후로 마르고 달토록 시간마다 강조한 것 중에 하나가 구약 예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는 예언은 바로 앞에 있는 사건을 보여줌과 동시에 더 멀리 있는 하나의 사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이중예언이라고 그랬어요.

 

이중예언의 성격이 있다. 그래서 바로 앞에 올 사건은 뭐냐하면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뜻이 잘 맞아서 두 사람이 평화가 되어가지고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도해서 그들의 소원이였던 무엇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가까이 이루어 질 예언이란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더 멀리 올 더 중요한 사건을 이제 겨냥하고 있습니다.

 

, 여호수아의 모습, 여기 왕관을 쓰고있는 제사장이면서도 왕이 된 여호수아의 모습, 제사장과 왕의 기능을 한꺼번에 완수할 분, 이분은 누구의 그림일까요? 예수님, 맞습니다. 메시야의 그림이에요. 바로 메시야, 예수그리스도. 그는 왕이시면서 동시에 뭡니까? 제사장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이 무슨 뜻입니까? 기름 부음을 받으신 자, The anointed,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 입니다.

 

구약에서 그 자리에 취임할 때 기름부음을 받는 종류의 사람, 세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죠 누구입니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요.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 신앙고백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에요. 이것 깨달으면 크리스챤이에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 예수님의 본래 이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본래이름, 예수님의 본래이름 예수에요. 굉장히 심오한 질문인줄 알고 하하~ 예수님의 본래이름은 예수에요. 그런데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에요. 그걸 주의하셔야 돼요.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뭡니까? 그리스도는 일종의 타이틀이예요. 타이틀, 즉 기름 부음을 받으신 자,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셔서 오실 메시야다. 메시야다.

 

구약시대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기능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신 자, 그런데 어느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고백했던 놀라운 발견이 어떤 발견이였습니까? 베드로의 고백 속에 보는 것처럼, 주님 당신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고백의 에센스에요. 가장 중요한 핵심이란 말이죠.

 

, 그래서 여호수아가 제사장인데 왕관을 쓰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누구의 그림이에요? 바로 메시야되시는 예수님의 그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사실 구약시대의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그 이름 자체가 예수라는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똑같은 말입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우리가 단기적으로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협력에 의해서 뭐가 이루어져요? 성전이 건축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날 보다 놀라운 사건을 지금 여기서 예언하고있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에 대한 또 하나의 아주 아름다운 상징적인 표현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어떤 표현이 등장할까요, ? 어떤 표현이 등장합니까? ''. , 12절에 12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 다음 12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이 사람이 순이다! 이 사람이 여호수아가 바로 순이다.

 

,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돋아 나와서 뭘한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순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썼습니다. , 참 아름다운 표현이죠 순, 예수님은 순과 같은 분이다. 순의 이미지가 어떤 이미지입니까? 순은 순하지요 녜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움의 이미지, 철 그러면 어떤 이미지가 느껴져요? 강력함, 견고함, 딱딱함. 그러나 순은 정반대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우리에게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서 보면 이사야서는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묘사할 때 그분을 순으로 묘사합니다. 순과 똑같은 표현을 다른 말로 말하면 싹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새싹 싹, , 새로운 싹, Branch, 가지, 가지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순과 같다. 가지와 같다.

 

, 우리가 이사야서 몇 편를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4, 우선 이사야4장 한번 찾아보세요 이사야4, 42절을 우리가 같이 읽겠습니다. 이사야42절 다같이 시작,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하나님의 싹이 하나님의 순이 Branch가 아름답게 돋아날 것이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에요.

 

, 좀더 구체적인 예언을 우리는 저 유명한 이사야53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53장입니다. 이사야53장입니다. 2절입니다. 이사야53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장차 오실 메시야의 이미지, 그 이미지를 그릴 때 그는 주앞에서 자라나기를 마치 뭐처럼 자라난다? 연한 순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자라난다. 조용히, 별로 그렇게 화려한 모습 없이 조용히 돋아납니다. 그러나 거기엔 생명력이 있어요. 그래서 마침내 모든 사람을 살리는 그 생명을 제공할 순

 

, 이 조용한 순, 아름다운 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이 순의 이미지로 나타났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오신다 막 광고하고 떠들석하게 온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베들레헴 구유에서 조용히 태어나셨어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태어나셨어요 그러나 조용히 태어나셔서 시작된 그분의 조용한 생애. 온 세상을 바꾸어놓은 생애에요.

 

저는 요즘 우리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미래의전도 사역을 펼칠 것인가 이런 것을 많이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번 우리 목회 스탭 회의 속에서도 앞으로 창립5주년도 맞이하고 그러는데 우리 교회가 좀 적극적으로 전도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이런 의견도 우리 사역자들 가운데 있었어요.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교회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전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너무 소극적이다. 우리가 좀 적극적으로 나가서 전도를 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나 또 한편 제 마음속에 그러지 않아도 제 발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교회가 적극적으로 전도를 하다가 보면 그것이 주변 다른 연약한 교회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않을까 이런 생각도 있어요. 제 마음 속에, 그리고 야단스러운 그런 이미지, 과거의 시대의 전도는 막 소리지르면서 예수님을 선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저는 하나님이 쓰셨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전도 21세기를 바라보는 전도의 방법, 저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통해서 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이번에 그 개신 교회들에 대한 신앙의식 조사 보고서를 보아도 불신자들이 여러가지 종교 가운데 한국에서 제일 싫어하는 종교가 뭐냐 기독교다. 그러면 기독교를 왜 싫어하느냐? 제일 중요한 이유가 극성스러운 전도 때문이에요. 그런데 전도하지 않으면 안돼요. 전도는 해야되요.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좀 매력적으로 전도할 수가 있느냐 저는 21세기의 우리 과제가 이미지 전도라고 생각해요. 이미지 전도, 매력 있는 전도,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전도, 전도하면서도 주의 지상명령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복종하고 우리가 뜨거운 팻션과 영혼들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전도하면서도 그 전도하는 방법이 무례하다든지 침략적이라든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모략한다든지,

 

심지어는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지구촌 교회에 오지않게 하기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요즘 어떤 교회에서 선전하기를 지구촌 교회는 이사 간다! 선전까지 하는 교회들이 있다고 해요. 이 주변에, 이사 갈 계획 전혀 없습니다 하하~.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동산을 계속 일구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냐 전혀 그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조용한 전도 그러나 매력적인 전도, 이웃들에게 사랑스러운 친절과 또 그들에게 조용히 다가서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해줄 수 있는 전도,

 

그래서 저도 저 아파트에서 어떻게 전도할까 생각하다가 제 아내에게 제가 강력한Pressure를 집어 넣었습니다. 반장 할지어다! 그래서 요즘 반장하고 있어요.하하~ . .그런데 반장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그래요 한 순간에 그냥 아파트 사람들을 다 알게 되었대요. 다 인사하고 말이죠. ,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분간 전략상 절대로 예수이름 내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당신이 반장 끝나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라고 그랬습니다. 이미지 이미지 전도하라고 그랬습니다. 우선 사람들에게 참 조용하고 친절한 그리스도인들의 이미지와 사랑을 심고 그 다음에 조용히 다가와서 그들의 삶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대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전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에 가까운 전도의 방법이 아닐까, 예수님이 이땅에 계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전도했을까 저는 이러한 생각들을 많이 해봅니다.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 나는 무어라고 그랬어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누구든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 그 안식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초대했을 것 같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올지어다!!! " 하하~~

 

거기서 안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파괴를 느낍니다. 혐오감을 느껴요. 정말 아파하는 사람들 곁에 조용히 다가가서 요즘 힘드신 것이 있는 모양이죠? 저하고 같이 차 한잔 하세요. 그리고 차 한잔의 대화 속에서 조용히 그리스도를 전해줄 수 있는 방법, 저는 이런 이미지,

 

저는 21세기를 향한 저는 우리 교회의 모습, 우리 교회 스타일, 어느 교회마다 그 스타일이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무례하지 않지만 예의 바르면서도 우리 속에 뜨거운 열정을 지닌 고요한 방법의 다가 섬, 저는 이것이 순 이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그런 이미지를 느낍니다. , 순과 같이 조용히 돋아나서,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여기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 그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마지막 광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자, 스가랴 마지막 절, 스가랴1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저는 이 15절에 가까이 있을 성전 건축을 겨냥한 의미도 있지만 저는 이것은 보다 멀리 바로 본 스가랴의 예언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수많은 이방인들이 먼 데로부터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 이것은 바로 신약교회 입니다. 신약교회 New Testament church, 신약교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비젼의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 데 있는 사람들이,

 

, 이 예언의 약속이 이루어지고있는 장면을 우리는 사도행전의 선포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238절 한번 찾아보세요. 사도행전238절 사도행전238,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사도행전238절과 39절 다같이 시작,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 바로 오순절 광장에서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면서 그 장면에서 바로 이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그뿐만 아니라 모든 뭐에요? 먼 데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약속이다.

 

세상 땅끝까지 저 먼 데로부터 주님 없이 살고있던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 믿고 구원 받고, 구원 받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한장의 벽돌이 되어 그들이 연결되어서 이루어지는 성전, 보이지않는 거대한 하나님의 성전, 신약의 성전 신약교회,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스가랴 6장 공부를 마치면서 이런 위대한 역사가 이런 새로운 시대,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여하게 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위대한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네 사람의 헌신, 성경이 오늘 네 사람의 헌신을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

 

그 당시에도 자, 성전을 건축하자는 소리는 높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헌신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네사람의 헌신을 귀하게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역사는 진행된다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문자 그대로 이 사람들이 아마 은과 금을 가지고 나와서 헌신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것을 상징적인 언어로 풀어서 설명 했지마는, 이것을 받으십시요.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저는 우리의 헌신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헌신 그러나 가장 필요한 헌신,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헌신을 헌신이라고 말할 수 없는 헌신의 두가지 측면이 있다면 하나는 몸으로 드리는 헌신이고 또하나는 물질의 헌신이라고 생각돼요.

 

마음으로 헌신하겠습니다. 말을 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몸으로 직접 드리는 헌신, 그리고 물질의 헌신, 이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이 네사람이 물질적인 헌신을 했을 때 바로 그 당시 성전건축이 진행되었고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네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드디어 저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구속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려온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있죠? 쟌웨슬레가 요한 웨슬레가 한 유명한 말,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를 믿을수가 없다. 그 말을 바꾸어보겠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헌신하지 않은 사람의 헌신은 신용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인 헌신 구체적인 물질, 왜 물질의 헌신이 귀합니까? 물질은 하나님을 떠나버리면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구체적인 헌신이 없으면 물질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가장 교묘한 가짜 우상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물질주의 빠져 사는 것은 우리가 Mammonism, 만몬주의라고 말하죠? Mammon, 그런데 Mammonism라는 말의 뜻이 I believe, 나는 믿는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물질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믿어요. 내가 가지고있는 돈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을 주앞에 드리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물질에서 자유해지고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주로 삼고,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구체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목회 경험을 통해서 가만히 보면 신앙적인 성장은 물질의 헌신과 거의 비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얼마만큼 드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형편이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얼마나 구체적일 수가 있느냐 이 구체적으로 헌신한 사람들, 이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시대 할일 많은 이 시대 복음의 위대한 영광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여기 한 시대 헌신을 기억하셨고 기념하셨고 기록하셨던 네 사람과 같은 헌신을 오늘 이 시대에 요구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 앞에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시옵소서 내 몸을 쓰시고 내 물질을 쓰십시요. 헌신할 때 하나님의 위대한 새로운 역사는 시작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통성으로 일분 동안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 우리가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을 통해서 본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과 구원,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이방인이 였든 나도 예수 믿고 구원 받아 교회의0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었다면 우리주변에 많은 이방인들이 또 한번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과 저의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부족하지만 저를 써 주시옵소서. 저의 인생을 쓰시고 저의 존재를 쓰시고 저의 시간을 써주시고 저의 물질을 써주시옵소서. 주의 백성들의 헌신이 결단되어지고 드려지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새 시대를 새 역사를 새로운 영광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저 같은 사람도 써주시겠습니까 역사해 주시옵소서.

 

 

 

오 사랑의 주님 연하고 연한 볼품없는 순처럼 줄기처럼 땅에서 돋아 나온 순과 같은 예수님 그런데 그 주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접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받고 새롭게 인생을 살기 시작한 나, 원하시면 저도 순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 조용한 순, 뻗어가는 순, 생명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펼쳐져 가는 순, 그러나 시끄러운 순이 아니라 조용히 조용히, 그러나 매력과 향기와 아름다운 생명력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다가서는 순처럼 나를 쓰시고 우리를 쓰시고 우리 교회를 써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진정한 금식 /7:1-7:14/ 이동원목사

2014-12-05 20:10:47

 

오늘은 스가랴서 공부, 스가랴 제 7장이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가랴서의 세번째 부분으로 다가서게 되겠습니다. 스가랴서 전체를 4개의 커다란 구조로 나눌 수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서론, 11절부터 6절까지. 크게 두번째 부분 17절부터 시작해서 6장까지 이르는 부분인데 이 부분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8개의 환상이 있습니다. 이 스가랴서의 제3번째 대목이라고 할 수가 있는 부분은 7장과 8장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두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두개의 예언, 두개의 신탁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 두개의 메시지. 세번째 부분에서 두개의 메시지 중에 첫번째 메시지 7장은 무엇에 대한 메시지 입니까? 금식에 대한 메시지. 우리가 7장에 어떤 Title, 제목을 부여할 수가 있다면 진정한 금식. 또한 참된 금식이라 이렇게 제목을 붙일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몇 차례에 걸쳐서 소개한 바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 교회도 연구조사에 같이 헌금으로 동참을 했던 작년도에 있었던 한국인들의 신앙의식 조사 보고서. 코리아 갤럽을 통해서 조사된 한국인의 신앙 의식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한국 땅에 종교를 믿고 있다 이렇게 대답한 사람들이 모두 52.8%입니다. 52.8% 종교가 없다. 종교를 안 믿는다

 

대답한 사람이 47.2%가 됩니다. 그럼 종교인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비 종교인보다는 약간 많은 그러한 통계률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지나간 10년 전하고, 비교하면 10년 전에 나는 종교를 믿고 있다가 49%. 안 믿고 있다가 51%였어요. 거기에 비하면 역전된 것입니다.

 

이제 종교인의 숫자가 비 종교인 숫자보다는 이 땅에서는 훨씬 더 많다. 그런 결론이 되겠습니다. 종교인 인구는 이 땅에서 서서히 계속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개신교인들이 얼마나 되느냐? 나는 종교인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52.8%인데 한국 땅에 개신교인들은 20.7%에 해당됩니다. 20.7% 천주교인 7.5%입니다.

 

우리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함께 기독교라는 큰 테두리 안에 묶어 버릴 수가 있다면 이 땅에 기독교인구가 28.2%가 됩니다. 거의 한 30%. 이 땅의 30%가 기독교적인 적어도 메시지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30%. 불교인구가 이 땅에서 23.5%입니다. 23.5%. ~~ 이러한 통계에도 불구하고 이 조사 보고서에 이런 대목이 있는데요.

 

자신들의 그 신앙생활과 일상생활. 자신의 그 교회생활이라든지 그리고 그 일상생활과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그 설문, 그 질문앞에 개신교인들은 64.7%가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64.7% 천주교인들은 61.5%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매우 주관적인 대답이죠. 대답이 뭘 의미하는 지는 다시 분석해 봐야 하고, 그 중에 상당한 부분은 주관적 착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전혀 일치하지 않으면서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으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30%이상 30% 내지 약 40% . 30%내지 40%는 자신의 신앙생활과 일상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괴리감 속에서 갈등하며 살고 있다는 그런 통계가 됩니다. 가정 생활의 만족도를 물었습니다.

 

개신교인들에게. 개신교인들에게 당신들의 가정 생활에서 어느 정도 만족하십니까? 한국의 여러가지 종교 가운데서 개신교인들의 가정생활 만족도가 제일 높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생활 만족도가 약 76.4%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신앙이 기독교인들의 그래도 가정 생활에 매우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그런 결론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 대한 질문으로 왔을 때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직장 생활에는 얼마나 만족합니까? 여기 학생들은 학교 생활에는 얼마나 만족합니까? 그 질문을 던졌을 때 개신교인들 가운데 만족한다, 어느 정도 만족한다고 대답한 퍼센테이지가 54.9%입니다. 그 얘기는 거의 절반, 거의 절반은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죠.

 

가정생활보다도 직장 생활에 훨씬 어려움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신앙인들도 그 신앙을 가지고 직장에서는 제대로 신앙인답게 살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는 것을 이 통계는 우리에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거기다 좀 더 질문이 넗혀져서 이제 외도에 대해서 뇌물 제공에 대해서 이혼에 대해서, 낙태에 대해서, 음주, 흡연, 혼전 성관계,

 

이런 여러가지 도덕적인 질문들을 던졌을 때, 이 땅의 기독인 가운데에서 거의 30%이상은 매우 허용적인 도덕적인 기준 바깥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계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아직도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통계 수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는 열심히 드리는 것이예요. 찬양도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우리의 이런 신앙이 예배당 밖을 벗어나면 매우 무력해 진다. 신앙이 우리의 삶 속에 별로 적용이 안된다는 그런 고민을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찬송을 열심히 불렀어요. 그런데 예배당의 밖, 바깥에 나가면 벌써 차 운전대를 잡는 순간 주차장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빨간불이 있으면 용감하게 빨리 빨리 건너갑니다. 신앙이 우리의 삶의 실제적인 삶의 영역 속에 구체적인 적용이 안되고 있다는 그런 문제가 한국 개신교에 매우 커다란 과제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저는 이 땅에 진정한 신앙의 부흥이 신앙의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장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신앙이 예배당 안에서 갇혀 있어서는 안되고, 특별히 저는 직장 생활에서 직장 생활에서 학생들은 학교 생활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직장 생활하는 그리스도인 답게 학교 생활하는 사람이 많아 져야 돼, 가정은 물론이고, 가정도 좀 더 이것이 퍼센트가 많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21세기, 2000년대를 내다 보면서 특별히 중요한 초점을 우리 평신도들이 삶의 한복판 속에서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우리가 어떻게 도울 것이냐? 우리 가정생활을 어떻게 할 것이냐,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이냐?

 

교회 모든 성경공부와 훈련 프로그램은 단순히 그것이 공부를 위한 공부여서는 안되고 그것을 가지고 직장에서 선교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직장에서 삶을 살고 직장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미래, 혹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내일을 전망할 수가 없다. 매우 중요한 결론 속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21세기 비젼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일찍이 기독교 공동체, 신앙 공동체가 존재하는 곳에서 언제나 있어왔던 문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이 문제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 그 당시에도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 ,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본문은 금식에 대한 메시지가 나와요. 그러나 이 금식에 대한 메시지는 단순히 금식을 위한 금식을 강조만 하려는데 선지자의 교훈의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이 금식이 진정한 삶의 회복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금식이 종교 행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찬송만 잘 불렀다. 화끈한 예배를 드렸다.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한마디로 오늘 저는 스가랴 7장의 메시지를 한 문장 혹은 단순한 한줄의 단어로 스가랴 7장을 요약할 수가 있다면 진정한 금식은 진정한 삶이다. 라는 말로 요약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금식이 삶의 회복을 가지고 올 수가 있느냐? 거기에 초점이 있어요. 지금까지 8개의 환상 스가랴서에 나타난 8개의 환상은 주로 그 성전이 어떻게 회복되느냐? 또한 예루살렘 도시가 어떻게 회복되느냐에 중요한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회복되고 성전이 회복되는 그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내면의 회복 그리고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느 삶의 회복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 7장과 8장의 핵심적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오늘 우리는 7장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1절부터 3절까지 이것은 사람들의 문제 제기. 71절부터 3절까지가 사람들의 문제 제기. 스가랴서의 두번째 부분인 74절부터 7절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의 문제 제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문제 제기. 그리고 78절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기대와 징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와 징계. 이렇게 세 대목으로 단락으로, 다시 스가랴 7장을 나누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스가랴 71절부터 3절까지는 어떤 사람들이 와서 문제를 제기 합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 합니다.

자 이렇게 시작합니다. 71, 2, 3절까지. 71절부터 3절까지.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다리오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울면 재계하리이까"

 

, 질문을 던졌어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 때는 다리오왕 사년 구월 사년 구월. 우리가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의 그 묵시를 받고 환상을 받기 시작한지, 시간이 상당히 흘렀습니다. 얼마나 흘렀느냐? 11절하고 비교를 해 보세요.

 

스가랴서 11. 자 스가랴의 메시지는 언제 시작이 되었습니까? 11. 다리오왕 언제 이년 팔월 ,이년 팔월. 그런데 71절에 보면 얼마예요. 다리오왕 사년 구월 .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사년 구월 빼기 이년 팔월. 21개월. 2년하고도 한달이 지냤어요. 2년 하고도 한달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났냐하면 2년 반동안 스가랴서가 환상을 받는게 한꺼번에 좌~악 받는게 아니예요.

 

환상 받고 조금 있다가 또 받고. 그러면서 세월이 2년 정도 흘러간 것입니다. 그 동안에 성전이. 2성전. 소위 The Second Temple. 2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지어졌느냐? 절반쯤 지어졌어요. 절반쯤. 무척 기뻤겠죠. 이제, 그동안 성전을 절반쯤 건축의 절반쯤 완성 되었으니까, 매우 마음 속에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때가 BC 518년경. 518년경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 뭐 기슬래월 , 기슬래월 그랬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달력으로는 구월, 또 요즘 달력으로 말하면 더하기 셋하면 되요. 더하기 셋하면 12월쯤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 그런데 바로 그 때에 그러니까 성전이 지금 완성된 것이 언제냐 하면 언제예요. 여러분 아십니까? 혹시 BC 약 오백 언제경일까요, 2년 후에 성전이 완성됩니다.

 

모두 한 4년에 걸쳐서 이 성전은 건축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절반쯤 완성된 상태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도착을 합니다. 2절에 보시면 때에 벧엘 사람이 벧엘은 북쪽이죠.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도시인데,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그 대표예요. 그 북방 벧엘 도시를 주변으로 한 지역 대표 두 사람 . 사레셀과 레겜멜렉이 그 종자들. 즉 수하들 , 수행원들을 거느니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다음에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이 바로 3절입니다.

 

3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즉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즉 지금까지 해오던 관례대로 습관대로 오월달에 오월간에 오월달에 울면서 재계를 하리이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 재계라는 말은 어떤 말이냐 하면 몸을 깨끗이 하고 목욕 재계라는 말을 쓰잖아요. 목욕 재계. 몸을 깨끗이 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어떤 제사, 특별히 금식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울면서 다시 한번 오월달에 금식을 해야 합니까? 이 무슨 얘기냐 하면 역사적 배경을 여러분들이 이해 하셔야 합니다.

 

,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는 과정에 있어서 한 4단계로 멸망합니다. 4단계에 있어서 치욕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슬픔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우선 사월달에, 이스라엘 달력으로 사월이면 우리 달력으로는 얼마예요. 7월이예요. 더하기 셋하시면 되요. 그 때 우선 성을 에워싸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 둘씩 포로로 잡아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5월달 예루살렘 도시가 드디어 허물어 지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가 됩니다. 그것이 5월이었어요. 우리 달력으로 말하자면 약 8월경에. 그 다음에 다시 이스라엘 달력으로 4,5, 그 다음에 7월 이어서 두달 후에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살륙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때에 여기 총독으로 와 있던 그다리아라는 총독을 위시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륙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7월 이었습니다. 그 다음 10월달에 완전히 예루살렘은 함락됩니다. 적에 손에 떨어지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4단계로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에 치욕적인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1년에 4번씩 금식을 한 것이예요. , 4월달에 금식하고 4월달에 있었던 그들의 치욕적인 사건을 생각하면서 금식하고 그 다음에 5월달에 성전이 파괴된 것을 생각하면서 또 울면서 금식하고 그 다음에 언제예요. 7월에 금식하고 또 언제 금식했을까요.

 

10월에 금식하고 이러한 금식제도를 4회에 걸친 금식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기적으로 대대적인 금식일이라는 것은 일년에 딱 한번이예요. 대대적인 금식일은 한번이었습니다. 특별히 그것은 속죄일날, 소위 욤 키핑이라고 불리워지는 대 속죄일 그 때에 일년에 한번씩 전 민족적으로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민족이 멸망한 치욕적인 사건을 회상하면서 포로로 잡혀간 후에 4월이 되면 금식하고 5월달 또 금식하고, 7월에 또 금식하고, 10월에 금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몇월달이 나와요. , 73절에 5월이 나오죠. 5월달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요. 성전이 파괴되었거든요. 그러니까 성전이 파괴된 것을 생각하면서 울면서 금식했던 거예요. , 지금 스가랴가 이 환상을 받기 시작한 이래로 성전이 어떻게 됐습니까?

 

절반쯤 건축이 됐단 말이죠. 그러니까 물어 보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이 절반쯤 건축되었으니까 기쁜 일이죠. 이 기쁨을 생각하면서 아니 지금도 금식을 해야됩니까? 금식을 계속해야 옳습니까? 라는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 절반이나 건축된 이 시점 속에서도 계속 해야 합니까? 70년 동안 그들이 금식을 해왔어요.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70년동안 이것을 계속해오는 동안에 이것은 일종의 형식이 돼버렸습니다.

 

형식. 물론 하나님이 어떤 지시를 한 것은 아니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꼭 수요예배와 같습니다. 수요예배 성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니까 뭐, 일주일에 한번 가지고 부족하다. 중간에 모이는 것이 좋겠다. , 좋은 일이죠. 그래서 우리 일주일에 한번 중간에 모이기 시작한 것이예요. 어떤 사람은 그것도 성경에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만약 수요일날 안되면 큰일나는 줄 생각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게 시간이 흘러가면 이러한 일들이 우리가 행하던 일들이 습관화되고, 형식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제도 성전이 절반이나 건축된 이 시점에도 계속해야 합니까라는 것이 벧엘에서 파송된 사람들의 문제의 제기였습니다. 문제제기.

 

, 그 다음에 74절부터 7절까지 보면 이번에는 하나님의 문제제기 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대로 문제를 제기 합니다. 그것이 4절부터 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4절부터 7절 다 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칩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이면서 하나님이 다시 반대로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상 깊은 말이 그래 너희들이 금식을 했다. 특별히 여기서는 몇번 금식을 얘기했습니까? 오월하고 칠월 금식을 얘기했었요. 금식이 4번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더 큰 금식 대표적인 금식이 오월과 칠월달의 금식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것 얼마나 슬픈 일이예요. 거기다가 총독,

 

그다리아 총독을 위시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륙을 당했던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애통하면서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묻습니까? 5절에서 무어라 묻습니까? 5절의 인상적인 단어가 무엇입니까? 70년 동안 이렇게 해왔는데, 계속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랬더니 다시 반문하기를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한번 묻지 않고 그 단어를 몇번 반복했습니까? 또 한번 반복했어요. 나를 위하여, 정말 나를 위해서 했느냐? 너희들이 금식을 나를 위해서 했느냐? 정말 나를 위해서 했니? 라고 두 번을 물어보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6절에 또 재미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의 이번에는 금식 얘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먹고 마심도 금식도 나를 위해서 했느냐 말을 질문하시면서 너희들의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했던 것이 아니더냐?

 

이것도 참 재미난 하나님의 대답인 것예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그래도 우리가 지난 70년 동안 열심히 금식했습니다. 금식 계속할까요, 말까요. 하나님의 대답을 단순하게 말하면 무슨 대답을 하는 것예요. 먹든지 말든지 나는 관심없다. 중요한 것은 뭐예요. 동기가 뭐냐. 뭐 때문에 먹었느냐? 혹은 무엇 때문에 먹지 않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금식을 했느냐, 안했느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뭣 때문에 금식했니? 또 먹는 것은 무엇 때문에 먹었니? 사실 금식했다는 자체가 잘한 것은 아니예요. 그 금식을 한 동기가 중요한 것이죠. 먹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뭘 먹었느냐 점심에?

 

메뉴가 뭐냐? 지금도 앞으로 계속 할 메뉴가 뭐냐, 오늘은? 생각하는 분이 계시질 몰라요.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뭐가 중요할까요? 동기가 뭐냐, 목표가 무엇이냐 이것이예요. 이것은 신약적인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사도가 유명한 고린도 전서 1031절에서 하신 말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으면 먹는 것도 귀한 일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으면.

 

그냥 먹는 것이 아니고 주님 제가 건강하면요, 오늘 오후에도 열심히 제가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가정 생활을 하고요, 또 안 먹을 때에도 뭐예요. 제가 이 문제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금식하고 기도할게 하나님 인도해 주세요. 그래서 제 삶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수종 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예요 라고 하면 먹는 것도 귀한 일. 그 다음에는 또 뭐예요. 안 먹는 것도 귀한 일인 것이예요. 그것이 다.

 

그러나 먹는 다는 것 자체, 또 안 먹는다는 것 자체. 무슨 금식 자체에 위대한 축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아예 명함 관리하는 것도 아닌데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 한 사람을 써 갖고 다니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게 뭐예요.

 

뭣 때문에 한 거예요. 자랑하려고 명함 만들어서 다니려고.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금식을 했느냐? 주님은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예요. 왜 금식을 했느냐?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금식했느냐? 처음에는 그렇게 했겠죠. 아마 처음에는.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예요. 너무 슬퍼서 성전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땅에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했을 거예요.

 

한참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뭐예요. 거기서 진정한 동기나 목적은 사라지고 자기를 위한 것, 자기를 위한 동기 밖에는 안 남았다 이 말이죠. 정말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 하나님께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동기를 가지고 금식을 했더냐? 이걸 질문하는 것이예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했느냐?

 

나를 위하여. 두번씩 반복했습니다. 강조의 의도가 있죠. 신약에서도 언제든지 예수님이 강조할 때 무슨 말을 합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런 강조, 반복은 강조의 의미도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다음에는 뭐라 그랬습니까? 너희가 먹는 것도 누구를 위해서 먹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먹은 것이 아니였더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 7절이 결론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7. 7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중요한 것은 뭐다. 중요한 것은. 금식이냐,

 

먹는 거냐, 먹을거냐, 안 먹을 거냐. 그것이 문제라도가 아니고 뭐가 문제예요. 청종이 문제로다 이 말이예요. 7절의 메시지는 순종이 문제다. 너희가 정말 내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기를 원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때에는 순종할 때에는 너희가 청종할 때, 내 말을 듣고 내 말대로 살고자 했을 때, 정말 순종할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순종할 때에는 예루살렘이 축복을 받았고, 뿐만 아니라 남방과 평원에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저 남방 땅. 네게브 지역은 사막 지역입니다. 사막 지역이예요. 심지어 순종할 때에는 사막 지역까지 축복을 받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좋으냐, 안 좋으냐,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먹느냐, 안 먹느냐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 환경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말 순종하는 삶을 살겠느냐, 그것이 문제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 제기예요. 하나님의 문제제기.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기대를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대한 것, 그러면서 그 기대를 져 버렸을 때 하나님의 징계가 어떠했었는가를 다시 상기 시켜주시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내가 한 절 읽고 다음 절 여러분들이 읽어 주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휴를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 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

 

"14절 다 같이 " 회리 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9절과 10절을 특별히 보시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삷을 볼수가 있어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하여 금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했다면 그들의 삶속에서 이러한 삶이 있어야 마땅했다. , 그들이 금식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써 살기를 원합니다.

 

금식의 목표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었다면 여러분 잘 들으십시요.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이 나타나야 할 것은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도 나타나야 되요. 그것이 거기만 머물면 안돼요.

 

수직적인 관계로만 머물면 안된다 말이죠. , 내가 하나님께 예배했다. 금식했다. 이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은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장.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떻게 사느냐.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예배 드렸느냐?

 

이것은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예요. 예배당 문 나갈 때부터 봐야 해요. 그 때 봐서. 저 아래 주차장에 가서 봐야되요. 조금 더 따라가봐서 가정에 가서 봐야 되요 조금 더 따라가 봐야 되요. 직장에 가서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예배를 얼마나 제대로 드렸나를 거기서 볼수가 있단 말이죠.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볼 수가 있다.

 

9절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이건 두가지가 강조된 것이예요. 재판. 재판의 핵심은 뭐예요. 재판에서 뭐가 이루어, 재판는 어때야 됩니까? 공평해야 되요. . 재판의 핵심은 의. 의에 있습니다. 공평함. 의에 있어요. 정의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뭘 강조했습니까.

 

인애와 긍휼. 사랑이죠. 한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그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두가지가 있어야 되요. 뭡니까? 정의와 사랑. 의와 사랑이 있어야 된다 말이죠. 의롭고 사랑.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우리안에 뭐가 있어야 되요. 두가지가 있어야 되요. 의로움이 있어야 되고, 사랑이 있어야 되요.

 

어떤 사람은 의는 있는데 사랑이 부족해. 어떤 사람은 사랑은 있는데 의는 부족해. 이 두가지를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말이죠. 그 다음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의와 긍휼을 이루는 삶을 우리의 인간 관계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금식의 의미다. 참된 금식을 했다면 이런 삶이 나타나야 한다. , 이것이 구약성경에 매우 일관성 있는 강조점이예요.

 

이사야 58장을 찾아 보세요. 한번 이사야 58. 이사야 58. 7절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587.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금식에 대한 교훈을 말할 때 마다 늘 찾는 말씀이 이사야 585, 6, 7절 이런 말씀을 우리가 많이 읽게되요. 6절 한번 읽어 볼까요. 6. 이사야 586절 먼저 . 다같이 시작.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그것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 우리가 이 말씀 보통 읽을 때 금식을 강조하면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 부분을 생각하고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기뻐하는 금식을 하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을 하자. 그러나, 기뻐하는 금식이 뭐냐? 그것은 묻지 않아요. 기뻐하는 금식이 뭘까요.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냐. 이런 삶이 이뤄져야할 한복판은 구체적인 삶의 장이란 말이예요. 삶의 장. 7절에 나오잖아요. 7절이 뭐예요.

 

7절 다 같이 시작 "또 주린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불쌍한 사람은 돌봐주고, 사랑을 실천하고, 그것이 진정한 뭐예요. 기뻐하는 금식이 이뤄지는 결과적 삶의 모습이란 말이죠 .그런데 반대로 5절보시면 이사야 585

 

, 이사야 585절에 보시면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그 이유는 4절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이사야 584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사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금식하면서 싸우고 다투고 뭐,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다 말이죠 그러면서 금식할 때 되면 또 다 열심히 금식한다 말이죠. 금식 왜 하느냐? 이런 얘기예요. 예배 드리고 가서는 싸우고, 미워하고 중상하고, 시기하고 말이죠

 

. 그러면 예배 왜 드려. 도대체 예배. 예배 왜 드려.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예배를 드렸느냐? 얼마나 제대로 금식 했느냐? 그것은 그 순간에는 잘 몰라요. 거기에 따라오는 삶의 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설교 왜 들었느냐? 설교. 설교 왜 듣습니까?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설교. 내가 말씀대로 살아보자 이 동기가 없다면 설교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성경 왜 읽습니까? 성경 읽고 말씀 듣고, 영적 양식을 취하는 것이예요. 영적 양식을. 그러면 영적 양식을 왜 취합니까? 질문 바꿀까요. 여러분 우리가 하루에 세끼, 세 때 식사를 왜 합니까? 식사하시는 이유, 잡수기 위해서 잡수십니까? 식사를 해야 힘을 얻고, 제대로 살기 위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그 다음이 더 중요한 것이예요.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 더 중요한 것이예요. 먹고 제대로 살려고. 그런데 먹고 자기만 해. 그냥. 또 먹고 형편없이 그 다음에는 아무런 거기에 따라오는 정당한 삶이 없다 말이죠. 이건 먹는 목적을 잃어 버리는 것이예요. 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먹게 하셨을까? 그러나 먹어야 되요. 먹고 제대로 인간답게 살기위해서 영적인 양식도 마찬가지예요. 먹기만 하고 삶이 없어요. 먹기만 하고, 성경공부는 왜 해요? 말씀은 왜 들어요?

 

삶이 없어요. 이런 사람을 박학 다식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박학다식. 박학다식. 박학 아는 것은 적고 많이만 먹는다. . . . . 그냥 먹기만 해요. 그냥. 먹는데 목적이 있어요. 진정한 삶이 없고 진정한 지식이 없어요. 진정한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이 없다 말이죠. 여러분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게 자랑일까 아닐까? 나는 하루에 8끼 먹었다. 자랑이예요. 아니예요

 

. 저 미쳤나, 하루에 8끼씩 왜 먹어? 먹고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공부만 한다. 예배만 드린다. 금식만 한다. 그것이 축복이 아니예요. 그것하고 뭐해요? 살아야죠. 내가 들은 말씀가지고 붙들고 살아야 한다 말이예요. 그대로 살아야 한다 말이예요. 그리고 사랑할려 그러구. 이웃을 끌어 안으려고 그러고, 복음을 실천할려고 그러고, 전도할려고 그러고, 그 삶이 있어야지. 그 삶이 없이. 그냥. 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말이죠. 종교의식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구약에 일관성 있는 강조점이예요.

 

여러분 아모스 5장도 보시면 구약에 아모스 5장도 한번 보세요. 아모스 521. 아모스 521. 아모스 521절부터 24절까지 한번 같이 읽어보겠어요. 다 같이 시작. "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 , 얼마나 신랄하게 그리고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하게 진정한 금식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종교생활 진정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뭐냐, 21절이 무엇으로 시작되요, 내가 절기를 미워한다. 절기를 위한 절기. 그냥 종교적인 절기만 지키기 위해서만 지키는 것.

 

그것을 미워하고 그러한 성회들은 기뻐하지 않는다. 그 자체에만 어떤 종교의식을 치루웠다. 규례를 치루웠다. 예배를 드렸다. 금식을 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하실것이요.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않겠다. 차리니 그럴려면 네 노래 소리를 그쳐라. 비파소리도 그쳐라. 찬송소리도 끝내라. 네가 살 마음이 없다면 찬송 부르는 그 가사처럼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없다면 그것을 관둬라.

 

그러면서 24절이 핵심이죠. 공법을 뭐예요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그것이 없는 종교 생활. 그것이 없는 종교적인 형식과 규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이죠.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보시면 마지막 징계. 그래서 이런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속에 임했던 과거의 징계를 다시 한번 회상시켜 줍니다. 11절로 돌아 가겠습니다.

 

스가랴 711절에 보시면 그들이 뭐라 그랬습니까,?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고 귀를 막았다. 이것은 제대로 들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이다.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했다. 그 마음을 딱딱하게 말씀을 거절하기 위해서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의 신으로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셨던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이 크게 분노하셨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느냐.

 

그 결과로 14절이예요. 14절 다 같이 시작.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래서 너희들이 이방에 끌려갔던 거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처음에 오늘 스가랴 7장에 무슨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 계속 금식 할까요, 말까요. 근데 하나님 대답은 뭐예요. 하나님 대답은 이겁니다. 쉽게 말하면 하든지, 말든지 니들 마음대로 해라. 그것은 내 관심은 아니다.

 

내 관심은 뭐예요. 너희들이 제대로 내 앞에 제대로 사느냐 그것이 내 관심이다. 왜 사람들은 종교적 형식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요. 하나님 토요일날 예배해도 괜찮아요. 하나님 예배시간에 사도 신경 왜 고백 안해요.

 

해야 될까요. 말까요. 하나님 뭐라 대답하실 것 같애요. 본문의 정신에 의하면 하나님 틀림없이 그렇게 대답하실 것 같애요. 니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런 것 관심없다. 중요한 것은 네가 받았던 말씀 그대로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사느냐 그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네 이웃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사느냐 그리고 네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얼마나 책임있게 사느냐 얼마나 공의롭게 얼마나 평화롭게 사느냐?

 

이웃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의를 따라서 살고자 얼마나 진지하게 애를 쓰고 있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오늘 그래도 수요일날 예배 드리고 나니까 기분이 좋다. 좋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 다음을 보겠다. 그 다음을 보겠다. 그 다음을 보겠다. 오늘 7장의 메시지를 요약할까요. 한마디로.

 

진정한 금식은 뭐예요. 진정한 삶이다. 이걸 바꾸면 진정한 예배는 뭘까요. 진정한 예배는, 진정한 예배는 진정한 삶이다. 참된 예배란 무엇일까.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질 그 다음의 삶이다. 나는 거기에 관심이 있다. 거기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바로 금식이라는 종교적, 종교적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보고 싶어 하는 삶의 회복. 그렇습니다. 예배가 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예요. 중요해요.

 

예배를 통해서 은혜 받는 것 중요하고 말씀 받는 것 중요해요.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나타나야 합니까? 그 말씀대로 살도록 삶의 회복이 이루어 지느냐 진정한 금식, 진정한 예배, 진정한 경건, 그것은 진정한 삶의 회복인 것을 믿으시길 바라십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약 1분간 통성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하나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면 오늘도 그러실거예요. 우리가 주일날 예배 드릴 뿐만 아니라, 수요일날도 예배한다. 그것은 좋은 일이예요.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 만큼 내 삶이 얼만큼 달라지느냐. 우리의 가정생활이 우리의 직장 생활이 우리의 인간관계가 얼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으로 변화되느냐?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예요. 얼마나 공의롭게 사느냐?

 

얼마나 거룩하게 사느냐, 얼마나 평화롭게 사느냐, 하나님 도와주소서 정말 주의 말씀을 들어사오니 말씀 붙들고 살게 해 주시옵소서.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그렇게 살아 가는자가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받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요, 단순히 예배만 참여하고, 또 내가 어떤 종교적인 그 규례나 습관을 실천하는 자로 만족하지 않게 도와 주시고,

 

하나님 정말 우리가 결심하고 금식했다면 금식할 때 결심한 것처럼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정말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 드렸을 때 우리가 주 앞에 결심했던 것, 생각했던 것, 그것처럼 이제 우리가 예배당을 나가는 그 순간부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금식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금식의 절제 정신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 같은 사랑하심과 오늘도 주 앞에 나와 말씀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주를 예배하고 또 어떻게 주를 섬기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씀으로

 

교훈 받고 다시 흩어져가는 우리들 삶의 장에 성령의 감동과 또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이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모든 사회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삶. 그리고 내가 구체적으로 그 삶의 장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각 사람을 쓰시고 축복하시고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예루살렘의 희망 /9:1-9:17/ 이동원목사

2014-12-05 20:13:51

 

오늘 스가랴 9장에서 함께 같이 공부하시겠습니다. 스가랴 9장을 함께 같이 공부하시겠습니다.

 

한마디로 스가랴 9장의 장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면 예루살렘의 희망, 혹은 시온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스가랴서를 4개의 커다란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서론

 

둘째는 8개의 환상들, 8개의 이상들을 두번째 부분을 형성합니다.

 

세번째 부분은 두개의 메시지, 두개의 메시지는 금식과 회복의 메시지 7장과8,

 

오늘 9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14장까지, 이 부분은 네번째 부분인데 두개의 예언, 두개의 예언혹은 두개의 신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탁. 신탁이라는 말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느냐 하면

 

, 스가랴 91절을 우리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스가랴 91절 다같이 시작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네 거기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이런 말로 시작되죠? “경고가우리가9장부터 14장까지 마지막 장까지를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면 9장부터11장 까지가 이 두개의 예언 가운데 첫번째 예언이에요 또 12장부터14장까지가 두번째 예언의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두번째 예언이 시작되는 다시 121절을 보시면요 121절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121절 다같이 시작,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121절 어떤 낱말로 시작됩니까?

 

경고경고라 경고란 말을 히브리말로 맛사, 맛사라고 말합니다. 맛사, ~ 이것은 본래 부담이다 이런 뜻입니다. burden 마음의 부담이다. 혹은 이 단어를 어근에서부터 연구하고있는 성서 학자들은 이것이 본래 마음의 부담이 큰소리로 외쳐진 모습이다. 이것은 일종의 심판성의 경고를 뜻하는 말입니다. 심판성의 경고. 종종 이러한 경고들을 아~ 우리 서양 문학편에서는 이것을 신탁이라는 낱말로 불렀습니다. 소위 오라클, 신탁. 미래에 대한 심판성의 경고다.

 

그러나 이것은 비관적인 경고만은 아닙니다.경고의 밑바탕에는 희망적 예언이 동시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네번째 부분, 스가랴서의 네번째 부분을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면9장 부터11장까지가 첫번째 예언, 그리고12장부터14장까지가 두번째 예언.

 

이 첫번째 예언은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경고,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경고. 그러나 이방인의 심판에대한 경고의 밑바탕에서 희망적인 예언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예언.

 

두번째부분 자 이 네번째 부분을 다시 크게 둘로 나누었을 때의 마지막 부분이 12장부터 14장까지는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이스라엘민족에 대한 심판의 경고.

 

다시 경고의 밑바탕에는 다시 희망적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예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메시야의 재림의 예언. 그래서 쉽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자 스가랴서를 크게 네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요.

 

첫째는 서론

 

둘째는 8개의 이상, 혹은 환상.

 

그 다음에 세번째는 두개의 메세지. 두개의 메세지는 뭡니까? 금식과 회복의 메세지.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두개의 예언. 두개의 예언은 쉽게 이렇게, 기억이 잘 안되면은 두개의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의 예언, 재림의 예언. 이렇게 두가지를 생각하고 있어도 되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이방인에 대한 심판. 이방인에 대한 심판이 먼저 나와요.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예언.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예언. 이 두개의 예언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오늘 본문 9장으로 들어와서 이 9장을 예루살렘의 희망,이런 타이틀을 붙였는데 이 9장을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91절부터8절까지, 여기는 알렉산더 대왕의 팔레스타인 정복의 예언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팔레스타인의 정복의 예언.

 

그리고 99절에서 17절까지는 멧시야의 초림의 예언, 멧시야의 오심에대한 예언.

 

이렇게 9장을 다시 두 부분으로 두 섹션으로 나눌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91절부터8절까지, 그 중에서도 다시 또 두 부분으로 나눠요.

 

91절부터4절까지는 팔레스타인 북부지역의 정복에 대한 예언, 5절부터8절까지는 팔레스타인 남부지역의 정복에대한 예언.

 

,우리1절부터4절까지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스가랴91절부터4절까지 다같이 읽겠습니다.시작,

 

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색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2: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은즉

 

4: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

 

자 이 부분이 뭐에요? 무슨 예언이에요? 팔레스타인 북부지역 정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누가 정복하느냐?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을 합니다.

 

주전BC 336년경에 마케도니아에는 아주 존경받는 유명한 한 사람이 왕이 됩니다. 그 왕의 이름이 필립이라는 왕이에요. 필립, 그런데 왕은 나중에 후세 역사에서 그 필립이라는 왕보다 그 아들의 이름이 더 알려지게 됩니다. 이 필립왕의 아들이 누구일까요? 알렉산더 입니다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페르시야의 그 당시의 통치자였던 다리오스를 정복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한 세계에 대한 비전을 갖습니다. 온 세상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겠다. 그래서 온 세계 정복에 대한 꿈을 가졌습니다.온 세상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군사적인 정복자였을 뿐 아니라 그는 문화적인 정복자였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에게서 우리가 흔히 헬레니즘의 선교적 사도, 헬레니즘이라는 헬라 문화를 전파한 그런 사도라 이렇게 보통 일컬어집니다.

 

그는 정복하는 모든 정복지에 피정복지에 헬라의 문화를 심습니다.또 헬라의 스포츠를 심습니다.그래서 알렉산더가 정복한 모든 곳에 헬라 스타일의 그 스포츠 스타디움이, 체육관이 건립이 되고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헬라어를 헬라어, 그리스어를 세계적인 언어로 보급합니다.

 

이것은 사실은 신약적인 관점에서 볼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알렉산더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했지마는 그 알렉산더 배후에서 하나님이 알렉산더를 쓰신것이다, 그러니까 알렉산더가 전세계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만들어놓으니까 나중에 지금 기독교인들의 최후의 명령 지상명령은 뭡니까? 땅끝까지 전도하는 것인데 전도의 가장 커다란 방해물이 무얼까요? 언어가 다른것이에요. 그래서 알렉산더가 세계언어를 하나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얼마나 전도하기에 쉬운거에요?

 

,헬라어, 헬라어를 전세계 공용어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신약성경은 무슨 말로 쓰여집니까? 헬라어로, 이 그리스어로 쓰여집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보통사실이 아니지요.

 

알렉산더는 몰랐지만 누가 쓰셨을까요? 하나님이 알렉산더를 쓰신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많아요. 나도 모르지만 내 배후에서 누가 나를 쓰실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그러니 언제 어떻게 쓰시나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알렉산더를 하나님이 쓰신거에요. 그래서 그는 전세계를 땅끝까지 정복할 야망을 갖고 알려진 그 당시의 전세계 정복원정을 합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 와요. 팔레스타인 땅까지, 이스라엘 땅까지 와서 정복을 하고 애굽까지 정복을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오래 살지는 못했습니다. 33세에 예수님처럼 요절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자, 그가 팔레스타인 땅까지 정복의 발걸음을 옮겼을 때 팔레스타인 땅 지금의 이스라엘땅 북방지역이 어떻게 정복되었는가가 여기 예언되어 있어요. 예언, 저는 이것 하나만 보아도 성경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냐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있어요. 예언한 그대로,정복예언을 한 그대로 정복의 역사가 펼쳐져 갑니다.

 

,1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이 하드락 땅이 어디일까? 신학자들이 아주 논쟁을 벌리는 그 초점중의 하나인데, 일반적으로 오늘날 성서학자 특별히 구약 고고학자들은 이 하드락 땅을 시리아의 땅하고 일치 시킵니다. 특별히 시리아의 고대도시 가운데 하타리카, 하타리카 라는 고대도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고대 비문들의, 그 고고학자들이 그 비문들을 해석해 보니까 그런 도시가 존재했든 그 기록이 나왔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하드락 땅은 일반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면 되요? 시리아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거에요. 시리아 땅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이 다메섹, 소위 다마스코스, 다마스코스, 다메섹,

 

다메섹 하면 누가 생각이 나요? 바울생각이 나죠? 다메섹으로 가다가 회심을 하죠? 이것이 시리아에요. 이 다마스코스 라는 도시는 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시리아의, 그러니까 하드락 땅에 임하며 특별히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요 2, “그 접경된 하맛에도하맛, 하맛은 역시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북방 도시인데 시리아 레바논쪽으로 오른테스라는 강이 흘러가는데 강 상류에 있었든 도시중의 하나가 하맛이라는 도시였습니다. 거기에도 알렉산더가 왔어요. 쳐들어 왔을때 거기까지 왔습니다. 하맛에도 임하겠고, 또 어디에? 두로와 시돈,

 

여러분이 성지 지도를 펼쳐보면 해안지방을 타고 이스라엘 북쪽을 가면 거기 두로와 시돈 이라는 두개의 도시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다시 말하면 알렉산더가 두로와 시돈 까지도 점령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본래 이 두로와 시돈은 그 이스라엘의 해안도시 가운데서도 가장 무역항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해외 무역을 위해서 이 두로나 시돈에서 부터 무역하는 배들이 출항을 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이 도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번영되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았어요. 심지어는 이 도시의 과거를 역사적으로 뒤져보면 고고학적으로 뒤져보면은 은이 먼지처럼 그리고 금이 진흙처럼 쌓여있던 도시다.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곳에 가서 한번 살아보면, 보석상 갈 필요도 없고 은이 먼지처럼 금이 진흙처럼 쌓여있었던 도시, 그것이 시돈과 두로의 형편이였습니다.

 

그 많은 경제적인 부요, 그 돈을 가지고 그들은 매우 강력한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성을 건설합니다. 뿐만아니라 약 그 두로에서 부터 한 반 마일쯤 떨어진, 반 마일쯤 떨어진 조그만 섬이 있었는데 그 섬에다가 150피트, 150자의 철벽 같은 성읍을 건설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처음에 이 두로와 시돈을 점령하는데 한 5개월쯤 걸렸지만 이 사람들이 다 그 바닷가에 있는 작은 섬 안에 그 성을 쌓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 성을 깨는데 알렉산더가 7개월을 소모합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어요. 지금까지 모든 이 두로나 시돈을 격파해 볼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과거에 다 실패했어요. 처음으로 알렉산더가 성공했습니다. 방파제를 만들어가지고 육지와 그 섬을 연결하는 땅을 메꾸는 작업을 통해서 드디어 이 성읍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니까 이 두로와 시돈사람들은 굉장히 교만했어요. 돈도 많고 그리고 왜적에게 점령당한 역사도 없고 우리는 항상 이긴다, 자존심이 있단 말이죠. 프라이드가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굉장히 아주 교만했든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이 도시들을 심판하신다는 거에요. 그 심판의 도구로 누가 쓰임을 받은 겁니까? 알렉산더를 들어서 하나님이 이 도시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4절 다같이 시작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그래서 성경예언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여러분 성경은 그냥 뭐 어떤 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예언하고있고 또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들은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떻게 가능해요? 하나님 말씀 아니에요 이것이? 성경이, 녜 그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이제 95절부터8절까지는 팔레스타인 이제는 북부지역이 아니라 어디도? 남부지역도 정복된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자 한번 그 부분을 읽겠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를 같이 읽어요. 시작

 

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셌 사람의 교만을 끊고

 

7: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 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같이 되리라

 

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

 

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 우리가 그 6절에 보시면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두로와 시돈 사람들만이 교만했던 것이 아니라 그 해안지방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은 남쪽 도시에 사는 사람도 굉장히 교만했습니다. 대개 해안지방 사람들이 돈도 잘 벌고 또 부유하고 그러니까 군사적인 무장도 갖추고 이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 지형적으로 이들은 교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있었을런지 모릅니다.

 

블레셋, 바로 이 남쪽지역에 살고있었든 지방을 주로 블레셋이라고 불렀습니다. 블레셋, 블레셋 족속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죠? 이 블레셋이란 말에서부터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거에요. 필리스틴, 필레셋트, 필리스틴, 팔레스타인. 거기서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이, 지금도 이스라엘하고 팔레스타인하고 싸우잖아요? 바로 그 지역의 원조 원조들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피에로의 원조들이 바로 이 남부지역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보면은 그 남부지역에 유명한 5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4개의 도시의 지명이 다 나타나요. 4개의 도시, 자 어떤 지명들이 나타납니까? 5절에 보시면 아스글론, 또 가사, 가사도 나오잖아요. 가사, 잘 봐요. 가사일에 바빠서 가사가 안보이십니까? 하하~~ 가사, 그 다음에 에그론 에그론, 또 어디에 뭐가 나와요? 6절에 아스돈, 4개의 지명이 나와요.

 

하나만 딱 빠졌습니다. 갓 이라는 도시가 빠져있어요. , . 그 한 도시만 빼고 4개의 도시지명이 여기 다 나타나있어요. 그런데 4개의 도시들이 다 역시 그들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이 남부지역까지도 도시들까지도 휩쓸고 다 점령을 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의 죄 뿐 만아니라 7절에보시면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재하리니그것은 우상숭배를 뜻해주고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우상의 피를 마시든 사람들, 그들이 그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 여기 예언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런 재앙에 대한 예언만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희망적 징후들도 그 7절에 보면은 나타나있죠?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된다고 그랬어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같이 되리라그들은 멸절한다고 예언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가운데 하나님을 믿는사람도 세우고 회복되는 사람도 세우고 가나안 땅에서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다. 그래서 저는 이 피에로,팔레스타인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성경의 예언이에요.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뭐냐하면 사실은 유태인들이 예수를 지금 더 안 믿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해보면 이스라엘땅에 가보면 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오히려. 그래서 우리는 심정적으로 유대하고 팔레스타인 하고 싸우면 어디를 동정하게 됩니까? 심정적으로, 녜 이스라엘에서도 동정적인 그런 마음을 갖습니다마는 크리스챤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운데 훨씬 더 많아요. 저는 그것이 예언의 성취라고 생각해요. 예언의 성취.

 

지금 베들레헴 같은데도 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통치하고 있어요. 다스리고 베들레헴. 그리고 크리스챤 사람들이 적지않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챤 인들을 만나보면 다 유대인들이 아니고 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성경의 예언의 성취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알렉산더의 거침없는 행진,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서 저 북쪽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까지 해안을 타고 내려오면서 하는 정복의 역사 가운데서 기묘하게 한 도시만이 정복에서 예외가 됩니다. 알렉산더가 거기는 정복하지 못해요 뭘까요? 어디를 정복하지 못할 것 같아요 녜? 8절에 나와있어요 8, 8절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8절 다같이 시작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하나님이 어디는 보호해준다고 그랬어요?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보호하겠다. 내 집이 어딜까요? 예루살렘, 녜 예루살렘 도성을 의미하는 거에요. 그래 예루살렘만을 보호하겠다! 그런데 이상하죠? 이상하다 못해 참 놀라운 사실입니다. 미치고 환장하도록 놀라운 사실이에요. 이것이 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졸아야 할 문제가 아니에요 너무 놀라운 사실이에요.

 

 

 

알렉산더가 팔레스타인 땅을 전체적으로 다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요.가다가 아~ 그 캠프에서 군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말씀하셔요. 그래서 알렉산더가 꿈을 믿고 예루살렘을 정복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꿈은 개 꿈입니까 신령한 꿈입니까?하하~ 하나님이 주신 꿈임에 틀림이 없어요. 그래서 이 말씀이 성취되었어요. 8절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에 예루살렘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 땅의 사람들의 교만과 사치와 또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그 심판 속에서도 당신의 집을 구별하고 그 백성들을 지켜 보호하시고 예루살렘성에 하나님의 소망을 두시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 이 세상을 심판하시면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눈동자같이 오늘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십니까?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쳐 보호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상하신 섭리를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자 우리가 9장의 두번째 부분 이제 99절부터 17절까지, 여기는 무슨 예언이 있다고 그랬어요? 9장의 두번째 부분, 9장의 두번째 부분. 메시야의 오심의 예언, 메시야의 초림의 예언.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

 

자 알렉산더는 어떤 의미에서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사자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는 몰랐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쓰신거에요. 그래서 길을 준비하고 세계가 다 통할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고 언어도 준비하고 또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다 보면 선교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문화적인 장벽이에요.

 

문화적인 장벽. 그래서 문화를 어떻게 뛰어넘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문화를 뛰어넘느냐? Cross cultural이라는, 문화를 어떻게 뛰어넘느냐? 그래서 다른 문화 속에 우리와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느냐 이것이 큰 문제인데 그 당시에 참 편리했든 것이 누가 다 문화를 통일시켰어요? 알렉산더가, 다 헬라 문화로 다 이렇게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 놓았단 말이죠. 하나님이 하신 일 입니다. 그리고 할 일을 다 하니까 알렉산더는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돌아가셔야 합니다.하하`~

 

 

 

그래서 할 일을 어느정도 해놓고 나서 알렉산더는 죽습니다. 33세에 요절을 했어요. BC 323년에 죽었는데 죽은 후에 자기의 신하들에 의해서 알렉산더가 통치하든 세계가 한 3개의, 크게 3개의 지역으로 분활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4, 조그만 자치제가 하나 있었습니다마는 보통 3개로 나누는데, 그런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금 이스라엘 땅과 시리아 레바논 그쪽 , 그쪽 지역에 통치자로 임명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등장하는 통치자가 누구냐하면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라는 사람이에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이 사람이 주전 175년까지 통치합니다. 주전175년까지 다스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종의 뭐냐하면 알렉산더의 통치의 연장 선상에서 통치하고있는 일종의 헬라 희랍문화를 가지고 이 팔레스타인 땅을 다스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라는 사람이 악질이에요 문제는, 악질입니다. 아주 악질입니다. 그래서 아주 팔레스타인 땅을 다스리는 동안에 아주 악한 통치를 진행합니다.

 

우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신상, 희랍의 제우스 신상을 앉혀 놓았어요. 그리고 유대인들이 고기 가운데 제일 싫어하는 고기가 무얼까요? ? 돼지고기 싫어해요 유대인들이 돼지고기 안먹죠? 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돼지고기를 돼지 대가리 같은것을 성전 안에다가 갖다 놓고 돼지 피를 성전 여기 저기에다 발라놓고,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죠? 도전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하고 할례를 폐하고 또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종교적 의무를 다 패기하고 반대 시켰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돼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자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짓밟혀온 경험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돼요 그렇게 되면? 열 받지요 뭐 열 받지요 녜,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독립운동을 시작해요.

 

 

 

그때 제사장 가운데 마티아스 라는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는데 경건한 제사장이고 민족을 사랑하는 제사장이 였습니다. 그가 우리민족을 살려야겠다 이렇게 시리아의 횡포를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 자신도 똑똑했지만 자식들이 똑똑해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과 더불어 붕개합니다. 그들을 막카비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않아요 녜? 교회 오래 다니다 보면 좀 어디선가 그런 말도 들어본 것 같은 생각이 나야 되요. 마카비 형제, 소위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중간기. 우리가 구속사를 공부하면 다 공부하게 되는데 마침 내일부터 우리가 구속사를 공부합니다 마는 그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시대를 얘기해 주고 있는거에요.

 

유다 마카비 그 중에서도 형제들 가운데서도 제일 지도자가 유다 마카비. 마카비란 말은 망치라는 말입니다. 망치 hammer, 왜 망치유다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어떤 사람들은 이사람 유다 마카비의 얼굴이 생긴게 꼭 망치같이 생겨서 그렇게 별명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게 아니라 그의 강력한 전술, 게릴라전을 통해서 이 시리아와 대결하면서 매우 효과적인 민족해방 전쟁을 벌렸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드디어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를 쫓아내고 그리고 성전을 회복해요. 성공했어요. 이 독립운동이, 게릴라식 독립운동이 성공을 합니다.

 

13절 한번 보세요. 913, 9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913절 시작,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이게 바로 무슨 예언일까요 녜? 이게 바로 마카비 예언이에요.자 어디에서 알수있어요? 13절에서 어떤 부분? “내가 네 자식들을 격동 시켜하나님이 격동시켜서 누구를 치게 한다구요? 헬라자식들을, 헬라 자식들이 바로 누구에요? 바로 이 시리아.

 

~그리고 바로 알렉산더의 후속 세력들. 그게 헬라 자식들이에요.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여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그랬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성공합니다.성공해서 성전을 빼았고 성전을 뺏고나서 제일 먼저 무얼하느냐 하면 이런 청소를 해요.더러운 것들을 다 청소하고 제우스상을 없애고 돼지 다 없애고 그 다음에 불을 켭니다. 어두워졌든 캄캄했든 성전에 일제히 메노라의 촛불이 등불이 환하게 빛나요.그래서 신약성경에 가면은 그게 수전절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유태인들은 지금도 지키는데 일년 중에 아주 중요한 명절로 지키는데 이것을 하누카! 하누카 그런데 하누카 명절이 꼭 시기적으로 언제 같이 오느냐 하면은 크리스마스하고 같이 와요. 비슷한 때에요.

 

그래서 난 처음에 미국가서 살다가 우리 동네근처에 유대인들이 많은데 집집마다 그냥 다 이렇게 촛불을 많이 밝혀놓아서 크리스마스를 촛불 가지고 다 지키는구나 이 동네는, 무식해 가지고 몰랐어요.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지키는게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누카의 명절을 지키는 그런 의식입니다.

 

 

 

16절 한번 같이 한번 읽어봐요. 16절 다같이 시작,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 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그것이 성취된 거에요.

 

,그래서 마지막에 어떻게 되느냐, 17절 그 결과 다같이 읽겠습니다. 17절 시작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이 포도주나 곡식은 기쁨과 풍요의 상징이죠?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의 회복, 형통함과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모습,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예루살렘의 이런 회복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더 중요한 예언이 나와요.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그렇게 왜적의 세력에서 해방하는 것, 거기서부터 끝나지 않아요.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왜적의 침략에서 해방되어 잘 살게 된다, 하나님은 거기서 만족할 수가 없어요. 더 근본적인 해방,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더 근본적인 해방,

 

이번에는 가난에서의 해방이나 외세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더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 무슨 문제일까요? 죄의 문제, 죄로부터 해방되어 정말 자유한 그리고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해방, 예루살렘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한 분을 예비하십니다. 그분이 누구일까요? 예수그리스도. 그 예언이 어디에 나옵니까? 11절 녜, 아주 유명한 예언이지요?

 

11절같이 읽습니다 시작 아, 9절부터 읽어요 9절 먼저 읽어요.9절부터 먼저 읽겠습니다. 910절을 먼저 읽고,910절 시작,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

 

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리니 그가 이방 사람

 

에게 화평을 전할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우선 거기 까지만 읽으세요. 어떻게 또 이렇게 때를 맞추어서 하나님이 딱 이 말씀을 우리 고난주간에 이렇게 묵상하도록, 제가 계획한 것도 아닌데, 고난주간 이때 9장하자! 딱 그런것도 아닌데, 저는 언제든지 놀래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때를 잘 맞추어주시나, 하나님의 타임테이블은 정확합니다.

 

자 지나간 주일을 우리가 무슨 주일이라고 부릅니까? 지난주일을 종료주일, 녜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멧시야로, 멧시야로 입성하신 그 사건이 여기 예언되어 있는거죠?

 

 

 

BC 700, 주전 700년경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이 사건이 일어나기 700년 전에,그분이 메시야되실 그 예수그리스도가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여러분 그래도 성경이 성경이 아니에요? 우연히 그렇게 일치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우연히? 자 우리가 나중에 신약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뭐 타고 오세요? 나귀새끼 타고 오시잖아요 그대로, 예언된 그대로,

 

, 자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희망의 시작. 진정한 복음 진정한 희망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잘사는 것 뿐만이 아니에요. 인간의 더 근본적인 문제, 죄로부터 해방되어 정말 하나님 앞에 죄 사함 받고 자유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복음이죠? 믿습니까 여러분?

 

 

 

, 이 복음이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뭘 전할것이요? “화평을 전할것이요예수그리스도는 이방 사람들에게 군사적인 정복을 하는 알렉산더 같은 그런 분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는 뭘 전한다고 그랬어요? “화평을 전할 것이요그의 정권은, 예수님의 정권은 어디에 미칠까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어디까지? “땅끝까지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의 정권은 이루게 될 것이다.

 

그분은 어떤 정부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온 세계 안에 그분을 따르는 무리들로 가득합니다. 전세계 흩어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주간에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고난을 기억하잖아요? 이것이 복음의 시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엄청난 역사를 보세요. 이 엄청난 예언, .

 

이게 돌아버릴 문제에요. 이렇게 놀라운, 성경의 예언이 이렇게 정확할 수가 있어요? 아주 디테일 하게 정확한 예언.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11절입니다.

 

1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그런데 어떻게 주님이 해방하시는가? 군사적인 방법으로 정복을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언약의 피를 통해서 하시겠다. “언약의 피!” 이게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이 목요일 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잔을 높이 드시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잔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내 언약의 피!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에요. 언약의 피! ! .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물론 이것은 가까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사건을 얘기해주고 있지마는 궁극적으로 이것은 뭐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언입니다. 물 없는 구덩이같은 지옥에서,

 

사회적인 압제에서가 아니라 이번에는 지옥에서부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든, 황량하고 허무한 지옥에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 분, 우리를 그렇게 건져내시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땅에 오셔서2000년전 바로 이주간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를,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보혈의 피,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고 새로운 생명, 새로운 평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우신 구세주 메시야를 예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그렇습니다. 정치적인 압제보다 더 무서운 영적인 압제. 죄 때문에, 방황하고 죄 때문에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상처 받고 괴롭고 어두운 인생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구세주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그가 예루살렘성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므로 이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사람마다 새로운 삶을 새로운 평강을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감사하십시요. 그의 이름을 높여 드리십시요. 우리 다같이 감사의 기도 찬양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경의 이런 예언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의 사건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렇게 세부적인 것들을 정하시고 역사를 승리하신 하나님 그렇게 인생을 구원하고자 십자가를 준비하시고 구세주를 보내주시고 200년 전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리게 하신 주님이시여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우신 계획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이 사랑과 배려와 계획이 없었더라면 그리스도가 내게 오시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한평생을 죄 속에 어둠 속에 방황했었을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감사와 감격으로 이 한 주간을 지내며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선한목자로 오실 메시아 /10:1-10:12/ 이동원목사

2014-12-05 20:16:42

 

오늘 우리 스가랴서 10장을 함께 공부할 시간입니다.스가랴서 10장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스가랴서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 스가랴서가 네개의 구조로 나누어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네 개의 구조 가운데 첫번째 부분은 서론이고, 둘째는 여덟개의 환상, 이상 둘로 이루어져 있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두개의 메세지, 두개의 메세지가 서론은 1장이고, 17절부터 8개의 비전이 시작됩니다. 두개의 메세지는 7장과8, 이 두개의 메세지의 내용은 금식과 회복의 메세지 였습니다. 그 다음에9장부터 시작해서 14장까지 두개의 예언, .

 

서론, 여덟 개의 이상, 두개의 메세지, 두개의 예언, 이 두개의 예언, 9장부터14장까지 도달하는 부분이 바로 두개의 예언부분 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9장부터 14장까지를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 9장부터11장까지가 첫번째 예언, 그 다음에12장부터14장까지가 두번째 예언이 되겠습니다.

 

첫 예언은 한마디로 말하면 뭐에요? 이방인에 대한 심판. 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두번째는.

 

그러나 단순히 심판에 메세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의 밑바탕에 흐르고있는 중요한 희망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희망은 어떤 희망입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그래서 9장부터11장까지는 예수님의 초림이 아~ 그 중요한 예언의 초점이라고 할 수가 있고 12장부터14장까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번째 부분에서 10장과11, 오늘 그 중에서 10장을 같이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0장과11장은 선한 목자로 오실 그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로 오실 메시야.

 

성경이 그 지도자들에 대해서 사용하는 아주 아름다운 그 표현, 명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목자라는 표현입니다 목자. 지도자라는 말보다도 목자라는 표현을 많이 써죠? 다시 말하면 목자와 양의 관계가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지도자의 그 따르는 자, 추종자들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로 지도자와 따르는 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에 최대의 문제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지도자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리더쉽을 연구하고있는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가장 커다란 현대인들의 그 의식의 변화는 지도자를 그들의 의식 속에서 추방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그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를 그는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봅니다. 신문이 나오고, TV가 나오고 이런 매스미디어가 발달되면서 사람들은 지도자들에 관한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알고 보니까 지도자가 별 것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이런 매스미디어의 발달 때문에 지도자의 신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그 지도자가 옛날 시대에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뭐냐하면 그건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잘 몰라서. 그러니까 모르니까 굉장히, 모르면 그 신비성이 있어요. 모르면 신비성이 있고, 그리고 굉장히 뭐가 있는 것 같고, 그것이 지도자가 옛날시대는 쉽게 등장할 수 있었든 배경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런 매스미디어의 발달, 또 민주주의 발달, 이런 것들이 지도자의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클린턴 대통령이 100년 전에만 나왔어도 위대한 사람으로 아마 존경을 받았을 거에요. 몰랐으니까 하하~~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 지도자의 심지어 침실에서 일어난 일까지도, 한 사람과 나눈 사소한 대화까지도, 딕테이션이 되어서 글자 하나 틀림없이 다 공개되는 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은 소위 지도자의 미스, 신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별 것이 없더라, .

 

이것이 시대의 특성이에요. 그러나 뭐 그까짓, 괜찮을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는 필요하단 말이지요. 공동체는 여전히 지도자를 필요로 해요. 그런데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 속에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는 그런 딜레마 속에 오늘 이 시대를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살고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20세기에 들어오는 초 입구에서 하버드의, 하버드대학에 총장을 지낸 한 분이 이런 말로 잘 표현을 했어요.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20세기 이 시대를 가리켜서,

 

오늘 우리는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잃어버렸다.

 

흔들 수 있는 깃발을 잃어버렸다,

 

세번째로 믿을 수 있는 신조를 상실했다,

 

네번째로 따라갈 수 있는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이런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잃어버리고, 흔들 수 있는 깃발을 잃어버렸고, 믿을 수 있는 신조를 상실했고, 따라갈 수 있는 지도자를 우리는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비극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공부하고 있는 이 스가랴가 살고 있었던 시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그들은 새로운 꿈을 안고, 이스라엘 땅으로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아왔는데 거기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는데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리드가 없는 거에요 리드가 없었어요. 물론 자천 타천에 여러 지도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일시적인 기대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포로 귀환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위 아~자칭 지도자를 통해서 많은 상처를 경험했습니다.

 

그 지도자를 통해서 계속 배신을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경험들을 가졌단 말이지요. 그래서 가짜 지도자들이 기성을 부리고 있었던 시대, 소위 악한 목자 나쁜 목자들이 있었던 시대, 이런 시대 속에서 상처 받고있는 이스라엘 민중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 스가랴 선지자를 오늘 불러서 그에게 메세지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0장의 메세지는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 하십시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가 오시고 있습니다. 바로 그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10장의 핵심이에요. , 지도자를 잃어버린 세대,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있다라는 사실, 그 분은 바로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 메시야가 지도자가 되신다. 이것이 바로 10장의 초점,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우리는 10장을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101절로부터 3절까지는 목자의 필요성, 목자가 왜 필요한가, 지도자가 왜 필요한가?

 

두번째로 이 4절 말씀에서는 목자의 약속, 그 목자가 오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그 다음에 5절부터12절까지는 그 목자의 미션, 그 목자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라는 목자의 임무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101절부터3절까지 목자의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우리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101절부터3절까지,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한 목소리로 시작,

 

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

 

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2: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얘기입니까? 참된 목자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방황하고 있다 고통 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10장 첫부분의 메세지 입니다.

 

 

 

우리가 2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백성이 뭐같이 유리하고? "양 같이 유리하고" 그랬습니다.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고 그랬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떼의 모습, 이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지요? 우리 복음서에도 예수께서 그 불쌍한 그 시대의 사람들을 보시면서 뭐라고 그랬어요?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하고 있다"라는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 양의 특성이 어떤 특성일까요? 저는 뭐 동물, 식물 이런 것 모르는데 양에 대해서는 조금 알아요. 왜냐하면 제가 목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0살 때까지 제 이름이 목동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팔자지요, 목사가 되는 것이 하하~~ , 바로 멀지않은 수원에 화산 목장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바로 제가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목장 관리인으로 계셨기 때문에 태어났고 어렸을 때는 제 별명으로 저를 불렀어요. 우리 식구들이, 그래서 목동아 목동아,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한잔하고 들어오시면 꼭 아 목동아를 불렀습니다 하하하~~

 

오 데니 보이. , 그래서 제가 미국 갔을 때 영어이름을 쓰야 되는데 뭐라고 붙일까 그러다가 우리 아빠가 밤낮 오 데니보이 대니 보이 그래서 데니 리로 부르자 이렇게, 제 이름도 부른 그 추억이 있습니다마는 어렸을 때 양이라든지 소, 뭐 우유, 소의 우유 젖도 짜보고 또 양떼들과도 놀았든 그런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양의 그 현저한 특성가운데는 3가지의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방향감각이 없어요 방향감각, 우리가 소도 말도 바깥에 같다 놓으면 반드시 제집을 찾아오지요? 그런데 양은 못 찾아 와요.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는지를 몰라요.

 

또 두번째는 양은 아주 쉽게 더럽힘을 탑니다. 아주 깨끗한 것 같지만 양은 매일 씻겨 주어야 되요. 조금만 한눈을 팔면 뭘 묻히고 아주 더럽힘을 탑니다.

 

세번째로 양은 아주 약한 동물입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어떤 자구책, 보호책을 가지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동물들을 보다가 보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어떤 비장의 무기나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 자연의 색깔과 자기 몸의 색깔을 비슷한 색깔, 무슨 색 이라고 그래요? 보호색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자기를 공격해오는 것들에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연의 색깔과 자기가 같은 색깔을 갖는다든지, 혹은 신체의 한 부분을 예리한 무기로 사용한다든지, 그래서 무기를 갖고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그럴 수 있는 아무런 자구책이나 보호책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이 인간을 설명할 때 자주 나오는 유명한 표현, 마치 이사야서의 표현처럼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어디를 가는지 몰라요. 여러분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한번 옆에 있는 사람보고 물어보세요.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하하~~

 

내 인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있는지?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미로를 헤매는 인생처럼 살고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오염을 탑니다. 세상의 영향, 세속적인 것들에 관한 영향을 너무나 쉽게 받습니다. , 쉽게 오염 당하고 그리고 쉽게 두려워하고 녜, 언제 어떻게 시작될지 모르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위험, 우리는 다 양과 같다.

 

양에게는 그래서 리드가 필요한 거에요. 목자가 필요한 거죠. 지도자가 필요한 거죠. 그러나 아~그래서 오늘 2절에 보시면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뭐가 없으므로?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목자가 없을 때는 사람들은 가짜 목자라도 만들어 놓아야 위로를 받아요, 마음에.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반드시 대용품 신을 갖습니다. 이것이 도스도예프스키가 한 유명한 말이에요. 신이 없는 인생은 반드시 대용품 신을 구한다. 가짜 신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가짜 신. 그래서 사람들이 우상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은 엄격하게 완전히 종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종교가 있어요. 다 자기의 종교가 있단 말이죠. 참된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고 소유하지 못한 인생은 반드시 우상을 찾도록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면서도 조금만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면 어디를 달려가요? 우상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상이 매력을 갖는 것은 우상은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은 보여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영이시고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우상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입니다. 시각적입니다.

 

 

 

오늘 102절 첫 부분에 보시면 뭐가 나와요? 대저 뭐는?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드라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아요? 드라빔? , 창세기에 나오죠? 누구 사건? , 야곱과 라헬, 이 부부가 그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갔다가 라반에게서

 

? 그 드라빔을 라헬이 훔쳐 가지고 나오죠? , 도적질 하는 장면이 있어요. 창세기 31장 일꺼에요. 창세기 3119절에 보시면 라헬이 이 드라빔을 도적질 합니다. 라반의 집을 떠나가면서 드라빔을, 이 드라빔이란 것은 일종의 가정에 대한 수호신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한 가정을 지키는, 가족을 지키는 수호신. 그것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데 라헬이 하나님 믿는 사람이에요. 하나님도 믿으면서도 뭐냐하면 불안해져 가지고 두려워해 가지고 혹시 이 우상신이 있으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종종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너무나 급박해지고 마음이 절실하고 두려워지면 가끔 가서 뭘 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것이 비슷한 생리에요. 비슷한 생리.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답답은 하고 좀 보였으면 좋겠고,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그래서 이 드라빔 같은 눈에 보이는 우상 신을 의존하고자 했든 그런 슬픈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대저,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드라빔들은 뭘 말한다? 허탄한 것을 말한다, 헛된 것이다 이 말이에요. 전혀 도움이 안된다 사실은. 또 복술자는,

 

점치는 사람,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다. 뭐 가끔 맞을 수도 있어요 가끔 맞아요.그게 미혹이죠. 가끔 맞아요. 가끔 한번 맞는 것 가지고 뭐 신통하게 맞는다 그래갖고 사명대사가 임했다 그래갖고 하하하~ 뭐 찾아 다니고, 또 아무것도 아닌 여자를 우상처럼 만드는 매스미디어 역할을 볼 수가 있습니다. 틀린 것은 하나도 얘기 안하고, 10개쯤 틀리다가 하나쯤 맞으면 굉장한 것처럼 뭐 얘기하고, 거기서 위로를 구하는 인생들. 이런 헛된 우상에게서 위로를 구하고 있었든 그 시대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0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01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다같이 시작,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무슨 얘기 입니까? 우상에게 구하지 말고 누구에게 구하라? 하나님께 구하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봄비 때에 하나님께 번개를 구하라 그랬어요. 봄비 때에.

 

~, 팔레스타인 땅에는 비가 두번 옵니다. 첫비가 언제 오느냐하면 가을에 와요. 1011, 1011월에 첫번째 비가 옵니다. 그리고 이 봄비라는 것은 아~ 34월쯤 오는데 그 비를 늦은 비라고 부릅니다 늦은 비, , 늦은 비에요. 그 얘기는 뭐냐하면, "봄비 때에 하나님께 구하라"라는 말은 늦게라도 이제라도 구하라, 좀 늦은 것 같지만 이제라도 우상을 포기하고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 인생에 응답이신 하나님, 소망이신 하나님, 진리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이제라도 구하라! 이 말입니다. 이제라도 구하라,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그래 하나님을 번개를 내시는 하나님, 번개. 번개는 뭐가 오기 전에? 비가 오기 전에 먼저, 그것은 비의 징후입니다. 싸인 입니다. 이제 곧 비가 내릴 것입니다. 소낙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겨우 가까스로 비를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풍성한 비를 주신 하나님. 이토록 풍성한 것을 예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그 하나님께 나와 구하시기 바랍니다. 늦게라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2절은 불행히도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제쳐놓고 어디를 달려가요? 드라빔, 이 드라빔은 조그만한 거에요. 아주 조그마한 우상 신입니다.

 

지난번 그 다윗의 유물 전시전, 예술의 전당에서 할 때 저도 가보았습니다만 거기 가 보신 분들이 있어요? 한번 손들어 봐요. , 그때 그 우상 보았어요? 우상 구경했어요? 조그마한 거에요. 손바닥만한 우상들, , 가지고 다니는, 이렇게 갖고 다닐 수 있는, 가끔 뭐 부처도 보면은 큰 부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것도 있어요. , 그런 식으로 작은, 작은 한 가정의 우상 신 이런 것들을 갖고 다니면서 거기다가 의지를 한단 말이지요.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연약한 존재에요. 그래서 그게 눈에 보인다고, 보인다고 시각적이라고 그래서 그것이 또 도움이 될 줄로 착각하는 인생들.

 

그리고 헛된 것을 말하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거기에서 도움과 위로를 구하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 뭐냐? 이것이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그래서 3절에는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그러니까 백성들이 이 지경이 되도록 지도자들은 뭘 하고 있었느냐 말이지요 그러니까 진정한 이땅에서의 영적 지도자들의 책임은 이 참되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임이겠죠.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니까 사람들이 우상으로 달려가도 있었던 것입니다.

 

 

 

3절을 다시 한번 읽어요. 다같이 3절 다같이 시작,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왜 숫염소가 나오는가? 염소떼가 다닐 때 항상 앞에 리드가 앞장 섭니다. 그것이 숫염소에요. 다시 말하면 이것은 리드에 대한 상징입니다. 리드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말이죠. 내가 그들에게 분노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쫓고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비극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기에 우리시대는 참된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 지도자의 필요성을 목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10장의 멧세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두번째로 그 목자가 약속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유리하고 곤고하고 방황하고 있었든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자를 약속하시는 장면이에요.

 

우리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모퉁잇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에게서" 이 말입니다. 그에게서, 모퉁잇돌이 그분에게서 나온다. 즉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에게로서 나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이 계속 뭐에요? "그에게서" 그에게로서 그에게서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에게로부터 주어지는 지도자, 목자, 메시야, 메시야 메시야.

 

그 메시야 상을, 여기 4절에 보시면 그 메시야 상을 몇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표현들이 등장합니까?

 

 

 

첫째 "모통이돌" 여러분 예수님은 모퉁이돌 이십니다. 믿으십니까? 모퉁이 돌이 되신다 Corner Stone이 되신다. 모퉁이돌.

 

건물을 지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모퉁이돌이죠. 그것이 기초에요 기초. 또 두개의 벽을 연결할 때, 그 중동지방의 건축법은 모퉁잇돌이 항상 가운데 있습니다. 부채살처럼 되어있어요. 중동지방의 모퉁잇돌은 이 부채꼴 살로 되어있는데 가운데 쫙 그것의 중심으로 두개의 벽이 연결이 되어요. 딱 연결이 되어요. ,

 

건물의 기초, 가장 중요한 파운데이션,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인생의 기초는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모통이돌이 되신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 내 인생의 진정한 지도자 내 삶에 기초가 되어주신 분 나의 인생의 Corner Stone, 나의 모퉁이돌이 되시는 주님, 그는 모퉁이돌 이십니다.

 

또 두번째는 뭐라고 그랬어요? ? ? "말뚝" 예수님은 또한 말뚝이십니다.하하~~ 아 이런 표현도 나와요. 예수님은 말뚝이십니다. 그건 별로 우리가 평소에 안 쓰는 표현인데 그렇죠? 기도할 때 가끔 말뚝 되신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하~~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하하~~

 

이 말뚝이라는 한국말의 이미지가 좀 이상하지만 진짜 그는 말뚝, 말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말뚝이, , 이건 특별히 여기 말뚝이라고 한 것은 이 텐트를 칠 때 그 텐트를 흔들리지 않토록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말뚝이죠. 견고하게 하는 것, 그래서 장막을 견고하게 만듭니다. 말뚝이 있으므로 해서 이 장막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말뚝 되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므로 내 인생 흔들리지 않을 줄 믿습니다. , 그러니까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면 내 인생이 뭐에요? 흔들려요. 왜냐하면 말뚝을 망각했기 때문에, 녜 말뚝.

 

또 어떤 표현이 등장합니까? 그 다음에는? "싸우는 활" 전사에게 있어서 활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활, 이 활이 없이는 전투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화살이 되십니다. 그가 우리의 무기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싸우는 활이신 바로 그 분.

 

그 다음에 또 어떤 이미지가 나와요? "권세 잡은 자" 권세 잡은 자에게 여기에선 힘이 있다 이 말인데 막강한 힘이 있는 분. 여러분 내가 활을 가지고 있어도 활을 당길 힘이 없다면 활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런데 이 활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활이 되어주시고 또 활을 당길 수 있는 힘도 되어주시는 예수님. 그분은 진정 나의 능력 나의 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바로 오실 메시야. 우리의 목자 메시야. 우리의 지도자 메시야.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오늘 우리시대에도 동일하게 우리의 힘이시고, 우리의 무기이시고, 우리의 말뚝이시고 내 인생의 기초인 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목자의 약속이 바로 이 4절에 나온 것이에요.

 

 

 

그 다음 5절부터12절까지, 목자의 미션, 의무. 목자는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목자의 의무.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가 있습니다. 목자의 의무.

 

5, 함께 하신다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신다" 목자가 함께 하신다, 그럼 끝난 것 아니에요? 목자가 함께 하신다.

 

,저가 양의 특성을 말하면서 세가지, 양의 특성은 세가지라고 그랬어요.

 

첫째로, 뭐 다른 특성도 있지마는, 세가지 특성. 첫째 양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요. 방황해요.그런데 목자가 있어주면 어떻게 돼요? 목자가 방향을 잡아줍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어디로 가느냐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주님과 함께 있으면 됩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마땅히 가야할 그 방향으로 그 목표를 향해서 나를 인도해가실 그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영원한 집을 향해서 나를 인도할 그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또 양의 특성 두 번째는 뭐에요? 쉽게 더럽힘을 탄다 그러나 목자만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목자가 씻어주어요. 늘 깨끗하게 보호합니다. 그 주님을 떠나서는 깨끗함이 없어요. 거룩은 주와 함깨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룩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바로 거룩이에요. 함께 있으면 그분과의 교제가 상실되면 우리가 더럽힘을 타요.

 

여러분 큐티 몇일 않해보세요. 마음이 벌써 끈끈하고 더럽힘을 당하고, ? 그런데 계속 안했는데 편안하다 하하~~. 큐티 안 했는데 몇 달 안 했는데 계속 편안하다, 마비증이 찾아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제 마비상태에 들어간 거에요. 그건 완전히 마비상태, .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이에요.

 

, 양의 또 하나의 특성이 뭐라고 그랬어요 양은? 자구책이 없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목자와 함께 있으면? 목자가 우리의 보호가 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며, 주님이 나의 보호에요. 주님이. 주님이 나의 보호에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며, 그런데 그 주님을 생각 안하고 골프 치러 간 사람들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며 하하하~~ 주님이 우리의 보호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5, 다시 한번 읽어요 5절 다같이 시작,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 즉 그들이 싸워 말 탄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전장에 한 복판에 우리가 던짐을 받아도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그분이 함께 하십니다.함께 하십니다.

 

목자는 양떼들과 늘 함께 해 주셔요. 내가 때로는 내가 목자를 피하고 싶어도 나를 추적하시는 목자 되신 하나님 그가 우리의 승리의 원인인 것을 확인하십시다. 함께 하십니다.

 

 

 

두번째로 6절과7절에 보시면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구원하십니다" 첫째는 뭐 한다고 그랬어요? 함께 하시고 둘째로 우리를 구출하셔요. 구원해 주셔요.

 

6절 다같이 읽어요. 시작,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그들을 긍휼이 여겨주신다. 그래서 구원해 주신다. 구원하신다음에 그들을 견고하게 하신다 그래서 버림받은 적이 없었든 것처럼 그들을 구원하시겠다. 믿습니까 여러분?

 

내가 위험 앞에 처할 때 나를 다시 구출하시는 그분. 구출하시는 그분. 함께 하시고 내가 위험에 처할 때, 내가 슬럼프에 처할 때 내가 구덩이에 던지움을 받을 때 빠져 나올 길 없는 인생의 사면초과, 그 딜레마 속에 빠질 때 나를 건져내시는 주님. 그분이 우리의 변화없는 목자이신 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구출하십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같이 "회복시키신다"

 

첫째는 함께 하십니다. 둘째는 구원하십니다. 세번째는 회복을 시켜 주셔요. , 8절 이하 11절까지, 어떻게 회복시키는가? 우리 8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8절 다같이 시작,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같이 번성하리라"

 

, 목자가 휘파람을 불면 양떼들이 어떻게 합니까? 다 모여요. 여기서 말한 휘파람은 아마 목자가 입으로 부는 그런 휘파람이 아니고 아~ 일종의 그 갈대 파이프 같은 것이 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대로 만든 파이프를 그 목동들이 목자들이 결정해서 그래서 파이프를 탁 불면 다 모여요. 목자의 음성을 목자의 부르는 소리인 줄을 알고 일제히 집합을 합니다.

 

,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징계에 의해서 바벨로니아 앗시리아 전세계 흩어졌던 그들을 다시 모아주십니다. 모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다시 모여 또 한번 번성하리라. 회복이에요. 온전한 회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다시 번성하리라.

 

그리고 9, 9절 다같이 읽어요. 시작,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지라"

 

다시 돌아온다 회복의 약속입니다. 다 돌아온다.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앗수르에서 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풍성하게 회복시키신다.

 

11,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돌아오는 길에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신다 이 말입니다.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 지겠고" 그들을 포로로 잡았든 앗시리아를 패망 시키시고 애굽을 치시고 그래서 그 백성을 다시 온전히 돌아와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그는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때로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고 우리가 잃어버리고, 우리의 소유를 잃어버리고, 사랑했든 사람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삶이 깊은 고통과 어둠 속에 빠져있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다시 그 주님을 의뢰하고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회복은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약속은 뭐냐하면 견고케 하신다. 회복시킨 다음에 그들을 아주 견고하게 해주신다.

 

 

 

12절입니다. 마지막 12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12,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어떻게 하신다고 그랬어요? "견고케 하리니" 견고하게 해주십니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다시는 우리가 이 고통을 당하게 하지 않도록 우리를 견고케 하실 하나님.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어요. 견고하게 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 견고한 것은 우리 자신이 뭐 어떤 견고할 수 있는 아~ 그 소스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견고는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하나님을 의지 하십시다. 그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견고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견고하시는 하나님, 나의 망대가 되시는 하나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우리의 인생이 견고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얼마나 우리가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느냐? 정말 바라보고 사느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리드라면, 참된 지도자라면 그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 그분이 우리의 인도자라면, 그렇습니다 인도자가 없는 세상, 지도자를 잃어버린 세상,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 상실의 시대에서 염려하거나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완전하신 지도자, 맘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 그 지도자는 이동원이 아니에요.

 

 

 

저는 여러분을 얼마든지 실망시킬 가능성이 있어요. 자꾸 저를 째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하~~

 

주님을 째려보시기 바랍니다. , 주님. 그 분은 우리의 완전한 지도자, 흔들림이 없는 지도자,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그리스도에게 맞출수록 하나님을 바라볼수록 그만큼 내 인생은 견고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지도자로 삼은 행복을 고백 하십시요.

 

하나님이 나의 지도자가 되셨다 예수가 나의 지도자가 되셨다. 예수님이 나의 리드이시다. 그분이 진정한 나의 리드이시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도자가 될 수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그 주님을 따라가는 행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우리의 궁극적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우리는 소개하는 작은 안내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작은 지도자라고는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의 책임은 초점을 자기에게 모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다 인간성은 연약함이 있고, 우리는 다 흔들릴 수가 있고,

 

우리는 다 오류를 저질을 가능성이 사람에게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지도자의 특성은 뭐냐하면 끊임없이 누구를 가리키는 거에요? 하나님 바라보세요. 예수님 바라보세요. 성령님 바라보세요. 잘못된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 입니까?

 

, 나를 바라보라고 하는 사람. 그건 잘못된 지도자에요. 진정한 지도자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사람, 그렇습니다. 그 주님만이 오늘도 우리의 소망인 것을 확인하십시다. 그 주님을 바라보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신실하게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이 한 주간도 그분이 우리의 승리의 원인인 것을, 이유인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말씀을 받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모든 삶의 장에 권능과 평안으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두가지 유형의 목자 /11:1-17/ 이동원목사

2014-12-05 21:03:43

 

스가랴의 마지막 네번째 부분 9장부터 14장까지. 두개의 약속.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11장에다가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면 두 가지 유형의 목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두 가지 유형의 지도자, 혹은 두 가지 유형의 목자. 우리 10장과 11장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지도자로 묘사합니다. 그는 지도자로 오신다. 이 리더로써 지도자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탁월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목자라는 표현입니다.

 

목자. 우리 교회에서도 목자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만은. 장차 오실 예수님, 그 메시야를 목자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11장에는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를 비교합니다. 선한 지도자와 악한 지도자. 리더쉽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면 저는 리더쉽을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더쉽은 영향력입니다.

 

자신이 지도자라고 생각하시는 분 한번 손들어 보세요. 지도자로 생각하시는 분.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십시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기가 원하든, 원치않든 영향을 끼칩니다.

 

자기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그 사람은 다 지도자예요. 그러나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또 안 좋은 영향을 우리가 끼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지도자들 가운데 보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또 테레사 여사처럼 한 생애를 살면서 아주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히틀러처럼 아주 악한 영향을 남긴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 짐 존슨 같은 종교계에도 교주가 되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자리로 이끈 아주 악한 영향을 끼친 지도자, 사람들의 생애 속에 일생을 망치는 악한 그런 결과를 남기게 한 지도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크게 두 부분으로 다시 나눌 수가 있다면 111절부터 3절까지는 서론 부분인데,

 

11장의 서론적인 부분인데, 악한 지도자는 결국 멸망한다. 멸망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114절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절까지 그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비교하고 있습니다.

 

 

 

 

 

, 우리 1절부터 3절까지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다 같이 시작. "레바논이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찌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 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한 산림이 엎드러졌도다.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우리는 성경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그 목자들이 악한 지도자들이, 이방의 지도자들을 말하느냐, 혹은 이스라엘 지도자를 말하느냐. 하는 그런 논쟁을 벌립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방의 지도자를 얘기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레바논아, 혹시 레바논의 지도자, 이스라엘 북쪽에 있었던 레바논 국가의 지도자를 혹시 향해서 선포했던 메시지가 아니였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꼭 레바논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종 건축을 하고 그럴 때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실어 왔는데 그것이 레바논이 자랑하던 백향목에 비추어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상징시킨 일종의 상징에 불가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더 많은 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후자의 견해를 더 지지하는 편인데요, 여기 지도자들의 모습이 종종 성경에서는 그 나무로 상징 되었습니다. 나무.

 

여기 1절에는 레바논이 자랑하는 백향목. 나오는가 하면, 그 다음 절에는 어디가 나와요. 또 하나의 지명이 나오는데 바산이라는 지명이 나오죠. 2절에는 바산. 갈릴리 동북쪽에 있는 지명을 바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산의 상수리 나무여. 바산의 상수리 나무여.

 

레바논의 자랑거리인 백향목. 이 바산지역에는 아주 아름다운 그리고 곧은 상수리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종종 성경에 보면 사람을, 지도자들을 이런 나무에 비교한 표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이사야 111절 같은데 보면 다윗을 가리켜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싹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싹과 같다. 이렇게 표현이 나오기도 하고 또, 여기 백향목이 나왔습니다만은 우리가 에스겔 17장 한번 찾아 보실까요.

 

에스겔 1720, 에스겔 17, 에스겔 17. 네 에스겔 17. , 에스겔 1722절부터 보시겠습니다. 에스겔 1722절부터. 22, 23절 같이 읽습니다. 다 같이 시작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놓고 빼어난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찌라" 이는 느부갓네살이라는 그런 지도자에 대한 이방인 지도자에 대한 상징을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비슷한 표현이 에스겔 31장에도 나와요. 에스겔 31장을 한번 보세요.

 

에스겔 31장을 보시면 첫머리 부분에 이렇게 시작하죠. 에스겔 311절에 보시면 "제 십일년 삼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지금 애굽의 통치자요,

 

지도자인 바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볼찌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뭐예요,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레바논이 자랑하는 백향목. 백향목을 종종 지도자들에 대한 그 상징적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스가랴 선지자는 이 11장에서는 당시의 그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이러한 백향목 또, 바산의 상수리 나무, 이것들에 비교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그 시대 그 시점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지도자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로니아의 포로로 갈 수 밖에 없었고, 또 포로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해방을 경험하고 자유를 얻어 다시 시온의 땅에 돌아왔지만은 그러나 성전하나 제대로 건축하지 못하고, 회복하지 못하고 아직도 백성들은 방황하고 아직도 예루살렘은 황폐한 지경속에 놓여 있었던 지도자를 갖지 못했던

 

그 시대의 어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 대접받기를 원했던 지도자들은 자천, 타천의 지도자들은 많이 있어도, 역사를 바르게 인도하는 지도자들은 부재했던 그 당시의 어두운 시대속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이러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나무에 비교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에 보면 2절의 마지막 부분에 뭐라그랬어요. 상수리 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한 산림이 어떻게요 넘어졌도다. 이런 나무들이 다 넘어지고 말았도다.

 

결국 그런 원인 중에 하나는 그런 그들이 주앞에 겸손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교만했던 지도자들이 결국 그 시대를 빛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인도한 책임이라고 지적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백향목, 상수리 나무. 이것은 그들 자신의 아름다움과 빼어남을 자랑했지마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는 지도자들은 많았지만 백성을 섬기고 백성을 유익하게 하는 지도자들은 많지 않았던 그 당시 지도자들에 대한 아주 적절한 상징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은 쓰실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개인의 달란트가 뛰어나도 그리고 개인에게 아무리 뛰어난 은사가 있었도 결코 교만한 사람은 주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겸허한 사람, 섬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임을 받는다는 역사적 교훈을 여기서 한번 더 확인하실수가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뭐라 그랬어요. 선봉이요. , 교만은 패망하는 일의 선봉입니다. 겸손은 그러나 존귀함의 앞잡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옛날 지구에는 메가 케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불리워지는 학명이 붙은 아주 거대한 사슴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사슴보다도 비교가 안되는 굉장히 큰 거대한 사슴. 메가 케로스라고 불리워지는 그런 사슴이 있었다고 그래요. 근데 이 사슴은 뿔이 아주 굉장히 컸어요. 근데 왜 이 사슴이 멸종했냐하면 뿔이 너무 커가지고 멸종했다고 합니다. 뿔이 너무 크니까 써먹을 때가 없어요. 돌아다니면서 그냥 받기만 하고 부딪히다가 멸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도 교만하면, 그리고 섬길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공격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런 식의 지도자들은 역사 속에서 결코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던 그 시대에 결코 자기를 지도자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들이 역사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 그들은 쓸모없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교만함, 그들의 이기심은 결국 그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무너뜨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파멸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그러나 4절 이하 17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정한 지도자가 일어나고 있다. 예언하고 있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이 선한 목자, 참된 지도자와 악한 목자, 악한 지도자를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참된 지도자와 악한 지도자는 어떤 면에서 그 contrast를 대조를 이루고 있을까요. 많이 나오는데 11장에 우리는 두들어진 4가지의 대조를 볼수가 있습니다. 누가 선한 목자냐, 누가 악한 목자냐. 왜 비교를 통해서 사실 여기서 스가랴 선지자가 강조하려는 초점은 선한 목자에 있습니다. 악한 목자들 때문에 우리는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참된 지도자가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걸 약속하려고 그래요. 그리고 그 참된 지도자는 궁극적으로 누굽니까? 예수님이십니다. 메시야이십니다. 지금 그걸 예언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를 악한 목자와 비교하고 있어요. 그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진짜냐, 그것을 감정시키는 방법 중에 하나는 감정사가 되길 원하면 그 훈련 가운데 하나가 가짜를 갖다놓고 자꾸 보게 한다고 그래요. 가짜를 한참 보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진짜와 가짜를 구별을 하게되요. 또 반대로도 할 수가 있습니다. 진짜를 자꾸만 보고 있으면 뭐예요. 가짜가 저절로 구별될 수가 있습니다. 대조법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도록 그래서 악한 목자를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 보내 주신 약속하신 메시야. 그 분이 진실로 얼마나 복된 우리의 지도자인가를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4가지의 대조적 이미지들이 이 부분 속에 등장합니다.

 

 

 

, 우선 악한 목자들을 보고 선한 목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5, 5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5절 다 같이 시작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 도다" 여러가지 표현이 나오지만 제일 중요한 마지막 강조점이 뭐라 그랬어요.

 

악한 목자, 나쁜 지도자들은 어떻게 한다고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백성에 대한 애정이 없다.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면 반대로 선한 목자는 참된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일까요. 불쌍히 여긴다. 그게 있어요,

 

없어요. , 있어야 원칙이죠. 자세히 보면 있어요. 시력만 좋으면 볼 수 있습니다. 실력 없어도 시력만 좋으면 되요. 몇 절에 나옵니까. 선한 목자는 불쌍히 여긴다. 7절 같이 읽어보세요, 7. 7절 다 같이 시작. "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쎄"

 

7절에 어떤 표현이 나와요. 양을 가련한 양으로 본다.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그 양을 불쌍히 여긴다. 여기서의 두 가지의 대조를 볼 수가 있죠. 악한 지도자는 백성을 향한 불쌍히 여김이 없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는 백성을 불쌍히 여긴다. 여러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우리 4복음서에 예수님이 백성들을 볼 때 제일 많이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내주는 복음서의 표현가운데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강조되는 표현이 하나있죠. 어떤 표현입니까?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불쌍히 여기는 것, 이것 참으로 중요한 것이예요. 지도자의 마음. 성경적 지도자의 마음. 선한 지도자의 태도.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다. 참 불쌍히 여긴다. 여기 선한 지도자 상으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백성들을 섬기는 거란 말이죠.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번째 요건은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의 상처를 그들의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늘 불쌍히 여기는 태도. 이게 성경적 지도자 상입니다. 불쌍히 여긴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불쌍히 여겨.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의 또 하나의 대조는 어디에서 볼 수가 있는가. , 119. 119,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119. 다 같이 시작. "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할자는 망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하고" 한마디로 표현 뭘까요. , 먹이지 않는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대도 그대로 내버려 둔다. 먹이지 않는다 말이죠. 그러면

 

자연히 선한 지도자는 어떻게 하는 지도자일까요. 부지런히 퍼 먹인다. , 부지런히 메인다. 여기서 또 하나 악한 지도자 상과 선한 지도자 상의 대조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4절봐요. 4. 4절 다 같이 시작.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너는 부지런히 그 양떼를 먹이라. 선한 지도자상 양떼를 부지런히 먹인다.

 

양떼가 굶든, 또한 기아상태에 있든, 그들을 그대로 버려둔다. 그럴 뿐만 아니라, 먹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계속 나아가면 16절에 이런 표현도 등장해요. 16절 한번 읽어봐요. 16절 다 같이 시작.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뭐예요. 먹는다.

 

뭐냐하면 먹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가 먹는다. 자기가 오히려 먹는다. 빼앗아먹는다. 그래서 목사가 타락하면 뭐가 됩니까. 먹사가 됩니다. 평신도가 타락하면 뭐가 될까요. 병신도가 되구요. 목사가 타락하면 먹사가 되요. 자기가 먹을려고. 목자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어떤 책임일까요. 먹이는 것이죠. 뭘로 먹입니까. 진리의 꼴로 먹여야 합니다.

 

우리가 요한 복음 10장에도 예수님의 그 선한 목자상을 스스로 밝히시죠. 가르쳐 주시죠. 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 다음에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목자는 꼴을 공급합니다. 먹을 것을 공급합니다. 말씀을 공급합니다. 영혼이 살아 움직이도록, 풍성한 진리의 말씀으로 꼴로 먹이는 목자. 여기서 우리는 선한 목자를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악한 목자는 먹이는 일에 관심이 없어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어요. 양떼의 창백한 영혼의 상태 속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 목장 사역하는 작은 목자들도 늘 자기 목장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우리 목장의 양떼들에 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이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예요. 가장 중요한 관심. 말씀을 나누고, 말씀으로 세우고, 그래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풍성한 생명으로 그가 윤기있는 영혼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 악한 지도자는 먹이지 않습니다. 선한 지도자는 부지런히 생명의 꼴로 먹인다.

 

 

 

, 그 다음에 세번째 또 다른 대조를 보일 수가 있어요. 여기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의 또 하나의 대조, 어떤 대조일까. 우리 7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7절을 다같이 시작. "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랑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쎄" 여기 선한 목자상을 얘기하면서 장차 오실 그 좋은 목자는 어떻게 하느냐? 막대기 둘을 가지고 있다. 막대기 둘을 가지고 뭘하냐.

 

작대기 싸움해요. , 막대기 둘을 가지고 뭘 한다고 그랬어요. 그 막대기 하나는 은총. 또하나는 연락. 연락은 연락한다. 연결시킨다. Union 함께 연합시킨다. 이말이예요. 먼저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게하고, 그 다음 은혜를 받은 다음에,

 

은혜를 받은 개개인들이 개인들로 남지 아니하고 그들이 연결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선한 목자의 이미지를 여기서 이렇게 그린 것예요. 다시 말하면 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만들고, 주의 은혜를 체험하게 만든 다음에 그들을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연결시켜서, 잘 연결시켜서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세우도록 돕는 것.

 

이것이 선한 지도자. 성경적 지도자 Biblical Leadership 성경적인 지도자상의 아름다운 또 하나의 모습을 여기서 볼 수가 있어요. 그러나 반대로 악한 목자는 어떻게 할까요. 연결시킨다고 그랬으니까, 연결의 반대가 뭘까요. , 분열시킨다. 흩어놓는다.

 

악한 지도자는 자꾸만 흩어놔요. 이간시키고, 그게 바로 악한 지도자의 총 두목은 누굴까요. 총 두목. , 사탄 마귀. 마귀의 뜻 같은데 하나가 뭐라 그랬어요. 마귀는 이간시킨다. 그 단어의 뜻이 본래 두가지 단어의 결합이라고 그랬죠. 무엇 무엇 사이에 단어와 던지다, 던지다, diabolos di라는 말이 원래 영어로는 between이예요. Between. Bolow, throw 던진다.

 

던진다. 던져서 사이에 던진다. 사이가 자꾸만 나눠요. 별명이 참소자, 참소자 그랬죠. 자꾸만 참소해서 인간관계를 파괴시켜요. 파괴시키고, 단절시키고, 흩어놓고 교인과 교인 사이에, 또 지도자와 교인 사이에 자꾸만 그 관계를 이간시키고 흩어놓고 누가하는 일일까요. 마귀가 하는 일이예요. 항상 마귀의 종이 있어요. 마귀의 장단에 춤추는 마귀의 종들이 있어요.

 

여러분과 저는 그 마귀의 장단에 춤추지 않는 종들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을 어떻게 하는 사람. 연합 시켜주는 사람. 그래서 세우는 사람. 은혜를 받고, 사람을 항상 견고한 공동체로 연결시키는 사람. 이것이 선한 목자상이예요. 선한 지도자상. 악한 지도자는 항상 어떻게 해요. 흩어놓는다. 사람을 이간시킨다. 싸우게 만든다.

 

, 이런 모습들이 이제 계속 나옵니다. 몇가지 이미지로 나오는데 9절에 보시면 9절 다같이 다시 한번 읽어요. 시작.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이 마지막 이미지 가운데 이런 모습이 있어요. 피차 살을 먹는다. 물고 뜯는 이미지의 모습이 나와요.

 

그 다음에 14절 보시길 바랍니다. 14, 14,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징계이되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그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어 주셨어요.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냐 하면 남쪽과 북쪽이 갈라지고 형제와 형제 사이가 갈라진 것. 이것이 사탄을 따라간 그 백성의 선택에 대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이었단 말이죠. 우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우리는 동일한 이미지를 볼 수가 있어요. 선한 지도자는 항상 어떻게 하는 사람이다. 연결시키는 사람. 합하는 사람. 근데 악한 지도자는 어떻게 해요. 분열시키고 나누는 것이 악한 지도자의 이미지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 우리는 스가랴의 이제 마지막장 마지막 경고를 보도록 하겠어요. 16절 먼저 읽겠습니다. 16. 16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지니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결국 이게 악한 목자상인데, 악한 목자. 악한 목자는 결국 어떻게 하는 것이 악한 목자예요. 마지막에 망가트린다. 이 말이죠.

 

아주 완전히 망가트린다. 상한자를 고치지 않고, 또 먹이지도 않고, 그러니까 병들게 되고, 상처받게 되고, 마지막에 완전히 망하게 만든다. 그러면 반대로 선한 지도자는 어떻게 할까요.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요. 흥하게 하는 자. 강건하게 하는 자, 건강하게 하는 자. 살찌게 하는 자. 양 떼를 강건하게 한다. 정리를 해 보겠어요.

 

여러가지로 많이 나와 있지만 여기 흩어나서 악한 목자와 선한 목자를 계속 스가랴 선지자가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핵심적인 강조점은 4가지 입니다. 선한 지도자는 4가지. 첫째 불쌍히 여긴다. 가련히 여긴다. 둘째 양떼를 먹인다. 셋째 은혜 받게하고 연결시켜서 세운다. 마지막 네번째로 건강하게 한다. 건강하게 하고 흥하게 한다.

 

4가지가 선한 지도자 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당시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환상을 받고 예언을 하던 그 당시 시대의 지도자들은 그런 모습의 지도자가 아니라 악한 모습의 지도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말이죠. 여기 8절에 보면 난해한 구절인데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18절을 같이 한번 읽어요. 다 같이 시작.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여기 하나님이 내가 한 달 동안에 세 목자를 싫어서 끊어버렸다. 이 세 목자가 무엇을 말하느냐. 아주 성경적인 난해 구절이예요. 그러나 많은 성서 학자들은 여기서 세 목자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대표적인 세 그룹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이스라엘 역사 속에 대표적인 지도자 그러면 세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첫째는 왕, 왕이 있고. 또 하나는 누가 있어요. 제사장. 또 하나는 선지자.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이게 대표적인 지도자예요. 대표적인 지도자예요.

 

아마 스가랴 선지자는 이런 세가지 종류의 대표자를 생각하면서 그 당시 세 가지 종류의 대표자들이 다 그 역할을 제대로 다 못했다.

 

왕은 일종의 정치 지도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종교적 측면도 있지만 교육적인 지도자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은 종교적 지도자죠. 정치 지도자도 교육계의 지도자도 종교의 지도자도 그 당시 백성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지 못했음을 인해서 백성들은 계속해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그들을 끊을 수밖에 없다.

 

그들을 심판할 수 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분노. 그 시대에 리더쉽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지도력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 그러나 이런 지도자들과 정 반대의 지도자가 오고 있다. 그걸 예언하고 있는 것이예요. 정반대의 지도자가. 그 분은 바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한꺼번에 완성할 분이십니다. 이 세가지 역할을 한꺼번에 완성할 분. , 이 세가지 지도자의 역할의 공통점이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그 직위에 취임할 때 뭘하고 취임을 받습니까? 기름을 받습니다. 맞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왕의 자리에 취임 받을때도 기름 부음을 받아요. 선지자도 , 제사장도. 자 왕의 책임은 뭐예요. 다스리는 자. 또 선지자의 책임은 가르치는 자, 예언하는 자, 제사장은 제사 드리는 자, 단어에도 나와 있는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던 사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끈임없이 왕에게 실망합니다.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지 못하고 잘못 다스리고 있는 왕들. 또 많은 가짜 선지자들.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었던 거짓 선지자들 또 제사장들은 백성의 죄 문제와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앞서서 자기 문제로 허덕이던 제사장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지도자를 갖지 못하고

 

지도자에게 실망을 할 때마다 마음속에 이런 기다림이 있었어요. 우리를 완전히 다스려 줄 수 있는 왕. 공평과 정의로 우리를 다스려 주고, 또 우리를 온전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고, 또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완전한 제사장.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한꺼번에 완성할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주셔서 보내 주실 분.

 

그 분이 바로 누굴까요. 메시야예요. 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죠. 너희들이 이렇게 지도자들 앞에 실망하지 않았냐. 그런데 이 모든 역할을 완성할 진정한 지도자가 온다. 그것이 바로 이 11장의 밑 바탕에 흐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약속이예요. 참된 지도자가 온다. 근데 오는데 불행한 사실은 그 지도자를 너희들이 박대할 것이다. 박대할 것이다. 그것을 예언하고 있어요.

 

자 그게 1213. , 다가오고 있는 지도자. 그가 받게 될 거절과 핍박의 예언이 12절과 13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 12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기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기를 삼은지라" 그 얼마나 이 말씀이 여러분이 전율할 예언이예요. 그죠.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기록된 스가랴 선지자의 입술을 빌려 나타난 예언. 참되고 진정한 구원자가 이신 그리스도가 되신 메시야가 오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박대할 것이다. 은 삼십에 그를 팔아버릴 것이다 그 말이죠.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고 그를 모시고, 새로운 삶을 살기 보다, 그를 거절하고 핍박하고 은 삼십에 그를 팔을 것이다.

 

누굴 통해서 이 예언이 성취 되었어요. , 가롯 유다. 마태복음 26장에 보시면 정확하게 가롯 유다가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용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은 삼십에 팔림을 받으신 그리스도. 본래 삼십에 판다는 것은 우리가 출애굽기 22장에 읽어 보시면, 어떤 노예가, 종이 소에 받쳤어요. 그러면 그 보상 가격으로 줄 때 삼십량을 줬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 정도밖에 보지 않았단 이 말이예요. 싸구려 가격으로 예수님을 팔아 먹었다. 기왕에 팔아 먹으려면 비싸게 팔아 버리든지 말이지. 은 삼십에 팔아 버렸다. 이렇게 최대의 모욕. 최대의 모욕감을 가지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팔아 먹은 그런 인류의 비극. 메시야를 거절한 그 비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예언을 통해서 마침내 진정한 우리의 지도자가 되실 것이다. 그는 이 거절과 핍박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실 진정한 메시야로 오셨다. 여러분, 이 위대한 약속을 인해서 주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보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어요.

 

,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참된 지도자를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비극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지도자를 여전히 예비하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속에서 마침내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이신 예수님을 만난 자가 된 것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요. 여러분 그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그 주님을 닮아서 우리도 작은 지도자지만 참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지도자 상을 우리 안에 갖추는 일. 얼마나 중요한 일이예요.

 

우리 주변에게 영향을 끼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도자로 살아 간다면 우리 예수님을 통해서 지도자 상을 배웁니다. 4가지 입니다. 참된 지도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어떻게 해요, 불쌍히 여기고,

 

두번째 진리로 그들을 먹여주고, 세번째 그들을 뭐예요, 은혜받게 하고, 그들을 연결시켜 주고, 마지막 네번째로 그들을 건강하게 세워주는 일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지도자가 되는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가 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예요.

 

우리 예수님도 그 지도자가 되어 가는 과정있어서,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거절과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지도력을 행사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어요. 희생해야 할 대가가 있어요.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이 거절 될 것을 알고, 알고도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셨어요. 왜냐하면 그분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침내 어떻게요, 많은 사람들을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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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보호 /12:1-14/ 이동원목사

2014-12-05 21:07:57

 

우리는 스가랴의 네번째 단원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9장부터 14장까지가 스가랴의 마지막 부분이죠. 스가랴를 크게 4단원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면 첫째로 서론. 11절부터 6절까지, 두번째 8가지 이상. 17절부터 시작해서 6장까지가 계속됩니다.

 

8가지 비젼, 8가지 환상. 그 다음에 세번째 단원은 두가지 메시지. 7장과 8. 두가지 메시지 내용은 7장은 금식. 8장은 회복에 대한 메시지. 네번째 단원이 9장부터 14장까지 내용이 뭡니까? 두가지 예언입니다. 두가지 신탁, 혹은 두가지 예언.

 

그것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에 심판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가 있고, 또 그것보다 더 중요한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예언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두가지 예언입니다.

 

첫 예언이 9장부터 11장까지. 9장부터 11장까지. 초림. 오늘 12장부터 시작해 14장까지가 메시아의 재림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12장부터 14장까지 메시아의 재림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약속되어있습니다. 12장은 예루살렘의 보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보호. 13장은 예루살렘의 정화. 예루살렘의 정화. 정결케 함. 마지막 14장은 예루살렘의 영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영광. 그러나 이 예루살렘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이스라엘의 수도인 그 도시 예루살렘만 국한해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예루살렘은 일종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symbol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정화와 영광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징이며 예루살렘은 좀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교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보호의 약속은 교회의 보호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가 있고, 예루살렘 정화에 대한 약속은 교회에 대한 정화의 약속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우리가 12, 13, 14장 이제 석장 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12,13,14장을 쭉 들쳐보면 무슨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까. 시작되는 첫 마디에 무슨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까. 무슨 말이 자주 나와요. 이건 실력 필요없어요. 시력만 있으면 되요. 시력만 쭉 보시면 무슨 말이 많이 나옵니까

 

. "내가" 라는 말도 많이 나오지만 또 그보다도 더 많이 나오는 것이 "그 날에" 맞습니다. "그 날에", "그 날에", 그 날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와요. 123절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 날에. 6절에 그 날에. 8절에 그 날에. 9, 11절에도 그 날에 그렇게 되어있고,

 

13장에 들어가면 1절에 그 날에. 4절에 그 날에. 이렇게 시작되죠. 14장에 들어가 보세요 여호와의 날이 이렇게 시작되는데, 14장에 또 3장에 그 때에 4절에 보시면 그 날에. 6절에 그 날에. 8절에 그 날에. 13절 그 날에. 20절 그 날에. 많이 나와요. 안 나와요. 과연 많이 나오죠.

 

근데 왜 이렇게 안 보였을까. . 그 날에. 계속 그 날에. 그 날에. 이것은 D-Day가 아닙니다. D-day가 아니라 V-day예요. V-day. Victory day, 승리의 그 날에. 우리 2차 대전을 둘러싸고 두 개의 큰 날이 있었다고 그랬죠.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던 그 날.

 

이걸 D-day라고 그럽니다. D-day. 결정적으로 히틀러의 군대가 패배할 것이 확정된 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결정의 날이다. Decision day이다. 연합의 승리가 결정된 날. D-day. 그러나 그 날보다 더 위대한 날이 있었어요. 그 때 연합군의 승리가 확정되긴 했지만 아직도 히틀러의 군대의 저항은 집요했습니다. 한동안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베를린이 함락되고, 연합군의 승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그 날을 우리가 뭐라고 불러요. V-day. Victory day. Victory day. 승리의 날, 그 날에. 바로 그 날 입니다. 그 날에. 신학자들은 연합군의 승리를 확정한 이 두 날, 노르망디에 상륙한 그 날과 베를린을 함락한 이

 

그 날. D-dayV-Day를 어디에다 적용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결정적 승리가 보장되기 시작한 날이 언제 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 날, 부활하신 날. 그 날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D-day예요. D-Day. 주님의 이 땅에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고 승리할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믿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뭐예요. D-day. 따라서 해보세요. D-day. , 우리가 승리를 확인받고 있지만 보장받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탄에게 밀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너무 너무 힘들어서 교회에 와서 졸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나오시고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언제 우리가 결정적 승리를 얻습니까.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 날을 뭐라 불러요. 우리들의 v-day. 다 같이 v-day.

 

승리의 그 날. Victory day. Victory day. 여기서 그 날은 바로 그 날 이예요. 그 날에, 그 날에. 12장부터 시작해서 그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날. 그 날은 우리의 승리의 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거슬리던 일체의 세력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 날은 심판의 날이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날이고 승리가 선포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그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호된다고

 

약속하는 것이 바로 스가랴 12장이예요. 예루살렘의 보호. 그래서 12장에 13구절, 가장 귀중한 구절이 있다면 13구절입니다. 보호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몇 절에 나옵니까. 몇 절에 나와요. . 8절에 나오죠. 8절에. , 128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이게 열 세구절이예요. 가장 중요한 구절이예요.

 

12장에서. 다시 우리는 12장을 두개의 부분으로 나눌수가 있습니다. 12장을 두개의 부분으로 나눠요. 첫째부분은 1절부터 9절까지. 환경적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환경적 보호. 우리들의 환경을 보호하신다. 그러나 10절부터 14절까지는 내면적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영적보호예요. 영적보호. 우리의 내면에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10절부터 14절까지. 그런데 아주 재미난 것은 뭐냐하면 121절이 이런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12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21절 시작.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 121절에서 이 말씀을 경고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십니까? 121절에 하늘을 펴시고 땅의 터를 세우신 분. 창조자 이말이죠. 창조자.

 

, 우리의 환경을 창조하신 분.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환경을 지으신 분.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동시에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선언되어 있습니까. 그 분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뿐만 아니라, 또 뭐라 그랬습니까.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분.

 

우리의 내면을 지으신 분. 그랬어요. 그렇게 선언하고 시작이 되요. , 우리가 12장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그랬어요. 첫째부분. 1절부터 9절까지. 내용이 뭐예요. 환경적 보호. 자 두번째 부분은 뭐라 그랬습니까. 10절부터 14절까지 뭐라 그랬습니까. 영적인 보호. 내면의 보호. 그런데 121절은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선포하고 시작합니까.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 환경의 주인되신 하나님. 동시에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예요.

 

사람안에 인간안에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 , 그 하나님이 환경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영혼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우리의 환경도 보호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심령도 보호해 주신다. 그 날. 심판의 그 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마지막 그 날에 역사는 심판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해 주신다고요. 환경적으로 보호해 주시고, 내면적으로 보호해 주신다.

 

그 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역사는 심판의 징조들이 뚜렷하게 등장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날 그 마지막에 시작에 대한 말씀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렇죠.

 

, 우리들은 그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그런 많은 징조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림의 징조들을 보면서 우리가 안심할 필요가 있어요.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뭘 약속합니까. 환경을 보호하신다. 환경적으로 보호하신다. 환경 보호의 성격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보호하시냐. 1절부터 9절 사이에 나타난 보호의 성격.

 

 

 

첫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우리를 보호할 것입니다. 주권적 보호로 우리를 보호하신다. 그것이 어떤 표현으로 등장합니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 무슨 표현으로 등장합니까. 2절부터 보시면 무슨 선언으로 시작돼요.

 

2절부터 그 날이라는 단어말고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슨 단어라고 그랬어요. '보라'가 많이 나와. 보라는 안만봐도 한번밖에 안 나오는데, '보라' 그랬지만, '보라' 한번 밖에 안나와요. "내가", "내가"라는 말이 많이 나오죠. 내가.

 

, 2절에, 23절 한번 같이 읽어요. 2, 3, 4절까지. 2,3,4. 같이 시작.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 계속되는 선언이 뭐예요. 내가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6절에 그 날에 내가. 내가 내가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책임진다. 이 백성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이 백성에 대해서 내가 책임진다. 내가 보호한다 이 말이예요. 내가 보호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 백성들이기 때문에. 내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434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또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세번째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네가 불 가운데 지날 때 보호할 것이고, 물 가운데 지날까 지날 때에도 보호한다. 왜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진다.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남편되신 그 분의 영적 신랑이 되시는 바로 그 분이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약속이예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호한다.

 

그 날에도. 그 심판의 그 날에도. 그 환란의 그 날에도. 역사는 심판과 환란을 향해서 더 가속화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 것은 내가 너를 보호한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강조된 단어가 뭐라 그랬어요. 내가. 내가 너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신부를 보호하고 싶은 신랑의 마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제 우리 마누라가 좀 우울해 하더라구요. 왠지. 자꾸 우울해 진대요. 근데 제가 뭐라 그랬을까요. 맞아요. 내가 있잖아. 내가. 주님 있고, 내가 있는데 왜 그래. 당신. 내가 있잖아.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라고 생각해요.

 

,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왔소. 불러볼까요. 다 같이. 2절 가사에 보니까, 가는 세월 뭐, 고은 얼굴. 잔 주름이 늘어도 그 다음에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다 같이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나 하나만 믿어온 것을 내가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찬송가에 집어 넣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주님의 마음.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 다 같이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그래서 하나님 뭐라 말씀하십니까. 계속 강조한게. "내가" "내가","내가" 이렇게 하겠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예요.

 

 

 

보호의 두번째 성격은 뭐냐하면 적들의 파멸과 백성들의 무장을 약속합니다. 적들은 파멸되고 백성들은 무장될 것이다. 적들이 어떻게 파멸하냐 2절에 보면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사면 국민에게 에워싸고 있는 적들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적들에게 혼취케하는 잔이 될 것이라. 이스라엘을 먹어 버렸어요.

 

예루살렘을 먹어버렸는데, 적들이 먹고 나니까 자기들이 취했어요. 자기들이 취해서 비틀거리고 말았다 이 말이예요. 그래서 혼취케하는 잔이다. 공격하고 손해봤다 이 말입니다. 오히려 수면제를 먹은 꼴이 됐다. 마취제를 먹은 꼴이 됐다.

 

그리고 나서는 자기들이 비틀거리게 된다. 혹은 그 다음에 재미나는 비유는 3절에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뭐가 된다 그랬어요. 무거운 돌이 되게 한다. 무슨 표현이냐하면 그 당시에, 이 성경이 기록되던 그 당시에 유행하던 게임중에 하나가 이런 게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년들이 젊은이들이 좋아하던 게임가운데 힘 자랑하기 위해서 무거운 돌을 들어요.

 

무거운 돌을 들며 흐~~흐 들어올린다 말이예요. 근데 어떤 사람들은 들다가 떨어트려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자랑하다 자기 발등이 찍혀요. 그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얘기하는 거예요. 예루살렘이 무거운 돌이 된다. 예루살렘을 공격했다가 자기 발등 찍히고 자기가 상처를 입고 자기가 물러간다 이 말이예요. 그래서 예루살렘을 혼취케하는 잔, 무거운 돌과 같이 삼아서 공격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것 때문에 파멸하게 될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느냐. 예루살렘 백성들은 오히려 어떻게 되는냐. 5. 5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찌라

 

" 5절의 마지막 부분에 그들은 따라서 합시다. 그들은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오히려 백성들은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어요. 새 힘을 얻었요. 능력을 힘입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6.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다시 말하면 그렇게 불 같은 기세로 적들을 파멸시키고 승리한다 이 말이예요. 적들은 공격해 왔지만 그들이 넘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불 같은 기세로 오히려 승리를 얻을 것이다라는 그런 그림이예요.

 

약속입니다. 약속입니다. 적들은 파멸되고 백성들은 무장된다. 이 두번째 약속입니다. , 어떻게 보호하냐, 환경적 보호. 첫번째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언입니다. 내가 보호하겠다. 두번째 적들은 파멸되고 백성들은 무장된다.

 

 

 

그 다음 세번째로 이 환경적 보호 가운데 하나는 뭐냐하면 약자들은 우선적으로 보호한다는 약속이예요. 약자들은 우선적으로 보호한다. 7절입니다.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7절 다 같이 시작.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지금 전체가 뭐에 대한 약속이예요

 

. 이 장 전체가 12장 제목이 뭐라 그랬어요. 12장 제목. 예루살렘의 보호.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을 약속하는데, 근데 예루살렘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주변을 가리켜서 뭐라 부릅니까. 유다라고 불러요. 유다의 수도가 예루살렘이죠.

 

유다 지역에. 이스라엘을 크게 둘로 나누면 북방 이스라엘, 남방 유다. 남방 유다의 수도. 이스라엘 전체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그 수도가 예루살렘이예요. 예루살렘을 보호하지만 예루살렘 보호하면서 예루살렘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도 보호하겠다. 그 주변 변두리도 보호하겠다 이 말이예요. 그래서 7절에 여호와가 먼저 그랬어요.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한다.

 

그래서 예루살렘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도 보호하는 사실을 보여주겠다.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우선적으로 먼저 유다를 책임지고 보호하고, 예루살렘도 보호하겠다 이 말씀이예요. 왜냐하면 약자에 대한 보호.

 

예루살렘에는 그 당시에는 당당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귀족들. 잘나신 분들 이런 분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변두리부터 책임지고 보호하신다. , 다시 말하면. , 하나님은 압구정동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수지도 보호해 주신다. 믿습니까. 근데 아멘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이렇게 다

 

하나님은 변두리 지역부터 보호하시고 책임져 주신다라는 약속이예요. 이것이. 이건 그 다음절 8절에도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8절 다 같이 시작.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그 중에 약한 자들이 그래서 그 날은 약한 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고, 어떻게 된다 그랬어요. 약한 자도 다윗 같겠고, 용맹 무쌍한 다윗 처럼 약한 자도 될 것이고, 하나님의 사자 같이 될 것이다 그랬어요. 여기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의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전체에 나타난 일관성 있는 정신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에 대한 언약들이 어떤 자들에게

 

약속 되었냐면 약한 자들에게 있어요.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약한 자를 편드시는 하나님.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약한 자를 편드시는 하나님. 특별히 고아, 과부, 나그네,장애인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지니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제가 무슨 날이었어요. 장애인. . 그래서 그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왜 나오느냐 말이예요. 자꾸만 성경이 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인들에 대한, 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한 보호를 약속하고 있단 말이죠. 장애인 날만 지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 내 생활 습관 속에서 여기 보면 7절에 뭐라 그랬냐면 중요한 단어가, 여호와가 먼저, 먼저. 따라서 합시다. 먼저. 이게 우선권이예요. 우선순위. 우선순위. 우선순위. 그렇니까 엘리베이터 탈 때 누가 먼저 타는 것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예요. 약한 자, 그러니까

 

누가 먼저 타야 되요. 나이 많으신 분 , 노약자. 그 다음에 뭐예요. 장애인 뭐 이런 사람 다 타고 혹시 남으면 타야죠. 그게 신앙 생활이예요. 신앙 생활이예요.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예요. 여기 저 장애인 차 parking 하라고 이렇게 표시해 놨는데, 딱 보고서 아무도 없다. 당당하게 딱 들어간다 말이죠.

 

따라서 하십시다. 이건 인간도 아니다. 그건 인간도 아니예요. 그리스도인은 물론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은 물론 아니고 이건 사람도 아니예요. 그게 하나님의 관심이예요.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먼저 돌아보시

 

 

 

 

 

 

예루살렘의 정화 /13:1-9/ 이동원목사

2014-12-05 21:10:41

 

이제 거의 우리가 스가랴서의 마지막 결론부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제13, 스가랴 제 13, 우리 펼쳐놓고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우리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 9장부터 14장까지 두 가지의 중요한 신탁, 예언.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 부분을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데 특별히 지난 시간에 메시야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세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세가지 사건.

 

첫째, 예루살렘이 보호된다. 둘째 예루살렘이 정화된다. 세 번째 예루살렘이 영광스럽게 된다. 예루살렘의 보호, 정화, 영광.

 

12장이 바로 예루살렘의 보호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이 보호된다. 환난 속에 보호된다. 보호될 뿐만 아니라13장은 예루살렘이 정화된다. 새로워 진다. 깨끗하게 된다. 14장은 예루살렘이 영광스럽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만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의 예루살렘, 그리고 시온은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보호는 바로 교회의 보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보호되고 또 교회가 정화되고 깨끗해지고 또 교회가 영광스럽게 된다.

 

메시야의 오심으로 재림을 통해서 일어날 사건은 뭐냐하면 교회의 정화와 영광으로 끝납니다. 교회가 깨끗해지고 또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는 것, 이것과 함께 인류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13장을 같이 생각하면서 예루살렘의 정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또는 교회를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교회가 정화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깨끗하게 될까요?

 

첫째는 죄 씻음을 통해서 깨끗해 집니다. 죄 씻음. 그것이 1절의 말씀 이에요. 13장의 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날에는 물론 그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지향하고 있지만 이미 그 재림을 향한 역사는 예수님 초림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초림과 재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살고있는 우리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가장 인류 역사를 향한 숨가쁜 드라마가 완성되는 그 시점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게 될 것이다.” 여기 죄와 더러움이란 낱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죄에 대한 또 한번의 강조점으로서 다른 단어를 쓴 것이냐 아니면 차이가 있느냐? 뭐 신학자들은 이러한 것을 가지고서 상당히 논쟁을 벌입니다.

 

저는 신학자가 아니라 그렇게 뭐 자세하게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데 어쨌든, 또 많은 학자들은 이 죄와 더러움이, 이 더러움이란 것은 죄의 결과로서 생기는 오염된 삶의 현장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려온다.

 

이 죄 씻음의 시작, 우리가 죄 씻음을 받을 수 있게 된 그 사건은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미 스가랴 12장을 공부하면서, 1210절에서 그 메시야가 오셔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그 예언을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1210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한번 더 시작,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들이 찌른바 그 분~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지요. 찌른 바 그 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위해서 애통하고 회개하면서 주앞에 돌아올 것이다. 어떤 예언 이에요. 예언. 회개에 대한 어떤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그분이 찔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찔리셨기 때문에. 그분이 찔리시므로 말미암아 그가 흘리신 피, 이 보혈이 바로 우리의 용서와 죄 사함의 근거인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피 흘림이 없은즉, 뭐가 없어요? 사함이 없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십자가의 피흘림의 사건이 바로 우리들의 죄 사함과 용서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주께서 찔리고 피를 흘리시므로 그것이 샘이 되었어요 샘.

 

여기 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샘이, 웅덩이와 구별되는 단어입니다. 웅덩이는 그냥 물이 이렇게 고여있는 거죠. 샘은 계속 솟아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은 고여있는 웅덩이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 솟아나는 능력입니다. 보혈의 피는 지금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정화의 능력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 이 보혈의 샘에 관한 참 아름다운 찬양을, 가사를 작사한 사람이 있죠?

 

우리 찬송가 가운데 무슨 찬송이 생각납니까 네? 190장이죠? 찬송가 190. 윌리암 카우프란 사람이 작사한 찬양인데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뉴엘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이 윌리암 카우프라는 사람은 목사 아들입니다. 목사 아들로서 변호사가 되었어요. 그런데 정신적인 질환을 앓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69년을 살았는데, 69세를 살았는데, 69년 동안에 21년간을 정신병과 더불어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분이 많은 도움을 얻은, 도움을 주었던 분이 한 분 있는데, 그 분이 누구냐하면 우리가 잘 아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Amazing grace를 작사한 존 뉴튼이라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존 뉴튼 목사님께 큰 도움을 받았어요.

 

늘 위해서 기도해주고 또 말씀을 읽어주고 또 격려해주고, 이 존 뉴튼 목사님을 통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안정되고 그리고 뉴튼 목사님이 자꾸 격려를 해서 자네는 좋은 달란트가 있네. 인생을 낭비할 것이 아니야. 당신도 자네도 뭘 할 수가 있다뭘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시적인 재능이 있었어요. 그래서 찬송가를 작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여러 편의 아주 아름다운 찬송 시를 남겼습니다.

 

그 정신병원과 투병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의 시의 한편이, 바로 이 시 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뉴엘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그가 세상을 떠나갈 때 그는 마지막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나를 버리지 마소서. 저가 이순간도 주님의 보혈 의지합니다. 그가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그 투병생활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고, 마지막에 그의 평생을 붙들어 주었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는 평안히 주님 앞으로 갔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뉴엘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이런 것이, 테잎 녹음이 되면 그 다음에 편지가 날라옵니다. 목사님 제발 설교하다가 찬송하지 마십시요. 하하~ ,

 

 

 

죄 씻음, ~ 죄 씻음이 바로 우리가 정결케 되는 첫번째 스탭이죠.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는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가 정화되기 위해는 두번째로 죄의 원인들을 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죄 짓게 만드는 원인들을 멀리해야 되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짓게 만들었던 원인들을 제거해 주시겠다 멀리해주겠다는 약속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2절부터6절까지, 우선 2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2절 다같이 본문의 2절 다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 우선 죄를 가지고 오는 첫번째 원인, 우상입니다 우상. 그 우상을 우상의 이름을 기억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우상을 없애겠다 우상을 멀리해주겠다. ~ 우상이 멀어져야 우리가 깨끗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늘 강조합니다마는 우상의 가장 간단하고도 단순한 정의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드는 모든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잘 안보여요. 하나님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

 

그런데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가장 무서운 우상이 보이는 우상들 이였어요. 그렇죠? 보여지는 우상들. 그러나 신약에 오면 보이는 우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상을 강조합니다. 보이지 않는 우상. 대표적인 우상이 뭘까요?

 

골로새서 34절에 보면 골로새서 35절 한번 찾아보세요. 골로새서 35. 신약성경은 보이는 우상보다도 더 큰문제가 보이지 않는 우상이다.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무엇인가?

 

골로새서35, 골로새서35. 골로 새지 말고 잘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하~~

 

, 골로새서 35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화 사욕과 악한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뭐가 우상숭배라고 그랬어요? 탐심이 우상숭배다. 욕심이 우상숭배다.

 

, 욕심이 나를 지배하면 내가 아~ 욕심을 품고있는 그것이 나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보다도 다른 것보다도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욕심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욕심 밖에 생각나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 또 하나님 보다도 내가 더 매달리게 되는 것, 그게 다 우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탐심이 우상숭배다, 우상을 없애야 합니다. 우상을 멀리할 때 우리가 깨끗해 집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는 돌아다니면서 막 우상을 없애려고 그랬는데 사실은 보이는 우상이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상이 문제에요. 내 마음 속의 욕심들, 내가 욕심을 떠날 때 그때 내가 정말 정결한 생활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또 죄의 원인들, 죄의 원인들이 되는 두번째, 그게 뭐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2절에 보면은 거짓 선지자가 나오죠? “거짓 선지자와이랬어요. 거짓 선지자.

 

다시 말하면 내게 잘못된 영향을 주는 거짓된 영향을 주는 교사들. 문화적으로도 나에게 잘못된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사상적으로도 나에게 잘못된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이 땅에는 많은 거짓된 교사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도 그냥 이단이 많고 가짜가 많으니까 다 가짜다! 다 가짜다 이렇게 생각해요. 기독교는 다 가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다 사기꾼이다. 한 사람 사기꾼이 나오면 다 사기꾼이다. 이런 사람도 있죠?

 

파스칼이 재미나는 얘기를 했어요. 왜 가짜가 많은가? 왜 가짜가 많은가? 진짜가 있기 때문이다. 하하. 왜 사람들이 많은 가짜를 만들어내는가?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를 만들어 내는 거에요. 진짜가 없으면 가짜를 만들어 내지 않아요. 진짜 다이아몬드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가짜를 만들어냅니다. 진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가짜 때문에 실망하면 안돼요. 우리가 이 가짜를 경험할수록 실망하지말고 그래서 더 진짜는 소중하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되요. 진짜는 소중한 거에요. 그것이 긍정적인 사고에요. 가짜에게 한번 속고 나서 다 가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단 말이죠. 그러나 잘못된 태도에요.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한평생 신앙생활의 여정에 있어서 특별히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거짓된 영향을 끼치는 거짓 선지자들, 이 거짓 선지자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뭐냐하면 여기 재미나는 말이 나오는데 4절에 보면 그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여기 가짜 선지자들 이에요. 가짜 선지자들. 3절에도 보면은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이 거짓된 선지자를 얘기하는 것 이에요.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고있구나

 

그러니까 잘못된 선지자는 누가 제일 잘 아느냐 하면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제일 잘 안다 이 말입니다. 부모가 제일 잘 안다. 부모가 제일 잘 안다. “, 너는 가짜야그러니까 진짜냐 가짜냐를 알 수가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진짜냐 가짜냐?

 

그 사람하고 같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요. 그러니까 나의 진실성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누굴까요, 하나님 빼놓고는? 우명자씨가 제일 잘 압니다. 제가 진짠가 아닌가 가짠지 확인하고 싶으면 다른데 가서 물어보지 마세요. 우명자씨 한테 가서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제일 잘 알아요. 그렇죠?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제일 잘 알아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안다 이 말이에요. 부모가, 부모가 알고 너는 가짜다,

 

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지만 너는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인정 받지 못하는 신앙인, 아내에게 인정 받지 못하는 신앙인, 자식에게 인정 받지 못하는 신앙인, 이건 문제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교회의 지도자를 말할 때 자기 가정에서 신뢰를 받아야 된다, 가정에서. 이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짜는 어떻게 아느냐? 가짜 선지자는 부모가 안다 부모가 안다. 자신도 알아요 사실은 자신도 알아요.

 

그래서 그 다음에 보면은 45절에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그러니까 가짜 선지자가 자기가 선지자가 아니라고 속인 것이라고, 진짜면 왜 그것을 당당하게 못 내어 놓겠어요? 가짜이기 때문에 그래요. 무당이 무당이라고 하면 좋아합니까 안 좋아합니까? 별로 안 좋아해요 무당이라면, 길에서 딱 마주쳐서 당신 무당입니까? 그러면 당당 하지를 못해요. 어딘가 이런 사람들은 다 당당하지 못해요. 가짜는 당당하지 못해요. 진실한 사람의 특성은 당당함입니다. 뭐 내가 잡힐게 없는데, 당당할 수 있습니다.당당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특별히 이런 거짓 선지자들, 오늘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가짜들에게 잘못된 영향을 받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어요. 그것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더 순결해져요. 순결해집니다.

 

또 하나 여기 2절에 보시면 또 누가 나옵니까? 죄 원인,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원인들? 우상, 거짓 선지자, 그 다음에 사귀그랬어요 사귀. 2절에 더러운 사귀를 이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더러운 사귀, 마귀. 다시 말하면 더러운 영, 더러운 영 더러운 영. , 이 악령에 관해서 우리가 이 사탄 마귀에 대해서 두 가지 뭐 여러 가지 별명이 굉장히 많아요. 별명이 참 많이 나오는데 제일 많이 나오는게 두가지 에요. 더러운 영, 악한 영. 더러운 영, 악한 영.

 

그래서 모든 더러운 일들의 배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더러운 영이 있어요. 악한 일들의 배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악한 영이 있어요. 악한 영이 악한 일들을 일으키는 거에요. 더러운 영들이 더러운 사건들과 더러운 일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사귀가 떠나야 돼요. 떠나야만 그래서 깨끗해 집니다. 가정에서 사귀가 떠나야 돼요. 교회에서 사귀가 떠나야 돼요.

 

부흥이란 것이 뭐냐하면 부흥? 사회가 한 사회가 막 더러워지고 파국으로 치닫다가도 교회 역사를 공부해보면 갑자기 부흥이 일어나요 부흥. 리바이블이 일어나요. 부흥이란 것은 하나님이 위에서 주권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사귀들이 떠나요. 더러운 영들이 떠나요. 그 사회에서 떠나요. 그러면 갑자기 깨끗해 져요. 사회가 갑자기 술집이 닫히고.

 

사람들이 죄 짓게 만드는 사업들이 다 무너지고 순간적으로 사회가 갑자기, 사람들이 그런 깨끗한 사회 만들어 볼려고 노력을 해도 안되었던 것이 불과 한 몇 달 사이에 갑자기 사회가 깨끗해 져요. 그게 부흥 이에요. 진정한 부흥 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러한 부흥을 가져올 수가 있어요. , 그러면 가정이 깨끗해지고 사회가 깨끗해지고 교회가 깨끗해지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부흥. 가정에서 부흥이 일어나도록.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도록 진정한 부흥, 참된 부흥,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부흥, 우리 사회 속에 부흥이 일어나도록 부흥.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날 때 한 사회와 역사가 깨끗해질 줄로 믿습니다.

 

, 이 죄를 가지고 오는 원인들을 멀리해야 된다. 악령들을 멀리해야 된다. 악령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그러한 틈을 보이지 말아야 돼요. 틈을 보이지 말아야 돼요. 마귀로 뭐라고 그랬습니까?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그랬어요. 틈타지 못하게 하라, 기회를 주지 말아야 돼요. 그래서 죄의 원인들을 멀리해야 됩니다. 그래야 깨끗해집니다. 죄 씻음을 받아야 되고 죄의 원인들을 멀리해야 됩니다.

 

 

 

마지막 세번째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기위해서 어떤 일을 하시느냐 하면 연단하십니다. 환난 가운데 연단하십니다. 환난 가운데서 연단, 그것이 7절부터9절까지의 내용이에요.

 

환난 가운데서 연단. 갑자기 하나님이 치세요. 공동체를 치시고, 7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갑자기 그냥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해요.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어려움을 당한다 해서 우리가 너무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는 방법 이에요.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핍박이 일어나고 수난이 일어나면은 그것 때문에 교회가 망하지는 않아요. 절대로, 절대로 안 망합니다. 더 순수해져요.

 

중국에 문화혁명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가 다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선교사들이 다 추방당했습니다. 추방 명령이 내렸고 뭐 안 떠나면 다 죽인다. 그래서 다 떠났어요. 다 떠났어요.

 

그래서 중국이 닫혀져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중국 땅은 완전히 버림을 받은 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문화혁명이 끝나고 중국이 개방되고 들어가 보니까 놀라운 사실들이 벌어졌어요.

 

그 동안에 하나님이 주권적인 역사로 다 그냥 순수한 지하교회. 가짜는 다 없어져요. 핍박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누가 교회에 안 나올까요? 핍박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 가짜의 농도 순서로 떠나요. 제일 가짜가 제일 안 나오고, . 그리고 진짜가 제일 많이 남아있어요.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남은 자들이 생겨요. 그들이 순수한 자들 이에요.

 

여기 보면 8절에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이걸 꼭 나는 숫자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뭐냐하면 많은 다수가 떠나지만, 많은 다수가 떠나가지만 이 핍박 속에 많은 다수가 떠나지만 상당한 숫자는 뭐에요? 남는다.

 

삼분의 일은 남는다 그래도. 상당한 숫자가 남는다.

 

그들이 교회를 지켜요. 그들이 교회를 순결하게 만드는 것이예요. 그래서 가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운 일이 생기면, 공동체 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어려운 것 싫어하는 가짜들이 제일 먼저 떠나요. 의미 없는 가짜들이 떠나요.

 

그리고 순수한 사람들이 남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공동체를 순결하게 만드셔요. “내가 그 삼분지 일을어디 가운데 던진다고요? “불 가운데 던져뭐같이 연단하며?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연단한다금과 은은 불 속에서 재련 되어서 깨끗하고 순결해지죠. 주님은 그러한 때가 올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습니다.

 

말라기 3장 한번 찾아보세요. 말라기323, 말라기323. 구약의 맨 마지막 책의 말라기에요 스가랴 다음에요. 말라기 3, 말라기 32절과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게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라기는 마지막 이제 예언인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오셔요. 그런데 비슷한 일이 예수님 재림 때도 일어나요.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까요? 하나님의 백성을 깨끗하게 하셔요.

 

제가 그 말세에 대한 설교를 얼마 전에 하면서 역사의 방향 마지막 때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사건중의 하나가 큰 환난 이에요. IMF는 문제가 아닌 큰 환난이 앞으로 오게 될 거에요. 그런데 그 환난이 온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어요.

 

그 큰 환난은 어떤 역사를 가져올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고 교회를 순결하게 만드는 일을 하실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준비하고 환난을 잘 맞이하고, 환난 속에 깨끗해 지는 연습을 해야 돼요. 자기의 생활 속에 조금만 어려움이 온다고 해서 막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 그럴 때 일수록 자신을 돌라보고 기도하면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보존할 때 우리는 금과 은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 앞에 설 줄로 믿습니다.

 

내가 한가지 재미있는 얘기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난이 올 때에 도망가면 안돼요. 그대로 고난을 직면해야 돼요. 후퇴하는 사람은, 피하거나 도망가거나 이런 사람들은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어떤 목사님이 어떤 교인이 고난을 받는 것 같아서 그 집을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심방을 갔는데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을 안합니다. 있는 것 같은데 눈치가, 아무리 해도 있는 것 같은데, 없는 척하고 안 열어준단 말이죠.

 

그래서 목사님이 그냥, 또 그냥 가기도 뭐하고 그래서 쪽지 하나를 남겼어요.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가 계시록320절을 썼어요. 계시록 3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 말을 딱 써놓고 갔어요. 미안했던지 그 다음에 이제 그 교인이 아마 교회에 나온 모양인데, 교회에 나왔는데 또 목사님 보지도 않고 그냥 도망갔어요. 그런데 도망가면서 목사님 사무실에다가 이 교인도 쪽지 한 장을 남겼대요. 목사님, 교회 다녀갑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창세기 310, 그래서 목사님이 뭔가? 창세기 310절을 찾아보았더니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숨으면 안돼요. 숨으면 살길이 없습니다. 도망가면 안돼요. 고난이 올 때 하나님 제가 받아야 할 교훈을 잘 배우고 받게 하시고 주앞에 견고하게 든든히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주앞에 더 깨끗한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오늘도 인생을 살면서 우리 앞에 크고 작은 시련들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시련 속에는 우리를 깨끗게 할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 붙들고 주 앞에 나와 정결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주 앞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버지 주의 거룩한 말씀을 붙들고 주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도록 도와주시고 역사해 주시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 앞에 나와 말씀을 받고 오늘 휴일이고 어린이 날이고, 그렇지만 말씀은 듣고 싶고 또 주 앞에 기도하고 싶고 또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너무나 커다란 기쁨 이여서 주앞에 나왔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해 주옵소서. 우리 시대가 어려움을 지나고 있지만 우리 선배들이 당한 어려움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 인생의 크고 작은 시련들을 잘 견디고 주 앞에 더 깨끗한 백성으로 설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님 언제 이 땅에 다시 오셔도 내가 주앞에 설 때 부끄럼 없이 주님 제가 주의 은혜로 잘 살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고백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처럼의 휴일이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을 드리옵고, 또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하고있는 고통 받는 이웃들을 돌아보며 감사함으로 이 헌금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쓰여지는 곳에 우리의 이웃들이 힘과 용기를 얻고 주앞에 더 가까이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주변에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위로해 주시고, 주의 성령의 은혜로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그 거룩한 섭리를 믿고 의지함으로 인생의 어려운 때들을 승리하며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주앞에 나와 이 귀한 예배와 또한 주를 향한 찬양의 시간을 같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이제 흩어지는 시간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다시 만날 때 까지 승리로운 삶을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주 앞에 예배를 드리고 또 감사의 헌금을 드리고 찬양하며 다시 삶의 장으로 나가는 당신의 백성들의 발걸음마다 성령의 평안으로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회복에의 메시지 /8:1-23/ 이동원목사

2014-12-07 06:47:59

 

스가랴서 8장을 함께 같이 공부하시겠습니다.. 스가랴서 다 잊어버리지 않으셨어요? 찾는데 어려움을 느끼는걸 보니까 스가랴서를 보신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

, 스가랴서는 4개의 커다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서론이고 11절부터 8절까지, 나머지 부분은 두번째, 스가랴서의 두번째 부분은 뭐라 그랬습니까? 8가지 환상, 8가지 환상으로 두번째 부분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부분은 뭐예요. 두개의 메시지. 그게 7장과 8장이죠. 7장과 8장이 두개의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고, 9장부터 마지막 장까지가 두개의 예언, 혹은 신탁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두개의 예언, 혹은 신탁. 두개의 메시지, 세번째 구조에서 첫번째 부분인 7장은 뭐에 대한 메시지 였습니까? 금식에 대한 메시지였고, 8장은 오늘 함께 공부할 8장은 회복에 대한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회복에 대한 메시지. 우리가 이 8장을 보면 8장에 열번씩 반복되는 중요한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8장을 풀어가는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82절 우리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82. 다 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82절이 무슨 말로 시작이 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3절도 무엇으로 시작되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4절도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6절도 어떻게 시작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7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9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11절에는 말하노라가 아닌 말하노니 그러니 11절은 빼고, 왜냐하면 딱 떨어지는 문장이 아니예요. 14절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19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20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마지막 23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몇번 나와요. 10번 나와요.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그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과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 그 회복을 축복하고 있는 그 축복의 메시지. 축복의 약속입니다. 약속과 동시에 그러한 축복이 이루어져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책임을 감당해 가야 할 것인가, 그 책임에 대한 격려가 10가지 메시지 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회복이라는 것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의 회복에 그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이 회복된다. City가 회복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이나 도시의 회복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비단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 회복뿐만이 아니라, 이것은 신약까지 연장되어서 모든 시대를 통한 신앙 공동체의 궁극적인 회복, 다시 말하면 신약에 있어서의 신앙 공동체의 회복인 교회의 회복까지도 바라보고 있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회복의 메시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이 스가랴 8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드는 이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 일수가 있는가 공동체의 이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꿈.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꿈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꿈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모아서 그들이 연결되게 하셨을 때 그 공동체를 향해서 하나님은 어떤 기대를 가지셨는가,

 

어떤 하나님의 꿈. God's Dream. 하나님이 어떤 꿈을 가지셨는가? 우리 편에서 볼 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꿈을 갖고, 그 공동체를 실현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도 그 누구도 완전히 자기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때, 완전히 인간 가운데, 예수님 빼놓고, 아마도 완전히 내 꿈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공동체도 그 공동체에 위탁된 꿈을 100% 완전히 실현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는 사실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완성 교향곡과 같은 것이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꿈이 없다면, 어떤 ideal이 없다면 이상이 없다면 Dream이 없다면 개인은 절대로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도 성숙해 갈수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꿈과 그리고 그 이상을 100% 성취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꿈이 없는 인생. 꿈이 없는 인생,

 

vision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은 앞으로 향해서 도무지 전진해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인생의 활력 인생을 움직이게 만드는 또 인생의 희열을 주는 것, 인생의 의미를 주는 것. 인생을 움직여 나가는 것. 인생을 성숙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열쇠, 삶의 요소가 있다면 저는 그럼 그걸 꿈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 Vision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꿈이라는 말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동양사회는 상당히 소극적인 정의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동양권에서는 이 꿈이라는 것이 별로 좋은 의미로 쓰여지지 않았어요. 몽상 그래서 개꿈.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수 없는 어떤것들 헛된 어떤 것들.

 

이런 것들을 상징하는 언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만 기독교 문화 영향을 받은 서구권에서는 꿈이라는 것은 매우 진취적이고 미래로 향한 그런 의지로 작용하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서양 사회가 동양 사회 앞지르고 많은 가치를 창조해 놓은 중요한 그 배경이 아니였는가라는 그 원인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실까요?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꿈을 갖는다는 것, vision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죠. 월트 디즈니, 유명한 월트 디즈니가 자기 딸이 한 5살쯤 되었을 때, 그 딸의 손을 잡고 공원에 갔다가, 그 공원이 아주 열약한 환경인 것을 보았습니다.

 

안전하지도 않고, 또 공원의 어린이 그 놀이기구도 엉성하고, 아이들이 당장 다칠 것만 같은, 그리고 엉성한 분위기의 그 공원을 보면서 월트 디즈니의 마음속에 물끄러미 자기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꿈이 하나가 있습니다.

 

정말 안전한 곳에서 마음껏 아이들이 미래를 향한 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그런 놀이공원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것이 단순히 놀이 터일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연을 학습하고, 과학을 학습할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장이 될 수는 없을까? 갑자기 머릿속에서 꿈이 막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월트 디즈니가 자기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고가서 그 열악한 공원 환경 속에서 보면서 그 자리에서 그 마음속에 움트고 있었던 꿈. Dream. Vision. 그것이 오늘날 전세계에 퍼진 놀이공원, 디즈니랜드라는, 디즈니 월드라든지, 에버랜드도 다 그것 때문에 생긴 거예요. 이 한 사람의 꿈 때문에.

 

한 사람의 꿈 때문에 저는 언젠가 여러분들과 나누었습니다마는 요즘 저는 평신도 지도자 훈련을 하면서 그 얘기를 지속적으로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 하블이라는 사람이 신학생 시절에 20대 초반의 어린 신학생이 빌스킬이라는 신학교 교수가 가르치는 사도행전 강의를 들으면서 이 교수가 사도행전 2장에 초대교회 특성을 얘기하면서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

 

살아 움직이는 교회. 모든 교인들이 전도하던 교회. 나가서 불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 이 교수가 학생들에게 도전하기를 나는 아직 초대 교회 이후에 이 초대 교회를 닮은 아니 초대교회를 능가할 수 있는 사도행전적인 그 가장 위대한 교회는 아직 이 땅에 탄생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말하면서 학생들을 가리키면서 여러분 중 누군가가 바로 그런 교회를 building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어린 신학생 빌 하이블은 마음속에서 외쳤다고 합니다. ~ 하나님이여 도와주시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사도행전을 닮은 위대한 교회의 꿈이 탄생하고 있었던 순간이예요. 만약 그가 그 꿈을 꾸지 않았었더라면 오늘날 윌로우 크릭 같은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공동체가 어떤 꿈을 가져야 하느냐? 오늘 우리는 스가랴 8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만드는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가 될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기대를 가지셨느냐? 10가지 기대. 10가지 기대. 10가지 기대가 하나님의 10가지 선언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선언입니까? , 여호와가 말하노라. ,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말속에 10가지 선언이 있습니다. 10가지 선언. 왜 하필이면 10가지를 선택하셨을까. 열이라는 숫자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수로 이해했습니다.

 

만수, 꽉 차 있는 수. 그렇잖아요. 옛날 뭐 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세대에는 손가락으로 다 셋는데 기꺼해야 세봐야 몇까지 셀 수가 있어요. 열이면 끝나요. 이게 만수예요. 만수. 그래서 아마 십계명도 나왔을지 모르죠. 십계명. 열 이상 세기 위해서는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해요. 열은 만수 입니다.

 

만수. 열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기대를 요약했다도 할 수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이것은 바로 잠시 후에 회복될 성전이 회복되고 도시가 회복되면서, 시온의 땅 예루살렘 안에 세워질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Dream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시대에서 믿음의 공동체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만드는 공동체가 어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하나님이 기대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만들고 있는 이 교회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되길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 몇 가지예요? 10가지.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아직 오늘 끝나기는 틀렸다. 10가지 하려면 얼마나 많이 지나 갈 것인가?

 

첫째는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공동체다. 사랑의 대상으로써의 공동체. 1절과 2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보고 너무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 없는 공동체. 사랑의 대상으로써의 공동체. 우리 다시 한번 1절과 2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시작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여기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왜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기대를 읽어낼 수가 있을까요. 무슨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단어가 있다면 어떤 단어가 있을까요. 질투입니다.

 

그렇죠. 사랑과 질투, 같은 단어라고 생각을 해요. 본래 사랑이라는 단어가 히브리, 아니 이 질투라는 단어가, 질투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키나(?), 키나(?). 라는 단어입니다. 키나, 다 같이 키나. 앞으로 남편을 질투할 일이 생기면 속으로 키나 그러십시오.

 

겉으론 하지 마시고. 키나. 질투. 이 단어를 히브리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 재미나는 것은 이것이 두가지 단어로 번역될 수가 있어요. 똑같은 단어를 가지고, 한 단어는 우리말의 번역처럼 질투라고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Jealous 라고 그렇죠. 영어로 jealous. Jealousness. Jealous. jealous라는 단어와 비슷한 영어 단어가 하나 있어요. zeal, zeal 아주 비슷한 단어예요.

zeal(?) 하나는 J로 시작하고 하나는 Z로 시작하고, zeal, jealous. zeal이라 하면 열정이라는 말입니다. 열정, 혹은 열심. 질투하고 열정. 펄펄 끓어 오르는 열정. 마찬가지 예요. 열정. 질투.

 

어떤 여자가 남편이 바람이 들었는데, 전혀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둘 중의 하나일거예요. 하나는 성화가 완성된 성녀던가 그렇지 않으면 아주 돌아이던가. 머리가 어떻게 된 이상한 사람이던가, 인간이 아니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질투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어떻게 질투 안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해서 그들의 시선을 돌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어떻게 하실까요. 질투하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예요. 이런 부분을 가지고 어떤 분이 하나님을 가지고 goship비슷한 언어를 썼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지나치게 인간적인 하나님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다. 저는 그걸 볼 때 하나도 이의를 달 것이 없더라구요. 맞아요. 하나님은 굉장히 인간적인 하나님이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닮아서 하나님이 인간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그건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런 것 뿐입니다.

 

그 차이예요. 그 차이. 사실은. 우리가 왜 질투하는가. 왜 그래요. 하나님 닮아서 질투하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을 닮은 특성 중에 하나예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예요. 질투하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시온, 시온이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 다른 말로 시온이라 말할 수 있죠.

 

시온을 위해서 쪼금 질투한다가 아니라, 여기 뭐라 그랬어요. 크게 질투한다. 크게 질투한다. 심지어 그를 위하여, 크게 뭐라 그랬어요. 분노까지 하신다. 막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시는 하나님. 아주 인간적이신 하나님이예요. 맞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 얘기는 뭡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얘기예요.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질투 속에 움직이고 있는 사랑. 그 사랑 . 바람이 나던지, 집에 나가던지, 나는 관심없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주님 이외의 다른 것을 향해서 시선을 돌릴 때, 밤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하나님. 크게 질투하시고, 화내시면서 돌아오라고 촉구하시는 하나님. 그렇게 저와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 그래서 시온은 마땅히 시온은 개인적으로 그분의 사랑 받는 대상이 되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되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뭐라 그랬어요. 신붑니다.

 

신부. 주님의 신부예요. 신부. 주님 보실 때 너무나 사랑스런 신부. 우리 공동체의 심령이 정말 주님을 향하여 드려질 때 우리의 그 순전한 시선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너무 사랑스러워 견디지 못해하시는 하나님. 주께서 보고 싶어하는 우리들 공동체의 모습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공동체.

 

두번째, 우리는 스가랴 8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공동체 우리가 회복을 위해서 공동체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먼저 봐야할 공동체의 이상이 있다면 두번째로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3절이예요.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 다들 돌아가시기 직전이예요. , 다시 한번 3절 다 같이 시작.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고 있고, 다 돌아올 것을 하나님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만 돌아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 3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누가 시온에 돌아와요.

 

내가 돌아왔은즉 주님이 돌아왔은즉, 동시에 함께 그 백성들과 함께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그리하여 그 예루살렘은 뭐가 되겠고, 진리의 성읍이 되겠고, 진리의 성읍이 된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뭡니까?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가보면 예루살렘 높은 고지대의 언덕에 세워진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 있습니다. 감람산 ,시온산 이 산들이 쭉 에워싸고 있어요. 지금 스가랴 선지자는 이런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환상을 보고 있어요.

 

그 성이 예루살렘 성이 무슨 성이 되고, 진리의 성읍이 되고, 여기서 강조한 Character는 특성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성읍이 되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 도성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을 보면서 이 산은 무슨 산, 성산, 거룩한 산. 여기 두가지의 Character가 강조됩니다. 하나는 진리, 또 하나는 거룩이예요.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

 

저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있다면 진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이 진리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세큘라한 세속적인 공동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다. 우리는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위에 교회는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이 진리 위에서 비로서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최대의 자산은 건물이 아닙니다. 빌딩이 아닙니다. 터전도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진 교회. 하나님이 말씀이 부요하지 못한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지 못한 교회. 그것은 비워있는 교회일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그것은 진리의 공동체가 마땅히 되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메시지가 선포될 때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빛을 볼 것입니다.

 

새로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진리의 공동체 그리고 뿐만 아니라, , 예루살렘을 아름다운 시온산, 감람산이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진리의 교회를 뭐가 둘러싸고 있어요. 거룩한 삶, 거룩의 삶. 거룩의 삶. 저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진리가 진리되기 위해서 또 하나,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거룩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진리와 거룩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수가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이 진리를 받고 나아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 거룩의 삶이 있습니까? 거룩의 삶.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삶으로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예요.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삶이 없을 때, 교회에서 선포되는 진리는 하나의 추상적인 강론으로 끝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은 우리의 삶 속에 거룩이 있을 때, 사람들은 정말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동체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이 바로 진리를 에워 싸고 있는 것이예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제자들을 향한 그들을 향한 마지막 기도의 장면 가운데서 이런 유명한 기도를 하셨죠. 아버지여 저들을 진리로 어떻게요? 거룩하게 하옵소서.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진리와 거룩이 같이 나왔어요.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그 다음에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 위대한 말씀이예요. 외우기도 쉬워요. 요한복음 1717.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따라서 하십시다. 저들을, 우리 편에 이렇게 바꾸어서 읽으십시다.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정말 하나님의 그 기대의 기대를 이루는 공동체가 될려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 그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세번째는 평화의 공동체. 45. 4절과 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어떤 이미지를 느끼시나요? 4절과 5절을 읽으시면서 어떤 이미지를 느끼세요. 대답까지 다 주었는데. 이미. 평화. Salom. 평화를 느끼잖아요. 어디서 평화를 느낍니까? 늙은 지아비와 지어미가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 혹은 어린아이들이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동남,동녀들이 어떻게 해요

 

. 철없이 장난치고 있는 모습. 평화의 반대개념은 뭘까요.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죠. 그래서 전쟁과 평화를 쓴 작가도 있습니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죠. 전쟁이 나오면 제일 피 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전쟁속에서 제일 고생하는 인간군이 있다면 누굴까요.

 

노인과 아이들이죠. .. 전쟁이 나면, 시대가 어려워 지면 제일 피해를 보는 것이 노인과 아이들이예요. 저는 지금 북한이 그럴거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제일 많이 피해를 보일거라고. 그리고 노인들. 노인과 아이들이 제일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이제 돌아오고 있습니다. 누가 제일 돌아오지 못했을까요? , 먼 길, 페르시아에서 이스라엘, 예루살렘까지 돌아오는 도상에 있어서, 그 먼 길이예요. 아직도. 그리고 교통도 발달되지 않은 그 시대 속에서 살았던 그들에게 있어선 위험한 전이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제일 없었을까요. 돌아온 사람들 중에. 노인이 없었을 거라고요. 그들은 아마 바벨론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예요. 아이들도 포기하고 온 사람들이 많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돌아온 예루살렘. 그들이 꿈을 가지고 돌아오긴 했지만 예루살렘 성은 아직도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제일 보기 힘든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노인과 아이들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 통해서 지금 이런 또 하나 위대한 비젼을 주고 있는 거예요. 어느 날, 예루살렘에는 늙은 지아비와 지어미들이 거리마다

 

편안히 앉아 있게 될 것이고, 그리고 동남, 동녀들은 장난을 치며 철없이 그들의 아름다운 웃음을 티없이 맑은 웃음을 터트리면 유희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상상만해도 어떻습니까? 평화를 느끼지 않습니까? 평화의 공동체가 된다. 평화의 공동체.

 

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드는 공동체는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공동체 속에서 기대하는 공동체상. 가장, 어떤 공동체상이 되어야 하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평화예요.

 

교회에 와서까지도 평화를 경험하지 못한다. 이건 어떤 나라 비극이예요. 왜 교회와서 시비거는 사람들이 있는지 몰라요. 시비걸 것이 이 세상에 많은데. 너무 아파서 그럴지도 모르죠. 마음의 상처가 많아서 그럴지도 몰라요.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안식을 경험하는 공동체. 평화를 경험하는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드는 공동체에 대한 주님이 기대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평화의 공동체예요.

 

그 다음에 네번째는 6. 다같이 읽겠습니다. 6절 다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여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적의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의 공동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된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예요. 사실 바벨로니아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예루살렘의 형편은 말이 아니였습니다. 여러분이 느헤미야 1장을 읽어보면 그래서 예루살렘의 보고를 듣고 나서 그 참담한 사정에 대한 보고를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느헤미야는 통곡을 하고 금식을 하면서 웁니다.

 

그만큼 사정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회복된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회복된다. 이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사실이예요. 이것은, 기적이 없으면 그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들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어찌 기이한 일이겠느냐? 다시 말하면 나 하나님에게는 그건 문제도 아니다 그 말이죠. 하고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성경에 그런 사건이 얼마나 많아요.

 

,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뭘 약속하셨습니까? 자녀를 약속하셨죠. 그러나 이미 인간적으로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생리적 한계를 넘어셨습니다. 이제. 근데 하나님이 다시 천사를 통해서 다시 자녀를 주신다는 메시지를 주셨더니 아브라함과 사라가 최초로 보였던 반응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어떤 반응을 보였어요. 웃었죠.

 

~~~. 그럴니가 있습니까. 하나님 농담도 너무하시지. 이 나이에 제가 무슨 자녀예요. 이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 여호와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내가 하고자 한다면 내 눈에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이런 메시지가 성경에 반복되는 장면이 여러 Case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서 32장에 봐도 이제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결정적인 유다의 멸망을 마지막 멸망을 예언합니다. 허나, 멸망을 예언하는 동시에 회복을 예언합니다. 이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뻔해요.

 

그런데 망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데 회복은 눈에 안보이거든요. 그 때 예레미야 3226절 이하에 보면 또 그 메시지가 나와요. , 여호와께 능치 못함 있겠느냐? 내가 하고자 한다면. 내가 하고자 한다면. 여러분 기울어져 가는 가정. 기울어져 가는 사업.

 

기울어져 가는 내 인생의 운명 앞에서 사람들은 멸망을 볼 뿐, 침륜과 좌절과 낙심과 황폐를 볼 뿐. 그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대부분의 회복을 보지 못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내가 하고자 하면 그것이 문제겠느냐. 네 눈에는 그것이 기이함일 것이다.

 

Wonder 놀라움일 것이다.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능치못한 일이 없느니라. 바로 이런 죽은 것을 살리시고, 그리고 헐어진 것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바로 치유의 하나님. 회복의 하나님. 그리고 치유와 회복을 가능하게 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안에는 언제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 무너졌던 가정이 다시 벌떡 일어나요. 인생에서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인생을 다시 살기 시작되는 모습들. 기적의 공동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의 모습이 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적의 공동체.

 

다섯번째는 7절과 8절에 보시면 성실과 정의 공동체입니다. 성실과 정의 공동체. 같이 읽겠습니다. 7, 8절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백성들의 구원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구원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설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으므로 주 앞에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길것인가. 두가지 단어가 강조되었어요.

 

뭐예요. 성실과 정의. 하나님 자신도 내가 너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실과 정의로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예요. 하나님의 속성이 굉장히 많이 있지만 여기서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그 분은 성실하신 하나님.

 

그리고 의로우신 하나님. 따라서 구원받고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들의 삶 속에도 하나님은 동일한 성실과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실과 의로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바로 이런 성실과 의에 공동체가 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실과 의에 공동체.

 

그 다음에 9절부터 13절까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축복의 공동체예요. 9절부터 13절까지. 축복의 공동체. 먼저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의 회복을 다시 한번 약속합니다.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성전을 짓다가 중간에 스톱을 했어요. 일단. 생각나십니까? 그들을 다시 격려하시는 것이예요.

 

손을 견고히 하여 다시 일어나 이 전을 건축하라. 성전 건축을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성전 건축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시 전체의 회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0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그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전의 상태예요. 전에는 10절은 전에는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전에는. 그러나 11절에 가면 전에는 단어와 대조를 이루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무슨 단어일까요.

 

이제는. 11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달라진다 이 말이예요. 예루살렘의 형편이 바꿨진다.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질 것이냐?

 

12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은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려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바뀐다 이 말이예요. 새로운 시대가 온다. 축복의 시대가 온다 이 말이예요.

 

드디어 13절 그 절정입니다. 13절 다 같이 시작.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

 

13절에도 대조가 되는 두개의 단어. 어떤 단어가 대조를 이룹니까? 저주와 축복.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다. 과거에는 너희가 저주가 되었고, 부끄러움이 되었다. 너희는 부끄러운 존재요. 부담스러운 존재요. 재앙스러운 존재요.

 

저주스러운 존재였다. 이제는 자, 13절 가운데 중요한 단어. 다시 뭐예요. 이제는, 이제는. 중요한 단어. 이 과거, BCAD. 하나님이 오시고 주의 손길이 내 인생의 장에 임하시면 전에는, 이제는 이 변화가 나타나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전에는 절망하며 어둠속에 살았으나, 이제는 이제는 하나님의 빛이 내게 임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뭐가 되게 하리니 축복이 되게 하리니 줄쳐 놓으세요. 축복이 되게 하리니.

 

축복이 되는 존재. 축복이 되는 공동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는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부끄러움으로 만들었어요. 조소의 대상으로. 멸시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예요. 회복을 약속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저주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축복이 되리라. 이 세상에 축복이 되리라. 교회가 영광이 될 것입니다. 축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때로 그 공동체를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다시 우리가 회개하고 주 앞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다시 당신의 백성 공동체를 어떻게 만드신다고요 축복이 되리니. 다 같이 축복이 되리니. 축복이 되리니. 이 축복의 공동체 소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일곱번째로 14절부터 17절까지는 진실의 공동체. 진실의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에게, 그 백성들의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기대하는 한가지 또 특성이 있다면 진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실. , 우리 특별히 16절만을 읽습니다.

 

대표로. 16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너희가 행한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16절에 두번씩 강조한 단어가 뭐예요. 진실. 두번씩 강조되었어요.

 

, 반복되는 단어는 강조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너희의 행할 일은 이러하니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앞으로는 이 회복의 공동체안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 너희는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성문에서도 진실하고 또 재판을 할 때도 뭐예요. 화평한 재판을 베풀며. 이 화평한 재판의 바탕도 진실입니다.

 

진실이예요. 17절에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진실의 반대가 뭘까요. 거짓이죠. 거짓. 일반적으로 말이죠. 우리 한국 사람들의 윤리관에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죄가 거짓말입니다.

 

제가 미국 살면서 느낀 것은 미국 사람들은 섹스 같은 것은 그렇게 큰 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애요. 일반적으로. 이번 클린턴 사건에 있어서도 재판할 때 초점이 뭐냐하면 그 부정한 행위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 재판의 핵심이 뭔지 아세요. 거짓 증언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게 문제예요. 그런데 우리 한국 같은 데에서는 누가 스캔들이 일어났다 하면 스캔들 가지고 난리를 치는데 진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진실. 너무 쉽게 거짓말을 해요. 너무 쉽게. 크리스챤들도. 너무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 언어와 입술이 진실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어떤 거짓말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쫒기는 그런 경우들도 있지만, 그 때라도 진실하려고 저는 애를 써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실한 마음. 진실한 태도.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진실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진실을 구하십시다. 거짓말할 사건이 생기면 차라리 입을 다물어요. 차라리 입을 다물어요.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다. 진실의 공동체

 

여덟번째로. 18절과 19절에 있어요. 하나님이 백성들의 공동체에 기대하는 또 하나의 모습. 공동체의 모습. 저는 그것을 기쁨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기쁨의 공동체.

 

, 18. 다시 이 말씀으로 시작되죠.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19절 다 같이 시작.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

 

그들이 바벨로니아 포로생활할 때 일년에 몇번씩 금식했다고 그랬어요. 4번 금식했다 그랬죠. 그 금식의 사건을 얘기해요. 그러나 이제는 이제는 너희들이 기뻐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슬퍼해야 할 때가 있어요.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노다지 크리스챤 라이프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늘 금식만 하고 늘 굶어갔고 그냥 우거지 상만하고 다닌다면 믿지않는 사람들이 볼 때 매력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예수님이 심지어 금식할 때에도 금식하는 티내지 말고 뭐예요.

 

금식할 때일수록 더 칠하고 바르고 더 볶으고 더 그래야 되요. 금식할 때일수록. 슬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동체가 기쁨의 공동체가 되길 원해요. 기쁨의 공동체. 그래서 우리 안의 넘치는 기쁨을 봤을 때 아, 예수 믿는 것이 매력이 있다. 기쁨이 있다.

 

워싱턴에서 한 이번의 사랑의 순례에 아주 최근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커플이 하나 있었는데 끝나고 나서 소감이 어떠냐고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즐겁고 기쁠수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안에도 있을 수는 기쁨. Enjoy. 세상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특이한 joy. 기쁨. 이 기쁨의 공동체. 뭐 그런데 그 기쁨이 괜히 기뻐하는 것이 아니예요. 뭐 때문에 기뻐하는가? 기쁨의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는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라.

 

하나님의 가치에 대한 기쁨. 하나님의 꿈에 대한 기쁨.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괜히 뭐, 내 아들 입학만해서 기뻐하고 그런 기쁨이 아니고 그런 기쁨이라면 잘못된 일상이면 또 기뻐하고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환경에 의존되지 않은 그 보다 더 중요한 기쁨. 하나님의 가치를 추구하는 기쁨.

 

하나님의 꿈을 추구하는 기쁨. God's Dream. 하나님의 꿈을 붙잡고 기뻐하는 기쁨. 이런 기쁨. 이런 놀라운 기쁨이 있을 때 아, 저 사람의 삶은 다르다. 저들의 삶은 다르다. 그리고 저 교회는 좀 다르다. 우리가 느끼는 이 놀라운 기쁨.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구합십시다.

 

, 20절부터 22절 아홉번째로 한마디로 구원의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구원의 공동체. 우리 20절부터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매력있는 모습을 보고 그 공동체의 매력과 향기를 보고서 야, 우리도 은혜받는 것이 좋겠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열방의 백성들이, 이방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말이예요. 22절 다같이 읽어요. 다 같이 시작

 

.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이것이 바로 구원의 공동체의 비젼이예요. 구원의 공동체의 모습.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체안에 넘치는 독특한 삶의 질과 그 특성을 보고

 

~ 나도 교회 갔으면 좋겠다. 교회 갔으면 좋겠다. 저는 어렸을 때 교회 안 다녔어요. 늘 교회가 부럽더라구요.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양 소리. 교회 다니는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나가야지.

 

나도 언젠가는 나가야지. 뭔가 그 기쁨의 모습들이 보이더라구요. 그것이 매력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목마른 갈증을 일으킬 수 있는 삶. 구원의 갈증. 새로운 생명의 갈증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23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저는 이 마지막 절을 성장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혹은 확장의 공동체. 성장의 공동체. 이미 알고 있는 유다 사람 한 사람을 이방 사람 몇 명이 그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요. 열 사람이 붙들고 늘어지면서

 

~ 우리도 가서 은혜 받자. 여기서 열 사람이 나와요. 열 사람. 다시 만수가 나와요. 만수. 이것은 많은 열국들의 그 구원의 놀라운 소식들이 많은 열국 가운데 확장되고, 그리고 수많은 열국들이 유대로 몰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예요. 영향력. 우리의 영향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예요.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쳐나는 모습. 그래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연합하여 공동체가 확장되어 가는 놀라운 모습의 비젼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공동체는 그랬어요. 구원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날마다 더해갔습니다. 날마다 더해가요. 날마다. 핍박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탄의 역사로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크리스챤들은 핍박만 받은 것이 아니예요. 핍박과 동시에 강조된 또 하나가 칭송이예요.

 

핍박과 칭송을 함께 받았던 교회. 핍박하면서 칭찬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매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잡아 당기고 있었습니다. 계속 사람들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비젼은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전체의 역사는 그 비젼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영향력이 확산되고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이 성장의 공동체. 이 확장의 공동체. 땅끝까지 나아가는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모습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 위대한 하나님의 꿈의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었다. 여러분 감사하십니까. 교회 나왔다 이 보통 사건이 아니예요. 보통 사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 교회가 잘못도 많이 했어요. 어떤 때는 부끄럽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예요.

 

그러나 빌 하이블 목사의 선언처럼 교회는 아직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유일한 하나님의 비젼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것은 피상적인것에 불가해요. 나는 이번에 워싱턴 교회에 가니까 이인제씨가 왔었요. 앉아서 이인제, 이인제. 이인제씨가 저보고 선배라고 그러더라구요.

 

고등학교 제 후배가 되서, 그래서 앉아서 얘기를 많이 했었요. 그 김만풍 목사님이 이인제씨를 소개하다가 이인제 지사 발음을 잘못해서 이인제 집사라고 발음을 했었요. 제가 그랬습니다. 그 사람보고 당신이 정말 큰 일을 한번 하려면 저분이 지금 예언했으니까 예언한대로 앞으로 당신 예수 믿고 집사가 되어야 된다고요.

 

가만히 제가 대화를 하면서 느낀 것도 뭐냐하면 한국 정치인들의 생각이 아직도 피상적이다라는 생각이예요. 피상적이다. 인간 존재의 깊은 곳을 바라보는 눈이 없었요. 물론 좋은 정치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속 심령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은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복음. 복음을 가진 교회.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 세상의 유일한 비젼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이 위대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 공동체. 그 공동체를 향해서 내가 너희들이 실은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막 질투하시는 하나님. 안달을 하시는 하나님.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동일한 기대를 안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숙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공동체를 만들어 이 세상 앞에 하나님의 꿈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것.

 

그래서 여기서 목 마른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해갈하고 그들의 인생이 바뀌고 삶의 변하는 위대한 비젼이 나타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꿈이 우리안에 이루어지길 기도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가 통성으로 같이 기도하실 때 오! 하나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고, 우리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주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귀한 말씀을 받았사오니 이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역사를 감당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성령이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이 나타나시어서 아버지, 우리 가운데 하나님 뜻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음악 배경~~~~)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공동체 상을 함께 같이 나누었습니다. ~ 하나님 그 때나 이 때나 동일한 가슴과 동일한 기대를 안고 당신의 백성을 굽어보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그러한 꿈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수요일 이 오후, 귀한 말씀을 받고 다시 떠나갑니다. 참으로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기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아갑니다. 주여 우리를 이 하나님의 백성 위대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아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공동체가 있는 한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함께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드려진 헌금이 또한 이웃들을 살리고 세우고 격려하는 그런 귀한 사랑의 헌금으로 쓰여지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말씀을 받고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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