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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바라보라 /히12:2-/ 조용기목사
04: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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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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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는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매일같이 선악과나무 밑에서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악과를 매일 쳐다보고 난 다음에 그것을 안 먹을 도리가 없습니다. 결국 선악과에 마음이 끌려가서 그것을 따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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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매일같이 물이 넉넉하고 푸른 풀이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가 꽉 들어찬 곳임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그곳의 세속적인 풍요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는 그 처자와 함께 소돔으로 가서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이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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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헛된 것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돈을 바라보고 권력을 바라보고 지위나 권세를 바라보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는 세월이 흘러가면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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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영원한 소망이 되시고 영원한 기쁨과 만족이 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와 귀와 공명은 권력은 바라보는 사람은 언젠가 절망하게 하고 말 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결코 절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 예수를 바라보면 절망하지 않을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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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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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용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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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서면 그 죄가 다 드러나고 벌거벗은 수치를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한 원죄를 짊어지고 또 거기에 자기 의지로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러한 죄의 사슬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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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래전에 루마니아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 나비 한 마리가 들어왔다가 갇혀서 못 나가고 팔락팔락 자꾸 창문에 부딪쳐요. 그래서 내가 나비를 인도해서 창문 밖으로 내보내 주려고 하는데 나비가 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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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끌어서 위로 갖다 놓으면 밑으로 나가버리고 또 올려 주면 옆으로 나가고 그래서 내가 "이 바보 녀석아, 너는 저 위에 열린 창문이 안 보이지만 나는 사람이니깐 보인다. 내가 너를 살려 주기로 이끌어 줄 텐데, 네 고집대로 하면 네 날개만 부서지고 네가 날아갈 수 있느냐?" 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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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죄에 갇힌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그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자기 힘으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정결함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문제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 손 든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아오면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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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면 십자가에 흐르는 그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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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삶을 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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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6.25때, 추운 겨울날 기차역에 갔는데 어느 병사 한 사람이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기차역에 쳐 놓은 철조망을 잡으니까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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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술에 취해서 있으니까 아픈 것을 모르고 손으로 잡고 또 잡으니까 그 손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술에 취하면 아픈 것도 모르고 도덕적인 감각도 잃어버리고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이 되는구나. 절대로 술에 빠져서는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어릴 때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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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 세상에 음란과 방탕과 퇴폐함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취해서 살아갑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국가도 부정과 부패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말세가 가까이 올수록 세상은 더욱 악해지고 죄가 만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은 교회에 있고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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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 이 세상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거룩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우리가 거룩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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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머리로만 예수 믿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계셔서 주야로 여러분을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려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늘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매일매일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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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료함을 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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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건강과 치료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다 병이 들었습니다. 영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몸이 병들고 가정과 사회와 전 세계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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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누가 우리를 이 병에서 건져줄 수 있겠습니까? 질병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 혼, 육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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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심같이 우리의 병도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대신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에는 항상 치료의 역사가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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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보면 모든 앓는 자, 각종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병에 걸렸든지 예수님께 나아오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특별히 주목해 볼 것은 예수님께서는 병 고침 받기를 소원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고쳐주셨지 주님이 병자를 찾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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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도 회개하고 나아오는 사람을 용서해 주시지 주님께 나아오지 않는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병 낫기를 소원해서 주님께 나오는 사람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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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절망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면 영적인 병, 마음의 병, 도덕적인 병, 가정의 병, 생활의 병, 모든 병을 치료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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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성도님 한 분은 아들이 밤에 자다가 갑자기 하늘나라에 가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보내고 나니 몇 달 동안 몸도 마음도 병이 들어서 시름시름 앓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분은 어릴 때 앓았던 폐결핵 때문에 평소에도 숨이 차서 잘 걷지도 못하는데 갑자기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인해서 심장에 합병증이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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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편도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술을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하니까 이분들이 그만 살고 싶지 않아서 병원에도 안 가고 집에 누워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보고 친정어머니가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의사가 보호자를 급히 불러서 하는 말이 심장에 합병증이 와서 위험한 상태라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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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비가 5천만 원 드는데 수술을 한다 해도 살 수 있는 확률이 낮았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그냥 일주일 먹을 약만 받아 나와서 "하나님, 수술비도 없고 치료할 돈도 없으니 이 약으로 치료해주세요. 아니면 그냥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가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친정 어머님이 설득해서 21일 동안 작정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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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기도회에서 다녀와 잠을 자는데, 꿈속에 제가 나타나서 기도해주면서 신문 한 꾸러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라는 뜻으로 알고 그때부터 우리 교회 전도지를 가지고 전도를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3일 동안 전혀 힘이 들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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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분은 심장과 폐가 나빠서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서 헉헉대고 평생 오르막길을 다니지도 못하고 앉아만 있어도 천식 환자처럼 숨쉬기 힘들어하던 사람인데, 3일 내내 전도를 하고 돌아다녔는데도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21일 작정기도를 마친 후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의사가 너무나 놀라면서 "수술하지 않아도 되니까 열심히 하나님을 믿으며 잘 믿고 살으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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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러분, 병들었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바라보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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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통한 삶을 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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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생애 속에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길이 멸망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형통은 형통의 근원 되시는 만군의 야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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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었을 때, 아담은 모든 생활에 완전히 형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 은혜가 임하여서 만사에 형통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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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 던져버리고 인간의 힘으로 살고 인본주의로 살겠다고 할 때, 그때부터 형통의 길은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다음부터는 피땀을 흘려야 진땀을 흘려야 되고 고생과 눈물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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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형통한 왕이었는데 다윗은 고백하기를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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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야훼 하나님을 온전히 자기의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자기의 목자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셔서 다윗의 생애 속에 형통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야훼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었으니 그 하나님의 양 무리들이 형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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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목자는 양을 정성껏 돌아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들을 데리고 푸른 풀밭을 찾아 나섭니다. 양들을 푸른 풀밭에 뉘어 놓고 풀을 뜯게 하고 난 다음에는 그는 양 무리들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습니다. 악한 짐승이 와서 양 무리들을 해 칠까봐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양들을 눈동자같이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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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후가 되면 양 무리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다시 우리로 안전하게 인도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돌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진실로 목자로 모셨으면 우리는 예수님께 절대 순종하고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드려 헌신하며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형통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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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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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 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유명한 의사 선생님을 도와서 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배에 복수가 차서 마치 만삭된 부인과 같은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김해에서 이름 있는 가문의 의사였는데 재산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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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진찰한 다음, 의사 선생님이 말하기를, "선생님의 병명은 간암입니다. 그런데 말기라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할 것이 있으시면 유언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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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 사람이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합니다. "선생님, 전 재산을 모두 드릴 테니 일 년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십시오." 의사 선생님이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데도 "제발 살려 달라."고 계속 애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처절한 몸부림이 지금도 제 기억에 생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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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는 죽음이 다가오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을 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사냥꾼에게 쫓긴 타조가 다급하니까 모래 속에 머리를 박고서 사냥꾼이 눈에 안 보이니까 잡힐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외면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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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고 말합니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인생의 끝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의 종결이요. 그 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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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불신자에게 죽음은 긍극적인 공포요, 슬픔이요, 절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권세와 명예, 부귀와 영화 같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바라보고 살다가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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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멸망이 아니라 소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처절한 절망이지만 예수 믿을 믿음을 갖는 우리에게는 죽음이 시작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고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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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나면 우리는 그다음에 곧장 주 예수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죽음은 절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사는 크나큰 영화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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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이러므로 우리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은 우리도 부활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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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서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우리의 아버지께로 가자."라고 하실 때,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당한 수많은 슬픔과 고통과 좌절감을 꿈에 본 듯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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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기도함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침에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점심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저녁에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나 깨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자고 깨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 모두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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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든 자는 아픈데 손을 얹고 여러분,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힘차게 바라보십시다. 오늘 교회 와 있는 중에 아픈 자가, 집에 모여서 예배 보는 사람 중에 아픈 자가 아픈데 손을 얹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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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죄짐을 짊어지고 온몸이 찢어지도록 얻어맞고 피를 흘리고 죄를 청산하고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와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면 병이 사라지고 우리가 깨끗한 몸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병을 짊어진 그 몸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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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와서 "나를 바라보고 다 이룬 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 병이 나은 줄 알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주 예수여 아멘으로 받아들이오니 주님 치료함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원수, 마귀야! 너희들은 우리에게 붙어있을 자격이 없고 권리가 없다. 너희들은 다 나가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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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원수, 마귀는 지옥으로 떨어져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아버지 하나님, 눈에 안 보이고 귀에 안 들리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치료를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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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치료함을 받은 줄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못해도 믿음으로 병에서 고침 받을 줄을 알고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 우리에게 오신 것을 감사하옵고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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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며 경주하는 자 /히12:1-2/ 김병삼목사
09: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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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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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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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선수가 쓴 『생각이 내가 된다』에 인상적인 글이 있습니다.
실패하는 가장 확실한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바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일정한 성공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노력하면 발전하는 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항변을 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떡하지?'라는 염려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의심은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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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외의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외의 일들을 가지고 일반적인 법칙을 부정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성경에 아주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인내'는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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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남자들이라면 젊은 시절에 몸에 근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본 경험들이 한 번쯤 있을 것입니다. 아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건강을 위해 'fitness'를 시작하다 포기했다거나 어떤 운동을 배우다가 포기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포기의 가장 큰 이유는 한계를 넘어선 운동을 하고나면 찾아오는 고통 때문이죠. 한계점을 넘어서는 근력 운동을 하면 미세한 근육의 파열이 찾아오고 그 순간 통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발생하는 통증이 바로 근육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통증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 근육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근력이 이전 보다 강해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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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우리의 한계점을 넘나드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고, 이 과정을 통해 성장과 열매의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의 축복이 있는데, 이러한 고통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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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에는 늘 어떤 중요한 순간들을 만날 때 Up and Down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저나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전성기인지 아니면 침체의 때인지를 점검해 봐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혜서 기자는 전도서 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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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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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늘 일정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침체의 순간에 우리의 신앙이 재충전되고 새롭게 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상승 곡선은 주님을 바라보며 나갈 때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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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경주(競走)다!
성경은 때때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서 말씀하기를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하지요.
먼저 경주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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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어떤 경주든지 "Rule"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규칙은 그냥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합니다. 가장 신사적이고 보기 좋은 경기는 룰을 잘 지킬 때입니다.
또한 규칙이 있다는 것은 그 규칙에 순종할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규칙이 있어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경주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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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축구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를 기억합니다. 그는 축구의 신동이라고 불렸습니다. 그가 함께 했던 아르헨티나는 월드컵의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끊이지 않고 붙어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신의 손" 논란입니다. 명백히 핸들링 인 것을 지적하지 않은 채 골을 넣은 것이지요.
아마도 운동선수 중에 가장 존경 받는 사람 중에 하나는 걸출한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매너가 좋은 사람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이지요.
성경이 우리들에게 "신앙은 경주다"라고 말할 때, 우리들이 지켜야할 믿음의 규칙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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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경주에는 필연적으로 상이 따른 다는 사실입니다.
자격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경주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상을 받는 자는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자격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0장 13절 말씀에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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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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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믿고 시인하는 순간 구원의 반열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경주에서 모두가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저는 이것을 "거룩한 욕심"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달려갈 길을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것은 거룩한 욕심이 있는 자들에게서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거룩한 야망"에 대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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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뜻을 이루는 야망은 때로는 비열하게, 이기적인 욕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의 욕심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거룩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여러분들이 가지는 욕심은 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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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은 반복된 연습입니다. 훈련은 습관이 될 때까지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신앙의 경주를 하기 위해 여러분들은 어떤 훈련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어떤 참음과 인내가 있었습니까?
운동선수들은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참으며 훈련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영원히 얻어야 하는 영적 세계를 위하여 참으며 인내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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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에 임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훈련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얼마 전 저는 새로 등록한 분을 심방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의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고민하던 중 만나교회에서 두 달 정도를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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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드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들었고, 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듣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분에게 끊지 못하던 옛 습관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친구들, 그리고 노름, 집에 있으면 쉼 없이 세상의 친구들이 불러냈지요.
직원이 50명 가까이 되는 큰 미용실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결단을 한 것입니다. "전화번호를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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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거래처, 관계된 사람들. . .
그러나 옛 습관을 끊지 않으면 신앙의 경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결단을 한 것입니다. 훈련의 습관을 만들기 위해 주변 환경을 훈련에 최적화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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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경쟁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주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경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를 방해하는 세력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구원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의 경기를 방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경쟁자를 대하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그 경쟁이 "시험"(test)인지, "시험"(temptation)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시험은 피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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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시험은 꼭 이기고 패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라는 말씀에 유의 하십시오.
예를 들자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과 기도하는 일, 성도들의 교제를 방해하는 "temptation"을 이기고, 신앙의 단계를 up-grade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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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저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 아는데요. . ."
가장 무서운 말입니다.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은 더 나쁜 일입니다.
일정부분 신앙의 단계를 높이기 위해 여러분들이 결단해야 할 일들이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는 다른 교인들의 등록을 권유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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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교인이든지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는 올바른 경주를 하기가 힘이 듭니다.
여러분들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교회는 여러분들을 지켜주는 버팀 목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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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주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2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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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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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규칙과, 그 규칙을 위해 우리들이 쌓아야 하는 훈련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경주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룰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요소인 "무거운 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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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땅 위에서 경주하며 주님만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경기가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속하여 있으나, 이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신앙을 경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경기를 하면, 우리의 신앙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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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들은 어렸을 때, 자치기를 하고 땅따먹기 하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열심히 땅을 따 먹습니다. 때로는 잘못 금을 그었다고 싸우기도 합니다. 당장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치열하게 경기를 하지요.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소리가 들립니다.
"병삼아! 어서 들어와 밥 먹어야지!"
그러면 그 치열했던 싸움터가 바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든지 아니면 그 금을 다 지우고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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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으로"
우리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언젠가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순간이 되면 우리가 쌓아 놓았던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 지역 국회의원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함께 분당지역에 좋은 모델을 만들어 보자고, 우리 교회뿐 아니라 지역의 교회들이 무언가 소망을 줄 수 있는 일을 해 보자고 여러 가지로 논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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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만나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면 지역을 위해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종합복지관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지관을 우리가 소유할 생각은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을 도와 달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이 정색을 하며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저에게 도와 달라거나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분과 참 대화가 잘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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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가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소유할 의사가 없다는 것, 우리 교회의 소유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에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우리가 지으려고 했던 복지관은 짓지 못했지만 은행동에 새로 지어진 복지관 위탁을 '월드휴먼브리지'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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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돈을 내어 복지관을 짓는 것보다, 시에서 지어놓은 복지관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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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무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고민을 이야기 했습니다.
만나교회는 빚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때를 잘 지내왔습니다. 이제는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각 부서에서 요청하는 것도 참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하자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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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헌금을 아껴가면서 열심히 사역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만큼 일했으니 '보상'을 해 줘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들을 하는 것은 아닌지,
교회의 힘은 우리가 행한 일들로 보상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행하며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 진정한 힘이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경주하며 무엇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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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삶과 신앙의 경주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소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주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빨리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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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만나교회 목사로서 시무하는 한, 집을 소유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16년을 살아왔고, 누군가 빠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은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이 문제로 장로님들과 많이 의논하고 회의도 했습니다.
은퇴하는 목회자들이 은퇴하는 순간에 교회로부터 얼마를 받았느니 하는 문제들로 시끄러워지는 일들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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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개인적으로 목회의 승리는 은퇴를 잘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에게 정답은 없지만, 최선을 다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남기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경주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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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장로님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지금처럼 돈을 모으지 않고 집을 사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은퇴하고 살 집을 준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저 저의 기준이죠. 저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 많은 교인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나를 얽매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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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른 목회자들이나 다른 교회에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고, 저의 목회의 여정에서 경주를 잘 하기 위해 고민하고 지켜 가려는 부분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경주를 잘 하기 위해 우리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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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고!
저는 말씀을 묵상하며, 이 문제는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우리들 삶의 문제요,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될 사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을 경주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무거운 짐, 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것 해결하고 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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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저 개인적인 견해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말처럼 비 신앙적인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결코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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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절제하지 못하고 술에 취하여 발가벗고 자는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의 수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수치를 조롱하던 아들의 자손이 저주를 받는 일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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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불끈 솟는 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 판을 던져 깨뜨린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가나안을 앞에 두고 그 땅을 밟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그의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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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새벽을 깨우는 사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순간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삶의 오점을 남겼을 뿐 아니라, 자식들이 칼부림을 하며 피를 흘리는 참상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우리들이 완벽해야 한다거나, 그럴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가 단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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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냥 버려두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를 얽매는 모든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죄'를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so easily entangles us" 즉, "쉽게 우리의 삶을 흐트러뜨리고 함정에 빠뜨리는 것들"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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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정의를 조금 쉽게 내려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이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죄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것들이지요.
대개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양립합니다. 그럴싸하게 포장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을 가지고 우리들 앞에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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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경주를 하기 위해 결단하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라고 하지요.
경주를 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들고 달릴 수는 없습니다.
마라톤 경주하는 것을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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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km를 뛰는 동안 갈증도 나고 배도 고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갖추고는 경기에 승리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믿고 달려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나아갈 때,
돈 많고, 땅 많고, 권력 있는 것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승리는 최후에 증명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부러워하면 결코 순례자의 길에 서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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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주는 릴레이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의 경주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릴레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산다는 것은,
단지 나에게 주어진 구간을 최선을 다해 달려가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평가를 받고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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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짧은 생애 가운데 온전한 뜻을 이룬다는 것이 왠지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분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만일 우리가 사는 인생과 경주가 온전히 이루어야 하는 것이라면 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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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왜 똑같은 조건으로, 똑같은 상황에서 경기를 하지 않게 하시고
불공평하게 경주를 하게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신앙을 경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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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우리의 경주가 릴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경주의 구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시대마다 특별한 상황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어려운 코스를 지나가야하는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그 구간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는 경주를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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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10장 13절의 말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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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내가 담당한 그 구간, 내가 달려가야 할 그 구간은 우리들이 능히 감당할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책임은 무엇입니까?
"책임" 이라는 영어의 단어는 "responsibility"인데, "대답한다"라는 "response"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임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올림픽에서 400m 계주경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면, 모두에게 똑같은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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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에게는 스타트를, 결정적인 승부수를 띄어야 하는 경우에는 마지막 주자에게 승부를 걸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는 무거운 시험과 책임을 진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에게는 영광도 많이 주어진 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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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신앙의 릴레이는 세상의 경주와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신앙의 릴레이는 얼마나 유능하게, 빨리 달렸느냐를 묻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에게 1등은 제일 빨리 들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의 경주는 지금 주님과 함께 자기에게 맡겨진 구간을 얼마나 책임 있게 달렸느냐의 문제요, 최선을 다한 사람은 모두가 1등을 할 수 있는 경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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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한 번 신앙적인 물음을 해봅시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 민족을 바라보며 맡겨진 책임 구간이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 책임 구간이 무엇인가요?" "가장 성실하게 제 책임을 완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은,
내가 달려가야 하는 구간은 나의 욕심으로 가는 구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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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소서"라고 기도했던 아굴의 기도처럼,
정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나의 구간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하여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이 절대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삶에 대해 물으실 때 후회함이 없는 인생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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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책임 구간이 있다면, 그 다음 사람에게 우리의 바통을 넘겨야 한다는 사실이지요. 릴레이는 잘 넘겨진 바통이 승패를 좌우합니다.
내가 아무리 잘 달려도 뒷사람이 잘하지 못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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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들이 하는 이 경주는 함께 달리고, 함께 영광을 얻는 것이지,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영광스러우려면 나의 다음 사람이 잘하는 것을 더욱 기뻐해야 하고, 그 다음 사람의 건투를 빌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의 기도와 누구의 믿음의 유산을 안고 갑니까?
저에게 정말 도전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목적이 이끄는 40일 새벽기도] 마지막에 물었던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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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죽어 하늘나라에 갔을 때, 당신 때문에 하늘나라에 오게 되었노라고 감사할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에 서 있는 여러분들이 누군가의 신앙의 유산으로 서 있다면, 또한 그 신앙의 유산, 바통을 넘겨 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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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월에서 목회를 할 때,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신 일입니다.
처음에 그 곳에 갔을 때, 할아버지 1명, 할머니 1명, 초등학생 2명이 앉아 있는 모습이 한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얼마정도 시간이 지나서 교회가 부흥이 되기 시작하는데, 청년들이 10명 이상 모이고, 주일학교가 겨울 성경학교를 통해 50명이 넘어가고, 어른들이 교회에 나와 등록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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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년 전이네요. 그 당시 신학생으로 있던 목사님이 저에게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목사님, 그 당시 영월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까지 전설로 남아 있어요. 그 시골에서 청년들이 그렇게 모였던 적이 없어요!"
사실,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참 훌륭하구나! 내가 참 잘했구나!"
그런데 어느 목사님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로 부임해 가기 전, 사역하던 전도사님의 이야기죠. 그 교회에서 40일 씩 금식하며 목회를 했었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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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만하거나 자만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그 분들은 그 교회를 떠나갔지만, 그 때 그 기도의 씨가 열매가 되어 맺혔구나! 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죠.
비록 지금 나는 사람들 보기에 영광스런 열매를 거두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씨를 뿌리고 심고 가꾸어온 수고자들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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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나교회를 바라보면서도, 이 전 세대의 헌신이 없었다면, 과연 이 교회가 설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몇 해 전 만나교회를 배우려는 천호제일교회 기획위원들에게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마친 후 질문을 받을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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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교회가 바뀌고 새로워져야 한다면 우리는 뭡니까?"라고 한 장로님이 질문을 하더군요.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또 희생하고 나를 내어 주는 것이 지금 세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가는 세대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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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맡겨진 책임을 다하며, 유감없이 다음 세대에 책임을 넘겨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나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
하나님에게는 누가 열매를 거두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 맡겨진 구간을 맡은 이가 잘 달리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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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주님을 바라보며, 주를 앙모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기억하시지요.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알의 기적을 믿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씨알 속에 생명이 있음을 믿기에 미련 없이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전 세대의 헌신이 없다면, 다음 세대의 열매도 없습니다.
"농부는 믿음으로 씨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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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그런 전화나 소식을 받습니다.
"목사님! 그 때는 제가 잘 못했는데요. 이제 이곳에서는 잘하고 있어요."
그러면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왕 잘 할 거 여기에서 잘하지 그랬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 여기서 뿌린 씨가 그것에서 열매를 맺고 있구나!"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목회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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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뿌리는 씨,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뿌리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하는 헌신, 믿음으로 책임 있게 하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에게 돌아올 칭찬과 명예, 열매를 바라본다면 결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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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우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의 모습니다.
열심히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신앙의 경주를 최선을 다해 달리십시오.
얽매이기 쉬운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 버리고 달리십시오.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달리십시오.
책임을 다한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씨알의 기적을 믿으며 기대하십시오.
이것이 주를 앙망하는 자의 삶임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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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바라봅니다. /히12:1-2/ 김병삼목사
07: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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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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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코드'라는 말이 자주 사용됩니다. 대통령이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 참 중요한 게 '코드 인사'죠. 모든 사람과 함께 의논하고 일해야 하지만,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은 결국 생각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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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가 무엇인가요? 같은 생각과 삶의 선상에 있느냐는 것이죠.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영적 코드를 맞추기 위함"이라고 말이죠. 그 코드를 맞추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코드의 방향은 바로 "믿음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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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디에 코드를 맞추고, 누구와 함께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기준이 누구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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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떠돌던 이야기니까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키우는 개와 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개와 달리기를 하는데 지는 걸 보니, '개만도 못하네'
이 소리를 듣고 이 남자는 열심히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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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달리면서 이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개보다 낫네'
이 소리를 듣고는 기분이 나빴던 이 사람은 이제 개와 똑같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제 개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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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하나님과 믿음의 경주를 한다면, 그리고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믿음의 경주를 한다면 얼마나 멋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달리는 사람이 되면, 무엇을 하든 예수님과 같은 선상에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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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와 행동이었습니다.
주변의 눈길보다는, 주님을 향한 열망이 강했던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보다는, 긴박한 열정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
예수님의 능력보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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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으면, 행동으로 움직이십시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모든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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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는 계속해서 '능력'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반기 변화산을 시작하면서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 삶에는 늘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단은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올바른 결심이 되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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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우리 삶의 결단을 위해 가장 필요한 기준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내일부터 여섯 가지 구체적인 '삶의 결단'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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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가운데 저는 먼저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바라보자'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라는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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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바라보자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자는 '의지' 정도로 생각되는데, 제 마음에 'fix'라는 것은 다른 것을 보지 않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압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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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과 신앙에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이유는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죠.
성경에서 가장 혼란했던 시기를 '사사 시대'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사사기 21장 2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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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사람의 소견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거나 조정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따라야 할 기준과 명령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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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는 지휘관의 명령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지휘관은 모든 현황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군인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적군과 싸움을 하지만 지휘관은 보이지 않는 적의 동태도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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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할 때 가장 무서운 무기가 '전자폭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파를 교란해 지휘부와의 교신이 끊어지도록 하는 것이죠. 아무리 훌륭하게 훈련을 받은 군인이라 할지라도, 지휘부와의 교신이 끊어지면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공포가 무서운 것은 두려움으로 인해 상황 판단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공포가 들어오면 공포로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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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의 눈을 집중해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소리 가운데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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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그분은 음성을 듣고, 그분의 명령을 들으므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결단하게 됩니다. 그 결단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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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2절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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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분이 승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승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분은 승리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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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중국의 역사가 있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항우와의 기나긴 싸움을 통해 결국을 패권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초한지에 나오는 항우와 유방의 기나긴 싸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항우가 유방을 제거할 목적으로 '홍문'에서 연회를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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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자리죠. 그때 유방의 책사인 장량은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참으라고 합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천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유방은 자기 힘이 아니라 자신을 돕는 장량과 한신 번쾌와 같은 영웅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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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의 마지막 싸움인 '해하전투'에서 승리하기까지, 기나긴 8년간의 싸움에서 항우는 늘 승자였습니다. 하지만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황제가 된 사람은 항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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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에 대한 리더십 연구가 참 많이 되어 있습니다. 항우는 귀족도 힘 있는 사람도 아니었음에도 역발산기개세라 불리던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죠. 그는 눈앞에 보이는 전투에서 승리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저 앞에 꿈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수치를 참을 수 있었던 인물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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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그분이 그렇게 사셨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면 우리의 시선을 그분께 고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과 '경주'라는 말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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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상을 통해 국가대표 출신 이영표 선수의 간증을 보게 되었습니다.
국가대표 시절에 대표적인 신앙인으로 모범을 보여줬던 이영표 선수에게 영적 침체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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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하고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그래서 지금까지 믿어 왔던 신앙이 맥을 못 추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때 어떤 분을 통해 매일 말씀을 보내는 앱을 내려받게 되었고, 어느 날 고린도후서 6장 10절의 말씀이 배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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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말씀을 보는 순간 거기에 '해답'이 있었다는 것이죠. 너무나 감격스러웠는데 문제는 그 말씀이 자신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죠. 어떻게 자신에게 들려진 음성이 단체 메시지를 통해서 올 수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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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성경을 보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는데, 자신이 읽던 성경을 보니, 영한 대조로 되어 있어서 종종 줄이 안 맞을 때가 있는데, 자신이 읽은 부분이 고린도후서 6장 10절이 아니라, 7장 10절이었던 것이죠.
너무나 놀란 순간이었다고,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자신에게 말씀을 주고 계셨다고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가장 명확하게 여러분을 향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그 주님을 명확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그것이 변화산의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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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경주(競走)다!
성경은 때때로 우리 신앙생활을 '경주'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조금 더 과격한 표현을 쓰자면 '전쟁'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 1절에서 말씀하기를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하지요.
먼저 경주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앙의 최후 승리를 위해 우리가 참고 인내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흔들리지 않고 한 곳을 고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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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피겨 스케이팅이나 무용수들이 회전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저렇게 돌면 어지러워서 중심을 잡지 못할 텐데. 그런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고 하지요. 회전할 때 눈을 감으면 안 됩니다. 돌면서도 한 곳을 집중해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인 전투를 하면서 보아야 할 중요한 규칙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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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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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규칙과 그 규칙을 위해 우리가 쌓아야 하는 훈련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의 경주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정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요수인 "무거운 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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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땅 위에서 경주하며 주님만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경기가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속하여 있으나, 이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신앙을 경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경기를 하면, 우리의 신앙이 좀 더 명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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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은 어렸을 때, 자치기를 하고 땅따먹기하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열심히 땅을 따 먹습니다. 때로는 잘못 금을 그었다고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당장 사생 결단낼 것처럼 치열하게 경기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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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소리가 들립니다.
"병삼아! 어서 들어와 밥 먹어야지."
그러면 그 치열했던 싸움터가 바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든지 아니면 그 금을 다 지우고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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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삶과 신앙의 경주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소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주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빨리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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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만나교회 목사로서 시무하는 한 집을 소유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목회는 소유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 많은 교인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나를 얽매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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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고!
저는 말씀을 묵상하며, 이 문제는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우리 삶의 문제요,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사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경주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무거운 짐, 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것 해결하고 가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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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인적인 견해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말처럼 비신앙적인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결코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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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절제하지 못하고 술에 취하여 발가벗고 자는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의 수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수치를 조롱하던 아들의 자손이 저주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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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불끈 솟는 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 판을 던져 깨뜨린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인하여 가나안을 앞에 두고 그 땅을 밟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그의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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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새벽을 깨우는 사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순간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므로 인하여, 삶의 오점을 남겼을 뿐 아니라, 자식들이 칼부림하며 피를 흘리는 참상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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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우리가 완벽해야 한다거나, 그럴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냥 버려두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 인생 경주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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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우리 사역자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고, 제 자식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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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하며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힘들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엔가 우리의 삶에 습관이 되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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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결단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결단 때문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역설이 있지요. 신앙인의 승리 비결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돈 많고, 땅 많고, 권력 있는 것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승리는 최후에 증명됩니다. 세상을 부러워하면 결코 순례자의 길에 서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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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전에 불렀던 참 좋은 찬양인데, 우리가 바라던 시온성을 바라며 신앙을 지켰던 신앙 선배들의 고백인데, 요즘 잘 부르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않으면 지금 사는 삶이 최선인지 알기 때문이죠. 우리의 삶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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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 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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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주는 릴레이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의 경주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릴레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산다는 것은, 단지 나에게 주어진 구간을 최선을 다해 달려가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평가를 받고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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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짧은 생애 가운데 온전한 뜻을 이룬다는 것이 왠지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분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만일 우리가 사는 인생과 경주가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면 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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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왜 똑같은 조건으로, 똑같은 상황에서 경기하지 않게 하시고 불공평하게 경주를 하게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신앙을 경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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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우리의 경주가 릴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경주의 구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시대마다 특별한 상황이 있습니다. 때로는 몹시 어려운 코스를 지나가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그 구간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는 경주를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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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브라질의 리우 올림픽에서 가장 인상적인 선수 중의 하나가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였습니다. 그는 세 가지 종목을 3번의 올림픽에서 우승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저에게 인상적인 것은 그가 400m 계주에서 늘 마지막 주자로 선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가 마지막을 제일 잘 뛰고 역전을 만들어 낼 선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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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올림픽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 중의 하나가 미국 선수들의 계주였죠. 그들은 최고였지만 늘 '저주'에 걸려 있었습니다. 바통을 터치할 때 꼭 실수하는 것이죠.
릴레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구간을 가장 성실하게 뛰어야 한다는 것이고,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다음 사람에게 잘 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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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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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내가 담당한 그 구간, 내가 달려가야 할 그 구간은 우리가 능히 감당할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맡겨진 책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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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이라는 영어의 단어는 "responsibility"인데, '대답한다'라는 "response"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임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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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림픽 400m 계주경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스타트를, 결정적인 승부수를 띄어야 하는 경우에는 마지막 주자에게 승부를 걸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무거운 시험과 책임을 진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에게는 영광도 많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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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신앙의 릴레이는 세상의 경주와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신앙의 릴레이는 얼마나 유능하게, 빨리 달렸느냐를 묻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경주의 1등은 제일 빨리 들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의 경주는 지금 주님과 함께 자기에게 맡겨진 구간을 얼마나 책임 있게 달렸느냐의 문제요, 최선을 다한 사람은 모두 1등을 할 수 있는 경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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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한 번 신앙적인 물음을 물어봅시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 민족을 바라보며 맡겨진 책임 구간이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 책임 구간이 무엇인가요?" "가장 성실하게 제 책임을 완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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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은, 내가 달려가야 하는 구간은 나의 욕심으로 가는 구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소서"라고 기도했던 잠언의 아굴의 기도처럼, 정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나의 구간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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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이 절대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삶을 물을 수 있을 때 후회함이 없는 인생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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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책임 구간이 있다면, 그다음 사람에게 우리의 바통을 넘겨야 한다는 사실이지요. 릴레이는 잘 넘겨진 바통이 승패를 좌우합니다. 내가 아무리 잘 달려도 뒷사람이 잘하지 못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이 경주는 함께 달려 함께 영광을 얻는 것이지,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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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영광스러우려면 나의 다음 사람이 잘하는 것을 더욱 기뻐해야 하고, 그다음 사람의 건투를 빌어줘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기도와 누구의 믿음의 유산을 안고 갑니까?
저에게 정말 도전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목적이 이끄는 40일 새벽기도] 마지막에 물었던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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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죽어 하늘나라에 갔을 때, 당신 때문에 하늘나라에 오게 되었노라고 감사할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에 서 있는 여러분이 누군가의 신앙의 유산으로 서 있다면, 또한 그 신앙의 유산, 바통을 넘겨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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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에서 목회할 때,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신 일입니다.
처음에 그곳에 갔을 때, 할아버지 1명, 할머니 1명, 초등학생 2명이 앉아 있는 모습에 심란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는데, 청년들이 10명 이상 모이고, 주일학교가 겨울 성경학교를 통해 50명이 넘어가고, 어른들이 교회에 나와 등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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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그 당시 신학생으로 있던 목사님이 찾아와서 이야기하는데, 아직도 그때의 일이 전설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청년들이 모인 교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그때, 내가 잘해서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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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제가 그곳에 가기 전 전임 전도사님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전에 있던 전도사들이 40일씩을 교회를 위해서 금식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만심이 싹 없어지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얻은 것이 없이 떠나갔지만, 그때 그 기도의 씨가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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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 나는 사람들 보기에 영광스러운 열매를 거두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씨를 뿌리고 심고 가꾸어온 수고자들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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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나 교회를 바라보면서도, 이전 세대의 헌신이 없었다면, 과연 이 교회가 설 수 있었을까?
얼마 전 천호제일교회 기획위원들에게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에 대해 강의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그렇게 교회가 바뀌고 새로워져야 한다면 우리는 뭡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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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위하여 또 희생하고 나를 내놓아 주는 것이 지금 세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가는 세대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맡겨진 책임을 다하며, 유감없이 다음 세대에 책임을 넘겨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나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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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게는 누가 열매를 거두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 맡겨진 구간을 맡은 이가 잘 달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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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주님을 바라보며, 주를 앙모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기억하시지요.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알의 기적을 믿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씨알 속에 생명이 있음을 믿기에 미련 없이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전 세대의 헌신이 없다면, 다음 세대의 열매도 없습니다.
농부는 믿음으로 씨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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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도 우리 교회에서 전화를 받는 "신영이 엄마"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신영이가 갓 나아서 걷지도 못할 때,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신영이 엄마는 아이를 잘 안을 수 없었습니다. 건강했던 아빠도 풍을 맞아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그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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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이 가끔 묻는답니다. 방에만 있지 말고 아이를 데리고 나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갓난아이를 안다가 떨어뜨리고 놀란 가슴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울면서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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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다시 태어나면 건강한 엄마한테서 태어나라"
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니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지금은 힘들지만,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 기도하면서 먹이세요. 지금은 힘이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면 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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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믿음의 영웅이 되어라! 신영이라고"
지금 그 아이가 씩씩하게 자라면서 사무엘 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며 저를 보고 열심히 인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제는 고등학생이 되어서 엄마를 염려하며 기도제목을 내는 딸의 모습을 봅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아이가 잘 자라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기적을 믿는다면 희망이 생깁니다. 다만 나의 맡은 구간을 성실하게 잘 경주하면 하늘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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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그런 전화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목사님! 그때는 제가 잘하지 못했는데요. 이제 이곳에서는 잘하고 있어요."
그러면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왕 잘 할 거 여기에서 잘하지 그랬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 여기서 뿌린 씨가 그것에서 열매를 맺고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목회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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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뿌리는 씨,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뿌리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이 교회에서 하는 헌신, 믿음으로 책임 있게 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에게 돌아올 칭찬과 명예, 열매를 바라본다면 결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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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우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여러분에게 맡겨진 신앙의 경주를 최선을 다해 달리십시오.
얽매이기 쉬운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 버리고 달리십시오.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달리십시오.
책임을 다한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씨알의 기적을 믿으며 기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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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주를 바라보며 인생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삶에서 점검하며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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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번 변화산의 주제가가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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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 합니다.
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린 우린 연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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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 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린 주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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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위에 충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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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길 따라갑니다.
그 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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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1-2/ 내 믿음의 가나다라 /조용기목사
06: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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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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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슨 일이든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비바람이 불어도 건축물이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건축물에 비유하는데, 튼튼한 건축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잘 다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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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자라려면 재료가 필요한데, 그 재료가 바로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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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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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이 자라려면 믿음의 재료가 되는 생각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너의 생각이 너의 삶의 근원이 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하루 동안에도 수많은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되는 생각을 보시고 그것을 진행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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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언제 생겨납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미리 바라볼 때,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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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밤에 예수님을 함께 모시지 않고 자기들끼리 배를 저어서 건너가는데 파도가 다가왔습니다. 파도가 높이 치고, 물이 배에 들어와서 가라앉게 되매 혼비백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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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예수님이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태복음 14장 27절)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거든 저를 물 위로 걸어오게 하소서.'라고 말하자 예수님이 걸어오라고 했습니다. 배에서 나온 베드로가 물 위를 몇 걸음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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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불어온 바람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자 곧장 물에 빠졌습니다. 물에 허우적거리며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가 '예수님 살려주십시오!'라고 고함을 치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잡아주면서 '믿음이 약한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주님이 꾸짖었습니다. 험난한 바다뿐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도 무서운 파도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세상살이에 문제라는 파도가 와서 우리를 파탄에 빠뜨리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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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면, 두려움의 바다에 빠지고 맙니다. 믿음이란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 담대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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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75세가 되도록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로 2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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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아브라함의 삶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75년이나 살았던 곳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니 다른 생각을 따라서 고향산천을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말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하면서도 모여 앉아가지고서 부정적인 생각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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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의 생각을 하지 믿음을 떠난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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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생각을 방치해놓으면 큰 시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심리학에 '깨진 유리창이론(Broken Windows)'라는 이론이 있는데, 이것은 건물의 유리창 하나가 깨졌는데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그 유리창을 갈지 않고 방치하고 있으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다른 유리창도 하나 둘 깨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유리창이 깨지기 시작하면, 그 가운데 정돈된 물건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그것을 바로 해놓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영적상태와 정신적 상태가 어지러워져서 범죄율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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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생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깨어진 유리창처럼 우리 마음에 그대로 내버려 놓습니다. 그러면 그 부정적인 생각이 점점 더 파괴적으로 마음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아주 흉악하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각은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항상 정결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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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모여서 부정적인 말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사건을 읽었을지라도, 여러분 스스로 마음속에는 그 생각을 담아서 가지 말고 "주님 보혈에 다 맡깁니다. 힘이 없고 무능하니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주님 보혈에 의지하니 저를 정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께 맡기고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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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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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다스려서 우리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을 다스리기 위해서 성경 말씀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고, 그 다음에는 마음속에 꿈을 가져야 됩니다. 제가 계속 꿈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꿈은 마치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한 음식을 요구하는 자녀의 손에 들린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릇을 가지고 와서 내미는 자녀가 음식을 얻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무엇을 구할 때 꼭 그릇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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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 왕 시대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큰 가뭄이 들게 합니다. 모든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엘리야가 사르밧 지방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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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고, 또 떡 한 조각을 주어 먹게 하시오"
사실 이 여인의 집에는 한 움큼의 밀가루와 몇 방울 기름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자녀와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이제 굶어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마지막 그릇을 요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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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이 여인은 하나님의 종의 말에 순종하여 음식을 만들어 대접을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흉년의 때가 다 지나갈 때까지 가루 통에 가루가 끊이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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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안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담는 내일을 우리 마음속에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방종하게 되고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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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꿈을 마음속에 품기만 하지 말고, 꿈을 소원을 두고 바라야 되는 것입니다. 소원과 꿈은 거의 같은 말입니다. 소원을 가진 사람이 꿈을 꾸고 꿈을 꾸는 사람이 소원을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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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면 주님이 소원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줍니다. 소원이 꿈입니다. 마음속에 꿈을 부어주십니다. 시편 71편 14절에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망을 품고, 나는 꿈을 품고 주님께 부르짖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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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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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알면 그 다음에는 내 마음속에 행동에 옮기는 믿음이 있는가? 살펴봐야 되는 것입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나? 네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느냐? 네가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 매일 네가 믿음에 사느냐?' 그것을 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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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믿음이 있는 자를 칭찬하셨으나 믿음이 없는 자는 꾸중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20절로 22절에 열두 해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군중들의 뒤에 섞여 와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옷자락만 만지면 열두 해 혈루병이 나을 것을 믿었는데,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보시고 그 여자를 발견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고쳤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깨끗이 나아서 집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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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약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에서 실시하는 치료 프로그램 중에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바로 외모를 바꿔주는 것입니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마약중독자로서,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를 빗지 아니하고, 옷도 아주 험하게 입고 있는데, 이 사람들의 수염도 깨끗이 깎아 주고, 머리를 정결하게 만들어주며, 옷도 깨끗한 옷을 입히고 아주 신사로 만들어서 그 사람들을 거울 앞에 세워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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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반응들이 놀랍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입니다. "저게 난 줄 몰랐습니다.", "너는 저런 사람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매일같이 변화된 자화상을 보여줘요. 그러면 대다수의 사람이 다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워진 자화상을 본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 다시 건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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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물며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가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보혈로 죄인인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고, 채찍에 맞으신 공로로 질병을 앓지 않고 낫게 되고, 예수님이 저주와 가난을 대신 짊어지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형통하고 축복을 허락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다음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영생 복락을 주신 것을 깨닫고, 주님 보혈로 청결하게 하셔서 성령을 주셔서 성령을 모시고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마음속에 매일 생각하면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건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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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그냥 지식적으로만 알지 말고 변화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무시기 전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마음속에 모시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함으로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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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갔을 때, 로마의 백부장이 와서 자기 하인이 죽어가니 와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십시다. 백부장의 집에 가서 병든 하인을 거쳐주겠습니다."라고 말씀하자, 백부장이 예수님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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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이 감히 우리 집에 올 수가 없습니다. 군대에서는 높은 사람이 부하를 보고 명령하면 그 명령을 준행합니다. 하인도 내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하인입니다. 주님이 나보고 '너 종은 나았다'고 말씀하시면 내 종은 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힘들게 오시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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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 못 봤다. 내가 가지 않아도 말씀 한 마디로만 그 쪽에 하면 나을 것이라고 믿는 이 사람의 믿음이 참으로 크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로마 백부장을 축복하시고 '당신의 종이 나았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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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백부장이 집으로 가보니 종이 나아서 주인을 섬기러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 생활 속에서 큰 믿음을 사용하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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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믿음을 주신 것은 "네가 내 이름을 무엇이든지 가지고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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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장 7절로 10절에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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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장 20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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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학문이 아니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겨자씨만한 하나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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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겨자씨만큼 작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삶을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되고 하나님이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해결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미암는다고, 하나님 말씀을 여러분께서 들어서 믿음이 생기면, 그것으로 변화를 믿으십시오. 변화를 가져옵니다. 기적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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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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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우리 신앙이 자라려면 말과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믿음을 가지면 그것이 주위를 변화시키고 창조를 가져왔다는 선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21편 2절에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입술에 요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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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귀에 들리도록 선언을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시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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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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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전에 어느 인터뷰를 하는데 TV아나운서가 저보고 "목사님, 믿음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그 아나운서가 허허허 웃으면서 "그야 계란이 박살이 나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요. 계란이 박살이 안 납니다"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치면 바위가 박살이 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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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어야 믿음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깨진다는 것은 3차원적 생각이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란을 들고 바위를 치면 바위가 깨어진다는 것은, 이것은 4차원적인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이냐?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위가 깨어져야 그 믿음이 믿음이지, 바위가 안 깨어지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아나운서가 고개를 까딱 거리면서 "그것 쉬운 줄 알았더니 쉽지 않네요"라고 말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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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믿음을 쓰면 그것이 기적을 산출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칠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절대로 안 나을 사람인데, 주님 말씀을 하니까 병이 오는 것이 아니라 도망쳐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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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 기적을 믿습니까? "어떠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런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저런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고요?" 그러게, 그런 사람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가슴속에 꿈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참으로 놀라운 신앙생활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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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펼치면 기적이 가득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성경에서 기적을 제외한다면 표지 두 장밖에 남는 것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두 껍데기 안에 기적만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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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지식, 종교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우리 변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고, 병든 사람이 약을 먹고 고침을 받고 새로워지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무에서 유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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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쓰고 오셔서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죽으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한 분을 마음속에 모시고 성경을 들고 기도하여 성령을 믿으면 여러분은 달라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냥 우리에게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ᅠ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만 바라보고 믿고 나아가겠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성장시켜 주시옵소서. 이 4차원의 영성을 통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복을 누리고 살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삶이 주님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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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자 /히12:1-4/ 유기성 목사
15:3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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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떨리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요즘 유행하는 독감으로, 설사를 하고 두통으로 고생,, 토요일 결혼식 주례와 지역장 세미나는 겨우 감당하였는데, 주일 설교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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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제 밤 기도하면서 감사가 터져나왔습니다.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와도 이 정도라면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삶이 같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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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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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의 삶입니다.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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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불가능합니다. 재벌도 자살하고 재벌 딸로 자살하고 인기 연예인도 자살하고 대통령을 지냈던 이도 자살하는 것을 보면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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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거운 짐은 그나마 낫습니다. 하소연할 수도 있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얽매인 죄는 말도 못합니다. 수치스러워서 상담받기도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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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고 존경받던 환경 운동가, 환경 오염을 걱정하여 하루에 한끼 밖에 먹지 않는다던 그가 성추행 스캔들로 사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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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처럼 얽매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죄로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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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때, 처음 미성년자불가 영화를 보고,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지만 하나님께 다시는 그런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는 약속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제 삶에 낙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죄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 얽매인 죄를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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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절에서 "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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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단순히 증인들이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도 얼마든지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도 믿음의 증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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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도무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증인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달려간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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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과 나는 달라요!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잖아요? 달리기, 등산, 수영, 암기, 손재주, 성격, 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잖아요?"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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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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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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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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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셨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아니라 약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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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짓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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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유일한 노력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리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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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서커스에서 공중그네를 타는 사람에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공중그네를 타는 사람들은 높은 곳까지 그네를 타고 올라가서 건너편에서 그네를 타고 오는 사람을 행하여 몸을 공중에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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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상대편 사람을 완전히 믿어야 완전한 자세가 나오고 결국 몸이 떨어지는 듯하다가 상대방의 손에 자신의 손이 탁 나꿔 채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상대방을 믿지 못하면 두려움 때문에 몸이 움츠러들게 되고, 결국 완전한 자세가 나오지 않아서 상대방이 붙잡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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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타는 사람이 공중에 몸을 던지고 완벽한 자세를 취하는 그 순간의 마음! 그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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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예수님을 이렇게 믿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보여져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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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은"세상이 얼마나 복잡한데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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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 안경점 광고가 히트를 쳤답니다."나는 안경 밖에 몰라요."이 광고가 그 해 전 미국에서 광고대상을 받았답니다. 안경 밖에 모르는 안경점 주인이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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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작 예수님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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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교회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떠십니까?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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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보이고 주님이고 왕이심이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정말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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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결혼식 주례 때 신랑 신부에게 권면한 말이 있습니다."행복한 결혼은 배우자 잘 만나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볼 때 예수님이 함께 보이고 아내를 볼 때 예수님이 함께 보여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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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누구를 대하든지 어떤 문제 앞에서든지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고 결정하지도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큰 실수를 할 위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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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는 40년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매일 만나가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병들었을 때 구리 뱀을 바라보고 나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 손을 들어 이겼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훈련을 40년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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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일기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훈련입니다. 일기를 나누지 못하시는 분은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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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장례식에 가면 '고인이 이제는 무거운 세상 짐과 얽매인 죄에서 벗어났구나!'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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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죽으면 무거운 짐과 얽매인 죄가 벗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을 때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자아는 죽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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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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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걸리면 사람이 왜 변합니까? 암 선고를 받을 때 마음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죽은 것은 아닙니다. 죽지 않았는데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보니 사람도 달리 보이고 시간도 환경도 돈도 성공도 재미도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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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왜 암이 걸린 후에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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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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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거운 짐과 얽매인 죄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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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선교사님이 최근 내신 [떠남]이라는 책에 보니, 몽골 사역을 마치고 잠시 가족들과 미국 애틀랜타에 머물러 있던 중, 열흘간 한국과 인도네사아를 사역차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답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이제 집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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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득 내 집이 어디인지 잠시 햇갈리더랍니다.'한국? 몽골? 미국?'워낙 여러 나라를 다니며 살다 보니 내 집이 어딘지 혼란스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어디가 내 집인가?'하는 질문이 떠올랐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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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아내가 기다리는 곳이 내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내가 찾아가는 대상은 집이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였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어디 있든지 그곳이 내 집이고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때부터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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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분명히 공간적인 개념이지만, 우리가 천국에 가려는 것은 천국이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계신 곳이니 가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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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천국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천국을 죽고 난 다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큰 일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순간부터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서 무거운 짐, 얽매인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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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에게 꽃을 피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장미 꽃을 피우고, 강아지에게 짖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짖어대며, 독수리에게 날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하늘 높이 비상하여 날아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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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명이 어떤 것을 살아 낸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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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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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고 왕이신데,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이요 이기지 못할 고난이 있겠습니까?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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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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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려면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도를 닦으러 산에 가고 자해를 하고 금욕생활을 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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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저녁 집회 후 성령께서 교인들에게 강력한 기도의 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저도 뜨겁게 기도하였는데,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충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게 다가와 기도를 요청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마음이 무너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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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들어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결단한 것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기도제목이 아니라 탄식이었습니다. 벌써 무너졌어요!"이제 1월 3일인데 작심삼일이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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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저도 얼마나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했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안되는 줄 알았습니다. 변화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거운 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려고 몸부림을 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무너진 후, 절망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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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저는'몸무림치는 것 때문에 실패를 반복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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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되나 봐!"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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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의 나락에 빠졌을 때, 주님은"나는 죽었습니다."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 고백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게 구원의 줄이었습니다. 죽고 싶은데, 이미 죽었다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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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저에게'모든 것을 맡기고 편히 잠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정말 비참하였지만 잠을 잤습니다. 그 때 저는 비로서 주님께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좀 알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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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우리는 조금 더 늦게 무너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3일이면 절망이고 3개월 후면 괜찮은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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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표는 완전히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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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당뇨병, 고혈압 환자가 매일 운동하고 음식을 조절하고 혈당을 체크하고 혈압을 체크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암 환자가 먹는 것 하나 마음 하나 잘 다스리려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지나치다고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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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당뇨병이나 고혈압, 암 보다 비교할 수없이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인 죄를 지고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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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들어 벌써 무너지고 좌절한 이들이 있다면 잠잠히 주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실패한 자아는 소리지릅니다. 비명을 지릅니다. 깊은 탄식을 내 뿜습니다. 그러다가 절망의 깊은 침묵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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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무엇 보다 먼저 우리 자아가 죽음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하면 비로서 주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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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노래하라' 저에겐 죄의 즐거움이 없어졌습니다, 조그만 죄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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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죄의 유혹은 너무나 작은 것이 되었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은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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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희미하게 보이기도 하고 선명히 보이기도 합니다. 그 차이가 삶의 차이입니다. 이따금 보이는 것과 계속 보이는 것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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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이시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왕으로 모시고 삽시다. 그러면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어떤 죄도 무거운 짐도 다 벗어집니다. 여기서부터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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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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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ᅠ후렴>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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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문 다 열어 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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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결케 되기를 원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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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 마시기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ᅠ
. 진실한 친구를 원하거든 네 맘 속에 주 영접하며
ᅠ
네 맘에 평안을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ᅠ
. 즐거운 찬송을 하려거든 네 맘 속에 주 영접하며
ᅠ
평안한 복지에 가려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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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히12:2-/ 김병삼 목사
09:5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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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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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에 한국 선교사 지도자 포럼이라는 대회가 있었습니다. 폐회 설교를 맡아 용인에 있는 한 수양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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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규모의 중요한 집회라는 기사를 접하고 갔지만, 너무나 썰렁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중요한 순서들이 끝나고 마지막 폐회예배만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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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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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멀리? 이 사람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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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시작하기 전, 상당한 경력을 가진 피아니스트 김애자 선교사님의 연주가 있었습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그분을 바라보며 "프로답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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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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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교를 누구 때문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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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많은 청중보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 그 연주를 듣는가가 아닐까요? 옛날 궁정에서, 청와대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이 사람의 숫자일까요?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을 주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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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내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제일 소중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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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신분을 모르지만, 갑자기 그분들이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 변했고, 하나님 앞에서 설교한다는 떨림에 성실하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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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는 생각, "나는 목사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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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우리를 실패자로 만들고, 예배에 성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규모와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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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페이스북에 댓글로 남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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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프로로 살게 해주셔^^ 개척 초기에 아내와 어린 아들 두 녀석과 함께 예배드리던 시절. 아들이 화장실에 가자며 엄마를 조를 때, 엄마는 두 아들을 다 데리고 나갑니다. 그때 홀로 단 위에 남겨진 나. 우두커니 그들이 오기만 기다립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내 설교가 끊여지지 않고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는 것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사람만 있어주면 좋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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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시작하면서 예배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핵심인 예배의 정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오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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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명하거나 강해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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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3주 동안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신앙의 기본을 다져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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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ᅠ만나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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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이 땅에 소망을 던져 줄 수 없다면 더는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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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가장 큰 이유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과 생명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이 절대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만나 교회는 2002년에 mission statement를 분명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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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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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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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과 세상을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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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핵심 단어를 뽑아낸다면, "예배" "훈련" "섬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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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예배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며, 훈련은 성자 예수님, 섬김은 성령님의 사역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비전이 아주 건강하게 balance를 맞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목적도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ᅠ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모임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이 섬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훈련을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기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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ᅠ
결국, 예배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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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훈련도 섬김도 의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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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교회가 꿈꾸는 사역의 기본은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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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역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없이 그 어떤 사역도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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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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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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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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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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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배가 없는 사역이란, 하나님의 관점에 올라갈 수도 없으며, 예배가 없는 사역이란 자의적 사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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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본다는 것 -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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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장 28절 이하에 보면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영어로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which is the most important?"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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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서기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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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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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엇인가요? 사랑하면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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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무엇인가요? 그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요?
ᅠ
ᅠ
저는 예배를 그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예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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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배 가운데 나아가는 자들이 그분의 생각을 알고, 그분의 관점을 알고, 그분 앞에서 삶을 결단하고,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ᅠ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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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에 제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묵상 글입니다.
ᅠ나침반과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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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등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상을 향해 가는 길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중간마다 나침반을 바라보며 방향을 확인합니다. 아들이 보기에 그 시간이 아까워 아버지를 재촉합니다. "아버지 빨리 가지 않으면 날이 밝기 전에 정상에 오르지 못해요!"
ᅠ
산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 때문에 방향은 보이지 않았고, 불안한 상황에서 더 이상 아들은 재촉할 수 없었습니다. 늦은 것 같았지만, 결국 나침반을 보며 부자는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ᅠ
정상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침반을 주며 말합니다. "얘야! 시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야,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산속에서 헤매다 죽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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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들이 아버지에게 시계를 풀어주며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스스로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시계를 보관해 주세요."
ᅠ
진정한 예배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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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침반을 받고, 우리의 시계를 풀어 맡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ᅠ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고 하십니다.
ᅠ
하나님은 빨리 가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는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ᅠ
ᅠ
저는 예배에 대하여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예배에는 웃음과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ᅠ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ᅠ
이 말은 예배 가운데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웃음과 눈물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열리지 않으면 인격적인 하나님을 우리의 가슴으로 고백하고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ᅠ
하나님은 메마른 기도, 형식적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ᅠ
예배는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나의 편리한 방식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ᅠ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가 죽는 것입니다.
ᅠ
"제사"는 동물을 죽이므로, 나의 죽음을 대신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죄의 사함뿐만 아니라 나의 인격과 내 생각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이 예배 가운데 회중이 들어오도록 준비하며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예배를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오늘 예배에 참여한 회중입니다.
ᅠ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요소 가운데 여러분의 생각을 꺾어야 하는 상황들, 여러분의 유익을 접어야 하는 순간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로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ᅠ
요즘도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ᅠ목사님은 설교할 때 아직도 떨리세요?"
ᅠ
저와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물어보십시오. 제가 얼마나 떨며 예배를 준비하는지 말입니다. 몇 주 전 원고를 마무리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중에 다시 원고를 보고, 토요일에 다시 수정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주일 새벽에도 수정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려고 나를 열어놓기 때문이지요.
ᅠ
적어도 저는 예배를 인도하기 몇 시간 전부터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고 씨름하며 준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하는 일은 예배를 돕는 일입니다. 사실 예배의 주인공은 여러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여러분이 영적인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ᅠ
ᅠ
한 가지 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오페라든 가장 비싼 자리가 어디입니까?
ᅠ
지휘자와 연기자, 연주자의 표정이 보이는 곳, 그들의 숨소리와 땀, 침이 튀는 곳에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그만큼 치열하고, 준비된 모습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자리가 다 똑같지 않습니다.
ᅠ
치열한 예배자의 준비를 여러분이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래층 뒤에서 열 번째 줄까지는 로비에서 들리는 음향과 겹쳐져서 좋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자리가 가장 음향이 좋은 자리인지 알고 앉아 계십니까? 어느 자리에 앉아야 영상을 통해 가장 깨끗한 모습을 볼 수 있는지 고민하며 앉아 보셨습니까?
ᅠ
예배는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재방송이 없습니다.
ᅠ
예배는 매 주일 생방송으로 진행됩니다. 그 순간이 가장 귀하고, 치열한 순간입니다. 그런 예배를 여러분이 조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예배의 시간과 자리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ᅠ
저는 목회자들에게 세미나를 인도하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ᅠ
"당신들 목회의 승부를 예배에 거십시오. 예배시간에 감격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가 오늘 여기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ᅠ
예배에 성공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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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ᅠ
. 예배당에 늦지 않도록 하십시오.
ᅠ
허겁지겁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준비된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예배의 감격이 달라집니다. 우리 교회에는 멀리 화곡동에서 2시간씩 걸려 예배당에 나오시는 원로 장로님이 계십니다.
ᅠ
이 다 된 분이 혼자 살면서, 교회에 나오기까지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오십니다. 우리 교회에는 매 주일 원주에서, 천안에서 1부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는 분도, 춘천에서 살면서 주말마다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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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로 장로님은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제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한 채로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너무나 은혜스러웠어요!" 그분의 예배가 어떻게 시간마다 늦게 오는 사람의 예배와 동일하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예배의 은혜가 없다면, 예배자로서의 당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ᅠ
ᅠ
. 핸드폰을 끄고 예배당에 들어오십시오.
ᅠ
예배시간에 설교 하다 보면 문자를 확인하는 사람들, 또 문자를 보내는 사람도 봅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울리는 핸드폰 확인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요?
ᅠ
문자를 보고 나면 꼭 지금 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지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전화에 조금 늦게 대답한다고 그렇게 큰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그 일이,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지만,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귀하게 여김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 존중받기를 원하시지요.
ᅠ
세상의 모든 염려를 차단하고 들어오면 하나님의 생각이 당신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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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을 끝날 때마다 듣게 되는 고백이 있습니다. "목사님! 사실은 제가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에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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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치고 돌아가 보니까,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막아주시고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있을 때보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여 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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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런 용기와 준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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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차단할 용기를 가진 자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의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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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도 맡기지 못하고 안달하는 사람의 예배와 믿음을 가진 사람의 예배가 어떻게 동일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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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처음 것을 드리도록 준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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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을 드릴 때, 가장 깨끗한 돈을 구별하고, 새 옷이 생기면, 주일날부터 입도록 하십시오. 교회는 사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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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전날은, 예배에 방해가 되는 행위들을 삼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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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은혜를 가로막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특히 부부싸움을 하고도 담대하게 나오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토요일에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아픈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대부분은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문제들이 많이 해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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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 시간은 나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결심하고 구별된 시간에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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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높은 사람과 어려운 사람과 약속을 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상대방의 시간을 먼저 물어보고, 거기에 맞추려고 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여러분의 편의가 예배시간을 좌우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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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예배의 시작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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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로 사는 것이야말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주일 예배자가 아니라 매일 예배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하여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흠 없는 산 제물로 구별되어 사람들을 대해 보십시오. 예배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흠 없는 제물이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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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고정! - 구별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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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영어 성경에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라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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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보는 차원에서 "see"라는 동사가 아니라 우리의 눈을 고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삶의 시선이 고정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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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기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거룩한 산제사"라고 말씀합니다. 산제사의 개념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이미 생각해 보았고, "거룩한"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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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늘 "구별"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배는 구별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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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기자도 분명하게 말하지요, 거룩한 산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드릴 때, "흠 없는"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찾고 찾아서 드리는 예물이 흠 없는 예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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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왜 나에게 응답이 없으며 삶의 변화가 없는지를 한탄하기 전에 구별된 예배를 드리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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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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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올 때, 제사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구별하여 왔습니까? 또 하나의 선택적 예배가 아니라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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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구별을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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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어떤 예배를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남는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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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어떤 예물을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물질 중의 하나를 지갑에서 꺼내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특별하게 구별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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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드리는 헌신과 봉사가 자신의 남는 시간과 자신의 즐거움으로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아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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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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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가장 신뢰할 때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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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드러날 때, 예배의 삶을 산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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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의한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나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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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신뢰는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철저한 순종은 우리의 이해의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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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예배의 삶을 살 때는 우리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이 아니라 지극히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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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유행했던 드라마 중의 하나가 [뿌리 깊은 나무]입니다. 세종대왕이 아주 멋진 대사를 했는데 한번 보실까요? 페이스북에 누가 올려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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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뿌리 깊은 나무를 시청하였지요. 극 중 세종대왕이 논리적 설명이 있어야 신뢰할 수 있다는 집현전 학자들의 말에 "신뢰라 하였느냐??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을 보며 그냥 믿어 줄 수는 없겠느냐?"라며 울분을 터뜨리던 장면을 보며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봤지요. 그리고 카이로스를 신뢰하기로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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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런 말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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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들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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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구별하는 것들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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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교회에서 주로 비상식적인 순종의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몸과 삶이 드려지는 헌신 말입니다. 자신의 것을 챙기고, 자신의 성을 쌓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과 재물을 쌓는 그런 일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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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분의 하시는 일들을 기뻐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야말로 예배자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합니다. 지금도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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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예배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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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에서 소피아 성당을 방문하고 바로 앞에 있는 블루 모스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비잔틴 문명을 꽃피웠던 그곳에 세워진 소피아 성당의 쇠락을 보는 것은 많은 의미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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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4번째 규모의 큰 성당이요, 콘스탄틴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걸쳐 A.D 538년에 세 번째 봉헌된 이 교회의 웅장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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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십자군 원정 때 약탈당하고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에 술탄 메멧은 귀중한 성화들을 파괴하고 그 위에 석회를 덮어 회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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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회를 벗겨 내고 여기저기 아름다웠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말씀이 선포되던 단도 삐뚤게 세워져 있었는데, 이유는 메카를 향해 방향을 틀어 놓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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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소피아 성당이 온전히 모스크로 사용되지 못하였습니다. 1609년 술탄 아흐멘은 성 소피아를 능가하는 더 크고 웅장한 회교 사원을 바로 맞은편에 건립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사원 내부 뒤쪽 벽을 뒤덮고 있는 21.000개의 푸른 무늬들의 타일 장식과 중앙 돔에 나 있는 260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이 모스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블루 모스크"라 불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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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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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잃으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성 소피아 성당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회칠한 모습으로 관광지가 되어버린 모습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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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영향력을 잃어버린 교회에서는 더는 말씀이 선포되지 않습니다. 소피아 성당이 유명했던 것은 초대교회 소위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존 크리소스톰의 명설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설교가 선포되던 곳이 저렇게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무서움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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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모스크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그 추운 날에도 찬물로 손과 발을 씻는 장소를 보았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 정결하게 하는 물두멍 같은 곳이죠. 죽 줄을 서서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치마를 입고 온 사람들 그리고 그 추운 날 반바지를 입고 온 사람들은 긴치마로 가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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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블루 모스크로 들어가는 입구에 쇠줄이 늘어져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유는 황제가 그곳을 들어갈 때 머리를 숙여가 들어가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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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독교와 가장 무섭게 대립하고 있는 이슬람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예식이 사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누가 먼저냐가 아니라 누가 본질을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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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진리를 잃어버리면 얼마나 무서운 수모를 당할지를 보여 줍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앞세웠던 십자가가 희생과게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분노와 상처를 남겨 놓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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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상처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밟았던 최초의 복음의 땅, 초대교회의 신학을 꽃피웠던 터키가 99% 모슬렘의 땅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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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묵상하던 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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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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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 7-8절에,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 그가 그곳에서 …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삶이 늘 평탄한 것이 아니었고 새로운 땅에서 기근을 만나 어쩔 수 없이 비옥한 애굽 땅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람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래를 빼앗길까 두려워 누이동생이라 속이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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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 12장 9절에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라는 말씀 이외에 애굽에서 아브람이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을 쌓고 시작한 삶이 언젠가, 아니 고난을 만나며 예배하는 것보다 그의 삶의 길을 찾는 것이 더 긴박한 문제가 되었고, 그가 가나안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사람이었음에도, 그것이 과거의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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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잃어버린 아브람을 보세요. 하나님의 관점에 서지 못한 아브람은 애굽에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 두려운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보호할 인간적인 수단을 간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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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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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의 삶에서 벗어나 수치를 당한 아브람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을 구원하시는 손길을 따라 온 가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창세기 13장 4절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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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이 다시 예배자로, 그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자가 되고 난 후의 행동입니다. 애굽에서 그렇게 치사하고, 수치를 당했던 아브람이 예배자가 되고 난 후에는 자신의 조카 롯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멋진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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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장 8-9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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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예배자가 된 아브람의 선택과 삶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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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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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을 쌓은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봅니다. 이제 예배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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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조카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고 난 후, 광야와 같은 땅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을 주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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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장 17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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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롯이 택한 땅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13장 10절입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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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 땅이 아름다워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의 땅은 멸망 받을 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래의 축복이요, 가능성의 축복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아브람은 눈에 보이는 땅을 축복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미래의 땅을 축복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한 자의 삶은 계속된 예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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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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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요, 그 약속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ᅠ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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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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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히12:1-3/ 김기석목사
1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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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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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오후 어디 마땅히 갈 데도 없고, 책도 읽히지 않아서 어린이 도서관에 들러 손에 집히는 대로 책 한 권을 뽑아들었습니다. 동시집이었는데 여기저기 넘기다가 눈에 들어오는 시 몇 개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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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비가 서 있고
하루종일 나무가 서 있고
하루종일 산이 서 있고
하루종일 옥수수가 서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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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우리 아빠 누워서 자네
―<비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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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 나가 놀지도 못하는 아이는 무료합니다. 그래서 툇마루에 앉아 발을 간둥거리며 주위를 우두커니 둘러보았겠지요.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마치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고보니 나무도, 산도, 옥수수도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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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쪽 방 한 켠에선 아빠가 누워서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 광경을 그린 마지막 대목을 보면서 저는 이 동시의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전환에 감탄했습니다. 수직적인 이미지를 돌연 수평적인 이미지로 전환시켜서 웃음을 유발하니 말입니다. 또 다른 시 한 편이 눈에 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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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수수 모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아이고 무거워
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거라
―<참새와 수수 모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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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농촌에서 보았던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참새가 수수 모가지에 턱 걸터앉을 게 뭡니까? 그렇지 않아도 잔뜩 숙어진 수수 모가지가 더욱 숙어졌습니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수수가 하는 말을 듣습니다.
ᅠ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거라". 참 좋지요? 다른 이를 위한 여백 없이 각박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 같으면 '썩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을 법도한데, 수수는 '몇 알 따먹고' 가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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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모가지에 걸터앉은 참새에 대해 아무런 미움도 적대감도 없습니다. '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하는 대목에서는 장난스런 엄살이 읽힙니다. 이 시에는 뭔가 조화로운 삶의 분위기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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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책표지를 보고서야 그것이 어린이들의 시가 아니라 섬진강변에 살고 있는 김용택 시인의 동시임을 알고는 다소 머쓱해지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아이처럼 살고 있는 시인의 맑은 심성이 빚어낸 시이기에 여전히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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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고, 워즈워드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했습니다. 어른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놀이정신'이 아닐까요? 놀이란 즐거운 것입니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잘 놀 줄도 모르고, 즐길 줄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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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것이 적은 사람이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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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살 것 즐겁게 축제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만만치 않고, 자식 교육도 걱정이고, 인간관계의 어려움도 있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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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내가 뭘 위해 이렇게 바장이며 사나" 싶어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매사를 너무 진지하게 대합니다.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도, 기어코 시시비비를 가려보려다가 상처를 입거나 입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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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우리의 일상은 감옥이 되고 맙니다. 무거움을 벗어나려면 수직의 심상을 수평의 심상으로 전환했던 동시 작가의 경쾌함을 배워야 합니다. 물위를 걸으셨던 예수님의 그 가벼운 보행법을 배워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파도가 잦아들지 않는 인생이지만, 그 속에 빠지지 않고 그 위를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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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없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쭉 열거한 후에, 이런저런 시련의 풍랑에 떠밀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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ᅠ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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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위를 걷기 위해서는 먼저 가벼워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온갖 시련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히브리서의 저자는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라고 권고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닙니다(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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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찾는 나그네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때가 되면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돈도 명예도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 떠나가는 것들입니다. 떠나려는 것을 굳이 붙잡으려니 삶이 힘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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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이 무거운 까닭은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그 동안 저는 나눌 것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달리 말해보고 싶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적은 사람이 부자입니다. 소유를 늘림으로 부자가 되는 길은 곳곳이 암초투성이여서, 그 길에 서있는 한 삶이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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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욕망을 줄이면 우리는 작은 일에도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은 '반드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거의' 죄에 얽혀들게 마련입니다.
집착이 강한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고, 생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모가지에 앉은 참새를 보고 '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라'고 할만한 정신의 여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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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그릇이 커질수록 감사와 평안은 멀어집니다. 얼굴에서 미소도 사라집니다. 다른 이에게 친절할 수도 없습니다. 이건 그 자체로 형벌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을 줄여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욕망의 그릇을 작게 할수록 우리 존재는 건강해집니다. 그래야 우리는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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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有證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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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면 예수님처럼 세상 물결 위를 가뿐하게 걷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드로처럼 가라앉곤 합니다. 욕심을 덜 부리고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보지만 세상은 마치 목동들이 올가미를 던져 소를 넘어뜨리듯이 수많은 올가미로 우리를 넘어뜨리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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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휘황한 빛에 취한 눈에 하늘의 별빛은 보이지 않게 마련입니다. 세상의 온갖 소리에 익숙해진 귀에 하늘의 세미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타락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슨 소리를 들으며 삽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ᅠ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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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은 자기를 깨는 아픔을 견디면서 이 땅에서 하늘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참 평화와 빛을 욕망으로 어둑해진 이 세상에 끌어들이셨습니다. 부와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악마적인지를 드러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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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섬김이야말로 하늘에 이르는 길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 되셨고, 그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생을 완성으로 이끄는 분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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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바라보고 사느냐가 우리 인생을 결정합니다. 똑같은 길을 걸어도 사람마다 보는 것이 다릅니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런 걸 가리켜서 '선택적 지각'이라 한다지요? '바라봄'은 '바라는 것, 즉 소원을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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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꿈꾸는 바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바라보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말과 행실이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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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卽有證無'라 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예수의 실체를 드러내는 향기입니다. 이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사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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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에 밀려온 토사를 말없이 걷어내는 이들의 꾸준한 손길처럼, 욕심의 부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덜어내며 살다보면 우리도 어느새 가뿐하게 세상 물결 위를 걷고 있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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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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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로써 경주하며 /히12:1-3/ 맥스 루카도
16: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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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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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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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조깅이 아니다.
경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agon인데
바로 그 단어에서 고통agony이란 영어단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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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신앙 경주는, 가벼운 조깅이 아니라마라톤처럼) 녹초가 되도록 힘들며, 때로 심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 고통스런 경주를 끝까지 펼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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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달리다가, 더 이상 달리지 않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끝까지 강한 경주를 달리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있으나, 결코 흔하지 않다.
조금 뛰다가.. 지치고 힘들면, 옆길의 구경꾼 대열로 그만 합류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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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잘 달리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도 자기 페이스를 잘 유지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피곤이 찾아왔다.
이들은 경주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주자를 보고 기세가 꺾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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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야 어찌되었든,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달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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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임하지 않는 크리스천
아시다시피, 지금 크리스천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는 교회에 정기적으로 다닌다.
주일날 헌금함에 지폐 한 장을 넣는다.
교회 빈 좌석 한 자리는 채울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 경주에 임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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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마음은, 경주에 있지 않다.
이들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뭔가 변화가 없는 한, 초반에 반짝 달린 것이, 이들의 최고 성적이 될 것이다.
경주가 힘에 겨워 끙끙거리다가 그만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인데,
문제는 천국에서 아무 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더 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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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예수님의 경주는
경주 막바지에 이를수록 더욱 피치를 올리셨다.
'막판 스퍼트'라고 하는데, 정말 전 구간 중 가장 막판에
가장 최선을 다해/사력을 다해 달리셨다. 환상적인 막판 스퍼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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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경주에서 포기하신 분들은,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시기 바란다.
지금 아직 포기하지 않고 달리시는 분들은,
예수님의 막판 스퍼트(십자가)를 모델로 삼으시고,
경주의 막바지에 이를수록.. 더욱 피치를 올리게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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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경주
예수님이야말로 인내하는 자의 정형적 모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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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기 바랍니다. 히12:3, 쉬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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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성경은 예수님이 '묵묵히 참으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참지 못하고/경주를 돌연 중단하시고/죄인들을 징계하실 수도' 있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참으신 것은, 경주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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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자 예수님은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실 수도 있었다. (우리들처럼)
경주를 포기하고, 자기를 놀리는 죄인들을 엄히 징계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한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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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경주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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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유혹/시험 받으셨다.
무슨 유혹이었을까?
포기하고싶은 유혹이었을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었을까?
아니면 세상 왕국의 영광으로 만족하려는 유혹이었을까?우리 중에 이런 유혹에 넘어갈 사람이 많을 것이다.아니 세상 모든 영광을 다 준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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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다.
내적인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유혹받으실 때, 그분은 경주를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다. 그분은 계속 달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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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뜻은
이렇게 유혹을 받으셨으나 승리하신/끝까지 경주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유혹의 현장에 있으나, 그런 주님을 본받으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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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도 그분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마라톤 경주 주자에게, 구경꾼들이 욕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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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축구경기장에서, 관중들이 특정 선수를 욕하고 생수병 등을 던져서
그 선수가 평정심을 잃고 흥분해서 맞받아치는 일들이 보도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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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심상치 않은 표현이 나온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히12:2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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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자도 있다
몇 해 전 나는 5킬로 경주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어느 자선단체 기금마련을 위해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달리기에 무지했던 나는 초반에 사력을 다해 달렸다.
그랬더니 절반도 못가서 숨이 헐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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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적시에 길가에 늘어선 관객들이 나를 격려해 주었다.
친절한 구경꾼들이 나를 응원해 주었다.
어느 인정 많은 아주머니는, 물 컵을 건네주었고,
다른 사람은, 달리는 이들에게 호스로 물을 뿌려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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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중에 달리는 나는, 그들과 초면이었다.
그런 그들의 격려는 내게 너무 큰 힘이 되었다.
이들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완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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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경주에 있어서도, 격려자의 응원은 너무나 소중하다.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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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새롭게 /히12:1-3/ 곽선희 목사
15: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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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정 주부가 고등어 두 마리를 시장에서 사가지고 집에 가지고 갔습니다. '내일 아침 이것으로 반찬을 하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고등어가 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구두가 냉장고 안에 들어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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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장을 가보니깐 신발장에 고등어가 놓여 있습니다. 이 여자가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여러분, 행동은 있는데 생각이 없다 말입니다. 그 생각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러분, 이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어느 사이에 행동만 남고 생각은 빠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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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이 먼저 가고 때로는 욕망이 먼저 가고 생각이 뒤따르면 그 일에는 계속 후회가 있습니다. 끝없는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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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먼저 가고 그리고 행동이 가서 생각한 바를 사건 속에서 행동 속에서 확증해 나갈 때에 그래서 때로는 더 높은 의미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올시다. 가령 생각과 행동이 따로 따로 간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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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학술적 용어로써는 호모사피엔스라고 합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말은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혹은 호모에렉투스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직립 보행하는 사람이다. 두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런 존재란 뜻입니다. 호모파베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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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도구, 용기를 사용할 줄 아는 존재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학술적 용어 속에서 사람의 사람 된 높은 가치는 어디 있느냐 하면, 호모사피엔스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 그 생각이 없는 인간 그건 다만 동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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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각하는 능력, 기능,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있는 가장 귀중한 기능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생각을 져버릴 때 '인간 됨을 져버렸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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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각하면서 자꾸 의심으로 갑니다. 생각이 의심으로 발전합니다. 의심하는 쪽으로 계속 추리하게 됩니다. 가령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남편이 저녁에 늦게 들어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ᅠ아이고, 이거 우리 식구를 위해서 이렇게 밤늦도록 수고하는구나. 지금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배고플까?' 이런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요것이 어디로 샜나. 오늘 아침에 수상한 전화가 오는 거 같던데 이기 어디로 빠졌나' 생각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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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의심 쪽으로, 의심하다보면 이게 계속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됩니다 이게요. 이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올시다. 이렇게 의심으로 이어지는 생각, 이런 유형을 아담타입이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 유형입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생각하면서 믿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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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까 그렇다. 확실히 이건 믿을 수 있다. 믿음이 점점 깊어집니다. 생각하면서 믿음이 깊어집니다. 이러한 것을 아브라함 타입이라고 그럽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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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 그런대요. 그리고 '약속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자손을 주마' 이렇게 했거든요. 이 약속을 믿고 갑니다. 믿고 가면서 사실은 여러 번 휘청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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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땅을 주신다고 했는데도 흉년이 드니까 애굽으로 피난도 갔고,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10년 20년 기다려 보다가 이게 도무지 영 안되니깐 그만 서자를 얻었지요.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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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휘청거렸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내가 네게 말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생각을 고쳤습니다. 믿음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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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능력과 지혜는 놀라운 것이고 나를 선택하신 경륜은 위대한 것이다.' 계속 믿음을 확증해 나갑니다. 그리고 모리아산에서 이 클라이막스를 이루게 됩니다. 생각이 그 믿음을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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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읽을 수 있는 교양서적 중에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번쯤은 꼭 읽을만한 아주 유익한 교양서적입니다. 그 리차드 칼슨이 이제 다른 저서로써 '생각의 집착을 버리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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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관점의 선택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는 겁니다. 꼭 같은 일을 놓고 어느 쪽을 생각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죠. 행복은 소유의 문제도 아닙니다. 행복은 지위의 문제도 아닙니다. 행복은 지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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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느 쪽으로 생각하느냐는 것이죠. 거기에 따라서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해요. 아시는 대로 인간의 행복 곧 인간적인 행복이란 생각의 문제입니다. 결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낙천주의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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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방향으로 좋게좋게 생각하고 밝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의 성향을 가지게 되면 그는 범사에 행복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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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부정적이고 의심하고, 부정하고 의심하고, 부정하고 마지막에는 우울증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거 정신적으로 죽어지고 맙니다. 이 사람은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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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그 보다 더 강한 사람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사람이다. 가장 풍족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처지에서 만족하는 사람이다' 생각이에요.
ᅠ나는 만족하다. 아∼ 나는 넘친다. 나는 넘치도록 행복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큰 부자입니다. 또한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남을 칭찬하는 사람이다.' 칭찬하지 않고 칭찬 받는 사람 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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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까? 칭찬하는 쪽으로 계속 우리 생각이 발전해야 되요. 그래야 칭찬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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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생각이라는 것이 뭡니까? 여기 몇 가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먼저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걸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또 멀리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 마지막 궁극적 종말은 어디 있느냐. 그걸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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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미래를 생각하고, 오늘에 살지만 끝을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어떤 방향에서 생각하느냐. 흔히 말하는 대로 과거 지향적이냐 미래지향적이냐. 항상 우리는 과거를 생각합니까? 아니면 밝은 미래를 내다봅니까?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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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집중력입니다. Concentration, 집중해야된다. 생각이 건성으로 되어선 안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생각하십시다. 가만히 보세요. 이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니까요 공부할 때는 놀 생각을 해요. 밖에 나가 놀 생각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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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앉아있긴 하지만 생각은 지금 저기 가 있어요. 그러니까 공부가 안돼요. 또 그런가하면 나가 놀 때는 또 공부할 걱정을 해요. 이거 숙제 안 해 가지고 가서 내일 가서 얻어맞을 생각을 하고 앉았어요. 걱정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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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 때는 놀기만 하고 공부할 때는 공부만 해야돼요. 집중해야 되는데 이 집중력이 부족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요. 뿐 만 아니라 자기가 가진 이 생각의 능력, 이 창조적 능력을 다 잃어버려요. 집중, 결국은 집중력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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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이 인격이요 집중이 그 사람의 운명입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죠. 또 하나는 지속성입니다. 한 두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평생, 계속 생각합니다. 이 집중 그리고 지속적 생각이 마지막에 구멍을 뚫어요. 저 미래를 향하여 큰 소망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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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어요. 다 알 필요도 없고 다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다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됩니다. 무엇이 우선적인가. Priority number one. 이 최우선! 절대우선적인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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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나마나한 거 쓸데없는 거 그 복잡한 거 그거 생각할 필요 없어요. 집중적으로 생각하되 최우선적인 것을 생각하고, 또 하나는 유치한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은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ᅠ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행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제 그 유치한 생각 제발 좀 그만하고 이제는 성숙한, 인격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생각을 해야되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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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각 자체를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의 기능인 이성, 그 이성이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생각 자체를 생각해야 되요. 저는 여러 모임에 이렇게 설교나 혹은 강연을 하러 다닐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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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강사로 갔고 그 사회하시는 분은 따로 있죠. 그 사회하시는 분이 초조하게 이러구 있다가 강단에 올라가서 대체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만요. "시간이 됐으므로……" 그러거든요. 그래 내 시간을 보니깐 아직도 5분 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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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자기 시계에 의해서 "시간이 됐으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시계가 있더라도 그 시계는 표준시계에 맞춰야지 고장난 내 시계에 맞추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내 생각이, 병든 내 이성이 사고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면 그처럼 멍청한 일이 어디 있어요. 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 인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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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념의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이 타락한 이성, 타락한 생각, 타락한 생각의 기준, 이 병든 이성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내 생각이, 내 이성이 근본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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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어떻게 개선해 보려고 어떻게 고쳐보려고, 어떻게 따라가 보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거기서는 밝을 미래를 창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가장 핵심적인 말씀은 중생한 이성이어야 합니다. 그 이성이 중생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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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거듭나야 됩니다. 그리고야 합리적인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야 밝게 볼 수가 있어요. 추리능력, 비판 능력이 바른 궤도에 설 수가 있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이 차 운전을 하고 다니다가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 앞에서 큰소리로 호령을 했답니다.
ᅠ왜? 불을 안켜고 이렇게 컴컴하게들 앉아가지고 뭘 하는거냐!" 하고 소리질렀어요. 그러니깐 아이들이 "불 켰는데요." 보니깐 썬글라스를 끼고 있더랍니다. 밖에서 끼고 있던 썬글라스를 끼고 '왜 방이 어두우냐!' 방이 어두운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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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이 문제지……. 내 생각의 척도가 빚나갔다고요 벌써……. 근본적으로 잘못됐어요. 이걸 어떻게 해요. 거기다 의지해 가지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중생하지 못한 인간이 아무리 공부를 하면 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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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한다는 게 사기꾼이나 되고 말이지. 아 요새 머리 좋은 사람들 많데요. 뭐 증권이 어떻고, 나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어요. 좌우간 머리 좋은 사람들이야. 그러나 멍청한 사람이에요. 저도 망하고 남도 망하고. 이 무슨 짓입니까?
나라를 망치고 말이에요. 이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해가지고 그 짓 하자는 겁니까? 왜요? 이성이 병들었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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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고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두가지로 명령을 하십니다. 이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중생케 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생각하라.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생각하라. 생각의 초점을 예수께 맞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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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경기자가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나를 보고 세상을 보아서는 세상을 모릅니다. 나를 보고 예수를 보아도 예수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를 보고 나를 보아야 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옵니다. 나를 보고 아버지를 보면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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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버지를 보고 나를 보니까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 기뻐하는 아버지, 정신없이 기뻐하는 그 아버지 얼굴을 보고 나를 보니 나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이제 복잡한 과거, 생각할 것 없습니다. 다시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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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보고 나를 보고, 예수를 보고 나를 보세요. 그래 오늘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십자가를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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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는 능력이 많습니다. 지혜도 있습니다. 기회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를 안 질 수도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왜 십자가를 져야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ᅠ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말없이 서있는 예수님을 보세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를 생각하는 순간에 세상에 억울한 게 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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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억울하고 분하고 뭐 어쩌고... 말도 안돼는 소리입니다. 십자가를 보세요. 참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소. 무엇을 못 참을 수 있다는 얘기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의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ᅠ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죄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사랑하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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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을 거역한 분이 한 두 분입니까? 얼마나 많은 동안 하나님을 거역했습니까? 양심을 거역했습니까? 불의의 길로 행했습니까 마는 하나님은 오래오래 참아주셨어요. 무던히도 참아주셔서 오늘 내가 있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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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참아주신 그를 생각하세요. 사랑이 뭡니까? 사랑이란 곧 믿음이에요. 나를 믿어 주었어요. 사랑은 참는 거예요. 나의 모든 불의를 참아 주셨어요. 사랑은 기다려 주는 거예요. 너무나 오래오래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돌아오기를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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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희생이에요. 내 대신, 내가 죽어야 할 대신 그가 죽으시고, 내가 고난당해야될 것을 그가 당하시고, 내가 저주받아야 할 것을 그가 당하시고 대신 십자가를 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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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나를 소중히 여겨서 내게 일을 맡기셨어요. 많은 은사를 주어서 오늘도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분을 생각하세요. 그분을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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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장 2절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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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말씀이죠. 어떤 한사람이 길을 지나가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왜요?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중이거든요. 지금 한시간이 바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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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며칠만 이제 직장을 못 얻어도 처자식들이 굶고 앉았어요 지금. 그래서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고 원망하면서 지금 직장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이 사람은 본래 슈퍼마켓을 경영했는데 어느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가지고 슈퍼마켓 홀랑 날아가 버리고 말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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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 나서게 됐어요. 이제는 한끼의 식사가 어려워요. 그래서 이렇게 길을 가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했는데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면서 십초만에, 본인의 말이 십초만에 생각이 확 돌아가면서 환한 미래를 보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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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앉아있는 분이 자세히 보니까 두발이 없어요. 두발이 없는 분이 휠체어에 앉아서 바로 이 사람을 만나서 "안녕하십니까? Good morning!" 그 다음에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그러더랍니다.
ᅠ아니, 발이 없어 휠체어에 앉은 분이 날씨 좋은 건 또 뭐요. 저 사람도 날씨 좋은 날이 있나?'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그는 화장실에 있는 큰 거울에다가 이렇게 써 놓았답니다.
ᅠ구두가 없어서 불편하거든 구두 신을 필요가 없는 사람을 생각하라." 구두가 문제가 아니오. 구두 신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라. 그 순간 생각이 확 돌아가요. '나는 행복하다. 나는 넉넉하다.' 거기서 새로운 일을 개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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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어의 법칙이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윌리스 H. 케리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성공을 하고 그가 성공한 비결을 요약해서 많은 사람에게 가르쳤어요. 그 말이 바로 캐리어의 법칙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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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기는 법칙. 첫째는 무엇을 위하여 내가 걱정을 하나?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목적의식이에요.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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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수용하라. 이 현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수용하라 그거예요. 받아 들이라.
세 번째는 깊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침착하게 현실에서 열린 문을 찾으라. 무엇인가 길이 있어요. 그런 개선방법을 생각하라, 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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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행동하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생각 없이 살았습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후회와 절망과 낙담뿐입니까? 다시 생각하십시다.
이제라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나를 생각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할 나를 생각하세요.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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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서 죽으실 뿐더러 내 운명을 책임지고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 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종말을 전망하십시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생각하고 그리하는 동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올 것입니다. 생각이 중생하고야 새로운 운명이 열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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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나님 아버지, 미련하고 우둔한 저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래오래 참아주시니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로 확증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빛을 보고 현실에서 저 먼 미래,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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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바보 /히12:2
16: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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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러시아 남자가 모스크바 크래물린 궁전 앞을 뛰어 다니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습니다.
"바보 후루시조프! 후루시조프 바보!"
그는 즉시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았습니다.
년 금고형이 떨어졌는데, 판결문은 이렇습니다.
"서기장 모독죄 3년, 국가 기밀 누설죄 20년"
재미있는 유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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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라는 것이 비밀인데, 그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입니다. 바보란 다른 말로 밥통입니다. 밥통은 밤만 축내는 식충이를 말합니다. 지능이 모자라거나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멍청한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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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바보! 이런 말은 신성모독 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바보"는 해석을 달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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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란 "바라 보다"의 줄인 말입니다. 바보란 바라볼수록 보고싶은 사람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십니다. 예수 바보, 바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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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사신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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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사신 분입니다.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지금 치루어야 할 댓가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고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할 것이 아니냐"(눅24:26)고 하신 말씀이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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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오늘의 고난 없이는 내일의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일의 영광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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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에 앉아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가 무얼 보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만 알뿐입니다. 세상은 난리가 나도 그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거기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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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람 다나가 고이치가 2002년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을 때 일본의 과학성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석사도 박사도 아니고, 대학 교수도 아닌 아주 평범한 회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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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후쿠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교토시에 있는 시마즈 제작소에 들어가 연구소 주임으로 일해왔습니다.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전념하고 승진 시험도 거부하고 주임 자리를 고집해 왔습니다. 그가 43세에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신약개발과 암 조기 진단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공적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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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학 다닐 때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낙제를 당해 1년 늦게 졸업했으니 천재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한 직장에서 20년 넘게 오직 연구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그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만큼 바보같이 보였습니다. 머리도 짧게 깎았고 옷도 대충 되는 대로 입고 다녔습니다.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고 오직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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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센몬빠가였습니다. 전문 바보라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된다. 다른 것은 못해도 된다. 하나만 잘하면 그것이 최고다. 한 분야의 1인자가 최후의 1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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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 센몬빠가 이십니다. 오직 앞에 있는 기쁨만 바라봅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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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예수님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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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디젤"이 "smart no! Be stupid!" "스마트 노! 바보가 돼라!"는 브랜드 광고를 내걸었습니다. 스마트가 멋이 있지만 바보에게는 배짱이 있습니다. 스마트한 사람은 비판을 하지만, 바보는 행동을 합니다. 스마트는 똑똑한 바보요, 바보는 창의적인 행동가입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목표가 있는 사람입니다. 목표를 향해 바보처럼 달려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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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신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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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란 흉악범을 못박아 죽이는 형틀입니다. 고대로부터 로마시대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로마의 경우 반란죄를 지은 자를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죽임을 당하는 기구였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갈3:13)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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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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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모욕하더라"(마27: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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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요, 바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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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
"십자가를 참으사" 이것은 하나뿐인 목숨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버린 자기희생을 말합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사고로는 이해가 안되는 바보입니다. 죄없는 그가 죄인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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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를 영어로, 이디어트 idiot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그리스어 idiotes 이디어테스에서 유래된 말인데, "공공의 문제에 관심이 없이 오직 사사로운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적인 이익보다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이 바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타산에 약한 사람을 바보라고 하는데, 바보의 참된 뜻은 이해타산에만 밝은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엄마는 바보야! 하고 소리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사는냐는 겁니다. 엄마 바보가 가정을 지켜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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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약1:4) 참음이 부족하다 싶으면,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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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는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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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는 "바보" 이십니다. 바보는 남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눈치를 보느라 피곤합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기 소신을 지키며 내면의 평화를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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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디트로이트에 홀레스 닷지라는 자동차 왕이 있었습니다. 그의 저택에서 젊어서부터 근무해온 나이 많은 문지기가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몹시 게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닷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가! 내일부터 출근 하지마!"하고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퇴근해보니 노인은 여전히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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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오늘 아침 해고당했잖아!" 하지만 노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장님을 용서했거든요!" 노인은 해고당한 직장에 날마다 나타났습니다. 해고당한 경비원이 주인을 용서했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바보인데 그 바보가 최후의 승자입니다. 바보는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식대로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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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는 막무가내식의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 바보 속에 자기 긍정의 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보는 망상가입니다. 망상이란 이치에 어그러진 생각입니다. 허왕된 꿈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허왕 된 생각 꿈 같은 이야기를 하여 바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역사 발전을 주도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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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합니다. 미래는 언제나 망상과 꿈이 재료입니다. 모든 사업가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꿈이나 망상이 기적의 모태가 됩니다. 선구자나 발명가는 모두 망상가 소리를 들었습니다. "꿈 깨!" 하고 핀잔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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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루고자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당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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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동지상고 야간학생이었습니다. 아이스케키를 팔면서 부끄러워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쓰고 얼굴을 안 보이게 가렸습니다. 어머니가 지나가다가 보시더니 모자를 벗기면서 "네가 하는 일이 그렇게 부끄러우냐? 부끄러우면 그만둬라!" 하고 야단을 쳤답니다. 어머니는 Tiger mother였습니다. 호랑이 엄마가 자식을 강하게 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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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학생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면회 와서 질질짜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하느냐? 기도하느냐? 성경을 읽느냐?"고 묻고 "나는 너를 믿는다!" 하고 갔답니다. 그 아들이 커서 28살에 현대건설 이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서울 시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현대건설에서 뽑으려 하지 않아 대통령께 직접 편지를 보내어 현대에 입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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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온 몸으로 부딪쳐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자기를 긍정하고 도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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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추운 겨울 교회에 가는데 눈보라가 너무 심해 본 교회까지 못 가고 가까운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이 안 계시고 집사님이 설교를 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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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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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읽고 설교하면서 스펄전을 향해서 예수를 바라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자라서 세계적인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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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 믿음의 창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성자이십니다.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 사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바보 예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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