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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고린도서 설교 모음

고린도전서 15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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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이 서고 넘어지는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15:12-19/ 김형익 목사

2021-05-10 00:17:06

 

1.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의 모든 것은 다 무너진다.

기독교 복음에 대한 가장 압축적인 진술인 고린도전서 15:3~4은 복음의 바뀔 수 없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일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서고 넘어지는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이것을 가정법의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라고 했습니다(14~15a).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7~18)”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합니다(19).

 

정리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1)사도들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고 2)믿음도 헛것이고 3)우리는 하나님의 거짓증인이 될 것이며 4)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5)믿고 죽은 사람들은 다 멸망했을 것이고 6)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이토록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중요하게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부족한 것입니까? 두 가지 점에서 바울 사도는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째는 그리스도 자신을 확증하기 위해서 중요하고, 둘째로 신자의 믿음을 확고하게 세워주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자신을 확증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 자신을 확증한다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부활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주일 새벽이었습니다. 주님은 이틀 전인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죄수를 처형하는 것을 전문으로 해왔던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확인했고(막 15:39, 44~45), 병사는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확인까지 했습니다(요 19:34). 주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당신의 죽으심의 성격을 누차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신구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은 죽음으로써 믿는 자들을 저주에서 속량하는 죽음이었습니다(갈 3:13).

 

뿐만 아니라 그 죽으심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시는 죽음이었습니다(롬 5:9). 그리스도의 피흘려 죽으심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속죄가 일어났고,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다 풀어주셨습니다(롬 3:25).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아는가, 어떻게 확신하는가 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서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내 죄가 모두 다 사함을 받았고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분의 모든 말씀이 진정한 것이었음을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이 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참으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그 죽으심으로 참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셨음을 확증해 주십니다. 로마서 1:4이 그것을 말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말은 아들이 아니었다가 아들이 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당신을 증명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인정되었다’는 말의 헬라어 단어는 ‘호리조 horizo’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평선을 뜻하는 horiozn 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존 맥아더는 “지평선이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확실한 경계선을 보여주듯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과 다른 인간들을 분명하게 구별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논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명확한, 부인하거나 논박할 수 없는 증거로 하나님은 부활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만나본 일차적인 증인들의 증거로 확인되는 바, 그것이 복음서요, 크게는 신약성경입니다, 이 목격자들은 한 둘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그 수많은 목격자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날조된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료의 진정성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준에서 보더라도 신약성경은 무시할 수 없는 1차 사료입니다. 만일 이들의 증언이 날조라면 어떻게 이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면서까지 날조된 거짓을 지키려고 했을까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변화를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사실상 믿음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하나의 명확한, 핑계 댈 수 없는 증거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부활로써 주님은 참되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의 믿음을 세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부활로써 증명되었다면, 이것은 또한 주님의 죽으심이 말씀하신대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는 죽음이었음을 입증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4:25에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 대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범죄와 허물을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어줌’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유는 그분의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죄가 완전히 용서함을 받았고 완전한 칭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진정성을 제자들과 오늘날의 신자들에게까지 확증시켜주신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런 전제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쓴 것입니다. 너무나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대속 형벌을 받으신 죽음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활을 역사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사도들이 전파하는 복음은 헛된 것이 되고 신자들의 믿음도 헛 것이 될 것이며,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되고, 믿는 자들은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믿고 죽은 심지어 순교한 많은 신자들은 지금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아니라 멸망한 자들이 되었을 테고 마지막으로 믿는 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들이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헛된 가정들을 무위로 돌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그리스도가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모든 말씀이 참되며, 그분의 죽으심이 말씀대로 대속 형벌의 죽음임을 모든 믿는 자들은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래서 바울 사도가 항변하듯이, 기독교 신앙이 서고 넘어지는 사건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난 사건이라면 기독교 복음은 참된 것이며, 믿는 자들의 믿음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참되고,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되며, 믿는 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자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신앙에 대하여 한 가지만 더 말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부활의 역사적 증거들을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좀체 이 사건만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 역사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는 부활 사건과 비교도 안 되는 일차 사료들을 가지고도 믿으면서도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이 부활 사건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처음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십니까? 먼저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집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의문도 많고 믿어지지도 않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부인할 수 없이 믿게 됩니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4. 부활이 신자가 기다리는 소망이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우리의 신앙에 어떤 의미를 줍니까? 신자는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에서 완전하게 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얻은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죄의 무게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기쁨의 은혜를 압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정초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순종하게 합니다. 이것은 이미 제자들의 삶의 변화에서 본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신자들이 경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용기로 자기 아들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썼습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주님께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부활로 입증되었듯이, 신자의 모든 것이 완전하게 입증되는 것도 그들의 부활할 때입니다. 우리에 대한 세상의 온갖 비난과 오해, 조소가 있을지라도 이 모든 것은 부활의 시간에 일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라는 사실은 이 세상의 어떤 증거들로써가 아니라 부활로써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신자의 소망은 부활에 있습니다. 이 전제에서 신자는 이 땅에서 십자가, 험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증명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옳음을 입증하실 것을 기다리십시오.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묵묵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십시오. 부활의 날까지 말입니다.

 

 

마음 눈을 밝히사 /엡1:18-19, 눅14:12-14, 고전15:17/ 김형익 목사

2021-05-20 11:49:24

 

로마의 압제 아래 살아가던 많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구원하고 다윗의 시대와 같은 황금시대를 열어줄 것에 대한 기대로 연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적을 행하였고 죽은 자도 살리셨던 메시아는 로마 총독에게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음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어둡습니다.

 

온 세상이 죄로 얼룩져 있고, 만족할 줄 모르는 죄인의 탐욕은, 경제적 부정과 착취, 힘에 의한 혐오 폭력, 또는 인종과 계급과 성별 간의 다툼, 각종 영유아 학대와 살해, 그리고 권력 탈취를 위한 무자비한 학살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는 뉴스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과연 이런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습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장이이거나 정치인, 그것도 아니라면 현실을 읽을 줄 모르는 무능한 바보일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많은 젊은이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자녀를 낳지 않으며 주식에 대박의 희망을 걸거나 아니면 미래 없는 현재에 자신들의 삶을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한순간에 경제적 어려움, 혹은 치명적인 질병, 가족들의 무서운 사고가 우리와 우리 가정에 미칠 수 있는 인생은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어둠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실제로 죽으신 주님께서 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부활하신 사건은 기자가 기사화할 수 있는 사실이었고, 역사가가 기록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의 삶과 소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과연 주님의 부활 사건은 어두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위대한 반전(The Great Reversal) (고전 15:17; 롬 4:25; 마 8:20)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의미를 되짚어봅시다. 주님의 부활은 위대한 반전(The Great Reversal)이었습니다. 반전이란 말은 사람들의 예상을 깬다는 의미이고, 위대한 반전이라고 하면, 아무도 그것을 예상하거나 기대할 수 없었다는 강조가 더해진 표현입니다.

 

주님의 표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도 없이 보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수 차례 들었던 제자들 조차 주님의 부활을 거의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역사상 많은 소설, 희곡, 드라마, 영화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삽입되는 어떤 반전의 요소도 인류 역사에 주님의 부활 사건에 견줄만한 반전은 아닙니다.

 

온 몸에 피가 흐르는 주님께서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흥 종교는 끝장났다고 모두들 생각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은 망연자실하여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안식일 다음날 새벽, 무덤이 열렸고 주님은 죽음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때 주님의 부활 사건이 온 세상에 가져올 파장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과 교회 역사를 통해 그 파장을 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사도행전과 교회사의 그 어떤 일도 이렇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어진 주님의 부활 사건은 대반전입니다. 주님은 당대 유대인들의 기대처럼 이땅에 오셔서 거사를 위해 세력을 모으시고 반로마 독립전쟁을 일으켜 유대를 독립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으시는 방식으로,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사 율법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하게 해결하심으로써,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그 죽음의 의미를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죽으심의 목적이 효력 있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린도전서 15:17).”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살아나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심 이라고도 말씀했습니다(롬 4:25).

 

십자가와 부활은 대반전의 두 중심축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으로, 여자에게서 나심으로써 오셨습니다. 이것은 무한한 낮아지심입니다. 몰락한 유대 왕손으로 오신 주님의 첫번째 침대는 화려한 왕실의 황금 침대가 아닌 말구유였습니다. 그리고 30세까지 무명의 노동자로 사셨습니다. 그후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메시아로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셨던 주님의 공생애 기간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만한 삶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마 8:20).

 

그리고 어느 유월절, 그분은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로 로마 총독의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예루살렘 영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으셨습니다. 이미 무한히 낮아지신 주님은 죽기까지 계속 낮아지셨습니다. 생명의 주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행 3:15).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때,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살아나신 것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현재 속으로 뚫고 들어온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자연 질서를 깨뜨린 기적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의 본래 의도된 상태로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싸인입니다.

 

죄와 악, 무질서, 부조리와 불의, 질병, 고난, 불의의 사고와 죽음 등이 아담의 범죄 후에 세상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주님은 사형선고를 받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써 주님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현재 속에 가지고 오셨습니다. 부활 사건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2. 신자의 소망의 의미와 능력 (고전 15:20)

 

고린도전서 15:20에 쓴 대로,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보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장차’ 말고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우울하고 희망 없어 보이고 불안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입니다.

 

A. 큰 그림을 보게 한다.

 

먼저 주님의 부활은 부활을 믿는 신자로 하여금 큰 그림을 보고 살게 합니다. 지금 사는 삶이 다가 아니라는 인식을 넘어, 인생의 모든 사건을 장차 누릴 부활의 영광과 승리의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기독교가 처음 몇 세기 동안 박해 속에서도 놀랍게 성장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엄청난 전염병이 로마의 도시들을 휩쓸던 암흑 속에서 기독교는 언제나 희망의 원천을 제공했습니다. 신자들이 그 무서운 전염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도 죽어가면서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전염병의 상황을 더 큰 이야기, 우주적이고 영원한 이야기의 일부로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입으로만 읊조리는 고백이 아니라, 이런 큰 이야기를 보게 해주었고 그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 것을 보장해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보장된 미래가 현재로 들어와 있기에, 신자들은 동일한 고통 속에서도 두려움에 매여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은 채,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신자들에게 이런 큰 그림을 가지고 변화된 삶을 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B. 지적 동의만으로는 안된다. (요 20:28)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히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정도의 지적 동의를 가지고 이런 급진적인 삶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의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지적 동의를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실재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저녁에 줄행랑을 쳤던 그 겁쟁이들이 그 만남 후 사자 같이 담대한 자들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을만한 증언들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던 도마가 주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수십년 동안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해 지적 동의만 하며 살아온 분들은 안 계십니까? 한 번도 자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힘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골 1:29)?

 

바른 진리를 잘 배우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참 신앙은 바른 진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에서 더 나아갑니다. 그 진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 진리가 마음의 정서적 습성에, 성품에, 삶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자신이 그 진리에 의해 빚어져야 합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C. 신자의 삶에서 반복되는 반전 (눅 14:26-27)

 

한 가지 오해는 짚고 가야겠습니다. 신자들이 주님의 부활에 근거하여 품는 희망은 소위 인생 역전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 역전을 바라고 현재의 고생을 견디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희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졌더니, 하나님께서 인생 역전의 복을 주셨다는 게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 유사한 반전을 경험합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6–27).” 내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내 십자가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낮아짐과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반전이 너희 삶에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나야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팀 켈러의 말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도 그분의 대반전을 통해 구원받고 변화되려면 각자의 반전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이 권력의 발휘가 아닌 자발적 상실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듯이, 우리도 이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혼신을 다해 완전한 덕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 아니라 극도의 연약함과 무력함과 결핍을 인정해야 한다.

 

그분의 약함과 수욕이 진정한 힘과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듯이, 우리도 회개하고 죄책과 죄를 인정하는 것만이 최고의 확신과 영예 즉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의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받아 주신다는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어떤 선물은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 (『부활을 입다』p.146-147).

 

복음은 반전이고 역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그분이 내가 생각하던 대로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여러분의 믿음을 의심할 것입니다. 반전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은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주님!”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다니요. 이해할 수 없어요.” 또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실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은 하나님이 내가 생각했던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포함합니다. 복음은 역설이고 부활은 반전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그 회심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것 같은 철저하고 온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과한 신자만이 주님처럼 자신의 삶에서 죽음과 부활을 꾸준히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D. 성화의 은혜 (고전 15:31; 눅 14:12-14)

 

죽음과 부활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은 신자를 삶의 구석 구석에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삶이 머리와 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이 죽음과 부활의 반복되는 삶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하는 선택입니다. 바울 사도가 어디서 이 말을 했습니까? 바로 부활장이라고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말을 했습니다. 그가 날마다 죽는다고 말할 수 있음은, 주님처럼 자신도 부활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은혜는 주님의 대반전을 따라 살아갈 때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주님은 잔치를 베풀 때 부자 이웃 보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12-13).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고대세계에서 잔치는 사회생활에서 인맥을 쌓고 호혜적 관계를 맺는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나보다 괜찮은 지위의 사람을 청하여 그에게 베풂으로써 좋은 관계를 맺고 후에 베풂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4:14).” 바로 부활의 때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답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답 없이 이웃을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죽음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한 결정을 그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어떻게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희망과 능력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땅에서가 아니면 영원 속에서 하나님은 기가 막힌 대반전을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E. 깊은 확신 (엡 1:18)

 

“말이 쉽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라는 질문이 올라오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큰 그림에서 우리 인생을 볼 수 있고, 답 없이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부활이 주는 희망은 근거 없는 주관적 바람과는 다릅니다.

 

만일 우리 희망의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것은 주관적 바람에 지나지 않겠지만, 하나님이 우리 희망의 대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희망이라기 보다 깊은 확신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실제로 헬라어로 ‘희망하다, 소망하다’라는 말은 ‘깊은 확신’을 의미합니다. 이 희망은 주님의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부활을 통해 보증된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입니다. 사도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로써 이미 현재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보아야만 우리는 죽음과 부활의 반전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 희망이 선명하게 경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 처럼 현재에 모든 것을 걸고 살 것입니다. 신자가 다르게 살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갚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을 것을 보고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그것을 볼 수 있기에, 바울 사도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 눈이 밝아져 부르심의 소망을 보게 될 때,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가장 바보 같고, 어리석은 결정도 하게 됩니다. 부활의 희망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절망과 불안, 두려움이 가득한 어둠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언제 어떤 일이 나와 내 가정에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고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밝히 보면,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그 나라의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되고, 절망의 순간에도 참되고 영구한 희망이 마음에 용솟음칠 것입니다.

 

3. 교회, 희망 공동체 (히 11:1; 갈 5:6)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를 둔 희망 공동체입니다. 교회에서 희망을 제거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본질은 소망이며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눈 앞의 증거처럼 보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 그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눈에 비친 교회는 바보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 그리고 결핍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자신에게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팀 켈러의 말입니다. “당신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는 만큼만 믿음이 당신의 삶에 사랑으로 분출된다.” (『부활을 입다』p.160).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지만, 은혜의 절대적 필요를 자각한 사람들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경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는 만큼, 눈먼 사랑, 답 없이 인애를 베푸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상을 펼치시고 교회를 먹이십니다.

 

당신의 몸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게 하십니다. 떡과 포도주를 통해 말도 안 되는 그 사랑, 그 은혜를 맛보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상에서 성찬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그렇게 교회는 절망하는 세상에 참된 희망의 빛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오늘이 중요하다 /고전15:12-34/ 유기성목사

2021-01-25 15:31:18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온라인 생방송으로 예배하는 일이 당황스럽지요?

그러나 주님만 주목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이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부활신앙이 분명해야 할 때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부활 신앙이 분명하면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때 삶이 달라집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집니다. 이기지 못할 시련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정말 믿고 있습니까?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기는 했습니까?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2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

:13에서 죽은 사람이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참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복음도 다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14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15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19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렇구나’ 하고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지난 8월 19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청소년 연합집회 때 즉흥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토크 쇼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있었던 질문 중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이 청소년들에게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은 청소년들에게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은 쉽게 이해가 되고 믿어지나요? 지성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믿고 누리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 지성인도 믿지 못할 수 있고 어린아이도 믿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이 믿어지면 성경이 실제가 되는 삶,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일을 행하실 분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장례식 때만 듣고 말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가면 되지, 꼭 부활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끝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주님께서 재림해 오실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도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다스리는 것입니다.

 

:24 그 때가 마지막입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이 세상에 임할까?’ 믿어지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앞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 전부터 있고, 지금도 있고, 영원까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전체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다만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예외로 남겨져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마귀의 말을 따랐기에 한시적으로 지구는 마귀가 왕 노릇 하는 곳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지구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와 교회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 왕이라, 생명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육신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솜씨가 담겨 있고 우리 형상에는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세상이 죄로 인하여 악이 장악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세상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계 11:15에서 분명히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약속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도 그 나라에서 살며 다스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결국 멸망할 것이고 우리 몸이 부활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의롭게 살고 사랑하며 살고 정직하게 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31에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사명의 삶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는 맹수와 싸웠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고 우리가 죽으면 끝이라면 그처럼 고난당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환란과 박해를 당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행 14:2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이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우리가 부활할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우리가 부활할 것이니 환란과 박해를 받을지라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세계 한인 선교사 대회에 가서 모인 선교사님들 가운데 더 고생스런 곳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가장 높임을 받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생스러웠던 일들이 자랑스러운 것을 보았습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 지금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6·25전쟁 때 죽어간 무명용사들, 지금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나라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독립유공자와 나라 위하여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고 보상하는 사업을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죽으면 끝이다’ ‘가족들 고생시키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활이 없기에 개인주의와 이기심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부활하여 그 나라에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우울해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며 “힘들어요 빨리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헌신과 고난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6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오늘의 삶이 달라집니다. 아무렇게나 살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원수도 용서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눈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주위에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누가 있는지 찾아보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살아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구별됩니다.

한국 사람은 일본에 가도, 미국에 가도, 아프리카에 가도 한국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감사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불평불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고 거룩하게’ 삽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될 일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결론은 압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고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우리는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 열매가 없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자신의 때에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헛수고 아닙니다.

심는 자, 물주는 자로 만족합니다. 우리가 마무리하지 못하여도 누군가 이어서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먼저 기도하니 하나님의 나라 영광을 봅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동행속회 통하여 이번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분명히 훈련하기 바랍니다.

 

부활 신앙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 사랑만 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믿음 /고전15:35-58/ 유기성목사

2021-01-26 02:09:50

 

코로나19 확산으로 몸도 마음도 너무나 힘든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주님과 동행하여야 합니다.

 

목회자들을 만나면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교회를 떠날 교인들이 많을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정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정도 시험에 무너지는 신앙이라면 어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며 구원일 수 있단 말입니까?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구분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편안하게 모여서 예배하기만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진정 생명을 가진 성도가 맞는지 점검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점검해야 할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고 우리의 몸도 부활함을 정말 믿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이냐고 물었습니다.

고전 15:35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

사도 바울은 씨와 나무를 비유로 대답했습니다. 씨는 아주 작고 볼품이 없습니다만 그 씨에서 나온 꽃은 너무나 아름답고 나무는 엄청나게 큽니다.

 

부활의 몸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썩지 아니하는’(:42) 몸이며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43)이며 ‘신령한’ 몸(:44)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을 때, 그 몸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49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한 사람이 들어갑니다. 현재 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50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합니다.

 

:52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믿음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꿉니다.

‘죽으면 끝이다’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염세적인 생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난 왜 이 모양일까?’ 하는 비교의식, 열등감, 좌절감이 다 사라집니다.

 

주일 예배 후 교인들과 대화 모임을 가졌을 때, 한 젊은 남자 집사님이 ‘어린 아들에게 정신지체 장애가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말씀하면서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아니신가요?” 그 질문에서 그 집사님의 마음이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어 대답 드렸습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 맞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을 다 고치시지 않고, 불치의 병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경우입니다. 몸이 건강하여 오히려 영혼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병이 있고 장애가 있어 영혼이 복되게 된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날에는 장애인도 다 온전한 몸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부활은 장애인에게만 복음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죽음을 향하여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55) 조롱 섞인 말로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한없이 비굴해지고 무력해지고 슬퍼지고 연약해집니다. 베드로가 사랑하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이유가 죽음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우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인지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믿음을 가졌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신하면 예배에 참석하도록 권하고 기도와 말씀 읽는 생활을 가르치고 교회 봉사를 하게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나 고난이나 순교는 금기어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고난을 당하거나 순교해야 한다면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지금과 같은 시험과 환란이 닥칠 때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 때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순교를 의미했습니다. 박해를 받고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처음부터 죽음으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었고 성령의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신앙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1944년도에 만 47세 나이로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 때가 지금 제 나이보다 훨씬 이른 나이였음에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산정현교회에서의 마지막 설교 제목은 [나의 다섯 가지 기도 제목]입니다. 그 설교의 첫째 대지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였습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義)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 그러나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힌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그러니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니다.”

그 설교 마지막에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들어야할 설교입니다.

지금은 주기철 목사님 당시와 같은 순교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 지금 우리의 신앙이 다른 것일 수 있겠습니까?

 

왜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 온갖 시험이 많고 사회의 구설수에 오르내립니까?

왜 성도들이 나약하고 삶에 거듭난 변화의 증거가 없는 것입니까?

부활 신앙, 죽음을 이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 교회 목사로 나치에 순교당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나를 따르라] (The Cost of Discipleship)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십자가는) 시작이다. ...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부르실 때, 그분은 그 사람에게 ‘와서 죽으라’ 하신다. … 예수님의 모든 명령은 죽음으로의 부르심이다, 우리의 모든 애정과 욕망과 함께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부르심이다.

 

… 제자로의 부르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의미한다. … 고난은 진정한 제자도의 표식이다. … 우리가 만약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으며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귐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며,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멈추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죽음도 이기는 순교 신앙, 부활 신앙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이 왜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중국의 워치만 니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에서 떠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 2:20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 맞다. 내가 이미 죽었구나! 죽은 자만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죽은 사람이지" 그러고는 아래층의 주방 아주머니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워치만 니라는 사람이 죽은 것을 아세요? 그 사람은 이제 죽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고백하였습니다." 워치만 니는 죽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부터 놀랍게도 그의 삶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뒤틀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죄악이 우리를 이길 것 같고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몸도 부활할 것이라고 증거한 이유가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5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혹과 핍박이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도 이기는 권세 있는 믿음을 가지려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 신앙을 가진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고전 15:8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도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질문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영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5학년 아이가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다가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듣고 예수 동행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보다 게임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예배드리기 싫어하는 아이인데 하나님이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을까? 그리고 내가 간절히 기도하면 나를 만나

 

주실까? 이런 생각을 해서 이번 주는 게임을 하지 않고 기도시간을 늘리려고 한다.”

얼마나 사랑스런 결단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을까? 내가 간절히 기도하면 나를 만나 주실까?’하는 이 아이에게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그래, 주님이 너를 만나주실 거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나도 죽음을 이기는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매일 일기를 써 볼까,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석해 볼까 하는 이에게 주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19 확산으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며 살게 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몸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적당히 살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도 이기는 부활 신앙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살아계신 주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신가? /고전15:17-26/ 유기성 목사

2016-08-13 11:44:59

 

“하나님은 정말 능력의 하나님인가?”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란 확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목사의 아들이기에 친구들이 자꾸“하나님이 정말 살아있다면 증거를 보여 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난감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왜 시원스럽게 기적을 행하여 저들의 입을 닫아 버리지 않으시나 답답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친구들에게 전도하지 못한 핑계거리였습니다. 가난 앞에서, 질병 앞에서, 독재 정권 앞에서 제가 믿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 아닌 것 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병을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경험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늘 실망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왜 시원스럽게 기적을 행하여 그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보여주지 않으시는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 마귀는 예수님께‘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하면서 시험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라면 기적을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며 마귀를 내어 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기적을 보고서 믿으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기적을 행하여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도 기적을 행하신 일이 여러 번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는 굳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기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데는 마귀가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능력은 마귀들도 얼마든지 흉내내는 능력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마귀가 이런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성경은 이적, 표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마귀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능력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정말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농산물 추수는 둘로 나뉩니다. 봄에는 보리나 밀 등 곡식을 추수하고, 가을에는 포도 무화과 올리브 대추야자 등 과일을 추수합니다.

 

맥추절은 첫 추수인 곡식 추수를 시작하면서 지키는 감사절기로서 곡식 추수가 마무리 될 때까지 초실절 칠칠절 오순절 등으로 지켜집니다. 가장 중심되는 절기는 첫 열매를하나님께 드려 감사하라는 초실절입니다.

 

그러나 맥추절은 단지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의미만 가진 절기가 아닙니다. 훨씬 놀라운 영적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비밀이 고린도전서 15장 20-23절에 나옵니다.

 

고전 15:20-23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라고 한 구절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열매로 감사하라고 명령하신 진정한 의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맥추감사절의 중심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해도 될텐데 굳이 부활의 첫 열매라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도 주님 재림 때 다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나중에 다 부활할 것이라는 것만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더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롬 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의 생명이며 주님이 되셨으니 우리도 또한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이며 우리와 한 몸이 되셨다는 확실한 증거로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맥추절 절기 마지막 날인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는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나누는 확실한 분기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 선지자, 제사장과 같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하나님의 성령님이 임하였지만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120명 모두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이 폭포수같이 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새 시대가 열렸고, 새로운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성령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긴 부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비교할 수없이 큰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죽어도 언젠가 다시 살 것을 말하는 것만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이 다 꺽어졌다는 말입니다.

 

마귀의 권세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누구나 절망입니다.

 

지난 주간에 유명한 심장 전문의의 글을 읽었습니다. 메멧 오즈(Oz·51)라는 외과의사인데, 미 컬럼비아대 의대교수이고 2005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심장수술을 집도했었고 '오프라 윈프리 쇼' 건강 코너를 맡았었고 TV '닥터 오즈 쇼'를 진행하고 있고, 국내에도 소개된 베스트셀러 '내 몸 사용설명서'의 저자이기도 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불시(不時) 수술이 많아 수도승처럼 살았답니다. 흰 쌀·빵·설탕과 담배는 입에 안 대고, 술은 이틀에 딱 한 잔만 했답니다. 그가 나이 50이 되어 반(半)세기나 세상살이를 한 기념으로 건강진단을 받아보았답니다.

 

그런데 자신의 건강만큼은 자신하였던 그가 검사를 담당했던 친구 의사로부터 "의심스러운 용종(polyp)이 보인다."는 진단 결과를 듣고서 교만이 꺽어졌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내게 더 허락된 삶이 40년일까, 1년일까?' 하는 생각이 났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만 생각이 났답니다. '아내한테 뭐라 할 것이고, 스물다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 자식 넷한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시청자들한테 사실대로 고백해야 할까. 내가 의대에서 배운 건 위기를 당한 환자를 고치는 것 뿐이었지, 죽음에 직면할 이들에게 해줘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무엇을 공부했었나?

 

' 비로서 자신의 환자들이 그동안 느꼈을 공포와 분노를 알게 됐다고 자신이 너무나 교만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죽는 것이 두려워 마귀의 종노릇하고 삽니다. “죽을래?” 하면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더 이상 마귀의 종노릇, 죄의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다는 말은 “죽어도 좋다.”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죽는 것이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신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이 임하였음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올 여름 청소년 수련회 때문에 교회 안에 크고 작은 영적인 파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8월 7일부터 10일까지 강원도 사북읍으로 수련회를 갑니다. 이번 수련회 때 청소년들이 사북읍 일대를 세수대야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순례전도를 하려고 합니다.

 

[종의 마음] [예수를 위한 바보]라는 책을 쓰신 데이빗케이프목사님이 어느 날 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발을씻겨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황스러웠지만 순종의 걸음을 내디디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였던 것처럼 순례전도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젼을 이해하고 우리 청소년 전도팀을 받아줄 현지 교회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목사님들도 우리의 전도 계획을 듣고 부담스러워하였습니다. 수련회를 한 달 정도 밖에 남겨두지 않은 지난 주간 사북읍의 한 목사님께서 반응해 주셨습니다.

 

그 목사님을 만나러 사역자들이 답사하러 갔던 날, 사북의 첫 느낌은 소돔과 고모라였답니다. 국내 유일의 내국인 카지노 도박장이 있는 곳입니다. 목사님은 우리 이야기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셨습니다. 그 교회 뒤편 언덕 위에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곳에서 도박 중독자가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그 후 이 사북 땅에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기도하고 계셨답니다. 우리 교회 청소년국 사역자들에게 여기 청소년들이 발씻는 전도를 할 장소가 있다고 하며 데려간 곳이 카지노 출입구였습니다. 사역자들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고, 처음에는 겁도 나더랍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탐욕의 영에 사로잡혀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곳에 다음 세대는 예수의 이름으로 발을 씻는다. 하루 종일 단 한 사람이라도 발을 닦겠다고 신발을 벗는 사람이 있다면 기적이 아닐까? 너무 놀라운 메시지라고 생각이 되었답니다.

 

주님께서 주신 마음을 우리 교회 청소년국 예배 때 나누었답니다.‘재미있는 수련회가 아닐 수도 있다. 잠자리도 불편하다. 그리고 우리는 카지노 앞에서 사람들의 발을 씻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라고 믿어지는 사람은 함께 가자.’140여 명 학생들이 이 일에 마음을 품었답니다.

 

8월 7일부터 8월 10일까지 우리 청소년들이 사북으로 갑니다. 소돔과 고모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엄재현 목사님은“저는 진리의 칼 끝이 원수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 칼끝은 바로 우리 청소년들입니다.

 

시편 23편에“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원수의 목전에 우리 아이들만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이런 믿음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죽음도 결코 성도들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좌절시키고 낙심시키고 포기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부흥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모든 성도의 능력입니다.

 

가정 문제, 재정 문제, 건강 문제, 별의 별 문제가 많지만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정직할 수 있습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무엇 보다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지난 주간 최종국선교사님이 쓰신 [사랑합니다]하는 책을 받아 보았습니다. 아직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연로한 부모님, 가족, 친구들에게 선물할만한 책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어느 날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수술을 거부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퇴근하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말을 하려니 많이 망설여지고 또 몹시 쑥스러웠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참 존경스러워요. 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제가 많이 배운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그래, 고맙구나! 아들아, 내가 널 많이 사랑한다.”

 

아버지도 그 말을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꺼내셨는지는 그 표정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뜨거운 눈물 두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믿지 않으셨었는데, 교회에 나가 구원과 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듣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오해로 별거에 들어갔던 어머니와 극적으로 화해하고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동적인 세례식이 치러졌습니다.

 

세례를 받는 아버지는 울고 계셨습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저 무심한 양반이 그래도 눈물이 있었구나.”

 

아버지는 신앙 안에서 조용하고 담담하게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정리한 후 아들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신앙 간증을 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저 착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죽어가면서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았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눈을 떴습니다.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분, 그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이제 부끄럽지만 아버지 앞으로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 모든 부끄러움과 고집스러움을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으니, 오직‘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만 가슴에 새기고 가려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당하셨고, 나의 모든 죄를 다 갚아 주셨기에 오직 그 분에 의지해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려 합니다.”“이 땅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빠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누구나 죽음이 오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이 오히려 축복의 시간이 됩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음도 우리를 꺽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 까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기에게 돌 던지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 모든 이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4/ 곽선희 목사

2014-11-26 15:44:45

 

장자옥 교수님이 쓰신 「마지막 남은 생명」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그 책의 사건 하나하나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군 형무소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방에서 총기를 난사하다가 민간인들을 몇 사람 죽였습니다. 그 죄로 사형에 처하게 됐고, 또 한사람은 월남전 참전 때 일시적으로 흥분을 참지 못해서 자기 동료를 죽였기 때문에 역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형 집행날짜가 가까올 때 마지막 소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소원은 한번 고기를 실컷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먹고 싶던 것 한번 실컷 먹고 싶다고…….

 

그러나 누구도 그의 사정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마지막 먹고 싶던 것을 먹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사식을 넣어주는 사람도 없고……. 마침내 그는 자기 몸을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선금으로 1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먹고 싶었던 고기를 먹었습니다. 실컷 먹어보려고 했는데 3만원어치 밖에는 못 먹었습니다. 그를 마주보던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야, 그 참 맛있겠구나." 대답했습니다. "맛은 무슨 맛? 내 몸뚱아리를 팔아서 먹는 건데……."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고, 그 후에 그는 형장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욕심을 채우겠다며 사는 것이 이 사형수가 고기 먹고 싶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을 모르고는 사실 입맛도 없는 겁니다. 아직도 입맛이 있는 것처럼 뭐 소위 말하면 엔조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사실 철없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생이 이생뿐이라면 우리가 산다는 게 이 사형수가 먹고 싶은 고기 먹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여기에 상징적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생 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하찮은 일입니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얼마나 맹랑한 얘깁니까?

 

그런데 다른 한 사형수는 자기 친구가 이렇게 하는걸 보면서 '아이구 그거 먹으면 뭘 하나? 한 끼 먹으면 뭘 하고 안 먹으면 뭘 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를 다 뒤져봅니다.

 

15,000원이 있었어요. 어느 날 교회성가대원들이 와서 위로한다고 복도에서 찬송을 부르는걸 보았어요. 이 사형수가 나가서 15,000원을 내놓으면서 "나는 이제 죽습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인데 당신들 좋은 일에 써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마침 형무소의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식을 앞두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그 15,000원을 가지고 강대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헌당식 날 설교하는 목사님이 이 강대상은 지금 여러분 가운데 앉아있는 한 사형수가 죽기 전에 마지막 가졌던 것을 다 내놓아서 그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발표하게 될 때 모든 사람이 다 눈물을 흘렸어요.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이것이 법무부에 그렇게 전해져서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바꾸어졌답니다.

 

요한크리스토프 아놀드(Johann Christoph Anold) 라고 하는 분은 「두려움 너머로」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죽음은 "결정적 과제"라고 "결정적 필연성"이라고……. 여러분, 요새 웰빙이니 해서 뭐 보약도 먹어보고 운동도 하고 발광을 하면서 오래 살아보겠다고 버티지만 웬만하면 이제 그만 합시다.

 

다 소용없으니깐. 그 조금 더 살면 어떻다는 얘깁니까? 그냥 살다 그냥 갑시다. 그리고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사후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되요.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죽은 다음 생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사람이 안 죽는다고 말한 적 없어요. 단,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를 예수님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서른세살에 가십니다. 생이 이생뿐이라면 예수님이야말로 정말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잘못 산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해주는 핵심은,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 핵심은 죽음다음이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성경을 똑바로 봐야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잘살고 성공하고 소원성취하고 그런 지엽적인 얘기 너무 관심가지지 마세요. 그저 성경은 똑똑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나와 같이 고난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와 같이 영광을 누릴 것이다"라고. 언제나 사후의 세계, 영생의 세계를 말하고 있죠.

 

거기다 초점을 맞추었지 이 땅에서 뭐 어떠하고 어떻고 관심 없네요. 성경 똑바로 봅시다. 아직도 기복사상에 매이고 세상에 매이고 뭐 그거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이지 조금 나으면 어떻고 덜하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문제요? 수명이 길면 어떻고 짧으면 어때요? 그거 아니올시다. 아주 냉정하게 생각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이상재 장로님께서 독립운동 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옥중 생활할 때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옥중에 있으면서도……. 그런데 어느 일본인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

 

자신이 알기는 인도의 간디는 평소에 100세를 산다고 늘 말했고 누구도 얼마, 누구도 얼마, 누구도 얼마, 그 유명한 사람들이 오래살기도 했고 오래 산다고들 얘기했는데 "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생각입니까?"

 

이상재 선생님이 감옥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가운데 하시는 말씀 들어보실까요? "사람이 한번 났으면 영원히 사는 거지 죽기는 왜죽어?"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의 외침이에요.

 

"사람이 한번 났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지 죽기는 왜죽어?" 이상재 장로님의 호언장담입니다.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안 죽는다고 말하지 않아요. 성경은 이적을 많이 말하고 있어요. 나사로도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나는 그래 생각해요. 그 사람 괜히 장례식만 두 번했지 별거 아니에요. 뭐 누가 살고 누가 살고 누가 뭐 병 낫고……. 예수님이 많이 이적을 행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력을 느낍니다마는, 예수는 자신도 서른세 살에 죽었어요. 성경에는 뭐 구백세 살았다는 사람의 얘기도 있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녜요. 성경은 부활을 말하고 있어요. 부활은 곧 생명의 변화예요.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부활이라는 말과 변화라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해요.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하리라. 변화! 생명의 변화를 생각해야 되요. 이게 영생의 뜻입니다. 죽음이 말하는 뜻을 알고 부활이 말하는 뜻을 알면 그 사람은 바른 신앙의 사람이에요. 죽음은 무궁무진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부활이 말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걸 알아야 사실은 오늘도 바로 살게 되고, 오늘을 살며 영생을 살게 되고, 영생으로 이어가는 오늘을 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는 이 말씀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귀한 복음을 주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이 계시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녜요. 만백성의 죽음, 예수를 믿는 사람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이 십자가가 우리 생명의 계시인 것같이 부활이 또한 계시적 사건이에요. 한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그런 기적을 말하는 게 아녜요. 그런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지 마세요. 그런 사건이 아녜요.

 

이건 한 사람에게 있었던 죽음과 한 사람에게 있었던 부활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녜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대표로 죽으셨고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대표로서 첫 열매의 테이프를 끊은 거예요.

 

그런 귀중한 사건입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에요. 이것을 계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부활을 무슨 낭만적인 얘기로 생각하지마세요.

 

여러분, 생명이란 네 단계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식물입니다. 요새 여기저기 벚꽃이 많이 피었어요. 벚꽃은 참 신기해요. 왜냐하면 꽃잎이 어디서 나왔는지, 피어나는데 아직도 나뭇잎도 없잖아요. 이게 특징입니다.

 

파란 나뭇잎은 전혀 없는데 꽃만 활짝 피니까 그 벚꽃이 참 아름답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워요. 일부러 벚꽃 있는 길을 차를 몰고 가다가 내려서 한번 쳐다보면 너무너무 신비로워요. 고목나무처럼 다 말라빠져서 '에라, 이제는 아무데도 못쓰겠다' 싶은 그런 나무에 어디서 준비됐다가 그렇게 꽃잎이 나옵니까? 너무 신기하잖아요? 식물의 생명은 신기합니다. 정말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식물적 생명입니다. 그 다음에 한 단계 높은 생명이 있죠. 동물적 생명. 이 또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동물이 태어나는 것, 암수가 그 멀리서 만나서 생명을 잉태하고 또 그 생명을 키우는 것 보세요.

 

여러분, 다 보셨겠지만 나도 들여야 보고서야 감탄을 한일이 있어요. 개가 강아지를 낳았거든요. 이게 아직 눈도 못 떴어요. 눈도 뜨지 못한 이 몸뚱어리가 벌벌 기어들어가서 그 어미 젖꼭지를 물고 빨잖아요. 가만히 보자하니 사람보다 낫대요.

 

사람은 갖다 물려도 못 빠는데, 이건 어떻게 눈도 못 뜬 게 찾아 들어가서 딱 빠는데, 그것도 자기 번호가 있어요. 고놈은 고것만 빨아요. 세상에 참 신기해요. 이걸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어떻게 이걸 물리적으로 생리학적으로 설명하겠어요? 신비한 거예요.

 

신비한 생명력이 여기 있어요. 동물 세계의 생명의 위대함 이예요. 그러나 그 위에 한 차원 높은 게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동물적이면서도 또 동시에 영적입니다. 이성이 있고 영이 있고 영의 지배를 받는 이성, 이성의 지배를 받는 육체, 그 본능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고귀한 생명 이예요. 고귀한 존재 인간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식물의 생명 동물적 생명 인간의 생명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한 단계 높은 생명이 있어요. 바로 그게 그리스도적 생명 이예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 그 무얼 말하는 거냐? '너희도 나와 같이 될 것이다. 너도 나와 같이 변화될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 줄 알았지? 봐라. 이렇게 부활했느니라.' 그리스도적 생명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라고 '너희도 나와 같이 될 것을 내가 보여주노라.' 여기에 부활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첫 열매 다음엔 우리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이 부활절에 가서 큰 실수를 많이 해요. 뭐냐 하면 소위 '영혼불멸설' 같은 겁니다. 이걸 부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녜요. 어떤 사람은 '도덕적 부활'을 말해요.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그거 아녜요. 낭만적으로 윤회적으로 생각하는 것, 곤충이 다시 회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다 아니올시다. 식물이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도 아니올시다. 자, 조그마한 표적이 될 수는 있으나 아니올시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만 부활입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소설이 있죠? 아, 이게 기독교적인 뭔 줄 알고 열심히 읽어보고 아무리 읽어봐도 이거 부활이 없네요. 그건 사랑의 부활을 말할 뿐이지 기독교적 생명의 부활을 말하는 게 아녜요. 부활이란 단어의 개념을 우리 기독교만이 가지는 것을 분명히 확실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만 부활입니다. 이것은 이론도 추상도 철학도 감상도 아녜요. 사건이에요. 이걸 보여준 것이 예수부활 사건이에요. 예수부활, 이건 사건이에요. 역사적 사건이에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활했다. 너도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첫 열매라고 합니다. 이것이 샘플 이예요. 이것이 모본이요 이것이 표본 이예요. 이것이 예언이요 계시란 말입니다. 확증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믿고 이 은혜에 사는 사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어요. 이 단계에서 저 단계로 넘어가니까……. 그 순간에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아요.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내게만 아니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앞서가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니라." 첫 열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의 문을 열었습니다. 아담의 후예가 되는 것은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하는 것은 인격적이고 신앙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붙은 자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같이 그리스도에게 생명적으로 접하여 연결되어서 생명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사람,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사람, 이제 마지막 나팔과 함께 다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다.

 

여러분,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 뒤에 우리가 있습니다. 곧 따를 것입니다. 그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볼 때 옛날에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게 아녜요. 이건 우주적인 것이고 바로 나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거예요.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이 은총 안에 오늘을 내가 살아야 합니다. 부활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영생을 소유하고 오늘을 삽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저희들을 부활생명으로 확정해주시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세계에 저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영광된 몸을 바라보면서 그 날의 아침을 지향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부활신앙을 새롭게 하여 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고 주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죽음을 이기신 예수 /고전15:1-26/ 옥한흠 목사

2014-11-11 09:33:20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 도께서

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 니다. 할렐루

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

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

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

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 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

(老)교수, 이제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

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

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의표를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

 

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1998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 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 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만 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랑의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서초

구의 전체 인구가 40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의 60%에 해당합니다. 1년에 서초구 인구의 60%

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의교회

만 해도 하루에 한 명 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1년에 365명이 세

상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의교회 교인 전체로 따지자면, 거의 100명에서 120명중에 하나가 날마다 세상을 떠난다

는 이야기 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우리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진지하게 직시해야 될 실체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낍니까?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덤을 갖고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

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 입니

 

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고상하게 대

답을 하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는데 다 이해한 체 한다면 본심을 숨긴 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

던 예수'는 굉장히 감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정말로 옥 목사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마음이 끌렸는지에 대하여 그는 퍽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은근

 

한 바람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

간적인 바람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

니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해 안에 자기 친구 셋을 잃은 슬픈 이야기를 하

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은퇴를 한 사람 인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를 타려다가 '윽' 하고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

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친구는 40대 부인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교

 

회에서 모이는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길을 드라이브 하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유조차가 앞에 있는 차를 못 봤던지 들이받아 차에 화재가 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건장한 친구인데,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졸지에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셋씩이나 잃어버리는 기막힌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되자, 그의 마음 속에서 죽

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 죽음이 마지막 이라고 하는 말에 저항하고 싶

고 거부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마음에 많이 남아있

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 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

여 워하던 어린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

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 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

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

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

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

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

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 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

 

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 백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

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한 예로 시편16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

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빗대어서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

스도가 죽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기가 부활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가기 싫

어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다에 빠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

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고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큰 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 인자도 무덤에서 사흘 동안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요

 

나가 사흘 후에 살아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나의 사건마저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신 것입

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자

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구원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대

단히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

습 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

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 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

 

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

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

 

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

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섹을 향해 가던 사

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

에 거꾸러졌 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 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 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

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다음부터 바울은

숨만 쉬고 있었지 제 정신이 아니었 습니다.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

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

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

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

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 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

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

 

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

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입니

다.

 

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

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확실

하게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

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혜택에 대해 논하라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믿도록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여러 명

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나사로라든지, 이렇게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었다

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고

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

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

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

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

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

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입니다. 성

 

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이 진리를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숭맹숭하다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매료되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

복한 사람인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이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빅 뉴스 가운데 제 1면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자

로 나올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죽은 자는 살 수 있다.' 하는 뉴스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부활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부터 19

절까지의 내용 중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

믿음도 헛되고'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

 

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했다면 우리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떠났더라도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라

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서 있을지 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바

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

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

 

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

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

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벌써 더위 때문에 힘이

드는데 왜 여기 와 앉아 있습니까? 모두 다 오염이 되어서 갈 때도 마땅치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연인과 함

 

께 꽃향기도 맡고 아름다운 인생의 꿈도 서로 나누면 좋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

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기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

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

려워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괜

 

히 재미있는 일도 못하고 한 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

히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

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

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

장 복 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언급한 성경이 17권이나 되고, 나머

지 10권은 간접적으로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빼고서는 신약의 말씀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 마

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준다.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절부터 24절까

 

지 보면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

들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

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

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흔들면서 요제를 드립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드리

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

엇을 의미합니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

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

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 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

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 구원입니다. 다시 말

하면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이 아

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

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 구원을 주십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습니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

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 다리

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않습니다. 죽음이

불쾌한 것이긴 하지만 저주스러운 것으로보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에 종지부를 찍

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마침표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배짱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놓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 하시지 않는 것입

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지금 여든 세 살 정도 되십니다. 그분이 쓴 글을 최근에 보았더니 참

인상 깊은 말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주소를 옮긴 것

 

이라고 합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

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이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죽음은 영

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

 

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

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

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

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

부 수리중인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

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입성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

은 일일지 모릅니다. 얼마나 비통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허무합니

까?

 

사랑의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 남편이 30대에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죽

어가고 있었습다. 라고 그랬더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안 갔습니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

 

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는 것,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며칠 전에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목회자의 사표가 되는 어른이었 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빈소 앞

에 가서 한참 동안 앞에 있는 큰 사진을 쳐다보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사진은 아마 그분이 한 80세 정도 되었을 때 찍은 것 같았습니다. 깊게 파인 주름살이

잔뜩 덮여 있는 얼굴, 이목구비의 모든 균형이 다 어그러진 얼굴, 생명의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얼굴, 이것을 쳐다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않는다

면, 이런 마당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정말 허무하네, 허

무해.' 그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물은 안 나오겠지만 당장 이

 

런 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허무하네. 빌어먹을 세상, 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죽어야지. 마지막이 저 모양인데 잘 살겠다, 의롭게 살겠다,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목사님의 그 사진을 보면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엄청난 미남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

시겠지.'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

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반드시 부활할 것

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눈물을 쥐어짜면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

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

상합시다.

 

또 우리 자신이 부활할 그 날을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서 우

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관한

가능성을 길게 변증한 사도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57절 보십시

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

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

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

각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하라.'는 이야기입

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

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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