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2:1-11/ 곽선희 목사
2014-11-26 17:15:08
이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빛의 사자로 둔갑한 사탄이 사막에서 기도하고 있는 교부에게 다가가서 그를 시험하게 됩니다. 사탄은 말했습니다. 빛나는 천사의 모습을 하고 다가가서 그를 유혹합니다.
"나는 가브리엘 천사다. 하나님이 내게 메시지를 주어서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네게 왔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교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시 잘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보냄을 받았겠지요. 저는 천사의 방문을 받을만한 사람도 못되고 아무런 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이 사탄의 방문을 물리쳤습니다. 사탄은 실패하고 그 자리를 떠나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겸손한 자는 사탄인 나도 유혹할 수 없다." 여러분, 겸손한 자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반대로 교만하면 사탄의 시험에 그대로 빠져듭니다. 이 귀중한 진리를 다시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고민이 있습니까? 근심이 있습니까? 때때로 좌절하십니까? 실망하십니까? 그리고 낙담하십니까?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교만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빠져드는 것이에요.
그럼 이 모든 문제 해결의 마스터키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합니다. 고민과 근심과 좌절과 실망과 낙담을 극복할 수 있는 마스터키는 딱 하나예요. 겸손입니다. 겸손하면 이 모든 것 하나도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걸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도 못하고,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많지만 감사하지도 못하고 왜 이렇게 무능하고 왜 이렇게 능력이 없을까하여 알고 보면 그것도 교만하기 때문이에요. 겸손이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교만한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뭘 가졌다하더라도 더 가지고 싶으니까, 아니 더 못 가진데 대한 불만이 있으니까 교만한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런가하면 교만한 사람은 한 평생을 통해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합니다.
끝없는 교만과 교만이 주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불만과 원망뿐입니다. 그런고로 겸손한 사람은 겸손한 만큼 감사할 수 있어요. 겸손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자기를 낮추는 순간 모든 것이 감사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합니까? 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해야 될 사람을 왜 용서하지 못합니까? 왜 그렇게 원수 맺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교만하니까. 교만해서는 전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면 쉽게 아주 저절로 용서할 수 있는데 교만한 자는 용서할 힘이 없어요. 우리는 때로 분열을 슬퍼합니다. 이견을 괴로워합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왜입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 겸손은 복입니다. 아니, 겸손은 은사입니다. 내 스스로 겸손할 수 있다면 그건 큰 축복이구요 내가 겸손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비상조치를 취해서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더라도 겸손을 얻었으면 그 사람 복을 얻은 거예요. 다 잃어버렸더라도 겸손만 바로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에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성공할 때 버렸던 것을 실패하고 나서야 찾습니다. 건강할 때 버렸던 사랑을 병들고 나서야 아쉬워합니다. 그렇다면 실패와 병드는 것 그것 자체를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모처럼 병들어서 모처럼 실패해서 제대로 제자리에 돌아가서 겸손을 찾았으면 그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복중의 가장 큰 복이 겸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말합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어요.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를 낮추고 낮추시기 위한 비상조치였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한평생 있었어요.
그래서 낮추고 낮추어서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은혜가 은혜 되고 그 은혜가 능력이 되고 사명이 되어서 자신에게 영광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겸손은 모든 은사 중에 최고요, 복 중의 최고의 복이라고 사도 바울은 그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해야 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피곤에 지쳐서 쓰러지는 것 그 모든 것이 교만 때문입니다. 왜 사는지 알 수가 없고 늘 피곤하고 좌절에 빠지는 그 깊은 곳의 원인이 무엇일까? 여러분, 겸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신을 정비해보세요.
여러분, 자신을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에요. 겸손한 사람은 그리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교만하다. 나는 교만하기 쉬운 사람이다. 그저 조금만,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또 고개를 드는 사람이다. 나는 교만하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써 그는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암시된 내용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을 받는 교회요, 당대의 가장 높은 칭찬을 받는 교회지만 그래도 그 교회 안에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가 좀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염려하면서 그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2절로부터 4절까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2-4)." 하나 되지 못하는 것,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해법은 바로 겸손에 있다고 말씀하는 가운데, 완전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2:5)" 품어야할 마음, 예수의 마음은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입니다.
겸손은 심리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의 감상이 아닙니다. 후회의 눈물도 아닙니다. 겸손은 행동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입니다. 겸손은 행동이다. 그것이 바로 Incarnation,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을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소위 사도 바울의 기독론의 성육신을 담은 대단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겸손을 네 단계로 말합니다. 보세요. 첫째는 '에케노센', 영어로는 empty 곧 텅 비었다는 의미입니다. 비운다, 비워버린다, 마음을 비워버렸다, 자기 자신을 비워버렸다, 능력을 비워버렸고, 지식을 비워버렸고, 지혜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능력 있으나 없는 것처럼 완전히 없는 것처럼 된 것입니다. 알고 있으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모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몰라 버렸습니다. 그것이 비운 거예요. 아는 대로 다 할 수 없고 아는 대로 다 말해선 안 돼요. 아주 잊어버렸어요. 벌써, 벌써 잊어버렸어요.
서울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은퇴를 하셨습니다. 보통 우리 목사님들이 70세에 은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교회 목사님은 65세에 은퇴했어요. 그 교회에는 아주 까다롭기로 유명한 장로님이 계셨어요. 이제 목사님은 65세에 은퇴했고요, 그 장로님이 어찌 어찌 하다가 이제 돌아가시게 됐어요. 돌아가기 전 병원에 입원한 것을 알고 목사님이 찾아갔어요.
찾아가니 할 말은 많죠. 그러나 다 씻고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말씀했어요. "장로님, 저도 섭섭했던 일이 있지만, 혹 그저 마음에 섭섭했던 일 뭐 그런 것 이제 다 잊어버립시다." 그렇게 목사님이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장로님이 딱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 말에 그만 목사님이 한대 얻어맞았어요. 장로님은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지금 장로님의 임종 시에 다 가지고 와서 잊어버리자고 했으니 아직 목사님은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목사님이 너무너무 죄송해서 그걸 돌아다니면서 설교하시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당했노라고. 벌써 잊어버렸어야지 뭘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면서 이제부터 잊어버리자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비워버리는 것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애창곡 가운데 애모라는 것 있죠?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그 말은 진리라고 생각해요. 그대 앞에 서면 왜 작아지는가? 작아지는 게 아니죠. 없어져야죠. 아주. 그대 앞에 서면 무능해지고 바보가 돼야죠.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하면 작아져요. 사랑하면 없어져요. 그게 사랑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순간이에요. 모든 것을 비워버렸어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웠어요. 에케노센, 비웠다는 것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게노메노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Becoming, 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되었다는 것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녜요.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말입니다. 되어버리는 거예요.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아주 큰 음악회가 있었어요. 이 콘서트에서 곡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지휘자는 온 정열을 다해서 지휘를 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아주 혼신을 다해서 그 곡에 도취되면서 연주를 하고 청중들은 조용하게 그 연주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인데 어쩌다가 너무 열정적으로 지휘하다보니까, 이 가난한 지휘자의 예복의 소매가 찢어지면서 펄렁 펄렁 하더니 이 소매가 떨어져 나갔어요. 한쪽 소매가 떨어져나갔는데도 지휘를 합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잠깐 쉴 때, 이 지휘자가 민망하니까 옷을 벗어버리고 그만 셔츠바람으로 지휘를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수선해졌습니다. 망신스럽게 셔츠바람에 이게 뭐냐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때 맨 앞 에 앉아있던 귀족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자기 웃옷을 벗고 다시 앉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차례로 웃옷을 벗습니다.
모든 사람이 웃옷을 벗고 오케스트라를 보게 됐어요. 곡도 곡이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 음악회는 최고의 감동을 주는 음악회가 되었어요. 지휘자의 옷이 찢어졌다고 비판하겠습니까? 당신도 벗어! 이것이 사랑이요, 이것이 존경입니다.
여러분, 같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멀리 앉아서 교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는 것, 그건 사랑이 아녜요. 저가 죄인이면 나도 죄인이요, 저가 아프면 나도 아픈 거예요. 누구를 향해서 비판을 하겠어요?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말합니다. 복종하셨다. 죽기까지 복종했다. 여기 '휘페코오스'라는 말은 노예적 복종을 말합니다. 모르고 순종하면 복종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데도 따라갑니다. 이게 복종입니다. 다 알고 하는 게 아녜요. 납득이 가서 하는 게 아녜요.
그러나 사랑과 믿음으로 순종하면 이것이 복종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하나님 앞에 복종했어요. 겉으로 볼 때는 빌라도 앞에 로마군병 앞에 끌려가서 매 맞고 죽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했어요.
그걸 잊지말아야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는 순간 온전하게 복종했어요. 그 다음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현실을 그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18:11)" 이 현실 속에서도 조용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어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입니다. 여러분, 변명하지 마세요. 구차하게 이론 늘어놓지 마세요. 하나님의 뜻에 조용하게 복종하세요. 이것이 겸손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구두를 자기가 닦고 있었어요. 아, 그러니까 옆에 있던 비서가 깜짝 놀라면서 "아니, 대통령께서 이렇게 구두를 닦으시다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닦아야 되는데……." 그러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껄껄 웃으면서 "이 사람아, 그러면 미국대통령이 네 구두를 닦아야겠냐?
내 구두 내가 닦는데 그게 그렇게 무슨 큰 문제냐?" 여러분, 이 얼마나 참 평안한 겸손입니까? 교만하다보면 시끄러워집니다. 겸손하면 이렇게 편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아주 완전한 자유인이에요. 자 보세요.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자유롭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겸손하게 되면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무슨 소원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 기도 아무리 해보세요. 그냥 들어주는 법은 없어요.
하나님은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 응답하십니다. 돈 벌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면 돈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돈을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겸손하게 만들어 놓으신 다음 그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교육의 교과과정입니다. 달란다고 그냥 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겸손을 갖춘 다음에만 주십니다. 그러니까 겸손하게 만든다는 그 자체가 복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진 다음에, 그 겸손한 마음에, 겸손한 그릇에 하나님께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제서 높이십니다. 예수는 낮아지고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는데 하나님은 다시 그를 높여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시고 만주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것,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높이는 것처럼 맹랑한 일은 없습니다. 다 쓸데없어요. 그것으로 되지도 않고요. 문제는 나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은 높이시는 바로 여기에 축복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물어보세요. 그리고 모든 문제의 그 깊은 곳의 원인이 무엇인가 물어보세요. 겸손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 그 그리스도의 겸손, 그 마음을 품으라!
-기 도-
하나님 아버지, 겸손한 자에게 은혜주심을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교만한 모습으로 은혜받기를 바라며 복 받기를 바라는 미련함을 고집하고 산 것을 용서하옵소서. 겸손을 깨닫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기에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꼼짝 못하고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원하오니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바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참으로 저 깊은, 깊은 곳에 내려가는 겸손이 있게 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한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겸손한자에게 주시는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마음을 품으라 /빌2:1-11/ 곽선희 목사
2014-11-18 13:49:47
이러한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날 성 프렌시스의 사랑하는 제 자 한 사람이 깊이 기도하며 명상중에 있었습니다. 환상 중에 그는 천국에 이끌리어 올라가게 되고 천국에 화려 한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더 랍니다.
이곳 저곳을 살펴 보는 중에 아주 가장 높게 영광스럽게 장식된 보좌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보 좌에는 그 의자에 앉은 사람 이 없더랍니다. 그 빈 보좌 를 보고 천사에게 물었답니 다. 도대체 이 보좌는 누구 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겁니 까?
누구를 위해서 예배해 놓은겁니까? 그때에 천사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성 프렌시스를 위해 서 마련된 것이다 라고 대답 했답니다. 이 말을 듣는 순 간 아무리 자기 스승이지만 은 자기 스승이 너무 높임을 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시기 와 질투가 작용을 했답니다.
그럴 사람은 그만한 사람은 아닌데 우리스승이 그렇게 위대한 스승은 아닌데...... 싶 었지만은 그저 무슨 할 말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 환상 에서 그는 깨어 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선생님을 따라 다니면서 계속 지켜 보았습 니다.
아! 이분이 그렇게 위대한 분인가 하늘에서 이 렇게 높이는 분인가? 하고 그는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 는데 어느날 단둘이 만나게 됐습니다. 그때 시험을 걸 었답니다.
“ 선생님 선생 님은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 성 프렌시스는 서슴치 않 고 마치 준비된 대답같은 대 답을 하셨습니다. “ 그거 물론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 람이라고 생각을 하지. ”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자는 반박을 했습니다. “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세상엔 살인 강도도 많고 도둑놈도 많고 갖가지 죄인들이 많은 데 아 당신은 성 프렌시스라 고 이렇게 추대받는 성잔데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위선이요 거짓말이 아 닙니까? ” 그럴때 성 프렌 시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 주 평화로운 가운데 진실을 말했습니다.
“ 그건 자네 가 몰라서 그래 나는 원래 악한 사람, 지금도 악한 사 람이야 그리고 오늘 내가 이 만큼 있다면 이것은 내가 하 나님께로 받은 이 많은 은혜 를 다른사람에게도 베푸셨다 면 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꺼야. ” 라고 대답했답니다.
여러분 참 겸손이라는게 뭡니까? 참 진실이라는게 뭡니까? 자기 스스로를 어 떤 사람으로 평가하겠습니 까?
나는 세상에 가장 악한 사람이다. 누구와 비교할 수도 없는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는 죄인의 괴수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훌륭하 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선 하다. 나는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악한 사람이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사람이다. 그 자기의 본래성 그 진짜 자기 존재를 정체를 이렇게 인정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 이 겸손입니다. 그런고로 아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내가 가장 악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이 있다면 오늘의 이것은 오 직 은혜로 내가 있는 거다. 내가 죄를 지었어요. 그러 나 더 큰 죄가 있는데 요만 큼 요기서 멈출 수 있었어 요.
이 은혜요. 내가 더 나 빠질 수 있는 사람인데 요만 큼도 은혜요. 내 생각엔 미 치지 못하지만 아무리 생각 해도 나 자신이 나됨으로써 는 이만큼의 의의, 이만큼의 거룩함도 있을 수 없는 사람 이예요.
이것 자체가 이 현 실 자체가 은혜중 은혜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이만큼의 오늘 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은혜를 감사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은혜에 대한 생각이요. 성 프렌시 스가 생각하는 정체감이었습 니다.
어떤날 빛의 천사로 둔갑 을 한 사탄이 악마의 괴수 사탄이 사막에서 수도를 하 고 있는 거룩한 교부 한사람 을 만나서 이렇게 시험 했다 고 합니다. “ 나는 가브리 엘 천사로써 하나님이 당신 에게 보내서 왔습니다. ” 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 교부 가 하는 말이 “ 다시 잘 생 각해 보세요.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로 보냄 받았을 겁 니다.
나는 천사의 방문을 받을 만큼 거룩한 사람이 못 됩니다. 나는 이런 귀한 분 을 맞을 만한 거룩한 사람 이 못됩니다. 다시 한번 생 각해 보세요. 다른 사람에 게 보냄을 받았을 겁니다. ” 이 말을 듣고 사탄은 슬 그머니 돌아가 버렸다고 합 니다.
여러분 겸손한 사람 은 절대로 사탄이 유혹하지 못합니다. 어떤 악마도 참 으로 겸손한 사람을 유혹하 거나 넘어 뜨리지 못합니다. 얼마간이라도 교만하기에 스 스로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겁 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싸 움이 있습니까?
혹 분쟁이 있습니까? 마음에 고민이 있고, 낙심이 있고, 나약함이 있고, 부끄러움이 있고, 뭔가 마음속에 많은 고통이 있습 니까? 여러분 이 모든 것의 원인이 교만에 기인하고 있 다는 것을 생각해 본일이 있 습니까? 내 모든 번민의 원 인은 교만이요. 이 해결의 길은 오직 낮추고 낮추어서 진실한 겸손을 찾는데 있다 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부부간에 좀 불우 합니까? 그 원인이 교만에 있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별거 아니에요. 사태가 어 떻게 곤두박질을 하든 말든 이게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한 계단 내려앉고 또 두계단만 내려 앉으면 아 무 문제도 아닌걸 다 쓸데 없이 교만하고 건방져 가지 고 저도 고민이고 남도 괴롭 히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요새 거품이라는 말을 하죠. 거품이 별건가 요. 교만이죠. 거드름을 피 워봤자 아무것도 아닌데 원 래가 내 놓을게 아무것도 없 는 존재가 뭘 잘났고 교만한 건지 . 그래 자기 괴롭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히 고 살아 왔느냐 말이에요. 마음에 자세에 달려 있습니 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나 자신 앞에 겸손하고 그리 고 이웃에 대하여 아주 겸손 한 마음만 바로 잡을 수 있 다면 아무 문제도 없는건데 아무 문제도 없는건데..... 여 러분 그렇게 생각해 본일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유명한 사 도바울이 사도바울의 기독론 인데 그 중에 한 당론이 기 록돼 있습니다. 소위 바울 의 기독론이라고 아주 유명 한 본문이올시다. 예수 그 리스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교본적인 말 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 제는 그리스도는 곧 겸손이 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 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 셨다. 하나님의 사랑! 독생 자를 주신 사랑이 뭘 말하는 것이냐? 그 자체가 겸손이 다. 사랑은 곧 겸손이다. 겸손의 행동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 문에 이 겸손의 4단계가 기 록되어 있습니다. 명확하게 4단계로 나누어서 말씀해 줍 니다.
첫단계가 입니다. 비웠다는 것입니다. 이 비웠다는 말은 영어로는 empty입니다. 헬라어로 에 케노센 기독론에 있어서 아 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기 독론에 있어서는 빼놓을수 없는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 다. ‘ 비웠다 ’아주 텅 비었다는 말입니다. empty. 그런데 먼저는 자기를 비었 습니다. 나됨을 비웠어요.
아주 본질적인 비움을 말하 는 것입니다. 비하를 말하 는 것이예요. 그래서 하나 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됨을 비워서 아주 깨끗이 비 워서 그것이 사랑의 시작입 니다.
또 스스로 비웠습니 다. 비워져서 비우는게 아 니예요. 요새 보니까 아주 낮아진 사람들 많데요. 아 주 망하고 나니까 낮아졌지. 겸손해진 사람도 좀 있습디 다. 그것도 부득히 겸손해 졌지 그건 겸손이 아니예요. 스스로 겸손하는 것, 스스 로 비우는 것이죠.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10 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는 내게 서 빼앗는 자가 있는것이 아 니라 나는 스스로 본이노라 ” 스스로 본이노라. 이것 이 바로 겸손이라는 겁니다. 이유는 오직 여기에 있습니 다.
스스로 비우는 것입니 다. 자원적으로 비우는 것 입니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피동적으로 되는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기 를 비우는 것이올시다. 그 런데 이것은 신비로우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뜨겁게 사랑 해 본일이 있습니까? 그러 면 어느사이에 내가 없어지 고 맙니다. 좌우간 남편앞 에 고집 부리는 사람은 남편 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 다. 아직도 나라고 하는 존 재가 강하게 작용 하고 있 고, 내 자존심이 아직 그렇 게 소중하면 그거는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자존심이라는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동안 다 녹아 없어집니다. 명예 고 욕심이고 뭐 장래가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 녹 듯이 사라져 녹아 없어지고 맙니다. 그것이 겸손이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뭐 유행가 가사에도 좀 있잖 아요. 그대 앞에 서면 작아 진다나요. 작아지는게 아니 라 없어진다니깐요.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건 절대로 억지로 되는게 아니 예요. 그건 지어먹은 마음 이 아니에요. 사랑 그 자체 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요. 아주 비워버려요. 남이 야 뭐라고 하든 말든 나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있으나 없는 것처럼 알지만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지고 맙니다.
유능하지 만은 무능해지고 맙니다. 할 수 있는 일인데 할 수 없 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보가 되는거지 요. 일본 어느 화가가 그린 예수님의 대한 예수님의 초 상을 그린게 있습니다. 그 그림의 재목이 재밌습니다.
‘ 바보 예수 ’ 예수님은 아무리 보아도 바보라 이거 예요. 그래서 너무 사랑하 고 고생을 해서 이 입술이 졸졸 마르고, 너무 불쌍한 사람을 사랑해서 이 갈비뼈 가 앙상하게 나오고, 그리고 너무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눈 하나가 찌그러지 고 진물이 나와요. 그렇게 그렸어요. 예수님은 확실히 바보가 된 거예요. 그 능력 많으신 어른께서 왜 이렇게 되야 되는겁니까? 그것이 바로 겸손이요. 그것이 사 랑이더란 말이요.
또 두번째 단계가 게노메 노스 입니다. 혹은 에게네 토. 이 말은 비카밍이라는 말이요. 되었다. 사람과 같 이 되었다. 된다는 것이올 시다. 비워서 또다른 존재 가 되어 버렸어요. 기다린 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돌 아오는 자를 영접한다는 얘 기도 아닙니다. 용서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무엇을 준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과 같이 죄인의 모 습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 올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무 죄인과 가깝게 되어 죄 인이 되어 버려서 불 명예 스럽게도 죄인의 친구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세속주 의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 니다. 먹고 마시기를 즐기 는 자라고 하는 좋지 못한 이름도 가지게 되셨습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되었기 때 문입니다. 같이 되어 버렸 단 말입니다.
제가 센프란시스코에 한 2 년전에 집회인도 하러 갔을 때에 보고 들은 얘깁니다. 센프란시스코는 기후가 좋아 서 미국에 있는 모든 에이즈 환자들이 거기 모여 삽니다 요. 거기 가면 많이 만날 수 있고 에이즈 환자들만 사 는 마을이 있고 에이즈 환자 들만 나가는 교회도 있습니 다.
아들이 에이즈 병에 걸 렸는데 아버지가 수레에다 태워놓고 그걸 끌고 다니면 서 에이즈 환자를 사랑합시 다. 하고 다니는 것을 보았 습니다. 거룩하게 보였습니 다. 거기에서 있은 이야기 입니다. 어느 부인이 의사 올시다.
의사일을 하면서 자기일에 바빠서 분주히 돌 아가는 동안에 남편은 밖으 로 나돌게 됐고 나돌다가 이 렇게 이렇게 잘못되가지고 타락하고, 마지막에 에이즈 환자가 되어 버렸어요. 몸 은 썩어가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이 사실을 알고 남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당 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어쩌다가 내 일이 분주해서 이러다 보니까 아내 노릇을 못하고 챙지기 못해서 당신 이 밖으로만 나돌다가 이렇 게 에이즈 환자가 됐는데 내 가 분명히 아는것은 당신의 에이즈 걸린것은 내 책임이 요.
그런고로 이대로 당신 이 죽어가면 당신없는 세상 에서 내가 건강하게 어떻게 내가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 갈 수 있겠느냐고.... 그러지 말고 같이 에이즈를 걸려서 같이 죽자고. 그때부터 다 시 신방을 꾸미고 오랫동안 헤어졌던 사인데 다시 부부 생활을 합니다. 열렬히 사 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부인이 에이즈가 전 염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 남편도 소생했다는 겁니 다.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가 없어요. 또 의학적으로 가능하다고까지 말합디다. 왜요? 진정한 사랑이기 때 문입니다. 여러분 이게 이 것이 겸손이라는 거에요. 비판이 아니예요. 설교가 아니예요. 책임을 묻자는게 아니예요. 같이 되는 거예 요. 죄인을 사랑하면 죄인 과 같이 되는 거예요. 약한 자를 사랑하면 약한 자와 같 이 되는 거예요.
레오 보스카 끄리아 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작가면서 연사인데 아주 재 미있는 대회를 하나 마련했 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선한 일을 장려하 기 위해서 마을에서 제일 착 한 일을 한 아이를 상을 주 겠다. 그래서 각자 착한 일 한 것을 알려라. 하고 모집 을 했더니 저마다 뭐 이런일 했고 저런일 했고 착한일 했 다고 모두가 다 자랑을 합니 다.
그런데 어느집 아이가 착한일 했다고 상을 받아가 지고 왔어요. 어머니가 너 무 좋긴 했지만은 아, 얘가 무슨 일을 했나? 그게 궁금 해요. 뭐 돈도 준적이 없고 넉넉한 집 아인데 네가 무슨 착한 일 했냐? 무슨 구제를 했느냐?
이렇게 얘기했더니 아니요. 나는 뭐 돈도 없고, 그럴것도 없구요 옆집 할아 버지 그 부인되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할아버지가 늘 쓸쓸해 해요 그리고 늘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우는 것 같애요. 그래서 나는 할 아버지 품에 안겼죠. 늘 할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놀았 죠. 할아버지가 나를 쓰다 듬으면서 좋아했어요. 그것 뿐이요. 눈물 흘리고 있는 할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요. 구제 보따리 가지고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돈 몇푼 가지고 선한일 했다고 생각 하지 마세요. 나 스스로를 비워서 내가 사랑하는 자와 같이 되는 거예요. becoming 그것이 바로 겸 손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성경 말씀대 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노예라고 하는 것은 섬긴다 는 뜻이요. 자유가 없다는 뜻이요. 노예가 한번 된 다 음부터는 그럴 수밖에 없다 는 거에요. 그것이 노예입 니다.
스스로 노예가 됩니 다. 낮추시고 죽기가지 복 종하십니다. 겉으로는 사람 의 종이 된 것 같으나 내용 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한 것 이예요. 오직 하나님의 뜻 앞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 다. 복종하지 아니할 수 있 는분이 복종하셨습니다. 거 기에 겸손이 있는 겁니다.
자 이제 4단계에 보면 그래 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십 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 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겸손한 가 장 밑에까지 내려가신 분을 높이고 높여서 만왕의 왕이 되고 하늘 위나 하늘 아래 모든 분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이것이 오늘 본 문의 내용입니다.
이제 성 경은 말씀합니다. 이 마음 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 도의 마음 그 겸손 그리할 때 평화이 있고 그리할 때 능력이 있고 그리할 때 권세 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리스도를 보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곧 겸손입니다. 여기에 구 원의 길이 있습니다. 이 마 음을 품은 자에게 온전한 영 광이 있습니다. 이것이 크 리스마스 메세지입니다.
◀ 예수, 사람 되심의 은혜 /빌2:6-8/ 옥한흠목사
2014-11-09 21:18:07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심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
상에 태어나셨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이미 이 사실을 선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또 이사야 7장 14절에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사렛에 살고 있는 마리아라
는 처녀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녀는 이미 요셉이라는 청년과 약혼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나
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예언하셨던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을 위해 그녀를 택하시고
그 태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
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과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처녀 탄생문제는
인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사건은 우리
의 이성을 초월한 초월적인 신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믿지 않
습니다.
미국 TV 토크 쇼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래리 킹(Larry King)에게 누군가가 물었답니다. "당
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과 다 인터뷰를 해왔는데, 만일 전 세계 역사를 통해서 딱
한 사람만 선택해서 인터뷰를 하라고 한다면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러자 래리 킹이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무엇을 묻고 싶
으냐?"는 질문에, "정말로 처녀의 몸에서 나셨습니까?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는 것입니다. 곧 자신도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믿을 수 없는 허황된 전설이나 우화에 불과
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을 확
신합니다. 모든 생명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처녀의 태를 이용하여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다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신학적인 심오한 표현을 빌려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6절) 여기에서 '그'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본
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할 때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란 스스로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자존하
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 말에는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는 자', '스스
로 만족하는 자', '영존하시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는 존재의 원인이 없습니다. 어
떤 원인 때문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합니다. 반면 사람은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은 도무지 맞닿을 수 없는 극과 극입니다. 하나님은 자족하시는 분입
니다. 심지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아도 만족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 자신을 위해서 예배를 명
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은 너무나 많은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신 분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고 영원히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들꽃처럼
잠깐 태어났다가 한 생을 마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있는 자로서 자존하시며, 자족하시며, 영존하시는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스스로 사람이 되시기 위해 주전 4
년 경 한 날을 선택해서 그분은 세상에 오셨고, 처녀의 몸을 빌려 탄생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성으로는 하나님과 동체요, 인성으
로는 사람과 동체인 존재로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신성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시
면서 동시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사람으로 오시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7절). 자신에게 있는 영광을 다 포기하고 종의 모
습을 입고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천대 받기 쉬운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관
심을 끌 수 없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종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
건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만 읽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종으로 오셨기에 악취가 진동하
고, 양들의 배설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구간 구석의 차갑고 단단한 말구유를 만족스
럽게 생각하시고 자기 몸을 누이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아무도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들이 오긴 했지만 스스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그들로 말구유를 찾게 만들어서 온 사람들입
니다.
얼마 후 박사들도 찾아왔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가 걸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서 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르쳐주셨기에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억지로
찾아온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예수님이 탄생하심을 기뻐한 사람이 없었습니
다.
6개월 전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기뻐하고 그의 소식을 듣는 사
람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축하했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종으로 오실 때는 그분을 영
접하거나 기뻐하며 캐롤을 부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머리
로 이해하려 들지 마십시오. 설득 당할 수 있는 설명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은혜로 받으십시오. 그러면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은혜가 됩니다.
그 사실을 곰곰이 묵상하면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울리고 감동시켜 가슴을 채우
는 은혜가 됩니다.
그러면 믿으면 믿을수록 감격스럽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은혜 속에 담긴 몇 가지 사실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되신 예수를 보면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저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 어떤 감정이 있다고는 쉽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혹 어
떤 감정이 있다고 해도 그 감정이 우리와 맞닿는 선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 탄생하
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프린스톤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있던 유명한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가
이 사실을 아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독특성
하나는 감정이다."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고 추종하는 수많은 군중
들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
면서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자 가족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셨습니
다. 우리가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슬퍼하는 하나님
의 이미지를 우리 마음에 떠올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잘못했을 때 슬퍼하십니
다. 내가 고통에 빠져 통곡하고 있을 때 슬퍼하십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마을로 달려
갈 때, 그를 지켜보던 예수님의 가슴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오늘도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를
보시고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두손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모습을 볼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양심이 마비되어 숱한 죄를 범하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괴변을 늘어놓는 바리새인
들을 보실 때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감정이 통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의 감정과
내 감정은 통하는 데가 있어." 그러면 벌써 뭔가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
처럼 슬퍼하기도 하시고 기뻐하기도 하시고, 또 나를 불쌍히 여기기도 하시는 그런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묵상할 수 있는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았다면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 감정이 어떠하면 예수님의 감정도 어떠하겠다. 예수님이 저렇게 슬퍼하시니 내 마음이
슬프지.' 이렇게 서로 통하는 데가 있는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되신 예수를 보면 우리와 똑같이 시험과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
다. 예수님은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도 식구는 많은, 마치 흥부 집이
나 다름 없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끼니마다 걱정을 덜어놓을 수 없는 각박한 상황에서 청
소년기를 보내셨습니다.
나중에 복음을 들고 일하실 때에도 얼마나 굶으셨는지 모릅니다. 가
난을 아시는 하나님,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나처럼 가난해지신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
고 천대 받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고의적인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런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거나 가난할
때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간이면 누구나 당하는 가난
의 고통, 배신의 고통, 멸시의 고통, 죽음의 모르신다면 아마 우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셔서 그 모든 고통을 다 맛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당하는 나를 이해하십니다. 내가 슬퍼할 때 왜 슬퍼하시는지를 아십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그분을 찾을 때 왜 자신을 찾는지 알고 계십니다. 내가 외로워서, 내가 버림받아서,
내가 배신 당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분은 곁에 계십니다.
이런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고통이나 슬픔, 또는 시험을 당할 때,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께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무엇 때문에 그분에게 달려가려고 합니까? 왜
그분의 이름을 부르려고 합니까?
왜 그분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려고 합니까? 내가 당하
는 고통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다 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찾
는 것입니다.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몇 일전에 교회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줄로 알았는데 2층에 어떤 성도가 혼자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걸어 가서
는 아래에서 볼 일을 보고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저를 봤는지 뒤에서 저를 부르면서
복도로 나왔습니다.
한 40대 초반의 젊은 성도였는데, 우리 교회 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분
은 "목사님께 꼭 좀 의논하고 싶어서요." 하고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목사님, 제 남편은
대학교 교수입니다. 아이는 둘이 있고요. 그런데 남편이 어떤 여자에게 눈이 팔려서 이혼하
자고 합니다.
교수이기에 논리적으로 제가 빠져나갈 수 없는 많은 구실들을 만들어 이혼 서
류를 꾸미고는 거기에 도장을 찍으라고 해요. 목사님, 저는 이혼하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
어요. 제 남편은 믿음이 없어요. 하지만 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혼할 수 없잖아요. 목사
님,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목사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남의 집안 일에, 남의 부
부의 일에 제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습니까? "이혼해도 괜찮소. 제가 대신 당신 남편 노릇
해줄 테니 이혼하시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으세요. 예수님은 성도님의 모든 형편 다 아십니다. 예수님을
찾아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세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그분께 매달려 보세요. 때가 되면 해
결해 주실 것입니다. 한번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하루 아침에 문제 해결이 안됩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십자가를 지고 고통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세요. 예수님만
열심히 찾으세요. 그분은 성도님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 기도하세
요." 사실 이것만이 가장 완전한 대답입니다. 감사하게도 그 성도는 "목사님, 알겠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고통을 당해보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가 겪는 고통을 가지고 그분을 만나려는 마음이 생
길까요? 기쁨으로 찬양에 마음 깊이 와 닿는 찬송 가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여기에서 마음을 만진다는 것은 나의 고통하는 마음을 아시고, 이
해하시고, 받아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마음을 만질 수 있습니다. 친히 고통을 당
해보셨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자녀 부르시니 주밖에 없네." 고통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으시고 품으십니다. 그분이 바로 고통 하신, 시험 받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되신 예수를 보면, 우리의 인간됨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하나님을 보게 됩
니다. 중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안셀름(Anselm)은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입증해주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께서 짐승
이나 천사가 아닌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인간이 그만큼 하나님 앞에 소중하고 존귀하다는 사
실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이러한 견해에 동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질 때 나름대로 퍽 괜찮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면서 하나님 같고, 하나님이면
서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하고 타락하자마자 그 하나님의 형상이 형편없
이 쇠잔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보다 마귀를 닮은 사람처럼, 어떤 면에서는 짐승을
닮은 존재처럼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면 어떤 때는 '사람이 왜 저럴까?' 하고 나름대로 고민합니다. 사실 짐승
과 다른 데가 없습니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이나 암수 짝을 지어서 후손을 남
기는 것도 똑같습니다.
얄팍한 영성과 도덕성을 빼버리면 짐승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짐승이 가는 길을 그대로 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간만큼
잔인하고 악한 짐승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한 것이 인간입니다.
어쩌다가 한번 가난을 십자가로 지면 평생 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다하
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과, 지도자와 나라를 잘못 만나 평생 노예처럼 살다가 한 생을
마치는 무고한 백성들을 볼 때면 스스로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인간에게 무슨 가
치가 있는가? 무슨 존엄성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마음 속에 있는 회의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비관론을 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
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얼마나 사람이 존중한 존재였으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을
까?' 바로 이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인
간을 예수님처럼 고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비록 악하고 더럽고 천하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처
럼 특별한 존재로 보십니다. 그래서 인간됨의 중요성과 가치를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는 것
입니다.
지금 한창 인기 리에 있는 미국의 탁월한 기독교 저자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큰 천
사와 작은 천사의 대화」라는 우화를 출간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데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의 영광스럽고 존귀하시며 위대하신 왕, 그분께서 다섯 번
째로 작은 저 행성 지구로 내려가셨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뭘 하시기 위해서 그리로 가셨단
말이죠? 정말 그분께서 저기 떠있는 지구의 하찮은 존재처럼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피조물
이 되셨다는 말인가요?"라며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작은 천사가 큰 천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큰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맞았어. 그분은 그리로 가셨
어. 그런데 그분이라면 네가 말하는 식으로는 말씀하지 않으실 거야. 뭐? 지구 상에서 엉금
엉금 붙어 기어 다니는 피조물이라고? 주님은 그렇게 멸시하는 투로 말하시지 않을 거야.
그러나 주님은 그리로 가셨어.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분은 저 지구의 그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피조물을 무척 사랑하신다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자기와 똑같이 닮
은 존귀한 존재로 높여 주려고 하는 큰 목적을 가지고 그리로 내려가셨다
네." 작은 천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큰 천사를 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하찮은 짐승과 같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자기처럼 높은 존재로, 존귀
한 존재로 받들어 세우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못생겨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가난해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죄를 범했어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실수해서 사람대접을 못 받
는 존재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네 번째로 사람이 되신 예수를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
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
다. 우리를 살리려면, 우리를 구원하려면 누군가 죄 없는 분이 오셔서 우리 대신 피를 흘려
주셔야 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영
원한 영적 원리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것도 의인의 피어야 합니
다.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준 의인이 있습니까? 피를 흘리려면 하나님께는 불가능
합니다. 그분께는 피도 육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으로서 피를 흘려주려면 몸을 가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누가 몸을 가진 하
나님이십니까? 어디에 가야 그런 분을 찾을 수 있습니까? 설혹 찾았다고 할지라도 찾아가
서 얼만큼 손을 비벼야 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로서는 해결 받을 수 없는 난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스스
로 자원해서, "내가 가마. 내가 사람이 되마. 내가 피를 흘리마. 내가 죽어주마. 내가 너희를
살려주마." 하시고는 이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 2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
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우리를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리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피를 흘리는 의인이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
도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우리를 허물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 다시 말하면 성 베들레헴의 요람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
에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을 갈보리의 십자가로 이끌어가는 길목
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
유는 십자가로 통하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말구유, 예수님의 탄생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배경에 십자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둔 베들레헴의 탄생이 진
정한 복음이요, 은혜이지 십자가를 모르는 크리스마스는 복음도, 은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 초라하기 짝이 없
는 한 여자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서있습
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개를 숙인 채 굳은 몸으로 서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물으
셨습니다.
'너를 정죄하고 있는 자가 어디를 갔느냐?" "예, 아무도 없습니다. 다 가고 말았습
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너를 죄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다시는 가서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 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 여인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 때문입
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터드(C. T. Studd)라는 위대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때 원주민들이 나와서 죄를
고백하는 대부흥이 일어났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내가 세 살 때 우리 아버지가 사람을 죽
인 것을 압니다.
사람을 죽였는데, 그가 누구냐고요? 우리 형님이었어요. 그 형님을 아버지
가 죽이고는 그 고기를 아버지와 내가 같이 먹었어요." 바로 이런 식인종들도 예수 그리스
도를 만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피 흘려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예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환희와 기쁨에 젖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
신 예수님입니다. 그리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신 하나
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와 똑같은 시험과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예
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 인간됨의 존귀함을 가르쳐주신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볼 때마
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피 흘려 주신 하나님을 봅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생각할 때마다 그분은 내게 은혜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
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하고, 믿으면 믿을수록 가슴이 벅차 오르고, 그 이름을 부르면 부
를수록 나의 전 인격이 가만있지 못하고 흥분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묵상하는
크리스마스가 됩시다. 그분에게 찬양을 돌리는 크리스마스가 됩시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
고, 그 놀라운 은혜 앞에 감사하는 성탄이 됩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
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스스로 계시면서 유한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되 종으로 오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거룩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께서 감동하셔
서,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식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보내지 않도록 해 주시
옵소서. 사람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감격
하며 경
배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성탄이 주는 은
혜 때문에 우리 영혼이 소생하게 하시고, 우리 심령이 기뻐 뛰게 하시고, 우리 영혼의 모든
질병들이 날라가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위로를 받는 귀한 성
탄이 되도록 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빌2:1-11/ 유기성 목사
2016-08-16 13:48:00
그 중에 짐 루이스(Jim Lewis)와 짐 스프링거(Jim Springer) 쌍둥이 형제의 경우, 나면서 떨어져서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만났습니다. 40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둘 다 교통법규 위반 교육을 받았습니다.
둘 다 취미로 설계, 제도, 목공예를 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스프링거는 두 번 결혼을 했습니다. 둘 다 첫 번째 부인의 이름이 린다였고, 두 번째 부인 이름도 모두 베티였습니다.
둘 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제임스 알렌(James Allen)이었습니다. 둘 다 개를 길렀는데 개의 이름을 토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쌍둥이 형제는 멀리 떨어져 살았는데 생김새만 같은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들이 매우 흡사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유전인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발견케 하는 탐구였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영적 유전인자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답게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박사가 되었다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기에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지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서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그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서도 마음껏 기뻐하고 감사하고,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분은 우리 안에 오신 주 예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 뿐입니다. 걱정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만 할 뿐입니다. 진정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심정 장로님이 지난 주간 영성수련회 중에 음주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로 끔찍한 전신 화상을 당한 딸 지선이를 간호했던 간증을 하였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 면회 시간에 지선이를 보러 들어가면 지선이는 시종일관 엄마의 눈을 보았답니다. 자신의 상황을 엄마의 눈빛으로 알기 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심정 장로님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모든 게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히 행동을 하며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있다가 나온답니다.
그러나 중환자실 밖으로 나오는 즉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답니다. 중환자실에서는 초인적인 힘으로 버텼지만 나오면 설 힘이 없더랍니다. 엄마의 마음입니다. 엄마의 마음은 그렇게 강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지선이가 일반병실에 오면서 상황은 또 달라졌답니다. 전에는 하루 세 번, 면회시간 30분씩만 담대하면 됐는데, 이제는 일반병실에서 하루종일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생활해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답니다.
그런 상황은 엄마의 마음만 가지고 감당할 수 없었답니다.그 때 심정 장로님을 이기게 한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보기도해 주었고 장로님도 낮에는 병실에 있고 밤에는 교회 가서 울면서 주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계속되는 어려움으로 마음의 낙심과 절망으로 주체할 수 없었을 때, 주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루에 한 가지씩 감사할 것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처음 찾은 감사제목은 그래도 발은 다치지 않아서 발을 씻을 수 있어서 감사했고, 하나 남은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어서 감사했고, 눈으로 사람들과 마주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외형적인 생활은 조금도 변한 게 없으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결국 고통과 절망이 계속 덮쳐 왔지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며 달려오다 보니 사고의 가해자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별로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가해자에게 분하고 억울해서 날마다 땅을 치고 원통해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내가 다 안다.’라는 한 마디에 모든 걸 맡기고 믿음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예쁜 딸을 봐도 전혀 부럽지 않고 지선이도 예쁜 친구들을 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지선이는 지금도 간증할 때 이 말을 합니다. 사고 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선이는 지금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선이의 외적인 모습이 더 이상 걸림돌도 아니고 장애물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과정일 뿐이며 주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흔적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고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것을 말면 구태여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자기자신 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는 복을 받도록 도와주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번은 지방회에서 감리사님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화가 너무 났지만 순간 주님께서 일체 입을 다물고 감리사인 그에게 순종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때는 이유를 알지 못하였지만 얼마 뒤 그 감리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고, 그 사모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야 왜 주님이 그 날 감리사님에게 시시비비를 따지지 말라고 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이번 영성수렴회에 두 아들을 둔 이혼남과 결혼한 집사님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면 마땅히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두 아들의 엄마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게임과 돈에 집착했던 큰 아들로 인해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지만 아들의 세상적인 관심은 점점 커져만 갔고 그것을 충족시키고자 돈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보이며 해서는 안될 악행을 저질러 소년원으로 가야만 하는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아들은 1년이라는 세월을 소년원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표현할 수 없이 밉지만 엄마라는 자리에 있기에 뒷일을 수습하려고 좇아다니면서 제 영혼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남편에게 " 더 이상 나는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싶지 않으니 당신이 해결해. 내가 낳은 자식도 아닌데 왜 내게 뒷수습을 다 맡기는 거야." 라고 소리치며 대들었습니다.
남편도 그 상황에서 어찌할 수 없어서인지 오히려 소리를 지르는 상황에 이르러 왜 제 삶을 이렇게 이끄시냐며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주님이 계시다면 벼랑 끝으로 나를 이렇게까지 몰 수는 없다.' 고 생각했습니다.그러다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신 목사님의 권고로 수련회에 갔지만 도무지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같이 힘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찬양을 부르는데 <나의 길, 오직 주님만이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가리라.>는 복음송 가사가 마음에 박히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의 길, 오직 주님만이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가리라!.> 실패한 것만 같은 결혼 생활로 인해, 아내로서, 엄마로서, 자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열심을 내어도 늘 한치 앞이 두려웠던 것이 저를 단련시키는 것이며 정금같이 나아가게 하려 하심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사랑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노력해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헌신하는 것이 힘들더니 주님의 마음을 품으니 저절로 되어지더라고 했습니다결국 마음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다 바뀝니다.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왕이 되시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왕이 되시면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려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분명히 고백하여야 합니다.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이 간단한 일이 정말 어려운 것은 마귀가 우리 마음을 혼미케 하여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 안에 계신데도 예수님이 함께 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마귀가 우리 마음을 이미 혼미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이 열쇠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계속 우리 마음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쉽게 속습니다. 마귀가 주는 마음이 더 솔깃합니다. 우리 자아를 더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마음대로 해봐.’ 하고 속삭입니다.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마음대로 살아서 잘 산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여 잘 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었습니다.” 분명히 고백하면 마귀가 혼미케 하던 것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이 선명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그래서 영성일기를 써 보시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 조차 힘듭니다. 그러나 꾸준히 써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계신 것이 일기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마귀가 주는 마음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성도의 교제의 축복도 영성일기를 나눌 때 옵니다.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그러나 서로 “속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영성일기를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 조차 나누는 관계가 됩니다. 교회가 천국임을 비로서 알게 됩니다. 교인들이 한 몸임이 믿어집니다.
열쇠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빌2:5-11/ 이동원목사
2014-12-01 20:16:33
인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호도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나무를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 당신은 그렇게 똑똑한 분으로 생각이 안되는군요. 어떻게 큰 나무에는 작은 호두가 열리게 하고 작은 풀에는 큰 수박이 열리게 하시는지요."
바로 그때 호두 하나가 그의 머리위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즉시 그는 일어나 회개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이 어리석은 자의 생각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 생각과 달리 저 큰 나무 높은 곳에서 큰 수박이 아닌 작은 호두를 열리게 하시고 그 작은 호도를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신관가운데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의 신관과 차별화 되는 특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크신 자로서 가장 작은 자가 되어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오늘의 본문 빌립보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소개하는 두 개의 키워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낮추시고"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높이셨다"는 단어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본문6-8절까지가 본문의 전반부인데 그 키 워드가 "낮추시고"인 것입니다. 후반부는 9-11절까지인데 후반부의 키워드는 9절에 나타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지극히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얼만큼 높이셨습니까?
그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이름을 높여 그 앞에 무릎꿇고 그를 경배하며 그를 주님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그분은 먼저 자신을 낮추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또 하나의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진정 의미있게 높아지기 위해서는 먼저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저마다 높아지려는 출세 지향적인 인생을 사는 시대속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낮아짐의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낮아짐의 참 의미를 붙들고 살기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두가지의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낮추심의 이유는 무엇인가와 둘째는 낮추심의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첫째 질문-그가 자신을 낮추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우리를 섬기시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 7절에서 하나님과 동등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이땅에 오신 것은 종의 형체를 갖기 위해서 였다고 기록합니다. 종이 하는 일은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낮추셔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낮추지 않고는 섬길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그는 먼저 자신의 허리를 구부려야 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결코 섬길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섬기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변화될수 없습니다.
세상은 지배하는 것으로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 섬기기를 결심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단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만큼 높으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시고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면 우리가 섬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전에 저의 사랑하는 친구인 하용조 목사님을 만났는데 최근에 가장 큰 목회의 보람이 생겼는데 그것은 온누리 교회 장노님들이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 일이라고 자랑을 하더라구요.
그리고 화장실 청소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된 것과--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장로님들이 청소하는 것을 보면서 성도들이 또한 감동먹고 변화되어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단순히 설교를 듣는다든지 성경공부하는 것만으로 변화되지 않든 분들이 주님의 말씀 그대로를 순종하면서 실제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말을 듣고 무슨 소감을 가졌을까요? 배가 아팠습니다.
나는 우리 지구촌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은 화장실뿐 아니라 하수도까지 청소하는 분들로 소문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신 이유는 섬김이라는 단순히 도덕적인 목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영혼들의 구원이었습니다. 막10:45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의 절정으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속죄함을 얻고 구원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빌2:8에서도 자신을 낮추시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구원하려면 먼저 섬겨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아직도 우리의 섬김의 분량이 채워지지 못한 때문인지 모릅니다. 저는 이번 추석절에 가족들이 모일때도 믿는 분들이 많이 섬길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가족들이 감동먹고 예수 믿을 생각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봉사를 침례요한의 역할에 비교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오실길을 준비하듯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이 이 사회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의 한국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세상을 감동시키는 섬김을 잃어버린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이유-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둘째 질문-그가 자신을 낮추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그가 자신을 낮추시기 위해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비우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이 대목의 이 표현은 신학에서도 상당한 논쟁(kenosis debate)을 야기시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비우셨다고 해서 자신의 본질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이땅에 오시면서 그가 만일 그의 신성을 포기한 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우리의 모범은 되실수 있어도 우리의 구원자는 되실수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쉽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우선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를 포기하시고 사람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받으실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셨습니다. 대신 가장 낮은 사람인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때로는 오해를 때로는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제자되기를 구하는 오늘의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기꺼이 자신을 낮추기 위해 주장할수 있는 특권을 포기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신 것들이 있으신가요?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을 줄이고 이웃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있으셨나요? 좀 더 큰 집에서 살수 있는 분들이 집을 줄인다든지 좀 더 큰 자동차 탈수 있는 분들이 더 작은 차를 타며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습들이 있으셨는지요?
주차장에 주차할때도 다른 이웃들이 주차하기 어렵지 않도록 주차하지 말아야 할곳에 주차 안하고 내가 좀 더 먼 곳에 주차하고 걸어오는 일,
엘리베이터 탈 때나 식당에서 식사할때도 연약한 이웃을 배려하고 자신이 손해볼줄 아는 것-믿음의 표현은 이런 구체적인 양보나 희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챙길 것 다 챙기고 다 대접받고 다 높임받고 언제 섬기고 언제 이웃들을 전도하시겠습니까?
2)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시작은 자신의 비우심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섬김의 마지막 절정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히 가학적인 순교행위가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단순히 고난의 도구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가신 이유, 거기서 못박히신 이유-
그것이 그를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양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죽을수 있다는 것-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을 사는 예수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특권도 위치도 포기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종의 모습이 있는지요? 우리가 죽으면 이웃들이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이웃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자 자신이 죽음의 자리를 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지 못합니다. 오죽하면 고 안이숙 여사는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라고 썼을까요?
그녀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할 뻔하다가 순교의 기회를 놓쳤을 때 주께서 그녀에게 더 힘든 삶을 주셨다고 푸념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한번 죽는 것이 낫지 날마다 죽는 것이 더 어려워요"라고.
실제로 바울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또한 롬6:11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로 여기고"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믿음의 역설은 우리가 죽기로 결심하는 순간 우리가 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교수의 길을 걷고 있던 헨리 나우엔에게 있어서 하바드 대학 교수직은 아마도 그가 추구할수 있는 인생의 가장 높은 곳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절정에서 그는 어느날 홀연히 하바드 교수직을 내려놓고 카나다 토론토의 데이 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소수의 정서 장애자들을 섬기는 사제가 되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적어도 캐리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자리, 이 공동체에서 영성작가 헨리 나우엔이 다시 태어납니다.
이 공동체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글들이 쓰여지면서 그는 이 작은 공동체를 넘어서서 가치 있는 인생을 추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가장 아름다운 저작들을 선물로 남기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에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인 리더십의 길은 세상이 시사하는 방향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십자가로 직결되는 저 낮은 곳을 향한 움직임인 것입니다.
이 말은 매우 자학적이고 자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첫 사랑을 경험하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예수를 따라가는 길은 세상은 결코 알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을 향한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은 힘과 지배의 지도력이 아닌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신 예수가 보여주신 스스로를 비우시고 낮추시는 무력함과 겸손의 길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참된 기독교적 지도력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높아지기를 구하는 자마다 먼저 낮아짐을 배워야 합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에 나타난 두개의 키워드는 무엇이며 이 단어들이 사용된 배경을 나누어 보십시오.
2.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신 방법을 나누어 보십시오.
3. 7절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셨다는 뜻을 설명하고그가 그렇게하신 이유를 나누어 보십시오.
4. 9-11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떻게 높이셨습니까?
5.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는 영역들을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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