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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디모데서 설교 모음

디모데후서 4장 6절 - 8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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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면류관 /딤후4:6-8/ 강대식목사

2023-11-07 05:34:08

 

1. 어떤 사람이 의의 면류관을 받는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날 시각이 가까울 때 디모데에게 하는 말씀이다.

유언과 같은 말씀이고 초점은 의의 면류관에 맞추어져 있다.

의의 면류관은 일생 동안 믿음으로 산 것에 대한 상으로 주어진다.

 

주시는 분은 주 곧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주의 나타나심곧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신다고 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사도 바울은 상 곧 면류관을 받는 사람은 경기장에서 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4-25)

 

믿음은 달려갈 길이고 달리는 경주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운동장에서 하는 달음질에서 1등 상은 한 사람만 받는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지요.

태능 선수촌에 들어가는 것도, 음식과 쾌락과 다른 활동들을 절제하는 것도,

다 올림픽과 같은 경주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달음질할 때도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해야 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해야 한다.

 

그러나 그 어렵게 받은 명예로운 금메달도 결국은 얼마 안가 썩을 승리자의 관이지요.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고 본인도 썩고 마는 명예를 실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 받는 관은 썩지 아니하고 영원한 관이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둘려 24 장로들의 보좌들이 있는데,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인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팔복의 사람들이 하늘에서 큰 상을 받는다는 결론의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이다.

곧 팔복의 사람들이 하늘에서 상이 큰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이미 상을 받은 자들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구제할 때에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부는 자들이다.

기도할 때에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자들이다.

금식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자들이다.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서 이미 상을 받았다. 하늘에서는 상이 없다.

 

2. 전제와 같이 다 부어져야 한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다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4:6)

 

전제는 지난 번역 성경에서는 관제로 번역되었다.

“drink offering”, 포도주와 같이 본 제사와 함께 부어드리는 제사를 일컫는다.

번제 소제와 같이 드려진 제사이다.

 

전제는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취했다.

희생물처럼, 소제의 제물처럼, 정해진 양의 포도주를 다 부어드림이 전제로 부어짐이다.

바울은 이 전제를 자신의 순교의 죽음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공동번역은,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 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다고 했다.

표준새번역은,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다고 했다.

빌립보서에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에 덧붙여 그 자신의 피를 전제로서 붓는데도

마다하지 않을 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2:17)

 

바울은 순교하였지만, 그의 회심 후, 전 생애가 전제로 부어지는 생애였다.

이제 순교로 전제의 포도주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부어질 때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세상을 떠날 시각인 것이다.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의 순교와, 그 전통을 이어 받은 발도인들 위그노들의 순교도,

바로 우리 주님의 전제를 본받은 것이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어 전제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7-28)

 

전제물을 붓는 것은 창세기에 처음 나온다.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35:14-15)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도 하나님의 영을 전제물처럼 부어주심이었다.

사도 베드로가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증거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2:17-18)

 

우리에게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신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2:1)

 

그럴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순종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할 것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할 것이다.

 

3.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악하고 폭행을 일삼는 악한 싸움이 아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음도 선한 싸움이기에 순종하신 것이다.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희생제물이 되면서도 순종한 것은 선한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지,

권력과 재물과 폭력으로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영광이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기에 선한 싸움이다.

 

우리 싸움의 대상은 육체와 세상과 마귀이다.

육체는 죄를 따르고, 그 육체는 세상에 속해 있고, 그 배후에 마귀가 역사하고 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은 그 배후에 있는 마귀를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2-5)

 

육체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육체의 욕심을 잡지 않고 축복과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 패망과 죽음의 길인 것을

언제나 알게 되느냐? 죽을 때이고, 죽어서 심판을 받을 때일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 하였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원수들을 향해 싸우라 하지 않고,

그 배후에 있는 마귀와 싸우라고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에게 마귀는 손을 쓸 수가 없다.

복종하지 않을 때, 떡으로만 살 때, 마귀의 밥이 되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고난의 배후에 마귀가 있다고 하심에 주목해야 한다.

근신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마귀 대적이 우는 사자 같이 삼켜 버린다는 것이다.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원수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마귀를 대적하며 살아야 한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1,6)

 

참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심판으로,

미혹의 역사 마귀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고 말씀한다.(살후2)

성경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하는 것이 진리의 영에 속하는 것이다.

 

의의 면류관을 받으려면, 세상과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세상과 벗하는 것이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4: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것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속한 자들의 말들을 좋아하여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달려간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영에 속한 사람들은

오직 사도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찾는 이도 적은, 생명의 길을 목숨 걸고 간다.

 

의의 면류관을 받으려면, 육체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2-13)

 

우리 몸과 육체가 불의의 무기가 될 것인가, 의의 무기가 될 것인가,

죄에게 내줄 것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인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죽었다가 방금 살아 난 사람 같이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 하신다.

 

육체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3:18-19)

 

땅의 일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자기의 탐심과 야망의 배를 채우는 것이 그들의 하나님이고,

영광을 얻어도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그 마침은 멸망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육체를 따라 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으로

그날에 임할 진노를 그들을 쌓고 있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4-5)

 

의의 면류관을 받을려면, 믿음을 지켜야 한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을 지킬려면, 무엇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된다.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믿음과 오래 참음이다.

믿음을 지킬려면 항상 말씀 안에 풍성하게 거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 행해야 한다.

말씀으로 사는 믿음의 행함이, 나와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고,

공의가 앞서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뒤에서 호위하게 하신다.

나의 남은 생애가 전제와 같이 다 부어지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생애가 되게 하자.

기도.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전제와 같이 다 부어지는 바울의 생애를 본받게 하옵소서.

육체와 세상과 마귀를 대하여 선한 싸움을 하게 하옵소서.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는 자 되게 하옵소서.

 

 

 

달려갈 길을 마치고 /딤후4:6-8/ 영문설교

2016-06-10 11:12:48

 

딤후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 가운데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딤후4:16 말씀이 밝히는 바와 같이, 이미 사도 바울은 로마의 황제 네로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 사도 바울을 변호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이 세상의 임금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곧 자신이 네로 황제의 판결로 목 베임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네로 황제가 자기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무도 자기를 변호해주지 않아서, 자신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후, 자신의 일생을 예수님께 산 제물로 드리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생명을 예수님께 드리기를 바랐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 바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에게도 허물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모든 가식을 벗고 진실해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그가 맡은 직무를 다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습니다.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금년 한 해 우리는 달려갈 길을 다 마쳤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일생의 달려갈 길을 모두 마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의 현재를 밝혔습니다. 그런 후 그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미래를 소망하며 바라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의 현재입니다.

 

딤후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오늘 본문은 전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법의 일종입니다. 민수기 15장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삼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불태워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소제를 그 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번제물과 소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이 때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것을 가리켜서 전제라고 칭합니다. 그러니까 맨 먼저 짐승을 번제로 드리고, 그 다음에 기름을 섞은 곡식 가루를 소제로 드리고,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전제로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약 삼십여 년 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부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아낌없이 불태웠습니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삶은 이미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졌던 것입니다.

 

그 동안 사도 바울의 몸에는 예수님의 흔적이 많이도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많이 했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삶은 이미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소제로 드려졌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전제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붉은 포도주가 제단에 뿌려짐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완결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붉은 피를 뿌림으로서 주를 위한 자신의 사역과 삶을 마무리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십자가형이 해당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참수형, 곧 목 베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이제 자기가 목 베임을 받을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미 사도 바울에 대한 심리는 끝이 나고, 이제는 판결과 집행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을 읽어봅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죽을 때를 가리켜 떠날 시각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죽을 때가 이미 다가왔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공항에 가면 각종 항공편의 스케줄이 스크린에 떠오릅니다. 스크린 상에는 출발이 있고 도착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떠남은 스크린 상에 나오는 출발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있던 곳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곧 목 베임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는 참으로 참혹한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럽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떠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본시 그는 장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 동안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며 장막을 치기도 하고 걷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장막을 치기 위하여, 이 땅에서의 장막을 걷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빌1:21에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또한 빌1:23에서는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내가....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우리도 언젠가는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우리의 떠날 시각이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하며, 차라리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에게는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지 맙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가 되시도록 하며,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시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곧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곧 떠날 시각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면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직무에 열심을 다해서 늘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과거입니다.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 개의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모두 완료형입니다. “싸웠다. 마쳤다. 지켰다.” 한 마디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직무를 다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런 아쉬움이나 뉘우침이 없이 자신의 삶을 기쁘게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싸웠던 선한 싸움을 생각해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약 삼십여 년 동안, 사도 바울은 줄곧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때때로 운동 경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예컨대 고전9:26 과 엡6:12 말씀과 같이, 그는 경기장에서 선수가 달음질하는 것처럼, 또는 권투를 하는 것처럼, 또는 씨름을 하는 것처럼 땀을 흘리며 열심히 싸웠습니다.

 

또한 엡6:11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군인들의 전투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군인이 전신 갑주를 입고 전투하는 것처럼, 그는 여러 대적들과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엇과 싸웠습니까?

 

사도 바울은 악한 마귀와 싸웠습니다. 또한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도 싸웠습니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율법주의자들과도 싸웠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과도 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며, 허탄한 이야기를 전하는 자들과도 싸웠습니다. 아울러 사도 바울은 그의 지체 안에서 그를 죄의 법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육체의 소욕과도 싸웠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의 싸움은 내가 잘났고 너는 못났다는 식의 수준 낮은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가 높고 너는 낮다는 식의 유치한 싸움을 싸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싸운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리스도의 바른 일꾼이 되기 위하여 싸웠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싸운 대의명분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었습니다.

 

1:30 말씀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전제와 같이 우리가 부어지고 우리의 떠날 시각이 점점 가까워짐을 생각하며, 끝까지 힘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줄곧 달려왔습니다. 그리해서 이제 그는 드디어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결승점에 이르렀습니다.

 

20:2324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며 줄곧 달려갔습니다.

 

우리도 달려야 합니다. 힘껏 달려야 합니다.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면,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상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언제나 달려가는 자세로 우리의 직무를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7절 끝 부분에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아무리 선한 싸움을 싸우고 아무리 달려갈 길을 마쳐도, 믿음을 잃어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믿음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그는 율법주의자들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로마의 황제 네로 앞에서 믿음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믿음은 결코 주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킨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10:17 말씀과 같이,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달려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고후2:17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지 않고,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데, 허탄한 이야기를 들어서 무슨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수하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들의 심령을 거듭나게 만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딤후4:12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와 같이 당부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들어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엄히 명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세상을 떠날 시각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때 우리도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 우리 모두도 기쁨으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의 미래입니다.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사도 바울은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는 달음질에서 승리했습니다. 권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씨름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이제 그는 땀을 닦으면서, 재판장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재판장은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어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에 메달을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받을 면류관을 가리켜서 의의 면류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면류관은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받을 면류관은 의로운 판결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심리가 이루어지며, 변호도 하고, 증거물이 제시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판결이 내려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로마의 원로원에서 불의한 판결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네로 황제는 불의한 재판장이었습니다.

 

고후5:10 말씀과 같이, 장차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결코 불의한 판결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그 곳에서는 의로운 판결만 내려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숨은 동기까지도 완벽하게 다 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심판에는 잘못이나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시며, 우리에게 상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 끝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말씀했습니까?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의의 면류관은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심판이 나옵니다. 첫째, 분리되는 심판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분리되고, 양과 염소가 분리됩니다. 둘째, 벌 받는 심판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받는 심판입니다. 셋째, 상 받는 심판입니다. 성도들이 충성한 대로 보상받는 심판입니다.

 

자연히 자기의 직무를 다한 사람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할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사람은 상 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부끄럼이 없이 주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생애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힘껏 달려갑시다. 믿음을 지킵시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우리 모두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기를 바랍니다. 아울러서 그 때 하나님의 칭찬과 예수님의 상과 성령님의 위로를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겨라 /딤후4:16/ 이재철목사

2015-07-25 00:26:48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유혹에서 떠나야 한다.

 

반드시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은 경제 원리이다. 그것은 업적주의다.

경제 원리, 업적주의가 꼭 나쁜 것은 아님, 필요함.

그러나 너무 극단적으로 그 쪽으로만 치우칠 때 문제가 되는 것임.

 

많은 한국의 대통령, 정치인들이

자신의 재임 기간 안에 모든 결과를 보려다가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도인들도 똑 같다.

내가 행한 일의 결과를 내 시대에서 내 눈으로 보려 한다면

우리는 정도를 벗어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결과를 내 세대에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원을 살면서,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경제 원리로만 본다면 바울은 철저히 (자기 세대에서)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자기처럼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또는 감옥으로 자기를 찾아 오는 사람들(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그의 만년의 고백을 들어보면, 아시아에서는 사람들은 다 자기를 떠났으며(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딤후 1:15)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할 때 자기와 함께 했던 자도 다 자기를 떠났다고 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결과로부터 자유하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하여 그 자신을 계속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 땅을 떠난지 3백년이 지나서, 저 천국 하나님의 품속에서

그 결과를 지금까지 영원히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

 

요셉은 자기 세대에 결과를 본 사람이고, 바울은 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는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과로부터 자유할 때 마음을 비운 자가 누리는 평안을 맛본다.

나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나머지 결과는 주님께 맡기자.

 

¨’가가와 도요히코를 키워낸 나가노 목사 이야기

 

§나가노 목사, 개척을 시작하다

20세기초, 일본에서 갓 안수를 받은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은,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는 어느 곳에 가서 교회를 개척할 것인가 일본 지도를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동서남북 100킬로미터 이내에 단 한명의 교인도 없는 곳을

찾고 보니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역 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 5년을 포기하지 않다

이 젊은 목사는 곧 그 지역으로 가서,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는데 교인이 오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지났습니다. 6개월 동안 교인이 아무도 오지 않으면

"하나님 뜻이 아니구나"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노 목사는 그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 주신 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무려 5년이나 꿋꿋이 지켰습니다.

 

§청년 가가와가 찾아오다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에 천막 교회의 커튼(입구)을 젖히고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초췌한 청년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지난 5년 동안 했던 그 어떤 설교보다도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하더니 식탁 위에 피를 쏟았습니다.

그는 폐병환자였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순간적으로 속에서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나?

이 사람을 지금 당장 쫓아 버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이 핏덩이를 쓸어내고 계속 함께 밥을 먹어야 하나?'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처음 보내주신 사람인데............'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과 다시 계속 먹었습니다.

 

§방황했던 청년 시절의 가가와 도요히코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출신이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폐병환자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는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이 생각할 때

'성경은 거짓말이구나, 예수도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 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자살 직전에 나가노 목사를 만나다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살 전에 우연히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나가노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밥을 먹다가 피를 쏟았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밥을 차려 왔습니다.

그 순간에 이 청년이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완치 후 빈민사역을 하다

주님의 은혜로 청년의 폐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을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빈민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변비라고 합니다.

항문에 변이 차돌같이 굳어 있어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장갑을 끼고 손으로 후벼 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그 빈민들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후벼 주었지만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지처럼 더러운 빈민의 항문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고,

차돌같이 굳어 있는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 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일본 기자가 도요히꼬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도요히꼬 목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국에서 가가와 도요히코의 영향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서도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을 모셔서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도 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습니다.

일본군대와 함께 민간인들이 철수합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나라에서 일본 민간인들이 철수할 때

현지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본패망 당시에 중국 땅에 있던 일본인의 숫자는

200만 명에 달했으나 그 중에 단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의 항복 성명과 동시에 장개석 총통이 포고령 1호를 내렸습니다.

철수하는 일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게 된 배후에는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의 사역에 대한 감동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 실패했으나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나가노 목사는 평생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밖에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경제 논리로 본다면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가 과연 실패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없었더라면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없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빈민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 때

그 심중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중국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칠 때

그 속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겨라 /딤후4:16/ 가가와 도요히코 Kagawa Toyohiko

2015-06-24 15:28:55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유혹에서 떠나야 한다.

 

반드시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은 경제 원리이다. 그것은 업적주의다.

경제 원리, 업적주의가 꼭 나쁜 것은 아님, 필요함.

그러나 너무 극단적으로 그 쪽으로만 치우칠 때 문제가 되는 것임.

 

많은 한국의 대통령, 정치인들이

자신의 재임 기간 안에 모든 결과를 보려다가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도인들도 똑 같다.

내가 행한 일의 결과를 내 시대에서 내 눈으로 보려 한다면

우리는 정도를 벗어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결과를 내 세대에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원을 살면서,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경제 원리로만 본다면 바울은 철저히 (자기 세대에서)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자기처럼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또는 감옥으로 자기를 찾아 오는 사람들(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그의 만년의 고백을 들어보면, 아시아에서는 사람들은 다 자기를 떠났으며(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딤후 1:15)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할 때 자기와 함께 했던 자도 다 자기를 떠났다고 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결과로부터 자유하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하여 그 자신을 계속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 땅을 떠난지 3백년이 지나서, 저 천국 하나님의 품속에서

그 결과를 지금까지 영원히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

 

요셉은 자기 세대에 결과를 본 사람이고, 바울은 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는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과로부터 자유할 때 마음을 비운 자가 누리는 평안을 맛본다.

나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나머지 결과는 주님께 맡기자.

 

¨’가가와 도요히코를 키워낸 나가노 목사 이야기

 

§나가노 목사, 개척을 시작하다

20세기초, 일본에서 갓 안수를 받은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은,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는 어느 곳에 가서 교회를 개척할 것인가 일본 지도를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동서남북 100킬로미터 이내에 단 한명의 교인도 없는 곳을

찾고 보니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역 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 5년을 포기하지 않다

이 젊은 목사는 곧 그 지역으로 가서,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는데 교인이 오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지났습니다. 6개월 동안 교인이 아무도 오지 않으면

"하나님 뜻이 아니구나"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노 목사는 그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 주신 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무려 5년이나 꿋꿋이 지켰습니다.

 

§청년 가가와가 찾아오다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에 천막 교회의 커튼(입구)을 젖히고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초췌한 청년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지난 5년 동안 했던 그 어떤 설교보다도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하더니 식탁 위에 피를 쏟았습니다.

그는 폐병환자였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순간적으로 속에서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나?

이 사람을 지금 당장 쫓아 버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이 핏덩이를 쓸어내고 계속 함께 밥을 먹어야 하나?'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처음 보내주신 사람인데............'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과 다시 계속 먹었습니다.

 

§방황했던 청년 시절의 가가와 도요히코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출신이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폐병환자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는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이 생각할 때

'성경은 거짓말이구나, 예수도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 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자살 직전에 나가노 목사를 만나다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살 전에 우연히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나가노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밥을 먹다가 피를 쏟았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밥을 차려 왔습니다.

그 순간에 이 청년이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완치 후 빈민사역을 하다

주님의 은혜로 청년의 폐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을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빈민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변비라고 합니다.

항문에 변이 차돌같이 굳어 있어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장갑을 끼고 손으로 후벼 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그 빈민들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후벼 주었지만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지처럼 더러운 빈민의 항문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고,

차돌같이 굳어 있는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 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일본 기자가 도요히꼬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도요히꼬 목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국에서 가가와 도요히코의 영향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서도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을 모셔서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도 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습니다.

일본군대와 함께 민간인들이 철수합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나라에서 일본 민간인들이 철수할 때

현지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본패망 당시에 중국 땅에 있던 일본인의 숫자는

200만 명에 달했으나 그 중에 단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의 항복 성명과 동시에 장개석 총통이 포고령 1호를 내렸습니다.

철수하는 일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게 된 배후에는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의 사역에 대한 감동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 실패했으나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나가노 목사는 평생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밖에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경제 논리로 본다면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가 과연 실패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없었더라면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없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빈민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 때

그 심중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중국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칠 때

그 속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금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1년이라면? /39:4/왕하20:1-/딤후4:6-8/ Greg Laurie

2015-06-23 14:57:58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39:4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체감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합니다.

물론 시간의 절대량은 변하지 않지만, 나이든 사람들일수록 그렇게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저는 제가 초등학교 교실에 영원히 앉아있을 것처럼 느꼈습니다.

학교의 벽시계가 왜 그렇게 느리게 돌아가는지요? 집에 돌아가는 종이 왜 그렇게 느리게 울리는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50대가 되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가 하면,

한 달, 일 년이 금방 지나갈 뿐만 아니라, 지난 10년 단위가 정말 금방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는, 앞으로 내게 남은 날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보다,

더 작게 남았다는 것을 느끼고, 마음이 약간 초조해 질 때도 간혹 있습니다.

 

중년이란 것이, 제가 어릴 때는 30대 중반부터가 중년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제가 나이를 먹어보니, 그때는 중년을 너무 일찍 잡은 것이군요.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50대 중년이라도, 너무 상심하지는 마십시오.

백살 가까이 사시는 몇몇 분들 눈에는, 지금 우리 나이도 아주 젊게 보이니까요.

 

39:4, 본문을 다시 한 번 봉독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여러분, 간혹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살 날이 6개월, 또는 1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러지요.

물론 그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확률적으로 보면 아마 90%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2013년을 시작하는 즈음에, 한 번 그렇게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금년이 나의 마지막 남은 최후의 한 해라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렇게 가정하는 이유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 때,

우리가 정말 금년 한 해를, 남다르게 살지 않을까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마지막 그 한 해를 누구나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금년이 정말 나에게 그 마지막 한 해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매 해를, 내게 남은 마지막 한 해로 여기고,

한 번 지혜롭게, 또한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의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실제로 의사로부터

이제 당신은 살 날이, 앞으로 1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선고를 듣고서,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나는 더 자주 친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겠고,

그래서 우리 집 카페트가 더러워지고, 소파가 탈색되는 것을, 개의치 않겠다.

그리고 늙으신 부모님의 말씀 듣기를, 귀찮아하지 않고, 좀 더 귀담아 듣겠다.

 

나는 아이들과 잔디밭에서 노는 것을 더 자주 할 것이고,

그것 때문에 예쁜 잔디가 훼손되는 것을, 개의치 않겠다.

 

나는 TV를 보면서 울고 웃으며 보내는 시간을 좀 줄이고,

좀 더 많은 시간에 빛(, 영원, 하나님)을 바라보겠다.

 

우리 어린 아이들이 내게 다가와서 몸을 부빌 때에도,

얘들아, 지금 바쁜데 빨리 손 씻고 와서 저녁 먹어야지하면서, 그들을 밀어내지 않겠다.

 

내게 좀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정말 그것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헛되이 버리지 않을 터인데...

 

누가 나를 싫어한다거나, 누가 뭘 많이 가졌다거나, 누가 뭘 어쨌거나에 관계없이,

즉 그의 사회적 신분, 지위고하, 소유의 유무, 내 성향에 그가 싫고 좋음에 관계없이,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나는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최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면,

정말 의사로부터 ‘6개월, 1년 남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내가 평소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왔던 것들이

다 뒤바뀌게 됩니다.

 

오늘 내가 평소에 소중하게 여기고 좇아가던 모든 것들도,

그 때가 되고, 그 시간이 되면.. 허무한 것들로 판명이 나고,

 

오늘 내가 별로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죽음과 영원을 대면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소중한 것들이었음을.. 내가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금년을 내 마지막 한 해로 여기고 살자>는 이유는,

나중에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정말 소중한 것들을,

내게 시간이 좀 더 남아있을 때, 미리부터 소중하게 여기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진짜 소중하게 발견되는 것이

크게 보면 3가지, faith, family, friends입니다. 믿음, 가족, 친구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중에서 믿음과 가족에 대해, 주로 살펴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한 기자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만나서 인터뷰했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많이 연로하신데, 만약에 목사님이 중년을 다시 살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때는 지금과 달리 살고 싶으신 것이 있으신지요?”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가 연구를 더 많이 하고, 기도를 더 많이 하고, 여행(집회)을 좀 더 작게 다니고,

집회 약속도 좀 더 적게 잡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제 삶을 다시 살게 된다면, 기도와 묵상을 좀 더 많이 하고,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더 많이 하며, 좀 더 깊이 영원을 묵상하며 살 것 같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의 삶을 사신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되돌아보니,

<좀 더 영원을 생각하며 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만약 다시 살게 된다면, 좀 더 영원을 오래, 깊이 생각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선왕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병들어 죽을 것이고, 다시 회복되지 못하리라라는 암울한 선고를 받습니다. 38:1

 

히스기야는, 급작스런 사망 선고에, 아마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적적인 응답을 받아, 병을 치료받고, 15년을 더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그 15년 사이에, 므낫세를 낳았는데,

그는 남유다 역사상 가장 악독한, 하나님을 거역하는 왕이 됩니다.

 

남유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바벨론 포로가 된 배경에는,

므낫세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하나님이 격노하신 것이,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므낫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되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응답된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내가 누구랑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그때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여러분, 제가 히스기야를 예로 든 이유는,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의미 있는 삶을 살 때.. 장수가 축복이지,

죄를 짓고 살며, 제 멋대로 살 바에는.. 오래 사는 것이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위에서, 길게 살았지만, 말년에 잘못 살았던 사람의 예로 히스기야를 들었다면,

반대로, 짧게 살았지만, 아주 영광스럽게 살았던 사람, 짐 엘리엇을 살펴보겠습니다.

 

짐 엘리엇은, 신혼 4년차에, 1956, 에쿠아도르 아우카 부족에게 피살되어 순교하여

당시에 잠자던 미국의 선교운동을 일깨운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은 유명합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선교지에 같이 있었던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그토록 크게 다른 일이란 말인가?”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최후로 쓴 서신서입니다.

그의 인생 마지막 즈음에, (그는 디모데후서를 쓰고 나서 얼마 후에 순교했습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딤후4:6~8절에서 이렇게 나타나있습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바울은, 자기 인생이 주안에서 성공적이었으며, 만족스러우며,

이제 조금 후에,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자기가 끝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여러분, 젊은 사람들은, 항상 디즈니랜드로, 산으로, 바다로 가자!’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들은, 항상 그만 놀고, ‘빨리 집에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항상 집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처럼 나는 떠날 시간이 가까웠도다!’ 라고 말할 때가, 반드시 닥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내 인생을 잘 마쳤다. 내 사명을 다 끝냈고,

더욱이 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웠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되돌릴 시간이, 만회할 시간이, 그 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6절에 바울이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고 했는데,

여기서 떠나다는 말은,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던 막사를 걷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할 때 쓰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사가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이생에서, 저 천국으로 이사를 떠나는 것입니다.

 

뭐가 없어졌다가, 천국에서 다시 생기는 게 아니고, 내 영혼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지상에서 천국으로 이사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이나 들판에서 텐트치고 자는 캠핑을 해 보십시오.

그게 즐거우면서도, 불편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집이 훨씬 편합니다.

그래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지잖아요? 경험해 보셨지요?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는 사도바울의 심정이, 지금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편하자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고, 자기 사명을 끝냈으니까, 내가 왔던 곳 천국/고향에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금년이 여러분의 최후의 한 해라고 가정해 보십시다.

본문의 사도바울처럼, 내가 최후를 맞이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때 여러분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는 후회가 없다. 그래서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

나는 그렇게, 바울처럼,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들 가운데, 그렇게 바울처럼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80%의 신자들은, 후회하며, 아쉬워하며, 황급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금년을 나의 마지막 한 해로 여기며 살자>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또 <그 해를 나의 마지막 한 해로 여기며 살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금년이 나의 마지막 한 해이다>라고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금년이 마지막 한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일이라도 당장에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빌리 그래함의 인터뷰 말고,

최근에 제가 목회자 디너 모임에 가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회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 당신은 살아생전에 참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직 더 남은 일이 있다.. 아직 하지 못한 일이 있다.. 라고

생각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주저함 없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건 세계복음화도, 전도집회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 룻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사실 룻 사모님은, 몇 해 전에 먼저 소천하셨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여러 곳을 방문하시면서, 많은 성취와 업적을 남기셨지만,

한 가지 후회랄까, 자기 삶을 되돌아볼 때,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은 가족과 함께 더 오붓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신 것이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정말 혼신을 다해,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지만,

그런데 우리는.. 엉뚱한 일에 매달려서 시간을 다 허비하고, 나중에 후회할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인생을 한참 진행 중일 때는.. 여러 성취와 업적들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제 떠날 기약이 가까우면’.. 가치관이 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현세적 가치관에서, 천국 영생의 가치관으로 변화됩니다.

 

그때는 성취나 업적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중요하고,

-가족이 중요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 믿음의 친구들이 중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고, 땀을 흘리고, 분초를 아껴야 하지만,

 

만약 그것이 만에 하나라도, 나의 명예와 업적과 관련된 것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집에서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나누며, 주님과 교제하는

개인적 친밀한 시간을 갖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가 많은 모임을 갖고, 대회를 열며, 모여서 바쁘고 거창한 일을 하지만,

어쩌면 그 중에는, 영생의 관점에서 볼 때, 별로 불필요한 일들도

되돌아보면 많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뒤를 돌아볼 때도..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붙잡혀져서,

그 분의 강권적인 섭리 속에 철저히 살아가지 않으면,

 

내가 명목상 주님을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 땀을 흘리며 수고했지만,

실제로는 내 이름과 내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수고한 일이 될 때,

우리는 내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탕진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냥 술먹고 방종하며 자기 생을 낭비한 것이나,

명목상 주의 일, 사역을 하면서 낭비한 것이나.. 낭비한 것은 똑같게 됩니다.

 

예를 들면, 실제로 그런 의사가 있는지 모르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부 의사들은, 자기가 잘 나가는 바쁜 의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괜히 세미나에 좇아다니고, 환자들 기다리게 하고, 사람들 눈에 굉장히 바쁘게 사는 것처럼,

시간에 매우 쫓기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고자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비단 의사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그저 자기가 바쁘게 사방을 돌아다녀야.. 유능한 인생인 것처럼, 그렇게 비춰지기를 원합니다.

다만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헛된 일에 낭비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80년 산다고 하지만,

사실 주님을 위해 사는 소위 골든 아워’(황금기)20년이거나, 길면 30년에 불과할 것입니다.

특별히 크리스천의 중년기는.. 그 골든 아워를 지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골든 아워 20년 중에,

한 해, 한 해를,

정말 금년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남은 한 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20년은 긴 세월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이끌려, 주님께 잡아채져서, 주님의 섭리가운데 수동태로 살게 되지만,

그때 불평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억지로 끌려가지 말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옆사람과 이렇게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금년 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후회 없이 살자는 것입니다.

 

금년 2013년 연말에, 내가 주님을 만나고 뵙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금년 한 해를 한 번 살아보십시다.

 

그래서 주님께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라고

칭찬을 듣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음의 의미 /딤후4:6-8/ 이동원목사

2014-12-05 21:22:38

 

미국의 부자 가운데 윌리암 할스트 라는 이름을 가진 부호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자기 나이 60세가 되었을 때 자기 자녀들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내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절대로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도 말아라! 이렇게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로마 역사를 읽으면 로마의 한 황제는 신하들이 아침마다 자기를 알현할 때 마다 폐하 이시여 죽음을 기억하시요이렇게 인사를 하도록 자기가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윌리암 할스트라는 부자는 죽을 때 무지무지하게 고생을 하면서 고통 속에 몸부림하다가 갔는데 이 로마의 황제는 아주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죽음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만 승리를 그리고 안식과 평안을 줄 수 있다는 하나의 레슨이요, 교훈일 것입니다.

 

아무도 이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에서 예외인 인생은 없습니다. 좀더 빨리, 좀 더 늦게의 차이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번은 세상을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충청도 사람을 만나서 충청도 사람은 천당도, 죽는 것도 천천히 가겠다고 좋겠다고 그랬더니 그분이 절대로 그렇지 않대요. 죽음에 관한한 충청도 말이 제일 급하답니다.

 

사실 표준어로 돌아가셨습니다.”이렇게 말을 하는데 아마 경상도 사람은운명하셨다 아입니꺼?” 뭐 이렇게 말하겠죠? 뭐 전라도 사람이면 모르겠어요 이세상 버렸어라우버렸당께, 뭐 이렇게 할지 모르지요. 그런데 충청도가 제일 급하대요 갔시유하하하 녜,

 

이번 추석 명절에도 이 땅에서는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을 위해서 고향으로 갈 것입니다. 또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조만간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반드시 찾아올 죽음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가올 죽음을 준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죽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무엇보다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함께 읽었던 이 본문을 바울 사도가 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 AD 67년경에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 오늘 본문은 어떤 말씀으로 시작했습니까? 6절에 보시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는 말로 시작 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우리가 구약시대의 제사 규례들을 좀 연구해 보면 여러가지 제사가 있죠. 번제 뭐 속죄제 서헌제 낙헌제 이런 제물을 드릴 때 일반적으로 보통 제물을 준비하고 양이나 염소를 이렇게 각을 뜹니다. 그 다음에 깨끗이 씻고 여러가지 그 의례 가운데 마지막 절차가 뭐냐하면 포도주를 붓는 것 이에요.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제에요. 전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마는 다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서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자기의 마지막 숨결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지금 예감하면서 지금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있었던 죽음은 어떤 것이 였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의 의미를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첫째로 죽음은 떠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떠남입니다.

 

오늘 6절에 보시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이렇게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란 떠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육체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 보시면 성경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이 떠남이라는 단어는 결코 어떤 의미에서도 허무나 종말을 뜻하지 않습니다. 소멸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죽음은 결코 비극적 종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구절에 사용된 떠남이라는 단어, 나의 떠날 것이 가까이 왔다, 이 떠남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는 그냥 “de-par-tur” departur, 출발, 이런 단어로 쓰여져 있습니다마는 희랍어에는 아날루시스라는 단어가 쓰여집니다.

 

그런데 본래 이 희랍어는 두가지 용도로 쓰여졌던 단어라고 합니다. 한가지 경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천막을 가지고 다녔어요, 장막을. 그래서 한 장소에 도착하면 장막을 칩니다. 천막을 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일정한 기간이 지난다음에 다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게 되면 천막을 매고 있었던 줄을 풀 때, 푼다는 것이 바로 이 떠난다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 어근입니다. 또 하나, 이 떠난다는 단어가 사용된 다른 용례는 이런 것입니다. 배가 항구에 매여있다가 이제 출발을 하게 되면은 닻줄을 풀어요. 닻을 올리고 닻줄을 풀 때 바로 이 떠난다는, 배가 떠날 때 이 단어가 쓰여집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출발이라는 떠난다는 이 단어는 그 의미가 종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여행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여행의 출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죽음은 결코 소멸의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 주변 그 교파 가운데 흔히 이단이라고 불러워지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혹은 안식교 가운데서는 죽음을 소멸로,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결코 소멸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렸을 때 그 피크닉을 갈 때 소풍을 갈 때는 어떤 그 소풍에 대한 피크닉에 대한 흥분 같은 것이 우리 마음 속에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성인이 된 어른이 된 지금도 어떤 낯선 미지의 장소를 향해서 여행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가벼운 흥분이 우리를 들뜨게 만듭니다. 저는 이것이 정상적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알고있는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기다리는 죽음의 경험일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본 헤퍼가 반 나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죠? 그리고 이제 마지막 교수형을 받기 위한, 간수가 나갑시다!”라는 신호를 주었을 때 직감적으로 그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을 때 본 헤퍼는 감옥에 같이 있었던

 

동료 수인들에게 이런 인상 깊은 인사를 남겼습니다. “친구 여러분, 이제 저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결코 저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저는 새로운 여행을 위해서 출발합니다이것은 얼마나 당당한 죽음 앞에서의 고백 이였는지요.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떠남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둘째로 죽음은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죽음을 경험하는 과정에서의 어떤 고통,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때문 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살아왔던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집착이나 미련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보다 깊숙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저들을 볼 수 없다, 만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부터 떠나야 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부터 떠나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번 미국의 대 테러, 이 참사사건 때도 보면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가장 안타까운 사연들은 그들의 최후를 절감한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겼던 전화의 멧세지들이 아니였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셀루러폰, 핸드폰을 가지고 그들은 최후를 절감하며 전화한 사람들의 많은 사연들이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들은 애인이든 혹은 어머니든 또 사랑하는 자기의 남편이든 아내든 그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고백을 하고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여보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연기가 차오르고 있어요 큰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그러나 사랑했어요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인사를 남기고 싶어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하와이 코나의 열방대학에 목회자 부부 세미나를 위해서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같이 있었던 목사님 가운데 뉴욕에서 오신 목사님이 있는데 이제 계속 전화로 접촉을 시도한 끝에 이런 소식을 알려왔어요. 자기 교회 교인 한 사람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있다가 자기의 죽음을 예견한 그 순간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도 안받는 거에요. 교회로 전화했어요. 그래서 교회 부목사님이 받았답니다. “목사님 죽을 것 같아요. 우리 식구들에게 전해 주세요 제가 정말 사랑했다고, 그리고 교우들에게 전해주세요 정말 사랑했다구요 감사하다구요. 그러나 저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떠난다고 꼭 전해주세요그리고 전화는 끊겼다고 합니다. 이런 가슴 아프나 감동적인 사연들이 지금도 우리를 울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슬픔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결코 마지막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시 만남의 약속이 확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의 확신이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확신이 아니였습니까?

 

빌립보서123절에 보시면 바울은 이런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두 사이에 끼였다는 것은 삶과 죽음사이에 끼였다는 말이죠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

 

다시 들어보세요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떠나서그 다음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

 

그렇습니다. 떠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떠남은 이와 같은 만남을 전제로 한 것이요 따라서 떠남은 곧 만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과 더불어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임제를 경험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경험이에요. 지금 이 땅에서 우리는 주님의 임제를 부분적으로만 경험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마치 그것은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죽음을 통해 주님 앞에 서는 날 거울을 통해 봄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온전하신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죽음의 경험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찬양하던, 사모했던 그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들에게 있어서는 결코Good bye~ 라는 인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네 자녀가 있었는데 세 자녀에게는 꼭 같은 인사를 주었다고 그래요. “다시 만나자! 천국에서, see you again in Heaven” 다시 천국에서 만나자! 그런데 한 아들에게 만은 쟈니 굿 바이, 굿바이”.

 

아버지 저에게는 다시 만나자고 왜 그러지 않아요?” “쟈니야! 너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잖니? 우리에게는 다시 만남의 소망이 없지않니? 쟈니야 이 아버지가 너에게 다시 만나자고 얘기할 수 있도록 해 줄 수는 없겠니?”

 

그때 비로소 아버지 앞에 터지고 울면서 이 아들은 아버지 저도 아버지가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세주로 믿어요힘없는 손이지만 아빠는 전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손과 몸을 끌어 안으면서 그래 아들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그래서 죽음은 만남인 것입니다. 죽음은 떠남이요, 동시에 죽음은 만남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은 상급입니다. 오늘 본문을 그렇게 가르칩니다. 죽음은 상급입니다.

 

여러분 죽음의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떤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입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지 라는 어떤 감정 말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그와 같은 무력감을 하나님께 대한 의존감으로 바꿀 수가 있어야 하겠다는 사실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때 가장 좋은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저는 이것이 매우 성경적 교훈이라고 생각해요.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그랬는데 그 천국에 들어갈 때 가장 좋은 자세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아기로서 출행할 때 또 아기로서 방금 태어나 자라날 때 우리는 무력하지요. 어쩔수 없어요.우리는 다만 우리를 돌보는 그 부모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면 기껍게 우리를 안아주시는 바로 그분들의 임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저는 죽음의 경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우리 예수님도 그런 태도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주님을, 하나님을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의존하는 태도.

 

사랑하시는 여러분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라는 것은 어떤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쥐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몸부림의 순간순간을 이땅에서 살아갑니다. 죽음은 이 몸부림을 마지막으로 포기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몸부림을 주 앞에서 깨끗이 포기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창조주 앞에 마지막 내어드리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의 순간이죠.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몸부림을 치면 부모도 편히 안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기가 자기의 존재를 그냥 내어 놓을 때, 그냥 내어 놓을 때 아빠와 엄마는 자기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자녀를 끌어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았던 마지막 내 존재를 주앞에 내어놓는 그 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완벽한 임제 안에서 우리를 끌어안아주시는 경험,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란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저는 본문을 기록하던 바울사도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감옥에 들어가서 이번에는 마지막이다 하는 예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때 바울 사도에게 할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할 일이 없었어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이제 기다림이 였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아직도 억울한 감정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심정으로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이것이 바울 사도의 수동적인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그것은 희망적인 신뢰요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8절에 본문의 고백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지요. , 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이제 후는 나를 위하여 의로우신 재판장이. , 그의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까? “의로우신 재판장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을 여러분 놓치지 마십시요.

 

당시에 바울사도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그 당시를 지배하던 로마의 황제에게서 그는 불의하게 체포되었고 로마의 법정은 그를 불의하게 단죄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의로우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은 나를 아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상급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순간의 바울의 고백이 아닙니까?

 

다시 한번 읽어보시면 이 8절에서 계속 강조되는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어요. 어떤 단어입니까? “의의라는 단어죠.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여기 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지않습니까?

 

그는 불의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세상에 의해서, 또 불의한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순간 바울은 자기를 정당하게 판단해 주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의의 면류관으로 상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 주 앞에 설 때 받을 수 있는 상급, 면류관이 성경에 여러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나와요.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특별히 의의 면류관을 강조합니다. 의의 면류관.

 

세상은 불의하게 나를 단죄했지만 세상은 불공평하게 나를 대접했지만 의로우신 하나님 의의 면류관으로 나를 상주실 주님을 바라본다고. 바로 이 믿음 때문에 바울은 이 불공평해 보이는 죽음 앞에 서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담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비단 바울사도의 고백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우리의 고백 우리의 경험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바라볼 때 혹은 우리가 사랑했던 어떤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볼 때 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이렇게 죽어가다니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얼마나 많은 삶의 불공평함을 경험하면서 이땅에 살고있습니까?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마지막 순간에 시선을 들어 역사를 주장하시는 아직도 의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의롭게 온 역사를 판단하실 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내게만 아니라 나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주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로 상주실 주님을 바라보라고 고백하고있는 이 당당한 바울 사도의 고백,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죽음은 승리였으며 죽음은 안식이였으며

 

그리고 그 죽음은 상급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일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상급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녕, 정녕 말이지요 이 마지막 우리를 찾아올, 다가올 죽음이 우리의 당당한 승리로 처리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인생을 어떻게 살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 다시 한번 본문의 7절에서 대답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대답은 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7절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믿음을 지켰다. 그 다음 8절에 이제 후로는,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만약 여러분과 저에게 7절이 없다면 8절은 기대할 수 없는 것 이에요. 그렇죠?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었다면,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었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면 바울처럼 이제 후로는 의의 하나님 의의 면류관으로 저를 상급주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 이 당당한 고백, 마지막 당당한 승리를 주님 앞에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는 다시 한번 7절의 고백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아있는 인생, 선한 싸움을 싸우시겠습니까? 달려갈 길을 정말 완주하시겠습니까? 이 선한 싸움이나 달려갈 길은 모두가 경기장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 그래서 전쟁터 상상하시면 안돼요. 바울은 전쟁터라는 의미가 아니라 경기장이라는 의미로 지금 이 표현을 써고 있는 것입니다. 복싱 경기장, 그런데서 경기지만 싸움을 하잖아요.

 

, 경기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완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챔피언을 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경기자의 미덕은 끝까지 완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완주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히브리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는 이이신 누구? “예수를어떻게 바라보자? 그런데 그 말은 이런 뜻이에요. 믿음의 주요 라는 말은 믿음을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믿음의 장본인, 믿음의 저작자, 믿음의 출발자, 그리고 믿음을 완성시켜 주실 분.

 

우리는 주님 때문에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놀라운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죽음 건너편에 영원한 소망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믿음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는 인생의 길, 그리스도인들의 여정은 믿음의 레이스요 믿음의 여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 주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 자산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어떤 재산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믿음은 자산 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레이스를 완주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상급을 기대 할 수가 있습니까? 두 가지에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이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 이렇게 말합니다. “지켰다그런데 이 지켰다라는 표현은 본래 아주 보물을 관리할 때 써여지던 단어라고 그래요. 믿음은 보물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잘 관리해야지요. 여러분, 가정에 보물 다이야몬드가 있다고 하십시다. 여러분은 정성을 다해서 관리할거에요 보험도 들고, 뭐 굉장히 관리를 할꺼에요. 믿음은 이 모든 보물보다도 더 존귀한 것, 그렇다면 믿음을 잘 지키셔야 돼요. 저는 여러분이 믿음 지키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는 종종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어떤 유혹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적이 아닌 다른 교훈,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3절을 보시면 자, 디모데 후서 43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우리 인간에게는 호기심이 있어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날 귀가 가려워 져요.

 

무슨 신가한 소리 없나? 그러다가 이단에 빠질 때 우리는 이 존귀한 믿음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잘 지키라고. 그러나 지키는 수세에서 끝나면 안돼요. 더구나 나는 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이 존귀한 인생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이 믿음을 나만 간직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믿음을 나누십시요. 그것이 전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다음절 5절에 보시면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이 믿음의 전하는 삶을 살라고. 이 보배로운 믿음 이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오늘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았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믿음을 나누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 우리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교했는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924절에서 꼭 같이 신앙생활을 경주로 표현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사람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상을 얻도록 달음질 하라. 상을 얻도록 달음질 하라.

 

그런데 바로 그 직전22절에 보면 상 얻는 방법을 말해요. 그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내가 구원코자 함이라. 내가 이 존귀한 믿음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때 그들은 나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믿음을 지켰고 이 영광스런 복음에 믿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저는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 우리 서선옥 집사님의 영결예배가 천국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발인예배 병원에,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많이 오셨어요 너무 많이 오셨어요. 왜이렇게 우리 교인들이 많이 왔나? 조금 생각해 보니까 그 분이 뿌린 씨았이였어요. 우리 서집사님 전도폭발 훈련 받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 아니였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분은 참 이런 상을 당한 어려운 가정을 위로하기 위해서 경조 성가대로 상을 당한 사람들의 집에 늘 그 분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분이 떠나가시는 날,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의 복음을 받았던 사람들이 와서 그 분을 전송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사건 이였습니다. 좀 빨리 가셨지만, 저는 그날 아침에 나오면서 정말 서 집사님의 출발은 아름다운 떠남이군요,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은 많이 남지않았습니다. 남은 세월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번 추석절에 주께서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신 보배로운 믿음을 이웃들과 가족들과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다가오는 우리 이웃사랑 축제에 우리가 이웃들에게 이 복음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될 수가 있을까요?

 

저는 남아있는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그 길을 바라보면서 제가 좋아하는, 여러분 가운데 좋아할 분이 많을 미국의 시인 이였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그 눈 내리는 저녁 호숫가에 걸음을 멈추고라는 시의 마지막 문단을 여러분 앞에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 몇 마일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게는 지킬 약속이 있다

 

 

 

But 1 have promises to keep

 

내게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내가 잠들기 전 걸어야 할 몇 마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남아있는 그 걸음 속에 죽음을 준비하는 영광스럽고 당당한 인생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함께 일어나서 기도할 때 조용히 한번 기도하면서 여러분이 걸어왔던 인생을 좀 생각해 보시고 또 한번 다가온 추석절 우리가 얼마나 추석절을 더 이땅에서 갖게 될까요 무한히 갖는 건 아니에요.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이 땅의 마지막 추석절을 맞게 되고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사랑했던 사람이 없이 추석절을 맞이해야 하는 분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그런 가정이 금주에도 여러 가정에서, 그렇게 죽음은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음이 찾아와도, 그 분 앞에 부끄럽지 않는 당당한 인생의 결산, 그 아름다운 죽음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의 남아있는 걸음을 정말 달려갈 길 다 달리고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믿음을 잘 지키고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인생 살아가도록 하나님 도와 주십시요.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함께 복음의 말씀을 나누어야 할 이웃들과 가족들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이 보배로운 복음으로 저를 구원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주셨기에 이제 이 소망을 나누어야 할 가족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우리 가운데 우리 주변에 이 복음을 받지 못한 이웃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 놀라운 복음을 생명의 복음을 나눌 수 있도록 도우시고 내 사랑하는 이웃들이 가족들이 주앞에 돌아오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에 남아있는 날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 다 달렸다고 이제 믿음을 지켰다고 그 마지막 승리로운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인생을 위하여 우리 믿음 잘 가꿀 수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이 믿음이 새로운 생명을, 믿음이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믿음이 나에게 영생을 줄 수가 있었기에 이 보배로운 믿음을 내 사랑하는 이들과 나눌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아직도 우리 가족 가운데 주님 앞에 돌아오지 못한 식구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속히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감동 속에 주 앞에 돌아오게 도와 주십시요. 이 가을이 그들의 영혼에 돌아옴을 주앞에 추수로 드리는 감격의 계절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마지막 찬양 내 인생 여정 끝내어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 때에

 

시험과 환란 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내 밟은 발걸음 마다 주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기도하십시다.

 

때로 인생이 회색처럼 보이시는 분 또 내 뛰어넘는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시는 분 혹시 천국의 소망이 영생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요? 교회는 이따금씩 왔다갔다 하지만 아직도 천국의 소망이 없는 분들,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마음속에 확신이 없는 분들, 그러나 나도 오늘 성경의 말씀처럼 바울의 고백처럼 그런 죽음 앞에서의 확신을 갖고 당당하게 담대하게 인생을 살고싶어요. 그런 분들 계시면 조용히 한번 가슴에 손을 얹어보세요. 그리고 이 시간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확인해 보세요.

 

조용히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저 여기 왔어요 저를 받아주세요. 저에게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저의 죄를 씻어주시고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 분을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그 분 안에 소망을 두고 살겠습니다. 저를 인도해 주십시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주님을 경배하고 내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리고 주께서 내게 주신 이 놀라운 은총을 인해서 구원의 선물을 인해 영생의 선물을 인해서 감사하며 죽음 저 건너편의 소망을 내다볼 수 있는 고백을 가지고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이 소망 없이 살있는 우리의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나누기로 결단하며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과 화평케 하심이 이 추석절 복음을 나누는 모든 현장마다 성령의 감동과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웰빙(Well-Being)에서 웰다잉(Well-Dying)으로 / 딤후4:6-8

2010-07-02 10:53:39

 

지난 한 주간은 죽음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한 시간 반 간격으로 사랑하는 민우진 집사님과 이영한 성도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두 분을 바라보면서 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인간의 무력감에 대한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목요일 아침 민 집사님과 한 시간 가까이 말씀을 나눴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다고 말씀하셔서 마음의 짐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이제는 모든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감사의 조건을 찾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시면 마음을 지켜주시고,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라고 했습니다. 그 핵심은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4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편안히 안겼습니다.

 

이영한 성도님은 화요일 날 병상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기력이 쇠했지만 아멘으로 신앙을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샘물 호스피스에서 너무나 평온하게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이영한 성도님이 병원에 있을 때 병이 회복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 대답이 학교 앞에 가서 붕어빵을 구워서 전도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지에 가서 봉사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두 분의 건강회복을 위해서 시간마다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건강하게 회복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슬픔과 고통을 그치게 하시고,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부르셨습니다. 슬픔당한 유족들과 함께 기도한 성지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오늘 죽습니다. 그 죽음의 그림자는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란 실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그것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두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하루의 삶 속에서도 많은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러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지나칩니다.

 

특별히 동양적인 사고는 죽음을 터부(금기)시합니다. 죽음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우리는 공동묘지 하면 왠지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나타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가급적이면 묘지는 집으로부터 먼 곳에 만듭니다.

반면에 서양인들은 죽음을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합니다. 유럽이나 미국을 보면 멋진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원은 대부분 공동묘지입니다. 공동묘지에서 가족들이 함께 소풍을 즐기고, 일광욕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 지하에 가면 대부분 묘지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알려진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시무하는 수정교회에 가면 교회 옆에 그림처럼 멋진 묘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멀리 있는 실체로 보지 않고 항상 가까이 있는 친구처럼 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든지 간에 죽음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웰빙(Well-Being)의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웰빙 아파트, 웰빙 음식, 웰빙 운동, 웰빙 여행, 웰빙 산업에 이르기까지 온통 웰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며 애를 쓰고 있습니다. 건강을 유지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의 그림자는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옵니다.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 김달진 님은 “60세에는 해마다 늙고, 70세에는 달마다 늙고, 80세에는 날마다 늙고, 90세에는 시마다 늙고, 100세에는 분마다 늙는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세월 따라 늙어가는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이라는 그림자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바울 사도를 만납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소망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죽음을 바로 앞두고 한 고백입니다

 

. 6절에 나오는 전제(a drink offering)’는 제물 위에 술을 부어서 드리는 제사로 바울이 자신의 순교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몸을 주님의 제단에 드릴 순교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 앞에서 주저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7-8)

 

어떻게 사도바울은 죽음 앞에서도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육신의 웰빙이 아닌 영적인 웰빙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육신의 편안함을 좇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쉽고, 넓고, 편안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웰빙을 넘어서 웰다잉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잘 살다는 것은 곧 잘 죽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렸다 할지라도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는 인생, 죽기 싫어서 몸부림치는 인생이 된다면 그것은 웰빙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 죽음 앞에 직면하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웰다잉이 진정한 인생의 승리요 멋진 마무리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는 잘 죽는 방법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웰빙을 넘어서 웰다잉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면 방황합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은 던져보는 질문이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철학이나 지식이나 과학, 그 어떤 것으로도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고행을 하고, 수고를 해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스스로를 진화의 산물로 여깁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양육강식의 논리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갈등과 투쟁의 삶을 삽니다. 소유의 가치에 집착하여 자기 이기심의 노예로 삽니다. 운명의 노예가 되어서 불행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태어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가장 가치 있고, 뛰어난 작품이요, 특별한 사랑을 받는 자임을 압니다. 누구와 바꿀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운명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투쟁이나 갈등이 아닌 조화와 협력을 통해 평화를 추구합니다. 항상 내가 보는 나가 아닌, 남이 보는 나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신을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3:1-4)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의 험난한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도 주님은 함께하십니다. 우리들이 연단의 불을 통과할 때도 주님은 동행하십니다. 다른 족속을 죽여서라도 택한 나의 자녀들을 끝까지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계속해서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17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나와 함께 기쁨의 춤을 추며 노래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웰다잉의 삶을 위해서 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라는 가치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구속하시고, 모든 상황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인정하는 자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나를 최고로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으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내게 주어진 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실천할 때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벧전4:8에서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했습니다. 17:9에는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하는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은 남의 허물만을 찾아 헤맵니다. 남의 허물을 보고 기뻐하는 자는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톰 행크스(Tom Hanks)가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톰 행크스는 극중 특급 우편배달 회사 직원으로 나옵니다. 1, 1초를 아껴가며 정확하고 빠른 배달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태평양 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면서 일상생활에서 겪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켜야 할 약속 시간도, 배달 시간도 없습니다. 천연의 시간만이 주어져 있습니다. 절대 고독의 시간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무인도에서 주인공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며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입니다. 우선 물질, 무인도에서도 필요한 음식과 의복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과 생각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감독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희망과 사랑입니다.

주인공은 머리맡에 사랑하는 여인의 사진을 놓아두었습니다. 사진 속에 여인은 주인공이 더 이상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막아 주었고, 날마다 약해져만 가는 주인공에게 무인도를 탈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주인공은 4년 만에 무인도를 탈출합니다. 탈출 후에 그 동안 자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던 사진 속 연인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떠나버린 후였습니다. 거기서 주인공은 자신을 살린 것은 여인을 사랑했던 사랑, 그리고 여인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일들, 즉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희망이 자신을 무인도로부터 건졌고, 사랑이 자신을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일어서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희망 때문입니다. 현실을 넘어 세상이 줄 수 없는 희망, 그 출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 사랑의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소성케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 가운데 물붓듯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서로를 힘써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최고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모든 희망의 원천은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면 그것이야말로 허망한 일입니다.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듯이 우리는 지금 육신의 고치에 싸여있지만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나비가 되어 힘차게 날아오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소망, 이것이 오늘 우리의 삶을 웰다잉으로 채워가는 힘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소망으로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아직 내 안에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아직도 내 안에 용서해야할 사람이 있지는 않는지요? 더 늦기 전에 당장 하시기 바랍니다. 작자 미상의 <지금 하십시오> 라는 시가 있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때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지금 사랑하며, 지금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산다면 그것이 바로 웰다잉의 삶인 줄 믿습니다.

 

셋째로, 내게 주신 사명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은 삶의 분명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헛된 것을 붙잡고 산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푯대가 아닌, 잠시 있다 사라지는 푯대가 아닌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 푯대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신앙의 푯대입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함과 사랑을 배워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인생의 모든 푯대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췄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그의 인생은 목숨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에 주어진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온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인생의 죽음 앞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굳게 지킨 바울은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가장 멋진 웰다잉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에 보면 자동차 정비사 카터와 재벌사업가 에드워드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같은 병실을 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리스트를 만듭니다.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스카이다이빙,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 두 사람은 병실을 박차고 나옵니다. 두 사람은 리스트에 있는 내용을 실천하면서 가족과의 화해와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시한부 인생이 된다면 내 인생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는 무엇입니까?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허둥거리는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내 인생의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야 합니다. 덧없이 흘러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이며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장인 엘리자베스 퀴블로스는 인생수업이란 책에서 인생의 작별을 앞둔 101명이 말하는 삶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웰다잉의 삶은 결국 오늘이라는 주어진 나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미 있게 느끼고,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언젠가 오늘 우리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확실하게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삶의 푯대를 향해 전심전력하십시오. 이 모든 것을 지금 당장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웰빙을 넘어 웰다잉을 준비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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