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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잠언설교 모음

잠언 16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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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잘 하는 사람 /16:3-/ 김병삼 목사

2016-03-09 13:47:32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 - 15.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기도 생각하기

"저 사람 기도 '' 하네." 그리고 "저 사람 기도 참 '' 하네."

한국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잘 아시나요?

 

기도는 청산유수처럼 잘하지만, 뭔가 가식적인 사람을 두고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정말 신실하게 기도를 잘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오늘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밸런스가 잘 맞아야 합니다. 실상 우리 교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모양은 기도이지만, 하나님과 무관한 기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기도를 습관적인 기도라고 표현하는데,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이러한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기도”(6:7)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 3:5)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 뜻을 바꾸려는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기도는, 정욕적이고, 욕심이 있고, 시기와 질투와 분냄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기도하지만, 육신의 일을 도모합니다.

 

기도하지만,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내 옛적 자아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기도하지만, 용서도 일어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유명한 시인 릴케(R. M. Rilke)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 한다는 것은 내가 보고 판단하는 모든 육신의 눈이 감길 때 시작됩니다. 진정으로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내가 듣던 육신의 소리와 주변의 소리로부터 차단될 때만이 들려집니다. 이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이 내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이 내려지면 나의 정욕과 이기심은 물러가게 됩니다.

 

기도는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을 향한 나의 소원과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가운데서 반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면 잘못된 기도, 혹은 비인격적인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책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에 보면 아주 짤막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영국에 있는 링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건물은 길이가 거의 210m나 되는 큰 건물이었고 예배당 중앙에는 오르간이 있습니다. 예배의식을 진행하는 성가대와 집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멋진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예배를 드리면서 혼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이 웅장한 예배실과 이런 멋진 의식! 나도 멋진 기도를 해야지.”

,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해 계신 우리의 아버지시여! 오늘 아침 우리는 주의 존전에 모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닥쳐라. 우리는 종일 대화를 나누는 사이인데 이제 와서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해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어쩌면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적인 기도를 가장 싫어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시고, 쌍방 간에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우리들의 삶이 점차로 교정되어 가기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당신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는 것 이상입니다. 기도는 듣는 것도 포함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기도 중에 말씀하시는 것이 당신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도는 관계성이지 하나의 종교 활동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당신에게 조정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서, 당신의 인생을 통해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적이었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기도에 대하여 이런 정의를 내렸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반복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아뢰므로 일어나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반응하는 순종까지를 포함합니다.

 

 

기도는 전적인 위탁이다!

오늘 본문의 잠언 163절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영역을 맡기고 그분의 경영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맡긴다!"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Commit to the Lord whatever you do, and your plans will succe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주께 위임하면 성공하리라는 것이죠.

 

이 말씀 중에 우리가 무게 중심을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사실 기도하고 우리가 실망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맡긴다!"라는 말씀에 무게의 중심을 둬 보세요. 하나님께 맡긴 일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계획조차 그분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기대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라 기대의 결과조차 하나님께 완전히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점점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경험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대보다 더 완전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7절에 우리가 잘 아는, 하지만 잘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전적인 위탁'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이 말씀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whatever you do."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분께 맡긴다는 것은 또한 기도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대부분 우리가 생각했던 기도는 "청원하는 기도"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대적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사단이 무서운 생각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대적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나태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 무서운 생각이 들고, 삶이 우울해질 때, 우리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대적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배시간만 되면 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신인 관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마귀는 대적하면 도망가지만 대적하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고 우리 속에 계속해서 머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 것이 분명할 때 대적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기도를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보다 대적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가끔 신앙인 중에도 "나는 원래 이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를 믿고, 기도하는데도 바뀌지 않는 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고 기도하며 살아가는데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에서 '방어기도'가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하여 누군가 부정적인 생각이나 이미지를 갖지 않도록 방어하는 기도를 미리 하는 것입니다.

 

저의 예를 든다면, 설교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은혜 받는 사람, 삶이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나도록 저를 사용해 주세요."

 

주일 아침에 1부 예배를 마치고 나면 장로님들이 함께 빈 성전을 향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곳에 앉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미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미리 준비되고 역사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도이다!

우리가 흔히 기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혹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화하기보다는 일방적인 선언이나 간구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문제를 가져와서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대적하는 기도를 담대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 답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방적인 시간이 계속됩니다. 매일 새벽마다 동일한 기도를 하고, 또 그 다음 날 찾아옵니다.

 

사실 기도하면서 우리가 변하지 않는 것은, 기도하면서 응답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변하려 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라고 했는데 어떻게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었을까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양들에게 목자의 소리만 들렸을까요?

 

많은 사람의 소리 가운데 자신을 인도하는 소리,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따랐을 때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는 소리를 구분하게 되지요.

때때로 많은 소리 때문에 구분하기 어려웠을 때도 있고, 다른 소리를 듣고 낭패를 본 경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전에 살던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얼마나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신앙이 땅에 떨어졌는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지만, 음성을 들어본 경험이 없었던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저를 부르셨나요?" 몇 번 이 같은 일이 반복되자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알려줍니다.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삼상 3:9)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응답합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엘리 제사장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힘든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와 구분하는 능력이 아닐까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의도적으로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음성이 들려오면 많이 힘들고 귀찮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기보다는 가는 길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겠다는 태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 그런 마음의 소원이 생겼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욕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매일같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적어보고 다음 날 아침에 적어둔 말씀에 'O' 표나 'X' 표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은 'O' 표 아니었던 것은 'X' 표를 하는 것이지요. 자꾸 연습을 하다 보면 점점 'O' 표가 많아집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만나는 사람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라면. . .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맡긴다!"라는 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위임하는 순간, 기도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나요?"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 전적인 위임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합니까? 그에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육적인 생각과 소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이 갈등이 보이게 되고, 이것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게 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이 부분에 대한 민감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로마서 826-2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순간에 이미 탄식하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토니 캠폴로가 쓴 [끝까지 사랑하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교편을 잡고 있던 대학의 한 청년은 같은 학교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려고 노력했다. 정작 그 여학생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내 사무실에 찾아와 여학생의 마음을 돌이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담을 청했다. 그는 기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으면서도 과연 그래도 되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말했다.

 

"어쨌거나 기도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는 내가 자신의 노력에 동참해주기를 바랐다. 성경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5:16)는 말씀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청년이 나를 의인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우쭐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그의 계획을 따를 수는 없었다. 대신에 나는 그가 하나님이 뜻에 순복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사적인 바람들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압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아닌지 청년에게 물었다.

 

이 청년은 딱 맞는 공식에 따라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조정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임을 그에게 납득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근래 들어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매우 흥미로운 시도들을 종종 본다. 이른바 '부자로 만들어주는 십일조'이다. 어떤 사람은 벌고 싶은 금액의 10분의 1'하나님의 일'(구체적으로 말해 설교자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에 드리라고 설교한다.

 

자신이 갖고 싶은 만큼의 금액 곧 원하는 수입에 해당하는 십일조를 드리면 장차 하나님께서 헌금한 액수의 열 배를 주신다는 논지이다.

이 말에 일부 사람들은 희망에 차서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몽땅 찾아다가 하나님께서 열 배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한 목사에게 갖다 바친다. 잘못된 헌금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을 돈 갚아야 할 빚쟁이로 내몬다.

 

그것이 얼마나 그릇된 일인지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이런 가르침이 많은 개발도상 국가에서 보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극빈자들이 갈취당하는 동안 그들로부터 돈을 거둬들인 목사들은 호화롭게 살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기도의 모델을 얍복 강가에서 환도 뼈가 부러질 때까지 기도했던 야곱에게서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나의 요구'를 말씀드리는 것이요, 기도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얻어내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능력 있는 기도는 언제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얻어내는 기도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기도하면서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권면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아직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는 간증을 듣습니다.

 

사실 그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때로는 사역에 대한 보상이 늘 따릅니다.

특별히 트레스 디아스를 하다 보면 팀멤버들에게서 이런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은혜를 받고 충만하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갑니다. 그러면 갔다 와서 정말 기적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문제가 풀리는 것들 말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인격이 형성되지 않은, 늘 보채고 울기만 하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들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엄마이고 아빠이기 때문에.

 

그러나 어느 정도 신앙이 성숙해지면, 하나님은 서서히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지내면서 기적을 보여주시고, 먹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하셨지만, 부활하신 이후에는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할 것을 예언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의 초대교회는 수없이 많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지만, 성숙된 그리스도인들이 요구되는 시점에서는 야고보서 기자를 통하여 기도의 다른 면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4:2-3)고 말입니다.

 

한국 교회는 늘 야곱의 투쟁하는 모습의 기도를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축복을 받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마치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먹는 아이가 보채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더 이상 보채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여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우리에게 의문이 생기지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라고 말입니다.

 

성령님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조금 전에 읽은 야고보서 말씀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다.

 

그러면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응답은 복이 아니라 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가끔 국외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은 제 가방에 관심이 있합니다. 그 속에서 무엇이 나올까 하고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부흥회에서 돌아올 때면, 가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을 생각합니다. “무엇이 나올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선물보다는 저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가끔 저는 아이들이 저보다 선물에 관심을 자주 보일 때,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아내를 볼 때, 감동이 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지요. “너희는 아빠가 반가운 거야, 아니면 선물이 반가운 거야?”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해할 수 있지만, 아빠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는 않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바로 이런 기도의 태도를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에 비유합니다.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이 기다리는 산타클로스는 그분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이 가지고 오는 선물에 대한 관심입니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이내 산타클로스에 대하여 잊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만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관계와 조건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난번에 한 집사님으로부터 귀한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중국에서 목사님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답니다. "내가 이번에 돌아가서 사업만 잘되면 중국에 교회 하나를 짓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집사님이 깨닫게 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사업이 잘되면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한 일이기에 할 뜻이 있느냐를 묻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그분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알았으면 뜻을 따르기 위해 나의 욕심이 바뀌고, 내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로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요구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를 향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를 대하듯 하나님을 대한다면 하나님을 만나 인격적으로 사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더 깊이 사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들으려고 무릎을 꿇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을 열어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좀 더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도를 ''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16:1-9/ 김기석목사

2015-07-13 09:17:10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꿈이 뭐예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인생을 길에 빗대어 말하길 좋아 했습니다. 가수 최희준님이 부드럽고도 쓸쓸한 음성으로 부르던 '하숙생'을 기억하시는지요?

 

1964년에 발표된 곡인 데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정일랑 두지 말자/미련일랑 두지 말자/인생은 나그네 길/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왠지 인생의 쓸쓸한 비애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2절에 나오는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라는 대목에서는 시적 감흥까지 일곤 했습니다.

 

지금껏 꽤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인생은 여전히 모호합니다. 인생의 각 시기가 내주는 숙제에 응답하며 살다 어느덧 서쪽인 셈입니다.

 

가끔 신학생들이나 기자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인터뷰의 말미에 그들이 꼭 묻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남은 생의 목표가 뭡니까?"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루하루 즐겁게 기쁘게 그리고 성실하게 사는 거요"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좀 맥이 빠진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꿈이 없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를 부러워합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목표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3:12-14)

 

지금 여러분은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에 상상했던 그 모습으로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교우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할 일이 이렇게 많은 데 아직도 한가하게 직장생활이나 하고 있다니."

 

우리 삶은 언제나 '하고 싶은 일''해야 할 일' 사이의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답니다.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 말입니다. 이 둘이 하나라면 좋겠지만 둘은 대개 불화 속에 있습니다.

 

운명, 필연, 우연

 

오늘의 본문은 그런 불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 한편으로는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쓸쓸해집니다. 아무리 애써 봐도 삶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획을 잘 세워야 합니다. 성공이 마치 삶의 목적인양 제시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카피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성공하는 사람들이 하지 않는 말' 등등. 성공 담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미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게 꼭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적인지에 대해서 한번쯤 검토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공을 향해 일심으로 달려갔는데 남는 것이 공허함과 외로움 밖에 없다면 그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제 신문에서 정희진의 칼럼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시인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세상을 새롭게 만든다면서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재해석할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용이 될 필요도 없거니와 ,개천에서 시를 쓰면 된다. 개천이 시궁창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시로써 개천을 새롭게 하자."(한겨레, 27일 자) 세속적인 성공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한 우리는 늘 패배자 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은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운명의 여신들의 이름은 모이라moira, 아난케ananke, 티케tyche인데, 그 이름은 각각 '', '필연', '우연'이라는 뜻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 있고, 인생은 필연과 우연을 날실과 씨실로 삼아 짜는 태피스트리라는 말일 겁니다.

 

그런 운명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운명은 '사전에 결정된 것'(destiny, Schicksal, Geschick)입니다. 우리가 이 한반도에 태어난 것도,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도 운명적인 요소입니다. 돌아보면 우연적인 요소 또한 많습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는 만남이 그러합니다. 왜 하필 그 때,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연입니다. 하지만 그 만남이 우리 인생을 바꿔놓았다면 사람들은 그 만남을 필연으로 간주합니다. 필연은 우연을 통해 실현되고 우연은 필연을 수반하게 마련입니다

 

. 사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벌어진 사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기서 필연을 봅니다. 성경에는 유난히 '택하심을 받았다'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부르심을 받은 순간은 철저히 우연적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영원한 계획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구절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지금 비교적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리 되게 하신 것이고, 해도 해도 어려움을 면치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아 그런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 구절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말이 아닐까요? 2절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사람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물론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혹은 은혜를 통해 자기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사고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그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 멀리 서있는 산을 보십시오. 서 있는 자리에 따라서 달리 보이게 마련입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총체적인 인식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삶을 자꾸만 비춰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이사야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55:8)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55:9)

 

주님께 맡긴다는 것

 

세상에는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하루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보면 인생이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는 전직 대통령을 보면 참 인생이 씁쓸해집니다.

 

시편 시인들은 악인들이 평안을 누리고 선하게 살려는 이들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정의가 어디에 있는가 묻곤 했습니다.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호의호식 하며 살아가는 현실을 보면 우리도 하나님의 정의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비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덧없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기에 우리는 조급합니다. 역사의 변화가 너무 더딘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4-5)

 

하나님의 시간은 반드시 온다는 말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악은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현실이 어둡다 하여도 빛에 속한 사람은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악인이 득세하는 현실로 인해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겸허하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궁극적으로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과 근기를 따라 잠시 주님의 일을 하다가 갈 뿐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이라 했습니다.

 

큰 일을 하겠다는 생각만 버려도 삶이 수월해집니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등불 하나를 밝혀드는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너무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가라지는 결국 뽑힐 것입니다.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거만한 사람을 역겨워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허비되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 기자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3).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기만 하면 욕심껏 세운 모든 계획이 저절로 다 잘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말은 의탁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봉헌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이 됩니다. 골로새서는 이것을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3:23)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자신을 바치는 삶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어질고 진실하게 사는 것,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6)입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십시오. 상대의 허물에만 집중하지 말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아내고 또 그것을 호명하여 불러내십시오. 그것이 어진 삶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라도 안과 밖이 동일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십시오. 그리고 늘 하나님의 뜻을 조회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인생의 성공은 다른 이들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질고 진실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다면 우리는 이미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8)는 구절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의 길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맹목적인 최선은 우리에게서 행복의 능력을 빼앗아갑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게 만듭니다. 옛 중국 시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인생이란 백년도 채우지 못하거늘,/늘 천년의 시름을 품는구나"(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古詩十九首 15).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을 시름에 잠긴 채 보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서야 할 존재들입니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려 하지 말고, 나를 향한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늘 자신을 바치며 사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신앙인의 경영지혜 /16:1-9/ 곽선희 목사

2014-11-27 21:16:44

 

그 유명한 카네기(Andrew Carnegie)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간 일이 있다고 합니다. 가득히 쌓여 있는 먹음직한 앵두를 보면서 침을 꿀떡꿀떡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 가게 주인 할아버지가 그 애를 예쁘게 봐서 얘야, 이 앵두를 먹고 싶으냐?” 그러니까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그럼 한줌 집어 먹어라.”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놈은 먹질 않습니다. 그냥 서 있습니다. “먹고 싶으냐?” 끄덕해요. “그러면 한 줌 먹어라.” 안 먹습니다.

 

이걸 보고 그 할아버지가 앵두를 한 줌 쥐어서 그 어머니의 장바구니 속에다가 넣어 주었습니다. 집에 가서 주라고. 그리고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가게를 나오는데 어머니가 물어 보았습니다.

 

얘야, 너 왜 거기 할아버지가 먹으라고 했는데 한줌 집지 않고 그냥 서 있었냐?"하고 물으니 이 아이가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할아버지 손이 더 크니까요.” (웃음) 이제 경영학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자기 손은 작고 할아버지 손이 크니까 그 손으로 줘야지 내 손 한줌은 얼마 안 됩니다.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그의 마지막 책이 있습니다. 제가 그 분의 책을 여러 권 읽었습니다만, 그가 91세 때 어느 대학교 학생이 묻기를 선생님의 책이 40권이 넘는데 너무 많아서 다 읽을 수도 없고 힘들어서 그러니 한 권만 소개해 주세요.

 

그 책을 제가 꼭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91세의 피터 드러커가 말하기를 내년에 쓰는 책입니다.” 그랬어요. 그래서 저도 기다렸다가 이 책을 주문해서 읽었습니다. The effective utive라는 책인데요, 우리말로 번역할 때 자기경영 노트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것입니다. Time management. 타임 매니지먼트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 책 속에서 "Know Thy time."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시간을 알아라. 당신의 시간을 알아라. 얼마 남았는지 알아라.

 

지금 네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라. 주어진 시간에 성격을 바로 알고 여기에 대응하라고 충고합니다. 재산, 지식, 경험, 능력, 다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없으면 안 됩니다. 시간경영을 못하면 실패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9)" 말합니다. 하나님의 경영, 하나님의 경영을 알고 거기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유행하는 말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육일약국으로 갑시다.’ 들어 봤습니까? 육일약국으로 갑시다. 이건 아주 기가 막힌 경영노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4.5평의 약국이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이것은 6백만 원을 빌려서 만든 작은 약국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그는 시가 1조원에 달하는 기업체의 CEO가 됩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분은 이 작은 약국을 만들어 놓고 3년 동안을 계속 택시만 탔습니다. 일부러 하루에 몇 번씩 택시를 탑니다. 멀리 나갔다가 택시를 타고는 육일약국으로 갑시다.”

 

그거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어디에 있는 거 몰라요? 갑시다.” 그 조그만 약국으로 안내합니다. 육일약국으로 갑시다. 3년을 계속 택시를 탔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입소문으로 전해집니다. 육일약국, 육일약국, 육일약국.

 

사람들이 가보니 조그만 약국이지만 친절하고 성실하게 잘 봉사하거든요. 이 소문이 나고, 나서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왜 하필이면 육일약국이냐? 이제 물으면 그 때 대답을 합니다. 하루는 교회 나가야 되니까. 육일만 일합니다.

 

주일날은 문 닫습니다. 육일약국이에요. 사람들이 기다렸다가 문 여는 날에 옵니다. , 육일약국으로 갑시다. 이 한마디가 경영철학이요 성공비결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산의 랜드 마크가 됐습니다.

 

여러분, 맨 먼저 할 일은 능력경영을 해야 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3)” 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모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로리 애쉬너(Laurie Ashner))라고 하는 분이 쓴 사람은 왜 만족할 줄을 모르는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 하나? 하고 묻습니다. 그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목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소중한 기회를 놓친답니다.

 

사람들이 날더러 뭐라고 하나. 성공했다고 하나, 실패했다고 하나, 그저 사람들에 대해서, 시선에 대해서, 평가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까 진작 알아야 할 자기 자신을 모르게 되고 자기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는 그걸 잃은 겁니다. 그래서 만족하질 못해요.

 

또 하나는, 뛰어난 재능을 다 가졌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다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하는데 자기 자신은 오히려 자기가 가진 재능을 평가할 줄을 모릅니다.

 

소중한 줄 모릅니다.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남은 나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나에게 불만이 많아요. 이 불만 때문에 자기 자신을 모르게 되고 만다.

 

여러분, 성경에도 있지 않습니까? 달란트 비유에 보면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주었답니다. 그런데 재능에 따라 주었다는 거예요. 이건 주인이 인정하는 재능입니다. 너는 한 달란트 감당할 능력이 있다.

 

한 달란트. 그렇게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줬는데 이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이 장사를 하지 않고 게으르게 땅에 묻어 놨다가 도로 가져왔다는데, 그거 왜 그랬을까? 성경에는 없습니다만 충분히 알만 합니다. 불만이 많아요.

 

'다른 사람은 다섯 달란트 주면서 왜 나는 한 달란트냐' 이거에요. '다른 사람은 크게 인정해 주시면서 나는 왜 이렇게 평가 절하해 주셨나.' 불만이 있었어요. 그 한 달란트가 소중한 것인데 남의 다섯 달란트보다 내 한 달란트가 소중한데 그거 소중한 줄을 몰라요.

 

내게 주어진 기회, 내게 주어진 건강, 내게 주어진 시간, 내게 주어진 재능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 끝난 다음에, 은퇴한 다음에야 압니다.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하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타임 매니지먼트가 잘못 됐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요구저항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많은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 요구를 거절합니다. 부정적으로 대합니다. 요구저항. 이것 때문에 실제적으로 자기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주인이 되기를 기피한다. 삶의 주역이 돼야 되는데 항상 편승하려 하고,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다시 말하면 책임을 지지 않아요. 책임지는 마음이 중요한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자기 존재, 자기 능력, 행복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능력을 관리해야 됩니다. 내게 주어진 능력, 할 수 있는 것,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잘 아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buhr)의 기도문에 보면 그러지 않습니까?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요.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게 하시고 또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세요."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능력이요 지혜이지, 할 수 없는 것 하게 해 달라고 한평생 몸부림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 관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여호와께 맡기라.” 기도로 맡기고, 또 염려를 맡기고, 결과를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위탁해서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맡기는 그 운명, 그 최종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경영능력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마음 경영을 해야 됩니다.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합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그렇습니다. 남들이 나를 칭찬할 때, 그 칭찬에 널뛰기하면 안 됩니다. 누가 뭐래도 아닌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드리는 주책없는 말입니다만 제가 한평생 살면서 간혹 '천재'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내가 천재 아닌 건 내가 알잖아요. 내가 기억력 없는 것도 알고, 내가 능력 없는 건 내가 잘 알아요. 누가 뭐래도 나는 천재가 아니에요.

 

또한 제가 북한에 가면, 여기서 못 듣던 말을 들어요. 여기서는 목사이지만, 거기가면 나보고 성자라고 그래요. 그러나 성자 아닌 것도 내가 잘 알아요. ? 우리 아버지를 저 사람들이 총살을 했는데 그 총살하는 장면을 내가 봤거든요.

 

그러고도 북한을 위해서 일한다니까 , 이건 성자라고그러나 저는 성자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납니다. 마음 관리를 똑바로 하세요.

 

동시에 내가 굴욕을 당할 때 억울한 말을 들을 때 그 때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리기가 쉬워요. 아무리 억울한 말을 들어도 나는 내 길을 가는 것이에요. 아무도 몰라도 좋아요. 하나님만 아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관리를 잘 해야 됩니다.

 

악에 기울지 않도록 항상 겸손을 지켜가도록 동시에 항상 감사하도록. 감사는 선택입니다. 계속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그래야 경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악인경영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하나님이 온갖 것을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4)"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돼요. 불행과 실패, 혹 나를 괴롭히는 악한 사람, 이거 원망하다가 자기를 잃어버려요.

 

여러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삽니다. 편안한 거 아니에요. 가끔 우리 후배들이 제게 얘기를 해요. “목사님은 참 평안하게 목회하는가 봐요. 아니 40여 년 동안 얼마나…….”

 

그러면, 내가 이 사람들아,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이 목회하면서 검찰청에 네 번 갔다.” 그러면서 살았어요. 여러분 이거 잊지 마세요. 평안한 거 아니에요. 평탄한 거 아니에요. 그러나 그럴 때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돼요. 악인을 경영할 줄 알아야 돼요.

 

여러분, 몇 일전에 TV를 보다가 이런 말을 들었는데 충격적이에요. 피부는 마음의 거울이다. 여러분, 한번 만져 보세요. 거칠거든 그냥 회개하세요. 피부는 마음의 거울이다. 이게 빛이 나질 않아요. 썩었어요. 그러면 무릎을 꿇어야지.

 

뭘 변명이 많아. 벌써 얼굴이 썩었는데……. 이거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도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악한 자, 그 비난, 비판, 증오, 바로 이때에 내가 나를 잃어버리면 안돼요.

 

악한 자를 경영해야 돼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니라." 가만히 두고 보세요. 그 사람이 내 은인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오늘이 있는 거예요. 저 못된 사람 때문에 내가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고로 악인을 경영하라.

 

내 친구 몇 사람이 있습니다. 고향에서 나온 친구들끼리 가끔 모이면 좀 짓궂은 말을 좀 합니다. 첫째 인사가 뭔지 아십니까? 고향에서 고생하다가 나와서 이렇게, 이렇게 돼서 뭐 학장도 되고, 목사도 되고, 박사도 되고 다 그런데, 모여 앉으면요 너나 나나 김일성 덕에 출세했다.”

 

그래요. , 그래요. , 그 양반 아니면 내가 여기 왔겠어요?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양반 덕에 여러분이 지금 나를 만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니라. 그런고로 너무 미워하려고 그러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내가 손해 보면 안 되죠. 내 페이스를 잃어버려선 안 되죠.

 

그래서 말입니다. 요새는 또 이런 말 합니다. 역경관리, 위기관리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니, 위기 경영 능력이 있어야 돼요. 위기에 참는 것만 가지고 관리가 아니에요. 그걸 넘어서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파도타기 하는 것을 가끔 볼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파도가 오기를 바라며 널쪽을 타고 이렇게 엎드리고 있더라구요. 이러고 엎드리고 있다가 파도가 막 올라오면 그때 가서 타고 올라가는데 그 사람들에게 파도가 없다면 그거 하루 종일 엎드리고 있다가 말거예요.

 

여러분, 파도가 높을수록 파도타기 하는 사람에게는 그 멋진 행복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뭐 좀 역경, 뭐 좀 어려운 일이 있다 합시다. 역경관리, 위기관리 아니 나아가선 악인원수 관리, 원수까지도 경영할 줄 알아야 돼요. 이것이 오늘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는 소득관리. , 여기에 보니 부하다 하더라도 악한 일을 했으면 그거 부한 거 아니에요. 차라리 가난한 것만 못해요. 의와 함께 가난한 것이 악인의 부보다 나은 거예요. 돈 버느냐 못 버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선했느냐, 의로웠느냐, 바르게 살았느냐에 문제가 있는 거죠. 이 소득을 관리해야 되겠어요. 성공이 문제가 아니에요. 얼마나 바른 길에 섰느냐가 문제고 진실이 문제죠.

 

탈무드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랍비가 찾아온 유대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길에서 만약 돈지갑을 하나 주었다면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데서 주었으면 자네 어떡하겠나?” 그랬더니 하나님이 내게 선물로 준 줄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랍비가 하는 말이 너는 도둑놈이다.” 그랬거든요. 또 다음 사람이 와서 똑같은 질문을 해 봤어요. 했더니 주인을 찾아서 꼭 돌려주겠습니다.” 그러니까 랍비가 하는 말이 , 너는 멍청한 바보다.”그랬어요. 세 번째 사람은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을 당한 현장에서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말씀하실는지 그 때 가봐야 알겠습니다.” 그랬더니 랍비가 말하기를 그대 말이 옳도다.”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오늘 결심하고 각오한다고 그대로 됩니까? 이제쯤은 알아야겠지요.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용기를 줘야 됩니다. 경영능력을 주어야 경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영의 목적은 하나님께 있고, 경영의 중심은 하나님께 있고, 경영의 그 최종결과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온전한 신앙인의 경영능력, 관리능력이 다시 새롭게 우리가 경영철학을 정비해야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너무 자기 뜻대로 사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만 이제서 생각하니 전부 하나님의 손에 있었고 주의 경륜과 그 은총 속에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습니다. 원컨대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주의 뜻을 바로 알게 하시고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고 그리고 바른 경영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 /16:16-20/ 곽선희 목사

2014-11-25 04:55:21

 

이러한 우스개 소리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무슨 일에든지 성공하려면 ''으로 시작되는 여섯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 , , , ,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꿈은 이상이고 꾀는 지혜고 꼴은 외모이고 끈은 연고이고 끼는 소질이고 깡은 끈기를 의미합니다. 글쎄올시다. 하버드 대학의 대니얼 골맨(D. Goleman) 교수는 성공하는 사람들을 나름대로 사회학적으로 잘 분석을 하고 요약하여 딱 두가지로 말합니다.

 

I.Q.20%, E.Q.80%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대와 좀 다릅니다. 우리 생각에는 I.Q.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Q.라고 하게 되면 지식, 재능, 기술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머리가 좋아야, I.Q. 이것은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E.Q. 입니다.

 

Emotional Intelligence, 감성지수가 높아야 된다. 그저 우리가 쉽게 말해서 마음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씨가 좋아야 된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바로 어제도 어떤 예쁘게 생긴 탤런트 아가씨가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장차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하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제가 어렸을 때는 누구누구같은 미남, 뭐 키가 얼마고 머리가 좋고,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요새 나이가 30이 넘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저 마음이 좋은 사람이면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철이 났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마음씨라는 것, 이 감성지수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능이 높아도 감성이 낮으면 그 지능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머리 좋은 것 가지고 자신도 고생하고 남도 고생합니다. 성공이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성에 있다, 하는 것입니다.

 

글렌 힐슨(Glann Hinson)이라고 하는 현대 영성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귀담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첫째가 Too Busy,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일 자체에 몰두하고 성과주의에 빠져서 그저 성공에만 급하고 성공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못한다. 의미도 깊이도 없이 그저 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고 뛰는 것이 아니고 뛰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열심히 뛰고 바쁜데 왜 바쁜지도 모르겠고 이 바쁨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수밖에.' 두 번째는 Noise 라고 했습니다.

 

너무 산만하다고 했습니다. 많은 볼거리가 있습니다. 많은 들을 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삽니다. 요즘에 휴가 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강릉까지 두시간 십오분이면 가는 것을 요새 여덟시간, 열시간을 간다고 합니다.

 

열시간이 얼마나 힘듭니까? 텔레비전에 해운대가 나오는 것을 보니 목욕탕이 아니고 죽탕입니다. 물은 하나도 안보이고 사람만 보이더라고요. 도대체 그래야 되나? "이 사람들이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했더니 제 말을 들은 사람이 제게 말하길 "목사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재미에 가는 겁니다."

 

시끄러운 재미에 가는 것이랍니다. 와글와글 해야지 쓸쓸하면 사람들이 가겠습니까? 그것도 또 말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들어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보아야 됩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나야 됩니다. 겪고 싶지 않은 일도 겪어야 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제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산천 경치가 좋은 유원지에 좀 조용했으면 좋으련만 거기다 대고 식당에서 스피커를 틀어놓고 흘러간 노래를 크게 들려대는데 참 유감스러웠습니다.

 

시장님께 전화를 좀 걸든지 해 보아야지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좀 조용한 곳을 찾아왔는데 서울 시내보다도 더 복잡하고 더 시끄러웠습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합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산만해졌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만 산만해졌습니다. 깊은 명상도 깊은 생각도 없습니다. 이제 인간 궁극에서 하나님의 만나게 돼있는데 조용하게 이 모든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려면 어떠해야 할 것 같습니까? 미안하지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안됩니다.

 

엄청난 사건을 만나기 전에는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냥 맞물려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보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없습니다. 물어보았더니 딱 세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식사할 때.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혼이 황폐해질 수 밖에요. 그래서 영혼에 병이 생기고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이기심이 있고 자기 우상화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이 나고 교만해집니다.

 

낙심도 절망도 다 교만에서 옵니다.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비참합니다. 큰 전쟁을 치른 다음에 오는 패잔병의 모습입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양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들을 길이 없습니다. 너무 바쁘고 너무 시끄럽습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심판입니다. 기도할 때 성경 볼 때 설교를 들을 때,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이미 현재적으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을 즐기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그랬습니다. 교만하면 멸망합니다.

 

그런데 멸망은 싫지만 교만은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번 월드컵이라는 큰 행사 속에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크게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교만을 즐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내 마음의 성향이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습니까? 점점 겸손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점점 교만해지고 있습니까? 구약성경에서 예를 들어봅시다.

 

가장 큰 예가 아마 사울왕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사울왕이 겸손할 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고 높여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교만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리노라"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사울왕은 전쟁에 성공하였습니다. 승전했습니다.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전쟁에는 이겼는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교만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은사를 모독하였습니다. 제사는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 외에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왕이라고 하더라도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대신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교만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모독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십니다. 그 뿐입니까.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가만히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의 사위이고 게다가 충성된 신하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이 늙은 사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한심합니까? 무엇에 씌웠지 않습니까. 악령에 씌워서 이렇게 행동을 하다가 결국엔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은 성공이 미래를 망친다.' 그는 전쟁에 이겼습니다. 차라리 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전쟁에 이겼다는 것 때문에 아주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교만해지면서 그와 그 가문, 그 족벌이 다 망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문자 그대로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말씀은 말하십니다. "삼가 주의 말씀을 들으라." 삼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내가 직접 대면하는 바른 자세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 환경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이야 어렵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직선적이고 종말론적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야곱이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가 20년 동안 집을 떠나 다니다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압복강변에서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단독으로, 홀로 남았다고 했습니다. 홀로. 아내가 넷입니다. 위로가 되지를 않습니다. 자식이 열둘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많은 재산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서 밤새 기도합니다. 이러한 대면적,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괜히 이 생각 저 생각, 세상이 어떻고... 그러지 마십시오. 남이 어떻고,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딱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들으십시오. 나의 소원을 말씀드리고 내 욕망에 사로잡힌 기도가 앞서서는 안됩니다. '주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 물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실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마음 문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솔로몬 왕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십시오.'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메부쉐 미드'라는 말입니다.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옛날 구() 역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Hearing heart' 요새 번역에는 'Understanding mind' Hearing heart, '하나님이여 나에게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주의 음성을 듣는 그런 조용한 맘을 주십시오' 바로 이것이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고집 나의 형편에 메이지 말고 마음을 열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또 한가지 있습니다. 이해에 겸손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듣는 대로 자신의 멋대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해석에 너무 조급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면서 너의 이성을 재현하라." 이성, 우리에게 주신 이상과 판단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 판단을 서두르지 마십시오. 나의 이성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이성이 건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 빨리 해석하고 빨리 판단을 내리지 마십시오.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서 신앙 생활 원칙을 말할 때에 Waiting on the Lord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기다리는 마음. '기다린다'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꼽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실 때의 마리아의 남편, 요셉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약혼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내가 관계를 한 일이 없는데 이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난리가 나죠. 벼락이 떨어지죠.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답니다.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겠지,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조용히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굉장합니까? 속단을 하지 마시고 너무 빨리 비판을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십시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있겠지. 무슨 뜻인가가 있겠지, 하고 기다리십시오. 이해를 기다리십시오. 해석을 기다리십시오. 판단을 기다리십시오. 죠지 뮬러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아라. 성령보다 앞서지 말아라.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앞세우십시오.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성령이 감화하여 문제의 해결을 주실 것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십시오.

 

무엇보다도 기도부터 먼저 하십시오. 기도하고 말하십시오. 많이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면 조용히 주의 음성이 올 것입니다. 기도하라.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라. 이 얼마나 참 명언입니까?

 

그리고 삼가 순종하라. 듣는다는 말은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조심스럽게 말씀에 순종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스탠리 팜(Stanley Pam)이라고 하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크게 성공을 한 사업가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 사업을 시작할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나의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한평생을 주님 앞에 바쳐서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너는 평생 종업원으로 일하라. 언제라도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멘" 그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는 종업원이다.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 회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나도 종업원이고 너도 종업원이다." 오로지 종업원 의식으로만 부지런히 일을 했습니다. 크게 성공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삼가 조심할 것이요.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실 것입니다. 나는 조용히 삼가 듣고 순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주신 말씀과 같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면 화를 당합니다. 겸손한자와 함께 하면 은혜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아치발트 하트라고 하는 분이 '마음의 습관'이라 하는 책을 쓰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흔히 행동의 습관을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무의식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습관입니다. 그런데 습관이 마음에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한 방향으로만 마음이 가게 됩니다. 이것을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타인의 좋은 점을 보는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는가? 만약 당신이 좋은 점만 보고 있다면 당신은 겸손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그것을 마음에 두게 된다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자신의 실패를 용납하라.'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실패했을 때에 실수했을 때에 '그럼, 이 부족한 사람이 언제나 실수할 수 있는 거지. 하나님의 긍휼로 사는데' 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가끔 보면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실패를 하다니, 내가 실수를 하다니 말도 안돼!" 참 웃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교만입니다. 자기가 실패해놓고 자신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이럴 수가 없다고. 아니오,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쪽으로 기울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인정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런가 하면 양심이 맑아야 합니다. 양심이 흐려지면 무엇에 지금 붙들려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인데 자신에 대해 가혹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도 교만입니다. '작은 은총을 소중히 여기라.' 그것이 겸손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대하라.' 하나님께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할 것이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올바른 낙관론자가 되어라.' 다 합동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종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절망하는 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여러분, 현실이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이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조용하게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이 교만입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생각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인정하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마음을 한 번 진단해 보십시다. 겸손 지향적입니까? 교만 지향적입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집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성숙하면서 겸손해지고 있습니까?

 

이것만을 잊지 마십시오. 사탄은 나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나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할 때에 나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동시에 조용하게 주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주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더욱더 크게크게 말씀의 역사가 우리 영혼 안에 우리 실제 생활 속에 크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너무 복잡해서 너무나도 흔들리고 있어서 너무 바빠서 주의 음성을 가까이 듣지 못함을 용서하옵소서. 주여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이웃에 대해서 불평하는, 자기 자신에 절망하는 사람이 된 것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사 이제 겸손 겸손하게 하시고 삼가 주의 음성을 잘 듣고 그 음성에 응답하며 사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께 맡기라 /16:1-9/ 곽선희 목사

2014-11-19 14:13:25

 

이스라엘 나라에 가면 '사해'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사해바 다'라고 하지만은 바다는 아니고, 호수가 분명합니다. 왜 하필이면 사해냐 하면 영어로 Dead Sea 입니 다. 거기에는 아무 생물도 살지 못 합니다.

 

그것은 물이 너무 짜기 때 문입니다. 너무 염도가 높아서 어 떤 생물도 거기에 살아 남지를 못하 는, 그러한 호수가 있습니다. 염도 가 높아서 그저 수영을 한다 치면은 그대로 사람이 이렇게 부력이 높아 가지고 둥둥 뜹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지방을 지나가다가 그만 그 사해바다에 빠졌어요. 살려달라 고 허우적거리고 있지만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멀리서 소리를 지릅니다.

 

"손을 드 세요. 손을 펴세요. 허우적거리지 말고 손을 펴세요."

 

그렇습니다. 손 을 펴면 그대로 둥둥 뜨게 돼있어 요. 그대로 둥둥 떠서, 누워 가지고 책을 볼 수가 있으니깐, 그런데 이 사람 쓸데없이 허우적거리니깐 자꾸 짠물만 먹게됩니다. 저도 얼마 전 에 한번 거기 갔을 때,

 

수영하는 사 람들, 전부 수영을 하니까, 하는 사 람은 문제없지만 못 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저절로 뜨는 데, 괜히 버둥거리다가 자꾸 들어가 더라고요, 물속에. 이것은 대단 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 리가 손을 들고, 완전히 항복하고, 손을 펴면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허우적거리면,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일이 어려워집니다.

 

사람은 한평생 자기 자신에 대하 여 실망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자 기 지식에 대하여, 그렇게 애써놓은 모아놓았던 재물에 대하여, 또 애써 서 키워놓은 자식에 대하여, 능력, 지위, 명예에 대해서 계속 실망합니 다.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도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헛된 줄 알면서도 또 물질을 의지하고,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 줄 알면서 자기 의지를 믿고, 아무 쓸모도 없는 줄 알면서도 그 쓸데없 는 자기 지위나, 명예나, 그 부끄러 운 과거를, 그래도 붙들고, 무슨 큰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내세울려고 합니다. 가소로운 것입니다.

 

철학 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궁 극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난다.' 그 래요. '인간궁극'. 우리의 한계, 모 든 것에 한계 끝에서, '이제는 끝났 다'할 때 하나님은 그때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아직도 여러분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하나 님은 여러분과 합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할려고 들지 않습니 다. 완전히 손을 들고, 백기를 들 고, 손을 펴야, 그때부터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의 지혜를 통하여, 여러분의 능력을 통하여, 여 러분의 마음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 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번은 벨기에의 여왕이 폴란드를 방문했습니다. 그 당시 폴란드는 공산 치하에 있었습니다. 이 여왕 께서 카톨릭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때에 한 공산당 간부가 그를 뒤따 랐습니다. 당 간부가 카톨릭 미사 의식에서 따라서 그 의식을 잘 참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여왕은 한 마 디 했습니다.

 

"당신은 카톨릭 교인 입니까?"그는 대답하기를

 

"여왕이 여, 저는 믿기는 하지만은 실천은 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마음으로 는 믿어도 교회 다니지 않는다.' 그 런 뜻입니다. "그러면 공산당원이 군요."

 

당 간부 말하기를"나는 공 산당원으로서 실천하기는 하지만 믿 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갈등이 있 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는 마음으로 는 믿는 척 하지만 실천이 없고, 공 산당원으로 살아가면서 행위와 실천 은 있는데,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은 없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입니까?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어떤 때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요. 그러나 믿는 대로 살지 못해요. 그 또 안 믿는 다고 하자 니 또 그렇다고 안 믿는 것도 아니 예요. 휘청휘청해요. 언제까지 허 우적거리오. 왜 이렇게 선명치 못 한 생을 살아가야 하느냐? 깊이 깊 이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영어로 표현할 때 Total Acceptance, Total Discipline, Total Commitment 그렇 게 말합니다. Three Totality, 세 가지를 전적으로, 전적으로 수락하 고, 전적으로 순종하고, 전적으로 위 탁하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데 어정쩡 해 가지고 전적으로 믿지 도 않고, 전적으로 부인하지도 않고. 그렇게 세월을 보낸 거예요. 그렇 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예 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행사도 맡기고, 마음 도 맡기고, 운명도 맡기라. 맡기라 는 말은 뭡니까?

 

이것은 소극적으 로 볼 때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라는 거죠. 자기가 하던 일, 자기가 하던 계획, 자기의 능력, 자기 지식. 그 모든 것을 다 부정해 버려라. 다 포기하고 손을 들어라.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 라.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리고 그 에게 위탁하라는 말입니다.

 

그 말 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에 대한 전적인 신앙,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그 말씀에로의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좀 더 깊이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보 면요.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한다' 는 뜻입니다. 책임을 많이 지고 있 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내 가 내 운명 내가 책임져야 되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주신 말씀에 전적 으로 순종하고 나면은 하나님이 책 임집니다. 이건 이제 내 책임이 아 닙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그 영이 언제나 자유로운 것입니다. 걱정이 없어요. 하나님 뜻대로 순종했으니까 이젠 하나님이 알아서 할거요. 내게는 아무 책임도 없습니다. 그걸 알아 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거역하면 거역할수 록,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게 마 련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자세히 보면은 '계획하는 바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 나님께 기도하라. 기도하고, 마음을 맡기고, 뜻을 맡기고, 그리고 그를 기뻐하라.'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 습니다.

 

미국에 가면 '나이아가라' 라는 폭포가 있는데,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그 폭포 바로 밑에 그 폭 포가 물이 떨어져 가지고 여울지면 서 흘러가는 물이 좀 거셉니다. 거 기에 한 나룻배가 있었답니다. 나 룻배에 사람들이 몇 사람 타고, 건 너가게 되는데 나이 많은 노인이 노 를 저으면서 건너가는데, 배가 빙빙 돌면서 이렇게 갑니다. 그 왜냐하 면, 여울져가기 때문에, 거기 한 손 님 하나가 겁이 났어요. 겁이 나가 지고,

 

"사공, 노를 젓는 양반!""""당신 몇 년 동안이나 이 사공 노릇 을 했소?"

 

"이십 년 넘은 것 같습니 다.""그 동안 사고 난 일이 없었 소?""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사 고 나게 돼있지만 아직까지는 없습 니다."아 이 사람이 점점 더 겁이 나는 거예요. 벌벌 떨고, 이렇게 하 면 되고, 저렇게 하면 되고. 자 꾸 말이 많아요. 그러니까 사공이 하는 말이

 

"여보시오. 손님! 당신 노 저을 줄 알우?""모릅니다.""그 러면 입 다물어. 내가 저을 테니까. 이제는 죽거나 살거나, 당신 목숨은 내게 있소."가만히 보니 그렇거든 요.

 

", 당신하고 나하고 같이 가 는 거요. 그러니까 아무걱정하지 마시오. 당신 죽을 때 나도 죽고, 나 죽을 때 당신도 죽을 거요."그 때부터 조용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노도 젓을 줄 모르면서 잔소리만 하 지 마세요. 어차피 당신의 힘으로 살지 못하는 세상인데 왜 그렇게 말 이 많아.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아. 손들어. 깨끗이 들고, 운명을 맡겨 버려. 그리고, 조용히 계세요. 세 상이 어디로 가든 하나님 알아서 인 도할 겁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말씀을 잘 보면 은 '의를 하나님께 맡기라.' 그랬어 요. '사람의 행위가 자기가 보기에 는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그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자기 보기엔 자기 가 깨끗하지. 하나님 보실 때 어떻 게 보느냐가 문제죠. 그런고로 의 를, 의를 하나님께 바쳐버려요. 자 기 의, 자기 의를 하나님께 위탁해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 서 43, 4절에 보면, 사도 바울 이 그런 말을 합니다.

 

"나는 아무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나로 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자책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의롭다 함은 얻지 못한다. 나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니라."

 

그런 말씀을 합니다. 옳은 말씀이에요.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해요.

 

"최 선을 다 했다."

 

최선가지고 통합니 까? 당신의 최선이 무슨 의미가 있 는 거요? 이것 때문에 쓸데없는 고 집에 빠져요. 나 나름대로의 최선 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내 의를 버리세 요. 제가 가끔 무슨 공동체 모임이 나, 혹은 성경공부 모임, 이런데 많 이 강사로 나갑니다.

 

가면은 거기 에 사회하시는 분이 늘 있어요. 그 리고 저는 성경공부만 인도하는데, 가만히 보면 이렇게 앉았다가, 그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하는 거니까 좀 서툴죠, 사회하시는 분들이. 이 렇게 않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서 가 지고는 자기 시계를 보면서

 

"시간이 됐으므로 이제 성경공부 시작하겠습 니다."

 

이 제가 보니까 아직도 5분 남았어요. 그건 자기 시계가 빠르 거든요. 대체로 그러더만요. 그래 시계는 좋은걸 차야돼요. 고장난 시계가지고…… 어 그러고 하는 소 리가"시간이 됐으므로……."

 

이 사 람은 이렇게 하고, 자기가 실수하는 걸 몰라요. ? 자기 시계는 맞잖 아요. 그것처럼 미련한 게 없어요. '내가 나대로의 The best, 진실 을 살고, 정직함을 살고, 나대로 의 최선을 다했노라.' 그건 당신마음 이지. 객관성이 없어요. 그게 하나 님 앞에 통하는 게 아니에요. 주로 이렇게 최선을 다했다는 사람들이 교만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람들이 문제예요. 그걸 알아야돼요. 내 의 를 하나님께 위탁을 해요. '당신만 이 아십니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요? 당신만이 아십니다.'

 

범브란트라는 목사님이 쓴 '승리 하는 신앙'이라고 하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하나를 얼마 전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랍비가, 유대 랍비가 아주 유대사람들, 교인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한 사람에게 물 었답니다.

 

"당신에게 어떤 길을 가 는데, 당신 앞에 돈이 많이 들은 지 갑이 하나 길에 떨어져 있다 하자 그걸 주웠어요. 아무도 안 보는데 서 주웠으면, 이 돈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을 어떻게 하겠냐?"

 

하고 물으 니까, 한 사람이 하는 말이"저는 아이도 많고 살림이 어려워서 하나 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인줄 알고 잘 쓰겠습니다."

 

랍비가 하는 말이"이 놈아, 너는 도둑놈이다."그러더래 요. 또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한 사람 하는 말이

 

"아 그거야 빨리 주인을 찾아 줘야지요. 난 냉큼 주 인 찾아 주겠습니다."

 

이러니까"야 이놈아, 바보다 너는."

 

그래요. 또 한 사람에게"이렇게 돈 많이 들은 지갑을 발견했으면 어떡하겠느냐?"

 

그러니까"저요? 저는 제 자신을 믿 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당해봐야 알지. 난 워낙 마음이 약 하고 욕심이 많아서 그런 일 당할 때 내가 정말 이걸 주인에게 돌려 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모르겠는 데요. 그저 하나님의 은총에 맡길 뿐입니다."

 

랍비가 말하기를 "네 말이 옳도다."

 

그랬어요. 내 힘으로 정직할 수 있던가요? 하나님이 내 게 은총을 베푸시지 아니하면, 조그 마한 일에도 내가 바로 살수가 없는 거예요. 내 나름대로의 생각, 내 나 름대로의 도덕성, 내 나름대로의 규 범을 놓고, 의이니, 선이니, 옳으니,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잣대를 놓고 남을 비판하고, 잘못된 거예요. 내 의를 하나님 앞에 맡겨버려. '당신 만이 아십니다.'

 

또 하나는 여기 보니 원수가 있어 요. 악한 사람들이 있는데, 악한 사 람, 즉 원수를 하나님께 맡겨버려. 나를 괴롭히는 이런 대립, 혹은 대 적 상황 속에 살아갑니다. 다 좋은 사람만 아닙니다. 내게 손해를 끼 치고 나를 비방하고, 나를 욕되게 하고 못 살게 구는 사람들이 많아 요. 뭐 그런 상황 속에 사는 거요.

 

그럴 때 이를 어떻게 합니까? 그쪽 으로 자꾸 마음이 가면 안됩니다. 그러다가 내가 나빠집니다. 나쁜 사람 내가 미워하다가 내가 더 나빠 집니다. 그 사람이 분명히 나쁜 사 람이라 하더라도 악한 사람에게 마 음을 쓰다가 내 자체가 페이스를 잃 어버려요. 내 자체가 기본을 잃어 버려요. 그걸 알아야돼요. 그런고 로 원수? 그것 갚는 것 하나님께 있어요. 미워할 것 없습니다.

 

그래 서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 곳에서 같은 말씀으로 말씀 합니다. '악인 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라. 원 수갚는 것이 내게 있느니라. 너희 가 갚으려고 하지 말아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배고프거든 먹이 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너 할일 만 해. 미워하지 마라.' 원수, 나를 괴롭히는 상황, 하나님께 맡겨버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깐, 하나님께 맡겨버려. 합동하여 선을 이룰 것이니까 하나 님께 맡겨버려. 요 성경 말씀에 '악 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 니라.' 아주 귀한 말씀이오. 잘 참 고 견뎌보세요. 거 괜찮아요. 좋은 일이 될 거예요.

 

우스운 얘기입니다만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중학교를 가야겠는데 그 때 상황이 그렇질 못했어요. 그래 서 내년에 중학교를 들어가게 될 때 에 좌우지간 몇 달 남았어요. 제가 제 외삼촌댁을 갔어요. 외삼촌은 의사고, 세브란스 제 2회 졸업생입 니다. 그런데, 책도 많고 그렇더라 고요. 그래 제가 외삼촌한테 가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제가 며칠 시간이 남아서 그러는데 영어공부를 좀 할라고 그러는데 책 좀 빌려 주 시요."그랬다고요. 그랬더니 외삼촌 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농사꾼의 아 들로서, 농사 배워서 농사 잘 하고 살면 되지, 뭘 공부 할라고 하냐."

 

그러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요. 제 가 돌아서서 나와 가지구 40리 길을 엉엉 울면서 집에 돌아왔어요.

 

"두 고보자, 나 공부하고야 만다. 내가 삼촌네 아들들보다 내가 공부 더 많 이 할거요."

 

그래서 그것이 미안했 던지 모르지만, 외삼촌이 92세에 세 상을 떠나는데 아들 다섯, 딸 셋, 쭉 둘러앉았는데요. 이상하게 내 손을 딱 잡고 세상 떠났어요. 거 좀 미 안했던가봐요.

 

여러분 조금 섭섭한 일이 있어요? 그거 뭐 그리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세요. 손해 좀 보면 그저 '좀 보 는가 보다'하세요.

 

이게 다 하나님 의 장중에 있으니까. '합동하여 선 을 이룰 것이다.' 그런고로 원수를 혹은 이 대결 상황을 하나님께 맡겨 버려요. 또 소득에 대해서도 그렇 습니다. 우린 너무 자꾸 돈을 많이 벌려고 애쓰는데, 소득은 하나님께 있어요. 많이 벌리려는지, 못 벌리 려는지 그거 내 마음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씨를 뿌리고 가꿀 뿐 이지 농사가 잘 되고, 안 되고는 하 나님의 손에 있지. 그래서 오늘 성 경말씀에 보니깐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이 소득이 불의를 겸하는 것 보다 나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많이 벌고 적게 벌고, 야 그 신경 꺼라. 그저 정직하게, 진실하게 ……. 좀 소득이 적더라도 의롭게, 그렇게 살아.' 소득은 하나님께 맡 기세요.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Positive Thinking 이라 고 하는 소위 '적극적 사고'라고 하 는 것을 철학 기초로 해서 '카네기' 식 교육을 내세운 그 유명한 '카네 기'라는 사람이 있죠?

 

그 카네기가 어렸을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시 장에를 갔는데, 그 시장에 많은 물 건들이 있는 데 특별히 큰 바구니에 다가 앵두, 그 앵두가 이쁘잖아요? 빨간 앵두를 수북히 쌓아 놓았거든 요. 이 어린아이가 그 앞에 서서 먹고싶어서, 고 서 있는 거야. 어머 니가 그 사정을 알지마는 그 늘 사 줄 수가 없었던 가봅니다. 거 가만 히 한참 서 있으니깐 그 주인 할아 버지가

 

"얘야, 너 이거 먹고 싶으 냐?"아주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어요. 이거 그 주인이 참 마음이 좋아서

 

"네 손으로 한 웅 큼, 한 웅큼, 네가 한 줌, 네가 가져 라. 그걸 먹어라."

 

그러더래요. 가 만히 있는 거야. 한참 일보다 보니 까 아직도 거기 있어요.

 

", 먹으 라는데, 왜 안 먹냐? 먹고 싶으 냐?"

 

먹고 싶다고,"한 줌 가져라."안 가지고 서 있어요. 할아버지가 한 줌을 줬어요. 그러니까 웃으면 서 받아 가지고"고맙습니다."

 

그리 곤 받아 가지고 나와서 어머니 가방 에다가 집어넣어 놓고, 몇 개를 입 에다 넣었어요. 집에 돌아온 다음 어머니가 말하기를

 

"얘야, 너 왜 할 아버지가 '한 줌 먹어라'그런데 왜 안 먹고 거 오래 서 있었냐?"

 

그러 니까 얘가 대답하기를"할아버지 손 이 내 손보다 크거든요."

 

아 고놈 똑똑하단 말이야. 그렇잖아요? 여 러분, 여러분이 버둥버둥 해봤대자 손이 작아서 시원치 않습니다. 하 나님의 손이 커요. 조용히 기다리 세요.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또한 나의 기쁨, 나의 행복을 맡 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그러면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실 거 다.' 기쁨, 기쁨을 또 반납해버려요. 사람이 본능적으로 자기를 기쁘게 할려는 마음이 많아요. 그러다가 망치는 거요. 가만히 보세요.

 

이 부부간에 두 사람 살면서도 상대방 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쁘지, 자 기만 기쁘게 하겠다고 한다고 기뻐 집니까? 기쁨이란 도둑질 못하는 거요. 기쁨은 강도질도 못해요. 기 쁨은 빼앗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아 무리 앙탈을 해도 기쁨은 주워지지 않아. 그렇게 주워지는 것이 아니 오. 기쁨은 상대방에게 먼저 기쁘 게 해야 돼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야 내가 기쁜 거요.

 

내 기쁨을 하나님께 맡겨버려.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하는 일에 온 정력을 쏟으면, 마침내 하나님의 기쁨에 의해서 내 가 기뻐할 수 있는 거요. 또 이웃 을 기쁘게 해 보세요. 그러면 결국 은 그 기쁨이 내게 돌아오는 거예 요. '그런고로 너의 기쁨, 너의 행 복, 너의 즐거움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라. 그리하면 네게 기쁨이 돌 아오리라.' 그 말씀입니다.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좀 피곤했던 가봐요. 저녁에 잠자리에서 이렇게 기도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 님,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입니까, 내 것입니까? 하나님, 이 교회가 하나님의 것입니까, 내 것입니까? 당신의 세상이고, 당신의 교회입니 다. 이제 그들을 당신이 돌보세요. 나는 자겠습니다."

 

그러고 잤답니다. 하나님께 맡겨버리세요. '너의 행사 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그 가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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