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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룻기 설교 모음

룻기 4:1 - 12 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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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고엘 /4:1-12/ 김도완 목사

2023-11-12 10:04:45

 

1. 땅을 주시는 하나님

 

3주만에 룻기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룻기의 하일라이트로 기업무를 것을 약속한 보아스가 실제로 기업무르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먼저 기업무르기의 배경을 잠깐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으로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땅에 정복하였습니다.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누가 토지를 차지할 것인가였습니다. 그 답은, 하나님이 명하신 제비뽑기를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토지를 받는다였습니다. 제비뽑아 전체 가나안땅을 열두 등분해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주고 각 지파는 그 땅을 다시

 

제비뽑아 각 가문별로 나누었습니다. 고대의 농사는 개인이 짓기에 너무 힘겨운 노동이었기에 가문 전체가 협동할 수밖에 없었고 토지를 가문별로 분배하여 소유케 한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이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자신이 속한 가문을 통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이가 없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이상사회로 출발했습니다.

 

모든 국가가 소수의 부유한 지배층과 다수의 빈곤한 피지배층으로 나뉘었던 고대왕국과 비교할 때 이스라엘은 놀랍도록 평등하고 발전하는 사회의 기초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런 평등한 토지소유구조는 공동체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한 핵심요소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이런 복되고 부강한 나라에서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2. 모든 땅의 주인

 

고대국가와 근대국가까지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회치고 이스라엘만큼 평등하지는 못 했지만 토지개혁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한반도만 해도 삼국시대가 그랬고 조선이 그랬고 해방직후 남한과 북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자들의 토지독점이 시작되며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런 위협에 직면할 것이 틀림없었기에 하나님은 평등한 토지소유구조를 깨뜨리지 못 하도록 안전장치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토지소유권과 희년이었습니다.

 

먼저 토지를 하나님의 소유라고 선언하셔서 모든 땅주인은 사실 임대인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토지의 소유구조, 사용방식 등을 모두 참소유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임대인인 이스라엘 백성은 그 토지를 팔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투자를 위해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야 한다든지 혹은 빚을 못 갚아 땅을 빼앗긴다든지, 가족이 먼 땅으로 떠나서 토지를 관리할 수 없다든지 하는 상황이 생기기에 이럴 때는 타인에게 임대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즉 돈을 받고 땅을 넘기더라도 이는 판매한 것이 아니며 임대한 것이고, 이는 희년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쥬빌리 곧 희년이 돌아오면 임대기간이 끝나서 원래 주인에게 아무 조건없이 돌아오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임대할 때 받는 돈은 희년이 돌아오기까지 남은 햇수를 땅의 사용가치에 곱한 금액이었습니다. 50년 주기로 돌아오는 희년까지 20년이 남았고 이 땅을 경작해서 거둘 수 있는 수익이 연 만 불 정도라면 20만 불을 받고 넘기는 것입니다. 30년이 남았다면 30만 불을 받는 식입니다.

 

3. 은혜로운 희년

 

50년마다 희년을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느 사회든 인구는 늘기마련이지만 땅은 늘지 않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땅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한 번 판매한 땅이 영원히 구매자의 소유로 남으면 그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땅을 잃어버린 집안은 갈수록 비싸지는 땅을 되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결국 빈익빈 부익부으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사회적 갈등과 분노가 점점 커집니다. 이를 제어하지 못 하면 요즘 문제가 되는 묻지마폭행, 묻지마살인이 등장합니다. 도무지 탈출할 수 없는 빈곤의 늪에 갇힌 이들이 사회를 향한 분노를 무작위로 누군가에게 쏟아놓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에서 제어하지 못 하면 분노가 집단화되면서 시위, 폭동, 반란, 혁명, 전쟁 등으로 기존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이런 양극화와 사회붕괴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놀라운 제도가 바로 희년입니다. 50년 약 1.5세대마다 찾아오는 희년으로 토지의 독점이 제어되어 불평등이 해결되고 분노의 김이 빠집니다. 희년 문자 그대로 기쁠 희자를 써서 기쁨의 해입니다. 노예된 신분이 자유민으로 해방되고 잃었던 가문의 토지를 되찾으니 얼마나 기쁜 해입니까? 당연히 모든 가문이 자신들의 토지를 소유함으로 소수에게 독점될 때보다 생산력이 올라가고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의욕도 크게 높아져서 지속적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토지제도와 희년제도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탐욕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세심한 돌봄의 손길인지요!

 

4. 재기의 기회 고엘

 

물론 희년만으로 복지의 구멍을 모두 메울 수는 없었습니다. 땅을 잃은 가족은 희년이 될 때까지 남은 기간 빈곤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위한 구제책이 바로 오늘의 주제 기업무르기입니다. 룻기는 여호수아시대에 바로 이어지는 사사시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사기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흉악한 죄악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그런 암흑기에도 하나님의 법을 좇아 살아가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룻기는 증언합니다.

 

보아스는 3장에서 룻에게 약속한 대로 기업을 무르기 위해 4장에서 성문 앞에서 장로들을 청하고 자신보다 나오미와 더 가까운 친척을 만납니다. 가까운 친척이 우선 기업무를 권리와 의무를 져야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재판정의 역할을 했습니다.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은 십년 전 흉년을 피해 가족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할 때 땅을 누군가에 팔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 판 돈을 들고 모압에서 흉년도 피하고 돈도 불려서 고향으로 돌아와 그 땅을 스스로 다시 사들일 즉 무를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치못하게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이국땅에서 죽고 들고간 돈도 바닥나 그의 아내와 작은 며느리만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극빈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던 나오미에게 룻을 통해 기업무름이란 소망이 생겼습니다. 부유한 친척 보아스가 나오미 집안의 땅을 물러준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것이요, 만약 며느리 룻과 결혼해 아들을 낳아준다면 가문도 다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5. 고엘의 희생

 

3-4절에서 보아스는 자신보다 더 나오미에게 가까운 천척에게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의사가 있는지 묻습니다. 1절은 그를 아무개라고 부르니 우리도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 4: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무를 권리를) 팔려 하므로 ( 4: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3절의 판다는 뜻은 죽은 엘리멜렉이 판 땅을 나오미가 다시 물러 되찾아올 힘이 없으니 그 무를 권리를 가장 가까운 친척인 당신에게 맡기려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개는 그 권리를 위임받아 엘리멜렉의 땅을 무르겠다고 답합니다. 그의 생각에 이는 엄청난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되사는데 적지않은 돈이 들겠지만 그 땅을 돌려받을 엘리멜렉이 죽고 없으니 고스란히 아무개의 것이 됩니다.

 

보통 남의 땅을 돈주고 임대해도 희년이면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무를 권리를 얻어 그 땅을 사면 엘리멜렉이 죽고 없으니 돌려줄 필요 없이 영원히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껏해야 나이든 나오미가 죽을 때까지 돌보는 것 정도가 추가부담일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큰 이득입니까? 그러자 보아스가 5-6절에서 그 권리에 큰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의 입장이 갑자기 바뀝니다.

 

( 4:5) 보아스가 이르되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 4: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아무개는 나오미의 며느리 룻의 존재를 생각지 못 했던 것입니다. 고엘의 의무는 기업무르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된 여인과 결혼해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의무도 있습니다. 만약 젊은 며느리 룻에게서 아들이라도 나오면 그 아이는 죽은 엘리멜렉의 아들로 족보에 올라가고 자신이 산 땅은 그 아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결국 경제적인 면만 보자면 큰 손해를 보고 나오미와 룻 좋은 일만 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아무개는 무를 권리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 의무를 담당하겠노라고 나섭니다.

 

6. 아무개와 보아스

 

아무개는 가까운 친척이지만 나오미의 삶과 복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며느리 룻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손해보지 않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익만이 중요한 인생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무개로 가득합니다. 모두가 아무개로 살아갑니다. 그 길은 넓지만 멸망의 길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그저 아무개라고 부릅니다.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 보아스는 큰 손해를 보아야 하는지 잘 알면서도 스스로 나서서 기업무를 의무를 집니다. 왜입니까? 그는 룻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젊은 여자의 육체를 원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아내를 여럿 두는 것이 흠이 아니던 시절 부유한 그는 얼마든지 이런 큰 부담을 지지 않고도 젊은 여자를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룻을 현숙한 여인인 동시에 신실한 인간으로 사랑했습니다. 또한 나오미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이웃을 위해 사랑의 의무를 지도록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즉 사랑과 희생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성경은 보아스라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어떻게 이런 사랑과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땅에 종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이란 존귀한 이름을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주시고 그 땅에서 복지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은혜로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은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돌보시려는 토지법과 희년법과 고엘법과 같은 은혜의 법이 가득합니다. 이 모든 행하심과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성품을 잘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노래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녀는 그 율법에 가득한 사랑과 믿음, 은혜와 긍휼의 성품을 닮는 복된 사람으로 변합니다. 보아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7. 우리의 고엘 예수 그리스도

 

나오미와 룻에게 보아스가 고엘이 된 것처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고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한 고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잃어버린 우리의 생명을 되찾아 주셨고 잃어버린 우리의 낙원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빌립보서는 고엘되신 예수님의 희생을 노래합니다.

 

(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그 분의 마음을 품는 이는 이 시대를 위한 고엘이 됩니다. 이 세상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나오미와 룻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에겐 보아스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심한 아무개가 될 수도, 긍휼의 보아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시대를 위한 보아스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개입니까, 보아스입니까?

 

 

 

 

나는 생명용품, 장례용품?-1 /4:13-22/ 이재철목사

2015-07-25 00:43:28

 

저는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떠오르는 단상들이 있습니다.

 

장례용품에 대한 단상들입니다.

죽은 자의 시신은 수의를 입힙니다.

 

수의는 삼베에서 명주를 거쳐 비단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천차만별입니다.

제일 비싼 수의는 그 가격이, 제일 싼 수의의 수십 배, 심한 경우 1백 배에 이르기도 합니다.

 

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동나무, 홍송, 향나무로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관도

그 형태나 가격이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장례용품은 그 특성이 오직 죽은 자를 위해서 제작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말을 바꾸어서 표현하면 아무리 비싼 장례 용품이라 할지라도

장례용품은 단지 썩어지기 위해서 제작됩니다.

 

같은 산에 같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건축 재료로 쓰입니다.

어떤 나무들은 가구로 쓰여집니다.

그런데 장례 용품으로 만들어질 관은, 오직 썩기 위해 존재합니다.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되지만, 오직 썩어지기 위해서

오직 죽은 자를 위해서 제작되는 장례용품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생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연인, 모든 인간은 그 인생이 일회적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장례용품과 동일합니다.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더불어 사는 사람을 살려내는 사람도 있고,

 

일평생을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긴 안목에서 본다면, 오직 공동묘지를 향해서

자기 평생을 전력으로 질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의 인생이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용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일구는 것이라면

후자의 인생이야말로 자기 인생을 장례용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출세를 하고,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남보다 1백배 비싼수의’, 1백배 비싼으로.. 으스댄다 하더라도

그래도이요, ‘수의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비싼이나, ‘수의라 하더라도,

남이 한 번 썼던 것을, 다시 재활용해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례용품의 재활용품은.. 그저 줘도, 안 가집니다.

 

예수 밖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인생도, 그와 같다는 것이지요.

성공해봤자.. ‘장례용품중에 고가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첫째, 한 인간이 자기 인생을 평생생명 용품으로 일구어 갈 것인가,

결국은 장례용품으로 일구어 갈 것인가는 철저하게 결정권이 개인에게 있습니다.

 

결정권을 그 당사자가 지니고 있기에

자기 인생을 스스로 장례용품으로 일구어 가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없고

그 인생보다 더 추한 인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 3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저는 목사입니다.

가령 이를테면 예를 들어 제가 몇 분과 성경 공부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목사인 제 이름을 걸고 저와 함께 성경 공부하시는 분 가운데서

단 한 분도, 그 인생이 실족하는 분이 없도록, 제 열과 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재철 목사와 성경 공부하다가, 내 인생 버렸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용납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믿다가 장례용품 되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도록.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세월이 가면 우리의 육체는 반드시 후패합니다. 반드시 노쇠합니다.

그러나 내 속에 진리에 기인한 생명이 차 있을 때

내 육체가 아무리 쇠잔해진다 할지라도

내 육체는 날로 새롭게생명 용품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의 체험적 고백이었습니다.

 

몇 해 전에 이름만 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여인이

단 하루 차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여인은 영국 찰스 황태자의 부인이었던 다이애나 비였습니다.

또 한 여인은 인도 캘커타에서 빈민들과 한 평생 살았던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다이애나 비는 30대의 젊은이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몸에 걸친 모든 것들은, 세상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최정상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장례 용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같이 썩었습니다.

 

그 젊은 여인에 비하면, 마더 테레사는 노파였습니다. 80세 노파였습니다.

재산이라고는 하루마다 번갈아 빨아 입는 사리 옷, 그것도 두 벌밖에 없었습니다.

 

온 얼굴, 손등에 깊이 주름이 패어 있었습니다.

미모라고는 어디라도 찾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 노인이야말로 후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넘치는 생명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생명용품으로 살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 외에 어머니를 떠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길 원합니다.’

 

룻이, 이방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생각할 때, 그 연로한 여인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여인이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남의 나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 시어머니가그래, 너 그런 결심으로 나를 따라왔으면

죽을 때까지 내 수발이나 들다가 세상 떠나거라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어머니는 그 젊은 며느리의 중심을 아름답게 보고

자기가 앞장서서, 보아스라는 사람에게 룻이 개가를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를 잉태께 하심으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바로 이 구절만 보면, 룻이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신앙을 위하여 시어머니를 좇아갔더니

하나님께서 새로운 가정을 주시고, 아들까지 주셨구나, 해피 엔딩이구나.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룻이 나온 성경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16~1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은, 자기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시어머니가

아이 키우는 기쁨을 누리시게끔 하기 위하여

시어머니 나오미로 하여금, 아이를 키우게 했습니다.

 

바로 룻이 낳은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이었다라고 성경은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태어난 것은 오벳 한명 밖에 없는데

성경은,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오벳의 아들 이새, 손자 다윗의 이름까지 거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성경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룻 한 여인이. 하나님에 대한 말씀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었을 때

 

그 조그마한 여인의 삶을 통해서

지금 미래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핏덩이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핏덩이를 통해서, 새롭게 될 역사의 지평을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인지 성경은 다시 반복합니다.

 

 

4:18~22,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다시 바로 그 오벳을 통해서 이새와 다윗이 태어났음을

이스라엘의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졌음을, 한번 더 강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미래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래는 창조의 대상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삶을 어떤 용품으로 일구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창조됩니다.

 

나의 삶은 절대로 내 개인과 내 시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미래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소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소망을 느낀다.. 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보잘것 없다 할지라도

여러분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나는 정말 보잘 것 없어.’

 

여러분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과부되고 늙은 시어머니 따라 국적까지 바꾼

룻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생명 용품이 될 때

미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할 수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은 반대로

내가 내 인생을 나의 욕망 때문에 썩어질 장례 용품으로 만든다면

나로 인해서 미래 역사의 한 부분은 반드시 허물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밖에 없는 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내 인생의 진리 안에서 생명 용품으로 일굼으로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일구는 하나님의 이 시대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요.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삶을 통해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룻보다도 먼저 내가 생명용품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오미, 오르바, . 룻기에 등장하는 이 세 여인의 특징은 공통점은

처절하게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

 

남편이 죽었죠. 두 아들들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죽는 사람은 오히려 편하죠. 고통은 산 사람의 몫입니다.

남편 죽고 두 아들이 죽어서, 슬픔을 가슴에 묻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처절하게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오르바,

시아버지 돌아가셨죠. 남편 죽었죠. 시동생 죽었습니다. 처절한 경험입니다.

 

,

시아버지 돌아가셨죠, 시숙 돌아가셨죠, 남편 죽었습니다.

 

세 여인 모두, 죽음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은 바로 나의 것이라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알기 때문에, 도리어 쾌락주의자, 염세주의자, 세속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르바는 죽음을 처절하게 경험하고나서도

어떤 연유인지 세상을 쫓아 갔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은 죽음을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죽음 이후를 책임져주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의탁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 접촉점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알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결국 나의 욕망의 도구로써

하나님을 부리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죽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 다는 거에요. 반드시 죽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은 크게 직삼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꼭지점마다 아주 대표적인 무덤이 있습니다.

 

오른쪽 꼭지점에는 이집트가 있죠. 이집트에는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2.5톤짜리 석회암 230만개를 정교하게 쌓아올렸습니다.

밑변이 230m, 높이가 144.6m입니다. 인간이 만든 무덤 중에 가장 거대한 무덤입니다.

그 앞에 서면, 압도당한다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아프리카 왼쪽 꼭지점에는 모로코가 있습니다.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 가면, 모하메드 5세의 영묘가 있습니다.

2년 전에 타계한 핫산 2세가, 자기 부왕을 위해서 만든 묘입니다.

묘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묘가 아니죠. 멋진 궁과 같은 묘입니다.

 

들어가면 2층 발코니에서 속을 볼 수 있습니다. 1층 바닥에 관이 있죠.

핫산 2세가 죽은 뒤에, 바로 그 묘에 들어갔습니다.

 

그 발코니에 서서 그 영묘를 쭉 둘러보면,

그 묘실 내부가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어있는지

만약 바닥에 관만 보이지 않으면, 무덤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치 멋진 왕궁의 왕비의 내실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하메드 5세의 영묘를아프리카의 타지마할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죠.

 

아프리카 직삼각형 제일 아래쪽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있습니다.

그 남아공화국에 흑인 빈민촌 속에, 흑인 빈민들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저는 어느 나라를 가던지, 처음 가보는 나라나 도시를 가면

꼭 그 도시의 공동묘지를 찾아가봅니다. 공동묘지에는 교훈이 많거든요.

 

 

저는 전 세계 어디에 가서도,

남아공화국 흑인 빈민촌 공동묘지처럼, 초라한 묘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묘지라고 부르기가 민망했습니다. 그곳은 쓰레기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피라미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 가장 아름다운 모하메드 5세의 영묘.

가장 지저분한 쓰레기장 같은 흑인 빈민촌 공동묘지.

그 형태는 완벽하게 다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뭡니까.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동일합니다.

 

무엇을 시사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거대했던 자? 가장 거대함을 누린 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 세상에서 제일 미모를 지니고 있는 자?

 

세상에서 제일 비천한 천민? .. 모두 동일하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우리 오늘 하루 살았죠? 그 말의 의미가 뭡니까.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하루를 죽은 것입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30세면, 30년 죽은 겁니다.

저는 우리 나이로 55살입니다. 55년 죽은 겁니다. (2003년 설교)

산다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알지 못하고, 매일매일 자기의 욕구를 따라서 산다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장례용품으로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알고 나면 오늘 하루 죽었다는 것은, 오늘 하루 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아는 자만이 죽음 이후를 책임져주실

내 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그분을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삶을 그분에게 의탁해드리기 위해서,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복음을, 단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그림이 될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구원의 십자가가

이스라엘 많은 동네 많은 장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골고다'라는 이름의 장소에 세워졌습니다.

 

골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굴골토를 헬라어로 음역한 말인데.

굴골토는 해골이라는 말입니다. 해골이라는 이름의 지명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하나 그려봅시다.

해골바가지가 있습니다. 그 해골 정수리에 십자가가 세워져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타고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한 방울 한 방울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해골처럼 죽었던 인간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정말 복음을 이보다 더 좋게 표현할 수 있는 한 컷의 그림은 없죠.

 

그럼 그 그림에 의거해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진정한 구세주로 인격적으로 영접하겠습니까.

누가 그 분을 이용하려 함이 아니라,

그 분에게 내 삶을 의탁하기 위해서 그 분을 찾겠습니까.

 

오직 한 사람입니다.

내가 해골임을 아는 자입니다.

 

내가 오늘 살았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산 것 같으나 결국 내가 해골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때

 

주여 제게로 오소서그분을 모시게 됩니다.

바로 나는 그 분의 생명 속에서생명 용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연세가 몇 세이던지 상관 없이, 여기에 젊은이들도 계십니다.

80년 잡을까요. 80년 후에 누가 살아있겠습니까.

 

80년 후에 다 우리가 뭐죠? 해골입니다.

80년 후에 우리는 땅 속에서 해골이 되어 있습니다.

 

2년 전에 캐나다 토론토 어떤 신문사에서, 직업 에이전트가 광고를 게재했는데

의사, 사무원, 이런 사람들을 쭉 세워놓고,

우리는 당신들의 직업을 죽을 때까지 보장합니다.’

 

이런 문구로 사진을 게재했는데. x-ray로 찍은 해골이에요.

옷은 다 입고 있는데, 속이 다 해골이에요.

 

그 사람들은 해골이 될때까지 직업을 보전하겠다고 사진을 게재했지만

대단히 신앙적인 그림이죠.

 

우리는 이렇게 서 있지만, 우리는 내일의 해골입니다.

그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는 자가 됩니다.

 

나오미의 첫번째 자부 오르바는 죽음을 알긴 알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좋은대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공동묘지의 해골로 사라졌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추적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례 용품이 된 것입니다..

 

 

 

 

희생하지 않으려는 율법 기꺼이 희생하시는 예수 /4:1-6/ 김진수목사

2023-10-29 05:30:01

 

보아스는 룻에게 일곱 되의 보리쌀을 주었는지 아니면 원문의 문자 그대로 여섯 알의 보리알인지 모르겠지만 청혼 수락의 의미로 혼수를 겉옷에 싸서 지워주면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한 후 자신보다 앞서는 고엘을 찾아서 그의 의향을 물어보고 만일 그가 허락하면

 

그가 대속자가 될 일이거니와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고엘의 의무를 반드시 감당하리라고 하나님께 맹세하리라 하면서 보아스가 룻보다 먼저 어둠이 가시기 전에 성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지난 주 설교였거든요 그렇다면 그가 이 일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으리라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대로 보아스의 움직임이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1절을 볼까요.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여기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았답니다.’ ? 집이 아닌 성문에 올라가 앉았을까요? 그 당시 성문의 기능은 출입을 통제하는 기능과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장터기능 그리고 성문 위에서는 성읍 백성들의 문제를 재판해 주는 법정의 기능까지 아주 중요한 곳이성문이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성문 위에는 돌로 된 의자가 있었고 재판관들은 바로 돌 의자에 앉아서 백성들의 문제를 재판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성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판정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는 거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인데 신16:18절에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이처럼 보아스가 성문 위 법정에서 자기보다 앞선 고엘의 의무를 가진 친족을 만나서 법적으로 자신이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일에 대해서 완벽하게 하려는 의도로 성문 위에 앉은 거지요 그런데 그 때 마침일 순위 고엘의 의무를 가진 자가 지나가더라는 겁니다.

 

여기마침히브리어웨힌네그런데 보라어떤 의미냐 하면 어쩜 이럴 수가 있지 마치 준비된 것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네 그런 의미란 겁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 뭘 알 수 있다는 겁니까?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일 순위 고엘의 의무를 가진 자에게 보아스가 아무개여 하고 부르니 올라왔고 그에게 앉으라 권했다는 거지요 두 사람이 재판관만이 앉는 자리에 보아스와 그 친족이 앉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둘 다 재판관의 자리에 앉은 모양새입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다만 재판하는 사람 둘이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사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있지 않지만 나오미와 룻이라는 두 여인을 두고 모인 거지요 하나님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고 그래서 마라라고 부르라는 나오미와 이방여인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저주와 진노의 대상이었다가 돌아 온 룻이 있는 거지요 보아스가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라면 보아스 보다 앞선 친족은 율법의 그림자일 겁니다.

 

뭡니까 보아스와 그 보다 앞선 친족이 앉아 있는 이 모습은 옛 언약과 새 언약 두 개의 언약이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라는 거지요 옛 언약에 대해 히10:1절에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그러니까 고엘 대속자의 의무가 우선순위인 친족은 율법의 그림자로서 나오미와 룻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는 거지요

 

그러나 히10:9절에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옛 언약인 율법을 폐하심은 새 언약을 세우려하심인데 그래서 새 언약의 중보로 누가 오셨나요? 예수그리스도 그 다음 10절에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그러니까 새 언약의 그림자인 보아스를 통해서 나오미와 룻이 대속함을 받아서 자신들의 수치는 보아스가 가져가고 대신 보아스는 자신들의 남편의 기업을 무르게 되고 남편의 이름이 계속 이어지게 보호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귀한 진리는 율법을 지키는 의무로서는 대속함을 받지 못하지만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믿음으로는 대속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옳은 관계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보아스와 그보다 순서가 앞선 친족이 나오미와 룻의 문제를 두고 성문 위에 앉아있는 겁니다.

 

2절을 볼까요.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왜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였을까요? 보아스는 법정의 합법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 열 명을 청했던 거지요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숫자10에 대한 개념은인간의 의무또는인간의 증언’ ‘인간 시련에 대한 완전함을 뜻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 주신 10계명에서 발견되고 성도들이 지켜야할 예수님의 열 므나의 비유와 열 처녀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열 명의 증인이지요. 그래서 장로 십 인의 증인으로 인해서 베들레헴 성읍백성 모두의 참석을 뜻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지나가는 장로가 있으면 성문 위로 청하고 또 지나가는 장로가 있으면 성문 위로 청하고 그래서 열 명을 채운 것이 아니지요 그가 이 일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으리라는 나오미의 말대로 보아스의 움직임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보아스가 참 차분하게 일처리를 빈틈없이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는 거지요 3절을 보세요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여기우리 형제 엘리멜렉이라고 말하는 보아스를 통해서 일 순위 고엘의 의무자와 함께 같은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사촌정도로 가까운 근족으로 보는 거지요 그런데 보아스보다는 연장자인 일 순위이인 친족에게모크라(팔다) 노오미나오미가 팔려한다는 거지요 뭘 그녀의 남편이자 우리의 형제인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그래서 4절을 보세요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열 명의 증인들인 장로들 앞에서 나오미가 팔려는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살 수 있는 것은 제일로 가까운 친족인 너에게 그 선택권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네가 무르면 무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다음 차례가 나니까 내가 무를 것이고 그 다음엔 무를 자가 없다 왜? 자신이 무를 거니까

 

보통 땅의 소유권이 남자에게 있었던 당시 나오미는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었으니 땅을 팔 수는 있어도 소유권이 없었다는 거고 일 순위이었던 고엘의 대상자인 친족이 자기가 무르겠다고 대답하더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일 순위 친족은 어째서 선뜻 대답을 했을까 하는 겁니다.

 

고엘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과부와 결혼하다 그러기 위해서 대신 몸값을 지불하다는 뜻이거든요 일 순위 친족은 엘리멜렉의 땅을 거저 얻는다고 생각했다는 거지요 왜요 나오미를 아내로 맞는다하더라도 뭡니까?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니까 아이에게 땅이 돌아갈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거 아닙니까? 뭡니까? 엘리멜렉의 재산이 자신에게로 모두 돌아오는 횡재를 마다할 일이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자 무엇입니까?

 

5절을 볼까요.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그렇습니다. 일 순위 고엘이 되는 친족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바로 나오미가 아니라 룻이 있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에겐 단순하지 않은 문제에 부딪힌 겁니다.

 

룻은 젊고 그렇다면 아들을 낳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신23:3절에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큰일이지요 모압사람에게 속한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니까 이것만이 아니라 신25:5~6절에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렇다면 나오미에게서 밭을 사서 룻이 낳은 아들에게 그것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일 순위 친족이 이 손해를 감수하고 과연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수 있을까요? 6절을 보세요.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정신이 나가지 않고 누가 이 손해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지금 네가 무르지 않으면 그 다음은 내 차례이고 내가 무를 거라고 내 뒤에는 없다는 보아스에게서 뭘 봅니까? 진정한 고엘 대속자의 모습이지요. 엄청난 희생을 지불해서 하나님의 기업을 무를 수 있도록 그들의 저주와 심판과 아픔은 자신이 갖고 대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보호 속에 살다가 마침내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자가 되게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였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옛 언약인 율법은 우리의 문제를 안고 해결해주는 존재가 아니지요 오히려 정죄하지요 자신은 희생하려 하지 않지요 그러나 새 언약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와 무거운 짐은 가져가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희생을 치루시고 우리에게 영원하신 하늘의 복을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히8:6절에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그렇지요 율법은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없지만 예수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당신을 향해 나가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사서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4:7-10/ 김진수목사

2023-10-28 13:14:04

 

고엘의 일 순위 자인 친족에게 보아스가 말했지요. 나오미에게서 엘리멜렉의 기업을 사서 룻을 아내로 맞아 그가 아들을 낳으면 죽은 엘리멜렉과 그 아들 말론의 이름으로 기업이 이어지게 하라고 그러니까 우선권이 있는 친족이 난 그렇게 손해되는 일을 못하겠으니 당신이 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 순서자인 보아스가 내가 룻을 아내로 맞아서 그가 아들을 낳게 되면 나오미에게 산 기업을 그 아들에게 주어서 죽은 엘리멜렉의 이름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을 열 명의 장로들에게 하게 되고 이제 뭐가 남았느냐 하면 이 일을 공식화하여 확정하는 일만 남은 거지요 그렇다면 공식화하여 확정하는 일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7절을 볼까요.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기업을 포함한 모든 걸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할 때 오래전부터 내려 온 이스라엘백성들의 관례가 뭐냐 하면? 신발을 벗어서 그의 이웃에게 줌으로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신발을 벗어서 주는 것으로 교환과 무름에 대해 확정을 했을까요? 팔레스틴지역은 유독 자갈이 많았다는 거고 그래서 신발이 없이 활동하기는 여간 힘들고 고통스럽지가 않았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중요한 신발을 벗어줌을 통해서 그가 신던 신발이 증거물이 되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고엘의 의무를 감당할 일 순위자는 난 포기 할 테니 보아스 네가 하라는 확정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을 벗어서 증거물로 줌으로 옛날부터 내려온 관례대로 행하여야 했다는 거지요

 

그래서 신25:9절에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뭡니까? 고엘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으려는 그 친척의 신발만 벗긴 것이 아니고 침까지 뱉으라고 하셨다는 거지요

 

그 다음 절 10절에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그러니까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던 자가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으면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는 수치를 지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고엘의 책임을 감당할 보아스보다 앞선 순위를 가진 친척은 자신의 발에서 관례대로 신발을 벗었을까요 안 벗었을까요?

 

8절에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이 말은 뭡니까? ‘내 집 가문에 대대로 신 벗긴 자의 집이라는 수치를 당해도 좋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신발을 벗었다는 거지요 신을 벗어서 줌으로 열 명의 증인들 앞에서 자신의 포기를 확정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사망에 처하게 되어 하나님의 기업을 무를 수 없는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고엘 즉 대속자의 의무를 기꺼이 감당해 주셨지요. 이 사실을 롬1:11절에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말하지요 또 롬1:14절에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그렇습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되도록 보증이 되어주심은 물론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고 하나님 영광을 찬송하는 삶을 살게 하신 겁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고엘이요 대속자가 되시려고 요10:17~18절에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뭡니까? 예수님의 희생은 보아스처럼 자원하는 희생이었다는 거잖아요

 

보아스보다 앞선 친족은 자신은 희생하지 않겠다 해서 신을 벗었는데 예수님이 그러셨더라면 우린 구원 받은 자로 하나님의 기업 무를 수가 없었을 건데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고엘 대속자가 되셨고 우리로 하나님의 기업을 무를 자로 복주셨을뿐만 아니라신을 벗은 자가 아니라유대인의 왕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영광을 세세에 누리시게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2:8~9절에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기꺼이 우리를 위해 수치를 감당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2:10~11절에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고엘 대속자가 되어 우리로 하나님의 기업을 무르게 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9~10절을 볼까요.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보아스보다 앞선 고엘의 의무를 가진 친척이 신을 벗어 자신의 포기를 확정해 주자 보아스가 자신이 할 일을 증인의 자격으로 참가한 장로들에게 말하지요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에게 샀다는 걸 확인시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산 일이 모압 여인 룻을 샀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녀를 아내로 맞아서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녀의 죽은 남편 말론의 이름으로 기업이 이어지게 하고 말론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에서와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바로 증인이 되었다는 걸 선포하더라는 거지요 자! 여기서 나오미와 룻은 이렇게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모압을 떠나올 때 생각이나 했었을까요? 아니지요 전혀 생각지 못했지요 하나님을 찾아 당신의 품으로 찾아 돌아오는 자들을 외면치 않으시는 걸 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떠나올 때가 언제였던가요? 불과 오십일 전이었다는 거잖아요 죽은 기룐의 아내였던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룻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도중에 마음이 바꾸잖아요. 그래 시어머니의 말대로 베들레헴으로 가는 일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모압에 남았었거든요.

 

자신의 남편 기룐의 이름이 이어지도록 보아스는 그녀도 아내로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분명한 것은 보아스에게서 기룐이라는 그녀의 남편의 이름이 거론이 되었음에도 안타깝게 그녀는 거기 없었던 겁니다. 여기서 뭘 깨닫습니까? 오르바는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룻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대표한다는 겁니다. 보아스는 이 모두를 위해서 희생하기를 원했지만 뭡니까? 그 확정의 자리에 오르바가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로 오셔서 자신을 주셨고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을 때 대상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었지만 세상엔 오르바처럼 대속자를 원하지 않고 세상에서 남편을 얻기 위해서 세상으로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룻과 같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 할 때 대속자를 만나서 자신의 수치와 저주를 넘기고 하나님의 기업을 무르는 자들이 있다는 거지요

 

예수님이 왜 오셨나요? 요일서2:2절에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뭡니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값을 치루셨다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이 사실을 말씀하셨지요. 3:17절에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고엘로서 대속자로서 값을 지불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였다는 거지요 보아스도 오늘 본문에서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이라고 그가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는 거잖아요 보아스는 나오미의 손으로부터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모든 것을 사지만 이들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룻을 사서’ ‘아내로 맞이함으로라는 거지요 수혼법이 없었다면 그 당시 아들도 없이 혼자 된 여인들은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약자로 위험스럽게 비참하게 구걸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고 했잖아요. 그런 이들을 위해 보아스가 샀다는 겁니다.

 

값을 지불하고 샀다는 속량이지요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사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7절에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예수님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속량이지요 우리를 사셨다는 겁니다.오늘 보아스도 자신이 속량했음을 선언하고 확정하는 보아스의 행위를 누가 보고 들었습니까? 열 명의 장로들이 증인입니다.

 

이들 증인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이 합법적인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낸 보아스의 행위가 이웃에게 그들은 또 그 이웃에게 전해지고 결국은 베들레헴 성읍 전역에 전파되었을 겁니다. 초대교회 베드로사도도 외치지요 행2:32절에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요 증인의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약 룻이 아닌 나오미를 샀다면 그녀는 이미 늙어서 아들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을 때 새로운 길을 여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1:11절에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바울은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끝이 아니라 뭡니까? 이방인에게로 넘어감으로 세상을 예수로 풍성하게 하였다는 거지요 언제나 기억하세요? 사람에겐 길이 없어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는 길이 있음을 막10:27절에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들레헴 성읍사람들과 십 인 장로들의 축사 /4:11-12/ 김진수목사

2023-10-28 13:10:54

 

보아스가 한 순위가 위인 기업 무를 자격이 있는 친척에게 나오미가 자신의 죽은 남편의 기업을 팔려한다는 이야기를 하자 내가 살게 오케이 싸인을 했었는데 이유가 뭡니까? 나오미를 아내로 얻으면 그녀가 늙어서 자식을 낳지 못할 거니까 그러면 남편 엘리멜렉의 모든 기업도 자신의 것이 되는 행운 때문이었잖아요. 그런데 보아스가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다시 합니다.

 

나오미에게서 죽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기업을 사고 그의 며느리요 말론의 아내인 룻을 사서 아내로 맞아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로 죽은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이름을 잇게 해주고 그쪽 집안이 이 베들레헴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자그랬더니 내가 살게 했던 그 친척이 자신의 발에서 스스로 신을 벗어 증거물로 주며난 그런 손해나는 짓은 못해 차라리 신 벗긴 자의 집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거야하고 포기를 선언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보아스가 나서기를그 다음은 난데 나는 나오미에게서 죽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기업을 사고 그 며느리 룻을 사서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요 죽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아들이 되어서 내가 샀던 모든 기업을 그에게 주어서 그로 하여금 그 집안이 대대로 이 성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장로들과 여기 참관한 백성들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라고 룻의 문제를 확정지었다는 것이 지난 주 설교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떤 내용이 전개가 될 건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1절을 볼까요.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여기서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자가 될 수 있었던 건 기업 무를 자로서 몇 가지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이거든요 그 첫째가 우선순위의 친족이 신발을 벗어서 기업 무를 자를 포기함으로 죽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 되었다는 것

 

둘째가 죽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모든 기업을 사야만 된다는 것 그런데 보아스는 상당한 재력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셋째가 죽은 자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보아스는 비록 늙었지만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넷째가 쉬쉬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성문 위에서 법적으로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모든 족건을 보아스가 성문 위에서 증인들을 모아놓고 확정까지 했으니까 기업무를 자로서 충족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로 충족이 되니 백성과 장도들이 축사까지 해주더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축사에서 분명한 것은 덕담정도가 아니라 예언이 담긴 축사였다는 거거든요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 같게 하시라는 겁니다.’ 이제 보아스 집에 들어가는 여인 룻이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달라는 거지요

 

이스라엘 집이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야곱이 형에서의 칼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지요. 거기서 외사촌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고 칠년 무임노동의 값으로 라헬을 아내로 맞게 되잖아요.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고 그런데 아침에 깨어 보니 라헬이 아니고 그녀의 언니 레아였다는 겁니다. 외삼촌에게 강한 항의 끝에 다시 칠년을 또 무임노동하기로 약속을 하고 칠일이 지난 다음에 바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지요

 

라헬과 레아는 그녀들의 몸종인 빌하와 실바를 야곱에게 들여보내서 모두 열 두 명의 아들들을 낳게 되잖아요 그리고 21년 만에 고향으로 떠나올 때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기도 끝에 기도의 승리를 하게 되자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시잖아요. 그때부터 뭡니까? 야곱의 가문을 이스라엘 집이라고 부르게 된 거지요 그래서 오늘 성문 위에 베들레헴백성들과 십 인의 장로들이이스라엘 집을 이 두 여인이 세워서 오늘에 이르게 한 것처럼 보아스 네 집에 들어오는 이방여인 룻이 이 둘을 이어 이스라엘 집을 계속 세워 나가서 메시아의 집을 세우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원한다고 예언 적 축사를 했다는 겁니다.

 

그 다음 또 두 번째 축사가 이어지지요 이번엔 누굴 위한 축사입니까? 보아스에 대한 축사지요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축사를 했잖아요. 뭡니까? 룻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되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여기 에브랏은 미가선지자가 예수님 탄생지역으로 소개 한 곳이잖아요.

 

5:2절에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에브랏은열매를 맺다는 의미이고 베들레헴은떡 집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렇다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을 보아서 베들레헴이나 에브랏은 한 곳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는 거지요

 

보아스에 대한 축사를 볼까요. ‘열매 맺는 땅 에브랏에서유력하고사실은 룻2:1절에 이미 보아스는유력한 자라고 했었잖아요. ‘유력히브리어하일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힘이 있음을 말하는 단어이고낍로르라는 단어가 더 해서낍보르하일유력한 자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선유력하고히브리어아세 하일은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군사적으로 힘이 있게아세’ ‘행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열매 맺는 곳에서 네 힘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오시는 열매를 맺는 이 땅 에브랏에서 너에게 시집오는 룻으로 인해 너의 어떤 힘이 있는 역할을 기대한다는 예언 같은 축사였다는 거거든요

 

여호와께서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원한다는 축사 역시 예언적인 성격이 짙다는 거지요 본인들은 덕담처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습니까? 베들레헴에 당연 유명한 대표적인 분은 당연히 베들레헴에 나실 것으로 예언되고 실제로 베들레헴에 출생하신 예수님이시잖아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신 일에 또 다른 유명한 사람들은 예수님 족보를 말씀할 때마다 소개되는 사람들이지요. 1:5절에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살몬, 보아스, 오벳, 그리고 이새 중심에 보아스가 있잖아요 이렇게 유명해 질 수는 없는 거지요

 

여기유명하게히브리어우케라 쉠명성을 얻다는 의미거든요 베들레헴 백성들과 십 인의 장로들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축사가 또 다르게 어떻게 명성을 얻게 되었나하면 보아스 오벳 이새 그리고 다윗 그의 아들 솔로몬 그러니까 보아스의 고손이 되는 거지요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천막인 장막에서 재목과 돌로 건물로 지어 드리게 되는데 바로 성전 안에 두 기둥 중 하나의 이름을 솔로몬이 고조 할아버지보아스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거지요. 왕상7:21절을 찾아볼까요?

 

이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그렇다면 뭡니까? 성전을 드나 드는 이스라엘 집의 백성들이 성전 안에서 본 두 기둥 오른쪽의 기둥 야긴 왼쪽의 기둥 보아스하면서 불렀으니 베들레헴 성문 위에서의 축사가 빈말이 되지 아니하고우케라 쉼’ ‘명성을 얻는그리고열매 맺는’ ‘에브랏이 되어 돌아 온 것은 보아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손해가 되더라도 기꺼이 기업을 무르는 순종하는 삶으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또 하나의 축사를 더하고 있지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에 대해서 하는 축사입니다. 이 역시 예언적 성격이 강하다는 거지요 성읍 백성들과 십 인의 장로들이 보아스와 룻 사이에 아들을 하나님이 주시면 누구와 같게 되기를 원한다고 축복하나요?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이랍니다. 유다와 다말의 자식과 보아스와 룻의 자식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 것이라는 암시잖아요 이스라엘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지요

 

유다가 자신의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거든요 세 아들을 낳고 아내는 죽게 됩니다. 첫째 아들이 엘인데 다말이라는 이방여인과 결혼하게 되는데 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서 하나님이 그를 죽이십니다. 그래서 수혼법에 의해서 둘째 아들 오난이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이름을 잇게 해야 하는데 자신에겐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형수에게 자신의 씨를 주지를 않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악함을 보시고 그를 죽이십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는 셋째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친정 가서 기다리라고 그런데 셋째가 장성을 했음에도 시아버지 유다가 셋째를 남편으로 주려는 생각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상복을 벗고 창녀가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유다가 양털을 깎는 곳 길가 에나임 문에 앉았지요. 마침 유다가 그곳을 지나다 창녀인줄 알고 너에게로 들어가리라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며느리 다말이 무엇을 주고 나에게 들어오려느냐

 

내 떼에서 염소새끼를 주마그러면 그것을 주기까지 담보물을 달라고 해서 도장과 도장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주고 관계를 갖게 되었거든요 며느리 다말은 친정으로 돌아와서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임신이 된 것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소문이 시아버지 유다에게까지 들리게 되고 행음하였으니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말할 때 그 담보물이 바로 이 아이의 주인입니다. 이에 대해 내가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주지 않았으니 며느리가 나보다 옳다고 그래서 죽음을 벗어나 쌍둥이를 낳았잖아요.

 

그 아들의 이름이 베레스고 나중 나온 아들이 세라거든요 사실 세라가 먼저 팔을 내밀었고 그래서 산파가 붉은 줄을 세라의 손목에 묶었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가 들어가 버리고 대신 베레스가 나왔다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 족보에 마1:3절에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그 다음 5절에서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이방여인들과의 결혼에서 낳은 아들들이기에 결코 떳떳할 수 없다는 점이 같지만 그 가문은 뭡니까?

 

동일하게 다윗의 조상이 되고 그들에게서 예수그리스도가 오시는 특별한 복을 받는 데 같다는 거지요 참으로 놀라운 예언이 담긴 축사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보아스의 어머니는 기생이었지만 보아스의 삶은 말씀 순종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사니까 백성들과 장로들이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와 그의 후손이 그 축복대로 되었으니 우리 또한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몸으로 실천하여 많은 분들에게 축복과 칭찬이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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