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강해: 구원의 증거(12) - 형제를 사랑함 /요일3:13-24/ 장부완 목사
2025-02-11 12:56:38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에 대하여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크게 감사해야 할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의 구원의 증거”를 아주 분명하게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감동적인 것도 많았지만, 마음의 고통을 주는 것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지순례를 온 많은 사람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허망한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성지를 순례하면 그 자체로 구원을 받거나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 혹은 성물을 만지면 구원을 받거나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것들을 지극정성으로 만지는 것들입니다.
개신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구원의 증거와 확신을 미신적 방법, 신비적 방법, 미스테리 한 경험 적인 것에 의지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구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구원을 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한 번의 경험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 한 곳도 그런 식으로 우리의 구원의 증거와 확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증거를 가장 명료하게 알려주는 요한일서를 보면, 구원의 증거는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동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진리에 속했다, 주 안에 거한 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드러내는 특성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형제를 사랑 한다”고 합니다. 형제 사랑에 대하여 이미 2:7-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본문에서 말씀 합니다. 크게 두 번 반복한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본문과 2장의 형제 사랑에 대한 차이점이 있다면, 본문은 형제 사랑을 어떻게 할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게 될 때 어떤 축복이 동반되는지를 추가하여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 사랑에 대하여 3가지를 강조 합니다. “첫째는 형제를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둘째는 형제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셋째는 형제를 사랑할 때 얻는 복이 무엇인가?”를 말씀 합니다.
이 3가지 강조점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왜 형제를 사랑해야 할까요?
요일3:14-15절에서 왜 구원받는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씀 합니다.(읽음) 형제 사랑은 그 자체가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알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형제를 사랑치 않는 사람은 반대로 사망에 거한 다”고 합니다. 무엇을 보여 줍니까?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특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형제와 자매된 성도들을 사랑하는 특성을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그런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형제 사랑이 구원의 중요한 증거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진짜 구원을 받으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증거에 근거하여 구원을 확신하려면 다른 형제를 한 번만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까? 한 번이라도 미워하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도 다른 형제를 일시적으로 미워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윗입니다. 그는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하여 자신의 충신이었고, 믿음의 형제였던 “우리야”를 사악한 방법으로 죽였습니다. 요한 사도가 말하는 “형제를 미워하면”이라는 말씀은 반복적,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말 합니다. 형제와 자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시기와 질투와 적개심을 갖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 사람의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짜 구원을 받으면 사랑할 대상이 많아집니다. 그 중에 한 대상이 형제와 자매입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구원의 강력한 증거가 될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요일3:23-24절에서 그렇게 말씀 합니다.(읽음) 또 이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이 요15: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안에는 있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품인 신적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한 아버지의 같은 자녀 된 증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감동 받았던 것들 중 하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민족을 초월하여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작고, 좁은 땅을 오가면서도 서로 존경하고, 배려하고, 격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둘째, 어떻게 형제를 사랑해야 할까요?
요일3:16-18절에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씀 합니다.(읽음) 첫 번째로, 사랑해야 할 이유를 말씀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누구 입니까? 그 분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연히, 재수 좋아서 복권 당첨 되듯이 된 것이 아닙니다. 만물을 전부 합한 것 보다 고귀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 형제와 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말씀 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라고 합니까? 물질로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섬기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면 그것과 비교하기에 덜 중요한 물질을 가지고 형제를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로 도와야 할 대상은 너무 많고, 도와야 할 방법도 무궁무진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눈에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개인적으로 눈에 띤다면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물질로 도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으로 형제를 도와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얼마나 마음을 드려서 헌금을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과 나라를 넘어서 도와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여행 중에 아주 작게나마 이 말씀에 순종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아랍인들이 굉장한 어려움, 가난 속에서 산다는 것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같은 아랍인들 속에서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직업 중 하나가 성지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것으로 수입은 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가기 오래 전에 개종한 아랍인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듣고도 무심히 흘렸습니다. 이번에 구체적으로 보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금액이었지만 한 형제를 도왔습니다. 세 번째로, 사랑을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말로도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장인 고전13장에서도 사랑을 행동하는 동사로 묘사 합니다.
셋째. 형제를 사랑할 때 얻는 복은 무엇일까요?
요일3:19-24절에서 우리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할 때 얻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 합니다.(읽음) 첫 번째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19절에서 “진리에 속한 줄 안다”고 합니다. 24절에서 “주님이 그런 사람 안에 거하고, 그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성령님이 알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를 사랑할 때 얻는 복은 자신이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방식, 즉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증거와 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알게 해 주십니다. 성령님의 여러 역살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롬8:16절에서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믿음으로 확신과 담대함으로 갖게 됩니다. 19b절에서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고 합니다. 21절에서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 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합니다. 무엇에 대한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을 말할까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씀 합니다. 형제 사랑에 대하여 책망 할 것이 없으면 우리가 그런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형제와 자매, 우리를 공격하는 형제와 자매를 미움과 적개심으로 대하지 않고 사랑하게 될 때 말씀처럼 “우리 마음이 좋은 의미에서 강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이 생겨서 오히려 그런 상황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 보좌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 주는 수단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22a절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파이프 라인을 확대시키는 축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를 받는 1차 독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럴 때 함께 형제와 자매 된 사람들이 그들의 궁핍을 돋게 된다면 하나님이 도와주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응답이 없다면 혹시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것 때문이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무엇에든지 응답해 주십니다.
형제를 사랑하는가, 살인하는가? /요일3:11-18/ 조정의목사
2021-09-01 09:17:30
극단적인 이분법은 위험하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빛과 어둠, 둘로 영역을 나눠 독자를 압박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가? 어둠 안에 행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는가?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세상을 미워하라. 진리를 따르는가? 거짓과 맞서 싸워라. 하나님 자녀인가? 죄를 짓지 말라. 회색지대는 없다. 왜 이토록 명백한가?
성별의 이분법으로 생각해보자. 남녀 성별 외에 제3의 성별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큰 문제가 된다. 생물학적 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욕구와 싸워야 하는 사람의 존재와 고통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제3의 성별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내면의 갈등과 싸우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힌다. 존재하지 않는 제3 영역을 인정하면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기 욕구대로 살며 방종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명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소위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아웃사이더 성도’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영적 어린아이로 성장이 필요한 성도가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중간에 제3 영역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적당히 세상을 즐기고 죄를 범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섬기는 일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여도 괜찮다고 인정하고, 결국 방종하게 만드는 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참 하나님 자녀라면 누구나 맺어야 할 두 번째 열매를 가르친다. 첫 번째는 죄를 짓지 않는 것, 바른 적용으로 죄와 항상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회색지대 걸쳐 산다. 성령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당신을 더욱 빛으로 인도하여 하나님 자녀의 참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거나, 당신이 어둠에 속한 것을 명백히 드러내셔서 그곳에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게 하시길 간구한다.
1. 기준: 하나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한다(11절)
조금 전까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난다고 말했고,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 곧 마귀의 자녀라고 분명히 선언했다(10절). 두 가지 열매가 모두 언급되었다. ①의를 행하지 않는 것—죄를 짓는 것, ②성도(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서 요한은 “우리” 곧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된 자들은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자녀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다. ①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죄와 싸우고 의를 행해야 한다. ②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신 모든 의로운 일의 완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롬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이런 측면에서 참 하나님 자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열매는 서로 조화를 이룬다. 가장 크고 포괄적인 의의 열매는 사랑이다.
성도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요한의 독자(너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다(요 15:12).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동일한 계명을 주셨지만(레 19:18), 이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계명이 되었다(요일 2:7-11).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근거),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며(본), 성령을 통해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힘을 얻는다(원동력).
요한이 3장 본문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생각해보자. “보라!” 무엇을 보고 감격하라고 명하는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요일 4:11).
2. 이유: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12-15절)
사실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은 하나님 모르는 세상도 캠페인 문구로 자주 사용할 정도로 일반적이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에게 더욱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은 두 가문을 구분하고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미워하는 자를 악한 자 곧 마귀 가문 사람으로 구분한다. 생명 곧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는 사랑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 가문 사람은 사랑한다. 결국 성도 사랑이라는 열매는 뿌리내린 곳, 우리가 속한 가문이 어딘지를 밝힌다.
자, 여기 마귀 가문에 속한 가인을 대표적인 예시로 만나보자(12절). 그는 우리 반면교사다. 가인은 누구에게 속하였는가? 그는 악한 자에게 속했다. 악한 자는 마귀다(요일 3:12; 5:18, 19).
가인이 무슨 일을 했는가? 그 아우를 죽였다(끔찍한 살인, 도륙, 도살, 잔인성 강조). 어떤 이유로 죽였는가? 필로는 ‘가인의 죄가 영원한 사망을 낳는 자기사랑에서 나오는 죄’라고 정의했다. 탈굼에선 가인이 심판, 내세, 의인의 보상, 악인의 처벌 등을 모두 부인하는 악인으로 평가한다. 심지어 유대인 문헌 중엔 마귀가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낳은 자식이 가인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가인과 그가 행한 일을 이렇게 연결 지었다.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12절).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행위를 낳는 자였고, 아우는 의로운 자에게 속하여 의로운 행위를 낳는 자였다. 그래서 가인이 아우를 죽인 것이다. 이것은 가문 간의 전쟁이다.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의에 속하여 의를 행하는 자를 시기하고 미워한다(요 3:19-21).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42, 44). 아버지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13절에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마귀에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래 세상에 속했으나 거기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세상이 더욱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5:18-19). 하나님 자녀답게 살수록 미움은 더 커진다(현재형).
요한은 하나님 가문에 속한 자들에게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12절). 문자적으로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과 같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속한 가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녀는 의로운 분, 하나님께 속했다(요일 3:7). 요한은 그것을 14절에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절)
사망과 생명이 대조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사망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분리된 관계가 사망이다(엡 2:1). 그럼 생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허물을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된 상태다. 15절에 요한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말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 즉 소속이 바뀐 자들의 마땅한 열매는 “형제를 사랑함”이다. 이것은 토대가 아니라 표증이다.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이로써 우리 소속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알거니와”, 미래 분명하게 드러날, 현재 경험하는 실재).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의 소속은 어디겠는가? 사망이다.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심이 있든, 직분이 무엇이든, 교회 다닌 연수가 어떻든 관계없다. 사랑하지 않음은 여전히 그가 사망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날 때부터 속한 소속, 가문이 바뀐 적이 없는 것이다.
15절에서 요한은 더욱 강력하게 이 사실을 피력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미워하는 것과 살인이 같은 수준의 죄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마 5:22). 형제를 미워하는 자나 살인하는 자 모두 처음부터 살인한 자 마귀에게 속해있다는 점에서 같다(요 8:44).
결론적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마다 영생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 즉 하나님과 화목한 가족 관계 안에 없음이 너무나 명백하다. 요한은 이 사실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너희가 아는 바라.
잠시 당신의 뿌리, 가문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라. 때로 성도를 향한 사랑이 부족할 때가 있다. 심지어 특정 성도가 미울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요일 1:9). 하지만 지속적, 반복적으로 성도에 대한 사랑 없음이 드러날 때, 오랜 세월 특정 성도를 향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 회색지대에서 어둠 혹은 사망으로 당신의 소속이 드러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라. 예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어 영생을 얻어라.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요 5:24).
3. 방식: 하나님께 받은 사랑처럼 사랑한다(16-18절)
그러면 영생이 그 속에 거하는 자, 하나님 자녀는 어떤 열매를 맺는 것이 합당한가? 성도 사랑의 열매는 어떤 모양인가?
가인이 마귀 가문의 대표였다면, 하나님 가문의 대표는 16절에 나오는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1).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지만 의인도 아닌 죄인, 선인도 아닌 원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사랑의 크기는 얼마나 더 클까? 바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다(롬 5:7-8). 요한은 16절에서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사랑의 크기와 성격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자매에게 보여야 할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가 맺어야할 성도 사랑의 크기와 형태다. 우리는 자기희생적인 사랑,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 성도를 위하여 자아를 죽이는 사랑을 해야 한다.
흥미로운 대조가 아닌가? 마귀에게 속한 자는 남을 죽이는 자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자신을 죽이는 자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 정의한 사랑은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이다(15개 모두 동사).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 자랑,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거나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 모두 자아를 죽이는 행위이다. 우리는 성도를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런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 그런 사랑을 맺는 것이다(엡 3:17-21).
요한은 또 다른 행함에 주목하는데, 17절에 나오는 실질적 도움을 주는 행함이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는 재물을 가지고 있고, 형제는 궁핍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봤다(흘끗 본 것이 아니라 오래 주시함). 그런데도 도와줄 마음을 닫는다. 문자적으로 “자기의 내장을 닫으면”이다. 감정을 통제하는 장기(내장, ’속상하다’)을 닫는 것 즉 긍휼, 동정, 연민의 마음이 흘러나오는데 억지로 틀어막는 것이다. 그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사랑은 말과 혀로 표현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에 부합하는 행함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요한이 특별히 주목한 행함은 성도의 필요를 보고 긍휼한 마음을 품고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행함이다. 야고보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책망했다(약 2:15-16).
우리는 반드시 성도의 필요를 실제로 채우는 행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왜 요한은 이것을 진실한 사랑이라 했을까?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은 다른 말로 ‘진리 가운데’ 하는 사랑이다. 복음의 진리와 일치하는 행함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가르쳐 주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궁핍함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사 자기 아들을 내어줌으로 우리의 영적 필요를 채우셨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엡 5:25; 딛 2:14). 그 진리와 일치하는 행함이 무엇인가? 자기희생적 사랑, 자아를 죽이는 사랑, 그래서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가 맺어야 할 사랑의 열매다.
적용
오늘날 하나님 자녀는 큰 도전을 받고 있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딤후 3:1-2, “말세에…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1980년대 세상과 2021년 세상은 얼마나 다른가? 이웃 사랑이 최고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자기 사랑이 최고 가치가 되었다. 교회도 그 막강한 변화의 급류 속에 서 있다.
하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그 터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 세상이 갈급해 하는 그 사랑을 교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이 묘사하는 초대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행 2:42-47).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성도를 사랑하는 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다. 요한은 그래서 3장 1절에 “보라”, ‘감격하고 열광하라’고 간청한 것이다. 당신이 뿌리 박혀 있는 사랑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엡 3:19). 성도를 향한 사랑이 방전될 때마다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으로 충전되어야 한다. 마음에 미움이 싹틀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그 사랑으로 미움을 제거하고 사랑을 심어라.
둘째, 사랑하지 않는 죄, 미워하는 죄를 자백하라. 마틴 로이드 존스는 본문에서 요한이 ‘사랑하라’ 명령했지 ‘좋아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성도는 기질적으로 잘 맞지 않고 좋아하기 힘든 면을 가지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랑’이 그 불편함, 어려움을 뛰어넘어 ‘좋아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항심을 가지고 있다. 자아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 죄를 우린 회개해야 한다. 주님이 당하신 수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자로서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불편함과 어려움을 넘어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셋째, 성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필요를 채워라. 절대로 자기 자신과 가족만 돌보는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시간, 재능, 영적 은사, 재물의 일부는 반드시 다른 지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성도에 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최고의 수단은 기도다. 반갑게 인사하고 교제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필요를 발견하는 좋은 방법이다. 성도가 모인 곳에 함께 하는 것 역시 서로의 기쁨을 채우는 귀한 일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실질적 성도 사랑으로 시험하여 보라(엡 5:10).
요한일서 강해 (19) -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 /요일3:10-18/ 김형익 목사
2021-05-13 10:27:49
1. 오해: ‘믿음은 필수, 사랑은 선택’
많은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별개로 여깁니다. 믿는 것은 필수이고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라고 여기는 듯 합니다. 믿는 것은 절대적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상대적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오해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옛 사람에게 속한 이기적 본성에 토대를 두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거짓된 환상을 낳습니다. 그래서 모순적 그리스도인이 생겨납니다.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매우 애쓰고 수고하면서도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는 인색한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이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고 존재론적으로도 모순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A. 이애칭의(以愛稱義): ‘오직 사랑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14)
이런 오해가 만연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충격적으로 들립니다. 10절은 마귀의 자녀냐 하나님의 자녀냐 하는 구분은 그가 형제를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분별된다고 말씀합니다. 14절은 더 노골적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은 이신칭의가 아니라 이애칭의(以愛稱義), 즉 형제를 사랑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들립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라는 말입니다. 15절에 의하면,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형제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어떻게 조화롭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형제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B.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마 22:37~40; 요일 4:20).
일단, 본문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별개로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형제 사랑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율법을 요약하여 말씀하신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두 가지 사랑은 ‘둘째로 그와 같으니’라고 한데서 보듯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가 되면 둘째는 따라옵니다. 사람이 첫째는 행하면서 둘째를 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옳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C. 형제 사랑은 복음과 함께 패키지로 주어진 계명이다(11).
사도가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형제 사랑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사도는 형제 사랑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자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들었을 때, 바로 그 때 형제 사랑이라는 계명이 함께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이미 2:7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그리고 3:23도 보십시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은 예수님을 믿고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도록 처음부터 복음의 패키지 안에서 함께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하는 말은 다분히 영지주의 이단을 의식한 말로 보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은밀하고 매우 특별한 지식을 깨달음으로써 구원을 받고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는 모두 함께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선포된 복음을 들었고 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2:7,24). 요즘도 이단들은 자기들만이 가진 특별한 지식이 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들은 소식’에 대해서 말하고, ‘오래된 복음’을 말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가인과 그리스도(12~13,16)
10절에서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가 드러난다고 사도는 말했습니다. 그 특징은 의를 행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의를 행한다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앞에서 4~9절에서 말했던 바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형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은 이제 11~24절에서 말하려고 하는 주제와 관련이 됩니다. 사실 사도는 이미 2:3~11에서 형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는 다시 한 번 이 주제를 다루면서 더 깊게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절은 앞 부분과 뒷 부분을 연결해주는 구절인 셈입니다. 그 내용은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형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을 말하면서, 가인과 그리스도를 각각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의 대표로 세워서 말합니다. 사도가 전개하는 논리는 비유컨대 칼라가 아니라 흑백입니다.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 미움과 사랑, 사망과 생명이라는 대립 구조가 선명하게 깔려 있습니다.
가인은 세상을 대표하고 그 특징은 미움이며 그는 사망에 거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대표하고 그 특징은 형제 사랑이고 생명 안에 거합니다. 이 대칭구조가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아벨과 가인의 관계와 그 성격이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한 원리는 정확하게 세상과 교회의 관계에 반영되고 또 반복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에서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단순히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개념입니다. 만일 그것이 도덕적 의로움이라면 세상은 교회를 존경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말한 것은 영적인 의로움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3.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다(요일 4:7~8,11; 갈 5:6).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는 별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형제를 사랑하지 않거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형제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보겠지만, 사도는 4:7~8에서 형제 사랑은 거듭남의 시금석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가 강조하는 논지를 아시겠습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신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 그 은혜를 입은 자의 마땅한 반응이고 증거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4:11).”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고로 우리는 형제 사랑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사랑이 형제 사랑의 원천이다(16; 4:19).
앞에서 가인과 그리스도를 각각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의 대표로 사도가 제시한다고 했지요? 사도는 신자의 형제 사랑의 원천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복음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형제 사랑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깨닫고 복음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4:19에서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또 말합니다. 우리의 형제 사랑의 원천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이 신자의 형제 사랑의 원천이고 모델이라는 말입니다.
5. 존재가 행위를 결정한다.
“신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라고만 말하면 다 될까요?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명령이나 윤리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합니다. 복음이 율법 보다 먼저이며, 직설법이 명령법보다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는데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만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으뜸이 되는 단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남자일 수 있고, 한 아내의 남편이거나 두 아이의 아버지일 수 있고, 직장이나 사회의 직함으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취미나, 기호, 조국이나 지역으로도 설명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비하면 이 모든 설명들은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A. 교회는 형제들이다.
자,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형제 사랑이 왜 참된 신앙의 증거일 수 밖에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강조하는 형제 사랑은 형제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라는 공통점, 아버지가 같다는 공통의 존재의 근거가 그들을 서로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설명이 되는 사람이다.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리스도를 대치할 수 있는 그의 존재를 설명할 말은 없다. 그런데 이 사람도 나와 동일한 근거, 그리스도로만 설명되는 사람이다.” 이것이 형제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근거입니다. 단지 기질이 같거나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거나, 동향 사람이거나 동창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공통점만 있어도 우리는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거룩한 성향이 흘러나오는 사람을 만나면 신자는 더 기쁘고 사랑스럽게 느끼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로써 형제를 알아보게 되고 그를 자기와 한 가족이요, 천로역정을 함께 가는 순례자로 여기게 됩니다.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본성(신적 본성), 같은 인생관, 같은 거룩한 소원들과 관심, 같은 축복된 소망을 가진 같은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형제들 안에서도 역사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그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형제 사랑은 참된 신앙의 증거로 그 사람의 신앙이 참됨을 확증해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본능입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차이와 다름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만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공통 분모가 너무나 커서 그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면서 나눔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형제 사랑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 형제 사랑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지방색이나 다양한 ‘끼리끼리’ 문화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져야 마땅한 장벽들이고 교회 안에서는 힘을 잃어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정치적인 입장 즉 진영 논리에 의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교회됨의 영광스러움을 저버리는 태도입니다. 정치 논리와 자기가 서 있는 진영이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자신을 설명하는데 그리스도 보다 더 큰 요소가 여러분의 의식 속에 있다면 저는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의심해야 마땅하다고 말하겠습니다.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영광스러운 직함을 가졌을지라도,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그 사실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욱 크게 여길 것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우리는 시편에 있는 다윗의 많은 고백 속에서 그것을 봅니다. 신자가 자기 존재를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B. 형제 사랑은 자연적 감정이나 본능이 아니다(요일 3:16; 4:11,19).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시면서 혹시 “나는 형제를 사랑하기가 어려운데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게 되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의문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본문이 말하는 형제 사랑은 자연적 감정이나 자연적 본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인간적 기질이나 기호, 취향 등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모두 몸을 입고 살아가고 몸의 본능적 요소들도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영적 본능도 신자 안에는 실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때때로 이런 문제로 고통을 느끼지만, 그들은 그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연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 그 형제를 향해서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이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것을 참으로 아는 자들은 그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졌으며 그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나타나게 됩니다. 형제 사랑은 자연적이거나 본능적 감정이 아닙니다(요일 3:16; 4:11,19).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사도는 형제를 좋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동물적 본능에 속한 것입니다. 개도 자기가 좋아하는 주인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사랑은 이성적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며 이해를 수반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좋아하지는 않아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6. 사랑은 명령이다(17~18).
사도는 형제 사랑이 참된 믿음의 특징이라고 말을 하는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형제 사랑은 참된 신자의 마땅한 바일 뿐 아니라 명령으로도 주어진 것입니다. 17~18절에서 사도는 진짜 사랑을 하라고 호소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신자에게는 영적 본능이 있고 이 본능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이 본능을 거스르지 말고 그 본능을 따라서 힘쓰고 애써서 살아야 합니다.
A. 사랑의 본질은 자기 희생이다(16, 17~18).
이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사도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형제 사랑의 원천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써 드러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16).
그리고 사도가 말하는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17~18절을 다시 보지요.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도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재물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형제가 궁핍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내게는 그 형제에게 도움이 될 재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재물을 그 형제를 돕는 일에 사용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교회 일에 열심이고 성경을 읽는 것이나 기도하는 일에서 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만일, 이것이 여러분에게 해당된다면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형제 사랑은 자기 희생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자기 희생은 말장난이 아니라 재물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하는 대신, 형제를 위해서 재물을 허비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입니다. 목숨을 버린다고 말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작고 사소한 것들을 형제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는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는데, 17절에서는 단수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라고 썼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대신, ‘한 형제’ 또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 작은 자 중 하나’(마 10:42)에게 주는 ‘냉수 한 그릇’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랑은 떠벌리는 사랑이 아니기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라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실 뿐 아니라,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과 진실함이 없이 말과 혀로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이런 일이 1세기의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도 얼마든지 이런 자기 기만이나 피상적 사랑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7. 교회는 보이는 복음이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은 미움이고, 이 미움은 살인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맺고 나누고 살아가는 관계는 세상이 우리의 메시지가 진실인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뼛속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 사랑으로 깊이 결속되고 재물을 사용하며 심지어 목숨을 주는 일까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교회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세상의 교회에 대한 멸시 같은 것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부어지심이 있은 후, 예루살렘에 형성된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형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행 2:44~45; 4:32~35).
물론 교회가 언제나 이런 방식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부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교회 안에서 경험된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 이런 방식으로, 즉 재물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원리는 중요합니다. 이런 것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교회는 보이는 복음입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의 말입니다. “항상 복음을 전해라. 필요하다면 말도 사용해라.” 물론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중요하고, 말로 복음을 전해야 선명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가 말한 것은, 우리의 삶이, 교회의 삶이 세상 앞에 복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메시지를 판단합니다. 개개인의 삶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교회 안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입니다. 형제 사랑이 세상에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교회됨의 증거라는 말입니다.
A. 재물로 형제를 사랑하라.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 희생은 목숨 이전에, 재물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재물 뿐이겠습니까? 때로는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도 형제를 위해 사용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프라이버시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당신의 모든 영광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누리실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프라이버시를 포기하셨습니다. 언제나 방해 받을 준비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을 알았습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사랑을 배운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형제를 사랑할 줄 알게 된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돈으로 한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시간으로 한 작은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프라이버시를 내려놓음으로써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호텔에 가면 방문 손잡이에 붙어있는 태그가 있습니다.
“방해하지 마시오 Do not disturb.”라고 쓰여진 태그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형제여, 내 삶은 형제를 위해서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형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책임지십시오! /요일3:13-24/ 김병삼목사
2018-04-14 05:35:27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
오늘 말씀의 제목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라는 말 전에 13절의 말씀이 참 힘이 듭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런데 가만히 성경을 묵상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맥이 이 말씀인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6장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며 처음부터 말씀하셨지만, 잘 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보려고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보며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지 못할 때, 제자들이 생각하던 복과 예수님이 주시고자 했던 복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21절을 보세요.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환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2절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베드로전서 2장 21절의 ‘이를 위하여’란, 예수님이 부르신 그 삶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사 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죄가 있어서 마땅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땅히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단어가 있다면 ‘사랑’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사랑이 일어나는 현장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낭만’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요한이 말씀하는 14~16절의 말씀을 보세요.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이라는 말과 더불어 ‘사망’이라는 말이 나오고, 미움이라는 말과 더불어 ‘살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둘 다 죽음에 관한 단어들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이 나오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해서 ‘살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살인하는 사람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의 이해의 폭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다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열광하는 일이나, 회피하는 일들이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면 우리가 세상에서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모르지만 부르심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웃집 사람이 솥을 빌리러 왔다. 이 사람은 솥을 빌리러 온 이웃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 자네에게 솥을 빌리러 갔을 때, 자네가 거절하지 않았나. 나도 솥을 빌려주지 않겠네!”
이것은 복수다.
어떤 사람에게 이웃집 사람이 솥을 빌리러 왔다. 이 사람은 솥을 빌리러 온 이웃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 자네에게 솥을 빌리러 갔을 때, 자네가 거절하지 않았나. 그러나 나는 자네에게 솥을 빌려주겠네!”
이것은 미움이다. 탈무드 얘기는 여기까지다.
이 얘기에는 여운처럼 남아 있는 무엇이 있다. 그 얘기를 하자면 이렇다. 솥을 빌리러 온 이웃 사람에게 복수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여기 있네. 빌려 가게나.”
이것이 사랑이다.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빌려주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므로 생명으로 들어가고 사랑하지 아니하므로 사망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14절).
사도 요한이 끊임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며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바로 그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속’을 위해 수고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그 바탕 위에서 ‘사랑의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지상 명령이 ‘제자를 삼으라’는 것인데, 이것은 세상을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를 가지고 나가서 사람들을 제자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는 것!
본문 16절 말씀을 보세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하는 일은 ‘구원’을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역사를 알고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아는 우리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엄격하게 구별되는데, 하나는 자의적인 사랑으로 ‘자기애’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다른 또 하나의 사랑은 상대방을 사랑하므로 우리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연초에 [Passengers]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단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로 무척 지루할 것 같은 내용인데 참 좋은 영화였습니다. 5천 명의 사람들을 동면시킨 채 다른 행성으로 120년 여행을 하는 우주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비행 중 다른 행성과의 충돌로 사고가 나고, 승객 중 한 사람만이 90년 먼저 깨어납니다.
모든 사람이 동면을 하고 있고, 90년 후에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죠. 그러니 사고로 깨어난 그 사람이 홀로 우주선에서 늙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엔지니어가 직업인 주인공 짐 프레스턴은 다시 잠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해 봅니다. 방법이 없자 이번에는 우주선에 있는 첨단의 장비를 가지고 놀고 우주선에 있는 온갖 좋은 음식을 먹어 보지만 고작 1년이 지나자 견딜 수 없는 고독감이 밀려옵니다. 결국,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동면해 있는 승객 중에 오로라라는 여성에 대해 알게 됩니다. 우주선에 타면서 그녀가 남긴 자료와 영상을 통해 그 여인이 바로 자신의 이상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평생 외롭게 죽어갈 처지에서 자신의 이상형과 함께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자신이 동면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누군가를 깨어나게 할 수는 있죠. 너무나 엄청난 일이고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일인지 알지만, 자신이 오로라를 깨웠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친 채 사고를 가장해 그녀를 동면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그녀 역시 90년을 먼저 깨어났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지만, 함께 깨어난 짐의 헌신적 도움으로 인해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둘 뿐인 우주선이지만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혼하려는 순간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외로움 때문에 자신을 동면에서 깨웠다는 사실에 극도로 증오심을 느끼게 됩니다. 120년 후의 자신의 꿈을 산산 조각낸 남자를 용서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영화는 여기서부터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본질에 대하여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등장한 한 승무원 역시 우주선의 결함으로 깨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고로 인해 이 우주선에 탄 모든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불행하게도 우주선을 고치지 못한 채 깨어난 승무원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 승무원은 오로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짐이 당신을 깨운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홀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를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서로 잘 도우십시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5천 명의 승객이 동면한 상태에서 이유도 모른 채 다 죽을 수 있는 사고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 가운데 짐이 오로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위해 한 여인을 깨워 인생을 망쳐버렸던 그 일에 대하여 자책합니다. 이제 그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돌려주고 자신은 기꺼이 죽음을 택하려 합니다. 그러나 목숨을 던져 우주선을 고치고 죽으려 했던 짐을 오로라가 구해 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둘 중 한 사람은 다시 동면에 들어갈 방법을 알게 되고, 짐은 기꺼이 오로라에게 동면을 권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다시 외로운 혼자만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그는 다시 외롭게 죽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입니다. 모든 사람이 깨어났을 때, 우주선에는 그저 두 사람이 평화롭게 살다 죽었던 흔적만이 보일 뿐입니다. 아마도 오로라는 혼자 사는 길을 택하지 않고,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떠올랐던 내용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므로 하는 사랑이 누군가를 죽음으로 이끄는 이기적인 사랑이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죽음으로 내놓아 누군가를 살리는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는 사랑이 무엇일까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
때때로 영화 한 편이 복음의 메시지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누군가를 죽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기의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결국, ‘어떤 사랑’이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랑이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 혹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에 머물지 말라는 것이죠.
본문 17~19절입니다.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오늘 본문 가운데 21~22절 말씀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 두 구절이 23절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조건과 같은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사랑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가 참 힘들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담대히 사랑하지 못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으면’ 흔히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이죠. 열심히 기도하는데 마음이 답답하고 응답이 없는 경우 말입니다. 분명히 기도는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없는 마음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 가운데 ‘책망할 일’이 없는지 말입니다. 마치 파이프에 물을 부어도 통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가운데 가로막는 것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사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근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없을까요?
올 초에 베드로전서 말씀을 강해하면서 묵상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3장 7절의 말씀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이 참 그렇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에게 잘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관계는 기도를 막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말은 아내를 이해하라는 말이 아닐까요?
아내가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은 아내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사랑’이라는 말만 가지고는 가정을 지키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어떤 아내와 남편도 늘 사랑하고 살기는 힘드니,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지금은 아니지만 결국 함께 기업을 이어받을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기도가 막히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이 책망할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학교에 다니며 한참 민중 신학과 해방신학을 공부할 때입니다. 그때는 부도덕한 기업주들에 대하여, 부도덕한 크리스천들에 대하여 비판을 많이 했던 때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런 예였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장로님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늘 신실하게 주일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을 지키는 그 시간 자신의 사업장에서는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정말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일까요?
참 힘든 질문이지 않나요?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22절에 우리가 기도하면서 구한 것을 하나님께 받는데,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는 무엇이든지 받기를 좋아하지만, 그것이 정말 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올바른’ 것을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올바른 것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A. W. 토저의 책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내 기도를 안내해주는 길잡이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인식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분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시도록 그분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기도회 때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들을 들어보라. 그분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수록 내가 그분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를 더욱 알게 되고, 또한 그분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그분과 나 사이에 기대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 통행이다.”
맞는 말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안다면 말입니다.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과 그분이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게 될까요?
이런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 사랑하라는 이야기, 참사랑이란 종류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정의하는 구절이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보니 ‘사랑’을 실체와 그림자의 비유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동그란 공을 생각해 봅시다. 공은 어느 위치에 있어도 동그랗습니다. 그런데 공의 그림자는 빛이 비치는 방향과 공의 그림자가 생기는 지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집니다. 동그랗게도 되고, 타원형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빛을 두 개나 세 개를 비춰주면 그림자는 꽃처럼 되기도 하고 춤추는 모양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그림자가 공이라는 실체에서 생긴다는 것이죠. 그림자의 모양은 그 모양이 어떠하든 실체가 아닙니다. 그림자는 실체의 왜곡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어떤 각도에서 어떤 마음에서 행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2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계명’이고, 이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이루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겠죠. 그럼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좀 더 명확히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과 동행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와 같은 사랑을 말씀하고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스왈드 챔버스의 [거룩과 성화]에 보면 사랑의 명령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라는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삶을 바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아왔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위해 죽으라고 부탁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을 내려놓으라고 부탁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원하신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말한다.”
서로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사랑은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면, 사랑이 아닌, ‘정복’과 ‘조정’하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성숙한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어떤 젊은이가 에게 해에 떠 있는 작은 외딴 섬에 홀로 사는 수도사를 찾아갔다. 높은 바위 위에 있는 작은 방에서 홀로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는 수도사에게 젊은이가 물었다.
“요즘도 악마와 씨름하시는지요?”
수도사가 말했다.
“나도 늙고, 내 안의 악마도 늙어서 더 이상 씨름하지 않는다오. 대신에 요즘은 하나님과 씨름하지요.”
젊은이가 물었다
“하나님과 씨름하신다고요?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길 바라나요?”
수도승이 말했다.
“내가 하나님께 지게 되길 기도한다오.” (출처: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서로 사랑’ 한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책임을 느끼는 것일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본문 23절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계명이 무엇이냐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줄을 우리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사랑을 ‘낭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사랑의 가장 큰 핵심은 ‘책임’입니다. 책임 없는 사랑은 단순한 자기감정의 만족입니다. 감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책임지고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24절에도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으로 그 사랑이 진짜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진짜인지를 알게 됩니다.
아마도 오늘 설교를 듣는 직장인들에는 꿈처럼 들리는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2016년 weekly biz에 인터넷 기업으로 시가 총액이 270억 달러에 육박하는 ‘넷플릭스 기업문화’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 회사는 성장할 때 ‘자유’를 늘렸다고 합니다.
휴가 정책을 없애고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 휴가를 써도 된다는 것이죠. 단지 책임지고 훌륭하게 성과를 내면 됩니다. 그리고 업무에 필요한 지출, 출장비, 선물에 관한 규율도 없앴습니다. 단지 ‘회사 돈을 내 돈처럼 아껴 쓰라’는 원칙은 남겨둔 채 말이죠.
우리가 잘 아는 야후라는 회사 역시 자율 출퇴근제, 재택근무를 도입했지만, 출근 안 하고 부업 하는 직원들이 생겨나자 머리사 메이어 CEO 때 이르러 재택근무를 폐지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가 무한한 자유를 주는 넷플릭스라는 회사를 부러워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회사가 지우는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요?
(넷플릭스는 평균적 성과를 내는 직원 2명보다,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우수한 직원 1명을 고용하면 회사 입장에선 비용을 절약한다고 본다. 그래서 뛰어나고 우수한 직원을 찾는 데 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그 회사에서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그 회사에서 찾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아주 중요한 말씀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참 많이 이야기하는 은혜가 왜 우리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는가?
왜 우리가 그렇게 많이 말하는 사랑이 교회와 신앙을 혼탁하게 만드는가?
사실은 나에게 적용되는 은혜와 사랑만을 바라고, 우리가 베풀어야 하는 은혜와 사랑을 간과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세상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받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때입니다.
누군가 누리는 자유를 부러워하기 전에 누군가 져야 하는 책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랑만 하며 삽시다 /요일3:17-24/ 유기성 목사
2016-08-24 11:22:35
어느 목사님께서 전도훈련을 하는데, 도무지 전도에 자신을 갖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더랍니다. 그들을 어떻게 전도하게 할까, 생각하다가 상가로 데려가 가게마다 찾아가서 단순히 말 한마디만 하게 하였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그리고 다시 인사를 하고 나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전도 못하겠다던 교인들이 전도의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노라고 간증하더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에 신선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고백만 분명히 해도 전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고백도 못하고 삽니다. 간단할 것 같은 이 고백이 쉽지 않습니다. 이 고백을 떳떳하게 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떳떳히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받았다면, 교인으로 등록되었다면, 집사라면?’
오래 전 옷 로비 사건이 있어서 몇몇 고위층 사람의 부인들까지 국회청문회 자리에 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주일에 누구라고 하면 다 아실 목사님 한 분이 주일 설교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선교사님 한 분께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도무지 주일 설교를 하지 못하겠더라는 것입니다. 청문회 자리에 선 부인들, 평소에 잘 알던 사람들이었고 믿음 좋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성경책에 손을 얹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과연 누가 이 고백을 떳떳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기준을 주셨습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실제로 사랑하지 못하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부부싸움 하고 나면 큐티하기도 쑥스럽고 새벽기도회 나오기도 쑥스럽습니다.
“위선자, 그러고도 큐티할 수 있어, 기도만 하면 다야.” 운전하다 다투고 난 뒤 교회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참 쑥스럽습니다.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느낍니다.
요일 3: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그리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이 축복입니다.
올해 교회에 변화가 하나 있다면 금요성령집회 때 전체 헌금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구제헌금입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든지 어려운 이웃, 어려운 교회, 선교단체들을 돕는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신기한 것은 헌금 시간 마다 그렇게 감사한 것입니다.“복이다! 이건 정말 우리가 받은 복이다.”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헌금하자면 기쁘십니까?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궁핍한 사람은 이것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 번 어려운 이들을 도와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기쁘냐는 것입니다.
18절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19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는 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하나님은 나에 복을 주셔.’ 확신이 생기면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확신있는 삶을 사는 열쇠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말씀만 나오면 언제나 자신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항상 마음에 찔리는 문제입니다. 이기적이었고 인색했고 용서하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햇습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로 인하여 마음의 가책이 있다면 아직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씨, 사랑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20절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가책을 받고 있는 정도이지만 반드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사랑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가책을 느끼는 것을 알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놓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리되게 하실 것입니다.
캐나다 집회 중에 어느 권사님 댁에서 묵는 일이 있었습니다. 집에 하루라도 꼭 묵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그 권사님 집에서 묵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정 분위기는 어두웠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 그 가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30년 전에 이민을 하여 예수를 믿었는데, 많은 은사를 체험했답니다.
그러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몇번 교회를 옮기다가 지금은 어느 교회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목사님, 저는 어느 교회에 다녀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에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설교 중에 물었습니다.“당신은 정말‘사랑이 제일이지’하고 여기고 있습니까?”대답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괴로워하셨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께 여전히 회복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간은 특히 우리 마음에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언제까지 가책만 느끼다 인생을 마치겠습니까?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성령충만은 믿음 충만, 사랑 충만입니다. 지금은 가책을 느끼지만 반드시 “주님 저는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담대히 외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충만하면 마음에 두려움이 없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21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기도를 해도 주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 믿어집니다.
22절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 집사님이 미국 이민을 갔는데, 사기를 당하여 돈을 다 잃어 버리고 심지어 폭행도 당하며 마음에 분노와 미움, 좌절감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공부 잘하던 두 아들 마저 방황하며 제대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미움의 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위기감에 집사님 내외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며 열심히 기도했는데, 자꾸 마음에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가족들 사이에서 회개와 용서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손해를 끼치고 말과 행동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아들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형제 둘 다 함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영은 살리는 영입니다.
그 집사님이 울면서 고백했습니다.“진작 이렇게 마음을 정리했다면 돈은 잃어 버렸을지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아이들까지 이런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사랑하라” 결코 무거운 계명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고 가족을 살리는 길이고 교회도 사회도 살리는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나 간단하고 뜻은 선명합니다. 더 이상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23절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힘든 것이 아닙니다.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사회가 이토록 과격하고 흥분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사랑이 회복되지 않으면 사회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길을 찾는 것이 왜 이리 힘들어야 합니까? 나라가 잘 되는 길을 의논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는 미움의 영입니다. 잘해보자, 바로 해보자는 것과 미움은 전혀 다른 영입니다. 속으면 안됩니다.
미워하고 싸우면 다 망한다고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서도 어른들이 왜 이러는 것입니까? 영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만약 파업 현장에 나가서, 청와대에 가서 “우리 사랑합시다!” 하면 양쪽에서 돌을 맞을 것입니다. 하품하고 조롱하고 무시할 것입니다. 영 분별이 안되니 미워하고 싸우면서 다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도산 안 창호 선생은 '우리 2천만이 다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2천만 한 민족은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고 외쳤습니다. 그가 민족을 위하여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디에서 사랑의 힘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라” 우리 힘으로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닙니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24절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는 압니다.
사랑해야 성령님이 오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가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되면 누구나 믿음으로 사랑으로 살게 됩니다.
크리스티 김 선교사님이 청년 때, 어느 날 룸메이트가 많은 형제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는데, 자기에게 꽃다발을 가져다 주는 형제는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자기 혼자 방에서 울었답니다.“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창 밖을 보라!’‘무엇이 보이느냐?“가로수가 보입니다.”’이것이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황홀하더랍니다.“이 세상에 가로수를 선물로 받은 사람 있더냐?”
그 때부터 김선교사님은 봄 가을로 황홀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 그 분이 그렇게 놀랍게 사역하시는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모든 이를 사랑하며 살 거야!”
그러나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기다려야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 컴패션의 서정인목사님의 책 [고맙다]가 출간되었습니다. 추천사를 부탁하셔서 읽다가 몇 번이고 울컥하는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한 여자아이를 위하여 골수이식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골수이식을 해주려면 1주일 동안 입원해서 전신마취를 하고 골반에 구멍을 내서 주사기로 골수를 채취해야 했는데, 그만 의료 사고가 일어나 큰 일 날뻔 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골수를 받은 아이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렇지만 5개월쯤 지나 아이의 병이 재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문제는 골수 기증을 다시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이제 다른 사람의 골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식을 해도 아이가 살 확률이 1% 정도였고 지난 번 사고도 있어 아내도 전문의인 매제도 주변 사람들 마다 다 말렸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이번에는 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있는 부담감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 마다 유도 질문을 해서 이번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을 얻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럼요, 어떻게 두 번이나 하겠어요.” “목사님, 잘하셨어요. 몸도 약하시고 할 일도 많으신데요.”
그런 중에 에콰도르에 비젼트립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난 장로님께 또 그간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을 얻고 싶었었는데, 의외로 그 장로님은 “목사님… 하시지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제 큰 아이가 백혈병으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 심정은 말할 수 없이 힘들 것입니다. 그 아이가 살고 죽고를 떠나 그 아이와 부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날 호텔로 돌아와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만약 그 여자아이가 네 친딸이었다면 너는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겠니? 설사 1퍼센트의 가능성 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야.’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못을 박듯 제게 다시 한 번 마음을 울리셨습니다.‘그 아이는 내 것이라.’
이제와서 병원과 아이의 부모에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전하기가 민망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자원하는 마음도 아니었고 숭고한 동기도 없었다는 것을 꼭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딸 아이의 생명을 놓고 그 부모가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을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부끄러운 목사’라고 편지 제목을 쓰고 그 간의 제 마음과 상황을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항복했기에 골수이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우리 예수님께 매달립시다.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붙잡읍시다.”
한국에 돌아온 후 바로 병원으로 가서 이식 준비를 하는데,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다섯 장의 긴 편지였는데 장마다 눈물이 떨어진 흔적이 보였습니다.“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골수이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딸애가 무균실에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감사의 편지를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저도 목사님이 얘기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매달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매달림과 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딸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고 있으며, 그 아이의 아버지도 다른 아이한테 골수이식을 해줬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힘이 들지만 주님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기적을 이루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담대히 “나는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서 강과 같이 흘러나가게 되어, 우리 자신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민족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안됩니다.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이번 주간 오직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