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시게 받으실 감사 /레22:17-23
2019-01-14 00:51:46
저는 길눈이 참 어둡습니다. 흔히 길치라고 하는데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도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그 어디도 찾아가질 못합니다. 목적지만 입력시키면 어떻게 찾아가는지 희한하게도 거기까지 데려다줍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네비게이션에 대해서 알고 보니까 우리가 쉽게 알고 있는 GPS, 그러니까 위성항법장치라고 하는데, 원래 영어로는 Global Positioning System 이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되었더라고요. 사실 이것은 원래는 미국 국방부에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민간 기술로 이전한 것입니다. 어쨌든 정말로 편의를 제공하는 현대의 기술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생각해 볼 때 삶의 여정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정확한 목적지를 보여줄 수 있는 네비게이션이 있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네비게이션에 정말 중요한 것은 GPS입니다.
그렇다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안전하게 우리를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네비게이션에 필요한 GPS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의 마음입니다. 신앙의 네비게이션에 감사를 입력하고, 감사를 따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종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GPS입니다.
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았습니다. 첫 아들로 가인이요, 둘째 아들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아담은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앉혀 놓고 단단히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살게 된 것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희생된 어린양 때문이었다고, 이 어린양은 장차 인간을 위하여 희생되실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라는 것도 알아듣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거나 양을 치거든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가르쳤을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절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버지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는지, 아니면 알아듣긴 했는데 거역한 것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땅의 소산을 가지고 되는 대로 성의 없이 적당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형 가인과 달랐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제사의 법에 맞추어서 양의 첫 새끼의 피와 기름으로 정성껏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즐겨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은 하나님 때문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신의 무성의와 불성실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께 분통을 터트리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오늘 날 가인의 이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기분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기분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 책망을 들은 가인의 마음이 더욱 거칠어져서 공연히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을 드린 동생 아벨이 미워진 것처럼 내 기분이 나쁘므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지면 다른 사람을 미워합니다. 급기야 아무 것도 모르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일 지경까지 이르렀던 가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드릴까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드리든지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하게 정리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세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하나님께 제사가 열납되도록 드리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아 주시는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배가 뭡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굴복하고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당시의 예배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 이었습니다. 제물이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가지고 자기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가 하나님 앞에 깨끗함을 받고자 하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몸을 온전한 제물로 바치심으로서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제사는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시어 완전한 제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아무런 장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예배는 제사를 드리는 과정이 없이 기도와 찬송과 말씀과 헌금의 네 가지 과정을 위주로 하여 진행합니다. 기도와 찬송과 말씀과 헌금은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네 가지 항목입니다. 예배는 몸과 마음과 함께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배시간에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함으로 더욱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 갑니다. 예배시간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굴복하는 마음이요 경배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우리들이 이 땅위에서 수고하여 얻은 물질을 감사함으로 바칩니다. 이것이 헌물 헌금입니다. 이 헌물을 어떻게 드려야 되느냐 하는 것이 오늘 봉독한 말씀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물과 관련된 말씀이 많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들은 예배에 제물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온 몸을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들을 위한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단지 기도와 찬송과 말씀과 헌금을 온전한 심령으로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한 제물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마음을 다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들의 깨끗한 심령만이 하나님께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로서 열납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 하 반절에서 19절을 보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예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말했습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흠 없이 온전하게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흠이 있으면 회개해서 그 흠을 없애고 나를 드려야합니다. 그래서 내게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소중한 것,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깨끗하게 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제사를 기억하십니까?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그리고 불로 태워드리는 “화제”, 흔들어 드리는 “요제”, 높이 치켜 올려 들어 드리는 “거제”, 부어드리는 “전제” 등 그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드리는 목적이나 방법이 각기 달라도 분명한 공통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제사는 제사가 아닙니다. 감사가 없는 예물은 예물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는 봉사는 봉사가 아닙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감사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 살아가지만 분명히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학생이 여행 중에 여관에 투숙했다가 신발을 잃어버렸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잠을 잤는데 신발을 도둑맞은 것입니다. 몹시 화가 나서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는데 헌 신발을 신고 주일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도, 찬송도 되지 않고 오직 잃어버린 신발 생각만 났습니다.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누가 내 신발을 신고 갔나?’ 하고 의자 밑 사람들의 발만 살폈습니다. 그런데 같은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태도가 어찌나 간절하고 감격스러웠던지 놀라워하며 그 사람의 발을 내려다 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순간 ‘신발을 신을 발도 없는 사람이 저토록 감사와 찬송으로 감격스런 예배를 드리는데 나는 신발 한 켤레 잃어버렸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투정을 부렸구나!’ 하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두 다리가 없어도 감사했던 그 사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훗날 독일의 재무장관이 된 바덴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은 드리는 자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드리려거든 받으실 만한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곧 정성이 없이 드리려면 차라리 드리지 않은 것이 낫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올해 추수감사주일은 작년보다 나은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더 못한, 아니면 그저 그런 감사가 아니라 작년보다 더 나은,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나은 감사가 있기를 바라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추수감사주일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너희가 기쁘시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니라 /레22:26-33
2018-04-17 05:41:05
아시다시피 저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전혀 보지 않지만, 그 스토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위 ‘막장 드라마’라고도 불리는 대로 그 내용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이며 과정이나 결말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나라의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가 고부간의 갈등입니다.
그런 경우 며느리가 무슨 꽃이나 선물을 들고 시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시어머니는 그것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따위의 장면도 아마 자주 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어머니의 눈에 일단 며느리가 밉게 보이면 제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오더라도 그 선물이 반가울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바로 오늘 본문 29절이 그 사실을 두고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림에 있어서 ‘제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곧 ‘나’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풍성한 제물을 바친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그 감사제사 자체가 무의미한 의식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의 감사가 그처럼 헛수고로 끝나는 것을 원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당신께서 그것을 기쁘시게 받으실 수 있는지를 명백하게 선포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온갖 귀하고 좋은 은혜와 복들을 세어 보면서 이제 한 주간 남은 추수감사절을 기다리는 오늘 주일에 저는 과연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심’이 될 만한 감사의 제물로 드릴 수 있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감사예물을 준비하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26절부터 28절에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리라 28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 앞의 17절 이하 2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께 바치는 제물은 반드시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21절)이 되어야 함을 구구절절 강조하셨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것”은 절대로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25절)이라고 명백히 단언하셨던 것입니다.
이 26절부터 28절의 말씀은 그처럼 ‘온전한 예물’이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추가조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소나 양이나 염소”는 여러 종류의 제사에 쓰일 수 있는 대표적인 짐승들인데, 이어지는 29절의 “감사제물”로도 쓰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짐승의 종목을 구체적으로 밝히시면서 특히 그것들이 갓 난 새끼일 경우에는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한 후에 “여덟째 날 이후로는” 언제든지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명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2장 30절에 나왔던 명령을 재확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짐승에 대해서도 인도주의적인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어차피 짐승의 새끼를 잡는다면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잡는 것이나 8일 후에 잡는 것이나 ‘인도주의적인’ 면에서 본다면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8일 후’에 잡을 수 있게 한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아이가 출생한 지 8일 후에 할례를 받게 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이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생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정식으로 언약의 백성이 되었듯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역시 난 지 8일 지난 후에 드림으로써 ‘언약의 백성 된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물’의 격식을 맞추도록 하는 데에 진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28절에서 제물로 쓸 짐승을 잡을 때 그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못하게 하신 것도 역시 그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어미 짐승과 그 새끼를 일부러 같은 날에 잡을 뿐 아니라 더 심한 경우에는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삶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잔인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런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위를 본뜬대서야 결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 제물부터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명하신 ‘온전한 것’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른에게 무엇을 대접하거나 사 드리고 싶을 때에 “어떤 것을 잡수시겠습니까? ”라든지 “뭘 좋아하십니까?”라고 여쭈어보게 됩니다.
그럴 때 어른 쪽에서 “아무 거나 괜찮다.”라고 하시든지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면 대접하려는 쪽에서는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반면에 그냥 당신의 취향대로 말씀해 주시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거나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우리를 더 어렵게 만드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물을 바쳐야 할 절기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정해 주셨으며, 그 예물의 종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까지도 상세하게 일러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맥추감사절을 지키라 명하셨고 또한 추수감사절 역시 지키라고 명하셨으며, 그 날 드려야 할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에 대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명령해 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기독신자들은 이 감사절기를 불신자의 풍습과는 전혀 다르게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추석이라는 명절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저 귀신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서 지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런 불신사회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자신의 감사행위를 ‘예배’를 통해 승화시킵니다.
불신자들은 추수를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순전히 자기네들끼리만 먹고 마시면서 ‘노는 날’로 끝냅니다.
하지만 적어도 ‘구원의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당연히 그 감사의 예물까지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준비하여 바치면서 이 날을 더욱 즐겁게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감사제물부터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드려야 함을 기억하면서, 이번 추수감사절에도 각자 ‘흠 없고 온전한 제물’들로 정성껏 준비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다른 성도들과 감사제목을 나누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29절과 30절에 기록하기를 “29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 30그 제물은 그 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감사제물”이란 ‘서원제, 낙헌제, 감사제’로 세분되는 ‘화목제’ 중에서 특히 ‘감사제’ 때에 바치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5대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 화목제에만 해당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사의 제물들은 오직 제사장과 그 식구들만 먹을 수 있었지만, 이 화목제만은 그 제물을 바친 일반 백성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 강조된 다른 제사들과는 달리, 이 화목제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교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열왕기상 8장 63절 이하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거행하면서 ‘이만 이천 마리의 소’와 ‘십이만 마리의 양’으로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리고 온 백성이 함께 나누어 먹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화목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화목제의 특별규정은 ‘감사제’뿐 아니라 ‘서원제와 낙헌제’에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이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은 있었습니다.
곧 서원제와 낙헌제의 경우에는 그 제물을 제사 드린 후 ‘이튿날’까지도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감사제만큼은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반드시 “그 제물은 그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나 양을 한 마리 잡아서 감사제를 드리고 그 고기를 당일에 다 먹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비단 가족이나 친지뿐 아니라 더 많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먹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연히 상호 친교가 이루어졌던 것이며, 바로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제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이, 감사 역시 혼자만 하는 것보다는 함께 나누는 사이에 더 커지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 감사헌금의 특별한 제목들을 공개하는 이유도 바로 모든 성도들이 ‘아, 저럴 때에도 저렇게 감사드리는 것이구나.’라고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도 같은 경우가 생길 때 감사드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돌을 맞이했을 때 감사헌금도 드리고 또 성도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열어 대접하거나, 자녀의 결혼 후에 역시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바칠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떡을 돌리는 것 역시 ‘감사가 더욱 증폭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히 ‘감사제물’은 그것을 바친 성도 본인뿐 아니라 가능한 한 그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함께 나누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남보다 당연히 먼저, 당연히 더 크게 감사해야 할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심히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작은 것 받았는데도 감사드리고, 내가 보기에는 감사의 제목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두고도 오히려 감사드리는 성도들을 보게 될 때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 잘 되고 돈 많이 벌고 있으면서도 일 년 열두 달 52주일 내내 감사헌금 한 번 드리지 않던 교인이, 이제 막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쥐꼬리만큼 받는 첫 월급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전부를 ‘첫 소산의 감사헌금’으로 바치는 청년을 보면 좀 무언가 자극을 받지 않겠습니까?
자기 집안 식구들이 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번 감사기도조차 드리지 않던 교인이, 사랑하는 가족의 상을 당하고도 오히려 장례를 위로와 은혜 가운데 이끌어 주신 것을 기억하여 특별감사예물을 드리는 유족 성도들을 보면 당연히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성전을 출입하면서도 보리떡 헌금에 단 한 푼도 바치지 않는 ‘짠 어른 교인’들이, 주일학교 학생이나 유치부 어린이들이 저금통 헌금을 이 제단 위에 올려놓은 것을 보면 좀 무언가 그 마음에 찔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감사제물’을 ‘그 날’에 함께 ‘나누어 먹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바로 이런 감사의 공감대가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에는 좋은 의미에서 일종의 ‘전염성’이 있습니다.
감사의 제목을 성도끼리 나누는 가운데 ‘무엇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언제 어떻게 감사드리고’ ‘얼마나 감사드리는’ 것에 대해 그야말로 ‘해피 바이러스’가 교회 안에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향공동체를 통해 나누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반드시 이러한 ‘감사의 화목제물’을 공유함으로써,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감사제사를 더 자주, 더욱 풍성히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결단과 함께 감사드리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31절 이하 33절까지의 말씀에 “31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2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33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감사제물’만 강조하고 끝내지 않으시고 연이어서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고, 어떻게 보면 앞 구절과는 아주 동떨어져 보이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너무나도 문맥에 맞는 말씀입니다.
감사제사를 한 번 드렸다고 해서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다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주 만홀히 여기는 신성모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거룩하게 함(여김)을 받아” 마땅하신 하나님께 겨우 양 한 마리, 소 한 마리 잡아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긴다면 하나님께 그 얼마나 모독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즉 당신의 백성을 천하만민들 중에서 택자로 부르시고 선민으로 삼아 주시는 분이신데, 딱 감사절기 하루만 지키고 나머지 날들은 그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성호를 속되게 하는’ 즉 신성모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특히 그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라고 스스로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단순히 일 년 농사를 도와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남의 종살이 하고 있던 백성에게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해방을 베풀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진정 그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있는 자라면 무슨 맥추절이나 장막절 때에 감사제사 한 번 드리는 것만 가지고서 그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다 나타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 말도 안 될 소리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아주 구체적으로 요구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가 베풀어 준 구원과 생명의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한다면 감사제를 드리는 날뿐 아니라 평소에도 늘 내 계명을 순종하고 살아야 마땅하다.’라고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말씀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모시는 방법’ 중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요,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야말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제물들’ 중에서도 가장 요긴한 제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감사란 예물을 바치는 것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것까지 행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갖출 것을 완전히 갖추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거룩히 모시는’ 성도의 기본마음에 해당된다면 순종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성도의 기본자세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감사절을 지키면서 그냥 ‘하나님, 감사합니다.
’ 하고 꾸벅 인사 한 번 하고 헌금봉투 한 장 내밀고 돌아서서 ‘이제는 다 끝났다.’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 감사절에 올린 감사가 진짜 감사인지 아닌지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날을 통해 다시 일깨워진 감사의 마음을 그 이후에도 계속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그 감사절 때문에 각자의 심령 속에 증폭된 감사를 이제 자신의 행동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발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하면 이제 성탄절이 올 때 정도까지는 적당히 주일을 빼 먹어도 괜찮겠지.’라고 ‘머리 굴리는’ 교인이 혹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특별감사헌금을 내 딴에는 꽤 많이 드렸으니 이제 내년 맥추감사절이 올 때까지 일반 감사헌금은 내지 않아도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지.’라고 제멋대로 ‘계산을 끝내 놓는’ 교인마저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실로 ‘속되게 만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신 성부 하나님을 너무나 ‘만홀히 여기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성도라면 정말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아 성별된 성도라면 결코 그럴 수도 없습니다.
어른이 무슨 고마운 일을 베풀어 주실 때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진심으로 드리는 사람이라면 ‘더 잘하겠습니다.
’라는 말도 절로 따라오게 되지 않습니까?
감사의 예물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서원과 결단 또한 함께 올림으로써 비단 감사절뿐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성호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그 감사가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감사가 그저 체면치레에 불과할 때, 감사의 정성이 모자랄 때, 혹은 감사 자체가 아예 외식이고 거짓일 때에 그 감사는 결코 하나님께 열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기쁘시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니라”(that you may be accepted)고 하셨습니다.
‘제물이 받으심이 되도록’이 아니라 ‘너희 자신이 받으심이 되도록’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 4:4-5)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벨의 제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즉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과 그의 제물을 동시에 받으시든지 아니면 그 사람과 그 제물을 동시에 받지 않으시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주일학교 어린이들 중에 가끔 제게 선물을 가져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선물이란 정말 각양각색인데, ‘색종이로 접은 하트’부터 시작해서 ‘먹다 남은 과자’일 때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저의 얼굴을 정말 괴상하게(?) 그려 놓고 게다가 그냥 ‘목사’라고 ‘님’ 자도 없이 제목을 달아 놓은 그림도 있고, 아마 틀림없이 엄마가 함께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될 정도로 작품성(?)이 높은 공예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선물이 어떤 종류인지,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를 따지겠습니까?
저는 그 ‘아이’들이 저를 찾아오는 자체가 더없이 기쁠 뿐이며, 더욱이 그런 ‘특별한 선물’까지 가져올 때에는 그 기쁨이 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물’ 자체보다 당연히 ‘사람’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나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제물’로 바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온전한 감사예물’을 준비하고, ‘감사의 제목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어’ 증폭시키며, 또한 ‘감사에 따르는 순종의 결단’을 서원함으로써, 이번 추수감사절에 더욱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감사제를 함께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추수감사절/ 감사 희생 /레22:26-33
2008-01-08 14:27:32
<용서하지 못해 불행한 사람들>
지난 주 신문에 참 어처구니없는 사건 하나가 소개됐습니다. 국립 대학 교수 한 분이 재판에 불만을 품고 "죽이고 싶다"는 내용의 책을 발간해서 자기를 재판한 부장 판사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에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145쪽 정도의 분량인데 제목이 놀랍습니다. 「아! 현직 판사들을 죽이고 싶구나」. 이 책은 그 교수가 직접 쓴 책인데 자신이 제기한 민사 소송을 부장판사가 각하시킨데 불만을 품고서는 그 부장판사와 사법부를 성토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서울 소재 모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판했으나 아직 판매는 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깊은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뼛속 깊이 상처를 준 사람들이 대부분 나와 가깝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특별 새벽기도회에서 창세기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순으로 내려오는 가족사에는 항상 갈등과 아픔이 있습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깊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기 한 목숨 살려고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남이 빼앗아가든 말든 내 목숨 하나만 건지면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태도이지요. 야곱은 자신의 쌍둥이형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조카인 야곱에게 사기를 쳐서 20년 간이나 노동 착취를 합니다. 야곱의 열 아들은 막내 동생 요셉을 미워한 나머지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을 때 가족 친지 친구 동료 등등,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그럴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에게 괴로운 일을 당하면 안 보면 그만인데 부모형제 친척 친구 동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어머니를 미워하고 형이나 누나나 동생을 미워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를 미워하고 직장 동료를 미워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증오심을 품을 때 우리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상대방은 그대로 있는데 무엇보다도 내 마음이 무겁고 내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풀어야지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우리 마음에 화병이 생깁니다.
<용서에 이르는 길: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라>
오늘 우리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막고 서 있는 다섯 번째 장애물 '증오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의 앙금을 떨쳐내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 그도 살고 나도 삽니다. 용서는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상처 준 그 사람을 살리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부터 살리는 일입니다. 내가 미워하고 복수하고 싶고, 은근히 망해서 저주받기를 바라는 상대방을 진정으로 용서하기 전에는 내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아직도 미워하고 앙금을 씻어내지 못한 분들이 누구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분명히 깨달은 사람은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직 어린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고향과 부모형제 곁을 떠나 요셉이 겪은 고생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죄수 신세로 전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요셉은 이집트에서 엄청난 출세를 합니다. 국무총리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한 손에 잡았을 때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양식과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때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지만 깨끗이 용서하기로 작정합니다. 자기가 형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배신을 받은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네 번씩이나 말합니다(창 45: 4-5; 45: 7; 45: 8; 50: 20).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넘긴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기가 노예가 된 것이 오히려 가족들과 민족 전체를 위하여 행운이었다고 고백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로서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습니다. 혹은 아직 나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 가족들을 힘들게 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 형제들 가운데 사고뭉치인 형이나 동생이 하나 있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슬픈 기억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옥소리와 박철인가 하는 유명 연예인 부부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사랑했던 연인이나 배우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믿었던 친구나 동료로부터 사기를 당해서 엄청난 손해를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자기를 고통스럽게 만든 그 사람들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미워집니다. 복수하고 저주하고 싶습니다.
이런 분들은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모든 사건을 해석하는 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지만 그런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거꾸로 가정의 소중함을 절감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폭력과 싸움과 갈등이 그치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간의 화목과 우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와 배신을 당하여 재산을 다 날렸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불우했던 시절, 억울하고 상처받았던 사건들도 믿음의 눈으로 해석해보면 오히려 나를 더 연단시키고 성숙하게 만들고 세상 줄이 아닌 하나님 줄을 더욱 더 굳게 붙들게 한 계기가 된 적이 많았습니다. 만일 내가 부유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하나님을 안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웠고 힘들었기 때문에 더 하나님께 매달렸다면 고난이 오히려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배신 안 당하고 사기도 안 당하고 사업도 안 망했더라면 나는 나 자신의 능력만 믿고 안하무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과 시련을 겪었기에 나와 비슷한 아픔과 시련을 겪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받은 것이 그 당시에는 견딜 수 없고 증오심을 머리끝까지 불러일으켰지만, 지나놓고 보니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련을 통하여 내 인격이 많이 성숙하고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롬 8: 28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옳고도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화가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릴 때 연필로 여러 가지 밑그림을 그리고 기본 색깔들을 칠해놓습니다. 언뜻 보면 형편없는 그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화가의 손놀림이 계속될수록 점점 더 아름다운 그림으로 바뀌어갑니다. 고난과 시련도 억울한 일도 상처도 지금 당장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 전체의 그림이 완성될 때 그토록 불우하고 괴로웠던 시절이 있었기에 우리 인생이 더욱 더 의미 있고 아름답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용서: 악을 선으로 갚는 일>
아마 제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정작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잘못 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또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나에게 아무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나님다운 일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일은 인간다운 일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악마가 하는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짐승이 하는 짓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사탄 마귀나 하는 짓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본능대로 하는 일이니 짐승의 짓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선을 선으로 갚든지 악을 선으로 갚는 일입니다. 나에게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선으로 되 갚으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도리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악을 끼쳤더라도 선으로 갚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정신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복음의 끝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용서하고 사랑할 때 복음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조엘 소넨버그(Joel Sonnenberg)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통행료를 내기 위해 매표소에 서 있는데 갑자기 대형트럭이 들이닥쳐 사고가 났습니다. 그 때 조엘은 뒷자리 유아용 좌석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조엘의 몸은 4/5가 화상을 입었고 한 손은 아예 없어졌습니다. 그 후 긴 세월을 재활 병원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조엘을 보면서 "저기 원숭이 좀 봐라" 하면서 조롱과 야유를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배보다 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축구팀의 주장과 학생회장이 되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과대표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인 조엘이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고를 낸 운전사를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트럭 운전사는 사고 처리 도중에 외국으로 도피해 19년 동안이나 잠적해버렸습니다. 조엘도 인간이었기에 자기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을 증오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트럭 운전사는 19년 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엘은 법정에서 그 운전사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레지날드 도트 씨(운전사의 이름), 당신이 은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증오는 불행만 초래할 뿐이므로 우리의 인생을 증오로 얼룩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인생을 사랑, 곧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감싸야 할 것입니다." 조엘 소넨버그는 하나님을 믿는 청년으로서 자기 인생을 망친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그리하여 진짜 승자는 조엘이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윤리적인 규범입니다. 말과 행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다 귀하고도 중요한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도 4: 32절 말씀을 주목해봅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을 먼저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야만 합니다. 우리를 억울하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겨야만 합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해를 끼친 상대방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제 제일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사 1: 18). 이렇게 놀라운 용서를 경험한 우리들이 훨씬 더 미약한 죄를 저지른 우리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마 6: 14-1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먼저 남의 잘못을 용서해줄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남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과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 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깨집니다. 자녀에게 회초리를 댈 때 맞은 녀석은 세상 모르고 쿨쿨 잘도 잠이 드는데 때린 부모는 뒤척거리며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억울하게 만들고 상처를 입힌 모든 이들을 너그럽게 용서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이 삽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행복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아멘.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레22:17-25/ 박봉수 목사
2016-02-07 17:47:56
정민이라는 분이 쓴 [일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없는 것을 찾아서 불평하는 불평주의자로 살고 있다고 책 제목대로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발이 네 개인 짐승에는 날개가 없다. 새는 날개가 있는 대신 발이 두 개고 발가락이 세 개다. 소는 윗니가 없고 토끼는 앞발이 시원치 않다. 발이 네 개고 날개가 있고 뿔에다 윗니까지 갖춘 동물은 없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불평거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누구도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감사거리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불평과 감사는 인생을 사는 태도요 습관입니다. 불평하며 사는 사람은 늘 불평거리만 보고 불평하며 삽니다. 그러나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은 늘 감사거리만 보고 감사하며 삽니다.
범죄 심리학자 소퍼 박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보면 감옥과 수도원을 비교해서 설명한 부분이 나옵니다. 사실 감옥의 죄수들과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하루의 삶이 비슷합니다.
격리된 곳에서 정해진 일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감옥에 있는 죄수들은 늘 불평하며 살지만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은 늘 감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불평하며 살면 우리 삶이 감옥과 같이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감사하며 살면 우리 삶이 수도원처럼 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뒤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구원의 핵심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또한 우리가 불평으로부터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늘 불평거리에 사로잡혀 불평하며 감옥과 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로 감사거리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점차 불평하던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를 스스로 분별해 볼 수 있는 체크리스트가 있습니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보다 불평을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풍성하다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불평거리가 훨씬 더 많은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면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목해야 할 표현 하나가 나옵니다.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잊은 채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배 안에서 은혜 받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연 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가에 대해서는 간과합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과연 이 감사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 자체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감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감사를 기쁘게 받으실까요?
깨닫고 드리는 감사
사실 감사는 받은바 은혜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감사하고 은혜 적게 받은 사람이 적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감사는 깨달은 바에 비례합니다. 은혜를 적게 받았더라도 크게 깨달으면 많이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았더라도 깨달음이 작으면 적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깨달은 만큼 하게 되어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깨닫고 드리는 감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초원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그 비를 맞고 초원을 걷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행히 큰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는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비가 그친 뒤에 나무 밑을 빠져나오려는데 나무 잎사귀가 머금고 있던 빗방울이 떨어져 이 사람의 머리에 쏟아졌습니다. 이 사람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큰 비는 피했는데 재수 없게 낙수에 머리를 적셨네...”
다른 한 사람은 피할 곳이 없어서 그 비를 다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비를 맞으며 계속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감사하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썹을 만들어 놓으셔서 비를 맞으면서도 눈을 뜨고 앞을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콧구멍을 아래로 향하게 해 주셔서 비를 맞으면서도 계속 숨을 쉴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감사할 상황에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달으면 불평할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시 136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러면서 감사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시인이 깨달은 내용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누구나 체험하며 살고 있는 보편적인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1절에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절을 보면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누리도록 베푸시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은 자기 민족에게만 베푸신 특수한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10절에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리고 16절에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자기 민족을 택하시고 은혜로 보살펴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은 자기들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23절에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24절에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기도했던 것 중 응답 받은 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중에 혹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나와 우리 가족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표현하는 감사
사실 감사는 표현할 때 전해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고만 있다면 그것은 아직 감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껏 선물을 마련해서 포장은 했으나 아직 전달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감사는 표현을 통해 전해질 때 힘을 발휘합니다. 감사를 받는 사람이 기쁘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도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감사를 마음에만 품고 표현하지 않으면 이런 감사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골의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 피아노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거부였던 포드 회장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얼마 후에 답장이 왔는데 달랑 100달러만 보내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실망하지 않고 100달러로 땅콩을 사왔습니다. 그리고 학교 뒤뜰에 그 땅콩을 심어 농사를 지었습니다. 몇 년 동안 농사를 지은 결과 드디어 피아노를 살 돈이 모였습니다. 이 때 이 선생님은 포드 회장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습니다. “회장님께서 보내주신 도움으로 피아노 살 돈이 모아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다시 포드 회장으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그 안에는 만 달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장에는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기부금을 주면 적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그 마음을 전해주시니 제가 감격했습니다. 만 달러를 함께 보냅니다. 피아노도 사시고 아이들 음악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을 사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하십시오. 이번에는 액수와 관계없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를 표현할 때 은혜를 베푼 사람이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때 우리가 깨닫고 바로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 눅 17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10명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저들이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기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소원대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율법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고침 받은 것을 확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들이 그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만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기서 나병환자 10명은 모두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아직 병이 낫지 않았지만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가다가 믿음대로 병이 나았습니다. 저들이 믿음은 좋았을지는 몰라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서운하게 해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열심히 간절하게 기도는 잘하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믿고 순종도 잘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감사는 어떻습니까? 혹시 저와 여러분이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의 대상이 아닐까요?
비범한 감사
감사 중에 비범한 감사가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하는 감사를 뛰어넘는 감사를 말합니다. 이런 감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선 고난 중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자기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 감사합니다. 평탄하고 행복한 시절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눈물과 탄식 속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감사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세브란스 병원 심장혈관 병동에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걸려있습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제대로 안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로 인해 인간된 보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모든 일로 감사할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내가 바라던 일들이 무산되고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감사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불평과 원망보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감사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큰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모두를 아우르는 감사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남들과 비교해서 감사합니다. ‘다들 사업이 안 되는 중에 나만은 특별히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식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건강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식입니다. 이런 감사는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리기 힘이 듭니다.
시인 박노해의 [감사한 죄]라는 시가 있습니다. 일부를 발취해 소개해 보겠습니다.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중략≫ 내 나이 팔십이 넘으니 오늘에야 / 내 숨은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
거리에서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 파출부 일자리도 나는 끊이지 않았느니라. /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 하면서/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 왔구나 /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 왔구나/
돌아보니 저도 이런 ‘감사한 죄’를 많이 짓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감사한다고 했는데 그 감사가 주변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한 채 드리는 감사였던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해 드리기 힘이 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감사가 모두를 아우르는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깨닫고 감사를 드리고, 마음을 다해 표현하여 감사를 드리고, 모두를 아우르는 감사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레위기강해-22 /레22:1-
2011-02-10 16:59:15
성물의 거룩
오늘은 22장이다. 21장과 22장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다. 이 규례를 주셔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먼저 22장을 요약해서 정리하고 설명은 가운데 있는 제일 끝에 거기서부터 설명이 되겠다. 22장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구별하여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런 말로 시작한다. 2절이 그렇게 되어 있다.
2절 말씀이 22장 전체를 푸는 주제적인 말씀이 되겠다. 즉 아론과 그 아들들 제사장 가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물에 대해서 잘 구별해서 그 성물을 더럽힘을 통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 말이다.
3절부터 9절까지가 한 단락인데 거기는 몸이 부정한 제사장은 먹지 말라 그렇게 되어 있고 10절부터 16절까지는 제사장에게 속한 자만 먹어라 그렇게 명령하고 17-25절은 열납되도록 서원제와 낙헌제를 흠 없는 것으로 드려라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6-30절은 열납되도록 팔일 후에 드리고 그리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고 그리고 화목제물을 그 날에 먹어라 그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31절-33절은 언약 체결적인 언어로 마지막 결론을 짓는 말이다.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켜서 나의 성호를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애굽에서 인도해낸자니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거룩법 17장 이하에서 제일 중요한 말인데 여기서도 결론적인 말로 마무리를 짓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서 자기 백성을 삼으셨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하나님의 소유된 이스라엘 백성도 거룩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거룩하냐면 하나님이 거룩케 하는 법을 주셨기 때문에 그 법을 지킴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그 법을 어기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의 성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제사장 가문은 조심해라. 해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를 주고 있다.
3절부터9절이다. 몸이 불편한 제사장은 먹지 말라 그런 내용이다. 아론 자손 중에 몸이 부정하고도 성물을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죽인다 그 말이다. 아론 자손 중 몸이 부정한자는 정한 후에야 성물을먹으리라. 먹어라 이는 자기의 응식 즉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음식이기 때문이다. 죽은 짐승르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그리고 성물을 욕되게 하면 죽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동심원적인 물결구조라는 말이 그 말이다. 제일 처음에 아론 자손중에 몸이 부정하고성물을 먹으면 죽여라. 제일 끝에도 성물을 욕되게 하면 죽여라 그런 말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더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면 부정한 자가 먹지 못하면 어떻게 할것인가? 부정한자가 깨끗게 되면 먹어라. 왜냐하면 아론 자손이 하나님앞에 드린 예물을 제사장가문의 마땅한 몫으로 준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정한 후에야 먹어라 그런 말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앞과 뒤에 부정한 자가 먹으면 죽여라 하는 말이 끼여들어 있고 정한 자만 먹어라 하는 말이 사이에 있다. 그렇게 해서 소위 서론과 결론이 맞아 들어가는 구조로 가운데것은 그것을 더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죽은 짐슴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이것도 정한 후에야 성물을 먹어라 하는 것과 같은 말인데 제사장 가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구별해 드리는 성물을 몫으로 주었지 죽은 짐승을 하나님이 주신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 들의 몫을 먹어야 되는데 깨끗한 뒤로 먹어야 되지 부정한 채로 먹으면 안된다. 그들은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을 먹어서 자기를 더럽히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상에서 먹도록 하나님의 상에 있는 것을 몫으로 주셧기 때문에 깨끗해야 먹고 그리고 깨끗한 자라도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라 그 말이다. 이런 죽은 짐슴은 이방인에게 팔기는 팔아도 제사장 가문이 먹어서는 안된다.
가령 다른 예로 들면 우리 믿는 신자들이 우상의 상에서 먹으면 그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먹는 식이 되니까 즉 하나님의 상에서 먹는 자기를 더럽혀 버리는 것이다. 그런 말과 일치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 다음에 10-16절은 이제 몸이 부정한 제사장은 먹지 말라 그랬는데 그러면 제사장 가문만 먹어라 그런 말은 아직 없었고 제사장에게 주신 마땅한 몫인데도 부정한 자는 먹지 말아라 이 말을 한 번 하고 나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상에 드리는 음식은 일반 백성은 못 먹고 제사장만 먹어라 해서 제사장에게 주신 특별한 관계를 강조시키고 있다. 외인은 여기서 다른 지파를 말한다. 이방인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 외인은 즉 다른 지파는 성물을 먹지 말라. 제사장의 객이나 품꾼은 먹지 못하나 종은 그것을 먹어라. 왜냐하면 객이나 품꾼은 제사장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거류민이다.
그러나 종은 그 가문에 속한 자가 되니까 먹어라. 다른 지파에 출가한 제사장의 딸은 먹지 못한다. 다른 지파에 출가해 버렸으면 그 남편에게 속한자가 되기 때문에 제사장 가문에 속한자가 아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이 돌아왔으면 먹어라. 자식이 있어서 돌아왔으면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잇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 가문에 속해 있다. 그런데 자식이 없이 만일에 친정으로 돌아와서 어릴때와 같이 되었으면 본문은 그렇게 되어 있다. 그 아비의 응식 즉 그 아비의 몫을 먹어라.
그리고 외인은 먹지 말라 한 번더 반복하고 있다. 한마디로 여기서는 제사장 가문만 먹고 그 외에 다른 지파는 먹지 말아라. 아무리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어도 다른 지파에 시집가버렸으면 먹지 못한다. 그러나 자식이 없이 친정으로 돌아와서 어렸을때와 같이 아버지에게 속하면 아버지의 몫에 참여해서 먹어라. 그리고 다시 결론에 다른 지파는 먹지 말아라.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혹시 다른 사람이 부지중에 성물을 먹으면 어떻게 할것인가? 그 때는 성물에다가 오분의 일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주어서 갚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주신것이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들이 성물을 먹으면 형벌을 받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제사장 가문에게만 주신것이기 때문에 다른 지파가 먹으면 벌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마땅히 오분의 일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갚아야 되겠고 레위기 앞부분대로 하면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은 제사장 몫이고 다른 지파의 몫은 아니다 하는 말이 강조점이다.
그 다음 17-25절은 조금 내용이 어려운 것처럼 되어 있다. 앞에 것은 제사장만 먹어라 하니까 쉬운 것 같은데 뒤에 것은 좀 그렇지 않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실은 이것도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드리고 먹는 것과 관계된 내용들이다.
17-25절에 보면 흠 없는 열납된다. 그 말이 반복되어 있다. 19절에 보니까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20절에 흠있는 것은 드리지 말라. 또 21절 끝에도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전부 흠없는 것을 드려라 하는 것이 17절부터 25절까지 반복되는 말이다. 이랬을 때 반복되는 말은 이 문단의 중심이 되는 말이 된다. 그래서 여기 보면 서원제와 낙원제를 드리는데 흠없는 것을 드려야 열납된다. 그런 말이다.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우양의 흠없는 수컷으로 드려라. 번제는 수컷으로 드린다. 흠있는 것은 열납되지 못한다. 여기서는 번제로 드릴 때다. 서원제나 낙원제는 실은 감사제다. 감사제를 가져와서 드리는 방식이 번제로 드릴려면 그 말이다. 그랬을 때 실은 서원제나 낙헌제는 암컷도 드리지요? 그러나 번제나 드릴려면 수컷이라야 된다. 그러니까 감사 제물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번제의 방식으로 드리고 싶으면 흠이 없는 수컷으로 가져와야 열납이 된다. 그런 말이다.
그 다음에 서원제나 낙헌제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흠없는 것으로 하라. 서원제나 낙헌제를 가지고 화목제 방식으로 드릴려면 여기서는 열납되도록 흠 없는 것으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번제는 전체를 태워 드리니까 수컷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화목제는 암컷도 드린다. 여러분이 레위기 7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또 3장에도 나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수컷으로 드려라 하는 말은 없고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그 말만 강조되어 있다.
그 다음에 소나 양이나 양의 지체나 더하거나 덜한 것은 낙헌제로는 쓰려니와 서원제로 드리면 열납되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흠 없다는 말은 여기 보면 여러 말로 반복되있다. 22절을 보면 눈먼 것 상한 것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 괴혈병 이렇게 일일이 나열하고 있는데 저는 양을 줄일려고 그냥 흠없는 것 이렇게 한마디로 알기 쉽도록 줄여 놓은 것이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우양의 지체가 더한거나 덜한 것은 너희가 낙헌 예물로는 쓰려니와 서원한 것을 갚으면 열납되지 못하리라. 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화목 제물에는 레위기3장과 7장을 참고하면 몇 가지 종류가 있냐면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는 방식으로 드리는 화목제가 있고 또 기쁨으로 드리는 낙헌제가 있고 그리고 감사할 때 드리는 감사제가 있다. 그 중에서 서원을 갚는 예물로는 우양의 지체가 덜한 것을 드려서는 안되고 기쁨으로 드리는 것은 그것을 쓸 수가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알이 상한 것을 여호와의 식물로 드리지 말라 이는 흠있는 것이여서 열납되지 못한다. 그런데 22절부터 흠있는 것을 눈 먼 것 상한 것 지체가 베임을 당한 것 이렇게 일일이 말해 놓고 24절에 보면 느닷없는 불알 상한 것을 따로 이야기한다. 이것도 한꺼번에 22절에서 한꺼번에 쭉 묶어서 해 버리면 좋을 것인데 24절에 보면 불알이 상했거나 치었거나 터졌거나 베임을 당한 것은 그것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너희 땅에서는 이런 일을 행치도 말지며 너희는 외방인에게서 이런 것을 받아 너희 하나님의 식물로 드리지 말라 이는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것인즉 너희를 위하여 열납되지 못하리라. 강조점은 흠이 있으니까 드리지 말라는 말인데 특별히 불알 상한 것을 자세히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 같으면 그것은 별볼일 없겠고 왜냐하면 돼지나 소도 식용으로 쓸려면 다 거세 하는 것이니까 별볼일 없고 22절 눈 먼 것 상한 것 괴혈병 이런 것은 부정하다는 감이 드는데 거세 한 것은 별로 상관이 없고 거세야 맛은 더욱 부드럽다고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그것을 굉장히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특별히 그것을 강조해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했을 때 구약에서는 그 남자라도 신이 상한 자는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리고 만일에 여자가 남편이 다른 남자와 싸울 때 다른 남자의 그것을 잘못 잡아 버리면 손을 베어 버리라고 되어 있다.
굉장히 중요하게 그것을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곧 출생의 방식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진행하고 누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라도 신이 상했으면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온다. 애굽 사람은 3대가 지나면 들어올 수가 있다. 신명기 21장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신이 상한 이스라엘 백성은 못 들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로 구약 때 여자가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저주처럼 되어 있다. 왜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는 구원의 약속이 단절되기 때문에 구약에서 하는 말이다.그래서 여기서도 하나님앞에 흠 없는 것을 식물로 드려야 되겠는데 하나님앞에 드릴때는 번제와 화목제로 드리는 것이 짐승을 드리는 것이다.
식물성 제사는 소제고 그런데 번제로 드릴때는 흠없는 수컷으로드려야 된다. 화목제를 드릴때도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되는데 특별히 화목제 중에 서원제는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는 것이어서 최상의 것으로 갚아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지체가 더한 것이나 덜한 것은 드리지 말고 네가 자원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로는 쓸수가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에 불알이 상한 것은 어떤 형태로 상한 것이라도 드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서도 받아서도 안될 뿐만 아니라 너희 땅에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해라. 그렇게 말함으로 흠있다 없다 하는 것을 불알이 상했냐 안상했냐 거기다가 최강조를 해서 열거를 한다. 왜냐하면 거기는 생명이 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생명의 흠이 있는 것은 드리지 말아라. 그런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26-30절을 보면 열납되도록 드리는 날고 먹는 날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면 흠없는 것을 드려야 되는데 그냥 아무 때나 드리면 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양의 수컷이 나거든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고 제 팔일 이후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면 열납이 된다. 그러나 그것까지라도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 앞에 열납이된다.
첫째는 흠이 없어야 되고 팔일 이후에 드려야 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감사의 희생을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드리라 그 말은 이제는 무슨 말이겠는가? 흠 없는 것으로 팔일 이후에 어미와 새끼를 따로따로 드리면 열납되록 드린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제물을 그 날에만 먹어라. 그렇게 나와 있다. 다른 제물을 먹으라는말은 아직 없었다. 흠없는 것을 드리라는 말만 있었는데 여기 보니까 감사제물을 그날에만 먹으라 그런 말이 나와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특별히 하나님앞에서 먹는 것은 화목제물이다. 그런데 자원해서 즉 낙헌에물이다. 자원해서드린 예물은 이틀까지 먹을수 있고 서원해서 드린것이나 감사해서 드린 것은 그날에만 먹어야 된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날에만 먹는 것이 예물을 먹는 기본 단위다.
이틀까지 먹는 것은 특별히 풍성히 주신 것이고 기본 단위는 하루 동안 부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도 그 날에만 먹는다. 하는 것이 구약의 기본 단위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본 단위를 따라서 그날에만 먹어라. 그래야 열납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31-33절은 언약적인 결론이 나와 있는데 너희는 내가 말한 이 계명을 잘 지켜서 내 이름을 욕되게 하지를 말아라. 나는 너희 중에서 거룩한 하나님이 아니냐?
나는 너희들과 함께 하려고 너희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었다. 그런데 함께 하는 것은 제사장을 어른 삼아서 자기 성소를 불러들이시고 하나님의 식탁에다가 음식을 차리게 하고 그 상에서 먹도록 하고 하는 이런 친교로 그들을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에 제사장이 하나님이 여기서 명하신 규례를 질 지켜야만 그가 하나님의 상에 나와서 드리고 먹는 자로 거룩하고 만일에 이 규첵을 어겨버리면 부정한 자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을 하겠다. 21-22장을 함께 해석해야 내용이 잘 일치가 된다. 지난 시간에 했던 21장은 백성의 어른으로서 또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는 자로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이다. 반복되는 말이 그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어른이 아니냐? 내 앞에 식물을 드리는 자임이니라. 그 말이 반복되어 있었다. 백성의 대표 어른으로서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는 자로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가 21장의 명령이었다.
거기서는 무슨 거룩이 있었냐면 시체를 만지지 말아라. 그리고 혼인에 있어서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지 말고 아론 지파 즉 제사장 가문에서 처녀에게만 장가 자거라. 특별히 대 제사장에게 강조되어 있었다. 대 제사장은 아비의 시체도 만지지 말고 성소에서 일체 나오지를 말아라. 또 머리를 풀 거가 옷을 찢거나 하는 슬픈 흔적을 내지 말아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그에게 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옷이 그에게 입혀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말아라. 그렇게 말씀했었다. 한마디로 제사장은 하나님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성소와 단에 나아가서 식물을 드리는 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도 죽음과 접촉되어서는 안되고 특별히 대 제사장은 죽음의 흔적까지도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
그래서 제사장이 죽음과 접촉되면 그가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소에 나와서 드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제사장은 자기 가문하고만 결혼하라고 되어 있다. 또 처녀에게만 하라 했다. 처녀가 아니면 이미 죽음의 흔적이 전 남편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자와 결혼하면 제사장이 죽음과 접촉하는 식이 된다. 그러니까 처녀하고만 결혼하되 또 자기 지파 하고만 결혼해라.
왜냐하면 다른 지파는 하나님 앞에 성물을 드리는 지파로 장자가 아니다. 레위지파 그 중에 아론의 가문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오고 단에가 드리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지파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는 지파로 들어와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아론 지파를 구별하고 레위 지파다. 그중에서도 아론을 구별하고 이렇게 여러 구별된 관계에서 하나님이 교제를 허락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상에 나오는 대 제사장은 어떤 죽음의 흔적이 었어서는 안되고 그리고 다른 지파가 결혼해서 이쪽으로 섞어 들어와서도 안된다. 왜 다른 지파는 성소에 들어오면 죽기 때문이다. 레위 지파만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구약에는 첩첩산중이다. 거룩의 간격이 많이 있었다. 그것이 21장에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였다. 그런데 그것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혹시 신체에 결함이 있으면 그런 사람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고 들어오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장자로 구별했어도 그 몸에 만일에 생명이 상한 흔적이 있으면 그는 내 식탁에서 가져간 것을 먹을 수 있어도 내 식탁에 나와서 드리지는 말아라. 그러니까 제사장까지라도 몸에 어떤 사망의 흔적이 있으면 그도 하나님의 상에는 가까이 나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막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이요 거룩하니까. 그것이 21장에서 말했던 내용이다.
여기 22장에서는 방금 요약해서 설명을 했습니다만 여호와의 식물을 먹도록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다. 21장은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는 거룩한 규례고 22장은 여호와의 식물을 먹는 거룩한 규례다. 그런데 무슨 말로 되어 있냐면 부정한 채로 먹지 말라 하는 것이 3-9절까지 있었던 말이다. 또 제사장과 그에게 속한 자만 먹어라. 하는 것이 10-16절까지 내용이었다. 그리고 흠없는 것만 여호와의 식물로서 드려라 하는 것이 17-25절까지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팔일 이후에 드려라 하는 것이 26-30절까지 내용이다. 또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 감사의 희생을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도록 그 날에 먹어라. 하는 말도 같은 말이다.
이제 설명하겠다. 제사장은 여호와의 성소와 단에 나아가 여호와께 식물을 드리며 그 식물을 먹는 자이다. 이스라엘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 성소에 계신 여호와께서 그들의 어른으로 제사장을 구별하셔서 그들도 성소에 계신 여호와의 상을 봉사하며 먹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레위에게 평강의 언약을 세우시고 그로 여호와로 경외케 하시며 제사장은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로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다.
말2장을 인용했다. 왜냐하면 어른이 되었다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백성의 어른으로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고 여호와의 식물을 먹어라. 어떤 의미로 어른이냐면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상에서 식물을 먹고 마시는 일에 어른이다. 왜 거기에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상에 들어가서 드리고 먹는 것은 온전한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들을 이런 큰 생명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어서 백성들을 율법으로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르쳐서 정결한 백성으로 살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21-22장에 있는 내용이다.
서원제와 자원제 여기 낙헌제라는 말이 한자로 쓰여져 있어서 알기가 어려울 것같아서 다른 말로 자원제라고 풀었다. 여기서도 그렇게 풀어서 설명되어 있다. 앞에서는 17절에서는 서원제와 낙헌제로 그렇게 했다가 그 다음에 21절에 보면 서원한 것을 갚으려 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든지 하여 그렇게 되어 있다.
21절에는 서원제와 낙헌제라는 말이 조금더 설명되어 있다. 서원한 것을 갚는 것은 서원제고 자의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낙헌제다. 그래서 서원제와 낙헌제와 감사제는 화목 제물이다. 화목제는 여호와와 제사장의 식탁 교제가 중심이다. 그래서 특별히 화목제를 드리면 제사장이 무엇을 주는가?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준다. 식탁 교제가 중심이다.
번제는 전체를 여호와께 향내나는 음식으로 드리는 것이 번제다. 다 태워 드리면 하나님이 향내를 맡으신다. 그러니까 화목제의 기름을 이 번제위에 태우라 그렇게 되어 있다. 기름은 하나님의 몫인데 그것을 번제와 일치 시켜서 번제위에 화목제의 기름을 태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번제는 전체를 여호와께 향내나는 음식으로 드리는 것이 번제다.
그러므로 서원제나 자원제로 번제나 화목제를 드릴때에 즉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내용은 서원을 갚거나 스스로 기뻐서 드리는 것인데 그것을 드리는 방식은 전체를 다 태워 드리는 번제로 드리든지 하나님앞에 식탁교제로 드릴때에는 열납 되도록 흠없는 것으로 드리도록 명령하시고 감사 희생을 열납되도록 흠없는 것으로 드리고 열납되도록 당일에 먹으라. 명하심으로 마무리 하신다. 이것이 여기 22장에 전체적인 내용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을 백성의 어른 삼으시고 성소에 불러 들인 것은 하나님앞에 생명과 평강의언약이다. 그들은 이 생명의 교제를 누리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도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특별히 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여기서는 번제나 화목 제물을 드리는데 무엇으로 드리냐면 서원을 갚기 위해서나 자원제로 드리거나 감사제로 드린다. 그렇게 했을 때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그리고 흠없는 것으로 드릴뿐만 아니라 열납되도록 그 날에 먹어라. 그러니까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도록 먹어라. 그 말이다. 하나님의 상에 하나님이 받으심직하게 드리고 하나님앞에 기쁜 친교로 먹으라. 드리고 먹어라는 말이 여기 22장에 강조점이다.
조금 미진된 것을 설명하겠다. 제 팔 일에 드리는 것도 흠없음과 관련된다. 여기 팔 일에 드리라는 말을 여러분이 의미를 몰라도 된다. 왜 몰라도 되느냐? 22장을 보니까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러니까 팔일에 드리라는것도 흠없는것과 관계가 있구나. 그냥 짐작이 갈 것이다. 그 문맥을 봐야 한다.
그러면 왜 팔일에 드리면 흠이 없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를 낳으면 여기서도 팔일후에 드리라는 것은 수컷을 낳았을 때 하는 말이다. 물론 암컷도 팔일후에 드려야 되겠지만 수컷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 27절에 보면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면 칠일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수컷을 두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칠일이 지나면 팔일에 할례를 행하고 그렇게 하면 그는 여호와의 백성으로 드려진다. 팔일에 할례를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한마디로 부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짐승의 새끼도 수컷은 팔일 후에 드려라 그런다. 이것은 암컷도 포함된 말이다. 그런데 팔일에 드리는 것은 흠없음과 관련이된다. 22장 전체가 흠없는 것을 말하니까 그렇다. 그런데 남아를 드리는 할례에 상응한다.
그 다음에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 이것은 암컷을 두고 설명한다. 28절 보면 암소나 암양을 몰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한 날에 잡지 말지니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어미와 새끼를 말하니까 암컷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는 것은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라는 말과 상응한다.
그것은 신명기 14장21절이나 또 출애굽기 23:18-19절 34:25-26절 거기 보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이렇게 드려라. 드리는 삼대 절기가 나온다. 3대 절기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물을 드리는 절기다. 그리고 초태생을 이렇게 이렇게 드려라. 초태생을 드리는 문제를 말하고 나서 그 다음에 무엇을 말하냐면 빈손 들고 나오지 말아라. 초태생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드리되 새끼를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강조되는 흐름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앞에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앞에 가나안 땅에 풍성한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드리는데 있어서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그렇게 했을 때 만일에 그렇게 드리면 하나님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앞에 풍성한 것을 드린다는 것이 강조점이다. 풍성한 것 그러니까 그것은 생명을 멸하는 방식이 포함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미의 젖은 새끼를 기르는것이지 새끼를 삶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해서 풍성함을 따라서 드리는데 그 풍성함은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아버리면 그것은 풍성함이 아니다.
어미의 젖은 새끼를 길러야 풍성한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풍성한 것 초산물로 내게 드려라. 그러나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그런 문맥이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드리는 문맥인데 여기서는 드리는 문맥이 아니라 흠없는 것의 문맥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흠이 없는가? 팔일 후에 드려야 흠이 없고 여기서는 같은 날에 드리지를 말아라. 같은 날에 드려버리면 어미와 새끼가 한날에 죽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생명이 멸하는 방식이다. 이 앞에는 풍성한 양식으로 드리는 것이 강조점이니까 남자는 삼대 절기에 나오고 초태생을 드려라 그런 문맥이니까 젖과 새끼를 연결시켰지만 여기서는 제물드리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팔일후에 드려야 거룩하고 어미와 새끼와 같은날에 죽여버리면 그런 것은 하나님의 식탁을 풍성케 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드리지를 말아라. 그런것과 상응하는 말이다.
이제 전체적인 설명이다. 흠있는 재물은 생명의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만국의 여호와께 서원을 갚는 극상품이 아니다. 이러한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식탁에는 반드시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된다. 왜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생명의 흠이 있는 것은 여호와의 식탁에 나타나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들은 흠없는 것으로 드리고 흠없이 먹어야 된다.
누가 먹는가? 제사장 가문만 먹고 부정한자는 먹지 못하고 제사장일지라도 그리고 그날에 먹어야 한다. 아무리 제사장이라도 이틀지 양식을 안 주셨다. 구약 때 이틀치 양식을 주신 것은 만나는 육일에 거둔 것은 제 칠일까지 먹었다. 이틀이 지나도 안 썩었지만 다른 날에 주신 만나는 썩어서 못 먹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제물은 당일에 먹어야 되고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만 이틀까지 먹을 수 있다. 거기가 식탁의 친교가 강화되어 있다. 나머지는 그 날에만 먹어야된다. 그러니까 구약 때 아무리 먹도록 주셨어도 그것은 그 날에 양식일 뿐이고 제사장에게만 주셨고 심지어 제사장 딸일지라도 다른 지파로 시집가버리면 제사장 가문의 것을 먹지를 못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러 간격을 두셔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께 나갈 때 흠 없는 것을 드려야 한다. 만일에 흠이 있는 것을 드리면 그것은 서원제에는 안 맞다. 서원제는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극상품을 갚는 것이기 때문에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로는 드릴수 있어도 서원제로는 못쓴다. 만일에 그것은 서원제물로 쓰면 말라기서에서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흠없는 것을 드리자니 얼마나 귀찮은고 하는 식으로 나를 멸시하면 너희들이 그것을 너희 관원들에게 드려보라 차라리 갖다주지 안했으면 괜찮겠지만 갖다주면 벌받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내 상을 멸시하지 말아라. 말라기는 여호와의 제도를 멸시해버린 제사장의 타락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앞에 가져온것중에 특별히 흠없는 것으로 골라서 하나님의 상에 드려야 된다. 흠있는 것을 받으면 안된다.
이제 이것이 어떻게 신약에서 완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교회는 자기의 몸을 화목 제물로 드리시고 하늘성소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안에서 그 몸을 향내나는 제물로 산 제사를 지내며 그의 상에서 그의 피와 살을 먹는 평강을누린다. 하나님이 옛 언약 경륜에서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하시고 그중에서도 제사장 가문을 구별하시고 그중에서 대 제사장을 구별하시고 그만 하나님의 상에 나와서 먹도록 했다. 안식일날 진설병을 먹는 것은 대 제사장이다.
그리고 어누 누구도 성소에 나와서 봉사하면 안된다. 이처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하는 생명의 관계를 한집에서 살고 한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에로 인치신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은 아직은 못들어가고 장자를 대신한 레위 지파만 성소를 봉사하는데 그중에 제사장만 단에 들어가고 성소에 들어가고 대 제사장만 성소의 진설병을 먹고 그런 방식으로 여러 간격을 두었다.
왜냐하면 아직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는 온전한 길이 열리지 안햇을 때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이처럼 여러 간격을 두고 교제했던 그 간격을 완성하셨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휘장밖에 자기 대 제사장을 둔 그런 교제 방식이 아니다. 큰 아들을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 상하방에서 아버지만 문 닫고 방에서 잡수시고 큰 아들은 그 앞에서 먹고 다른 아들은 저 마당에서 먹고 하는 그런식으로 먹는 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의 온전한 대 제사장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으셨는데 그것은 구약에서처럼 휘장으로 가리운 한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에로 구원하신 것이다.
이전에 휘장밖에 두고 먹도록 했던 이 관계를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관계로 완성시키셨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어른으로 기른 것처럼 휘장 밖에서 먹고 마셨던 것을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관계로 완성시키셨다. 어떻게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렇게 하셨다. 이 일을 이루셧다. 이제 예수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에 화목제물이신 예수는 하나님과 제사장의 친교의 식탁의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바로 이 예수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이 사람되신 그분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화목의 길을 열으셨는데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제는 땅에 속한 성소에 먹는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부활시키셔서 하늘 보좌에 올리심으로 이제는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관계를 열으셨다. 이제 교회는 예수 안에서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데 이제는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땅에 속한 것 모세에게 속한 것은 아무리 흠이 없어도 그런 것은 짐승의 흠이 없는 것 뿐이고 그리고 그 피만 하나님의 단에 드린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러나 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는 주지 안했다.
아직도 그런 친교의 간격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지 우리는 예수안에서 몸으로 향내하는 제물을 드린다. 거기는 장자와 차자의 차이가 없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없이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대표자에게 속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성소에 속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의 죽으심에서 휘장을 찢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제사장의 간격이 없는 것 만큼 제사장과 일반 백성의 간격도 없고 대 제사장과 일반 제사장의 간격도 없고 제사장과 레위지파의 간격도 없고 레위 지파와 일반 백성의 간격도 없고 이제 모든 간격은 제거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이 빛가운데서 생명의 교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리고 우리로 그의 상에서 먹고 마시도록 했다. 구약 때는 어느 누구에게도 피와 기름을 주지 안했지만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라고 그렇게 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와 하나이니라 하는 생명의 관계로 영원히 교회를 거룩하게 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시면 그럴 것이다.
구약 때는 이런 저런 규칙을 지킴으로 그 거룩을 누렸다. 부정한 것을 안먹고 또 부정한 짐승을 안만지고 또 부정한 여자에게 장가 안가고 그런 방식으로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를 누렸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하늘에 속한 새 백성이 되고 예수께 속한 모든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는 썩어짐의 그림자가 없다. 그 확증이 예수님게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 일반의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이 먹으면 항상 식탁에 술이 있는 식이다.
먹는 것을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 즉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먹고 마시는 방식이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께만 드렸고 고기만 일부 제사장이 먹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하는 그런 교제방식으로 우리의 먹고 마시는 삶을 거룩하게 했다. 누구든지 예수안에 있으면 우리의 전 삶의 질서로 거룩한 봉사를 하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삶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이제는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들로 취임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대제사장적인 교제를 누린다. 이제 이것이 일단 적용되는 문구다. 단지 우리들이 이제 구약에서 하나님앞에 흠 있는 것을 드리면 하나님앞에 욕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에게 직접 적용시킬때는 구약 자체의 본문을 우리에게 직접 적용시켜 가지고 돈도 한쪽이 접어 졌으면 흠이 있고 하나님앞에 성의가 없고 그것을 다리미로 다려서 드린다거나 돈을 벌면 제일 새돈으로 골랐다가 내면 거룩하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러분이 구겨진 돈으로 헌금을 하는 것보다는 좋게 펴서 깨끗하게 쓰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에 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 상식이다. 성경은 돈을 새 돈으로 내라는 등 그런 말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완전한 생명의 교제로 주시는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헌금할것인가? 종교적인 의식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방금 제가 했던 말은 정당한 상식적인 이야기다. 부활하신 예수안에서가 아니고는 흠없는 것은 없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면 혹 그 사람이 가난해서 다른 사람에게 얻어서 냈다고 해도 한쪽 모퉁이 찢어진 돈을 내다고 해도 그는 거룩하게 봉사한것이고 아무리 세상에서 신사여도 그가 예수를 안 믿으면 그는 부정한자요 저주받은 자다.
그러니까 신약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이제는 제사장과 백성의 차이가 업다. 왜 우리의 대표자인 예수와 우리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형제로 대표로 들어갔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신약 교회에 종교 의식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일반 상식에서 보았을 때 마땅히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이 정당한 믿음으로 살면 분별할 수 있는 이야기지 성경 본문이 우리의 종교적인 의식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려고 줄긋기를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주의 이름으로 수고하고 이익을 모인 것은 안식 후 첫날 곧 예수의 부활의 날에 주님의 상에 함께 가지고 나오고 우리의 일상 양식 생명의 선물을 하나님의 상으로 가지고 나오고 그 상에서 생명의 친교로 먹고 우리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생명의 선물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히 주신 것으로 형제를 몸으로서 구제하고 이런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냥 토요일 되니까 아 벌써 주일이 되었냐? 일주일 내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못살고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달력을 보니까 빨간 날짜가 있다. 아 벌써 주일이구나 그래서 부랴부랴 나오고 그리고 마침 부자라 은행에서 바꾼 새돈이 있어서 새 돈 내고 그런다고 해서 다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 것 외에는 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면 구약의 제사장은 흠이 있고 휘장밖에 있어도 신약의 백성은 흠이 없다. 왜 우리의 대표는 하늘 보좌에 나가셨기 때문이다. 그 교제로 우리가 먹고 마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흠이 없다.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운데 먹을수 있다. 이것은 믿는 것을 말하는것이지 종교 에식을 두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여러분이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줄 때까지라도 실은 가난한 사람 주기가 어려운 것이다. 부자 주기도 어렵겠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면 꼴아버릴 수가 있다. 나를 무시하고 이것 준가 하고 미국 사람들이 구제를 많이 하고 욕을 먹는 것이 이 사람들이 찝차를 타고 가면서 휙 던져 준다. 우리 나라는 두 손으로 주어야 예의지 지나가다가 휙 던져 주면 이것을 불사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휙 던져 주면 받아 먹으면 그 만이다. 미국식으로 주면 한국 사람들은 아주 기분이 나쁘다. 우리가 누가 지나가는데 어이 받아 하고 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친한 친구이면 몰라도 가난하다고 그렇게 주면 받아도 기분이 나쁘고 더구나 어른 한테는 그렇게 주는 법이 없고 그럴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영역에서 정당한 예의를말하고 있는것이지 이것을 성경과 막 직접 연결시킨 것은 아니다. 각 나라 마다 물건을 주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방식은 윤리라는 것은 서로 관계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추어서 주어야 되는 것이고 더구나 자기 보다 어떤 면에서 높다고 생각하면 나이가 많던지 상관이던지 무엇이 있던지 하면 정당한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오히려 무엇을 주는 것이 실례가 되고 불쾌감을 사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은 교회에서 가르칠 것이 아니라 가정 교육에서 배울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미국은 미국식으로 배우면 된다. 성경은 우리의 구체적인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완전한 새로운 관계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그 완전한 관계 아래서 마땅히 형제를 존중해야 되고 또 하나님이 주신 질서 안에서 정당한 예의를 지켜야 된다.
그런데 그런 것을 교회에서 다시 가르쳐야 될는지 그것이 좀 답답한 일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그런다고 그런다. 우리 나라 교회가 목사는 존경하고 장로는 존경하지 않는다. 목사는 신학교도 나오니까 좀 괜찮은 것 같고 장로는 신학교 나오지도 않고 오래 다니다 보니까 장로 되었으니까 나도 몇 년 다니면 되겠구나.
그래서 그런지 별로 존경을 안한다. 우리 나라 교회 형편이 거의 목사에게 들어가 버린다. 아마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장로한테는 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우리 전도사들은 그렇게 안 가르칠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설교해도 교회의 대표는 장로다. 그러니까 마땅히 존경해야 된다. 왜 직무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국민학교 나와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장로로 뽑았으면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열심히 가르치니까 성탄절 때 장로에게 선물을 많이 한 모양이다. 얼마큼 좋은 일이다. 그런데 전도사한테는 입을 다 씻는 것이다. 왜 배우기를 장로를 존경하라고 배웠거든 그러니까 꼭 우리 아이들 비슷하게 되었다. 하나 시키면 그것만 딱 배우는 식이다. 저는 그런 예를 들어서 여러분한테 미안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연말과 연초가 되면 인사를 차릴 때가 많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고 특별히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 직무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목사는 생각이 나는데 전도사는 가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는 것이 그런 종교 의식을 배워서는 안된다. 마땅히 성도들이 서로 존경할 줄 알아야 되고 내가 연말이 되면 가난한 성도에게 선물할 것을 기억을 해야 되고 그런 일에 있어서 정당한 예의들을 갖추어야 된다.
그 은혜는 태평하게 산 것이 은혜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데 진정한 은혜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은 허물없이 사는 것이 좋은 줄 알고 있는데 예의를 지켜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예의를 지키면 숨 못 쉬게 갑갑한 줄 아는데 그것은 타락한 본성이 그런다. 정당한 예의를 지키는 것만 상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준 것이고 그것이 정당한 우리가 차지할 위치다. 서로가 정당한 위치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이 주신 조화와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땅히 남녀간에도 예의가 있는 것이고 조심해야 된다. 그런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신령한 분별력으로 사는 한 면이다.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서로 존중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흠이 있는 것을 드리면 전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막 그렇게 적용할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헌 것을 목사에게 줄 수도 있다.
목사는 새것만 쓰고 제일 좋은 것만 쓰고 그런 이야기를 이 본문으로 인용하면 안된다. 헌 것을 쓰기도 헌것도 못 받으면 자기가 일해서 먹기도 하고 교회를 봉사하는 것은 월급제가 아니기 때문에 교인 없어도 혼자라도 할 것이다. 교회를 세워야 할 일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이 삶의 질서에서 정당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 그 말이다.
여러분이 집에서 못 쓸 것 교회 가지고 와서 써도 된다. 교회는 꼭 새것만 있어야 되고 그런 말은 아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당한 질서에서 이것을 교회가 쓸 수 있는지 모르는지 그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분별해라 그 말이다.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고 성도를 그리스도안에서 귀히 여기고 하는 그런 관점에서 질서를 지키면 된다. 이 본문하고 그런 것하고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흠이 없는 제사장이 되었다. 우리는 흠 없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고 이제는 완전한 생명의 교제로 주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영광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린다. 바로 구약에서는 제사장을 휘장밖에 두시고 교제했던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우리에게 선물하셨다. 이것이 이 본문이 신약 교회에서 읽혀지는 방법이다.
구약 규례를 신약의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다 맞추어 버리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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