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일 /딛3:3-7/ 노창영목사
2022-08-12 13:43:29
이 복된 주일에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은혜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디도서강해 열두번째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디도서 3:3-7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교리의 매우 중요한 구원관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여러 서신에서 구원에 대한 진리를 기록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디도서에 나오는 구원관의 기록은 아주 독보적이며 성경적인 구원관을 통합하여 요약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이후의 삶의 변화의 모습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말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19을 보셔도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의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이후의 삶의 모습을 구별하여 기록한 것이 보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극명한 회심을 경험(행 9장)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포악하고 폭력적이고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므로 전격적인 회심을 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변화된 모습들이 여러 서신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의 한 부분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Ⅰ. 먼저,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이전의 모습을 살펴봅시다(3:3)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의 때를「이전에(At One Time, NIV)」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헬라어로는 포테(ποτε)입니다. 포테(ποτε)는 한 때(Once, 혹은 Formerly)라고 번역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도 한 때, 혹은 이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갔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불경건하고 불의한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과거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이전의 모습을 7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A. 첫 번째는 어리석은 자(Foolish)입니다
NIV영어성경은「어리석은 자」를 Foolish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영어성경은「감각이 없는(Senseless)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 센스가 없는 무감각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감각이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며 영적으로 무감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영적 감각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 입니다. 자연인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일컬어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B. 두 번째는 순종치 아니한 자(Disobedient)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부모님께 순종하지 않으며, 직장 상사에게도 순종하지 않으며, 교회 지도자에게도 순종하지 않고, 국가 지도자나 제도에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의 원인은 하나님의 권위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순종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순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권위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권위를 아는 사람이 부모님께, 교회 지도자에게, 직장 상사에게, 국가 지도자와 제도에 순종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없는 사람의 특색은 불순종입니다.
C. 세 번째는 속은 자(Deceived)입니다
사탄은 속이는 자이며 거짓말장이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거짓말로 속여 넘어지게 만듭니다. 사탄은 우리를 거짓말로 유혹하며 진리를 떠나 죄를 짓게 만들고 결국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마귀에게 유혹을 당하여 넘어지고 각종 이단의 거짓 교리에 넘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가 도살장에 잘 끌려가도록 하는 방법을 말하였습니다. 돼지앞에 삶은 콩을 조금씩 뿌리면 돼지는 그 삶은 콩을 맛있게 먹으면서 계속 따라가다 어느 순간에 도살장에 스스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없는 사람도 이처럼 자기도 모르게 죄와 사단의 미혹에 속아 넘어갑니다.
D. 네 번째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Enslaved by All Kinds of Sinful Desires and Pleasures)입니다
각색 정욕이라는 것은 온갖 종류의 정욕입니다. 정욕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탐욕스러운 죄악의 욕망입니다. 행락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온갖 종류의 정욕과 쾌락의 본능을 따라가다가 결국 그에게 종노릇하게 됩니다.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쉽게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좌우에 날이 선 칼날에 생선의 기름과 피를 발라서 얼립니다. 그리고 또 그 위에 생선의 기름과 피를 발라서 얼립니다. 이 방법을 여러 번 계속하면 칼날이 생선의 기름과 피로 덮여서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칼날을 위로 보이게 하여 칼 손잡이쪽을 거꾸로 땅에 꽂아 놓습니다. 밤이 되면 늑대들이 생선의 냄새를 맡고 다가옵니다.
다가온 늑대는 생선의 피와 기름을 열심히 핥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름과 피를 다 먹게 되고 숨어있던 칼날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생선의 피와 기름의 맛에 취한 늑대는 계속 핥다가 자신이 칼날을 핥는지도 모르고 계속 핥습니다. 결국에는 칼날에 자신의 혀를 베이게 됩니다. 그러다 자신의 피인지도 모르고 계속 핥던 늑대는 자신의 피를 쏟고 쓰러집니다. 에스키모인이 아침에 일어나 칼을 꽂아 놨던 장소에 가면 늑대가 피를 쏟은 채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은 이 늑대들처럼 어리석게도 정욕과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멸망으로 끌고 갑니다.
사무엘상 30장을 보시면 다윗이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하여 길을 나서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다윗이 길을 가는데 들판에 애굽소년 하나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다윗은 정신이 없는 이 소년에게 떡과 물과 무화과뭉치와 건포도를 먹여 정신을 차리게 합니다. 다윗은 정신을 차린 소년에게 네가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그 소년은 자신은 애굽 사람이지만 아말렉 사람에게 잡혀서 그들의 종으로 지내다가 3일 전에 자신이 병이 걸리니 아말렉 주인이 그를 버리고 가버렸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 소년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은 악하고 잔인한 아말렉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아말렉은 악한 주인입니다. 아말렉과 같이 마귀는 악한 주인입니다. 많은 사람을 미혹하여 죄의 종으로 만듭니다. 정욕과 행락의 노예가 되게 하여 실컷 죄짓게 하고 나중에는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각색 정욕과 행락에 사로잡히면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2-23)”라고 말씀합니다.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알기 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E. 다섯 번째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Lived for Spending in Malice and Envy)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악독과 투기로 인생을 지냅니다. 지냈다는 말은 소비하고 허비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악독과 투기로 시간을 허비합니다. 쓸모없이 인생을 삽니다. 헬라어로 악독은「카키아(κακίᾳ)」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악의, 적의, 원한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악의와 미움과 원한을 품고 살다가 죽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생산적 삶을 살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입니다. 또 헬라어로 투기는「프도노(φθόνῳ)」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투기, 시기, 질투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살다가 의미 있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 인생을 허비합니다. 평생을 비교의식, 질투, 우월감,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다가 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인생을 악독과 투기로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F. 여섯 번째는 가증스러운 자(Being Hated)입니다
이 같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가증스러운 자(Being Hated, NIV)라고 하십니다. 헐라어로 가증스러운 자는 「스튀게토이(στυγητοί)」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사람의 모습은 로마서 1:23-28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23-28에「바꾸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➀하나님의 영광을 더러운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며, ➁하나님의 진리는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③ 하나님의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남색, 동성연애)을 행하고 여자도 여자를 향하여 같은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간들을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이처럼 구제불능인 가증스러운 자들을 아예 포기하시고 그 죄가운데 내버려 두십니다.
G. 일곱 번째는 피차 미워한 자(Hating One Another)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미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가족과 가족 사이에, 부족과 부족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국가와 국가간에 서로 미워합니다.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영국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영국에는 가족보다 크고 부족과 비슷한 공동체인 크랜(Clan)이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들 크랜간에 서로 미워하고 상대가 망할 때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피차 물고 뜯고 멸망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Ⅱ. 다음으로 자비와 사람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살펴봅시다(3:4-5)
A. 하나님께서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신 결정적인 때를 상고 합시다(3:4)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패역한 모습을 보시면서 인간들을 포기하시고 그 죄악의 상태대로 내어 버려두셨습니다. 하지만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패역한 인간세계에 개입하셔서 자비와 사람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때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 때는 어둠이 충만한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빛과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 때입니다(요1:14). 이 때는 하나님의 품 안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때입니다(요:1:18). 빛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그 날이 인류 구원역사의 전환기가 된 것입니다.
B.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내용(3:5b)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전 인류적인 구속의 사건이지만 이는 오늘날 개개인의 삶 가운데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마음과 인격과 삶에 구원의 하나님께서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구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①중생의 씻음과 ②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다가오셔서 개인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1. 먼저 하나님의 구원은 중생의 씻음(The Washing of Regeneration)을 통하여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우리를 씻어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Regeneration Rebirth)은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씻음」는 헬라어원어성경에서 세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세례란 죽음을 뜻합니다.
베드로전서 3:21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생의 씻음은 말씀의 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지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더러운 몸을 씻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피로 우리 선한 양심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중생은 물과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을 때 이루어집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물과 피와 성령의 역사이며 이 셋은 또한 하나입니다(요일 5:6-8).
어느 한 청년이 작은 배를 만드는 조선회사에 다녔습니다. 이 청년은 면목상의 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이 청년이 교회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이 청년의 마음을 일깨워 주셨고, 그는 자신이 지었던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떠올랐습니다. 그 죄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배에 쓰는 아주 중요한 구리 못을 훔쳐서 빼돌린 것입니다. 배를 만들 때는 구리 못을 사용해야 배가 부식되지 않는데 그 구리못은 값이 비싸기 때문에 그는 구리못을 훔쳐서 내다 팔았습니다. 그는 설교말씀을 들을 때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 청년은 목사님께 상담을 하러 와서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고 목사님께서는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그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와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청년은 주인에게 찾아가서 이 죄를 사실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주인은 “나는 자네가 위선자인줄 벌써 알고 있었네. 예수라는 분이 자네를 변화시킨 것을 보니 그 종교는 썩 괜찮은 종교로구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중생의 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물과 보혈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양심을 깨우치고 회심하게 되어 깨끗하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2. 두 번째로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The Renewal by the Holy Spirit)입니다.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이전에 살아왔던 무의미한 삶에서 소망이 넘치고 새로운 삶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기쁨의 삶으로 달라지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중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요3:3,5). 먼저, 물을 통한 중생의 씻음이 있고, 그 다음에 씻겨진 마음의 그릇에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역사가 뒤 따라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면 우리의 새로운 마음의 그릇에 성령께서 기름부어 주심으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뉴저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명의 젊은이가 춤과 술과 도박과 쾌락이 있는 클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럽으로 가는 길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클럽에 들어가던 두 청년 중 한 명은 우연히 교회 입구에 적혀있던 그 주일의 설교 제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죄의 삯은 사망이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귀를 보자 그 청년은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른 친구에게 “야, 나는 오늘 클럽에 가지 않을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른 친구는 “사람이 한번 결심을 했으면 같이 놀러 가야지. 무슨 소리야?”라고 말했고 그는 결국 클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교회로 들어 갔습니다. 그 날 예배를 드린 청년은 설교말씀을 듣는 순간 성령의 임재가 강하게 역사하여 크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때 회심한 청년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그 순간에 30년 전에 클럽을 선택했던 젊은이는 종신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서 자신의 친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장면을 TV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취임식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그 회심한 사람이 바로 클리브랜드(Cleveland) 대통령입니다. 성령의 압도적인 임재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삶이 새롭게 되고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입니다.
C.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근거(3:5a)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우리의 공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자기 의나 자기 공로나 우리의 의로운 행위(의행칭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우리가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인 가치가 있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나타내 보이셔서 이뤄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9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 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주시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Ⅲ. 은혜 받은 사람의 축복(3:6-7)
이전의 삶을 살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이 같은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두 가지 축복을 얻습니다.
A. 첫 번째,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3:6-7a)
우리는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됩니다(Being Justified by His Grace).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성하신 구원안으로 믿음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이신칭의는 교리나 신학이나 이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 도달하지 못하는 의롭지 못한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의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는 신학, 교리,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실 때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부어지실 때 이신칭의가 내 것으로 확실히 다가와 적용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의 핵심교리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통하여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아 담력과 용기로 죄를 이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참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죄인들은 자신감이 상실되고 두려워 떨며 주눅이 든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담력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의 축복입니다.
B. 두 번째,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3:7b)
은혜 받은 사람은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됩니다(Become Heirs Having The Hope of Eternal Life). 후사는 후계자,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땅의 후사는 부모님께로부터 지위, 집, 재산과 모든 것을 상속받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상속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따라 주시는 하늘소망의 모든 약속을 상속받게 됩니다. 하늘의 상속은 땅의 것과 같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9:1-8에 나타난 사울 왕의 손자 므비보셋은 조부와 아버지를 모두 전쟁터에서 잃은 몰락한 왕가의 후손이었습니다. 사울 왕가가 몰락하기 전에 그는 왕세손이었습니다. 그는 두 발이 모두 절뚝발이였고 남에게 붙여져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다윗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에게 조부 사울 왕의 모든 전토, 집, 종들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리고 왕자처럼 왕의 식탁에서 죽을 때까지 먹게 합니다. 즉 다윗왕의 후사처럼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1-24에 보시면 어느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모두 챙겨서 먼 나리로 떠나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는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 갔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하였고 그 땅에 흉년이 들게 됩니다. 그는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 살게 되었고 돼지를 쳤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아버지를 떠난 것을 후회하였고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돌아 갔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나가 끌어 안으며 입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영접하고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신분이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의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자녀로서의 권세가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죄를 덮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후사란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 신분, 특권, 거룩함을 상속 받는 축복의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영생의 소망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얻을 상속자, 후사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되심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됨과 영생의 소망에 따라 후사가 됨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하시고 축복받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내신 사랑의 능력 /딛3:4-7/ 권오진목사
2020-10-08 04:06:12
성탄축하예배와 한 해를 마감하는 결산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과 가정위에 주님의 크신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밤새 곡하고 누가 죽었느냐고 물어 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서 실컷 슬퍼하고 심지어 곡까지 하고는 정작 누가 죽었는지 몰라서 물어본다는 말인데,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요?
속담이란 것이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으니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그리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면 괜찮은데,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그러했다면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그런데 초상집은 몰라도 생일은 그런 날이 있습니다. 밤새 축하하고는 누구 생일인지를 물어보는 날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요즈음은 많이 덜해졌지만 그래도 성탄절이 되면 화려한 장식의 트리가 세워집니다. 성탄이브가 되면 사랑하는 여인끼리 여행을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즐기면서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탄절을 즐기면서도 <성탄절이 누구의 생일인지?>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성탄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우리의 삶에 성탄의 정신을 적용시키는 데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그레데 섬에서 목회를 하는 디도목사에게 주신 목회서신입니다. 그레데 섬은 지중해상에서 네 번째 큰 섬으로 소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요충지였습니다. 바울이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치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갈 때 미항에 머물렀다가 겨울을 나기 위해 뵈닉스 항구로 가려다가 풍랑을 만나게 된 곳이 바로 그레데 섬입니다. 그 섬에서 디도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바닷가나, 섬은 목회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당시에도 섬 목회가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디도서 1:12-13에 그레데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지금도 그레데 섬과 같은 데서 목회를 하라고 하면 많은 목회자는 힘들기에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타고난 거짓말쟁이라도 해도, 짖어대는 개처럼 말이 많은 자라도 해도, 게으른 먹보와 같은 자라고 해도 분명한 사실은 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야 할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에 디도 목사를 보냈고, 디도 목사가 그곳에서 목회를 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말씀이 오늘 읽은 디도서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성탄절을 맞은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성탄절의 핵심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1. 성탄절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다.
4-5절을 보세요.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으니”
간단하게 기록한 이 말씀이 성탄의 사건과, 우리가 구원받은 근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절정의 사건이 <성탄절>이라는 말입니다.
요한사도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요일4:8)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 너 사랑해’라고 해도 사랑한다는 흔적이 없다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교회생활을 함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아이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입술로 교회를 사랑한다고 해도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으면 그 사랑을 사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부부지간에도,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속성을 <사랑>이라고 해도 우리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천국에 계신 하나님이 –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생명의 떡 되신 하나님이 – 마구간 구유에 뉘였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성탄절의 기도>가 있습니다. 성탄절의 기도 앞부분에서 성탄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친히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부유해지기 위해 가난해지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영생에 참여시키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당신은 단지 하늘에만 거하려고 하시지 않고,
우리 곁으로, 이 땅으로 오길 원하셨습니다.
단지 높은 곳에서 크신 분으로서 존재하길 원하시지 않고
우리처럼 낮고 작은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단지 우리를 지배하길 원하시지 않고
우리를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단지 영원 속에서 하나님이길 원하시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 태어나고
살고 죽기를 원하셨습니다.】
신학자다운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성탄의 사건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요 사랑 때문입니다. 그 성탄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주님의 공생애 모든 사역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 있지만,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가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서 오셨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역하셨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성령께서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해 주셨고,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너는 네 아들이라’하면서 의롭게 여겨주셨습니다.
그러니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예수님 탄생으로 인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격해하고,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 6-7절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이 부어 주사 ○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은혜의 완성을 향해 구별된 삶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 자녀들의 삶은 경건한 믿음, 사랑 실천의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962년 오스트리아에서 간호대학을 다니던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ger)는 대한민국 소록도에서 한센인 들의 도우미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광고를 보는 순간 하나님이 “네가 가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설렜다고 합니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 자격을 얻은 뒤 수녀가 되어 한국의 버림받은 땅 소록도를 향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 마가렛 피사레크도 같은 마음으로 소록도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사진 1 – 의료진과 함께 찍은 사진 /(좌 – 마가렛, 우-마리안느))
이들이 도착했을 당시 소록도에는 6천여 명의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한센 병은 나균 때문에 살이 썩고 뼈가 녹아서 손발이나 코와 입이 뭉그러지거나 없어지는 병으로,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여겨질 만큼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고, 한센병 환자가 만졌던 물건만 만져도 병이 전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가족들조차 한센병 환자들을 집에서 내쫓거나 거리에 갖다 버렸고, 정부에서는 아예 법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소록도에 끌고 와 치료를 받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치료할 시설이나 물품 일손 따위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록도 병원에서 일하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한센 병에 걸릴까 봐 두려워 환자에게 가까기 가기를 꺼렸고, 치료 할 때도 모기나 파리에게 약을 치듯 환자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독약을 부려 댔습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스트리아에서 온 두 수녀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은 몹시 충격적이었습니다.
두 수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환자들의 썩어 가는 부위를 맨손으로 만지고 손수 피고름을 짜주었습니다. 또 손으로 환자들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 주고 구멍이 뚫린 발바닥에 거즈를 밀어 넣어 주면서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한센 병은 나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봉사하기를 10년 20년 30년 40년이 지났습니다. 20대 후반에 한국에 온 그들이 일흔이 넘게 되었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개친 두 수녀를 “큰 할매, 작은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사진 2. 큰 할매, 작은 할매 사진)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던 두 수녀가 이제는 자신이 오히려 소록도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고 2005년 겨울 아침에 “이제 저희들이 천막을 접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조용히 소록도를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난 소록도 사택 앞에는 마음에 평생 담아 두었던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여라”는 말이 또렷이 적여 있었습니다.
(사진 3,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여라’)
그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소록도 사람들은 하나같이 슬픔에 잠겼고, 열흘 동안 수녀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두 수녀 할머니는 수도원 3평 남짓 방 한 칸에 살면서 소록도가 그리워 방을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 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방문 앞에는 한국에서도 붙여 놓았던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한국말로 써서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성탄의 감격을 아는 자의 삶이란 바로 이런 삶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작은 예수가 되어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돌아보는 삶,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성탄절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제가 앞부분을 소개한 칼 바르트 <성탄절을 위한 기도> 뒷부분에도 성탄의 감격을 가진 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도하는 내용이 이어서 나옵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온갖 어두움과 고난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잘못들과 오해들을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암담하게 견디어야 하는
차가운 현실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위협하는 크나큰 위험들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이런 위험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를 엄청난 위험으로 몰아넣는 냉전과
상호위협의 어리석은 행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
통치자들에게,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는 자들에게,
새로운 지혜와 인내와 결단력을 주소서.
당신의 선한 땅에서
모든 자들이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으려면,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병든 사람들,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사람들,
불의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
부모가 없는 어린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도울 수 있고 돕도록 부름 받은 모든 사람들,
재판관들, 공무원들, 교사들, 학자들과 언론인들,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생각합니다.
여러 교회와 모임에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 모두에게 성탄의 빛이 이전보다 더 밝게 비추어,
우리 모두가 도움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결단하여야 할 것은 칼 바르트가 기도한 내용처럼,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나의 삶의 주변을 볼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금년은 성탄예배가 한 해를 결산하는 예배가 되어버렸습니다.
금년 한 해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셨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셨습니까?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으로 한 해를 잘 마무리 하시고,
2017년을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사회 생활 /딛3:1-7/ 이동원 목사
2015-05-08 16:41:04
제가 항상 지적하는 바이지만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서 반
드시 극복되어야 할 점은 소위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사고 방식, 즉 이원론
적(二元論的)인 사고 방식입니다.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이란 신앙 생활과
일상 생활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생활이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신앙 생활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
니다.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한다든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한
다든지 혹은 예배나 성경 공부 그리고 기도 시간처럼 신앙이 직접적으로 표
현될 때에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강하게 실감하지만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바로 신앙 생활이
며 신령하고 영적인 생활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성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한국 교인들의 의식 구조 속에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단어 중의 하나가
신령하다입니다. 저 사람은 참 신령하다는 말을 들을 때 얼른 떠오르
는 이미지는 저 사람은 식사도 안 하고 아주 열심히 기도한다, 혹은
그는 40일간 금식기도한다, 전도하는 일에 아주 광적으로 열심이다,
종교적으로 지나치다 등등입니다. 설령 의식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정의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보통 신령하다는 말을 그런 방향에서 사용하
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신령하다는 말
은 삶과 유리된 종교적인 행위 속에 우리 자신을 몰두시키는 정도를 가리키
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원리를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
실하게 내 삶의 장(場)에 적용하고 있는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성경에 따르
자면 기도할 때 목소리 톤이 유달리 괴상하다든지, 뱀 쫓는 소리를 잘 낸다
든지, 혹은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해서 영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 생활과 직접적으
로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마음을 다해 임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
질구레한 사건들, 즉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한다든지, 백화점에서 계산을 잘
못한 사람과 시비를 가린다든지, 혹은 고용주로서 고용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는 것 등은 영적이지 못한 일로 취급하여 소홀히
여기기가 쉽습니다.
자꾸만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다 보니 특별히 한국의 교인들
은 각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이라고 하는 중요한 문
제를 놓쳐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한다는 말은 내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즉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동기가
영적이고 또 그 목표가 영적이라면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영적인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는 일도 영적인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하여 하라(고전 10:30).
내가 이것을 먹고 건강을 얻어 정말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내 삶을 드
리고 싶다. 내 삶의 전체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 내
삶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타내는 화육(化肉)이 되었으면 하는 의도와 동
기를 가지고 먹고 마시면 그것은 신령한 일이 됩니다. 부흥회 못지않게 먹
는 일도 중요합니다.
동기나 목적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 삶의 모든 영역이 다
주님의 일이 될 수가 있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全)영역을 다스리는 주인
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주권입니다.
우리가 종종 듣게 되는 비판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많아지
는데 왜 세상은 자꾸만 어두워지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교회
가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주권이 적용되지 못한 까닭이라고
봅니다. 즉,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갖게 되는 그런 열망과 확신을 가지고 가정과
직장과 가게에서 신앙의 원리에 바탕한 삶을 살고 있다면, 저는 정말 문자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우리의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으신 어떤 분이 저에게 두 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보내 주
셨는데 거기에는 이 편지에 실렸던 내용을 1월 첫째 주일에 꼭 이야기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은 꽤 부정적이었습니
다. 종업원을 함부로 다루고 4개월에 한 번씩 종업원을 갈아치우면서도 스
스로는 신앙이 돈독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어떤 교인을 고발하며 그를 용납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항변이 적혀 있었습니다. 차라리 정직하게 자기 이름
을 밝혔다면 발표할 용의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 발표를 하지 않기로 했습
니다. 그러나 그 분이 지적하고자 했던 바는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디도서 2장에는 교회 생활과 가정 생활에 대한 교훈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들을 어떤 태도로 섬길 것인가 하는 문
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의 윤리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상황으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가정 생활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
할지 모릅니다. 가정에서 종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내가
고용하는 종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도 영성(靈性)을 테스트하는 진정한 시
금석이 될 수 있습니다.
3장에서는 사회 생활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사회 생활을 어떻게 했었는가를 지적하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사회 생활을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 구원받은 자의 사회 생활 태도
사회 생활에 대한 바울의 권고는 여러 가지이지만 결론적으로 복종과 평화,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에는 대단히 중요한 동사
하나가 나옵니다. 그것은 기억하게 하라는 단어입니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
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1,2
절).
어떤 영어 성경에는 기억하게 하라는 말이 끊임없이 기억시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
다.
● 법 질서에 대한 복종
물론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것은 법 질서를 행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
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복종이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
게 복종해야 할 이유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라고 밝
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는 사회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소위 법을 다루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복종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나 사회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기대하
신 법에 대한 복종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언제나 제기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법 질서를 집행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의한 것을 요구할 때에도 복종해야 옳은
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불변의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
한 복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될 때는 더 높은 권위, 즉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권위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때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들에 대한 불
복종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요구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말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한 순복의 자세는 잃지 말아야 합
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5장이 그와 같은 예(例)를
아주 잘 보여 주는 고전적인 예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
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5장의 배경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 체포당하고 전도를 못 하도록 명령
을 받은 것입니다.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
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敎)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
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7,28절).
사도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명령이었고 누구의 명령과도 타협할
수 없는 소중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전도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냐는 대제사장의 물음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
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5장부터 시
작해서 죽 읽어 보면 관리들이 투옥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이 저항했다는 언
급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특정한 요구에 관
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가지고 말했지만, 그러한 순간에도 그들은 순복의
자세, 복종의 자세를 전혀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범위를 좁혀 봅시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요구가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판단했을
때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녀는 부모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모가 있겠습니까마는 때때로, 부모가 자녀들에
게 거짓말을 요구하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녀는 당연히 순종할 수가 없습
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를 했다고 해서 부모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다든가 당신 같은 아버지하고는 더 이상 살지 않겠소. 당신이 인간이오?
하면서 공격하는 것은 그 부모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스스
로 거부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때에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명령을 따르
자면 절대로 그 부분에 관해서는 순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관
해서 제가 거절한다고 해서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 말씀 앞에 순종하는
저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 문제에 관해서는 기독교계 내에 두 가지 극단적인 견
해가 있습니다.
첫째 견해/극단적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의 자세
이것은 정의를 위해서, 특정 명령에 대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민
불복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면 반항하는 삶을 살게 되고 맙니
다.
반항을 위한 반항... . 그러다 보면 매사에 반항을 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운 질서 그 자체를 거절하는 아주 부정적인 인생이 되고 맙니다. 소위 정
의(正義)의 이름으로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극단적인
삶의 모습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둘째 견해/권위에 순복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불의한 요구에 대해서도
복종할 자세
이것은 결국 불의를 정당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합니다. 우리는 하
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 아니오를 말해야 할 순간에는 분명히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복종이 아니라 아직도 순종하고 있다는,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분이 세우신 삶의 모든 질서 속에서 근본적으로 복종
의 자세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바울은 여기에서 강조하
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영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알고 암송할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
을 할 때 정말 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는 자세로 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끔 저는 우리 교회 임원들이 회의를 할 때마
다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신앙 생활한다는 사람들이 교회당에 들어올 때 주차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것입니다. 질서를 위해서 주차하지 말라고 선을 그어 놓은 곳에
도 기를 쓰고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시정하기 위해
서 이야기하면 오히려 핏대를 올립니다. 도대체 교회에 왜 오는지 모르겠습
니다.
사실 이런 데서 개인의 영성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
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고칠 수 있고 그런 작은
부분에서까지도 법 질서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 인간 관계에서의 평화
바울은 대인 관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와 해야 할 것 두 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훼방이란 말은 본래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입니
다. 즉, 본인이 없는 데서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툼이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사람과 구체적으로 논쟁을 일삼는 것입니
다.
관용이란 본래 어떤 사람의 죄과나 약점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는 상대방의 구체적인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처리
하는 방법과 태도에서 자기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평화를 끼쳐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건 멀리 있는 사람이건, 나
를 축복하는 사람이건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건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고 관용하십시오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2절)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부딪치는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의 이러한
원만한 대인 관계를 가리켜서 샬롬(평화)이라고 불렀습니다.
◈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사회 생활
바울은, 구원받은 후의 삶이 그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맥락에서 구원받기
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3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본능적으로 불복종이며 반항적입니
다. 반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순종하는 것이 부자연스
럽습니다. 우리가 이렇듯 자연스럽지 않고 본능에 거스르는, 자기 자신을
쳐서 하나님과 그분의 법을 사랑하고 그분 뜻을 따라 살고 그분이 세우신
권위를 존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구원받았기 때문
입니다. 어떤 사람이 순종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거
듭났다는 구체적인 증거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전에는 순종치 아니한 자요... .
그래서 구원받기 전의 가장 주된 실상은 불순종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열거된 수많은 단어는 대인 관계들을 파괴하는 원인들입니다.
정욕, 욕심, 행락, 악독, 투기, 가증함, 미움, 이러한 우리의 욕구들이 결
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샬롬의 인간 관계, 즉 원만한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주범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이러한 삶을 살았다. 그
러나 구원받았으므로 달라진 이러한 삶을 마땅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스
스로에게 상기시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새로워진 사회 생활을 추구해야 할 이유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
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하려하심이라(5-7
절).
바울 사도는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기 시작한 다음부터의,
구원받은 삶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맨 처음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출발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우리구주 하나님의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때에(4절).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에 도전을 하며 새로운 삶을 추구해
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사랑
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잘난 것이 하나
도 없었던 나,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던 나이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
로 말미암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삶의 출발이었습
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삶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순간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삶 전체를
묘사하는 아주 놀라운 말씀이 그 다음 대목에 있습니다.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
로 하셨나니(5절).
여기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씻음'이라는 단어는 단회적(單回的)인 사건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한 번
씻음으로 완전히 씻어졌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은 이미 그리스도인
들에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거듭났을 때 완전히 근본적으로 씻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더 씻을 필요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총에 근거해서
우리는 단회적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성령
의 새롭게 하심이 따르게 됩니다. 이 말은 계속해서 새롭게 하심이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하십니다. 교리적으로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부릅니다.
흔히 회개라는 단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 안 믿게 된 상태에
서 예수 믿게 된 것, 그것이 근본적인 회개다, 또한 회개한 사람은 그 다음
에는 자백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란 단어는
구원받을 때의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쓰인 회개라는
단어는 굉장히 폭이 넓습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들도 날마다 회개해야 하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개념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
다. 근본적인 회개는 예수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돌이켜 이제 그분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근본
적인 회개는 이 순간부터 뒤따를 수많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회개란 돌아선다,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회개
는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까 아직도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
다. 내 개성, 가정 생활, 직장 생활, 내 삶의 방식... .
우리는 계속해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럴 때, 계속 새로워질 수 있도록 성
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남으로 씻음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을 성령이 계속해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정, 사회,
교회, 모든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삶, 하
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회 생활을 추구할 수 있는 그 동력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사회 생활의 영역까지 포함하여 성화의 추진력으로서의,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인 성령의 역할을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이 6절에 있습니다.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
사.
여기서 풍성히 부어 준다는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부
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그분은 우리 속에 오십니다. 그런데 우
리 속에 오신다는 말을, 즉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을 그분이 공간
적으로 우리 안에 꼼짝도 않고 머물러 계신다는 뜻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 찾아오신 성령님은 계속해서 내게 오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기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 생활까지 포함해
서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의도적인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부어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 그 성령의 능력에 계속해서 사로잡힐 때에 모
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궁극
적으로 우리는 왜 이러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7절에 있습니
다.
우리가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후사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
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신앙 생활의 출발을 이야기합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은 성화의 출발이지 끝이 아닙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답게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출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즉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
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시
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것이
저 영광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누리기에 합당한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에게 경건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
다.
록펠러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한번은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당
신의 재산을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해서 당신이 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그는 세 가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첫째, 나는 감사할 줄 아는 후손들에게 내 재산을 남기겠다. 둘째, 내 재
산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남기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후손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지금까지 훈련시켜 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
하나님께서도 저와 당신을 위해 영원한 기업을 준비하셨습니다.
귀한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잘사는 분들이, 전혀 훈련되지 않은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대한 재
산을 그냥 물려줍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마냥 흥청거리
다가 있는 재산을 다 탕진하여 넘어지는 재벌 2세들의 추한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로
후사 역할을 감당할 만한 인격을 갖추게 하려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부
단히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손해도 보게 하시고, 엄청난 손실도
입게 하시고, 그러면서 부단히 우리의 인격을 쳐서 주님 앞에 복종시키시며
주님을 바라보도록 계속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진실로 영광의 날에 주님
앞에서 받을 기업을 누릴 만한 후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회 생활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고 사소한 대인 관계도 후사가 되게 하기
위한 훈련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을 알아차리지 못한 순
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장차 저 영원한 기업을 누리며 하나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할 그 영광의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 그
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께서 오늘 나를 훈련시키십니다. 사람과의 대인
관계 속에서, 내 직장에서 신경질나는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나를 그분이
기뻐하시는 후사가 되도록 훈련하십니다. 여기에, 주(主)의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딛3:4-7
2015-04-06 23:27:13
세계 3대 폭포 중의 하나인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본 적이 있다. 카나다와 미국 국경을 이루는 곳에 너비가 790m 높이가 54m 그 폭포에서 떨어지는 수량이 1분당 168,000입방미터나 된다고 한다. 폭포 주위에서 바라보는 것만해도 장관을 이룬다. 물안개가 100m까지 올라간다. 그 폭포의 위력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우비를 입고 배를 타고 폭포 가까이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본지가 30여년 가까이 되가지만 그 폭포의 위용은 지금도 변함없다. 오늘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향하여 부어 주시는 은혜는 이전에도 폭포수와 같았고 오늘도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변함 없이 폭포수와 같이 부어 주실 줄로 믿는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도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딛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은혜는 무엇인가? 5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통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 부른다.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여 이 주제로 특강을 하는 중에 이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여 간략히 요약하도록 하겠다.
1.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구원하셨다
1)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한 존재이다.
롬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을 행할 수는 있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그들의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정치, 사회, 경제, 과학, 문화등의 증진에 이바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다.
2)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3)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며 꿈이 아니다. 성경은 오리혀 죽음을 영생과 영벌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소개한다. 죽음 후에는 죄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히 9:27).
요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큰 사랑이다. 바로 우리가 이 폭포수와 같은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2.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선택하셨다
이것을 “무조건적 선택”이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조건을 제시하여 조건에 맞는 사람만 구원하신다고 선포하셨다면 구원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하여 전적으로 선에 대하여 무능력한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조건 없이 무조건 선택하셨다.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렸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아무런 능력도 공력도 없기에 그의 영원하신 자비하심과 선하심으로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우신 은혜요 사람이 아닌가? 바로 우리가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3.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만 구원을 허락하신다
이것을 우리는 “제한 속죄”라 부른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 속죄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행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성경은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은혜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로 제한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 제물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믿는 자에게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스펄전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 속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베드로가 속죄를 받은 것처럼 가룟 유다도 속죄를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은 천국의 구원받은 자들만큼이나 지옥의 저주받은 망령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이 된다고 믿는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면, 구원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세에 저주를 받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될 뿐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분이 아니다. 바로 택함을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바로 우리, 나 자신을 위해 속제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바로 그 사랑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4.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실패가 없으시다.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이다.
외적인 부르심은, 모든 사람이 듣는 일반적인 부르심이다. 복음을 선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으로의 초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절될 수도 있다. 외적인 부르심으로는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다.
눅 14장의 비유 중에,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초대 받은 사람들이 거절하여 오지 않았다. 밭을 사서 가서 일해야 하고, 소를 5겨리를 사서 돌봐야 하고, 장가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많지만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내적인 부르심은, 복음을 듣고 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찾아 오셔서 은혜스럽게 협력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믿게 하시며 자유롭고도 자발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오게끔 만드시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을 보통 “유효적 부르심 또는 효과적인 부르심,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부른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선택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이 부르심을 행사하시는 위대한 초청자이시다. 그리고 유효적인 부르심은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살아 계신 음성이다. 우리의 그의 택하신 자요 그분의 양이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택하심을 받은 그의 자녀들에게 실패함 없이 반드시 전달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큰 은혜요 사랑이다.
5.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는 끝까지 인도하신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사람은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한 번 믿으면 멸망할 수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구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성도는 안심하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설령 실수하고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회개시켜서 끝까지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예)견인차
결단과 적용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5가지로 요약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 5대 강령이란 것이다. 이 구원의 교리를 깨닫게 되는 사람은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며 강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 중에 이런 내용의 기도문이 있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학교 시절, 박윤선목사님의 강의 시간이면 항상 암송했던 성구가 3개 있었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롬 3:4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잠 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지금도 수시로 그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한다. 나 자신의 모습을 알 때 겸손하게 되고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하루하루 매일매일 감사와 찬송의 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은혜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투덜이가 된다. 왜 그런가? 은혜가 말랐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은혜는 마르지 않는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지금도 변함 없이 굉음을 내며 쏟아지고 있다. 그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부어지고 있다.
만약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그 큰 은혜와 사랑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면 5가지 강령을 깊이 묵상하기 바란다.
1)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영어 이니셜로 TULIP(튤립)이다. 폭포수와 같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크고도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매일매일 감사와 찬송이 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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