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디도서 설교 모음

디도서 2:11- 14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2. 12.
728x90
반응형

 

 

하나님의 친백성 /2:11-15/ 이동원 목사

2015-05-08 16:43:27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말을 아주 특별한 단어를

써서 특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

(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

󰡑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14).

 

󰡒친백성.󰡓 저는 이 단어가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친숙하

게 느껴집니다.

 

󰡒친백성󰡓의 원어는 페리우시우스라는 두 헬라어가 결합한

페리 우시우스입니다. 페리는 영어로 󰡒round󰡓, 󰡒둘러싼다󰡓

뜻을 가지고 있으며

 

우시우스󰡒나는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둘러싸인 한복판에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

와 관심과 긍휼과 돌보심과 사랑으로 둘러싸여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

이 바로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아 주신 목적과 우리가 그분의

친백성이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백성으로 삼으신 목적

우리는 14절에서 그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

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

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왜 우리를 친백성이 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

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선한 일󰡓이라는 것은 어

 

느 한 가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한 일들을 말합니다. 복수

형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선하다󰡓가 언제나 거의 예외없이,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모든 일들을 말하듯이 본문에서도 어느 특정한 사역을 두고 이야

기한 것은 아닙니다.

 

󰡒열심󰡓이라는 말도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다른 사람들이 샘나

도록󰡓, 󰡒시새움을 느끼도록󰡓, 󰡒투기(妬忌)를 느끼도록󰡓이라는 뜻이 들

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에 헌신하게 하려고 그분은 우리를 그

분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친백성󰡓이라는 말은 우리 말로도 영어로도 그 의미를 나타내지 못합니

. 󰡒하나님의 특별히 친한 백성󰡓이라 해서 󰡒친백성󰡓이라고 번역을 했

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미 서론 부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과 은혜와 보호 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입니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주소입니

.

 

친백성이 되는 과정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

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과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

한 백성이 되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백성

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건은 󰡒나타난다󰡓라는 한 단어

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타난다󰡓라는 단어가 두 번 언급됩

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여기에 맨 처음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는 13절을 보십시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

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런데 이 단어는 다 역사적(historical)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historical󰡓이라는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떤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마누라는 부부 싸움 할 때마다 얼마나 `historical\' 한지 모른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사람이 가만 있지 못하고 그럴 때에는 `historical\'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hysterical\'이라고 하는 것이오라고 거들었답

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다시 말했습니다.

 

󰡒, 이 사람이... 내가 영어를 모르는 줄 아시오? 나도 아는데 우리 마누

라는 너무나 `historical\' 하다구.󰡓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 마누라는 싸울 때마다 늘 과거를 들추기 때문에 `historical\'이라

한 거요.󰡓

어쨌든, 󰡒나타나다󰡓라는 단어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 되

어 있습니다.

 

첫째/구속사적 사건

 

이것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가 나타나서 어떤 사건이

저와 당신의 삶 가운데 이루어졌습니까?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

시되󰡓(11,12).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까? 바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극명하게 나타난 사건이

었습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

비와 긍휼과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

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

󰡓(5:8).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십자가.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우리

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사건은 곧 하나님

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8).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어 구원

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관심과 사랑과 보호와 애정과 그 모든

축복 안에 거하는 친백성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에

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내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작업이 끝난 것이 아닙니

.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가고 있습니

. 계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은 그것을 위해서 또 한번 우리에게 은혜를 나타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

.

 

둘째/종말론적 사건

 

이것은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이 13절의 말씀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

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명할 수 있는 유명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

. 하나님이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여호와의 증인을 비판하면서 이 구절을 이야기했더니, 얼마전 여호와

의 증인과 이야기하고 오신 어느 분이 제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

. 대표적인 여호와의 증인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하더랍니다.

 

󰡒이동원 목사가 되게 무식한 모양이오. 영어 성경을 한번도 보지 않았는가

보오. 영어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and\'가 있

.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이것은 절대로 동격이 아니

라오. 그것도 모르고 말하다니.󰡓

 

그래서 저는 이야기를 전해 주신 분에게 저도 영어 성경을 보아서 그것을

잘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어에는 유명한 법칙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카이 법칙󰡑입니다.

는 곧 and입니다. 이것으로 두 단어를 연결시키는 법칙 가운데 하나가

동격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이 법칙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여기

에서는 and를 빼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곧 다시 말하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정확한 법칙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법칙에 합당한 정확한 번역입

니다. 우리말 번역이 잘된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 나타나심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미국 대통령이 한번 방문하면 온 나라가 얼마나 법석을 떨었

습니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학생들이 총동원되어 새벽부터 나가서 깨끗

하게 길을 쓸고 또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도로변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흔들면서 미국 대통령이 지나가기만을 설레이면서 또

짜증을 내면서 기다리던 경험이 제 어린 시절에 있었습니다. 강제로 동원이

 

되었기 때문에 짜증과 설레임의 착잡한 감정이 교차되는 가운데 기다렸습니

. 한 나라의 최고 수반(首班)이 온다고 하니까 온 나라가 법석대면서 준

비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를 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날 그때를 기다린다\'는 그 기

다림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년 전에 영국에 갔다가 버킹검 궁전 바로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국왕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있던 관광객들이 다 멈추

어 서서 사진을 찍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 그분이 나오는 광경을 포착하기 위해서 도시 전체가 술렁이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나타나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 벌

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본문 12절에는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친

백성다운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의 삶의 성화(聖化)를 촉구하는 일련의 덕목

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12).

이렇게 살면서 그 영광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림을 기다리는 삶은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 측면/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림

 

경건치 않은 삶의 가장 정확한 정의(定義)는 하나님이 없는 삶입니다. 지적

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사

 

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관념적인 하나의 신()은 될지언정

절대로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사실

상 하나님과 무관한 삶인 것이며 이것이 곧 불경건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에 관해서 바울 사도는 디도서 116절에서 이미 지적했

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

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아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

배도 드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의 삶의 초점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만 의식할

뿐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바로 불

경건한 삶입니다.

 

그러나 정말 구원받은 자로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참

으로 기다린다면 우리는 경건치 않은 것을 버리게 됩니다. 이 세상 정욕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정욕이란 이 세상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입니다. 세속적인 삶은

이 세상만 알고 오는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얽매여서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일까

? 그것은 오는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온 삶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으며 그 심판의 결과가 우리의 영원을 결정한다는,

내세의 가치를 우리가 참으로 알고 깨닫는다면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

의 모습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속적인 인간의 삶을 초

 

월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영광이 나타

나기를 기다릴 수 있다면 경건치 못한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적극적인 측면/근신과 의로움과 경건을 성취함

 

이 세 가지는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우선, 근신은 자기 자신에 대

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의로움은 이웃을 향한 덕목이며 경건은 하나님을 향

한 자세입니다. 정말 우리가 나타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모한다면 삶

 

의 세 가지 영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게

되며 이웃과는 투명하고도 정직한 관계를 맺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온전한 삶입니까?

 

이런 삶을 살려면 우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그 때를 사모하고 기

다려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면서 말입

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본문의 가장 중요한 구절인 14절을 보십

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

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

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관심을 받는 그분의 친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우리로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

을 열심으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

는 인격이 되어 가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속에 나타났던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의 영광이 나

타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첫번째는 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흔들리고 열심이 식는

후퇴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때가 바로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대상이었던 나를 자녀로 삼아 주신 그 놀라운 구속

의 은혜를 깨닫는다면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을 연결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것에 감사하

고 감격해 할 때 우리의 신앙은 자라납니다. 그러한 감격이 시들시들해지면

그것은 적신호입니다.

 

내가 신앙 생활을 얼마만큼 정상적으로 하고 있는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한 감격과 감사가 생생하게 내 속에 살아 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항상 이 점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두번째는, 내게 이미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의 주님이 나타날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다시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은혜와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진 낱말은 󰡒선물󰡓입니

. 우리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기뻐하면서 선물만 즐기고 정작 그 선물을

 

주신 분은 별로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선물을 주신 분이 나타

나는 날이 바로 재림일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분을 영광 중에 뵈옵는 그

날을 사모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의 진정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느 날 이 지상의 삶이 끝날 때, 나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

내가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서야지.󰡓

 

이것을 사모하는 사람은 그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사람, 곧 그분의 친백성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는 은혜

가 당신과 저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의 공동체 /2:11-14/ 이동원목사

2014-12-03 21:03:24

 

필립 얀씨의 저서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영국에서 비교 종교학 회의가 열렸을 때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인가라는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성육신의 교리가 아니겠느냐고 했을 때 어떤 학자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근거들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아무래도 부활의 교리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또 다른 학자들은 죽은자의 환생의 교리는 기독교의 전유물만은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 유명한 영국의 C.S. Lewis교수가 일어나 그 대답은 어렵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다른 종교에서 찾을수 없는 기독교만이 제공하는 일관성있는 메시지는 은혜라고 지적하자 결국 모든 이들이 동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도가 그레데 섬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감당할 때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설교하고 어떻게 교회를 치리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한마디로 그는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침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미 로마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강조했고,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역설한바가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유명한

2:8-9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강조를 바울은 딛3:5에서도 반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치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은혜의 다른 표현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저주가 아닌 사랑을 베푸심이 바로 긍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여 살아가도록 만세 전부터 준비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사도는 동일한 관점에서 목회서신인 디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진실로 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은혜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주님은 각각의 혼자로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공동체안에서 살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야 할 삶들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성도들이 은혜 공동체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 것입니까?

 

1. 과거의 불법들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이유를 설명하며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우리를 불법에서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회복되어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피흘리시는 희생하는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법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불법이란 단어는 죄에 대한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죄는 곧 불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안하고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신 법을 어기고 행한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곧 그의 은혜로 우리는 이런 불법에서 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우리가 다시 불법을 행하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픈 과거 회귀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땅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아 애급을 떠나서도 자꾸 기회만 있으면 애급을 그리워하고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끝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사람들중에 창조적인 미래를 만들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내는 너무 히스토리칼해서 괴롭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히스테리칼을 잘못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히스테리칼이 아니라 히스토리칼이래요.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옛날 결혼전의 자기 과거를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히스토리칼(historical)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아내에게 하나님은 히스토리칼하지 않으시다고 그분을 본 받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러나 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처음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과거로 후퇴하지 않고 성장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적절하게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양육의 첫 스탭은 과거의 죄나 불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버릴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을 떠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12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이것은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베드로 전서2:1-2에도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의 은혜 받은 교회 공동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이유가 오늘의 성도들이 버릴 것을 버리도록 양육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를 최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만 해도 교회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수 있었던 것이 성도들이 일단 예수를 믿으면 버릴 것을 분명하게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바람피우지 않고, 술 끊고, 도박을 포기하고, 이런 분명한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주의 은혜가 다시한번 우리에게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는 은혜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현재의 선한 일에 열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은혜에 대한 응답은 무엇인가를 버리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결코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행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이미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강조한 바가 있었습니다. 2:8-9에서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엡2:10에서 바울사도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선한 일-선행)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그는 다시 오늘의 본문 14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심이 우리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선행가운데 살아감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증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결코 우리가 마땅히 이런 선한 일을 해야 하겠다는 도덕적인 당위의식으로 말미암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선행은 믿지 않는자도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은 오래가지 못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 선전하는 수준의 선행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율법주의적 선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 그 사랑을 체험한 가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인 감격의 충동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필립 얀씨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을 명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의 여인 제니의 사랑에 대한 반응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이큐 75의 우직한 저능아 검프-아무것도 의미있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받은-그가 어느 날 한 여인의 사랑을 받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길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그는 달립니다.

 

그에게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도 메달을 받고 싶은 충동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제니 때문에 사랑 때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간증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이유-그 은혜, 그 사랑의 감동이 우리를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선한 일을 위해 달려가는 자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저앉을 때마다 우리는 조건없는 첫 사랑을 알게 해준 그분의 음성-그리고 그의 사랑을 겅험한 동료들의 소리를 듣고 일어납니다. “포레스트-, , (달려, 달려, 달려야 해)”

 

3. 미래의 소망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반드시 부딪치는 장애가 있다면 세상이 우리의 선의를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상처받고 좌절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보상받고 싶어할수록 더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행의 목표를 남들이 알아주기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선행의 유일한 동기는 은혜이며 차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면 자신의 경건의 유익을 위해서 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12절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12절 하반부에는 우리가 버리면서 동시에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라고 가르칩니다.

 

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한 인격의 표상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 이시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삶의 결과가 선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을 단순히 죄를 피하고 안 짓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1:27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런 적극적인 선행을 함께 수행하도록 이 선행의 미숀을 주께서는 교회 공동체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도 지칠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욕심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13절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의 못다 한 선행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시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못다 자란 인격의 마지막 부분을 채워 그분을 온전히 닮은자로 그분앞에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경건이십니다.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공동체의 비전이십니다.

 

제가 비전의 신을 신고 걷는다에서 인용한 마더 테레사의 어쨋거나”(Anyway)라는 시를 다시 한번 인용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느껴진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용서하십시오/당신의 친절에 사람들이 오히려 당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당신을 이기적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친절하십시오

/당신의 성공을 보고 주변에서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친구들이 함께 모여온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공하십시오./당신의 솔직함과 단순함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속인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정직하십시오/

 

신이 여러 해에 걸쳐 성취해온 모든 것을 사람들이 하룻밤에 다 무너뜨리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취 하십시오/당신이 찾아 낸 행복과 평화를 누군가가 질투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행복하십시오/당신이 오늘 베푼 선함을 사람들이 내일은 다 잊는다고 할지라도 어쨋거나 선을 베푸십시오/당신이 가진 최선을 이 세상에 다 내어 주어도 세상은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라 해도 어쨋거나 당신의 최선을 내어 주십시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을 에베소서 2:8-10과 비교했을 때 공통적인 강조점들이 무엇입니까?

 

2. 본문 12, 13, 14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각각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12:

·13:

·14:

 

3. 본문 14절에 의하면 성도의 선한 일의 동기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4. 금번 여름 우리가 각자가 헌신하고 싶어하는 선한 일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오.

 

 

 

 

admin

 

 

2:1-14/ 노년기와 신앙생활 / 한경직 목사

2014-08-23 08:30:36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몇 주일 전에 제가청년 시대와 신앙 생활이란 문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온 생각은노년 시대의 신앙 생활이라는 문제로도 설교를 하여야 되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가만히 보면 우리 가운데 물론 청년이 대부분이지마는 노인님들도 이제는 상당히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해방 후에 설립되었을 때에는 대부분 청년들뿐이었습니다. 혹 중년도 물론 섞였지만 대부분 청년들뿐이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노인 님들은 이북에서 많이 내려오지 못했으므로 청년들이 거의 다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해방된 지 十七년쯤 되고 보니 아마 청년들이 점점 늙어 가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상당히 노년들이 우리 가운데 섞여 앉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가 필요한 줄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저도 거울을 보면 점점 머리에 배꽃이 많아지는데 제가 이 설교가 이 설교가 대단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선교자가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서 설교를 준비하지마는 특별히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제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노년 시대와 신앙 생활이라 하는 문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 청년들은 이 설교를 들을 것 없다라고 만 생각지 말고 잠을 자지는 마세요. 왜 그런고 하니 그저 지금 청년 시대라고 하지마는 잠깐 노인들이 됩니다. 잠깐 노인 시대가 옵니다. 또 그뿐만 아니고 사실 노년 시대에 축복을 받는 노인들이 되려고 하면 젊어서부터 잘 준비를 하고 잘 믿고 옳은 길을 걸어야 될 것이올시다.

 

먼저 이 시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노년 시대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청년은 물론 인생의 아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년은 인생의 저녁이올시다. 석양이올시다. 청년은 인생의 봄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노년은 인생의 가을이올시다. 아침이 중요하지마는 저녁도 중요합니다. 아침에 무슨 일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저녁에 바로 마치는 것이 아마 더 중요하지요. 봄에 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을에 추수를 잘 하는 것도 아마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봄에 뿌리는 것은 가을에 추수를 잘하려고 뿌리는 것입니다. 시종이 여일 하여야 된다는 말을 우리가 늘 듣습니다. 시작도 잘 하려니와 마침을 바로 하여야 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내가 부음이 되고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운지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양의 유명한 채근담에도인생을 보는데는 그 전반생을 보지 말고 후반생(後半生)을 보아라.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후반생이 실상은 전반생보다 더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달음박질 마당에서 경주를 할 때에도 시작도 잘 하려니와 마지막 끝까지 마치기를 잘 해야 상을 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년 시대에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믿으며 어떻게 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천당을 준비하는 시기가 이 때입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아무 할머니는 곱게 늙는다.이런 말을 더러 듣습니다. 그런 말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어떤 할머니는 밉게 늙는 모양이올시다. 사실 늙을 바에야 곱게 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곱게 늙을 수 있을까? 곱게 늙는 방법을 네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기야 곱게 늙기 위해서 머리에 물도 들이고 옷도 깨끗이 입고 여러 가지로 수고 많이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 성경의 교훈과 우리 경험을 의지해서 몇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청년 시대에 영광이 있는 것과 같이 노년 시대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청년 시대에 유혹과 시험이 있는 것과 같이 노년 시대에도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할 때에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여 경건하며 근신하며(삼가라는 말입니다)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렇게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 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려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들에게 특별히 권면 하였습니다. 늙은 남자들은 나이 많다고 함부로 하지 말고 절제하라고, 경건 하라고, 근신하라고,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늙은 여자들도 이와 같이 행실이 참소 하지 말며(없는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술의 종이 되지 말며 - 아마 요즘 썼더라면 화투의 종이 되지 말며 라고 한마디 붙였을는지 모르겠습니다 - 담배의 종이 되지 말며, 근신하며 조심하며 삼갈 것이 노년시대에도 있습니다. 경계할 것이 노년 시대에도 있습니다.

 

제가 먼저 이 노년 시대의 경계할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늙어지면 흔히 나이 많은 재세 하고 말도 삼가지 아니하고, 행실도 삼가지 아니하고, 옷 입는 것도 삼가지 아니하고, 시험지에다가는내 나이 금년 六十이올시다이렇게 쓰기도 하고, 삼가지 않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니 근신하라고 하였습니다. 삼갈 것이 있습니다. 늙을 때에 오는 시험이 따로 있습니다. 늙을 때에 오는 유혹이 따로 있습니다. 삼갈 것이 몇 가지나 되나 생각해 써보니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추려서 세 가지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맹목적 보수주의, 다시 말하면 그릇된 보수주의를 삼가야 합니다. 노년 시대는 흔히 뒤를 돌아보기 쉬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저 무슨 일을 당하면전에는 안 그랬는데!그런 이야기를 잘 합니다.

 

우리 젊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새 법 내지 말고 옛 법 버리지 말라는 말이 제일이야!이런 이야기 잘 합니다. 그것 다 뒤를 돌아다보는 말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다. 옛것 중에 보수할 것이 있습니다. 참 진리를 보수해야지요. 미풍양속을 보수해야지요. 그러나 덮어놓고 보수만 하자고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아직도 저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가보면 상투 틀고 갓 쓰고 다니는 노인 님들 상당히 볼 수 있습니다. 철저한 보수주의올시다. 옛날 할아버지 하는 대로 꼭 하니까 효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에 와서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보수주의 같이 아니합니다.

 

전에 이북에 어떤 목사님은 젊었을 적부터 누가 가져다 올렸는지 집에서 마련했는지 모르지만 개 가죽자리를 늘 깔고 앉았었다고 합니다. 나이 많아서 늙을 때까지 개가죽 자리만 깔고 앉아 계시니까 다른 사람들이 개가죽 자리 목사라고 했다고 합니다. 전에 하는 대로 하느라고!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새 것을 덮어놓고 이단시해서는 되지 아니합니다. 옛날 신약 가운데서 찾아보는 바리새주의가 이런 종류의 맹목적 보수주의올시다. 그 때에 새 시대가 왔고 새 선지자가 나타났고 새 메시야가 와서 부르짖었지마는 덮어놓고 반대했습니다.

 

덮어놓고 핍박했습니다. 십자가에까지 못박았습니다. 새 것을 배울 줄 몰랐습니다. 요사이도 정통 보수란 말로 간판을 삼아서 행세를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맹목적 보수주의를 나이 많아 갈 때에 삼가야 됩니다.

 

둘째로, 완고(頑固)와 고집을 삼가야 합니다. 늙어가면서 몸이 굳어진다고 합니다. 마음도 굳어지기 쉽습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 굉장히 떠든 사실을 알지요? 평택 어느 곳에 예순 여덟 살 난 할머니가 여든 한 살 난 영감을 죽이려고 술에 약을 타 주전자에 넣어놓았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이것을 영감에게 먹여 죽이려고 했는데, 영감이 먹기 전에 며느리가 모르고 자기 남편에게 가져갔습니다. 아들이 먹고 죽었습니다.

 

사위가 먹고 또 죽었습니다. 조카가 먹고 죽었습니다. 또 며느리도 멋모르고 한 잔 먹은 모양이요. 며느리는 중태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디 잇느냐? 그것을 신문 기자들이 자세히 알아보고 설명하기를 이 여든 한 살 된 노인이 어떻게 완고하고 고집스러운지 도무지 온 집안이 화평할 수 없고 아들과 함께 살수도 없고 노친네하고도 같이 살수 없고 이 노인 때문에 온 집안이 살 수 없단 말이요. 그래서 이 할머니가에이 이까짓 영감 죽여버려야 되겠다.그런데 여러분, 잘못 듣지는 마십시다.

 

이 할아버지만 고집쟁이 영감이 아닙니다. 이 할머니가 예순 여덟 살까지 같이 살다가 예순 여덟 살 나서 왜 이런 짓을 하게 되었습니까?

아마 그 동안에 할머니도 고집쟁이가 된 모양입니다. 두 고집쟁이가 함께 할 재간이 있나! 삼가야 합니다. 나이 많아지면서 이러한 완고와 고집의 큰 시험이 들어오는데 이것을 항상 삼가야 합니다.

 

제가 전에 이북에 있을 때 어떤 큰 교회(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유명한 목사님에게 대해서 젊은 사람들의 돌아가는 말 들어보니까그 목사는 다 좋은데 너무 고집이 세서이런 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몇 해 후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때에 들어보니까 그 교회에서 큰 싸움이 났습니다. 이런 이야기 종종 듣지요. 어떤 교회는아무 장로 때문에 그 장로 너무 고집이 세서……., 그 교회야 목사가 가서 년을 견디자? 못 견디어.여러분, 목사나 장로 이야기만 하니까 집사나 평신도는 고집 없는 줄 생각지 마시오.

 

이런 이야기 너무 많이 들어서 다하지 못합니다. 나이 많아지면서 이런 시험이 꼭 들어오는데 우리가 이것을 미리 알고 조심해야 됩니다. 고집과 완고로 말미암아 가정에 비극이 일어나고 교회에 비극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국가에 비극도 일어납니다. 一九혁명은 한 노인의 고집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도 함께 포함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욕심이올시다. 나이 점점 많아가면서 정욕이나 허영에 대한 욕심은 줍니다. 과히 많지 않아요. 아주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조심 하십시오. 그러나 이 욕심의 시험은 점점 많아집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어떤 때는 권세, 어떤 때는 감투 욕심…….

 

어떤 책에 이렇게 기록했어요. 영어로 기록한 것을 제가 우리 나라 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어요사람이 四十이 넘어가면 몸은 뚱뚱하여지고 배는 점점 나오고 욕심은 커간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四十지난 분들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대부분 그렇게 됩니다. 전에 들으니 어떤 목사는 아주 좋은 목사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집장사하느라고 거간과 같이 집 보러 다니기에 심방 못한다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이북에 있을 때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어떤 교역자에 대해서그 아무 목사는 참 좋은 목사인데 요사이 가만 보니까 돈이 속에 들어가서……』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말도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장로도 그렇고 집사에게도 이런 시험이 들어옵니다.

 

서양 속담에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고 사람의 욕심이 제일 많아진다.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마 그런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청년 시대에는 헌금도 잘 하고 공공(公共)한 사업에도 잘 바치다가 점점 나이 많아 지면서는 주머니 끈을 단단히 맵니다. 이런 시험이 들어옵니다. 조심할 데 대해서는 그만큼 이야기합시다.

 

그 다음에 여기에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라.고 권면 했습니다.

 

특별히 노년 시대에 삼갈 것이 세 가지를 말했는데 이제 힘쓸 것 세 가지를 말씀하겠습니다.

 

첫째는, 창조적 생활을 계속해서 힘써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나이 많으면 은퇴하지요. 일을 바꿀 수는 있지마는 나이 많다고 아무 것도 안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면 건강을 주시는 대로, 일을 할 수 있으면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모세 같은 이는 나이 八十세에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一二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심명기 三十四절에 보면 그 때까지눈이 흐리지 아니했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기록했습니다.

 

전에 갈렙은 여든 다섯 살에 여호수아에게 와서 하는 말이,내가 여든 다섯 살이지마는 아직까지 기력이 젊었을 때와 별로 다름이 없으니 내게 아낙 자손들(키가 큰 거족)이 사는 저 산지를 맡겨주세요. 그러면 내가 가서 산지를 점령하겠어요.그대로 했습니다. 그 사람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일을 계속해야 됩니다.

 

또 부득이 우리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지마는 다른 방면을 찾아서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창조적 생활을 하여야 됩니다. 특별히 노년 시대에 교회를 돕고 심방을 하든가 전도를 하든가 하는 모교회의 일을 제일 자유롭고 제일 능률 있게 할 만한 시대입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였지만 스탠리 존스(Dr. Stanley Junes)박사는 七十이 되었을 때에(그 나라 법에는 七十이면 은퇴합니다)자기 선교 부에 편지를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내가 금년 七十이니까 부득이 선교사로는 은퇴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서는 도무지 은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나 혼자 이 앞으로 사방으로 다니면서 전도하겠습니다.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실 그이가 지금 일흔 댓 되었습니다. 그러나 온 세계에 다니면서 지금까지도 복음을 전파합니다.

 

빌레몬 편지를 보면 바울이 이런 편지를 했습니다. 나이 많은 바울은 옥중에 갇혀서 있을 때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에 대하여내가 네게 부탁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에 오네시모라고 하는 어떤 젊은 사람이 역시 옥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에게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빌레몬이라고 하는 사람의 종이란 알이요. 그래서 오네시모를 도로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한 편지가 이 빌레몬 편지입니다. 나이 많은 가운데서 아들을 낳았다고!

 

여러분, 전에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나이 많아서 실지 아들을 못 낳을지언정 신령한 아들을 많이 나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 많아서 좋은 아들을 바울은 낳았습니다. 시편 九十二十二-十四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柏香木) 같이 발육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나리로다.의인은 늙어도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나이 많아도 배우는 것은 계속해야 됩니다. 학구적 생활은 계속해야 됩니다. 계속해서 새 것을 배우고, 새 시대를 이해하고, 새 청년들을 이해하고, 어떻든지 새로운 시대에 낙오되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의학상으로 보면 나이 많다고 머리가 반드시 둔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보통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둔하다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는 나이 많을 때에 새 악기를 배워서 음악을 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유명한 정치가 케코 같은 사람은 여든 다섯 살에 헬라 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여기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시대의 유명한 학자 피토락 같은 사람은 일흔 살 때에 라틴어를 처음으로 배웠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김성무 권사 님은 환갑 지나서 신학을 졸업했습니다. 우리 교회 김성준 장로님은 환갑 지난 지 , 년 되었는데 금년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나이 많을지라도 계속해서 새 것을 배워야 됩니다. 여러 청년들과 접촉해야 됩니다. 청년들의 꿈과 이상에 감화를 받아야 됩니다. 나이 많아도 계속하여 배우세요.

 

셋째로, 제일 중요한 것이 물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점점 많아 가면 육체도 쇠약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말씀으로 권면 했습니다.겉 사람은 부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록 힘쓰라.고 이렇게 하려고 하면 특별히 여기에 대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시편 七十一절에 보면나를 늙을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떠나지 마소서.이렇게 우리도 기도하십시다. 의로운 길을 가야 합니다. 잠언 十六三十一절에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의로운 길로 가도록 힘써야 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이사야 四十六절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이 많아진다고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인도의 유명한 시성 타골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나는 점점 나이 많아 감으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대를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그래야 됩니다. 나이 점점 많아 감으로 내 육체가 쇠약해져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 노력을 너무 의심하지 말고, 믿음의 돛대를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바람을 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에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하늘 나라를 보도록 힘써야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 이 젊었을 때에 계시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이 많을 때에 밧모 섬에 가서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 하늘 나라의 영광이 그 눈앞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은 누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다 허락한 축복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뭇잎은 떨어질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과실은 가을에 다 익을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곡식도 거두게 될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햇빛도 서산낙조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노년 시대는 인격과 믿음이 완숙하고 아름다워질 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원만하고, 이해성이 많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를 때입니다.

 

 

 

 

 

 

 

 

성육신의 능력 /2:11-14/ 임영수목사

2014-12-15 08:26:20

 

옛날 로마시대에 황제 숭배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 황제는 신적 존재로 숭배 되었습니다. 그러한 황제가 어느 지방 도시를 방문하면 그 지역 전체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세금감면, 도로건설, 극장건립과 같은 특혜가 베풀어졌습니다.

 

오늘 디도서 본문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사는 지구라는 항성을 방문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지구 방문으로 인해 특별한 혜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가 줄 수 있었던 세금감면, 도로건설, 외국권력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인간 구원입니다.

 

디도서에서 말하는 인간 구원은 베드로전서에서와 같이 낡고 무의미한 삶의 틀에서 해방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세상의 욕망과 하나님의 부재 상태에서 해방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아 갈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연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법을 어기며, 율법과 삶의 규범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사물에 대한 잘못된 표상들이 그들의 욕망을 더욱더 부추깁니다. 그들은 오로지 세속적인 사물, 소유물, 먹고 마시기, 성적 만족감에만 집착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데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중함, 의로움, 경건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디도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현현(Epiphany)으로 베풀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며, 경건하지 않음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 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표준 새 번역개역)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구원의 은총이 무신론의 공허한 활동과 기질에 따른 노예화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세속적 욕망, 다른 사람의 눈치, 체면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살도록 성령님을 통해 교육시킵니다.

 

디도서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해방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 단어로 표현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신중함 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하여 건전한 사고를 갖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 목적에 맞는 것 적당하며 예의바름 입니다.

즉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정욕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선 자기중심대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실재와는 거리가 멉니다. 실재를 바르게 보지 못할 때 헛된 환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쉽게 좌절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신중함으로 교육받은 사람은 참된 실재를 인식하게 되고, 현재를 바르게 의식하고, 매순간 온전히 현재에 머물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온전히 현재의 상태에 머물지를 못합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실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다른 나라를 그리워합니다.

 

그 곳에 가면 자신의 정욕대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그를 더욱더 아버지를 떠나가게 만듭니다. 결국 그는 환상의 세계로 달려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그를 진정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삶의 비참성 가운데서 실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실재의 삶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는 비로소 허구와 실재를 바르게 보게 됩니다. 그가 전에 그렇게 동경하던 그 화려함, 멋짐,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디도서의 저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로마 사회를 바라보게 될 때 로마 사회가 만들어 놓은 만족을 추종하는 삶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실재가 아닌 가상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디도에게 그 사실을 서신으로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망상과 허영, 정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상상하는 대로 세상과 사람이 바뀌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게 살아가려는 부담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그 다음은 의로움 입니다.

의로움은 삶의 질서, 즉 사회질서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생명의 질서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올바르고 공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치품을 점점 더 많이 가짐으로써, 즉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벌면서 자신들의 외적 상황을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작은 배려를 얻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노력하며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존엄성에 상응하지 않는 것을 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8:36)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번역하면 자기 영혼에 해를 끼친다면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호의, 물질적인 것을 다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심한 공허감,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삶에는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외적인 명성만을 전부로 여긴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영원한 실재를 감지한 그들은 모든 명성이 가상임을 폭로했습니다.

그들은 당 시대 사회의 헛된 짓들을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사람들은 “60세가 되어서야 자기 자신에게 속아서 삶을 빼앗겼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빼앗았다고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고 조화롭게 진정한 자아와 일치하며 살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은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삭개오는 당시대에 의롭게 살아가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는 작은 키에 자신을 잃어버린 상실감,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허를 재물과 권력으로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세리장으로서 백성들의 재물을 불법한 방법으로 착취했습니다. 어느날 그리스도께서 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택이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의 집안 구석 구석에 빛이 비췄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두운 영혼에도 빛이 비췄습니다. 그는 그 빛 가운데서 자유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욕심에서 해방되었고, 자신의 삶을 열등감과 정욕에 사로잡혀 결정하지 않고 새로운 자아의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자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 재물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웃에게 새로운 존재로 다가갔습니다.

 

이웃은 그에게 더 이상 착취의 대상이 아닌 도와주고 협력하며 살아가야할 그의 형제 자매였습니다. 그의 집과 그의 마음에는 재물이 쌓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머무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유인으로서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드디어 예수님께로부터 그에게 구원이 선포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마지막으로 경건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파멸의 소용돌이에서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 입장에서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샘과 접하게 해줍니다.

그 샘은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 샘에서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우선 진실로 생기 있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인간의 비극 전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비극이란 인간이 자신을 보지 않으며 살아가고 환상을 좇으며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 채 항상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은총과 함께 나타나십니다. 그 분이 내가 사는 도시에 나의 일상생활 안에 나타나십니다. 왕이 지방 도시를 방문할 때 그 도시 전체가 왕을 맞기 위해 단장하고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사랑어린 깊은 배려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사랑으로 어루만지시고 그의 사랑으로 나의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비추시며 그 사랑의 빛으로 내 영혼의 구석구석을 밝혀 주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의 삶은 모든 면에서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도시가 사람이 살 수 없고 더럽고 궁핍해서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무가치한 곳이라고 한탄하지 않게 됩니다.

 

나의 열등감에 대해서도 한탄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인 나에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사랑을 지니고 나타나십니다. 즉 나의 내면의 도시에서 거리를 활보하고 어디에서나 호의와 동의를 선포하십니다.

 

그 때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닿지 않거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정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정의 빛 가운데서만 실재적인 것과 비 실재적인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에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일어나게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비 실재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사항들이 달라집니다.

 

그전에는 소박한 것, 유행의 풍조에 따르지 못하는 것, 양이 적은 것, 겉으로 아름답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전에는 소위 사회에서 상류층들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의 축에 끼여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모두 비 실재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이 진정 값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서와 정욕의 노예적인 삶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운 자유인으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유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양육의 궁극적 목표/2:11-14

2005-01-05 13:49:09

 

어떤 마을에 아주 잘 생기고 예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총각들은 그 여자와 사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너무나 도도했습니다. 아무리 잘 생기고 조건이 좋은 남자들이 와서 데이트를 신청했지만 모두 다 퇴짜를 맞았습니다

 

. 그런데 어떤 한 청년이 용감하게 나섰습니다. 그 청년은 직업도 변변히 없고 생긴 것도 별로인 백수건달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그 도도한 여자와 뽀뽀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친구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백수건달 청년은 친구들과 내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일주일 내에 그 여자와 뽀뽀를 하면 100만원을 주기로.

 

과연 이 청년은 이 여자와 뽀뽀를 할 수 있을 까요? 이 청년이 하는 것은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에게 선물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밤이 되면 그 여자의 집 창문을 두드리면서 뽀뽀라고 소리치고 여자가 창문을 열면 얼른 잽싸게 튀는 일 뿐이었습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나고... 그렇게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청년은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가 그 여자와 뽀뽀를 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증거를 대라고 합니다. 그 청년은 친구들을 데리고 그 여자의 집을 찾아 갑니다. 그리고 그 밤에도 창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그 여자가 창문을 확 열더니 화가 나서 소리칩니다. “! 너 또 뽀뽀할거지?”

 

친구들은 모두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어떤 교인 하나가 앵무새를 길렀습니다. 앵무새를 기르게 된 동기는 자기 교회 목사님이 앵무새를 기른다는 말을 듣고 나도 앵무새나 한 번 길러보자.”해서 기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의 집에서 자란 그 앵무새는 주인을 너무나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앵무새는 무엇을 잘하지요? 말을 잘 합니다. 그런데 그 앵무새가 할 줄 아는 말은 한 마디였습니다. 그 앵무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키스해 주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앵무새 집 주인은 키스해 주세요.”라는 말을 잘 했었나 봅니다)

 

앵무새가 시도 때도 없이 키스해 주세요. 키스해 주세요.”하니까 집에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민망했습니다. 괜히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것 같아서 목사님에게 전화를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앵무새는 경건한 언어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앵무새가 참 세속적인데 제 앵무새를 보낼 테니까 경건 훈련 좀 시켜주세요.”

 

전화를 받은 목사님은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이 성도의 앵무새를 받은 즉시 자기가 기르고 있던 앵무새 새장에 넣었습니다. 이제 새장 속에는 두 마리의 앵무새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앵무새가 주인이니까 먼저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앵무새도 꼭 한 마디의 말을 할 줄 아는데 그 말은 다같이 기도 합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앵무새가 먼저 인사합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그러자 그 교인의 앵무새가 인사합니다. “키스해 주세요.”

 

그러자 목사님의 앵무새가 전에 하지 않았던 한 마디 말을 더 했다고 합니다.

 

주께서 드디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듭니까? ‘도대체 저 이야기를 어떻게 설교에 연결시킬까?’ 이것이 여러분의 가장 큰 관심이라는 것을 압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 성장반 공부하신 분들에게 뽀뽀를 많이 하라고 하려나 보다.”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에게 훈련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도도한 처녀가 너 또 뽀뽀하려고 하지?”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훈련의 결과입니다. 앵무새가 다같이 기도합시다. 키스해 주세요. () 주께서 내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주인의 말을 오랫동안 듣고 훈련해 온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성장반의 과정을 훈련했습니다. 훈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훈련이 중요한 것은 훈련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이 중요한 것은 그 훈련을 통하여 실전에서 그 훈련한 것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훈련은 실전을 위해 존재합니다.

 

 

 

오늘 성경은 구원에 대한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구원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구원에 대해 말씀한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간다라는 말씀으로 곧 바로 건너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복스러운 천국에 대한 소망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재림의 사건을 13절에서 말하지만 그것을 말하기에 앞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줍니다.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양육, 정욕을 다 버림, 신중함, 의로움, 경건함 같은 말들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모두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 양육되고, 성장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게 훈련받은 다음 우리는 복스러운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고대하게 됩니다.

 

14절 말씀은 이 모든 말씀을 다시 한 번 요약해 줍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속량하여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가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의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성장반 그리고 제자훈련반, 사역훈련반 그리고 모든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나 혼자 구원받은 사실에 띵가띵가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스티븐 오그니(Steven L. Ogne)는 지난 번 사랑의 교회에서 열린 코칭 세미나에서 다른 사람을 세우는 코칭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코칭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을 계발하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이 인격적으로 자라나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공헌하도록 만든다.” 코칭의 마지막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공헌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리더십의 대가인 헨리 블랙커비(Henry T. Blackaby)는 리더십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영적 리더십은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리더십의 마지막 지점은 자기 일에 몰두해 있던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장반을 공부하고, 제자훈련을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은 채 공부만 하고, 졸업만 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영적인 지식만 얻게 되어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양육의 원래의 목적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함으로써 오히려 신앙의 역작용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훈련받아야 하며, 양육되어야 하며, 성장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양육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리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훈련의 과정을 걸어갈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말씀이 순간순간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728x90
반응형

'설교문 모음 > 디도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도서 3장 설교 모음  (0) 2022.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