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라! /요5:30-47/ 유기성목사
2022-02-17 11:30:22
미자립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을 만나 힘들고 어려운 목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게는 역사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만 있어도 견뎌나갈 수 있을 텐데요!”
이런 탄식이 목사에게만 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더 크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녀 옆에 있는데, 자녀가 여러분을 보지도 못하고 여러분의 말을 듣지도 못한 채, 두려워하고 외로워하고, 잘못된 길을 간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말씀을 직접 들었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을 증거는 너무도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분명히 예수님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증언했습니다.
:36에서 예수님은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증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39 ...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안다던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겉으로만 “말씀! 말씀!” 하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38 또 그 말씀이 너희 속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분을 유지하고 세상 영광을 얻는 도구로 여긴 것입니다.
:42 너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이 말씀이 기가 막힌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 마음에 사랑이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가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니 오직 사람의 영광, 세상 자랑만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사렛 출신에다가 목수였던 예수님이 좋게 보였을 리가 없었습니다.
:43 ...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할 것이다. 44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유대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 모세의 율법 하였지만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율법을 기록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45에서 모세가 유대 사람들을 고소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대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믿기 더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기만 해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게다가 우리 안에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친밀히 동행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마음에 계시다고 말은 하는데,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할 말 못할 말 다 하고 갈 데 못갈 데 다 다니고 은밀한 죄를 짓고 삽니다.
주님의 몸이라는 교회에서도 주님은 무시당하십니다. 그래서 싸우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큰 소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못 들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제 들은 온갖 말을 다 기억하십니까?
마음을 열고 듣지 않은 것은 들어도 못 들은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있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있습니까?
들어 본 적이 있었다면 주님은 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마음에 품지 않았으니 꼭 필요할 때 말씀이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듣지 못한 것처럼 사는 것은 세상에 정신팔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하루 종일 예수님을 몇 번 정도나 기억하고 사는지 점검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롯이 날마다 보고 듣는 것으로 인하여 심령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벧후 2: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여러분이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이 여러분의 삶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마스크는 왜 씁니까? 손은 왜 그렇게 자주 씻습니까?
바이러스는 그렇게 조심하면서 악하고 음란하고 탐욕적인 세상 풍조는 왜 그리 바라보고 사십니까? 그래서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듣고 은혜도 받았고 성령체험도 했지만 영적으로 답답한 것입니다.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조국 프랑스를 구한 오를레앙의 처녀 쟌 다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늘 밭 갈던 들녘이었습니다.
무디가 주님을 만난 자리도 그가 늘 일하던 보스톤의 한 구둣가게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람들이 다메섹을 향하여 늘 다니던 길 위에서였습니다.
모세는 양떼를 몰고 늘 다니던 길목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늘 반복되는 일상으로 무의미하게 여겨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기대도 가지지 않았고, 소망할 것도 없었고, 바라 볼 것도, 신날 것도 없었던 삶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매일의 일상적인 삶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침실에서 주방에서 사무실에서 출퇴근 길에서 어디서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믿으라는 것입니까?
조건이 있다면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을 정말 믿는 것입니다.
제게는 예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제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더 강하게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 유대사람들이 이미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도 계속 표적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했습니다. “지금보다 예수님을 더 체험한다면 교만해지고 미혹될 것 같습니다. 이미 허락하신 은혜, 지금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느껴졌습니다,
잔느 귀용 부인은 17세기 사람으로서 성직자도 신학자도 아니었지만 앤드류 머레이, 워치만 니, 허드슨 테일러 등과 같은 위대한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던 경건한 예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순전한 사랑]에 보면 귀용 부인은 자신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기고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자기를 점검하고 또 살폈지만 헛되고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의 한 수사를 만나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며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가 귀용부인에게 답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귀용 부인의 영적 눈이 뜨였습니다. 사모함, 열망, 안타까움이 다 주님의 역사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경건하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인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주님이 영혼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에는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너무나 분명한데도 믿지 않는 유대인을 보시며 너무나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하여 더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보지 못하여도 주님은 여러분을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살아계시고 주님은 지금 함께 하시고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혜요 충분한 은혜입니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지옥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마음에 거하심이 믿어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세상과 사람의 영광으로 가려진 눈을 떠서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주님이 마음에 임하셨음이 믿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더 큰 은혜가 아니라 사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매일 주님을 바라보며 그것을 일기로 쓰고, 또 함께 하는 이들과 나누시기 바랍니다.
다른 성도들도 예수님이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은혜를 누리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섬겨야 합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동행운동이고 영적 대각성을 위한 기도입니다.
은혜는 받기만 하면 말라집니다. 사명이 될 때, 은혜의 역사는 더욱 크게 경험됩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동행하는 일에 다른 성도와 다른 교회와 함께 가야 합니다.
그것은 부담이 아닙니다. 사방이 적인데 함께 하는 아군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으면 좋지 왜 부담입니까?
왜 혼자가 되려 하십니까? 정말 혼자가 된 심정을 아십니까?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을 가정과 교회, 우리나라의 영적 대각성의 불씨로 삼아달라고 기도할 사람, 없습니까?
그런 갈망이 있는 사람, 그런 부름을 느끼는 사람은 일어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를 사용하소서. 저를 통하여 역사하소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도 살려주시고 가족도 이웃도 교회도 나라도 살리소서.”
찬양: '눈을 들어 주를 보라'
admin
�댁쟾�쇰줈
내적인 증거를 보이라! /요5:39-40/ 김병삼목사
2023-04-17 11:09:58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저에게 어떤 분이 자료로 보내 준 것입니다. TV에 나왔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나와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에서 사자성어 문제가 나왔습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뜻하는 사자성어는?”
보기) OOO가
문제를 푸는 어린이들의 답: 고음불가, 미친건가, 인간인가, 이럴수가...
그런데 서울 창일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의 답이 기가 막혔다.
“아빠인가”
그 어린이의 아빠에 대한 기억이 그 답을 만들어 내었다. 내게 아빠에 대한 기억은?
우리들의 삶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기억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족적들이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질문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믿음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점검해 보려고 합
니다. 믿음의 핵심은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는 것 같
아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아니 설교라기보다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질책하시는 장면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믿음 있는 것처럼 살아도, 내적인 믿음의 확신과 증거를 보이
지 않는 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즉, 바리새인들이 신앙생활은 잘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지는 못했습
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오늘 본문과 연결되는 것이지요, 39절의 말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
니라
“내적인 증거를 보이라!”
잘못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 .
- 2 -
성경은 연구하는데, 성경에서 증거 하는 분이 예수님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믿지 않는 이유
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랑
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질책이 무엇입니까? 겉모양은 믿음이 있
는 것 같은데, 진정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성경적 믿음이 아닌,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이
죠.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 5장 4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런데 이 구절을 NIV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yet you refuse to come to me to have life.
저에게 이 ‘refuse’라는 말이 ‘의지적 거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자신들이 믿는 확
신이 강했으면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 믿기를 거부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주 유명한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는데, 오
히려 유대인들이 그 일로 인해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도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예수
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에,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러니, 그렇게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지키며 살아가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전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는 자’가 되버린 것이죠.
아주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잭 그레이엄이 쓴「그대, 영혼의 심장을 뛰게 하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막의 죄”
친구 하나가 수년 전에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친구는 그곳에서 관광 안내원인 아랍 사람에게 예수
님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친구가 예수님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그는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
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왜 여태까지 아무도 저에게 이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가
수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관광 안내를 해왔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친구는 예수님을 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해 사과했다. 그러자 관광 안
내원은 매우 흥미로운 말을 했다. “아, 저도 이해해요. 그게 바로 ‘사막의 죄’(the sin of the desert)라는
거죠.” “사막의 죄라뇨?” 친구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사막의 죄는 사막에서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
죠!”
나는 절대로 그런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않다.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공급하신 영
원한 생수를 마신 후에 물동이를 내버려 두고 즉시 동네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을 알리기 시작했던 것처럼,
- 3 -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음 생활을 자신을 위하여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여 합니까?
여러분들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며 전도할 때 어떻게 말씀을 하시나요?
“예수를 믿으면 참 좋습니다. 좋은 일이 많이 생깁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 .”
그렇지요?
예수를 믿을 때 우리들에게 일어날 좋은 일들, 바로 그런 것들이 전도하는 이유가 아닌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온 확신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나에게 일어날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생길 때 가장 행복한 일이라
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를 위해, 배우자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 돌아올 대가를 바라기 때문입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대가를 바랄 때,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에는 헌신이 따릅니다. 그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행동은 ‘헌신’이 없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평가가 중요하게 되는 것
이지요. 그런 현상을 가리켜서 성경은 “자신의 의”라고 말을 합니다.
소위 우리가 가장 ‘재수 없어’라고 하는 사람의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잘 보
이기 위해서 하는 행동,
같은 여자지만 남자 앞에서는 청순가련형으로 갑자기 변하는 여자들,
같은 학생이지만 선생님 앞에서만 갑자기 모범생이 되어 버리는 학생들,
같은 신앙인이지만 목사님 앞에서 신실해 지는 교인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행동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상식이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 어떻게 그들에게
물의 근원이 있는 곳을 속히 알려 주고 싶다.
내면 깊은 곳에서 묻고 싶습니다.
- 4 -
믿음이 있겠습니까?
김형국 목사가 쓴 [청년아 때가 찼다]라는 책에 보면 잘못된 믿음에 대한 견해를 3가지로 말
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 1: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얼핏 들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 때문이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가만히 말씀을 묵상해 보면, ‘믿음’이 선물이 아니라 ‘구원’이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
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믿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도 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선물을 안 주셔놓고 믿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런 이상한 논리가 나오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입니다.”
잘못된 믿음 2: 믿음은 내가 소원하는 바를 믿는 것이다.
우리를 종종 혼돈스럽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
였느니라’는 말씀이죠. 우리가 잘 아는 ‘혈루병 여인’을 고치신 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이로의 집으로 행하시는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예수님을 만지면
낫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혈루병 여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이 예수님을 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독 그 여인을 향해 말씀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가 아니라 “네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죠.
만일 우리의 믿음으로 병이 낫는다면,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병이 낫거
나 낫지 않는 경우들이 ‘믿음의 세기’의 문제일까요?
혈루병 여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녀의 믿음으로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예
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말을 생각해 보셨나요? “믿음을 사유화 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인 자신들이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이 축복을 얻어내는 수단
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떤 믿음’과 ‘어떤 확신’을 갖느냐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거룩한지, 아니면 세속적이고 기복적인지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 3: 의심하지 말고 세게 믿어야 한다.
믿음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마가복음 11장 23-24절의 말씀을 곡해하는 것입니
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에 근거해 보면, 믿음의 문제는 얼마나 세게 믿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론 전에 22절에 ‘하나님을 믿어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 5 -
그리고 이 말씀이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 열매를 저주하신 사건이후에 말씀하고 계시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세게 믿어라’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지 않도록 제대로 믿어라, 그러면
그 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에서 김형국 목사아 아주 재미
있는 예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믿음을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뭘 잘못 먹었는지 속이 더부룩하고 배가 살살 아
픈데, 소화제를 먹지 않고 두통약을 먹으면서 꼭 나을 거라고 세게 믿는다면 배가 나을까요? 배가 아플 때는 그
냥 소화제를 먹으면 됩니다. 두통약 먹으면서 “믿씁니다!”하고 굳게 믿으면 나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믿음
은 세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세게 믿어서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도록 조작할 수 잇다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
니다. 왜 우리 하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들어버립니까? 아이가 아빠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는데 “네 열심히
부족하다. 더 열심히 장난감을 원해야지” 이렇게 말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는 자녀의 열심이나 신뢰가
아니라 자녀의 필요 때문에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변화산 여섯 째 날을 시작하며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일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워진 심령이 무엇인지. . .
사랑과 희락이 무엇인지. . .
죄 용서 받았다는 것이 여러분들의 삶에서 무엇인지. . .
성화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는 지. . .
우리의 믿음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아주 도움이 될 만한 [오두막]이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연쇄 살인범에 의해 어린 딸이 희생된 한 남자의 괴로움을 이해 하시겠나요?
어느 날 캠핑장에서 두 딸은 카누를 타고 있었고, 막내 딸 미시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배가 뒤집히게 되고 자식을 구하러 물에 뛰어 든 순간 어린 딸은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를 당하고 있
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두막에서 피 묻은 빨간 옷이 발견되고,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장례식
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그 죽인 범인에 대한 증오로 인해 괴로워하던 주인공 맥에게 어느 날 편지가 전
달됩니다. “파파로부터” 이 책의 저자는 어디까지 사실이고 환상인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말입니다.
주인공 맥은 주말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파파”의 편지를 따라, 딸이 살해된 오두막으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관념과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만나 대화하게 됩니다.
흑인 어머니의 모습을 한 하나님, 중동 남자로 보이는 예수님,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성령님. . .
많은 대화를 통해 주인공은 자신이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 .
자신이 살인범을 용서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죄인도 용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괴
로워합니다.
하나님은 그 살인범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공을 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서하도록 노력
하라고 말을 합니다.
죽은 딸 미시를 시켜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도 죽으려 생각했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 그것 또한 얼
마나 큰 짐이 되는 것인지. . .
- 6 -
자신이 믿어왔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일들 가운데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되는 순간
그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죄책감, 증오, 분노의 감정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질책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예배당에 나오기를 원하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를 원치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연구하지만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며,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들이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던 사람
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오지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이 무엇이냐면,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여러분들 주변에서 보세요.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참으로 답답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신뢰하지 않으면, 일단 의심하기 시작하면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믿음은 믿기로 작정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의 능력을 목회자에게 맡기신 것도 아니고, 절기 예배 때인 성탄절이나, 부활절,
송구영신에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식이나 성찬식 때에 구원의 능력이 임하는 것도 아
닙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를 가까이 하거나, 절기 예배에 참석하면서 스스로 크
리스천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구원을 받고 믿음을 증명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것 말고는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물속에 빠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뛰어든 순간에 동생이 납치되고 살해 되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미시의 언니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었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과 함께 아파하고 손에 동일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들. . .
- 7 -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변화산 기간 동안 우리들에게 필요
한 것이 있다면 “정직한 의심”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는
유일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4-25절을 보세요.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
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드레가 지난 후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
라”(27절)
그리고는 도마가 진짜로 손을 넣어 보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도마가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도마가 의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심이 그로 하여금
가장 강력한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우리는 도마하면 자연스럽게 ‘의심 많은 도마’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런데 한국을 제외한 나라에서 도마를 의심이 많다고 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 도마가 의심이 많다기 보다는 의심을 했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의심 안할 제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기에 혼자 의심한 꼴이 되었고, 그 한 번의 의심이 도마하면 한국
사람에게는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이 떠오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신앙 생활한 사람이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만나고 제자들도 만나며 신기
해하고 있는데 어느 날 도마를 만났습니다. 그 순간 입에서 ‘아! 의심 많은 도마’가 튀어 나왔
습니다.
그 말을 듣자 도마가 울컥하며 말하길,
“그래, 나 딱 한번, 그 때 한번 의심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너는 의심 안했냐?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왜 자꾸 그 한번 가지고 나를 의심 많다고 하냐?
내가 믿어도 너보다 백배는 더 주님을 믿었다.“
사실 도마는 그 후 주님을 전하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승이 남아 있
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
도마는 딱 한번 의심했습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의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의심할 수 있으나, 그 의심으로 인해 내적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내적인 확신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인 증거”입니다.
- 8 -
누가복음 8장 43-48절에 보면 앞에서 언급한 혈루병 여인데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 분에게서 능력이 나와 아무도 고치지 못하던 질
병을 고쳤던 사건이죠.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여인의 이름도 신분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 익명의 여인이 우리 중에 한 사람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수천 명의 사람이 앉아 있지만, 진정 내적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만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있었던 일입니다. 입시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아내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독수리
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독수리 문장을 한 학교가 어디지?
그런데 그 학교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예상치 않은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났습니다. 1
년의 시간이 흐르고, 미국에서 학교에 입학원서를 내면서 나중에 깨닫게 된 놀라운 일이 있습
니다. 환상 중에 보았던 흰 독수리가 지금 다니게 된 학교의 문장 이었죠. . .)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되어진 일이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말입
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런 기적이 일어났지?”라는 물음이 아니라,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저런 역사가 일어났지?”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그 분에게 가까이 가지 않기 때문이며, 그 분에게 우리
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려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역사 가운데서 누군가를 만나시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어 ‘history'가 ’His' and ‘story' 즉 그 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분의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시작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직한 의심과 고민을 가지고 그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교회를 다니는 것에 대한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다니고 있
었지만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아버지인 목사님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하나님 때문에 나의 삶이 제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
다.
나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삶을 내가 control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분에게 가십시오!
- 9 -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음을 아는 순간 그 분이 나
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그 분이 앞으로도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여 왔던 거짓 믿음, 거짓 행동을 버리고 아주
솔직하게 그 분에게 다가가는 것이죠. 주님은 오늘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적 믿음과 확
신을 보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내적 증거를 보이라’로 잡았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보니까,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영생을 얻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으신가요?
지금 우리들에게는 참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할 수 없었다” 가 아니라 “하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지 않았던 그 어떤 이유도 우리의
의지적 문제가 아닐까요?
우리가 ‘나의 소원’이 아닌 ‘하나님’을 믿으려고 작정하는 순간, 그 믿음을 보이는 순간, 그 분
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행하시는 일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기적의 역사가 아닐까요?
admin
하나님의 증거 /요5:31-39/ 김형익 목사
2021-05-05 16:42:05
여러분은 무슨 증거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증거는 무슨 증거’라고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적어도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 짧은 본문에 ‘증거’라는 단어가 동사와 명사 형태로 12번이나 나옵니다(헬라어로는 11번).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다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1. 무슨 증거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인식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알고, 공부해서 알고, 천부적으로 안다고 말할 수도 있고……이처럼 안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아느냐 하는 문제를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영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3).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도 어떻게 아느냐고 하면 ‘그냥 안다’고 말하는 것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두 주 전에 살펴본 17~30절의 본문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요지는 아들인 나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계속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아들이신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순수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령, 제가 이번에 PCA 교단에 가입하는데, 저의 목사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안수증명서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수증명서를 한국에 전에 제가 속해있던 노회에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그러면 안수증명서를 통해서 제가 목사임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안수증명서가 김형익이란 사람이 목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순수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거기 찍힌 도장들을 보라고 할 것입니다. 노회의 직인이 있고, 노회장의 도장, 그리고 노회서기의 도장을 보고 이 안수증명서가 진짜임을 알라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와 유사합니다. 어떻게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지, 당신의 존재가 하나님을 아는 확실하고 분명한 방편임을 증명해 주십시오라고 할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31~32)
A.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31; 요 8:13~16)
31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겸손의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진리이시기에 주님이 주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합당하며 참된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 말슴의 의미는 요한복음 8:13~16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증거하셔도 그 증거가 참되지만,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를 떠나서 주님이 스스로 독자적인 증거를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들로서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고, 한 순간이라도 아버지와 떠나서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당신 자신을 증거하는 일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 8:16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을 위하여 증거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데, 그분은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해주고 계시며 그 증거가 참되다는 것입니다(32).
B. 증거의 내용은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증명하고자 하시는 것은 주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다하는 주님의 신성이 아닙니다.
주님이 증명하려고 하시는 것은 주님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드러내셔야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으며 하실 사명이 있으시고 그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주님은 당신의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는데 힘을 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시려고 했다면 공생애 초기에 금식하셨을 때 마귀의 요구대로 돌로 떡을 만드셨을 것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기적을 보여주어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종종 우리의 자존심과 신앙이 섞여서 내가 뭘 증명하려고 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신앙은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이렇게 잘 됐다’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내게 살게 하신 삶을 삶으로써 나를 보내신 분이 계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보다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신앙을 이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지신 관심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이며, 보냄을 받아 할 일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C. 증거의 방법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증거하십니다. 그 증거의 방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 둘째는 주님이 하시는 일, 세째는 성경, 구약성경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i. 선지자의 말: 세례 요한의 증거(33~35)
지금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내서 ‘네가 누구냐’고 물었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요 1:19). 그때 요한은 진리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그 진리는 바로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례 요한의 증거를 붙잡거나 의지하지는 않으셨습니다(34).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례 요한을 통해서 증거하시는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증거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34).
믿음은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들음으로써 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요한의 제자 중 요한과 안드레는 그렇게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었습니다(35). 그는 빛 자체는 아니었지만, 그 빛을 받아서 비추는 등불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잠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즉 요한이 메시야를 증거했을 때 사람들은 그 메시야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줄 자라는 기대를 가지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습니다.
35절에 ‘일시’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믿음, 참 믿음은 결코 일시적으로 교회에 나오거나, 일시적으로 헌신을 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임을 성경은 일관성있게 가르치고 있고 여기서도 이런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주님께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자, 그들은 곧 다 떠나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교회에 들어옵니다. 그때 다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습니다. 교회가 그들의 기대에 미치는 메시지를 전하고 가르칠 때 그들은 일시적으로 즐겁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복음이 자기 부인과 십자가짐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교회에 머물기를 원치 않거나 아니면 자기의 기분을 좋게 해줄 수 있는 메시지를 찾아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메시지를 찾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듣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것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의 증거가 아버지께로서 온 증거임을 말씀하시지만, 이보다 더 큰 증거를 두번째로 이야기하십니다.
ii. 행동화된 말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사 하게 하신 일/표적(36)
보다 큰 증거로 두번째 증거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6).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되는대로 하신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의도된 행동들이었고, 그 자체가 행위로서의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하시는 일은 곧 행동화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입니다. 뭔가 실재를 가리키는 표시입니다. 그 실재란 바로 주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주님은 첫 표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참된 기쁨을 가져다 주시는 것이 메시야의 사역의 본질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주님은 죄와 질병을 고쳐주시는 분이심을 보이셨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38년된 소망없는 병자를 고침으로써 우리가 영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를 주권적으로 찾아와서 구원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일은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써 우리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해주신 사건입니다.
소경으로 난 자를 고쳐 보게 해주신 사건은 세상의 빛으로 오사 영적으로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님을 보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이신 주님께서 결국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기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 모든 표적은 하나같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싸인(sign)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표적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표적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 자체는 그 일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단도 이런 일을 행할 수 있고 또 행합니다.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기적과 표적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표적은 주님이 누구신지 그 본질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기적이 반드시 믿음을 자동적으로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표적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표적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분별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믿음은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를 아버지의 증거로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최정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거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iii. 기록된 말씀: 성경(37~39)
그 최종적이고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하나님의 증거는 바로 성경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성경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은 37절부터 마지막 47절까지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가리켜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37).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듣던 유대인들은 물론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저 자를 위하여 친히 증거하셨다는 말인가? 우리 중에 누가 그 소리를 들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십니다(37).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고 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선지서들입니다. 문제는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38).
그분이 보내신 자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은 동일한 것이며, 구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왜 중요합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증거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증거입니다.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오류가 없게 쓰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친히 하신 증거라고 하시는 근거입니다. 주님은 39절에서 성경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특히 여기서 가리키는 구약성경은 일관성있게 그리스도 자신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리키는 목적을 수행합니다. 이것을 간파한 마르틴 루터는 모든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헛되게 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도, 잠언도, 구약 역사서도, 선지서도 다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기 위해서 쓰여진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하신다면 기적을 구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여러분이 존경하는 사람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결코 여러분의 인생을 걸만한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게 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확신은 점점 더 견고하게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면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그 구속사역의 모든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성경을 떠나서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으며, 물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벤허의 작가인 루 월리스(Lew Wallace)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는 맹목적인 사람들을 깨우치고, 예수라는 인물의 허구성을 파헤치기 위하여, 또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반대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검증하기 위하여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2년 간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2년간의 성경 연구와 검증을 마친 끝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승리를 찬송하는 “벤허”라는 작품을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아 영생을 얻고, 여러분의 믿음이 견고하게 성장해가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열고 거기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증거인 성경을 열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실 때, 여러분은 말할 수 없이 견고한 믿음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핑계는 없다!(롬 1:20)
오늘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제시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증거를 주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창조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여러분은 그때 이렇게 말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증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더욱 알아가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한 증거 /요5:30-47
2012-07-20 15:44:04
존 스토트는 영국 여왕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는 대관식이 행해지기 바로 직전, 즉 여왕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기 바로 직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당 안에서 동, 서, 남, 북 각 방향의 청중들을 향하여 네 번 소리를 지릅니다.
‘귀빈 여러분, 저는 이분이 틀림없는 영국 여왕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대주교가 물을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안에 모인 청중들이 큰 소리로 승인의 대답을 네 번 해야만 비로소 왕관이 여왕의 머리에 씌워집니다.”
스토트씨는 말을 계속 잇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도 오늘 여러분들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심을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 분께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모든 사람이 필히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그뿐 아니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였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됩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니 그 남은 사람들이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였습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이 군병들이야 말로 참된 증인이었던 셈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언하는 이가 여럿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요한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을 찾아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시므로 그 일이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으로 매듭을 짓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그 날에 일을 하라고 하셨는데 너희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논쟁의 불씨가 어디로 퍼지느냐 하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즉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 하는 말로 인해 이제는 신성모독죄로 비약됩니다. 그렇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으로 주제를 바꾸어 버리십니다. 나는 어떤 것이라도 나 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셨고 시키는 일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결국 그 논쟁은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신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싸움으로 이제 옮겨갑니다. 그 결과 나중에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 즉 인간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겼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논쟁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뒤에 가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이야기를, 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이야기를 진전시키십니다.
문제의 초점은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자이냐 하는 것입니다.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 때문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라면 감히 어떻게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느냐?’고 비난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 당시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없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고유 성함이 여호와라고 밝혀진 것은 요즈음에 와서입니다. 사실은 여호와라는 이름도 정확한지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성경에 하나님이란 단어를 기록할 때마다 모음만 쓰고 자음은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뜻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경을 기록하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말씀을 쓰던 서기관들이 쓰던 붓을 물에 빨아서 다시 썼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기만 하면 꼭 그렇게 해야만 했고 성경을 읽다가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여호와라고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또는 ‘나의 주’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웃어른들의 성함이나 부모님의 성함을 남에게 대야 하거나 불러야 할 때는 ‘김 0자 0자’라고 쓰고 부릅니다. 만일 누굽니다라고 가볍게 함자를 댔다가는 예의가 없는 자라고 멸시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별짓는 이스라엘의 관습 아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도나이’로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유대인들의 충격은 이만 저만 큰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말을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하라 명하신 것만을 한다’ 그가 나를 보내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공격을 받고 계십니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보내신 자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지금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여기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시킨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의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설득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감언이설로 자신을 증명하거나, 우리를 감동시키거나, 우리를 놀라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못 알아먹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최후의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최후의 방법이 바로 나의 죄 값을 위하여 대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세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마지막까지 이를 위해 사셨고 이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이 증거한 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보라 우리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내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을 우리가 기쁨으로 따르며 우리 역시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신 모든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귀한 사역에 함께 동참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하늘 아버지의 증거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여기서 역사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증거 하시거나 과시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증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까? 그것은 그가 죽으심으로 인해 중생하게 된 자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나중에 이해하고 알게 하려고 미리 해 놓으신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은 제자들에게까지도 이해가 다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잡혀가시자 도망가 버렸던 것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시고 장사 지낸 바 되자 제자들은 모두 고기 잡으러 가버렸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열 두 제자들 앞에 차례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돌아온 시점에서 거꾸로 풀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 그때 그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렇게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 깨닫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을 증명하라는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내가 누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제한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포기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공격하는 자들을 무색하게 만들거나, 심판하거나, ‘그래, 그것 봐라!’ 하는 식의 싸움을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고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됨과 신자의 신자 됨의 표지가 무엇이냐 하면 곧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한을 품고 죽은 자는 아닙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들의 이와 같은 이 세상을 사는 목적과 원리를 아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원리를 아는 세상 사람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가면서 기도하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졸며 자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일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그것을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눈이 뜨여졌고 우리의 눈도 뜨여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압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때에 그가 가진 권위, 권세, 그리고 이루어야 할 일 중에서 그는 권세와 권위를 내려놓고 오신 분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시고 종의 형체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그 일을 이루러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요, 목표요,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이라는 간단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시작이라는 말 자체는 쉬운 단어입니다. 뭔가 시작됐다는 말이야 쉬운 말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슨 좋은 소식입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좋은 소식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단순히 순종한다는 그것만 가지고 구원받을 수가 없고 우리는 언제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중심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신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다.
많은 유대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면 이방 사람들이 자기 땅을 점령하여 통치하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자기들을 해방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메시야로 오시되 우리들을 영원히 묶어 매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앞부분은 시편 2편 7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편은 대관식의 시편 즉 왕으로 즉위하는 자에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자와 같이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분에 대해서 찬양을 드리는 내용으로 꽉 차 있는 시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에 앉으사 왕관을 쓰실 왕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뒷부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은 그가 오시되 어떠한 왕으로 오시느냐를 설명해 주는 말씀인데 이것은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지만 또한 아울러서 종이 되신다고 하는 예언적인 뜻을 담은 위대한 예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이러한 구주가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구주는 빨리 없애야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가 왕이 되려고 하고 대접받기를 원하지만 섬기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어려움 당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증언하신 것은 왕이지만 오히려 종처럼 섬기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요 예수님은 이 하늘의 소리처럼 철저히 섬기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기까지 마지막 피한방울까지도 다 내어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죄에 속박과 사망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된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속의 은총을 얻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자가 되었음을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요 따라서 비판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용서하고 용납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자신을 낮추고 먼서 섬기기를 기뻐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증거입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오직 주님의 관심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누구나가 영생을 얻기를 원합니다. 천국은 다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예수를 믿는 그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러냐고 항변까지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도 지키고 십일조도 드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더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였더라면 너희가 나를 영접하였을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어도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고자 하여 성경을 열심히 연구도 하고 읽기도 하는데 깨닫지를 못하는 그 이유가 어디 있냐 하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들 역시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를 우리가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의 주가 되신 주님이 사셨던 바로 그 모습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거듭거듭 말씀하시기를 대접을 받고 싶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라 하셨고 너희가 살고자 하면 먼저 죽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욕되게 한다고 흥분하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고 싫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냐고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셨던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내 안에 자랑할 것은 오직 한 가지 십자가의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주님 말씀하셨는데 과연 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라 고백하던 바울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근본 죄 가운데 태어난 죄인이로되 이제 모든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넘어지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인자한 손길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 안에서 함께 교제하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를 내려놓는 종의 삶, 비움의 도리를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약 당신이 재난의 한 가운데 처해 있다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죤 하퍼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퍼는 스코틀랜드의 목사였는데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에서 3개월 동안 설교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빙산에 부딪쳐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승객 중 얼마는 구명정에 옮겨 탈 수 있었지만 하퍼 목사님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차가운 대서양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물에 떠 있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그 시간에 하퍼 목사님은 주위를 헤엄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하퍼 목사는 부서진 나무 조각 하나에 매달려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예수를 믿으라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기 바로 전 하퍼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4년이 지나 그 여객선, 곧 타이타닉 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한 모임에서 그 남자는 자기가 그날 밤 두 번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하퍼 목사님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혹한의 바다에서 구조된 것이었습니다.
하퍼 목사님이 죽으면서 간절히 소원했던 것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소원을 가지고 삽니까? 우리는 위기에 처할 때나 편안할 때나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그 분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서 살고 있습니까? 하퍼 목사님이 마지막 순간에도 전도를 한 모습은 자신의 죄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오늘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아름다운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요5:31-39
2008-03-15 01:27:11
암행어사는 평소에는 자기 신분을 감추고 평민처럼 복장을 하고 다니다가 필요한 때에만 소위 '암행어사 출도'를 선언했는데 그럴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마패였습니다.
원래 암행어사에게는 임금이 내려주는 봉서(封書)가 그 신분을 증명해주는 문서였지만, 역마(驛馬)를 빌려 쓸 수 있도록 의정부에서 지급해주는 마패가 더 실용적인 신분증 역할을 했습니다.
평민들은 알아보지도 못할 한문으로 된 문서를 펼치는 것보다는 주로 세 마리의 말들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던 마패를 사람들의 눈앞에 들이대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자기 신분을 어필(appeal)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그 마패를 관리들이나 백성들 앞에 제시를 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특별히 임명받은 어사임이 분명해지고 그 신분에 따른 권한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암행어사 출도 정도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자기 선언'을 하신 분이셨습니다.
바로 본문 앞의 17절 이하에서 보았던 대로, 당신은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또한 장차 다시 오실 심판주라고 밝히셨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스스로 주장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인데, 모든 사람에 대한 영생구원과 영벌저주의 전권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성자라고 하시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자 그대로 경천동지하지 않을 수 없는 출현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엄청난 신분을 선포하셨는데 과연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제시해주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과연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귀하고도 특별한 신분에 대하여 친히 보여주시는 두 가지 증거, 주관적인 증거 하나와 객관적인 증거 하나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에 대한 주관적인 증거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31절과 3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31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말씀 중에 '참되지 아니한' 것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절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법적 원칙과 법정에서의 관례를 뜻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랍비들도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 수는 없다."라고 못 박고 있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증인이 되는 '자증'은 인간사회의 그 어떤 법정에서도 통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라고 하신 것인데, 문제는 이 '증거하시는 이'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신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자는 이 증인이 바로 그 다음 절에 나오는 세례요한을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에 대한 아주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증거, 누구 앞에서나 "참인 줄" 알 수 있게 해주는 증거를 제시하려 하시는데, 그것을 세례요한이라는 한 사람의 증언에 의지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조금 뒤 34절에서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도 더욱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이 '증거하시는 이'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증거는 성자의 자증이 아닌 만큼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유일하게 유력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같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성부 하나님의 증거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졌습니까?
우선 36절에 보면 "36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 즉 예수님께서 제시하실 수 있는 최고의 증거, 곧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첫째가 바로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게 하시는 역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하여 나타난 복음사역 그 자체가 바로 최고의 증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조금만 눈여겨 살펴보면 정말 비범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소위 '4대 성자'라고 불리는 다른 세 사람들과도 사실상 필적될 수 없는, 도무지 비교의 상대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묘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예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행적 하나하나가 바로 기적보다 더 위대한 사건들로서, 그 자체가 예수님은 실로 '화육강생하신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목도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증거, 그러면서도 이 성자의 화육강생과 직결되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이어지는 37절부터 39절에서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린 성부의 음성을 가리키신 것일 수도 있고, 또 나중에 변화산상에서의 소리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성부의 증거는 바로 성경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까지는 아직 구약성경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사람은 "아무 때에도 그 음성" 즉 하나님의 육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 즉 하나님의 모양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말씀"인데, 그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셔서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하는 마음으로는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을 상고"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구약 구석구석을 뒤져 읽으면서, 각 권마다 몇 절, 몇 개의 단어들, 그리고 몇 글자까지 있는지를 꼼꼼히 세어보았습니다.
구약의 어떤 절에 히브리어 알파벳 전체가 다 들어있는지, 각 권의 제일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절이 무엇인지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읽던 성경의 주제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구약성경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의 기록목적이 '영생을 얻게 해주는 것'인 줄은 바로 파악하고서 열심히 그것을 상고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생을 얻는 길이 자질구레한 율법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야말로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가운데 헛수고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경의 '숲'을 바로 볼 줄 아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 성경 말씀이야말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에 관해서 내려주시는 최고의 증거인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자증'도 통하지 않지만 또한 사실 '직계가족의 증언'도 채택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도로공사 현장을 지나가다가 위반딱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이미 5시 이후였고 비록 공사차량은 있었지만 인부들도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공사표지판이 꺼져 있었기 때문에 다들 퇴근한 줄로 여기고 평소의 속도로 지나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량 뒤에 모여 앉아 있던 인부들이 제 차가 공사현장을 지나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고 신고를 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 제 집을 찾아온 경찰관에게 저는 분명히 공사표지판 등이 꺼져 있었고 제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제 아들도 곁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주었지만, 그 증언이 법정에 가서는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을 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냥 벌금을 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제 아들의 증언을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증언 자체는 어디까지나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직계가족의 증언이라고 해서 못 믿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사정이고 판사의 불신앙(?)일 뿐이지, 제 아들의 증언이야말로 제게 있어서는 가장 틀림없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성자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외에 누가 더 잘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직계가족의 증언을 못 믿는 것은 바로 못 믿는 쪽의 불신앙 때문일 뿐이지, 아무리 친한 이웃이라 해도 자기 친아들보다 더 좋은 증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의 과학이, 인생의 체험이, 성자의 수도(修道)가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예수님을 잘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사실상 사람 편에서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증인도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자기의 결백이나 진실을 증언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면서'(As God is my witness), 자기의 양심선언을 증거해줄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다 아시는 분이시며 완전무결하게 진실하신 증인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할 때에는 왜 하나님은 안 되고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왜 성부께서 성자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불충분하고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무슨 인격자나 지식인이나 종교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법정에서 개나 고양이가 사람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없듯이 열등한 존재가 자기보다 우수한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신분을 뒷받침해주는 증인이 될 수는 결코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을 증거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에 대하여 친히 '증거하시는 성경' 이것만이 최고의 증거물일 따름입니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진실하신 증거인 동시에, 수십 명의 선지와 사도의 증언, 즉 법이 요구하는 2명을 훨씬 초과하는 충분한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 믿어진다는 사람은 일단 성경부터 제대로 정독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저 '믿음 주옵소서'하고 기도만 드린다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에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없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11장에도 꼭 같은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라고 번역된 부분은 원래 'Jesus loves me this I know for the Bible tells me so.'라는 가사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날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을 나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알아요.'라는 뜻인데, 너무 길어서 음표에 맞출 수 없어서 그냥 '거룩하신 말일세'라고 줄여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후렴에 가서는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라고 원가사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단 성경이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을 알게 되고나면 그 '완전한 인간'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대로'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위하여 증거하신' 참 증거이며 최고의 증거인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됨으로써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다시 오실 심판주로,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전도자들이 외치는 증언입니다.
본문 33절부터 3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주고 계시는데, 말씀하시기를 "33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34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5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고 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요한에게 찾아가서 그의 정체를 물었을 때, 요한은 그 대답의 결론에서 자기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했는데(요 1:19-28),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내가 곧 진리요"(요 14:6)라고, 또는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고 하셨으니, 세례요한이 증거한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등불은 일단 그 자체가 '켜져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비취는' 조명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바로 세례요한 자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깨닫는 불이 켜졌으며 그 빛은 그의 증언을 통하여 절로 사람들에게 비취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된 사람에게서는 절로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삼일만 공부를 하고 나와도 그 무언가 달라진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된 신자라면 불신자의 눈에 얼마나 뚜렷하게 돋보이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증거와 비교해볼 때에는 도저히 상대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라 할지라도 그 점에 있어서는 오십보백보입니다.
바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대로, 세례요한이 아무리 열심히 진리에 대하여 증거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증거인 성경에 견줄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설명조차 필요없는 일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세례요한의 증거는 사실상 그리 큰 실제적 효과도 발생시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을" 뿐이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였습니다.
대중들은 그 동안 바리새인들의 지긋지긋한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지쳐 있었던 까닭에 세례요한의 설교를 일시적으로는 즐겨 들었지만, 그 요한의 전도의 핵심, 즉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메시아 되신다는 진리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증거한 '빛'은 그저 세례요한 자신의 제자들 몇 명만 끝까지 따라갔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굳이 언급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의 증거가 필요 없다.'고 바로 앞에 말씀해 놓으셨으면서도 곧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례요한의 증거를 여기서 언급하는 까닭은 그것이 너희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해주는 증언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또 한 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성부 하나님의 증거와는 결코 견줄 수 없는, 또 성자 예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도 않는, 게다가 사람들에게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도 못했던 세례요한의 증거를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그의 증거는 만약 사람들이 듣고 받아들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것이었다.'라고 인정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요한의 증거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대에 예수님에 대하여 그렇게 증거한 사람은 세례요한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대중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이나 얻어먹고 병이나 고침 받기를 바랬을 뿐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철도 들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가족들조차 그저 예수님이 미쳤다고만 여기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아무도 그를 영접해주기는커녕 인정조차 해주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세례요한이 왔던 것입니다.
그 세례요한을 가리켜 요한복음 1장 7절에 "저는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존재 목적이 '예수 증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대속의 희생제물 어린 양이 되실 메시아'라고 증거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것은 실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와 같이 혼자서만 지르는 고독한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그 소리는 우리 예수님에게는 더욱 귀중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도 자기를 믿지 않을 때 자기를 믿어줄 뿐 아니라 남들 앞에서 증거까지 해주는 사람, 얼마나 반가운 사람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오해할 때,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정말 진실한 사람입니다."라고 용기 있게 외쳐주는 사람,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겠습니까?
그것도 온 힘을 다하여, 끝내 목숨까지 바치면서 증거해준다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아무리 무식자라 할지라도 신자가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다,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외치는 증거는 최고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 자신이 곧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득도나 논리 때문에 우리의 전도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도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이미 요지부동의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 누가 전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전도는 다 '참된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도는 아무리 미련하게 보이고 어설프기까지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놀라운 증언입니다.
사람이 입 밖에 내어놓을 수 있는 말 중에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 대신에 천당 가게 만들어줄 수 있는 말은 전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혹 우리의 그런 증언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증인이 되어주는 그 자체만 가지고도 우리를 지극히 귀히 여겨주십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죄인이 감히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법정에서도 신빙성 있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 자격과 사회적인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세금도 잘 내고 이웃사람들에게 평판도 좋고 무엇보다도 범법행위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증인이라는 사람이 너무 수준이 낮고 신용도가 없으면 그 증언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증언 받는 쪽에서 먼저 거부할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같은, 수준에 있어서나 자격에 있어서나 미달 되어도 한참 미달인 우리들의 증언을 기쁘시게 받아주고 계십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받아주지도 않고 세상의 지식인들과 현대인들은 결코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 먼저 '등불처럼 켜진' 이 예수님이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비취는 빛'이시라고 우리가 높이 들면,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저와 여러분만이야말로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참된 증인이라고 인정해주십니다.
우리가 전도하면서도 '천사 같이 말 못하고' 말을 더듬고, 그렇게 서투르게 전도하는 까닭에 '바울 같이' 많은 해산신자도 낳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로 하여금 먼저 믿게 해주신 '예수께서 구속함을 힘을 다해 전하기만 하면,'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우리 주님께서 지극히 귀중한 소수라고 아껴주시고 별과 같이 최고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바로 믿게 된 신자라면 어찌 이런 귀한 사명을 위하여 불러주실 때 '힘이 없어 못한다고 핑계할 수' 있겠습니까?
성자에 대하여 성부께서 성경을 통하여 친히 증거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죄인 중에도 괴수된 자'를 부르셔서 그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 세워주시는 이 과분한 소명 앞에 '나를 보내소서'라고 즉시 순종하고 그 사명을 '항상 기뻐하며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증거를 본 사람만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처럼 증거를 먼저 본 사람은 증인이 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암행어사는 출도를 외치기 전에 먼저 역참(驛站)에서 자기의 마패를 보여주고 역졸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관가에 가게 되면 그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외치는 것은 암행어사가 아니라 바로 그 역졸들이었습니다.
자기네들은 암행어사가 아닌 것은 물론이요 그저 최말단 공무원에 불과하면서도 기분은 그네들이 다 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분을 누가 말릴 수 있었겠습니까?
암행어사의 마패를 먼저 보고 그 암행어사를 수행하면서 그 암행어사의 신분을 제일 먼저 외치게 되었는데, 그 신나는 선포를 누가 감히 막겠으며 그 있는 힘 다 내어서 지르는 소리를 설사 암행어사 본인이라 할지라도 "야, 그 소리 너무 크다. 좀 작게 해라."고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시며 장차 오실 심판주이심을 먼저 알게 된 신자의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 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 이 기분을 도대체 누가 말릴 수 있으며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동의 영원한 증거이며, 신자는 그 증거를 먼저 받고 현존하는 세상의 사람들을 향하여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현실적인 증인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증거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먼저 받은 '비취는 등불'이 되어서, 아직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 악한 세대를 향하여 비록 외롭더라도 그 주님을 소리 높여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문 모음 > 요한복음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6장 22절 이하 설교 모음 (0) | 2023.05.22 |
---|---|
요한복음 6:1 - 15 설교 모음 (오병이어) (0) | 2023.05.08 |
요한복음 5장 19절 - 29절 설교 모음 (1) | 2023.04.10 |
요한복음 16장 20절 - 24절 설교 모음 (1) | 2023.03.29 |
요한복음 4장 46절 - 54절 설교 모음 (1) | 2023.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