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요5:19-29/ 하용조 목사
2015-05-27 23:30:58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능력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아주 특별한 주제로 반복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고소 사건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때문입니다. “참람하도다.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 일치와 투명성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강조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관계’라고 설명하십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하시는 게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가 완전히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일치와 투명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숨기는 게 없는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뜻이 아들에게 전달돼 그대로 진행되는 관계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하시는 것을 행한다’라는 말이 얼른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 뜻에 맞게 사는 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사춘기를 거치면서 아버지가 하는 것마다 반대하는 게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상처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자상’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반항하고 거부하며 아버지의 가슴에 못 박는 불행한 관계로 발전한 것입니다.
오늘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경제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용돈, 학비, 생활비를 주니까 그나마 연결돼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유산일 뿐입니다. 어떤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내 놓으라고 조릅니다. 그런 아들이 성경에 나오는 둘째 아들 탕자입니다.
유산이란 아버지가 소천한 다음에 갖는 것이 원칙인데 미리 빼앗아 갑니다. 그 재물을 마음대로 사용한 것을 가리켜 성경에서 탕자라고 합니다. 불행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 대해 사랑 대신 미움, 축복 대신 저주를 품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는 아버지라도 집나간 아들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이 우리 시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기쁨,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대화가 단절됩니다. 대화가 없으면 만남이 없습니다. 만남이 없으면 관계가 끊어집니다. 이런 불행이 아버지가 병들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을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
예수님의 경우에서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보고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다르듯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특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언어, 생각, 감정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과 자신이 일치했음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의 의식에는 순수하게 아버지의 뜻이 있었습니다. 나의 생각, 말, 감정이 예수님의 것과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간은 언제나 반항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거절하는 본성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마음의 상처는 거절당하는 데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배척하고 용납하지 않으면 감당을 못합니다. 미움과 분노(anger)가 생깁니다.
여기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반항하는 체질’이 없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분노하는 체질’이 없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상처로 생긴 모든 것들이 녹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미움보다 크고, 포기가 소유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변화되듯, 스스로 자신을 바꿀 때 주변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21~22절에서 한 가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맞춰 목사, 성도들의 비전이 동일해야 합니다. 같은 꿈, 생각, 행동…. 1백 명이 모여 싸우면 1만 명같이 여겨지고, 1만 명이 모여 한마음이 되면 하나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 수가 아무리 많아도 갈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이 같으니까 복잡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부부 사이도 복잡해집니다. 부자나 형제간에도 복잡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투명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숨기는 게 없으십니다. 투명성은 곧 믿음을 주게 됩니다. 일치와 투명성은 축복을 줍니다.
둘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부활’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부활의 능력’ 이양 관계
하나님 아버지의 매우 독특한 모습이 있습니다. 아들이 등장하면 아버지는 역할을 끝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아들이 등장해도 아버지가 계속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후계자가 전승되지 않는 게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전임자는 후임자에게 맡기고 물러나야 하는데, 계속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부활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백세 때 의학적, 물리적으로 더 이상 임신할 능력이 없는 사라에게 아이를 잉태하게 합니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19~20). 부활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기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요, 부활이요,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인해 불가능에서 생명을 얻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내놓으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부활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절망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활하니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아들에게 칼을 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하나님은 모든 부활의 권위와 능력을 예수님께 이양하셨습니다.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겁니다.
신뢰 관계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뒤에서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맡긴 후 원격 조종합니다. 대리인을 내세워 조종하기도 합니다. 그런 방법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을 모두 예수님께 이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부활의 능력을 이양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부활과 기적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고 예수님 안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의 부활과 기적의 능력을 동일하게 체험합니다.
◆ 심판의 권리 이양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일치와 투명성’, ‘부활 능력의 이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예수님께 부활의 능력과 동시에 ‘심판의 권리’도 이양하셨습니다. 22,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죄악, 불의한 자들, 불순종의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바벨탑, 노아 홍수, 소돔과 고모라 등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죽이기도 하고 포로로 잡혀가게도 하셨습니다.
전염병으로 죽이기도 하고 이방인의 칼에 죽게 하며 온 나라를 뒤집어 놓기도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어지듯 날려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던 심판을 예수님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것을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하나님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하나님의 모든 심판 기능이 예수님에게 갔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물리적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심판은 구원론적입니다. 우리가 일대일 하면서 열심히 외우는 성경 말씀 24절도 이 뜻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다른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내 말씀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신들이 있습니다. 알라, 부처 등이 있고, 일본에는 8백만 개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됨의 축복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범신론을 믿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얼굴을 찡그립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사실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또 다른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어서 26~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자주 하셨을까요? 구원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심판의 기준도 예수님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아들의 영광이고, 아버지의 존경은 아들의 존경으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나와 네가 하나되기를 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 감정, 의지, 비전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너는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들이 사랑과 용서로 투명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하나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 되었을 때 기쁨, 감동, 축복이 어떤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요5:19-29/ 영생의 축복 /한경직 목사
2014-08-25 16:20:58
이미 읽음 말씀 가운데서 24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에서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곧 영생을 얻었고” 곧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심판에, 곧 정죄함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믿는 자는 사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인데, 거기에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오는 축복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믿을 때 우리 마음 속에 평화의 축복을 또한 받습니다. 마음이 평안하여집니다.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는 이들도 많습니다. 누구나 믿음으로 건강의 축복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사업을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가정의 축복, 사회의 축복, 온 국가의 축복을 또한 받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축복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영생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이 모든 축복을 통합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영생의 축복을 받습니다.
‘영생’이란 말은 글자 뜻대로 길이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생이란 말은 참된 삶, 곧 ‘하나님의 삶’이란 뜻이 있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으므로 죄 사함을 받고, 이 하나님의 삶, 온전한 삶, 영원 불멸의 삶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영생의 축복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자 합니다. 영생을 생각할 때에는 자연히 내세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내세를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 나라, 혹은 천당을 또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육신 생명은 제한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은 이 영생은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갑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는 감사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막연한 생각이 스며들기 쉽습니다. 이 시간 특별히 이러한 점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성의 견지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여 보세요.
이성이란 우리 인간이 누구나 생각하는 힘이 있어요.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생각하는 힘, 이성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속을 살필 때에 여러 가지 생각, 혹은 의식의 흐름이 있지만, 또 한 가지 분명히 깨닫는 것은 이 의식의 흐름을 지도하는 무엇이 있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합당치 아니하니 버려라,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좋은 생각을 하여라 지도하는, 우리의 의식을 지도하는 무엇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다 체험합니다.
그러면 이 우리의 의식을 지도하는 무엇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을 흔히 심리학자들은 ‘자아’ 혹은 영어, 본래 헬라말로 ‘이고(ego)’라는 말로 씁니다. 우리 인간의 속에는 ‘이고’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지도합니다. 그건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하면 우리 속에서 우리의 생각을 지도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죽을 때 이 영혼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물론자들은 물론 아주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육신을 구성하였던 물질도 죽을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변화를 일으키는 것뿐입니다.
모든 물질은 간단(間斷 끊임)없이 변화를 합니다. 물리적 혹은 화학적 변화는 일으키지만, 물질 자체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끓이면 수증기로 변합니다. 그러나 물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촛불을 오래 켜면 혼자 없어지는 것 같지만, 초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초 속에 있던 탄소가 공기 속의 산소와 합하여 탄산가스로 변하는데 탄산가스는 기체이니까 공기 속에 사라지는 것 같지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물질 불멸론이라고 합니다. ‘물질은 간단없이 형태는 변하지만 물질 자체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다는 것’이이 이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육체를 구성했던 물질도 죽은 후에 그냥 남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변합니다. 썩어진다는 말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을 구성하였던 물질 자체도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 있을 때 사지백체를 마음대로 사용하던 영혼만은 아주 없어지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영혼은 그냥 남아 있습니다. 이성으로 이런 문제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 욕망과 본능을 분명히 갖고 있는데, 이 우주 안에는 그것들을 충족할 만한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식욕이 있는 곳에 먹을 것이 있습니다. 애욕이 있는 곳에 사랑할 이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원하는 성품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충족시킬 만한 아름다운 경치,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심령의 깊은 곳에는 또한 영생에 대한 욕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명한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한 시구와 같이, “그는, 인간은 아주 없어지려고 지음을 받은 줄 생각지 않는다.”는 이 영생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에 대하여만 대상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이성으로 생각하여 보세요. 사후에도 생명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양심이 있습니다. 이 양심은 우리에게 선과 악을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선을 행하면 상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보응(因果報應)의 원칙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되는 일을 보면, 이 원칙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핍박합니다. 악한 공산당들이 믿는 사람들, 죄 없는 사람을 핍박하고, 때로는 죽입니다. 순교자들이 이 땅에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과응보의 원칙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내세에 가서 완성됩니다. 인간은 그 삶이 현세에 끝나지 아니하고, 내세에까지 미치므로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형벌이 옵니다. 양심으로 생각할 때에도 영생과 내세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모든 진리를 분명히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지 아니하였습니까? 성경에서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린도후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엄숙한 사실을 들어보세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0장 12절로 15절까지 읽어 보세요. 가장 신임할 만한 책, 오직 하나인 책 성경은 분명히 영혼의 불멸과 내세와 최후 심판을 가르쳐 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몇 번이나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으로만 가르치지 아니하시고, 그 자신이 친히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또 그 후에 승천하심으로써 사후에 생명과 내세와 영원한 천당이 있음을 분명히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지난 주일에 지킨 부활절은 이 모든 사실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옛날 야곱이 당하였던 일을 회상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아서 얻은, 특별히 총애하던 요셉을 잃었습니다. 악한 아들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처음에는 죽이려 하다가 그 후에는 멀리 애굽으로 돈 받고 종으로 팔아먹은 후에, 요셉의 채색 옷을 양의 피로 적셔가지고 늙은 아버지께 그것을 보이면서 요셉이 필연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거짓말로 속이지 않았습니까? 늙은 야곱은 그 말을 듣고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흐르고 흘러 야곱은 더욱 늙어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큰 흉년으로 곡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갔던 아들들이 돌아와 이상한 말을 전하였습니다. 곧 요셉이 애굽에 살아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늙은 야곱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멀리 바라보니 황금마차가 자기 집을 향하여 오는데, 아들들의 말이, 이 마차는 요셉이 애굽에 살아 있어서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보낸 마차이니 어서 타고 가자고 재촉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야곱이 황금마차를 타고 가서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애굽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저는 본 교회 주보를 매주일 보는데, 매주 본교회 안에서 세상을 떠나는 교우들이 6, 7명, 때로는 10여 명에 미치는 보고를 보면서 조용히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는 귀한 아들을 혹은 딸을 먼저 보내고, 많은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적지 아니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이 엄숙한 사실을 아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앉은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영원한 하늘나라로부터 황금마차가 올 것입니다. 또 누구나 이 마차를 타고 하늘나라로 갈 것입니다. 가보면 놀랄만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먼저 아들을 잃고, 딸을 잃고,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많은 눈물을 흘렸으나 그때에는 모두 기쁨으로,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영생을 이미 얻었습니다. 이 영생은 죽음을 초월하여 계속됩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죽어도 삽니다. 영원히 삽니다. 죽음이란 먼저 가신 사랑하는 이들, 사랑하는 교우들과 다시 만나는 큰 기쁨의 기회도 될 것입니다. 영생은 확실합니다. 하늘나라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영생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권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생을 주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올 때마다 찬송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오나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삶 곧 영생을 주셔서 우리는 금생과 내생의 참된 삶을 얻게 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만입이 있어도 다 감사와 찬송을 드릴 길이 없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에게 이 시간 영생의 축복을 주시고 이 영생의 축복을 받아서 우리는 영원히 사는 삶을 금생과 내생에 가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복음 강해-28/ 여섯 번 이어지는 ‘진실로’ /요5:19-29
2020-01-21 10:49:38
지방에서 부교역자로 섬길 때에 청년부를 맡아 지도했습니다. 제가 20대 후반이었습니다. 청년들 중에 대덕 연구단지 내에 있는 원자력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이동일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나이가 서른 중반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미국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원자력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제가 섬기던 교회 청년부에 출석했습니다. 교회에서 제가 살던 집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그 분과 저는 저의 집까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과 나눈 대화 가운데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이해가 안 돼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겠어요”라는 말입니다. 그 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진심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성경을 읽으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읽으면 이동일 씨의 순수한 마음과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 가운데 하나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분의 정말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이 여섯 번이 나옵니다. 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아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짧은 말씀 안에 여섯 번이나 ‘진실로’를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낫게 했다는 이유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고 죽이려 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진실로 진실로’를 연이어 여섯 번이나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말을 듣고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아집과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진실로’를 여섯 번이나 이어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망의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당신의 죽으심의 희생을 통해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실로 진실로’에는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대상관계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분석이론에서 나온 한 이론입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만나,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의 성품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면서 좋은 대상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면 그가 긍정적인 성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쁜 대상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면 부정적인 성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식과 성공, 사회적인 지위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상관계이론이 다른 심리학과 차이가 있는 것은 내담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입니다. 일반 심리학은 그들의 내면의 정신세계를 분석하고 약물로, 또는 다양한 상담을 통해서 치료합니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좋은 관계의 모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나쁜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겪게 된 상처들을 이해해 주면서 좋은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서 나쁜 대상과의 관계에서 가졌던 상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나쁜 관계에서 가졌던 상처를 가지고 부정적으로만 바라봤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좋은 대상을 통해 나쁜 대상으로부터 받는 상처의 세계를 조금씩 벗어 던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짧은 기간에 치료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짧게는 수개 월,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느냐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2000년 5월에 과천에서 고려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청년이 부모를 살해해 시신을 토막 내 유기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온 사회가 충격에 빠졌었습니다. 가정은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 장로이고, 어머니는 권사였습니다. 그 청년이 지금도 무기수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을 만나 상담을 했던 분이 그 사건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 마지막에 ‘은석이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사건이 외국에서 일어났다면 사형선고가 아닌 무죄를 선고받고 도리어 정신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라고 썼습니다. 그 사건이 조사 중일 때 그 청년의 형이 조사에 임하면서 자신은 동생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부모로부터 억압과 수모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은석이 청년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대통령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하자 이대 정치외교학과를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를 찾아서 결혼했습니다. 군인이 대통령을 이어받는 세상에 살다보니 군인으로서 능력을 인정받는 미래가 촉망한 군인 장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남편의 승진이 어느 순간부터 이뤄지지 않습니다. 남편과 사이가 틀어지며 불화가 잦아졌습니다. 남편에게서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는 자녀들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집착해 자녀들을 다그치며 교육시켰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무능한 자식이라고 질타하며 무시했습니다. 부모의 잘못된 욕심이 아이들의 마음을 병들게 했습니다. 고려대학이라는 명문 대학을 다니면서도 항상 불안과 열등감에 쌓여 살았습니다. 그것이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청년의 악한 행동은 사실은 잘못된 부모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가해지이면서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진실로 진실로’를 말씀하면서 그들의 영생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가장 좋은 대상으로서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대상관계이론에서 말하는 나쁜 대상과의 만남에서 갖게 된 부정적인 성품을 좋은 대상을 만남으로서 긍정적인 성품으로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단의 종이 되어 살면서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부정적이고, 악한 속성을 닮아 살면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단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죄 값으로 지불하고 사단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종으로 살면서 몸에 배어 있는 사단의 악한 성품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며 새로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의 가장 귀한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데 있어서 우리를 지도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사단의 악한 성품이 순간순간 나올 때마다 우리를 품으시고 다독이시며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하고 닮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사단의 성품을 벗고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삶을 훈련하는 것이 바로 경건 훈련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성화의단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사단의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은총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을 성화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온전해지는 단계를 영화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38년 된 병자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낫게 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를 여섯 번이나 반복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친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부모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동행자가 되십니다. 무엇을 보고 배우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나쁜 대상을 닮아 가면 그 인생이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대상을 닮아 가면 좋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말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오늘도 나의 허물과 약함이 드러나면 감추고 변명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바로 그곳에 진정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집니다.
크로스웨이의 성경 공부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닮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계속 닮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예수님을 더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이렇게 변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계신 것처럼 우리 자신의 삶에 진정한 믿음의 복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가정이 변하게 됩니다. 내가 머무는 곳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진정한 복에 이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24절의 말씀을 함께 큰 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9절의 말씀도 함께 읽어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면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부활, 인류 최대의 사건 /요5:19-29
2020-04-27 08:56:11
1. 인류 역사를 바꾼 사건들
인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서양역사 구분에 따라 원시시대, 고대시대(B.C. 4000년 수메르 문명의 탄생~A.D.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중세시대(A.D.476~1453 동로마제국 멸망), 근대시대(A.D.1453~1914 1차대전 이전까지), 그리고 현대(1,2차대전부터 오늘까지)로 나누어집니다. 그 중에서 인류의 역사가 가장 많이 변한 때는 현대라고 하는데요. 역사를 바꾼 초대형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인류 역사를 바꾼 초대형 사건들은
첫째,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저격당한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는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역사 상 최악의 재앙을 만든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 28일),
세 번째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해군기지인 진주만을 공습한 사건으로서, 이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1989년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시작되어 점점 퍼져나가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무너지고, 또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로 재탄생되는 결과를 낳은 이른바 “동유럽혁명”입니다.
그런가 하면 전염병, 혹은 질병이 인류 역사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역병이 역사의 방향을 바꾼 최초의 기록은 주전 5세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네로와 안토니우스 때의 로마제국에서도 역병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페스트는 주후 540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서 시작되어 약 50년 간 지속된 것으로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페스트는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할 때 발생하여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인구의 4분의 3을 죽게 했습니다.
그 후에도 15세기에 7번, 16세기에 7번, 17세기에 8번, 18세기와 19세기에도 발생했으며, 1904년 인도에서는 페스트로 인하여 10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 외에도 나병, 결핵, 매독 등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질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바꿀만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고, 거기에는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대륙 할 것 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코로나19’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코로나19의 세계적인 현황을 보고 계신데요. 지난 10일 기준, 세계적으로 확진자는 160만 명, 사망자는 1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인 ‘유발 하라리’,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 하버드대의 ‘스티븐 월트’ 교수, 과학 저널리스트인 ’로리 개럿‘ 등 세계적인 석학들은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 사태 이후의 세계를 전망하면서 “앞으로 세상은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과 생활과 관계가 바뀔 것이고, 사회질서도, 또 어쩌면 국제적인 질서까지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이미 그 당시에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고, 또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질서를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사건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2. 사건들 중의 사건, 부활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을 200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정도로 여긴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용어만 봐도 그렇습니다. ‘부활’, 즉 ‘다시 산다’는 말은 미래형이자 진행형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부활, 혹은 부활절이라는 용어 자체가 과거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늘 오늘이 아닌 내일을 바라본다는 뜻이며, 나아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진행형인 사건을 뜻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오늘이 진정한 부활절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 부활이 지금 여러분과 이 땅에서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은 바로 이런 내용으로 부활절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1)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첫째로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죽은 자들(21)”, “사망(24)”, “죽은 자들(25)”과 같은 표현들이 반복해서 나오고 그 반대로 생명에 관한 표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죽어야 합니까? 죽음은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합니다. 왜 죄의 결과가 사망입니까?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어도 좋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는 금령을 주시면서 ‘위반하면 반드시 죽는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를 범하여 타락했고, 그 후손은 모두 원죄의 굴레 아래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도 곧바로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이 육신적인 죽음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까지도 의미한다는 뜻이셨습니다. 즉 죄로 인하여 인간은 육신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죽음은 정말 슬픈 것입니다. 한 개인과 그 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죽음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두 분의 성도의 장례를 인도했습니다. 장례하는 동안 그 가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 죽음이 그토록 슬픈 것일까요? 죽음은 의식이 없고 움직일 수 없어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다운 목소리와 신체를 비롯하여 가진 전부를 잃는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요, 자신의 모든 삶과 이력이 지워지거나 소멸되는 것, 나아가 사람들에게서 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스럽게 하며, 슬프게 합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사람들은 그 이후 삶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또 버거워집니다. 신자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이렇게 큰 사건이고 또 그 힘이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에 지난 역사에 존재했던 위대한 정복자들이 죽음까지도 정복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권세가 크고 높을지라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진시황제, 알렉산더 대왕, 시저가 그런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 사람들 아닙니까? 또 돈으로도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인류 최고의 정복자이자 인류 최대의 적입니다. 아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죽은 사람은 부활한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 안에서 죽음은 ‘최고의 정복자’, ‘모든 사람, 모든 가정을 파괴하고 집어삼키는 괴물’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 개인과 그 가족들에게 가장 큰 사건이지만, 그보다 더 큰 사건은 바로 부활이라는 말이죠.
①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로마 당국자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서 확인되었고, 로마 총독부가 지정한 무덤에 묻힌 후 총독의 봉인까지 찍혔습니다.
그런데 3일 뒤 그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후 그곳은 썩어가는 시신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부활 생명의 출발점으로 변했습니다.
분명히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다시 살아남을 증거하셨습니다. 12사도들만 아니라 수백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거짓말이라고요? 꾸며낸 이야기라고요?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요 사상가인 파스칼(Blaiss Pascal, 1623~1662)은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꾸며낸 연극이라면 그 조작극을 위해 꾸며낸 사람들 스스로가 목숨을 바쳐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많은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 잠시 잠간은 속일 수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회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고, 부활을 주장하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바보천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② 그와 더불어 우리가 믿어야할 것은 부활은 예수님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신불신 간의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29절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만 아니라, 죽은 모든 자들에게 해당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날이 되면, 나이 들어 죽은 자나 어린 자, 비천했던 자나 부요했던 자, 세도를 부렸던 자나 힘없던 서민, 화려한 집에 살았던 자나 노숙자, 화장하여 가루로 흩날렸던 자나 무덤 속에 누웠던 자, 그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부활한다고 해서 다 똑 같지는 않습니다. “생명의 부활 … 심판의 부활로” 구분될 것입니다. 신자는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 것입니다. 왜요? 여러분들은 ‘선한 일을 행한 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한 일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부활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24).
그렇다면 영생은 무엇입니까? 영생은 헬라어로 “아이오니오스 조에, αιωνιοσ ξωη”라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악인들 죄인들도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삽니다만,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벌에 떨어져 그렇게 영원을 보낼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첫째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이죠.
두 번째로 신자의 영생은 ‘천국의 생’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이 세상의 삶이나 육신적인 삶과는 차원이 다른 신령한 세계의 삶을 산다는 뜻이라는 말이죠.
세 번째로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으로 미래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그 삶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은 사후의 세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생을 얻었고”의 “얻었고(εχει)”는 헬라어로 현재형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영생은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육신적인 부활은 장차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이루어지겠지만, 영적인 부활 즉 영생을 누리는 것은 오늘, 지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말입니다!
3) 부활은 신앙과 삶의 기초
이 부활과 영생은 기독교의 기초이자 성도의 삶의 기초가 됩니다. 신학자 보른캄(Günther Bornkamm, 1905~1990)은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제거하면 신약성경의 복음서도, 바울의 편지들도, 오늘의 교회와 예배, 심지어 우리의 기도까지도 무용하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또 과학자이며 신학자인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1929년 북경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기독교가 불교와 같이 해탈을 설교하고 금욕을 말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금욕이나 해탈보다 더 깊은 경탄을 이 땅 위에서의 부활에서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이야말로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 짓는 것이요, 부활 신앙을 가진 것이 성도의 정체성이요 자랑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부활신앙이란 과거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앞에서 ‘부활이라는 말은 미래적이기도 하고, 또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은 과거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가리키고, 또 장차 모든 자들이 다시 살아날 미래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은 ‘오늘’이고, ‘지금’이고, ‘여기’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3. 지금도 계속 중인 사건!
말씀을 맺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 이후로 세계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코로나19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막강해도 우리 주님의 부활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인 여러분은 주님의 부활 사건의 위력이라면 지금의 코로나19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하고, 나아가 코로나19가 이후 세계역사를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재편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미국의 맥스 루카도(Max Lucado) 목사는 “주님, 다시 그렇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문을 발표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모두가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얼마 전만 해도 엄마들은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을 싸고, 요리사들은 ‘오늘의 메뉴’를 고민했으며. 운동장이 시끌벅적하고, 신랑신부들이 힘차게 행진을 하고, 길에서 마주친 이웃들과 날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질병이 유령처럼 우리의 평화와 계획과 안전을 침범했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사회적 거리두기’, ‘격리’, ‘코로나19’와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닥칠 일이 두렵고, 사람들과 접촉하기가 두렵고, 바이러스에 노출될까 두렵습니다. … 아버지, 불안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 “주님, 다시 그렇게 행하여 주시옵소서!”
요셉을 기억하소서. 주님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구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기억하소서. 주님은 그들의 아이들을 죽음의 천사로부터 지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이들이 있습니다. 주님, 다시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사라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주님은 두려움에 빠진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또 무덤 앞에서 울던 여인들의 소망을 회복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를 기억하십니까? 주님은 그 의심을 없애셨습니다. 다시 그렇게 해 주십시오, 주님. 다시 그렇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아들을 덮었던 것 같은 그 어둠이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들과 세계를 덮을까 두렵습니다. 그날 세계가 흔들렸듯이 질병 하나에 우리의 세계가 흔들립니다. … 당신의 아들이 무덤에 들어간 지 3일이 지나자, 당신은 입구를 막은 바위를 굴리고, 땅을 울리며, 가장 어두웠던 금요일을 가장 밝은 주일로 바꾸셨습니다. 다시 그렇게 하시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또 다른 부활절을 주시옵소서.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맥스 루카도 목사의 “다시 그렇게 하시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또 다른 부활절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처럼 부활의 능력이 오늘 여러분에게, 그리고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나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질병과 죽음이 덮고 있는 이 세상을 부활의 능력으로, 그 선한 능력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하시고, 그렇게 되는 것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자리에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육신에 매이지 않는 것, 즉 영원을 바라보며 영원에 잇대어 산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질병이, 그리고 죽음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일에도 근심 걱정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날 때까지 믿음으로 버티고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 부활의 산 증인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사랑인가?”를 물으라! /요5:1-29/ 유기성목사
2022-02-17 11:24:10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26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셔서, 그 속에 생명을 가지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27 또,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것은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말아라.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29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
설 명절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이 유대인의 명절에 된 일이니 명절을 맞는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 메시지 같습니다. 명절이 되면 가족, 친척들이 모이는데 이상하게 불편한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이때 조심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까다롭고 옳고 그른 것만 잘 따지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소문난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주일 예배 후 한 성도가 나와서 “저는 교회 나온 지 6개월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부터는 안 나오겠습니다.” 놀라서 “왜 그러십니까?” 물었더니 “오늘 예배 중에 옆자리의 성도가 아이를 데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 중에도 아이가 자꾸 떠들어서 위에 자모실에 가서 예배드리시라고 했지만 들은 채도 안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예절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고는 돌아 가버렸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가 많으신 분 같았습니다. 교회 안내도 더욱 잘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베드자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베드자다 연못에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따금 물이 솟아오르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때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도 낫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연못가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아마 가장 비참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낫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7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의 안타까움을 보시고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고침을 받아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여러분, 지금 아무리 절망적인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도 주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주님을 찾아간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 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을 가졌다면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 6:65에 주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영적 갈망이 있다면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다.
빌 2:13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오신 주님을 믿으면 38년 병자에게 일어난 놀라운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38년 된 병자보다 더 비참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유대 사람들이었는데 38년이나 병으로 앓던 사람이 치유 받은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분노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병든 사람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화를 낸 것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10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이것이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일수록 해결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인데 38년 병자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과 화를 잘 낸다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면 당연히 화가 나지요, 그러나 화를 내는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비참한 신세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38년 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자 :18에 보면 유대 사람들은 화를 내며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38년 된 병자보다 더 병들었고 더 악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화를 낸다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렘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성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14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이 사람이 38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고생했던 그 병이 죄 때문이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는 정말 무서운 것이고 그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유대 사람들은 율법의 핵심에 대한 이해가 달랐습니다,
막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첫째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한 주에 하루는 정말 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종이나 여자나 아이들은 쉬라고 해도 마음 놓고 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법으로 정해 놓으면 쉬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일부러 안식일에 38년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만나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고칠 수 있지만 오늘이 안식일이라 너를 고치지 않겠다” 하시는 것이 옳으시겠습니까?
38년 된 병자에겐 고침 받는 것이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유대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그저 지켜야 할 법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일인지 어떤 것은 일이 아닌지 규정을 만드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에 보면 안식일 규정은 234항이나 됩니다.
그리고 누가 이런 조항을 어겼는지 눈에 불을 켜고 서로 감시하였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까다롭게 지키면서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정 안식일을 지키신 예수님을 보며 형식적으로 안식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큰일이 난 것처럼 화를 낸 것입니다.
주님은 38년 병자에게 “더 나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짓지 말라 하셨는데 38년 병으로 앓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무엇입니까?
유대 사람들을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서 화를 내며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경남 하동에 유명한 가마고개가 있습니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유학자들이 남명파와 퇴계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두 집안의 딸에게 혼사가 있어 가마를 타고 고개를 넘다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길이 좁아 한 쪽이 비켜주어야 하는데 비켜선 쪽은 스스로 자기 집안을 상대방보다 못하다 인정하는 것이니 서로 가마를 내려놓고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니 먹을 것과 요강이 가마 안으로 들어갔고 양쪽 집안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막후 협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양쪽 가마에 무거운 돌이 들어갔고 시집가던 양쪽 집안의 딸들은 치마폭에 싼 돌을 안고 절벽 아래 덕천강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리고서 두 집안의 가마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24 ...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에서는 믿음을 사랑으로 바꾸어 말씀하였습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우리는 진정 영생을 가진 사람의 증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함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랑하기 원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죽은 사람도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김태한 목사님이란 분이 중국 조선족 교인들 수련회를 인도하면서 마지막 순서로 성찬식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참석자 중에 약 절반가량이 세례를 안 받은 것입니다. 몇몇 조선족 사람들이 전도사에게 묻는 말이 들렸습니다. "저는 세례를 안 받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전도사가 "성찬 받지 말고 따로 한쪽에 서 계세요."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프더랍니다.
그곳에는 세례를 줄 목사가 없으니 이 사람들이 세례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먼저 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 되지 않느냐?" 그렇구나! 하고 "누구든지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은 이 앞에 나와서 자기 믿음을 간증하십시오." 했더니 모두 나와서 자기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간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석자 모두가 성찬을 받았답니다. 여기저기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화가 많은 사람입니다. 유난히 잘못된 일이 눈에 잘 들어옵니다.
그것이 똑똑하고 정의로운 줄 알았는데, 회심할 때, 가장 큰 회개 제목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바리새인 중의 바라새인이었던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보다 더 심각한 죄인이었습니다.
제 성격은 무엇이든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열심 있던 유대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알고 영적으로 답답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정확히 들을 수 있습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들으면 나의 음성을 가장 잘 들은 것이다!"
여러분, 언제나 그러해야 하지만 이번 명절에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이것이 사랑인가?” 물으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잘 안되십니까? 여러분이 진정 고침받기 원하면 주님은 고쳐주십니다.
이 시간 ‘사랑이 없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사람은 일어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찬양: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아버지와 아들 /요5:17-30/ 김형익 목사
2021-05-05 16:36:11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은 주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을 초래했습니다. 이 논쟁을 통해서 주님은 주님 자신의 신성에 대한 가장 놀라운 증거를 주십니다. 이것이 5장의 나머지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주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려고 쓰여진 요한복음 전체에서 가장 심오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주님 자신이 하신 논증들인데,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서 그 말씀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가장 소홀하게 다루어지기 쉬운 본문이 바로 이런 본문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을 더욱 열어주사, 이 말씀을 통해서 깊은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묻고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시라면, 왜 아버지께서 직접 오시지 않고 아들이 오셔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
A.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
주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셨다는 것이 논란이 되자 하신 말씀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17). 이 말은 더욱 유대인들의 마음을 격노하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것 뿐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임을 의미하셨기 때문입니다(18).
유대인들은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인지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 전체에서 주님은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유대 전통에서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감히 부르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럼 없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르게 이해하였듯이,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동격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표현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시고 제칠일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사 쉬셨습니다(창 2:3). 이 구절대로라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이 구절을 부인하시는 것인가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제칠일에 쉬셨지만, 그것은 창조의 행위로부터 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통치하시고 섭리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채우시는 일을 쉬신 것은 아닙니다.
과거 계몽주의 시대에 이신론(deism)이라는 신학적 이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의 법칙을 주신 후에 피조세계를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하고 쉬셨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들이 간과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였습니다. 비가 오고 해가 비추며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 이 모든 일들을 그들은 자연의 법칙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냥 멀리 떨어져계신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로부터 하나님은 쉬셨지만, 계속해서 피조된 세계를 돌보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새도, 백합화도 돌보십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그것도 38년이나 병들어 고생한 자를 고쳐주신 일이 어찌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고 구원과 온갖 선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의 요지가 이것입니다. 주님은 피조물을 돌보시는데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동등하십니다.
B.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19).
유대인들의 이해 위에서, 주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 이 구절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구절입니다. 마치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의지가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시키는 일만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인성의 결함이나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독립적으로 행동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인간이 있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과 자신이 의지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다고 선언하겠습니까? 천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와 의지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동일하셨습니다.
그의 의지를 꺽으셔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은 절대적으로 의지에 있어서 하나로 존재하신 것이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인성을 강조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행하신다는 것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언제나 그것을 보셨고 아셨고 이해하셨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20).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친밀함이 숨김이 없는 친밀함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목적과 계획과 방법을 아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더 큰 일이라고 한 것은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 더 나아가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일을 가리킵니다.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니고서는 여러분은 누구에게도 여러분 자신의 것을 다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가족만큼 이런 친밀함을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고 하십니다. 근거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C.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21).
세번째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더 분명한 선언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하셨습니다(21). 아버지께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니 나도 그 일을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본대로 주님도 동일한 일, 사람 살리는 일을 하시는데 왜 책잡느냐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못에 있는 모든 병자를 다 고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고치고 살리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 주권과 의지는 절대적으로 아버지와 동일한 것입니다.
D.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심판을 다 맡기셨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로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다(22~23,27).
주님의 이어지는 선언은 하나님의 심판권을 주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까? 지금 주님을 판단하려는 자들에게 주님이 만인을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하늘의 모든 권세를 내려놓고 인간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주님은 한 번도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으셨고, 이 순간에도 주님은 모든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심판자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27절을 주목해 본다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권을 맡기신 것은 ‘인자됨을 인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당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인간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하심으로써 구원의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인자됨을 인하여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자됨을 인하여 마지막 날에 심판의 모든 권세를 가지심은 너무나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모든 무릎이 주님 앞에 꿇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들에게 모든 심판권을 맡기셨다는 것을 그 아들을 공경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들을 공경치 않는 것은 곧 아버지를 공경치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E.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24).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심을 계속해서 주님은 강조하고 계십니다. 24절에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와 아버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증거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아들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그들 목자이신 아들의 음성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거짓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아버지를 믿는 것은 결코 구분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믿는 자가 현재 누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의 보장을 가리킵니다. 지금 영생을 누리는 자는 결코 미래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대속자이신 주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이미 옮긴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F.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며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25).
주님은 마지막으로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25).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실 특이합니다. 죽은 자는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주님의 음성은 죽은 자의 죽음을 꿰뚫고 들려질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죽은 자에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죽은 자에게 음성을 듣게 하사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 거듭나고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렇게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자기가 원하는 자로 듣게 하시고 그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28절과 29절에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들을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미래의 어느 때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나게 될 일입니다. 주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면 무덤 속에 자는 자들이, 그리고 죽은 모든 자들이 그 음성 앞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어남은 다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선을 행하고 악을 행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우리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선을 행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이기에 참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음을 더욱 강조한 표현입니다.
2.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유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신성, 하나님 되심을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아버지와 아들이 그토록 하나이시라면, 왜 아버지께서 직접 오심으로써 분명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실 일이지, 왜 아들을 보내심으로 사람들을 더욱 혼동하게 하셨는가 하는 겁니다.
A.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5~20; 출 20:18~21; 신 5:22~27).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구약의 말씀으로 가보면 신 18:15 이하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묘사하였을까요?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은 모세의 중보적 역할을 비유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처음에 율법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떨면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올라가서 그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모세 밖에는 하나님을 뵙고 살아난 자가 없다는 것을 백성들은 보고 알았습니다(신 5:22~27). 그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란 말은 백성들이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세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앞서 던진 질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B.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인간을 죽이고 심판하실 의사가 없으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오신다면, 인간은 살아남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고 마치 종의 형체로 오게 하신 것은 인간을 죽이고 심판하실 의사가 없으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증거대로 심판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구원하려고 찾아오신다면 하나님은 그 심판의 권세와 영광과 무한 위엄하심을 다 내려놓고 자기를 비우시고 오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분을 뵈옵는 순간 다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놓치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보다는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종처럼 오셨습니다.
한 노동자처럼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냐?’고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만한 권세와 능력을 보이라’고 조롱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면 주님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심판하러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유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3. 잠잠하신 그리스도(사 53:7)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주님을 못박아 죽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시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믿지 않습니다. 표적을 보이라고 합니다. 진짜 표적을 보이면 다 죽을 수 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잠잠하셨던 이유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사 53:7). 우리를 살리시려고 주님은 잠잠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모든 심판권을 행사하지 않으시고 모욕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셨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실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심판의 권세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분은 잠잠하셨습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 하심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시끄럽게 떠벌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라는 증명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주님께서 잠잠하게 당신의 일을 이루신 것을 보며 그 길을 따라가는 삶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한 주간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시고 잠잠하셨던 주님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피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다 씀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를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증명되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하고 귀한 교훈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요, 부르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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