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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3:22 - 36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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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3:22-36/ 유기성목사

2022-02-17 11:02:56

 

3:22 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 23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서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26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27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31 위에서 오시는 이는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여서, 땅의 것을 말한다. 하늘에서 오시는 이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32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의 증언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한 것이다. 34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다. 36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여러분,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십니까? 이 질문을 항상 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진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인지를 분별해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닥쳐도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시기를 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시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는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그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말 속에는 다분히 질투와 분노의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의 마음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정말 답답하고 안타깝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 자신은 너무나 기쁘다고 했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에게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는 신랑 친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기쁨을 압니다. 전도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은 다시 한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28) 라면서 자신의 제자들이 그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몰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세례 요한이 기뻤던 것은 성령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복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아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으로부터 들어서 아는 정도였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도 시기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과 전해 들어서 알고 믿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신앙생활의 모습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동행하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기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듣고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 생활을 종교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대하여는 충성하면서도 다른 교회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교 헌금 작정이 세금 고지서처럼 부담스럽게만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게는 오늘 본문에 대하여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안산에서 목회할 때, 신도시의 3400평 종교부지가 있었습니다. 전임목사님 때 그 부지를 위하여 오랫동안 공을 들여 마련한 것이었는데 마지막 추첨에 의하여 다른 교회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교회는 그 땅에 큰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제가 그 땅을 지나갈 때마다 이상하게 배가 아팠습니다. 교인들도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부도나라고 기도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책망하셨습니다,“그 교회는 누구 교회이냐?”“예수님의 교회입니다그 생각이 미치자 심각한 문제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제 교회 일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교인들에게 고백하고 간곡히 제안하였습니다. “그 교회를 축복합시다

 

연말 연초가 되면 직분이나 맡은 직책으로 인하여 시험드는 사람이 생깁니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순간, 교회고 예수님이고 아무 생각이 없어집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고 낙심이 되고,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제자들 중에 누가 예수님의 오른쪽 왼쪽 자리에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싸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장본인이었던 야고보는 첫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 왼쪽 자리는 누가 먼저 죽느냐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으면 제자들이 싸웠을까요?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포옹하고 축복해 주었을 것입니다,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순서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질투하고 시기할 마음이 없어집니다,

 

F.B 마이어목사님이 영국 런던에서 목회하실 때, 당시 런던에 기독교 역사상 제일 설교를 잘 하시는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마이어목사님과 캠벨 몰간 목사님은 친구였는데 캠벨 몰간목사님이 미국에 있는 동안 그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몰간 목사님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을 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이 있을 때에는 기도하기가 좋았는데 서로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까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더군요.󰡓나는 스펄전 목사님처럼 설교에 인기를 얻지 못하고 몰간 목사님처럼 권위 있는 목회를 하지도 못하는 구나󰡑하는 열등감이 너무 가책이 되어󰡒하나님, 저의 마음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 주시옵소서.󰡓기도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깊이 기도하는 마이어 목사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네 기도를 바꾸어라. 질투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해라.󰡓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부터 마이어 목사님은.󰡒하나님, 스펄전 목사님과 그 교회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캠벨 몰간 목사님과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는데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가득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주일 예배에서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가득 메워지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남거든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시옵소서.󰡓그 후부터 이 세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세 교회 모두 크게 성장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 종교생활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정말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고 친밀히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 처럼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은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 고백을 하는 것이 두렵다면 나도 그렇게 고백하게 해 주세요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얼마나 기뻤으면 그런 고백을 했겠는가?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믿음, 세례 요한의 고백을 부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 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고후 5:15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고 항상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1:12부터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니 이제는 바울이 누리던 명성과 존경을 내가 받아야지󰡑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 대답하였는지 아십니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여러분, 세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을 위대한 인물로만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안하든지 고난이 닥치든지 예수님으로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열등감으로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사시였었고 중 1 때 부친이 돌아가신 후부터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신학교에 갔지만 마음에는 분노가 가득했답니다,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분노하였습니다. 한번 화가 나면 성경책도 찢고 강대상도 뽀개었답니다.“이렇게 살게 할거라면, 왜 날 태어나게 하였나요?”마음에 가득한 분노 때문에 음란물 등 각종 중독에 빠져 살았답니다.

 

그런데 목회자 기도모임에서 회개가 터졌습니다.

그 날 간증하신 분이 박보영목사님이었습니다. 주의 종이 되면서 가진 재산 다 나누어주고, 의사면허증도 반납하고, 부랑 청소년들과 함께 살던 일을 간증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조차 하나님께 맡기고 사명 위하여 떠난 간증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교회에 찾아왔답니다. 너무 반가왔는데 순간 아들에게 다른 아이들 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두려워이제 가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들이 화를 내며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부활절에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을 보고 싶어 마음이 떨리더랍니다. 그런데 아들이 올 것을 생각하니 부활절 예배에 집중 할 자신이 없더 랍니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 하는 박보영목사님의 고백을 듣고 기도하면서 이 목사님이 통곡을 하였습니다.

가진 것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왜 안 주셨냐고 평생을 원망하고 분노하며 살았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또는 둘도 없는 친구나 후원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하여 대신 죽을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들어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배신하지 않고 사랑할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31절에서는 그를 하늘에서 오시는 이라 하였고 모든 것 위에 계시고했으며 34절에서는 하나님께서성령을 아낌없이 주신분이라 하였고 3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다고 했고 36절에서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학교 양효선전도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지독히 미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미워했는지하나님 저 딱 일주일만 미워할게요.’이렇게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너무 괴롭고 힘들어 기도할 때저에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그러면 제 안에 미움이 사라지게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 미움은 여전했습니다. 이렇게 괴로워할 때,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나님께서 저에게그래 네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니. 속상했지.’라고 위로해 주시거나 저를 책망하시며미워하면 살인한 것이라 하였거늘 어서 회개하여라말씀하지 않으시고내가 너를 사랑한다하신 말씀은 너무 쌩뚱맞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말씀을 들은 후 꽝꽝 얼은 눈 더미가 뜨거운 태양빛에 녹는 것처럼 제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졌습니다. 너무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미움이 없어진 건지 확인하려고 그 미워했던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미워하고 싶지도 그럴 만한 이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하나님은 넘어지는 저를 수도 없이 용서하시고 일으키시고, 또 용서하시고 일으키셔서 지금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을 뿐인데 제 마음의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청소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다시 웃으며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저를 미움의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더 이상 종교 생활로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설교를 듣기만 하여서는 안됩니다.

세례 요한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세례 요한의 그 기쁨을 우리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찬송: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는 흥하는 삶 /3:22-30/ 김형익 목사

2021-05-05 12:02:02

 

1. 인간의 꺼지지 않는 불, 경쟁심(26)

사람의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습니다. 경쟁심입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그는 대담하게도 하나님과 하와 자신을 비교하게 만들어서 하와가 하나님을 향하여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경쟁심을 부추겼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 본성의 이 경쟁심을 물리치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혹자는 선의의 경쟁심을 추켜세웁니다마는, 성경은 그렇게 하는 것을 결코 칭찬하지 않습니다. 경쟁심이 비교하는데서 오는 마음입니다. ‘저 사람보다는 잘 해야겠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교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열등감과 교만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등감과 교만은 인간의 본성 깊이 자리를 잡고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을 계속해서 끊어내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하도록 잡는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경쟁심을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의 시골 지역에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세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4:2).

 

그런데 세례 요한이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렇게 많이 요한의 주변에 모여서 세례를 받고 말씀을 듣던 군중들이 이제는 예수님 편으로 많이 몰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 행하심을 보았던 것도 그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이 일로 인해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요한에게 그들은 말하기를,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합니다(26).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이 일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선배가 아니었습니까? 적어도 그의 제자들이 볼 때에는 그랬던 것입니다. 가장 거룩한 일에 부름을 받아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던 경쟁심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교회와 경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에 목회서신에서도 썼지만, 교회가 교회와 경쟁해서 잘 되는 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인 사단과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데,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기업 하듯이 교회를 세워간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나와 저 사람을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세상적 기준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적 기준으로조차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은가?’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처방

제자들이 요한에게 나아와서 이렇게 말했을 때 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사실, 이런 경쟁심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일 속상해야 할 사람은 제자들보다도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관점은 놀랍습니다.

 

A. 하나님의 주권(27)

첫째로 그가 제자들에게 제시하는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27).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관점은 절대적으로 자기의 실력과 주님의 실력을 비교하는데로 가거나 거기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의 관점은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낙심을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비록 나의 부족함이 있을 수 있고, 나의 잘못도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실수와 부족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나 잘못을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신앙을 무책임한 것으로, 뭐가 잘 안되면 다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을 표현할 때, 자기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그는 자기 자신의 무능력이나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관점을 가지고 사십니까?

 

B. 들러리의 기쁨(29)

요한이 들려주는 또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식의 체념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지만,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는데 나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합니다(29). 이것이 말하는 바는 결혼식에 신랑의 들러리가 누리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랑의 이 친구는 결혼이 성사되기 전부터 신랑과 신부 사이에 전갈을 전해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랑이 이루어지고 결혼이 성사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주관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신랑이 나타나고 결혼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 친구의 기쁨은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비록 그 자신이 신랑이 아니지만, 그는 이 결혼식을 통해서 자기의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대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부로, 주님을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62:4~5). 그는 그리스도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낙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사명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의 기쁨은 신부를 그리스도께 인도해드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종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기쁨,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지상에서 대단한 성취를 이루고, 유명세를 타게 되고, 억만금을 손에 넣게 되고, 자식이 기막히게 성공하는 그런 것들도 다 기쁨을 줄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참된 성도의 기쁨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이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정말 이 일로 인해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때 성도는 참으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은 결코 앞서 언급한 그런 종류의 순간적인 기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은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조금이라도 알고 맛본 사람들은 그 기쁨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종류의 기쁨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가 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을 누릴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C.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는 삶(30)

그래서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30). 누가 과연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정말 그 말 그대로 자기는 쇠하고 그리스도는 흥하는 삶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쪽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흥하고 주님도 흥하는 삶을 원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내가 망해야만 주님은 흥성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 찌그러지고 망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의미이겠습니까? 가난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일까요? 이 말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3. 신앙은 자기증명이 아니고 그리스도 증명이다.

본질적으로 신앙은 자기 증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늘 넘어지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여기입니다. 신앙을 자기 증명과 혼동하는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신앙은 자기 증명이 아니라 자기 부인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도 빠질 수 있는 오류는 자기가 너무나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는 길은 오직 자기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일 때입니다. 그러니 가지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오히려 가진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H. G. Spafford 씨가 1873년 여객선의 침몰로 타고 있던 네 자녀가 다 죽고 살아남은 아내가 보낸 전보를 읽고 쓴 시를 보십시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것이 순교의 죽음으로써만이 아니라, 인간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아끼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셨던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붙잡을 뿐 아니라 그분께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기쁨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죽음이야말로 자기를 증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좇아오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따라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매일 우리가 그런 죽음을 연습하고 삶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없어서만이 아닙니다. 잃어버려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만족이 그것으로 말미암음이 아님을 드러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습니까? “주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이 태도는 자기를 증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A. 내 희생, 내 사랑, 내 봉사가 십자가를 대신하거나 십자가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는 흥하는 삶의 유일한 열쇠입니다. 십자가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만일 내 희생, 내 사랑, 내 봉사가 십자가를 대신하거나 십자가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희생과 봉사의 이름으로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꼭 드러나는 것은 내가 한 봉사이고, 내가 한 희생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도대체 왜 필요한 것입니까? 내 희생과 내 사랑과 내 봉사로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습니까? 내가 흥하려고 생각하고 내가 흥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되는만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게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은 아무런 차이도 가져오지 않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과 사를 가르는 중요한 분깃점이며,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의 구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얼마나 많은 봉사와 수고와 희생이 십자가를 드러내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증명받고 자기 자신이 인정받는 쪽으로 가게 되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끌고 가는 본성의 힘을 저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참된 기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B. 자기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본성 안에는 그리스도를 좇는데 유용하거나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낸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의미는 인간의 본성 안에는 그리스도를 좇는데 유용하거나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있으면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본성을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본성을 부인하고 그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율법의 의, 바리새인이며 관원이었다는 명예와 신분, 그의 지식다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방해가 될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것들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또는 가지고 계시지 않은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만족과 기쁨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 사역의 성공을 통해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의 사역이 기울어져가고 있을 때 말할 수 없는 낙심에 빠졌다고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역의 성패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누렸고, 자기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는 흥하는 삶입니다. 바로 자기의 죽음을 지고 그리스도를 좇는 삶인 것입니다.

 

4.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길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을 누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조지 휫필드는 그의 임종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지 휫필드의 이름은 사라지게 하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게 하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 죽기도 전부터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세우는 많은 주의 종들의 모습을 볼 때 어찌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섬기는 것은 명에의 신이며, 재물의 신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끝없는 비교 속에서 기쁨을 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기쁨은 결국 비참함과 열등감과 교만의 깊은 독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자의 기쁨을 추구하십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 있음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잠시 잠깐의 성공과 실패에 기뻐하고 낙심하는 일을 이제는 내려놓으십시오. 영원히 쇠하지 않는 기쁨은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겠다고 하며 살아가는 삶에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상의 기쁨을 누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고 기뻐하십시오.

 

 

 

종교개혁 /버릴 것, 붙잡을 것 /3:22-30/ 김기석목사

2015-07-12 07:34:26

 

[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서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

 

그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주님의 팔에 나를 던지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96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루터는 15171031일에 자신이 신학교수로 섬기고 있던 대학 교회 겸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가톨릭교회가 판매하고 있던 면죄부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95개조의 격문을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습니다.

 

면죄부는 당시의 가톨릭 신학의 보속론補贖論과 연관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순례를 하거나 고행을 함으로써 자기 죄 값을 치르거나,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이들은 돈을 냄으로 보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면죄부는 바로 그런 신학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인간이 공적을 통해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그런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이란 죄의 용서 혹은 구원의 문제를 둘러싼 신학적인 싸움으로 촉발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 갈등이나 위험이 없는 곳은 없지만, 제도로서의 교회 역시 논란의 대상입니다.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는 3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의 대형 영정을 강대상에 걸어놓고 추모예배를 드린 것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그것은 권력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개신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참담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가장 흉한 법입니다. 외부 사람들이 오늘의 개신교회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교회사를 일별해보면 타락한 교회에 대한 저항은 거의 매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저는 특히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Jan Huss, 1372-1415)를 떠올립니다. 그는 영국의 개혁자인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1384)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체코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를 섬기던 후스는 놀랍게도 라틴어가 아닌 체코의 일상어로 예배를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사제의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제들의 부정축재, 성적인 난잡함, 알코올 중독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특히 성만찬을 온전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만찬 석상에서 평신도들에게는 빵만 제공되었고 포도주는 오로지 사제 계급만 먹었습니다. 일종의 성례전적 권위주의인 셈입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이 발행하던 면죄부 판매가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교회나 공의회 혹은 교황보다 성경이 더 큰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교권에 도전했으니 그의 운명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일종의 체제 전복자였고, 요즘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로 항명자’, ‘배신자였습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조직을 배신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제나 그제나 죽음입니다.

 

얀 후스는 1415년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호반 도시 콘스탄츠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위클리프 사상을 전파한다는 죄목으로 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공의회는 마지막으로 그의 신학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후스는

 

"나에게는 순간의 형벌을 피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며, 영원한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불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더 유익하다. 그런 일들은 바로 나를 주님의 팔에 던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후 처형당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은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값진 유산입니다. 그들은 비록 죽었지만 인간이 얼마나 숭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류의 사표들로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기념일에 엉뚱하게도 얀 후스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들 개혁자들은 교회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늘 개혁되지 않으면 그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지만 참 예수의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반성적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개혁은 그릇된 것을 꾸짖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본질적인 것을 꼭 붙드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통해 오늘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해보고 싶습니다.

 

성전 체제와의 대립

 

이제 본문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그 뒤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살렘 근처의 애논이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 물이 많았기 때문에 세례를 베풀기에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좀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세례식은 있었습니다. 개종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 절차일 때도 있었고, 에세네파의 입문의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라는 측면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인 마가는 요한의 세례를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1:4)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요한은 죄 사함의 상징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죄 용서의 문제를 독점하고 있던 것은 성전 체제였습니다.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가서 제사장들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는 제사장이라는 매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이 문제입니다. 특권이 주어지는 순간 거룩함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벌건 욕망과 이해관계만이 도드라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기에 성전체제를 향해 강도의 굴혈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그러니까 성전체제에 대한 부정이자 도전이었던 셈입니다. 예수님도 그 세례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살렘 근처의 애논은 조용하지만 일종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불온한 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말하지만, 말이 좋아 논쟁이지 그것은 정말 심각한 해석학적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그런데 정작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당혹케 한 것은 그런 논쟁이 아니라, 자기들을 추종하던 이들이 예수에게 몰려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뜻을 세우고 살아도 사람은 이렇게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은근한 경쟁심이 문제였습니다. 사람 수를 세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스승 요한에게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대답은 의외로 차분합니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27)

 

장엄한 말입니다. 우리 어둔 눈이 탁 틔어지는 말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자기들의 성공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경우를 더러 봅니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이들은 그분들을 하나님의 큰 종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렇게 큰 교회를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교회를 크게 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은 그런 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집니다. 그런데 이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소위 말하는 성장을 추구하는 이들이 할 때와, 정신의 그릇이 큰 사람이 더 큰 정신의 등장을 기뻐하며 말할 때 그 의미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이 실망하거나 말거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제자들도 그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나는 아니다’. 이 말 한 마디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요한을 참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여인이 낳은 자 가운데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역할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가끔 인용합니다만 정진규 선생의 시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모두 잊고 오늘은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면 된다 알 수가 있다 바다도 몇천년을 그렇게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앞물결을 뒷물결이 싸악 지워내고 또다시 뒷물결이 앞물결을 싸악 지워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싱싱하게 싱싱하게 다시 채워지고 있을 것이다 지워지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다 분명하게 지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장 분명하게 다시 태어난다"(<·4> 부분)

 

잘 지워질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세상을 푸르게 푸르게 바꾸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29)

 

그는 지금 스스로 지워지고 있음을 알지만 그 때문에 기쁘다고 말합니다. 종교란 이런 것입니다. 종교를 개혁한다는 것은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속에서 자랄 때 개혁은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마치 못이라도 박듯이 마지막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30)

 

이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해 종교인들이 타락했고, 교회의 기둥이 기울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집쟁이 농사꾼이었던 봉화의 전우익 선생님은 "모든 참된 삶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우리가 다짐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물질이 주는 안락함과 쾌적함에 중독된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예수 정신만 굳게 붙드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불의와 공모하면서 기득권의 이해에 복무하는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공의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려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이 의사 결정권을 독점하는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가장 작은이들의 신음소리가 경청되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믿음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겁박하는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마음 시린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으려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영광의 신학에 사로잡힌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십자가의 신학에 충실한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중산층의 사교장처럼 변한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사들은 쇠하여야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김의 도리를 다하는 이들은 흥하여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섬김의 직책을 권위로 이해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쇠하여야 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낮은 곳을 밝히는 이들은 흥하여야 합니다.

 

-믿음을 가장하여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쇠하여야 하고, 모든 이의 종이 되려는 이들은 흥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정말 영생을 원하십니까? 예수의 길을 걸을 생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버릴 것을 버리십시오. 아깝더라도 말입니다.

 

붙잡아야 할 것은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설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해도 말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이러한 기쁨에 충만한 사람 /3:22-30/ 곽선희 목사

2014-11-19 15:00:17

 

세계의 50개국에서 출간된 베스 트셀러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이것 은 한국에서도 출간됐고 여러분 가 운데도 읽은 분이 많으시리라고 생 각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준 책 입니다. 앤드류 매튜스 (Andrew Matthews)라고 하는 세계 적인 일러스트 작가가 쓴, 'Being Happy' 라고 하는 책입니다. 행복 을 찾기,혹은 행복하기, 뭐 그런 뜻 으로 번역 할 수 있겠습니다. 기쁘 게 살아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 해 주는 책입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 할 수 있을까? 저마다 생각을 합니다 만은 많은 면 에서 공명을 주는 그런 감동적인 책 이었기에 온 세계 사람들이 즐겨 읽 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패턴에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입니 다.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그 틀대로 살아갑니다.

 

이 패턴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만은 여러 사람 의 말을 좀 달리 비교해서 말한다 면, 세계관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혹 은 Frame of Reference 라고 할 수 도 있고 가치관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요새 많이 쓰는 패러다임 (Paradigm), 공유하는 사고의 틀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사 람의 각자의 마음속에 어떤 사고의 틀이 있다는 거죠.

 

그 틀을 기준으 로 해서 사람들은 생각하고 그 틀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는 대로 불행 하기도하고 행복하기도 하는 거지 요. 가령 내가 작다 한다면 이건 큰 사람하고 비교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크다 한다면 작은 사람하고 비 교하면서 생기는 거거든요. 그런고 로 나름대로의 자기 속에 틀이 있습 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거죠. 과거 의 경험했던 그 행동, 혹은 들어서 배운 것, 오랫동안 흘러오면서 그 되풀이되는 가운데서 우리 속에 하 나의 틀을 만들어 주고 고정관념이 되기도 하고 하나의 가기 나름의 가 치관과 철학이 됩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행복과 불행 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변명하 기를 좋아합니다. 그 변명한다는 것은 좋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 나의 위선이요 또 하나의 허영입니 다. 사실대로 인정하며 그만 입니 다, 또는 남이야 어떻게 인정하든 말든 난 나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 데 꼭 변명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 히 보세요. 뭐 운동을 하는걸 봐두 요 그게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 도 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안 될 때는 꼭 변명을 하는 사람이 있 어요. 감기기운이 와서, 뭐 어디가 어때서, 오늘 아침에 나올 때 마누 라가 잔소리를 해서, 꼭 갖다가 어 디다 갖다가 부쳐요. 꼭 이유를 들어요.

 

못된 버릇이요. 변명 그거 아주 좋지 않은 악습입니다. 그저 사실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잘한 건 잘 한대로, 못한 건 못한 대로 또 남이야 뭐라고 하든 이리 생각하 면 아주 편하겠는데 변명을 하려고 할 때에 사람이 짤아지는 거예요. 못되지는 거예요. 변명이 습관화되 면은 사람 아주 못쓰게 됩니다.

 

그 런 걸 볼 수가 있어요. 가령 시간 에 늦었다. 어떤 모임에든 시간이 늦었다 그러면은 늦었다, 내가 잘 못해서 늦었다 그리 생각하면 좋은 데 그게 아니에요. 어쩌고 어쩌고 어찌해서 꼭 변명을 합니다. 그런 데 가만히 보세요 그 사람 항상 늦 어요. 그리고 항상 변명해요. 그 변명도 꼭 같아요.

 

이 예배시간에 늦는 사람도 보면 5분 늦는 사람은 항상 5분 늦어요, 더 늦지도 않아요 늦는 사람이 늘 늦어요. 그리고 꼭 변명이 있어요. 그거 그게 얼마나 나쁜 체질이라는 걸 본인이 모르고 있어요. 여러분, 변명하는 사람 불 행합니다. 변명 없이 사는 사람 자 유 합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심 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또 늦어 가지 고 늦는다 하면은

 

"아 그 사람 또 늦을 거야"그러지 않습디까, 모임 에서? 게다가 또 하나 있지요, 들 어서자마자 또 변명 할 거야. 변명 하지 정말로.

 

"그거 봐, 내 그럴 줄 알았지"왜 이런 말을 들으며 사느 냐 이거예요. 그 사람이 얼마나 불 행합니까?

 

이 분은 생각합니다. 가치관이 라는 걸 크게 나누면 둘로 나눌 수 가 있는데 하나는 부정적이고 하나 는 긍적적이요. 어떤 경우에든지 긍정적으로 보며, 행복을 찾는 사람 이 있고 어떤 사람은 꼭 부정적으로 보고, 어둡게 보고 그리고 스스로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 면 도대체 문제는 그거예요.

 

어떻 게 하면 구제할 수 있느냐? 이게 부정적으로 기울어지는 이 사람 어 떻게 하면 치료 할 수 있을까? 잘 못된 가치관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까? 바로 이것을 말하는데 지혜가 있어요, 이 책에서. 그래서 이 책이 유명해 지는 겁니다.

 

첫째는 칭찬을 받아들이라. 이 거 중요한 얘기입니다. 남이 칭찬 할 때 순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요. "고맙습니다"하고 받아요. 남이 칭 찬할 때 꼭 남을 비판해요. 당신이 뭔데 나를 칭찬 하냐고 그 사람을 비판해 버려요.

 

"어 이거 칭찬이 아니라 비웃는 거 아니야 이거, 나 를 없수이 여기고 무슨"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예요. 여러분 스스 로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나 에 대해서 칭찬 할 때 그대로 끼끗 한 마음으로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들였습니까? 아니면 마음속에 뭔가 못된 것이 들 끊었습니까?

 

바로 여 기에 당신의 존재가 있는 거예요. 칭찬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드릴 수 있어야 당신은 당신의 허영된 인 격으로부터 구제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남을 칭찬하라. 어떤 사 람은 보면 남을 한평생 칭찬이란 해 본 일이 없어요. 아이들을 놓고도 잔소리만 하지 칭찬하는 것을 들어 보질 못해요. 그거 구제 불능한 거 예요. 못 고치는 병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 각해 보세요. 나는 하루에 남을 몇 번이나 칭찬했나…… 칭찬하는 순 간 내가 낮아진다고 생각하는데 문 제가 있는 거예요. 남을 높이는 순 간 나도 함께 높아진다는 생각을 못 하는 바로 이것이 병적인 심리예요.

 

열심히 칭찬하세요. 칭찬하는 동안 에 장점을 보게 되고, 칭찬하는 동 안에 나도 더불어 함께 커지고 있다 는 걸 알아야 돼요. 아이들을 가르 치는 거, 간단해요 칭찬하면 되요. 어떡해서든지 좋은 점을 보아 가면 서 계속 칭찬해 나가면 교육은 저절 로 되는 거예요. 뭐 복잡하게 생각 할 것 없어요. 칭찬보다 더 효과적 인 교육은 없으니까요.

 

그러데 그 로 더불어 내가, 내가 더 행복해 진 다는 걸 잊지 말아요. 또 한가지는 자신을 좋게 말하라 이거예요. 이 게 무슨 말인고 하니, 다른 사람에 게 자신을 소개 할 때 거 자꾸 아픈 소리하지 마세요. 거 괴로운 거 나 혼자 당했으면 되지, 남에게까지 또 그렇게…… 그것이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는 생각을 안 해요.

 

이 것이 남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 거예 요. 몸이 아파요, 좀 참으세요. 혼 자서 그냥 뭐 아프다,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온 집안을 다 못살게 굴어…… 그 사람 중생 해야 되요 그거, 큰 병입니다. 아픈 거 좀 참 으면 되잖아요.

 

또 그리 소리 지른 다고 덜 아파지나? 점점 더 아파지 지. 내가 어려운 것은 나 혼자서 당할 생각을 하고, 될 수만 있으면 은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 지 않겠다는 이런 배려 의식이 필요 해요. 그런고로 나는 언제나 좋은 빛으로, 이건 위선이 아닙니다. 걱 정거리가 많아도 많은 사람을 대할 때는 화평하게 즐겁게 행복한 얼굴 로 나타날 필요가 있어요.

 

이것이 점점 쌓이면서 내 성격을 이루는 것 이요. 또 하나는 자기 자신과 자기 행동을 분리해 생각하라.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 사업을 위해 힘씁니다만은 사업과 나는 별 개예요. 사업이 망하는 순간 내가 다 망하는 거 아닙니다.

 

학생들 학 교에 가서 대학 시험을 본다, 시험 에 떨어질 수도 있고, 붙을 수도 있 지, 그거 떨어졌다고 해서 인생 끝 났다, 가문 망했다, 이게 무슨 소립 니까? 상가집 같아요, 상가집. 그 대학 가지고 오늘 못 가면 내일 가 고 저기 아니면 여기고 못 가면 딴 직업 가지면 되지 뭘 이걸 가지고 운명을 걸어요! 목숨을 거는 이게 얼마나 초라한 인간입니까.

 

이런 사람은 불행해요. 사업은 사업이고 나는 나예요. 그거 아니에요. 또한 중요한 것은 어떤 대접을 받고자 하 는지를 남에게 알리라. 그것도 중 요한 거예요. 가만히 어떤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결혼 기념일이 란 게 있잖아요.

 

이 부인은 생각해 요, 결혼 기념일이나 자기 생일이나 이럴 때 남편이 알아주나, 그냥 넘 어가나…… 가만히 기다렸다가 그 냥 넘어가면 삐져 가지고 한달 동안 말도 안하고 이런 여자하고 살려면 피곤합니다. 아니 그러면 아침에 "오늘 결혼 기념일입니다. 잊어버 리지 마세요. 작년에 이런 선물을 주었으니까 금년에는 다른 선물을 주세요."

 

뭐 이래 야지? 그러면 되 잖아요. 그런걸 놓고선 뭘 알아주 나 안 알아주나 나는 불행해 뭐 나 는 결혼 잘 못했어. 참 궁상맞은 여자요, 이런 사람하고 살려면 오래 살기 힘들어요. 아주 들어요. 자 보 세요, 왜 이래야 되요?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길 바라는가, 그걸 알 리면 될 거 아니에요, 좀더 솔직하 고 좀더 깨끗하게 이게 자유 할 수 있는 길이요, 이게 행복할 수 있는 길이요.

 

또한 좋은 친구도 사귀고, 좋은 책도 많이 읽어야 되고요,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자기 모습이 어떠 한가를 생각하지 말고, 어떠한 사람 이 되고 싶은가 그걸 생각하라. 항 상 현재에 만족할게 아니라 '내가 바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그런 이상적 이미지를 앞에 두고 늘 생각 하라. ? 사람은 생각하는 만큼 운명이 주어지니까. 생각하는 방향 으로 달라지니까 계속 생각하는 거 예요.

 

그런 사람하고 사귀고 좋은 이상의 그런 자기 모습을 그리며 살 아가라 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다 털어 말하면은 항상 웃으라. 기뻐하 라 그런 말입니다. 그것이 행복 할 수 있는 길이요, 그래서 Analysis of Disease라고 하는 '병의 분석'이 라는 책이 있어요,

 

노만 커즌의 유 명한 책인데 거기 보면, 통통 다 읽 어보면 별 얘기 아니에요. 웃으라 그거예요. 위장병, 위계양, 신경성, 이런 거요 호탕하게 몇 번만 웃어도 낳는데요. 중요한 것은 웃지 않는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없 어요. 끝이예요, 그걸 알아야 되요. 그러니까 웃어야 되요, 어떤 방법으 로든지. 기껏해야 뭐 코메디안 보 고 웃어 가지고야 되겠습니까만은, 웃어야 되요. 기쁨이 건강에 유일 한 비결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 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 모든 것보 다 더 높은, 아주 높은 차원의 성경 적 행복 지름길이 있어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요한이 말합니다.

 

"이 기쁨에 충만 하다. 이같은 기쁨, 이러한 기쁨으 로 나는 충만하다."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같은 기쁨이 라는게 뭐 냐? 요한의 마음속에 있었던 절대 적인 기쁨, 넘치는 기쁨, 기본자세 기본 존재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기 쁨이 있었어요. 그는 이 기쁨으로 모든 것을 소화합니다.

 

그게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냐, 먼저는 질투가 없는 마음에서 왔어 요. 여러분 질투하는 마음은 사람 을 썩게 해요. 잠언에 보면 시기는 사람의 피를 마르게, 골수를 마르게 합니다. 어떤 일로든지 간에 기도 하고 회개하고 질투 없이 살아야 되 요. 질투하는 마음을 속에서 완전 히 빼버려야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 이거 참 무서운 병입니다.

 

사람 에게는 기본적으로 생리적 욕구가 있고, 안전 하려는 욕구가 있고, 소 속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고, 인정받 으려는 욕구도 있고. 인간적인 가 장 높은 차원의 욕구는 자기 실현의 욕구입니다.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 는 자기 존재를 확실하게 하고자 하 는 정신적 욕구가 있는데, 이 욕구 가 어떤 일로 인하여 방해받을 때, 침해될 때 이게 질투로 작용하는 거 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자유경쟁이다. 이 나라에서 이런 말을 하죠, 또 우리 가 무한 경쟁의 시대다 뭐 경쟁에서 강한 자만 살아 남는다, 하도 이런 얘기를 해서 못쓰게 만들었어요. 사람 다 병신 만들어 놨어요. 공부 잘해야 하고, 일류 대학에 가야하고, 결국 머리좋은 사람, 강한 사람, 똑 똑한 사람 그 몇 사람만 살아 남는 다, 생존경쟁이다! 생존경쟁이라는 말은 칼 막스의 이론입니다.

 

공산 주의 마음입니다. 경쟁에서 몇 사 람만 살아 남고 약육강식이라는 말 은 무서운 철학입니다. 아니요. 물 론 강한 자가 살아요, 그러나 강한 자가 하나가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일등이 살아요, 그러나 일 등은 하나가 아니에요. 경쟁 할 때 는 일등은 하나지만 무경쟁으로 갈 때는 모두가 일등이요. 한사람은 운동을 잘 해 일등이요, 한사람은 음악을 잘 해 일등이요, 한사람은 얼굴이 예뻐 일등이요,

 

한사람은 말 을 잘 해 일등이요, 다 일등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누구는 일등하고 누구는 패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적 진리요, 그런고로 우리는 무한경쟁 이 아니라 무경쟁으로 살아가야 한 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 서 나 나름으로의 나만의 세계에서 나는 늘 이기고, 승리하는 것이예요. 결코 누구와 경쟁해서 하는 게 아니 예요. 우리 나라 경제가 왜 어려워 졌습니까? 경쟁을 더티(dirty)하게 더러운 경쟁을 했어요, 내가 살려는 게 아니라 남을 죽였다 말이에요, 많은 중소기업을 죽여가면서 나를 크게 만들었어요. 저도 망하고 다 망했잖아요.

 

이게 아닙니다. 남을 살려야 내가 사는 거죠. 저를 살려 야 내가 사는 거예요. 그런데 나만 사는 경쟁, 이건 공산주의 이론이라 는 거예요, 결국은 다 망하게 되는 거예요. 이 경쟁하는 마음 시기, 질 투하는 마음, 이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자 이제 세례요한을 보세요. 어 떻게 해서 이로부터 구원받았는가? 그는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예수 님을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었어요.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는 데 예수님이 저 곳에서 제자들과 함 께 세례를 주었다 했더니, 세례요한 에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오 늘 성경을 보니까 통계는 없습니다 만 '모두' 그랬어요, '모두가 그에게 로 가더라' 이 이야기를 또 누가 와서 고자질을 합니다.

 

세례요한, 인간적으로 말하면 기분 나쁘죠. 내가 선배인데 나에게 오던 사람이 다 저에게 가버린다 맘 편하겠습니 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해석을 합 니다.

 

하늘에서 주시기 아니하면 받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다 주신 거다. 내게 주었고 그에게 주었고. 내게 주신 것처럼 그에게 주었어요. 하나님이 다 주신 거예 요. 어떤 사람에게는 재산을 많이, 어떤 사람에게는 재주를 많이 주었 고,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도 주었고, 모두에게 하나님이 적당하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 이다. 그런고로 나는 이 문제에 대 해서 아무 이의가 없어요.

 

내게 왔 던 사람이 몽땅 가도 상관이 없어 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하 나님이 주신 분복 안에서 그는 만족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적인 거예 요, 그래서 나는 광야의 소리와 같 다. 이것으로 내 사명을 다 한 것 이다. 나는 그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내 기능, 내 책임은 다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 신 거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거이 무 엇인지를 똑바로 아세요. 남에게 주신 거 시기, 질투 할 것 없습니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요. 하나님 이 내게 주신 거, 내게 주신 은혜 여기에 충실할 것이예요. 그러면 자유하고 질투로부터 벗어 날 수 있 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불변해야 됩니다. 이 변화가 있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 해서 시종일관해야 됩니다. 이사야 서 263절에 보면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인도하신다.' 그랬어요. 심지가 견고해야 되요. 예를 들어서 '사랑한다' 했으면 사랑 하는 거죠, '참는다' 했으면 끝까지 참아야죠. 사람이 어떻게 했든 간 에, 누구 말도 이 이상 들을 필요가 없지요. 특별히 어제 보니까 그런 일들이 많아요, 부모님들이 자녀를 위해서 입버릇처럼 말해요.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산다. 너희들만이 내 소망이다."

 

말은 잘 하는데 아 혼수 때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아 예 본전을 빼려고 그러더라고요. 그 동안에 밑천 든 거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아 이래가면서 혼수 문제로 막 가정이 깨지는걸 봐요. 왜 이러는 거예요. 줄려고 했으면 끝까지 주어 버리지 뭘 이제 와서 찾겠다고. 아니에요, 마음이 변하면 안돼요.

 

섬기기로 시작했으면 섬기 는 거예요. 주기로 시작했으면 끝 까지 줘 버리는 것이지 이제 와서 뭘 효도 받고, 뭘 찾고,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충성은 한번 맹세하시면 끝까지 충성하시는 거예 요. 이 변함이 없는 자의에게 평강 이 있어요. 환경에 따라 대접받는 데 따라, 이렇게 저렇게 마음이 흔 들리면 그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 습니다.

 

또 하나는 함께 하는 기쁨이 있 어야 합니다. Sharing 하는 것, 고 난 당하는 자와 함께 고난 당하기도 하고, 아파하고 또 상대방이 기뻐할 때 내 것이 아니지만 함께 기뻐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행복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 가운데 이런 분들이 여러분 있는 걸 고맙게 생하고, 정 말 다른 교회 가서 얘기 할 때 내가 자랑을 합니다. 우리 구역에 이제 학생들이 있거든요. 고등학생이 고 3이 셋이 있었단 말입니다. 온 구 역원들이 그 셋을 위해서 함께 기도 하는 거예요. 이 세 학생이 시험을 보는데,

 

"합격하게 해 주시고 좋은 길을 열게 해 주세요." 심지어 는 이 교회까지 나와서 구역원들이 열심히 또 시험 보는 날도 기도했어 요. 그런데 이상하게 둘은 합격하 고 하나는 떨어 졌어요. 합격한 분 의 어머님이 말을 못해요. 저쪽 떨 어진 사람 맘 아프니까, 말을 못하 고 있어요. 자 이제 말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떨어진 사람의 어머님 만 말 할 수가 있어요. 그 떨어진 사람의, 학생의 어머니가 아이를 다 청해 가지고, 구역원까지 다 청해 가지고 잔치를 했어요. 우리 두 젊 은이가 학교에 입학한 걸 축하한다. 자기 아들은 떨어졌지만, 둘 합격한 거 얼마나 좋으냐? 이래서 잔치를 했어요. 자 그런데 보통은 어떻습 니까.

 

"창피해서 못 다니겠다. 남 의 아들 다 합격했는데 너는 떨어져 가지고. 나는 이제 살 수가 없다."뭐 이런 식이지요. 못된 마음이지 요. 이렇게 마음을 열어서 내 자식 은 떨어졌지만 다른 사람의 아이들 합격한 것을 기뻐해 주었어요. 그 건 그 떨어진 자의 어머님만 할 수 있는 일이요. 잔치를 했는데 그 다 음해 그 떨어졌던 아이가 더 좋은 학교에 갔어요. 그럴 겁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더불어 기뻐하는 것. 내 손에 들어 온 것이 없어요, 그러나 저 사 람 잘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해요. 남 잘 되는 거, 내가 잘 되는 것처럼 좋아요. 그 마음이래야 행복한 것 이에요.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하 는 마음은 없고, 배가 아프다고요.

 

그럼 배 아파서 죽어야지. 그건 안 돼는 거예요. 그건 못사는 사람이 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남이 잘 되는 거 행복해하고 축하하는 마음, 이 축하하는 마음이 꼭 필요한 것이 에요. 항상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 그것이 행복의 근본이요.

 

좀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 것은 쇠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성 경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이 참 중요 한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 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이 기쁨에 충만하다. 신랑의 친구와 같이 신랑이 내 친구가 장가가고 좋 으니까, 내 친구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하는 것처럼, 이제는 그것 만이 아니에요.

 

좀더 나아가서 나 는 물러나는 기쁨이요. 물론 하나 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자기의 사 명을 다하고 이제 예수님에게 바톤 을 넘겨주는 시간입니다. 물론 행 복하지요.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 하면 이것은 물러서는 마음이에요. 시작하는 기쁨도 있어요, 끝내는 기 쁨도 있어요, 나아가서는 물러서는 기쁨이 있어요.

 

후배에게 물러서요. 여러분 퇴직했습니까? 퇴직하는 기 쁨이 있어야 되요. 직장에서 물러 설 때, 내가 20년 동안이나 수고한 직장이야, 앞으로도 잘 되길 바랍니 다 하는 마음을 갖어야지, 돌아서면 서

 

"다 망해라. 이 쌍!"이러고들 있 어요. 모두 다 이 마음을 가지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요. 전부 저주하고 있으니 안그래요? 그저 내가 얼마나 애써서 수고하던 회사 인데 더 잘되길 바랍니다. 나 외에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어서 잘 되길 바라는 그런 마음이어야 되지 않겠 어요?

 

이게 행복의 비결인데, 우리 는 그렇질 못해요. 너무 생각이 좁 아요. 물러설 때마다 저주요, 욕설 이요, 그러니 우리나가 살 수가 없 어요. 개인도 죽어요. 여러분 물러 서는 기쁨,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 는 쇠하여야 하리라' 물러가면서, 은 퇴하면서 기뻐하는 거예요. 잘 되 길 바라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바 로 이것이예요. 이것이 행복의 길 이요.

 

성 프렌시스가 임종시에 많은 교 인들이 모여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 습니다. 조용히 숨을 거둘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그는 갑자기 큰 소 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한 수도사가 옆에서 이렇게 말했답 니다.

 

"신부님 지금은 창밖에 많은 사람이 와 있습니다. 이 엄숙 시간 에 신중하게 처신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그럴 때에 이 말이 끝 나기가 무섭게 빙그레 웃으면서 하 는 말이,

 

"미안하네, 내가 주책을 떨어서. 하지만 난 도저히 참을 수 가 없다네, 가슴깊이 솟구치는 기쁨 을 어떻게 감추겠나. 내가 오랫동 안 그리워하던 주님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네"

 

세상을 떠나면서 이렇게 기뻐하는 마음, 그 것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는 흥 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할 것입니다. 이 속에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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