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포도주가 되다 /요2:1-11/ 유기성목사
2022-02-17 10:32:43
요 2:1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2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4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였다. 6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7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9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 그래서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서 10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였다. 11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
설교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오늘 말씀은 빨리 교우들에게 전해드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누리는 놀라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있는 한 친척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는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유대인에게 이런 일은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런 일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서서 예수님께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리고 하인들에겐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빈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고는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갔다 주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이 기적을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11에 보면 이 기적을 행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 같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도 ‘내게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저도 한동안 제 삶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어 영원히 멸망당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모든 죄 사함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였는데도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속죄함만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안에 임하신 주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인생이 됩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한 신학 과목 시험 시간에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의 종교적인 의미에 대해 서술하라.”는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답을 써 내려가는데 한 학생만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시험 시간이 끝나갈 때 교수님이 안타까워서 “무슨 말이든 한 마디라도 쓰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학생은 마지못해 펜을 잡더니 짧은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다.”
이 학생이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입니다.
기가 막힌 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에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형록 목사님이 쓰신 [메이크 뮤직]이란 책에서 목사님이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 목사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하셨고 13년을 나환자촌에서 섬겼고 미국으로 건너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며 공부도 하신 훌륭한 분이셨지만 식사 시간마다 언제 불같이 화를 내실지 몰라 온 가족이 긴장해야 했다고 합니다.
하 목사님의 아버지께서 이렇게 가족들을 힘들게 하신 것은 어려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있었기 때문인데 할아버지에게 두 분의 아내가 있으셨기에 어려서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자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 목사님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 기적의 순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식사하면서 상대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법을 배웠고 무슨 말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말해야 할 때와 말하지 말아야할 때, 울어야 할 때와 웃어야 할 때, 사랑해야 할 때와 훈련해야 할 때를 배웠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의 상처조차 복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도 자신의 삶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 같은 어려움만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실제로는 손님으로 여기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도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실 때 포도주가 떨어졌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고 무조건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 하셨습니다.
“내 때”란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행하실 때를 말씀하신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데, “나는 이 집의 손님이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언제 역사하신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주인이실 때인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강제로라도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주차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초보 운전자가 운전대를 붙잡은 채 울면서 도와달라고 할 때, 무슨 수로 도울 수 있습니까? 운전대를 내려놓고 운전석에서 내려야 도와줄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회사에서 시간을 쓰고 돈을 쓸 때, 반드시 결재를 맡아서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주님이라 고백한다면 마찬가지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예수님의 허락을 구하게 됩니다. 음식 하나 사먹을 때도, 물건 하나 살 때도, 한 시간 여유 시간을 쓸 때마다 “주님 어떻게 할까요?” 물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아무리 귀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손님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삶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예수님께 순종하며 살 때 일어납니다.
:9 말씀에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고 했습니다. 온 세상이 예수님을 부인하여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성도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일 젊은이교회 2021년 총회가 열렸는데 여호수아 공동체의 대표인 원지연 자매가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작년 여호수아 대표로 콜링 받았을 때, 부끄럽지만 저는 제가 하나님께서 택하실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여호수아 공동체에서는 윗 또래이고 2년간 기획위원도 경험했으니, 저를 사용하시는 것이 가장 편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1년을 돌아볼 때, 사실 저는 하나님의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해 일하시기 위하여 매번 저를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제가 이전에 해봤는데 그건 안 될 거예요.’‘그렇게 말고 이렇게 하면 더 좋아요.’저의 얕은 지식과 경험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들이미는 교만한 저를,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삶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호수아 대표 자리로의 부르심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젊은이교회를 세워내라는 사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전혀 다른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저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여 매번 하나님을 외면하는 저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교회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저를 향해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부어주시고, 저를 위해 기꺼이 비효율적인 선택을 감내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원지연 자매를 통하여 지금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를 통하여 물이 포도주가 된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물이 포도주가 된 삶을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라 믿었기에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져 왔고, 종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대로 순종하라고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종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고 한 말은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순종은 부담이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릴 특권이고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 분위기입니까? 그렇다면 가나 혼인 잔칫집의 기적의 전반부가 이루어졌음을 믿음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일 년만이라도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보기 바랍니다.
죽을 때 가서야 ‘철드니 무덤 앞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우리가 시작할 순종은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돈 돈 하며 세상 성공과 맛있는 것, 재미있는 것만 찾으며 사는데 예수님이 역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예수님 없이 살던 삶을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삶으로 바꾸어 보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물이 포도주가 된 삶, 구원의 삶입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삶을 사는 열쇠입니다.
지난 예수동행교회 창립 2주년 예배 때 한 성도가 간증하였는데 간증 요청을 받고 마음이 참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작년에는 어머님에게 암이 발견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는 등 극적인 간증거리가 있었는데 올해는 그런 간증 거리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큰 어려움을 겪고 거기서 건짐을 받았다는 드라마틱한 간증 거리가 생기지 않은 것이 오히려 큰 복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은혜요 간증거리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매순간 그토록 신실하게 돌보시는데 간증거리가 없다며 투정부렸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했습니다.
이 분이 학교 교사이신데 2-30대 젊은 세대 교사들이 어느 날 회의 시간에 ‘교사라고 학생들을 다 사랑할 필요가 있나요? 우리도 한 명의 직장인일 뿐이죠’라고 말하는데 그 말에 공감하는 동료들을 보며 놀랐습니다.
새로 옮긴 학교에서도 ‘교사가 직업윤리만 지키면 되지, 굳이 학생을 사랑해야 할까요?’ ‘저는 세상에서 헌신이라는 단어가 가장 싫어요’라고 말하는 교사를 만나면서 사명감 가지고 일하는 자신이 오히려 동료교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버린 현실이 막막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행일기에서 그런 어려움을 털어놓으면 나눔방 지체들로부터 위로와 격려의 댓글을 받고 힘을 얻었다면서 “이것이 저의 간증입니다. 주님이 제 삶에 있는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고비 고비를 넘어갈 수 있도록 늘 함께 해주시는 주님이 저의 간증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면 매일이,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의 연속입니다.
최근 40일 동안 예수동행일기를 쓰신 한 목사님이 이런 소감을 쓰셨습니다.
“잠깰 때부터 잠잘 때까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살고 있다.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신 것이 점점 믿어진다. 동행일기 쓰기 전에도 예수님이 내안에 있다고 믿었지만 말과 행동이 내 마음대로였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함께하심이 믿어지면서 말과 행동이 자제된다.아내와의 싸움이 거의 사라졌다. 특히 차만 함께 타고 가면 늘 싸웠는데 동행일기 쓰면서부터 싸우지 않은지가 벌써 1달이 넘었다.
1주일에 1~2번 보던 19금 성인만화도 안 본 지가 1달이 넘었고 지금은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가장 끊기 힘들 정도로 시간낭비가 심했던 인터넷 뉴스, 유튜브 보기와 댓글달기가 이제는 끊어졌다.
동행일기 쓰기 전에도 노력은 해보았지만 되다 안 되다 반복이었다. 그러나 일기를 쓰고 나누니 반복되는 죄를 다시 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 않게 되었다.
아내와 딸을 전보다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하고 있다. 집안이 평화롭고 화목하다. 아내의 충고나 잔소리를 오래 참게 되고 아내의 잔소리가 내게 필요함을 느낀다. 아내가 집에서 내가 하는 모습을 장모님께 이야기하니까 장모님이 웃으셨다고 했다. 집안에 웃음도 회복되었다.”
예수동행일기를 만난 2021년은 신앙의 분기점이다.
여러분 이제부터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살아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제부터 마음대로 살지 않겠습니다.
먹고 사는 걱정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예수님 기뻐하실 일만 하겠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결심만 한다고 살아지지 않습니다. 뜻이 맞는 사람을 찾아 동행일기 나눔방을 만들고 일 년만이라도 매일 일기로 기록하며 살아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년에 간증 집회를 열면 어떻겠습니까?
간증자로, 믿음으로 자원해보기 바랍니다.
찬양: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첫 표적-혼인잔치 /요2:1-11/ 김형익 목사
2021-05-05 10:35:47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번째 기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에 기록된 7개의 표적 가운데 첫번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 기적들을 기적이라는 말로 쓰지 않고 표적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11).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기적은 그냥 어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라면 표적은 그 놀라운 기적의 배후에는 매우 중요한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그냥 육안으로 기적을 보고 믿는다는 것은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기적을 믿음의 눈으로 인식하게 되면 거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교훈과 증거가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표적 기사는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잘 아시다시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 사건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왜 주님께서는 하고 많은 이적 중에서도 첫번째 이적으로 술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술을 드시는 분들을 위해서일까요? 술 문제는 한국교회에서는 참 심각한 이슈가 되어온 것입니다. 잠깐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술마시면 천국가는가? 이것은 물론 구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단지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에서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인식이 한국교회 초기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술 마시는 것이 천국 가고 못 가고 하는 문제가 아닐지라도, 신앙이 어린 사람들이 시험에 드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즉 덕을 세우기 위해서 절제하는 것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물론이요, 신앙이 성숙할수록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지요? 왜 주님께서 첫 표적으로 술을 만드셨는가? 대답은 조금 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결혼잔치에 떨어져버린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것은 주님의 사역에 대한 매우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의미를 전달해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의 곤경: 포도주가 떨어졌다!(3a)
이 표적기사는 즐거워야 할 혼인잔치에 기쁨을 보장하는 포도주가 끊어진데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을 가집니까?
A. 잔치는 벌어지지만 기쁨은 사라질 것이다(시 104:15; 전 10:19).
여러분은 이런 상황을 아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잔치들이 벌어지지만, 기쁨은 쉬 사라지고 맙니다. 잔치는 흥겨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계속되는 잔치는 없습니다. 흥겨운 잔치가 끝나고 홀로 집에 돌아왔을 때 느끼는 외로움과 허전함 같은 것을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에 계속되는 기쁨을 제공할 수 있는 잔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속을 보면 결혼식을 할 때, 잔치를 일주일씩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손님들에게 계속해서 포도주를 제공해야 하는데, 아마 그러던 중 포도주가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간혹 당시 유대 사회에는 결혼식에서 포도주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 경우 소송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까, 이런 것은 정말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포도주는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 104:5에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라고 했고 전 10:19에는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결혼식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기쁨이 다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쁨은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나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를 온전히 기쁘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모든 인간의 곤경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B. 인간의 곤경은 축복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인간의 곤경은 사실 축복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간다고 해도, 영혼의 깊은 속은 채워지지 않고 너무나 목이 마른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축복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2. 인간의 해결 방식(3b~4)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잔치집에 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합니까? 요즘 같으면 어디 가서 사오면 되지만 그런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 주인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마는, 놀랍게도 이 잔치에 함께 참석했던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가가 나와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참석하신 것으로 보아, 이 결혼식은 예수님의 친척의 결혼식이었던 모양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상황에 대한 설명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12살 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놀라운 사건 등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는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께서 뭔가를 행하심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내심 기대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냥 한 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A. 인간 관계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좀 당혹스럽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은 거절입니까? 예, 거절입니다. 여기 ‘여자여’라는 표현은 무시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부인’하고 부르는 말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주님을 물었습니다.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머니가 육신의 모친으로써 저와 가지는 인간적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또, ‘내 생각과 당신의 생각을 별개입니다’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마리아가 이제 어머니로써 자식에게 명령할 수 있는 그런 때는 지나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개인적 관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께 대한 모친 마리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특별한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사라져버린 기쁨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관계로 되는게 아닙니다.
B. 인간의 선이나 좋은 뜻, 덕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마리아가 이렇게 예수님에게 부탁했을 때에 그것은 실로 선한 뜻이었을 것입니다. 해줄 수만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선이나 좋은 뜻, 덕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은 인간의 도덕적 선이나 좋은 뜻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영적인 무지로 말미암아 이것을 혼동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고 힘들어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은 그저 좋은 생각, 도덕적 선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3. 예수님의 관점(4, 11)
주님께서 주신 대답은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관계의 우선순위를 생각하게 합니다.
A. 관계의 우선순위
예수님에게 어머니 마리아보다 더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선적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이 가지시는 더 우선적 관계 때문에 일보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언제나 ‘당신을 보내신 이’이신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우선적일 수 있는 관계는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이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심으로써 이제 마리아는 뒤로 물러나서 구주를 필요로 하는 한 죄인으로 서야 할 뿐인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모든 삶은 전에도 그러셨듯이 철저하게 자신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살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B. 때(사명)
주님은 분명히 거절하는듯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거절은 사실상 부분적인 거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의 때가 아직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때는 여러 번 나오고 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결국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그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역사가 완전하게 만족되는 순간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긴장감을 고조하면서 그 때를 향해서 전개되어 가고 있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넓게 보면 여기서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은 메시야로서 공적 사역을 시작할 때를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살아가십니다.
C. 표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믿게 함
결국 주님께서는 이 표적을 행하셨는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 이것이 바로 표적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거기는 단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표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하는 모든 표적들은 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는 방법들입니다.
4. 하나님의 방법:
결국 주님은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 없던 포도주를 제공해주시는 이 일에는 사람들의 놀라운 순종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A. 믿음과 순종(5~8): ‘무엇을 명하시든지’,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 ‘끝까지’
주님께서는 하인들을 불러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7). 그러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마리아가 먼저 하인들에게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대답을 들은 마리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대를 꺽지 아니하고 하인들을 불러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본문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기대는 ‘무엇을 명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말을 하게 했습니다. 믿음은 조건을 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무엇을 명하시든지’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는 말씀을 하자,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명하신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요구는 하인들이 늘 하던 일인 결례를 위한 항아리에 물을 채워넣는 ‘사소한’ 주문이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보통 유대인들의 집에 손과 발을 닦는 정결규례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하인들은 주님께서 뭔가 대단한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주문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엄청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매일 매일 삶의 자리에서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들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이 없이 ‘엄청난 일’을 할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작고 사소한 일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순종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은 ‘끝까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아리에 다 물이 채워진 후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십니다. 연회장은 이 결혼잔치의 주인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나 전체 진행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하신 명령은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명령입니다. ‘물을 방금 떠다 항아리에 채워넣었는데, 그걸 떠다가 갖다 주라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떠다 갖다 주니까, 연회장은 이미 변화된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끝까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한 번 해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안잖아?’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게 되는 믿음과 순종은 얼마나 단순한 것입니까? 결코 주님은 힘들어서 하지 못할 일을, 힘에 부치는 일을 명하시지 않습니다. 하기에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이는 하기가 쉽지 않은 일들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만 압니다. 연회장은 어디서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나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서 보통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오고 사람들이 취해서 맛을 구분할 수 없을 때 질이 낮은 포도주를 내오는 법인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이제야 내오느냐고 놀라며 묻습니다.
그러나 신랑도, 연회장도 모르지만 하인들은 압니다. 혹시 신랑이 그 말을 듣고 나중에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아는 것과 순종을 통해서 이것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B. 충만과 넘침: 주님이 하시는 일 그리고 은혜의 특성(시 23:5; 롬 5:5; 엡 2:7; 3:8)
또 하나 이 표적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이 만들어주신 포도주의 양입니다.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라고 했는데, 여기 ‘통’은 약 9 gal. 정도의 양입니다. 그러니까, 두세 통이라고 하면 18 gal. 이나 27 gal.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돌항아리에 채워지는 물의 양이니까, 돌항아리 6개라고 하면 만들어진 전체 포도주의 양은 108 gal. 이나 162 gal.이 됩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여기서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 또는 주님의 은혜의 특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충만과 넘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부족하게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실 때에도 주님은 정확하게 맞추어서 양식을 만드시지 않았고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에 차게 남기도록 만들어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은혜를 주실 때, 약간 부족하게 주심으로써 나머지는 네가 해라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인색하시지 않습니다.
시편 23편에 있는 다윗의 고백을 아시지요? 그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베푸심의 특성입니다. 로마서 5:5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찔끔 하고 주신 것이 아니라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엡 2:7에서는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주님은 그저 대충 잔치를 마칠 정도의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다시 잔치를 처음부터 시작하고도 남을 만큼 풍성한 양의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자들은 점점 그 부요하시고 넘치도록 베푸시는 주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색함에서 관대함으로, 관대함에서 허비하듯 느껴질만큼 부어주는 사랑을 베풀게 될 것입니다.
5. 기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요 10:10; 15:11; 17:13)
이렇게 해서 곤경에 처할 뻔 했던 이 잔치는 처음보다 더 나은 기쁨으로 잘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술입니까? 왜 첫 표적이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까? 이것은 소경을 보게 하는 것도,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도, 못고칠 병을 고쳐주심도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서 주신 것도 아닙니다.
‘도덕적 차원에서, 긍휼의 차원에서 그다지 꼭 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나요?’라고 묻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저 남의 집 잔치에 술 마련해주시는게 메시야의 사역이며, 그 전능하신 능력을 그런데다 사용해도 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표적, 이보다 메시야이신 주님의 사역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얼른 보면 잔치가 열리는 것 같고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진정한 기쁨은 다해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내고 연출할 수 있는 모든 기쁨은 포도주가 떨어졌듯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냥 잔치만을 연출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혹은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야?’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이 왜 오신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그렇게 만나셨고 만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삶에 대해서 맛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이 누리시는 그 종류의 기쁨을 충만하게 경험해 보셨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A. 참 포도나무(요 15:1)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시편에서 말씀했는데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5:1). 주님이 우리의 모든 기쁨의 근원이 되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술이 아니고 주님이 기쁨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B. 참 기쁨이 될 포도주는 새언약의 피로 흘려질 예수님의 피다.
그렇다면, 기쁨이 될 포도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흘려주신 보혈, 곧 새언약의 피가 바로 우리의 참 기쁨이 될 포도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써 우리가 누리지 못할 기쁨을, 곧 다해버리고 마는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가 누리고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C. 잔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주님은 이 첫 표적으로써, 우리 모두를,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을, 삶에 지친 모든 사람들을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여기에는 결코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언젠가 다 떨어져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포도주의 기쁨이 아니라, 결코 다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으며 잃어버리지도 않을 참된 기쁨이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저 믿고 순종함으로써, 여러분은 이 잔치에 들어와 먹고 마시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요2:1-11/ 유기성목사
2019-05-24 02:11:39
요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올해 마지막 주일인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진지한 점검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목사님께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둘 있었는데, 하루는 작은 아이가 교회 문 앞에 붙은 <신천지 및 이단 출입금지> 포스터 문구를 읽고는 언니에게 물었습니다. “이단이 뭐야?” “예수님을 제대로 안 믿는 거.” “아.... 그럼 우리 교회 들어가도 돼?” “응.” “그럼 우리는 일단이야 삼단이야?” “몰라 그냥 모른척해.”
어린아이이니 귀엽지 어른이 이러면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 한 청년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나오는데 한 청년이 뛰어나와 인사를 하며 질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죄를 지으면 주님은 자신을 떠나 계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주님이 항상 우리와 하께 계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지을 때도 주님이 여전히 자신과 함께 계신 줄 꿈에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울먹였습니다.
우리가 정말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정말 내 안에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이란 말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도 듣기만 하지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친척이 유산 10억 원을 남겨주었다는 통보를 받았다면 그 사실을 알고만 지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일 년쯤 지나서 “아, 정말 놀라운 일이 있었어. 누가 내게 10억 원을 유산으로 주셨대.” 하고 또 한 번 10년 쯤 지나 “정말 놀라운 일이 내게 있었어.”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장 찾아 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에 임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왜 그렇게 무덤덤합니까?
요 2:1-11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 이야기입니다.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보여주신 표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믿음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기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신앙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에,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져올 수 있었고, 예수님께로 문제를 가져왔기 때문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이나,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나,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었기에 주님 앞에 나아왔고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여러분,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그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도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야 마땅할 것입니다.
한 친구 목사님이 답답해하였습니다. 주위에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중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어찌 그리 믿음 없는 말만 하는지, 답답해서 다그쳐 물으신답니다. “목사님, 하나님, 안 믿으시지요? 믿는데 그런 말을 해요?”, “장로님, 하나님 정말 믿으세요? 믿는데 그런 생각을 해요?”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말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까?
물론 기적만 바라는 신앙을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힘써야할 부분도 있고, 져야할 십자가도 있고, 유익한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만 바라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적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소확행’이란 말이 있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입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개켜진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입을 때의 기분 등을‘소확행’이라고 한답니다.
현실이 힘들 때 이처럼 일상의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태도는 바람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구원의 삶이 ‘소확행’에 불과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저 마음의 위로나 죽어서 천국 갈 희망 정도가 아닙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안에 또 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유목사, 또 사고치려는 거야? 기적이란 없어. 기적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야. 더 이상 교인들에게 희망고문하지 마, ‘소확행’이나 누리며 사는 것이 현실적이야! 너 그러다 사이비 부흥사나 감정적이고 수준 낮은 설교자처럼 보일까 걱정이다.’
그러나 기도 중에 2007년 10월, 병원에 한 달간 입원하여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전하는 말씀과 실제로 사는 삶에 틈이 생기는 것을 작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한 달 동안 모든 설교와 집회 일정을 취소시키시고 저를 병상에 묶어 놓으신 채 저를 다루신 문제였습니다, 증거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성경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가득합니다. 현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 힘들어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하나님의 기적이 지금도 일어남을 선포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성령집회 때, 기도 받으러 나오는 많은 성도들의 절박한 사정을 듣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구합니다. 암 진단을 받은 사람, 생계가 막막해진 사람, 가정이 깨어질 위기에 처한 사람, 늘 같은 죄에 넘어지는 사람 등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리 스트로벨 [기적인가 우연인가] 라는 책을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기적을 바랐다가 응답되지 않은 일로 잠시 마음이 무거웠을 때였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우리가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 안에서 살고 있음을 새롭게 도전받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믿는다고, 또 기대한다고 체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 집에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계셨으나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처음에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려 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고 누구에게나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도 자신의 삶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간증하시면서, “저는 무능력이 충만했습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다들 웃었지만 많은 성도들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서 어찌 무능력이 충만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문제를 예수님의 주인 되심으로 풀었습니다.
그 집의 종들에게 ”이 분이 지시하는 대로 하라.” 한 것입니다.
그 후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제 안에 임하셨으면서도 왜 제 삶 속에 역사하지 않으시는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오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런 역사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역사도 행하지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제 주인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나쁜 짓만 하고 살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실하게 살려고 애를 썼고 칭찬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었고 내 마음에 옳은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 삶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역사를 이루시지는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종들처럼 완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죽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려고 노력하면 중간에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결코 완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순종하면 완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항상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요 7:37-38에서 우리에게 보내실 성령의 역사를 강에 비유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사람들과 산과 들과 동식물들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강과 같은 역사는커녕 샘물 같은 역사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은혜의 강을 막고 있는 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둑이 우리의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존심, 생각, 지혜, 고집, 경험, 계획 등이 얼마나 강한지 아십니까? 은혜의 강도 막아 버립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인 자아가 무너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가정과 직장, 학교, 교회 안에 넘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강 같은 은혜의 역사가 나타났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번 신년부흥회에서 저는 ‘막힌 담을 헐라’ 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성령집회 때 일상에서 경험하는 기적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기적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으며, 이것은 결코 알고만 넘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되기 위하여 준비하는 전도사님들에게 “목회 성공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예수님의 종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아무도 안 가겠다는 곳이 있다면 주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도사들에게는 잔인한 말처럼 들렸겠지만 지금에서야 ‘진작 그런 자세로 목회를 하였다면 저도 살고 교회도 살았을 텐데’ 하고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사만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살 길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의 시작입니다. 나만 죽으면 가족도 살고 교회도 살고 직장도 삽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살 길이 열립니다. 고난도 축복으로 변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믿어지지 않습니까? 이해가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믿어지기까지 기다리기만 해서는 인생은 다 지나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평생 갈등만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죽는 것이 사는 길이었구나.’ 깨닫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진리를 결론삼고 ‘나 하나 죽으면 되는구나.’ 결론 내리고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여러분, 내게도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는 이 시대에 나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표적으로 삼으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죽는 은혜를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은 어떤 어려움이나 슬픔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강력한 기적입니다.
두려운 일은 기적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고 살았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 년 이 년 십 년 이십 년을 지내다보니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불평, 불만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적 속에서 기적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간 주신 말씀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가나 혼인잔치 집의 종들처럼 진정 예수님께 순종하며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며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표적으로 삼으소서.” 결단할 분은 일어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찬양: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다시 그 산으로 가자! /요2:1-11/ 김병삼목사
2018-11-07 03:15:40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호주 멜버른에서 집회를 인도하며 오랜만에 교인을 만났습니다.
아마 7년 전쯤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막 호주에 정착해서 스시맨으로 일을 시작한 집사님이 멜버른에 방문한 저를 대접하기 위해 집으로 초청을 했었기 때문이죠.
그 당시 저는 혼자 간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았던 일행이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자신이 배운 솜씨를 발휘에 음식을 만들었는데, 들어가면서 보니 음식이 조금 모자랄 듯하여 ‘라면’을 하나 끓여 달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음식을 못 먹어서 라면이 먹고 싶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밥상에 다 올라오지 않았지만, 더 준비한 음식이 있었던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혹시라도 대접하는 사람이 음식이 모자라 미안할까봐 저는 라면을 맛있게 먹었고, 하나 더 끓여 달라고 했습니다.
7년 만에 만난 김재용 집사는 그 때의 감정을 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은 어엿하게 한 가게의 사장으로 구글에 나타난 식당 평점에 4.9라는 높은 점수를 자랑하는 맛집의 주인인데. 그 때 자신이 만든 스시를 놔두고 라면을 맛있게 먹는 제 모습에 너무 창피하고 실망스러워 마음을 독하게 먹었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스시를 만들 때 마다 라면을 맛있게 먹던 제 모습을 떠올리며 맛으로 성공하겠노라고 다짐을 했답니다.
7년이 지나서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서로를 배려하며 했던 행동이 상처로 남을 수 있었지만, 상처로 끝나지 않고 ‘절치부심’ 한 끝에 성공적인 사람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을 지난다 해도, 그 시절을 지나 성공하면 과거를 웃으며 이야기하고 좋은 추억이 되는 것이죠.
오늘부터 다시 변화산에 오르려고 합니다. 늘 우리가 오른 던 그 산에 ‘다시’ 올라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한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 산에서 다시 경험하고 간증하기 위해서 올라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변화산에 오르려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너무나 당연한 물음 같지만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함”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상황에서 다르게 변한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에 수치심을 가져다주거나 상처를 주는 일이 없다면 우리의 성장은 멈춰버릴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산으로 가기 전에 어떤 기대를 가지고 가야할 지 마음과 삶, 그리고 영적인 준비를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올해 변화산에는 진짜 산으로 갑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영적인 등산을 마치고 교인들과 함께 등산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합니다. 만일에 있을 사태에도 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 처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시간을 위한 결단들도 필요합니다.
한동안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월드컵이 지나갔습니다. 요즘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장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언젠가 월드컵에서는 새로운 공이 공인구로 채택이 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선수들이 착용하는 옷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선수들이 신고 있는 신발과 무릎보호대를 포함한 유니폼의 무게가 얼마쯤 될 것 같습니까?
언젠가 남아공 월드컵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니,
다 합쳐서 760g으로 나와 있습니다. 유니폼 상의가 130, 하의가 118, 무릎 보호대 한 쌍이 100, 스타킹 한 켤레 82, 축구화 한 켤레가 330g에 불과합니다. 박주영이 신고 있는 아디다스 F50은 한 짝 당 무게가 165g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축구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게도 중요하지만 삼각형 모양의 스터드는 선수들의 가속도를 극대화시키고 발의 측변 움직임을 지지하는데 가장 적절한 신발이라고 합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 팀이 입은 유니폼은 나이키가 제작한 것인데 독일 월드컵 당시보다 10%가량 가벼워 졌습니다. 무엇보다 땀 흡수력과 배출력이 일반 면 셔츠에 비해 100배 정도 뛰어나고 공기 투과율이 초당 약 170cc라고 하는데 이는 성인 남자가 한 번 내 쉬는 날 숨의 4배 정도 되는 것입니다. 2002년에는 1119g 2006년에는 999g 그리고 2010에는 760g입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나요? 변화산을 오르기 위해서 우리들에게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들과 함께 그 준비를 위한 변화산 지침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겠습니다.
변화산 지침. . .
그리고 우리가 이번에 오를 산에 대한 정보과 등산로를 점검해 보겠습니다.
등산을 해본 분들은 다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산에 오르다보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묵묵히 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정상이 너무 멀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정상을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걸어온 여정이 나에게 힘을 주고, 멀기는 하지만 정상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변화산에서는 여러분들이 이 지도를 잘 간직하고 끝까지 변화산 정상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기대하시나요?
어느 교수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려서, 컴퓨터 119 구조대가 왔다. 그들이 컴퓨터를 고치다가 저장된 파일들 보니, ‘독수리.hwp, 두루미.hwp, 앵무새.hwp’ 등 전부 조류의 이름들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교수님, 새에 대한 논문을 쓰시나 보죠?”
그러자 교수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닐세, 그것 때문에 짜증나서 미치겠다네, 자료를 저장할 때마다“새 이름으로 저장”이라고 나오는데. . 이젠 생각나는 새 이름도 없다네.”
이게 무슨 유머인지는 이해가 되시겠지요? 세상이 무척 빨리 변화되고 있습니다. 아니 한 번도 이 세상은 정지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되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삶에 변화가 있고, 어려움이 찾아오고, 이해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속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의 해결도 분명히 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그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우리의 삶이 up-grade 된다는 것이지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자꾸 변화를 주는 이유, 새로운 신앙의 도전을 주고 삶의 도전을 주는 이유들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제가 트위터를 하고 facebook을 하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하는 이유들도 어렵기는 하지만 삶에 활력을 주는 일들이 아닌가요? 그냥 편안하게 살아도 되는 교인들에게 Q.T를 하자고 하고, 굳이 1년에 두 번씩 변화산에 오르는 이유 말입니다.
다음 주부터 오르게 될 7개의 산은 성경에서 삶의 전환기적인 역사들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왜 산에 올라야 하느냐고요? 그곳에서는 평상시에, 평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 인간의 합리성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 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상식과 합리성, 그리고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지 못하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지성, 감성, 상식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념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번 변화산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게 될 놀라운 일들은, “그 산”에 올라간 사람들에게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이 믿음을 시험하시고, 사명을 주시고, 결단을 내리게 하시고, 하늘의 비밀한 일들을 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산에 오르기 위해 “믿음의 행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어난 일들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정하신 방법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산에 오르지 않았다면 결코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런 기대를 합니다. 이번에 산을 오르면 여러분들 인생에서 “On Time”의 체험이 있기를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를 건축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한 적도 있답니다. “하나님도 돈 없어 보셨어요?” 그런데 그런 위기 가운데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민족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갈 때 마다 인용되던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우리가 잘 아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곳입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권능으로 임하셔서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마른 뼈들의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저에게도 그런 기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산에 올라가 서서 이런 마른 뼈들이 일어나고 힘줄이 돋아나고, 생기를 돋우니 살아 일어나는 그런 환상을 볼 수 있기를 말입니다.
문제 속에서 첫 번째 기적이. . .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이기에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저는 이번에 변화산 기도회를 준비하면서 우리 만나교인들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상식과 합리성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 기적의 삶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인간에게는 기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상식에 불과합니다.
오래전부터 변화산 기도회를 준비하며 예수님의 기적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기적에는 공통점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모든 현장은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그 문제 가운데서 주님을 신뢰하고 믿으며 순종할 때 일어난 일들 이라는 사실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첫 번째 주님의 기적 역시 마른 뼈와 같이 가능성을 상실한 가운데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부흥의 환상, 그리고 처음 포도주보다 나은 역사가 주의 이름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이 부흥의 역사입니다. 최악에서 최선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 역시 심각한 문제에서 시작합니다. 3절의 말씀“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이스라엘에서 포도주는 혼인잔치에 핵심이 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잔치를 배설한 주인이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아마도 본문의 정황으로 보아
이 가나의 혼인집이 예수님의 가정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초청했을 뿐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의 어머니가 직접 나선 것으로 보아 말입니다.
바로 이 잔치집의 심각한 문제 속에서 기적이 시작됩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문제 속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작용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절망과 어두움의 나락을 걷고 있을 때, 이 믿음의 법칙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캄캄한 어둠 가운데서 영롱한 별빛을 보고, 밝은 달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법칙에 의해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달은 한국에서 뜨는 달보다 훨씬 더 커 보입니다.
그 곳의 별빛은 얼마나 영롱한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은하수라는 것을 아프리카 케냐의 하늘에서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빛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 주변에 어떤 빛도 비추지 않는 어둠에서 만이 그 빛이 찬란하게 빛났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며 시내 산을 내려올 때입니다. 해가 진 어두운 길을 랜턴을 켜고 내려오는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잠시 쉬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고, 별들이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제가 교인들에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랜턴을 다 끄세요. 그리고 하늘을 보세요.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돌산에서 쏟아지는 별 빛을 본다는 것 말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광야가 아니며, 다른 빛이 있는 곳이었다면 결코 볼 수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은 인생의 어둠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아니 실제적인 밤에,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때에, 아니 밤보다 더 무서운 깜깜한 새벽에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 가나의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지만, 가까운데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던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빌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굳이 예수님에게 기적을 요청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용하기 시작하는 때는, 사방이 막혀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많은 자원들과 도움의 손길을 옆에 두고, 아니면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지 아니하는 불성실함으로 인하여 기적을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당신에게 캄캄한 어둠이 내려있다면, 바로 기적을 기대할 때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빛을 발할 때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인생의 밤을 지나가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때라는 생각을 하시지 않습니까?
시편 30편 5절의 말씀,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통해 기적을 창조하십니다.
문제가 없이는 기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변장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들의 인생이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어둠의 순간에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약점을 안고 갑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기적은 포도주가 모자랐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족한 것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기적을 가져오는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문제를 안고 변화산으로 갑시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그대로 안고 변화산으로 올라갑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 때문에 잘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이 일어난 후, 그 잔치의 주빈이었던 연회장이 한 말을 기억하시나요.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을 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10절).
만일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연회장은 그 맛있는 포도주의 맛을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실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인생의 막장까지 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변화산은 우리가 온전하기 때문에 오르는 산이 아니라, 부족함을 안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오르는 산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바닥나 봐야 하나님을 찾는 우리 인간들이기에 실패의 경험들과 부족함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만들어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담근 포도주가 떨어져봐야, 주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기적의 포도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문제없이 사는 것이 분명히 큰 축복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문제를 통해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어제의 문제를 오늘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이지, 그 문제가 우리를 실패한 인생으로 몰고 가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떨어진 포도주, 인생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질 때까지 심각한 문제를 모르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아무 문제가 없이 인생이 잘 나간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사실 우리의 인생이란 끊임없는 문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고 있으나,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다가오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제가 다른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힘 있고 능력 있는 설교는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삶에서 단점을 강점으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문제가 있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를 만나거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먼저 기쁘게 여기십시오.
야고보서 1장 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성경에는 약점 때문에 축복의 기회를 잡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삭개오 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던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 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키가 작다는 약점 때문에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되었고, 예수님의 눈에 특별하게 띈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의 축복의 만남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평생을 키가 작은 것 때문에 한탄을 하며 살았을 그가,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얻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다시 그 산으로 가자!”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올라가자는 말씀입니다.
문제를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문제를 안고 변화산으로 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변화산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변화산으로 가서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변화산으로 가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변화산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여러분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삶에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변화산에 오를 이유가 없겠지요. 문제를 알지 못하기에, 더 이상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기적도 체험할 수 없겠지요.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를 안고, 여러분의 삶의 모든 단점들을 안고 변화산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이미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무릎”이라는 시입니다.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꿇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주님을 믿는 믿음 위에서. . .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는데 모토가 되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민하게 되었던 것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려 해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이 인생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앎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주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닿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때로 모험입니다. 새로운 변화의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믿고 살아왔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무어라고 말을 합니까?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5절)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무엇을 말하든지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문 입구에 둔 항아리, 즉 발을 씻는 용도로 쓰이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을 때,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물을 채울 때 대충 채운 것이 아니라 “가득 아귀까지” 채웠는데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면, 물을 가져다 부어도 대충 채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주님을 신뢰하며 물을 채운 만큼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아귀까지 채웠기 때문에, 포도주가 아귀까지 만들어진 것이지요.
오늘 기적이 당신의 믿음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믿음으로만이 믿음에 이릅니다. 이 믿음에 이르는 자만이 영생을 얻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기적을 체험합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주님이 물결과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걸어오시는 주님의 모습은 유령과 흡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상식에서는 사람이 물위를 걸어온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바라보고 있었던 많은 제자들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주님이 허락하시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8-29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이것은 상식을 뛰어 넘는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어쩌면 상당히 다혈질의 성품을 지녔던 베드로만이 할 수 있었던 행동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모험적인 그 말에 주님이 “걸어오라”고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기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라는 책에서 강준민 목사는 이 부분을 아주 의미 있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시거든”이라고 했던 이 말은 주님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가 경험하고 알았던 주님에 대한 확신이라는 말이지요.
이 사건이 있기 전, 그가 보고 경험했던 주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말씀으로 왕의 신하의 아들을 낫게 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남자만 해도 오천 명을 먹게 하신 능력의 주님.
바로 그 “주님이시거든” 물위를 걷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무슨 복권을 사듯이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주님을 알기에 그 앎 위에 나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모험을 행하는 자만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 말씀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부흥의 역사를 위해 변화산으로!
이번 변화산 기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부흥이 무엇입니까? 포도주가 다 떨어져서 잔치를 파하여야 할 즈음에 주님께서 개입하시므로 이전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맛보고 잔치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아귀까지 채웠더니, 아귀까지 변화되는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이번에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에 특별한 변화산이 될 수 있도록 결단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산 하나하나를 정복하며 우리 인생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라고,
우리의 약함을 통해 놀라운 부흥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회장이 포도주를 마시고는 놀라 고백했던 말이 있지요.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고백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맛없는 포도주를 나중에 내는 것이 정상인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나중에 나올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인생이 끝난 것 같았는데, 어떻게 저런 놀라운 인생을 살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코미디언 김형곤씨를 기억하시나요.
정치 풍자개그를 하다가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던 사람,
그러나 정치에 실패하고, 두 달 만에 이혼을 하고, 사업이 실패하여 인생의 나락에 떨어졌던 사람, 그 사람이 변화된 모습으로 TV에 출연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살을 많이 뺐습니다. 살을 빼게 된 동기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다 자신을 포기할 때, 절대로 자신은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제조 일자가 아니라 유통기한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삶이, 여러분들의 나이와, 지금까지 살아왔던 여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여러분들의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기대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포도주의 기적을 경험하는 변화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 색깔이 변화됩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 맛이 변화됩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 삶의 질이 변화됩니다.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정을 우리의 일정보다 앞세우고, 그것을 위해 노력할 때 언제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지경을 넓혀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하면 놀랍게도 그 분의 멋진 응답을 알아보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기적을 경험하는 삶의 앞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절망의 항아리, 순종으로 채우다 /요2:1-11/ 김병삼목사
2017-05-13 09:44:06
[요한복음 2장 1-11절]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사흘째 되던 날”
가나에서 베푸신 기적의 이야기는 ‘사흘째 되던 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43절부터 51절까지는 예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율법에 기록된 선지자라고 소개하자,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런 나다나엘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라고 대답하지요. 그러자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50~51절입니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사흘째 되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처음 행하신 기적은 ‘더 큰 일’의 시작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사흘 때 되던 날은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이 계산하는 개념에 의하면 어떤 사건 이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단지 안식일이 지나고 사흘 때 되던 날일 수 있죠.
안식일은 토요일이니 화요일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기적이 일어난 날은 안식일이 아닌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난 장소도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결혼식장이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는 특별히 구별된 곳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난 문제 가운데 주님의 역사를 만나는 것이죠. 어떻게 해석을 하든, 기적은 우리가 정한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날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적이란, 우리의 삶에 특별히 구별된 곳이 아닌 곳에서 일어나지만, 그 기적으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만드는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적은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장소’를 구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첫 아이를 가져 출산을 앞둔 아내가 갑자기 배가 아팠다. 남편은 황급히 아내를 차에 태워 산부인과에 갔다. 남편은 진찰실 밖에서 아기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진찰실에서 의사가 걸어 나오자 남편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의사가 대답했다.
"배탈입니다. 배 아프다고 다 아기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어야 하고 형편에 맞아야 하죠.
예수님의 기적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 이후에는 3장에 니고데모와의 만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요한복음 3장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거듭남’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오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통해 ‘거듭남’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 말이죠.
거듭남이 무엇일까요? 죽음에 속한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가득 찼던 삶이 순종으로 인해 소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순간 더 좋은 포도주로 바꾸어주신 기적은 우리의 삶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일 것입니다.
기적의 시작
거듭남의 기적은 ‘포도주가 떨어진지라’(3절)에서 시작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보고하는데, 이렇게 표현합니다.
“포도주가 거의 바닥났구나!”
늘 그렇듯이, 기적의 시작은 우리 인생에서 바닥을 경험할 때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알았던 것처럼 잔치의 핵심이 ‘포도주’인데, 포도주가 떨어져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은 더는 잔치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잔치를 끝낼 때가 되어 바닥이 나면 괜찮은데, 잔치 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이죠.
‘난감함’ 누구나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것이죠. 난감함은 문제가 생겼으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을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의 행동 양식을 보입니다.
하나는, 난감함으로 인해 포기하든지, 다른 하나는, 난감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도움을 찾든지.
마리아는 이 난감함을 해결할 수 있는 도움을 아들 ‘예수’에게서 찾았습니다. 마리아는 30년을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수태고지’를 받고 낳은 아들이기도 하고, 어린 소년이었던 시절 예루살렘에서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자기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도 예수님의 모습을 경험해 보지 못했죠. 그런데 ‘난감함’ 가운데서 육신의 아들 예수님에게 부탁을 합니다.
오늘 ‘포도주’는 좀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한 난감한 상황이라기보다는 ‘기쁨을 표현’하는 순간에 그 기쁨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진 것이죠. 이러한 상황이 오면 우리는 그 기쁨을 표현할 수단과 방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가 아닌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시죠.
기적은 우리의 ‘요구’를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죠?
우리의 기쁨을 앗아간 곳에서 그 기쁨을 채우는 방법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기적이 온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때로 그 은혜의 수단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방향이 너무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수단을 통해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더 설명하겠지만, 물이 포도주로 변하자 그 맛을 표현하는 연회장의 말이, 이전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경험한 것 정도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채운 포도주는 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요구가 기적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정도에서 머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면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어도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우리에게 ‘기대’가 되는 것은 주님의 방법이 은혜의 통로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모든 기적이 그렇듯이, 기적에는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산’인데, 믿음을 시험하는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 ‘산’이 오늘 본문에서는 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냉정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 이 일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고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람의 문제,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진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마리아의 문제인 것이죠.
결국, 기적의 시작은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에서 해석해 놓은 것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관여할 일입니까? 지금은 나의 때가 아닙니다. 재촉하지 마십시오.”
혼인 잔칫집에는 아주 급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예수님께 그렇게 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언가 하시리라는 것을 말이죠.
이제 이런 공식이 성립합니다.
기적의 시작은 인간의 ‘난감함’에서 출발하고,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문제지만,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시작할 것이다.
기적은 예수님의 주권입니다.
기적이 인간의 ‘난감함’에서 출발했다면, 그 기적의 역사는 예수님의 주권으로 옮겨갑니다. 마리아의 위대함은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이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전적인 기대가 있었다는 것이죠. 5절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시키실지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문제를 가진 사람이 예상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권자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적에는 ‘믿음’과 ‘순종’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입니다. 기적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무엇을 시키실지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은,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 그 집에 놓여 있던 돌 항아리 6개에 물을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은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이 참 힘든 것은, ‘포도주’와 ‘항아리’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을 채우라는 것이 포도주 항아리였다면 이해할 만할 텐데, 그 항아리는 유대인의 예식에 의하면 집에 들어오는 주인이나 손님들이 발을 닦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이러한 상황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했다고 상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니지요.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명령이 불합리하게 보이죠.
사실 우리가 이 기적을 보면서 쉽게 간과하는 부분인데, 하인들의 역할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숨겨진 사람들입니다.’ 이 잔치의 주인공도 아닙니다.
사실 하인이라는 직책이 어떤 것인가요? 주인의 일이 정말 자기 일로 느껴질까요? 주인의 다급함이 자신들에게도 그렇게 다급하게 느껴질까요?
그런데 오늘 기적의 중요한 포인트는 철저하게 숨겨져서 드러나지 않는 하인들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운 것도 하인들입니다. 단순히 그냥 물을 부은 것이 아니라 아귀까지 채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을 때 순종한 사람들도 하인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명령을 따르기도 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항아리에 있는 물을 떠서, 연회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가져다줄 수 있습니까? 오히려 ‘포도주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오늘 물이 포도주를 변하는 기적의 순간이 언제인가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갖다 주었더니’ 하인들이 연회장에게 갖다 준 것은 포도주가 아니고 물이었습니다. 포도주로 변한 것은 연회장이 그 물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위험부담이 많은 일이었을까요? 포도주를 준비하는 것은 하인들의 몫이 아니라 주인의 몫일 테니 말입니다.
하인이란 그저 주인이 만들어 놓은 각본에 심부름만 하는 사람일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가운데서 가장 불합리한 일을 보고 있는 당사자들인데 말입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이지만 ‘누군가를 통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의 동역자가 되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회장의 반응이 아닐까요? 본문 9절을 보세요.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기적을 체험하고 사는 사람도 있고, 기적이 일어나도 기적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비밀한 기쁨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우리의 편이 아닐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기쁨을 만들어 주는 분이십니다. 이 비밀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인들이 아니었을까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 기적을 가능케 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입니다. 그때 그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어린 소녀가 수종 들고 있었는데, 주인에게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아람 왕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 허락을 받습니다. 열왕기하 5장 5절입니다.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 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여기서도 같은 공식이 성립됩니다. 나아만이 처한 ‘난감함’에서, 그 처지를 공감한 한 어린 소녀의 조언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기적의 주권에 관한 것이죠.
나아만이 생각하기에는 돈을 가지고 엘리사를 움직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찾아온 나아만 장군에게 ‘문둥병을 고치는 것’과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은 명령을 합니다.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순종하기 힘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요단강을 본 사람이라면 이해가 될 텐데, 요단강은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고, 기적을 일으키는 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강입니다. 나아만이 생각했던 것처럼, 물에 씻어서 병이 낫는다면 자신의 나라에도 그런 강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5장 12절에서,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가진 문제와 생각할 수 있는 해결의 ‘상관관계’로 본다면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낫게 된 기적의 중심에 그 상관관계를 뛰어넘어 순종하도록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문제의 당사자’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자’의 명령에 있다는 것이죠.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는 기적에서 ‘종들’의 역할이 마치 가나 혼인잔치의 ‘마리아’의 역할 혹은 하인들과 흡사합니다. 열왕기하 5장 13절입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그 말에 나아만은 순종했고, 문둥병이 낫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적의 주권이 기적을 행하는 자에게 있으나, 그 주권에 순종하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순종에도 ‘정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량’이지요. 물론 기꺼이 하는 순종도 있고, 억지로 하는 순종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의 결과도 그 순종의 분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기적은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요한복음 2장의 기적이 1장의 나다나엘을 만나서 제자로 부르신 일, 그리고 3장의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 매개체가 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나다나엘을 부르셔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고, 니고데모에게 영적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무엇을 깨닫게 하고 싶었을까요?
주님이 행하시는 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영적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맛본 연회장의 말입니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10절)
이런 비유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으로 살아가다가 그것이 다하면 ‘별 볼일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인생의 후반부가 더 멋질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변화된 거듭난 사람들의 인생은 이전보다 더 맛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빚으시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분량만큼 그 맛을 자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연회장이 이 비밀을 몰랐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의 이유를 이해하거나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 기적과 거듭남의 결과 때문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임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 놀람이 두려움이나 어두움이 아니라, 기쁨과 밝음이라는 것이고, 함께 기뻐하며 축하할 만한 일을 만들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12주 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묵상하며 기대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부족함’에서 출발할지 모르지만, 이전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바꿔 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우리가 순종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이해’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태생적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일까요? 그는 믿음이 좋아서 무슨 말에든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참 실수가 잦습니다. 하지만 순종을 배워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순종하기 힘든 일일수록 가장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죠.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축복은 아들 ‘이삭’을 얻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생각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잘 자랐고,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해하기 힘들기에 순종하기가 더욱 힘든 상황이었죠. 아브라함 인생의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순종하기 힘들었던 그 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언가 일을 행하실 때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되어 있죠.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는 일이지만,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하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들었어도 쉽게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처럼 밀이죠.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행하시던 방식이 아니라고, 이삭을 통해 이제 축복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항변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에서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우리 인생에서 계획했던 일이 아니라면, 우리 계획이 틀어졌다면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우리는 항아리가 ‘포도주’로 채워지기를 원하지만, 주님께서 ‘물’로 채우라고 하시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은 참 힘든 순종의 길을 가서 모리아 산에 이릅니다. 참 쉽지 않은 순종의 길 끝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자 기적을 경험합니다. 이미 그곳에선 하나님께서 제사에 쓸 숫양을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없었다면 ‘여호와 이레’의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것. 오늘 하인들의 숨겨진 순종과 마리아의 부탁, 그리고 주님의 명령이 없었다면, ‘최고의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한 가지 이야기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김운용 교수의 칼럼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감격과 찬양으로 섬기는 8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6월 진행했던 대학원 집중 강의에 박사 과정 중에 있는 몽골 선교사님 한 분이 들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교사로 가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울의 한 대학의 영문과를 졸업하고 1990년대 초 코이카 해외 봉사 단원으로 몽골에 갔단다. 그곳에서 통합 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 몇 분을 도와 초기 몽골 선교를 위해 학교와 교회에서 함께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그리고 몽골 사역에 그가 필요하다는 선교사님들의 말을 듣고 귀국해 장신대 신대원에서 공부하고 바로 선교사를 지원해서 갔고 10년 가까이 사역을 감당해 왔다.
언젠가 성장한 아이들에게 몽골에 오게 된 동기를 들려주면서 초기 사역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단다. 그런데 아이가 몽골의 초기 선교 역사의 기록을 찾아보았는데 아빠의 이름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더라고 했단다.
그래서 자신도 궁금해서 살펴보았더니 “초기에 안교성, 윤순재 선교사 등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더란다. 자신의 이름은 ‘… 등’이라는 글씨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문득 히브리서 12장의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말씀이 기억나면서 그 무리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작가인 그는 몽골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 소설의 이름을 <잊혀진 이름>이라고 했단다.
쓰임 받는 감격을 가지고 오직 주님의 이름과 사역만 세우려는 그런 분이 있어 오늘도 믿음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이 말이 우리 인생의 후반전, 아니 거듭남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기적이 아닐까요? 혹시 포도주가 떨어져 실패한 인생이라고, 내 인생의 잔치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망쳐진 나의 인생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어쩌면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최고의 포도주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삶, 그래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들.
순종으로 다시 시작하는 인생이야말로 최고의 기적 아닐까요?
참 멋지신 예수 /요2:1-8/ 김기석목사
2015-07-10 15:35:19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였다.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 소명
대림절 네 번째 초에 불을 밝히고 우리는 주님 앞에 모였습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여러분의 가슴에는 어떤 사건이 벌어집니까?
그 이름이 호명되는 데도 우리 속에 아무런 울림도 없다면 우리는 예수와 무관한 이들입니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많은 이름 중에 특별히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이름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맑아지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리 속에 흐뭇한 기운이 번져가는 이름이 있습니까?
요즘 저는 ‘예수’라는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죄송한 생각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인류가 피워낸 가장 아름다운 꽃이신 주님의 이름이 부정적으로 호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예수라는 분에게 매혹 당해 ‘그 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길을 나의 길로 삼고 살겠다는 장한 결심 때문에 저는 신학교에 갈 때 매우 비장했습니다. 결혼을 할 때도 예물과 가구를 준비하려는 신부를 만류하며,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목회자의 살림살이는 단출해야 한다고 강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설명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습니다. 저는 예수가 좋아 예수에게 미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예수의 길에서 일쑤 벗어나곤 합니다. 약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롭고, 강자들 앞에서는 당당하셨던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아 답답합니다.
2년 전 어느 날 소설가 이승우 선생은 제게 신간 도서 <<소설을 살다>>라는 책 한 권을 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책의 속표지에는 “소설로 인생에 복무하라고 충고해 준 김기석 목사님께, 고마움과 함께-!”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서명을 보는 순간 여러 해 전 워커힐 앞에 있던 그의 집필실에서 함께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저는 인생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좋아하는 일, 곧 가슴 뛰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형편이 안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그 일로 인생에 복무한다고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소설가이니 암담한 순간에도 소설로 복무한다고 생각으로 글을 쓰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셋 중 어느 쪽에 속합니까?
바람의 딸을 자처하는 한비야 씨는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애썼다’는 말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몽당연필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모두 잠시 동안 그분의 일을 하다가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사모하는 말 한 마디는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칭찬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은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일까요?
기다림의 절기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통해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2장은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는 두 가지 상징적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가셨다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은 사건이지만 이 두 사건은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유대인의 혼인
먼저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벌어진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뜬금없이 ‘사흘째 되는 날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어느 날부터 사흘째란 말인가요?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신지 사흘째라는 말일까요?
복음서 기자는 전후 사정을 다 생략하고는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고 말하더니 다짜고짜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한달음에 말해 버립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경쾌하지만 여기서 잠시 뜸을 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이들은 대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변화의 사건에 주목합니다. 물론 남의 딱한 처지를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따뜻함과 영문도 모르면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던 하인들의 순종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본문에서 생략된 부분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신 후 첫 번째로 찾으신 집이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집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도자 코헬렛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전7:2),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전7:4)고 말했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지금 출발을 좀 잘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알고 나면 좀 생각이 달라집니다.
유대인이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칩니다. 저도 복음서 기자처럼 다 생략하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을 하기로 계약이 성립되면 남자는 포도주를 따라 여자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고 싶습니다. 이 포도주를 당신에게 따라 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당신도 이 잔을 받아 마심으로 나의 아내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감동적인 프로포즈입니다.
그런 후 신랑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후, 신랑은 신부 집으로 아내를 데려 옵니다. 결혼하는 날, 두 사람은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는 뜻으로 금식을 합니다. 그래서 결혼식 날을 유대인들은 개인의 대속죄일(private Yom Kippur)이라고 부릅니다.
결혼식 절차를 다 마친 후, 신랑 신부는 ‘하나’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된 신방으로 들어갑니다. 의식이 끝나면 신랑은 문을 열고 나와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때부터 결혼식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혼인 잔치는 보통 이레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잔치를 위해 신랑의 가족들은 아주 오랫동안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음식이 떨어져 흥이 깨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처럼 고기도 먹고 포도주도 마십니다. 포도를 생산하면서도 포도주를 마실 형편이 못되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야말로 자기 생일입니다.
결혼 의례에 꼭 포함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헌신입니다. 그것은 신랑이 신부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하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칩니다.
둘째는 결단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옛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금식을 합니다.
셋째는 하나됨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신 주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넷째는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잔치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이 공생애의 시작을 혼인 잔칫집에서 하신 것은 참 적절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 네 가지 과정 전체가 예수님의 사역과도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 만남과 맛남
예수님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치러야 할 의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례 중 하나인 혼인 잔치에 손님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신방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환호성이 터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흔감한 마음으로 음식과 포도주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노래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흥이 나서 함께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노래에 춤이 빠질 수 없겠지요. 어깨동무를 한 채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 흥겨운 자리에서 예수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을까요? 그들의 행태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계셨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 흉허물 없이 먹고 마시고, 한껏 유쾌해지셔서 노래를 함께 부르고,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예수님像을 잃어버린 것이 교회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별명은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주님이 유난히 술과 음식을 밝히셨다고 유추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별명은 오히려 소위 경건하다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랫것들’(?)과 무람없이 어울리는 예수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곁에 친밀하게 다가서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잔치의 한 부분이 되어 유쾌한 기분을 즐기고 계시던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주님은 잠시 동안 망설이지만 곧 일꾼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시고는, 이어 그것을 떠다가 잔치 맡은 이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줄 알고 난감해하던 잔치 맡은 이는 갑자기 등장한 포도주에 놀랐고 또 그 맛에 놀랐습니다.
이야기의 도입이 느닷없었던 것처럼 이야기의 마무리도 느닷없습니다. 그 후의 소식이 궁금한 독자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요한은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너무 잔치 분위기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 사건이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표징(archen ton semeion)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주는 상징입니다.
첫 번째라고 번역된 단어 ‘아르케’는 ‘시작’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원’ 혹은 ‘근본’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가나의 이적은 첫 번째 이적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기원’으로서의 사건이라는 뜻으로도 새길 수 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의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삶은 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은 우리를 죄의식에 사로잡히도록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 앞에서 전전긍긍하도록 만드는 신앙이 아닙니다.
처벌의 두려움이나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 오늘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울적한 종교는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삶의 맛을 되찾게 됩니다.
• 빅 브라더 혹은 아빠 아버지
이제 잠시 요한복음 2장이 전하고 있는 다른 한 사건을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유월절 무렵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떤 격분에 사로잡히셨던지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도 둘러 엎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격정에 놀랍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이 이런 난폭해 보이는 행동을 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대체 예수님을 격분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인들과 결탁해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 종교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종교 권력자들은 죄에는 언제나 형벌이 따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우리 잘못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제물을 바쳐야 했고, 그 일을 대행하는 것은 제사장 계급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죄책이 커지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그들의 입지는 더욱 든든해집니다.
어떤 분은 ‘죄’와 ‘형벌’이라는 도식을 통해 사람들을 옭죄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종교인들의 행태를 가리켜 ‘Sin management’, 즉 ‘죄 경영’이라 했습니다. 그런 성전 체제를 향해 주님은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하나님은 빅 브라더(Big Brother) 하나님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과 허물까지도 받아 안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벌어지는 내적인 변화였습니다. 예배에 출석하고, 헌금 생활 열심히 하고, 봉사하는 모임에 동참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주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공명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에 공명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사람이 됩니다.
며칠 전 만난 어느 목사님은 자기 교회 여선교회 회원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며 혀를 찼습니다.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싸운다면야 좋은 일이겠지만,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함 때문에 싸우니 문제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니, 동역자들이 이래서야 되겠어요. 목사님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교회도 그래요’ 하고 말해야지요.” 그러자 다 같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웃음 끝에 한 목사님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습니다. “아휴, 싸울 교인들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여러분,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했습니다. 내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주변을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얼굴에서 행복한 웃음이 피어나고, 삶이 활기차지고, 그들 속에 숨어 있던 따뜻한 마음이 솟아오른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삶을 한껏 누리며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을 축제로 바꾸어주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복지 예산이 줄고, 우리가 복지를 즐길 때냐며 언구럭 부리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쓸쓸해진 이 세계, 포도주가 떨어진 것 같은 세계를 살맛나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시인 바이런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매/그 얼굴이 붉어졌다.” 여러분, 참 멋지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사람들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 꿈으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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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기쁨으로 사는 인생 /요2:1-11/ 이동원목사
2014-11-29 20:03:42
흥분과 모험을 찾아 한 평생 온 세상을 돌아다닌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직업의 다양성과 주거지의 다양성만으로 해도 기네스 북에 오를만 했습니다.
운전기사, 투우사, 사냥꾼, 종군기자, 낚시꾼, 권투선수, 사업가, 군인, 작가--.그는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에서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 전장에서는 종군기자로 일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했습니다. 쿠바에서는 군수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며 틈틈히 바다 낚시를 즐겼습니다.
파리에서는 특파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파리와 스페인을 무대로 한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역사적인 놀만디 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탄 비행기는 두 번씩이나 떨어졌지만 살아 남았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고 네 번이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가 쓴 한 소설 작품의 첫 머리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하나가 나둥그러져 있다. 과연 표범은 그 높은 산봉우리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고.
그는 마침내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자신의 이마를 겨냥하고 당긴채 쓰러져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작품의 주인공처럼 그는 정상의 산봉우리에서 쓰러져 피흘리는 표범의 운명이 된것입니다.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평생 인생의 기쁨 곧 스릴을 찾아 도전했고 또 어느정도 그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가 찾던 기쁨이 그의 인생의 장에서 떨어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의 자신의 존재를 이 땅에서 중단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본문에는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고 기쁨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그 위기를 더 큰 축제의 기쁨을 경험하는 기적의 순간으로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의 본문을 가르쳐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적은 갈릴리 가나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동일하게 기다리고 있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쁨대신 온갖 유형의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꾸는 희망은 기적뿐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약된 가장 큰 선물이 기쁨이라고 증거합니다.
성경이 그리는 하늘나라는 기쁨이 가득찬 잔치집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잔치 집이어야 할 우리의 인생은 차라리 초상집을 더 닮은 것으로 보여 집니다. 과연 우리의 인생마당의 슬픔을 축제의 기쁨으로 바꾸는 기적을 보고 싶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주 예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의 사건에서 무엇보다 먼저 관찰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거기에 초청함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1-2절을 읽어보십시오.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이 초청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의 초청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요한 복음 1장 마지막 부분은 나다나엘이 빌립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21:2절에 보면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가나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동네 잔치에 선생님이신 예수님과 동료 제자들을 초청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능한 추측이지요. 그러나 또 다른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 혼인집이 아마도 친척지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이 잔치집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을 근거로 한 추측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하튼 "예수가 --청함을 받았더니"(2절)라는 사실입니다. 나다나엘이 초청했건 마리아에 의해 초청되었던 저는 그날 대부분의 갈릴리 가나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요한 복음 1장에 의하면 침례 요한의 증거에 의해 요단강 일대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가난한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쁘게 이 초청을 수락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은 중요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잔치는 중요한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었던 작은 사람들은 중요한 사건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성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가나가 아주 작은 마을임에 불구하고 그들의 여행 스케줄에서 이 마을을 빼놓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초청되어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잔치마다 중요한 잔치가 됩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가정마다 중요한 가정이 됩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개인마다 중요한 개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미 증언하기를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마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1:12)라고 한 것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 그분을 초청하십시오. 만일 그 자리에 그분을 초청하는 것이 당신에게 부담이 되거든 당신도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힘들어도 당신이 안 갈수 없는 자리 그리고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당신의 주님이신 그분에게 함께 가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는 거기에 기꺼이 당신과 동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을 위한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주께서 기적을 행하신 자리로 기억될 것입니다.
2. 주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잔치에도 문제는 존재합니다. 어느 가정에도 어느 공동체에도 문제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피해 살아갈수 없습니다.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한 청년이 유명한 '적극적 사고방식'의 저자인 놀만 빈센트 필 박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마치면서 "선생님, 저에게 제가 지금까지 겪어온 그런 문제가 없는 직장을 하나 소개해 주실수 없습니까?"했다고 합니다. 박사는 그에게 "당장 소개하지요"하더니 그에게 "내 차를 타라"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나가 그의 사무실에서 몇 블럭 떨어진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더니 "형제여, 저 곳이야 말로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이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피해 인생을 살아갈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직면할 때 어떻게 하는냐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리아는 잔치집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런 문제 조차도 해결하실수 있는 주님이심을 알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믿었기에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나아와 "--포도주가 없다"(3절)고 잔치집의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마리아는 훌륭한 기도자의 모범입니다. 그녀는 카톨릭의 주장처럼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의 훌륭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여기에 "여자여"라는 말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윌리암 바클레이는 여기서 사용된 '여자'(gunai)라는 말은 본래 로마의 황제 어거스투스가 에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사용한 최상의 존칭이었다고 하면서 영어로는 "Lady"라고 번역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마리아는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문제가 있으십니까? 포도주가 떨어지셨습니까? 포도주는 유대인들에게 인생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격언처럼 사용되던 말에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Without wine, there is no joy)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없어지는 곤난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험은 누구에게도 예외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헤밍웨이처럼 말입니다. 오직 기도를 배운 사람만이 기도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기적의 시작인 것입니다.
3. 주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이 소개하는 기적의 결정적인 열쇠는 순종이었습니다. 특히 하인들의 순종이 돋보입니다. 7절에서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도주이지 물이 아니라고 항의할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7절) 8절에 예수께서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당신이 우리를 망신시킬 작정이냐고 항의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8절) 그리고 순종했던 그들은 기적의 비밀을 이해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9절에 "하인들은 알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기적은 믿음의 기적이었고 순종의 기적이었습니다. 때로 주님은 우리에게 비 합리적이고 비 이성적인 일을 요구하실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합리적 이성의 틀안에서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은 체험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제가 합리적 이성을 존중하지만 이성에만 묶이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적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순종이 가져온 기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돌 항아리 여섯에 넘쳐나는 포도주의 기쁨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항아리에는 20-30갤론의 물을 부을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섯 항아리면 120-180갤론의 포도주가 예비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한 사람에게 열잔씩 돌아가도 200명분을 대접할 만한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풍성한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양만 풍성함이 아니라. 질적으로 비할데 없는 맛을 지닌 포도주였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손님들은 처음보다 나중에 더 좋은 포도주가 나왔다고 했겠습니까?(10절)
그래서 예수님은 가까스로 우리의 필요만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이런 풍성한 축제의 기쁨으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단순히 기적이 아닌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표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결정적으로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믿게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처음 제자들을 위해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그는 오늘의 제자들을 위해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그가 갈릴리 가나의 이름없는 마을에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오늘 우리의 마을에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그가 이름도 표기되지 않은 무명의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이 무명의 신랑 신부를 위해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나같은 무명의 가정을 위해서도 무명의 인생을 위해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초청하십시오.
그분에게 이제 기도해 보시지요. 그리고 순종을 결단해 보십시오. 기적의 축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은 축제의 기쁨으로 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는 최근 주님의 선교명령에 순종하여 분당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중국 연변으로 떠나 교수생활을 하는분의 부인되시는 자매님으로부터 아름다운 이 메일 편지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편지를 읽으며 이 분이야 말로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분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가슴 가득히 밀려 왔습니다. 한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연변의 가을은/코스모스 꽃들이/들꽃들이/맑은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흰구름이/미루나무 숲 사이로 반짝이며 비치는 가을햇살이/싸늘한 가을바람이/조용히 제곁에 다가와 속삭입니다./저와 친구가 되어 이 아름다움에 함께 머무르고 싶다고/요즈음 이곳 건너편 미루나무 숲길을 산책하였는데/미루나무 숲 사이로 비껴 가는 가을 햇살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이 정경을 마음으로 스케치 해두었습니다.-
-/또한 오는 길에 들녁에서 보라빛과 핑크빛 들꽃들을 한아름 꺽어들고/얼마나 행복해 했던지/집에 와서 여기저기 들꽃으로 단장을 했습니다/바흐의 무반주 협주곡을 들으면서/연변에서의 단순한 생활/이곳에서 욕심없이 이렇게 사는것도 아주 행복한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1원짜리 뻐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시장을 보며 먼지투성이인 곳을 누비고 다녀도/웬지 재미있고 행복함이 넘치곤 한답니다./비록 타고 다니던 그랜저 자가용이 없어도/비록 값비싼 옷을 입지 않아도/비록 좋은 집에 살지 않아도/비록 제 마음에 드는 좋은 가구가 없어도/구름 타고 오실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며/들꽃들과 더불어 사랑을 속삭이는/큰 기쁨이 마음속에 넘친답니다.---"
오늘 이분이 경험하는 동일한 기쁨, 주님 주신 축제의 기쁨을 우리 모두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2,000년전 이 기쁨을 빼앗긴 인생들을 위해 이땅에 오시사 친히 우리의 슬픔과 슬픔의 원인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신 그분은 오늘 우리의 주가 되셔서 이 기쁨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싶어하십니다. 넘치도록 말입니다. 만일 이 예수를 우리의 인생의 축제의 주인으로 모신다면 이제 곧 당신에게도 잔치가 시작 될 것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잔치 석상의 문제와 해결의 단추는 무엇이었습니까?(3절)
2. 잔치집의 문제 해결을 위해 마리아가 제시한 방편은 무엇이었습니까?(5절)
3. 본문 7-8절에 의하면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열쇠는 무엇이었습니까?
4. 예수께서 행하신 이 첫째 기적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11절)
5.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기쁨을 회복해야 할 삶의 영역들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물 떠온 하인들만 알더라 /요2:1-11/ 하용조목사
2015-05-27 16:20:48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첫 번째 일으킨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푸신 기적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기적은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이거나 기적을 위한 기적을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먹을 것을 만드셨고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에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외로운 것은 너무나 인위적이기 때문입니다. 부부생활, 자녀교육도 어떤 목적을 두고 하다보니 갈등이 생겨납니다. 사랑이나 기적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런 기적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과시하듯이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나 나사렛에서 베풀지 않고 사람들이 많지 않은 평범한 마을 결혼식장에서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도 과시적이거나 형식적인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따뜻하고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봉사와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지혜있고 영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의 기적이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잔치에 시종을 드는 종들이 영적인 감각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여러분을 통해 일어나길 바랍니다. 우리의 순수함, 헌신, 지혜, 간절한 마음을 통해 모든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적에서 배우는 것은 관계와 때입니다. 우리는 기적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했는데 이 말은 나와 먼저 관계를 맺고 난 후에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당신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 내가 원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적에는 언제나 ‘상관관계’와 ‘때’가 중요합니다.
■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부족하다고 예수님께 얘기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에 마리아는 노여워하거나 섭섭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그 말을 거절로 생각하지 않고 응락한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신앙은 해석입니다. 해석을 잘하면 인생이 즐겁습니다. 그 사건에 의미가 있으면 모든 곳에 축복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나의 믿음을 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즉시 종들에게 얼굴을 돌렸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시니라
보십시오. 마리아는 종들에게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중요한 기적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은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기적을 베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적을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싶다면 당신의 생각이나 철학, 상상력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사상, 묵상, 생각에는 기적이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의 철학이나 사상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허무하게 됩니다. 당신이 따라다니는 지도자, 사상은 당신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보고 묵상하십시오. 말씀이 시키는 대로 행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데는 기적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내 생각이나 사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또 한 가지 배우는 것은 기적에는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합 소리로 허공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술사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보면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인 것을 보시고, 그 재료를 보시고 기적을 베풀 것을 생각하십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공중 나는 새를 보고 설교 재료를 삼으십니다.
5천 명이 배고플 때 어린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엘리사는 가난한 과부가 굶주렸을 때 빈 기름병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헌금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드린 헌금으로 엄청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여러분의 작은 은사를 바치면 하나님은 그것을 극대화 시켜 큰 축복의 그릇으로 삼으십니다.
■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예수님께서 돌항아리 여섯 통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시자 종들이 항아리 아구까지 물을 채웁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합니다.
종들은 ‘어떻게 물을 채울까요’라든지 ‘왜, 언제, 어떤 물을 채우라는 겁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작은 봉사를 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합니다. 자신의 봉사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따지고 묻습니다.
하인들에게서 배울 점은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구까지 물을 채웠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의 따뜻한 믿음도 보지만 하인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도 봅니다.
‘물 채우라’는 말에 아구까지 채우는 것을 저는 ‘충만한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이 제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요즘 사람들은 너무 삭막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계산합니다. 일하는데 여유가 없고 각박하고 살벌합니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경험합니다.
우리에게 물을 채우라고 한다면 할 수 있는 반응이 세 가지 정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눈에 보기에 좋을 정도로만 적당히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적도 적당히 일어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는 척만 할 뿐입니다.
물통을 들고 왔다갔다 하면서 일을 다하는 척하지만 정작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조용히 물을 아구까지 채웁니다. 충만한 사람, 충만한 믿음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물을 채우라는 말씀에 아구까지 채우는 믿음을 보여 준 하인들은 이제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을 때 갈등 없이 떠다 주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 작은 순종에 주시는 큰 축복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심도있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을 항아리에 채우는 것은 그저 물을 채우는 것이기에 갈등하지 않고 누구라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은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물을 발씻고 손 씻는 데 갖다 주라면 그것은 상식이기 때문에 별로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회장에게 갖다주라는 말은 그 물이 ‘술’이라는 뜻입니다. 물을 술인줄 믿고 갖다 주라는 말은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그때 사람은 갈등하게 됩니다. 내 이성과 상식과 경험에 맞지 않는 말에 갈등하고 따지게 됩니다. 의심하고 주저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봉사하다가 주저앉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 종의 위대함은 그 맹물을 갖다 줬다는데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맹물을 떠다 주는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들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경험하는 작은 세계 안에 속하지 않습니다.
저는 16년 전 횃불회관에 12가정이 모여 시작한 온누리교회가 이렇게 큰 교회가 된 기적과 역사를 뭐라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온누리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물떠온 하인처럼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이성에 맞지 않아도 순종할 뿐입니다.
기적은 그분이 베푸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에도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찬란하고 복된 미래가 여러분 앞에 전개돼 있음을 믿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연회장은 포도주 맛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인들이 갖다 준 물을 먹고 자신이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향긋하고 신선한 포도주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문에는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이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고 물떠온 하인들은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적은 당신이 믿고 순종하는 순간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맹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준 순간까지도 그 물은 맹물이었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갖다 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물을 도로 퍼다 줄 바에야 왜 항아리에 넣었다 퍼내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과정입니다. 맹물을 들고 하인들이 연회장앞에 갔는데 그 과정은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연회장이 그 물을 먹는 순간 그것은 향긋한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면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언제 였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적은 이렇게 여러분이 알 수 없는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기적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과정입니다. 겨울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온 천지에 하얀 눈이 덮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눈은 아침에 한꺼번에 온 것이 아니라 밤새 내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적의 연속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적이고 축복이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을 보면서 우리는 구원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말은 나쁜 물이 좋은 물이 되었다거나 물의 악취가 제거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분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본질적 변화입니다. 내 인격의 성숙이나 양심이 청결하고, 도덕성이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나와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본질적 탄생의 의미입니다.
물 떠온 하인의 사건을 통해 두 번째 배우는 것은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그 비밀을 알지 못했지만 물 떠온 하인들은 그 비밀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은 자만이 압니다. 옆에서 구원받은 사람을 아무리 구경해도 알 수 없습니다.
■ 승리하게 하는 힘
물 떠온 하인들은 연회장이 감동할 때 흐뭇하게 웃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포도주 맛을 본 사람은 큰 일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의 현장을 경험한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분명히 자기 손으로 맹물을 떠다 주었는데 그것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힘이 없는 것은 체험적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체험적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실제를 경험하고 내 삶의 본질이 변화되는 경험이 힘이고 능력이며, 감격이며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어떤 위기와 어떤 고난에서도 승리하게 하는 힘이 이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세상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을 봅니다. 세상사람들의 관계는 처음에는 다 좋다가 나중에는 싸우고 비참하게 헤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들의 관계는 처음에는 서먹하지만 나중에는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을 보면서 괜히 좋고 행복합니다. 시적이고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마음을 갖게 해줍니다.
포도주가 모자란 것을 본 마리아의 안타까움과 갈등을 상상해봅니다. 이것은 인간 삶의 현주소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의 의미, 기적을 베풀기 위한 믿음과 순종의 비밀,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기적과 축복,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의 감동. 크리스천이 가는 곳에 이와 같은 감동과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포도주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여유가 생깁니다. 물떠온 하인들만 아는 미소와 기쁨이 한데 어울려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처음 표적을 가나에서 베풀었을 때 가장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연회장과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예수님이 영광을 받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번째는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 삶에 계속되는 기쁨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의 삶에 날마다 이런 기적이 계속되기를 축원합니다. 미래는 내가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를 막지 않습니다. 나의 과거의 상처와 패배와 절망의 생각이 언제나 미래를 향하는 나를 막는 것입니다.
‘넌 해봐야 안돼. 이번에도 너는 망할꺼야’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어서 좋은 머리와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를 단절하십시오.
‘나와 함께 가자’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다시 사업하면 성공할꺼야, 다시 일어나면 회복될 수 있어’ 예수님은 미래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고 그런 축복을 우리의 믿음을 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은 기적의 주인공입니다. 나이를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돈이 없어서, 병들어서 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과 믿음이 없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며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나누어 주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 머리숙인 당신의 종들 중에
병든사람이 있거든 치유해 주시고
움츠린 자의 가슴을 열어 주시고
부정적인 생각의 사람을 바꾸어 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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