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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1장 19절 - 34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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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만 드러내며 살자 /1:19-42/ 유기성목사

2022-02-17 10:11:30

 

여러분, 오늘 진정 복된 삶이 무엇인지 분명한 눈이 뜨이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살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대부분 후회하고 낙심하고 허무해 합니다.

 

그것은 노력을 안해서도 아니고 재능이 없어서도 아니고 배경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 복된 삶인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헛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복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며 나아가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얼마든지 복된 인생을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성공하는 삶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 동안 명의 선지자도 출현하지 않았던 영적 암흑기를 깨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요, 세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고 약대 털옷을 입고 지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오시기로 메시야가 아닐까?’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조차 두려운 마음으로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요? “엘리야요? “그 선지자요?”라고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지체하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그저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23)라고 대답했습니다. 말은 마치 임금의 행차 앞에서 "임금님의 행차요" 하고 외치는 자의 소리 같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 사용되었던 ‘희생양’을 말합니다.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자신을 소리라고 말한 의미였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목적인지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 누군가 문을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될 , 문을 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역할이 가장 귀하고 복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도 자기를 드러내려는 사람들과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요네즈, 토마토케첩 등으로 유명한 '하인츠' 설립자 헨리 하인츠가 1919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예배당을 건립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에 자녀들은 피츠버그 대학 캠퍼스 내에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부친과 할머니를 위한 예배당을 완공하고, 이름을 '하인츠 기념예배당'이라 붙였습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예배당은 피츠버그 대학의 상징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어디를 둘러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볼 없답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인츠' 가족들의 이름과 흔적 밖에 없습니다. 목사도 있고 주일마다 예배가 드려지지만, 예배당은 주님과는 무관한 인간 하인츠를 기념하는 예배당일 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 얼마나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였습니다,

:27“그는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만한 자격도 없소”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32 요한이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를 때는 예수님만 드러내라는 말이 짜증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있나?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만 드러내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사촌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보통 사람 같으면 질투심으로 얼굴빛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사실 1-2년의 공생애를 살다가 베임을 당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닮고 싶겠습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중에 가장 자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 요한보다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진정 복된 조건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없습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주의 ]이라 불리었지만 실제로는 주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가 무슨 종입니까?

그런데 제가 회심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소원이 오직 가지뿐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 “수고했다, 종아” 말씀을 들을 있다면 어떤 것도 포기할 있을 같았고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을 같았습니다.

이런 마음이 특별했던 것은 평소에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왕 목사가 것이면 목사로라도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 리서치 센터]라는 곳에서 2021 , 17 선진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에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 대부분의 나라 국민은 가족이라고 대답했는데, 오직 한국만이 ‘돈’을 첫째로 답했습니다. 17개국 평균 응답에서, 2위는 직업, 4위는 친구관계였는데 직업과 친구관계는 한국에선 순위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조사 결과에서 정말 마음 아픈 것은 한국인 중에 신앙이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1%였으며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일본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은데 기독교인조차도 신앙보다 돈을 최고 가치로 생각한다는 결과입니다.

 

목사로라도 성공하고 싶었던 저도 다를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회심할 하나님이 종이라 불러주시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이었겠습니까? 느낌을 잊을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흔들릴 때가 오지만 느낌이 너무나 선명하기에 다시 방향을 바로 잡고 바로 잡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도 세례요한처럼 예수님만 드러내는 삶을 살자고 담대히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저절로 그렇게 살고 싶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14:8)라고 말했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고백하였습니다.

고백은 고통스런 고백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의 환희에 노래입니다.

 

나는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께서 예수님 머리에 임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믿는 것이고 이렇게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큽니까? 주님을 바라보기만 했던 세례요한이 큽니까?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가 큽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인이 낳은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 하시고는 이어서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1:11) 하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을 알고 얼마나 행복한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이렇게 평안해도 되나’ 걱정이 정도였답니다. 그런 중에 목사님의 교회 문제를 지방 감리사님이 잘못 처리한 때문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시시비비를 밝히는 글을 조목조목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면 분쟁을 이기고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들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위의 권세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3: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너무 억울하고 가슴이 답답하더랍니다. 게다가 모든 지방 목사님들 앞에서 공개 사과까지 하라는 마음까지 주셨습니다. 떠오르는 생각이 이것이 자존심의 문제인가? 주님의 자존심 문제인가? 였습니다. 결국 자존심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은 목사님은 결국 순종하고 모든 교역자 앞에서 공개 사과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 목사님은 자기가 이긴 알고 좋아하더랍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지방회를 분란에서 건지시려는 주님이 이기신 것입니다.

 

형제교회 목사님 분이 예배를 인도하려고 강단에 올라갔는데 눈에 익은 사람이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반가운 마음보다 불편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교회 일을 맡겼는데, 하다가 아무 소리 없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고 넘게 연락도 없었습니다.

 

‘사람을 잘못 책임이지’ 여기고 서운한 마음을 접었는데, 교인이 다시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하여 기도했답니다. ‘주님, 잃어버린 마리 양을 찾아나가야 마땅한데, 잃어버린 양이 발로 찾아왔는데도 저는 사랑으로 그를 맞아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바로 목사님의 실상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인을 탓할 자격도 없음을 깨달았고 그런 자신이 어떻게 예배를 인도해야 할지, 무슨 자격으로 설교해야 할지 난감하여 기도하였답니다. ‘주님,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교만하고 사랑 없는 저를 보지 마시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온 성도들 때문이라도 은혜를 내려주세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같았습니다. ‘아니다. 나는 너를 통해 은혜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눈물로 예배를 시작할 있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예수님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순간이 생깁니다. 순간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 준비를 마무리 하면서 조용히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여, 제가 교회에 유익한 존재입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실까? 생각했습니다. 설교일까? 리더십일까? 목회기획 능력일까? 아닙니다. 오직 가지, 언제나 예수님만을 드러내었느냐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님만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게 것입니다.

 

찬양: 이름 예수(우리를 구원하신 이름 예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사람 /1:19-42/ 김다위목사

2022-02-17 10:23:46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지난 10월에 “세상의 중심, 나”라는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올해 봄과 여름에 걸쳐서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응답자 중의 67%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응답했고, 그렇기에 64%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돈을 쓰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평소에 자신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80% 관심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10대는 주로 자신의 ‘외모’에 20대는 주로 ‘건강과 성격, 직업’에 30, 40대는 ‘건강과 재력’에, 50 이후로는 압도적으로 ‘건강’에 관심이 많다고 답했습니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인가?”라는 질문에 53% 그렇다고 응답했습니다. 한명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무척 관심이 간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인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복된 삶을 사람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비밀이 오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로마를 대적할 메시야가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말라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엘리야를 보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사람들은 궁금했던 겁니다.

 

그가 누구냐? 그가 오리라고 했던 엘리야인가?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세례 요한의 옷차림만 보았을 정말 엘리야와 닮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그는 낙타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처럼 회개를 외쳤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가 메시야인지 궁금했던 겁니다. 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누구이기에 회개를 외치며 당신은 누구이기에 세례를 줍니까? 25절에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은 그가 세례를 베풀도록 권위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상 질문은 “당신이 그리스도요?”라고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구원자니까, 다시 말하면 당신이 구원자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지금과 같은 대선 시기에 적합한 질문입니다. 어느 후보에게 묻든 자신이 구원자, 바로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러나 질문은 역시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인생을 이끌며 오로지 자신에게만 주목하는 인생이라면, 똑같은 질문이 우리에게 던져질 겁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요?

 

당신이 그리스도냐는 질문에 세례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1:2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그는 고백하였다

 

뒤이어 당신은 엘리야요? 당신은 예언자요?라는 질문에도 그는 아니오, 아니오 아닙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그리스도 비슷한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지난주에 질그릇과 보배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질그릇에 보배가 담기면 복음의 광채가 환히 비칩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통해 증거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질그릇은 보배가 아닙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는 “보배”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빛’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1:8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그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보배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단지 빛을 “증언”하는 자입니다. 증언이라는 말이 오늘 말씀의 핵심 단어입니다. 19, 32, 34절에 증언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1:34 ..그래서 나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성령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증인이었습니다. 그가 보고 들었기에 이제는 말할 있는 , 증언하는 자가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증언하는 ,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23절에,

1:23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구원자입니까? 엘리야입니까?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타인들이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 만일 이러한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SNS에서 팔로워가 늘어나고 소위 인플루언서 influencer 되면 좋겠지요? 그것이 선한 영향력의 통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향력을 키우고 싶은 이면에 자신의 존재감을 남기고 싶은 매우 교묘한 욕심이 스며들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때가 영적으로 보면 아주 위험한 때일 있습니다.

 

누가 이런 글을 것을 보았습니다. SNS마다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블로그: 내가 이렇게 전문적이다

인스타그램: 내가 이렇게 먹고 있다 (먹빵 사진)

카카오 스토리: 아이가 이렇게 크고 있다

페이스북: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

 

물론 웃자고 말이겠지요. SNS 서로 연결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한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목받고 싶은 욕망의 도구로도 쓰일 있어요. 미국의 10 자살률이 오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소셜 네트워크 때문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남들은 “좋아요”와 “사랑해요”를 그렇게 많이 받는데, 나는 받지 못해서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겁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 얼마나 우리가 목말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알고 주를 알기 전에는 절대로 채울 없는 갈증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왕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왕이 되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승승장구 합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택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고 모두 진멸하라고 했는데 동물들이 아까워서 좋은 것들은 가져옵니다. 그걸 보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삼상 15:11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시 말해 이상 그가 하나님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울은 그것도 모른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음 자기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서 꾸짖으며 말합니다.

 

“왕께서 주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이상 주목하지 않았으므로 이상 왕은 왕의 자리에 있지 못하게 겁니다. 그가 말씀을 듣지 않은 아닙니다. 단지 건성으로 들었고, 별로 중요하게 듣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울도 주님께 예배한 사람입니다. 사랑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사울에게 주목하고, 칭송하고 그의 용맹과 업적을 기리자 그는 시선을 ‘자기 자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님” 나에게로 돌렸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내가 괜찮은 왕이구나. 나의 헌신과 지도로 전쟁에서 이겼구나.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주님이 사랑하십니다. 예뻐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내가 하는 일과 사업이 내가 잘나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돌보심입니다. 보호하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님”으로 시선을 돌릴 바로 , 이상 하나님은 사울을 쓰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시선이 몰려오고 칭송이 들릴 이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전쟁은 저로 인해 이긴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셨을 ,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공로를 주님께로 돌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 가야 영광과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던 겁니다. 그것이 ‘사울의 기념비’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 회개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조차도 그가 메시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때에 단호하게 외칩니다. 저는 그저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여러분,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형체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리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소리를 사용하셔서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소리는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만 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소리라고 소개한 겁니다. ,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천둥과 같은 소리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외칩니다. 29절입니다.

 

1:29 다음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목된 시선을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께로 돌립니다. 어린양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삭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셨던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은 출애굽 당시 장자의 죽음 앞에서 생명을 대신하여 죽은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어린 양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죄를 십자가에서 지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어린 예수님을 붙잡으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인생이 어떻게 될까에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중요한 이슈입니다. 누구나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어린 양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했을 뿐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사는 그의 삶이 참으로 복된 삶이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유일한 청중”이 있다면, “유일한 타자”가 있다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주님은 세례 요한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11:1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인물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모세보다 다윗보다 인물이었다는 겁니까?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주님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오직 주님께로만 돌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대 정신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목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유혹 하나는 바로 자아도취, 나르시시즘입니다. 자신을 숭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조차도 자기 자신에게 주목했을 징계를 받았습니다. 다윗이 지은 가장 죄는 밧세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역대상 21장의 “인구조사”였습니다. 자신의 병력과 백성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세어봄으로써 마치 자신이 그러한 나라를 이룬 마냥 높아졌던 마음이 가장 죄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교만을 부추겼던 주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넘어간 것은 다윗이었습니다. 밧세바와의 간음으로는 아기만 죽었지만, 인구조사로 인한 벌로는 7 명이나 죽어야했습니다.

 

사울도, 다윗도 이기지 못한 유혹이 바로 이겁니다. 자아도취, 자기숭배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옆에서 조금만 부추기면 얼마든지 사울이나 다윗과 같은 자아도취의 죄에 빠질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직장과 교회를 섬기다가 이런 마음 적은 없습니까?

“역시 내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 내가 얼마나 많이 헌신했어? 없었으면 회사는, 교회는 망했을 거야... 없이 위원회가 될까? 없이 부서가 될까? 일부 맞는 말이긴 합니다.

 

헌신된 일꾼 명이 조직과 부서를 살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질그릇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요 자비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보배’는 아닙니다. 우리가 ‘빛’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구원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보배이고, 내가 빛이고 내가 그리스도인줄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주 무서운 유혹입니다. 사실 가장 교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저나 목회자들, 오랜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신 분들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과 가깝고 친밀한데 그런 유혹을 받을 있을까요?

 

정확한 예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본래 천사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천사였다고 하지요.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고 아주 가까이서 그를 모시던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다보면 자신의 어두움을 보게 되고 회개하며 돌이키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유혹이 일어날 있습니다. 나보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 있어? 당신 하나님의 음성 들어봤어? 당신 치유의 은사 있어? 당신 기적을 행해봤어? 당신 개척교회 있었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영적 교만으로 변질될 있습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면 강할수록 악령의 역사도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영적 교만이 사람을 변질시킵니다. 영적 교만이 하는 역할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거의 그리스도나 다름없다. 사투리로 하면 거진 그리스도나 다름없어. 거진 교회 내가 세운거야. 회사 거진 내가 살린 거야..

 

모세가 넘어진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알던 자였고 하나님의 임재를 누구보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유와, 세례 요한이 사실은 자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분노해서 갔나요?

그가 온유했어야 했는데 분노해서 들어간 것일까요? 분노는 본질적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민수기 20:8-13절에 보면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고 바위에게 명하면, 소리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번이나 직접 쳤습니다. 누가 보면 모세가 물을 내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정말 물이 바위에서 나왔지요. 그러나 곧장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20:12 너희(모세, 아론)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핵심은 바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라는 부분입니다. 부분을 이해해야 오늘 세례 요한의 말을 이해할 있습니다. 거룩에는 크게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거룩하면 정결하다, 깨끗하다, 흠이 없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정결하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거룩의 번째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구별된, 차원이 전혀 다른 , 레벨이 다른 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의 둘째 중학교 1학년 아들이 저에게 거룩에 대한 개념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번째 개념을 설명하면서 예를 것이 이것이었어요. 게임할 레벨 1, 2끼리 싸움 붙으면 비슷비슷하지? 그런데 갑자기 레벨 999 나타났어. 어떻게 ? 번만 스치면 쓰러지잖아. 감탄을 하지... ... 게임이 되네.. 레벨이 다르네... 그게 “거룩”이야.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내가 물을 건데 너는 마치 너가 마냥 애매모호하게 했니? “모세야, 나는 너에게 그냥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했다. ? 너는 소리니까. 그런데 너는 너가 지팡이로 바위를 번이나 침으로써 마치 물을 너가 것처럼 하였다. 일을 창조주인 내가 것이 아니라, 누가 것인지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 사실 모세가 지팡이로 치기 전에 이런 말도 했습니다.

 

20:10 ...우리가 너희를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아니, 모세는 자기가 물을 내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화를 낼까요? 분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의 표출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물을 내랴?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세야, 우리? 내가 하는 건데? 우리?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모세와 아론? 아니면 모세와 하나님?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회중들은 모세가 바위를 번이나 치자 물을 나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거예요.

“일부는 .. 위대한 , 모세가 물을 냈구나...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모세가 물을 냈구나….

 

우리와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치 인간이 마냥 뒤섞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마치 내가 마냥 공로를 취하는 , 이것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가려 버렸습니다.

“아.. 모세는 ‘거진’ 하나님급이구나...

모세는 “거진” 하나님이 되어버린 거예요. 모세는 거진 그리스도, 구원자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야, 너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를 막으셨어요. 왜요? 하나님은 모세를 정말 사랑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대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는 신이 되었을 겁니다. 그는 우상이 겁니다. 실제로 몇백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놋뱀을 숭배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하셔서 가나안으로 데려가지 않으셨던 겁니다. 누구나 이런 유혹에 넘어갈 있습니다. 연약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하나님은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높은 기준을 적용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주님의 길을 곧게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자칫 길을 ‘곧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굽게’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누가 그리스도이신지 혼동되게끔 하는 미혹의 소리가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나는 빛이 아닙니다. 나는 보배가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나는 질그릇입니다. 나는 그저 외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라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을 조건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8 35절입니다.

8:35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자기 부인은 나의 자랑, 나의 헛된 욕망, 교만, 나의 위치, 나의 성취, 어떠함이 없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사람들이 외쳤던 구호가 있습니다.

19:15 “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우리 교회는 수년 전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번째 조건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을 하는 이가 예수님을 바라보게 있습니다.

자기 부인은 나를 주목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주목하게 하지 않고 바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20세기 초중반,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라고도 평가받는 스탠리 존스라는 인도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그가 세운 기독교 공동체 아슈람에서는 5일에 걸친 24시간 연속 기도회 이후 마지막 밤에 치유기도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때에는 육체적인 질병 치료를 받기 원하는 사람, 영적인 치료를 원하는 사람, 원하는 사람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선교사를 비롯한 리더십들이 그들을 위해 안수하며 기도문을 암송하는데 바로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치료자가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치료자이십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치료하시도록 우리의 손을 그분께 빌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치유가 일어나면 치유를 받은 분들은 우리를 찬미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찬미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은 내과 의사나 외과 의사를 통해서도 치료하십니다. 그렇기에 거기서 섬기는 내과 의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환자를 보살필 뿐입니다. 치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외과 의사는 고백합니다.

 

“나는 절개할 뿐입니다. 고치는 것은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맡긴 바를 최선을 다하지만, 끊임없이 사람이 아니라, 보라, 붙잡으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스탠리 존스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아슈람 공동체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 95% 가량이 치유, 회심,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고 떠나갑니다.”그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광야의 소리일 , 주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직장을 이끄시고, 주님이 자녀를 키우시고, 주님이 교회를 이끌어 가십니다.

저는 형편없는 질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통해 보배를 드러내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공로, 나의 경험과 능력,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하였기에 받은 복이 그렇게 컸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증언하고 가리키는 증인이 누릴 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얼마나 귀한 일이며 귀한 사명입니까?

다시 오실 주님, 또한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온전히 가리키고 바라보게 있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요 신실한 증인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dmin

 

 

 

사나운 영의 숨소리 /1:19-28/ 김기석목사

2016-06-04 11:30:22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그는 고백하였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예언자요?" 하고 그들이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시오?"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계시오. 그는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만한 자격도 없소."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마야드 모스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인 오늘,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통해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여러 시리아에 며칠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IS 근거지로 알려지고 있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나라입니다.

다마스커스 거리에 있는 숙소에 머물면서 바울이 걸었던 '곧은 '이며, 하늘의 빛과 만나 앞을 보지 못하던 그를 찾아와 안수함으로 눈을 뜨게 했던 아니니아의 집을 둘러볼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를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음을 알고 광주리를 타고 성밖으로 탈출했던 장소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마스커스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였습니다.

 

건축물의 규모나 화려함도 대단했지만 모스크 안에 있는 돔형의 작은 예배당은 우리 의식의 허를 찔렀습니다. 고린도식 기둥 사이에 있는 작은 건물은 '세례자 요한 머리 무덤 교회'였습니다.

요르단의 마케루스 산성에 갇혀 있다가 참수된 요한의 머리는 시리아 총독이 주재하고 있던 다마스커스로 보내져 그곳의 지하 납골당에 묻혔던 것입니다.

 

애초에 그곳은 고대 시리아인들이 비를 주관하고 땅을 비옥하게 한다 하여 최고산으로 모셨던 '하다드' 신전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리아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있을 로마는 신전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웠고, 비잔틴 시대에는 그곳에 '세례자 요한 머리 무덤 교회' 세웠습니다.

 

그러던 시리아가 이슬람세계에 편입되자 사람들은 그곳에 거대한 모스크를 세웠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 머리 무덤 교회' 헐지 않은 것은 무슬림들도 세례자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세계의 변전에 따라 장소의 의미가 그렇게 변한다는 사실이 묘한 느낌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 머리 무덤 교회' 둘러보는 동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죽음조차도 뒤흔들 없는 그의 자유혼이 처절하게 되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초록색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외쳤던 그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오는 같았습니다.

 

요한의 , 예수의

세례자 요한은 요단강 인근의 광야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그는 거침없는 언사로 성전체제와 권력자들의 불의와 위선을 폭로했습니다. 그는 다정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에게 들큰한 위로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보고 뭐라 했는지 아시지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3:7a-8). 사회 지도층에 속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섣부른 선민 의식에 안주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있다"(3:9) 말했습니다.

 

내로라 하는 자부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는 에두르는 없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냐?' 묻는 이들에게 그는 "속옷을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는 "너희에게 정해 것보다 받지 말아라" 했고,

 

군인들에게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하고 말했습니다. 정말 단순합니다. 삶은 복잡한 신학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 하고, 다른 이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고 마음 쓰며 살면 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조금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무대가 광야였다면 예수님의 활동무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찾아오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람들 속에 파고 들어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는 일상에 근거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 바다에서 건져올린 물고기를 고르는 어부들, 밀가루 반죽 속에 누룩을 넣는 여인, 진주를 사러 다니는 상인, 양을 치는 목자 등이 그러합니다. 일상의 삶을 떠난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공허하기 이를 없습니다.

 

일상 속에서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예수님은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의인과 죄인, 거룩함과 속됨,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여자를 차별하는 세상이 지양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은 열릴 없음을 아셨기에 주님은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불통하던 이들이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세계를 해체하는 기여했습니다. 그는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말함으로써 폭력과 힘의 세계가 끝나가고 있음을 증언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선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집중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이야말로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심으로 핏줄을 넘어선 사랑의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영혼인지를 공적으로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저는 말을 세례자 요한이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경계선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회개로의 부름과 세례에 집중되었다면 예수님의 활동은 하나님 나라 선포와 아울러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의 회복에 집중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과 거리를 마땅히 가야 길을 가리켜 보이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은 직접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길을 만드신 분이라 있습니다.

 

더러움에도 손을 대야 했고, 귀신과 맞서기도 했고, 사람들의 노골적인 적대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일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은 질문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대가 메시아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파견된 이들은 다시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아니오." "당신은 예언자요?" "아니오." 여기서 ' 예언자냐' 질문은 신명기 18 15절과 연관된 것입니다.

 

모세는 탈출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예언자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 예언자' 모세와 같은 위대한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급해진 사람들이 자기들을 파견한 이들에게 답할 말을 해달라고 하자 요한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소리'라는 대체 뭘까요? 나는 그것을 함석헌 선생의 시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나는 들에 외치는 소리

아니 건드리는 것이 없고

들어가는 틈사리가 없고

데마다 부닥쳐 싸워

이겨 울고 져서 우는

하늘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

 

어디서 오며 어디로 몰라

우두컨 서는 인생들이 맘에 차지 않아

참과 거짓 가르기 싫어,

뒤범벅을 굴리는 세상이 언제나 미워,

흔들고 흔들고 부르고 부르며

가는 소리 하나 들으려다

종시 소리를 내고야 마는

허공을 뒤흔드는 사나운 영의 숨소리.

-<나는 들에 외치는 소리> 부분

 

소리는 느른한 우리의 일상을 뒤흔듭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과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와 같습니다.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한 사는 우리들을 찾아와 흔들고 흔들고 부르고 부르면서 허공을 뒤흔드는 사나운 영의 숨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숨소리입니다. 소리는 영원을 일깨우는 소리입니다. 이웃들의 아픔에 반응할 아는 사람이 되라는 부름입니다. 이런 소리가 잦아들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지금도 광야와 같은 세상 도처에서 하늘의 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세상의 희망입니다.

 

길을 곧게 한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닌 사람이 세례를 주냐고 묻습니다.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계시오. 그는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만한 자격도 없소."(1:26-27) 물론 이것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닙니다.

 

들을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증언을 계속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계시오'라는 말이 강력합니다. 우리도 혹시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요한은 자기 역할을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으로 이해했습니다. 역할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며칠 우리는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챈이 맥스의 탄생을 기뻐하며 자기들이 보유하고 있는 페이스북의 지분 99% 기부한다는 소식에 접했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52조원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자기 부부가 그런 선택을 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맥스야, 우리는 너를 사랑하며, 너와 모든 어린이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남겨주기 위한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 네가 우리에게 줬던 것과 같은 사랑과 희망,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기 바라며 네가 세상에 무엇을 가져다줄지 어서 보고 싶구나".

 

그는 어른들은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세상을 좋게 만들어야 도덕적 책임이 있다면서, 그런데도 어른들은 자기들이 가진 자원을 가장 기회와 다음 세대가 직면할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기아, 질병, 불평등의 심화, 기후 변화, 식량 위기 문제야말로 우리 시대가 풀어가야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들은 바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마크 저커버그와 프리실라 챈이 보여준 사회적 실천이야말로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앞가림 하기에 바빠서 공적인 일에 무관심한 이들이 많습니다.

 

엔에이치(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우리나라의 중위소득에 해당되는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는 연구 결과를 '2016 대한민국 중산층 보고서' 통해 발표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중산층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 374만원을 번다. 102제곱미터(31)짜리 채와 중형차 대가 있다. 장만하느라 생긴 빼고 재산은 23천만원이다. 6천원짜리 점심을 먹고, 하루 8.2시간 일한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하루 1시간 40분이다.

취미 활동은 한달에 한번 정도다. 따로 모은 돈은 거의 없고, 노후는 쥐꼬리만한 국민연금에나 기댈까 한다. 이런 내가 중산층이냐고? 아닌 같은데…."(한겨레신문, 2015 12 3 2면에서 재인용)

 

중간 정도의 소득에 해당하는 이들 가운데 79.1% 자기는 중산층 아래라고 했습니다. 사회적 불안감이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목적으로 '가정의 안녕'(40%) 꼽고 있지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형편이 나아질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형편 가운데서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 요구 앞에 있습니다. 저커버그처럼 없다고 하여 낙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얼마 버마(미얀마) 아웅산 수치의 마디가 가슴을 쳤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누군가를 도우라 If you are hopeless, help someone". 희망은 그런 일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하나님의 희망이 유입됩니다.

 

조금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불의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이들 곁에 다가설 우리는 비로소 하늘이 주는 자유를 맛보게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촛불 개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촛불이 차례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자기우상화(自己偶像化) 극복한 사람/1:19-28

2003-02-17 21:27:13

 

 

깊은 속에 고요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내려올 많은 짐승들은 연못으로 물을 마시러 나왔습니다. 저마다의 몸짓을 해가며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중에 사슴 마리가 끼어 있었습니다. 사슴은 고요하게 드리운 연못 그림자를 보면서 자기 뿔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잘생긴 사슴뿔을 비추고 이리저리 보면서 그는 스스로 만족해했습니다. 다른 짐승들,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는 머리를 보면서 저것들은 불쌍하다 생각하고, 봐라 뿔이 얼마나 근사한가. 나뭇가지처럼 뻗어 올라간 뿔을 물에 비추어 보면서 혼자서 자기 모습에 감동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숲에서 사자가 나왔습니다. 으르렁, 때에 모든 짐승들은 속으로 쏜살같이 빠져 도망을 했지마는 사슴도 도망하다가 뿔이 수풀에 걸려 도망가지 못하고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사슴은 때문에 죽었습니다. 저가 자랑하던 때문에 그는 아침에 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자랑하는 바로 그것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죄사함받고 은혜 받은 사람은 절대 교만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 자신의 공로는 크신 은혜 아래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모든 것이 감사한 것뿐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모든 것이 감사였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모든 것이 자유였습니다. 기쁨이었습니다. 아직도 나를 내세우며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우상화하는 기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모든 계급장을 내려놓고 만인 앞에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께 모든 조명을 비추고 있는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의 신임을 받은 사람 헌신된 사람의 전형적인 모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비추인 모든 귀와 영광을 오직 주님께만 돌리는 신실한 주님의 종을 만날 있습니다.. 오늘 자기 우상화를 극복하고 존귀한 영광의 대열에 참여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인물인가?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갸랴의 기도를 통하여 얻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저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1:17) 시대의 엘리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두운 역사 무대에 출연시킨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가문이었습니다. 바로 제사장의 신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레위지파 뼈대있는 가문입니다. 특별한 계시도 받았습니다. 때부터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벳의 태내로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독설가입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 모금의 생수처럼 민초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래 세례요한의 연설 요지를 보십시오. 얼마나 힘있고 능력이 있는지요.

 

 

 

(3:7-15)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진노(震怒) 피하라 하더냐(8) 그러므로 회개(悔改)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시리라(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1) 대답하여 가로되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것이니라 하고(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13) 가로되 정한 외에는 늑징(勒徵) 말라 하고(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强暴) 하지 말며 무소(誣訴)하지 말고 받는 ()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 하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 구석구석에 독버섯처럼 만연되어 있는 부정과 부패와 악을 통렬히 지적하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것이라는 메세지인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가슴을 찢고 요단강 가에 나아와 세례는 받는 인파가 날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힘있고 능력 있는 메세지를 수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분명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주관적인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여 재림 주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명을 가진 요한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을 마무리하고 신약을 열기 위하여 세례요한인 것입니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였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헤롯왕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방인이었으며, 로마의 대리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를 로마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통치기간에 유대 땅은 주권을 상실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노예 민족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 하에서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된 메시아의 도래가 지체되자 종교적인 불신과 회의의 분위기가 만연하게 되었던 시대적인 상황이 있었습니다. 암울한 역사적인 어두움을 밝혀주는 tot별로 세례요한이 등장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이렇다 선지자들이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다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오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례요한의 강한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가 드디어 나타난 알고 모두 그에게 몰려 나아왔습니다. 요단 강가로 나와 회개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3:7). 참으로 억눌리며 살았던 민중들에게는 통쾌한 일이 아닐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시대적인 암울한 시대에 엘리야 처럼 목숨을 걸고 소리를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침없이 품어내는 그의 연설과 설득력에 사람들의 이목을 몸에 받게 됩니다. 이렇게 인기를 얻고 잘나가고 교만할까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여론에 의해서 인기에 의해서 착각하게 되기 쉽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확실한 외침에 눌렸던 압박과 설음에서 카타르시스 적인 대리 만족까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소문은 전국을 강타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세례요한 신드롬이었습니다. 모이는 사람마다 모든 나라안에 세례요한의 집회소식이요 소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제는 통제가 불능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도 학창시절 한창 나라가 군사독제하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는 민주투사들의 연설과 모임에 많이 쫓아 다녔습니다. 당시에 김대중씨와 김영삼씨의 대중집회는 여의도 광장을 메우었고 장충단 공원을 인산으로 메웠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민초들이 독제치하에서 눌렸던 감정들을 사자후처럼 쏟아 놓을 환호성을 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심정으로 세례요한의 외침에 매료되었고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불안한 혁신 세력이 아닐 없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는 능력을 행한 데다가 무리가 추종하면 교주가 있는 것입니다. 신비한 능력의 역사 앞에서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령한 사람으로 숭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화를 정당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일이라면 흉내를 내서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보려고 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경험한 사건입니다.

 

 

 

(14:11-13)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13)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무리들이 바울의 행한 것을 보았습니다. 때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바울을 통하여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전설을 믿어 오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신이 강림하신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바나바를 쓰스라하고 바울을 허메라 하여 우상화 작업을 시도한 것입니다. 게다가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시도하려 했습니다. 순간 바울과 바나바가 아무소리 않고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면 저절로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우쭐할 수가 있습니다. 능력 행함을 인하여 큰기침을 하고 초자연적인 능력 앞에 두려움 갖는 저들에게 군림할 있는 찬스가 것입니다. 때를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 긴장과 불안이 고조

 

 

 

 

 

이런 상황 하에서 종교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가만히 앉아 구경을 하듯 사건을 바라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건은 유대교 자체를 흔들어 놓은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제사장의 아들이 이러한 돌출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단성을 조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하는 의혹이 제기되어 조사단을 파송합니다.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그의 신분을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1:19) 여기에 요한은 자신의 특유의 똑떨어지는 논조로 대답해 나갑니다. 여기에 요한이 자기 우상화를 극복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 너는 메시아냐? 하는 질문입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입니다.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결론부터 확고합니다. 이상 왈가왈부 논한 여지가 없는 대답입니다. 사실은 조사단은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하는 의혹을 가지고 요한을 만나게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애매한 대답이 있습니다. 글쎄요... 하는 대답입니다. 우리의 대답은 예면 "" 아니면 "아니오"하는 yes no 분명해야지 이에서 지나면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성향의 인간은 많은 추종자가 생기고 능력을 행하고 신령한 은사를 받으면 자신을 신격화하는 교만 성향의 기질이 있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정명석이요 박태선이요 문선명이요 이재록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카리스마를 이용해서 메시아로 군림하며 모든 영광을 자신들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점에서 단호한 답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합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자라는 자기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인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음을 증거 하여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사명의식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나는 아니라

 

(1:21) "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400년전에 예언된 사실이기에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네가 엘리야냐 묻습니다. 사실은 여기에 대하여 말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1:17)" 분명히 자신의 존재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주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는 사실을 설명할 있습니다. 그러나 여가에서는 아니라고 거절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조사단의 질문이 구체적입니다. 직분이 무어이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오리라 약속한 엘리야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내가 엘리야라고 자기 선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을 아니라고 잘라 말합니다. 엘리야와 같은 사명을 감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엘리야는 아니거든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문에 대하여 일체 함정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심지가 견고합니다.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엘리야가 사람이니라"(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네가 선지자냐?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묻는 조사단의 배경이 있습니다. (18:15) "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선지자 하나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으킨 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이 선지자의 한사람이 아니가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역시 아니라고 단호하게 답합니다.

 

 

 

조사단들도 답답하여 세례요한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그러면 마지막으로 자신의 신상에 대한 설명을 의뢰하였습니다.(1:22) "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너는 너에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여기에 세례요한의 자기부정의 확실한 증인의 태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례요한의 자기 정체성

 

 

 

광야의 소리(23)

 

(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입니다.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자신을 광야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로고스이신 말씀이십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자신을 ‘소리’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과 ‘소리’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요? ‘말씀’은 내용이고, ‘소리’는 내용의 전달 매체입니다. 전달 매체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가치를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매체는 여러 가지가 있을 있으니까,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지 내용은 전달되어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달 매체는 내용이 없으면,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소리에 말씀을 담을 소리는 의미 있는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노문환 전도사님의 트럼펫은 KBS경음악단에서 쓰던 것을 구입했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트럼펫으로 세상노래를 불렀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했지만 이제는 트럼펫의 주인이 바뀌어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여기 전자 오르간이 있다. 오르간이 우리의 찬양을 도와주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악기에 불과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오르간을 누가 연주하느냐?, 무슨 곡을 연주하느냐? 따라서 아름다운 곡조의 찬송이 되기도 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오르간은 하나의 악기에 불과할 연주자가 없다면 스스로 아무 음악도 만들어낼 없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그냥 울리는 소리요 악기이지 자기는 연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은 안에 생명이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분이 성육신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 로고스이신 말씀을 증거 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가고 자신을 설명합니다. 내용을 담아야 소리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에 모든 되신 다는 말입니다. 예수 없는 설교 성경공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광야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땅의 모든 주의 종들도 세상이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말씀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말씀 자체인 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리가 말씀 흉내를 내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오늘날도 존재하는 것을 봅니다. 사이비 교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의 소리로 자신은 사라지고 증거된 말씀만이 남아 역사를 일으키는 세례요한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그러면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느냐? 핵심적인 문제를 접근합니다. 사실은 문제를 제기하여 법적인 시비를 걸려고 것입니다. 마치 혐의를 포착한 것처럼 다그쳐 묻습니다.

 

 

 

(1:25-27) "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섰으니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방인들에게 베푸는 세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는 행위는 엄연히 불법인 것입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충돌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중대한 문제입니다. 조사단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닐 진데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느냐는 질문입니다. 무자격자가 종교행위를 하고 있음으로 산헤드린 공회에 회부할 있는 사안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말합니다. 한술 뜨고 있습니다. 메시아 그분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엑스트라라는 것입니다. 모든 조명은 그리스도께 비추고 있습니다. 물로 베푼 세례는 도덕적인 회개를 말하지만 불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죄를 완전히 태워 사죄하는 은총으로 역사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나를 없애고 중생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사람,새생명으로 탄생하게 하는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26)

 

자신의 죄된 본성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우상화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다하지 못하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도 이런 고백으로 우상화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가운 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바울은 능동적으로 자원 적으로 잘랐습니다. 고려하던가 기도해보고가 아닙니다. 결정은 상식적인 선에서 단호히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우물우물하다가는 속게 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라고 하는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밑을 내려다보는데 급급한 나머지 위에 계신 분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교만한 사람은 밑에 것만 내려다보면서 바로 위에 계신 분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그게 망조가 겁니다. 여러분이 아는 미국의 1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 그는 옛날에 타자기가 없을 때니까 편지를 직접 손으로 써야되는데 친필로 편지를 쓰고 편지의 마지막 글은 이렇게 맺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으로부터'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이 편지를 씁니다.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보잘것없는 충직한 하인일 뿐입니다. 언제나 겸손을 잃어버림으로 해서 사회는 시끄러워집니다 본인도 불행해집니다. 다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교만한 기질의 마귀는 우리를 자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와 같은 성정의 사람이라고 단호히 거절을 합니다. 아담이 이것으로 넘어졌지 않습니까?

 

 

 

세례요한의 겸손은 나도 너희들처럼 죄인이요 약함이 있어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실족하는 연약한 사람인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있겠느냐고 자기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을 확실히 깨닫음(23)

 

세례요한은 자신이 광야의 소리로 빛에 대하여 증거 하여 그분을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자라는 사명이 확실했습니다. 오직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그분은 우리 주님 분밖에 없다고 그분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도 복음에 분명하게 있습니다.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드러낼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죽으나 사나 복음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주앞에 드리면서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시대의 주님의 자녀들이 감당해야 사명인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것입니다.

 

 

 

조금만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체하고 자신을 들어내고 피알(PR)하여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인간을 쓰시는 법이 없습니다. 교만한 기질, 자기를 우상화하는 기질이 많으면 많을수록 연단이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나이 사십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를 가지고 힘을 가지고 동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번 폼나게 애국심을 발휘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모세의 교만 자만을 꺾기 위하여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 하십니다. 그리고 나이 팔십에 그를 불러 교만키 빠진 뒤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자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세례요한은 비록 산헤드린공회원으로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자신을 입지를 구축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여 생애를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세례요한 새로운 생명의 빛을 한번 경험한 세례요한은 자신은 죽고 내인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최고의 자리 성공한 자리 칭찬 받는 자리에서 낮아져서 주님을 첫자리에 모실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그를 존귀케 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난자 중에 가장 자라고 말합니다.(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더욱 권세를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나를 낮추고 겸손하면 주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우상화를 극복한 사람들을 주께서 쓰시고 그를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이요 자신은 광야의 소리로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자기 우상화를 극복하며 주님의 영광을 누리는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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