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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6장 35절 이하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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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6:47-59/ 김형익 목사

2021-05-06 03:28:57

 

1. 혼동: 생명의 떡은 세상살이를 하려고 먹는 떡이 아니다.

Born once die twice, born twice die once ( 태어나면 죽고, 태어나면 죽는다)라고 쓰여진 범퍼 스티커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입니다. 성경은 종류의 생명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누구나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의 생명은 영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영적 생명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문제를 혼동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시는 모든 것을 육신의 생명을 살면서 누리는 것들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의 떡이란 말은 먹으면 배가 고파서 먹지 않아도 되고 화장실에 가도 되는 그런 신묘한 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생명을 사는데 쓰는 떡이 아니고, 영생을 누리는데 먹는 떡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Kingdom life)입니다. 우리는 한국 아니면 미국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소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가지 소속이 생기는데, 하나님 나라 소속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씀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말의 의미입니다( 3:20). 소속이 우리에게는 본질적이고 우선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소속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왕이 하나님이 되십니다. 생명의 떡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양식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생명을 얻고 유지하려면 먹어야 하는 떡입니다.

 

관점이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이것이 63 말씀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고 거기서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서 먹고 살라고 주님께서 오병이어를 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삶을 무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신의 필요도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리 배불리 먹고 먹어도 결국은 죽을 밖에 없게 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도 죽은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냥 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를 도와주시는 분으로 격하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생을 주시려고 땅에 오신 분입니다. 대속의 죽음만이 영생을 있기에, 장대에 높이 달리시기 위해서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데 사람들은 혼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영생을 말씀하시고 떡을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떡을 세상살이를 하는데 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2.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말씀은 사실 섬뜩한 말씀입니다. 물론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비유입니다. 주님 자신을 , 생명의 떡이라고 했기에 떡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기만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살과 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살과 피는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고, 먹으라는 것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47절과 51, 54절을 비교해보면, 믿는다는 말과 먹고 마신다는 말이 같다는 것을 있습니다. ,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주님을 도덕 선생이나 존경하는 위인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관계를 맺는 유일한 길은 그분을 믿는 것인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나의 죄를 대신하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A.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12:6~8, 13~14)

그런데 먹고 마신다는 말씀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유월절 전통을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6 4절을 다시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무의미하게 시기를 제시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이 하시는 일이 유월절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유월절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잡아서 먹는 전통을 생각하게 합니다. 유월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애굽에서 나오기 전날 밤입니다.

 

해질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가족마다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피를 받아서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고기는 밤에 불에 구워서 무교병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렇게 했습니까? 살기 위해서 그렇게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와 인방에 발려진 죽은 양의 피를 보고서 넘어갈 것이기(pass over)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이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이것을 믿지 않고 양을 잡아 먹지 않고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은 화를 면할 없었습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이런 전제를 다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 말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3:3)이란 말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주님 자신이 유월절 양이 상징하는 실재라는 것입니다.

 

B. 믿음은 먹고 마시는 것처럼 개인적이고 실제적이다.

유월절 사건을 생각하게 하는 외에, 주님께서 믿음을 먹고 마시는 것에 비유하신 것은 믿음이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이 실제적인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에게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얼마나 실제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막연하기만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의 구석 구석에서 살아있고, 확신을 주며, 힘을 주는 실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 믿음을 생각하게 합니까, 아니면 매일 매일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실재로 경험되고 있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속에서 나와 하나가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내가 밀접하게 하나가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은 개인적인 행위입니다. 옆에 사람이 먹었다고 해서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실제적인가를 주님은 당신 자신의 예로 설명하셨습니다. 5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들의 생명과 아버지의 생명은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산다고 말할 있습니다( 17:21). 주님께서 실제로 4장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을 (34)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장난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말씀을 가장 실제적인 방식으로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령, 어느 어머니가 자식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나는 자식 때문에 살아요”라고 하면 그것은 관념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자식이 어머니의 삶의 원동력이고, 자식을 위해서 하지 못할 희생은 없으며, 자식이 삶의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생명은 자식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그런 차원이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 우리의 믿음은 “나는 주님 때문에 살아요”라고 말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수준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과연 믿음이 그렇게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것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의 특징입니다. ,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믿음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C. 본문은 성찬식과는 상관이 없다.

가지 본문을 대할 생기는 오해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성찬식에 대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각각 성찬을 제정하시는 것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는데,

 

유독 요한복음에만 기록이 없기 때문에 기사로서 성찬식 제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물론 성찬식이나 본문이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성찬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유는 첫째로, 성찬은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이 영생을 준다고 여기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결과와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찬식은 이미 믿는 자들이 주님의 살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두번째 이유가 있는데, 성찬식과 달리 여기서는 아직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3.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

,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A. 생명의 약속과 확신(47,51,54,53)

첫째로 주님이 강조하고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은 생명(영생) 약속과 확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47, 51, 54).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시는 것은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53).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47절과 51절은 주님이 하신 진술입니다. 그대로 우리도 말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이미 영생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못하거나, 않는다면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한없이 좋은 생명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줍니다. 확신을 느낌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확신은 일차적으로 주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B. 그리스도와 연합(56)

둘째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단순히 생명이 있다고 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그가) 안에 거하고 나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과 본성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이것을 결혼에 비유할 있습니다. 결혼하면 여인은 miss(아가씨)에서 Mrs.(부인)으로 신분이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와 결혼하여 연합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Miss Sinner 에서 Mrs. Christian으로 바꿔줍니다. 본성의 변화도 있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성품을 대하면 대할수록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되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그러는 동시에 나의 본성이 그분의 성품으로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본성의 변화는 자신의 신분의 변화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를 그리스도를 바라보듯이 사랑스럽게 보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8:1).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모든 것의 보장이 됩니다. 마귀가 이상 그를 흔들 없습니다. 모든 죄의 세력이 그를 꺽을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안에 거하신다’는 말을 바닷물이 작은 속으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것이라고 표현한 글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공급과 무한한 흘러넘침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무한하게 크신 분이 피조물인 안에 찾아오신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입니까? 무한한 거룩하심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노력에 근거한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사실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함에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번째 축복입니다.

 

C. 적용: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57)

세번째로 주님께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세상을 믿음으로 넉넉히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을 밥심으로 살아간다고 하면 말이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이고 원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하늘의 생명, 영생,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되 세상이란 장소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을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신자의 당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도는 밥심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우리 소명입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옵니까? 주님이 약속하시기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이런 힘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매일,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으며 기초 위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 자신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힘을 순간 순간 경험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구질구질하고 비리비리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세상의 잣대로는 가진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고 반대로 있을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규정해주는 ,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은 이상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며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소유한 자요, 잠깐의 세상이 다하게 되면 우리가 천국을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게 자들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땅을 당당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들에게 주님은 이런 삶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당당할 있음은 잃어버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영생의 유업을 아무도 빼앗아갈 없습니다.

 

4. 적용: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해서 수고하고 고난도 감수하라.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가지게 되는 혼동을 조심하십시오. 생명의 떡을 육신의 떡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여러분이 이땅의 삶을 영위하는 일에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고작 이땅 수준에서의 삶에 여러분의 목을 걸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생을 말씀하셨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땅에서 직업을 가지고 혹은 자신의 속에서 수고하고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는 육신의 떡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수고와 희생을 봅니다. 마치 육신의 삶이 전부인 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생명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생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떡을 위해서 수고하고 계십니까? 생명의 떡을 위해서 고난도 감수하고 계십니까?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을 더욱 맛보고 더욱 풍성하게 누리기 위해서 행하는 수고와 희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수고의 땀을 흘리십시오. 그리고 모든 약속을 누리고 사십시오.

 

 

 

일시적 만족인가, 영원한 만족인가 /6:22-35/ 김형익 목사

2021-05-06 03:21:40

 

우리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교회다니는 것입니까? 그외 다른 것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믿음은 우리 관점을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고 사는 삶에서 영원한 만족을 추구하는 쪽으로 옮겨준다는 것입니다.

 

1. 사람들의 관심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주님께서 아직 자기들 있는 곳에 계신 알았다가 계시지 않은 것을 알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으려고 건너왔습니다(22~24).

 

A. 열심이 신앙의 표지가 수는 없다(22~25).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열심 자체가 신앙의 표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때가 있습니다. 열광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합니다. 그러나 년이 지난 후에 보면 그는 이상 교회에 나가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서도 이런 경험을 과거에 하신 분들이 계신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가 다시 버리시기도 하는가? 성경의 설명은 처음에 열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말은 열심을 내지 마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인가? 나는 그분을 알고 있는가? 내게는 그분의 자녀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B. 물질주의적 동기는 신앙의 표지가 없다(26)

본문이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찾은 후에 주님께 언제 여기 오셨느냐고 묻습니다(25). 주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지 않고 매우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의 동기의 문제를 직접 지적하셨습니다. 신앙은 동기와 매우 중요하게 연관이 됩니다. 이들의 열심이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를 지적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을 만들어내는 마음 속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실 있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슴의 충만함이 아니라 배부름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라도 주님을 좇아왔는데, 이것만이라도 훌륭한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있고, 그래도 주님은 격려했어야 한다고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목회적 기교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적입니다. 이들의 물질주의적 동기는 결코 신앙의 표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시는 이유, 동기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주님께로 움직이도록 만든 요소입니까? 주님은 어떻게 여러분을 판단하시겠습니까?

 

C. 기적은 일시적인 만족만을 뿐이다. 기적을 보고 효과를 누리지만, 표적을 통한 유익을 얻지 못하는 신앙의 태도

이들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표적을 통한 유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기적은 일시적인 만족을 뿐입니다. 병이 낫고, 은사를 체험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기적 체험이 자동적으로 신앙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래서 신앙이 만들어내는 영원을 바라보는 관점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시적인 만족에 머물러서 배부름의 체험, 문제 해결의 체험에 매여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그것을 기적적으로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만나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일입니다. 그들은 천국문 가까이에 이르렀다가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어보이기 때문입니다.

 

2.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27).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목회적 가르침이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상고해야 부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으러 바다 건너에 열심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먹고 살자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나를 찾는다면, 너희는 결국은 죽고 것이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나를 찾아라. 그러면 너희는 영원히 살게 것이다.

 

A.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가진 직업을 헛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마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사는 자체가 헛된 것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릴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땅을 살아가는 자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오히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때에 불신자 보다 열심으로 하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 성경의 권면입니다.

 

B.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위하여 염려하고 힘쓰라!

여기, 주님의 의도는 무엇보다도 영혼을 위해서 그만큼 염려하고 힘쓰라는 것입니다. 배부름의 욕구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찾아 바다 건너로 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여주는 열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는 그런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썩을 것을 위해서는 생명을 걸지만, 영생을 위해서는 조금의 시간도 드리지를 않습니다. 썩는 양식이란 표현은 우리가 천국갈 가지고 없는, 일시적인, 지상에서 끝나게 되는 가치를 말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우리의 것으로 남게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만, 영원한 만족을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것을 성경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물질지상주의의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불편한 지적이 아닐 없습니다. 불편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불편한 말씀을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주님 앞에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일을 이상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영원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한가(28~29)

사람들의 접근방식은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28). 무슨 프로그램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썩는 양식 때문에 움직이는 , 동기가 고작 배부름의 수준에서 움직이는 삶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내가 그렇게 움직였구나. 영혼을 염려하고 것은 아무 것도 없었구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면 어떤 프로그램이 없냐고,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천연덕스럽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너무나 직접적이고 분명한 말씀을 피하는 오래된 방식입니다. 영혼을 생각하고 살라는 것은 결코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프로그램을 알려달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고상해보이고 신앙적으로 보이기까지 있지만, 결국 불신앙이며 불순종일 뿐입니다.

 

A. 생명의 떡은 신뢰 가운데서 받는 선물이다.

우리를 세상에서 배부르게 하는 떡은 일과 수고에 대한 댓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일을 하면 그것을 얻을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의 떡은 신뢰 가운데서 받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을 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님의 대답에 함축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떡을 그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받게 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으려 하신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믿음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너, 나를 믿느냐”고 물을 , 이것은 인격에 대한 신뢰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든지, 형통하게 된다든지 하는 신앙적 명제를 믿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수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믿음이 정말 믿음이겠습니까?

 

언제나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응답이 원하는대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할렐루야’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의 믿음과, 비록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그대로 안고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의심치 않고 과정을 통해서도 범사에 유익하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믿음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깊고 신뢰요, 믿음이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내라고 요구하거나, 일을 많이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신앙이 일시적인 수준의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함정이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C.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다(44).

믿음이 이런 차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기를 바라고 제자들에게 데리고 아버지를 보셨습니다( 9:14~27). 제자들은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시고는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대답하면서 “무엇을 하실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구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할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대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아버지는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9:24).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세입니다. 아버지는 자기는 주님의 말씀과 인격을 믿겠지만,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올 없는 것이라면 자기에게 믿음을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조건적으로 ‘믿음을 주시면 믿지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안된다면, 믿음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믿음을 우리 속에 주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가 믿습니다’라는 자세가 동시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요한복음 6:44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없다”고 하실 ,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4. 자기 지향적인 마음이 요구하는 , 다른 표적(30~33)

자기 지향적인 마음이 아마 모든 인간의 본성일 것입니다. 마음은 계속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아멘하고 받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당신을 믿게 하시려면 다른 그리고 나은 표적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들의 음란한 마음은 결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없고, 하나의 기적을 경험하면 그보다 더한 기적을 요구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A. 하늘에서 내린 , 만나( 8:3)

그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은, 하늘에서 떡을 내려보라는 요구였습니다. 광야에서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듯이, 모세가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신 것은 일정한 재료를 가지고 많은 떡을 만들어 여자, 어린애 합하여 2만명을 먹이신 것이라면 모세는 하늘에서 떡을 내려서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실상 만나가 의미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신명기 8:3 하나님께서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너도 알지 못하며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갈릴리 사람들이 마음의 눈이 가리워져 있으니까, 그들은 모든 영적 상징과 의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육신적 필요와 일시적 만족에 부합하는 것들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만족에 눈이 멀면, 결코 우리는 영적이고 영원한 만족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열심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B. “내가 생명의 떡이다”(35).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도착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야 비로소 진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일 아니라, 사실 우리 주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떡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세상의 양식에 주목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십니다. 주님이 무엇을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대해서 배고픔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은 일시적 만족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생명의 떡이신 주님 자신에 대해서 굶주려하고 그분을 경험하고 맛본 사람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적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양식이 것입니다. 뜻은, 다시는 영적으로 굶주림이 없다는, 세상에서 아무리 최선의 것이라도 염증과 권태가 특징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다시는 아쉬움이 영원히 없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구절을 추상적 선언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은 간절한 호소입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시니 사람은 그에게 와야 하며 그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교훈

A. 그림자 때문에 실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러므로 육신적 배부름에 취하여 영적으로도 만족을 누리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신적 건강에 취하여 영적으로도 건강한 것인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육신적 성공과 성취에 취하여 그것이 영원한 만족을 보장해줄 것인 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림자를 보면서 실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즉각적인 기도의 응답이 전부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오래도록 기도하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격을 믿으며 영원을 향하는 그런 믿음의 수준으로 나아가실 있기를 바랍니다.

 

B. 영혼을 염려하는 지혜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에 대하여 합당한 염려를 하시고 사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십니까? 하나님께 구하는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말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만족을 뿐인 것들입니까,

 

아니면 영원토록 쇠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만족을 주는 것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인하여 여러분의 삶이 움직여지게 하십시오. 일시적 만족 때문에 바다를 건너 주님을 찾으러오는 열심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이 되시는 주님, 친히 생명의 떡이 되어서 자기 몸을 깨뜨려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주님 자신을 원하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영원토록 만족하게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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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먹고 마셔라 /6:48-59/ 이규현 목사

2020-12-27 11:13:51

 

사람은 누구나 기적이 일어나기를 갈망합니다. 어떤 때는 기적이 필요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기적을 통해서 배워야 진리입니다. 진리를 터득하지 않으면 기적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적을 많이 체험한 민족은 없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영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육안으로는 없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어떤 것도 삶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나옵니다.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로 5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기적입니다. 아이와 여자를 포함한다면 2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오해한 있습니다. 기적을 보고도 기적의 핵심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떡의 문제에 관해 말씀을 하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상당히 노출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사회적 이슈가 되었겠습니까. 수만 명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떼어주는 떡을 먹고 배가 불렀다는 사건은 오늘날에 비유하면 뉴스 시간에 주요 타이틀이었을 것입니다. 사건으로 예수님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최고 인기 대선주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피해서 다니시고, 그들의 환호에 흥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몰려오는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6:26)

 

그들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몰랐고, 단순히 순간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사건으로만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떡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핵심을 놓쳤습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경제 문제의 해결사를 찾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는 40 동안, 하늘에서 내려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당시 최강국인 애굽의 바로왕을 무릎 꿇게 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며, 매일 2백만 명의 사람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광야를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매일 기적을 밟고 다녔고, 기적 속에서 뒹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기적 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정도의 기적을 생애에 번만 보여주셔도 뒤집어질 같은데 그들은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기적 속에 살았지만, 영적 세계에서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그들의 발전과 진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로 끝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풀어야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영적 개안이 일어나지 않으면 기적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핵심은 사람들이 먹었던 떡이 아니라 ‘진짜 떡’입니다. 잠시 배부른 말고 영원히 배가 부른 떡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6:49) 먹고 죽는 말고 죽지 않는 떡이 있다는 것입니다.

 

32절에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주시나니( 6:32) 35절에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 48절에서도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살이로다”라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떡이다”를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리얼하고 엽기적인 표현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55절에는 콜라나 햄버거 광고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피는 참된 음료로다( 6:55) 56절에는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6:56)

 

제삼자가 들으면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역사에 의하면 당시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핍박할 바로 이런 내용들 때문에 기독교를 괴집단으로 몰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박히기 최후의 만찬에서도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건네시며 “받아먹으라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먹는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보다 실제적인 표현이 ‘예수를 먹는다’는 표현입니다. 무엇이든지 먹는다고 표현하는 한국 사람에게는 이해가 빠릅니다.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칠 때도 주로 먹는 것으로 비유하면 빨리 계산해냅니다. “사과가 10개가 있는데 3개를 먹었다면 개가 남을까?, “세 개요”, “아니 10 3개를 먹었는데 어떻게 개가 남아? “우리 엄마가 먹는 남는 거래요”라는 농담도 있습니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6:56)」라고 하셨습니다. 원색적 표현 안에 신앙의 핵심적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표현은 소화를 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밥을 입안에 넣어 꼭꼭 씹고 침과 밥이 섞여서 식도를 통해 위장으로 넘겨집니다. 그러면서 입안에 넣고 맛을 느끼고, 위장에서는 위액과 함께 소화의 과정을 거쳐 밥이 완전히 분해됩니다.

 

분해된 밥은 다양한 영양소를 만들고 혈액을 통해서 영양소가 온몸으로 전달됩니다. 밥은 우리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활동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먹어야 힘이 나고 먹어야 생명이 유지됩니다. 먹고 소화시키는 과정은 나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가 안에 내가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먹어야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우리의 진짜 밥이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은 전부 먹는 이야기입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산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산다,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평소에 식탁에서 먹는 밥은 살기 위해서 먹지만 엄밀히 말하면 먹고 죽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당장 죽는 것이 아니니까 심으로 산다고 그러는 것이지, 사실은 밥은 서서히 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류 호텔에서 최고의 요리를 먹었다고 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배가 고픕니다. 아침을 실컷 먹었어도 점심때 챙겨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먹고 죽는 것입니다. 먹어도 죽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지금 나를 찾느냐?”라고 하십니다. 먹고 죽을 것을 찾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도 광야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었지만 결국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답이 나옵니다. 기적은 좋지만, 기적 자체가 핵심이 아닙니다. 오늘의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암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다 해도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쇠퇴합니다. 육신의 밥을 먹는 것은 아주 일시적인 순간을 유지하는 일에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요즘 웰빙 음식이 많습니다. 무엇인가 좋은 것을 찾아다닙니다. 생명 공학의 발달로 120세까지 사는 시대가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고령화 시대에 대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노후 문제가 이슈입니다. 그러나 쉽게 풀릴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식들 보는 것도 갈수록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짜 노후 준비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 얼마나 건강하게 사느냐가 아닙니다. 100년을 살아도 영원에 비교하면 여름밤의 꿈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떡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한 노력도 좋지만, 우리는 영원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시적인 문제를 푸는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생활의 필요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몰두한다면 영의 세계에 눈을 없습니다. 요즘에는 포장지가 너무 멋있고 화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포장지가 좋고 화려해도 중요한 것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누가 주었느냐입니다. 오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으로 떡에 열광하고 있지만, 주님의 관심은 떡을 누가 주었느냐입니다. 그분에 대한 관심이 본질입니다.

 

그것을 붙들지 못하면 포장지만 붙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핵심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영원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6:58) 순간적인 문제 해결에 너무 목을 매지 않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신앙은 지금 당장 좋은 것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합니다.

 

너무 쉽게 문제를 풀려고 하면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빨리,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알라딘의 램프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 주는 신을 원한다면 믿음의 곁길로 빠지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2:2) 영광을 바라보는 훈련, 순간이 아니라 영원을 추구하는 신앙, 그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것은 무엇입니까? 일시적으로 배를 채우는 떡이 아니라 떡을 먹는 것입니다. 기적에 목을 매지 말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생명 되시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안에서 역사할 파워가 있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살맛이 납니다. 예수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떡인가요? 떡인가요? 나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를 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나는 무엇에 배가 고픈가? 무엇으로 힘을 내려고 하는가? 무엇으로 만족을 얻고자 하는가?

 

사탄은 자꾸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사탄은 세상에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이고 먹는 것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세상에 자꾸 눈을 돌리게 하고 세상의 것으로 배를 불리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고 만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세끼 밥을 먹을 때마다 진짜 밥이신 그리스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먹어야 내가 삽니다. 영적인 것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눈이 열리면 말씀의 맛을 알아가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66절을 보면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현실적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군중으로 돌아섰습니다.

 

현실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교회에 오신 분들은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군중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가 정확히 보았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을 걸자 예수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라( 4:4) 간단하지만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핵심적 진리입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실감하는 것은 말씀의 위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보다 강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살은 참된 양식이다.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떡은 예수님이고 동시에 생명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먹는다는 것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입니다. 말씀을 열심히 먹으면 힘이 납니다. 영적인 힘은 말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63절에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63)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과 육을 정확히 구분하십니다. 영이 살아있지 않은 육은 무익합니다. 말씀을 먹지 않아 영이 살아있지 않으면 육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육체가 존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 죽어있으면 몸은 사실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영이 살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육신이 기름진 것만 열심히 먹으면 육이 펄펄 살아서 주체를 못합니다. 영은 죽어있고 육만 기세등등한 삶은 끔찍합니다. 육이 나를 지배하게 되고, 밖에 지을 없습니다. 앞에서 무력합니다. 죄에 저항할 힘이 하나도 없어 육체의 본성대로 짐승처럼 삽니다. 왜냐하면, 영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만 만족시키는 일에 몰두하니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육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영의 힘에 의해서 육이 의미를 가지며 인생이 존귀해집니다. 영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살리는 영이신 성령이 역사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 식욕이 있습니까? 내가 영의 사람인가 육의 사람인가를 있는 질문입니다. 영적 식욕은 영이 하나님의 영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욕구입니다.

 

며칠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이 갈급하고 심하면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이 채워지지 않으면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갈증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심하면 갈증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느낀다면 영의 사람입니다.

 

영에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여행 중에 한국 사람은 여러 동안 김치를 먹지 못하면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먹은 같지 않고, 아무리 좋은 요리를 먹어도 김치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영의 것이 사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섭취하지 않으면 영혼이 곤고해지고 힘을 잃게 됩니다.

 

시편에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19:131)」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주인이 밥을 때의 강아지와 같습니다.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렸습니다. 생존의 기로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 통해 생명의 기운을 얻으면 이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떡을 먹어야 삽니다. 그것은 떡이신 예수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먹을 예수의 생명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안에서 영적 기운을 일으키고 의욕이 넘치게 합니다. 말씀을 먹을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나를 감싸서 땅의 환란과 문제를 뚫고 나가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저의 큰아들은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당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먹어주면 자기 몸이 기쁨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힘이 난다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56절에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6:56) 신비로운 말씀이지만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말씀으로 충만하면 내가 죽을 육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생의 힘이 안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없는, 죽음 앞에서도 맞대응하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떡을 먹지 않으면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유리그릇과 같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 영이 떠나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런데도 영이 빠져나가면 썩을 몸을 붙잡고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떡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떡을 먹은 사람은 영생의 안에 있습니다. 영이 없는 육은 무익합니다. 살았어도 영을 만족시키지 않고 육만 있다면 하루하루 위태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하고 심각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날마다 흔들어대고,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들이 몰려옵니다. 순간적인 해결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떠날 이유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입니다. “나는 언제나 영생의 말씀을 선택하겠습니다., “주님만이 삶의 만족이고 기쁨입니다.”라는 진실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먹고 사는 길입니다. 영혼이 배부른 , 진짜 기적은 지금 배가 부르고, 내가 병이 낫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육체는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고 먹으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게 됩니다. 죽음의 힘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떡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진짜 기적은 영생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게 ‘영원히 사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영원을 추구하는 자로서 믿음 안에서 순간적인 배부름이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영원한 것을 놓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안에 있는 생명 /6:53-56/고전10:16/ 앤드류 머레이

2015-06-22 23:27:03

 

▲아래 말씀들은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살은 참된 양식이요 피는 참된 음료로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안에 거하나니" 6:53-56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고전10:16

 

물을 세탁하는데 사용하면 그것이 깨끗이 씻어주는 역할을 합니다만

물을 마시면 신선해지고 새로워지는 효과가 납니다.

이렇게 물이 이중적인 효과를 내듯이, 거룩한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충만히 알기를 바라는 사람은

피를 마시는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씻는 것과 마시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물로 씻는 일도 필요하고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물을 마시는 것이, 훨씬 필요하고 생명을 유지케 하는 일입니다.

 

물로 깨끗이 씻지 않으면.. 마땅히 살아야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만

물을 마시지 않고서는.. 아예 살지를 하는 것입니다.

 

오직 물을 마심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하는 능력의 충만한 혜택을 누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 피의 효과를 마음을 다하여 누리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라는 말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습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말이 더더욱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피를 마시는 일’은 모세의 율법으로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피를 마시면 극심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예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피를 <마시라> 하십니까?

 

 

1. ‘그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어떠한 축복을 묘사하는가요?

 

물로 씻는 것보다, 물을 마시는 것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효과를 냅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교제 속에는

‘깨끗이 씻음’이나 ‘거룩하게 함’보다 훨씬 깊은 축복이 있습니다.

 

아니 ‘그 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시사하는 축복의 영향력이

얼마나 널리 미치는지를 있습니다.

 

피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행할 아니라 우리 속에서 무언가를 행합니다.

우리의 속을 전연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사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종류로 구분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육체와 영혼의 자연적인 생명을 지녔습니다.

그들 가운데 경건하고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주님은 그들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는"

그들 속에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하늘의 생명, 그리스도 자신이 소유하셨고

그가 친히 베푸시는 생명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땅의 모든 생명체는, 외부로 부터 영양분을 받아야만 합니다.

자연의 생명은 빵과 물로써 자연적으로 영양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은.. 예수님 자신이 주시는 하늘의 양식과 음료로

영양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생명 바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인자로서 땅에서 사셨던 생명 말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우리 주님은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시면서

더욱더 강력하게 점을 강조하십니다.

 

"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 주님이 땅에 임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육체가운데 있는 영생을 드러내며

육체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영생이 신적인 능력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육체적인 안에 생명이 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자기의 살을 먹고 자기의 피를 마시는 자들은

그의 몸을 그들을 유지하는 능력으로 삼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들의 안에서도 영생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그들을 다시 살리리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놀라운 점은

그것이 인간의 안에 있는 영생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몸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의 몸도 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것입니다.

 

▲주님은 "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료다"라고 하셨습니다. 6:55

땅의 양식은 참된 양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참된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가져다주고, 유지시켜주며, 더구나 그림자처럼이나..

그저 상징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그렇게 자주 반복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충만하고도 참된 의미에서

영생이 우리 속에서 영양분을 받고 유지되는 참된 양식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료다"

 

▲이 양식의 실재와 능력을 지적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은

"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안에 거하나니"

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영양분을 섭취하는 일은

주님과의 지극히 완전한 연합의 효과를 이루어 냅니다.

그의 살과 피가 그런 영생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그를 믿는 자들은

그저 그에게서 마음에 이런 저런 영향을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지극히 친밀하고 또한 영구히 지속되는 연합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안에 거하나니"

 

그러므로 인자의 피를 마시는 축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요, 그와 함께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 얼마나 실제적인 것이냐 하는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있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6:57)

 

우리 주님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처럼,

주님과 우리의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나뉠수 없는 신적인 본성에 있어서 위격이 참으로 하나이신 것처럼

그렇게 (피를 마시는) 사람이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몸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나누는 존재가 되었고

우리 주님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존재가 것입니다.

축복을 충만히 받기를 사모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라는 거룩하고도 신비한 표현을 통해서

성경이 베풀어 주는 모든 것들을 조심스럽게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피를 마신다'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1. 영적으로 흠뻑 피에 젖음

"마신다" 것은 피의 능력에 관하여 우리가 깨닫는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으로 깊이 진정으로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연사의 말에 흠뻑 빠져서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경우에

사람의 말을 "마신다"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의 보배로움과 능력에 대한 감각으로 가득 채워질 경우

그가 피에 대한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기뻐할 경우에..

 

마음이 전심의 믿음으로 피를 스스로 취하고

속마음으로 피의 생명을 주는 능력을 납득하려 힘쓰는 경우에

내가 "예수의 피를 마신다"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피로 말미암는 구속과 깨끗이 씻음과 거룩하게 함에 대해서

믿음으로 바라볼 있는 모든 내용을

그의 영혼 깊은 곳으로 흡수해 들이는 것입니다.

표현에는 아주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피로 말미암는 충만한 축복을 얻을 있는 길을

표현이 아주 영광스럽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코카콜라 사장이 ' 몸에는 코카콜라가 흐른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성도들은 ' 몸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른다' 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2. 성찬식에 참여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 표현을

거듭거듭 사용하심으로써 이보다 더한 것을 의도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가버나움이었고,

말씀이 훗날 성찬식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전달받는 일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기를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1:23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몸이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협력하고 상합하여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몸을 자라게 하느니라" 4:15~16

 

3. 피로 하나됨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고전6:15~16

그리스도께서 몸과 영으로 우리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도 아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다시 "우리는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라" 영광스러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 비밀이 크도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주님의 살과 안에서 하나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됨의 역사가 너무나도 높고 귀하여

그것을 해명하기 보다는 그저 그것에 대하여 놀라워하는 것입니다.

 

성찬에는 그저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누리는 것보다

더한 의미(하나됨) 있습니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6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2)

 

‘그 피를 마신다’는 것은 과연 지극히 친밀하고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발효되는

그러한 깊고 깊은 영적 신비인 것입니다.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의 연합을 충만히 누리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실 때에 드러내 보이신 바로 기질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자가 ,

그것이 바로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피는 몸에 생명입니다.

※우리도 '피를 나눈 형제, 핏줄, 핏덩어리(자녀)'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기를 바라면

거기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인간적인 강력한 방식으로

피가 하늘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강건케 것입니다.

속에서 부은바 생명이,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생명이 죽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일이

어떻게 주님의 하늘의 생명에 고귀하게 참여하는 것이 되는지를 깨닫는 데서

믿음의 가장 고상하고 영광된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 읽으실 ..........................

 

 

3. ‘피를 마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가장 깊은 신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을 앞에서 이미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예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의 피를 마신다" 표현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시기를 구할

깊고 깊은 경외심을 갖고 그에게 나아가야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충만한 연합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올바로 배우게 됩니다.

"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안에 거하리라"

 

그저 용서함으로만 만족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풍성히 마시게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 자는

영혼과 육체의 구속의 충만한 능력을 체험하여 예수님께 있었던 것과 동일한 기질을

자신도 진정으로 소유하게 되기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피를 마시는 " 그저 작은 부분만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목표와 동일한 목표

" 안에 거하고 나도 안에 거하리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아서 힘쓰는 사람은

영생의 능력이 자기 몸에서 역사하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말씀들이 너무 높다거나 너무 비밀스럽다거나 하는 선입관 때문에

두려워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사고방식을 갖기를 사모합니다.

그가 하늘에 속해있고 또한 그리로 향하여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로서 오는 양식과 음료를 얻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갈증이 없이는 음료를 마시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와의 완전한 교제를 갈망하는 것이 바로 갈증이요

그것이야말로 피를 마시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인 것입니다.

 

▲갈증 있는 영혼이 생명을 주는 음료를 마셔

하늘로부터 말미암아 새로워지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를 마시는 일이 하늘의 신비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만유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고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계신

하늘에도 또한 "뿌린 " 있습니다. 12:23~24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실 , 말하자면 손으로 붙잡고 가실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력의 범위 이상의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나 그의 생명에 대하여

가운데 우리의 몫에 대하여

그리고 피의 살아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들은

그가(성령께서)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영광스러운 현실의 그저 희미하고 가느다란 빛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피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피를 마시는 증거를

과연 우리의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몸의 지체가 하나씩 정맥을 통해서

심장에서 계속해서 새로이 흘러나오는 피를 받는 바로 그곳이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몸은 지체마다 끊임없이 풍성하게 피를 받아 마시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예수와 연합시키시는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께서

이처럼 피를 마시는 역사를 내적 삶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는 일에 대하여 하신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어려운 "이라고 하며 불평하자

주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신적인 신비를 우리 속에서 생명과 능력으로

신비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참된 살아 있는 체험으로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축복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리라는 고요하며 강하고 확정된 믿음의 기대가

반드시 우리 편에서 있어야 합니다.

보배로운 피가 있고 또한 베풀어 있는 모든 것이

정말로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극한 확신과 기쁨으로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있을 것입니다.

" 주님, 주의 피가 제게 생명을 주는 음료입니다.

저를 피에 씻으시고 깨끗하게 하신 주께서

날마다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기를’ 가르치사

제가 안에 거하고 주께서 제안에 거하시도록 만드시옵소서."

주께서 반드시 구하는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

 

1)

개혁교회에는 성찬에 대하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개혁자 츠빙글리의 이름을 따라서 불리는 가지 견해에 따르면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저 영적진리의 증표 혹은 상징물로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몸에 영양을 주고 힘을 주는 것과 똑같이

그만큼 확실하게 - 오히려 그보다 확실하게 -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닫고 우리의 것으로 삼은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혼에 영양을 주고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이름이 붙어있는 다른 견해에 따르면

성찬에 참여하는 일에는 이보다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모종의 감추어진 방식으로 사람이 깨달을 없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영양을 받아서

심지어 우리의 몸조차도 주님의 몸의 능력을 통하여

영생의 능력에 참여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몸의 부활과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일과 연관을 짓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성찬이 요구하는 육체적 임재는 여기서(성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이 우리의 영에게 영생에 대한 의심할바 없는 확신이 아니라

육체의, 불멸까지도 확신하게 해준다.

 

이것이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부끄럼없이

그것은 너무나 높은 신비여서 나의 영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고

나의 말로써 표현할 없다고 시인할 것이다.

내가 깨달을 있는 이상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살이 그렇게도 무한히 거리에서 우리에게 도달하여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이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것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해력으로 납득할 없는 그것을 믿음으로 포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과 피를 신성하게 전달하셔서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심어주시며

그것이 마치 우리의 뼈와 골수를 찔러 관통하듯 한다는 사실 말이다."

 

2)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가 흘린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으심을 포용하여

죄사함과 영생을 받는다는 뜻임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고

또한 동시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신성한 몸과 점점 연합되어

우리가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위에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의 중의 살이 되며, 그의 뼈중의 뼈가 되어,

영원토록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받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6:41-59/ 하용조 목사

2015-05-27 22:47:31

 

죄인을 구원해 영원한 생명 누리게 하는 ‘참 양식과 음료’

깨진 관계를 하나로 잇는 예수님께 연결, ‘생명의 능력’ 경험해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서

핵심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면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복을 누릴 것입니다.

 

 

11 27~29일까지 일본에서 생각지도 못한 은혜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서울 온누리교회의 모세대학, 일본어 예배 관계자들 90여명, 일본의 다섯 교회에서 1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예상치도 않았던 100 명이 참석했습니다.

 

일본 집회에 대한 정의는 한마디로 ‘생각지도 못한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모든 분들이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는 아름다운 경험을 했습니다. 내년에도 이런 집회로 다시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헌금하며 눈물 흘릴 보잘 없던 일본 교회들에 그동안 엄청난 축복이 있었습니다.

 

우에다에서 오신 여자 성도 분과 동경온누리교회(장재윤 목사) 남자 성도 분의 간증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세례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모든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가 넘쳤던 기쁨이 충만한 집회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교회를 환영하기보다 거절하고, 이해하기보다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를 말할 사람들은 거부감과 적개심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타락했다’라고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도 인간은 선한 구석이 있지 않느냐’며 반발합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있다’고 설명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주어졌다’며 맞섭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요, 메시아다’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내고 맙니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식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면 진화론자나 이성주의자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벌떼처럼 들고일어납니다. 그들은 윤회설이 이성적이고 타당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천국이 있다고 하면 듣기 싫어하고 지옥이 있다고 하면 더욱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자신이 지옥으로 같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며 애써 태연한 합니다.

 

이렇듯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해 사람들은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2,000 전에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를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떡이라고 증거하실 함께 있던 종교인들은 부정적인 반응과 적개심을 나타냈습니다. 말씀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41, 42절입니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1 말씀에 ‘서로 수군거렸다’고 기록하고 있고, 42 말씀에는 ‘예수의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떻게 자기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할 있느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신론자보다 묘하고 복잡하며 강퍅한 사람이 종교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편견과 오류를 범하고도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수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께서 종교인들에게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3, 44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4 말씀에는 구원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에게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없다는 설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닫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미는 , 초청하는 손’이 있기에 구원을 얻을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손’과 ‘믿음의 손’ 사이의 예수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서 믿을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초청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님을 믿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나를 이끄시지 않으셨다면 응답할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허공에 손을 내밀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다’며 소리 지를 있겠습니까? 그분이 계시지 않고 초청하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응답할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손은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은혜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조건 없이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응답이 존재할 않습니다.

 

내가 편지를 쓰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특정인 ‘아무개’에게나 편지를 없는 노릇입니다. 이름도, 주소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편지를 있겠습니까? 편지는 대상이 분명히 있어야 부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는다’는 것도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다는 겁니까? 그분이 부르시고 초청하시며 이끄셨기 때문에 내가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 입니다.

 

둘째, ‘믿음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에 내가 응답하고 마주 뻗는 손이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미는 손과 내가 구원을 요청하는 손이 닿는 연결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운데에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손은 만날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일입니다.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영원하신 자에게 연결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44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과 나를 연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은혜의 손과 나의 믿음의 사이에 예수님께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45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이요, 조건 없는 사랑이요, 영원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초청하시고 이끄셔서 예수님께로 오게 하셨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로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끄시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오신 분도 있겠지만 거기에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오셨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그분께로 오게 됩니다.

 

꿰어 억지로 오는 분도 있고, ‘아멘, 할렐루야’하며 즐겁게 오는 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든 성도들이 춤추며 기쁘게 그분께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름 ‘예수’

 

45절에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았다는 뜻인가요? 46 말씀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를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을 뵙지 못했지만 환경, 여건, 심정 여러 가지 정황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하심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살다가 실망한 나머지 자살 직전에 하나님께로 나오기도 합니다. 외로움, 실패, 절망, 질병을 통해 이끌려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적은 없지만 여러 상황에서 자꾸 하나님께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와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7, 48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생명의 떡이로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셨기에 본인도 모르게 교회로 나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 앞에 갔을 은혜와 생명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삶을 경험하고서야 하나님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서 핵심은 생명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공언하셨습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생명의 특징은 한마디로 죽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특징이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슬프거나 절망하고 싸우는 것들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로 입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프다, 죽고 싶다, 괴롭다, 죽이고 싶다, 불안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등은 죽음의 그림자가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모든 상담은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생명이 있습니다. 안에 생명이 있으면 성장하게 됩니다. 생명의 성장에는 ‘번식’과 ‘열매’가 있습니다. 생명의 성장은 절대 멈추지 않는 법입니다. 생명은 사랑이고 빛이며 영원입니다. 생명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안에 들어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운데 서게 되고 편안해지며 용서하고 관용합니다.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자녀들에 대한 희생 정신이 생깁니다. 샘솟는 기쁨이 자기 안에 움트는 것을 경험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명사입니다. 덧붙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생명의 떡과 비교되는 것이 구약에서 먹었던 ‘만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은 죽었지만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49절에서 51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고서도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겐 ‘죽음’의 개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고 죽어도 사는 것이 됩니다. 그게 생명의 특징입니다. 죽는 순간에도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을 닿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 드는 것과 상관없이 성도들의 얼굴에 생명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과 음료

 

사람이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시체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어도 살아있는 같습니다. 입에선 생명의 말이 나오고 감사와 찬양이 넘쳐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재미있게 ‘생명의 떡’으로 표현했습니다. ‘떡’의 기능은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떡’은 떼어서 먹는 것입니다. ‘떡’이라는 말은 ‘먹는다’는 말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듯이 신앙은 느끼고 감상하는 아닙니다. 보고 즐기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구경만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가대가 노래를 얼마나 하는지 봅니다. 목사가 얼마나 설교를 하는지 살핍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왔는지,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게 구경만 하면 10년을 왔다갔다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떡’을 먹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객관적 대상이 아니십니다. 지식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안에 계시는 영원하신 주님이 되십니다. 52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사람이 어찌 능히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식인종의 관점’에서 이해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해석할 없습니다. 육은 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해석하려면 식인종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식인종 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됩니다. 계속해 53~ 55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살은 참된 양식이요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감상하고 따지며 연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나를 먹고 마셔라. 그러면 주리고 목마른 인생은 풍성해지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내가 녹아져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6, 57 말씀입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먹으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먹어야 삽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개념이 성만찬식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려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것입니다.

 

‘내 살을 먹어라. 피를 마셔라’는 말씀은 단지 관념이 아니라 역사의 경험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통해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늙어간다는 것에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병든 것도 실패한 것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생명이 들어오면 모두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십시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를 위해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시간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전달되게 하시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나는 생명의 떡입니다 /6:30-35/ 이동원 목사

2015-05-07 16:25:02

 

영국에 컨글튼 경(Lord Congleton)이라는 유명한 그리스도인 부호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컨글튼 경이, 자기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게 만약 5파운드만 있다면 이상 소원이 없겠다.』이 말을 들은 컨글튼 경은 하녀에게 다가가 “정말 그런가?” 하고 물었습니다.

 

『주인님, 정말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컨글튼 경은 하녀의 등을 다독거려 주면서 “내가 5파운드를 줄테니 이제부터는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렴” 하고 말했습니다. 이게 횡재입니까?

 

그런데 컨글튼 경이 정원으로 나가는데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참, 이럴 알았으면 10파운드라고 말하는 건데, 아유 아까워.』

 

또다시 불평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화는 만족할 모르고 끝없이 불평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항상 만족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필요와 필요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당신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입니까?

 

가장 근본적인 필요

 

현대인들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심리학자 가운데 사람인 아브라함 머슬로우는 “인간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필요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 생존을 위한 필요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최고의 필요는 자아 실현이다”라고 했습니다. 일리있는 지적입니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육체적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도 자기 생존을 위한 필요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아셨던 것입니다. 예로 요한복음 6장 부분을 보겠습니다.

 

벳세다의 들판에 모인 배고픈 군중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하신 자체가 예수께서 배고픔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지구촌의 빈곤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되지 않겠습니까?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나라의 요즘 세대에게는 ‘절대 빈곤’이라는 말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촌에는 10억에 해당하는 인류가 아직도 절대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즉,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구촌에 10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웃의 빈곤에 무관심해서는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문제를 책임져야 윤리적인 의무가 있습니다.그러나 그들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했다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근본적인 해답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그날 벳세다의 들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배고픔을 면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까? 심한 말인지 모르지만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불안해 하며, 불만스러워하며, 방황하며, 슬퍼하며, 배고파하는 군중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도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필요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야기는 “근본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인간은 결코 만족스러울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가지 그냥 넘길 없는 것은 기적을 체험한 후의 이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기적 때문에 감격한 흔적은 별로 찾아볼 없습니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절).그들은 이미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31,32절).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당시의 민중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정도의 기적 가지고는 됩니다. 아직 당신은 모세보다 못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내리게 하여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루 분의 양식을 채워 주는 정도의 기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적어도 40년 간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이런 식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맛보고도 주님 앞에 커다란 기적을 요구하며 끝없이 불평하는 당시 민중들의 얼굴을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모세 당시에 있었던 민중들은 만나를 내리시는 기적으로 만족했습니까? 그들도 만족한 흔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항상 만나만 주십니까?”라고 투정하던 구약 백성들의 얼굴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을 없습니다. 백성들은 아직도 그들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필요, 그리고 근원적인 필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근원적인 필요 가지를 지적해 주고 계십니다.

 

첫번째 필요/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내게로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37절).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오는 것, 그것이 근본적인 필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음식, 직장, 사업, 많은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너희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이다.”

 

시편 기자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영혼이 주(主)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인생의 근원적인 필요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없이는 제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결코 만족할 없다는 것을 시편 기자는 알았습니다. 어거스틴도 오래 전에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하나님! 영혼이 당신의 품에 돌아가 쉬기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었나이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 인생의 근본적인 필요가 해결되었다는 고백을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고,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당신은 아직도 굶주린 사람입니다.

 

두번째 필요/영생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절).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힙니다. 내가 무언가 성취했다고 해도 기쁨은 순간입니다. 다음 우리는 인생의 또다른 불안과 두려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

 

다음에는 무엇일까요? 결국 사람이 마지막에 직면해야 것은 차디찬 무덤입니다. 무덤을 생각하면 쓸쓸합니다.“나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이 사실 앞에서 당신의 성공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인생을 향락한다고 하지만 쾌락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자유, 삶의 보람, 그것이 차디찬 줌의 앞에서 가지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중세 로마의 어떤 대학 정문 앞에 이런 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던 젊은이가 청운의 꿈을 품고서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가난해서 뜻을 이루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자선 사업을 하는 유명한 할머니 분을 찾아갔습니다.

 

“할머니, 저는 꿈이 있는 젊은이입니다. 학창 시절에만 저를 도와 주시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청년의 고백을 들으면서 할머니가 물었습니다.『청년이 하려는 계획은 무엇이오?』

 

“예, 우선 법과대학에 들어가면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그리고 다음에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변호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정의 구현에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리고 다음에는…변호사 사업을 좀더 확장해서 많은 사람들의 공익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할머니가 묻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늙겠죠. 늙으면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과 편리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머리를 긁던 청년이 대답합니다.

 

“죽겠지요.”

 

『그리고 다음에는?』

 

“……”

 

청년은 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할머니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인생의 마지막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한푼도 투자할 없소.』

 

할머니와의 만남이 청년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건 이후에 자기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훗날 자기가 세운 대학 정문에 간판을 붙였던 것입니다.『그리고 다음에는?』

 

삶의 궁극적인 문제, 영생의 문제,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문제 앞에 말이 없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오늘의 성취도, 성공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영생의 문제, 이것이 당신의 근원적인 필요(Need)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가장 근본적인 필요에 대한 대답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유명한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나는 무엇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일곱 가지가 나오는데, 중의 하나가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선언 속에 담겨진 의미를 가지로 요약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라는 말은 흔히 우리가 친구와 대화하면서 “내가 말이야, 내가 있잖아” 하는 식으로 말하는 ‘내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가’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어서 있는 자다”(I AM THAT AM)라고 대답하셨습니다(출 3:14). ‘I AM’이라는 말은 신적(神的)인 명칭입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의미를 여기에서 사용했습니다. 구약에서 사용되었던 의미와 전적으로 동일한 선언! 여기에서 ‘내가’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가 인생의 문제에 대한 대답입니까?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지으신 분이시요, 나의 섭리자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만나를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신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32절).하늘에서 내린 떡, 사실 떡은 모세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말씀은 “내가 하나님이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영접했다”라고 그것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말은 그리스도가 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해답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 자신이 해답이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그의 필요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필요가 많았습니다. 우선 그에게는 독립이 필요했습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제게 자유를 주십시오. 마음대로 여행도 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하게 해주세요. 아버지 밑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죽치고 있어야만 합니까?”

 

그에게는 많은 필요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나라에서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던 그날,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필요는 아버지였습니다.

 

“오, 아버지께서 나를 영접해 주신다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시 한번 회복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돌아오는 탕자 그리고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하십니까?

 

“얘들아, 살진 송아지를 잡자. 잔치를 벌이자.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는 신을 신겨라. 그리고 옷을 입혀라.”

 

이제 아들의 모든 외적인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자연히 따라오게 것들입니다. 문제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얼마나 주실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궁극적 필요 자체입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실제로 깨닫는 데에 우리는 이렇게도 더딘지요?

 

셋째로, 예수님 안에 참된 영원한 만족이 있습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인류 역사상 누가 이런 엄청난 약속을 적이 있습니까?“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 나를 소유하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아니, 예수를 믿으면 정말로 그렇게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당신의 간증일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긴 믿지만, 오늘 우리의 속에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의 약속들을 어디까지가 진실이라고 고백할 있습니까?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말씀을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크고 작은 수많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 사업, 결혼, 재물, 성공, 성취 수많은 문제들과 싸우고 있음을 부인할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신뢰했을 때, 적어도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무덤 건너편에는 영원한 본향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있게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소한 필요 때문에 나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감히 이런 고백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필요한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주실 믿습니다. 필요가 바꾸어져야 필요가 있다면, 주께서 시선을 조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백은 것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에 나도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처럼 고백합니다.“내게는 배고픔이 없습니다. 내게는 목마름이 없습니다.”시편 기자처럼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나의 생명의 떡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복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내가 생명의 떡이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이제 약속을 더욱 확신있게 주장하십시오. 하늘과 땅을 주장하시는 아버지, 그분께서 나의 아버지시라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불안에 싸일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애니 플렌트라는 여인은 은혜를 다음과 같은 시로 주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짐이 무거워질

 

더욱 은혜 내리시며,

 

우리가 힘겨워할

 

더욱 힘을 주시도다.

 

고통이 더해질 긍휼을 입히시고,

 

시험이 더해질 평강을 부으시도다.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을 즈음,

 

우리가 쌓아 모든 것이 고갈될 즈음,

 

아버지의 풍요의 공급은 이제 시작되었도다.

 

아! 그의 사랑 끝없어라.

 

그의 은혜 측량할 없어라.

 

헤아릴 없어라.

 

작은 머리로는,

 

무한하신 풍요와 능하심을!

 

오, 예수여.

 

당신은 내게 주시네, 주시네,

 

또다시 주시네.

 

주님이 함께하시는 한, 우리는 고통과 갈등을 안겨주는 많은 필요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행복한 고백을 있습니다.

 

“배고픔이 없습니다. 목마름이 없습니다. 주님 때문입니다. 주께서 주님 자신을 저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찬송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생애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넘어서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되찾는 평안을 누릴 있을 것입니다. 참된 영원한 만족은 예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직도 저희는 생존 경쟁 가운데 숨막히게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필요로 인해, 우리는 부족한 한계를 느끼며 고뇌와 고독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사업에 대한 해결도, 저를 괴롭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단순한 해답도 아닙니다. 저의 진정한 필요는 오직 아버지이심을 항상 깨닫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와 함께하시면 두렵지 않습니다. 절망도 외로움도 겁나지 않습니다. 이제 주어진 삶의 마지막 날들을, 주님과 더불어 도전해 나가고 싶습니다.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저희에게 다가오신 그리스도를 향해 몸과 마음을 드립니다. 생명의 떡이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한 찬양을 부르며 인생의 걸음 걸음을 내딛고 싶습니다.

 

오, 주여. 저의 시선이 항상 주님을 향할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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