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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1장 35절 이하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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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스라엘 사람 /1:43-51/ 곽선희 목사

2014-11-27 22:47:10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고향인 폴라드 실레시아를 향해 말을 타고 혼자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깊은 산속의 숲길을 지나가고 있을 무렵 무서운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고 타고 가던 말까지도 빼앗았습니다. 강도는 단호하게 물었습니다. “네가 가진 것이 이것이 전부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 이것이 전부입니다.” 강도는 다 빼앗은 후에 칸트의 아버지를 놓아 주었습니다.

 

가라고. 그래서 허둥지둥 혼자 걸어서 먼 길을 다시 가게 되는데 가다보니까 옷깃에서 묵직한 것이 손에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옷깃에다가 넣고 꿰매서 보관한 금덩어리였습니다.

 

그는 깊이 생각한 바가 있어서 이 금덩어리를 손에 들고 다시 강도에게로 갔습니다. “아까 한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너무 무서워서 그게 다라고 했는데 가다보니 내 주머니에 이 금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금덩어리를 내놓았습니다.

 

강도는 깜짝 놀랐고, 아무도 이 금덩어리를 받아 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강도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되 돌려주었고 말까지도 돌려주었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요새 이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병자 아닙니까? 이건 넌센스가 아닙니까? 아주 어리석은 사람의 얘기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엄연한 사실입니다. 진실이 없는 세대, 변명이 많은 세대, 이 세대에는 꿈같은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이와 비슷한 경험이 좀 있었습니까? 아니,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몇 건의 사건, 이 비슷한 경험이 있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진실과 정직함이 금보다 더 귀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강도 앞에서 그랬지만, 없다고 한 말, 이것이 전부라고 한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이 거짓말이 금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어요. 진실만이 힘이요, 용기요, 지혜요, 그리고 완악한 사람의 마음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일정 말년에 우리 한국 교회는 큰 시련에 빠졌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동리마다 만들어 놓은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집에까지 가미다나(かみだな)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일본의 신을 섬기라는 겁니다.

 

신사를 섬기고, 신사를 향해 절하고, 신사 앞을 지나갈 때는 머리를 숙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 어려운 문제에 빠졌습니다. 이 신사 앞에 고개를 숙이느냐 아니하느냐, 아니한다고 하면 그대로 끌려가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 그런 형편입니다.

 

그 때에 묘한 안책이 나왔습니다. 고개를 숙이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어떠냐고. 마음으로는 기도하고 겉으로는 신사 앞에 고개를 숙이면 안 되냐고. 미안합니다, 대체로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분은 "아니요. 누가 보건 말건 신사 앞에 고개를 숙였으면 우상에게 절 한 것이요. 마음이 어떤지 아닌지, 그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하고 끌려가서 많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 선배들, 장로님들, 목사님들이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순교란 거짓말할 줄 모르는 자의 행위입니다. 적당히 넘어가는 자에게는 순교는 없습니다. 한 치의 양보 없이 정직하고 바르게 믿음을 지킬 때 바로 이것이 순교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만나는 순간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참 이스라엘 사람. 간사한 것이 없다."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는 그 뜻은 먼저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로마의 속국에 살지만은 그 양심과, 그 인격과, 그 신앙이 자유함을 누리고 있어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또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말과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계속 이렇게 엇갈려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어떤 때는 야곱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야곱과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간사하다는 뜻입니다. 그거 좋지 않은 이름이에요. 그런가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이겼다. ,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이다.’ 하는 그런 뜻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야곱이 아니고 참 이스라엘이다.

 

참 이스라엘. 참이라는 말은 정직하다는 말이요 순수하다는 말이고 또 문자 그대로는 '물을 타지 아니한 술', 물을 타지 아니한 포도주, 순수한 포도주, 그런 뜻입니다. 또 도덕적으로는 간음하지 아니한, 다른 피가 섞이지 않은 피가 깨끗한 아주 순종 이스라엘이다. 그런 뜻이올시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나다나엘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렇게 말하는데 나사렛이란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사렛은 유대나라 맨 최북단에 있습니다. 북쪽에 있어서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저 어느 나라든지 강한 나라들이 쳐들어 올 때마다 북방에서 내려옵니다. 맨 먼저 침략을 당합니다. 이렇게 외세의 침략을 당할 때마다 많은 피해가 있지만,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침략자가 쳐들어오면 먼저 여인들이 짓밟힙니다.

 

여인들이 끌려가서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히 이 나사렛에는 사생아가 많습니다. 그런고로 유대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을 멸시합니다. “저거는 잡종이야. 저거는 순종이 아니야.” 순종 이스라엘이 못 된다고 해서, 피가 섞였다고 해서 나사렛하고 말할 때 그건 아주 일단 비하시키는 말로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이렇게 침략을 많이 받다 보면 자연히 사람이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됩니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이리저리 주체의식이 없고 바른 정직함을 지키지 못해서 그저 적당히, 적당히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지조가 분명하지 못한 사람들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나사렛, 그거 그런 사람들이야.’ 이런 평판이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나사렛 사람 중에 무슨 감히 메시야 같은 분이 나올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나다나엘이 한마디 합니다.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미국의 한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와 16살 된 아들과의 대화입니다. 16살 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나도 이젠 16살이 되니까 자동차 면허를 얻어서, 아버지 자동차를 내가 몰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래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래, 아 하고말고. 그러나 운전을 하려면 책임 있는 인간이 돼야 하느니라. 책임 있는 인간.” “그래요. 어떡하면 됩니까?” “그럼 나하고 약속을 하자. 약속을 지키는 게 책임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첫째, 너 그 성적이 아주 나빠. 공부해서 성적을 좀 올려라. 둘째, 성경을 매일 아침 한 장씩 읽어라.” 약속을 했어요. 다음에는 네 머리가 너무 좀 긴데 그거 좀 잘라서 머리를 좀 단정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랬어요.

 

아 정말로, 이 아이가 한 학기를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올라갔어요. 그리고 아버지 앞에 성적표를 딱 내놓으면서 , 운전 면허도 얻었고, 성적도 올랐고, 내가 성경도 봤습니다. 그러니까 저 운전해도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이러고 보다가 야 그거 머리가 아직도 긴데? 머리를 자르기로 약속했는데 머리는 자르지 않았구나.” 그러니까 그 하는 말이 아버지, 그 예수님의 머리가 길던데. 그 예수님이 장발족인데 저도 예수님 닮아서 좀 길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 아버지 하는 말씀이 그러면 예수님처럼 걸어 다녀라.” 그랬어요.

 

여러분, 약속입니다. 어떻게 돼서 약속을 했든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정직함입니다. 뒤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해서는 안 되죠. 그런데 오늘 나다나엘이 빌립으로부터 전도를 받습니다. 빌립이 말합니다. 오늘 45절에 보면 귀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메시야 대망사상을 굳혀 왔어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차에 기다리는 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분을 내가 만났다.’ 하고 전도를 합니다. 이때에 나다나엘이 대답을 합니다. 나사렛,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렇게 일단 일축해 버립니다.

 

일단 의심을 합니다. 그의 전지식이 그렇고 전경험이 그렇고 나사렛, 그 속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는 없어.’ 이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그의 판단이었습니다. 이성적 반응이기도 합니다.

 

이 때 빌립은 긴 얘길 하지 않습니다. “Come and see.” “와보라.” 와 보라. 생각의 문제가 아니고 이건 경험의 문제다. 이건 만남의 문제라고 합니다. 와 보라. 그럴 때에 나다나엘이 예수께로 나옵니다. 이 장면이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의심을 했다고, 자기 판단이 있다고, 일축하지 않고 이성적 판단을 누르고 전이해와 전경험을 일축하고 대모험을 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모험입니다. 왜요? 전에 경험했던 바가 아니니까. 전에 알던 것이 아니니까. 전에 생각하던 것이 아니니까. 아주 새로운 경험, 창조적 경험에 도전하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뭐 미리 알았고, 옛날에 어떻고, 지식이 어떻고, 도덕률이 어떻고……, 이래가지곤 안 되는 거예요. 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런 변명을 가지고 있어요. 대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그래요.

 

다 알아. 다 안대요. 그러니까 새로운 지식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새로운 경험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의심은 있어요. 그러나 의심을 극복하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건 행동적입니다. 그런가하면 요새말로 positive합니다. 아주 긍정적이에요. 부정을 하지 않고 긍정합니다. 그래서 이성이나 지식이나 경험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것에 준하지 않고 새 경험에 도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그 나오는 그 나다나엘을 예수님이 딱 보시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다.” 참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 못 가본 곳을 갑니다. 해보지 못한 일을 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순종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미지의 땅,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행동으로 반응하는 겁니다. , 의심하면서 나온다. 참 귀한 일입니다. 의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 의심 다 풀릴 때까지 기다리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여러분 식사 하십니까? 그거 위생적으로 과학적으로 다 증명하고 나서 먹으려면 먹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요새 뭐 무엇이 좋다 무엇이 나쁘다들 그 말 많이 합디다만 대충 잡숫고 사세요. 뭐 오늘까지 그렇게 먹어왔는데 뭘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뭐 그 난리를 칩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먹으면 죽는다고, 그러면 안 먹으면 안 죽나?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구요 그냥 편안하게 사세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내 경험, 내 지식에 매이지 말고 이걸 넘어서는 믿음. 이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그런데 나올 때에 오늘 성경에 보니까 벌써 예수님이 이 나다나엘을 알고 계셨어요. 먼저 알고 계셨어요. 말씀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너를 보았느니라.” 깜짝 놀랐어요. 빌립이 너를 만나서 전도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보았다.

 

먼저 보았다는 말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게다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 그거 감동적이에요. 이건 하나의 수수께끼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뭘 하고 있었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만일에 예수님께서 이랬다면 어떨까요?

 

네가 어느 포장마차 집에서 술 먹는 거 봤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그 유대사람들 중에 경건한 사람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거든요. 무화과나무 아래서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었어요.

 

하루에 세 번씩 9, 12, 3시에 꼭 기도하거든요. 시간을 정하고 그 때 딱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을 예수님이 보았거든요. ‘저기에 경건한 유대인이 하나 있구나.’ 하고 있다가 이 사람이 걸어오니까 내가 먼저 보았다.” 라고 하세요.

 

여기서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아주 완전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여러분, 이거 잊지 마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항상 좋은 점을 보십니다. 좋은 시간을 보십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만 봅니다.

 

아름다운면만 봅니다. 아니, 아름다운 면으로 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들을 때에 전인적으로 응답하게 되는 거예요.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각주를 달면 '거기서 네가 기도하고 있는 걸 봤다.' 할 때 나다나엘이 너무 감동이 돼서 마침내 오늘 성경에 보니까 당신은 하나님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탕자비유를 볼 때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 그래서 그 탕자비유의 주인공이 탕자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탕자를 집을 나가도록 허락한 것도 아버지요,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버지입니다. 영접한 것도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어요. 탕자가 돌아오기 전에 벌써 탕자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돌아왔으니 용서한 게 아니고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나왔으니 주님을 안 것이 아니에요. 벌써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내가 세상으로 갈 때에도 나와 함께 계셨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리고 오늘 나를 만나주고 계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나다나엘이 너무 감동을 했습니다. 신앙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감동 먹었냐? 아니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더 큰 일, 여기까지가 네가 한 것이지만, 네가 경험한 것이지만, 네가 생각한 바지만, 네가 고백하는 것이지만 더 큰 일을 보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정직하고 끝까지 진실할 때 더 큰 세계를 볼 것입니다. 더 위대한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위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더 큰 것을 보리라.”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전이해와 전경험에 매여서 새로운 세계로 가지 못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다나엘이 저렇게 의심하면서도 주님 앞에 나아갔고 정직함과 진실을 바쳐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 같이 우리 또한 모든 경험, 전이해, 사소한 생각, 의심 다 버리고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새롭게 신앙을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가 생각한 세계보다 더 넓고 위대한 주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더 큰 것을 보리라 하신 주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당신의 가능성을 실현하십시오 /1:35-42/ 이동원목사

2014-12-05 11:37:12

 

저가 미국에서 섬기든 와싱톤 지구촌교회에 한200m쯤 떨어진 곳 도보로5분거리 안에 그 묘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 묘지이름이 Gate of heaven 천국 문 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런 묘지입니다. ~제가 이따금씩 그 묘지를 교회에서 가깝기 때문에 아주 아름답게 잘 단장된 묘지여서 산책하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묘지를 산책하다가 그기 쓰여진 묘비 문을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무덤 앞에 섰든 일이 있습니다. 그 어린아이 무덤 같아요.

 

지금 제 기억에 마이크라는 어린 아이인데 마이크 니콜슨 five years old, 다섯 살 먹은 아이. 그런데 그 아래에 무어라고 영어로 쓰여졌나 하면 Rest in peace, 평화 속에 잠들다. 라는 그런 비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제가 그 비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마음속에서 의문하나가 생겼습니다. 5살에 죽었는데 이 소년이, 만약 50년을 더 살 수가 있었더라면 아니 607080년을 살 수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자기의 재능과 달란트를 충분히 펼쳐가고 발휘하면서 인생을 살아 갈수 있었더라면 이 아이가 장차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과연 그 비문의 얘기가 정확하게 그 아이의 마음을 나타내 주고있는 것일까? 차라리 보다 정직과 진실에 가까운 어떤 비문이 있다면 자기의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꿈이 꺾인체5살에 세상을 떠나간 마이크라는 소년, 그 소년은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여기에 잠들다. 이렇게 쓰는 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든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그 부모의 배경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또 자기가 가진 지능의 지수가 높든 낮든 차별없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공통으로 부여 받는 선물하나가 있습니다.

 

그 선물은 뭐냐하면 가능성이라는 선물입니다. 영어로 우리가 Potential이라고 그러죠. 가능성이라는 선물,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능성을 펼쳐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흔히 우리가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하고 문화가 펼쳐지고 과학이 발달해 가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이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의 꿈을, 자기의 재능을, 자기의 그 가능성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살다가 떠나가는 사람들로 적지않습니다.

 

, 이 가능성 소위 Potential, 이 가능성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가 어느날 인생의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할 것 같으면 저와 여러분이 가진 이 가능성에도 어떤 변화가 좀 일어나야 하지않겠습니까?

 

가능성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났는데 이 가능성을 펼쳐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전혀의 가능성이 사장되었다, 좀 말이 안되잖아요?

 

저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한 본문을 통해서 자기의 가능성을 펼쳐간 예수님의 한 제자의 얘기를 할려고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고싶은 것이 아니라 이 베드로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꼭 같이 주신 이 가능성을 어떻게 우리가 펼쳐가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싶은 것 입니다. 가능성이란 무엇입니까? Potential이란, 가능성이란 도대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쉽게 가능성을 정리하자면 우리가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한 것,

 

될 수 있는데 되지 못한 것,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했고 될 수 있는데 되지 못한 나의 잠재적 가능성, 잠재적인 능력, 그 능력이 바로 가능성이죠 그것이. 어떻게 이 가능성을 펼쳐가는 인생을 저와 여러분이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우리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 시몬 베드로는 예수 만나고 어떻게 자기의 가능성을 펼쳐가는 인생을 살아갔습니까? 이 베드로를 통해서 배워야 할 우리 인생의 모습을 어떻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그 가능성을 펼쳐가면서 후회 없이 한평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저는 그 첫째로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첫째는 우리의 현재 상(), 나의 지금 현재의 상이 있어요. 내가 느끼고있는 나에 관한 현재의 상, 그 현재 상을 넘어서서 창조주가 설계한 나의 미래상을 먼저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제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내가 나를 어떻게 느껴요? 흔히 우리들의 자화상은 주변 사람들의 말과 평가에 의해서 결정되기가 쉽습니다. 저 사람은 별볼일 없구만, 저 사람은 인생을 헤매고 있구만,

 

그래 나는 별볼일 없어 나는 헤매는 인생이야. 그러다 보면 우리 인생의 꿈은, 가능성은 펼쳐지기가 힘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설계하신 나의 인생의 미래상, 그 미래상을 발견해야 돼요.

 

, 오늘 본문은 자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게 시작 됩니다. 자 본문의 시작 35절에 보시면 또 이튿날 요한이, 여기서 요한은 세례 요한, 침례 요한 입니다.

 

John the Baptist, 그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제자 중에 사도 요한이 있어요. 이 두 사람을 우리가 보통 헷갈리는데, 이 두 제자는 누구냐하면 사도 요한과 또 한 사람은 안드레였을 것입니다.

 

, 36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이, 침례요한이 유명한 설교를 했잖아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그 멧세지를 듣고 이 두 제자,

 

그러니까 사도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고 나서 보니까 정말 침례 요한이 설교한 그대로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 구세주 메시야 였어요. 메시야를 만났다 이 감격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우리 민족이 소망하고 기다려왔든 그 놀라운 메시야를 우리가 드디어 만났다! 그러자 안드레는 그 메시야를 만난 감격을 가지고 자기의 형제에게로 뛰어갑니다.

 

우리가 좋은 일이 생기면 가까운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시몬 베드로를 찾아와서 야! 내가 말이야 메시야를 만났어 너도 만나봐! 그래서 시몬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에게로 왔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 4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42절 다같이 시작,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이 시몬을 만나면서 딱 그 이름을 알았어요. ,만나지도 않고 그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 네가 시몬이로구나,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누구의 아들인 것 까지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아주 이상한 그러나 아주 의미 심장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네가 시몬인데 장차는 말이야 네가 게바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이름을 가지고 얘기를 하셨어요. , 시몬 본래 이름인데 시몬.

 

시몬 이름은 구약성경에 보면 시므온, 야곱의 아들이 있었죠? 열 두 지파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시므온, 시므온 말의 본래의 뜻은 듣는다는 뜻입니다. 듣는다, 듣는다. 그래서 시므온 이름에는 적극적인 의미도 있고 매우 부정적인 그런 이미지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시므온 그러면 그 이름의 뜻이 어떻게 뉘앙스를 갖고 있었는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 혹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음성을 들어주시는 사람, 아주 영적인 사람,

 

이런 이미지로 시므온이 통하기도 했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이 듣는다는 단어에서 왔는데 너무 여러가지 소리를 듣고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 결정을 못하는 사람, 또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

 

쉽게 바꾸어지는 사람, 아주 변덕이 심한 사람, 감정적인 콘트롤이 안되는 사람에게도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므온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런데 예수님이 시몬을 만나는 그 순간 새 이름을 주셔요. 그러면서 네가 말이야 장차는 게바라고 하리라.

, 게바의 뜻은 뭡니까? 게바는 본래 아람어입니다. 아람어인데 베드로하고 같은 이름 같은 말이에요. 게바는 희랍어 이고 그리스어 이고, 그것을 아람어 씨리아로 표시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게바입니다 똑같아요.

 

게바하고 베드로는, 그런데 그 뜻이 뭡니까 게바의 뜻이? 번역하면 뭐라고 그랬어요? 반석이다. 반석, 반석인데 조그만 돌이 아니에요. 쪼개진 작은 돌이 아니라 거대한 반석, 육중한 바위 견고한 바위. 그런데 예수님이 딱 만나서 너, 네가 말이야 장차 반석이 될꺼야 그래서 뭘 느꼈을까요?

 

이 견고하고 움직이지않는 안정된 바위, 그런데 현제의 시몬에게는 전혀 적합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아마 시몬은 자기자신을 알았을꺼에요. 자기 주제를 알았을꺼에요. 이 사람은 예수를 만나고도 한동안 전혀 베드로 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시몬이였습니다.

 

, 한번은 그 파도를 밟고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자 너무 놀래 가지고 갑자기 베드로가 어떤 부탁을 했습니까? 예수님보고 선생님 나를 좀 명령해서 나도 물위를 걸어오게 하소서. 그래서 걸어가는 기적이 잠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파도를 보면서 빠져들어가자 이번에는 다시 뭐에요 선생님 살려 주세요. 조금 전 까지 그 용감무쌍했든 모습과 살려달라는 모습의 시몬의 모습,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이 시몬의 차례가 왔죠? 시몬 베드로의 발을 씻겨 줄려고 그랬더니 이 시몬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선생님 절대로 내 발을 씻기실 수 없습니다. 제가 씻겨드려야지요

 

선생님이 저를 씻기시다니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또 변합니다. 또 순식간에 변했어요. 어떻게 변했어요? 그래요?그러면 선생님 아예 몽땅 목욕을 시켜주십시요. 이렇게 얼마나 잘 변해요? 뭐 언제 목욕시켜준다고 그랬어요 예수님이? 그런데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또 예수님이 자신의 생애 속에 다가올 죽음을 암시하자 시몬이 나서서 튀는 시몬이 나오자마자 뭐라고 말합니까? 선생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저가 선생님을 보호해드리고 대신 죽을 겁니다 옥에도 가고 선생님 죽으신다면 죽음의 자리를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이렇게 큰소리 뻥뻥 치든 시몬이 그러나 자기의 생애가 불리하게 된다고 느끼자 일개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든 베드로, 그런데 베드로 보고 반석? 이 시몬에게 반석? 견고하고 육중한 바위?

 

전혀 어울리지않는 그런 별명이죠.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그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뭐에요? 장차,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장차라는 단어에요. 장차, 장차 말이야 네가 게바가 될것이다!

 

지금은 요동치고, 지금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지금은 쉽게 연약하고 그리고 흔들리고 있지마는 말이야 네가 장차는 게바가 될 것이라고, 게바. 반석이 될 것이라고 반석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그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거에요. 선생님 제가 그렇게 되어요? 이것이 얼마나 그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켰을까요?

 

자기의 미래상을 보는 사람, 이런 사람은 그 미래상을 쫓아 자기의 능력을 Potential을 발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사람이 일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열정을 상실합니까? 자기의 미래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의 미래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저 유명한 위대한 조각가 장인 미켈란젤로가 어느날 성당의 뒤뜰에서 굴러다니고 있든 돌덩이 하나를 보았다고 그랬죠? 가만히 그 돌덩이를 쏘아보다가 버림받은 돌, 수풀사이에 팽개쳐진 돌덩이 하나.

 

갑자기 돌덩이를 쏘아보든 미켈란젤로의 입술에서 이런 외침이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저거야, 다비드(David), 다비드가 나온다. 그는 그 거친 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돌이 장인의 손에 의해서 다듬어지는 그날 그 속에서 만들어질 위대한 다윗상, 다비드상을 보고있었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서 어떤 말을 합니까? 그 말을 자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사람 희망 없어 별볼일 없어 끝난 사람이야. 그러나 하나님의 미래상으로 자신을 본적이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셨습니까?

 

성경이 여러분보고 어떻게 말씀합디까? 너는 내가 택한 백성이라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나의 보배라고 내 눈동자라고 너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너는 빛이라고,

 

현재의 자기모습이 아니라 내 현재상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나를 바라본 사람 이 미래상을 볼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한번 하나님이 주신 창조주가 주신 그 Potential를 나의 가능성을 발휘하고 그것을 개발하면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인생을 살기를 소원하십니까?

 

내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상을 바라볼 줄 아는 여러분과 저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가능성이 한번 발휘되기를 원하십니까?

 

두번째로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상에 근거한, 나의 미래상에 근거한 삶의 목적을 이제는 발견 하셔야 합니다. 미래상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해요 그것은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그러나 그 미래상에 근거해서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내 생애의 목적을 혹은 미션을 발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 주님은 시몬 베드로를 만나주시든 그 첫날 그의 미래상을 보여주셨지요 너는 말이야 장차 반석 같은 존재가 될 것이야!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반석 같은, 이름처럼 반석 같은 존재가 되어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래서 무슨 일을 하자는 것입니까? 내가 무엇이

 

되느냐 그것도 중요한 질문이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느냐 이것도 중요한 것 이지요. 그것이 인생의 미션이에요.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에요.

 

여러분 인생에서 일어날수 있는 최대의 비극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자기의 미션을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일 입니다. 내가 왜 사는지 모르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내가 왜 태어 난지 모르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아주 비극적인 인생이 없을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몬을 만나자 마자 처음에 이 미래상을 제시해 주시고 너는 말이야 단순히 시몬이 아니야 너는 장차 베드로가 될꺼야 반석이 될꺼야 내 손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만들어져 너는 반석 같은 존재가 될 것이야.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는 않습니다. 이제 시간이 흘러갑니다. 어느날 결정적인 시각에 이 제자 베드로에게 그가 해야 할 일을 계시하십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6장을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혹은 너희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하든 그 장면 말입니다. 여러가지 대답이 나왔어요. 그래 그러면 너희들, 나와 더불어 삼년을 같이 살아오고 같이 호흡하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그 대답 앞에 감격해 하시면서 주님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베드로가 할 미션을 제시합니다. 맞아! 너는 베드로야 너는 베드로야,

 

네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바로 이순간이 베드로의 미션을 시몬의 미션을 인생의 목적을 제시하는 순간이에요. 너는 말이야 나의 교회를 세우는 그 일을 위해서 쓰임을 받아야 해. 그것이 네가 할 일이야. 교회를 세우다니? 건축하라는 말입니까? 그 얘기가 아니에요.

 

교회의 본질은 뭡니까? 하나님의 백성이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를 만드는 것 입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네가 세워가야 해. 세상을 복음화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배성들을 네가 세워야 해, 그것이 네 미션이야 네 사명이야 네 목적이야.

 

,그날 이후로 그 목적을 붙들고 일관성 있게 베드로가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이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베드로는 당분간을 헤매었습니다. 넘어졌습니다. 흔들렸습니다.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배신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제자를 놓치지 않아요. 다시 찾아오십니다. 갈릴리 바다에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찾아와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지요? 넘어졌든 제자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그러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유명한 질문을 하시죠.

 

,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 아시잖아요? 이 베드로의 대답을 받아내시면서 그때 주께서 다시 하신말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래 내 어린양을 먹여야 돼, 그것이 베드로의 미션이에요 하나님의 사람들을 먹이는 일, 키우는 일, 기르는 일, 그것이 네가 할 일이야. 다시 그 미션을 그 목적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해주시는 장면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인생을 살면서 최대의 비극, 왜 사는지 모르고 사는 것 입니다. 왜 사는지, 왜 태어났는지 모르고 사는 것 입니다. 여러분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보세요 저 전구, 비추기 위해서. 그런데 조금 아까 꺼져있어요. 그건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 다시 비취니까 얼마나 아름다워요? 바로 존재하는 이유에요 빛을 발휘하기 위해서.

강대상, 설교자 앞에 서서 설교자에게 안정감을 주고 제대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써포트(support) 하기 위해서 이 강대상은 존재합니다.

 

마이크, 제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마이크는 존재합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 왜 살고 계십니까? 왜 존재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호흡이 붙어있어 숨쉬고있는 이유? 왜 그러시죠?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발견하셨습니까? 제가 많은 분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특별히 젊은 솔직한 그리스도인 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어떻게 인생의 미션을 발견할 수가 있나요? 그 목적을 어떻게 발견할 수가 있나요? 두가지에요. 대답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자, 이 마이크를 어느 전혀 문명사회에서 단절된 정글의 인디어족이 마이크를 한번 어느날 보았다고 하십시다. 이것이 뭔 줄 모를꺼에요. 그런데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이 마이크를 만드신 분을 만나면 알 수가 있어요.

 

그전까지는 아마 이거 가지고 이게 뭐하는 건가? 이것 가지고 칼 싸움하는 것인가? 혹시 이것 가지고 장식품인가? 허리에 이렇게 차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가 있어요? 이 마이크를 만드신 분을 만난다면 야! 그건 그런데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목소리를 전달하기위해서 쓰여지는 것이야,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만드신 그분 앞에 나와서 진지하게 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하나님 저 왜 만드셨어요? 무엇 때문에 태어나게 하셨어요?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합니까? 진지하게 창조주 앞에서 내 인생의 존재의 목적을 질문 해 본적이 계십니까? 기도하셔야 돼요. 그래야 그 인생의 목적을 발견합니다.

 

또 하나는 여러가지를 해 보셔야 돼요. 여러가지 해 보시면서 내가 목적에, 나를 태어난 목적에 부합한 일을 발견한다, 이 두가지가 가능합니다. 두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으면 그것은 내 목적과 사명에 맞는 일립니다.

 

두가지가 뭐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그 다음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이 일을 하면 나는 너무 좋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은 잘할 수가 있다, 그래서 어느정도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둘 중에 하나만 있어도 안돼요. 좋아하는데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에요 그것은.

 

예를 들어서 저는 아주 음악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합니다. 제가 음악을 좋아해요. 그것 아십니까 여러분? 상당히 좋아합니다 제가, 우리집에 CD 많아요. , 그래서 저를 닮은 우리 아들들도 그냥 돈만 주면 CD 삽니다.

 

음악을 제가 무지무지하게 좋아해요. 그래서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 하나님이 나를 음악가로 부르신 모양이다 그래서 제가 음악대학을 입학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제 인생이 어떻게 될까요

 

그 다음에? 비참한 인생이 될꺼에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데 음악을 못해요. 음악을 좋아하는 것만 가지고 안돼요 잘 할 수 있어야 해요. 잘 할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그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에요.

 

요즘 빈센트 반 고흐의 그 미술세계가 새롭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있다고 그럽니다. 자서전도 많이 팔리고 또 그의 그림 앞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 위대한 화가의 생애 속에서 그가 가장 잘한 결정하나가 있다면 목사가 안되기로 결정한거에요.

 

그 목사가 되고 싶었어요. 아세요? 빈센트 반 고흐가 목사가 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그 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목사니까 아들 보고 목사 되라고 아마 그랬었겠지요. 그래서 자기도 목사 되고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자기도 목사가 되기를 원했는데 신학공부를 해보니까 잘 안돼요. 바로 그 순간 그 빈센트 반고호가 위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내가 목사 되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는 잘 할 수없구나. 그것을 발견하고, 아 이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어느날 그 결단을 내렸어요. 그 결단을 내리든 밤에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요즘 민기로라는 사람이 쓴 책,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에 31페이지에 보면은 빈센트 반고호가 자기 일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결정하는 날에 그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의 새로운 운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새로 태어난 나 빈센트. 이제 나는 성직자의 길을 버리고 화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내 나이 27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방황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것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 속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길입니다.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나는 그 길을 갈 것이며 그 속에서 나와 하나님 사이의 만남을 이루어 내고야말 것입니다.

 

만약 반고호가 계속해서 성직자의 길을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사람이 자기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래서 적지않는 이성간의 관계에 있어서 실 수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통제 불가능한 것 때문에 일종의 정신병 비슷한 아픔을 앓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목사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화가이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소간 통용되지 못한 감정 속에서 오히려 그는 자기의 가능성을 발휘하면서 위대한 불멸의 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그 은사와 그 달란트의 부합된 내 인생의 미션, 그 목적을 발견한다는 것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서 나를 태어나게 하셨다. 그것 한번 발견한 사람, 달려갑니다. 그 가능성이 발휘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자녀들에게도 돈을 따라 인생을 길을 선택하라고 말하시면 안돼요. 그게 요즘 취직하기 좋더라 너 그 과에 가라. 세상에 제일 무식한 부모에요. 너가 무얼 좋아하니? 너 그거 잘 할수 있니?

 

이 두가지 질문을 가지고 자녀의 장래를 지도해 주셔야돼요. 내 목적에 부합한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한 미션을 발견한 사람, 이 사람은 날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주신 가능성을 펼쳐가며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하여 저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미래상에 근거한 목적을 그리고 미션을 발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 한번 살아가는 인생 정말 가능성 발휘하고 살고싶어요?

세번째로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라 가셔야 합니다. 나의 과거의 주인, 현재의 주인 그리고 우리 인생의 미래의 주인이신 그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라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를 한번 만난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어요.

, 오늘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시몬을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자 먼저 자기의 형제 안드레가 만났다고 그랬죠?

 

그리고 너무 좋았어요.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왔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시몬을 한번 만난 것으로 그와의 거래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후에 다시 만나주셔요.

 

, 오늘 본문의 배경은 요한이, 세례요한이 침례요한이 설교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든 배경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요 조금,

우리가 다른 복음서,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4장을 읽어보시면 요한이 잡힙니다. 요한이 잡혔어요. 이제 시간이 흘러갔어요.

 

자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시다가 다시 안드레와 베드로를 봅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업으로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태복음 4장에 보시면 19절에 안드레와 베드로를 만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를 따라오너라!” 한번 만난 것 가지고는 안돼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나를 따라오면 하나님이 너희들을 위해서 계획한 사람을 낚는 어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이 어부의 미션, 그 어부의 삶, 영적인 어부의 삶, 이 목양의 삶을 너희들은 살아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 이 말씀 한번 듣고 시몬 베드로가 아주 일관성 있게 주님을 계속 잘 따라갔습니까? 아니에요 따라가다가 흔들리고, 따라가다가 자빠지고, 따라가다가 넘어졌어요. 그러나 주님은 계속해서 이 명령을 주시고 있습니다.

 

,실패했든 제자 주저앉았든 제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쳤든 제자, 그 제자를 찾아 다시 디베랴의 바다에, 갈릴리의 바다에 다시 다가오신 주님,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보시면 그 유명한 사랑의 확인, 세 차례에 걸친 대화.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그리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지 않느냐고, 그래? 그러면 내 어린양을 먹여달라고, 그 대화가 어떻게 연결 됩니까? 그 다음에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보시면 베드로야 네가 젊어서는 마음대로 살았어 그러나 늙어서는 내가 좀 간섭 할꺼야, 네 인생의 마지막이 승리이기 위하여 말이야, 너는 영광스럽게 죽을꺼야,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 나를 다시 따라오게나 나를 따르라그 말씀이 거기서 다시 등장해요.

 

여러분 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 주님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인생을 설계하신 분이라면 우리인생에 목적을 주시는 분이라면 그리고 그 설계를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불러주시는

 

그분이라면 그리고 그분이야말로 우리인생의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그분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분을 따라가지않고, 그분을 따라가지않고 어떻게 인생의 꿈과 진정한 비젼이 실현될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잠시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그분을 따라가는 것을 후회하지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 저분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저분이 나를 최선의 곳으로 인도하고 있구나. 맞습니다.

 

주님은 이 제자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려주셨어요. 동일하신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아세요?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고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을 책임 지시고 간섭해오기 위해서 다시 사신 그 주님이 이제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를 따라오너라!

 

여러분 이 가능성이라는 말을 영어로 제가 Potential 이라고 말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Potential.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가장 중요한 속성이 뭐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전능하다는 말을 영어로 Omnipotent 이렇게 말합니다. Omnipotent. 이 포텐트라는 말이 Potential하고 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처음에 Omni 옴니라는 말은 all 모든, 모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능력이 있는 분, 전능하신 분, 하나님은 가능성의 주인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성경의 첫머리 부분 창세기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 안에 만물의 가능성이 이미 존재했어요. 만물은 지어지기 전에 하나님 안에 가능성으로 하나님 안에 계획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그 가능성은 만물의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가능성의 주인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해요? 그러지않고 우리인생의 진정한 자아실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삶의 보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내 가능성을 펼쳐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리학자들은 자기실현 자아실현이라고 말합니다. 자아실현 하는 것,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영적인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지 어떻게 자기 뜻을 실현하는거야?

 

이 말 속에는 매우 중요한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있는 보편적인 오해하나가 있어요 그 중요한 전제는 뭐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은 항상 다를꺼야! 그럴까요?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항상 다를까요?

 

내 뜻이 내 욕심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분명히 다를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네 뜻과 내 뜻이 다르다고 말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진리가 아니에요.

 

여러분 제가 좋아하는 말씀가운데 빌립보서 2장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여러분 믿으세요? 내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다 믿으십니까?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 다음에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최고 우선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그 다음에 소원을 두고,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내가 어떤 일에 열정을 가지고 남다른 패션과 열정이 있어요. 나는 음악 안 하면 못살아요, 그 팻션을 그 열정을 누가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거에요 하나님이, 내가 음악 잘하고싶다 그게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내 소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여러분 앞에서 일어나고있는 거룩한 열정, 생애대한 아름다운 열정, 생에 대한 뜨거운 소원, 여러분 그 소원을 펼쳐가는 인생을 두려워 마십시요. 세월이 어둡습니다. 환경이 어둡습니다. 우리 시대가 점점 캄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꿈을 잃어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꿈을 펼쳐줄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버려주시고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 하시사 다시 살아계신 주님이 되어 내 삶 속에 간섭하시고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주님, 그리고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 나를 따라오너라!

 

나를 따라오너라! 그 분을 신뢰할 때 그 분을 신실하게 따라갈 때 비로소 우리의 가능성이 실현되는 인생을 살아갈 것을 믿습니다. 그 삶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인생의 보람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저는 그래서 내 가능성을 펼쳐가는 것, 내가 성공하는 것, 그것 못지않게 또 하나 그러나 인생에서 또 하난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다른 사람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두번째로 중요한 것 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제자훈련이 뭡니까 요즘 많이 말하는 멘토링이 뭡니까? 다른 사람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에요.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창조주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멘토링이 아니에요? 그것이 제자 훈련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런 일을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고 공동체적으로도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기도제목을 하나 나누고 싶어요. 우리가 내일부터 사흘간은 저 안성 수양관에서 침례교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라는 모임이 열립니다. 45세 이하의 침례교회 목사님들이 젊은 목사님들이 한 600명이 모이게 될 것 입니다. 이것은 작년부터 우리교회가 스폰서(Sponsor)하여 시작한 것 입니다.

 

우리가 한국교회를 어떻게 섬길 수가 있나? 저는 리드가 바뀌어야 한국교회가 갱신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젊은 목회자들에게 꿈을 주고 그들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들이 하나님의 꿈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을 섬기고 돕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자 그 모임을 위해서 한번 기도해 주세요. 우리가 우리교회가 최선을 다해서 한번 젊은 이 시대의 지도자들을 섬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바뀌면 교회가 바뀔 줄로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질 것을 믿습니다. 역사가 새로워질 것으로 믿습니다.

 

여러분 남을 성공시키는 자가 되십시요. 그리고 자신도 성공하는 자가 되십시요. 아직은 꿈을 버리기에는 이른 시각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놀라운 설계를 하신 바로 그분,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나보다 더 소망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내 곁에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다시 나를 따라오라고, 일어나서 쓰러지지 말고 절망하지말고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서 나를 따르라고,

 

그렇습니다. 창조주, 구세주이신 바로 그분을 따라 일어서서 신실하게 그를 따라갈 때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인생 성공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가능성이 펼쳐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발 이루지 못한 꿈의 한을 안고 무덤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요.

 

 

 

기도 하시겠습니다.

 

우리 다 일어나서 기도하시겠습니다.

내 꿈이 꺾여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내 꿈이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십니까 주변의 환경 때문에 이 시대의 여건 때문에 비틀거리고 게십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을 위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신 그분, 지금은 헤매고 지금은 비틀거리고 있지만 내게 오셔서 말씀하신 그분, 장차는 말아야 네가 게바가 될것이야 그리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분, 그래요 주님, 저 실망하지 안을 거에요 저 좌절하지 안을 거에요 저 낙심하지 안을 거에요 일어나서 주님 따를 거에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한번 도와주십시요. 저는 실수하지만 저를 포기하지않고 내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의존하고 일어서서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꿈 우리의 가능성 축복하시고 이루어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신말씀을 붙들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평생의 삶의 기회를 걸어가게 도와주시옵소서 단 한번의 삶의 기회, 주여 우리의 주변의 환경과 시련과 역경 때문에 쉽게 인생을 포기하는 자들이 되지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그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시니

나의 생명 되시는 하나님 내게 행 하신일 찬양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 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찬양하십시다 가사의 뜻을 기억하며 찬양하십시다.

 

 

 

 

 

 

나다나엘 /1:45-51/ 이동원목사

2014-11-29 20:07:19

 

추석 절을 잘 지내셨는지요?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전도의 기회도 가져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두 주 후면 이웃 사랑 축제가 열립니다. 이 축제는 믿지 않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고귀한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그 일을 중단하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 교회는 전도해도 이제 수용할 공간도 없지 않은가 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 교회가 직면한 문제임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꼭 어떤 분을 우리 교회 교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전도 받은 분들이 예수만 믿을 수 있다면 어느 교회에 출석하느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도를 꼭 결과에 의해서만 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 전도의 일차적 과제는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일단 복음을 들으면 복음의 씨가 그 마음에 뿌려 지는 것입니다. 결실은 당장이 아닌 얼마 후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전해진 말씀은 결코 헛되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바울 사도는 낙심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이웃들인 전도 대상자들, 곧 우리들의 VIP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실 때 그가 만나주신 한 VIP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나다나엘로 되어 있습니다. 이름으로 미루어 그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그의 다른 이름이 공관복음서의 12제자 명단에 나오는 바돌로매 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2제자의 명단에 바돌로매가 나오면 나다나엘은 나오지 않습니다. 공관 복음에는 바돌로매만 등장하고 요한 복음에는 나다나엘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돌로매라는 이름이나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빌립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학자들은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돌로매의 뜻은 돌마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돌마이는 물론 그의 부친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흔히 사람들에게 돌마이의 아들로 불리워졌지만, 그의 정식 이름은 나다나엘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였던 빌립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되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만남을 통해 한 사람의 이웃을 복음적으로 접근하는 예수님 자신의 효율적인 전도전략을 학습하고자 합니다. , 이제 오늘의 본문-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레슨은 무엇일까요?

 

1. 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말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피할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점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 네 사람이 만나 서로의 약점을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친구는 자기에게는 사실 거짓말을 고치지 못하는 약점을 아직도 갖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둘째 친구는 도벽의 습관을 고백합니다. 셋째는 성적인 약점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넷째 친구만이 가만히 있어서 너는 통뼈냐? 너도 고백을 하라고 다그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안하지만 내 약점은 다른 이들의 비밀을 알면 불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고백한 사람들이 큰 일 나지 않았습니까? 이야기의 초점은 약점에서 자유로운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인도하고자 할 때에도 이런 약점들이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나다나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약점은 한마디로 말하면 편견입니다. 문화 평론가인 손드라 티더맨(Sondra Thiederman)박사는 편견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으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이 지니는 특정한 성향이 아니라, 모든 선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의 태도이다라고 말합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던 것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그는 소위 오늘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지방색의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편견은 설명만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편견의 가장 효율적인 해소는 사실을 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편견도 단순한 설명만으로 해소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나다나엘의 편견을 깨기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했습니까?

 

46절의 마지막 대목을 읽어보십시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오해했다고 말합니까? 그 오해를 풀기 위한 반론을 제시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전략은 단순하지만 직설적이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와서 보라”(46)입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런 전략으로 나다나엘의 편견이라는 약점을 돌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지구촌 성도들이 다가오는 이웃 사랑 축제에서 사용할만한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를 변명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냥 한번만 와서 보십시오라고 초청하십시오. 기도하고 믿음으로 초청하십시오.

 

윌로우 크릭 빌 하이블 목사님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 전도 집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니까 무대 앞에 너무 빈 공간이 많아 시설 담당자에게 여기에 의자를 놓으면 1,000명 정도는 더 수용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빈 공간에 빌리 목사님이 구원 초청을 할때 수천의 사람들이 이 곳으로 걸어 나와 결신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그는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가 수많은 영혼들을 결실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믿음 때문인 것을 실감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초청하는 이들이 결신할 것을 믿고 초대하십시오.

 

2. 인간은 누구나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접촉할 때 단지 그들의 약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여는 것은 상대의 강점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비판받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방어적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방어의 가면을 벗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사용하신 전략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견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정직함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47절입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마디의 칭찬이 나다나엘로 그의 가드를 내리게 하고 그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방어를 위한 싸움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 그들의 진정성을 칭찬해 보십시오.

선생님의 생각과 판단은 참 진지하시군요. 실제로 우리 기독교가 그런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비판은 선생님의 관심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런 기회에 한번 복음을 직접 들어 보시도록 초청하고 싶군요라고 말해 보십시오.

 

요즈음 유행한 베스트 셀러의 제목처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칭찬은 사실에 부합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안에서 그런 칭찬받을 만한 강점을 보신 것입니다. 실로 나다나엘의 강점은 정직함이었습니다.

 

그의 안에 내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숨기는 이중 플레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정직성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이무석씨가 지은 책 “30년만의 휴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쯤 되어 보이는 한 여학생이 시내버스에서 껌을 팔고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버스내 승객들에게 이런 말로 호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병든 어머니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비를 벌기 위해 껌을 팔고 있습니다.

 

한 통에 300원입니다. 한 통씩만 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늘 볼 수 있는 동정심을 이용하여 이익을 남기는 껌팔이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 신사가 이 소녀에게 1,000원 짜리 지폐를 내밀자 소녀는 700원을 거슬러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사는 돈을 거슬러 주는 것을 보니 넌 정직하구나. 나머지는 네가 가지라고 했답니다. 이 때 소녀는 그 돈을 정중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지금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학비를 벌기 위해 장사를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순간 버스안의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여기저기서 껌을 사겠다고 소녀를 불렀습니다. 껌은 순식간에 다 팔렸다고 합니다. 이 순간 승객들을 움직인 힘-그것은 정직이었습니다. 이런 정직함과 진지함으로 이웃들의 강점을 칭찬하며 접근해 보십시오. 전도의 무한한 기회가 열려 올 것입니다.

 

3. 인간은 누구나 예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도는 전도 대상자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참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오 구주이심을 믿지 않는 한 아무도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인인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주는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이 중요한 구원의 강을 건너도록 예수님은 당신의 VIP 인 나다나엘에게 당신이 참으로 누구이신가를 계시하십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무슨 말입니까? “너에게 전도를 한 것은 빌립이지만 빌립이 너에게 전도하기 전 조금 전까지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서 무엇을 네가 기도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네가 생각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네가 고민하고 있었는지--나는 다 알고 있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49절의 나다나엘의 반응을 주목하십시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이 평범한 인생 이상의 분, 존경할만한 스승 이상의 분,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그렇다면 그는 우리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 구주라는 인식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끝나시지 않고 좀더 명확하게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나다나엘에게 알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의 확실한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어지는 50절에서 나다나엘에게 무화과 나무아래 있던 너를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보다 네가 더 놀라울 일, 더 중요한 일, 더 위대한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5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잘 아시는 대로 이는 구약 성경에서 야곱이 벧엘의 들판에서 밤에 본 환상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에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야 말로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구원의 중보자로 오실 메시아의 예언적 환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바울 사도는 딤전2:5에서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까!

 

본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진지한 구도자들이 인생을 사색하기 위해 찾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오실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구도의 마음을 아시고 주께서는 빌립을 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이 가을 낙엽이 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이 시대의 나다나엘들이 이 땅에서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가 하늘의 사다리를 타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그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들도 이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분, 오직 예수만이 그들이 인생의 해답이라고 희망이라고 구원이라고 전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그들이 무신론자들이고 안티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19세기 말에 토마스 헉슬리라는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한 과학자였고, 후에 자신의 입장을 무신론에서 불가지론으로 바꾼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 무리의 명사들과 시골을 여행하다가 주일이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 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헉슬리는 한 사람에게 예수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여행길에도 그를 예배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의 눈에 있는 공허함을 발견한 이 그리스도인은 헉슬리 곁에 머물러 그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이 교회에 다녀오기 까지 들어준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 같은 학자에게 논쟁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당신을 떠나도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친구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 당신 곁에 친구로서 이제까지 머물기를 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오른 손을 내밀며

 

그리스도가 당신 같은 친구라면 나도 그를 믿고 싶소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무신론자의 영혼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을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 줄 당신의 VIP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갈망 /1:43-51/ 유기성목사

2022-02-17 10:26:15

 

1:43 다음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44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향 사람이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46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48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9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5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 하나를 읽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남자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여자는 열심히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자는 설득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하고 여자는 설득되고 싶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자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여자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헤어지는 시간 허무합니다. 남자는 설득에 실패하고 여자는 설득되기에 실패했습니다.

 

남자는 다음을 기약하며 다짐합니다. ‘다음에는 좀 더 멋진 이야기를 해야지.’ 비전, 이상, 위대함, 성취 등을 생각합니다. 여자는 다음을 기약하며 기대합니다. ‘다음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지도 몰라.’

많은 사람이 깊은 대화가 안 됩니다. 마음의 갈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주님과 우리 사이가 이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실제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여 마음 통하지 않는 관계로 사는 것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시험 들어 낙심한 성도가 있고 말 한마디를 해도 확신과 감격에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이 있지만 주님을 만나면 모든 의심이 사라집니다.

여전히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확신이 없고 주님과 관계가 친밀하지 못하다면 주님을 만나려는 갈망부터 가지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만나고 동행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은 열두제자 중의 한 사람인 바돌로매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어느 날 친구 빌립이 너무나 흥분하여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45)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그런 빌립을 이해할 수 없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46)라고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한 것은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리라 예언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사렛은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변방이라 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가서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고 헤롯 왕이 죽이려 한 까닭에 애굽에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나사렛에 정착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하여 확신이 없었지만 "와서 보시오." 하는 친구의 강권에 못 이겨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 나다나엘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47)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칭찬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자랑했지만 실생활은 가식적이고 위선이 가득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서 어떻게 하여 나를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48) 하신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이 기절할 듯 놀라 즉각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49)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고백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한 순간 믿음이 바뀐 것은 주님이 자기 마음의 갈망을 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우 더운 날씨이지만 건조하기에 그늘 아래에 있으면 시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흔히 나무 그늘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명상을 하곤 했습니다.

나다나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서 성경을 묵상하였는데, 그 날 메시야를 묵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드레는 스승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는 말을 듣고 즉각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그 안드레를 보시고 주님께서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왜 나를 따라오느냐?”는 말입니다. 그 때 안드레는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안드레의 갈망을 아신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고 부르셨습니다. ‘함께 지내자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듣는 것보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는 가장 정확한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날 밤 예수님과 지낸 안드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고, 베드로도 예수님께 나아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안드레나 나다나엘처럼 진정 주님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 반드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하면 이런 질문을 할 분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안드레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였지 않은가? 특별한 시대 특별히 택함 받은 사람의 경우를 이처럼 일반화해도 되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다 안드레와 나다나엘처럼 되겠는가?” 맞습니다. 그런 질문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저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는 것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갈망을 가지고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드레나 나다나엘이 누리지 못하였던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음을 이제는 정말 믿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다른 복음서와 달리 천사가 나타나고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하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목자들이 경배하고 동방박사가 찾아오는 이야기 등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하지 않고 예수님을 말씀이요, 빛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요한 사도가 복음서를 썼던 1세기 말의 초대교회는 영적인 위기에 빠졌습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세대가 지나 1세기 말이 되면서 교회는 영적으로 정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은 예수를 직접 보지 못했던 사람들로 전해들은 예수님을 믿었으며, 교회도 점차 제도화 조직화되고 사람인 지도자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심히 걱정하였기에 요한 사도가 요한 복음서를 쓴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은 말씀이다, 빛이다 증언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져야 하며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말씀이고 빛으로 우리를 만나주고 계신 것일까요?

그 증거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큰 수술을 앞둔 성도 한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잘 안 됩니다.” 그분께 대답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기 원하는 마음이 성도님 안에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고 계신 증거입니다.”

 

꼭 술 마시고 한밤중에 전화하는 남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술주정을 끝까지 받아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술 마셨을 때라도 목사 생각이 났다면 그 사람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기 원하는데도 만나주시지 않는다고 답답한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주님을 향한 갈망 그 자체가 주님의 역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갈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갈망도 있고, 육신과 세상에서 온 갈망도 강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갈망을 붙잡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구하고, 말씀을 구하고, 사랑을 구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붙잡고 사는 것은 돈이고 성공이고 명예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영적 좌절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19장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부자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청년에게 영생에 대한 갈망과 재산을 향한 갈망이 다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청년이 재산에 대한 갈망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는 아닌가요?

여러분은 정말 귀한 것, 정말 중요한 갈망을 붙잡고 사십니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야를 갈망하는 기도를 드린 것을 아셨다고 했는데,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서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네가 술집에 있는 것을 보았다’ ‘네가 인터넷에 매달려 지낸 것을 보았다' 이런 말을 듣지는 않겠습니까? 중요하지도 의미도 없는 문제로 세월을 허송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속극의 결과를 알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주인공을 살려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내년 프로 야구 시즌에서 누가 우승하든지 상관하지 마십시오.

유치하게 살기에는 너무나 인생이 짧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학교에서 다리가 부러져 집에 왔습니다.

병원으로 가면서 엄마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부러졌니?”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높은 철봉 위에서 뛰어 내렸어요.”

엄마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그 높은데서 왜 뛰어 내렸어?”

아들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다리가 부러지나 안 부러지나 궁금했어요.”

엄마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시원하겠구나.”

 

다섯 살 아이에게 엄마가 말했습니다.

, 절대로 선풍기에 손가락 넣지 말아라. 손가락 부러진다.”

아이는 엄마에게 애원했습니다.

엄마, 꼭 한 번만.. 정말 부러지는지 한 번만 해보면 안 돼?”

 

여러분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어린아이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어른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파괴할 것을 갈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거하심을 확신하지 못하니 방황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고백하지 못하니 답이 없는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은 정말 내 안에 계신가?”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 “어떻게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며 살 수 있을까?”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다나엘 이야기를 왜 성경에 기록하셨을까요?

성경을 읽는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기록하셨고 읽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안드레나 나다나엘보다 더 놀라운 은혜의 주인공들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였다가 빈 들에서 잠이 들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너무 놀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8:16 ...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의 이 체험이 지금 우리의 체험이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교회에 올 때까지만 해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이 막연하였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구나!’ 믿어지지 않습니까? 정말 말씀으로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작으냐 크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갈망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 그 아이는 얼마나 작은가요? 그러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만으로 온 집안이 기쁨으로 충만해지잖아요?

새끼라도 호랑이는 호랑이고 작은 열매라도 사과는 사과인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주를 향한 갈망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만 따라 살고 싶습니다!” “주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그가 구한 것 이상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50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5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도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게바''베드로' '바위'라는 말이다.) 하셨습니다.

 

앞으로는이 말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초라한 어부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지만, 앞으로 게바 곧 베드로라는 놀라운 사도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재를 보시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복된 미래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습이 어떻든 낙심하지 말고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찬양: 시선

 

 

예수님만 드러내며 살자 /1:19-42/ 유기성목사

2022-02-17 10:11:30

 

여러분, 오늘 진정 복된 삶이 무엇인지 분명한 눈이 뜨이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다 잘 살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대부분 후회하고 낙심하고 허무해 합니다.

 

그것은 노력을 안해서도 아니고 재능이 없어서도 아니고 배경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 복된 삶인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헛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 복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아니며 나아가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얼마든지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성공하는 삶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단 한 명의 선지자도 출현하지 않았던 영적 암흑기를 깨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요, 세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고 약대 털옷을 입고 지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오시기로 한 메시야가 아닐까?’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조차 두려운 마음으로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요?” “엘리야요?” “그 선지자요?”라고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지체하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그저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23)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마치 임금의 행차 앞에서 "임금님의 행차요" 하고 외치는 자의 소리 같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사용되었던 희생양을 말합니다.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자신을 소리라고 말한 의미였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목적인지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누군가 그 문을 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될 때, 그 문을 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역할이 가장 귀하고 복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도 자기를 드러내려는 사람들과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요네즈, 토마토케첩 등으로 유명한 '하인츠'의 설립자 헨리 죤 하인츠가 191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예배당을 건립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에 자녀들은 피츠버그 대학 캠퍼스 내에 5년에 걸친 대 공사 끝에 부친과 할머니를 위한 예배당을 완공하고, 이름을 '하인츠 기념예배당'이라 붙였습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 예배당은 피츠버그 대학의 상징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 어디를 둘러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볼 수 없답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인츠'와 그 가족들의 이름과 흔적 밖에 없습니다. 목사도 있고 주일마다 예배가 드려지지만, 그 예배당은 주님과는 무관한 인간 하인츠를 기념하는 예배당일 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 얼마나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였습니다,

:27“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를 때는 예수님만 드러내라는 말이 짜증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나?’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만 드러내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사촌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보통 사람 같으면 질투심으로 얼굴빛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사실 1-2년의 공생애를 살다가 목 베임을 당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닮고 싶겠습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진정 복된 조건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주의 종]이라 불리었지만 실제로는 주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가 무슨 종입니까?

그런데 제가 회심할 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제 마음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소원이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수고했다, 내 종아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마음이 특별했던 것은 평소에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왕 목사가 될 것이면 목사로라도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퓨 리서치 센터]라는 곳에서 2021년 봄, 17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게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나라 국민은 가족이라고 대답했는데, 오직 한국만이 을 첫째로 답했습니다. 17개국 평균 응답에서, 2위는 직업, 4위는 친구관계였는데 직업과 친구관계는 한국에선 순위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이 조사 결과에서 정말 마음 아픈 것은 한국인 중에 신앙이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1%였으며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일본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은데 기독교인조차도 신앙보다 돈을 최고 가치로 생각한다는 결과입니다.

 

목사로라도 성공하고 싶었던 저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회심할 때 하나님이 종이라 불러주시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이었겠습니까? 그 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흔들릴 때가 오지만 그 때 그 느낌이 너무나 선명하기에 다시 방향을 바로 잡고 또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도 세례요한처럼 예수님만 드러내는 삶을 살자고 담대히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저절로 그렇게 살고 싶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라고 말했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고통스런 고백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의 환희에 찬 노래입니다.

 

나는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께서 예수님 머리에 임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믿는 것이고 이렇게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더 큽니까? 주님을 바라보기만 했던 세례요한이 큽니까?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가 큽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 하시고는 이어서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11) 하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을 알고 얼마나 행복한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이렇게 평안해도 되나걱정이 될 정도였답니다. 그런 중에 목사님의 교회 문제를 지방 감리사님이 잘못 처리한 것 때문에 큰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시시비비를 밝히는 글을 조목조목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이것이 다 밝혀지면 분쟁을 이기고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위의 권세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3: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너무 억울하고 가슴이 답답하더랍니다. 게다가 모든 지방 목사님들 앞에서 공개 사과까지 하라는 마음까지 주셨습니다. 그 때 떠오르는 생각이 이것이 내 자존심의 문제인가? 주님의 자존심 문제인가? 였습니다. 결국 내 자존심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은 목사님은 결국 순종하고 모든 교역자 앞에서 공개 사과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 목사님은 자기가 이긴 줄 알고 좋아하더랍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이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지방회를 분란에서 건지시려는 주님이 이기신 것입니다.

 

형제교회 목사님 한 분이 예배를 인도하려고 강단에 올라갔는데 눈에 익은 한 사람이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반가운 마음보다 불편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교회 일을 맡겼는데, 몇 번 하다가 아무 소리 없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고 그 후 일 년 넘게 연락도 없었습니다.

 

사람을 잘못 본 내 책임이지여기고 서운한 마음을 접었는데, 그 교인이 다시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하여 기도했답니다. ‘주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가야 마땅한데, 잃어버린 양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도 저는 사랑으로 그를 맞아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바로 그 목사님의 실상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교인을 탓할 자격도 없음을 깨달았고 그런 자신이 어떻게 예배를 인도해야 할지, 무슨 자격으로 설교해야 할지 난감하여 기도하였답니다. ‘주님,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교만하고 사랑 없는 저를 보지 마시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온 성도들 때문이라도 은혜를 내려주세요.’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다. 나는 너를 통해 은혜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눈물로 예배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주 예수님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순간이 생깁니다. 그 순간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 준비를 마무리 하면서 조용히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여, 제가 이 교회에 유익한 존재입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실까? 생각했습니다. 설교일까? 리더십일까? 목회기획 능력일까?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언제나 예수님만을 드러내었느냐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님만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인생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게 될 것입니다.

 

찬양: 그 이름 예수(우리를 구원하신 그 이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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