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 성전 되지 않으면 /요2:13-22/ 유기성목사
2022-02-17 10:46:48
요 2: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 본문은 좀 충격이고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는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시면서 양과 소와 함께 그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좌판을 뒤엎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화가 나신 것인가?’
어떤 죄인도 용납하시고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화를 내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것만큼은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겉과 속이 다른 신앙생활에 진노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어 쫓으신 짐승들은 성전 뜰에서 팔았던 짐승들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상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는 사람들이 굳이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고 성전 뜰에서 제물을 사도록 돕는 사람들이었고 환전상들도 성전세를 내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돕는 것이었지 실제는 탐욕의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온 제물은 무조건 흠을 잡아 불합격시키고 오직 성전 뜰에서 산 것만 제물로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니 장사꾼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그것이 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에게 흘러들어갔던 것입니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16)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이었습니다. 인간이 속죄함을 받는 곳,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라고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곳입니다.
그러니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영적 생명줄인 것입니다.
이 성전이 더렵혀지면 이스라엘 백성은 망하고 맙니다.
구원의 길이 막히고 은혜의 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은 온 인류의 속죄주이신 예수님 자신의 예표였습니다,
:21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 성전을 성전 되지 못하게 만들었기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형식적 종교생활이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 실제로는 돈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생활이 심각한 것은 마음이 중요함을 모르는 것이고 그것이 죄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행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러했습니다. 땅을 팔아 큰 헌금을 하였지만, 일부만 바치면서 땅 판 모든 것을 바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큰 죄입니까? 어떻든 헌금한 것 아닙니까?’ 우리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타락한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겉은 하나님께 마음은 마귀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하는 그 시간 죽어 나간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되면 은혜의 문은 막히고 구원의 역사도 그치게 됩니다.
형식적 신앙생활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사야가 하나님의 책망을 전하였습니다.
사 1:11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교회 열심히 다니고 예배 잘 드리고 교회 직분을 가졌기에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잘하는 것에 속지 않으십니다. 마음을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이 타락하니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졌었고 교회가 뒤집어진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타락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러시아 정교회가 타락했을 때, 공산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음 중심에 정말 예수님이 계신지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화입니다만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심할 때, 한 흑인이 예배시간에 늦어 가까운 백인 교회를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 입구에 있던 백인 교회 안내원이 그 흑인이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 흑인은 예배당 입구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때 누가 그 흑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니? 하면서 위로를 하였습니다. 이 흑인이 돌아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오, 주여! 제가 오늘 예배를 드리기 원했지만 흑인이라고 저 예배당에 들여 주지 않아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저 예배당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하였단다.”
백인 교회 안내원이라고 자기 나름 잘하느라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예배 잘 드리도록 충성하며 섬겼지만 마음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 설교 준비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시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며, 저 자신과 교회를 심각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시면 가장 먼저 담임목사인 저를 부르실 것입니다.
주님은 제게 교인 수를 물으실까요? 예배당 건물을 둘러보실까요? 목회 프로그램에 대하여 물으실까요?
주님은 저와 주님만 아시는 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저 혼자만의 시간에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제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심해야 합니다.
제가 안산에서 목회할 때, 거리가 먼 곳에서 일부러 예배를 드리러 찾아오시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먼 곳에서 오시느냐 질문하였더니 ‘정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교회, 정말 예수님을 느낄 수 있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을 만나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제 안에 있는 갈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라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예배가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갈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 무급 사역자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디를 마음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섬기는 교회를 예수님의 교회로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제 갈망입니다.
여러분, 진정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머리가 되시는 교회에 대한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주인인 교회를 찾아 다녀서는 안 됩니다.
찾았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그 교회 교인이 될 보장은 있습니까?
행복한 가정을 찾았다고 여러분은 그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를 세워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님보다 사람을 높이는 일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직분을 자신의 명예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 직분은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교회 역사나 교인 수, 교회 건물이나 시설 등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19)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건물이나 시설, 교단, 프로그램, 예배 형식 등에 목을 매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는 어떻게 세워집니까?
감시 기구를 만들고 신임 투표제도를 만들고 교회 규정을 엄격히 만들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어느 목사님의 일기를 보니, 그날 운전을 하다가 신호등이 붉은 등으로 바뀌어 멈추었는데 뒤에 오던 차가 찢어질 듯한 브레이크 마찰음을 내면서 종잇장 한 장 차이로 뒤에서 멈췄답니다. 교통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백미러로 보니 운전하는 사람이 잠깐 한눈을 팔았는지 너무나 놀란 눈이더랍니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는 것 같더니 담배를 꺼내 피우더랍니다. 그런데 운전석 앞에 큰 십자가 목걸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답니다.
그것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참으로 무겁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2021년 마지막 주일인 오늘을 위하여 주님께서 일부러 택하여 주신 성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마지막 주일은 주님 앞에 서는 순간을 연습하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정말 마지막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성전 된 자가 아닌 채 주님 앞에 서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되었음에도 성전 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오늘 돌이켜야 합니다.
겉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예수님이 왕이신지 점검해야 합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고 교회도 나오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는지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의 용서를 믿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은밀히 죄짓는 삶을 청산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는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정신 차려야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신앙생활을 결코 작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닥쳐올 심판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전 되는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음에 원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는 분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 아닌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신 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보는 것과 바라는 것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러분, 성전 된 자로 살려면 이제부터 마음을 점검하고 살아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재해 계심을 정말 믿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복종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 앞에 철저히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전 된 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반드시 예수님의 교회가 됩니다.
찬양: 두 손 들고
admin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요2:13-17/ 김형익 목사
2021-05-05 10:42:49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살펴본 같은 본문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주님은 성전의 주인으로서 성전에 들어오셔서 온갖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다 정결하게 하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청결하게 하셨던 성전은 오늘날의 교회에 비유되는 것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초점,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 자신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것이 매우 성경적인 논리입니다. 바로 성도들 자신을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참 성도의 자화상(고전 6:19~20; 엡 3:16~17)
참된 성도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성도는 자신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고전 6:19).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거듭나고 믿는 자들의 심령 안에 들어오사 거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는 예전의 자기 자신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안에 들어와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엡 3:16~17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속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화상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깨달으십니까?
2. 성도들을 정결케 하시는 예수님
주님께서 성전에 오셔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이 과격해 보이는 행동은 실제로 모든 참된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A. 하나님의 사랑만 취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늘 온화하고 선하시며 자비로우신 주님의 모습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이런 본문은 아주 불편하게 여깁니다. 또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불쾌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만을 취하고 공의는 거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다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계시며 어떻게 조치를 하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B. 거절하는 심령을 때려 정결케 하시는 주님
성전이 바로 성도 자신들이라면,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그 마음과 생각과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그리고 우리 안에서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그런 모습들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거절하는 그 심령을 때려서 정결케 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며 징계하십니다(히 12:5~10).
여러분, 정직하게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정결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 허용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고 주의 은혜를 구하면서 이 씨름을 하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이 그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보다는 약간 더 도덕적이라는 것 정도로 여러분은 스스로를 안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성경에서 발견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서 괴로움을 더하시지는 않으십니까? 그것이 성전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는 삶,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이 아니라 그냥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셔서 채찍을 드신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거절하는 심령을 그대로 놔두지 않으십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님의 채찍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채찍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더더욱 낙심할 일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히 12:5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채찍을 휘두르시는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자기 자녀에게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히 12:10). 징계를 받을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이 문제인가? 영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C. 가치있어 보이는 것들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엎으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성전에 들어오셔서 장삿군들이 파는 상품인 양과 소를 내어쫓으셨고, 환전상들의 탁자를 엎으셨습니다. 이것들은 다 장삿군들과 환전상들에게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들이 이로써 먹고 사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다 가치있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들을 내어쫓고 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치있어 보이는 것들이 더 이상 동일한 가치를 지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전에는 만유보다 크시고 만유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속사람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신다면 결코 주님은 그것을 그냥 놔두시거나, 그런 여러분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시 106:15).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 자녀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면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창기의 집에 가셔서 이런 분노를 드러내시며 그 집기들을 엎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세리의 집에 가셔서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직 한 번, 그렇게 하신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불신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의 심령에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자녀에게만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것을 진지하게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적용해보시기를 바랍니다.
D.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내버리라’고 요구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하신 것은 또 성전 안에 있어서는 안 될 합당치 않은 것들을 가지고 나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비둘기가 성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사장에게 제물로 가지고 올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제물인 것입니다. 장사하기 위해서 가지고 들어온 비둘기는 성전 안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미묘한 차이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것이 아닌 영역은 털끝만치도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하실 수 있으십니까? 고린도전서 6:19~20을 보십시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내 것이 아니라 값으로,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바됨으로써 주님의 것이 되었으며 내 몸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마음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너무나도 잘못된 가르침을 한 가지 다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주와 주님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3. 잘못된 가르침의 문제: 구주와 주님
A. 그리스도를 구주로만 영접하고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을 구주로만 영접하고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15세 때 구주로 영접했고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하는 식의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 말이 맞다면 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으로 영접하기 전에 죽었다면 그는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모순이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바른 대답을 찾는 것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 사람을 해석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15세 때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자기의 삶이 아직 완전하게(스스로의 기준으로) 주님께 드려지지 못했다고 느끼다가 30대의 어느 때에 받은 큰 은혜로 말미암아 드디어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만큼 주님이 주인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은 그가 15세 때 한 것은 그저 영접 기도를 따라 한 것일 뿐, 진정한 회심이 아니었으나, 그 가운데에도 그는 교회를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대가 되어서 진정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참된 회심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그는 이전에도 자기는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많이 이런 가르침을 배워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구주로만 영접하고 주님으로는 나중에 영접한다는 것에 대해서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B.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믿음은 또한 주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이고,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이다.
순종은 믿은 후에 더해지는 인위적 행위가 아닙니다. 처음 믿은 그 믿음이 바로 순종하게 하는 같은 믿음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구주로만 믿고서 순종하는 삶이 전혀 없는 삶을 산다면 그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만드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죄의 결과와 그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신 구주이시며, 또한 피로 사서 나를 당신의 것으로 만드신 내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고 왕이시라고 믿고 고백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내 삶을 주님의 주권 아래 드리는 것은 평생에 계속 해야하는 과업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표현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 만유의 주가 되실 뿐 아니라, 나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성숙한 신자, 미성숙한 신자, 그리스도 안에 장성한 사람, 어린 아이 모두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 자라고 말씀합니다(롬 10:9).
또 로마서 14:8에서는 모든 교인들 앞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다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고백입니다. 믿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나는 아직 구주로만 고백하고 주로는 나중에 고백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C.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당신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는가?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으신다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수 있으신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노예라는 말은 불쾌감을 전해줄지 모르겠습니다.
노예가 없는 시대를 살아도 노예라는 말은 불쾌감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노예가 존재하던 시대에 그 자신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표현을 즐겨 썼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종이라고 번역된 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말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쾌한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믿는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인이라고 선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그리스도를 구주로만 영접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고 자기 자신이 부인할 수 없는 구원의 분명한 증거가 삶 속에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설교를 약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런 가르침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있고 헌신된 제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고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어린 그리스도인과 장성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주이시며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육신의 연약함에 매여있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정말 심각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리스도의 노예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당신의 인생의 주인이신 것이 분명합니까? 당신은 여기에 전적으로 아멘할 수 있으십니까?’
4. 기독교의 본질: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요한복음은 주님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다고 소개했습니다(1:4). 그리고 주님이 오신 것은 그 ‘생명’을 주고자 하심이며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 10:10).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셔서 그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요 5:26).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요일 5:12).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그 아들이 계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여러분의 주인이십니까? 여러분은 그 아들로 말미암아 생명을 누리고 더 풍성히 누리는 것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분의 생명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청교도 목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 1650~1678)은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명저를 남겼습니다. 이것은 한 친구에게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인 조지 휫필드는 이 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고 성례에 참여했지만, 소중한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훌륭한 책을 보내 주시기 전까지는 참된 신앙에 대해 전혀 몰랐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깊이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기독교의 요체입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까? 생명은 그 자체로 살아서 움직이고 우리 영혼을 살리고, 우리 영혼으로부터 그 생명력이 흘러나가서 죽은 영혼들을 살리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놀라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여러분 자신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조금도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경험하고 누리고 계시다면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이것을 알지 못하고 계시다고 해서 낙심하지는 마십시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확증하게 하려고, 그리고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이 생명을 누리게 하려고 요한복음이 쓰여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그 은혜를 누리게 하고, 그 은혜를 누리는 자들은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고자 성령님께서 교회에 주신 복음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표적을 구하는 불신앙 /요2:18/ 김형익 목사
2021-05-05 10:45:56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매우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써 표적을 달라고 구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비즈니스, 건강, 자녀문제…기타 등등 많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는 더 심하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듣습니다. 이것이 정말 잘못된 것입니까? 성경이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 이 문제를 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증거로서 표적을 요구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묘하지만 분명히 다른 차이입니다.
1. 두 가지 반응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표적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사렛출신의 청년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난동을 부린 것을 성전 시위대나 고위 제사장들 또는 자기 물건을 지킬만한 험한 장삿군들 중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노끈으로 채찍을 삼은 것 하나 밖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분은 마치 성전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불과 주님의 제자가 된지 며칠 밖에 되지 않은?은 시편 69:9에 있는 구약의 예언을 생각했다고 했습니다(17). 그들은 ‘아, 하나님의 예언이 이 분, 메시야를 통해서 성취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반응이 여기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한편에서는 주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더욱 확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동일한 것을 보고도 표적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즉, 이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까 다른 표적을 더 해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표적을 구함으로써 잃어버리고 마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행위는 언제나 사람들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말입니다. 오늘날도 그것은 무서우리만치 동일합니다. 똑같은 복음의 말씀을 듣는데 그 말씀으로 거듭나고 구원을 얻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2.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영적 이해가 부족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저는 표적을 구하는 마음 자체가 불신이라는 뜻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표적을 구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영적 어두움의 증거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표적을 구한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두 가지 예만 들려고 합니다.
A. 떡을 먹은 사람들(요 6:30~33): 오병이어 기적을 본 후에 표적을 구하고 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이 기적을 보고 또 체험했습니다. 그들이 배불리 먹고서 하는 말을 보십시오. “당신은 이제 무슨 표적을 보여 우리로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 6:30).
나중에 그 본문을 상고할 때 더욱 자세히 살피겠지만, 놀랍기만 한 것은 그런 기적을 본 후에 그들이 요구한 것이 믿을만한 표적을 달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들은 한 번이 아니라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한 것처럼 매일 매일 이렇게 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B.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마 12:38):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표적을 구하고 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는데, 이 표적을 구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마 12:22). 그러자 이것을 지켜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심한 말을 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이와 유사한 상황이 마태복음 16장에서도 재연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하늘의 표적을 구합니다(마 16:1). 여기서도 주님은 같은 말씀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꾸짖으셨습니다(마 16:4).
3. 주님이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신 뜻(마 12:38; 16:38)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왜 그들은 자기 눈 앞에서 기적을 보면서도 주님께 또 표적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님은 왜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악한 것은 그렇다 치고 왜 음란한 것입니까? 악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지 않는 마음입니다. 믿지 않는 마음을 악심이라고 합니다(히 3:12). 그러나 음란하다고 한 것은 단지 성적인 죄를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음란한 것과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음란한 것은 자기의 배우자로 만족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이것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하고 계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족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만족이 없으니까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은 후에 사람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한 번이 아니라, 하루가 아니라 평생토록 매일 그런 기적을 행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 이 표적을 통해서 그들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이 세상의 정욕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만족함이 없었고 이 참에 봉을 잡자는 식의 생각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음란한 마음입니다.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치신 것을 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은 표적을 보고 믿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악한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그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는 끝도 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음란한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도 이런 성향이 혹시 여러분 가운데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을 보여주셔야 그 살아계심과 능력을 믿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마음이라고 하셨고 그들에게는 결코 요구하는 표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4. 마리아와 세례 요한은 악하고 음란한 것이 아니다(요 2:3; 마 11:2~3).
여기서 우리가 멈추어 생각할 것 하나는 주님께서 표적을 나타내시는 것과 사람들이 표적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표적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한 말씀인데, 주님이 다시 사셨어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지어냈고 믿지 않았다는 것,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표적을 또한 나타내셨습니다.
가나의 결혼식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알렸습니다(요 2:3). 비록 주님은 이것을 책망하셨지만,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리아가 책망을 받은 것은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리아가 구한 것은 필요를 채워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기서 마리아의 마음은 악하고 음란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표적을 주시면 믿겠습니다’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생애의 마지막에 감옥에서 제자들을 주님께 보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온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자로서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왜 그가 메시야로서 세상에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시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그분입니까?’라고 묻게 한 것입니다(마 11:3). 사실상 세례 요한도 어떤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우리는 이것을 악하고 음란한 마음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지 확신이 흔들리는 때를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런 상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믿고자 하는 마음이었지, 악심도 음란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책망하시기 보다는 이사야 61:1~2을 인용하여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1:5).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믿는 사람도 믿음이 연약하여 표적을 구하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5. 위험!: 악하고 음란하게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사단의 미혹을 받는다(마 24:24; 살후 2:9~10).
제가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지적하시는 바 악하고 음란한 마음, 믿지 않고 자족함이 없는 마음으로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결국 사단의 미혹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마음은 사단이 미혹하기 가장 좋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여러분, 자족함이 없는 사람이 뭔가 유혹에 걸려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람은 사기를 당하고 거짓에 속기도 쉬운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는 표적을 구하는 태도에 연관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이들을 미혹하고 그들이 미혹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들에게 넘치도록 표적을 보여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표적을 주시지 않으나, 거짓 그리스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요구대로 표적을 행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라고 말입니다(살후 2:9).
그러므로 여러분, 기적이 나타나는 곳이 옳은 곳이고 주님이 역사하시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국 그런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런 기적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속고 멸망하게 된다는 성경의 경고를 들으십시오.
6. 적용할 원리들
유대인들이 주님께 표적을 구한 것은 결코 그들의 진지한 신앙적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악하고 음란한 마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적용할 원리들이 있습니다.
A. 하나님은 우리가 음란한 영에 의해서 표적을 구한다면 그 요구를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음란한 영에 의해서 표적을 구한다면 듣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눈멀고 벙어리된 자가 깨끗이 나음을 입었는데도 그 앞에서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가? 그들은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자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잠 30:15).” 이런 마음의 상태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태도입니다(약 4:3).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거나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행하고 계시는 방법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고난과 고통도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실 장래의 은혜의 한 수단임을 그가 믿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가 메마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영생을 얻은 것이 감사한데,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덤으로 얻은 것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부족의 마음 상태로 고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B. 구원얻는 것은 표적을 봄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눅 16:31; 살후 2:10).
구원얻는 것은 더 대단한 표적을 봄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죽어서 하나는 천국에, 하나는 지옥에 갔습니다(눅 16:27~31).
부자는 자기가 지옥에 온 것이 너무나 슬퍼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부자의 대답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말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죽었다 산 자가 말한다고 해서, 이런 표적이 있다고 해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어도 믿지 않은 것을 보십시오. 모세와 선지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의 진리로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표적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는 자는 더 이상의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는 표적을 통해서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인용했던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면, 사단이 능력, 표적, 거짓 기적을 행한다고 했는데, 멸망당하는 자들이 거기 속아서 망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살후 2:10).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저희가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사랑했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체험을 사랑했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사와 능력을 사랑했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흥분하고 들떠서 뭔가 새로운 체험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이렇게 막 들떠서 흥분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상쾌함과 기쁨과 만족을 주십니다.
영적 체험이 가장 깊이 표현되는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체험이나 표적같은 감각적인 요구를 주님 자신보다 더 앞에 두지 마십시오. 그것은 영적인 간음인 것입니다.
C.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구하라.
우리의 초점은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표적이 아닙니다. 표적이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은 언제나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표적에 여러분의 초점이 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려고 하지 않을 때, 사람은 표적으로 그것을 대신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나 빌립, 안드레나 요한 등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결코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분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었으며 그분과 교감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있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표적을 구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 자신이 아니라, 표적을 구했으며, 주님 자신과 교제를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관심은 더 먹는 것이었지,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 계시던지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형편 때문에, 이 처지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 여러분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의 자세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표적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전되신 그리스도 /요2:19-22/ 김형익 목사
2021-05-05 10:56:16
1. 센세이션(Sensation)
주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보고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인지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사실상 작은 사건이 아니었고, 유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준 언사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마지막 주간에 주님에 대한 거짓 증거를 하던 자들의 말을 기억해보면 거기에는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회 앞에 서셨을 때에, 많은 거짓 증인들이 가운데 두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마 26:61).
이 말이 마가복음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막 14:58).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님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막 15:29)고 조롱하였습니다. 모두 이 사건에서 비롯된 말들입니다.
2. 제자들의 믿음(22절)
성전을 헐면 사흘 안에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하신 뜻은 주님께서 사흘 안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21~22절). 성전을 헐라는 것은 실제로 성전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것에 대한 말씀이자, 또한 주님을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이 결국 로마제국에 의해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만큼 무너지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도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짓기 시작한 지 46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완공이 되지 않았던 당시의 그 화려한 성전 건물만을 바라보던 유대인들이야 물론 주님의 말씀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제자들도 역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22).
제자들이 주님 부활 후에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들이 성경과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언급이 여기에 있는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두 번 살펴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불신앙이었으며 악하고 음란한 태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기간에 주님이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도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믿음이 아니었으므로 일시적인 믿음이며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비록 당장에는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었고 뿐만 아니라 나중에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이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고 결국 주님의 하신 모든 말씀과 성경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거짓 신앙들과 제자들이 보여준 참 신앙의 본질적 차이입니다.
A.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전혀 이해되지 못한 채 오래도록 잠복하여 있을 수 있다.
처음에는 그들 사이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마음은 주님 자신을 향하여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것처럼 닫힌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깨달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나중에 두드러집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은 주님이 이 날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고 그것으로 주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말씀을 기억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기억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는 들을 때에 다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제가 전하는 복음의 설교가 얼마나 들으시는 여러분들에게 온전하게 이해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지금 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 들은 바 복음의 진리가 그 심령 속에 잠복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깨달아지고 구슬 서말이 한 줄에 꿰어지듯하는 은혜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표시이다(요 14:21,24).
제자들은 단지 그 말씀만을 기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믿은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으며 참된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임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경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믿되,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라고 하셨고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주님을 믿지 않으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태도가 주님 자신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똑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믿음을 가지셨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에 대한 하나의 증거인 것입니다.
3. 성전 모독의 역사
다시 우리는 이 사건 자체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비록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합당한 증거로써 채택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마는, 주님의 이 말씀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어 잊혀지지 않을만큼 충격적이었다는 것은 위의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전모독 자체만으로도 유대인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무거운 죄였습니다.
A. 예레미야
우리는 이미 구약의 역사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와 비슷한 곤경에 빠졌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에서 설교하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될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이는 실로에 성막이 있을 때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실로도 황폐하게 되었던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성전이 다 무너지고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예레미야는 왕실 법정에 서서 사형을 언도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었습니다(렘 26:1~19). 죄목은 성전모독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그 전에도 성전 문에 서서 제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외친 바 있었습니다(렘 7:4).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제사를 받으시지 않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서 만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B. 말라기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참혹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스룹바벨의 지도 하에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했던 가장 우선적인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재건된 성전에서 다시 제사가 이전과 같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백성들의 제사는 다시 타락했습니다. 이번에는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구약 최후의 선지자인 말라기는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라고 최후통첩과도 같은 극단적 표현을 서슴지 않았었습니다(말 1:10).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곳은 성전이 아니라고 말했고 말라기 선지자는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감히 성전문을 닫은 선지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의 주인이시고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사를 받으시는 주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입니다.
“이곳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 무너지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참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울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말라기 선지자의 무서운 경고를 기억하게 하시려고 하는 것처럼, 채찍을 휘둘러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안에 짓겠다고 말씀하시고 이런 행동을 하신 것은 한편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전되신 그리스도
분명히 성경 본문은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심이라고 했습니다(21절). 성경이 주님에 대해서 성전이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 임마누엘(마 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잠을 자다가 꿈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했고 덧붙여서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주님의 오심을 설명했습니다(요 1:14).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 구약 시대에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이미 상고한 바 있습니다.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상징적으로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또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서 성전으로 이어졌고 주님이 오셨을 때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성막이나 성전이나 다 상징과 예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주님 자신이 오심으로써 이제 더 이상 상징으로서의 성막도, 성전도 불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 있는 이 말씀으로써 그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B.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골 2:9)
또 하나 우리가 살펴볼 구절은 골로새서 2:9입니다. 성경은 여기서 주님을 가리켜 말씀하기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 곧 하나님께만 속하는 영광과 그 모든 하나님의 성품이 충만하게 예수님의 몸 안에 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의미에서가 아니더라도 구약적 사고에서는 성전에 대한 묘사로서 가장 합당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된 백성들 속에 거하시는 하나의 방편으로써 성막과 성전을 선택하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을 지었을 때,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가득했다는 기사를 기억해보십시오(출 40:34~35; 왕상 8:10~11; 대하 5:13~14). 이제는 더 이상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자신이 성전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C. 하나님이 백성들과 만나시는 곳(출 25:22)
주님이 성전이시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세번째 사항은 성전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요 14:7).
주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요 14:9).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요 14:10~11). 주님을 떠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요 14:6). 주님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가 되셨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만나시는 장소는 바로 지성소에서 였습니다.
그 안에는 법궤가 있었는데, 법궤는 길이 110 cm, 높이와 넓이가 각각 67 cm 정도되는 전체가 금으로 입혀진 상자 모양이었습니다. 그 위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키는 천사인 그룹의 형상이 만들어져 있고,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언약궤 상자의 덮개였습니다. 성경은 이 덮개를 가리켜 속죄소 혹은 시은좌/시은소(Mercy Seat)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모든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으면 들어가서는 그 피를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서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려야 했습니다(레 16:14).
그 피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그 백성을 만나주셨고, 그 피로 말미암아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었고 그 보좌는 더 이상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의 보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보좌가 바로 시은소/시은좌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1년에 단 한 번 수송아지의 피를 통해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를 흘리셔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어주신 것입니다(히 9:12).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기 피를 가지고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대면하셨습니다(히 9:24).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당신 자신이 바로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만나는 성전이 되셨으며 상징인 성전을 대신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야 하는 지성소에 두려움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는데, 더 구체적으로는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겨질 때, 찢어진 휘장은 바로 주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히 10:19~20).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인 시은소 앞에 이제는 담대하게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히 4:16).
5. 성막?성전?성육신하신 그리스도?신자들의 몸?교회?성삼위 하나님 자신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이 되신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정리하면, 구약의 성막과 성전을 거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 자신의 몸이 성전을 대신하신 후에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안에 성령님이 거하심으로써 그들 자신이 성전이 되고(고전 3:16; 6:19),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우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과 그 자녀들이 만나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엡 4:12; 골 1:24; 고전 12:27).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성경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새 하늘과 새 땅에 임하는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 사도 요한은 도무지 성전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계 21:22).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물론 성령 하나님, 성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성전이시므로, 더 이상 상징으로써의 성전이 불필요한 것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오늘 이 말씀은 조금 복잡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매우 중요한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인 진리를 다루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A. 성전은 주님 자신이시며, 주님의 몸인 교회다.
첫째로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와 건물은 성경적으로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이 성전을 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이미 성전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건물인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의 장군 디도의 군대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이후에는 그 자리에 다시 세워지지 않았고 세워질 수 없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섭리라고 밖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전으로서의 건물이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는 그 자체로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육체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심이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연장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이 또한 성전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전되신 그리스도이심을 안다면 어떻게 떨지 않을 수 있으며 가볍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대하는 일에서 어떻게 가볍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두렵고 떨림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어떤 단어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전인 교회를 섬기는 태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에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강하게 양육되고 그 믿음과 사랑이 자라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영적 지도자들이 각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들이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의미에서 성전 건축인 것입니다.
B. 천국: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 천국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이 충만하게 거하시며,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뵈옵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존 오웬은 이렇게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 이 세상에 있을 동안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를 소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태도는 자신을 속이는 상상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여러분에게 의무에 불과한 것이고, 고역이라면 여러분에게 천국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전인 교회를 기뻐할 수 없고 교회가 그저 억지로 최소한의 의무로 출석하는 곳이 된다면, 여러분에게 천국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이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가르치는 바입니다.
주님께서 성전된 당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따라서 주님의 육체로 가려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육체가 바로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성전임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육체가 바로 성전의 실체이었음을 압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바라볼 때, 무엇을 보십니까?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 육체 안에 거하는 것, 하나님의 완전하신 영광을 보라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믿음을 주님 앞에 구하십시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보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결코 없을 것입니다.
admin
믿음은 인격적 관계입니다 /요2:23-25/ 김형익 목사
2021-05-05 10:52:09
두 주 전에 우리가 함께 살펴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1. 또 한 그룹의 사람들: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이 믿지 않은 사람들
23절에 보면 이 유월절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계셨는데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은 ‘그러나’입니다. ‘믿었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믿었으나 주님께서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않으셨습니다. 헬라어에서 ‘의탁하다’라는 단어는 23절에 ‘믿었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믿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친히 사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에 대해서 누군가로부터 배우셔야 했거나,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을 공부하셔야 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창조주로서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A. 표적을 보고 믿었지만, 표적이 가리키는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지만, 그 표적이 가리키는 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가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B. 일시적인 신앙이었다(요 6:14~15).
그러므로 이들의 신앙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특별히 이런 경우를 또 소개하고 있는데,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은 표적을 경험하고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리라 한 그 선지자임을 인정하고 에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요 6:14~15).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믿었던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2. 참된 믿음이 아닌 것들
이 사람들의 경우에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무엇이 참된 믿음이 아닌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A. 한 때에만 믿는 믿음(히 6:4~6; 요일 2:18~19): 믿음은 한 때 보여준 믿음의 열정과 봉사가 아님.
한 때에만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때 믿음의 열정과 봉사를 보여주지만, 지금은 주님과 아무 관계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한 때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고 굉장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전에는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에게서 나가서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할 때 바로 이런 믿음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요일 2:18~19).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히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과거에 잠깐 하나님의 선하심과 말씀과 은혜를 경험하지만, 결국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것이 한때에 그치는 사람들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본질상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B. 감정이나 감각으로만 믿는 믿음: 체험이나 현상으로 인하여 종교적으로 흥분하고 감동하는 믿음(행 8:13,18~24).
감정이나 감각으로만 믿는 믿음도 역시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험이나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흥분하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마는, 믿음이 여기에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형태는 복음의 진리와 성경에 대한 관심이 없는 대신에 간증이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들은 늘 들떠있을 것입니다. 뭔가 성령님께서 대단한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그들은 그것을 보고 들으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면 그들은 진정으로 체험이나 감각적인 현상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향한 목마름으로 성경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제가 언급하자면 금이빨로 바꾸어주는 집회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것이야말로 간음하는 여인과 같은 불신앙이며 그저 흥분하고 감동할 뿐, 참된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C. 머리로만 믿는 믿음: 신학과 교리에 지성적 접근을 하지만 마음에 아무 감동도,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믿음.
머리로만 믿음도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이럴 수 있습니다. 신학과 교리에 대해서 많은 것을 공부하고 또 압니다. 성경공부에도 열심히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지성적으로 접근할 뿐입니다. 설교를 듣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저 성경본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는 일반적인 강의가 아닙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말하기를, “설교는 사람의 소명 중에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소명인데, 그 이유는 설교가 죄인인 인간을 각성시키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전향하도록 돕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로만 설교를 듣고, 머리로만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는 태도로는 결코 진리의 말씀에 의한,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역사를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처럼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역사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판단을 받아서 깊은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D. 의지로만 믿는 믿음: 믿음의 모든 근거가 내가 하는 결심과 열심 그리고 행동에 근거하는 믿음.
의지로만 믿는 믿음 또한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모든 근거가 내가 하는 결심, 열심, 행동에 근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의 한 순간에 자기가 영접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믿고 있다’는 자기 행위를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보여주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까? 그들도 주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다짜고짜 찾아가서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제게 돈을 빌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심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을 마치 은행에 맡긴 돈을 찾는 것이고 언제나 퍼올릴 수 있는 물탱크의 물을 퍼올리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경우를 보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오해입니다. 이런 것이 참된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인격적 관계의 요소가 결여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은행잔고나 물탱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신성모독적이기까지 합니다.
3.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믿음을 인격적인 관계로 설명합니다.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믿음은 쌍방의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단지 내가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믿음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놀라운 진리는 참된 믿음은 주님이 우리를 믿으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조금 더 이것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A.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요 6:37; 고전 1:24).
참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들만 주님께로 나아온다고 했습니다(요 6:37).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만이 참된 믿음에 이르며 구원을 얻습니다(고전 1:24).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먼저 주님이 우리를 아셨다고 설명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요 15:16). 우리의 믿음이라는 행위 이전에 하나님의 행위가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B. 주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이다(요 1:42; 행 9:15).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믿어주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그들을 믿으셨습니다.
주님은 안드레와 요한에게 ‘와보라’고 초청하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요 1:39).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게바’라고 하신 것은 그를 믿으셨고 그의 장래를 바라보셨다는 증거입니다(요 1:42). 빌립에게도 주님은 나를 좇으라고 부르셨습니다(요 1:43). 나다나엘에게는 보다 큰 일을 볼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는 것도 역시 주님께서 그를 믿으셨다는 증거입니다(요 1:51).
나아가서 바울 사도를 부르실 때에도 그가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를 믿어주셨습니다(행 9:15). 이런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인격적인 관계는 서로의 믿음의 행위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C. 문을 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마 25:1~13).
늘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가장 결정적인 오해는 우리가 문을 주님께 문을 열어드린다고 하는 생각일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당신이 지금 결정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에 요한계시록 3:20에 대한 우리의 오해도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구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 안에 임재하실 수 없게 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죄로 더럽혀진 삶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복된 교제를 누릴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복음전도에 사용하라고 주신 구절은 사실 아닙니다. 이 구절이 복음전도에서 사용되면서 우리에게 생기는 믿음에 대한 오해는 마치 우리가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은 들어오실 것이며, 들어오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마 25:1~13). 열 명의 신부의 들러리들인 처녀들이 있습니다. 그중 다섯 처녀는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의 도착이 늦어졌고 기름이 부족한 것을 안 이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사러 나가지만 문은 이미 닫혀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소리치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대답만을 들을 뿐입니다. 구원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참된 신앙은 주님께서 내가 너를 안다고 하시고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4. 주님께서 자신을 내게 의탁하셨는가?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본질은 내가 믿는다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나를 믿으신다에 그 강조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안다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나는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주님이 모른다고 하시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심판의 날까지 기다려야만 우리의 믿음이 참된 구원하는 믿음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를 믿으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롬 8:16). 그러나 우리는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참으로 자신을 내게 의탁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성경적 시금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A.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놀라고 있는가?(딤전 1:12~16; 갈 2:20)
주님께서 여러분을 믿으신다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여러분에게 의탁하셨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많이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고백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2~16에서 바울 사도는 과거에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자기가 이런 긍휼과 은혜를 입어서 복음 전하는 직분을 받았다는 것에 여전히 놀라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인생의 노년에 이르러 이 서신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놀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넘치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자신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놀랍니다. 죄인의 괴수인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서 너무도 오래 참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는 놀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갈라디아서에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갈 2: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이 그에게는 여전히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을 향해서 여러분도 이런 놀라움이 있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공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을 의탁하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B. 영적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가?(롬 8:5~6; 고전 2:8~10,16)
두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증거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의탁하신 자들에게는 영적 이해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입니다(롬 8:6). 참된 믿음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합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고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이해력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해력이나 세상의 지혜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 영적 이해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자신을 의탁하고 믿는 자에게는 성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줄 알고 이해하고 깨닫는 능력이 생깁니다. 이것은 단지 지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영적 이해는 그의 마음에 깊은 성령의 감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이해가 무엇인지를 아신다면 여러분은 주님께서 자신을 의탁하신 자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입니다.
C. 주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 평강, 고요와 만족을 아는가?(마 11:28~30)
주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의탁하셨는지를 확인하는 세번째 시금석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과 평강, 그리고 고요와 만족을 내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어떤 체험이나 현상을 보고서 종교적으로 흥분하고 감동하고 들떠있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본 자들은 그 안에서 참된 안식을 경험합니다. 거기에는 참된 평강이 수반됩니다. 그리고 들뜨고 흥분하기 보다는 깊은 고요와 만족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을 초대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마 11:28~30)?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쉼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앞에서 고요히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바로 주님이 자신을 의탁하신 자들입니다.
D. 주님을 더 알고 싶은 열망, 주님을 향한 갈망,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스스로 물으셔야 할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주님을 더 알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까? 단순히 성경지식을 더 알고 싶고 신학지식을 얻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을 더 알기를 원하십니까?
그분의 자비와 선하심과 은혜를 더 알고 싶으십니까? 그분에게 더 깊은 감동을 얻기를 구하십니까? 그분 자신에 대해서 깊은 열망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님을 향한 배고픔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더 알지 못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고,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면 만족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있으신가 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에게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있습니까? 주님이 자신을 의탁하신 자들에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들을 정직하게 여러분 자신에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정직한 대답과 함께 말입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저 일시적으로 주님을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주님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여러분만이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여러분에게 의탁하시는 참된 믿음 가운데 거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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