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라 /요1:1-18/ 유기성목사
2022-02-17 10:09:13
김다위 목사님과 함께 주일 설교를 하게 되어 본문으로 어떤 성경을 택할까, 생각할 때, 바로 떠오른 성경이 요한복음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설교자가 누구인가에 신경 쓰지 않고 예수님을 주목하게 하는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이 제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사는 눈을 열어준 성경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시다거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거나 친밀히 동행하라는 말이 너무 힘들게 여겨졌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2,000년 전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태어나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는데, 지금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이해도 안 되고 믿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분이고 재림하실 때나 만나 뵐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지금도 저와 함께 하시고 저도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난 이야기부터 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이셨고 빛이시라고 증거하는 말씀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1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하면서 :14에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말씀은 요 1장 3장 8장 11장 12장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요 12:46 “내가 세상에 빛으로 왔나니”
우리는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더욱 분명히 믿는 것은 주님은 지금도 말씀과 빛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주님을 알게 되고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빛이시라면 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모르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도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빛이 어두움을 환하게 밝히는 것만 아니라 감추인 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밤에 자는데 누가 방의 불을 켜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너무 싫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안에 감추어졌던 죄와 허물이 다 드러나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가장 경건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앞에 서니 그들이 가장 경멸하던 세리보다도 못한 자였습니다. 그들에게 까무러칠 일이었고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 좋습니까? 어둠 속으로 숨는 것이 좋습니까?
부목사 시절에 심방 선물로 예수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액자를 창고에 둔 교인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눈과 마주치기 두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동행일기를 쓰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보라 하면 가장 큰 걸림돌이 일기를 공개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나 실제 삶을 공개하는 것이 너무 두렵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삽니다,
자신의 과거, 자신의 진짜 모습,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큰일 납니다,
그것은 곧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감추라, 어둠 속에 숨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배에 가득 물고기를 잡았지만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눈이 멀고 삼일 밤낮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날 밤새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인터뷰 작가가 ‘목사님, 솔직히 무슨 죄를 그렇게 지으셨어요?’라고 물으셨습니다. 가장 큰 죄는 목사면서도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를 믿고 살았음을 깨달은 것이 시작이었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의 저와 혼자 있는 은밀한 때 저의 모습이 다른 것, 마음으로 지은 죄가 무서운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고 또 구원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4-19)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우리의 은밀한 모습과 죄를 드러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은밀한 죄만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아는 눈을 열어주십니다.
: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은밀한 죄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십자가로 증거하셨습니다.
이것이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이유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말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빛을 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 60;1에 보면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어둠의 자식인 우리가 무슨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빛을 발하라” 하시는 것은 우리가 빛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빛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 60:1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목사님 한 분이 설교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여러 가지 문제들로 사방에서 에워쌈을 당하는 듯한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 일기에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매 순간 마음의 한계점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나 주님을 바라보며 부정적인 감정의 반대정신으로 이겨낼 수 있게 되니 은혜입니다. 비틀비틀 거려도 의지할 분이 계시다는 것이 복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임하셨기에 우리가 빛을 드러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결코 어두운 사람이 아닙니다. 밝은 사람입니다.
결코 “내 죄! 내 죄!” 하며 살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빛이신 주님과 동행하기에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어둠에 숨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빛 가운데서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였을 때 제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정말 어두움 속에서 빛 가운데로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충격이었고 당혹스러웠고 솔직히 낯선 느낌이었습니다,
여전히 어둠의 일에 유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더 이상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빛이시고 여러분 안에 역사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예수동행일기, 가장 큰 위기는 부목사님들이 힘들어 할 때였습니다. 결국 “그만 쓰자”고 했습니다. 목사님들도 안 되는데 교인들에게 쓰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목사님들이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목사님, 계속 씁시다.” 하셨습니다. 일기를 쓰고 나누는 것이 힘들지만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은 더 끔찍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쓰게 되었습니다.
아직 빛 보다는 어둠이 더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빛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고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일들을 언제까지 가지고 살려는 것입니까? 다 드러날 때가 옵니다. 그 때, 배우자와 부모와 자녀와 목사와 교인들을 어떻게 볼 것입니까?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당장은 힘들고 불편해도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쁨이고 구원입니다.
지난 성령집회 때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집으로 간다면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다들 웃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가시는 것은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거하심을 정말 믿는 것이 빛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어둠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어둠 속으로 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은밀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만 아닙니다.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교인들과 일기를 나누며 사는 것이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왜 계속하여 은밀히 죄짓고 살면서 일기를 쓰려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면 일기를 공개하는 것이 왜 두려운 일만 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빨리 코로나19가 끝나기만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19로 겪는 시련을 통하여 우리가 진정 달라지지 않았다면 더 큰 시련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교회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언제부터 교인들과 함께 마음껏 예배하고 모일 수 있느냐도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살 것인가? 정말 예수님과 동행할 결심은 섰는가 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하고 어둡습니까?
주님께 등지고 세상과 문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어둠에 숨어 살려하지 말고 빛이신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빛이신 주여, 내가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나를 인도하소서!”
찬양: 비추소서 (주님 당신은 사랑의 빛)
말씀이신 하나님 /요1:1-2/ 김형익 목사
2021-05-05 09:25:54
1. 요한복음, 독특한 성경
이제 우리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특별한 정해진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님께서 가지고 계신 계획을 기대하며, 성령님의 특별한 기름부으심과 은혜베풀어주심을 기대하면서 요한복음서를 강해하고자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주신 이 거룩한 복음서를 통하여 드러난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기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저는 이 주님의 기도를 의지하여 이렇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아더 핑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는 자가 하나님에 대한 나은, 보다 깊고 온전한 지식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는 성경에 계시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기도하는 자세로 공부해야만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제 시작하는 이 복음서의 말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성경 중에서 가장 쉬워서 기독교를 알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 읽으라고 권할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성경학자들은 가장 난해하고 심오한 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소개하기 가장 쉬운 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한 복음전도적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책이 바로 이 요한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이 책을 기록하게 하실 때, 이 책의 목적을 이렇게 밝혀주셨습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너무나 분명하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책의 목적은 그 사실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복음서가 가장 심오한 책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건 위주라기 보다는 의미 위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관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과 이 요한복음이 가지는 차이이기도 합니다.
A. 공관복음(公觀福音)과 요한복음의 강조점과 내용의 차이
성경에는 네 복음서가 있는데, 왜 이렇게 많은 복음서가 필요한 것일까요? 이 네 복음서는 각기 목적을 가지고 각기 다른 대상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쓰여진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복음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 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온전하고도 종합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를 가리켜 공관복음이라고 일컫는데, 이 말은 공통된 관점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서 제외되는 것일까요? 공관복음은 모두가 앞서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의 사역의 사건들에 무게중심을 두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이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많은 사건들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훨씬 더 많은 내용을 그 의미에 대한 설명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이 생략하고 있는 것들은 가령,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세례받으심, 변화산상에서의 변화되심, 마귀를 쫓아내시는 축사(逐邪), 겟세마네에서의 고뇌의 기도, 마지막 만찬, 감람산 강화 등입니다.
이런 것을 빼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약간은 상이한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요한복음의 특별한 본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양과 목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10장, 다락방 강화라고 일컬어지는 14~16장,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일컬어지는 그 위대한 본문인 17장 등입니다.
아마 이 본문들만을 따로 떼어서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 심오한 의미로 인하여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상 많은 설교자들이 그 본문들만을 위해서 오랜 기간 설교한 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해서 훨씬 더 신학적인 복음서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뿐이 아닙니다. 가령,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사역이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이루어진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훨씬 더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의 기록만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몇 년이었는가를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굳이 추측한다면 1년에서 길면 2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약 3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의 기록 덕분인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을 구체적으로 세 번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13; 6:4; 11:55; 5:1)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은 전체 구조에서는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은 1:1~18인데, 이 본문 안에는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이 놀라울만큼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상고할 본문은 그 중에서도 처음 두 절입니다.
2. 태초
A. 각 복음서의 시작의 차이
제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를 조금 장황하게 설명을 드렸는데, 여기서 각 복음서가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가를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울 것입니다. 각 복음서의 시작을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1:1)
마가복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누가복음: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1:1)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를 통하여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 주님은 바로 예언의 성취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족보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정통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마가복음은 단도직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선포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초두에 밝히듯이, 이방인인 데오빌로라는 인물(혹은 가상인물이라면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인물)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특별히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는데 사용하신 누가라는 인물은 의사이기도 했지만, 당대의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가진 자답게 그 시대적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밝혀주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가령 “유대왕 헤롯때에”(1:5)나,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2:1)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B. 창 1:1의 ‘태초’와 요 1:1의 ‘태초’
이렇게 보면 요한복음의 시작은 매우 장엄한 듯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태초에’라고 시작하는 것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우리는 여기서 모든 유대인 독자들과 함께 구약성경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의 초두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과 요 1:1에 나오는 단어인 ‘태초’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창세기 1장에서 태초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말씀이 계셨던 태초를 설명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단어이며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던 영원 전의 때를 가리키는 말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즉, 요한복음의 태초가 창세기의 태초보다 먼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마가복음 1:1과 이것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여기서 ‘시작’이란 단어가 요한복음 1:1의 ‘태초’란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태초다라고 해도 되겠지요. 마가복음이 복음서 가운데서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였고 요한복음이 쓰여지기 전에, 사도 요한 자신도 마가복음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할 때,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 요한복음은 그 복음의 시작이 하나님 아버지(더 나아가서는 삼위 하나님)과 태초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입니다.
C. 예수님과 시간과의 관계(요 17:5,24)
맞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시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싶어하는데 즉, 예수님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영원 전 부터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태초를 설명해주는 실마리들을 우리는 나중에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더욱 발견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던 요한복음 17장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창세 전’이라는 이 표현이야말로 1:1에서 ‘태초’가 어느 때를 지시하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단서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인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기도를 가까이서 관찰하던 사도 요한은 그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자신과 너무나도 가깝게 3년여를 동행하셨던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창세 전 즉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서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바로 이 장엄한 사실을 선포함으로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3.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하나님
이제 우리는 이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다른 표현보다도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했는데, 왜 성령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표현하신 것일까요? 왜 보다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 즉 창세전부터 계셨다’라고 쓰지 않은 것일까요? 여기에는 매우 깊은 신학적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주 중요한 별명이 ‘말씀’인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A.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말씀)하시는 하나님(1:18; 14:8~9): God expressed himself.
J. B. Phillips는 그의 현대역 신약성경에서 1:1의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t the beginning God expressed himself. That personal expression, that word, was with God, and was God, and he existed with God from the beginning.”
‘태초에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셨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표현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쉽게 말해서, 말 혹은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하는 기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 생각을 다른 존재에게 설명해주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이 말로써 설명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의 진가를 알거나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영이시며(요 4:24),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골 1:15; 딤전 1:17). 그리스도가 말씀이시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드러내며, 계시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골 1:15). 1:18을 보십시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 ‘나타내다’라는 단어는 ‘설명하다’, ‘펼쳐보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 자신이 말씀이 되셔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설명해주시는 분이신데,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말씀과 가르침으로 설명해주신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그 분 자신이 말씀 자체이시기에,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나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행동과 사역, 감정의 표현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우리는 복음서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인용했던 아더 핑크(Arthur Pink)가 한 말의 의미입니다.
“믿는 자가 하나님에 대한 나은, 보다 깊고 온전한 지식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는 성경에 계시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기도하는 자세로 공부해야만 한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입에서 나간 말은 행해진 행동과 다름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곧 빛이 있었습니다(1:3).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들을 뿐 아니라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나고 결과가 주어지는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초두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내용의 의미입니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당신 자신을 통하여 인간에게 보이셨고, 설명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의 의미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B.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10:30).
본문은 더 나아가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선언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결론적 선언을 하면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심을 특별히 강조해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자,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단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이 원어로는 ‘하나님’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신적인(divine)’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 말씀은 곧 신적인 존재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격을 받은 존재?피조물?라는 주장입니다마는, 이런 식의 헬라어 구문은 오히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라고 읽어야 하는 강조어법이라는 것이 헬라어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여기서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한 위대한 주님 자신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이 주장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으실 뻔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C.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잠 8:30~31):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라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특별히 1절에서 설명된 후에, 2절에서 반복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양태로 존재하셨는지를 영적으로 무지한 우리에게 희미하게나마 알게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 말로 ‘함께’라고 번역된 이 전치사는 ‘함께’라는 뜻 외에도 ‘~을 향하여’라는 뜻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다라고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A. T. Robertson이라는 성경학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계셨으니’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계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 대한 또 하나의 실마리를 잠언 8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잠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바로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때 이전과 창조의 때에 성부 하나님과가지셨던 관계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완벽한 영광과 기쁨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 17:5, 24).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시작입니다.
4. 적용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제일 먼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A.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원형이시다(롬 8:29).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원형, 모범이시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과 인류에게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모범은 바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삼위 하나님의 제2위이신 성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이 복음서를 상고해야 합니까? 바로 말씀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닮아감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서야 어찌 제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주목하지 않고서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제가 설교를 합니까? 말씀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서 성령님께서 기록하여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 모두에게 드러내어 그분을 믿고 닮아가게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중 앞에 밝히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20:21). 하나님을 향하여 존재하고, 하나님을 설명하는 존재로 살라.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러니까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이렇게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독생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이 세상에 파송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를 이 세상 속에 ‘말씀으로’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소명으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우리의 존재양식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가까이 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소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하기 전에 여러분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목사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피로 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 구원얻은 모든 자에게 동일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거듭난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 편에 가까이 서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도록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이보다 더 행복하고 기쁜 삶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시 16:11).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두번째 소명은, 이 세상 앞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소명입니다. 여러분의 말, 여러분의 행위, 여러분의 감정표현, 여러분의 삶의 방식, 이 모든 것들은 과연 세상 앞에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말과 행위와 삶의 방식은 그저 이 세상적이고 육적이며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세상 앞에서라고 하는 것은 단지 불신 세상만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여러분의 부모와 자녀들에게,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여러분은 여러분의 말로, 행동으로, 그리고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반영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과 도전 앞에서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예’ 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낸다고 말씀하신 후에, 숨을 내쉬며 하신 말씀을 인하여 힘을 얻습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가 아니고서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이 소명을 따라서 살 능력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고 삽시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때,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소명을 이루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주님께서도 성령과 능력의 기름부음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셨다면, 하물며 우리야 얼마나 더 성령의 충만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는 짧지 않은 기간을 통하여 요한복음을 상고하면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의 삶에 이 소명을 이루어사는 복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말씀으로 이 땅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요1:1-5/ 김병삼목사
2017-05-13 06:11:10
[요한복음 1장 1-5절]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과 격동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말씀
이번에 국내 성지를 돌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 알려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가 들어오기 훨씬 전에 이 땅에 말씀이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어둠 가운데 전해졌던 그 말씀의 능력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선교의 역사는 본문 1절과 5절 말씀을 가지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계신 말씀을 우리가 알지 못했지만, 그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거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둠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 우리 선교의 역사라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그 신비한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 민족에서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셨고, 어떻게 말씀이 역사하셨는지를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성경번역의 역사는 조선 선교 역사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에는 로스 선교사와 이응찬이라는 인물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였던 로스는 만주 봉황성 고려문에서 의주에서 온 조선인들을 처음 만나 전도하였습니다. 그 만남을 계기로 1874년부터 로스는 의주 상인들을 만나 한국어를 익히고 조선에 대한 선교를 계획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응찬은 홍삼을 사서 장사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혀 물건을 몽땅 잃어버리고 고향에도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사람을 구한다는 서양 사람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로스를 만나 그의 어학 선생이 되었습니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연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 말씀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보이도록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선교사 로스는 이응찬과 함께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착수하였고 1882년 봉천에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오게 됩니다.
바로 그해 역사적으로 조선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당시 상황을 로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초 한글 성서 발행이 조미조약 체결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완고한 고려문이 열린 문이 되면 곧바로 복음이 이 민족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성경이 의주 출신들의 도움으로 인해 평안도 사투리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어린양’ 같은 말은 ‘하나님의 양새끼’라고 번역되기도 하면서 복음의 토착화 과정이 시작된 것이죠.
또 한 인물 로스 선교사와 백홍준의 만남도 한국 선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1876년 늦가을 만주 봉천 근처 고려문 국경 지역에서 로스는 조선 상인들에게 초와 한문 성경 전달하였는데, 백홍준은 자신이 받은 성경책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나 뜻을 같이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세례를 받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봉천에 거하는 선교사를 찾아갑니다. 당시 안식년이었던 로스를 대신하여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대신 세례를 주었습니다.
1879년에는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만주에서 인쇄된 성경이 국내로 유입되었습니다. 아직 한글은 아니었지만, 고려문을 통해 들어온 성경은 ‘불온문서’(?)처럼 유통되며 새로운 도에 관심을 둔 사람들 사이에 은밀하게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의주와 소래, 서울에서 백여 명에 가까운 개종자들이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1879년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선교사가 들어오기 6년 전입니다. 이렇게 세례지원자들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으로 이 민족에 들어와 계셨습니다. 아직 어둠 가운데 보이지 않았을 뿐이죠. 2년 뒤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만주에서 인쇄되어 쪽 복음으로 한국에 은밀히 유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쇄국 분위기에서 성경을 반입하고 나누어 준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1882년 로스 목사에게 세례받고 정식 매서인으로 임명받았던 서상륜은 그해 10월 성경 500권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고려문 검문소에 걸려 모두 압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상륜과 같은 매서인들을 통해 1884년까지 조선에 들어온 성경은 이미 9,500여 권에 달했다고 합니다.
조선 선교의 독특성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 땅에 말씀이 들어왔다는 것이고, 1885년 제물포항에 선교사들이 첫발을 내딛고 이 땅에 들어왔을 때는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셨습니다.
빛이 있으나 아직 어둠이 깨닫지 못했을 때 그 작은 빛들이 조선을 밝히는 횃불로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빛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빛입니다.
요즘 저에게는 그런 마음의 열망이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가 진정 복음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가정이 깨어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불의한 일들에 연루되는 이 세상에서, 정말 복음으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선교 초기 말씀으로 이 땅의 문을 두드리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의 암울함 가운데 역시 빛으로, 복음으로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복음이 전해지던 당시 구한말 조선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암울”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소망이 없었던 나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복음의 역사 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둠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빗자루로 막 쓸어버리면 어둠이 도망갈까요? 총과 대포로 쏜다고 어둠이 달아날까요?
소리를 지른다고 없어질까요?
간단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됩니다. 빛이 비치는 곳에 자연스럽게 어둠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 위에 들어온 것은 “교회”가 아니라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담아내고, 말씀을 전파하고,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 세워진 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죠. 교회라는 건물이 생명과 빛인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잃어버린, 말씀이 더는 역사하지 않는 곳에서 그 어떤 빛도 비치지 못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빛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교회가 존재하고 말씀을 받아들였지만, 그 말씀이 역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한말에는 말씀의 빛이 이미 땅에 있었으나 세상이 빛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므로 어둠이었죠.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왜 깨닫지 못할까요?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런데 5절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둠에 빛이 비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 정상인데, 왜 어둠이 깨닫지 못할까요?
이 부분은 빛을 빛으로 인정하지 않는 의지적인 부분이 아닐까요?
어둠에 빛이 비치는데 깨닫지 못한다면, 빛을 보지 않겠다고 눈을 감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면 이 자연스러움에 대하여 거부하는 세력은 무엇일까요?
첫째, 죄를 범한 인간들의 특징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즐기기 위해 빛을 차단하는 것이죠. 의지적으로 말입니다.
둘째는, 빛이 들어오면 주변이 밝아지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빛 앞에서 드러나는 죄에 대하여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죠, 노출된 죄를 고치든가, 두려움으로 피하든가. 그런데 많은 사람이 고치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많은 사건이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그렇게 드러날 죄들을 일단 부인하고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다 아는데, 다 모를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죠? “CCTV는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모든 범행이 CCTV에 찍혀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두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밝혀질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명백하게 펼쳐놓으실 우리의 삶 때문에 그렇습니다.
빛 되신 주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불의가 득세할수록 진리를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핍박할수록 많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죄를, 어둠은 더 어두운 곳으로 인도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빛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빛은 아닙니다. 그러나 받은 빛을 비출 수는 있습니다.
유명한 아시시의 성자인 프란시스의 전기 작가 중 하나는 그의 생애를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달이 태양의 거울이듯, 그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거울이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꼈다. 그의 심장은 그리스도의 심장이었고, 그의 언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였다.
아프리카의 남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어떤 선교사의 묘비에는 그 지역 원주민들에 의해서 새겨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고 합니다.
“당신이 왔을 때,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유명한 스탠리 존스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태양이 나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빛만큼 그리스도와 복음을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도 보입니다. 특히 어두운 동굴에서 저 멀리 보이는 터널의 끝이 작지만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다가갈수록 주변이 점점 밝아집니다.
이 민족의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던 사람들, 아직은 어둠이지만 그 빛이 어둠을 물리치리라는 복음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이 땅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언더우드 목사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빛의 이야기입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땅에 첫 복음이 들어 올 때…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초대 교회 말씀이 전해지던 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 첫 복음이 들어오던 때의 감격과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가?
요한계시록 2장 4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그러나’라는 접속사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모임에 대한 열심과 예배가 있었고, 수고하며 헌신하는 많은 일꾼이 있었지만, 그들이 처음에 가졌던 마음 즉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첫사랑’ 하면 여러분에게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설렘”이 아닌가요?
가슴 저리는 그 어떤 이야기가 아닌가요?
어떤 사람에게는 첫사랑이 추억으로 끝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첫사랑이 끝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가슴 설레던 그 마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잠깐 말씀과 연관이 되는, 그러면서 남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예화를 하나 들까요?
2016년 3월 26일 자 ‘weekly biz’에 유명한 장난감 회사 ‘레고’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12년째 CEO를 맡은 에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 (kundstorp,)와의 인터뷰였습니다.
레고는 2015년 기준으로 영국 브랜드 평가기관인 ‘브랜드 파이낸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1위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글과 애플보다 영업 이익률이 높은 (34.1%) 회사가 된 것이죠. 그리고 기업 혁신의 교과서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레고는 10여 년 전 혁신 과잉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던 회사입니다. 더는 아이들이 레고 블록과 같은 장난감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최신 유행하는 미국 만화의 주인공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레고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레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블록’을 생각했기 때문이죠. 기업의 위기 가운데서 ‘혁신’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블록’에 집중하고 나머지를 다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블록을 기억했던 핵심 고객층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놀랍게도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디자인을 바꾸고 쉽게 블록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레고가 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레고다운 것’에서 사람들은 다시 레고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창업 때부터 내려오던 정신인 ‘최고만이 최선이다’라는 말, 밟아도 깨어지지 않는 장난감을 만드는 것으로 레고는 최고 브랜드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고의 CEO인 크누스토르프에게 앞으로의 전략에 관하여 물었을 때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저희는 미래 성장 목표에 대한 정확한 숫자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계의 더 많은 어린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게 하겠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레고의 이야기를 했을까요?
복음이 들어왔을 때의 그 ‘빛’, 이 땅 조선의 어둠을 물리쳤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세상이 변했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변화된 세상에서 어떻게 복음이 역사하겠어!”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은 여전히 복음으로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지난주 기자들과 우리가 10월 24일에 준비하는 만나 컨퍼런스 ‘Think Next’에 대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교육의 문제는 아이들을 너무 ‘배려’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교육은 배려가 아닌데, 우리는 배려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만 것입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고, 복음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랑과 배려가 더해져야 하죠.
레고의 목표가 참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목적은 숫자가 아니라, 이 세상이 빛으로 바뀌는 것이고, 복음으로 인해 이 땅의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복음으로 얼마나 빛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것은 ‘첫 사랑’의 상실입니다.
상실된 첫사랑은 형식만 남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유지하는 사랑은 어는 순간부터인가 고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첫 번째 복음을 접한 사람들의 행동을 ‘사랑’이라는 말없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느꼈던 사랑이 누군가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더는 누군가에게 흘러갈 것이 없는 신앙이라면 이제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의 책 [큐티 365]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네팔에서 의료 선교를 하고 계시는 강원희 선교사님은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고 불립니다.
의대를 졸업한 뒤 계속 꾸려온 개업병원이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며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48세가 되던 해, 느닷없이 병원과 가산을 정리하고 아내 최화순 사모님과 함께 네팔로 의료선교를 떠났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귀한 시절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하루에 150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계십니다. 팔이 아파 손을 들기 힘들면 진통제를 맞고 진료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강 선교사님은 30년을 오지에서 아픈 사람들을 위해 진료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들 선교사님 부부의 지나온 삶과 인생은 ‘소명 3’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 부부는 영화 시사회에 참석하지 않고, 어떤 관련 활동도 하지 않은 채 평소처럼 네팔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소명이 생겼습니까?’라는 질문에 강 선교사님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부터 이미 소명은 시작됐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소명은 곧 숙명입니다. 단지 실천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지상 소명은 예수님을 믿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소명을 갖고, 실천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제 사랑이 아닌 ‘익숙함’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늘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드리던 예배, 늘 해오던 봉사들 말입니다.
저는 교인들과 함께 국내 성지를 방문하며 얻은 커다란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3 R'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Remember
Repent
Restore
소아시아 7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첫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지던 때, 아주 작은 빛이었지만 우리 민족과 우리 민족 교회에 촛불이었습니다. 말씀이 빛으로 오셔서 이 세상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어둠에 묻혀버리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때를 기억하는 유익을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회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회복할 수 있다면, 다른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은 ‘사명’을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명이 없는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를 상실해 버렸다면 말입니다. 가장 무서운 경고가 아닐까요?
사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저는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구한말에는 사람들이 무지해서, 구별하지 못해서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애써 외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말씀의 가뭄 가운데 어둠이었다면, 지금은 말씀의 홍수 가운데 어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비가 오지 않는 가뭄보다, 홍수가 나서 먹을 물이 없는 가뭄이 더욱 무섭다는 것입니다.
가뭄은 물을 찾으면 해결이 되지만, 홍수 속에 먹을 물이 없다는 것은 지금 옆에 있는 넘치는 물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넘쳐나는 물을 먹고 전염병에 걸리고, 죽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를 꼭 말해주는 것 같지 않나요?
TV를 틀어도 인터넷 스마트 폰으로도, 어디를 가다 그냥 교회를 들어가도 말씀이 넘쳐나는데 왜 세상이 이렇게 캄캄한 어둠입니까? 아니, 왜 말씀의 생명력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나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생명과 같은 말씀의 물꼬를 텄던 사람이 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복음을 갈구하던 한 사람의 열정을 통해 복음의 물꼬가 터졌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수정’이란 인물은 바울의 전도 여정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던 마케도니아인이 손짓하는 환상 속의 인물과 같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가려 했지만, 계속해서 길이 막히게 되죠. 그때 꿈속에서 환상을 봅니다. 아시아를 향해 드로아까지 내려갔으나 결국 마케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진로를 유럽으로 바꾸게 됩니다.
1882년 우리 역사에서 임오군란으로 인해 명성황후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이수정이란 사람의 공로로 목숨을 지키게 됩니다. 그는 고종황제의 배려로 그 사건 후에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죠.
이수정은 개화 문명을 배우기 위해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 츠다센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감리교 교인이었습니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츠다센의 집에 걸려 있는 산상수훈 한문 족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족자에 대하여 대화를 하다 이수정은 성경을 선물로 받게 되었고, 성경 말씀을 탐구하며 내용에 대한 질문을 위해 다시 츠다센을 찾게 됩니다. 이수정에게 성경은 새로운 진리였고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한국인 개신교 세례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1884년 우리말이 달린 형태로 4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인쇄되었습니다. 1885년 2월에는 마가복음도 우리말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이 땅에 복음이 필요함을 호소하는 편지였죠. 그래서 이수정을 환상 중에 손짓하던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의 편지는 Missionary Review 같은 미국의 유력 선교 잡지에 실려 소개되었습니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참된 하나님의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퍼져가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국어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퍼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잘되도록 저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망은 1년 만에 이루어져 1885년 부활절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복음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누군가의 기도와 꾸준한 두드림이 있었기에 이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죠.
어둠 때문에 빛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타임스퀘어 교회는 뉴욕의 3대 복음주의 교회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 교회를 개척한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님은 어느 날 뉴욕의 번화가를 걷다가 교회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1986년 맨해튼 42번가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과 마약 중독자들, 그리고 넘쳐나는 게이바 등을 보며 그곳에 빛을 비추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목사님은 실제 갱단들과 마약 중독자, 직업여성들을 찾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 많은 갱단의 두목과 단원들이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이곳에 빛을 비추라고, 복음으로 어둠의 문을 두드리라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성령님의 도전입니다.
이 땅의 어둠을 물리치는 말씀의 빛이 우리 교회를 통해 넘쳐 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회중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자가 되어 제2의 이수정이 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어둡지만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다시 복음의 빛이 어둠을 물러가게 할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 가운데 우리가 서야 한다고 말입니다.
빛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그 빛은 이미 말씀으로 이 땅에 거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 빛이고 말씀을 가슴에 품은 자들입니다.
아직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과 축복(1)- 자녀 됨의 축복 /요1:1-14/ 하용조목사
2015-05-27 10:32:26
저는 지난 3주 동안 미국의 시애틀, LA, 얼바인 등지를 돌면서 헌당 예배와 큐티 집회 등을 인도하며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미국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말씀을 준비하던 중에 너무 은혜가 충만해 1시쯤에 기록을 마친 후 1시간 동안 손을 들고 선포했습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던 그 특별한 은혜를 “복음의 능력과 축복”이라는 시리즈로 7주간에 걸쳐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일곱 가지 복음의 능력(권세)과 축복들이란
첫째는 자녀 됨의 권세와 축복,
둘째는 죄 사함의 권세와 축복,
셋째는 자유함의 권세와 축복,
넷째는 치유됨의 권세와 축복,
다섯째는 믿음의 권세와 축복(기적의 권세와 축복),
여섯째는 성령 세례의 권세와 축복 마지막으로 의롭다하심의 권세와 축복입니다.
영적 권세와 축복은 과거형
일곱 가지 복음의 권세와 축복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은혜는 과거형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권세와 축복은 장차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도 영적 빈곤과 삶의 무기력함을 느끼는 이유는 복음의 권세와 축복을 장차 올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부모는 사랑해서 자녀를 임신하는 게 아니라, 임신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자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과 동시에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따라서 진정한 영적 권세와 축복은 과거형인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권세와 축복을 믿고 선포
두 번째로 일곱 가지 권세와 축복에 대해 이미 이뤄진 것으로 믿고 선포하면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 능력과 축복들에 한결같이 ‘네가 믿으면’이라는 전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셨는데, 그것을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초등학생부터 어른들까지 누구나 소지하고 있는 것이 휴대전화기입니다. 사람들은 휴대전화기를 꺼내 자신이 원하는 숫자를 누르기만 하면 상대방과 언제든지 통화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주어진 일곱 가지 능력과 축복들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기만 하면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복음의 권세와 축복을 믿고 선포한다면 곧 우리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날 밤에 저는 이미 주어진 일곱 가지 권세와 축복을 깊이 묵상하던 중에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것은 확실히 믿고 있는데, 어떤 것은 제대로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고 천국으로 가는 축복은 말만 해도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질고를 치유하신 축복은 잘 믿어지지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저에게 암이 여섯 번이나 재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고혈압이 있고 당뇨가 있으며 신장이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미 주어진 권세와 축복을 선포하는 데 주저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축복을 누리지만 고난을 받거나 사업이 안 되거나 현실이 고통스럽거나 아무리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을 때는 포기해 버립니다. 저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간의 죄와 질고를 모두 해결하셨다고 수없이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그 사실을 선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깨닫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새벽 1시 30분까지 손을 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회복이 일어나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요즘 저는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까지 ‘네 병은 치유되었다’라고 선포합니다. 현실적으로 아직 치유되지 않았지만, 이런 비밀을 발견하고 그날 밤에 역사가 이뤄진 것입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고 질병을 앓게 되면 그 현상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원리를 믿으며 계속 선포해 나간다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은혜라는 자물쇠에 믿음이라는 열쇠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열쇠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물쇠는 항상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자물쇠에 믿음의 열쇠를 꽂아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항상 사용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복음의 능력과 축복에서 첫 번째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에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단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에서 ‘주다’는 동사가 과거형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다’라는 동사가 영어로 현재형인 ‘give’도 아니고 미래형인 ‘will give’도 아닙니다. 분명히 과거형인 ‘gave’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된 은혜의 자물쇠에 믿음의 열쇠를 꽂아 돌려서 그 뚜껑을 열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능력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복음의 권세와 축복에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자문해 보았습니다.
‘네가 진정 믿느냐’라고요. 한 시간 정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여섯 번이나 암이 재발했다는 상처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암이 재발하면 수술을 받아야 하고 독한 약을 먹어야 한다는 공식으로 생각은 노회(老獪)돼 있고 어느덧 질병의 노예가 돼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박차고 일어나 이미 주어진 복음의 권세와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에 동의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논리나 과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시며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나 부활은 논리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그 믿음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믿음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믿지 못한 사람이 바로 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 줄을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경험, 생각, 상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자제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뚫는 또 따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세계에 대해 감정적이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주먹구구식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하고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아버지의 말부터 고쳐주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곧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말은 바꿨지만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말했을 때,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의 실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도 예수님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인간적인 생각, 지식, 의심의 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영접하는 것이 복음의 권세와 축복을 받는 제일 신호탄입니다. 그럼,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즉 말씀은 예수님이십니다. 2, 3절 말씀을 봅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물위를 걷으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4, 5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은 인간들을 둘러싸고 있는 질병, 죽음, 마귀의 세력들을 깨뜨리시고 안으로 들어오셔서 밝게 비추십니다. 6절에서 8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빛이 아니고 빛에 대해 증거하러 온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초점은 모두 예수님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9절에서 11절까지 말씀을 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적으로 비참한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빛에 대해 알지 못하고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참 빛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알고 그분 안으로 들어가면 천지 창조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고 생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권세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놀라운 권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쑥스러워집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자꾸 거부하게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겠느냐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운 권세를 가진 사실을 믿음으로 자주 선포해야 합니다. 천지의 모든 권세를 받았음을 믿고 크고 강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처음에 잘 안 되겠지만 믿음을 갖고 자주 반복하면 다음부터 자연스럽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으로 간다는 사실이 자연스럽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상속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자꾸 선포하면 그것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셔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보호, 인도, 공급, 양육 등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개념입니다.
자녀 됨에 대한 마귀의 유혹을 경계
그런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말씀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의 축복을 받았는데, 어느 날 마귀가 와서 이런 사실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원래 인간은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귀와 너무 오래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성격마저 마귀의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성격을 가리켜 문화라는 이름으로 ‘개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귀신의 성격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아버지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끈질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자녀로 하여금 육신의 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로 하여금 육신의 자녀에게 부정(父情)에 대해 경험된 게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녀에 대한 잘못된 양자 개념의 주입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소리를 한 번쯤은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 콤플렉스를 갖게 됩니다.
마귀는 자녀들에게 친부모가 아니라고 속삭여 줍니다. 그러면 잘못된 양자 개념이 심화돼 갑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됨의 권세와 축복마저 의심하게 만들고 고착화시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한 자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며 복을 주시고 미래를 보장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 됨의 축복으로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서 17절까지 말씀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서 9장 4절 말씀에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 약속, 치유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항상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와 축복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권세와 복을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비굴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떳떳이 나아가 필요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워온 자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 새로움을 입은 당당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자녀 됨의 축복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됨의 특권과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이신 그리스도 /요1:1-2/ 박영선 목사
2015-07-30 20:45:33
성경에는 복음서가 네 권이나 기록되어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앞에 있는 세 복음서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세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사건적 추적을 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 내용과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른 복음서는 사건 기록이 많은데 비하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세례나 시험에 관한 기사가 없고, 변화산의 기사나 최후의 만찬이나 겟세마네의 기사도 없고, 수많은 비유나 이적담들이 없는 대신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설명하시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주의할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이 말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시킬 만큼 묘사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래서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말씀이라는 단어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세 분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한 분이라는 뜻은 숫자상 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성품과 능력과 존귀와 영광이 똑같으시다는 말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본체라는 말은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똑같다는 의미의 하나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2)
천국에 가면 우리는 분명히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이 세 분은 똑같이 다 거룩하시며 전능하시며, 영광과 경배를 받아 마땅하신 분이다. 세 분은 능력이나 영광에서 차이가 없으시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일하시는 순서가 있을 뿐이지 누가 더 높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에게 바로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그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6-8)
예수님께서 말씀이라는 별명을 가지시는 것은 예수야말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달시키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9-10)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5-19)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신 것과 같이, 그리고 그의 안타까움들과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수행시키는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같이 우리를 보내신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일한 '말씀'인 것이다. 내 말뿐만 아니라 내 판단, 내 행위, 내 모양이 그대로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르셨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의 삶 전체를 말씀으로 사셨듯이 그는 걸어다니는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에 그렇게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참 신자의 삶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이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다 빛을 보라고 보이는 곳에 두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써 하나님을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 생애를 사시면서 어느 한 말씀, 어느 한 행위도 은혜롭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이 있었는가?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명샘이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먹고 마시라' 우리가 바로 그러해야 한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신자는 그것을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짐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자나 대속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문은 되어야 한다. 일차적으로 우리를 통과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 소경, 앉은뱅이들이었다. 우리는 흔히 유유상종이라 말한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지 않다. 신자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들 틈에 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을 증거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에게 휩싸여 있는 사람, 그가 잘하는 사람이다. 교회 안에서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지 말라.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없는 사람은 갈곳이 없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 속에 가서 끼기 쉽지만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 틈에 끼지 못한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있다 없다는 것은 꼭 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신앙이다. 신앙이 성장하고 난 다음에 제일 못 참는 것이 무엇인가?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가 엉뚱한 질문을 하면 너무나 냉정하게 대한다.
성장한 믿음의 사람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키우는 토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나는 말씀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하는 말의 깊은 뜻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렇게 우리는 보냄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로써 우리의 영광을 취해야 한다. 지식과 능력이 아니다. 은혜와 진리로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 혹은 만나는 사람 앞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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