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강해 10. 사울이 기름부음 받다 /삼상9:1-10:1/ 이종철목사
2022-06-06 09:57:49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3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 곳에는 없었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니 6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7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
8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쳐 달라 하겠나이다 하더라 9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10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가니라 11 그들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1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13 당신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곧 그를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14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 15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16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17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18 사울이 성문 안 사무엘에게 나아가 이르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하건대 내게 가르치소서 하니 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선견자이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20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21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22 사무엘이 사울과 그의 사환을 인도하여 객실로 들어가서 청한 자 중 상석에 앉게 하였는데 객은 삼십 명 가량이었더라 23 사무엘이 요리인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그 부분을 가져오라 24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25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26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27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더라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나귀를 찾아서
사무엘서의 주인공 중 하나인 사울의 등장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가문인 기스의 아들입니다. 일단 베냐민 지파라는 점에서 사울은 왕의 후보로 적당합니다. 북쪽와 남쪽을 대표하는 강성한 에브라임 지파나 유다 지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전환기에는 중립적인 인물이 갈등을 줄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외모도 출중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입니다. 그 예로 키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컸다고 합니다. 건장하고 체격이 크다는 것은 노동력과 체력을 중시하던 고대 사회에서는 매력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첫 등장은 그리 강렬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그 아비 기스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이리저리로 헤매는 모습으로 처음 소개됩니다. 사울은 나귀를 찾아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곳에도 없었습니다.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숩 땅의 사무엘이 있는 곳까지 이르게 됩니다. 먼 곳까지 가서 이곳저곳을 찾아도 찾지 못했다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왜 못 찾았을까요? 암나귀가 재빨라서입니까? 누가 훔쳐 팔지 않는 이상 대충 수소문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스토리는 흔합니다. 주로 민담같은 데서 자주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 나섰는데 다른 더 큰 것을 찾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암나귀를 찾지 못한 이유는 실제 찾았어야 할 대상이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찾아야 할 것은 왕권이었습니다.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하니 이렇게 해매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20) 사울이 나귀를 찾듯 이스라엘은 사울을 찾았습니다.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 아비의 암나귀는 신기하게도 금방 발견됩니다.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10:2) 마땅히 찾아야 할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정작 찾아야 할 것은 못 찾고 엉뚱한 것을 좇을 때가 있습니다. 해매고 있으면 하나님이 정작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답을 찾기까지 우리는 계속 해맬 것입니다. 가끔 일상적인 일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것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연한 일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평범한 만남에서 우리는 인생의 보물을 건지기도 합니다. 인생의 신비입니다. 그런 만남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불교에서는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소를 찾아가는 과정에 빗댄 십우도(十牛圖)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심우(尋牛)입니다. 동자가 손에 고삐와 줄을 들고 소를 찾는 모습입니다. 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자기를 찾이 못한 모습입니다. 두 번째 그림은 견적(見跡)입니다. 소의 발자국을 찾아나서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소를 발견하는 견우(見牛)인데 그 뒷모습만 보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득우(得牛)로 소를 붙잡아 고삐를 씌웁니다.
다섯 번째는 목우(木牛)로 길들이는 단계이고, 여섯 번째는 기우귀가(騎牛歸家)로 소의 등에 타고 피리를 불면서 돌아옵니다. 아마 이 그림을 가장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이어서 망우존인(忘牛存人), 인우구망(人牛俱妄), 반본환원(返本還源)는 소와 나의 경계가 없어지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열 번째는 입전수수(入廛垂手)라 하여 중생을 계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서는 단계입니다. 불교의 깨달음을 얻는 단계의 비유이지만 우리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느 단계입니까? 제대로 가고 있습니까?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야 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만남은 쉽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이 두 번의 대화라는 장애로 나타납니다. 암나귀를 찾지 못하자 종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근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물어보자.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다고 주저합니다. 종은 자기에게 약간의 은이 있다고 하며 재촉합니다.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종이 설치는 것도 이상합니다. 어찌되었든 좋은 종을 두었습니다.
그렇게 찾아 나섰지만 쉽사리 찾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바람 같은 사람이라 쉽게 잡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우물가로 가서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사무엘의 행방을 묻습니다. 소녀들은 사무엘이 산당에 올라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읍에 들어갔으니 지금 좇아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알려줍니다. 소녀들은 부지런히 뒤쫓아 가라고 재촉합니다. 그들의 지시를 따라 성읍으로 들어가자 마침 산당에 제사하러 가려던 사무엘과 마주치게 됩니다. 인연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수고와 돌아가는 듯한 낭비는 사실 사무엘을 만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어렵게 만났지만 이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오기 전날 밤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16)라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귀를 잃어버린 것도, 나귀를 쉬 찾지 못하고 해맨 것도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낭비는 없습니다. 인생은 연극과 같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1막에 총이 놓여졌다면 언제가는 반드시 발사되어야 합니다. 무대의 휴지 한 조각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현장에 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인식하기 어렵지만 다 지나고 난 뒤 우리 인생을 뒤돌아본다면 진짜 한 편의 연극처럼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이릅니다.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16) 하나님은 분명히 8장에서 왕정제도에 반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백성들이 싫어서 그런다고 하며 다시는 그들에게 응답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이 솔선해서 인간 왕을 세우려 합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합니다. 속이 상해서 다시는 응답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불쌍하게 부르짖으면 돌아서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세상이 그렇게 바뀌어 가고 이스라엘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니 하나님은 들어주시기로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망쳐놓은 정원을 다시 수리하는 분과 같습니다. 버리거나 팔아버리지 않고 주어진 것들을 활용해 다시 아름답게 가꾸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거나 끝까지 왕정제도에 반대하는 모습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왕정 제도 하에서 가장 선한 모습으로 만들어가려 하십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 사울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최선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노력 끝에 다윗 시대에 왕정제도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순수한 사울
사울은 가문도 괜찮았습니다. 부모의 명을 좇아서 암나귀를 끝까지 찾는 모습은 마치 효성이 있고 성실했던 요셉을 보는 듯합니다. 요셉도 아버지의 명을 좇아 형들이 치는 양떼를 살피러 세겜과 도단으로 해매는 모습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려 하자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21)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세도, 기드온도,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겸손함을 보입니다. 나중에 제비뽑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 하자 사울은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을 정도로(10:22) 순수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말씀을 보며 가장 깊은 한숨을 쉬었을 사람은 사울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하던 시절이 있었지. 내가 왜 이 무거운 짐을 맡았을까? 그때 끝까지 안 한다고 했더라면...’ 사울이 마지막 길보아 전투에서 자신의 칼로 자결하던 그 순간 그는 처음 이 장면을 떠올렸지 않았을까요?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아니면 다시 인생을 컴퓨터처럼 리셋하고 싶다.
199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중에 《박하사탕》이 있습니다. 영화배우 설경구씨의 처음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처음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기찻길 위에 선 설경구씨 뒤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고 그는 관객을 마주보며 “나 돌아갈래!” 하고 외칩니다. 이 영화는 그 기법이 독특한데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과거로 후퇴하는 형식입니다. 설경구씨의 인생은 사기, 살인. 고문. 폭력 등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지금은 자살하기 일보직전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설경구 씨의 인생은 꼬이고 악한처럼 보이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순박한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다 설경구씨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결정적 시점이 보이는데 바로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었습니다. 진압군으로 갔던 설경구씨가 오발로 여고생을 죽이고 맙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폭력성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는지 그 이후로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의 설경구씨는 매우 순박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기찻길은 자신이 소풍을 나와서 첫사랑을 만났던 곳입니다. 그 행복하고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사울도 돌이키고 싶지 않았을까요? 후회는 되고 돌이키고는 쉽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은 연필로 쓰라는 노래가 예전에 있었습니다. 쓰다가 틀리면 깨끗이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연필로 쓸 수 없습니다. 지우거나 덮을 수 없는 바위에 새긴 비문과 같습니다. 후회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한순간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쌓여서 그렇게 됩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의 나의 결정과 노력에 의해서 나라는 인생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찢을 수는 없고, 거기서부터 다시 하나씩 하나씩 고쳐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되어갑니다. 사울은 몇 번의 실수 끝에 사무엘과 멀어지고 결국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듯한 모습으로 방치하다가 결국 비극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돌아보면 사울은 왕의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비극은 갑작스럽게 영광스러운 자리가 주어지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고난이나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영광의 자리에 섰을 때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를 흔히 ‘스토리가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스토리라는 것은 그 자리에 오기까지 험난했던 인생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스토리가 없었기에 왕의 기반이 흔들릴 때 어리석은 선택을 하거나 섣부른 결정을 합니다. 반면에 다윗은 스토리가 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면서 동가식서가숙했고 어떤 때는 적국의 땅에서 미친 척 하며 살아남았습니다. “천만 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3:6)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 이런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여러 환경이나 인간의 욕구나 배신이나 인간적 실수라는 폭풍을 견디고 이겨낼 수 힘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다
어찌되었든 지금 이 순간만은 최선입니다. 사울을 선택한 것은 최선이었고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고 사울이 열어가야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10:1) 기름은 번영과 권능과 정결을 상징합니다. 기름 바름은 거룩한 물건들과 중요한 인물들을 임명할 때 합니다. 주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시편은 그 순간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시133:2)
그런데 이 의식은 사무엘과 사울 둘 사이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사환은 앞서서 보내고 둘만 남았습니다. 왕을 세우는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흔들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 그의 집에서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북왕국의 예후 또한 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사의 제자에 의해서 골방에서 조용히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은밀히 하는 이유는 그 혁명성 때문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다는 주기도문의 찬양은 바로 이 뜻입니다. 하나님은 왕을 폐하기도하고 세우기도 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은 국민들을 자신의 보이지 않는 손을 삼아 지도자를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합니다. 이전보다는 더 손쉬워졌습니다.
기름부음은 영광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기름부으심이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언제 기름부음을 받았는가? 공생애 처음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던 사건을 기름부음 받음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기름부음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이름 없는 한 여인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14:3) 예수님의 기름부음 받음은 영광이 아니라 그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
지도자로 임명 받는다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희생입니다. 왕이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희생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자기를 죽여 양의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백성을 구하고 섬겨야 하는 희생의 자리로 기름부음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잃은 것을 염려하지 마시라 /삼상9:1-10
2015-07-19 12:08:38
▲도입/ 무엇을 잃어버릴까봐 늘 염려하며 사는 사람들
우리가 무엇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힘든 시련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을 잃버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염려와 걱정은 우리의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봐 가지는 불안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건강을 잃을까봐,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까봐 불안해합니다.
지위나 명예를 잃을까봐, 직장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는데
새벽기도를 많이 나오는 지역이 있고, 많이 안 나오는 지역이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새벽기도를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할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들이 사는 지역도 새벽기도를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가진 것을 잃을까봐 겁이 나서’입니다.
그런데 별로 잃을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새벽기도를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 인생을 초조하게 하고, 밤잠을 설치게 하고, 걱정과 근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인생의 큰 불행이며 재앙입니다.
◑본문 설명
본문 삼상9장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기스는 당대의 유력한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 사울은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리고 속이 상해서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아들 사울과 종을 보냈습니다.
도대체 그 넓은 산간에 어디에 가서 그 암나귀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한자리에 있는 나귀도 아닌데, 이 나귀를 찾는다는 것은 당연히 헛수고일 것이 뻔합니다.
그래도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이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사울에게 이 일은 시킨 것입니다.
사울은, 종과 함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나귀를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종이 하는 말이,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물어보자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또 잃어버린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는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사울과 종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 선견자 사무엘을 찾아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린 것을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할 때 기억할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가 잃은 것을 찾아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사울과 그 종이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를 찾아갔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무엘이 말하길 ‘나귀를 이미 찾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좋은 음식으로 대접을 했습니다.
▲잃어버린 것 때문에.. 축복을 받게 되다
그 다음날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졸지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옛말에 전화위복, 새옹지마란 말이 있듯이,
기스의 가정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다가, 한 나라를 얻게 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짐승 나귀를 잃고.. 한 나라의 왕의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속상하고 마음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 기스 집안에 축복과 행운이 찾아온 것입니다.
◑적용
▲잃어버린 것이, 행운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슬픔입니까? 아픔입니까?
슬픔도 아픔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큰 행운이요 축복일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시인 존 밀턴은
"내가 육신이 시력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신령한 것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열어주셨다."라고 했습니다.
존 밀턴은 시력을 잃고 시각 장애인이 된 후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불후의 명작 <실락원>을 썼습니다.
등촌동에 있는 실로암 안과병원의 병원장은,
어렸을 때 사고로 시력을 잃은 김선태 목사님이십니다.
평생을 시작 장애인으로 살면서
<땅을 잃어버리고 하늘을 찾은 사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세상을 볼 수 없도록 시력을 잃었지만 하늘을 얻은 것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스스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잃어버림으로써, 예수님을 얻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특별한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잃음이란 단지 없어짐이 아닙니다. 잃음은 상대적입니다.
무엇을 잃었다 함은.. 얻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잃어버리고, 더 좋은 것을 얻습니다.
잃음을 통해서 얻은 것은,
잃은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더 값지고 귀한 것들입니다.
때로는 물질을 잃어버립니다.
사업이 망하고 부도가 나고.. 그러나 진실을 얻게 됩니다.
재산을 잃어버리고.. 친구를 얻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사람에게 기대하고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고 실망하고 그때가 돼서야 하나님을 쳐다봅니다.
건강을 잃고서.. 믿음을 얻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할 때는 기도하지 않고, 제 잘나서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고서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명예를 잃고서.. 겸손을 얻게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명예를 깎아내리고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십니다. 잃는 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게 하십니다.
‘잃는 것을 통해서 얻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나고 나면, 다 복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아픈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물질을 잃어버리고, 자식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시간을 잃어버리고,
특별히 수많은 기회를 아쉽게 놓친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모든 잃어버린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신령한 것을 여러분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얻은 것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잃어버린 것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의 신비가 있고,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인생의 길에
설령 우리가 무엇을 잃는 일이 있다 해도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지 마십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주시면.. 그것으로 감사하겠거니와
설혹 그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잃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건강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건강을 주시면 감사하게 살고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건강을 가져가시면
더 신령한 심령의 강건함으로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죽음 때문에도 두려워하지 말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가신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직장 때문에 걱정하지 마십니다. 직장을 잃는다 해도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려주실 것입니다.
물질을 잃는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될 지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잃어버림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단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신령한 것으로,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울이 종과 함께 나귀를 찾으려고 3일을 걸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 갔을 때.. 그가 잃은 나귀를 찾을 수 있었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것을 가져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것이 잃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길 바랍니다.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그것을 찾았느니라.
이제 네가 왕이 되어야 하리라’고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도 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잃은 것을 염려하지 말고
잃은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를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
▲도입
여러분 모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속상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돈을 잃어버리고 속상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돈이 생각나 속이 상하고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해 돈을 떼이고 병이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법정스님이 쓰신 수필집에 보니까
스님이 사시던 암자에 도둑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시는 스님의 암자에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값비싼 물건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도둑을 맞은 일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아
명상을 할 때도 늘 그것이 생각나고 자다가도 속이 상했다고 합니다.
무소유의 삶을 살아왔고 아주 높은 경지의 삶을 살았던 스님도
무엇을 잃어버리고 속상했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잃어버리는 것이 물건이나 돈 같은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그렇습니다.
시간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모릅니다.
물건이나 돈은 잃었다가 찾을 수도 있고 다시 장만할 수 있지만
시간은 한 번 잃어버리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잃어버리면 더 속상한 것입니다.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새벽기도를 끝내고 난 후 6시에서 7시 반 사이입니다.
사람들이 전화도 하고 찾아오기도 하면 속상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꼭 만나달라고 하는데, 거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갔는데
2시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엉뚱한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이야기하면 되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사실은..." 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만날 때는 ‘10분만 만나겠다, 30분만 만나겠다’
그렇게 정하고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뺏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잃어버리면 여간 속상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은혜와 축복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축복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잘 간직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유리그릇 같아서, 깨지기 쉽고, 한 번 깨지면 붙여놓아도 흔적이 남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길에 많은 좋은 사람을 보내주셔서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을 잃어서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물질이나 시간, 사람을 잃는 것과 같이
우리가 평생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은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길에 많은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그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
평생의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결혼의 혼기를 놓치고 그때 그 사람을 붙잡아야 하는데 하고 후회합니다.
또 그때 돈을 벌었어야 했는데 라고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하시는 몇 번 기회가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돈을 벌기 어렵습니다.
그때 그 직장에 들어가야 했는데, 그때 그 일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잃어버린 기회 지나간 기회에 대해서 뼈를 깎는 아픔과 후회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더 늙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달픈가, 왜 이렇게 꼬이는가?’ 하며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잃어버린 아픔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하고 안타깝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초대 왕이 될 사울의 등장/삼상9:1-10
2008-06-09 10:43:02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대로 王을 세우도록 사무엘에게 지시하신 하나님의 뜻하신바 섭리를 따라 사울을 사무엘에게 인도하려고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게 하신다.
本章에서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는 과정이 소개된다.
이것을 위하여 사소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이야기 같은 것은 그가 사무엘을 만나거나 이후 왕으로 세움 받는 것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사에서 진행되는 하찮은 일들도 우연이 아니라 이면에는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흐르고 있다.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종결하고 君主制政治로 들어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에 王을 세우신 자는 이스라엘백성이나 사무엘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유의해야 한다.
사울의 인간됨을 本文 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도 모든 백성보다 어깨위는 더하더라”고 했다.
초대 이스라엘 王의 인간 됨됨이는 3가지로 소개되는데 그의 집안과 외모와 도덕성이었다.
가상의 인물이 아닌 역사적인 인물로서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체격은 월등했고 출중했으며 용모도 준수했다.
가정에서 사울은 효자였다.
잃어버린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으라는 명령을 거절하거나 싫은 내색한번 하지 않고 나섰으며 온 에브라임을 뒤지는 충실한 아들이었다.
사울의 이같은 인간됨됨이는 왕을 바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적합하였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물이 되기에 부족했으며 하나님같이 다스릴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삼상9:15 “사울의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하시면서 하나님은 사울에 대한 사전 계시를 주셨다.
하나님이 사울을 王으로 세우시고자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이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해 받는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9:17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고 하시면서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로 사울은 그에게 기름을 부을 자인 사무엘과 상면한다.
이후 두 사람은 세군대의 장소에서 대화를 갖는데, 성문앞에서(삼상9:18), 산당의 객실에서(9:22), 그리고 성읍에서(9:25) 각각 만나 이야기 하였다.
세 번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스라엘의 王으로서 必要한 충고를 해주었다.
1. 사울의 배경과 용모가 어떠합니까?
1) 유력한 가정에서 출생하고 자랐다.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본문 1~2절 “베냐민 지파의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 . .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
“유력한 사람”이라는 뜻하는 원어 : 끼보르하일 / a man of standing(명성, 지위, 신분)은 의미상 유력함(Strong, mighty)뜻하고 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부자”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울의 아버지는 부유해서 당시 그 지역에서 유력한 사람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가나안 영토 분할 때에 차지한 땅이 기브아 전투후 남겨진 600명에게 분할되었기 때문에 사울 집안의 재산은 다른 지파들에 비해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적 열세는 엄청난 재산으로 충분히 가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유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갖추는 것도 좋겠지만 경건한 집안에서 태어나 탁월한 신앙을 유산으로 받고 죄악과 싸워 이기고 고난의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Vision과 믿음을 유산으로 받는 것이 더 좋은 상속이 됩니다.
2) 월등한 체격조건과 준수한 용모를 가졌다.
本文 2절 “기스의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중에 그 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고 한다.
“준수하다”는 말이 여러번 나오는데 그 뜻은 히브리어 :빼후르/impressive young man) “선발하다, 선택하다”로 번역하기도 하고, 청년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本文에서는 “선택된 젊은이, 인상적인 젊은이”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의 지혜나 덕성, 그의 학업이나 경건성 또는 그의 신앙이나 정신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그는 잘생긴 얼굴과 키, 용모가 단정하고 인상적인 젊은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천성적으로 탁월한 인물로 태어났던 사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 키가 어깨 위만큼 더 컸다.
이는 블레셋의 영웅인 가드 출신의 거인들과 견줄만한 인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풍체의 준수함이나 용모의 미려함을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내면세계에 자리 잡은 믿음과 신앙적 인격과 거기서 풍겨 나오는 생활과 순종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내면세계를 보시며 그 사람의 행위의 열매로 판단하시고 축복하시고 의의 도구로, 쓰시며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
사울은 모든 젊은이가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소유했다.
그는 매력적인 늠름한 인물이었다.
젊은 처녀들에게 매혹적인 젊은 청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준수하고 뛰어난 신체를 축복으로 주셨다.
비록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때때로 자만하는데 이것은 가볍게 넘길 유전물이 아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신체와 용모는 성령을 위한 아름다운 전이 되며 요셉처럼 그의 용모는 사탄의 요새를 허물어 뜨리는 강한 주님의 무기가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울은 외적인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겁이 많았고 성격이나 사람 됨됨이가 대범하지 못했다.
그는 질투심이 강한 비정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훗날 자기의 생명을 파멸시켰고,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아무리 좋은 환경과, 좋은 외모를 가졌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내면적인 생활이 바르게 되어 있지 못하면, 부조화가 형성되고 끝내는 파멸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사울의 생애의 아침은 고요하고 화창했다.
앞길이 밝았으나 정오는 구름이 끼고 찌푸렸으며, 오후는 춥고, 어둡고, 날씨가 엄악했으며, 저녁은 절망적인 우뢰와 벼락과 자멸적인 음침함으로 무시무시했다.
그의 생애는 은혜의 날로 시작했으나 죄의 열매로 끝났다.
이 장에서 사울이 준수한 젊은이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3)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9:3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를 찾으라 하매” 이스라엘에서는 소나 나귀를 잃으면 반드시 찾았으며 잃어버린채로 방치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사울이 “에브라임”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가서 찾았는데 거기도 없으니 “사알림 땅” “베나민 사람의 땅” 일대를 돌면서 40Km의 긴 여행을 한 끝에 “숩 사람의 땅 라마 근처까지 가서 찾아다닌 것은 남다른 효성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사울이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하였지만 그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린애다운 순종을 하며 불효하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이것이 준수한 젊은이의 아름다운 특성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누가 제일 크게 될 것인가”에 관해 서로 경쟁하며 다투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데려다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4)고 말씀 하셨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자신을 우리를 위해 속죄의 제물로 주셨고 주님은 그 뜻에 어린아이처럼 순종하셨다.
本文 9:5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걱정하실까 두려워 하노라”고 하면서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생각을 잊을 정도로 그가 쫒는 대상에 몰두하지 않았다.
일을 위해 집을 떠난 후 새로운 환경 속에 있는 자식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일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잊고, 집에 자주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면서 안부를 알리지 않는 젊은 이들이 많이 있다.
현명한 아버지는 자식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그들의 건강과안전에 대해 더욱 염려합니다.
사울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면서 일할 줄 아는 도덕성을 갖춘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인간적인 조건을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본장에는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였는지,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자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떠한 인간적인 장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인격에 뿌리 내려 있지 않으면 영속성과 지속성을 갖지 못하며 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막는데는 외모와 외적 조건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사람을 찾는 사울의 모습을 본다.
사울은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인내하며, 수백리 길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남다른 인상까지 준다.
사울이 암나귀를 잃어버린 후 진행되는 일련의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필연입니다.
나귀를 잃어버리는 미미하고 사소한 사건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는 귀한 도구로 활용된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작은 일에 성실한 사울에게 고귀한 직책인 王의 직무가 맡겨졌듯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큰일을 맡기시고 거기에 따른 상급과 축복을 준비해 놓으셨다.
本文 6절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을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라고 한다.
사울의 이 사환이 말하기 까지는 선지자에게 가고자 하는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예물이 없다고 한 것은 선지자에게 가기를 反對해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근동 지방에서는 존경하는 어른을 찾아 갈 때는 그의 신분에 걸맞는 선물을 갖고 가는 것이 예의였다.
물론 사울의 중심에는 적어도 점성술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복채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환의 주머니에서 나온 은 1/4 세겔을 예물로 드리기로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물품이나 물질로써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매 한가지였고, 그것이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사울은 사환의 권고로 사무엘 선지의 성읍인 “라마”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찾은 것은 그 자신의 인간성이나 경건성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오직 사울을 인도한 제일 원인자는 하나님이시며, 제이의 원인자는 사환이었다.
즉 사울이 선지자를 찾은 것은 믿음의 발로나 그 성의 영적인 어른을 찾고자 하는 예의의 발로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와 사환의 동역 때문이었다.
사울의 경건성과 신앙심은 자신의 하인인 사환보다도 떨어지는 것이었다.
사울과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묻고자 한 것은 가장 형편없는 물음이었다.
암나귀 한 마리로 인해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가자고 했던 그들의 태도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울과 그 사환처럼 궁극적인 인생 문제, 나의 평생 지은 죄는 어떻게 해야 처리되며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인간은 이 땅에서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인간은 조상적 부터 죽었고, 나도 죽을 터인데 죽은 후에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지옥의 세계가 있고 사후 세계가 있다는데 그럼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 하는 궁극적이며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기보다는 당면한 사소한 문제 나귀 새끼 한 마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기를 좋아 한다.
사람들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다운 삶인가하는 것보다, 어떻게 살면 부자가 되고 노후가 보장되며 건강하며 평안히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알아보기 원한다.
삶의 당면 문제를 무시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그것을 염려하며 풀어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잃어버린 나귀보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야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나귀보다 잃어버린 신앙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나귀보다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나귀보다 잃어버린 생명을 찾고 Cell 자녀를 찾아야한다.
우리는 그것을 주님께 어떻게 찾을 것인가 물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영혼도, 신앙도, 생명도 찾고 세상 사람이 죽을힘을 다하여 찾는 생업의 문제는 더하여 주신다는 약속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연”인 것처럼 느껴지는 일을 자주 만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주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의 구체적인 “걸음을 정하시고 인도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의 인도하심을 믿느냐 불신앙 하느냐이다.
어린아이가 혼자였을 때는 약하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그때는 강건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이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지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약한 존재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의 품에 안기고 그의 손에 이끌림 받을 때 우리는 참으로 강한 자가 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나의 길을 오직 하나님께 의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왕으로 선택된 사울/삼상9:1-27
2002-08-09 15:48:43
오늘 본문에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택함을 받는 과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택함을 받는 과정은 특별한 과정이 아니라 사소한 일들을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울이 아비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나섰다가 사무엘을 만나는 사건으로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사에 일어나는 하찮은 일 같아도 그 이면에는 온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이는 사무엘이나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또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사건들임을 깨닫고 그 섭리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또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이는 대통령이나 정치인이나 군인 경찰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울은 왕으로 부름 받기 전에 어떠한 자였습니까?
1. 사울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3)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할 때 사울은 부모님의 말씀에 거역하지 않고 잘 순종하였습니다.
또 그들이 숩 땅에 이르렀을 때, 사울이 함께 하는 사환에게 (5)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효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세상 부모나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순종하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하려면 먼저 부모나 선생님께 잘 순종하게 하십시오.
보이는 부모나 선생님께도 잘 순종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2. 사울은 만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암나귀들를 잃어버려서 부친 기스가 사울에게 찾아오도록 했는데, 사울은 힘을 다해 방방곡곡을 찾아 다녔습니다.
(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하실 때 (마18:12)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적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되다고 말씀하신 대로 만물들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릴 때부터 만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커서 사람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사울은 사람의 중심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비가 한 사환을 대리고 가라고 했는데 술친구나 거짓말을 좋아하거나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사환이 아니라 사울에게 잘 순종하며 사울을 위하여 조언을 할 줄 아는 유익된 사람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찾기 위하여 수일이 지나 피곤하고 지친대도 원망이나 후회함이 없이 도리어 사울을 위로하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6)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이나 친구들은 어떻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사울의 사환과 같은 좋은 이웃이나 친구를 사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친구를 사귈 때 외모보다 중심을 보고 사귈 수 있도록 지도하시기 바랍니다.
4. 사울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7)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며 피곤하고 지쳐 먹을 것이 다한 가운데도 빈손이 아니라 예물을 가져가기를 원했습니다.
예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이웃집에 놀로 가도 빈손으로 가기가 미안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 받기를 원한다면서 빈손으로 보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양의 많고 적음보다 마음과 정성을 보십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교회에 올 때 그냥 보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예배를 잘 드리라고 가르치며 꼭 헌금을 챙겨서 보내십시오.
또 스스로 용돈을 아껴서 헌금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십시오.
그래야 후에 사회인이 되어도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권자 하나님 되심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아까워하지 않고 잘 할 수 있는 믿음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5. 사울은 겸손의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할 때 사울은 (21)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은 (벧전5:5)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해도, 높은 권세를 얻었다해도, 훌륭한 지식을 배웠다해도 하나님 앞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벧전 5: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모든 현실에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겸손한 자녀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이런 모습들을 보시고 준수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2)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했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준수한 자라도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현실에 충실하여 살 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을 통해서 그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부모를 만난다는 것, 좋은 배우자, 좋은 스승, 좋은 친구나, 좋은 이웃을 만난다는 것 인생에 있어서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소중한 만남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현실들을 통해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사울은 좋은 부모 좋은 사환을 만났으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헤매는 촌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암나귀를 잃어버린 현실에 암나귀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을 만난 결과 그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잃은 암나귀를 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블레셋에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울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현실을 만났으며 그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 누구를 찾고 계십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지혜 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같은 신실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또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들을 맡길만한 이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기 위하여 찾고 부르짖어 보십시오.
사무엘을 찾아온 사울에게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전해 줍니다.
(20)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하며 그 잔치의 수석에 앉게 했습니다.
그 잔치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바로 사울을 위하여 예비된 잔치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잃었던 암나귀와 같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해결되게 되고 온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 변화 받게 될 것입니다.
(렘33:2-3)"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은 바로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구원 운동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섭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여러분을 위하여 천국잔치를 예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섭리를 통하여 여러분이 주님 앞에 나오셨습니까?
(고전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 된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구원 운동에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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